ODD

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 조영환 옮김

夏目漱石 — 坊っちゃん (1906)

11장 · 212분

물려받은 무모함 탓에 어려서부터 손해만 봐 온 도쿄 토박이가 시골 중학교 수학 선생으로 내려간다. 너구리 교장, 빨간 셔츠 교감, 알랑쇠 미술 선생 틈에서 거짓말 못 하는 성미로 들이받기만 하는 그를 알아주는 건 도쿄에 두고 온 늙은 하녀 기요뿐이다. 소세키가 열흘 만에 써냈다는, 가장 사랑받는 소설.

1장

부모 닮은 앞뒤 안 가리는 성미라 어려서부터 손해만 보고 있다. 소학교 다닐 무렵 학교 이 층에서 뛰어내려 한 주일쯤 허리를 못 쓴 적이 있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별로 깊은 까닭도 없다. 새로 지은 이 층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더니 같은 반 녀석 하나가 농으로, 아무리 큰소리쳐도 거기서 뛰어내리지는 못할걸. 겁쟁이 얼레리. 하고 놀려 댔기 때문이다. 학교 소사에게 업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 이 층쯤에서 뛰어내려 허리를 못 쓰는 놈이 어디 있느냐고 하기에, 다음번엔 허리를 안 다치고 뛰어 보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친척에게서 서양제 칼을 얻어 고운 날을 햇빛에 비추며 동무들에게 보이고 있었더니, 하나가 번쩍이기는 번쩍이는데 잘 들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안 들 리가 있느냐, 무엇이든 잘라 보이겠다고 장담했다. 그럼 네 손가락을 잘라 보라고 주문하기에, 뭐야 손가락쯤 이렇다, 하고 오른손 엄지 등을 비스듬히 베어 들어갔다. 다행히 칼이 작은 데다 엄지 뼈가 단단해서 지금도 엄지는 손에 붙어 있다. 그러나 흉터는 죽을 때까지 안 지워진다.

뜰을 동쪽으로 스무 걸음 가서 끝나면 남쪽으로 올라가는 비탈에 손바닥만 한 채마밭이 있고, 한가운데 밤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건 목숨보다 소중한 밤이다. 밤이 여물 무렵이면 일어나자마자 뒷문으로 나가 떨어진 것을 주워다 학교에서 먹는다. 채마밭 서쪽이 야마시로야라는 전당포의 뜰과 잇닿아 있는데, 이 전당포에 간타로라는 열서너 살 된 아들이 있었다. 간타로는 물론 겁쟁이다. 겁쟁이 주제에 대나무 울타리를 넘어와 밤을 훔쳐 간다. 어느 날 저녁 사립문 그늘에 숨어 있다가 드디어 간타로를 붙잡았다. 그때 간타로는 달아날 길을 잃고 기를 쓰고 덤벼들었다. 저쪽은 두 살쯤 위다. 겁쟁이지만 힘은 세다. 뒤통수가 툭 튀어나온 머리를 이쪽 가슴에 대고 쑥쑥 밀어붙이는 서슬에 간타로의 머리가 미끄러져 내 겹옷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거치적거려 손을 못 쓰겠기에 마구 팔을 휘둘렀더니 소매 속에 든 간타로의 머리가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흔들 나부꼈다. 나중에는 괴로웠는지 소매 속에서 내 팔뚝을 물었다. 아프기에 간타로를 울타리에 밀어붙여 놓고 다리를 걸어 저쪽으로 넘어뜨렸다. 야마시로야 땅은 채마밭보다 여섯 자쯤 낮다. 간타로는 대나무 울타리를 반쯤 무너뜨리고 제 땅으로 거꾸로 떨어져 끙 소리를 냈다. 간타로가 떨어질 때 내 겹옷 한쪽 소매가 뜯겨 나가 갑자기 손이 자유로워졌다. 그날 밤 어머니가 야마시로야에 사과하러 간 김에 겹옷 소매도 찾아왔다.

이 밖에도 장난은 꽤 쳤다. 목수네 가네와 생선 가게 가쿠를 데리고 모사쿠네 당근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적이 있다. 당근 싹이 다 돋지 않은 데에 짚이 온통 깔려 있기에 그 위에서 셋이서 한나절 내리 씨름을 했더니 당근이 몽땅 짓밟혀 버렸다. 후루카와네 논에 있는 우물을 메워 버려 뒷감당을 한 적도 있다. 굵은 대나무의 마디를 빼서 깊이 묻어 놓은 속에서 물이 솟아 그 언저리 벼에 물이 대지게 한 장치였다. 그때는 무슨 장치인지 모르니까 돌이며 막대기 토막을 우물 속에 꾹꾹 쑤셔 넣고 물이 안 나오게 된 것을 확인하고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있었더니, 후루카와가 새빨개져서 고함을 치며 쳐들어왔다. 아마 벌금을 물고 끝난 것 같다.

아버지는 조금도 나를 귀여워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형만 두둔했다. 이 형은 이상하게 살빛이 희고, 연극 흉내를 내며 여자 역을 하는 걸 좋아했다. 나를 볼 때마다 이 녀석은 어차피 변변한 게 못 될 거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난폭하고 난폭해서 앞날이 걱정이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과연 변변한 게 못 되었다. 보시다시피 이 꼴이다. 앞날이 걱정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저 감옥에 안 가고 살아 있을 뿐이다.

어머니가 병으로 죽기 이삼 일 전 부엌에서 재주넘기를 하다 부뚜막 모서리에 갈비뼈를 찧어 몹시 아팠다. 어머니가 크게 노해서 너 같은 놈 얼굴은 보기 싫다고 하기에 친척 집에 가서 묵고 있었다. 그랬더니 끝내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그렇게 일찍 죽을 줄은 몰랐다. 그런 큰 병이라면 좀 더 얌전히 굴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돌아왔다. 그랬더니 그 형이 나더러 불효자다, 너 때문에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분해서 형의 따귀를 갈겼다가 된통 혼이 났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는 아버지와 형과 셋이서 살았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라, 남의 얼굴만 보면 너는 글렀다 글렀다 하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무엇이 글렀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묘한 아버지도 다 있다. 형은 실업가가 된다나 하며 부지런히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본래 여자 같은 성미에 약아빠져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열흘에 한 번꼴로 싸웠다. 한번은 장기를 두었는데 치사한 수를 두고, 남이 쩔쩔매면 좋아라 약을 올렸다. 하도 화가 나서 손에 쥐고 있던 장기짝을 미간에 내던졌다. 미간이 찢어져 피가 조금 났다. 형이 아버지에게 일렀다. 아버지가 나와 의절하겠다고 나섰다.

그때는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저쪽 말대로 의절당할 작정이었는데, 십 년째 부리고 있던 기요라는 하녀가 울면서 아버지에게 빌어 겨우 아버지 노여움이 풀렸다. 그런데도 그다지 아버지가 무섭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요라는 하녀에게 미안했다. 이 하녀는 본디 내력 있는 집안 사람이었다는데, 막부가 무너질 때 몰락해서 그만 남의 집 일까지 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할멈이다. 이 할멈이 무슨 인연인지 나를 몹시 귀여워해 주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머니도 죽기 사흘 전에 정나미가 떨어졌고 ― 아버지도 일 년 내내 애물단지로 여기고 ― 동네에서는 난폭한 말썽꾸러기라고 따돌리는 ― 이 나를 덮어놓고 떠받들어 주었다. 나는 도무지 남에게 사랑받을 성미가 아니라고 단념하고 있었으므로 남에게 나뭇조각처럼 취급받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 기요처럼 떠받들어 주는 걸 이상하게 여겼다. 기요는 이따금 부엌에서 아무도 없을 때 「도련님은 곧고 좋은 성품이세요」 하고 칭찬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기요가 하는 말의 뜻을 알 수 없었다. 좋은 성품이라면 기요 말고 다른 사람들도 좀 더 잘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기요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아첨은 싫다고 대꾸하곤 했다. 그러면 할멈은 그러니까 좋은 성품이지요, 하고는 흐뭇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제 손으로 나를 만들어 내고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좀 으스스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기요는 더욱 나를 귀여워했다. 가끔은 어린 마음에도 왜 저렇게 귀여워하나 이상히 여겼다. 시시하다, 그만두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기요는 귀여워한다. 이따금 제 용돈으로 팥 과자며 매화 과자를 사 준다. 추운 밤 같은 때는 남몰래 메밀가루를 사다 두었다가, 어느새 자고 있는 머리맡에 메밀 물을 가져다준다. 때로는 냄비 우동까지 사 주었다. 먹을 것만이 아니다. 양말도 얻었다. 연필도 얻었고 공책도 얻었다. 이건 훨씬 나중 일이지만 돈을 삼 원쯤 빌려준 적까지 있다. 뭐 빌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니다. 저쪽에서 방에 가지고 와서, 용돈이 없어 곤란하시지요, 쓰세요, 하고 준 것이다. 나는 물론 필요 없다고 했지만 꼭 쓰라고 하기에 빌려 두었다. 실은 몹시 기뻤다. 그 삼 원을 동전 지갑에 넣어 품에 넣은 채 뒷간에 갔다가 뒷간 속에 쏙 떨어뜨리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어슬렁어슬렁 나와서 실은 이러이러하다고 기요에게 말했더니, 기요는 얼른 대나무 막대를 찾아와서 꺼내 드리지요, 했다. 조금 있으니 우물가에서 좍좍 물소리가 나기에 나가 보니 대나무 끝에 지갑 끈을 걸어 물로 씻고 있었다. 그러고서 지갑을 열어 일 원짜리 지폐를 살펴보니 누렇게 되어 무늬가 지워지려 하고 있었다. 기요는 화로에 말려서 이제 됐지요, 하고 내밀었다. 잠깐 냄새를 맡아 보고 구리다, 했더니, 그럼 이리 주세요, 바꿔 드릴 테니까, 하고는 어디서 어떻게 둘러댔는지 지폐 대신 은화로 삼 원을 가져왔다. 이 삼 원은 무엇에 썼는지 잊어버렸다. 곧 갚을게, 하고 말한 채 갚지 않았다. 이제 와서는 열 배로 갚아 주고 싶어도 갚을 수 없다.

기요가 물건을 줄 때는 꼭 아버지도 형도 없을 때로 정해져 있다. 나는 무엇이 싫다 해도 남 몰래 저만 이득을 보는 것만큼 싫은 게 없다. 형과는 물론 사이가 나쁘지만, 형 몰래 기요에게서 과자나 색연필을 얻고 싶지는 않다. 왜 나한테만 주고 형한테는 안 주느냐고 기요에게 물을 때가 있다. 그러면 기요는 태연하게 형님은 아버님이 사 주시니까 괜찮아요, 한다. 이건 불공평하다. 아버지는 고집불통이지만 그런 편애는 안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기요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리라. 아주 사랑에 눈이 멀었던 게 틀림없다. 본래는 신분 있는 사람이라도 배운 것 없는 할멈이니 어쩔 수 없다. 이것만이 아니다. 편애하는 눈이란 무서운 것이다. 기요는 내가 장차 입신출세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서 공부하는 형은 얼굴만 희멀겋지 도무지 쓸모가 없을 거라고 혼자 정해 버렸다. 이런 할멈을 만나면 당할 재간이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되고, 싫어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몰락한다고 믿고 있다. 나는 그때부터 별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기요가 된다 된다 하니까 역시 무언가가 될 수 있나 보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한번은 기요에게 나는 무엇이 될 것 같으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기요도 별다른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저 인력거를 타고 훌륭한 현관이 있는 집을 지을 게 틀림없다고 했다.

그러고서 기요는 내가 집이라도 장만해 따로 나가면 함께 살 작정이었다. 부디 데리고 있어 주세요, 하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 부탁했다. 나도 왠지 집을 장만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응 데리고 있어 주지, 하고 대답만은 해 두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퍽 공상이 센 여자라, 도련님은 어디가 좋으세요, 고지마치예요 아자부예요, 뜰에 그네를 만드세요, 서양식 방은 하나면 충분해요, 하는 식으로 제멋대로 계획을 혼자 늘어놓고 있었다. 그때는 집 따위 조금도 갖고 싶지 않았다. 서양식 집도 일본식 집도 전혀 쓸데가 없었으니, 그런 건 갖고 싶지 않다고 언제나 기요에게 대답했다. 그러면 도련님은 욕심이 적고 마음이 깨끗하다고 또 칭찬했다. 기요는 무슨 말을 해도 칭찬해 준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대여섯 해 동안은 이런 식으로 지냈다. 아버지에게는 야단맞는다. 형과는 싸운다. 기요에게는 과자를 얻고 가끔 칭찬을 듣는다. 따로 바라는 것도 없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대개 이런 거려니 했다. 다만 기요가 걸핏하면 도련님은 가엾다, 불행하다고 덮어놓고 말하니까, 그러면 가엾고 불행한가 보다 했다. 그 밖에 마음에 걸리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용돈을 안 주는 데는 질렸다.

어머니가 죽은 지 여섯 해째 되는 정월에 아버지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사월에 나는 어느 사립 중학교를 졸업한다. 유월에 형은 상업학교를 졸업했다. 형은 무슨 회사의 규슈 지점에 자리가 나서 가야만 한다. 나는 도쿄에서 아직 공부를 해야 한다. 형은 집을 팔고 재산을 정리해서 부임지로 떠나겠다고 나섰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어차피 형 신세를 질 생각은 없다. 돌봐 준다 해도 싸울 테니 저쪽에서도 무슨 소리를 하게 되어 있다. 어설프게 보살핌을 받으니까 이런 형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이다. 우유 배달을 해서라도 먹고살 수 있다고 각오했다. 형은 그러고서 고물상을 불러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잡동사니를 헐값에 팔았다. 집과 땅은 어떤 사람의 주선으로 어느 부자에게 넘겼다. 이쪽은 꽤 돈이 된 모양이지만 자세한 건 전혀 모른다. 나는 한 달 전부터 당분간 앞길이 정해질 때까지 간다 오가와마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기요는 십몇 년 살던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걸 몹시 아쉬워했지만 제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도련님이 조금만 더 나이가 드셨으면 여기를 물려받으실 수 있을 텐데, 하고 자꾸만 푸념을 늘어놓았다. 조금 더 나이를 먹어서 물려받을 수 있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물려받을 수 있을 터다. 할멈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이만 먹으면 형의 집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형과 나는 이렇게 헤어졌지만, 곤란한 건 기요가 갈 데였다. 형은 물론 데려갈 처지가 아니고, 기요도 형 꽁무니에 붙어 규슈까지 내려갈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고, 그렇다고 이때의 나는 네 첩 반짜리 싸구려 하숙에 틀어박혀 그나마도 여차하면 당장 비워 줘야 할 형편이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기요에게 물어보았다. 어디 남의 집 일이라도 할 생각이냐고 했더니, 도련님이 집을 장만하시고 아씨를 맞으실 때까지는 할 수 없으니 조카 신세를 지지요, 하고 겨우 마음먹은 대답을 했다. 이 조카는 재판소 서기라 우선 오늘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므로, 여태까지도 기요에게 올 거면 오라고 두세 번 권했지만, 기요는 설령 남의 집 일을 할지언정 오래 살아 정든 집이 좋다고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같아서는 모르는 집으로 일자리를 옮겨 쓸데없는 눈치를 새로 보느니 조카 신세를 지는 편이 낫다고 여긴 것이리라. 그러면서도 어서 집을 장만하라느니, 아내를 맞으라느니, 와서 돌봐 드리겠다느니 한다. 피붙이 조카보다 남인 내가 더 좋은 것이리라.

규슈로 떠나기 이틀 전 형이 하숙에 와서 돈 육백 원을 내놓으며, 이걸 밑천 삼아 장사를 하든지 학비 삼아 공부를 하든지 마음대로 써라, 그 대신 뒤는 모른다, 하고 말했다. 형치고는 기특한 짓이다, 뭐 육백 원쯤 안 받아도 곤란할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느 때와 달리 깔끔한 처사가 마음에 들어 고맙다고 하고 받아 두었다. 형은 그러고서 오십 원을 내놓으며 이걸 내친김에 기요에게 전해 달라고 하기에 두말없이 맡았다. 이틀 뒤 신바시 정거장에서 헤어진 채 형은 그 뒤로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나는 육백 원 쓸 방법을 누운 채 궁리했다. 장사를 한대도 귀찮아서 잘 될 리가 없고, 더구나 육백 원으로 장사다운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지. 설령 할 수 있다 해도 지금 같아서는 남 앞에 나가 교육받았다고 뽐낼 수 없으니 결국 손해만 볼 뿐이다. 밑천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 이걸 학비 삼아 공부를 해 주자. 육백 원을 셋으로 나눠 한 해에 이백 원씩 쓰면 삼 년 동안은 공부할 수 있다. 삼 년 동안 죽기 살기로 하면 무언가 될 것이다. 그러고서 어느 학교에 들어갈까 생각해 보았지만, 학문은 타고나기를 어느 것이나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어학이니 문학이니 하는 건 딱 질색이다. 신체시 따위는 스무 줄 가운데 한 줄도 모르겠다. 어차피 싫은 것이라면 무엇을 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물리학교 앞을 지나다 보니 학생 모집 광고가 나와 있기에, 이것도 인연이려니 하고 규칙서를 받아 곧바로 입학 절차를 밟아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부모 닮은 앞뒤 안 가리는 성미에서 나온 실수다.

삼 년 동안 뭐 남들만큼은 공부했지만 딱히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라서, 석차는 언제나 밑에서부터 세는 편이 편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어서 삼 년이 지나니 끝내 졸업해 버렸다. 나도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불평할 까닭도 없으니 얌전히 졸업해 두었다.

졸업하고 여드레째 되던 날 교장이 부르러 왔기에 무슨 볼일인가 하고 나가 보았더니, 시코쿠 쪽 어느 중학교에서 수학 교사가 필요하다, 월급은 사십 원인데 가 보면 어떻겠느냐는 의논이었다. 나는 삼 년 동안 공부는 했지만 실을 말하면 교사가 될 생각도 시골에 갈 생각도 아무것도 없었다. 하기야 교사 말고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도 없었으니, 이 의논을 받았을 때 가겠습니다, 하고 그 자리에서 대답했다. 이것도 부모 닮은 앞뒤 안 가리는 성미가 탈이 난 것이다.

맡은 이상 부임해야 한다. 이 삼 년 동안은 네 첩 반 방에 틀어박혀 잔소리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싸움도 안 하고 지냈다. 내 한평생 가운데서는 비교적 태평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니 네 첩 반도 비워야 한다. 태어나서 도쿄 밖으로 나가 본 건 같은 반 녀석들과 가마쿠라로 소풍 갔을 때뿐이다. 이번에는 가마쿠라 정도가 아니다. 엄청나게 먼 데로 가야 한다. 지도에서 보면 바닷가에 바늘 끝만큼 작게 보인다. 어차피 변변한 데는 아닐 테지. 어떤 동네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모르겠다. 몰라도 곤란할 건 없다. 걱정되지도 않는다. 그저 갈 뿐이다. 하기야 좀 귀찮기는 하다.

집을 정리하고 나서도 기요한테는 이따금 갔다. 기요의 조카라는 사람은 뜻밖에 좋은 사람이다. 내가 갈 때마다 집에 있기만 하면 이것저것 대접해 주었다. 기요는 나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내 자랑을 조카에게 들려주었다. 이제 학교를 졸업하면 고지마치 언저리에 저택을 사서 관청에 다닐 거라느니 하고 떠벌린 적도 있다. 혼자 정해 놓고 혼자 떠드니 이쪽은 난처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따금 내가 어릴 때 오줌을 싼 일까지 끄집어내는 데는 질렸다. 조카가 무슨 생각을 하며 기요의 자랑을 듣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기요는 옛날 사람이라 저와 나의 사이를 봉건 시대의 주인과 종처럼 여기고 있었다. 제 주인이면 조카에게도 주인이 틀림없다고 여긴 모양이다. 조카야말로 봉변이다.

드디어 약속이 정해지고 이제 떠난다는 사흘 전에 기요를 찾아가니, 북향 세 첩 방에서 감기에 걸려 누워 있었다. 내가 온 것을 보자마자 일어나 앉더니, 도련님 언제 집을 장만하세요, 하고 물었다. 졸업만 하면 돈이 저절로 주머니 속에서 솟아나는 줄 안다. 그렇게 훌륭한 사람을 붙잡고 아직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건 더욱 어리석다. 나는 간단히, 당분간 집은 안 가진다, 시골에 간다, 했더니 몹시 실망한 얼굴로 희끗희끗한 귀밑머리의 흐트러진 데를 자꾸만 쓰다듬었다. 너무 딱해서 「가기는 가지만 곧 돌아온다. 내년 여름 방학에는 꼭 돌아온다」 하고 달래 주었다. 그래도 묘한 얼굴을 하고 있기에 「무얼 선물로 사다 줄까, 뭐가 갖고 싶어」 하고 물어보았더니 「에치고의 조릿대 엿이 먹고 싶어요」 했다. 에치고의 조릿대 엿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다. 우선 방향이 다르다. 「내가 가는 시골엔 조릿대 엿은 없을 것 같다」 하고 일러 주었더니 「그럼 어느 쪽이에요」 하고 되물었다. 「서쪽이야」 했더니 「하코네 너머예요 이쪽이에요」 하고 묻는다. 퍽 애를 먹었다.

떠나는 날에는 아침부터 와서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오는 길에 방물가게에서 사 온 치약이며 이쑤시개며 수건을 천 가방에 넣어 주었다. 그런 건 필요 없다고 해도 좀처럼 들어주지 않는다. 인력거를 나란히 해서 정거장에 닿아 승강장으로 나왔을 때, 기차에 올라탄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이제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다.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더했으면 울 뻔했다. 기차가 한참 움직이고 나서, 이제 괜찮겠지 싶어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돌아보니 역시 서 있었다. 어쩐지 무척 작아 보였다.

2장

부웅 하고 기선이 멈추자 거룻배가 기슭을 떠나 저어 왔다. 사공은 벌거숭이에 빨간 샅바만 차고 있다. 야만스러운 데다. 하기야 이 더위에는 옷을 못 입겠지. 햇볕이 세서 물이 유난히 번쩍인다. 가만히 보고 있어도 눈이 어질하다. 사무원에게 물어보니 나는 여기서 내리는 거란다. 보아하니 오모리만 한 어촌이다. 사람을 바보로 아나, 이런 데서 어떻게 참겠느냐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다. 기세 좋게 맨 먼저 뛰어내렸다. 뒤이어 대여섯은 탔을 거다. 그 밖에 큰 상자를 넷쯤 싣고 빨간 샅바는 기슭으로 저어 돌아왔다. 뭍에 닿았을 때도 제일 먼저 뛰어올라, 대뜸 바닷가에 서 있던 코흘리개를 붙잡고 중학교가 어디냐고 물었다. 꼬마는 멍하니, 몰러유, 했다. 눈치 없는 시골뜨기다. 고양이 이마만 한 동네 주제에 중학교가 어딘지도 모르는 놈이 어디 있나. 그런데 묘한 통소매 옷을 입은 사내가 와서 이리 오라기에 따라갔더니 미나토야인가 하는 여관으로 데려갔다. 언짢은 여자들이 목소리를 맞춰 어서 오르세요, 하기에 오르기가 싫어졌다. 문간에 선 채로 중학교를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중학교는 여기서 기차로 이십 리쯤 가야 한다고 듣고는 더 오르기 싫어졌다. 나는 통소매 사내에게서 내 가방 두 개를 낚아채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했다. 여관 사람들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거장은 금방 찾았다. 표도 쉽게 샀다. 타 보니 성냥갑 같은 기차다. 덜컹덜컹 오 분쯤 움직였나 싶더니 벌써 내려야 한다. 어쩐지 표가 싸다 했다. 겨우 삼 전이다. 그러고서 인력거를 불러 중학교에 와 보니 벌써 수업이 끝나 아무도 없다. 숙직은 잠깐 볼일 보러 나갔다고 소사가 알려 주었다. 퍽 태평한 숙직도 다 있다. 교장이라도 찾아갈까 했지만 지쳐서 인력거를 타고 여관으로 데려가라고 인력거꾼에게 일렀다. 인력거꾼은 기세 좋게 야마시로야라는 집 앞에 댔다. 야마시로야라니 전당포 간타로네 가게 이름과 같아서 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이 층 계단 밑의 어두운 방으로 안내했다. 더워서 있을 수가 없다. 이런 방은 싫다고 했더니 공교롭게 다 차 있어서요, 하면서 가방을 내던진 채 나가 버렸다. 할 수 없어 방 안에 들어가 땀을 흘리며 참고 있었다. 이윽고 목욕을 하라기에 풍덩 뛰어들었다가 곧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들여다보니 시원해 보이는 방이 잔뜩 비어 있다. 무례한 놈들이다. 거짓말을 하다니. 그러고서 하녀가 밥상을 가져왔다. 방은 더웠지만 밥은 하숙보다 꽤 맛있었다. 시중을 들면서 하녀가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기에 도쿄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도쿄는 좋은 데지요, 하기에 당연하지, 하고 대답해 주었다. 밥상을 물린 하녀가 부엌으로 갔을 무렵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시해서 곧 잤지만 좀처럼 잠이 안 온다. 더워서만이 아니다. 시끄럽다. 하숙보다 다섯 배는 시끄럽다. 깜빡 졸았더니 기요 꿈을 꾸었다. 기요가 에치고의 조릿대 엿을 조릿대째 우걱우걱 먹고 있다. 조릿대는 독이니 그만두라고 하니, 아니에요 이 조릿대가 약이에요, 하며 맛있게 먹고 있다. 내가 어이가 없어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하하 웃었더니 잠이 깼다. 하녀가 덧문을 열고 있다. 여전히 하늘 밑이 뚫린 것 같은 날씨다.

길을 떠나면 찻값을 주는 법이라고 들었다. 찻값을 안 주면 푸대접을 받는다고 들었다. 이런 좁고 어두운 방에 밀어 넣는 것도 찻값을 안 준 탓이겠지. 초라한 옷차림에 천 가방과 모직 박쥐우산을 들고 있으니 그렇겠지. 시골뜨기 주제에 사람을 얕보는군. 한번 찻값을 줘서 놀래 주자. 나는 이래 봬도 학비 남은 것 삼십 원쯤을 품에 넣고 도쿄를 떠나왔다. 기차와 기선 표 값과 잡비를 빼고도 아직 십사 원쯤 있다. 다 줘도 이제부터 월급을 받으니 상관없다. 시골뜨기들은 쩨쩨하니까 오 원만 줘도 놀라서 눈을 뒤집을 게 뻔하다. 어떻게 나오나 보자 하고 태연히 세수를 하고 방에 돌아와 기다리고 있으니, 어젯밤 그 하녀가 밥상을 가져왔다. 쟁반을 들고 시중을 들면서 유난히 히죽히죽 웃는다. 무례한 년이다. 내 얼굴 속으로 축제 행렬이라도 지나가는 것도 아닌데. 이래 봬도 이 하녀 낯짝보다 훨씬 낫다. 밥을 다 먹고 줄 생각이었는데, 비위가 상해서 도중에 오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이따 이걸 카운터에 가져가라고 했더니 하녀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서 밥을 다 먹고 곧 학교로 나섰다. 구두는 닦여 있지 않았다.

학교는 어제 인력거로 가 봤으니 대강 방향은 안다. 네거리를 두세 번 꺾으니 곧 교문 앞이 나왔다. 교문에서 현관까지는 화강암이 깔려 있다. 어제 이 돌길 위를 인력거로 덜컹덜컹 지날 때는 턱없이 요란한 소리가 나서 좀 곤란했다. 도중에 무명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잔뜩 만났는데 다들 이 교문으로 들어간다. 그 가운데는 나보다 키가 크고 억세 보이는 녀석도 있다. 저런 놈을 가르치나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교장실로 들였다. 교장은 수염이 성기고 살빛이 검고 눈이 큰, 너구리 같은 사람이다. 유난히 점잔을 뺐다. 자 열심히 공부해 주시오, 하고 공손히 큰 도장이 찍힌 임명장을 건넸다. 이 임명장은 도쿄로 돌아갈 때 둘둘 말아 바다에 던져 버렸다. 교장은 이제 직원들에게 소개해 줄 테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임명장을 보이라고 일러 주었다. 쓸데없는 수고다.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느니 이 임명장을 사흘 동안 교무실에 붙여 두는 편이 낫다.

교사들이 교무실에 모이려면 첫 시간 나팔이 울려야 한다. 시간이 꽤 있다. 교장은 시계를 꺼내 보더니, 차차 천천히 이야기할 작정이지만 우선 대강은 알아 두시라며, 그러고서 교육의 정신에 대해 긴 훈화를 들려주었다. 나는 물론 대충 듣고 있었지만 도중에 이거 엉뚱한 데 왔구나 싶었다. 교장 말대로는 도저히 못 하겠다. 나 같은 앞뒤 안 가리는 놈을 붙잡고, 학생의 본보기가 되라느니, 온 학교의 사표로 우러름을 받아야 한다느니, 학문 말고도 사람됨으로 감화를 주지 않으면 교육자가 될 수 없다느니 하며 턱없이 엄청난 주문을 한다. 그런 훌륭한 사람이 월급 사십 원에 멀리 이런 시골까지 오겠나. 사람은 대개 비슷비슷하다. 화가 나면 싸움 한 번쯤은 누구나 하겠지 했는데, 이 꼴이면 함부로 말도 못 하고 산책도 못 한다. 그런 어려운 일이면 고용하기 전에 이러이러하다고 말할 것이지. 나는 거짓말하는 게 싫으니 어쩔 수 없다, 속아서 온 거다 하고 단념하고, 시원스레 여기서 거절하고 돌아가 버리려고 생각했다. 여관에 오 원을 줬으니 지갑 속에는 구 원 남짓밖에 없다. 구 원으로는 도쿄까지 못 돌아간다. 찻값 따위 안 줄걸 그랬다. 아까운 짓을 했다. 그러나 구 원이라도 어떻게든 안 될 건 없다. 여비는 모자라도 거짓말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 도저히 선생님 말씀대로는 못 하겠습니다, 이 임명장은 돌려드립니다, 했더니 교장은 너구리 같은 눈을 끔벅이며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방금 한 말은 그저 바람이다, 당신이 바람대로 못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며 웃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었으면 처음부터 겁을 주지 말 것이지.

그러는 사이에 나팔이 울렸다. 교실 쪽이 갑자기 왁자해진다. 이제 교사들도 교무실에 모였겠지요, 하기에 교장을 따라 교무실로 들어갔다. 넓고 길쭉한 방 둘레에 책상을 늘어놓고 다들 앉아 있다. 내가 들어간 것을 보고 다들 짜기라도 한 듯 내 얼굴을 보았다. 구경거리도 아닌데. 그러고서 이른 대로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가서 임명장을 내밀고 인사를 했다. 대개는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힐 뿐이었지만, 꼼꼼한 사람은 내민 임명장을 받아 한번 훑어보고 그것을 공손히 돌려주었다. 꼭 신사 마당 연극 흉내다. 열다섯 번째로 체조 선생 차례가 왔을 때는 같은 짓을 몇 번이나 하니 좀 짜증이 났다. 저쪽은 한 번이면 끝난다. 이쪽은 같은 짓을 열다섯 번 되풀이하고 있다. 남의 속도 좀 헤아려 볼 일이다.

