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D

데미안

헤르만 헤세 · 조영환 옮김

Hermann Hesse — Demian.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 (1919)

9장 · 285분

밝은 세계와 그 바깥 사이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을 찾는 소년의 이야기.

서문

나는 그저 내 안에서 저절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살아 보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이야기를 하려면 한참 앞에서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멀리, 어린 시절의 맨 처음 몇 해까지, 나아가 그 너머 내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아득한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양, 사람의 일생 하나쯤은 통째로 굽어보고 헤아릴 수 있는 양, 그래서 신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아무 가림막 없이 어디서나 본질만을 내보이는 양 군다. 나는 그러지 못한다. 작가들이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어떤 작가에게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보다 나에게 더 중요하다. 이것은 내 것이고,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지어낸 인간, 있을 법한 인간, 이상적인 인간, 그 밖에 어딘가에 없는 인간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단 한 번뿐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다.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요즘처럼 모르는 때도 없었다. 그래서 저마다가 자연의 귀하고 단 한 번뿐인 시도인 사람들을 무더기로 쏘아 죽인다. 우리가 단 한 번뿐인 인간 이상의 무엇이 아니라면, 우리 하나하나를 총알 한 발로 이 세상에서 정말 말끔히 지워 버릴 수 있다면, 이야기를 한다는 일에 아무 뜻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저 자신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세상의 온갖 현상이 서로 엇갈리는 자리, 단 한 번뿐이고 아주 특별하며 어느 경우에나 중요하고 눈여겨볼 만한 그 한 점이기도 하다. 꼭 그렇게 한 번뿐이고 다시는 없다. 그래서 사람마다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하다. 그래서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서 자연의 뜻을 이루고 있는 한 놀랍고 온전히 눈여겨볼 만하다. 저마다의 안에서 정신이 형상을 얻었고, 저마다의 안에서 피조물이 괴로워하며, 저마다의 안에서 한 구원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

오늘날 사람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드물다. 많은 이가 그것을 느끼며, 그래서 더 수월히 죽는다. 내가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더 수월히 죽게 될 것과 같이.

나를 아는 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나는 찾는 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다만 이제는 별에서도 책에서도 찾지 않는다. 내 피가 내 안에서 소리 내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지어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지도 조화롭지도 않다. 거기서는 헛소리와 뒤엉킴의 맛이, 광기와 꿈의 맛이 난다. 더는 스스로를 속이려 들지 않는 모든 사람의 삶이 그렇듯이.

사람마다의 삶은 저 자신에게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을 가 보려는 시도이고, 오솔길의 어렴풋한 자취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저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도 저마다 그렇게 되려 애쓴다. 누구는 어둑하게, 누구는 좀 더 환하게, 저마다 할 수 있는 만큼. 저마다 태어날 때의 찌꺼기를, 태초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끝까지 달고 다닌다. 더러는 끝내 사람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로, 도마뱀으로, 개미로 남는다.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다. 그러나 저마다 자연이 사람을 향해 던진 하나의 던짐이다. 우리 모두에게 내력은, 어머니들은 같다. 우리 모두 같은 목구멍에서 나왔다. 그러나 저마다 깊은 곳에서 나온 하나의 시도이자 던짐으로서 제 나름의 목적지를 향해 애쓴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풀이할 수 있는 것은 저마다 저 자신뿐이다.

두 세계

내 이야기는 열 살에서 열한 살쯤이던 무렵, 우리 소읍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때의 한 경험에서 시작한다.

거기서 많은 것이 향기처럼 밀려와 아픔과 아늑한 떨림으로 나를 안에서부터 건드린다. 어두운 골목과 밝은 골목, 집들과 탑들, 시계 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얼굴, 살림 냄새와 따뜻한 편안함이 밴 방들, 비밀과 깊은 유령의 두려움이 밴 방들. 따뜻하고 비좁은 냄새가 난다. 토끼와 하녀들의 냄새, 집안 상비약과 말린 과일의 냄새가 난다. 거기서는 두 세계가 뒤섞여 흘렀다. 두 극에서 낮과 밤이 왔다.

한쪽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좁아서 실은 내 부모님만을 아우르는 세계였다. 이 세계는 대체로 내가 잘 아는 곳이었다. 그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였고, 사랑과 엄격함이었고, 본보기와 학교였다. 이 세계에는 은은한 광채와 맑음과 깨끗함이 있었다. 여기에는 부드럽고 다정한 말씨, 씻은 손, 깨끗한 옷, 집안의 바른 예절이 있었다. 여기서 아침 찬송을 불렀고, 여기서 성탄을 기렸다. 이 세계에는 곧은 선과 미래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고, 의무와 죄가 있었고, 꺼림칙한 양심과 고백이 있었고, 용서와 좋은 결심이 있었고, 사랑과 공경이 있었고, 성경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우리의 미래는 이 세계에 속해야 했다. 그러니 그 미래는 맑고 깔끔하고 아름답고 반듯해야 했다.

한편 다른 쪽 세계는 이미 우리 집 한복판에서 시작되었고, 완전히 달랐다. 냄새가 달랐고 말이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이 달랐다. 이 두 번째 세계에는 하녀들과 직공 아이들이 있었고, 귀신 이야기와 추문이 있었다. 거기에는 엄청나고 홀리고 무섭고 알 수 없는 것들이 알록달록한 물결로 있었다. 도살장과 감옥 같은 것, 술 취한 사람과 악을 쓰는 여자들, 새끼를 낳는 소, 쓰러진 말, 도둑과 살인과 자살에 관한 이야기들. 이 아름답고 끔찍하고 사납고 잔인한 것들이 사방에, 바로 옆 골목에, 바로 옆집에 있었다. 경찰과 떠돌이가 돌아다녔고, 취한 남자들이 아내를 때렸고, 저녁이면 어린 처녀들이 공장에서 뭉텅이로 쏟아져 나왔고, 늙은 여자들은 사람을 홀려 병들게 할 수 있었고, 숲에는 도둑이 살았고, 불 지른 자들은 헌병에게 붙잡혔다 — 어디서나 이 두 번째의 격렬한 세계가 솟아오르고 냄새를 풍겼다. 어디서나. 다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우리 방들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좋은 일이었다. 우리가 있는 이곳에 평화와 질서와 고요가 있다는 것, 의무와 떳떳한 양심이, 용서와 사랑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 그리고 저 모든 다른 것도, 저 시끄럽고 요란한 것, 침침하고 험한 것도 함께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어머니에게로 한달음에 달아날 수 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그 두 세계가 어떻게 맞닿아 있었는가,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우리 하녀 리나가 저녁 기도 시간에 거실 문가에 앉아 씻은 손을 반듯이 편 앞치마 위에 얹고 맑은 목소리로 찬송을 따라 부를 때, 그때 그 애는 온전히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우리에게, 밝고 옳은 쪽에 속했다. 그러다 곧바로 부엌이나 장작광에서 나에게 머리 없는 난쟁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 또는 푸줏간 작은 가게에서 이웃 여자들과 다툴 때, 그때 그 애는 다른 사람이었고 다른 세계에 속했고 비밀에 둘러싸여 있었다. 모든 것이 그러했고, 나 자신이 가장 그러했다. 물론 나는 밝고 옳은 세계에 속했다. 나는 내 부모의 아이였다. 그러나 눈과 귀를 어디로 돌리든 저 다른 것이 거기 있었고, 나 또한 저 다른 것 속에서도 살았다. 그것이 나에게 자주 낯설고 섬뜩했는데도, 그곳에서는 으레 양심이 꺼림칙해지고 겁이 났는데도 그랬다. 나는 때로 그 금지된 세계에서 사는 것이 제일 좋기까지 했고, 밝은 쪽으로 돌아오는 일은 — 그것이 아무리 꼭 필요하고 좋은 일이었대도 — 덜 아름다운 쪽으로, 더 심심하고 더 삭막한 쪽으로 돌아오는 것에 가까울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알고 있었다. 내 삶의 목표는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되는 것, 그렇게 밝고 깨끗하고 그렇게 의젓하고 반듯해지는 것이라고. 그러나 거기까지는 길이 멀었고, 거기까지 가려면 학교를 앉아서 견디고 공부하고 시험과 검사를 치러야 했으며, 그 길은 내내 저 다른 어두운 세계를 스쳐 지나갔고 그 속을 뚫고 지나갔다. 그러다 그 세계에 눌러앉아 가라앉아 버리는 일도 결코 없지 않았다. 그렇게 된 탕자들의 이야기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열심히 읽었다. 거기서는 언제나 아버지에게로, 선한 쪽으로 돌아오는 일이 그토록 구원 같고 훌륭했다. 나는 그것만이 옳고 선하고 바랄 만한 일임을 분명히 느꼈다. 그런데도 그 이야기에서 악한 자들과 잃어버린 자들 틈에서 벌어지는 대목이 훨씬 더 마음을 끌었고, 말하고 털어놓아도 되는 것이었다면, 사실 이따금은 그 잃어버린 자가 뉘우치고 되찾아지는 것이 못내 아깝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았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저 어떻게든 있었다. 예감이나 가능성으로, 느낌의 맨 밑바닥에. 악마를 그려 보면 나는 그를 저 아래 길거리에, 변장한 모습으로든 드러난 모습으로든, 또는 장터에, 또는 술집에 아주 잘 앉혀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 안에는 결코 아니었다.

내 누이들도 밝은 세계에 속했다. 그 애들은, 내가 보기에 자주 그랬듯, 본성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더 가까웠고, 나보다 더 착하고 더 얌전하고 흠이 적었다. 그 애들에게도 모자란 데가 있었고 버릇없는 구석이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리 깊지 않았고, 악한 것과 맞닿는 일이 자주 그토록 무겁고 괴로워지던 나와는, 어두운 세계가 훨씬 가까이 있던 나와는 같지 않았다. 누이들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아껴 주고 받들어야 할 사람들이었고, 그 애들과 다투고 나면 뒤에 내 양심 앞에서 언제나 내가 나쁜 쪽이었고, 부추긴 쪽이었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쪽이었다. 누이들을 건드리는 것은 곧 부모를, 선하고 다스리는 것을 건드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누이들보다 가장 막된 골목 아이들과 훨씬 더 쉽게 나눌 수 있는 비밀들이 있었다. 좋은 날, 환하고 양심이 말끔한 날에는 누이들과 노는 일이, 그 애들에게 착하고 곱게 구는 일이, 그러면서 나 자신을 반듯하고 고결한 빛 속에서 바라보는 일이 자주 더없이 달았다. 천사라면 이래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가장 높은 것이었고, 우리는 천사가 된다는 것을 성탄이나 행복처럼 환한 울림과 향기에 둘러싸인, 달콤하고 놀라운 일로 여겼다. 아아, 그런 시간과 그런 날은 얼마나 드물게 이루어졌던가! 나는 자주 놀이를 하다가, 좋고 해롭지 않고 허락된 놀이를 하다가, 누이들에게는 너무 벅찬 열기와 격렬함에 사로잡혔고, 그것이 다툼과 불행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노여움이 나를 덮치면 나는 무서운 사람이 되어, 하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그 막됨을 깊이 타는 듯이 느끼면서 그런 짓을 하고 그런 말을 했다. 그러고 나면 뉘우침과 뼈아픔의 사납고 캄캄한 시간이 왔고, 그다음에는 용서를 비는 쓰라린 순간이 왔고, 그러고 나면 다시 한 줄기 밝음이, 갈라짐 없는 고요하고 고마운 행복이 몇 시간이나 몇 순간 동안 왔다.

나는 라틴어 학교에 다녔고, 시장의 아들과 산림감독관의 아들이 우리 반이어서 이따금 우리 집에 왔다. 사나운 아이들이었지만 그래도 선하고 허락된 세계에 속한 아이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우리가 평소 업신여기던 초등학교 학생들, 이웃 아이들과 가깝게 지냈다. 내 이야기는 그중 한 아이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느 한가한 오후 — 나는 열 살을 갓 넘긴 참이었다 — 나는 이웃 아이 둘과 어울려 쏘다니고 있었다. 거기에 더 큰 아이 하나가 끼어들었다. 열세 살쯤 된 억세고 거친 아이로, 초등학교 학생이었고 재봉사의 아들이었다. 그 애 아버지는 술꾼이었고 집안 전체가 평판이 나빴다. 프란츠 크로머는 내가 익히 아는 아이였다. 나는 그가 무서웠고, 그가 우리 쪽에 붙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그는 벌써 사내 티가 나는 몸짓을 했고 젊은 공장 아이들의 걸음걸이와 말투를 흉내 냈다. 그가 앞장서서 우리는 다리 옆으로 강기슭에 내려가 첫 번째 교각 아래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겼다. 아치진 다릿벽과 느릿느릿 흐르는 물 사이의 좁은 기슭은 온통 쓰레기였다. 깨진 조각과 잡동사니, 녹슨 철사가 어지럽게 뭉친 것, 그 밖의 오물이었다. 거기서 더러 쓸 만한 것이 나오기도 했다. 우리는 프란츠 크로머가 시키는 대로 그 구간을 뒤져 찾은 것을 그에게 보여야 했다. 그러면 그는 그것을 제 주머니에 넣거나 물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는 우리에게 납이나 놋쇠나 주석으로 된 것이 있는지 잘 보라고 했고, 그런 것은 모조리 제 주머니에 넣었다. 뿔로 만든 낡은 빗 하나도 그랬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몹시 답답했다. 아버지가 알면 이런 어울림을 금하리라는 것을 알아서가 아니라, 프란츠 자신이 무서워서였다. 그가 나를 받아 주고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 주는 것이 나는 다행스러웠다. 그가 명령하면 우리는 따랐다. 내가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처음인데도 그것이 오래된 관례처럼 여겨졌다.

마침내 우리는 바닥에 앉았다. 프란츠는 물에 침을 뱉었는데 어른처럼 보였다. 그는 이 빠진 자리로 침을 뱉었고 겨눈 데를 맞혔다.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아이들은 온갖 학교 무용담과 못된 장난을 뽐내며 떠벌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자코 있었지만, 바로 그 잠잠함 때문에 눈에 띄어 크로머의 노여움을 내 쪽으로 끌어들일까 봐 두려웠다. 내 친구 둘은 처음부터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그의 편임을 밝혔고, 나는 그들 틈에서 낯선 사람이었으며, 내 옷차림과 몸가짐이 그들에게는 시비 걸 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라틴어 학교 학생이자 곱게 자란 집 아들인 나를 프란츠가 좋아할 리 없었고, 다른 둘도, 나는 그것을 잘 느꼈는데, 일이 닥치면 곧바로 나를 모른 체하고 내버릴 터였다.

마침내 나도 순전히 겁이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커다란 도둑 이야기를 하나 지어내고 그 주인공 자리에 나를 앉혔다. 모퉁이 방앗간 옆 어느 과수원에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친구 하나와 함께 밤에 사과를 한 자루 가득 훔쳤는데, 그것도 흔한 사과가 아니라 온통 최상품 레네트와 골트파르메네, 제일 좋은 품종이었다고. 나는 눈앞의 위험에서 이 이야기 속으로 달아났다. 지어내고 이야기하는 일은 나에게 익은 일이었다. 곧바로 끝내 버렸다가 더 나쁜 일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나는 내 재간을 있는 대로 빛냈다. 우리 중 하나는,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늘 망을 봐야 했고 그동안 다른 하나가 나무에 올라가 사과를 떨어뜨렸는데, 자루가 어찌나 무거웠던지 끝내 다시 열어 절반을 두고 가야 했지만, 우리는 반 시간 뒤에 다시 와서 그것마저 가져왔다고.

이야기를 마쳤을 때 나는 얼마쯤의 갈채를 바랐다. 끝에 가서는 열이 올라 이야기 짓는 일에 취해 있었다. 작은 아이 둘은 잠자코 기다렸고, 프란츠 크로머는 반쯤 찡그린 눈으로 나를 꿰뚫어 보며 으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 정말이냐?"

"그럼." 내가 말했다.

"진짜로 참말이란 말이지?"

"응, 진짜로 참말이야." 나는 속으로는 겁에 질려 숨이 막히면서도 고집스럽게 우겼다.

"맹세할 수 있냐?"

나는 몹시 겁이 났지만 곧바로 그렇다고 했다.

"그럼 말해 봐. 하느님과 내 영혼의 복을 걸고!"

나는 말했다. "하느님과 내 영혼의 복을 걸고."

"뭐, 됐다." 그는 그러고 나서 몸을 돌렸다.

나는 이것으로 끝났거니 여겼고, 그가 곧 일어나 돌아가는 길로 들어서자 다행스러웠다. 다리 위에 올라섰을 때 나는 머뭇거리며, 이제 집에 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급할 것 없잖아." 프란츠가 웃었다. "우리 가는 길이 같은데."

그는 느릿느릿 어슬렁거리며 걸었고 나는 달아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그는 정말로 우리 집 쪽 길로 갔다. 거기 이르러 우리 집 대문이, 두툼한 놋쇠 손잡이가, 창에 든 볕과 어머니 방의 커튼이 보이자 나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아, 집으로 돌아옴! 아, 집으로, 밝은 쪽으로, 평화 속으로 돌아오는 좋고 복된 일이여!

내가 얼른 문을 열고 미끄러져 들어가 등 뒤로 문을 닫으려던 참에 프란츠 크로머가 밀치고 함께 들어왔다. 안뜰에서만 빛이 드는 서늘하고 침침한 타일 복도에서 그는 내 곁에 서서 내 팔을 붙들고 나직이 말했다. "그렇게 급할 것 없다니까, 너."

나는 놀라서 그를 보았다. 내 팔을 쥔 그의 손아귀는 쇠처럼 단단했다. 나는 그가 무슨 속셈인지, 혹시 나를 때리려는 것인지 헤아려 보았다. 지금 소리를 지르면, 크고 세차게 지르면, 위에서 누가 나를 구하러 제때에 내려와 줄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만두었다.

"뭐야?" 내가 물었다. "뭘 하려는 건데?"

"별거 아냐. 너한테 뭘 좀 더 물어봐야겠어. 다른 애들은 들을 것 없는 얘기야."

"그래? 그럼, 내가 뭘 더 말해야 하는데? 나 올라가 봐야 해, 알잖아."

"너 알잖아." 프란츠가 나직이 말했다. "모퉁이 방앗간 옆 과수원이 누구 건지."

"아니, 몰라. 방앗간 주인 것 아닐까."

프란츠는 팔로 나를 감아 아주 바짝 끌어당겼고, 나는 코앞에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은 악했고 고약하게 웃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잔인함과 힘으로 가득했다.

"그래, 얘야, 그 과수원이 누구 건지 내가 말해 줄 수 있지. 사과를 도둑맞았다는 건 나도 진작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 사람이 누가 그 과일을 훔쳤는지 일러 주는 사람한테 2마르크씩 준다고 한 것도 알고 있어."

"어이구 하느님!" 내가 외쳤다. "그렇지만 너 그 사람한테 말하진 않을 거지?"