인사를 한 가운데 교감 아무개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문학사란다. 문학사라면 대학 졸업생이니 훌륭한 사람이겠지. 묘하게 여자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이 더위에 플란넬 셔츠를 입고 있다. 얼마간 얇은 천이긴 하겠지만 더운 건 뻔하다. 문학사답게 참 고생스러운 옷차림을 한 것이다. 게다가 그게 빨간 셔츠니 사람을 놀리는 거다. 나중에 들으니 이 사람은 일 년 내내 빨간 셔츠를 입는단다. 묘한 병도 다 있다. 본인 설명으로는 빨강은 몸에 약이 되니까 위생을 위해 일부러 맞춰 입는다는데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러면 내친김에 옷도 바지도 빨강으로 하면 되겠다. 그리고 영어 선생으로 고가라는, 몹시 얼굴빛이 나쁜 사람이 있었다. 대개 얼굴이 파란 사람은 야윈 법인데 이 사람은 파랗게 부어 있다. 옛날 소학교 다닐 때 아사이네 다미라는 아이가 같은 반에 있었는데, 이 아사이네 아버지가 역시 이런 낯빛이었다. 아사이는 농사꾼이니 농사를 지으면 저런 얼굴이 되느냐고 기요에게 물어보았더니, 그게 아니에요, 그 사람은 끝물 호박만 먹어서 파랗게 붓는 거예요, 하고 가르쳐 주었다. 그 뒤로 파랗게 부은 사람을 보면 반드시 끝물 호박을 먹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어 선생도 끝물 호박만 먹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하기야 끝물 호박이 무엇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기요에게 물어본 적은 있지만 기요는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기요도 모르는 거겠지. 그리고 나와 같은 수학 선생으로 홋타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억센 까까머리로, 히에이산의 난폭한 승병이라고나 할 낯짝이다. 남이 정중하게 임명장을 보이는데 거들떠보지도 않고, 야 자네가 새로 온 사람인가, 가끔 놀러 오게 아하하하, 했다. 아하하하는 무슨. 그런 예의도 모르는 놈한테 누가 놀러 가나. 나는 이때부터 이 까까머리에게 고슴도치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한문 선생은 역시 딱딱했다. 어제 도착하셔서, 필시 피곤하실 텐데, 그런데 벌써 수업을 시작하시다니, 퍽 부지런하시기도 하셔라, ― 하고 쉴 새 없이 늘어놓은 건 붙임성 있는 할아버지다. 미술 선생은 영락없는 광대 투다. 하늘하늘한 얇은 겉옷을 걸치고 부채를 딱딱거리며, 고향이 어디시옵니까요, 네? 도쿄? 그거 반갑습니다요, 한패가 생겨서…… 저도 이래 봬도 도쿄 토박이올시다요, 했다. 이런 게 도쿄 토박이라면 도쿄에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밖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이런 걸 쓰자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끝이 없으니 그만둔다.

인사가 한차례 끝나자 교장이 오늘은 이제 돌아가도 좋다, 다만 수업에 관한 일은 수학 주임과 의논해 두고 모레부터 수업을 시작해 달라고 했다. 수학 주임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바로 그 고슴도치였다. 망할, 이놈 밑에서 일하는가 싶어 에구 하고 실망했다. 고슴도치는 「이봐 자네 어디 묵고 있나, 야마시로야인가, 응, 이따 가서 의논하지」 하고 말을 남기고 분필을 들고 교실로 나갔다. 주임 주제에 제 쪽에서 와서 의논하겠다니 체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불러 대는 것보다는 기특하다.

그러고서 교문을 나와 곧 여관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돌아가 봐야 할 일도 없으니 동네를 좀 산책해 주자 하고 발 닿는 대로 마구 걸어 다녔다. 현청도 보았다. 지난 세기의 낡은 건물이다. 병영도 보았다. 아자부 연대보다 못하다. 큰길도 보았다. 가구라자카를 반으로 좁힌 만한 길 너비에 거리 모양은 그보다 못하다. 이십오만 석 성 아랫마을이라 해도 뻔하다. 이런 데 살면서 성 아랫마을이라고 뽐내는 사람들은 가엾다고 생각하며 오다 보니 어느새 야마시로야 앞에 나와 있었다. 넓은 것 같아도 좁다. 이걸로 대개는 다 본 거겠지. 돌아가서 밥이나 먹자 하고 문간에 들어섰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주인이 내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뛰어나와 어서 오세요…… 하고 마루에 머리를 조아렸다. 구두를 벗고 올라서니, 좋은 방이 비었습니다, 하고 하녀가 이 층으로 안내했다. 열다섯 첩짜리 앞쪽 이 층 방이고 큰 도코노마가 딸려 있다. 나는 태어나서 아직 이런 훌륭한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앞으로 언제 들어가 볼지 모르니, 양복을 벗고 유카타 한 장 차림으로 방 한가운데에 큰 대자로 누워 보았다. 기분이 좋다.

점심을 먹고 나서 곧 기요에게 편지를 써 주었다. 나는 글솜씨가 서툰 데다 글자를 몰라서 편지 쓰는 게 딱 질색이다. 또 보낼 데도 없다. 그러나 기요는 걱정하고 있겠지. 배가 난파해서 죽지나 않았나 생각하면 곤란하니까 큰맘 먹고 길게 써 주었다. 그 글귀는 이렇다.

「어제 도착했다. 시시한 데다. 열다섯 첩 방에서 자고 있다. 여관에 찻값을 오 원 주었다. 여주인이 마루에 머리를 조아렸다. 어젯밤엔 잠을 못 잤다. 기요가 조릿대 엿을 조릿대째 먹는 꿈을 꾸었다. 내년 여름엔 돌아간다. 오늘 학교에 가서 모두에게 별명을 붙여 주었다. 교장은 너구리, 교감은 빨간 셔츠, 영어 선생은 끝물 호박, 수학은 고슴도치, 미술은 알랑쇠. 앞으로 이것저것 써 주마. 잘 있어라」

편지를 다 쓰고 나니 기분이 좋아져서 졸음이 오기에 아까처럼 방 한가운데에 쭉 뻗고 큰 대자로 누웠다. 이번에는 꿈도 뭐도 안 꾸고 푹 잤다. 이 방인가, 하는 큰 소리에 눈을 떴더니 고슴도치가 들어왔다. 아까는 실례, 자네 담당은…… 하고 사람이 일어나기가 무섭게 의논을 시작해서 크게 허둥댔다. 담당을 들어 보니 별로 어려운 것도 없을 것 같아서 승낙했다. 이 정도라면 모레는커녕 내일부터 하라고 해도 놀라지 않는다. 수업 의논이 끝나자, 자네 언제까지 이런 여관에 있을 작정은 아니겠지, 내가 좋은 하숙을 주선해 줄 테니 옮기게. 다른 사람이면 안 들어주지만 내가 말하면 곧 된다. 빠를수록 좋으니 오늘 보고 내일 옮겨서 모레부터 학교에 나가면 딱 좋다, 하고 혼자 다 정해 버린다. 과연 열다섯 첩 방에 언제까지나 있을 수도 없겠지. 월급을 몽땅 숙박비로 내도 모자랄지 모른다. 오 원이나 찻값을 쓰고 곧 옮기는 건 좀 아깝지만, 어차피 옮길 거라면 일찍 옮겨서 자리를 잡는 편이 편하니 그 점은 고슴도치에게 잘 부탁하기로 했다. 그러자 고슴도치는 아무튼 같이 가 보자고 하기에 갔다. 동네 끝의 언덕 중턱에 있는 집으로 아주 한적하다. 주인은 골동품을 사고파는 이카긴이라는 사내고, 마누라는 남편보다 네 살쯤 위인 여자다. 중학교 다닐 때 영어로 위치, 마녀라는 말을 배운 적이 있는데 이 마누라는 영락없이 마녀를 닮았다. 마녀라도 남의 마누라니 상관없다. 결국 내일부터 옮기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고슴도치는 도리초에서 빙수를 한 그릇 샀다. 학교에서 만났을 때는 유난히 건방지고 무례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이것저것 돌봐 주는 걸 보면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다. 다만 나처럼 성미가 급하고 욱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나중에 들으니 이 사람이 학생들에게 인망이 가장 높단다.

3장

드디어 학교에 나갔다. 처음 교실에 들어가 높은 데에 올라섰을 때는 어쩐지 이상했다. 강의를 하면서 나 같은 것도 선생 노릇을 할 수 있나 싶었다. 학생들은 시끄럽다. 이따금 유난히 큰 목소리로 선생님, 한다. 선생님 소리는 좀 찔렸다. 여태 물리학교에서 날마다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불러 댔지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불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어쩐지 발바닥이 근질근질하다. 나는 비겁한 사람은 아니다. 겁쟁이도 아니지만 아깝게도 담력이 모자란다. 선생님 하고 큰 소리로 부르면, 배고플 때 마루노우치에서 정오 대포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첫 시간은 어쩐지 대충대충 해치웠다. 그러나 딱히 곤란한 질문도 받지 않고 끝났다. 교무실에 돌아오니 고슴도치가 어떤가, 하고 물었다. 응, 하고 짧게 대답했더니 고슴도치는 안심한 모양이었다.

두 번째 시간에 분필을 들고 교무실을 나설 때는 어쩐지 적진에 쳐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교실에 들어가 보니 이번 반은 아까보다 큰 놈들뿐이다. 나는 도쿄 토박이라 몸집이 가냘프고 작게 생겨서 아무래도 높은 데 올라가도 위엄이 서지 않는다. 싸움이라면 씨름꾼하고라도 해 보이겠지만, 이런 덩치들을 마흔 명이나 앞에 늘어놓고 혀 하나로 쩔쩔매게 만들 재주는 없다. 그러나 이런 시골뜨기들에게 약점을 보이면 버릇이 된다고 생각해서 될 수 있는 대로 큰 소리로, 혀를 좀 굴려 가며 강의를 해 주었다. 처음에는 학생들도 연기에 휩싸인 듯 멍하니 있기에, 그것 봐라 하고 더욱 신이 나서 도쿄 토박이 막말 투를 썼더니, 맨 앞줄 한가운데 있던 제일 억세 보이는 놈이 대뜸 일어나서 선생님, 한다. 옳지 왔구나 하면서 뭐냐고 물었더니, 「너무 빨라서 모르겄슈, 쪼매만 천천히 해 주면 안 되겄슈」 했다. 「안 되겄슈」는 맥 빠진 말투다. 너무 빠르면 천천히 말해 주겠지만, 나는 도쿄 토박이라 너희 말은 못 쓴다, 모르겠거든 알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대답해 주었다. 이 가락으로 두 번째 시간은 생각보다 잘 풀렸다. 다만 나오는 길에 학생 하나가 이 문제 좀 풀어 주면 안 되겄슈, 하고 풀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기하 문제를 들고 다가왔을 때는 식은땀을 흘렸다. 할 수 없어 뭔지 모르겠다, 다음에 가르쳐 주마, 하고 서둘러 물러났더니 학생들이 와 하고 놀려 댔다. 그 속에 못 푼다 못 푼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제기랄, 선생이라도 못 푸는 건 당연하다. 못 푸는 걸 못 푼다고 하는데 이상할 게 뭐 있나. 그런 걸 풀 수 있을 정도면 사십 원에 이런 시골에 오겠나 하며 교무실로 돌아왔다. 이번엔 어떤가, 하고 또 고슴도치가 물었다. 응, 했지만 응만으로는 성이 안 차서, 이 학교 학생들은 벽창호로군, 했다. 고슴도치는 묘한 얼굴을 했다.

세 번째 시간도 네 번째 시간도 점심 뒤 한 시간도 거기서 거기였다. 첫날 들어간 반은 모두 조금씩 실수를 했다. 교사는 곁에서 보는 것만큼 편하지 않구나 싶었다. 수업은 한차례 끝났지만 아직 못 돌아간다. 세 시까지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세 시가 되면 담임 반 학생들이 제 교실을 청소하고 알리러 오니 가서 살펴봐야 한단다. 그러고서 출석부를 한번 훑어보고 나서야 겨우 풀려난다. 아무리 월급에 팔린 몸이라지만 빈 시간까지 학교에 묶어 놓고 책상하고 눈싸움을 시키는 법이 어디 있나.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얌전히 규칙대로 하고 있으니 새로 온 나만 떼를 쓰는 것도 좋지 않겠다 싶어 참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자네 무조건 세 시 넘어까지 학교에 있게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일세, 하고 고슴도치에게 하소연했더니, 고슴도치는 그렇지 아하하하 하고 웃더니 나중에 진지해져서, 자네 너무 학교 불평을 하면 안 되네. 할 거면 나한테만 말하게, 퍽 묘한 사람도 있으니까, 하고 충고 비슷한 말을 했다. 네거리에서 헤어져서 자세한 건 물어볼 틈이 없었다.

그러고서 집에 돌아오면 하숙 주인이 차를 타 드리지요, 하고 온다. 차를 타 준다기에 대접하는 줄 알았더니 내 차를 거리낌 없이 타서 제가 마신다. 이 꼴이면 내가 없는 동안에도 멋대로 차를 타 드리지요를 혼자 실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주인 말로는, 저는 서화 골동품을 좋아해서 끝내 이런 장사를 몰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뵙기에 퍽 풍류를 아시는 분 같습니다. 취미로 좀 시작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당치도 않은 권유를 한다. 이 년 전에 어떤 사람 심부름으로 제국 호텔에 갔을 때는 자물쇠 고치는 사람으로 잘못 보인 적이 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가마쿠라 대불을 구경했을 때는 인력거꾼에게 두목 소리를 들었다. 그 밖에 오늘날까지 잘못 보인 일은 퍽 많지만, 아직 나를 붙잡고 퍽 풍류를 아시는 분이라고 한 사람은 없다. 대개 옷차림이나 몸가짐으로도 안다. 풍류객이라는 건 그림에서 보더라도 두건을 쓰거나 시 쓰는 종이쪽을 들고 있는 법이다. 이런 나를 풍류객이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건 여간내기가 아니다. 나는 그런 태평한 늙은이나 하는 짓은 싫다고 했더니, 주인은 헤헤헤헤 웃으면서, 아니 처음부터 좋아하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만, 일단 이 길에 들어서면 좀처럼 못 빠져나옵니다, 하며 혼자 차를 따라 묘한 손짓을 하며 마시고 있다. 실은 어젯밤 차를 사다 달라고 부탁해 두었는데 이런 쓰고 진한 차는 싫다. 한 잔 마시면 위에 찌르르 오는 것 같다. 다음부터는 좀 덜 쓴 걸 사다 달라고 했더니, 알겠습니다, 하며 또 한 잔을 우려 마셨다. 남의 차라고 생각하고 마구 마시는 놈이다. 주인이 물러간 뒤 내일 수업 준비를 하고 곧 자 버렸다.

그러고서 날마다 날마다 학교에 나가서는 규칙대로 일하고, 날마다 날마다 돌아오면 주인이 차를 타 드리지요, 하고 나온다. 한 주일쯤 지나니 학교 사정도 대강 알게 되었고 하숙 부부의 사람됨도 대강 알게 되었다. 다른 교사들에게 물어보니 임명장을 받고 한 주일에서 한 달쯤 사이는 제 평판이 좋은가 나쁜가 몹시 마음에 걸린다는데, 나는 도무지 그런 느낌이 없었다. 교실에서 이따금 실수를 하면 그때만은 기분이 언짢지만 삼십 분쯤 지나면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 나는 무슨 일이든 오래 걱정하려 해도 걱정을 못 하는 사람이다. 교실에서의 실수가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이 교장이나 교감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도무지 무관심했다. 나는 앞서 말한 대로 그다지 배짱이 두둑한 사람은 아니지만 결단은 아주 시원시원한 사람이다. 이 학교가 안 되면 곧 어디든 갈 각오였으니 너구리도 빨간 셔츠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하물며 교실의 꼬맹이들한테 애교도 아첨도 떨 마음이 안 났다. 학교는 그걸로 됐는데 하숙 쪽은 그렇게 안 됐다. 주인이 차를 마시러 오기만 하면 참겠지만, 이런저런 물건을 가져온다. 처음 가져온 건 무슨 도장 재료였는데, 열 개쯤 늘어놓고 전부 삼 원이면 싼 거니 사시라고 한다. 시골을 떠도는 엉터리 화가도 아니고 그런 건 필요 없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가잔인가 뭔가 하는 사람의 꽃과 새 족자를 가져왔다. 제 손으로 도코노마에 걸고 잘 그리지 않았습니까, 하기에 그런가, 하고 대충 인사를 하니, 가잔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무슨 가잔이고 하나는 무슨 가잔인데, 이 족자는 그 무슨 가잔 쪽이라고 시시한 강의를 늘어놓은 뒤, 어떻습니까, 선생님이면 십오 원에 해 드리지요. 사시지요, 하고 재촉한다. 돈이 없다고 거절하니, 돈이야 언제든 괜찮습니다요, 하며 여간 고집스럽지 않다. 돈이 있어도 안 산다고 그때는 쫓아 버렸다. 그다음에는 귀면와만 한 큰 벼루를 짊어지고 들어왔다. 이건 단계입니다, 단계입니다, 하고 두 번 세 번 단계 단계 하도 우기기에 재미 삼아 단계가 뭔데, 하고 물었더니 곧 강의를 시작했다. 단계에는 윗층 가운데층 아랫층이 있어서 요즘 것은 다 윗층입니다만 이건 틀림없이 가운데층입니다, 이 눈을 보십시오. 눈이 셋 있는 건 드뭅니다. 먹이 퍼지는 품도 아주 좋습니다, 한번 써 보십시오, 하고 내 앞에 큰 벼루를 들이민다. 얼마냐고 물으니, 주인이 중국에서 가지고 돌아와서 꼭 팔고 싶다고 하니 싸게 해서 삼십 원으로 해 두지요, 한다. 이 사람은 바보가 틀림없다. 학교 쪽은 그럭저럭 무사히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골동품 공세를 당해서는 도저히 오래 못 갈 것 같다.

그러다 학교도 싫어졌다. 어느 날 밤 오마치라는 데를 산책하는데 우체국 옆에 메밀국수라고 쓰고 밑에 도쿄라고 덧붙인 간판이 있었다. 나는 메밀국수를 무척 좋아한다. 도쿄에 있을 때도 메밀국숫집 앞을 지나다 양념 냄새를 맡으면 아무래도 포렴을 들추고 들어가고 싶어졌다. 오늘까지는 수학과 골동품 때문에 메밀국수를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간판을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내친김이니 한 그릇 먹고 가자 하고 올라갔다. 보니 간판만 못하다. 도쿄라고 내세웠으면 좀 깨끗이 할 법도 한데, 도쿄를 모르는 건지 돈이 없는 건지 지독하게 지저분하다. 다다미는 빛이 바랬고 게다가 모래로 버석거린다. 벽은 그을음으로 새까맣다. 천장은 남폿불 그을음으로 거멓게 그을렸을 뿐 아니라 낮아서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릴 정도다. 다만 번드르르하게 메밀국수 이름을 써 붙인 차림표만은 아주 새것이다. 아마 헌 집을 사서 이삼 일 전에 문을 연 게 틀림없을 거다. 차림표 첫 번째에 튀김이라고 있다. 어이 튀김 가져와, 하고 큰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때까지 구석에 셋이 모여 무언가 후루룩 쪽쪽 먹고 있던 녀석들이 일제히 내 쪽을 보았다. 방이 어두워서 얼른 몰라봤는데, 얼굴을 마주하니 다 학교 학생들이다. 저쪽에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인사를 했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메밀국수를 먹어서 맛있기에 튀김 메밀국수를 네 그릇 해치웠다.

이튿날 아무 생각 없이 교실에 들어가니 칠판 가득한 큰 글씨로 튀김 선생이라고 쓰여 있다. 내 얼굴을 보고 다들 와 하고 웃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튀김을 먹으면 우스우냐고 물었다. 그러자 학생 하나가, 그래도 네 그릇은 너무 했지유, 했다. 네 그릇을 먹든 다섯 그릇을 먹든 내 돈으로 내가 먹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하고 얼른 강의를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왔다. 십 분 뒤 다음 교실에 나가 보니 하나, 튀김 네 그릇이라. 단 웃지 말 것. 하고 칠판에 쓰여 있다. 아까는 별로 화가 안 났지만 이번에는 비위가 상했다. 농담도 도를 넘으면 장난이다. 새까맣게 탄 떡 같은 거라 아무도 칭찬 안 한다. 시골뜨기들은 이 호흡을 모르니까 어디까지 밀고 나가도 괜찮다는 속셈이겠지. 한 시간 걸으면 구경할 거리도 없는 좁은 동네에 살면서 달리 아무 재주가 없으니까 튀김 사건을 러일 전쟁처럼 떠들고 다니는 거겠지. 불쌍한 놈들이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교육을 받으니까 유난히 비비 꼬인, 화분 속 단풍나무 같은 좀팽이가 생기는 거다. 천진해서 그러는 거라면 같이 웃어도 좋지만 이건 뭐냐. 어린 주제에 묘하게 독기를 품고 있다. 나는 잠자코 튀김을 지우고, 이런 장난이 재미있냐, 비겁한 농담이다. 너희는 비겁이라는 말뜻을 아느냐, 했더니, 지가 한 짓을 비웃는다구 성내는 게 비겁한 거 아닌가유, 하고 대답한 놈이 있다. 밉살스러운 놈이다. 일부러 도쿄에서 이런 놈을 가르치러 왔나 생각하니 한심해졌다. 쓸데없는 말대꾸 말고 공부나 하라고 하고 수업을 시작해 버렸다. 그러고서 다음 교실에 나가니 튀김을 먹으면 말대꾸가 하고 싶어지는 법이라 하고 쓰여 있다. 도무지 손쓸 도리가 없다. 너무 화가 나서, 그런 건방진 놈들은 안 가르친다 하고 성큼성큼 돌아와 버렸다. 학생들은 수업이 없어져서 좋아했단다. 이렇게 되면 학교보다 골동품 쪽이 그래도 낫다.

튀김 메밀국수도 집에 돌아와 하룻밤 자고 나니 그다지 울화가 치밀지 않게 되었다. 학교에 나가 보니 학생들도 나와 있다. 어쩐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러고서 사흘쯤은 무사했는데, 나흘째 밤에 스미타라는 데 가서 경단을 먹었다. 이 스미타라는 데는 온천이 있는 동네로 성 아랫마을에서 기차로 십 분쯤, 걸어서 삼십 분이면 갈 수 있고, 요릿집도 온천 여관도 공원도 있는 데다 유곽이 있다. 내가 들어간 경단집은 유곽 입구에 있는데 몹시 맛있다는 평판이라 온천에 갔다 오는 길에 잠깐 먹어 보았다. 이번에는 학생도 안 만났으니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이튿날 학교에 가서 첫 시간 교실에 들어가니 경단 두 접시 칠 전이라고 쓰여 있다. 실제로 나는 두 접시 먹고 칠 전을 냈다. 도무지 성가신 놈들이다. 두 번째 시간에도 틀림없이 무언가 있겠지 하고 보니 유곽의 경단 맛있다 맛있다 하고 쓰여 있다. 기가 막히는 놈들이다. 경단은 그걸로 끝났나 했더니 이번에는 빨간 수건이라는 게 소문이 났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시시한 내력이다. 나는 여기 온 뒤로 날마다 스미타 온천에 가기로 정해 두었다. 다른 데는 무엇을 봐도 도쿄 발밑에도 못 미치지만 온천만은 훌륭하다. 모처럼 왔으니 날마다 들어가 주자는 생각으로 저녁 먹기 전에 운동 겸 나간다. 그런데 갈 때는 꼭 큰 서양 수건을 달랑달랑 들고 간다. 이 수건이 물이 든 데다 빨간 줄무늬가 번져서 얼핏 보면 다홍빛으로 보인다. 나는 이 수건을 갈 때나 올 때나, 기차를 타도 걸어도 늘 들고 다닌다. 그래서 학생들이 나를 빨간 수건 빨간 수건 하고 부른단다. 아무래도 좁은 땅에 살면 성가시다. 아직 있다. 온천은 삼 층짜리 새 건물이라 상등은 유카타를 빌려주고 등까지 밀어 주고 팔 전이면 된다. 게다가 여자가 찻잔에 차를 받쳐 내온다. 나는 언제나 상등에 들어갔다. 그러자 사십 원 월급으로 날마다 상등에 들어가는 건 사치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참견이다. 아직 있다. 탕은 화강석을 쌓아 올려 열다섯 첩쯤 넓이로 칸을 지어 놓았다. 대개는 열서너 명이 담가 있지만 가끔은 아무도 없을 때가 있다. 깊이는 서면 가슴께까지 오니, 운동 삼아 물속을 헤엄치는 건 퍽 유쾌하다. 나는 사람이 없는 걸 보고는 열다섯 첩 탕을 헤엄쳐 돌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삼 층에서 기세 좋게 내려와 오늘도 헤엄칠 수 있으려나 하고 입구를 들여다보니 큰 패에 시커멓게 탕 안에서 헤엄치지 말 것, 하고 써 붙여 놓았다. 탕 안에서 헤엄치는 사람은 그리 없을 테니 이 붙임쪽은 나를 위해 특별히 새로 만든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 뒤로 헤엄치는 걸 단념했다. 헤엄치는 건 단념했는데, 학교에 나가 보니 여느 때처럼 칠판에 탕 안에서 헤엄치지 말 것, 하고 쓰여 있는 데는 놀랐다. 어쩐지 학생 전체가 나 하나를 염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울적했다. 학생들이 무슨 말을 하든 하려고 마음먹은 일을 그만둘 나는 아니지만, 왜 이런 코앞이 막힐 듯한 옹색한 데로 왔나 생각하니 한심해졌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면 여전히 골동품 공세다.

4장

학교에는 숙직이 있어서 직원들이 돌아가며 맡는다. 다만 너구리와 빨간 셔츠는 예외다. 어째서 이 두 사람이 마땅한 의무를 면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고등관 대우라서 그렇단다. 재미도 없다. 월급은 많이 받고 시간은 적고, 그런데 숙직까지 빠지다니 이런 불공평이 어디 있나. 제멋대로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게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용케도 저렇게 뻔뻔할 수 있구나. 이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지만, 고슴도치 말로는 아무리 혼자 불평을 늘어놓아도 통하는 게 아니란다. 혼자든 둘이든 옳은 일이면 통할 법도 한데. 고슴도치는 might is right라는 영어를 끌어다 타일렀는데, 어쩐지 요령부득이라 되물어 보니 강자의 권리라는 뜻이란다. 강자의 권리쯤이야 옛날부터 알고 있다. 이제 와서 고슴도치에게 강의를 들을 것도 없다. 강자의 권리와 숙직은 별문제다. 너구리나 빨간 셔츠가 강자라니 누가 인정하나. 따지는 건 따지는 거고, 이 숙직이 드디어 내 차례로 돌아왔다. 본래 결벽이 있어서 이부자리 같은 건 내 것에 편히 눕지 않으면 잔 것 같지가 않다. 어려서부터 동무 집에서 자 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다. 동무 집도 싫은데 학교 숙직은 더 싫다. 싫지만 이것이 사십 원 속에 들어 있는 거라면 어쩔 수 없다. 참고 해 주자.

교사도 학생도 다 돌아가 버린 뒤에 혼자 멍하니 있는 건 퍽 얼빠진 노릇이다. 숙직실은 교실 뒤편 기숙사 서쪽 끝 방이다. 잠깐 들어가 보았는데 서쪽 해를 정면으로 받아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시골이라 가을이 와도 느긋하게 덥다. 학생 급식을 가져오게 해서 저녁을 먹었는데 맛없는 데는 두 손 들었다. 용케 저런 걸 먹고 그만큼 날뛰는구나. 그러면서 저녁을 서둘러 네 시 반에 치워 버리니 호걸이 틀림없다. 밥은 먹었지만 아직 해가 안 졌으니 잘 수도 없다. 잠깐 온천에 가고 싶어졌다. 숙직을 하면서 밖에 나가는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우두커니 중금고나 다름없는 꼴을 당하는 건 참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처음 학교에 왔을 때 숙직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잠깐 볼일 보러 나갔다고 소사가 대답한 걸 묘하다고 여겼는데, 내 차례가 돌아와 보니 알 것 같다. 나가는 게 옳은 거다. 나는 소사에게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더니 무슨 볼일이 있으시냐고 묻기에, 볼일이 아니라 온천에 들어간다고 대답하고 휑하니 나섰다. 빨간 수건을 하숙에 두고 온 게 아쉽지만 오늘은 거기서 빌리기로 하자.

그러고서 제법 느긋하게 나왔다 들어갔다 하다가 겨우 해 질 녘이 되었기에 기차를 타고 고마치 정거장까지 와서 내렸다. 학교까지는 여기서 사백 미터쯤이다. 뭐 별거 아니지 하고 걷기 시작하니 저쪽에서 너구리가 왔다. 너구리는 지금 이 기차로 온천에 가려는 속셈이겠지. 휘적휘적 바쁜 걸음으로 왔는데, 엇갈릴 때 내 얼굴을 보기에 잠깐 인사를 했다. 그러자 너구리는, 당신 오늘 숙직이 아니었던가요, 하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었던가요는 무슨. 두 시간 전에 나에게 오늘 밤이 첫 숙직이로군요, 수고하시오, 하고 인사하지 않았나. 교장쯤 되면 유난히 빙빙 꼬인 말을 쓰는 법이다. 나는 화가 나서, 예 숙직입니다, 숙직이니까 이제 돌아가서 잘 것은 틀림없이 잡니다, 하고 내뱉고 태연히 걸어갔다. 다테마치 네거리까지 오니 이번에는 고슴도치와 딱 마주쳤다. 아무래도 좁은 데다. 나다니기만 하면 꼭 누군가를 만난다. 「이봐 자네 숙직 아닌가」 하고 묻기에 「응, 숙직이야」 하고 대답했더니 「숙직이 함부로 나다니다니 안 되지 않나」 했다. 「조금도 안 될 거 없어, 안 나다니는 게 안 되지」 하고 큰소리를 쳐 보였다. 「자네 게으름에도 질리는군, 교장이나 교감을 만나면 성가시다네」 하고 고슴도치답지 않은 소리를 하기에 「교장은 방금 만났어. 더울 때는 산책이라도 하지 않으면 숙직도 힘들겠지요 하고 교장이 내 산책을 칭찬하던데」 하고 말하고, 귀찮아서 얼른 학교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니 해는 곧 저문다. 저문 뒤 두 시간쯤은 소사를 숙직실로 불러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도 싫증이 나서 잠은 안 와도 자리에 들자 싶어 잠옷으로 갈아입고 모기장을 걷고 빨간 담요를 걷어차고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반듯이 누웠다. 내가 잘 때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건 어려서부터의 버릇이다. 나쁜 버릇이라고 오가와마치 하숙에 있을 때 아래층에 있던 법률학교 학생이 불평을 해 온 적이 있다. 법률 학생이란 것들은 약한 주제에 유난히 말이 청산유수라 어리석은 소리를 길게 늘어놓기에, 잘 때 쿵쿵 소리가 나는 건 내 엉덩이가 나쁜 게 아니다. 하숙 건물이 엉성한 거다. 따질 거면 하숙에 가서 따지라고 한 방 먹여 주었다. 이 숙직실은 이 층이 아니니 아무리 쿵 하고 쓰러져도 상관없다. 될 수 있는 대로 기세 좋게 쓰러지지 않으면 잔 것 같지가 않다. 아아 상쾌하다 하고 다리를 쭉 뻗으니 뭔가 두 다리에 달라붙었다. 까슬까슬해서 벼룩 같지도 않으니 이게 뭐냐 하고 놀라 다리를 두세 번 담요 속에서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까슬까슬 닿던 것이 갑자기 불어나서 정강이에 대여섯 군데, 넓적다리에 두세 군데, 엉덩이 밑에서 물컹 짓뭉갠 게 하나, 배꼽께까지 뛰어오른 게 하나 ― 드디어 놀랐다. 얼른 일어나 담요를 확 뒤로 던지니 이불 속에서 방아깨비가 오륙십 마리 튀어나왔다. 정체를 모를 때는 다소 으스스했지만, 방아깨비로 판명이 나고 보니 갑자기 화가 났다. 방아깨비 주제에 사람을 놀래다니, 어떻게 되나 보자 하고 대뜸 베개를 들어 두세 번 내리쳤지만 상대가 너무 작아서 기세 좋게 던지는 데 비해 효과가 없다. 할 수 없어 다시 이불 위에 앉아, 대청소 때 멍석을 말아 다다미를 두드리듯이 그 언저리를 마구 두드렸다. 방아깨비가 놀란 데다 베개 바람에 뛰어오르니까 내 어깨며 머리며 코끝에 달라붙거나 부딪치거나 한다. 얼굴에 붙은 놈은 베개로 때릴 수 없으니 손으로 움켜쥐고 죽을힘을 다해 내던진다. 분하게도 아무리 힘을 써도 부딪치는 데가 모기장이라 흐늘흐늘 움직일 뿐 조금도 손맛이 없다. 방아깨비는 내던져진 채로 모기장에 매달려 있다. 죽지도 않는다. 겨우 삼십 분쯤 걸려 방아깨비를 해치웠다. 비를 가져와 방아깨비 시체를 쓸어 냈다. 소사가 와서 무슨 일이냐기에, 무슨 일이고 뭐고 있냐, 방아깨비를 이불 속에 기르는 놈이 어느 나라에 있냐. 얼간이 같으니. 하고 야단쳤더니 저는 모릅니다 하고 변명했다. 모릅니다로 끝나냐 하고 비를 툇마루로 내던졌더니 소사는 겁먹은 얼굴로 비를 메고 돌아갔다.

나는 곧 기숙생을 셋쯤 대표로 불러냈다. 그랬더니 여섯이 나왔다. 여섯이든 열이든 상관없다. 잠옷 바람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담판을 시작했다.

「왜 방아깨비 따위를 내 이불 속에 넣었냐」

「방아깨비가 뭐래유」 하고 맨 앞의 하나가 말했다. 유난히 침착하게 구는 놈이다. 이 학교는 교장만이 아니라 학생까지 빙빙 꼬인 말을 쓰는 모양이다.

「방아깨비를 모르냐, 모르면 보여 주마」 하고 말했지만 공교롭게 쓸어 내 버려서 한 마리도 없다. 다시 소사를 불러 「아까 그 방아깨비를 가져와」 했더니 「벌써 쓰레기장에 버렸습니다만, 주워 올까요」 하고 물었다. 「응 당장 주워 와」 하니 소사는 서둘러 뛰어나갔는데, 이윽고 종이 위에 열 마리쯤 얹어 와서 「참 죄송합니다만, 공교롭게 밤이라 이것밖에 안 보입니다. 내일이 되면 더 주워 오겠습니다」 한다. 소사까지 바보다. 나는 방아깨비 하나를 학생들에게 보이며 「방아깨비란 이거다, 큰 덩치를 해 가지고 방아깨비를 모르다니 이게 뭐냐」 했더니 맨 왼쪽에 있던 얼굴 둥근 놈이 「그건 메뚜기유」 하고 건방지게 나를 되받아쳤다. 「제기랄, 메뚜기나 방아깨비나 같은 거다. 무엇보다 선생을 붙잡고 유, 유가 뭐냐. 유자는 차로나 마시는 거지」 하고 거꾸로 되받아쳐 주었더니 「유하고 유자는 달러유」 했다. 끝까지 유를 쓰는 놈이다.

「메뚜기든 방아깨비든 왜 내 이불 속에 넣었냐. 내가 언제 방아깨비를 넣어 달라고 부탁했냐」

「아무도 안 넣었는디유」

「안 넣은 게 어떻게 이불 속에 있냐」

「메뚜기는 따뜻한 데를 좋아허니께, 아마 혼자 들어가셨겄지유」

「바보 소리 마라. 방아깨비가 혼자 들어가시다니 ― 방아깨비한테 들어가셔져서 되겠냐. ― 자 왜 이런 장난을 했는지 말해」

「말하라구 해두, 안 넣은 걸 설명할 수가 없잖유」

쩨쩨한 놈들이다. 제가 한 짓을 제 입으로 말하지도 못할 거면 애초에 안 하는 게 낫다. 증거만 안 나오면 시치미를 떼려고 뻔뻔하게 버티고 있다. 나도 중학교 다닐 때는 장난을 좀 쳤다. 그러나 누가 했냐고 물었을 때 꽁무니를 빼는 비겁한 짓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건 한 거고 안 한 건 안 한 거다. 나 같은 건 아무리 장난을 쳐도 깨끗하다. 거짓말을 해서 벌을 피할 거라면 처음부터 장난 따위 치겠나. 장난과 벌은 붙어 다니는 거다. 벌이 있으니까 장난도 기분 좋게 칠 수 있다. 장난만 치고 벌은 사양하겠다는 천한 근성이 어느 나라에 유행하는 줄 아나. 돈은 빌리지만 갚는 건 사양하겠다는 무리는 다 이런 놈들이 졸업해서 하는 짓이 틀림없다. 대체 중학교에 무엇 하러 들어와 있는 거냐. 학교에 들어와서 거짓말을 하고 얼버무리고 뒤에서 좀스럽게 건방진 못된 장난을 하고, 그러고서 큰 낯짝으로 졸업하면 교육을 받은 줄로 착각하고 있다. 말이 안 통하는 졸병들이다.

나는 이런 썩은 속을 가진 놈들과 담판하는 게 속이 뒤집혀서 「그렇게까지 말해도 모르겠거든 안 들어도 된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점잖은 것과 천한 것도 가릴 줄 모르다니 딱하다」 하고 여섯을 쫓아 버렸다. 나는 말씨나 몸가짐은 그다지 점잖지 않지만 마음은 이놈들보다 훨씬 점잖은 셈이다. 여섯은 유유히 물러갔다. 겉으로만 보면 교사인 나보다 훨씬 훌륭해 보인다. 실은 침착한 만큼 더 나쁘다. 나에게는 도저히 이만한 배짱이 없다.

그러고서 다시 자리에 들어 누웠더니, 아까 소동 때문에 모기장 안이 앵앵 울리고 있다. 촛불을 켜서 한 마리씩 태우는 귀찮은 짓은 못 하겠으니, 모기장 고리를 풀어 길게 개어 가지고 방 안에서 가로세로 열십자로 휘둘렀더니 고리가 날아와 손등을 호되게 때렸다. 세 번째로 자리에 들었을 때는 좀 가라앉았지만 좀처럼 잠이 안 온다. 시계를 보니 열 시 반이다. 생각해 보면 성가신 데로 왔다. 대체 중학교 선생이란 어디를 가도 이런 것들을 상대해야 한다면 딱한 노릇이다. 용케 선생이 동나지 않는다. 어지간히 참을성 많은 목석들이 되는 거겠지. 나로서는 도저히 못 해 먹겠다. 그걸 생각하면 기요 같은 사람은 우러를 만하다. 배운 것도 없고 신분도 없는 할멈이지만 사람으로서는 아주 귀하다. 여태는 그렇게 신세를 지고도 딱히 고맙다고도 생각지 않았는데, 이렇게 혼자 먼 고장에 와 보니 비로소 그 친절을 알겠다. 에치고의 조릿대 엿이 먹고 싶다면 일부러 에치고까지 사러 가서 먹여 주어도 먹여 줄 만한 값어치는 충분히 있다. 기요는 나를 욕심 없고 곧은 성품이라고 칭찬하지만, 칭찬받는 나보다 칭찬하는 본인 쪽이 훌륭한 사람이다. 어쩐지 기요가 보고 싶어졌다.

기요 생각을 하며 뒤척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머리 위에서, 수로 치면 서른 마흔은 될까, 이 층이 무너질 만큼 쿵, 쿵, 쿵 하고 박자를 맞춰 마룻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발소리에 걸맞은 큰 함성이 일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하고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는 순간, 옳거니 아까 앙갚음으로 학생들이 날뛰는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제가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말해 버리기 전에는 죄는 안 사라지는 법이다. 잘못한 건 너희가 알고 있겠지. 본래라면 자고 나서 뉘우치고 내일 아침에라도 사과하러 오는 게 도리다. 설령 사과는 안 하더라도 황송해서 얌전히 자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소동은 뭐냐. 기숙사를 지어 놓고 돼지를 기르는 것도 아닐 텐데. 미친 짓도 적당히 해라. 어떻게 되나 보자 하고 잠옷 바람으로 숙직실을 뛰쳐나가 계단을 세 걸음 반에 이 층까지 뛰어올랐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여태 머리 위에서 틀림없이 쿵쾅쿵쾅 날뛰던 것이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져, 사람 소리는커녕 발소리도 안 나게 되었다. 이건 묘하다. 남포는 이미 꺼 놓았으니 어두워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똑똑히 모르겠지만, 사람이 있고 없고는 기척으로도 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뚫린 복도에는 쥐 한 마리 숨어 있지 않다. 복도 끝에서 달빛이 비쳐 저 멀리가 아슬아슬하게 밝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꿈을 잘 꾸는 버릇이 있어서 꿈결에 벌떡 일어나 알아듣지 못할 잠꼬대를 하다 남에게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잦다. 열예닐곱 때 다이아몬드를 줍는 꿈을 꾼 밤에는 부스스 일어나 곁에 있던 형에게 방금 그 다이아몬드 어떻게 했냐고 몹시 다그쳐 물었을 정도다. 그때는 사흘쯤 온 집안의 웃음거리가 되어 크게 혼났다. 어쩌면 지금 것도 꿈일지 모른다. 그러나 틀림없이 날뛰었는데, 하고 복도 한가운데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으니, 달빛이 비치는 저쪽 끝에서 하나 둘 셋 와, 하고 서른 마흔 명의 소리가 한데 뭉쳐 울렸나 싶더니, 아까처럼 박자를 맞춰 다들 마룻바닥을 굴렀다. 그것 봐라 꿈이 아니다, 역시 사실이다. 조용히 해, 한밤중이다, 하고 이쪽도 지지 않을 만한 소리를 내며 복도를 저쪽으로 달려갔다. 내가 가는 길은 어둡고 다만 끝에 보이는 달빛이 과녁이다. 내가 달려서 네 미터나 왔나 싶은데 복도 한가운데서 단단하고 큰 것에 정강이를 부딪혀, 아야 소리가 머리에 울리는 사이에 몸은 털썩 앞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 망할 놈 하고 일어나 보았지만 달릴 수가 없다. 마음은 급한데 다리만은 말을 안 듣는다. 답답해서 한 발로 뛰어왔더니, 벌써 발소리도 사람 소리도 조용해져 괴괴하다. 아무리 사람이 비겁하다 해도 이렇게 비겁할 수는 없다. 영락없는 돼지다. 이렇게 된 이상 숨어 있는 놈을 끌어내 사과를 받을 때까지는 안 물러선다고 마음먹고 침실 하나를 열어 안을 살펴보려 했지만 안 열린다. 자물쇠를 걸었는지 책상이나 무엇을 쌓아 기대어 놓았는지 밀어도 밀어도 절대 안 열린다. 이번에는 마주 보는 북쪽 방을 해 보았다. 안 열리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문을 열고 안에 있는 놈을 잡아 주려고 조바심을 내고 있으니, 또 동쪽 끝에서 함성과 발 구르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이놈들 짜고서 동쪽 서쪽이 맞장구치며 나를 바보로 만들 속셈이구나 싶었지만 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정직하게 털어놓자면 나는 용기에 비해 꾀가 모자란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결코 질 생각은 없다. 이대로 넘어가서는 내 체면에 관계된다. 도쿄 토박이는 기개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건 분하다. 숙직을 서다 코흘리개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손쓸 도리가 없어 할 수 없이 울며 잠들었다고 여겨져서는 평생의 수치다. 이래 봬도 본디 하타모토다. 하타모토의 뿌리는 세이와 겐지로 다다노 미쓰나카의 후손이다. 이런 촌놈들과는 태생부터 다르다. 다만 꾀가 없는 게 아까울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게 곤란할 뿐이다. 곤란하다고 질까 보냐. 정직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다. 세상에 정직이 이기지 않으면 달리 이길 게 있는지 생각해 봐라. 오늘 밤에 못 이기면 내일 이긴다. 내일 못 이기면 모레 이긴다. 모레 못 이기면 하숙에서 도시락을 가져오게 해서 이길 때까지 여기 있겠다. 나는 이렇게 마음먹었으므로 복도 한가운데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기가 앵앵 왔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까 부딪친 정강이를 쓰다듬어 보니 어쩐지 미끈미끈하다. 피가 나는 거겠지. 피 따위 나고 싶으면 마음대로 나라. 그러다 아까부터의 피로가 나와 그만 깜빡 잠들어 버렸다. 뭔가 시끄러워서 눈을 떴을 때는 앗 제기랄 당했다 하고 벌떡 일어났다. 내가 앉아 있던 오른쪽 문이 반쯤 열려 있고 학생 둘이 내 앞에 서 있다. 나는 정신이 들어 흠칫한 순간 내 코앞에 있는 학생의 다리를 움켜쥐고 힘껏 확 잡아당겼더니 그놈은 쿵 하고 벌렁 넘어졌다. 꼴좋다. 남은 하나가 잠깐 허둥대는 틈에 덤벼들어 어깨를 누르고 두세 번 쥐어박았더니 어리둥절해서 눈을 끔벅거렸다. 자 내 방까지 와라 하고 끌고 가니 겁쟁이인지 두말없이 따라왔다. 날은 벌써 밝아 있다.

내가 숙직실로 데려온 놈을 다그치기 시작하자, 돼지는 때려도 두들겨도 돼지라 그저 몰러유로 끝까지 버틸 속셈인지 결코 자백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하나 오고 둘 오고 차츰 이 층에서 숙직실로 모여든다. 보니 다들 졸린 듯 눈두덩이 부어 있다. 쩨쩨한 놈들이다. 하룻밤쯤 안 잤다고 그런 낯짝을 해 가지고 사내라고 할 수 있나. 세수라도 하고 따지러 오라고 해 주었지만 아무도 세수하러 가지 않는다.

나는 쉰 명 남짓을 상대로 한 시간쯤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불쑥 너구리가 나타났다. 나중에 들으니 소사가 학교에 소동이 났다고 일부러 알리러 갔단다. 이까짓 일에 교장을 부르다니 너무 기개가 없다. 그러니까 중학교 소사 따위나 하고 있는 거다.

교장은 한차례 내 설명을 들었다. 학생들 말도 잠깐 들었다. 나중에 처분할 때까지는 여태처럼 학교에 나와라. 어서 세수하고 아침을 먹지 않으면 시간에 늦을 테니 서둘러라, 하고 기숙생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미지근한 처사다. 나라면 그 자리에서 기숙생을 몽땅 퇴학시켜 버린다. 이런 느긋한 짓을 하니까 학생들이 숙직을 바보로 아는 거다. 게다가 나를 향해, 당신도 필시 걱정하시느라 피곤하시겠지요, 오늘은 수업을 안 하셔도 됩니다, 하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조금도 걱정 안 합니다. 이런 일이 밤마다 있어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수업은 하겠습니다, 하룻밤쯤 안 자서 수업을 못 할 정도라면 받은 월급을 학교 쪽에 돌려드리겠습니다」 교장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참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렇지만 얼굴이 꽤 부었어요, 하고 일러 주었다. 과연 어쩐지 좀 무거운 느낌이 든다. 게다가 온통 가렵다. 모기가 어지간히 문 게 틀림없다. 나는 얼굴 여기저기를 박박 긁으며, 얼굴은 아무리 부어도 입은 틀림없이 놀릴 수 있으니 수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교장은 웃으면서 꽤 기운이 좋군요, 하고 칭찬했다. 실을 말하면 칭찬한 게 아니겠지, 놀린 거겠지.

5장

자네 낚시하러 안 가겠나, 하고 빨간 셔츠가 나에게 물었다. 빨간 셔츠는 으스스할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도무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다. 남자라면 남자다운 목소리를 내야지. 더구나 대학 졸업생 아닌가. 물리학교를 나온 나도 이만한 목소리는 나오는데, 문학사가 이래서야 꼴사납다.

나는 글쎄요, 하고 좀 내키지 않는 대답을 했더니, 자네 낚시해 본 적 있나, 하고 무례한 걸 묻는다. 별로 없지만 어릴 때 고우메 낚시터에서 붕어를 세 마리 낚은 적이 있다. 그리고 가구라자카 비샤몬 잿날에 여덟 치쯤 되는 잉어를 바늘에 걸어서 됐다 싶었는데 첨벙 떨어뜨리고 말았는데, 이건 지금 생각해도 아깝다고 했더니, 빨간 셔츠는 턱을 앞으로 쑥 내밀고 호호호호 웃었다. 뭐 그렇게 거드름 피우며 웃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럼 아직 낚시 맛을 모르겠군요. 원한다면 좀 전수해 드리지요」 하고 아주 우쭐한다. 누가 전수를 받을까 보냐. 대체 낚시나 사냥을 하는 무리는 다 몰인정한 사람들뿐이다. 몰인정하지 않고서야 살생을 하고 좋아할 리가 없다. 물고기나 새나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살아 있는 편이 편한 건 뻔하다. 낚시나 사냥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다면 모를까, 아무 부족 없이 살면서 산 것을 죽이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는 건 사치스러운 이야기다. 이렇게 생각했지만 저쪽은 문학사인 만큼 말을 잘하니 따져서는 당해 낼 수 없겠다 싶어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이 선생이 나를 항복시킨 줄로 착각하고, 당장 전수해 드리지요. 한가하시면 오늘 어떻습니까, 같이 가시지. 요시카와 군하고 둘뿐이면 쓸쓸하니 오시게, 하고 자꾸 권한다. 요시카와 군이란 미술 선생으로 바로 그 알랑쇠다. 이 알랑쇠는 무슨 속셈인지 빨간 셔츠네 집에 아침저녁으로 드나들고 어디든 따라다닌다. 아주 동료가 아니다. 주인과 종 같다. 빨간 셔츠가 가는 데라면 알랑쇠는 꼭 가게 되어 있으니 이제 와서 놀랄 것도 없지만, 둘이 가면 될 것을 왜 무뚝뚝한 나에게까지 말을 걸었을까. 아마 거만한 낚시 취미로 제가 낚는 걸 나에게 뽐내려는 속셈이나 뭐 그런 걸로 꾄 게 틀림없다. 그런 걸로 뽐냄을 당할 내가 아니다. 참치를 두세 마리 낚는다 한들 끄떡이나 할까 보냐. 나도 사람이다, 아무리 서툴러도 줄만 내리면 무언가 걸리겠지, 여기서 내가 안 가면 빨간 셔츠니까 서툴러서 안 가는 거지 싫어서 안 가는 게 아니라고 넘겨짚을 게 틀림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으므로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서 학교를 파하고 일단 집에 돌아가 채비를 하고 정거장에서 빨간 셔츠와 알랑쇠를 만나 바닷가로 갔다. 사공은 하나고, 배는 가늘고 긴 것이 도쿄 언저리에서는 본 적도 없는 모양이다. 아까부터 배 안을 둘러보는데 낚싯대가 하나도 안 보인다. 낚싯대 없이 낚시를 할 수 있나, 어쩔 셈일까 하고 알랑쇠에게 물으니, 먼바다 낚시에는 대를 안 씁니다요, 줄만이올시다요, 하고 턱을 쓰다듬으며 전문가 같은 소리를 했다. 이렇게 되받아칠 줄 알았으면 잠자코 있을걸 그랬다.

사공은 느릿느릿 젓고 있지만 숙련이란 무서운 것이라, 돌아보니 바닷가가 조그맣게 보일 만큼 벌써 나와 있다. 고하쿠지 오층탑이 숲 위로 삐죽 솟아 바늘처럼 뾰족하다. 건너편을 보니 아오시마가 떠 있다. 이건 사람이 안 사는 섬이란다. 잘 보니 돌과 소나무뿐이다. 과연 돌과 소나무뿐이면 살 수가 없겠다. 빨간 셔츠는 자꾸 바라보며 좋은 경치라고 하고 있다. 알랑쇠는 절경이올시다요, 하고 있다. 절경인지 뭔지 모르지만 기분 좋은 건 틀림없다. 탁 트인 바다 위에서 바닷바람을 쐬는 건 약이라고 생각했다. 유난히 배가 고프다. 「저 소나무를 보게, 줄기가 곧고 위가 우산처럼 퍼져서 터너의 그림에 있을 법하군」 하고 빨간 셔츠가 알랑쇠에게 말하자, 알랑쇠는 「정말 터너로군요. 저 굽은 품이라니 이를 데가 없군요. 터너하고 똑같습니다요」 하고 아는 체한다. 터너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안 물어도 곤란할 게 없으니 잠자코 있었다. 배는 섬을 오른쪽으로 끼고 빙 돌았다. 물결은 전혀 없다. 이래서야 바다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판판하다. 빨간 셔츠 덕분에 몹시 유쾌하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섬 위에 올라가 보고 싶어서, 저 바위 있는 데에는 배를 못 댑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못 댈 것도 없지만 낚시를 하려면 너무 기슭이면 안 된다고 빨간 셔츠가 반대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알랑쇠가, 어떻습니까 교감 선생님, 이제부터 저 섬을 터너 섬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겠습니까요, 하고 쓸데없는 제안을 했다. 빨간 셔츠는 그거 재미있군, 우리는 이제부터 그렇게 부르세, 하고 찬성했다. 이 우리 속에 나도 들어 있다면 성가시다. 나에게는 아오시마로 충분하다. 저 바위 위에 어떻습니까, 라파엘로의 마돈나를 세워 두면. 좋은 그림이 될 텐데요, 하고 알랑쇠가 말하자, 마돈나 이야기는 그만두지 않겠나 호호호호, 하고 빨간 셔츠가 으스스한 웃음을 웃었다. 뭐 아무도 없으니 괜찮습니다요, 하고 잠깐 내 쪽을 보더니 일부러 얼굴을 돌리고 히죽히죽 웃었다. 나는 어쩐지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마돈나든 작은 나리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 마음대로 세워 두면 되겠지만, 남이 모르는 말을 해 놓고, 몰라서 물어봐도 괜찮습니다, 하는 식으로 군다. 천한 짓이다. 그러고서 당사자는 저도 도쿄 토박이올시다요, 하고 말한다. 마돈나라는 건 아마 빨간 셔츠의 단골 기생 별명인가 뭔가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단골 기생을 무인도 소나무 밑에 세워 놓고 바라본다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걸 알랑쇠가 유화로라도 그려서 전람회에 내면 좋겠다.

이 언저리가 좋겠다고 사공은 배를 멈추고 닻을 내렸다. 몇 길이나 되나, 하고 빨간 셔츠가 물으니 여섯 길쯤이란다. 여섯 길쯤이면 도미는 어렵겠군, 하고 빨간 셔츠는 줄을 바다에 던져 넣었다. 대장은 도미를 낚을 작정인 모양이다, 대담하다. 알랑쇠는, 뭐 교감 선생님 솜씨라면 걸립니다요. 게다가 바다가 잔잔하니까요, 하고 아첨을 하며 이쪽도 줄을 풀어 던져 넣는다. 어쩐지 끝에 추 같은 납이 달랑 달려 있을 뿐이다. 찌가 없다. 찌 없이 낚시를 하는 건 온도계 없이 온도를 재는 것과 같다. 나로서는 도저히 못 하겠다 싶어 보고 있으니, 자 자네도 해 보게, 줄은 있나, 하고 묻는다. 줄은 남아돌 만큼 있지만 찌가 없습니다, 했더니, 찌가 없으면 낚시를 못 하는 건 풋내기일세. 이렇게 말이야, 줄이 물 밑바닥에 닿았을 무렵 뱃전에서 집게손가락으로 호흡을 재는 걸세, 물면 곧 손에 느껴지지. ― 옳지 왔다, 하고 선생이 갑자기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하기에 무언가 걸렸나 했더니 아무것도 안 걸렸다, 미끼가 없어졌을 뿐이다. 꼴좋다. 교감 선생님, 아까운 일을 하셨군요, 방금 그건 틀림없이 대물이었을 텐데요, 교감 선생님 솜씨로도 놓치시다니 오늘은 방심을 못 하겠습니다요. 하지만 놓치셔도 뭐지요. 찌하고 눈싸움하는 무리보다야 낫지요. 꼭 브레이크 없이는 자전거를 못 타는 것과 같은 정도니까요, 하고 알랑쇠는 묘한 소리만 지껄인다. 어지간히 한 대 갈겨 줄까 생각했다. 나도 사람이다, 교감 혼자 전세 낸 바다도 아닐 텐데. 넓은 데다. 가다랑어 한 마리쯤은 의리로라도 걸려 주겠지 하고, 퐁당 추와 줄을 던져 넣고 대충 손끝으로 놀리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어쩐지 까딱까딱 줄에 닿는 것이 있다. 나는 생각했다. 이건 물고기가 틀림없다. 살아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까딱일 리가 없다. 됐다, 걸렸다 하고 쭉쭉 끌어당겼다. 어라 걸렸습니까, 후생가외로군요, 하고 알랑쇠가 놀리는 사이에 줄은 벌써 거의 다 당겨져 다섯 자쯤밖에 물에 잠겨 있지 않다. 뱃전에서 들여다보니 금붕어 같은 줄무늬가 있는 물고기가 줄에 붙어서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리며 손을 따라 떠오른다. 재미있다. 물가에서 올릴 때 첨벙 뛰는 바람에 내 얼굴은 바닷물투성이가 되었다. 겨우 붙잡아 바늘을 빼려 하는데 좀처럼 안 빠진다. 붙잡은 손은 미끈미끈하다. 몹시 기분이 나쁘다. 귀찮아서 줄을 휘둘러 배 바닥에 내동댕이쳤더니 곧 죽어 버렸다. 빨간 셔츠와 알랑쇠는 놀라서 보고 있다. 나는 바닷물에 손을 첨벙첨벙 씻고 코끝에 대 보았다. 아직 비린내가 난다.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무엇이 낚이든 물고기는 쥐고 싶지 않다. 물고기도 쥐이고 싶지 않겠지. 얼른 줄을 감아 버렸다.

첫 공은 장하지만 고루키로군요, 하고 알랑쇠가 또 건방진 소리를 하자, 고루키라니 러시아 문학가 같은 이름이군, 하고 빨간 셔츠가 멋을 부렸다. 그렇군요, 영락없는 러시아 문학가군요, 하고 알랑쇠는 곧 맞장구를 친다. 고리키가 러시아 문학가면 마루키는 시바의 사진사고, 쌀 열리는 나무는 목숨의 은인이겠지. 대체 이 빨간 셔츠는 나쁜 버릇이 있다. 누구를 붙잡든 가타카나로 쓰는 서양 사람 이름을 늘어놓고 싶어 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전문이 있는 법이다. 나 같은 수학 교사가 고리키인지 수레꾼인지 짐작이나 하나, 좀 삼가면 좋겠다. 말할 거면 프랭클린 자서전이라든가 푸싱 투 더 프런트라든가, 나라도 아는 이름을 쓰면 된다. 빨간 셔츠는 이따금 「제국 문학」인가 하는 새빨간 잡지를 학교에 가져와서 고마운 듯 읽고 있다. 고슴도치에게 물어보니 빨간 셔츠의 가타카나는 다 그 잡지에서 나온단다. 「제국 문학」도 죄 많은 잡지다.

그러고서 빨간 셔츠와 알랑쇠는 열심히 낚았는데, 한 시간쯤 사이에 둘이서 열대여섯 마리를 올렸다. 우스운 건 낚이는 것마다 죄다 고루키뿐이다. 도미 같은 건 약에 쓰려도 없다. 오늘은 러시아 문학이 대박이로군, 하고 빨간 셔츠가 알랑쇠에게 말하고 있다. 선생님 솜씨로 고루키니까 저 같은 게 고루키인 건 어쩔 수 없지요. 당연하지요, 하고 알랑쇠가 대답하고 있다. 사공에게 물으니 이 잔고기는 가시가 많고 맛이 없어서 도저히 못 먹는단다. 다만 거름으로는 쓸 수 있단다. 빨간 셔츠와 알랑쇠는 열심히 거름을 낚고 있는 것이다. 딱하기 짝이 없다. 나는 한 마리로 질렸으므로 배 바닥에 반듯이 누워 아까부터 넓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낚시를 하느니 이편이 훨씬 멋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작은 소리로 무언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잘 안 들린다, 또 듣고 싶지도 않다. 나는 하늘을 보면서 기요 생각을 하고 있다. 돈이 있어서 기요를 데리고 이런 예쁜 데로 놀러 오면 퍽 유쾌하겠지. 아무리 경치가 좋아도 알랑쇠 같은 것과 같이 있으면 시시하다. 기요는 쭈글쭈글 주름투성이 할멈이지만 어떤 데에 데리고 나가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알랑쇠 같은 건 마차를 타든 배를 타든 료운카쿠에 오르든 도저히 곁에 둘 수가 없다. 내가 교감이고 빨간 셔츠가 나였다면 역시 나에게 굽신굽신 아첨을 하고 빨간 셔츠를 놀릴 게 틀림없다. 도쿄 토박이는 경박하다고 하는데 과연 이런 게 시골을 돌아다니며 저는 도쿄 토박이올시다요, 하고 되풀이한다면, 경박은 도쿄 토박이고 도쿄 토박이는 경박이라고 시골 사람들이 생각할 게 뻔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어쩐지 두 사람이 킥킥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 사이로 무언가 말하는데 띄엄띄엄이라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네? 글쎄요……」 「……정말입니다…… 모르니까요…… 죄로군요」 「설마……」 「방아깨비를…… 정말이라니까요」

나는 다른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방아깨비라는 알랑쇠의 말을 들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알랑쇠는 무엇 때문인지 방아깨비라는 말만 유난히 힘을 주어 또렷이 내 귀에 들어오게 하고, 그 뒤는 일부러 흐려 버렸다. 나는 꼼짝 않고 여전히 듣고 있었다.

「또 그 홋타가……」 「그럴지도 모르지……」 「튀김…… 하하하하하」 「……선동해서……」 「경단도요?」

말은 이렇게 띄엄띄엄이지만 방아깨비니 튀김이니 경단이니 하는 데로 미루어 보면 아무래도 내 이야기를 소곤거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야기할 거면 좀 더 큰 소리로 하면 되고, 또 소곤거릴 거면 나 같은 건 꾀지 않으면 된다. 밉살스러운 무리다. 방아깨비든 가죽신이든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게 아니다. 교장이 일단 맡겨 두라고 했으니 너구리 얼굴을 봐서 지금은 참고 있는 거다. 알랑쇠 주제에 쓸데없는 비평을 한다. 붓이나 빨고 물러나 있으면 된다. 내 일은 조만간 나 혼자 해치워 보일 테니 상관없지만, 또 그 홋타가라든가 선동해서라든가 하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홋타가 나를 선동해서 소동을 크게 만들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홋타가 학생들을 선동해서 나를 괴롭혔다는 건지 방향을 알 수 없다. 푸른 하늘을 보고 있으니 햇빛이 차츰 약해지고 조금은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향 연기 같은 구름이 맑게 비치는 바닥 위를 조용히 뻗어 가나 싶더니 어느새 그 바닥 깊이로 흘러들어 옅게 안개를 드리운 것처럼 되었다.

이제 돌아갈까, 하고 빨간 셔츠가 생각난 듯 말하자, 예 마침 때가 됐군요. 오늘 밤 마돈나 님을 만나십니까, 하고 알랑쇠가 말한다. 빨간 셔츠는 바보 소리 하면 안 되네, 오해가 생기네, 하고 뱃전에 기대 있던 몸을 조금 일으킨다. 에헤헤헤헤 괜찮습니다요. 들어도…… 하고 알랑쇠가 돌아보았을 때, 나는 접시 같은 눈을 알랑쇠 머리 위로 정통으로 퍼부어 주었다. 알랑쇠는 눈부신 듯 몸을 뒤로 젖히고, 야, 이거 항복이올시다, 하고 목을 움츠리며 머리를 긁었다. 이 무슨 건방진 놈인가.

배는 조용한 바다를 기슭으로 저어 돌아간다. 자네 낚시는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군, 하고 빨간 셔츠가 묻기에, 예 누워서 하늘을 보는 편이 좋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피우던 궐련을 바닷속에 던져 넣었더니 치익 소리가 나고 노에 헤쳐진 물결 위를 흔들리며 떠갔다. 「자네가 와서 학생들도 크게 기뻐하고 있으니 분발해서 해 주게」 하고 이번에는 낚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을 꺼냈다.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을걸요」 「아니, 인사치레가 아닐세. 정말 기뻐하고 있네, 그렇지 요시카와 군」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지요. 난리지요」 하고 알랑쇠는 히죽히죽 웃었다. 이놈이 하는 말은 하나하나 비위에 거슬리니 묘하다. 「그렇지만 자네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하네」 하고 빨간 셔츠가 말하기에 「어차피 위험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위험은 각오했습니다」 하고 말해 주었다. 실제로 나는 파면을 당하든지 기숙생을 몽땅 사과시키든지 둘 중 하나로 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붙잡을 데도 없지만 ― 실은 나도 교감으로서 자네를 위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니 나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네」 「교감 선생님은 정말 자네에게 호의를 갖고 계시다네. 나도 미력하나마 같은 도쿄 토박이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계셔 주시기를 바라며 서로 힘이 되자고, 이래 봬도 뒤에서 애쓰고 있다네」 하고 알랑쇠가 사람다운 말을 했다. 알랑쇠 신세를 질 바에야 목을 매고 죽어 버리겠다.