그의 명예심에 호소해 봐야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는 저 다른 세계에서 온 아이였고, 그에게 밀고는 죄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느꼈다. 이런 일에서 「저쪽」 세계 사람들은 우리와 같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고?" 크로머가 웃었다. "이봐 친구, 내가 위조꾼이라서 2마르크짜리를 제 손으로 찍어 낼 수 있는 줄 아냐? 나는 가난뱅이야. 너처럼 잘사는 아버지가 없어. 2마르크를 벌 수 있으면 벌어야지. 어쩌면 더 줄지도 모르고."

그가 갑자기 나를 놓아주었다. 우리 집 복도에서는 더 이상 평화와 안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세상이 내 둘레에서 무너졌다. 그는 나를 고발할 것이고, 나는 범죄자였고,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그 말을 할 것이고, 어쩌면 경찰까지 올 것이었다. 온갖 혼돈의 무서움이 나를 위협했고, 추하고 위험한 모든 것이 나를 겨누어 소집되어 있었다. 내가 훔친 적이 아예 없다는 사실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맹세까지 했다. 하느님, 하느님.

눈물이 솟았다. 나는 몸값을 치러야 한다고 느끼고 절망하여 주머니를 모조리 뒤졌다. 사과 하나, 주머니칼 하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내 시계가 떠올랐다. 낡은 은시계였고 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그냥」 차고 다녔다.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나는 얼른 그것을 꺼냈다.

"크로머." 내가 말했다. "들어 봐, 너 나를 일러바치면 안 돼. 그건 너답지 않은 짓이야. 내 시계를 너한테 줄게, 여기 봐. 안됐지만 나한테는 달리 아무것도 없어. 네가 가져도 돼. 은으로 된 거고 속도 좋아. 조그만 흠이 하나 있을 뿐이야, 고치기만 하면 돼."

그는 웃으며 그 큰 손에 시계를 받아 들었다. 나는 그 손을 보면서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거칠고 깊이 적대적인지를, 그것이 어떻게 내 삶과 평화를 움켜쥐려 하는지를 느꼈다.

"은으로 된 거야 —" 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네 은이고 네 낡은 시계고 나는 관심 없어!" 그가 깊이 업신여기며 말했다. "그건 네가 직접 고쳐서 써!"

"그렇지만 프란츠." 나는 그가 가 버릴까 봐 겁이 나서 떨며 외쳤다. "조금만 기다려 봐! 시계 받아, 응! 정말로 은이야, 진짜로 참말이야. 그리고 나한테는 정말 다른 게 없어."

그는 싸늘하고 업신여기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래, 내가 누구한테 갈지 너도 알겠지. 아니면 경찰에 말해도 되고. 나 경찰 아저씨 잘 알아."

그는 가려고 몸을 돌렸다. 나는 그의 소매를 붙들어 세웠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가 그렇게 가 버렸을 때 닥칠 모든 일을 견디느니 나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프란츠." 나는 흥분해서 쉰 목소리로 빌었다.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 그냥 장난인 거지, 응?"

"그럼, 장난이지. 그런데 너한테는 비싸게 먹힐 수도 있는 장난이야."

"그러면 말해 줘, 프란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 뭐든지 다 할게!"

그는 찡그린 눈으로 나를 뜯어보고 다시 웃었다.

"멍청하게 굴지 마!" 그가 짐짓 너그러운 척하며 말했다. "너도 나만큼 사정을 잘 알잖아. 나는 2마르크를 벌 수 있고, 그걸 내던져 버릴 만큼 넉넉한 사람이 아니야, 그건 너도 알지. 그런데 너는 넉넉하잖아. 시계까지 있고. 나한테 그 2마르크만 주면 돼. 그럼 다 잘되는 거야."

나는 그 셈속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2마르크라니! 나에게 그것은 10마르크나 100마르크나 1,000마르크만큼이나 크고 닿을 수 없는 돈이었다. 나에게는 돈이 없었다. 어머니 방에 저금통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 삼촌이 왔을 때나 그런 일이 있을 때 받은 10페니히짜리와 5페니히짜리가 몇 개 들어 있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나이에 나는 아직 용돈을 받지 않았다.

"나 아무것도 없어." 내가 서글프게 말했다. "돈이 정말 하나도 없어. 그렇지만 다른 건 뭐든 다 줄게. 나 인디언 책도 있고, 병정도 있고, 나침반도 있어. 가서 가져올게."

크로머는 그 뻔뻔하고 악한 입을 삐죽하고 땅에 침을 뱉었다.

"허튼소리 하지 마!" 그가 명령하듯 말했다. "네 쓰레기는 네가 갖고 있어. 나침반이라니! 나 더 화나게 하지 말고, 알아들어, 돈 내놔!"

"그렇지만 나 없어, 나는 돈이라는 걸 받아 본 적이 없어. 나도 어쩔 수가 없잖아!"

"그럼 내일 2마르크를 가져와. 학교 끝나고 아래 장터에서 기다릴게. 그걸로 끝이야. 돈 안 가져오면, 어떻게 되나 보자고!"

"그래, 그렇지만 그걸 어디서 구해? 맙소사, 정말로 없는 걸 —"

"너희 집에 돈은 넉넉히 있잖아. 그건 네 사정이고. 그러니까 내일 학교 끝나고. 그리고 말해 두는데, 안 가져오면 —" 그는 무서운 눈길을 내 눈에 쏘아 넣고 다시 침을 뱉더니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 * *

나는 위층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내 삶은 부서졌다. 나는 달아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을, 또는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렷한 그림이 아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우리 집 층계의 맨 아래 단에 앉아 몸을 바싹 웅크리고 불행에 나를 내맡겼다. 리나가 장작을 가지러 바구니를 들고 내려오다가 거기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리나에게 위층에는 아무 말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올라갔다. 유리문 옆 걸이에 아버지의 모자와 어머니의 양산이 걸려 있었고, 이 모든 것에서 집과 다정함이 나에게로 흘러왔고, 내 마음은 탕자가 옛 고향 방들의 모습과 냄새를 맞이하듯 그것들을 애원하듯 고맙게 맞이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밝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였고, 나는 깊이 죄를 지고 낯선 물살에 잠겨 모험과 죄에 얽혀 있었으며, 적에게 위협받고 위험과 두려움과 수치의 기다림을 받고 있었다. 모자와 양산, 오래되고 좋은 사암 바닥, 복도 장 위의 커다란 그림, 그리고 안쪽 거실에서 들려오는 큰누이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어느 때보다 정답고 여리고 값졌지만, 그것은 더 이상 위로도 확실한 재산도 아니었다. 그것은 온통 나무람이었다. 이 모든 것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 밝음과 고요에 낄 수 없었다. 내 발에는 흙이 묻어 있었고 그것은 신발 털개에 털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림자를 데리고 들어왔고 고향 세계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미 얼마나 많은 비밀을 가져 보았고 얼마나 많이 마음 졸여 보았던가. 그러나 오늘 내가 이 방들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에 견주면 그것은 다 놀이요 장난이었다. 운명이 내 뒤를 따라 달려왔고, 손들이 나를 향해 뻗어 있었으며, 어머니도 그 손들에게서 나를 지켜 줄 수 없었고 그 손들에 대해 알아서도 안 되었다. 내 죄가 도둑질이든 거짓말이든 — 나는 하느님과 내 영혼의 복을 걸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 그것은 매한가지였다. 내 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내 죄는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주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왜 따라갔을까? 나는 왜 크로머에게, 아버지에게 그런 적이 없을 만큼 잘 복종했을까? 나는 왜 그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냈을까? 죄를 마치 무용담인 양 뽐냈을까? 이제 악마가 내 손을 쥐고 있었고, 이제 적이 내 뒤를 쫓고 있었다.

한순간 나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내 길이 이제 자꾸만 아래로, 어둠 속으로 이어지리라는 무서운 확실함을 느꼈다. 내 잘못에서 새로운 잘못들이 뒤따라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누이들 앞에 나서는 일도, 부모에게 하는 인사와 입맞춤도 거짓이라는 것을, 내가 그들에게 감추는 운명과 비밀을 지니고 다닌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느꼈다.

아버지의 모자를 바라보다가 한순간 믿음과 희망이 내 안에서 번쩍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그의 판결과 벌을 받아들여, 그를 내 비밀을 함께 아는 사람이자 구해 주는 사람으로 삼으리라. 그것은 내가 여러 번 치러 낸 것과 같은 하나의 속죄일 뿐일 것이었다. 무겁고 쓰라린 한 시간, 무겁고 뉘우침에 찬 용서의 청.

그것은 얼마나 달게 들렸던가! 얼마나 아름답게 마음을 끌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되지 않을 일이었다. 나는 내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나에게 비밀이 하나 있다는 것을, 나 혼자 스스로 삭여 내야 할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바로 지금 갈림길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이 시간부터 영영 나쁜 쪽에 속하여 악한 자들과 비밀을 나누고 그들에게 매이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어른인 척 영웅인 척 놀았고, 이제 그 뒤에 오는 것을 짊어져야 했다.

내가 들어섰을 때 아버지가 내 젖은 신발을 가지고 나무란 것이 나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것이 눈길을 돌려 주어서 아버지는 더 나쁜 것을 알아채지 못했고, 나는 속으로 저 다른 일에 갖다 붙이면서 그 나무람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내 안에서 야릇하고 새로운 느낌이 번쩍였다. 미늘이 잔뜩 돋친 악하고 살을 에는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아버지보다 위에 있다고 느꼈다! 나는 한순간 그의 모름에 대한 어떤 업신여김을 느꼈고, 젖은 장화를 두고 꾸짖는 일이 시시해 보였다. '아버지가 아신다면!' 나는 생각했고, 살인을 자백해야 할 처지에 빵 한 조각 훔친 일로 심문받는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것은 추하고 역겨운 느낌이었지만 강했고 깊이 사람을 끄는 데가 있었으며, 다른 어떤 생각보다도 나를 내 비밀과 내 죄에 단단히 묶었다. 어쩌면, 나는 생각했다, 크로머는 벌써 경찰에 가서 나를 일러바쳤고, 사람들이 여기서 나를 어린애로 보고 있는 동안 내 머리 위로는 벼락이 모여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여기까지 이야기한 이 모든 경험 가운데 중요하고 남은 것은 이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거룩함에 난 첫 번째 금이었고, 내 어린 시절이 놓여 있던 기둥들에 가해진 첫 번째 칼자국이었으며, 사람은 저 자신이 되기 전에 누구나 그 기둥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이런 경험들로 우리 운명의 안쪽 본질적인 선이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금은 다시 아물고, 낫고 잊힌다. 그러나 가장 은밀한 방에서 그것은 계속 살아서 피 흘린다.

새로운 그 느낌이 나 자신에게도 곧바로 소름 끼쳤고, 나는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발에 입 맞추어 그것을 빌고 싶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빌어서 무를 수 없다. 아이도 그것을 어떤 현자만큼이나 잘, 그리고 깊이 느끼고 안다.

나는 내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내일을 위한 길을 궁리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나는 저녁 내내 오직 우리 거실의 달라진 공기에 익숙해지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벽시계와 탁자, 성경과 거울, 책꽂이와 벽의 그림들이 나에게 작별을 고하는 듯했고, 나는 얼어붙는 마음으로 내 세계가, 내 좋고 행복하던 삶이 지나간 것이 되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내가 새롭게 빨아들이는 뿌리로 저 바깥 어둡고 낯선 곳에 박혀 붙들려 있음을 느껴야 했다. 나는 처음으로 죽음을 맛보았다. 죽음은 쓴맛이 난다. 죽음은 태어남이고, 무서운 새로움 앞의 겁과 떨림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잠자리에 누웠을 때 나는 다행스러웠다! 그 전에 마지막 연옥으로 저녁 기도가 나를 지나갔고, 우리는 거기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축에 드는 찬송을 불렀다. 아아, 나는 따라 부르지 않았고, 음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쓸개즙이요 독이었다. 아버지가 축복을 말할 때 나는 따라 기도하지 않았고, 그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하고 맺었을 때 한 번의 경련이 나를 이 테두리 밖으로 찢어 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 모두와 함께 있었지만 더는 나와 함께 있지 않았다. 나는 싸늘하고 깊이 지쳐서 그 자리를 떠났다.

잠자리에 누워 한동안 있으려니, 따스함과 감싸임이 다정하게 나를 두르자, 내 마음은 두려움 속에서 다시 한번 뒤로 헤매어 지나간 것 둘레를 불안하게 파닥였다.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잘 자라고 인사했고, 그 발소리가 아직 방 안에 남아 울렸고, 촛불 빛이 아직 문틈에서 타고 있었다. 지금, 나는 생각했다, 지금 어머니가 한 번 더 돌아오실 거야 — 느끼신 거야, 나에게 입 맞추고 물으실 거야, 다정하게, 무언가 약속하듯 물으실 거야, 그러면 나는 울 수 있고, 그러면 목에 걸린 돌이 녹고, 그러면 나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다 말할 거야, 그러면 다 잘되는 거야, 그러면 구원이 오는 거야! 그리고 문틈이 이미 어두워진 뒤에도 나는 한참을 귀 기울이며, 그 일이 꼭, 꼭 일어나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고 나서 나는 실제의 일들로 돌아와 내 적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를 또렷이 보았다. 한쪽 눈을 찡그리고 있었고 입은 거칠게 웃고 있었으며, 내가 그를 바라보며 피할 길 없음을 삼키는 동안 그는 더 커지고 더 추해졌고 그 악한 눈이 악마처럼 번득였다. 그는 내가 잠들 때까지 바싹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나는 그의 꿈도 오늘의 꿈도 꾸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부모와 누이들과 내가 배를 타고 가는 꿈을 꾸었고, 우리를 온통 휴일의 평화와 광채가 둘렀다. 한밤중에 깨어나 나는 아직 그 복된 뒷맛을 느꼈고, 누이들의 흰 여름옷이 볕에 반짝이는 것을 아직 보았고, 그러다 그 모든 낙원에서 있는 그대로의 것 속으로 도로 떨어져 악한 눈을 한 적과 다시 마주 섰다.

아침에 어머니가 급히 와서 벌써 늦었는데 왜 아직 누워 있느냐고 부를 때 내 낯빛은 나빴고, 어디 아프냐고 묻자 나는 토했다.

그것으로 뭔가 얻어진 듯했다. 나는 조금 앓아서 아침나절 내내 캐모마일차를 곁에 두고 누워 있어도 되는 것을, 어머니가 옆방을 치우는 소리와 리나가 바깥 복도에서 푸줏간 사람을 맞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오전은 무언가 홀린 듯하고 옛이야기 같은 것이었고, 그때 볕이 방 안에 들어와 놀았는데, 그것은 학교에서 초록 커튼을 내려 가리던 그 볕과 같은 볕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마저 맛이 없었고 어긋난 소리가 나 있었다.

차라리 죽어 버렸더라면! 그러나 나는 그저 여느 때처럼 조금 몸이 편치 않을 뿐이었고,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학교에서 지켜 주었지만, 열한 시에 장터에서 나를 기다리는 크로머에게서는 조금도 지켜 주지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다정함은 이번에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성가셨고 아팠다. 나는 곧 다시 자는 척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열한 시에 장터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열 시에 조용히 일어나 다시 괜찮아졌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에 으레 그렇듯, 다시 자리에 눕든지 아니면 오후에 학교에 가든지 하라는 말이 나왔다. 나는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계획을 하나 세워 두었다.

돈 없이 크로머에게 갈 수는 없었다. 내 것인 그 작은 저금통을 손에 넣어야 했다. 거기 든 돈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은,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얼마쯤은 되었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고 적어도 크로머를 달래기는 해야 한다고 어떤 낌새가 나에게 일러 주었다.

양말 바람으로 어머니 방에 숨어 들어가 책상에서 내 저금통을 꺼낼 때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어제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가슴이 뛰어 목이 졸렸고, 아래층 계단참에서 처음 살펴보다가 저금통이 잠겨 있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것을 부수기는 아주 쉬웠다. 얇은 양철 살 하나만 찢으면 되었다. 그러나 그 찢김이 아팠다. 그것으로 비로소 나는 도둑질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설탕 조각과 과일을 몰래 집어 먹었을 뿐이었다. 이번 것은 내 돈인데도 훔친 것이었다. 나는 내가 크로머와 그의 세계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음을, 이렇게 곱게 한 코 한 코 아래로 내려가고 있음을 느꼈고, 그에 맞서 오기를 부렸다. 악마가 나를 잡아가든 말든, 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다. 나는 겁내며 돈을 세었다. 저금통 안에서는 그렇게 가득 소리가 났는데 손에 놓고 보니 초라할 만큼 적었다. 65페니히였다. 나는 저금통을 아래 복도에 숨기고 돈을 손에 꼭 쥔 채 집을 나섰다. 여태 이 대문을 지나던 것과는 다른 걸음이었다. 위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빨리 걸어 나갔다.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서 나는 달라진 도시의 골목들을 에돌아 다니며, 여태 본 적 없는 구름 아래로, 나를 쳐다보는 집들과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 곁을 지나 빠져나갔다. 가는 길에 학교 친구 하나가 언젠가 가축 장터에서 1탈러를 주웠다는 일이 떠올랐다. 하느님이 기적을 일으켜 나에게도 그런 것을 줍게 해 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더 이상 기도할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대도 저금통이 다시 성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프란츠 크로머는 멀리서 나를 보았지만 아주 느릿느릿 다가왔고 나를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내 가까이 왔을 때 그는 따라오라고 명령하듯 눈짓을 하고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계속 걸어, 슈트로가세를 내려가 다리를 건너 마지막 집들 옆 어느 새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거기서는 공사를 하고 있지 않았고, 벽들이 문도 창도 없이 휑하니 서 있었다. 크로머는 둘레를 살피고 문으로 들어갔고 나는 뒤따랐다. 그는 벽 뒤로 들어서서 나를 손짓해 부르고 손을 내밀었다.

"가져왔냐?" 그가 싸늘하게 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움켜쥔 손을 꺼내 내 돈을 그의 편 손바닥에 쏟았다. 마지막 5페니히짜리가 울림을 그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다 세어 놓았다.

"65페니히군." 그가 말하며 나를 보았다.

"응." 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게 내가 가진 전부야. 너무 적은 건 나도 잘 알아. 그렇지만 그게 전부야. 나는 더 없어."

"너를 더 똑똑한 놈으로 봤는데." 그가 자못 부드럽게 나무라듯 꾸짖었다. "사내들 사이에는 법도가 있어야지. 나는 온당하지 않은 건 너한테서 받지 않을 거야, 그건 너도 알잖아. 네 잔돈 도로 가져가, 자! 저쪽 사람은 — 누군지 너도 알지 — 나한테 값을 깎으려 들지 않아. 그 사람은 낸다고."

"그렇지만 나는 없어, 정말 더 없다니까! 그게 내 저금 전부였어."