「그래서 말이네, 학생들은 자네가 온 걸 크게 반기고 있지만 거기에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네. 자네도 화나는 일이 있겠지만 여기가 참을 고비라 여기고 견뎌 주게. 결코 자네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

「이런저런 사정이라니 어떤 사정입니까」

「그게 좀 복잡하네만 뭐 차차 알게 되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될 걸세, 그렇지 요시카와 군」

「예 퍽 복잡하지요. 하루아침에는 도저히 모르지요. 하지만 차차 알게 됩니다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지요」 하고 알랑쇠는 빨간 셔츠와 똑같은 소리를 한다.

「그런 귀찮은 사정이라면 안 들어도 됩니다만, 선생님 쪽에서 먼저 꺼내셨으니 여쭤보는 겁니다」

「그거 지당하네. 이쪽에서 말을 꺼내 놓고 뒤를 잇지 않는 건 무책임하지. 그럼 이것만은 말해 두지요. 당신은 실례지만 아직 학교를 갓 졸업했고 교사는 처음인, 그런 경험이네. 그런데 학교라는 데는 퍽 정실이 얽힌 데라 그렇게 학생처럼 담백하게는 안 되거든요」

「담백하게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 자네는 그렇게 솔직하니까 아직 경험이 모자라다는 걸세……」

「어차피 경험은 모자랄 겁니다. 이력서에도 써 두었지만 스물세 살 넉 달이니까요」

「자, 그러니까 뜻밖의 데서 파고듦을 당하는 일이 있는 걸세」

「정직하게 하고 있으면 누가 파고들어도 무섭지 않습니다」

「물론 무섭지는 않네, 무섭지는 않지만 파고듦을 당하지. 실제로 자네 전임자가 당했으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세」

알랑쇠가 조용해졌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돌아보니 어느새 고물 쪽에서 사공과 낚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알랑쇠가 없으니 훨씬 이야기하기 편해졌다.

「제 전임자가 누구에게 파고듦을 당했습니까」

「누구라고 짚으면 그 사람 명예에 관계되니 말할 수 없네. 또 뚜렷한 증거가 없는 일이니 말하면 이쪽 잘못이 되지. 아무튼 모처럼 자네가 왔으니 여기서 실패하면 우리도 자네를 부른 보람이 없네. 부디 조심해 주게」

「조심하라고 하셔도 이보다 더 조심할 수는 없습니다. 나쁜 짓을 안 하면 되겠지요」

빨간 셔츠는 호호호호 웃었다. 딱히 나는 웃음거리가 될 말을 한 기억은 없다. 오늘 이 순간까지 이게 옳다고 굳게 믿고 있다. 생각해 보면 세상 사람 대부분은 나빠지기를 권하고 있는 것 같다. 나빠지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법이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다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을 보면 도련님이니 애송이니 하고 트집을 잡아 업신여긴다. 그러면 소학교나 중학교에서 거짓말하지 마라, 정직해라 하고 윤리 선생이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 마음먹고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법이라든가, 사람을 믿지 않는 기술이라든가, 사람을 속여 넘기는 꾀를 가르치는 편이 세상을 위해서도 당사자를 위해서도 될 것이다. 빨간 셔츠가 호호호호 웃은 건 내가 단순한 걸 웃은 거다. 단순함이나 솔직함이 웃음거리가 되는 세상이라면 어쩔 수 없다. 기요는 이런 때 결코 웃은 적이 없다. 크게 감탄하며 들었다. 기요 쪽이 빨간 셔츠보다 훨씬 상등이다.

「물론 나쁜 짓을 안 하면 되지만, 저만 나쁜 짓을 안 해도 남이 나쁜 걸 모르면 역시 혼쭐이 날 거요. 세상에는 호탕해 보여도, 담백해 보여도, 친절하게 하숙 주선 따위를 해 주더라도 좀처럼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까……. 꽤 추워졌군. 이제 가을이군요, 바닷가 쪽은 안개로 세피아빛이 되었군. 좋은 경치다. 이봐 요시카와 군 어떤가, 저 바닷가 경치는……」 하고 큰 소리로 알랑쇠를 불렀다. 과연 이건 기막힌 절경이로군요. 시간이 있으면 사생을 할 텐데 아깝군요, 이대로 두기는요, 하고 알랑쇠는 크게 떠든다.

미나토야 이 층에 불이 하나 켜지고 기차 기적이 휘익 울릴 때, 내가 타고 있던 배는 바닷가 모래에 뱃머리를 서걱 박고 멈춰 섰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하고 여주인이 바닷가에 서서 빨간 셔츠에게 인사한다. 나는 뱃전에서 영차 하고 기합을 넣어 바닷가로 뛰어내렸다.

6장

알랑쇠는 딱 질색이다. 이런 놈은 단무지 누름돌을 달아 바다 밑에 가라앉혀 버리는 편이 일본을 위해서다. 빨간 셔츠는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 저건 타고난 목소리를 일부러 꾸며서 저렇게 부드러운 것처럼 보이는 거겠지. 아무리 꾸며도 저 낯짝으로는 틀렸다. 반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마돈나쯤이겠지. 그러나 교감인 만큼 알랑쇠보다 어려운 말을 한다. 집에 돌아와 그놈 말을 생각해 보니 일단 그럴듯한 것 같기도 하다. 똑똑한 말을 안 하니 짐작이 잘 안 가지만, 아무래도 고슴도치가 좋지 않은 놈이니 조심하라는 뜻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똑똑히 잘라 말하면 되지, 사내답지도 않다. 그러고서 그런 나쁜 교사라면 어서 파면시키면 될 것이다. 교감이란 문학사 주제에 배짱이 없다. 뒷말을 하면서도 대놓고 이름을 못 댈 만한 사람이니 겁쟁이가 틀림없다. 겁쟁이는 친절한 법이니 저 빨간 셔츠도 여자 같은 친절한 사람이겠지. 친절은 친절이고 목소리는 목소리니,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친절을 저버리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세상은 알 수 없다. 밥맛없는 놈이 친절하고 마음 맞는 친구가 악당이라니 사람을 놀리는 거다. 아마 시골이라 모든 게 도쿄와 거꾸로 가는 거겠지. 뒤숭숭한 데다. 이러다 불이 얼고 돌이 두부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 고슴도치가 학생들을 선동한다니, 그런 장난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인망이 제일 높은 교사라니까 하려고 들면 웬만한 일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 무엇보다 그렇게 빙 돌아가는 짓을 안 해도 곧바로 나를 붙잡고 싸움을 걸면 품이 덜 드는 거다. 내가 거치적거린다면, 실은 이러이러하다, 거치적거리니 그만둬 달라고 하면 좋을 텐데. 일은 의논하기 나름으로 어떻게든 된다. 저쪽 말이 그럴듯하면 내일이라도 그만둬 주겠다. 여기만 쌀이 나는 것도 아닐 테지. 어느 끝에 가든 길바닥에서 굶어 죽지는 않을 작정이다. 고슴도치도 어지간히 말이 안 통하는 놈이다.

여기 왔을 때 제일 먼저 빙수를 산 건 고슴도치다. 그런 겉과 속이 다른 놈한테 빙수라도 얻어먹어서는 내 체면에 관계된다. 나는 딱 한 그릇밖에 안 먹었으니 일 전 오 리밖에 안 쓰게 했다. 그러나 일 전이든 오 리든 사기꾼의 신세를 져서는 죽을 때까지 기분이 좋지 않다. 내일 학교에 가면 일 전 오 리를 돌려줘 두자. 나는 기요에게 삼 원을 빌렸다. 그 삼 원은 다섯 해가 지난 오늘까지 아직 안 갚았다. 못 갚는 게 아니다. 안 갚는 거다. 기요는 곧 갚겠지 하고 조금이라도 내 주머니를 바라고 있지 않다. 나도 곧 갚아야지 하고 남남 같은 의리를 세울 생각은 없다. 이쪽이 이런 걱정을 하면 할수록 기요 마음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기요의 고운 마음에 흠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안 갚는 건 기요를 짓밟는 게 아니라 기요를 내 반쪽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기요와 고슴도치는 애초에 견줄 것도 못 되지만, 설령 빙수든 감차든 남에게서 은혜를 받고 잠자코 있는 건 상대를 제법 된 사람으로 쳐서 그 사람에게 보이는 호의의 몸짓이다. 제 몫을 내면 그걸로 끝날 일을 마음속으로 고맙다고 은혜를 입는 건 돈으로 살 수 있는 답례가 아니다. 벼슬도 없고 지위도 없어도 한 사람 몫을 하는 독립한 사람이다. 독립한 사람이 머리를 숙이는 건 백만 냥보다 귀한 사례로 여겨야 한다.

나는 이래 봬도 고슴도치에게 일 전 오 리를 쓰게 해서 백만 냥보다 귀한 답례를 한 셈으로 여기고 있다. 고슴도치는 고맙게 여겨야 마땅하다. 그런데 뒤로 돌아가 비열한 짓을 하다니 괘씸한 놈이다. 내일 가서 일 전 오 리를 돌려줘 버리면 빌린 것도 빌려준 것도 없다. 그렇게 해 놓고 싸움을 해 주자.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니 졸려서 쿨쿨 자 버렸다. 이튿날은 생각한 바가 있어서 여느 때보다 일찍 학교에 나가 고슴도치를 기다렸다. 그런데 좀처럼 안 나온다. 끝물 호박이 나온다. 한문 선생이 나온다. 알랑쇠가 나온다. 나중에는 빨간 셔츠까지 나왔는데, 고슴도치 책상 위에는 분필이 한 자루 세로로 누워 있을 뿐 한적하다. 나는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돌려주려고 집을 나설 때부터 목욕값처럼 손바닥에 일 전 오 리를 넣고 학교까지 쥐고 왔다. 나는 손에 땀이 많아서 펴 보니 일 전 오 리가 땀을 흘리고 있다. 땀 흘린 돈을 돌려주면 고슴도치가 무슨 소리를 하겠다 싶어서 책상 위에 놓고 후후 불어 말리고 다시 쥐었다. 그런데 빨간 셔츠가 와서 어제는 실례, 폐가 많았지요, 하기에, 폐는요, 덕분에 배가 고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빨간 셔츠는 고슴도치 책상 위에 팔꿈치를 짚고 그 넓적한 얼굴을 내 코 옆으로 들이대기에 무얼 하나 했더니, 자네 어제 돌아오는 길에 배 안에서 한 이야기는 비밀로 해 주게.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겠지, 했다. 여자 같은 목소리를 내는 만큼 걱정이 많은 사람인 모양이다. 말하지 않은 건 확실하다. 그러나 이제부터 말할 작정으로 벌써 일 전 오 리를 손바닥에 마련해 두고 있을 정도니, 여기서 빨간 셔츠에게 입막음을 당해서는 좀 곤란하다. 빨간 셔츠도 빨간 셔츠다. 고슴도치라고 이름을 짚지 않았다 해도 그만큼 짐작이 가는 수수께끼를 던져 놓고서, 이제 와서 그 수수께끼를 풀면 곤란하다니 교감답지 않은 무책임이다. 본래 같으면 내가 고슴도치와 싸움을 시작해서 불꽃 튀게 겨루는 한복판에 나와 당당히 내 편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한 학교의 교감이고 빨간 셔츠를 입는 뜻도 선다는 거다.

나는 교감에게,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 고슴도치와 담판할 작정이라고 했더니, 빨간 셔츠는 몹시 허둥대며, 자네 그런 무법한 짓을 하면 곤란하네. 나는 홋타 군에 대해 별로 자네에게 아무것도 분명히 말한 기억이 없으니 ― 자네가 만약 여기서 난폭한 짓을 하면 나는 몹시 곤란하네. 자네는 학교에 소동을 일으킬 작정으로 온 건 아니겠지, 하고 묘하게 상식을 벗어난 질문을 하기에, 당연하지요, 월급을 받으면서 소동을 일으키면 학교 쪽에서도 곤란하겠지요, 했다. 그러자 빨간 셔츠는 그럼 어제 일은 자네 참고로만 두고 입 밖에 내지 말아 주게, 하고 땀을 흘리며 부탁하기에, 좋습니다, 저도 곤란하지만 그렇게 선생님이 곤란하시다면 그만두지요, 하고 맡았다. 자네 괜찮겠나, 하고 빨간 셔츠는 다짐을 두었다. 어디까지 여자 같은지 속을 알 수가 없다. 문학사란 다 저런 무리라면 시시한 것이다. 앞뒤가 안 맞는, 논리가 없는 주문을 하고 태연하다. 게다가 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 외람되지만 사내다. 맡은 일을 뒤로 돌아가 뒤집는 치사한 속셈은 안 갖고 있다.

그러자 양옆 책상 주인도 출근해서 빨간 셔츠는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다. 빨간 셔츠는 걸음걸이부터 멋을 부린다. 방 안을 오가는데도 소리를 안 내려고 구두 바닥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소리 안 내고 걷는 게 자랑이 되는 줄은 이때 처음 알았다. 도둑질 연습도 아닐 텐데 보통으로 걸으면 된다. 이윽고 수업 시작 나팔이 울렸다. 고슴도치는 끝내 안 나온다. 할 수 없어 일 전 오 리를 책상 위에 놓고 교실로 나갔다.

수업 사정으로 첫 시간이 좀 늦어져 교무실에 돌아오니 다른 교사들은 다들 책상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슴도치도 어느새 와 있다. 결근인 줄 알았더니 지각한 거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오늘은 자네 덕분에 지각했네. 벌금을 내게, 했다. 나는 책상 위에 있던 일 전 오 리를 내밀며, 이걸 줄 테니 받아 둬라. 지난번 도리초에서 먹은 빙숫값이다, 하고 고슴도치 앞에 놓으니, 무슨 소린가 하고 웃으려다가 내가 뜻밖에 진지하니까, 시시한 농담 말게, 하고 돈을 내 책상 위로 쓸어 돌려보냈다. 어라 고슴도치 주제에 끝까지 사 줄 작정이군.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다. 나는 자네한테 빙수를 얻어먹을 까닭이 없으니 내는 거다. 안 받는 법이 어디 있나」

「그렇게 일 전 오 리가 마음에 걸리면 받아도 좋지만, 왜 생각난 듯이 이제 와서 돌려주는 건가」

「이제 와서든 언제든 돌려준다. 얻어먹는 게 싫으니까 돌려주는 거다」

고슴도치는 차갑게 내 얼굴을 보며 흥 했다. 빨간 셔츠의 부탁만 없었다면 여기서 고슴도치의 비열함을 폭로하고 크게 싸워 줄 텐데, 입 밖에 안 낸다고 맡았으니 꼼짝할 수가 없다. 사람이 이렇게 새빨개져 있는데 흥 하는 법이 어디 있나.

「빙숫값은 받을 테니 하숙은 나가 주게」

「일 전 오 리 받으면 그걸로 됐다. 하숙을 나가든 말든 내 마음이다」

「그런데 네 마음이 아니야, 어제 그 집 주인이 와서 자네가 나가 줬으면 한다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주인 말이 옳더군.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할 작정으로 오늘 아침 그 집에 들러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왔네」

나로서는 고슴도치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주인이 자네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알 게 뭐냐. 그렇게 혼자 정해 버리면 어쩌나. 까닭이 있으면 까닭을 말하는 게 순서다. 대뜸 주인 말이 옳다느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소리 마라」

「응, 그렇다면 말해 주지. 자네가 난폭해서 그 하숙에서 애물단지가 돼 있는 거야. 아무리 하숙집 마누라라도 하녀하고는 다르다네. 발을 내밀고 닦게 하다니 너무 거드름을 피운 거지」

「내가 언제 하숙집 마누라한테 발을 닦게 했나」

「닦게 했는지 어쩐지 모르지만 아무튼 저쪽에서는 자네 때문에 곤란하다네. 하숙비 십 원이나 십오 원은 족자 하나만 팔면 곧 생긴다고 하더군」

「아는 체하는 말을 지껄이는 놈이다. 그러면 왜 들였나」

「왜 들였는지 난 모르지, 들이기는 들였는데 싫어졌으니까 나가라는 거겠지. 자네 나가 주게」

「당연하다. 있어 달라고 두 손 모아 빌어도 있을까 보냐. 대체 그런 트집을 잡는 데를 주선하는 자네부터가 괘씸하다」

「내가 괘씸한지 자네가 얌전하지 않은지 둘 중 하나겠지」

고슴도치도 나 못지않은 욱하는 성미라 지기 싫어하는 큰 소리를 낸다. 교무실에 있던 무리는 무슨 일이 시작되었나 하고 다들 나와 고슴도치 쪽을 보며 턱을 길게 빼고 멍하니 있다. 나는 딱히 부끄러운 짓을 한 기억이 없으니 일어서면서 방 안을 한차례 둘러봐 주었다. 다들 놀라고 있는 가운데 알랑쇠만은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내 큰 눈이, 네놈도 싸울 작정이냐 하는 기세로 알랑쇠의 박고지 같은 낯짝을 꿰뚫었을 때, 알랑쇠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하고 크게 삼갔다. 좀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러는 사이 나팔이 울린다. 고슴도치도 나도 싸움을 그만두고 교실로 나갔다.

오후에는 지난밤 나에게 무례를 저지른 기숙생들의 처분에 관한 회의다. 회의라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 도무지 사정을 모르겠지만, 직원들이 모여서 저마다 제멋대로 설을 세우고 그걸 교장이 대충 추리는 거겠지. 추린다는 건 흑백을 가리기 어려운 일에 대해 쓸 말이다. 이번처럼 누가 봐도 괘씸하다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사건에 회의를 하는 건 시간 낭비다. 누가 어떻게 풀이하든 다른 설이 나올 리가 없다. 이런 뻔한 건 그 자리에서 교장이 처분해 버리면 될 것을. 퍽 결단력이 없다. 교장이라는 게 이렇다면, 다른 게 아니라 미적지근한 굼벵이의 다른 이름이다.

회의실은 교장실 옆에 있는 길쭉한 방으로, 여느 때는 식당 노릇을 한다. 검은 가죽을 씌운 의자가 스무 개쯤 긴 탁자 둘레에 늘어서 있어 얼핏 간다의 서양 요릿집쯤 되는 격이다. 그 탁자 끝에 교장이 앉고 교장 옆에 빨간 셔츠가 자리 잡는다. 나머지는 마음대로 앉는다는데, 체조 선생만은 늘 끝자리로 겸손하게 물러난다고 한다. 나는 사정을 모르니 박물 선생과 한문 선생 사이에 끼어들었다. 건너편을 보니 고슴도치와 알랑쇠가 나란히 있다. 알랑쇠 얼굴은 아무리 생각해도 열등하다. 싸우긴 해도 고슴도치 쪽이 훨씬 운치가 있다. 아버지 장례식 때 고비나타 요겐지의 객실에 걸려 있던 족자가 이 얼굴과 꼭 닮았다. 스님에게 물어보니 위타천이라는 괴물이란다. 오늘은 화가 나 있으니 눈을 부라리며 이따금 내 쪽을 본다. 그런 걸로 겁먹을까 보냐 하고 나도 지지 않을 기세로 역시 눈을 부라리며 고슴도치를 노려봐 주었다. 내 눈은 모양은 좋지 않지만 크기로는 웬만한 사람한테 안 진다. 도련님은 눈이 크시니까 배우가 되면 틀림없이 어울리겠어요, 하고 기요가 곧잘 말했을 정도다.

이제 대개 모이셨나요, 하고 교장이 말하자 서기 가와무라라는 사람이 하나 둘 머릿수를 센다. 하나가 모자란다. 한 사람이 모자라는데요,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건 모자랄 수밖에. 끝물 호박 군이 안 왔다. 나와 끝물 호박 군은 무슨 전생의 인연인지 모르지만, 이 사람 얼굴을 본 뒤로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 교무실에 오면 곧 끝물 호박 군이 눈에 띄고, 길을 걸어도 끝물 호박 선생의 모습이 마음에 떠오른다. 온천에 가면 끝물 호박 군이 이따금 파란 얼굴을 하고 탕 속에 부어 있다. 인사를 하면 예, 하고 송구스러워하며 머리를 숙이니 딱해진다. 학교에 나와 끝물 호박 군만큼 얌전한 사람은 없다. 좀처럼 웃은 적도 없지만 쓸데없는 말을 한 적도 없다. 나는 군자라는 말을 책에서 알고 있지만, 이건 사전에나 있을 뿐 살아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끝물 호박 군을 만나고서 처음으로 역시 실체가 있는 말이로구나 하고 감탄했을 정도다.

이만큼 관계가 깊은 사람의 일이니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끝물 호박 군이 없는 걸 곧 알아차렸다. 실을 말하면 이 사람 옆에라도 앉을까 하고 남몰래 과녁으로 삼고 왔을 정도다. 교장은 이제 곧 오겠지요, 하고 제 앞에 있는 보라색 보자기를 풀어 등사한 종이 같은 것을 읽고 있다. 빨간 셔츠는 호박(琥珀) 파이프를 비단 손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이게 취미다. 빨간 셔츠다운 거겠지. 다른 사람들은 옆 사람끼리 무언가 소곤거리고 있다. 심심한 사람은 연필 끝에 달린 고무 머리로 탁자 위에 자꾸 무언가를 쓰고 있다. 알랑쇠는 이따금 고슴도치에게 말을 거는데 고슴도치는 도무지 응하지 않는다. 그저 응이라든가 아아라든가 할 뿐이고 이따금 무서운 눈을 하고 내 쪽을 본다. 나도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본다.

그러는 데 기다리던 끝물 호박 군이 미안한 듯 들어와, 볼일이 좀 있어서 늦었습니다, 하고 공손히 너구리에게 인사했다. 그럼 회의를 열겠습니다, 하고 너구리는 먼저 서기 가와무라 군에게 등사한 종이를 나눠 주게 한다. 보니 첫째가 처분 건, 다음이 학생 단속 건, 그 밖에 두세 가지다. 너구리는 여느 때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교육의 화신이라는 태도로 이런 뜻의 말을 했다. 「학교의 직원이나 학생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모두 제 부덕의 소치로, 무슨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저는 이러고도 용케 교장 노릇을 한다고 남몰래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만, 불행히도 이번에 또 이런 소동을 일으킨 것은 깊이 여러분께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일단 일어난 이상은 어쩔 수 없으니 어떻게든 처분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실은 이미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이니, 뒷수습에 대해 거리낌 없는 말씀을 참고 삼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교장의 말을 듣고 과연 교장이니 너구리니 하는 건 대단한 말을 하는 법이로구나 하고 감탄했다. 이렇게 교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제 허물이니 부덕이니 할 정도라면 학생을 처분하는 건 그만두고 저부터 먼저 파면당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이런 성가신 회의 따위를 열 필요도 없어지는 셈이다. 무엇보다 상식으로 봐도 안다. 내가 얌전히 숙직을 선다. 학생들이 난동을 부린다. 나쁜 건 교장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학생들뿐이 틀림없다. 만약 고슴도치가 선동했다면 학생과 고슴도치를 혼내 주면 그걸로 충분하다. 남의 엉덩이를 제가 짊어지고 내 엉덩이다, 내 엉덩이다 하고 떠벌리는 놈이 어느 나라에 있나. 너구리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재주다. 그는 이런 이치에 안 맞는 말을 뱉고 의기양양하게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박물 선생은 제일 교실 지붕에 까마귀가 앉아 있는 걸 바라보고 있다. 한문 선생은 등사한 종이를 접었다 폈다 하고 있다. 고슴도치는 아직 내 얼굴을 노려보고 있다. 회의라는 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거라면 빠지고 낮잠이라도 자는 편이 낫다.

나는 답답해져서 한번 크게 말해 주자 하고 엉덩이를 반쯤 들려는데 빨간 셔츠가 무언가 말을 꺼내기에 그만두었다. 보니 파이프를 넣고 줄무늬 비단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무언가 말하고 있다. 저 손수건은 틀림없이 마돈나한테서 빼앗은 게 틀림없다. 사내는 흰 삼베를 쓰는 법이다. 「저도 기숙생의 난동을 듣고 교감으로서 몹시 불찰이었으며, 또한 평소의 덕화가 소년들에게 미치지 못했음을 깊이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무언가 결함이 있으면 일어나는 것으로, 사건 그 자체를 보면 어쩐지 학생들만 나쁜 것 같지만, 그 진상을 캐어 보면 책임은 오히려 학교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엄중한 제재를 가하는 것은 오히려 장래를 위해 좋지 않은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또한 소년은 혈기가 왕성하니 활기가 넘쳐 선악에 대한 생각 없이 반쯤 무의식으로 이런 장난을 하는 일이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물론 처분 방법은 교장 선생님 생각에 달린 일이라 제가 참견할 바는 아니지만, 부디 그 점을 헤아리셔서 될 수 있는 대로 너그러운 처분을 바랍니다」

과연 너구리가 너구리라면 빨간 셔츠도 빨간 셔츠다. 학생이 난동을 부리는 건 학생이 나쁜 게 아니라 교사가 나쁘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다. 미치광이가 남의 머리를 때리는 건 맞은 사람이 나쁘니까 미치광이가 때린다는 거다. 참 고마운 일이다. 활기가 넘쳐서 곤란하면 운동장에 나가 씨름이라도 하면 된다, 반쯤 무의식으로 이불 속에 방아깨비를 넣어서야 되겠나. 이 꼴이면 자다가 목을 따여도 반쯤 무의식이었다고 풀어 줄 작정이겠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무언가 말할까 해 보았지만, 말할 거면 남을 놀라게 할 만큼 청산유수로 늘어놓지 않으면 시시하다, 내 버릇으로 화가 났을 때 입을 열면 두세 마디 만에 반드시 막혀 버린다. 너구리든 빨간 셔츠든 사람됨으로 치면 나보다 하등이지만 말솜씨는 퍽 능란하니, 서툰 소리를 지껄였다가 말꼬리를 잡혀서는 재미없다. 좀 속으로 초안을 짜 보자 하고 가슴속에서 글을 짓고 있다. 그러자 앞에 있던 알랑쇠가 갑자기 일어선 데는 놀랐다. 알랑쇠 주제에 의견을 말하다니 건방지다. 알랑쇠는 여느 그 헤헤거리는 가락으로 「실로 이번 방아깨비 사건 및 함성 사건은 우리 뜻있는 직원으로 하여금 남몰래 우리 학교 장래 전도에 위구의 염을 품게 하기에 족한 진사이옵고, 우리 직원 된 자는 이때 분발하여 스스로 돌아보고 전교의 풍기를 진작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리하여 방금 교장 선생님 및 교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설은 실로 정곡을 찌른 적절한 고견으로, 저는 철두철미 찬성하옵니다. 부디 될 수 있는 대로 관대한 처분을 우러르고자 하옵니다」 했다. 알랑쇠가 하는 말은 말은 있는데 뜻이 없다, 한자어를 쉴 새 없이 늘어놓을 뿐이라 영문을 모르겠다. 알아들은 건 철두철미 찬성하옵니다, 하는 말뿐이다.

나는 알랑쇠가 하는 말뜻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몹시 화가 나서 초안도 짜기 전에 일어서 버렸다. 「저는 철두철미 반대입니다……」 하고 말했는데 뒤가 갑자기 안 나온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처분은 딱 질색입니다」 하고 붙였더니 직원들이 모두 웃기 시작했다. 「대체 학생이 완전히 나쁩니다. 아무래도 사과를 시키지 않으면 버릇이 됩니다. 퇴학을 시켜도 상관없습니다. …… 뭐냐 무례하게, 새로 온 교사라고 우습게 보고……」 하고 말하고 앉았다. 그러자 오른쪽 옆에 있는 박물 선생이 「학생이 나쁜 건 나쁘지만 너무 엄한 벌 같은 걸 주면 오히려 반동을 일으켜서 안 되겠지요. 역시 교감 선생님 말씀대로 너그러운 쪽에 찬성합니다」 하고 약한 소리를 했다. 왼쪽 옆의 한문 선생은 온건론에 찬성이라고 했다. 역사 선생도 교감과 같은 의견이라고 했다. 분하다, 대개가 빨간 셔츠 당이다. 이런 무리가 모여서 학교를 꾸려 가고 있다면 알 만하다. 나는 학생들을 사과시키든지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로 정해 놓았으니, 만약 빨간 셔츠가 이긴다면 곧 집에 가서 짐을 쌀 각오였다. 어차피 이런 패거리를 말솜씨로 굴복시킬 재주는 없고, 굴복시킨다 해도 언제까지나 사귀어 달라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다. 학교에 없을 거라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또 무슨 말을 하면 웃을 게 틀림없다. 누가 말할까 보냐 하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러자 여태 잠자코 듣고 있던 고슴도치가 분연히 일어섰다. 이놈 또 빨간 셔츠에게 찬성하겠구나, 어차피 너와는 싸움이다, 마음대로 해라 하고 보고 있으니, 고슴도치는 유리창을 떨게 할 만한 목소리로 「저는 교감 선생님 및 그 밖의 여러분의 설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어느 점으로 보아도 쉰 명의 기숙생이 새로 온 교사 아무개 씨를 업신여기고 이를 우롱하려 한 소행이라고밖에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감 선생님은 그 원인을 교사의 사람됨 여하에서 찾으시는 모양입니다만, 실례지만 그것은 실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개 씨가 숙직을 맡은 것은 부임하자마자의 일로, 아직 학생들을 대한 지 스무 날도 안 된 무렵입니다. 이 짧은 스무 날 동안 학생들은 선생의 학문과 사람됨을 평가할 여지가 없습니다. 업신여김을 받을 만한 마땅한 까닭이 있어서 업신여김을 받은 것이라면 학생들의 행위에 참작할 까닭도 있겠지만, 아무 원인도 없는데 새로 온 선생을 우롱하는 경박한 학생들을 너그러이 봐준다면 학교의 위신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정신은 단지 학문을 가르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상하고 정직하고 무사다운 기운을 북돋우는 동시에, 야비하고 경솔하고 오만한 나쁜 풍조를 쓸어 내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반동이 무섭다느니 소동이 커진다느니 하는 미봉책을 말한다면 이 폐풍은 언제 바로잡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폐풍을 끊어 내기 위해서야말로 우리는 이 학교에 몸담고 있는 것이니, 이것을 못 본 척할 정도라면 처음부터 교사가 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상의 이유로 기숙생 일동을 엄벌에 처하는 동시에, 해당 교사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죄의 뜻을 표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 조치라고 여깁니다」 하고 말하며 털썩 앉았다. 모두 잠자코 아무 말도 안 한다. 빨간 셔츠는 또 파이프를 닦기 시작했다. 나는 어쩐지 몹시 기뻤다. 내가 하려던 말을 나 대신 고슴도치가 몽땅 해 준 셈이다. 나는 이런 단순한 사람이라 여태까지의 싸움은 까맣게 잊고, 크게 고맙다는 얼굴로 앉은 고슴도치 쪽을 보았더니 고슴도치는 도무지 모르는 낯을 하고 있다.

조금 있다가 고슴도치는 다시 일어섰다. 「방금 깜빡 잊고 빠뜨렸기에 말씀드립니다. 그날 밤 숙직원은 숙직 중에 외출해서 온천에 가신 모양인데, 그건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한 학교의 빈집을 맡아 놓고 나무랄 사람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하필이면 온천 같은 데에 목욕하러 가다니 큰 실책입니다. 학생은 학생대로 하고, 이 점에 대해서는 교장 선생님께서 특별히 책임자에게 주의를 주시기 바랍니다」

묘한 놈이다, 칭찬했나 싶더니 뒤이어 곧 남의 실수를 들춘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앞의 숙직이 나다닌 걸 알고 그런 관습인 줄 알고 그만 온천까지 가 버렸는데, 과연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이건 내가 잘못했다. 공격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또 일어나 「저는 분명히 숙직 중에 온천에 갔습니다. 이건 정말 잘못입니다. 사과합니다」 하고 앉았더니 모두 또 웃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웃는다. 시시한 놈들이다. 너희는 이만큼 제 잘못을 공개적으로 잘못했다고 잘라 말할 수 있나, 못 하니까 웃는 거겠지.

그러고서 교장은, 이제 대개 의견도 없는 모양이니 잘 생각한 뒤에 처분하지요, 하고 말했다. 내친김에 그 결과를 말하자면, 기숙생들은 한 주일 외출 금지가 된 데다 내 앞에 나와 사과를 했다. 사과를 안 했으면 그때 그만두고 돌아갔을 텐데, 어설프게 내 말대로 되는 바람에 끝내 큰일이 나고 말았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교장은 이때 회의의 연장이라며 이런 말을 했다. 학생의 풍기는 교사의 감화로 바로잡아 가야 한다, 그 첫걸음으로 교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음식점 따위에 드나들지 않기로 하고 싶다. 물론 송별회 같은 때는 특별하지만, 혼자 그다지 상등이 아닌 데에 가는 건 삼갔으면 한다 ― 이를테면 메밀국숫집이라든가 경단집이라든가 ― 하고 말을 꺼내자 또 모두가 웃었다. 알랑쇠가 고슴도치를 보며 튀김, 하고 눈짓을 했지만 고슴도치는 상대하지 않았다. 꼴좋다.

나는 머리가 나빠서 너구리가 하는 말 따위는 잘 모르겠지만, 메밀국숫집이나 경단집에 가서 중학교 교사 노릇을 못 한다면 나 같은 먹보는 도저히 못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걸로 좋으니 처음부터 메밀국수와 경단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주문해서 고용하면 된다. 아무 말 없이 임명장을 내려 놓고 메밀국수를 먹지 마라, 경단을 먹지 마라 하고 죄 많은 포고를 내는 건 나처럼 다른 취미가 없는 사람에게는 큰 타격이다. 그러자 빨간 셔츠가 또 끼어들었다. 「본래 중학교 교사 같은 건 사회의 상류에 자리하는 것이니까 단지 물질적인 쾌락만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쪽에 빠지면 그만 품성에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니까 무언가 오락이 없으면 시골에 와서 좁은 땅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지요. 그러니 낚시를 간다든가 문학 책을 읽는다든가, 또는 신체시나 하이쿠를 짓는다든가, 무엇이든 고상한 정신적 오락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잠자코 듣고 있으니 제멋대로 열을 올린다. 먼바다에 가서 거름을 낚거나, 고루키가 러시아 문학가이거나, 단골 기생이 소나무 밑에 서거나, 오래된 연못에 개구리가 뛰어들거나 하는 게 정신적 오락이라면, 튀김을 먹고 경단을 삼키는 것도 정신적 오락이다. 그런 시시한 오락을 가르치느니 빨간 셔츠 빨래나 하는 게 낫다. 너무 화가 나서 「마돈나를 만나는 것도 정신적 오락입니까」 하고 물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는다. 묘한 얼굴로 서로 눈과 눈을 마주 보고 있다. 빨간 셔츠 자신은 괴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것 봐라. 먹혔지. 다만 딱했던 건 끝물 호박 군으로, 내가 이렇게 말하자 파란 얼굴을 더욱 파랗게 했다.

7장

나는 그날 밤으로 하숙을 나왔다. 하숙에 돌아와 짐을 꾸리고 있으니 마누라가,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화나는 일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한다. 도무지 놀랍다. 세상에는 어째서 이렇게 요령부득인 사람들만 모여 있을까. 나가 달라는 건지 있어 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완전히 미치광이다. 이런 걸 상대로 싸움을 해 봐야 도쿄 토박이 망신이니 인력거꾼을 데려와 얼른 나왔다.

나오기는 나왔는데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다. 인력거꾼이 어디로 모실까요, 하기에 잠자코 따라와라, 곧 안다, 하고 휘적휘적 걸어왔다. 귀찮으니 야마시로야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또 나와야 하니 결국 수고다. 이렇게 걷다 보면 하숙이라든가 무슨 간판이 있는 집을 찾아내겠지. 그러면 거기가 하늘의 뜻에 맞는 내 집이라고 하자. 하고 빙빙, 한적하고 살기 좋아 보이는 데를 걷다가 끝내 가지야마치로 나오고 말았다. 여기는 무사 집안 동네라 하숙 같은 게 있는 동네가 아니니 좀 더 번화한 쪽으로 되돌아갈까 했지만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내가 경애하는 끝물 호박 군은 이 동네에 산다. 끝물 호박 군은 이 고장 사람이고 조상 대대의 집을 지키고 있을 정도니 이 언저리 사정에 밝은 게 틀림없다. 그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면 괜찮은 하숙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마침 한 번 인사하러 와 봐서 집은 아니까 찾아다니는 수고도 없다. 여기겠지 하고 대충 짐작을 대고 계십니까 계십니까 두 번쯤 하니, 안에서 쉰쯤 된 노인이 옛날식 종이 촛불을 켜 들고 나왔다. 나는 젊은 여자도 싫지 않지만 노인을 보면 어쩐지 그리운 마음이 든다. 아마 기요를 좋아하니까 그 넋이 여기저기 할머니들에게 옮겨 붙는 거겠지. 이분은 아마 끝물 호박 군의 어머니일 거다. 머리를 짧게 자른 품위 있는 부인인데 끝물 호박 군을 많이 닮았다. 자 올라오세요, 하는 걸 잠깐 뵙고 싶으니까 하고 주인을 현관까지 불러내어 실은 이러이러한데 자네 어디 짚이는 데 없나, 하고 물어보았다. 끝물 호박 선생은 그거 참 곤란하시겠군요, 하고 한참 생각하더니, 이 뒷골목에 하기노라고 늙은 부부 둘만 사는 집이 있는데, 언젠가 방을 비워 두어도 쓸데없으니 믿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세를 놓아도 좋다고 주선을 부탁한 적이 있다. 지금도 세를 놓을지 어떨지 모르지만 뭐 같이 가서 물어봅시다, 하고 친절하게 데려가 주었다.

그날 밤부터 하기노네 집 하숙생이 되었다. 놀란 건 내가 이카긴의 방을 나오자 이튿날부터 엇갈려 알랑쇠가 태연한 얼굴로 내가 있던 방을 차지한 일이다. 나도 이건 기가 막혔다. 세상은 사기꾼뿐이라 서로 속여 넘기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싫어졌다.

세상이 이런 거라면 나도 지지 않을 기세로 세상 사람들처럼 하지 않으면 못 배겨 낼 판이다. 소매치기 몫을 가로채지 않으면 세 끼 밥을 못 먹는다고 정해진다면,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다고 멀쩡하게 튼튼한 몸으로 목을 매서는 조상 볼 낯이 없는 데다 남 보기에도 흉하다. 생각해 보면 물리학교 같은 데 들어가서 수학 같은 쓸데없는 재주를 익히느니 육백 원을 밑천으로 우유 가게라도 할 걸 그랬다. 그러면 기요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되고 나도 멀리서 할멈 걱정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 같이 있을 때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시골에 와 보니 기요는 역시 착한 사람이다. 그렇게 마음씨 좋은 여자는 온 일본을 뒤지고 다녀도 좀처럼 없다. 할멈이 내가 떠날 때 감기에 좀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지난번 편지를 보고 퍽 기뻐했겠지. 그렇다 해도 이제 답장이 올 법한데 ― 나는 이런 생각만 하며 이삼 일 지냈다.

마음에 걸려서 하숙집 할머니에게 도쿄에서 편지 안 왔습니까, 하고 가끔 물어보는데, 물을 때마다 아무것도 안 왔어유, 하고 딱하다는 얼굴을 한다. 이 집 부부는 이카긴과 달라서 본디 무사 집안이라 둘 다 품위가 있다. 영감이 밤이 되면 이상한 목소리로 요쿄쿠를 읊는 데는 질리지만, 이카긴처럼 차를 타 드리지요, 하고 함부로 나오지 않으니 퍽 편하다. 할머니는 가끔 방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어째서 아씨를 데리고 같이 오시지 않았시유, 하고 묻는다. 아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딱하게도 이래 봬도 아직 스물넷이오, 했더니 그래도 선생, 스물넷에 아씨가 있으신 건 당연하지유, 하고 서두를 떼고는, 어디 누구는 스물에 색시를 얻었다느니, 어디 아무개는 스물둘에 아이가 둘이라느니, 무엇이든 보기를 여섯 가지쯤 들어 반박을 시도하는 데는 두 손 들었다. 그럼 나도 스물넷에 색시를 얻을 테니 중매 좀 서 주면 안 되겄슈, 하고 시골 말을 흉내 내어 부탁해 보았더니, 할머니는 정직하게 정말이유, 하고 물었다.

「정말이고말고, 나는 색시가 얻고 싶어서 못 견디겠소」

「그러시겄지유. 젊을 때는 누구나 다 그런 거니께유」 이 인사에는 송구스러워서 대답을 못 했다.

「그래도 선생은 벌써 색시가 있으신 게 틀림없어유. 나는 벌써 다 알아봤시유」

「허, 눈이 밝군요. 어떻게 알아봤소」

「어떻게라니유. 도쿄에서 소식 없냐, 소식 없냐 하구, 날마다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잖유」

「이거 놀랐는걸. 대단한 눈이오」

「맞혔지유」

「그렇군요. 맞혔는지도 모르겠소」

「그래도 요즘 여자들은 옛날하고 달라서 방심을 못 허니께, 조심하시는 게 좋아유」

「뭐요, 내 아내가 도쿄에서 샛서방이라도 두고 있단 말이오」

「아니유, 선생 아씨는 틀림없지만……」

「그럼 이제야 안심이오. 그럼 무얼 조심하란 말이오」

「선생 것은 틀림없지 ― 선생 것은 틀림없지만 ―」

「어디에 안 틀림없는 게 있소」

「이 근처에도 꽤 있시유. 선생, 저 도야마네 아가씨 아시유」

「아니요, 모르오」

「아직 모르셨시유. 이 근처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지유. 너무 미인이라서 학교 선생님들은 다들 마돈나 마돈나 하구 부른대유. 아직 못 들으셨시유」

「응, 마돈나 말이오. 나는 기생 이름인 줄 알았소」

「아니유 선생. 마돈나라는 건 서양 말로 미인이라는 뜻이겄지유」

「그런지도 모르겠소. 놀랐소」

「아마 미술 선생님이 붙이신 이름일 거유」

「알랑쇠가 붙였소」

「아니유, 그 요시카와 선생님이 붙이신 거라유」

「그 마돈나가 안 틀림없단 말이오」

「그 마돈나 씨가 안 틀림없는 마돈나 씨라서유」

「성가시군. 별명 붙은 여자치고 옛날부터 변변한 게 없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소」

「참말 그래유. 귀신 오마쓰니 달기 오햐쿠니 하는 무서운 여자들이 있었지유」

「마돈나도 그 부류요」

「그 마돈나 씨가 말이유, 선생. 저기 그, 선생을 여기 주선해 주신 고가 선생 말이유 ― 그분한테 시집갈 약속이 되어 있었는디유 ―」

「허, 알 수 없는 일이군. 저 끝물 호박 군이 그런 여복이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소. 사람은 겉보기와 다르군. 좀 조심해야겠소」

「그런디 지난해 그 댁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 그때까지는 돈도 있구 은행 주식도 갖고 계시구 만사가 순조로웠는디 ― 그 뒤로는 어찌 된 셈인지 갑자기 살림이 기울어서 ― 말하자면 고가 씨가 너무 사람이 좋아서 속으셨지유. 이러구저러구 해서 혼사도 미뤄지고 있는 판에 그 교감 선생님이 오셔서 꼭 색시로 달라고 하신대유」

「그 빨간 셔츠가 말이오. 지독한 놈이군. 아무래도 그 셔츠는 보통 셔츠가 아니라고 생각했소. 그래서요?」

「사람을 넣어서 말을 넣어 보니께, 도야마 씨네도 고가 씨한테 의리가 있으니께 바로는 대답을 못 하구 ― 뭐 잘 생각해 보겠다는 정도로 인사를 하셨대유. 그랬더니 빨간 셔츠 씨가 줄을 대서 도야마 씨네로 드나들게 되더니, 끝내 선생, 아가씨를 길들여 버리셨대유. 빨간 셔츠 씨도 빨간 셔츠 씨지만 아가씨도 아가씨라구 다들 나쁘게 말해유. 일단 고가 씨한테 시집가겠다구 승낙해 놓구서, 이제 와서 학사님이 오셨으니 그쪽으로 바꾸겠다니, 그래서야 하늘에 볼 낯이 없지유, 선생」

「정말 볼 낯이 없군요. 오늘 하늘은커녕 내일 하늘에도 모레 하늘에도 언제까지 가도 볼 낯이 없겠소」

「그래서 고가 씨가 딱하다구, 친구분인 홋타 씨가 교감한테 따지러 가셨더니, 빨간 셔츠 씨가, 나는 약속이 있는 사람을 가로챌 생각은 없다. 파혼이 되면 얻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도야마 댁과 그저 교제를 하고 있을 뿐이다, 도야마 댁과 교제를 하는 건 별로 고가 씨에게 미안할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셔서, 홋타 씨도 하는 수 없이 돌아오셨대유. 빨간 셔츠 씨하고 홋타 씨는 그 뒤로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유」

「참 여러 가지를 잘 아시는군요.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시오. 감탄했소」

「좁으니께 뭐든 다 알아유」

너무 알아서 곤란할 지경이다. 이 꼴이면 내 튀김이나 경단 일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성가신 데다. 그러나 덕분에 마돈나의 뜻도 알았고 고슴도치와 빨간 셔츠의 관계도 알았으니 크게 공부가 되었다. 다만 곤란한 건 어느 쪽이 나쁜 놈인지 똑똑하지 않다. 나 같은 단순한 사람에게는 흰지 검은지 딱 정해 주지 않으면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빨간 셔츠하고 고슴도치하고 어느 쪽이 좋은 사람이오」

「고슴도치가 뭐유」

「고슴도치라는 건 홋타 말이오」

「그야 센 걸로는 홋타 씨가 셀 것 같지만, 그래도 빨간 셔츠 씨는 학사님이니께 수완은 있는 분이지유. 그리구 상냥한 걸로도 빨간 셔츠 씨가 상냥하지만, 학생들 평판은 홋타 씨가 좋다대유」

「그러니까 어느 쪽이 좋단 말이오」

「그러니께 월급 많은 쪽이 훌륭하겄지유」

이래서야 물어봐야 소용없으니 그만두었다. 그러고서 이삼 일 뒤 학교에서 돌아오니 할머니가 싱글벙글하며, 예 오래 기다리셨지유. 드디어 왔시유, 하고 편지 한 통을 가져와서 천천히 보시라며 나갔다. 집어 들어 보니 기요에게서 온 편지다. 쪽지가 두세 장 붙어 있기에 잘 살펴보니 야마시로야에서 이카긴 쪽으로 돌려지고, 이카긴에서 하기노로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야마시로야에서는 한 주일쯤 머물렀다. 여관이라 편지까지 묵어갈 작정이었나 보다. 펴 보니 엄청나게 길다. 도련님 편지를 받고 곧 답장을 쓰려고 했는데 공교롭게 감기에 걸려 한 주일쯤 누워 있어서 그만 늦어져 미안하다. 게다가 요즘 아가씨들처럼 읽고 쓰기가 능하지 못해서 이런 서툰 글씨라도 쓰는 데 퍽 애를 먹는다. 조카에게 대필을 부탁할까 했지만 모처럼 드리는 건데 제 손으로 쓰지 않으면 도련님께 미안하다 싶어 일부러 초고를 한 번 쓰고 나서 정서를 했다. 정서하는 데는 이틀이면 끝났지만 초고를 쓰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읽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이래 봬도 죽을힘을 다해 쓴 것이니 부디 끝까지 읽어 달라. 하는 서두로 넉 자쯤 이것저것 적혀 있다. 과연 읽기 어렵다. 글씨가 서툴 뿐 아니라 대개 히라가나라서 어디서 끊기고 어디서 시작하는지 구두점을 찍는 데 퍽 애가 쓰인다. 나는 성미가 급해서 이렇게 길고 알기 어려운 편지는 오 원 줄 테니 읽어 달라고 해도 거절하지만, 이때만은 진지해져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읽어 내려간 건 사실인데, 읽느라 애를 써서 뜻이 이어지지 않으니 다시 처음부터 읽어 보았다. 방 안이 좀 어두워져 아까보다 보기 어려워졌으므로 끝내 툇마루 끝에 나가 걸터앉아 정중히 읽었다. 그러자 초가을 바람이 파초 잎을 흔들고 맨살에 불어 가는 길에 읽던 편지를 뜰 쪽으로 나부끼게 하는 바람에, 끝 무렵에는 넉 자 남짓한 두루마리가 사락사락 울려서 손을 놓으면 건너편 산울타리까지 날아갈 것 같다. 나는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도련님은 대쪽 같은 성품이지만 다만 욱하는 게 너무 세서 그게 걱정된다. ― 다른 사람한테 함부로 별명 같은 걸 붙이는 건 남의 원한을 사는 근원이니 함부로 쓰면 안 된다, 만약 붙였거든 기요한테만 편지로 알려라. ― 시골 사람들은 심보가 나쁘다니까 조심해서 험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해라. ― 날씨도 도쿄보다 고르지 못할 게 뻔하니 자다가 한기가 들어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 도련님 편지는 너무 짧아서 사정을 잘 모르겠으니 다음에는 적어도 이 편지 절반쯤 되는 길이로 써 달라. ― 여관에 찻값을 오 원 준 건 좋지만 나중에 곤란하지 않겠느냐, 시골에 가서 의지할 건 돈뿐이니 될 수 있는 대로 아껴서 만일의 때에 지장이 없게 해야 한다. ― 용돈이 없어 곤란할지 모르니 환으로 십 원 보낸다. ― 지난번 도련님한테서 받은 오십 원을 도련님이 도쿄에 돌아와 집을 장만할 때 보태려고 우체국에 맡겨 두었는데, 이 십 원을 빼도 아직 사십 원이 있으니 괜찮다. ― 과연 여자라는 건 꼼꼼한 것이다.

내가 툇마루 끝에서 기요의 편지를 팔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으니, 칸막이 장지를 열고 하기노 할머니가 저녁을 가지고 왔다. 아직 보고 계셔유. 어지간히 긴 편지네유, 하기에, 예 소중한 편지라 바람에 날려서는 보고 날려서는 보는 거요, 하고 나도 요령부득인 대답을 하고 밥상에 앉았다. 보니 오늘 밤도 고구마 조림이다. 이 집은 이카긴보다 정중하고 친절하고 게다가 품위가 있지만, 아깝게도 먹을 게 맛이 없다. 어제도 고구마, 그제도 고구마, 오늘 밤도 고구마다. 나는 고구마를 아주 좋아한다고 분명히 말한 건 틀림없지만, 이렇게 내리 고구마를 먹어서는 목숨이 이어지지 않는다. 끝물 호박 군을 비웃기는커녕 나 자신이 머지않아 고구마 끝물 선생이 되고 말겠다. 기요라면 이런 때 내가 좋아하는 참치회나 어묵구이를 먹여 줄 텐데, 가난한 무사 집안의 구두쇠라니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요와 같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 학교에 오래 있을 것 같으면 도쿄에서 불러 주자. 튀김 메밀국수를 먹으면 안 된다, 경단을 먹으면 안 된다, 그러고서 하숙에 틀어박혀 고구마만 먹고 누렇게 떠 있으라니 교육자는 괴로운 것이다. 선종 스님이라도 이보다는 입을 호강시키고 있겠지. ― 나는 한 접시 고구마를 해치우고 책상 서랍에서 날달걀을 두 개 꺼내 밥그릇 가장자리에 깨뜨려 겨우 때웠다. 날달걀로라도 영양을 취하지 않으면 한 주일에 스물한 시간 수업을 어떻게 하나.

오늘은 기요의 편지 때문에 온천에 가는 시간이 늦어졌다. 그러나 날마다 다니던 걸 하루라도 거르면 기분이 나쁘다. 기차라도 타고 나가자 하고 그 빨간 수건을 들고 정거장까지 오니 이삼 분 전에 막 떠난 참이라 좀 기다려야 한다. 벤치에 걸터앉아 시키시마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우연히도 끝물 호박 군이 왔다. 나는 아까 이야기를 듣고 나서 끝물 호박 군이 더욱 딱해졌다. 평소부터 하늘과 땅 사이에 얹혀사는 것처럼 작게 웅크리고 있는 게 참 가엾어 보였지만, 오늘 밤은 가엾은 정도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월급을 두 배로 올려 도야마네 아가씨와 내일부터 결혼시켜서 한 달쯤 도쿄에라도 놀러 보내 주고 싶은 참이었으므로, 야 목욕 가시오, 자 이리 앉으시오, 하고 기세 좋게 자리를 비켜 주니 끝물 호박 군은 황송한 모양으로, 아니 괘념치 마십시오, 하고 사양하는 건지 뭔지 여전히 서 있다. 좀 기다려야 출발합니다, 피곤하니 앉으시오, 하고 또 권해 보았다. 실은 어떻게든 곁에 앉아 주었으면 싶을 만큼 딱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겨우 내 말을 들어 주었다. 세상에는 알랑쇠처럼 건방져서 안 나와도 될 데에 꼭 얼굴을 내미는 놈도 있다. 고슴도치처럼 내가 없으면 일본이 곤란할 거라는 낯짝을 어깨 위에 얹고 다니는 놈도 있다. 그런가 하면 빨간 셔츠처럼 머릿기름과 멋쟁이 도매상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교육이 살아서 프록코트를 입으면 내가 된다고 말하지 않을 뿐인 너구리도 있다. 다들 저마다 뽐내고 있지만, 이 끝물 호박 선생처럼 있어도 없는 듯이, 볼모로 잡힌 인형처럼 얌전히 있는 건 본 적이 없다. 얼굴은 부어 있지만 이런 훌륭한 사람을 버리고 빨간 셔츠에게 기울다니 마돈나도 어지간히 속을 알 수 없는 말괄량이다. 빨간 셔츠가 몇 다스 모인다 한들 이만큼 훌륭한 서방님이 되겠나.

「선생은 어디 편찮은 것 아니오. 꽤 힘들어 보이는데……」 「아니요, 딱히 이렇다 할 지병도 없습니다만……」

「그거 다행이오. 몸이 나쁘면 사람도 틀렸지요」

「선생은 꽤 튼튼하신 모양이군요」

「예 야위어도 병은 안 납니다. 병이란 건 딱 질색이니까요」

끝물 호박 군은 내 말을 듣고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는 데 입구에서 젊은 여자 웃음소리가 들리기에 무심코 돌아보니 대단한 사람이 왔다. 살빛이 희고 서양식 머리를 한 키 큰 미인과 마흔대여섯 된 부인이 나란히 표 파는 창구 앞에 서 있다. 나는 미인을 형용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말도 못 하겠지만 틀림없이 미인이다. 어쩐지 수정 구슬을 향수로 데워 손바닥에 쥐어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 든 쪽이 키는 작다. 그러나 얼굴은 많이 닮았으니 모녀겠지. 나는, 야 왔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끝물 호박 군 일은 까맣게 잊고 젊은 여자 쪽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끝물 호박 군이 갑자기 내 옆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여자 쪽으로 걸어가기에 좀 놀랐다. 마돈나 아닌가 싶었다. 세 사람은 매표소 앞에서 가볍게 인사하고 있다. 멀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정거장 시계를 보니 벌써 오 분 뒤면 출발이다. 어서 기차가 오면 좋겠는데, 하고 말벗이 없어져서 기다려지고 있으니, 또 한 사람이 허둥지둥 역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보니 빨간 셔츠다. 어쩐지 하늘하늘한 옷에 비단 허리띠를 칠칠치 못하게 감고, 여느 때처럼 금줄을 달랑거리고 있다. 저 금줄은 가짜다. 빨간 셔츠는 아무도 모르려니 하고 자랑하고 있지만 나는 똑똑히 알고 있다. 빨간 셔츠는 뛰어들자마자 무언가 두리번거리더니, 매표소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세 사람에게 공손히 절하고 무언가 두세 마디 하나 싶더니, 갑자기 이쪽으로 돌아서서 여느 때처럼 고양이 걸음으로 걸어와, 야 자네도 목욕인가, 나는 늦지나 않을까 걱정해서 서둘러 왔더니 아직 삼사 분 있군. 저 시계는 정확한가, 하고 제 금시계를 꺼내더니 이 분쯤 틀리는군, 하면서 내 곁에 앉았다. 여자 쪽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지팡이 위에 턱을 괴고 정면만 바라보고 있다. 나이 든 부인은 이따금 빨간 셔츠를 보지만 젊은 쪽은 옆을 향한 채다. 이제 틀림없이 마돈나다.

이윽고 휘익 하고 기적이 울리고 기차가 닿는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우르르 앞다투어 올라탄다. 빨간 셔츠는 맨 먼저 상등칸에 뛰어들었다. 상등을 탔다고 뽐낼 것도 없다, 스미타까지 상등이 오 전이고 하등이 삼 전이니 겨우 이 전 차이로 위아래가 갈린다. 나 같은 사람조차 상등을 큰맘 먹고 흰 표를 쥐고 있는 걸 보면 안다. 하기야 시골 사람들은 쩨쩨하니까 겨우 이 전 드나드는 것도 몹시 마음에 걸리는 모양인지 대개는 하등을 탄다. 빨간 셔츠 뒤를 따라 마돈나와 마돈나 어머니가 상등으로 들어갔다. 끝물 호박 군은 판에 박은 듯이 하등만 타는 사람이다. 선생은 하등칸 입구에 서서 어쩐지 망설이는 모양이었는데, 내 얼굴을 보자마자 마음먹고 뛰어들어 버렸다. 나는 이때 왠지 딱해서 견딜 수 없었으므로 끝물 호박 군 뒤를 따라 곧 같은 칸에 올라탔다. 상등 표로 하등을 탄다고 안 될 건 없겠지.

온천에 닿아 삼 층에서 유카타 차림으로 탕에 내려가 보니 또 끝물 호박 군을 만났다. 나는 회의 같은 데서 막상 닥치면 목이 막혀서 말을 못 하는 사람이지만 여느 때는 퍽 말을 잘하는 편이라, 탕 속에서 끝물 호박 군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어 보았다. 어쩐지 가엾어서 견딜 수 없다. 이런 때 한마디라도 상대 마음을 위로해 주는 건 도쿄 토박이의 의무라고 여긴다. 그런데 공교롭게 끝물 호박 군 쪽에서는 잘 이쪽 가락에 맞춰 주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도 예라든가 아니요뿐이고, 게다가 그 예와 아니요도 꽤 귀찮은 모양이라, 나중에는 끝내 그만두고 이쪽에서 먼저 물러났다.

탕 속에서는 빨간 셔츠를 만나지 않았다. 하기야 탕 수는 많으니 같은 기차로 닿아도 같은 탕에서 만난다고 정해진 건 아니다.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보니 달이 좋다. 동네 양쪽에 버드나무가 심겨 있어 버들가지가 둥근 그림자를 길 한가운데에 떨구고 있다. 좀 산책이라도 하자. 북쪽으로 올라가 동네 끝에 나서니 왼쪽에 큰 문이 있고, 문 막다른 데가 절이고 양옆이 기생집이다. 산문 안에 유곽이 있다니 전대미문의 현상이다. 잠깐 들어가 보고 싶지만 또 너구리에게 회의 때 당할지 모르니 그만두고 지나쳤다. 문과 나란히 검은 포렴을 건 작은 격자창의 단층집은 내가 경단을 먹고 실수한 데다. 둥근 등롱에 단팥죽, 떡국 하고 쓴 것이 매달려 있고, 등롱 불이 처마 끝 가까운 버드나무 한 그루의 줄기를 비추고 있다. 먹고 싶었지만 참고 지나갔다.

먹고 싶은 경단을 못 먹는 건 한심하다. 그러나 제 약혼녀가 남에게 마음을 옮긴 건 더 한심하겠지. 끝물 호박 군 일을 생각하면 경단은커녕 사흘쯤 굶어도 불평을 할 수 없는 셈이다. 정말 사람만큼 믿을 수 없는 건 없다. 그 얼굴을 보면 아무래도 그런 몰인정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 아름다운 사람이 몰인정하고, 동아처럼 물에 불은 고가 씨가 선량한 군자니 방심할 수가 없다. 담백하다고 여긴 고슴도치는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하고. 학생들을 선동했나 싶으면 학생 처분을 교장에게 다그치고. 아니꼬움을 반죽해 굳힌 것 같은 빨간 셔츠가 뜻밖에 친절해서 나에게 넌지시 주의를 주나 싶으면 마돈나를 속이고, 속였나 싶으면 고가 쪽이 파혼되지 않으면 결혼은 바라지 않는다고 하고. 이카긴이 트집을 잡아 나를 쫓아내나 싶으면 곧 알랑쇠 녀석이 엇갈려 들어오고 ―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다. 이런 걸 기요에게 써 보내면 틀림없이 놀라겠지. 하코네 너머니까 도깨비들이 모여 있는 거라고 할지도 모른다.

나는 타고나기를 아무렇지 않은 성미라 무슨 일이든 걱정하지 않고 오늘까지 견뎌 왔지만, 여기 와서 아직 한 달이 될까 말까 한 사이에 갑자기 세상이 뒤숭숭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딱히 두드러진 큰 사건을 만난 것도 아닌데 벌써 대여섯 살은 더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서 끝내고 도쿄로 돌아가는 게 제일 좋겠다. 하는 식으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어느새 돌다리를 건너 노제리강 둑에 나와 있었다. 강이라고 하면 대단한 것 같지만 실은 이 미터쯤 되는 졸졸 흐르는 개울로, 둑을 따라 한 킬로미터 남짓 내려가면 아이오이촌에 나온다. 마을에는 관음상이 있다.

온천 동네를 돌아보니 붉은 불빛이 달빛 속에서 반짝이고 있다. 북이 울리는 건 유곽이 틀림없다. 강물은 얕지만 빠르니 신경질적인 물처럼 마구 번쩍인다. 어슬렁어슬렁 둑 위를 걸으며 삼백 미터쯤 왔나 싶을 때 저쪽에 사람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달에 비추어 보니 그림자는 둘이다. 온천에 왔다가 마을로 돌아가는 젊은이들인지도 모른다. 그런 것치고는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 뜻밖에 조용하다.

차츰 걸어가니 내 쪽이 걸음이 빠른 모양인지 두 그림자가 점점 커진다. 하나는 여자 같다. 내 발소리를 듣고 이십 미터쯤 거리로 다가갔을 때, 남자가 갑자기 돌아보았다. 달은 뒤에서 비추고 있다. 그때 나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어라 싶었다. 남자와 여자는 다시 본래대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이 있으니 갑자기 전속력으로 쫓아갔다. 저쪽은 아무것도 모르고 처음처럼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제는 이야기 소리도 손에 잡힐 듯 들린다. 둑의 너비는 여섯 자쯤이니 나란히 가면 세 사람이 겨우다. 나는 수월하게 뒤에서 따라잡아, 남자의 소매를 스쳐 지나가며 두 걸음 앞에 내디딘 발꿈치를 빙 돌려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달은 정면에서 내 짧게 깎은 머리부터 턱 언저리까지 사정없이 비춘다. 남자는 앗 하고 작은 소리를 냈지만 갑자기 옆을 향하더니, 이제 돌아가자고 여자를 재촉하기가 무섭게 온천 동네 쪽으로 되돌아갔다.

빨간 셔츠는 뻔뻔해서 얼버무릴 작정인지, 마음이 약해서 이름을 못 댄 건지. 그런데 좁아서 곤란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8장

빨간 셔츠의 권유로 낚시를 갔다 온 뒤부터 고슴도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없는 일을 빌미로 하숙을 나가라고 했을 때는 드디어 괘씸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회의 자리에서는 예상과 달리 학생 엄벌론을 청산유수로 늘어놓았으니, 어라 이상하다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기노 할멈에게서 고슴도치가 끝물 호박 군을 위해 빨간 셔츠와 담판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거 기특하다 하고 손뼉을 쳤다. 이 꼴이면 나쁜 놈은 고슴도치가 아니다, 빨간 셔츠 쪽이 비뚤어져서 되는대로 넘겨짚은 것을 그럴듯하게, 게다가 빙 돌려서 내 머릿속에 스며들게 한 게 아닐까 하고 헷갈리던 참에, 노제리강 둑에서 마돈나를 데리고 산책 따위를 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 뒤로 빨간 셔츠는 음흉한 놈이라고 정해 버렸다. 음흉한 놈인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사람은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사람은 대나무처럼 곧지 않으면 믿음직하지 않다. 곧은 사람은 싸움을 해도 기분이 좋다. 빨간 셔츠처럼 상냥한 것과 친절한 것과 고상한 것과 호박 파이프를 자랑스레 내보이는 건 방심할 수 없다, 함부로 싸움도 못 한다고 생각했다. 싸움을 해도 에코인 씨름 같은 기분 좋은 싸움은 못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니 일 전 오 리 때문에 교무실 전체를 놀라게 한 말다툼 상대인 고슴도치 쪽이 훨씬 사람답다. 회의 때 움푹 들어간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았을 때는 미운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도 빨간 셔츠의 끈적끈적한 고양이 어르는 목소리보다는 낫다. 실은 그 회의가 끝난 뒤 어지간히 화해를 할까 하고 한두 마디 말을 걸어 보았지만, 이 녀석이 대답도 안 하고 아직 눈을 부라려 보이기에 이쪽도 화가 나서 그대로 두었다.