"그건 네 사정이고. 그래도 나는 너를 못살게 굴고 싶지는 않아. 너는 나한테 아직 1마르크 35페니히를 빚졌어. 그건 언제 받지?"

"아, 꼭 줄게, 크로머! 지금은 모르겠지만 — 어쩌면 곧 더 생길 거야, 내일이나 모레쯤. 내가 아버지한테 말할 수 없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너한테 해를 끼치려는 사람이 아니야. 봐, 나는 점심 전에 내 돈을 받을 수도 있어. 그리고 나는 가난해. 너는 좋은 옷을 입었고 점심도 나보다 나은 걸 먹지. 그래도 나는 아무 말 안 할래. 나야 좀 기다려 줄 수 있지. 모레 오후에 휘파람을 불 테니 그때 깨끗이 해. 내 휘파람 알지?"

그는 나에게 그것을 불어 보였다. 나는 그것을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응." 내가 말했다. "알아."

그는 내가 저와 아무 사이도 아닌 듯이 가 버렸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것은 거래였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오늘도 크로머의 휘파람을 갑자기 다시 듣는다면 나는 소스라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나는 그것을 자주 들었고, 내가 느끼기에는 늘 언제까지나 듣고 있었다. 그 휘파람이 파고들지 못한 곳은, 놀이는, 일은, 생각은 없었다. 그 휘파람이 나를 매인 몸으로 만들었고, 이제 그것이 내 운명이었다. 나는 내가 무척 좋아하던 우리 작은 꽃밭에, 부드럽고 빛깔 고운 가을 오후에 자주 있었고, 야릇한 충동이 나에게 지난 시절의 사내아이 놀이를 다시 해 보라고 시켰다. 나는 말하자면 나보다 어린 사내아이를, 아직 착하고 자유롭고 죄 없고 감싸여 있는 아이를 연기했다. 그러나 그 한복판으로, 늘 예상하면서도 늘 소름 끼치게 휘저어 놓고 불시에 덮치는 크로머의 휘파람이 어딘가에서 울려와 실을 끊고 그 상상을 부수었다. 그러면 나는 가야 했고, 나를 괴롭히는 자를 따라 나쁘고 추한 곳으로 가야 했고, 그에게 셈을 대야 했고, 돈 내놓으라는 재촉을 들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이 몇 주쯤 이어졌을 테지만 나에게는 몇 해 같았고 영원 같았다. 나에게 돈이 있는 일은 드물었다. 리나가 장바구니를 부엌 탁자에 놓아두었을 때 거기서 훔친 5페니히나 10페니히짜리가 고작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크로머에게 꾸중을 듣고 업신여김을 뒤집어썼다. 그를 속이고 그의 정당한 권리를 가로채려는 것은 나였고, 그의 것을 훔치는 것은 나였고, 그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나였다! 살면서 곤경이 그토록 가슴 가까이 밀려든 적은 많지 않았고, 그보다 더 큰 절망과 더 큰 얽매임을 느낀 적도 드물었다.

저금통은 놀이용 딱지를 채워 제자리에 도로 놓아두었고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도 언제든 내 머리 위로 터질 수 있었다. 크로머의 거친 휘파람보다도, 어머니가 조용히 내게 다가올 때가 자주 더 무서웠다 — 저금통을 물으러 오시는 것 아닐까?

내가 여러 번 돈 없이 내 악마 앞에 나타나자 그는 나를 다른 방식으로 괴롭히고 부려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위해 일해야 했다. 그가 제 아버지의 심부름을 맡으면 내가 그것을 대신 해야 했다. 아니면 그는 나에게 어려운 것을 시켰다. 십 분 동안 한 발로 뛰기, 지나가는 사람의 옷자락에 종잇조각 붙이기. 여러 밤의 꿈에서 나는 이 고역을 이어 갔고 가위눌린 땀에 젖어 누워 있었다.

한동안 나는 앓았다. 자주 토했고 쉽게 추워졌으며, 밤이면 땀과 열에 잠겨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그것에 믿음으로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내가 이미 자리에 누운 저녁에 어머니가 초콜릿 한 조각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지난 시절의 여운이었다. 그때는 저녁에 착하게 굴었으면 잠들라고 그런 위로의 한 입을 자주 받곤 했다. 이제 어머니는 거기 서서 그 초콜릿 조각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너무 아파서 고개를 젓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이 말만 겨우 밀어낼 수 있었다. "싫어요! 싫어요!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는 초콜릿을 머리맡 탁자에 놓고 나갔다. 이튿날 어머니가 그 일을 캐물으려 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척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의사를 데려왔고, 의사는 나를 진찰하고 아침마다 찬물로 씻으라고 처방했다.

그 무렵 내 상태는 일종의 미친 상태였다. 우리 집의 반듯한 평화 한복판에서 나는 유령처럼 겁먹은 채 괴로워하며 살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지 못했으며, 나 자신을 한 시간이나마 잊는 일이 드물었다. 자주 짜증을 내며 나를 불러 캐묻는 아버지에게 나는 닫혀 있었고 싸늘했다.

카인

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구원은 전혀 뜻밖의 쪽에서 왔고, 그와 함께 새로운 무엇이 내 삶에 들어와 오늘까지 계속 작용해 왔다.

얼마 전 우리 라틴어 학교에 새 학생이 들어왔다. 그는 우리 도시로 이사 온 넉넉한 과부의 아들이었고 소매에 상장을 두르고 있었다. 나보다 높은 학년이었고 몇 살 위였지만, 모두가 그랬듯 나도 곧 그가 눈에 띄었다. 이 묘한 학생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고, 누구에게도 소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어린애 같은 우리들 틈에서 그는 낯설고 다 자란 사람처럼, 아니 그보다 신사처럼 움직였다. 그는 인기가 없었다. 놀이에 끼지 않았고 싸움질에는 더욱 끼지 않았다. 다만 선생들을 대하는 그 당당하고 단호한 말투만은 아이들 마음에 들었다. 그의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어느 날 우리 학교에서 이따금 그렇듯, 무슨 사정이 있어 아주 큰 우리 교실에 다른 학급 하나가 더 들어앉게 되었다. 데미안의 학급이었다. 우리 어린 쪽은 성경 이야기 시간이었고 큰 쪽은 작문을 해야 했다. 선생이 우리에게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주입하는 동안 나는 데미안 쪽을 자주 건너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나를 야릇하게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 영리하고 환하고 유난히 단단한 얼굴이 제 일 위로 몰두하여 정신 깊이 숙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과제를 하는 학생이라기보다 제 문제를 파고드는 연구자처럼 보였다. 사실 그가 나에게 좋게 여겨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그에게 무언가 거슬리는 데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너무 우월하고 서늘했고, 그 몸가짐이 지나치게 도전적으로 확신에 차 있었으며, 그의 눈은 어른의 표정을 — 아이들이 결코 좋아하지 않는 그 표정을 — 하고 있었다. 조금 슬프면서 그 안에 비웃음이 번득이는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좋든 싫든 자꾸만 그를 보아야 했다. 그러다 그가 한 번이라도 나를 쳐다보면 나는 놀라 눈길을 거두었다. 그때 학생이던 그의 모습을 오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점에서 다른 누구와도 달랐고 철저히 제 것으로 도장 찍혀 있었으며 그래서 눈에 띄었다 — 그러면서도 그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썼고, 시골 아이들 틈에 끼어 저도 그들과 같아 보이려고 갖은 수고를 다하는 변장한 왕자처럼 차리고 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가 내 뒤에서 걸었다. 다른 아이들이 흩어지자 그는 나를 앞질러 오며 인사했다. 그 인사도, 우리 학생들 말투를 흉내 내기는 했지만, 어른스럽고 정중했다.

"좀 같이 걸을까?"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우쭐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가 어디 사는지 일러 주었다.

"아, 거기?"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 집은 벌써 알아. 너희 집 문 위에 묘한 게 하나 붙어 있잖아. 그게 곧바로 내 흥미를 끌더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얼른 알아듣지도 못했고, 그가 우리 집을 나보다 잘 아는 듯한 것에 놀랐다. 대문 아치 위 머릿돌에 문장 비슷한 것이 있기는 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납작해지고 여러 번 덧칠이 되어 있었고, 내가 아는 한 우리와도 우리 집안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난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새인지 뭔지 그런 거야. 아주 오래된 것일 거야. 그 집이 예전에는 수도원 것이었다더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잘 봐 둬! 그런 건 가끔 아주 재미있거든. 내 생각엔 새매인 것 같아."

우리는 계속 걸었고 나는 몹시 어색했다. 갑자기 데미안이, 무슨 우스운 일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웃었다.

"참, 내가 아까 너희 수업에 함께 있었지." 그가 활기차게 말했다. "이마에 표를 달고 다닌 카인 이야기 말이야, 그렇지?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드니?"

아니,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은 드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른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이야기가 꽤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데미안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한테 꾸며 댈 것 없어, 얘.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정말로 꽤 묘해. 내 생각엔 수업에 나오는 다른 대부분의 이야기보다 훨씬 묘한 것 같아.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 별말을 안 했지, 그저 하느님이니 죄니 하는 늘 하는 소리뿐이었고. 그렇지만 내 생각엔 —" 그는 말을 끊고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너 이런 게 재미있니?"

"응, 그러니까 내 생각엔," 그가 이어 갔다. "이 카인 이야기를 아주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어. 우리가 배우는 것 대부분은 물론 다 참되고 옳지만, 그것들을 모두 선생님들이 하는 것과 다르게 볼 수도 있고, 대개는 그럴 때 훨씬 나은 뜻이 나오거든. 예를 들어 이 카인이랑 그 이마의 표만 해도, 우리한테 설명해 주는 대로는 도무지 만족스럽지가 않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누가 다투다가 제 아우를 때려죽이는 일이야 물론 있을 수 있고, 그러고 나서 겁이 나서 움츠러드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런데 그 비겁함 때문에 특별히 훈장을 받아서, 그게 그를 지켜 주고 다른 모두를 겁먹게 한다는 건 아무래도 아주 이상하잖아."

"그건 그러네." 나는 흥미가 나서 말했다. 그 일이 나를 붙잡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어떻게 달리 설명하지?"

그가 내 어깨를 쳤다.

"아주 간단해! 먼저 있었던 것, 그래서 이야기가 거기서 시작된 것은 그 표였어.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얼굴에 다른 이들을 겁먹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거지. 사람들은 그를 건드릴 엄두를 못 냈고, 그와 그의 자식들에게 눌렸어. 그런데 그건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우편 소인처럼 이마에 정말로 찍힌 표는 아니었을 거야. 세상일이 그렇게 거칠게 굴러가는 경우는 드물거든. 그보다는 거의 알아챌 수 없는 어떤 섬뜩함, 사람들이 익숙한 것보다 눈빛에 조금 더 담긴 정신과 담대함 같은 것이었겠지. 이 사람에게는 힘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 사람 앞에서 움츠러들었어. 그에게는 「표」가 있었던 거야. 사람들은 그걸 제멋대로 설명할 수 있었지. 그리고 「사람들」이란 언제나 저한테 편하고 저를 옳다고 해 주는 쪽을 원해. 사람들은 카인의 자손을 두려워했고, 그들에게는 「표」가 있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그 표를 있는 그대로, 곧 표창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 반대로 설명한 거야. 이 표를 단 자들은 섬뜩하다고 사람들은 말했고, 실제로 그들은 섬뜩했지. 용기와 줏대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언제나 아주 섬뜩한 법이거든. 겁 없고 섬뜩한 족속이 돌아다닌다는 건 몹시 거북한 일이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그 족속에게 별명과 옛말을 하나 붙여 준 거야. 그들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여태 견뎌 온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벌충하려고. — 알아듣겠니?"

"응 — 그러니까 — 그럼 카인은 악한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리고 성경에 있는 그 이야기 전부가 실은 참이 아니라는 거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그렇게 오래되고 오래된 이야기는 언제나 참이야. 다만 언제나 옳게 적히지도 않고 언제나 옳게 설명되지도 않을 뿐이지. 요컨대 내 말은, 카인은 훌륭한 사내였는데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했다는 것 하나 때문에 그에게 이 이야기를 갖다 붙였다는 거야. 그 이야기는 그저 소문이었어.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다니는 그런 것 말이야. 그리고 카인과 그 자식들이 정말로 일종의 「표」를 달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랐다는 점에서는 아주 참된 소문이었지."

나는 몹시 놀랐다.

"그럼 사람을 때려죽였다는 것도 참이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사로잡혀 물었다.

"아니, 그건 그래! 그건 틀림없이 참이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때려죽인 거지. 그게 정말 제 아우였는지는 의심해 볼 수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따지고 보면 사람은 다 형제니까. 그러니까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때려죽였어. 그게 영웅다운 일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지. 어쨌든 남은 약한 자들은 이제 겁에 잔뜩 질려서 몹시 하소연했어. 그러다 누가 '그럼 당신들도 그냥 그를 때려죽이지 그러오?' 하고 물으면 그들은 '우리가 비겁해서요'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 거야. '그럴 수 없소. 그에게는 표가 있소. 하느님이 그를 표해 두셨소!' 그 속임수는 대충 그렇게 생겨났을 거야. — 아이고, 내가 너를 붙잡고 있었네. 그럼 잘 가!"

그는 알트가세로 꺾어 들며 나를 혼자 남겨 두었고, 나는 여태 그래 본 적 없을 만큼 어리둥절했다. 그가 가자마자 그가 한 말이 모두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카인이 고결한 사람이고 아벨이 비겁자라니! 카인의 표가 표창이라니! 그것은 터무니없었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었고, 못된 소리였다. 그러면 사랑하는 하느님은 어디로 가는가?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가, 하느님이 아벨을 사랑하지 않으셨던가? — 아니다, 헛소리다! 그리고 나는 데미안이 나를 놀리고 미끄러운 데로 꾀어내려 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가 지독하게 영리한 녀석이고 말도 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 아니다 —

그렇지만 어쨌거나 나는 성경 이야기든 다른 이야기든 그토록 오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처음으로 프란츠 크로머를 그토록 완전히 잊고 있었다. 몇 시간을, 저녁 내내. 나는 집에서 그 이야기가 성경에 어떻게 적혀 있는지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짧고 분명했고, 거기서 특별하고 은밀한 풀이를 찾는다는 것은 아주 미친 짓이었다. 그런 식이면 살인자마다 자기가 하느님의 귀염둥이라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그건 말이 안 된다. 다만 데미안이 그런 것을 말할 수 있는 그 태도만은 근사했다. 모든 것이 당연하기라도 한 듯 그렇게 가볍고 곱게, 게다가 그 눈까지 하고서!

물론 내 안에도 뭔가 온당치 못한 것이, 아니 아주 어지러운 것이 있었다. 나는 밝고 깨끗한 세계에서 살았고 나 자신이 일종의 아벨이었는데, 이제는 「저쪽」에 그토록 깊이 박혀 그토록 떨어지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따지고 보면 내 탓이랄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면 이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때 한 기억이 내 안에서 번쩍 솟아올라 한순간 숨이 막힐 뻔했다. 지금의 이 비참함이 시작되던 그 고약한 저녁에 아버지와 있었던 그 일, 그때 나는 한순간 아버지와 그의 밝은 세계와 지혜를 대뜸 꿰뚫어 보고 업신여기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때 카인이고 표를 달고 있던 나 자신이, 이 표는 수치가 아니라 표창이며 나는 내 악함과 내 불행으로 아버지보다, 선하고 경건한 이들보다 높은 데 서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가.

그 일을 그때 이렇게 또렷한 생각의 꼴로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것은 그저 감정의, 아프면서도 나를 자랑으로 채우던 야릇한 움직임의 확 타오름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 데미안은 겁 없는 자들과 비겁한 자들에 대해 얼마나 묘하게 말했던가! 카인의 이마에 있는 표를 얼마나 야릇하게 풀이했던가! 그러면서 그의 눈이, 어른의 눈 같은 그 묘한 눈이 얼마나 이상하게 빛났던가! 그리고 어렴풋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 이 데미안 자신이 일종의 카인 아닌가? 자기가 그와 닮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왜 그를 두둔하지? 왜 그 눈빛에 그런 힘이 있지? 왜 그는 「저쪽 사람들」을, 겁내는 자들을 그렇게 비웃듯 말하지? 그들이야말로 실은 경건하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들인데?

이 생각들로 나는 끝을 볼 수 없었다. 우물에 돌 하나가 떨어졌고, 그 우물은 내 어린 영혼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카인과 살인과 그 표에 관한 이 일은 앎과 의심과 비판을 향한 내 시도들이 모두 거기서 출발하는 지점이었다.

* * *

다른 학생들도 데미안에게 마음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챘다. 카인 때문에 있었던 그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적어도 「새로 온 애」에 관한 소문이 많이 돌았다. 그것을 지금도 다 알고 있다면 좋으련만, 하나하나가 그에게 빛을 던져 줄 것이고 하나하나가 풀이해 볼 만할 것이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처음에 데미안의 어머니가 아주 부자라는 말이 돌았다는 것뿐이다. 또 그 어머니는 교회에 한 번도 가지 않고 아들도 그렇다고 했다. 그들이 유대인이라고 아는 척하는 아이가 있었지만, 몰래 이슬람교를 믿는 것일 수도 있다고들 했다. 그다음에는 막스 데미안의 힘에 관한 옛이야기 같은 것들이 돌았다. 확실한 것은 그가 저에게 싸움을 걸고 마다한다고 비겁자라 부른 반의 최강자를 무섭게 눌러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아이들 말로는, 데미안이 그저 한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잡아 꽉 눌렀을 뿐인데 그 아이가 새파랗게 질렸고, 나중에 슬그머니 물러가서는 며칠 동안 그 팔을 쓰지 못했다고 했다. 어느 저녁에는 그 아이가 죽었다는 말까지 돌았다. 한동안은 무엇이든 주장되었고 무엇이든 믿어졌고 무엇이든 흥분되고 놀라웠다. 그러다 한동안은 다들 물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학생들 사이에 새 소문이 돌았는데, 데미안이 여자애들과 가깝게 지내며 「다 안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프란츠 크로머와의 내 일은 어쩔 수 없는 길을 계속 갔다.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사이사이 며칠씩 나를 내버려 두어도 나는 그에게 매여 있었다. 꿈속에서 그는 내 그림자처럼 함께 살았고, 그가 현실에서 나에게 하지 않은 짓을 내 상상이 이 꿈들 속에서 그에게 시켰으며, 그 꿈속에서 나는 완전히 그의 노예가 되었다. 나는 이 꿈들 속에서 — 나는 늘 꿈이 센 사람이었다 — 현실에서보다 더 많이 살았고, 이 그림자들에게 힘과 삶을 잃었다. 그중에서도 크로머가 나를 때리고 침을 뱉고 내 위에 무릎을 꿇고 앉는 꿈을 자주 꾸었으며, 더 나쁜 것은 그가 나를 무거운 죄로 꾀어내는 꿈이었다 — 아니, 꾀어낸다기보다 그 힘센 영향력으로 그냥 밀어붙이는 꿈이었다. 그중 가장 무서운 꿈, 반쯤 미친 채로 깨어난 그 꿈에는 아버지를 죽이려는 일이 들어 있었다. 크로머가 칼을 갈아 내 손에 쥐여 주었고, 우리는 가로수 뒤에 서서 누군가를 노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러다 누가 다가왔고 크로머가 내 팔을 눌러 저 사람을 찔러야 한다고 일러 주었는데, 그것은 내 아버지였다. 거기서 나는 깨어났다.

이런 일들 위에서 나는 카인과 아벨을 아직 생각하기는 했지만 데미안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다시 처음으로 다가온 것은 묘하게도 역시 꿈속에서였다. 그러니까 나는 또 내가 매 맞고 짓눌리는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크로머 대신 데미안이 내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 이것은 아주 새로웠고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 크로머에게서 괴로움과 뻗댐 속에 당하던 모든 것을 데미안에게서는 기꺼이, 두려움만큼이나 큰 황홀함이 담긴 느낌으로 당했다. 이 꿈을 나는 두 번 꾸었고, 그다음에는 다시 크로머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이 꿈들에서 겪은 것과 현실에서 겪은 것을 나는 진작부터 정확히 가를 수 없다. 어쨌든 크로머와의 나쁜 관계는 제 갈 길을 갔고, 자잘한 도둑질을 모아 그 아이에게 빚진 액수를 마침내 다 갚았을 때에도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그는 그 도둑질들을 알고 있었다.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늘 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때보다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다 말하겠다고 자주 으름장을 놓았고, 그럴 때 내 두려움은 처음부터 그 일을 내가 직접 하지 않았다는 데 대한 깊은 아쉬움만큼 크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토록 비참하면서도 모든 것을 뉘우치지는 않았고, 적어도 늘 그렇지는 않았으며, 이따금은 모든 것이 이럴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듯도 했다. 하나의 운명이 내 위에 있었고 그것을 깨뜨리려 드는 것은 부질없었다.

아마 내 부모도 이 상태 아래서 적잖이 괴로웠을 것이다. 낯선 정신이 내 위에 내려와 있었고, 나는 그토록 살가웠던 우리 사이에 더는 맞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낙원을 그리듯 미친 향수가 나를 자주 덮쳤다. 나는 특히 어머니에게서 악한 사람이라기보다 병자처럼 다루어졌다. 그러나 실제 사정이 어떤지는 두 누이의 행동에서 가장 잘 볼 수 있었다. 몹시 조심스러우면서도 나를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던 그 행동에는, 내가 일종의 사로잡힌 사람이며 그 상태를 꾸짖기보다 딱하게 여겨야 하되 그 안에 바로 악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위해 여느 때와 다르게 기도한다는 것을 나는 느꼈고, 그 기도가 헛되다는 것도 느꼈다. 가벼워지고 싶은 그리움을, 제대로 고백하고 싶은 갈망을 나는 자주 타는 듯이 느꼈고, 그러면서도 아버지에게든 어머니에게든 모든 것을 옳게 말하고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미리 느꼈다. 그들이 다정하게 받아 주리라는 것을, 나를 몹시 감싸 주고 딱하게까지 여기리라는 것을, 그러나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운명인데도 일종의 탈선쯤으로 여겨지리라는 것도.

아직 열한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더러는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에게는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더 잘 아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제 감정의 일부를 생각으로 바꾸는 법을 익힌 어른은 아이에게서 그 생각이 없는 것을 보고는 겪은 일도 없으려니 여긴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그때만큼 깊이 겪고 괴로워한 적이 드물다.

* * *

한번은 비 오는 날이었다. 나는 나를 괴롭히는 자에게 성터 광장으로 나오라는 지시를 받아 거기 서서 기다리며, 시커멓고 물 듣는 나무에서 여태 떨어지는 젖은 밤나무 잎을 발로 헤집고 있었다. 돈은 없었지만 과자 두 조각을 챙겨 두었다가 가지고 나왔다. 크로머에게 적어도 무언가는 줄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느 구석에 서서 그를 기다리는 일에는, 그것도 아주 오래 기다리는 일에는 진작 익숙해져 있었고, 나는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듯 그것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크로머가 왔다. 그는 오늘 오래 있지 않았다. 그는 내 옆구리를 몇 번 쥐어박고 웃고 과자를 빼앗고 눅눅한 담배까지 한 개비 권했는데 나는 받지 않았다. 그는 여느 때보다 다정했다.

"참," 그가 가면서 말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 다음번엔 네 누나를 데려와도 되겠다. 큰 쪽 말이야. 걔 이름이 뭐더라?"

나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놀라서 그를 보았다.

"못 알아듣겠어? 네 누나를 데려오라고."

"응, 크로머, 그렇지만 그건 안 돼. 나는 그러면 안 되고, 누나도 아예 따라오지 않을 거야."

나는 그것이 또 하나의 못살게 굴기이자 구실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자주 그런 식이었다. 무언가 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나를 겁에 질리게 하고 나를 짓눌러 놓았다가, 차차 흥정에 응해 주었다. 그러면 나는 얼마간의 돈이나 다른 물건으로 몸값을 치러야 했다.

이번에는 그가 아주 달랐다. 내가 마다하는데도 그는 거의 화를 내지 않았다.

"뭐, 그래."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생각해 보게 될 거야. 나는 네 누나랑 알고 지내고 싶어. 언젠간 되겠지. 그냥 산책에 데리고 나오면 내가 거기 끼는 거야. 내일 휘파람 불 테니 그때 다시 얘기하자."

그가 가고 나자 그가 바라는 것의 뜻이 문득 어렴풋이 밝아 왔다. 나는 아직 온전히 어린애였지만, 사내아이와 여자아이가 조금 나이가 들면 서로 무언가 비밀스럽고 망측하고 금지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런 일을 —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가 아주 갑자기 또렷해졌다! 결코 그러지 않겠다는 결심은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러나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크로머가 나에게 어떻게 앙갚음할지는 감히 생각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에게 새로운 형벌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태 것으로는 모자랐던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막막하게 빈 광장을 가로질렀다. 새로운 괴로움, 새로운 종살이!

그때 싱그럽고 낮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놀라서 달리기 시작했다. 누가 내 뒤를 쫓아왔고 한 손이 뒤에서 나를 부드럽게 붙들었다.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순순히 붙잡혔다.

"너였구나?" 내가 어색하게 말했다. "깜짝 놀랐잖아!"

그가 나를 보았는데, 그 눈길이 지금처럼 어른의, 위에 선 자의, 꿰뚫어 보는 자의 눈길이었던 적은 없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그가 정중하면서도 아주 분명한 그 태도로 말했다. "그런데 들어 봐. 그렇게 놀라면 안 되는 거야."

"그야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것 같기는 하지. 그렇지만 봐.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한 사람 앞에서 그렇게 움찔하면 그 사람은 생각을 하기 시작해. 이상하고 궁금해지거든. 그 사람은 네가 유난히 잘 놀란다고 생각하고, 이어서 이렇게 생각하지. 저러는 건 겁이 날 때뿐이라고. 비겁한 사람은 늘 겁을 내지.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너는 사실 비겁한 애가 아니야. 그렇지? 아, 물론 영웅도 아니고. 네가 무서워하는 것들이 있어. 네가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아니, 사람을 무서워해서는 결코 안 돼. 너 나는 안 무섭지? 그런가?"

"아니, 전혀 안 무서워."

"그것 봐. 그런데 네가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있지?"

"모르겠어… 나 좀 놔줘.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그는 나와 보조를 맞추었다 — 나는 달아날 생각으로 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 그리고 나는 옆에서 오는 그의 눈길을 느꼈다.

"내가 너를 좋게 생각한다고 한번 쳐 봐."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어쨌든 나를 무서워할 건 없어. 나는 너하고 실험을 하나 해 보고 싶어. 재미있는 거고, 너도 거기서 아주 쓸모 있는 걸 배울 수 있어. 잘 봐! — 그러니까 나는 가끔 생각 읽기라고들 하는 재주를 부려 봐. 거기에 마법 같은 건 전혀 없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르면 아주 야릇해 보이지. 그걸로 사람들을 크게 놀래 줄 수도 있고. — 자, 한번 해 보자. 그러니까 나는 너를 좋아하거나 너한테 관심이 있어서, 네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내고 싶은 거야. 그러려고 첫걸음은 이미 뗐지. 내가 너를 놀라게 했잖아 — 그러니까 너는 잘 놀라는 애야. 그러니까 네가 겁내는 일들과 사람들이 있는 거지. 그건 어디서 오는 걸까? 사람은 누구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누군가를 무서워한다면 그건 그 누군가에게 자기를 다스릴 힘을 내주었기 때문이야. 이를테면 나쁜 짓을 했는데 저쪽이 그걸 안다 — 그러면 그 사람이 너를 다스릴 힘을 갖는 거지. 알아듣겠어? 뻔한 얘기지, 안 그래?"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얼굴은 여느 때처럼 진지하고 영리했고 인자하기도 했지만 다정한 구석이라고는 없었고, 오히려 엄했다. 거기에는 올바름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나는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그는 마법사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알아들었니?" 그가 한 번 더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 읽기가 우스워 보인다고 내가 말했지. 그렇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야. 이를테면 언젠가 내가 너한테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네가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꽤 정확히 말해 줄 수 있어. 뭐, 그건 여기 낄 얘기가 아니고. 나는 네가 언젠가 내 꿈을 꾼 적이 있으리라고도 생각해. 그렇지만 그건 그만두자! 너는 영리한 애야. 대부분은 어찌나 멍청한지! 나는 가끔 믿음이 가는 영리한 애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 너도 괜찮지?"

"응. 다만 나는 도무지 모르겠어 —"

"그 재미있는 실험으로 돌아가 보자!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낸 건 이거야. S. 소년은 잘 놀란다 — 누군가를 무서워한다 — 아마 그 상대와 자기한테 몹시 거북한 비밀이 있다. — 대충 맞니?"

꿈속에서처럼 나는 그의 목소리에, 그의 힘에 굴복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목소리 아닌가? 모든 것을 아는 목소리, 나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더 또렷이 아는 목소리 아닌가?

데미안이 내 어깨를 힘껏 쳤다.

"맞는구나. 그럴 줄 알았어. 이제 딱 한 가지만 더 묻자. 아까 저기서 가 버린 그 애 이름이 뭔지 아니?"

나는 몹시 놀랐다. 건드려진 내 비밀이 아프게 몸을 웅크리며 안으로 되말렸다. 빛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무슨 애? 애는 없었어, 나뿐이었어."

그가 웃었다.

"그냥 말해!" 그가 웃었다. "이름이 뭐야?"

나는 속삭였다. "프란츠 크로머 말이야?"

그는 흡족한 듯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했어! 너 눈치 빠른 녀석이구나, 우리 친구가 되겠는걸. 그런데 이건 너한테 말해 둬야겠다. 그 크로머라는 애, 이름이야 어떻든, 나쁜 녀석이야. 그 얼굴이 나한테 말해 주는데, 그 애는 악당이야! 네 생각은 어때?"

"아, 맞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걔는 나빠, 걔는 악마야! 그렇지만 걔가 알면 안 돼! 제발, 걔가 알면 안 돼. 너 걔를 알아? 걔가 너를 알아?"

"걱정 마! 걔는 갔고, 나를 몰라 — 아직은. 그렇지만 나는 걔를 꽤 알고 싶은데. 초등학교에 다니지?"

"응."

"몇 학년?"

"5학년. — 그렇지만 걔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 제발,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걱정 마, 너한테 아무 일도 안 생겨. — 이 크로머에 대해 나한테 좀 더 이야기해 줄 마음은 없겠지?"

"못 해! 안 돼, 나 좀 놔줘!"

그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아깝네." 그러고 나서 그가 말했다. "실험을 더 끌고 갈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만 너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아. 그래도 이건 알지? 걔를 무서워하는 게 온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 말이야. 그런 두려움은 사람을 아주 망가뜨려. 그건 떨쳐 내야 해. 네가 제대로 된 사람이 되려면 그걸 떨쳐 내야 해. 알아듣겠니?"

"그럼, 네 말이 다 맞아… 그렇지만 안 되는걸. 너는 모르잖아…"

"내가 이것저것 안다는 건 너도 봤잖아. 네가 생각한 것보다 많이 알지. — 혹시 걔한테 돈을 빚졌니?"

"응, 그것도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 말 못 해, 못 한다고!"

"그럼 네가 걔한테 빚진 만큼 돈을 내가 준대도 소용이 없겠구나? — 나는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리고 부탁인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한마디도! 너 나를 못살게 만드는 거야!"

"나를 믿어, 싱클레어. 너희 비밀은 나중에 언젠가 나한테 털어놓게 될 거야 —"

"절대로, 절대로 안 해!" 내가 거세게 외쳤다.

"네 마음대로 해. 나는 그저 나중에 언젠가 너가 나한테 더 말해 줄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물론 네가 원해서 말이지. 설마 내가 크로머 그 애처럼 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니 — 그렇지만 너는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아무것도 모르지. 나는 그냥 생각해 볼 뿐이야. 그리고 나는 크로머가 하는 식으로는 결코 하지 않아, 그건 나를 믿어도 돼. 너는 나한테 빚진 것도 없잖아."

우리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고 나는 좀 가라앉았다. 그러나 데미안이 아는 것들은 나에게 점점 더 수수께끼가 되었다.

"나 이제 집에 갈게." 그가 말하며 빗속에서 두꺼운 모직 외투를 여몄다. "여기까지 왔으니 한 가지만 다시 말해 둘게 — 너 그 녀석을 떨쳐 내야 해! 정 다른 수가 없으면 때려죽여!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감탄할 거고 마음에 들 거야. 내가 도와주기도 할 거고."

나는 새삼 겁이 났다. 카인 이야기가 갑자기 다시 떠올랐다. 섬뜩해져서 나는 가만가만 울기 시작했다. 내 둘레에 섬뜩한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 좋아." 막스 데미안이 웃었다. "집에 가! 우리가 어떻게든 할 거야. 때려죽이는 게 제일 간단하긴 하지만. 이런 일에서는 제일 간단한 게 늘 제일 나아. 너는 네 친구 크로머한테 좋은 대접을 못 받고 있어."

집에 돌아오니 일 년쯤 나가 있다 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나와 크로머 사이에 미래 같은 것이, 희망 같은 것이 서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몇 주고 몇 주고 내 비밀과 함께 얼마나 무섭게 혼자였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여러 번 곱씹었던 것이 떠올랐다. 부모 앞에서 고백하면 가벼워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온전히 풀려나지는 못하리라는 것. 그런데 이제 나는 거의 고백을 한 셈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낯선 사람에게. 그리고 풀려남의 예감이 짙은 향기처럼 나에게 날아왔다!

* * *

그렇다고 내 두려움이 곧바로 다 이겨진 것은 아니었고, 나는 아직 내 적과 길고 무서운 다툼을 치를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토록 조용히, 그토록 완전히 은밀하고 잠잠하게 지나간 것이 나에게는 더욱 묘했다.

우리 집 앞에서 크로머의 휘파람이 들리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한 주가 지났다. 나는 그것을 감히 믿지 못하고, 그가 갑자기, 바로 이제는 영영 오지 않으려니 여길 때 다시 거기 서 있지나 않을까 속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고, 오지 않은 채였다! 새로 얻은 자유를 미덥지 않게 여겨 나는 여전히 그것을 잘 믿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한번은 프란츠 크로머와 마주쳤다. 그는 자일러가세를 내려와 바로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움찔하더니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리고는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두말없이 돌아섰다.

나에게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순간이었다! 내 적이 내 앞에서 달아나다니! 내 악마가 나를 무서워하다니! 기쁨과 놀라움이 나를 관통했다.

그 무렵 데미안이 한 번 다시 나타났다. 그는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내가 말했다.

"안녕, 싱클레어. 그냥 어떻게 지내나 한번 들어 보려고. 크로머는 이제 너를 가만두지, 그렇지?"

"네가 그렇게 한 거야?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한 거야? 나는 도무지 모르겠어. 걔가 아예 안 나타나."

"잘됐네. 혹시라도 걔가 다시 오거든 — 안 그럴 것 같지만 워낙 뻔뻔한 녀석이니까 — 그냥 데미안을 생각해 보라고 말해."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야? 걔한테 싸움을 걸어서 두들겨 팼어?"

"아니, 나는 그런 건 별로 안 좋아해. 그냥 걔하고 이야기를 했어, 너하고 하듯이. 그러면서 너를 가만두는 게 제 이익이라는 걸 알아듣게 해 줄 수 있었지."

"아, 설마 걔한테 돈을 준 건 아니지?"

"아니야, 얘. 그 방법은 네가 벌써 해 봤잖아."

내가 아무리 캐물으려 해도 그는 빠져나갔고, 나는 그에 대한 예전의 그 답답한 느낌을 안고 남겨졌다. 고마움과 어려움, 감탄과 두려움, 끌림과 속으로 거스르는 마음이 야릇하게 섞인 느낌이었다.

나는 곧 그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카인 이야기에 대해서도 그와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고마움이란 애초에 내가 믿음을 두는 덕이 아니고, 그것을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나는 여긴다. 그래서 내가 막스 데미안에게 보인 그 완전한 배은망덕을 두고 나 자신도 그리 놀라지는 않는다. 그가 나를 크로머의 발톱에서 풀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병들고 망가졌으리라는 것을 오늘 나는 분명히 안다. 그 풀려남을 나는 그때도 이미 내 어린 삶의 가장 큰 사건으로 느꼈다 — 그러면서도 그 풀어 준 사람 자신은 기적을 이루자마자 내버려 두었다.

말했듯이 배은망덕은 나에게 묘한 일이 아니다. 오직 야릇한 것은 내가 보인 궁금함의 없음이다. 데미안이 나를 맞닿게 해 준 그 비밀들에 한 발짝도 다가가지 않은 채 어떻게 단 하루라도 태연히 살아갈 수 있었을까? 카인에 대해, 크로머에 대해, 생각 읽기에 대해 더 듣고 싶은 욕심을 어떻게 억누를 수 있었을까?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랬다. 나는 문득 악마의 그물에서 풀려난 나를 보았고, 세상이 다시 밝고 기쁘게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고, 더는 두려움의 발작과 목을 죄는 가슴 두근거림에 시달리지 않았다. 주술이 깨졌고, 나는 더 이상 시달리는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다시 여느 때와 같은 학생이었다. 내 천성은 되도록 빨리 다시 균형과 고요를 찾으려 했고, 그래서 무엇보다 그 많은 추하고 위협적인 것을 저에게서 밀어내어 잊으려고 애썼다. 내 죄와 겁먹음의 그 길고 긴 이야기 전체가 놀랍도록 빨리 내 기억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겉보기에는 아무 흉터도 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

반면에 내가 나를 도와주고 구해 준 사람을 그토록 빨리 잊으려 한 것도 오늘은 이해가 된다. 내 저주의 골짜기에서, 크로머 밑의 무서운 종살이에서 나는 상한 영혼의 온갖 충동과 힘을 다해 전에 행복하고 흡족했던 그곳으로 달아났다. 다시 열린 잃어버린 낙원으로, 밝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로, 누이들에게로, 깨끗함의 향기로, 아벨의 하느님 마음에 듦으로.