그 뒤로 고슴도치는 나와 말을 안 한다. 책상 위에 돌려준 일 전 오 리는 지금도 책상 위에 얹혀 있다. 먼지투성이가 되어 얹혀 있다. 나는 물론 손을 못 댄다, 고슴도치는 결코 가져가지 않는다. 이 일 전 오 리가 두 사람 사이의 담벼락이 되어, 나는 말하려 해도 말을 못 하고 고슴도치는 완강히 입을 다물고 있다. 나와 고슴도치에게는 일 전 오 리가 탈이 났다. 나중에는 학교에 나가 일 전 오 리를 보는 게 괴로워졌다.

고슴도치와 내가 절교한 꼴이 된 것과 반대로, 빨간 셔츠와 나는 여전히 예전 관계를 지키며 사귀고 있다. 노제리강에서 만난 이튿날 같은 때는 학교에 나오자 맨 먼저 내 곁에 와서, 자네 이번 하숙은 좋은가라느니, 또 같이 러시아 문학을 낚으러 가지 않겠나라느니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나는 좀 밉살스러웠으므로, 어젯밤엔 두 번 만났군요, 했더니, 예 정거장에서 ― 자네는 늘 그 무렵에 나가나, 늦지 않나, 한다. 노제리강 둑에서도 뵈었지요, 하고 먹여 주었더니, 아니 나는 그쪽엔 안 가네, 목욕하고 곧 돌아왔네, 하고 대답했다. 뭐 그렇게 숨기지 않아도 좋을 텐데, 실제로 만났는데.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이러고도 중학교 교감 노릇을 할 수 있다면 나 같은 건 대학 총장도 하겠다. 나는 이때부터 더욱 빨간 셔츠를 믿지 않게 되었다. 믿지 않는 빨간 셔츠와는 말을 하고, 감탄하고 있는 고슴도치와는 말을 안 한다. 세상은 참 묘하다.

어느 날 빨간 셔츠가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 우리 집까지 와 달라고 하기에, 아까웠지만 온천행을 쉬고 네 시쯤 나섰다. 빨간 셔츠는 홀몸이지만 교감이라 하숙은 벌써 오래전에 나와 훌륭한 현관을 차리고 있다. 집세가 구 원 오십 전이란다. 시골에 와서 구 원 오십 전을 내면 이런 집에 들 수 있다면 나도 한번 큰맘 먹고 도쿄에서 기요를 불러 기쁘게 해 줄까 싶었을 정도의 현관이다. 계십니까 했더니 빨간 셔츠의 동생이 나왔다. 이 동생은 학교에서 나에게 대수와 산수를 배우는 지극히 공부 못하는 아이다. 그러면서 떠돌이 출신이라 태어날 때부터의 시골 사람보다 심보가 고약하다.

빨간 셔츠를 만나 볼일을 들어 보니, 대장은 그 호박 파이프로 탄내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 말을 했다. 「자네가 와 준 뒤로 전임자 때보다 성적이 잘 올라서 교장 선생님도 좋은 사람을 얻었다고 크게 기뻐하고 계시니 ― 부디 학교에서도 믿고 있으니 그런 줄 알고 힘써 주었으면 하네」

「허, 그렇습니까, 힘쓰라니 지금보다 더 힘쓸 수는 없는데요 ―」

「지금 정도면 충분하네. 다만 지난번에 말한 일 말일세, 그걸 잊지 말아 주면 되네」

「하숙 주선 따위를 하는 사람은 위험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면 뜻도 없는 일이 되지만 ― 뭐 좋네 ― 정신은 자네에게도 잘 통하고 있으리라 믿으니까. 그래서 자네가 지금처럼 힘써 준다면 학교 쪽에서도 제대로 보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형편만 되면 대우 문제도 얼마간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네만」

「허, 봉급 말입니까. 봉급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만 오르면 오르는 편이 좋지요」

「그래서 마침 이번에 전임하는 사람이 하나 생기니 ― 물론 교장 선생님과 의논해 보지 않으면 장담은 못 하지만 ― 그 봉급에서 조금 돌릴 수 있을지 모르니, 그걸로 형편을 맞추도록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려 볼까 하네만」

「참 고맙습니다. 누가 전임합니까」

「이제 곧 발표될 테니 말해도 상관없겠지. 실은 고가 군일세」

「고가 씨는, 아니 여기 사람 아닙니까」

「이 고장 사람이지만 좀 사정이 있어서 ― 반은 본인의 희망일세」

「어디로 갑니까」

「휴가의 노베오카로 ― 고장이 고장인 만큼 한 급 봉급을 올려서 가게 되었네」

「누가 대신 옵니까」

「후임도 대강 정해졌네. 그 후임의 형편에 따라 자네 대우 문제도 맞춰지는 걸세」

「예, 좋습니다. 그렇지만 억지로 안 올려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나는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릴 작정일세. 그래서 교장 선생님도 같은 생각이신 모양인데, 머지않아 자네가 더 일해 주어야 하게 될지도 모르니 부디 지금부터 그런 각오로 해 주었으면 하네」

「지금보다 시간이라도 늘어납니까」

「아니, 시간은 지금보다 줄지도 모르는데 ―」

「시간이 줄고 더 일하다니 묘하군요」

「얼핏 들으면 묘하지만 ― 똑똑히는 지금 말하기 어렵네만 ― 뭐 말하자면 자네가 더 중대한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일세」

나로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지금보다 중대한 책임이라면 수학 주임일 텐데, 주임은 고슴도치니 녀석은 좀처럼 그만둘 리가 없다. 게다가 학생들 인망이 있으니 전임이나 파면은 학교에 득책이 아닐 거다. 빨간 셔츠 이야기는 언제나 요령부득이다. 요령부득이어도 볼일은 이걸로 끝났다. 그러고서 좀 잡담을 하는 사이에 끝물 호박 군 송별회를 한다는 것, 그래서 내가 술을 마시느냐는 물음이며, 끝물 호박 선생은 군자라 사랑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며 ― 빨간 셔츠는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끝내 말머리를 바꾸어 자네 하이쿠 하나, 하고 나오기에 이거 큰일이다 싶어서, 하이쿠는 안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대충 돌아왔다. 하이쿠는 바쇼나 이발소 주인이나 하는 거다. 수학 선생이 나팔꽃에 두레박줄을 빼앗겨서야 되겠나.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세상에는 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집과 땅은 물론이고 다니는 학교에 부족함이 없는 고향이 싫어졌다고 낯선 타향으로 고생을 찾아 나선다. 그것도 꽃 같은 도회지의 전차가 다니는 데라면 모르되 휴가의 노베오카라니 이게 무슨 소리냐. 나는 배편 좋은 여기 와서도 한 달이 안 되어 벌써 돌아가고 싶어졌다. 노베오카라고 하면 산속도 산속, 지독한 산속이다. 빨간 셔츠 말로는 배에서 내려 하루 마차를 타고 미야자키에 가서, 미야자키에서 또 하루 인력거를 타지 않으면 못 닿는단다. 이름을 듣기만 해도 트인 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원숭이와 사람이 반반씩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리 성인 같은 끝물 호박 군이라도 좋아서 원숭이 상대가 되고 싶지는 않을 텐데, 이 무슨 별난 취미냐.

그러는 데 여전히 할머니가 저녁을 날라 온다. 오늘도 또 고구마요, 하고 물어보았더니, 아니유 오늘은 두부유, 했다. 어느 쪽이든 비슷비슷하다.

「할머니 고가 씨는 휴가로 간다면서요」

「참말 딱해유」

「딱하다니, 좋아서 가는 거면 어쩔 수 없지요」

「좋아서 가다니, 누가유」

「누가유라니, 본인이지. 고가 선생이 별난 취미로 가는 것 아니오」

「그건 선생, 크게 틀린 간고로지유」

「간고로요. 그렇지만 방금 빨간 셔츠가 그렇게 말했소. 그게 간고로라면 빨간 셔츠는 거짓말쟁이 허풍선이 호라에몬이오」

「교감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당연하지만, 고가 씨가 가기 싫으신 것도 당연하지유」

「그러면 둘 다 당연하다는 거군요. 할머니는 공평해서 좋소.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오늘 아침 고가 씨 어머님이 오셔서 차근차근 사정을 이야기하셨는디유」

「어떤 사정을 이야기하셨소」

「그 댁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살림이 넉넉지 않아서 곤란하시니께, 어머님이 교장 선생님께 부탁하셔서, 벌써 사 년이나 다닌 사람이니께 부디 다달이 받는 걸 좀 올려 주실 수 없겠냐구유, 선생」

「과연」

「교장 선생님이, 잘 생각해 보겠다구 하셨대유. 그래서 어머님도 안심하시고, 이제 곧 월급 올려 준다는 분부가 있겠지, 이달일까 다음 달일까 하고 목을 빼고 기다리시던 차에, 교장 선생님이 잠깐 오라구 고가 씨한테 말씀하셔서 가 보니께, 딱하지만 학교는 돈이 모자라서 월급을 올려 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노베오카에는 빈자리가 있어서 그쪽이면 다달이 오 원을 더 받을 수 있으니, 바라던 대로 되어 좋겠다 싶어서 그렇게 절차를 밟았으니 가는 게 좋겠다구 하셨대유. ―」

「그럼 의논이 아니라 명령 아니오」

「그렇쥬. 고가 씨는 딴 데 가서 월급이 오르느니 전과 같아도 좋으니 여기 있고 싶다, 집도 있구 어머니도 있으니께 하고 부탁하셨는디, 벌써 그렇게 정한 뒤라, 고가 씨 후임도 정해졌으니 어쩔 수 없다구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대유」

「흥 사람을 바보로 아는군, 재미도 없다. 그럼 고가 씨는 갈 생각이 없는 거군요.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오 원쯤 올랐다고 그런 산속에 원숭이 상대를 하러 가는 벽창호는 없을 테니까」

「벽창호가 뭐래유, 선생」

「뭐든 상관없소, ― 완전히 빨간 셔츠의 계략이로군. 좋지 않은 짓이다. 영락없는 기습이군요. 그래서 내 월급을 올려 준다니 괘씸한 일도 다 있다. 올려 준대도 누가 올라 줄까 보냐」

「선생은 월급이 오르시는 거유」

「올려 준다니까 거절하려고 하오」

「왜 거절하시는 거유」

「무조건 거절이오. 할머니, 저 빨간 셔츠는 바보요. 비겁하오」

「비겁해도 선생, 월급을 올려 주시면 얌전히 받아 두는 게 이득이유. 젊을 때는 곧잘 화가 나는 법이지만, 나이 먹고 생각하면 조금만 참았으면 됐을 걸 아까운 짓을 했다, 화낸 탓에 이런 손해를 봤다구 뉘우치는 게 보통이니께, 이 늙은이 말 듣구, 빨간 셔츠 씨가 월급을 올려 주마 하시거든 고맙다구 받아 두셔유」

「늙은이 주제에 쓸데없는 참견 마시오. 내 월급은 오르든 내리든 내 월급이오」

할머니는 잠자코 들어갔다. 영감은 태평한 목소리로 요쿄쿠를 읊고 있다. 요쿄쿠라는 건 읽으면 알 수 있는 데를 유난히 어려운 가락을 붙여 일부러 모르게 하는 재주겠지. 저런 걸 밤마다 싫증도 안 내고 읊조리는 영감 속을 모르겠다. 나는 요쿄쿠 따위 들을 판이 아니다. 월급을 올려 준다기에 딱히 갖고 싶지도 않았지만 필요 없는 돈을 남겨 두는 것도 아깝다 싶어 좋다고 승낙했는데, 전임하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전임시켜서 그 사람 월급을 가로채다니 그런 몰인정한 짓을 할 수 있나. 본인이 전과 같아도 좋다는데 노베오카까지 떨어뜨리다니 대체 무슨 속셈일까. 귀양 간 다자이노곤노소치조차 하카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가와이 마타고로도 사가라에 머물렀지 않나. 아무튼 빨간 셔츠한테 가서 거절하고 오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린다.

무명 하카마를 입고 다시 나섰다. 큰 현관에 버티고 서서 계십니까 하니, 또 그 동생이 나왔다. 내 얼굴을 보고 또 왔나 하는 눈빛을 했다. 볼일이 있으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온다. 한밤중에라도 깨우지 말라는 법은 없다. 교감한테 문안 여쭈러 오는 나로 잘못 보고 있나. 이래 봬도 월급이 필요 없어서 돌려주러 온 거다. 그러자 동생이 지금 손님이 와 계신다기에, 현관이면 되니 잠깐 뵙고 싶다고 했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발밑을 보니 다다미를 붙인 얇은 굽 낮은 나막신이 있다. 안에서 이제 만세올시다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손님이란 알랑쇠로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알랑쇠가 아니고서야 저런 새된 목소리를 내고 이런 광대 같은 나막신을 신을 사람은 없다.

조금 있으니 빨간 셔츠가 남포를 들고 현관까지 나와서, 자 올라오게, 남이 아니라 요시카와 군일세, 하기에, 아니요 여기서 충분합니다. 잠깐 말씀드리면 됩니다, 하고 빨간 셔츠 얼굴을 보니 긴토키처럼 벌겋다. 알랑쇠 녀석과 한잔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까 제 월급을 올려 주신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생각이 좀 바뀌어서 거절하러 왔습니다」

빨간 셔츠는 남포를 앞으로 내밀고 안쪽에서 내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느닷없는 일이라 대답을 못 하고 멍하니 있다. 봉급 인상을 거절하는 놈이 세상에 단 하나 튀어나온 걸 이상히 여긴 건지, 거절한다 해도 지금 막 돌아가서 곧 다시 오지 않아도 될 텐데 하고 어이가 없는 건지, 아니면 둘이 합쳐진 건지, 묘한 입을 하고 선 채로 있다.

「그때 승낙한 건 고가 군이 제 희망으로 전임한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고……」

「고가 군은 정말 제 희망으로 반은 전임하는 걸세」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있고 싶어 합니다. 전 월급이라도 좋으니 고향에 있고 싶어 합니다」

「자네는 고가 군한테서 그렇게 들었나」

「그야 본인한테 들은 건 아닙니다」

「그럼 누구한테서 들었나」

「제 하숙 할머니가 고가 씨 어머님한테서 들은 걸 오늘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럼 하숙 할머니가 그렇게 말한 거로군」

「뭐 그렇습니다」

「그건 실례지만 좀 다르지 않나. 자네 말대로라면 하숙집 할머니 말은 믿지만 교감 말은 안 믿는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런 뜻으로 풀이해도 상관없겠나」

나는 좀 곤란해졌다. 문학사란 역시 대단한 것이다. 묘한 데에 매달려 끈적끈적 밀고 들어온다. 나는 곧잘 아버지에게 너는 덤벙대서 글렀다 글렀다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과연 좀 덤벙대는 모양이다.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흠칫해서 뛰쳐나왔지만 실은 끝물 호박 군도 끝물 호박 어머니도 만나서 자세한 사정을 들어 보지는 않았던 거다. 그러니 이렇게 문학사 식으로 베고 들어오면 좀 받아내기 어렵다.

정면으로는 받아내기 어렵지만 나는 이미 빨간 셔츠에 대해 불신임을 마음속으로 선고해 버렸다. 하숙 할머니도 구두쇠 욕심쟁이가 틀림없지만 거짓말은 안 하는 여자다, 빨간 셔츠처럼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 나는 할 수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 아무튼 봉급 인상은 사양하겠습니다」

「그건 더욱더 이상하군. 지금 자네가 일부러 온 건 봉급 인상을 받을 수 없는 까닭을 찾아냈기 때문인 것처럼 들렸는데, 그 까닭이 내 설명으로 없어졌는데도 봉급 인상을 거절하는 건 좀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군」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요. 아무튼 거절합니다」

「그렇게 싫다면 억지로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두세 시간 사이에 특별한 까닭도 없이 표변하면 장차 자네 신용에 관계되네」

「관계돼도 상관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네, 사람에게 신용만큼 소중한 건 없어요. 설령 한 발 양보해서 하숙 주인이……」

「주인이 아니라 할머니입니다」

「어느 쪽이든 좋네. 하숙 할머니가 자네에게 한 말을 사실이라 친다 해도, 자네 봉급 인상은 고가 군의 소득을 깎아서 얻는 게 아니지 않나. 고가 군은 노베오카로 가신다. 그 후임이 온다. 그 후임이 고가 군보다 다소 낮은 봉급으로 와 준다. 그 남는 걸 자네에게 돌린다는 거니, 자네는 누구에게도 미안해할 필요가 없을 걸세. 고가 군은 노베오카에서 지금보다 영전하신다. 신임자는 처음부터 약속으로 싸게 온다. 그래서 자네가 오른다면 이만큼 형편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네만. 싫으면 싫어도 좋지만 한 번 더 집에서 잘 생각해 보지 않겠나」

내 머리는 그다지 좋지 않으니 여느 때 같으면 상대가 이런 교묘한 말솜씨를 휘두르면, 어라 그런가, 그럼 내가 틀렸구나 하고 황송해서 물러나지만, 오늘 밤은 그렇게 안 된다. 여기 온 처음부터 빨간 셔츠는 어쩐지 밥맛이었다. 도중에 친절한 여자 같은 사람이라고 고쳐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게 친절이고 뭐고 아닌 것 같으니 반동으로 지금은 어지간히 싫어져 있다. 그러니 저쪽이 아무리 교묘하게 논리적으로 말솜씨를 뽐내든, 당당한 교감 식으로 나를 몰아세우든 그런 건 상관없다. 말 잘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고 정해진 건 아니다. 몰리는 쪽이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 겉으로는 빨간 셔츠 쪽이 거듭 지당하지만, 겉이 아무리 훌륭해도 속까지 반하게 할 수는 없다. 돈이나 위세나 이치로 사람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고리대금업자나 순사나 대학 교수가 제일 사랑받아야 한다. 중학교 교감쯤의 논법으로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겠나. 사람은 좋고 싫음으로 움직이는 거다. 논법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선생님 말씀은 지당하지만, 저는 봉급 인상이 싫어졌으니 뭐 거절하겠습니다.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내뱉고 대문을 나왔다. 머리 위에는 은하수가 한 줄기 걸려 있다.

9장

끝물 호박 군의 송별회가 있다는 날 아침 학교에 나갔더니, 고슴도치가 갑자기, 자네 지난번엔 이카긴이 와서 자네가 난폭하게 굴어서 곤란하니 부디 나가도록 말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곧이듣고 자네에게 나가 주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 그놈은 나쁜 놈이라 곧잘 가짜 글씨에 가짜 낙관을 찍어서 팔아넘긴다니, 자네 일도 틀림없이 엉터리일 거야. 자네에게 족자며 골동품을 팔아넘겨서 장사를 하려고 했는데 자네가 상대를 안 해 줘서 벌이가 없으니까 그런 거짓말을 지어내서 얼버무린 거지. 나는 그 사람을 몰라서 자네에게 크게 실례했네, 용서하게, 하고 길게 사과를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슴도치 책상 위에 있던 일 전 오 리를 집어 내 동전 지갑 속에 넣었다. 고슴도치가 자네 그걸 거둬들이는 건가, 하고 이상한 듯 묻기에, 응 나는 자네한테 얻어먹는 게 싫어서 꼭 돌려줄 작정이었는데 그 뒤로 차츰 생각해 보니 역시 얻어먹는 편이 좋은 것 같아서 거둬들이는 거다, 하고 설명했다. 고슴도치는 큰 소리로 아하하하 웃으면서, 그러면 왜 진작 안 가져갔나, 하고 물었다. 실은 가져가려고 가져가려고 했는데 어쩐지 묘해서 그대로 두었다. 요즘은 학교에 와서 일 전 오 리를 보는 게 괴로울 만큼 싫었다고 했더니, 자네는 어지간히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군, 하기에, 자네는 어지간히 고집쟁이다, 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고서 두 사람 사이에 이런 문답이 일어났다.

「자네는 대체 어디 출신인가」

「나는 도쿄 토박이다」

「응, 도쿄 토박이인가, 어쩐지 지기 싫어하는 게 세다 했지」

「자네는 어디냐」

「나는 아이즈일세」

「아이즈 촌놈이군, 고집이 셀 만하다. 오늘 송별회에 가나」

「가고말고, 자네는?」

「나는 물론 간다. 고가 씨가 떠날 때는 바닷가까지 배웅 갈 생각까지 하고 있다」

「송별회는 재미있다네, 나와 보게. 오늘은 크게 마실 작정일세」

「마음대로 마셔라. 나는 안주를 먹으면 곧 돌아간다. 술 따위 마시는 놈은 바보다」

「자네는 금방 싸움을 거는 사람이군. 과연 도쿄 토박이의 경박한 기풍을 잘 드러내는군」

「아무래도 좋다, 송별회 가기 전에 잠깐 우리 집에 들러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고슴도치는 약속대로 내 하숙에 들렀다. 나는 요전부터 끝물 호박 군 얼굴을 볼 때마다 딱해서 견딜 수 없었는데, 드디어 송별 날인 오늘이 되니 어쩐지 가여워서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가 주고 싶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송별회 자리에서 크게 연설이라도 해서 그 길을 성대하게 해 주고 싶은데, 내 도쿄 토박이 막말 투로는 도저히 안 되니, 큰 소리를 내는 고슴도치를 고용해서 한번 빨간 셔츠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주자고 생각해 냈으므로 일부러 고슴도치를 부른 것이다.

나는 먼저 서두로 마돈나 사건부터 이야기를 꺼냈는데, 고슴도치는 물론 마돈나 사건은 나보다 자세히 알고 있다. 내가 노제리강 둑 이야기를 하고 저건 바보 녀석이라고 했더니, 고슴도치는 자네는 누구를 붙잡든 바보라고 부르는군. 오늘 학교에서 자기 자신을 바보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바보라면 빨간 셔츠는 바보가 아니지. 자네는 빨간 셔츠와 같은 부류가 아니다, 하고 주장했다. 그럼 빨간 셔츠는 얼빠진 멍청이다, 했더니,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고슴도치는 크게 찬성했다. 고슴도치는 세기는 세지만 이런 말이 되면 나보다 훨씬 말을 모른다. 아이즈 촌놈이란 다 이런 거겠지.

그러고서 봉급 인상 사건과 장차 중하게 쓰겠다고 빨간 셔츠가 한 이야기를 했더니, 고슴도치는 흥 하고 코로 소리를 내며, 그럼 나를 파면할 생각이로군, 했다. 파면할 작정이라니 자네는 파면당할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누가 당할까 보냐, 내가 파면되면 빨간 셔츠도 같이 파면시켜 주겠다고 크게 뽐냈다. 어떻게 같이 파면시킬 생각이냐고 되받아 물었더니, 그건 아직 생각 안 해 봤다고 대답했다. 고슴도치는 세 보이지만 꾀는 그다지 없는 것 같다. 내가 봉급 인상을 거절했다고 이야기하니 대장이 크게 기뻐하며, 과연 도쿄 토박이다, 장하다, 하고 칭찬해 주었다.

끝물 호박이 그렇게 싫어하는데 왜 유임 운동을 해 주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끝물 호박한테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미 정해져 버려서 교장한테 두 번, 빨간 셔츠한테 한 번 가서 담판해 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했다. 그것도 고가가 너무 호인이라 곤란하다. 빨간 셔츠한테서 말이 있었을 때 딱 잘라 거절하든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고 빠지면 될 걸, 그 말솜씨에 속아서 그 자리에서 승낙해 버렸으니, 나중에 어머니가 매달려도 자기가 담판하러 가도 소용이 없었다고 몹시 분해했다.

이번 사건은 완전히 빨간 셔츠가 끝물 호박을 멀리 보내고 마돈나를 손에 넣으려는 계략이겠지, 하고 내가 말했더니, 물론 그게 틀림없다. 그놈은 얌전한 얼굴을 하고 나쁜 짓을 하고, 남이 무슨 말을 하면 제대로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니 어지간한 간신이다. 그런 놈한테는 주먹 제재가 아니면 안 듣는다, 하고 혹투성이 팔을 걷어 보였다. 나는 내친김에, 자네 팔은 세 보이는군, 유도라도 하나,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대장은 팔뚝에 힘을 불끈 주더니 좀 쥐어 보라기에 손끝으로 주물러 보니, 영락없이 목욕탕에 있는 부석 같다.

나는 몹시 감탄해서, 자네 그만한 팔이면 빨간 셔츠 대여섯은 한꺼번에 날려 버리겠군, 하고 물었더니, 물론이지, 하면서 굽힌 팔을 폈다 오므렸다 하니 알통이 가죽 속에서 빙글빙글 돈다. 아주 유쾌하다. 고슴도치가 증명하는 바로는 종이 노끈을 두 가닥 꼬아 이 알통이 솟는 데에 감고 팔을 힘껏 굽히면 툭 끊어진단다. 종이 노끈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고 했더니,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 나왔다. 안 끊어지면 체면이 안 서니 나는 그만두었다.

자네 어떤가, 오늘 밤 송별회에서 크게 마신 뒤 빨간 셔츠와 알랑쇠를 두들겨 주지 않겠나, 하고 재미 삼아 권해 보았더니, 고슴도치는 글쎄, 하고 생각하다가 오늘 밤은 뭐 그만두세, 했다. 왜냐고 물으니 오늘 밤은 고가에게 미안하니까 ― 게다가 어차피 때릴 거라면 그놈들의 나쁜 짓을 확인하고 현장에서 때리지 않으면 이쪽 잘못이 되니까, 하고 분별 있어 보이는 말을 덧붙였다. 고슴도치도 나보다는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그럼 연설을 해서 고가 군을 크게 칭찬해 주게, 내가 하면 도쿄 토박이의 수다가 되어 무게가 없어서 안 된다. 게다가 정해진 자리에 나서면 갑자기 속이 치밀어 목구멍께로 큰 덩어리가 올라와서 말이 안 나오니 자네한테 맡기겠다고 했더니, 묘한 병이로군, 그럼 자네는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못 하는구먼, 곤란하겠지, 하고 묻기에, 뭐 그렇게 곤란하지는 않다고 대답해 두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되었으므로 고슴도치와 함께 모임 장소로 간다. 장소는 가신테이라는 곳으로 이 고장에서 제일가는 요릿집이라는데, 나는 한 번도 발을 들여 본 적이 없다. 옛날 가로인지 하는 사람의 저택을 사들여 그대로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겉보기부터 위엄 있는 차림새다. 가로의 저택이 요릿집이 되는 건 진바오리를 뜯어 고쳐 조끼로 만드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이 닿았을 무렵에는 사람들도 벌써 대개 모여서 쉰 첩짜리 넓은 방에 두세 무리의 사람 덩어리가 생겨 있다. 쉰 첩인 만큼 도코노마가 굉장히 크다. 내가 야마시로야에서 차지했던 열다섯 첩 방의 도코노마와는 견줄 것도 없다. 재어 보니 세 미터 반이었다. 오른쪽에 붉은 무늬가 있는 사기 항아리를 놓고 그 안에 큰 소나무 가지를 꽂아 놓았다. 소나무 가지를 꽂아서 무얼 하려는지 모르지만, 몇 달이 지나도 질 염려가 없으니 돈이 안 들어서 좋겠다. 저 사기그릇은 어디서 나느냐고 박물 선생에게 물었더니, 저건 사기가 아니라 이마리요, 했다. 이마리라도 사기그릇 아니냐고 했더니 박물 선생은 에헤헤헤헤 웃고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세토에서 나는 구운 그릇이라 세토모노라고 부른단다. 나는 도쿄 토박이라 도자기를 다 세토모노라고 하는 줄 알았다. 도코노마 한가운데에 큰 족자가 있고, 내 얼굴만 한 크기의 글자가 스물여덟 자 쓰여 있다. 아무래도 서툴다. 너무 못났기에 한문 선생에게, 왜 저런 못난 걸 번드르르하게 걸어 두는 겁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생은 저건 가이오쿠라는 이름난 서예가가 쓴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가이오쿠인지 뭔지 나는 지금도 서툴다고 생각한다.

이윽고 서기 가와무라가 부디 자리에 앉으시라고 하기에, 기둥이 있어 기대기 좋은 데에 앉았다. 가이오쿠 족자 앞에 너구리가 하오리와 하카마 차림으로 앉자, 왼쪽에 빨간 셔츠가 역시 하오리 하카마로 자리를 잡았다. 오른쪽은 주인공이라고 끝물 호박 선생이, 이 사람도 일본 옷으로 앉아 있다. 나는 양복이라 꿇어앉기가 거북해서 곧 책상다리를 했다. 옆자리 체조 선생은 검은 바지에 반듯이 꿇어앉아 있다. 체조 선생인 만큼 유난히 수련이 쌓여 있다. 이윽고 밥상이 나온다. 술병이 늘어선다. 간사가 일어나 한마디 개회사를 한다. 그러고서 너구리가 일어선다. 빨간 셔츠가 일어선다. 모두 송별사를 했는데, 셋 다 짜기라도 한 듯 끝물 호박 군이 좋은 교사이고 호인이라는 걸 떠벌리며, 이번에 떠나시는 건 참으로 유감이다, 학교로서뿐 아니라 개인으로서도 크게 아쉬운 바이지만, 일신상의 사정으로 간절히 전임을 희망하셨으니 어쩔 수 없다는 뜻을 말했다. 이런 거짓말을 하며 송별회를 열고 그래서 조금도 부끄럽다고도 여기지 않는다. 특히 빨간 셔츠는 셋 가운데 끝물 호박 군을 가장 칭찬했다. 이 좋은 벗을 잃는 건 실로 자기에게 큰 불행이라고까지 말했다. 게다가 그 말투가 자못 그럴듯해서,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한층 부드럽게 해서 늘어놓으니, 처음 듣는 사람은 누구나 틀림없이 속게 되어 있다. 마돈나도 아마 이 수로 낚았겠지. 빨간 셔츠가 송별사를 늘어놓는 한창때, 건너편에 앉아 있던 고슴도치가 내 얼굴을 보고 잠깐 번갯불을 번쩍였다. 나는 답신으로 집게손가락으로 눈 밑을 당겨 메롱을 해 보였다.

빨간 셔츠가 자리에 돌아가기를 기다렸다는 듯 고슴도치가 불쑥 일어섰으므로 나는 기뻐서 저도 모르게 손뼉을 짝짝 쳤다. 그러자 너구리를 비롯해 모두가 죄다 내 쪽을 보는 데는 좀 곤란했다. 고슴도치는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방금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특히 교감 선생님은 고가 군의 전임을 몹시 아쉬워하셨지만, 저는 좀 반대로 고가 군이 하루라도 빨리 이 고장을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노베오카는 외딴 곳이라 이 고장에 견주면 물질상의 불편은 있겠지요. 그러나 듣자니 풍속이 아주 순박한 곳이라, 직원이며 학생이 모두 옛날의 소박하고 곧은 기풍을 띠고 있다고 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아첨을 뿌리거나 고운 얼굴을 하고 군자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하는 멋쟁이 놈은 하나도 없다고 믿으니, 군과 같이 온화하고 두터운 선비는 반드시 그 지방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는 크게 고가 군을 위해 이 전임을 축하하는 바입니다. 끝으로 군이 노베오카에 부임하시거든 그 고장의 숙녀로서 군자의 좋은 짝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 이를 골라 하루라도 빨리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 저 정조도 절개도 없는 말괄량이를 사실로써 부끄러워 죽게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에헴 에헴 하고 큰 헛기침을 두 번쯤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이번에도 손뼉을 치려고 했지만 또 모두가 내 낯짝을 보면 싫으니 그만두었다. 고슴도치가 앉자 이번에는 끝물 호박 선생이 일어섰다. 선생은 정중하게 제자리에서 방 끝 말석까지 가서 공손히 모두에게 인사를 한 다음, 이번에 일신상의 사정으로 규슈로 가게 된 데 대해 여러 선생님께서 소생을 위해 이렇게 성대한 송별회를 열어 주신 것은 참으로 감격하기 그지없는 바로서 ― 특히 방금은 교장, 교감 그 밖의 여러분의 송별사를 받자와 크게 고맙게 마음에 새기는 바입니다. 저는 이제 먼 곳으로 갑니다만, 부디 지금까지처럼 버리지 마시고 돌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넙죽 엎드렸다가 자리로 돌아갔다. 끝물 호박 군은 어디까지 사람이 좋은지 거의 밑을 알 수가 없다. 저를 이렇게 바보 취급한 교장이나 교감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있다. 그것도 의리로 한 번 하는 인사라면 모를까, 저 모습이며 저 말투며 저 얼굴로 보면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성인에게 진지하게 인사를 받으면 미안해져서 얼굴이 붉어질 법한데, 너구리도 빨간 셔츠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을 뿐이다.