데미안과 짧게 이야기한 바로 다음 날, 되찾은 자유를 마침내 완전히 확신하고 다시 떨어질 걱정이 없어지자 나는 그토록 자주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일을 했다 — 나는 고백했다. 어머니에게 가서 자물쇠가 부서지고 돈 대신 놀이 딱지가 채워진 그 작은 저금통을 보여 주었고, 내 잘못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못된 괴롭히는 자에게 매여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저금통을 보았고, 달라진 내 눈빛을 보았고, 달라진 내 목소리를 들었고, 내가 나았다는 것을, 내가 당신에게 되돌려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벅찬 마음으로 나를 다시 받아들이는 잔치를, 탕자의 귀향을 치렀다. 어머니가 나를 아버지에게 데려갔고, 이야기가 되풀이되었고, 물음과 놀라움의 감탄이 잇달았고, 두 분 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랜 짓눌림에서 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훌륭했고, 모든 것이 이야기책에서처럼 되었고, 모든 것이 놀라운 어울림으로 풀렸다.

이제 나는 참된 열정으로 이 어울림 속으로 달아났다. 다시 내 평화와 부모의 믿음을 얻었다는 것에 나는 아무리 배불러도 모자랐고, 집안의 모범 소년이 되었고, 누이들과 어느 때보다 많이 놀았고, 기도 시간에는 풀려나고 돌아선 자의 황홀한 느낌으로 그 정답고 오래된 노래들을 따라 불렀다. 그것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고 거기에 거짓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것은 조금도 온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데미안에 대한 내 잊음이 참으로 설명되는 유일한 지점이다. 나는 그에게 고백했어야 했다! 그 고백은 덜 그럴싸하고 덜 뭉클했겠지만 나에게는 더 열매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온 뿌리로 예전의 낙원 같은 내 세계에 매달렸고, 집으로 돌아와 은혜롭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 세계에 결코 속하지 않았고 여기에 맞지 않았다. 그도, 크로머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결국 — 그도 꾀어내는 자였고, 그도 나를 저 두 번째의 악하고 나쁜 세계와 이어 주었으며, 나는 이제 그 세계에 대해 영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막 나 자신이 다시 아벨이 된 마당에, 아벨을 내주고 카인을 높이는 일을 거들 수는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겉으로 얽힌 사정은 그러했다. 그러나 속의 사정은 이러했다. 나는 크로머와 악마의 손에서 풀려났지만 내 힘과 내가 한 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의 오솔길을 걸어 보려 했는데 그 길이 나에게는 너무 미끄러웠다. 이제 다정한 손의 붙듦이 나를 구해 주자 나는 곁눈 한 번 팔지 않고 어머니의 품으로, 울타리 쳐진 경건하고 부드러운 어린애다움의 감싸임으로 도로 달려갔다. 나는 실제의 나보다 더 어리고 더 기대고 더 어린애답게 굴었다. 나는 크로머에게 매였던 것을 새로운 얽매임으로 바꾸어야 했다. 혼자 걸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눈먼 마음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오래되고 사랑하는 「밝은 세계」에 매이는 쪽을 골랐다. 그것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는 데미안에게 붙어 나를 그에게 맡겨야 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것이 그때는 그의 낯선 생각들에 대한 마땅한 미더워하지 않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두려움일 뿐이었다. 데미안은 부모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요구했을 것이고, 부추김과 타이름으로, 비웃음과 빈정거림으로 나를 더 홀로 서게 만들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아, 오늘 나는 안다. 저 자신에게로 이끄는 길을 가는 것보다 사람에게 더 싫은 일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나는 반년쯤 뒤에 그 꾐을 이기지 못하고, 산책길에 아버지에게 어떤 사람들이 카인을 아벨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몹시 놀라며, 그것은 새로울 것이 없는 견해라고 일러 주었다. 그것은 이미 초기 기독교 시대에도 나타났고 여러 분파에서 가르쳐졌는데 그중 하나가 스스로를 「카인파」라 불렀다고 했다. 그러나 물론 이 터무니없는 가르침은 우리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악마의 시도일 뿐이라고 했다. 카인이 옳고 아벨이 그르다고 믿으면 하느님이 잘못하셨다는 결론이 나오고, 그러면 성경의 하느님이 참되고 유일한 하느님이 아니라 거짓 하느님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카인파도 비슷한 것을 가르치고 설교했지만, 이 이단은 오래전에 인류에게서 사라졌으며, 다만 내 학교 친구가 그런 것을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 놀랍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은 그만두라고 진지하게 타일렀다.

강도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서 감싸여 있던 것에 대해, 자식의 사랑과 부드럽고 정답고 밝은 둘레에서 넉넉히 놀며 지내던 삶에 대해서라면 아름답고 여리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 그런 것은 넉넉히 말해 두었다. 나에게 흥미로운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이르려고 내 삶에서 내디딘 걸음들뿐이다. 그 고운 쉼터들, 행복의 섬들, 낙원들, 그 홀림을 나도 모르지 않았던 그것들은 먼 곳의 광채 속에 그대로 두고 다시 발 들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직 소년 시절에 머무는 동안에도 새로 나에게 온 것, 나를 앞으로 밀어낸 것, 나를 뜯어낸 것만을 말한다.

이 밀침들은 언제나 「저쪽 세계」에서 왔고, 언제나 두려움과 억눌림과 꺼림칙한 양심을 함께 데려왔으며, 언제나 뒤엎는 것이었고, 내가 기꺼이 머물러 살고 싶던 평화를 위태롭게 했다.

내 안에도 허락되고 밝은 세계에서는 기어들어 숨어야 하는 근원의 충동이 살고 있음을 새삼 알아내야 하는 나이가 왔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천천히 깨어나는 성의 느낌이 적으로, 부수는 자로, 금지된 것으로, 꾐과 죄로 덮쳐 왔다. 내 궁금함이 찾던 것, 나에게 꿈과 쾌락과 두려움을 만들어 주던 것, 사춘기의 그 큰 비밀은 울타리 쳐진 내 어린 평화의 복됨에 도무지 맞지 않았다. 나는 남들처럼 했다. 더는 아이가 아닌 아이의 이중생활을 했다. 내 의식은 집안의 것과 허락된 것 속에서 살았고, 내 의식은 밝아 오는 새로운 세계를 부인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와 나란히 땅 밑 같은 꿈과 충동과 바람 속에서 살았고, 그 위로 저 의식된 삶이 점점 더 겁먹은 다리를 놓았다. 내 안의 어린이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부모가 그렇듯 내 부모도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 그 깨어나는 삶의 충동을 도와주지 않았다. 다만 지칠 줄 모르는 정성으로, 현실을 부인하고 점점 더 헛되고 거짓되어 가는 어린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 보려는 내 가망 없는 시도들만을 도왔다. 여기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지 나는 모르겠고, 내 부모를 탓하지도 않는다. 나 자신을 감당하고 내 길을 찾는 것은 내 몫이었고, 나는 잘 자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내 몫을 서투르게 해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어려움을 겪어 낸다. 보통 사람에게 이 지점은 제 삶의 요구가 둘레와 가장 모질게 부딪치는 자리,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장 쓰라리게 싸워 얻어야 하는 자리다. 많은 이가 우리 운명인 죽음과 새로 태어남을 삶에서 오직 이 한 번, 어린 시절이 삭아 천천히 무너질 때, 정들었던 모든 것이 우리를 떠나려 하고 우리가 문득 우주의 외로움과 죽음 같은 차가움을 둘레에서 느낄 때 겪는다. 그리고 아주 많은 이가 이 벼랑에 영영 걸린 채로,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간 것에, 잃어버린 낙원의 꿈에 평생 아프게 붙어 산다. 그것은 모든 꿈 가운데 가장 나쁘고 가장 사람을 죽이는 꿈이다.

이야기로 돌아가자. 어린 시절의 끝이 나에게 알려 오던 그 느낌과 꿈의 그림들은 이야기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어두운 세계」가, 「저쪽 세계」가 다시 와 있었다. 한때 프란츠 크로머였던 것이 이제 내 안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바깥에서도 「저쪽 세계」가 다시 나를 다스릴 힘을 얻었다.

크로머와의 일이 있고 여러 해가 지나 있었다. 내 삶의 그 극적이고 죄에 찬 시절은 그때 나에게 아주 멀었고, 짧은 가위눌림처럼 흔적 없이 지나간 듯했다. 프란츠 크로머는 진작 내 삶에서 사라져, 어쩌다 마주쳐도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내 비극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 막스 데미안은 내 둘레에서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오랫동안 멀찍이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보이기는 하되 작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차차 다시 가까이 다가와 다시 힘과 영향을 뿜기 시작했다.

그 시절 데미안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을 떠올려 보려 한다. 한 해가 넘도록 그와 단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그를 피했고 그는 조금도 다가서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치면 그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그럴 때 그 다정함에 비웃음이나 빈정대는 나무람의 가는 울림이 섞여 있는 듯할 때가 이따금 있었지만, 그것은 내 상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겪은 그 일도, 그때 그가 나에게 끼친 그 야릇한 영향도 그에게서나 나에게서나 잊힌 듯했다.

그의 모습을 더듬어 보면, 그리고 이제 그를 떠올려 보면, 그가 거기 있었고 내 눈에 띄었음을 알겠다. 나는 그가 혼자서, 또는 큰 학생들 틈에 끼어 학교로 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가 낯설고 외롭고 조용하게, 별처럼 그들 사이를 거니는 것을, 저만의 공기에 둘러싸여 저만의 법 아래 사는 것을 본다.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와 가깝지 않았다. 오직 그의 어머니뿐이었는데, 그 어머니와도 그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처럼 지내는 것 같았다. 선생들은 되도록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좋은 학생이었지만 누구의 마음에 들려고 하지 않았고, 우리는 이따금 그가 어느 선생에게 했다는 말이나 주석이나 대꾸에 대해 소문으로 들었는데, 그것은 매몰찬 도전이나 빈정거림으로 모자랄 것이 없었다.

눈을 감고 떠올려 보면 그의 모습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게 어디였더라? 그래, 이제 다시 떠오른다. 우리 집 앞 골목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가 손에 수첩을 들고 서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우리 집 문 위에 있는, 새가 그려진 그 오래된 문장을 옮겨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창가에서 커튼 뒤에 숨어 그를 지켜보았고, 문장 쪽으로 돌린 그 주의 깊고 서늘하고 환한 얼굴을 깊이 놀라며 바라보았다. 어른의 얼굴, 연구자나 예술가의 얼굴, 위에 서 있고 의지로 가득하고 야릇하게 환하고 서늘하며 아는 눈을 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가 보인다. 얼마 뒤 거리에서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우리는 모두 쓰러진 말 한 마리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말은 아직 끌채에 매인 채 농사 수레 앞에 누워, 벌어진 콧구멍으로 무언가를 찾듯 가엾게 공기를 들이켜며 보이지 않는 상처에서 피를 흘렸고, 그래서 그 곁의 흰 길먼지가 천천히 검게 젖어 들었다. 메스꺼움을 느끼며 그 광경에서 눈을 돌리다가 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앞으로 비집고 나오지 않고 맨 뒤에 서 있었다. 편안하고 꽤 우아하게, 그다운 모습으로. 그의 눈길은 말의 머리에 가 있는 듯했고, 다시 그 깊고 고요하고 거의 광신에 가까우면서도 열정은 없는 주의 깊음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를 오래 바라보아야 했고, 그때 아직 의식과는 먼 곳에서 아주 야릇한 무언가를 느꼈다. 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았고, 그것이 소년의 얼굴이 아니라 어른의 얼굴이라는 것만 본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상을 보았다. 그것이 어른의 얼굴도 아니고 또 다른 무엇이라고 보는 듯, 느끼는 듯했다. 거기에는 여자의 얼굴 같은 것도 얼마쯤 들어 있는 것 같았고, 특히 그 얼굴은 한순간 나에게 남자답지도 아이 같지도 않고, 늙지도 젊지도 않고, 어쩐지 천 년쯤 된 듯, 어쩐지 시간 밖의 것인 듯, 우리가 사는 것과는 다른 시대의 도장이 찍힌 듯 보였다. 짐승이 그렇게 보일 수 있고, 나무가, 별이 그럴 수 있었다 — 나는 그것을 몰랐고, 지금 어른이 되어 그것에 대해 하는 말을 그대로 느낀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무엇을 느꼈다. 어쩌면 그는 아름다웠고, 어쩌면 내 마음에 들었고, 어쩌면 나에게 거슬리기도 했다. 그것도 판가름할 수 없었다. 내가 본 것은 이것뿐이었다. 그는 우리와 달랐다. 그는 짐승 같았고, 또는 정령 같았고, 또는 그림 같았다. 그가 어떠했는지 나는 모르지만, 그는 달랐다. 우리 모두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달랐다.

기억이 나에게 말해 주는 것은 그 이상이 없고, 어쩌면 이것도 얼마쯤은 이미 나중의 인상에서 길어 올린 것인지 모른다.

여러 해가 더 지나서야 나는 마침내 다시 그와 가까이 닿게 되었다. 데미안은 관례가 요구하는 대로 제 또래와 함께 교회에서 견신례를 받지 않았고, 그 일에도 곧 소문이 따라붙었다. 학교에서는 다시 그가 실은 유대인이라거나, 아니 이교도라는 말이 돌았고, 다른 아이들은 그가 어머니와 함께 아무 종교도 없거나 괴상하고 고약한 분파에 속해 있다고 아는 척했다. 그와 맞물려 그가 어머니와 연인처럼 산다는 의심도 들은 것 같다. 아마도 그는 그때까지 교파 없이 자랐고, 이제 그것이 그의 앞날에 이런저런 불편을 낳을까 걱정하게 된 사정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어머니는 또래보다 두 해 늦게라도 그를 견신례에 참여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몇 달 동안 견신례 수업에서 내 친구가 되었다.

한동안 나는 그에게서 완전히 물러나 있었다. 나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소문과 비밀에 너무 많이 둘러싸여 있었고, 무엇보다 크로머 사건 이후 내 안에 남아 있던 빚진 느낌이 거슬렸다. 게다가 바로 그 무렵 나는 내 비밀만으로도 벅찼다. 나에게 견신례 수업은 성에 관한 결정적인 눈뜸의 시기와 겹쳤고, 마음은 착했으나 그 탓에 경건한 가르침에 대한 내 관심은 몹시 줄었다. 목사가 말하는 것들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고요하고 거룩한 비현실 속에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어쩌면 아주 아름답고 값진 것이었겠지만 조금도 지금의 일이 아니었고 가슴 뛰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 다른 것들은 바로 그것을 더할 나위 없이 하고 있었다.

이 상태가 나를 수업에 무심하게 만들수록 내 관심은 다시 막스 데미안에게로 다가갔다. 무언가가 우리를 잇는 듯했다. 나는 이 실을 되도록 정확히 따라가 보아야 한다. 기억하는 한 그것은 아직 교실에 불이 켜져 있던 어느 이른 아침 시간에 시작되었다. 우리 성직자 선생이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 이르렀다. 나는 거의 귀담아듣지 않았다. 졸렸고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때 목사가 목청을 높여 카인의 표에 대해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무언가 닿는 듯한, 일깨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고개를 드니 앞줄 쪽에서 데미안의 얼굴이 나를 향해 돌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환하게 말하는 눈, 비웃음일 수도 진지함일 수도 있는 표정이었다. 그는 한순간만 나를 보았는데, 갑자기 나는 목사의 말에 바짝 귀를 기울였고, 그가 카인과 그 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고, 그것이 그가 가르치는 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을 달리 볼 수도 있다는 것을, 거기에 비판이 가능하다는 것을 내 안 깊은 데서 아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으로 데미안과 나 사이에는 다시 이어짐이 생겼다. 그리고 묘하게도 — 마음속에 어떤 한편이라는 느낌이 생기자마자 나는 그것이 마법처럼 공간에도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꾸밀 수 있었던 것인지 순전한 우연이었는지 나는 몰랐다 — 그때 나는 아직 우연을 굳게 믿었다 — 며칠 지나지 않아 데미안이 갑자기 종교 시간의 자리를 바꾸어 바로 내 앞에 앉았고(빽빽한 교실의 그 초라한 아침 공기 한복판에서 그의 목덜미 쪽에서 나는 산뜻한 비누 냄새를 얼마나 즐겨 들이켰는지 나는 아직 기억한다!), 다시 며칠 뒤에는 또 자리를 바꾸어 이제 내 옆에 앉았고, 겨우내 그리고 봄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침 시간이 아주 달라졌다. 더는 졸립고 지루하지 않았다. 나는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어떤 때는 우리 둘 다 더없이 주의 깊게 목사의 말을 들었고, 옆자리에서 오는 눈길 한 번이면 어떤 묘한 이야기나 야릇한 구절에 내 눈길을 돌리게 하기에 넉넉했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눈길, 아주 정해진 눈길 하나면 나를 일깨워 내 안에 비판과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넉넉했다.

그러나 아주 자주 우리는 나쁜 학생이었고 수업에서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데미안은 선생과 친구들에게 늘 예의 발랐다. 그가 학생다운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고, 크게 웃거나 떠드는 것을 들은 적이 없고, 선생에게 꾸중을 듣는 일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주 조용히, 속삭이는 말보다는 몸짓과 눈길로 그는 나를 제 일에 끼워 줄 줄 알았다. 그 일들은 더러 묘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어떤 학생들이 자기에게 흥미로운지, 그들을 어떤 식으로 살피는지 나에게 말해 주었다. 더러는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수업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엄지로 신호를 보내면 누구누구가 우리 쪽을 돌아보거나 목덜미를 긁을 거야." 그러다 수업 중에 내가 그 일을 거의 잊고 있을 때쯤 막스가 갑자기 눈에 띄는 몸짓으로 나에게 엄지를 돌려 보였고, 내가 얼른 지목된 학생 쪽을 살피면 그는 어김없이 줄에 매달려 당겨지듯 그 몸짓을 했다. 나는 선생에게도 한번 해 보라고 막스를 졸랐지만 그는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번은 내가 수업에 들어와 오늘 숙제를 못 해서 목사님이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기를 몹시 바란다고 말하자 그가 나를 도와주었다. 목사는 교리문답을 외게 할 학생을 찾고 있었고, 헤매던 그 눈이 죄지은 내 얼굴에 걸렸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나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고 이미 내 이름이 입에 올라 있었다 — 그런데 갑자기 그가 정신이 흩어졌거나 안절부절못하는 듯 옷깃을 매만지더니, 자기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데미안 쪽으로 다가가 무언가 물으려는 듯하다가 뜻밖에 다시 돌아서서 한동안 기침을 하고는 다른 학생을 시켰다.