인사가 끝나자 저쪽에서도 쪽, 이쪽에서도 쪽, 하는 소리가 난다. 나도 흉내를 내서 국을 마셔 보았는데 맛이 없다. 전채에 어묵은 딸려 있지만 거무죽죽해서 지쿠와 못난이다. 회도 늘어서 있지만 두꺼워서 참치 토막을 날로 먹는 것과 같다. 그래도 옆 사람들은 우걱우걱 맛있게 먹고 있다. 아마 도쿄식 요리를 먹어 본 적이 없는 거겠지.

그러는 사이 데운 술병이 부지런히 오가기 시작하니 사방이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알랑쇠 녀석은 공손히 교장 앞에 나가 잔을 받고 있다. 밉살스러운 놈이다. 끝물 호박 군은 차례차례 잔을 주고받으며 한 바퀴 돌 작정인 모양이다. 몹시 수고스럽다. 끝물 호박 군이 내 앞에 와서, 한 잔 받겠습니다, 하고 하카마 주름을 바로 하고 청하기에, 나도 거북하게 바지 차림으로 꿇어앉아 한 잔 드렸다. 모처럼 왔는데 곧 헤어지게 되다니 아쉽군요. 떠나시는 건 언제입니까, 꼭 바닷가까지 배웅하겠습니다, 했더니 끝물 호박 군은, 아닙니다 바쁘신데 결코 그러실 것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끝물 호박 군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학교를 쉬고 배웅할 생각이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사이에 자리가 꽤 흐트러진다. 자 한 잔, 어라 내가 마시라는데…… 하고 혀가 잘 안 돌아가는 사람도 한둘 생겼다. 좀 지루해서 뒷간에 가서 옛날식 뜰을 별빛에 비추어 바라보고 있으니 고슴도치가 왔다. 어떤가 아까 연설은 잘했지, 하고 꽤 우쭐해 있다. 대찬성이지만 한 군데 마음에 안 드는 데가 있다고 항의를 했더니, 어디가 반대냐고 물었다.

「고운 얼굴을 하고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멋쟁이 놈은 노베오카에 없으니까…… 라고 자네 말했지」

「응」

「멋쟁이 놈만으로는 모자란다」

「그럼 뭐라고 하나」

「멋쟁이 놈의, 사기꾼의, 협잡꾼의, 내숭쟁이의, 약장수의, 날다람쥐의, 끄나풀의, 멍멍 짖으면 개나 다름없는 놈이라고나 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혀가 안 돌아가. 자네는 말을 잘하는군. 무엇보다 낱말을 굉장히 많이 알아. 그런데 연설을 못 한다니 이상하군」

「뭐 이건 싸울 때 쓰려고 조심해서 모아 두는 말이다. 연설이 되면 이렇게 안 나온다」

「그런가, 그렇지만 술술 나오는데. 한 번 더 해 보게」

「몇 번이든 하지, 됐나. ― 멋쟁이 놈의 사기꾼의, 협잡꾼의……」 하고 말하고 있는데, 툇마루를 쿵쾅거리며 두 사람쯤이 비틀비틀 달려 나왔다.

「두 분 그건 너무하오, ― 도망치다니, ― 내가 있는 동안은 결코 안 놓치오, 자 마시오. ― 협잡꾼? ― 재미있소, 협잡 재미있소. ― 자 마시오」

하고 나와 고슴도치를 쭉쭉 잡아끌고 간다. 실은 이 두 사람도 뒷간에 온 건데, 취했으니까 뒷간에 들어가는 걸 잊고 우리를 끌고 가는 거겠지. 술 취한 사람은 눈에 띄는 데에 볼일을 만들고 앞의 일은 곧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자, 여러분, 협잡꾼을 끌고 왔소. 자 마시게 해 주시오. 협잡꾼을 흠뻑 취하게 해 주시오. 자네 도망치면 안 되네」

하고 도망치지도 않는 나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사방을 둘러보니 밥상 위에 온전한 안주가 올라 있는 건 하나도 없다. 제 몫을 깨끗이 먹어 치우고 열 미터쯤 앞으로 원정을 나간 놈도 있다. 교장은 언제 돌아갔는지 모습이 안 보인다.

그러는 데 방이 여기인가요? 하고 기생이 서넛 들어왔다. 나도 좀 놀랐지만 벽에 밀어붙여져 있으니 가만히 그저 보고 있었다. 그러자 여태 도코노마 기둥에 기대어 그 호박 파이프를 자랑스레 물고 있던 빨간 셔츠가 갑자기 일어나 방을 나가려 했다. 맞은편에서 들어온 기생 하나가 엇갈리면서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 하나는 제일 어리고 제일 예쁜 기생이다. 멀어서 안 들렸지만, 어머 안녕하세요, 쯤 말한 모양이다. 빨간 셔츠는 모르는 척 나가더니 그 뒤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아마 교장 뒤를 쫓아 돌아갔겠지.

기생이 오자 방 안이 갑자기 들떠서,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환영했나 싶을 만큼 시끄럽다. 그러고는 어떤 놈은 난코 놀이를 한다. 그 소리 큰 것이 영락없는 칼 뽑기 연습 같다. 이쪽에서는 겐 놀이를 하고 있다. 욧, 핫, 하고 정신없이 두 손을 휘두르는 품은 다크 극단의 꼭두각시보다 훨씬 능숙하다. 저쪽 구석에서는 어이 술 따라, 하고 술병을 흔들어 보고는 술이다 술이다 하고 고쳐 말하고 있다. 아무래도 시끄럽고 떠들썩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 가운데 심심하게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는 건 끝물 호박 군뿐이다. 자기를 위해 송별회를 열어 준 건 자기 전임을 아쉬워해서가 아니다. 모두가 술을 마시고 놀기 위해서다. 자기 혼자 심심하게 괴로워하기 위해서다. 이런 송별회라면 안 열어 주는 편이 훨씬 낫다.

조금 있으니 저마다 탁한 목소리로 무언가 부르기 시작했다. 내 앞에 온 기생 하나가, 보소, 뭐라도 한 곡 하이소, 하고 샤미센을 끌어안기에, 나는 노래 안 한다, 네가 불러 봐라, 했더니, 징이며 북으로 에헤, 길 잃은 길 잃은 산타로야, 둥둥둥 둥치 창치키린. 두드리고 돌아서 만날 수만 있다면, 나 같은 것도 징이며 북으로 둥둥둥 둥치 창치키린 두드리고 돌아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고 두 숨에 부르고는 아이고 숨차라, 했다. 숨차면 좀 더 편한 걸 부르면 될 것을.

그러자 어느새 곁에 와서 앉은 알랑쇠가, 스즈짱,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나 싶었더니 곧 돌아가셔서 딱하게 됐구먼요, 하고 여전히 만담꾼 같은 말투를 쓴다. 모립니더, 하고 기생은 새침하게 시치미를 뗐다. 알랑쇠는 아랑곳없이, 어쩌다 만나기는 만났건만…… 하고 언짢은 목소리를 내어 기다유 흉내를 낸다. 고마 하이소, 하고 기생이 손바닥으로 알랑쇠 무릎을 치니 알랑쇠는 황송해하며 웃고 있다. 이 기생은 빨간 셔츠에게 인사를 한 기생이다. 기생에게 얻어맞고 웃다니 알랑쇠도 어지간히 속 편한 사람이다. 스즈짱, 내가 기이노쿠니를 출 테니 한 곡 켜 주오, 하고 나섰다. 알랑쇠는 이 위에 또 춤까지 출 작정이다.

저쪽에서는 한문 할아버지가 이 빠진 입을 일그러뜨리며, 그건 들리지 않아요 덴베에 씨, 당신과 나 그 사이는…… 까지는 무사히 넘어갔는데, 그다음은? 하고 기생에게 묻고 있다. 할아버지란 기억력이 나쁜 법이다. 하나는 박물 선생을 붙잡고, 요새 이런 게 나왔는데예, 한번 켜 볼까예. 잘 들어 보이소 ― 가게쓰 머리에 흰 리본의 서양식 머리, 타는 건 자전거, 켜는 건 바이올린, 어설픈 영어로 줄줄, I am glad to see you, 하고 부르니, 박물 선생은 과연 재미있군, 영어가 들어갔군, 하고 감탄하고 있다.

고슴도치는 턱없이 큰 소리로 기생, 기생, 하고 불러서, 내가 칼춤을 출 테니 샤미센을 켜라, 하고 호령을 내렸다. 기생은 너무 난폭한 목소리라 어안이 벙벙해서 대답도 안 한다. 고슴도치는 아랑곳없이 지팡이를 가져와서, 천산만악의 연기를 밟아 넘고, 하고 한가운데로 나가 혼자 장기를 선보이고 있다. 그러는 데 알랑쇠가 벌써 기이노쿠니를 마치고 갓포레를 마치고 선반의 다루마 춤까지 마치고, 알몸에 훈도시 한 장 차림이 되어 종려 빗자루를 옆구리에 끼고, 청일 담판 결렬되어…… 하고 방 안을 누비며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미치광이다.

나는 아까부터 괴로운 듯 하카마도 벗지 않고 앉아 있는 끝물 호박 군이 딱해서 견딜 수 없었는데, 아무리 제 송별회라도 훈도시 알몸 춤까지 하오리 하카마 차림으로 참고 보고 있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곁에 가서, 고가 씨 이제 돌아갑시다, 하고 물러가기를 권해 보았다. 그러자 끝물 호박 군은, 오늘은 제 송별회니 제가 먼저 돌아가면 실례입니다, 부디 괘념치 마십시오, 하고 움직일 낌새도 없다. 뭐 상관있습니까, 송별회라면 송별회답게 해야지요, 저 꼴을 보십시오. 미치광이 모임입니다. 자 갑시다, 하고 내키지 않는 걸 억지로 권해 방을 나서려는 참에, 알랑쇠가 빗자루를 휘두르며 나아와서, 야 주인이 먼저 돌아가다니 너무하지요. 청일 담판이올시다. 못 돌려보냅니다요, 하고 빗자루를 옆으로 해서 가는 길을 막았다. 나는 아까부터 울화가 치밀어 있던 참이라, 청일 담판이면 네놈은 청나라 놈이겠구나, 하고 대뜸 주먹으로 알랑쇠 머리를 딱 먹여 주었다. 알랑쇠는 이삼 초 동안 넋이 빠진 꼴로 멍하니 있더니, 어라 이거 너무하시네. 치시다니 한심합니다요. 이 요시카와를 때리시다니 황송하옵니다요. 이제야말로 청일 담판이올시다, 하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데에, 뒤에서 고슴도치가 무언가 소동이 벌어졌구나 알아차리고 칼춤을 그만두고 뛰어왔는데, 이 꼴을 보고 대뜸 목덜미를 꽉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청일…… 아야. 아야. 이건 너무 난폭하다고 버둥거리는 걸 옆으로 비틀었더니 털썩 쓰러졌다. 그 뒤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도중에 끝물 호박 군과 헤어져 집에 돌아오니 열한 시가 넘었다.

10장

전승 축하회라 학교는 쉰다. 연병장에서 식이 있다고 해서 너구리는 학생들을 이끌고 참석해야 한다. 나도 직원의 한 사람으로 같이 따라가는 거다. 거리에 나가니 온통 일장기라 눈이 부실 정도다. 학교 학생이 팔백 명이나 되니, 체조 선생이 대오를 정돈해서 반과 반 사이를 조금씩 띄우고, 거기에 직원이 한둘씩 감독으로 끼어드는 장치다. 장치만은 아주 교묘하지만 실제로는 몹시 서툴다. 학생들은 아이인 데다 건방져서 규율을 깨지 않으면 학생 체면이 안 선다고 여기는 놈들이니, 직원이 몇 명 따라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명령도 안 내렸는데 제멋대로 군가를 부르고, 군가를 그치면 까닭도 없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르고, 꼭 낭인들이 동네를 누비며 돌아다니는 것 같다. 군가도 함성도 안 지를 때는 와글와글 무언가 떠들고 있다. 떠들지 않아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본 사람은 다 입부터 먼저 태어나니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들을 리가 없다. 떠드는 것도 그냥 떠드는 게 아니라 교사 흉을 떠드는 거니 하등이다. 나는 숙직 사건으로 학생들에게 사과를 시켰으니 뭐 이만하면 됐겠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크게 틀렸다. 하숙 할머니 말을 빌리면 그야말로 크게 틀린 간고로다. 학생들이 사과한 건 진심으로 뉘우쳐서 사과한 게 아니다. 그저 교장한테 명령을 받아 형식으로 머리를 숙인 거다. 장사꾼이 머리만 숙이고 교활한 짓을 그만두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생들도 사과만은 하지만 장난은 결코 그만두지 않는다. 잘 생각해 보면 세상은 다 이 학생들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남이 사과하거나 비는 걸 곧이듣고 용서하는 건 너무 정직한 바보라고 하는 거겠지. 사과하는 것도 임시로 사과하는 거고 용서하는 것도 임시로 용서하는 거라고 여기고 있으면 지장이 없다. 만약 정말로 사과시킬 생각이라면 정말로 뉘우칠 때까지 두들겨야 한다.

내가 반과 반 사이에 끼어 가니 튀김이니 경단이니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난다. 게다가 여럿이니 누가 하는 말인지 모른다. 설령 알아도 선생님을 튀김이라고 한 게 아닙니다, 경단이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건 선생님이 신경 쇠약이라 비뚤어져서 그렇게 들리는 거지요, 쯤 할 게 뻔하다. 이런 비열한 근성은 봉건 시대부터 길러 온 이 고장 관습이니 아무리 타일러도 가르쳐도 도저히 고쳐질 리가 없다. 이런 고장에 일 년이나 있으면 결백한 나도 이 흉내를 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될지도 모른다. 저쪽이 잘 발뺌할 수 있는 수단으로 내 얼굴에 먹칠하는 걸 내버려 둘 까닭은 없다. 저쪽이 사람이면 나도 사람이다. 학생이라도 아이라도 덩치는 나보다 크다. 그러니 벌로 무언가 앙갚음을 해 주지 않으면 의리가 아니다. 그런데 이쪽에서 앙갚음을 할 때 보통 수단으로 가면 저쪽에서 되받아친다. 네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하면, 처음부터 도망칠 길을 만들어 놓은 거라 청산유수로 늘어놓는다. 늘어놓아 놓고 제 쪽을 겉으로만 훌륭하게 세우고 나서 이쪽 잘못을 공격한다. 본디 앙갚음으로 한 일이니 이쪽 변호는 저쪽 잘못이 드러나지 않는 한 변호가 안 된다. 결국은 저쪽에서 먼저 손을 대 놓고, 세상 보기에는 이쪽이 건 싸움처럼 여겨지고 만다. 엄청난 손해다. 그렇다고 저쪽이 하는 대로 멍청이인 척하고 있으면 저쪽은 점점 기어오를 뿐, 크게 말하면 세상을 위해 좋지 않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쪽도 저쪽 수법을 써서 붙잡히지 않고 손쓸 도리가 없는 앙갚음을 해야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도쿄 토박이도 끝이다. 끝이지만 일 년이나 이렇게 당하는 이상 나도 사람이니 끝이고 뭐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수습이 안 된다. 아무래도 어서 도쿄에 돌아가 기요와 함께 사는 게 제일이다. 이런 시골에 있는 건 타락하러 온 것과 같다. 신문 배달을 해도 여기까지 타락하는 것보다는 낫다.

이렇게 생각하며 마지못해 따라가는데, 어쩐지 선두가 갑자기 와글와글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행렬이 딱 멈춘다. 이상해서 행렬을 오른쪽으로 벗어나 앞을 보니, 오테마치를 막다른 데서 야쿠시마치로 꺾이는 모퉁이에서 막힌 채로 밀었다 밀렸다 하며 옥신각신하고 있다. 앞쪽에서 조용히 조용히 하고 목이 쉬어 온 체조 선생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모퉁이에서 중학교와 사범학교가 부딪쳤단다.

중학과 사범은 어느 현에서나 개와 원숭이처럼 사이가 나쁘단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도무지 기풍이 안 맞는다. 무슨 일만 있으면 싸운다. 아마 좁은 시골이라 심심하니까 시간 때우기로 하는 거겠지. 나는 싸움을 좋아하는 편이라 충돌이라는 말을 듣고 재미 삼아 뛰어갔다. 그러자 앞쪽에 있는 녀석들은 자꾸만, 뭐야 지방세로 공부하는 주제에, 물러나라, 하고 고함치고 있다. 뒤에서는 밀어라 밀어라 하고 큰 소리를 낸다. 나는 거치적거리는 학생들 사이를 빠져나가 모퉁이로 막 나서려고 할 때, 앞으로! 하는 높고 날카로운 호령이 들리나 싶더니 사범학교 쪽은 엄숙하게 행진을 시작했다. 앞을 다툰 충돌은 절충이 된 게 틀림없지만, 결국 중학교가 한 발 양보한 거다. 자격으로 치면 사범학교 쪽이 위란다.

전승 축하식은 아주 간단했다. 여단장이 축사를 읽고, 지사가 축사를 읽고, 참석자들이 만세를 부른다. 그걸로 끝이다. 여흥은 오후에 있다고 해서 일단 하숙에 돌아와, 요 며칠 마음에 걸리던 기요에게 보낼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더 자세히 써 달라는 주문이니 될 수 있는 대로 꼼꼼히 적어야 한다. 그런데 막상 두루마리를 집어 드니 쓸 건 많은데 무엇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그걸 쓸까, 그건 귀찮다. 이걸 쓸까, 이건 시시하다. 무언가 술술 나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서 기요가 재미있어할 만한 게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그런 주문대로의 사건은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나는 먹을 갈고 붓을 적시고 두루마리를 노려보고, ― 두루마리를 노려보고 붓을 적시고 먹을 갈고 ― 같은 짓을 같은 식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한 끝에, 나로서는 도저히 편지를 쓸 수 없다고 단념하고 벼루 뚜껑을 덮어 버렸다. 편지 따위 쓰는 건 귀찮다. 역시 도쿄까지 나가서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간편하다. 기요의 걱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기요의 주문대로 편지를 쓰는 건 스무하루 단식보다 괴롭다.

나는 붓과 두루마리를 내던지고 벌렁 누워 팔베개를 하고 뜰 쪽을 바라보았지만, 역시 기요 일이 마음에 걸린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먼 데까지 와서도 기요의 신상을 걱정하고 있기만 하면 내 진심은 기요에게 통할 게 틀림없다. 통하기만 하면 편지 따위 보낼 필요는 없다. 안 보내면 무사히 지내고 있는 줄 알겠지. 소식은 죽을 때나 아플 때나 무슨 일이 생겼을 때만 보내면 되는 셈이다.

뜰은 열 평쯤 되는 평평한 뜰로, 이렇다 할 나무도 없다. 다만 귤나무 한 그루가 있어 담 밖에서도 표적이 될 만큼 높다. 나는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이 귤나무를 바라본다. 도쿄를 떠나 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귤이 열려 있는 모습이 아주 진기하다. 저 파란 열매가 차츰 익어서 누렇게 되겠지, 틀림없이 예쁘겠지. 지금도 벌써 반쯤 빛이 바뀐 게 있다.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아주 물이 많고 맛있는 귤이란다. 이제 익으면 실컷 드시라고 했으니 날마다 조금씩 먹어 주자. 이제 세 주일만 지나면 넉넉히 먹을 수 있겠지. 설마 세 주일 안에 여기를 떠날 일은 없겠지.

내가 귤 생각을 하고 있는 데에 우연히 고슴도치가 이야기하러 왔다. 오늘은 전승 축하회니 자네와 같이 맛있는 걸 먹으려고 쇠고기를 사 왔다며, 대나무 껍질 꾸러미를 소맷자락에서 끄집어내어 방 한가운데에 내던졌다. 나는 하숙에서 고구마 공세 두부 공세를 당하고 있는 데다 메밀국숫집, 경단집 가기를 금지당하고 있는 판이라, 그거 좋다 하고 곧 할머니에게서 냄비와 설탕을 빌려 끓이기 시작했다.

고슴도치는 마구 쇠고기를 볼이 미어지게 먹으며, 자네 저 빨간 셔츠가 기생과 정분이 있는 걸 아나, 하고 묻기에, 알고말고, 요전에 끝물 호박 송별회 때 온 하나가 그렇겠지, 했더니, 그렇지, 나는 요즘에야 겨우 눈치챘는데 자네는 퍽 눈치가 빠르군, 하고 크게 칭찬했다.

「그놈은 두 마디째면 품성이니 정신적 오락이니 하면서, 뒤로 돌아서는 기생과 관계를 맺고 있으니 괘씸한 놈이야. 그것도 다른 사람이 노는 걸 너그러이 봐준다면 모르지만, 자네가 메밀국숫집에 가거나 경단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단속에 해가 된다며 교장 입을 통해 주의를 주지 않았나」

「응, 그 녀석 생각으로는 기생 놀음은 정신적 오락이고 튀김이나 경단은 물리적 오락이겠지. 정신적 오락이라면 더 대놓고 하면 된다. 뭐냐 그 꼴은. 단골 기생이 들어오니까 엇갈려 자리를 비우고 도망치다니, 끝까지 사람을 속일 작정이니 마음에 안 든다. 그러고서 남이 공격하면 나는 모른다느니, 러시아 문학이라느니, 하이쿠가 신체시의 형제라느니 하며 사람을 연막에 싸려는 속셈이야. 그런 겁쟁이는 사내가 아니야. 영락없는 궁중 시녀가 다시 태어난 건가 봐. 어쩌면 그놈 아버지는 유시마의 가게마인지도 모르지」

「유시마의 가게마라니 뭐냐」

「뭐든 사내답지 못한 거겠지. ― 자네 거기는 아직 안 익었네. 그런 걸 먹으면 촌충이 생겨」

「그런가, 대개 괜찮겠지. 그래서 빨간 셔츠는 남 몰래 온천 동네 가도야에 가서 기생을 만난대」

「가도야라니, 그 여관 말인가」

「여관 겸 요릿집이지. 그러니 그놈을 한번 혼내 주려면 그놈이 기생을 데리고 거기 들어가는 데를 확인해 두고 대놓고 따지는 거지」

「확인한다니, 밤을 새워 지키는 건가」

「응, 가도야 앞에 마스야라는 여관이 있지. 그 앞쪽 이 층을 빌려서 장지에 구멍을 내고 보고 있는 거지」

「보고 있을 때 올까」

「오겠지. 어차피 하룻밤으론 안 돼. 두 주일쯤 할 작정이 아니면」

「퍽 지치겠군.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한 주일쯤 밤을 새워 간호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멍해져서 크게 혼났다」

「몸이 좀 지친들 상관없지. 저런 간신을 그대로 두면 일본을 위해 안 되니까 내가 하늘을 대신해 벌을 주는 거야」

「유쾌하다. 그렇게 정해졌으면 나도 거들어 주겠다. 그래서 오늘 밤부터 지키는 건가」

「아직 마스야와 말을 안 해 봤으니 오늘 밤은 안 돼」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 작정이냐」

「머지않아 하지. 어차피 자네에게 알릴 테니 그러면 거들어 주게」

「좋다, 언제든 거든다. 나는 계략은 서툴지만 싸움이라면 이래 봬도 제법 날쌔다」

나와 고슴도치가 한창 빨간 셔츠 퇴치 계략을 의논하고 있는데, 하숙 할머니가 나와서, 학교 학생이 하나 홋타 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왔시유. 지금 댁으로 갔는디 안 계셔서, 아마 여기겠지 하구 찾아왔대유, 하고 문지방께에 무릎을 꿇고 고슴도치 대답을 기다린다. 고슴도치는 그렇습니까, 하고 현관까지 나가더니 이윽고 돌아와서, 자네, 학생들이 전승 축하회 여흥을 보러 안 가겠느냐고 꾀러 왔네. 오늘은 고치에서 무슨 춤을 추러 일부러 여기까지 여럿이 몰려왔으니 꼭 구경하라, 좀처럼 볼 수 없는 춤이라는구먼, 자네도 같이 가 보게, 하고 고슴도치는 크게 신이 나서 나에게 같이 가자고 권한다. 나는 춤이라면 도쿄에서 실컷 봤다. 해마다 하치만 신사 축제에는 수레 무대가 동네를 도니까 시오쿠미고 뭐고 다 알고 있다. 도사 촌놈의 바보 춤 따위 보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했지만, 모처럼 고슴도치가 권하니 그만 갈 마음이 들어 문으로 나섰다. 고슴도치를 꾀러 온 게 누군가 했더니 빨간 셔츠의 동생이다. 묘한 놈이 왔다.

회장에 들어가니 에코인 씨름이나 혼몬지 법회처럼 긴 깃발을 여기저기 수없이 꽂아 놓은 데다, 세계 만국의 국기를 죄다 빌려 온 듯 줄에서 줄로, 밧줄에서 밧줄로 걸쳐 놓아서 넓은 하늘이 여느 때 없이 떠들썩해 보인다. 동쪽 구석에 하룻밤 만에 지은 무대를 세우고, 여기서 이른바 고치의 무슨 춤을 춘단다. 무대에서 오른쪽으로 오십 미터쯤 오니 갈대발로 울타리를 치고 꽃꽂이를 늘어놓았다. 다들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도무지 시시하다. 저렇게 풀이나 대나무를 구부려 놓고 좋아할 거면 곱사등이 미남이나 절름발이 남편을 두고 자랑하면 되겠다.

무대와 반대쪽에서 자꾸 불꽃을 쏘아 올린다. 불꽃 속에서 풍선이 나왔다. 제국 만세라고 쓰여 있다. 천수각 소나무 위를 둥실둥실 날아 병영 안으로 떨어졌다. 다음은 펑 소리가 나고 검은 경단이 휙 가을 하늘을 꿰뚫듯 오르더니 그게 내 머리 위에서 탁 갈라져, 파란 연기가 우산살처럼 퍼져 줄줄 허공으로 흘러들었다. 풍선이 또 올랐다. 이번에는 육해군 만세라고 붉은 바탕에 희게 물들인 게 바람에 흔들리며 온천 동네에서 아이오이촌 쪽으로 날아갔다. 아마 관음상 경내에라도 떨어졌겠지.

식 때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엄청난 인파다. 시골에도 이렇게 사람이 사나 하고 놀랐을 만큼 우글우글하다. 똑똑한 얼굴은 별로 안 보이지만 수로 치면 확실히 얕볼 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 소문난 고치의 무슨 춤이 시작되었다. 춤이라니까 후지마 유파 같은 게 추는 춤인가 하고 섣불리 짐작했는데, 이건 크게 틀렸다.

위엄 있게 머리띠를 뒤로 매고 통 좁은 하카마를 입은 사내가 열 명씩 무대 위에 세 줄로 늘어섰는데, 그 서른 명이 죄다 칼을 빼 들고 있는 데는 기겁했다. 앞줄과 뒷줄 사이는 겨우 사십오 센티쯤일 거고, 좌우 간격은 그보다 짧으면 짧았지 길지는 않다. 단 한 사람이 줄을 벗어나 무대 끝에 서 있을 뿐이다. 이 따돌림당한 사내는 하카마만은 입었지만 머리띠는 아끼고, 칼 대신 가슴에 북을 걸고 있다. 북은 다이카구라 북과 같은 것이다. 이 사내가 이윽고 이야, 하아아 하고 태평한 소리를 내며 묘한 노래를 부르면서 북을 보콘, 보콘 두드린다. 노랫가락은 전대미문의 기묘한 것이다. 미카와 만자이와 후다라쿠를 합친 거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노래는 몹시 느긋해서 여름철 물엿처럼 늘어지지만, 끊어 가려고 보콘을 넣으니 쉴 새 없는 것 같아도 박자는 맞는다. 이 박자에 맞춰 서른 개의 칼날이 번쩍번쩍 빛나는데, 이게 또 아주 재빠른 솜씨라 보고 있어도 오싹하다. 옆에도 뒤에도 사십오 센티 안에 산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또 잘 드는 칼을 자기와 똑같이 휘두르니, 어지간히 박자가 맞지 않으면 제 편끼리 치고받아 다치게 된다. 그것도 움직이지 않고 칼만 앞뒤라든가 위아래로 휘두른다면 아직 위험도 없지만, 서른 명이 한꺼번에 발을 구르고 옆을 향할 때가 있다. 빙 돌 때가 있다. 무릎을 굽힐 때가 있다. 옆 사람이 일 초라도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으면 제 코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옆 사람 머리가 깎일지도 모른다. 칼날이 움직이는 건 자유자재지만, 그 움직이는 범위는 사십오 센티 네모난 기둥 안으로 한정된 데다, 앞뒤 좌우 사람과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번쩍여야 한다. 이거 놀랐다, 도무지 시오쿠미나 세키노토 따위가 따라올 바가 아니다. 물어보니 이건 몹시 숙련이 드는 거라 웬만해서는 이렇게 박자가 안 맞는단다. 특히 어려운 건 그 만자이 가락의 보콘 선생이란다. 서른 명의 발놀림도 손놀림도 허리 굽히는 법도 죄다 이 보콘 군의 박자 하나로 정해진단다. 곁에서 보고 있으면 이 대장이 제일 태평한 듯 이야, 하아아 하고 편하게 부르고 있지만, 실은 몹시 책임이 무거워 무척 애를 쓴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와 고슴도치가 감탄한 나머지 이 춤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데, 오십 미터쯤 저쪽에서 갑자기 와 하는 함성이 나고, 여태 얌전히 여기저기 구경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물결치듯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싸움이다 싸움이다 하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사람들 소매를 빠져나온 빨간 셔츠의 동생이, 선생님 또 싸움입니다, 중학 쪽에서 오늘 아침 앙갚음을 한다고 또 사범 놈들과 결전을 시작한 참입니다, 어서 와 주세요, 하면서 다시 인파 속으로 파고들어 어디론가 가 버렸다.

고슴도치는 손 많이 가는 녀석들이군 또 시작했나, 어지간히 하면 될 것을, 하고 달아나는 사람들을 피하면서 한달음에 뛰어갔다.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말리려는 거겠지. 나는 물론 도망칠 생각은 없다. 고슴도치 발뒤꿈치를 밟으며 뒤따라 곧 현장으로 달려갔다. 싸움은 지금이 한창이다. 사범 쪽은 오륙십 명은 될까, 중학은 틀림없이 삼 할쯤 많다. 사범은 교복을 입고 있지만 중학은 식이 끝난 뒤 대개 일본 옷으로 갈아입었으니 적과 편은 곧 안다. 그러나 뒤엉켜 맞붙었다 떨어졌다 싸우고 있으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서 떼어 놓아야 할지 모르겠다. 고슴도치는 곤란하다는 듯 한동안 이 난장판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순사가 오면 성가시다. 뛰어들어 떼어 놓자, 하고 내 쪽을 보고 말하기에, 나는 대답도 안 하고 대뜸 제일 싸움이 거세 보이는 데로 뛰어들었다. 그만둬 그만둬. 그런 난폭한 짓을 하면 학교 체면에 관계된다. 그만두지 못하겠냐, 하고 낼 수 있는 대로 소리를 내며 적과 편의 경계선인 듯한 데를 뚫고 나가려 했지만 좀처럼 잘 안 된다. 이삼 미터 들어가니 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게 되었다. 눈앞에서 비교적 큰 사범생이 열대여섯 된 중학생과 맞붙어 있다. 그만두라고 했는데, 그만두지 못하겠냐, 하고 사범생의 어깨를 잡고 억지로 떼어 놓으려는 순간 누군지 모르지만 밑에서 내 다리를 걸었다. 나는 불시에 당해 쥐고 있던 어깨를 놓치고 옆으로 쓰러졌다. 딱딱한 구두로 내 등 위에 올라탄 놈이 있다. 두 손과 무릎을 짚고 밑에서 벌떡 일어났더니 올라탄 놈은 오른쪽으로 굴러떨어졌다. 일어나 보니 오 미터쯤 저쪽에서 고슴도치의 큰 몸이 학생들 사이에 끼인 채, 그만둬 그만둬, 싸움은 그만둬, 하며 이리저리 밀리고 있는 게 보였다. 이봐 도저히 안 되겠다, 하고 말해 보았지만 안 들리는지 대답도 없다.