이런 장난이 나를 몹시 즐겁게 하는 동안, 내 친구가 나에게도 같은 놀이를 자주 한다는 것을 나는 차차 알아챘다. 학교 가는 길에 문득 데미안이 얼마쯤 뒤에서 걸어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돌아보면 정말로 그가 거기 있곤 했다.

"너 정말로 다른 사람이 네가 원하는 걸 생각하게 만들 수 있어?"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여느 때의 어른스러운 태도로 조용하고 담담하게 선뜻 일러 주었다.

"아니." 그가 말했다. "그건 안 되는 일이야. 사람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게 없거든, 목사님은 있는 척하지만. 저쪽도 제가 원하는 걸 생각할 수 없고, 나도 그가 내가 원하는 걸 생각하게 만들 수 없어. 그렇지만 누군가를 잘 살펴볼 수는 있지. 그러면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꽤 정확히 말할 수 있을 때가 많고, 그러면 대개 그가 다음 순간에 무엇을 할지도 미리 볼 수 있어. 아주 간단한 일인데 사람들이 모를 뿐이야. 물론 익히기는 해야 하고.

이를테면 나비 중에 밤나방이라는 게 있는데, 그중에는 암컷이 수컷보다 훨씬 드문 종류가 있어. 이 나방도 다른 짐승처럼 새끼를 치지. 수컷이 암컷에게 씨를 붙이고 암컷이 알을 낳아. 그런데 이 밤나방의 암컷 한 마리를 두면 — 자연 연구자들이 자주 해 본 일이야 — 밤에 수컷들이 이 암컷에게로 날아오는데, 그것도 몇 시간 거리에서 날아와! 몇 시간 거리에서, 생각해 봐! 몇십 리 밖에서 그 수컷들이 그 언저리에 하나뿐인 그 암컷을 알아채는 거야! 사람들이 그걸 설명해 보려고 하지만 잘 안 돼. 일종의 냄새 감각이나 그런 것이겠지. 좋은 사냥개가 알아챌 수 없는 자취를 찾아 쫓아가는 것처럼 말이야. 알아듣겠어? 자연에는 그런 것들이 가득한데 아무도 설명하지 못해. 그런데 내 말은 이거야. 이 나방들의 암컷이 수컷만큼 흔했다면 수컷들은 그런 예민한 코를 갖지 못했을 거야! 그들이 그걸 가진 건 오직 그렇게 자기를 길들였기 때문이지. 짐승이든 사람이든 온 주의와 온 의지를 어떤 한 가지에 쏟으면 그것을 이루게 돼. 그게 전부야. 네가 말하는 것도 꼭 그래. 어떤 사람을 충분히 정확하게 들여다보면 그 사람 자신보다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지."

나는 「생각 읽기」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와, 그것으로 그에게 그토록 오래전에 있었던 크로머 때의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둘 사이의 야릇한 일이었다. 그가 여러 해 전에 내 삶에 그토록 심각하게 끼어들었다는 것을, 그도 나도 결코 한 번도 아주 넌지시라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고, 또는 서로가 상대는 그것을 잊었으려니 굳게 셈하는 것 같았다. 한두 번은 함께 길을 가다가 프란츠 크로머와 마주치기까지 했지만, 우리는 눈길도 주고받지 않았고 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지라는 건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물었다. "너는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하잖아. 그런데 또 의지를 어떤 것에 단단히 쏟기만 하면 제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하고. 그건 앞뒤가 안 맞잖아! 내가 내 의지의 주인이 아니라면 그걸 이리로든 저리로든 마음대로 쏟을 수도 없는 거잖아."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그를 기쁘게 할 때면 그는 늘 그렇게 했다.

"물어봐 주니 좋구나!" 그가 웃으며 말했다. "늘 물어야 하고 늘 의심해야 해. 그렇지만 이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이를테면 그런 밤나방이 제 의지를 별이나 어디 다른 데로 쏟으려 한다면 그건 안 되겠지. 다만 — 나방은 애초에 그런 걸 해 보지 않아. 나방은 저에게 뜻과 값이 있는 것만, 저에게 필요한 것만, 저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만 찾아. 그리고 바로 거기서 믿을 수 없는 일까지 해내는 거야 — 저 말고 어떤 짐승도 갖지 못한 마법 같은 여섯 번째 감각을 길러 내지! 우리 같은 사람은 물론 짐승보다 운신할 자리도 넓고 관심도 많아. 그렇지만 우리도 비교적 꽤 좁은 테두리에 매여 있어서 그 밖으로는 못 나가. 나야 이것저것 공상할 수 있고, 이를테면 꼭 북극에 가고 싶다고 여길 수도 있지. 그렇지만 그걸 해내고 충분히 강하게 원할 수 있는 건 그 바람이 온전히 내 안에 있을 때, 정말로 내 본성이 그것으로 가득 차 있을 때뿐이야. 그렇게만 되면, 네 안에서부터 명령받은 것을 해 보려 하기만 하면 그건 되는 일이고, 그때는 네 의지를 좋은 말처럼 부릴 수 있어. 이를테면 내가 지금 우리 목사님이 앞으로 안경을 쓰지 않게 만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건 안 돼. 그건 장난일 뿐이야. 그렇지만 지난가을에 저 앞자리에서 옮겨 앉겠다는 굳은 의지가 생겼을 때는 아주 잘됐지. 갑자기 이름 차례가 나보다 앞인 애가 하나 나타났는데 그때까지 앓던 애였어. 누군가 그 애한테 자리를 내줘야 했으니 그게 나였던 건 당연한 일이지. 내 의지가 그 기회를 곧바로 붙잡을 채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내가 말했다. "나도 그때 아주 야릇했어. 우리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 순간부터 네가 자꾸 나에게 가까이 왔지.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처음엔 곧바로 내 옆에 앉지 않고 몇 번은 내 앞자리에 앉았잖아? 그건 어떻게 된 거야?"

"그건 이랬어. 첫 자리에서 떠나고 싶었을 때 나 자신도 어디로 가고 싶은지 잘 몰랐어. 그저 더 뒤에 앉고 싶다는 것만 알았지. 너에게 가려는 것이 내 의지였는데 그게 아직 의식되지 않았던 거야. 동시에 네 의지도 함께 끌어당겨 나를 도왔고. 그러다 네 앞자리에 앉고 나서야 내 바람이 아직 절반만 이루어졌다는 걸 알았어 — 내가 실은 네 옆에 앉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는 걸 알아챈 거지."

"그렇지만 그때는 새로 들어온 애가 없었잖아."

"없었지. 그렇지만 그때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두말없이 네 옆에 앉았어. 나랑 자리를 바꾼 애는 그저 어리둥절해하면서 내버려 뒀고. 목사님도 한 번은 뭔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채긴 했어 — 사실 나를 상대할 때마다 그분은 속으로 뭔가에 시달리셔. 내 이름이 데미안이라는 걸, 그러니까 이름이 D인 내가 저 뒤 S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맞지 않다는 걸 아시거든! 그렇지만 그게 의식까지는 뚫고 올라가지 못해. 내 의지가 거스르고 있고 내가 자꾸 그걸 막으니까. 그분은 자꾸만 뭔가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나를 보면서 따져 보기 시작하시지, 그 착한 어른이. 그런데 나한테는 간단한 방법이 있어. 그때마다 그분 눈을 아주, 아주 단단히 들여다보는 거야. 그걸 견디는 사람은 거의 없어. 다들 불안해지지.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고 싶어서 불시에 그 눈을 아주 단단히 들여다봤는데도 그가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으면, 그러면 그만둬! 그 사람한테서는 아무것도 못 얻어, 절대로! 그렇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어. 나한테 그게 안 통하는 사람은 사실 딱 하나밖에 몰라."

"그게 누군데?" 내가 얼른 물었다.

그는 생각에 잠길 때면 짓는 조금 작아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눈길을 돌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몹시 궁금했지만 그 물음을 되풀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가 자기 어머니를 말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그는 어머니와 아주 살갑게 지내는 듯했지만 나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나를 자기 집에 데려간 적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거의 몰랐다.

* * *

그 무렵 나는 이따금 그를 흉내 내어 내 의지를 어떤 것에 모아 그것을 이루어 보려는 시도를 했다. 나에게 충분히 절실해 보이는 바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되지 않았고 되지도 않았다. 그것을 데미안에게 이야기하는 일은 나로서는 할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그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도 묻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종교 문제에서 내 믿음에는 여러 군데 구멍이 났다. 그러나 철저히 데미안의 영향을 받은 내 생각은 아주 안 믿는 쪽으로 돌아선 친구들과는 크게 달랐다. 그런 아이가 몇 있었는데, 그들은 이따금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습고 사람답지 못한 일이라느니, 삼위일체나 예수의 동정 탄생 같은 이야기는 그저 웃음거리라느니, 오늘날까지도 그런 잡동사니를 들고 다니며 파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느니 하는 말을 흘렸다.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의심이 드는 데서도 나는 이를테면 내 부모가 살아가는 것 같은 경건한 삶의 실제를 어린 시절의 온 경험에서 넉넉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값없는 일도 꾸며 낸 일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나는 종교적인 것 앞에서 여전히 가장 깊은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데미안이 나를 그 이야기들과 믿음의 조항들을 더 자유롭게, 더 저 나름으로, 더 놀이하듯, 더 상상력 있게 보고 풀이하는 데 길들여 놓았을 뿐이다. 적어도 나는 그가 나에게 넌지시 일러 주는 풀이를 늘 기꺼이 즐겁게 따랐다. 물론 더러는 나에게 너무 매몰찼고, 카인 이야기도 그랬다. 그리고 한번은 견신례 수업 중에 그가 어쩌면 그보다 더 대담한 견해로 나를 놀라게 했다. 선생이 골고다에 대해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구주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린 사내아이였을 때 나는 이따금, 이를테면 성금요일에 아버지가 수난기를 읽어 준 뒤에 그 괴로우면서도 아름답고 창백하고 유령 같으면서도 엄청나게 살아 있는 세계 속에서,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깊이 사로잡혀 살았다. 그리고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들을 때면 그 비밀스러운 세계의 침침하고 힘찬 고난의 광채가 온갖 신비의 떨림과 함께 나를 덮쳤다. 오늘도 나는 이 음악에서, 그리고 「악투스 트라기쿠스」에서 모든 시와 모든 예술적 표현의 정수를 본다.

그런데 그 시간이 끝날 무렵 데미안이 생각에 잠겨 나에게 말했다. "싱클레어, 저기 내 마음에 안 드는 게 하나 있어. 그 이야기를 한번 다시 읽고 혀에 얹어 맛을 봐. 뭔가 밍밍한 맛이 나는 데가 있어. 바로 두 강도 이야기 말이야. 언덕 위에 세 개의 십자가가 나란히 서 있는 건 굉장하지! 그런데 그 착해진 강도가 나오는 감상적인 전도지 이야기라니! 처음엔 죄인이어서 하느님만 아실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는데, 이제 와서 사르르 녹아서는 뉘우침과 고쳐먹음의 그 눈물겨운 잔치를 벌인다는 거잖아! 무덤에서 두 걸음 떨어진 데서 하는 그런 뉘우침에 무슨 뜻이 있어, 응? 그것도 또 하나의 영락없는 성직자 이야기일 뿐이야. 달곰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감동의 기름칠을 하고, 아주 교훈적인 배경을 깔고 있지. 네가 오늘 그 두 강도 중 하나를 친구로 골라야 한다면, 또는 둘 중 누구를 더 믿을 수 있을지 헤아려 봐야 한다면, 그건 분명히 그 눈물겹게 돌아선 쪽은 아닐 거야. 아니지, 다른 쪽이야. 그쪽이 사내고 줏대가 있어. 그는 제 처지에서는 그저 듣기 좋은 소리일 수밖에 없는 돌아섬 따위에 콧방귀를 뀌고, 제 길을 끝까지 가고, 마지막 순간에 비겁하게 악마와 갈라서지 않아. 그때까지 자기를 도와줘야 했던 그 악마와 말이야. 그는 줏대가 있는 사람이고, 줏대 있는 사람은 성경 이야기에서 으레 손해를 보지. 어쩌면 그도 카인의 후손인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몹시 당황했다. 이 십자가 이야기에서만은 내가 아주 제집처럼 훤하다고 여겨 왔는데, 내가 그것을 얼마나 저 나름 없이, 얼마나 그려 보는 힘도 상상력도 없이 듣고 읽어 왔는지를 그제야 보았다. 그러면서도 데미안의 새로운 생각은 나에게 불길하게 들렸고, 내가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여기던 관념들을 뒤엎으려고 위협했다. 아니, 무엇이든 아무것에나 그렇게 함부로 굴 수는 없었다. 가장 거룩한 것에 대해서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곧바로 내 뻗댐을 알아챘다.

"나도 알아." 그가 체념하듯 말했다. "늘 있는 일이지. 진지해지지만 말자는 거! 그렇지만 하나만 말해 둘게 —. 여기가 이 종교의 모자란 데를 아주 뚜렷이 볼 수 있는 지점 가운데 하나야.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 하느님이라는 분이 훌륭한 인물이기는 한데, 정작 그분이 나타내야 할 그것은 아니라는 게 문제야. 그분은 선한 것, 고결한 것, 아버지다운 것, 아름답고 또 높은 것, 감상적인 것이지 — 다 맞아! 그렇지만 세상은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그건 죄다 그냥 악마 몫으로 돌려 버리고, 세상의 그 몫 전체, 그 절반 전체를 슬쩍 빼돌리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거야. 하느님을 모든 생명의 아버지라고 기리면서, 정작 생명이 거기 딛고 선 성의 삶 전체에 대해서는 그냥 입을 다물고 되도록이면 악마의 것이라거나 죄스럽다고 못 박아 버리는 것처럼! 나는 사람들이 이 여호와 하느님을 섬기는 데 아무 반대가 없어, 조금도. 그렇지만 내 생각엔 우리는 「모든 것」을 섬기고 거룩히 여겨야 해. 인위로 잘라 낸 그 공식적인 절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말이야! 그러니 그렇다면 우리는 예배 옆에 악마 섬기는 예배도 두어야겠지. 나는 그게 옳다고 봐. 아니면 악마까지 제 안에 품은 하느님을 하나 지어내야 할 거야.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벌어질 때 눈을 감지 않아도 되는 그런 하느님을."

그는 그답지 않게 거의 격해졌다가 곧 다시 웃으며 나를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내 안에서 소년 시절 전체의 수수께끼를, 내가 시시각각 품고 다니면서도 누구에게도 한마디 하지 않았던 그 수수께끼를 맞혔다. 데미안이 하느님과 악마에 대해, 신적이고 공식적인 세계와 입 다물어 버린 악마의 세계에 대해 한 말은 바로 내 생각이었고 내 신화였다. 두 세계, 또는 세계의 두 쪽 — 밝은 쪽과 어두운 쪽에 관한 생각이었다. 내 문제가 모든 사람의 문제이고 모든 삶과 생각의 문제라는 깨달음이 갑자기 거룩한 그림자처럼 나를 덮쳤고, 나의 가장 나다운 개인의 삶과 생각이 큰 사상들의 영원한 흐름에 얼마나 깊이 함께하고 있는지를 보고 문득 느끼자 두려움과 경외심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깨달음은 어쩐지 확인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었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그것은 딱딱했고 거친 맛이 났다. 거기에 책임의 울림이, 더는 아이일 수 없다는 울림이, 홀로 선다는 울림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에서 처음으로 그토록 깊은 비밀을 드러내며,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녀 온 「두 세계」에 관한 내 생각을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내 가장 깊은 느낌이 그에게 동의하고 그를 옳다고 한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이용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여태 준 적 없는 더 깊은 주의로 귀를 기울이며 내 눈을 들여다보았고, 나는 눈을 돌려야 했다. 그의 눈길에서 다시 그 야릇하고 짐승 같은 시간 없음을, 생각할 수 없는 늙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얘긴 다음에 더 하자." 그가 아껴 주듯 말했다. "너는 남한테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구나. 그런데 그렇다면 너도 알겠지. 네가 생각한 것을 온전히 살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그건 좋지 않아. 우리가 살아 내는 생각만이 값이 있어. 너는 네 「허락된 세계」가 세계의 절반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목사와 선생들이 하듯 나머지 절반을 네게서 빼돌리려 해 왔어. 그건 안 될 거야! 한번 생각하기를 시작한 사람에게는 아무도 그게 안 돼."

그 말이 나를 깊이 쳤다.

"그렇지만," 나는 거의 소리쳤다. "실제로 정말로 금지되고 추한 일이라는 게 있잖아. 그건 너도 부정 못 해! 그런 건 금지된 거고 우리는 그걸 단념해야 해. 살인이니 온갖 악덕이니 하는 게 있는 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그런 게 있다고 해서 내가 나가서 범죄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오늘 이걸 끝낼 수는 없겠다." 막스가 달래듯 말했다. "너는 물론 사람을 때려죽이거나 여자를 겁탈해 죽여서는 안 되지, 그럼. 그렇지만 너는 아직 「허락된」과 「금지된」이 실은 무슨 뜻인지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가지 않았어. 너는 이제 진리의 한 조각을 느꼈을 뿐이야. 나머지는 아직 올 거야, 나를 믿어! 이를테면 너에게는 지금 한 해쯤 전부터 다른 무엇보다 강한 충동이 하나 있는데, 그게 「금지된」 것으로 통하지.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과 다른 많은 민족은 거꾸로 이 충동을 신으로 삼아 큰 잔치를 열어 섬겼어. 그러니 「금지된」 것은 영원한 게 아니야, 바뀔 수 있어. 오늘도 목사 앞에 여자와 함께 서서 혼인만 하면 누구나 그 여자와 잘 수 있잖아. 다른 민족들에게는 그게 다르고, 지금도 그래. 그러니 우리 저마다가 무엇이 허락된 것이고 무엇이 금지된 것인지 — 저에게 금지된 것인지를 스스로 찾아내야 해. 금지된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으면서도 큰 악당일 수 있어. 거꾸로도 마찬가지고. — 사실 그건 편하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이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제 재판관이 되기에는 너무 편한 것만 찾는 사람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금지에 따르는 거지. 그게 쉬우니까. 다른 사람들은 제 안에서 스스로 계율을 느껴. 그런 사람에게는 점잖은 이라면 누구나 날마다 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고, 여느 때 같으면 손가락질받는 다른 일이 허락되어 있어. 저마다 스스로 서야 하는 거야."

그는 갑자기 너무 많이 말한 것을 뉘우치는 듯 말을 끊었다. 그때도 나는 그가 그러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어느 정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제 생각을 그토록 기분 좋게, 겉보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내놓곤 했지만, 언젠가 그가 말했듯 「그저 말하기 위한」 이야기는 죽어도 견디지 못했다. 그런데 나에게서는 참된 관심 옆에 놀이가 너무 많다는 것을, 영리하게 떠드는 데서 오는 즐거움 같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요컨대 온전한 진지함이 모자라다는 것을 그는 느꼈던 것이다.

* * *

내가 방금 쓴 마지막 말을 — 「온전한 진지함」을 — 다시 읽으니, 아직 반쯤 어린애였던 그 시절에 막스 데미안과 겪은 일 가운데 가장 마음에 파고든 또 하나의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우리 견신례가 다가왔고, 종교 수업의 마지막 시간들은 성찬을 다루었다. 목사에게는 그것이 중요했고 그는 애를 썼으며, 그 시간들에는 얼마간 거룩함과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마지막 몇 시간의 가르침에서 내 생각은 다른 것에, 그러니까 내 친구라는 사람에게 매여 있었다. 교회 공동체로 받아들여지는 엄숙한 예식이라고 설명된 그 견신례를 앞두고, 이 반년 남짓한 종교 수업의 값이 나에게는 여기서 배운 것에 있지 않고 데미안의 가까움과 영향에 있다는 생각이 떨칠 수 없이 밀려들었다. 이제 내가 받아들여질 채비가 된 곳은 교회가 아니라 아주 다른 무엇, 곧 어떻게든 이 땅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생각과 인격의 결사였고, 나는 내 친구를 그 결사의 대리인이나 사자로 느꼈다.

나는 이 생각을 밀어내려 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견신례 예식을 얼마간의 품위를 지니고 겪고 싶다는 것이 내 진심이었는데, 그것은 내 새로운 생각과 잘 맞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생각은 거기 있었고, 차차 다가오는 교회 예식에 대한 생각과 얽혔다. 나는 그것을 남들과 다르게 치를 채비가 되어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 데미안에게서 알게 된 그런 생각의 세계로 받아들여지는 일을 뜻해야 했다.

그 무렵에 나는 다시 한번 그와 활발히 논쟁을 벌였다. 바로 수업 시간 앞이었다. 내 친구는 마음을 닫고 있었고 내 말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내 말은 아마 꽤 어른인 척하고 잘난 척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말이 너무 많아." 그가 여느 때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영리한 말은 아무 값도 없어, 조금도. 저 자신에게서 멀어질 뿐이야. 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죄야. 사람은 거북이처럼 온전히 제 안으로 기어들 수 있어야 해."

곧이어 우리는 교실에 들어섰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나는 귀 기울이려 애썼으며 데미안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얼마쯤 지나자 그가 앉은 옆자리 쪽에서 야릇한 무언가가, 텅 빔이나 서늘함이나 그 비슷한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 자리가 어느새 비어 버린 것 같았다. 그 느낌이 답답해지기 시작할 때 나는 몸을 돌렸다.

거기 내 친구가 여느 때처럼 꼿꼿하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여느 때와 아주 달라 보였고, 그에게서 무언가 나오고 있었고,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그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눈을 감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보니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보고 있지 않았다. 보는 눈이 아니었다. 굳어서 안쪽으로, 또는 아주 먼 곳으로 돌려져 있었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고 숨 쉬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그 입은 나무나 돌에서 깎아 낸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돌처럼 고르게 핏기가 없었고, 갈색 머리카락이 그에게서 가장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의 두 손은 앞쪽 책상 위에 물건처럼, 돌이나 열매처럼 생명 없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핏기 없이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늘어지지는 않았고, 숨어 있는 강한 생명을 감싼 단단하고 좋은 껍데기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떨렸다. '죽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고 하마터면 소리 내어 말할 뻔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홀린 눈길로 그의 얼굴에, 그 창백하고 돌 같은 가면에 매달려 있었고, 이렇게 느꼈다. 이것이 데미안이다! 나와 함께 걷고 말할 때의 그 모습은 반쪽 데미안일 뿐이었다. 한동안 어떤 역을 맡아 하고 맞춰 주고 호의로 어울려 주던 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참된 데미안은 이러했다. 이렇게 돌 같고, 아주 오래되었고, 짐승 같고, 바위 같고, 아름답고 차갑고, 죽어 있으면서 남몰래 들어 본 적 없는 생명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를 두른 이 고요한 텅 빔, 이 에테르와 별들의 공간, 이 외로운 죽음!

'이제 저 애는 온전히 제 안으로 들어갔구나.' 나는 떨면서 느꼈다. 그토록 외로웠던 적이 없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먼 섬에 있을 때보다도 나에게서 멀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그것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모두가 이쪽을 보아야 했고 모두가 소름 끼쳐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림처럼, 그리고 내가 생각할 수밖에 없었듯 야릇하게 우상처럼 뻣뻣이 앉아 있었고, 파리 한 마리가 그의 이마에 앉아 코와 입술 위를 천천히 기어갔다 — 그는 주름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 그는 지금 어디에 있었을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그는 어느 하늘에, 어느 지옥에 있었을까?

그것을 그에게 물어보는 일은 나로서는 할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그가 다시 살아 숨 쉬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눈길이 내 눈길과 마주쳤을 때 그는 예전과 같았다. 그는 어디서 온 것일까?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는 지쳐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핏기가 돌았고 두 손은 다시 움직였지만, 갈색 머리카락은 이제 윤기가 없고 지친 듯했다.

그 뒤 며칠 동안 나는 내 방에서 여러 번 새로운 연습에 매달렸다. 의자에 꼿꼿이 앉아 눈을 굳게 뜨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지 그러면서 무엇을 느끼는지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저 피곤해졌고 눈꺼풀이 몹시 가려웠다.

얼마 뒤 견신례가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중요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린 시절이 내 둘레에서 무너져 내렸다. 부모는 얼마쯤 어색해하며 나를 보았다. 누이들은 나에게 아주 낯설어졌다. 무언가 깨어 버린 마음이 익숙한 느낌과 기쁨을 어긋나게 하고 바래게 했다. 정원에는 향기가 없었고 숲은 부르지 않았으며, 세상은 헌 물건 떨이처럼 내 둘레에 서 있었다. 밍밍하고 끌리는 데가 없었다. 책은 종이였고 음악은 소음이었다. 가을 나무 둘레로 잎이 그렇게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 비가 나무를 타고 흘러내리고, 볕이 들고, 서리가 내리고, 그 안에서 생명은 천천히 가장 좁고 가장 안쪽인 곳으로 물러난다. 나무는 죽지 않는다. 기다린다.

방학이 끝나면 내가 다른 학교로 가서 처음으로 집을 떠나기로 정해져 있었다. 이따금 어머니가 남달리 다정하게 다가와 미리 작별을 하며, 내 마음에 사랑과 그리움과 잊지 못할 것들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데미안은 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베아트리체

내 친구를 다시 만나지 못한 채 나는 방학이 끝날 무렵 St.로 떠났다. 부모가 둘 다 함께 와서 온갖 정성을 다해 나를 김나지움 선생이 맡은 어느 하숙집의 보호에 넘겨주었다. 그들이 지금 나를 어떤 일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는지 알았더라면 소스라쳐 굳어 버렸을 것이다.

물음은 여전히, 세월이 가면 내가 착한 아들이자 쓸모 있는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내 천성이 다른 길로 밀고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집과 정신의 그늘에서 행복해 보려던 내 마지막 시도는 오래 이어졌고 한동안은 거의 성공하기도 했지만, 끝내 완전히 무너졌다.

견신례를 마친 뒤 방학 동안 처음으로 느끼게 된 그 묘한 텅 빔과 외로움은(뒷날 나는 이 텅 빔을, 이 희박한 공기를 얼마나 더 알게 되었던가!) 그리 빨리 지나가지 않았다. 고향과의 작별은 야릇하게도 쉬웠다. 내가 더 서글퍼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누이들은 까닭 없이 울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나는 늘 정이 많은 아이였고 따지고 보면 꽤 착한 아이였다. 이제 나는 아주 달라져 있었다. 나는 바깥 세계에 완전히 무심했고, 며칠씩 오직 내 안에 귀를 기울여 흐름을, 거기 내 안에서 땅속으로 소리 내는 금지되고 어두운 흐름을 듣는 일에만 매달렸다. 나는 아주 빨리 자랐는데 그것도 지난 반년 사이의 일이어서, 웃자라고 마르고 덜 여문 모습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소년의 사랑스러움은 나에게서 완전히 사라졌고, 이런 나를 사람들이 사랑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 자신이 느꼈으며, 나 스스로도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 막스 데미안이 몹시 그리울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드물지 않게 나는 그를 미워하기도 했고, 추한 병처럼 내가 짊어진 내 삶의 메마름을 그의 탓으로 돌렸다.

우리 하숙집에서 나는 처음에 사랑도 존중도 받지 못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나를 놀리다가 나에게서 물러났고, 나를 음흉하고 거북한 별종으로 보았다. 나는 그 역할이 마음에 들어 그것을 더 부풀렸고, 겉으로는 늘 더없이 사내다운 세상 업신여김처럼 보이는 외로움 속으로 앙심을 품고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자주 사람을 삼키는 서글픔과 절망의 발작에 시달렸다. 학교에서는 집에서 쌓아 둔 지식을 파먹으면 되었다. 그 반은 전에 다니던 곳보다 얼마쯤 뒤처져 있었고, 나는 또래들을 어린애로 보아 얼마쯤 업신여기는 버릇이 들었다.

한 해가 넘도록 그렇게 흘러갔고, 처음으로 방학에 집에 다녀온 것도 새로운 울림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나는 기꺼이 다시 떠났다.

11월 초였다. 나는 날씨가 어떻든 생각에 잠긴 짧은 산책을 하는 버릇이 들어 있었고, 그 산책에서 자주 일종의 황홀을 누렸다. 우울과 세상 업신여김과 자기 업신여김으로 가득한 황홀이었다. 그렇게 어느 저녁 나는 축축하고 안개 낀 땅거미 속에서 도시 언저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공원의 널따란 가로수길이 아주 텅 빈 채 나를 부르고 있었고, 길에는 떨어진 잎이 두껍게 깔려 있었으며, 나는 어두운 쾌감으로 발을 그 속에 파묻었다. 축축하고 쓴 냄새가 났고, 먼 나무들이 안개에서 유령처럼 크고 그림자 같이 걸어 나왔다.

가로수길 끝에서 나는 망설이며 멈춰 서서 검은 낙엽을 들여다보며, 삭고 스러지는 것의 젖은 냄새를 게걸스럽게 들이켰다. 내 안의 무언가가 그것에 응답하고 그것을 반겼다. 아아, 삶은 얼마나 밍밍한 맛이었던가!

옆길에서 깃 달린 외투 자락을 날리며 한 사람이 다가왔다. 나는 그냥 가려 했는데 그가 나를 불렀다.

"어이, 싱클레어!"

그가 다가왔다. 우리 하숙집에서 제일 나이 많은 알폰스 베크였다. 나는 늘 그를 좋게 보았고, 나에게든 다른 어린 축에게든 늘 빈정거리며 삼촌 노릇을 하는 것 말고는 그에게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그는 곰처럼 힘이 세다고들 했고, 우리 하숙집 주인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말이 있었으며, 김나지움에 도는 숱한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넌 여기서 뭐 하냐?" 그가 큰 아이들이 이따금 우리 중 하나에게 몸을 낮출 때 쓰는 그 말투로 스스럼없이 외쳤다. "야, 내기할까, 너 시 짓고 있지?"

"그럴 리가." 내가 퉁명스럽게 물리쳤다.

그가 소리 내어 웃고는 내 옆에 붙어, 내가 이제는 영 익숙하지 않은 투로 재잘거렸다.

"내가 그걸 몰라줄까 봐 겁낼 것 없다, 싱클레어. 저녁에 안개 속을 이렇게 가을 생각에 잠겨 걷다 보면 뭔가 있긴 하지. 그럴 땐 시가 짓고 싶어지는 법이야, 나도 알아. 죽어 가는 자연에 대해서, 당연히. 그리고 그것을 닮은 잃어버린 젊음에 대해서. 하인리히 하이네를 보라고."

"난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아." 내가 막아섰다.

"뭐, 됐다! 그건 그렇고 이런 날씨엔 말이지, 내 생각엔 사람은 포도주 한 잔쯤 있는 조용한 데를 찾는 게 좋아. 좀 같이 갈래? 나 마침 아주 혼자거든. — 아니면 싫어? 네가 모범생이라면 너를 꾀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얘."

얼마 뒤 우리는 변두리의 작은 선술집에 앉아 미심쩍은 포도주를 마시며 두꺼운 잔을 부딪쳤다.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새로운 일이기는 했다. 그런데 곧 나는 술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몹시 말이 많아졌다. 내 안에서 창문 하나가 열어젖혀지고 세상이 들이비치는 것 같았다 — 얼마나 오래, 얼마나 무섭도록 오래 나는 마음속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신이 나서 지어내기 시작했고, 그 한복판에서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베크는 즐겁게 내 말을 들었다 — 마침내 내가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나를 대단한 녀석이라고, 천재적인 놈이라고 불렀고, 쌓여 있던 말하고 알리고 싶은 욕구를 마음껏 흘려보내는 것에, 인정받는 것에, 나이 많은 사람에게 값을 인정받는 것에 내 가슴이 기쁨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가 나를 천재적인 놈이라고 불렀을 때 그 말이 달고 독한 포도주처럼 내 영혼으로 흘러들었다. 세상이 새로운 빛깔로 타올랐고, 생각이 백 개의 당돌한 샘에서 나에게로 흘러들었고, 정신과 불이 내 안에서 활활 타올랐다. 우리는 선생들과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에게는 우리가 서로를 훌륭히 알아듣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리스 사람들과 이교에 대해 이야기했고, 베크는 기어이 나에게서 연애담을 털어놓게 하려 했다. 거기서는 나도 낄 말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겪지 않았고 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안에서 느끼고 지어내고 그려 본 것은 타는 듯이 내 안에 박혀 있었지만 포도주로도 풀려 나와 남에게 전해질 것이 되지 못했다. 여자아이들에 대해서는 베크가 훨씬 많이 알았고, 나는 그 이야기를 달아오른 채 들었다. 나는 거기서 믿을 수 없는 것들을 알게 되었고, 될 수 있으리라 여긴 적 없는 일들이 밋밋한 현실로 걸어 들어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알폰스 베크는 열여덟쯤 되는 나이에 벌써 경험을 쌓아 두고 있었다. 그중에는 여자아이들이란 골치 아픈 것이어서 예쁘게 굴고 살가운 말을 듣는 것밖에 바라지 않는다는 것도 있었다. 그것도 꽤 좋기는 하지만 진짜는 아니라고 했다. 그보다는 여인들에게서 성과를 바랄 만하다고 했다. 여인들이 훨씬 영리하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공책과 연필을 파는 가게를 하는 야겔트 부인, 그 사람하고는 말이 통하고, 그 가게 계산대 뒤에서 벌어진 일들은 책에 담을 수도 없다고 했다.

나는 깊이 홀려 얼떨떨한 채 앉아 있었다. 물론 나라면 야겔트 부인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그래도 어쨌든 그것은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적어도 나이 많은 이들에게는 내가 꿈꾼 적도 없는 샘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는 어긋난 울림이 있었고, 모든 것이 내 생각에 사랑이 마땅히 지녀야 할 맛보다 하찮고 흔해 빠진 맛이 났다 — 그래도 어쨌든 그것은 현실이었고 삶이었고 모험이었으며, 내 옆에는 그것을 겪은 사람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우리 이야기는 얼마쯤 아래로 내려앉았고 무언가를 잃었다. 나도 더 이상 천재적인 꼬마가 아니었다. 나는 이제 어른의 말을 듣는 소년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 몇 달이고 몇 달이고 이어진 내 삶에 견주면 이것은 값진 것이었고 낙원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차차 느끼기 시작했듯 금지된 일이었다. 술집에 앉아 있는 것부터 우리가 하는 이야기까지 몹시 금지된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거기서 정신의 맛을, 반란의 맛을 보고 있었다.

그날 밤을 나는 더없이 또렷이 기억한다. 우리 둘이 흐리게 타는 가스등을 지나 늦은 시각에 서늘하고 젖은 밤길로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난생처음 취해 있었다. 좋지 않았고 몹시 괴로웠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무언가가, 어떤 끌림이, 어떤 달콤함이 있었다. 그것은 봉기였고 난장이었고 삶이었고 정신이었다. 베크는 나를 풋내기라고 모질게 꾸짖으면서도 씩씩하게 나를 돌보아, 반쯤은 떠메다시피 나를 집까지 데려갔고, 열려 있던 복도 창으로 나와 자기를 몰래 들여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주 짧게 죽은 듯 자고 나서 아픔과 함께 깨어난 그 깨어남과 더불어 터무니없는 아픔이 나를 덮쳤다. 나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고 낮에 입던 셔츠를 그대로 입고 있었으며, 옷과 신발이 바닥에 널려 담배와 토한 것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두통과 메스꺼움과 미칠 듯한 갈증 사이로 오래 마주 본 적 없는 그림 하나가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나는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아버지와 어머니를, 누이들과 정원을 보았다. 고향의 조용한 내 방을 보았고, 학교와 장터를 보았고, 데미안과 견신례 수업을 보았다 —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밝았고, 모든 것이 광채에 둘러싸여 있었고, 모든 것이 놀랍고 신성하고 깨끗했으며, 이 모든 것이 — 이제 나는 알았다 — 어제까지도, 몇 시간 전까지도 내 것이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바로 이 시각에 가라앉고 저주받아 더는 내 것이 아니며 나를 내치고 역겨워하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장 멀고 가장 금빛인 어린 시절의 뜰까지 거슬러 부모에게서 받은 모든 다정하고 살가운 것, 어머니의 입맞춤 하나하나, 성탄절 하나하나, 집에서 맞은 경건하고 환한 일요일 아침 하나하나, 정원의 꽃 하나하나 — 모든 것이 짓밟혔고 내가 그것을 다 발로 밟았다! 지금 경찰이 와서 나를 묶어 쓰레기이자 성전을 더럽힌 자로 교수대에 끌고 간다 해도 나는 받아들였을 것이고 기꺼이 갔을 것이고 그것이 옳고 마땅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내 속이 이렇게 생겼구나! 돌아다니며 세상을 업신여기던 내가! 정신에서 자랑스럽고 데미안의 생각을 함께 생각하던 내가! 내 꼴이 이랬구나. 쓰레기이자 돼지 같은 놈, 취하고 더러워진 놈, 역겹고 천한 놈, 흉측한 충동에 불시에 덮쳐진 사나운 짐승! 내 꼴이 이랬구나. 모든 것이 깨끗함이고 광채이고 고운 여림이던 저 뜰에서 온 내가, 바흐의 음악과 아름다운 시를 사랑하던 내가! 나는 아직도 역겨움과 분함 속에서 내 웃음소리를 들었다. 취하고 걷잡을 수 없이 툭툭 터져 나오던 어리석은 웃음소리를. 그것이 나였다!