휙 하고 바람을 가르고 날아온 돌이 대뜸 내 광대뼈에 맞았나 싶더니, 뒤에서도 등을 몽둥이로 후려친 놈이 있다. 교사 주제에 나와 있다, 쳐라 쳐라, 하는 소리가 난다. 교사는 둘이다. 큰 놈과 작은 놈이다. 돌을 던져라. 하는 소리도 난다. 나는, 뭐 건방진 소리 지껄이지 마라, 시골뜨기 주제에, 하고 대뜸 곁에 있던 사범생의 머리를 갈겨 주었다. 돌이 또 휙 날아온다. 이번에는 내 짧게 깎은 머리를 스치고 뒤쪽으로 날아갔다. 고슴도치는 어떻게 되었는지 안 보인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처음에는 싸움을 말리러 들어갔지만, 얻어맞고 돌을 맞고 해서 황송하다고 물러서는 얼간이가 어디 있나. 나를 누군 줄 아나. 키는 작아도 싸움의 본고장에서 수련을 쌓은 형님이다, 하고 마구잡이로 갈기고 갈김을 당하고 있는데, 이윽고 순사다 순사다 도망쳐라 도망쳐라 하는 소리가 났다. 여태 칡가루 반죽 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꼼짝도 못 하던 게 갑자기 편해졌나 싶더니, 적도 편도 한꺼번에 물러가 버렸다. 시골뜨기라도 퇴각은 교묘하다. 쿠로팟킨보다 잘할 정도다.

고슴도치는 어떻게 되었나 보니, 가문을 새긴 홑 하오리를 갈가리 찢기고 저쪽에서 코를 닦고 있다. 콧대를 얻어맞아 피를 꽤 흘렸단다. 코가 부어올라 새빨개져서 몹시 꼴사납다. 나는 무늬 겹옷을 입고 있어서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고슴도치 하오리만큼 손해는 없다. 그러나 뺨이 따끔따끔해서 견딜 수가 없다. 고슴도치가 꽤 피가 나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순사는 열대여섯 명 왔는데, 학생들은 반대쪽으로 물러갔으므로 붙잡힌 건 나와 고슴도치뿐이다. 우리는 이름을 대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했더니 아무튼 경찰서까지 오라기에, 경찰서에 가서 서장 앞에서 일의 전말을 말하고 하숙으로 돌아왔다.

11장

이튿날 눈을 떠 보니 온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오랫동안 싸움을 안 해 봐서 이렇게 사무치는 거겠지. 이래서야 그다지 자랑도 못 하겠다고 이불 속에서 생각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시코쿠 신문을 가져와 머리맡에 놓아 주었다. 실은 신문을 보는 것도 귀찮지만 사내가 이까짓 일에 기가 죽어서 어쩌나 하고 억지로 엎드려서 누운 채로 두 번째 면을 펴 보고 놀랐다. 어제 싸움이 떡하니 나와 있다. 싸움이 나와 있는 건 놀랍지 않지만, 중학교 교사 홋타 아무개와 요즘 도쿄에서 부임한 건방진 아무개가 순량한 학생들을 사주해서 이 소동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은 현장에서 학생들을 지휘한 데다 함부로 사범생들에게 폭행을 마음껏 저질렀다고 쓰고, 다음에 이런 의견이 덧붙어 있다. 본현의 중학은 예로부터 선량 온순한 기풍으로 전국이 부러워하던 바이나, 경박한 두 풋내기 때문에 우리 학교의 특권을 훼손당하여 이 불명예를 온 시에 입은 이상,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믿는다, 우리가 손을 쓰기 전에 당국자가 상당한 처분을 이 무뢰한들에게 가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시 교육계에 발을 들일 여지가 없게 할 것을. 그러고는 한 자 한 자마다 모두 방점을 찍어 놓고 뜸을 뜬 셈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똥이나 처먹어라 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여태 몸 마디마디가 몹시 아프던 것이 일어남과 동시에 잊은 듯 가벼워졌다.

나는 신문을 둘둘 말아 뜰에 내던졌지만 그래도 아직 성이 안 차서 일부러 뒷간에 가져가 버리고 왔다. 신문이란 턱없는 거짓말을 하는 법이다. 세상에 무엇이 제일 허풍을 떠느냐 하면 신문만 한 허풍선이는 없을 거다. 내가 해야 마땅할 말을 다 저쪽에서 늘어놓고 있다. 게다가 요즘 도쿄에서 부임한 건방진 아무개라니 뭐냐. 천하에 아무개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나. 생각해 봐라. 이래 봬도 버젓한 성도 있고 이름도 있다. 족보가 보고 싶으면 다다노 미쓰나카 이래의 조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뵙게 해 주마. ― 세수를 하니 뺨이 갑자기 아파졌다. 할머니에게 거울을 빌려 달라고 했더니, 오늘 아침 신문 보셨시유, 하고 묻는다. 읽고 뒷간에 버리고 왔다. 갖고 싶거든 주워 오라고 했더니 놀라서 물러갔다. 거울로 얼굴을 보니 어제처럼 상처가 나 있다. 이래 봬도 소중한 얼굴이다, 얼굴에 상처까지 난 데다 건방진 아무개 따위로 아무개 소리를 들으니 이제 됐다.

오늘 신문에 질려서 학교를 쉬었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평생의 수치니, 밥을 먹고 맨 먼저 출근했다. 나오는 놈마다 나오는 놈마다 내 얼굴을 보고 웃고 있다. 뭐가 우스우냐. 네놈들이 만들어 준 얼굴도 아닌데. 그러는 사이 알랑쇠가 나와서, 야 어제는 큰 공을 세우셨더군요, ― 명예의 부상이올시다요? 하고, 송별회 때 때린 앙갚음으로 여겼는지 유난히 놀려 대기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붓이나 빨고 있으라고 해 주었다. 그러자 이거 황송하옵니다요. 그렇지만 퍽 아프시겠지요, 하기에, 아프든 안 아프든 내 낯짝이다. 네놈 신세를 질까 보냐 하고 호통쳐 주었더니, 건너편 제자리에 앉아서 여전히 내 얼굴을 보며 옆자리 역사 선생과 무언가 소곤거리며 웃고 있다.

그러고서 고슴도치가 출근했다. 고슴도치의 코에 이르러서는 보랏빛으로 부풀어 올라 파면 속에서 고름이 나올 것 같다. 자만 탓인지 내 얼굴보다 훨씬 호되게 당했다. 나와 고슴도치는 책상을 나란히 하고 있는 이웃끼리의 가까운 사이인 데다, 게다가 그 책상이 방 입구에서 정면에 있으니 운이 나쁘다. 묘한 얼굴 둘이 모여 있다. 다른 놈들은 심심해지기만 하면 꼭 이쪽만 본다. 큰일 날 뻔했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속으로는 이 바보들이 하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식으로 소곤거리며 킥킥 웃을 까닭이 없다. 교실에 나가니 학생들이 박수로 맞았다. 선생님 만세라고 하는 녀석이 두셋 있었다. 경기가 좋은 건지 바보 취급을 당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와 고슴도치가 이렇게 주목의 초점이 되어 있는 가운데, 빨간 셔츠만은 여느 때처럼 곁에 와서, 참 뜻밖의 재난이었소. 나는 자네들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네. 신문 기사는 교장 선생님과도 의논해서 정정을 요청하는 절차를 밟아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내 동생이 홋타 군을 꾀러 갔으니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 나는 참으로 면목이 없네. 그러니 이 건에 대해서는 끝까지 힘쓸 작정이니 부디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하며 반쯤 사과 같은 말을 늘어놓고 있다. 교장은 세 번째 시간에 교장실에서 나와서, 신문이 곤란한 걸 써 냈군요. 어려워지지 않으면 좋겠는데, 하고 다소 걱정스러워 보였다. 나에게는 걱정 따위 없다, 저쪽에서 파면을 한다면 파면당하기 전에 사표를 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이쪽에서 물러나는 건 허풍쟁이 신문쟁이를 더욱 기어오르게 하는 셈이니, 신문쟁이에게 정정을 시키고 내가 오기로라도 계속 다니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돌아가는 길에 신문사에 담판하러 가려고 했지만, 학교에서 취소 절차는 밟았다니 그만두었다.

나와 고슴도치는 교장과 교감에게 틈을 보아 거짓 없는 데를 일단 설명했다. 교장과 교감은 그렇겠지, 신문쟁이가 학교에 원한을 품고 저런 기사를 일부러 실은 거겠지 하고 결론을 내렸다. 빨간 셔츠는 우리 행동을 변명해 주면서 교무실을 한 사람 한 사람 돌아다녔다. 특히 제 동생이 고슴도치를 꾀어낸 걸 제 잘못인 양 떠벌리고 있었다. 모두들 정말 신문쟁이가 나쁘다, 괘씸하다, 두 분은 참 재난이다, 하고 말했다.

돌아가는 길에 고슴도치는, 자네 빨간 셔츠는 구리다네, 조심하지 않으면 당하네, 하고 주의를 주었다. 어차피 구리다, 오늘부터 구려진 건 아니겠지, 했더니, 자네 아직 모르겠나, 어제 일부러 우리를 꾀어내 싸움 속으로 끌어들인 건 계략이란 말일세, 하고 가르쳐 주었다. 과연 거기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다. 고슴도치는 거칠어 보이지만 나보다 꾀가 있는 사람이라고 감탄했다.

「그렇게 싸움을 시켜 놓고 곧 뒤이어 신문사에 손을 써서 저런 기사를 쓰게 한 거야. 참으로 간신이지」

「신문까지 빨간 셔츠냐. 그거 놀랍다. 그렇지만 신문이 빨간 셔츠 말을 그렇게 쉽게 들을까」

「안 듣고 배기나. 신문사에 친구가 있으면 쉽지」

「친구가 있나」

「없어도 쉽지. 거짓말을 해서 사실은 이러이러하다고 이야기하면 곧 쓰지」

「지독하군. 정말 빨간 셔츠의 계략이라면 우리는 이 사건으로 파면될지도 모르겠군」

「잘못하면 당할지도 모르지」

「그러면 나는 내일 사표를 내고 곧 도쿄로 돌아가 버리겠다. 이런 하등한 데는 부탁을 받아도 있기 싫다」

「자네가 사표를 내 봐야 빨간 셔츠는 곤란하지 않아」

「그도 그렇군. 어떻게 하면 곤란할까」

「저런 간신이 하는 짓은 무엇이든 증거가 안 나오게, 안 나오게 궁리하니까 반박하기가 어렵지」

「성가시군. 그러면 누명을 쓰는 거로군. 재미도 없다. 천도는 옳은가 그른가로군」

「뭐, 이삼 일 더 형편을 보세. 그래서 막상 되면 온천 동네에서 붙잡을 수밖에 없겠지」

「싸움 사건은 싸움 사건대로인가」

「그렇지. 이쪽은 이쪽대로 저쪽 급소를 누르는 거지」

「그것도 좋겠다. 나는 계략은 서투니 모든 걸 잘 부탁한다. 막상 되면 무엇이든 하겠다」

나와 고슴도치는 이렇게 헤어졌다. 빨간 셔츠가 과연 고슴도치가 짐작한 대로 했다면 참 지독한 놈이다. 도저히 꾀 겨루기로 이길 놈이 아니다. 아무래도 완력이 아니면 안 된다. 과연 세계에 전쟁이 끊이지 않을 만하다. 개인도 결국은 완력이다.

이튿날 신문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펴 보니 정정은커녕 취소도 안 보인다. 학교에 가서 너구리에게 재촉하니 내일쯤 나겠지요, 한다. 내일이 되니 작은 활자로 조그맣게 취소가 났다. 그러나 신문사 쪽에서 정정은 물론 하지 않았다. 또 교장에게 담판하니, 그 이상 밟을 절차는 없다는 대답이다. 교장이란 너구리 같은 얼굴을 하고 유난히 프록코트로 뽐내지만 뜻밖에 힘이 없다. 거짓 기사를 실은 시골 신문 하나 사과시키지 못한다. 너무 화가 나서 그럼 제가 혼자 가서 주필에게 담판하겠습니다, 했더니, 그건 안 되네, 자네가 담판하면 또 욕을 쓸 뿐일세. 결국 신문에 쓰인 건 거짓이든 참이든 결국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법일세. 단념할 수밖에 없네, 하고 중의 설교 같은 훈계를 늘어놓았다. 신문이 그런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때려 부숴 버리는 게 우리에게 이득이겠지. 신문에 쓰이는 것과 자라에게 물리는 것이 비슷비슷하다는 건 오늘 이 순간 너구리의 설명으로 처음 알았습니다.

그로부터 사흘쯤 지나 어느 날 오후 고슴도치가 분연히 와서, 드디어 때가 왔다, 나는 그 계획을 실행할 작정이다, 하기에, 그래 그럼 나도 하겠다 하고 그 자리에서 한패에 가담했다. 그런데 고슴도치가 자네는 그만두는 편이 좋겠네,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냐고 물으니, 자네는 교장에게 불려 가서 사표를 내라는 말을 들었나, 하고 묻기에, 아니 안 들었다. 자네는? 하고 되물으니, 오늘 교장실에서, 참으로 안됐지만 사정이 어쩔 수 없으니 결단해 달라는 말을 들었단다.

「그런 재판이 어디 있나. 너구리는 아마 배북을 너무 두드려서 위가 뒤집힌 거다. 자네와 나는 같이 전승 축하회에 나가서, 같이 고치의 번쩍번쩍 춤을 보고, 같이 싸움을 말리러 들어간 거 아닌가. 사표를 내라면 공평하게 둘 다 내라고 해야지. 왜 시골 학교는 이렇게 이치를 모를까. 답답하다」

「그게 빨간 셔츠의 조종이야. 나와 빨간 셔츠는 여태까지의 경위로 보아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자네 쪽은 지금 그대로 두어도 해가 없다고 여기는 거지」

「나라고 빨간 셔츠와 함께할까 보냐. 해가 없다고 여기다니 건방지다」

「자네는 너무 단순하니까, 두어도 어떻게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더 나쁘다. 누가 함께해 줄까 보냐」

「게다가 지난번에 고가가 떠나고 나서 후임이 사정으로 아직 도착하지 않았잖나. 그 위에 자네와 나를 한꺼번에 쫓아내면 학생들 시간에 빈자리가 생겨서 수업에 지장이 있으니까」

「그러면 나를 틈새를 메우는 쐐기로 한 자리 앉혀 둘 셈이로군. 이 망할 놈, 누가 그 수에 넘어갈까 보냐」

이튿날 나는 학교에 나가 교장실에 들어가 담판을 시작했다.

「왜 저에게는 사표를 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 하고 너구리는 어안이 벙벙하다.

「홋타에게는 내라 하고 저에게는 안 내도 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그건 학교 쪽 사정으로……」

「그 사정이 틀렸습니다. 제가 안 내도 된다면 홋타도 낼 필요가 없겠지요」

「그 점은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만 ― 홋타 군은 떠나도 어쩔 수 없지만 당신은 사표를 내실 필요를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과연 너구리다, 요령부득인 말만 늘어놓고 게다가 침착하기 짝이 없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러면 저도 사표를 내겠습니다. 홋타 군 혼자 그만두게 하고 제가 태평하게 남아 있을 수 있으리라고 여기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몰인정한 짓은 못 합니다」

「그건 곤란하오. 홋타도 떠나고 당신도 떠나면 학교의 수학 수업을 아예 할 수 없게 되니……」

「못 하게 돼도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자네 그렇게 제멋대로 말하는 게 아니오, 좀 학교 사정도 헤아려 주지 않으면 곤란하오. 게다가 온 지 한 달이 될까 말까 한데 그만두었다고 하면 자네 장래 이력에 관계되니 그 점도 좀 생각해 보면 좋겠지요」

「이력 따위 상관있습니까, 이력보다 의리가 소중합니다」

「그거야 지당하오 ― 자네 말은 하나하나 지당하지만 내 말도 좀 헤아려 주시오. 자네가 꼭 그만두겠다면 그만두어도 좋으니 후임이 올 때까지 부디 해 주었으면 하오. 아무튼 집에서 한 번 더 다시 생각해 보시오」

다시 생각하라니, 고칠 데가 없는 명명백백한 이유지만, 너구리가 파래졌다 빨개졌다 해서 가여워졌으므로 일단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물러났다. 빨간 셔츠와는 말도 안 했다. 어차피 해치울 거면 한데 모아 크게 해치우는 게 낫다.

고슴도치에게 너구리와 담판한 모양을 이야기했더니, 아마 그럴 줄 알았다. 사표 일은 막상 될 때까지 그대로 두어도 상관없겠지, 하는 이야기였으므로 고슴도치 말대로 했다. 아무래도 고슴도치 쪽이 나보다 영리한 모양이니 모든 걸 고슴도치 충고에 따르기로 했다.

고슴도치는 드디어 사표를 내고 직원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바닷가 미나토야까지 내려갔지만, 남 모르게 되돌아와 온천 동네 마스야 앞쪽 이 층에 숨어서 장지에 구멍을 내고 엿보기 시작했다. 이걸 아는 건 나뿐일 거다. 빨간 셔츠가 몰래 온다면 어차피 밤이다. 게다가 초저녁에는 학생이며 다른 사람들 눈이 있으니 적어도 아홉 시 넘어서가 틀림없다. 처음 이틀 밤은 나도 열한 시쯤까지 망을 보았지만 빨간 셔츠 그림자도 안 보인다. 사흘째는 아홉 시부터 열 시 반까지 엿보았지만 역시 허탕이다. 허탕을 치고 한밤중에 하숙으로 돌아가는 것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다. 네댓새 지나자 하숙 할머니가 좀 걱정을 시작해서, 아씨가 있으신데 밤놀이는 그만두시는 게 좋아유, 하고 충고했다. 그런 밤놀이와는 밤놀이가 다르다. 이쪽 것은 하늘을 대신해 벌을 주는 밤놀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 주일이나 다니고도 조금도 효험이 안 보이면 싫어지는 법이다. 나는 성미가 급해서 열심이 되면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하지만, 그 대신 무엇이든 오래간 적이 없다. 아무리 천벌당이라도 싫증 나는 건 마찬가지다. 엿새째는 좀 싫어졌고 이레째는 이제 쉴까 하고 생각했다. 거기에 대면 고슴도치는 고집스럽다. 초저녁부터 열두 시 넘어서까지 장지에 눈을 대고 가도야의 둥근 갓 가스등 밑을 노려보고만 있다. 내가 가면 오늘은 손님이 몇 명 오고 묵는 사람이 몇 명, 여자가 몇 명 하고 이런저런 통계를 보여 주는 데는 놀랐다. 아무래도 안 오는 것 같지 않나, 하면, 응 틀림없이 올 텐데, 하고 이따금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쉰다. 가엾게도, 만약 빨간 셔츠가 여기 한 번 와 주지 않으면 고슴도치는 평생 천벌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여드레째에는 일곱 시쯤부터 하숙을 나와 우선 느긋이 목욕을 하고, 그러고서 동네에서 달걀을 여덟 개 샀다. 이건 하숙 할머니의 고구마 공세에 맞서는 대책이다. 그 달걀을 넷씩 좌우 소맷자락에 넣고 그 빨간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품에 손을 넣은 채 마스야 계단을 올라 고슴도치 방 장지를 여니, 어이 가망 있다 가망 있다 하고 위타천 같은 얼굴이 갑자기 생기를 띠었다. 어젯밤까지는 좀 풀이 죽은 기색이라 곁에서 보고 있는 나조차 음침하다고 여길 정도였는데, 이 낯빛을 보니 나도 갑자기 기뻐져서 아무것도 묻기 전부터 유쾌하다 유쾌하다 하고 말했다.

「오늘 밤 일곱 시 반쯤 그 고스즈라는 기생이 가도야에 들어갔어」

「빨간 셔츠와 같이냐」

「아니」

「그럼 틀렸다」

「기생은 둘이 같이 왔는데 ― 아무래도 가망이 있어 보여」

「어째서」

「어째서라니, 저런 교활한 놈이니까 기생을 먼저 보내 놓고 뒤에서 몰래 올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지. 벌써 아홉 시겠지」

「지금 아홉 시 십이 분쯤이야」 하고 허리띠 사이에서 니켈 시계를 꺼내 보며 말하더니 「이봐 남포를 꺼라, 장지에 까까머리 둘이 비치면 이상하다. 여우는 곧 의심하니까」

나는 종이를 발라 만든 책상 위에 있던 남포를 후 불어 껐다. 별빛으로 장지만은 좀 밝다. 달은 아직 안 나왔다. 나와 고슴도치는 열심히 장지에 얼굴을 대고 숨을 죽이고 있다. 땡 하고 아홉 시 반 벽시계가 울렸다.

「이봐 올까. 오늘 밤 안 오면 나는 이제 싫네」

「나는 돈이 이어지는 한 할 거야」

「돈이 얼마나 있나」

「오늘까지 여드레 치 오 원 육십 전 냈어. 언제 뛰쳐나가도 괜찮게 밤마다 셈을 치르는 거지」

「그건 준비성이 좋군. 여관에서 놀라고 있겠군」

「여관은 괜찮은데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곤란해」

「그 대신 낮잠을 자겠지」

「낮잠은 자지만 밖에 못 나가니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어」

「천벌도 힘들구먼. 이래 가지고 하늘의 그물이 성겨서 빠뜨려 버리기라도 하면 시시하겠군」

「뭐 오늘 밤은 틀림없이 와. ― 이봐 봐 봐」 하고 작은 소리가 되었으므로 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검은 모자를 쓴 사내가 가도야 가스등을 밑에서 올려다본 채 어두운 쪽으로 지나갔다. 아니다. 에구 싶었다. 그러는 사이 카운터 시계가 거리낌 없이 열 시를 쳤다. 오늘 밤도 끝내 허탕인 모양이다.

거리가 꽤 조용해졌다. 유곽에서 치는 북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린다. 달이 온천 산 뒤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길은 밝다. 그러자 아래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창으로 고개를 내밀 수는 없으니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차츰 다가오는 낌새다. 딸각딸각 나막신 끄는 소리가 난다. 눈을 비스듬히 하니 겨우 두 그림자가 보일 만큼 다가왔다.

「이제 괜찮지요. 거치적거리는 건 쫓아 버렸으니까요」 틀림없이 알랑쇠 목소리다. 「큰소리만 칠 뿐 꾀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이건 빨간 셔츠다. 「그 사람도 막말쟁이를 닮았군요. 그 막말쟁이로 말하자면 혈기만 왕성한 도련님이라 애교가 있지요」 「봉급 인상이 싫다느니 사표를 내고 싶다느니, 저건 아무래도 신경에 이상이 있는 게 틀림없어」 나는 창을 열고 이 층에서 뛰어내려 실컷 두들겨 패 주려고 했지만 겨우겨우 참았다. 두 사람은 하하하하 웃으면서 가스등 밑을 지나 가도야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

「이봐」

「왔다」

「드디어 왔다」

「이걸로 겨우 안심했다」

「알랑쇠 망할 놈, 나를 혈기만 왕성한 도련님이라고 지껄였다」

「거치적거리는 거라는 건 나를 두고 한 말이야. 무례하기 짝이 없군」

나와 고슴도치는 두 사람이 돌아가는 길을 기다렸다 쳐야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언제 나올지 짐작이 안 간다. 고슴도치는 아래층에 내려가, 오늘 밤 어쩌면 한밤중에 볼일이 있어 나갈지도 모르니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왔다. 지금 생각하면 용케 여관 사람이 승낙했다. 웬만하면 도둑으로 오해받을 판이다.

빨간 셔츠가 오기를 기다리던 것도 괴로웠지만, 나오는 걸 가만히 기다리는 건 더 괴롭다. 잘 수도 없고, 내내 장지 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도 괴롭고, 도무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이만큼 고생한 적은 지금도 없다. 차라리 가도야로 쳐들어가 현장을 잡자고 제안했지만 고슴도치는 한마디로 내 제안을 물리쳤다. 우리가 이 시각에 뛰어들어 봐야 난폭한 놈들이라고 도중에 막힌다. 까닭을 말하고 면회를 청하면 없다고 발뺌하거나 딴 방으로 안내한다. 방심한 틈에 쳐들어갈 수 있다고 친다 해도 수십 개나 되는 방 가운데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지루해도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하므로 겨우겨우 끝내 아침 다섯 시까지 참았다.

가도야에서 나오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보자마자 나와 고슴도치는 곧 뒤를 밟았다. 첫 기차는 아직 없으니 둘 다 성 아랫마을까지 걸어가야 한다. 온천 동네를 벗어나면 백 미터쯤 삼나무 가로수가 있고 좌우는 논이 된다. 그걸 지나면 여기저기 초가가 있고 밭 가운데를 한 줄기로 성 아랫마을까지 통하는 둑으로 나선다. 동네만 벗어나면 어디서 따라잡아도 상관없지만, 될 수 있으면 인가 없는 삼나무 가로수에서 붙잡자 하고 보일락 말락 따라왔다. 동네를 벗어나자 갑자기 뛰는 자세로 질풍처럼 뒤에서 따라잡았다. 무엇이 왔나 하고 놀라 돌아보는 놈을 거기 서라 하고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알랑쇠는 허둥대는 기색으로 달아나려는 낌새였으므로 내가 앞으로 돌아가 앞길을 막아 버렸다.

「교감 직을 가진 자가 왜 가도야에 가서 잤나」 하고 고슴도치는 곧 다그쳤다.

「교감은 가도야에서 자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습니까」 하고 빨간 셔츠는 여전히 정중한 말을 쓰고 있다. 얼굴빛은 좀 파랗다.

「단속에 좋지 않으니 메밀국숫집이나 경단집에조차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할 만큼 근엄한 사람이 왜 기생과 함께 여관에 묵었나」 알랑쇠는 틈만 보면 달아나려 하니 나는 곧 앞을 가로막고 서서 「막말 도련님이란 뭐냐」 하고 호통쳤더니, 「아니 자네 얘기를 한 게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요」 하고 뻔뻔하게 변명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이때 알아차리고 보니 두 손으로 제 소맷자락을 쥐고 있다. 쫓아올 때 소맷자락 속의 달걀이 달랑달랑해서 곤란하니까 두 손으로 쥐고 온 것이다. 나는 대뜸 소맷자락에 손을 넣어 달걀을 두 개 꺼내 얍 하면서 알랑쇠 낯짝에 내던졌다. 달걀이 철퍽 깨져서 코끝에서 노른자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알랑쇠는 어지간히 기겁했는지 와 하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살려 달라고 했다. 나는 먹으려고 달걀을 샀지 던지려고 소맷자락에 넣고 있던 건 아니다. 그저 울화가 치민 나머지 던질 생각도 없이 그만 던져 버린 거다. 그러나 알랑쇠가 엉덩방아를 찧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내가 성공했다는 걸 알아차렸으므로, 이 망할 놈, 이 망할 놈 하면서 남은 여섯 개를 마구잡이로 던졌더니 알랑쇠는 얼굴이 온통 누렇게 되었다.

내가 달걀을 던지고 있는 사이 고슴도치와 빨간 셔츠는 아직 담판 중이다.

「기생을 데리고 내가 여관에 묵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초저녁에 네놈 단골 기생이 가도야에 들어가는 걸 보고 하는 말이다. 속일 수 있을 줄 아나」

「속일 필요는 없소. 나는 요시카와 군과 둘이서 묵은 것이오. 기생이 초저녁에 들어갔든 안 들어갔든 내 알 바 아니오」

「닥쳐」 하고 고슴도치는 주먹을 한 대 먹였다. 빨간 셔츠는 비틀거렸지만 「이건 난폭하오, 행패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완력에 호소하는 건 무법이오」

「무법이면 충분하다」 하고 또 딱 때린다. 「네놈 같은 간신은 때리지 않으면 안 먹힌다」 하고 딱딱 때린다. 나도 동시에 알랑쇠를 실컷 두들겨 패 주었다. 나중에는 두 놈 다 삼나무 밑동에 웅크리고 앉아 움직이지 못하는 건지 눈앞이 어른거리는 건지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제 충분하냐, 충분하지 않으면 더 때려 주마」 하고 딱딱 둘이서 때렸더니 「이제 충분하다」 했다. 알랑쇠에게 「네놈도 충분하냐」 하고 물었더니 「물론 충분하다」 하고 대답했다.

「네놈들은 간신이니까 이렇게 천벌을 내리는 거다. 이걸로 혼이 나서 앞으로는 삼가라. 아무리 말솜씨 좋게 변명을 늘어놓아도 정의는 용서하지 않는다」 하고 고슴도치가 말했더니 두 놈 다 잠자코 있었다. 어쩌면 입을 여는 것도 귀찮은지 모른다.

「나는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는다. 오늘 밤 다섯 시까지는 바닷가 미나토야에 있다. 볼일이 있으면 순사든 뭐든 보내라」 하고 고슴도치가 말하기에 나도 「나도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는다. 홋타와 같은 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경찰에 고발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하고 말하고 둘이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내가 하숙에 돌아온 건 일곱 시 조금 전이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꾸리기 시작하니 할머니가 놀라서 어쩌시려는 거유, 하고 물었다. 할머니, 도쿄에 가서 아내를 데려오는 거요, 하고 대답하고 셈을 치르고 곧 기차를 타고 바닷가에 와서 미나토야에 닿으니 고슴도치는 이 층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곧 사표를 쓰려고 했지만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서, 소생 사정이 있어 사직하고 도쿄로 돌아가오니 그리 아시옵기 바라나이다 이상, 하고 써서 교장 앞으로 해 우편으로 부쳤다.

기선은 밤 여섯 시에 떠난다. 고슴도치도 나도 지쳐서 쿨쿨 곯아떨어졌다가 눈을 떠 보니 오후 두 시였다. 하녀에게 순사는 안 왔냐고 물었더니 안 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빨간 셔츠도 알랑쇠도 고발하지 않았군」 하고 둘은 크게 웃었다.

그날 밤 나와 고슴도치는 이 더러운 땅을 떠났다. 배가 기슭을 멀어질수록 기분이 좋았다. 고베에서 도쿄까지는 곧장 가서 신바시에 닿았을 때는 겨우 사바세상에 나온 기분이 들었다. 고슴도치와는 곧 헤어진 채 오늘까지 만날 기회가 없다.

기요 이야기를 하는 걸 잊었다. ― 내가 도쿄에 닿아 하숙에도 안 가고 가방을 든 채로 기요야 돌아왔다 하고 뛰어들었더니, 어머 도련님, 어쩌면 이렇게 일찍 돌아와 주셨어요, 하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나도 너무 기뻐서, 이제 시골에는 안 간다, 도쿄에서 기요와 집을 가질 거다, 하고 말했다.

그 뒤 어떤 사람의 주선으로 시가 전철의 기수가 되었다. 월급은 이십오 원이고 집세는 육 원이다. 기요는 현관 딸린 집이 아니어도 아주 만족스러운 모양이었지만, 딱하게도 올해 이월 폐렴에 걸려 죽고 말았다. 죽기 전날 나를 불러, 도련님 제발 부탁이니 기요가 죽거든 도련님 댁 절에 묻어 주세요. 무덤 속에서 도련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고 말했다. 그래서 기요의 무덤은 고비나타의 요겐지에 있다.

(19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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