그런데도 이 괴로움을 겪는 것은 거의 즐거움이었다. 그토록 오래 나는 눈멀고 무디게 기어다녔고, 그토록 오래 내 마음은 입을 다물고 가난하게 구석에 앉아 있었기에, 이 자기 고발도, 이 소름도, 이 흉측한 느낌 전체도 영혼에게는 반가운 것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느낌이었고, 그래도 거기서 불길이 솟았고, 그래도 그 안에서 심장이 뛰었다! 나는 비참함 한가운데서 어리둥절한 채 풀려남 같은 것을, 봄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는 사이 겉에서 보기에 나는 보기 좋게 아래로 내려갔다. 첫 취함은 곧 첫 취함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술 마시고 난장 피우는 일이 잦았고, 나는 거기 끼는 무리 가운데 가장 어린 축이었는데, 곧 봐주는 꼬마가 아니라 앞장서는 자이자 별이 되었고, 이름난 겁 없는 술집 단골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한번 온전히 어두운 세계에, 악마에게 속했고, 이 세계에서 나는 훌륭한 녀석으로 통했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은 비참했다. 나는 나를 부수는 난장 속에서 살아갔고, 친구들에게 앞장서는 자이자 대단한 녀석으로, 지독히 대담하고 재치 있는 놈으로 통하는 동안, 내 깊은 곳에서는 두려움에 찬 영혼이 불안으로 파닥이고 있었다. 언젠가 일요일 오전에 술집을 나서다가 길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았을 때 눈물이 났던 일이 아직 기억난다. 막 빗은 머리에 나들이옷을 입고 환하고 즐겁게 놀던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허름한 술집의 더러운 탁자, 흘린 맥주 웅덩이 사이에서 들어 본 적 없는 비아냥으로 친구들을 즐겁게 하고 자주 놀라게 하는 동안, 나는 숨은 마음속으로 내가 조롱하는 그 모든 것 앞에 경외심을 품고 있었고, 내 영혼 앞에, 내 지난날 앞에, 내 어머니 앞에, 하느님 앞에 울면서 무릎 꿇고 있었다.

내가 내 패거리와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한 것, 그들 틈에서 외로운 채로 남아 그토록 괴로워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나는 가장 거친 자들의 마음에 드는 술집 영웅이자 비아냥꾼이었고, 선생과 학교와 부모와 교회에 대한 생각과 말에서 정신과 용기를 보였고, 음담도 견뎠고 이따금 내가 하나 던지기도 했다 — 그러나 패거리가 여자아이들에게 갈 때 나는 한 번도 끼지 않았다. 나는 혼자였고, 사랑을 향한 타는 그리움으로, 가망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내 말대로라면 나는 닳고 닳은 향락가여야 했는데도 그랬다. 나보다 상처받기 쉬운 사람도, 나보다 부끄럼 많은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이따금 시민 집안의 젊은 아가씨들이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면, 곱고 깨끗하고 환하고 우아한 그들은 나에게 놀랍고 깨끗한 꿈이었고, 나에게는 천 배나 과분하고 깨끗했다. 한동안은 야겔트 부인의 문방구에도 갈 수 없었다. 그를 보며 알폰스 베크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리면 얼굴이 붉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무리 속에서도 내가 줄곧 외롭고 다르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나는 그 무리에서 더 벗어나지 못했다. 퍼마시고 으스대는 일이 나에게 정말로 즐거움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나는 이제 정말 모르겠고, 마실 때마다 괴로운 뒤끝을 겪지 않을 만큼 술에 익숙해진 적도 없었다. 모든 것이 억지 같았다. 나는 해야 하는 것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웠고, 내가 늘 기울던 그 여리고 부끄럼 많고 살가운 마음의 움직임들이 무서웠고, 그토록 자주 찾아오던 여린 사랑의 생각들이 무서웠다.

가장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다 — 친구였다. 내가 아주 좋게 보던 친구가 두셋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듯한 축에 들었고 내 못된 짓은 진작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피했다. 나는 모두에게 발밑이 흔들리는 가망 없는 노름꾼으로 통했다. 선생들은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고, 나는 여러 번 엄한 벌을 받았으며, 내가 끝내 학교에서 쫓겨나리라는 것은 모두가 기다리는 일이었다. 나 자신도 그것을 알았다. 나는 진작 좋은 학생이 아니었고, 이것이 오래갈 수 없다는 느낌을 안은 채 힘겹게 눌러앉아 속여 가며 버티고 있었다.

신이 우리를 외롭게 만들어 우리 자신에게로 이끄는 길은 많다. 그때 신은 나와 그 길을 갔다. 그것은 고약한 꿈 같았다. 더러움과 끈적임 너머로, 깨진 맥주잔과 비아냥으로 지새운 밤들 너머로 나는 홀린 몽상가가 되어 쉬지 못하고 시달리며 추하고 지저분한 길을 기어가는 나를 본다. 공주에게로 가는 길에 똥 웅덩이에, 악취와 오물로 가득한 뒷골목에 발이 빠져 버리는 그런 꿈이 있다.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 그리 곱지 않은 방식으로 나는 외로워지고, 나와 어린 시절 사이에 무자비하게 빛나는 파수꾼이 선 잠긴 에덴의 문을 세우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시작이었고, 나 자신을 향한 그리움의 깨어남이었다.

하숙집 주인의 편지에 놀란 아버지가 처음으로 St.에 나타나 뜻밖에 내 앞에 섰을 때는 나도 소스라쳤고 몸이 떨렸다. 그해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버지가 두 번째로 왔을 때 나는 이미 굳고 무심해져서, 꾸짖게 두었고 빌게 두었고 어머니를 들먹이게 두었다. 아버지는 끝내 몹시 언짢아하며,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창피를 무릅쓰고라도 나를 학교에서 쫓아내게 하고 감화원에 넣겠다고 했다. 그러시라지! 그때 아버지가 떠날 때 나는 아버지가 딱했지만, 아버지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나에게로 오는 길을 더는 찾지 못했으며, 나는 순간순간 그래도 싸다고 느꼈다. —

내가 어떻게 되든 나에게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야릇하고 그리 곱지 않은 방식으로, 술집에 앉아 큰소리치는 것으로 세상과 다투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항의하는 꼴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망가뜨렸고, 이따금 나에게는 이 일이 이렇게 보였다. 세상이 나 같은 사람을 쓸 수 없다면, 세상이 그런 사람에게 더 나은 자리도 더 높은 일도 주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그냥 망가지는 것이라고. 손해는 세상이 보라지.

그해 성탄절 방학은 여간 언짢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다시 보고 소스라쳤다. 나는 더 자라 있었고, 여윈 얼굴은 잿빛에 황폐해 보였으며, 이목구비는 늘어지고 눈가는 벌겋게 헐어 있었다. 처음 나기 시작한 콧수염과 얼마 전부터 쓰던 안경이 나를 어머니에게 더 낯설게 만들었다. 누이들은 물러서며 킥킥거렸다.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나눈 이야기도 못마땅하고 쓰라렸으며, 몇 안 되는 친척에게 하는 인사도 못마땅했고, 무엇보다 성탄 전야가 못마땅했다. 내가 살아온 동안 그날은 우리 집에서 큰 날이었다. 잔치와 사랑의 저녁, 고마움의 저녁, 부모와 나 사이의 언약을 새로 하는 저녁이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이 짓누르고 어색하게 할 뿐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버지가 들에 있던 목자들에 관한 복음을,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하는 대목을 읽었고, 여느 때처럼 누이들은 선물 탁자 앞에 환하게 서 있었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즐겁지 않았고 그 얼굴은 늙고 옹색해 보였으며 어머니는 슬펐고, 나에게는 모든 것이 한결같이 거북하고 반갑지 않았다. 선물도 축복의 말도 복음도 촛불 켠 나무도. 향과자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고 더 달콤한 기억의 짙은 구름이 흘러나왔다. 전나무는 향기를 풍기며 이제는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 저녁이, 그 명절이 어서 끝나기를 바랐다.

겨우내 그렇게 이어졌다. 얼마 전에는 교사회에서 엄중한 경고를 받고 퇴학 위협까지 받았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뭐, 그러라지.

막스 데미안에게는 특별한 앙심이 있었다. 나는 그동안 내내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St.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무렵 그에게 두 번 편지를 썼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방학에도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 * *

가을에 알폰스 베크와 마주쳤던 바로 그 공원에서, 가시울타리가 막 푸르러지기 시작하던 이른 봄에 한 아가씨가 내 눈에 띄었다. 나는 혼자 산책을 나가 역겨운 생각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건강이 나빠졌고, 게다가 늘 돈에 쪼들려 친구들에게 빚을 지고 있었고, 집에서 다시 얼마쯤 받아 내려고 꼭 필요한 지출이라는 것을 지어내야 했으며, 여러 가게에 담배니 그런 것들의 외상을 쌓아 두고 있었다. 이런 걱정이 아주 깊이 파고들었던 것은 아니다 — 머지않아 여기 있는 것이 끝나서 내가 물에 빠져 죽거나 감화원에 보내진다면 이 몇 가지 자잘한 일도 아무 상관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늘 그런 고약한 일들과 눈을 마주하고 살았고 그 아래서 괴로웠다.

그 봄날 공원에서 나는 나를 몹시 끄는 젊은 아가씨와 마주쳤다. 그는 키가 크고 날씬했고 우아하게 차려입었으며 영리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마음에 들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형이었고, 내 상상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그리 나이가 많지도 않았을 텐데 훨씬 다 여물었고 우아하고 윤곽이 또렷했으며, 벌써 거의 온전한 숙녀였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얼마쯤 겁 없고 사내아이 같은 기색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몹시 좋았다.

내가 반한 여자아이에게 다가가는 일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고, 이 사람에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인상은 전의 어떤 것보다 깊었고, 이 반함이 내 삶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문득 나에게 다시 하나의 그림이, 높고 우러르는 그림이 세워졌다 — 아아, 경외하고 우러르고 싶다는 바람만큼 내 안에서 깊고 거센 욕구도 충동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주었다. 단테를 읽지 않았어도 어느 영국 그림에서 그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복제화를 나는 간직해 두고 있었다. 거기 있는 것은 영국 라파엘 전파의 소녀상이었는데, 팔다리가 아주 길고 날씬했으며 좁고 긴 머리에 정신이 밴 손과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내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가 그 그림과 아주 닮지는 않았다. 다만 그도 내가 좋아하는 그 날씬함과 사내아이 같은 몸매를, 그리고 얼굴에 밴 정신 같은 것 또는 혼 같은 것을 얼마쯤 지니고 있었다.

나는 베아트리체와 단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때 나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내 앞에 자기 그림을 세워 주었고, 나에게 성소를 열어 주었고, 나를 신전에서 기도하는 자로 만들어 주었다. 하루아침에 나는 술판과 밤의 쏘다님에서 물러났다. 나는 다시 혼자 있을 수 있었고, 다시 기꺼이 책을 읽었고, 다시 기꺼이 산책을 했다.

그 갑작스러운 돌아섬은 나에게 넉넉한 비웃음을 안겼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제 사랑하고 우러를 것이 있었고, 다시 이상이 있었고, 삶은 다시 예감으로 가득하고 알록달록 비밀스러운 어스름으로 가득했다 — 그것이 나를 무디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서 집을 얻었다. 비록 우러르는 그림의 종이자 시중드는 자로서일 뿐이었지만.

그 시절은 얼마쯤의 뭉클함 없이는 떠올릴 수 없다. 나는 다시 한번 더없이 살가운 애씀으로 무너져 내린 한 시기의 잔해에서 「밝은 세계」를 지으려 했고, 다시 한번 내 안의 어두운 것과 악한 것을 벗어 버리고 온전히 밝은 데 머물러 신들 앞에 무릎 꿇겠다는 오직 하나의 갈망 속에서 살았다. 그래도 지금의 이 「밝은 세계」는 얼마쯤은 내가 지어낸 것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어머니에게로, 책임 없는 감싸임으로 되달아나 기어드는 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생각해 내고 스스로에게 요구한 새로운 섬김이었다. 책임과 자기 다스림이 있는 섬김이었다. 내가 그 아래서 괴로워하며 늘 달아나기만 하던 성의 문제도 이제 이 거룩한 불 속에서 정신과 기도로 변모해야 했다. 이제 캄캄한 것도 추한 것도 없어야 했고, 신음으로 지새우는 밤도, 음란한 그림 앞의 가슴 두근거림도, 금지된 문에서 엿듣는 일도, 색을 탐하는 마음도 없어야 했다. 그 모든 것 대신 나는 베아트리체의 그림을 놓고 제단을 차렸으며, 그에게 나를 바침으로써 정신과 신들에게 나를 바쳤다. 캄캄한 힘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삶의 몫을 밝은 힘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내 목적은 쾌락이 아니라 깨끗함이었고,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정신다움이었다.

이 베아트리체 숭배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어제까지 조숙한 비아냥꾼이던 내가 이제 성인이 되겠다는 목적을 지닌 신전의 종이 되었다. 나는 익숙해진 그 고약한 삶을 벗어 버렸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바꾸려 했고, 모든 것에 깨끗함과 고결함과 품위를 들이려 했으며, 먹고 마시는 데서도 말과 옷차림에서도 그것을 생각했다. 아침은 찬물로 씻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나를 억지로 몰아세워야 했다. 나는 진지하고 품위 있게 굴었고, 몸을 곧게 세웠으며, 걸음을 더 느리고 더 무게 있게 했다. 보는 사람에게는 우스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 내 안에서 그것은 온통 예배였다.

내 새로운 마음가짐을 나타낼 길을 찾던 그 모든 새 연습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중요해졌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그 영국 베아트리체 그림이 그 아가씨와 충분히 닮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나는 나를 위해 그를 그려 보고 싶었다. 아주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안고 나는 내 방에 — 얼마 전부터 내 방이 따로 있었다 — 좋은 종이와 물감과 붓을 모아 놓고 팔레트와 유리와 사기 접시와 연필을 갖추었다. 사 온 작은 튜브에 든 고운 템페라 물감이 나를 홀렸다. 그중에 불타는 듯한 크롬 녹색이 있었는데, 그것이 작고 흰 접시에서 처음 빛나던 모습이 아직도 보이는 듯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얼굴을 그리는 것은 어려워서 먼저 다른 것으로 해 보고 싶었다. 나는 장식 무늬와 꽃과 지어낸 작은 풍경을 그렸다. 예배당 옆의 나무, 사이프러스가 선 로마식 다리 같은 것들이었다. 어떤 때는 이 놀이 같은 일에 아주 빠져들어, 물감통을 가진 아이처럼 행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베아트리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몇 장은 아주 잘못되어 내버렸다. 이따금 길에서 마주치던 그 아가씨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애쓸수록 더 되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그것을 단념하고, 그저 하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작한 것에서, 물감과 붓에서 저절로 나오는 상상과 이끎을 따라서. 그렇게 나온 것은 꿈꾼 얼굴이었고 나는 거기에 불만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곧바로 그 시도를 이어 갔고, 새 종이마다 조금씩 더 또렷이 말했고 그 모습에 더 가까워졌다. 실제와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지만.

나는 본보기 없는 선을 긋고 면을 채우는 일에, 놀이하듯 더듬는 데서, 의식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그런 일에 꿈꾸는 붓으로 점점 익숙해졌다. 마침내 어느 날 나는 거의 의식 없이 얼굴 하나를 끝냈는데, 그것은 앞의 것들보다 강하게 나에게 말했다. 그것은 그 아가씨의 얼굴이 아니었고, 진작부터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다른 무엇, 실제가 아닌 무엇이었지만 그렇다고 값이 덜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가씨의 얼굴이라기보다 젊은 사내의 머리처럼 보였고, 머리카락은 내 예쁜 아가씨처럼 밝은 금발이 아니라 불그레한 기운이 도는 갈색이었으며, 턱은 힘 있고 단단했고 입은 붉게 피어 있었으며, 전체가 얼마쯤 뻣뻣하고 가면 같으면서도 사람을 붙들고 숨은 생명으로 가득했다.

다 그린 종이 앞에 앉았을 때 그것은 나에게 야릇한 인상을 주었다.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신상이나 거룩한 가면 같아 보였다. 반은 남자이고 반은 여자였으며, 나이가 없었고, 의지가 굳으면서도 꿈꾸는 듯했고, 굳어 있으면서도 남몰래 살아 있었다. 이 얼굴은 나에게 할 말이 있었고, 나에게 속했고, 나에게 요구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와 닮아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 몰랐다.

이 그림은 한동안 내 모든 생각을 따라다니며 내 삶을 나누어 가졌다. 나는 그것을 서랍에 숨겨 두었다. 아무도 그것을 잡아채어 나를 놀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작은 방에 혼자 있게 되면 곧바로 그 그림을 꺼내 그와 사귀었다. 저녁에는 그것을 침대 맞은편 벽지에 바늘로 꽂아 두고 잠들 때까지 바라보았고, 아침이면 첫 눈길이 거기로 갔다.

바로 그 무렵에 나는 어린 시절 늘 그랬듯 다시 꿈을 많이 꾸기 시작했다. 여러 해 동안 꿈을 꾸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이제 꿈이 다시 왔다. 아주 새로운 종류의 그림들이었고, 그 안에 그 그린 얼굴이 자꾸자꾸 떠올라 살아 움직이며 말했다. 나에게 다정하기도 하고 적대적이기도 했고, 어떤 때는 흉하게 일그러졌고 어떤 때는 한없이 아름답고 어울리고 고결했다.

그러다 어느 아침 그런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문득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그토록 놀랍도록 낯익게 나를 보고 있었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머니처럼 나를 아는 것 같았고, 모든 시간에 걸쳐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나는 그 종이를,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반쯤 여자 같은 입을, 야릇하게 환한 이마를(저절로 그렇게 말라 있었다) 뚫어지게 보았고, 알아봄이, 되찾음이, 앎이 내 안에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침대에서 뛰어나와 그 얼굴 앞에 서서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크게 뜬 푸르스름하고 굳은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는데, 오른쪽 눈이 왼쪽보다 조금 높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 오른쪽 눈이 움찔했다. 가볍고 곱게, 그러나 또렷이 움찔했고, 그 움찔함과 함께 나는 그 그림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이것을 이제야 찾아냈을까! 그것은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나중에 나는 그 종이를 기억 속에 있는 데미안의 실제 이목구비와 자꾸자꾸 견주어 보았다. 닮기는 했어도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데미안이었다.

어느 초여름 저녁에 볕이 서쪽으로 난 내 창으로 비스듬히 붉게 들어왔다. 방 안이 어스름해졌다. 그때 베아트리체의, 아니 데미안의 그 그림을 바늘로 창살에 꽂아 두고 저녁 볕이 비쳐 드는 대로 바라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얼굴은 윤곽 없이 번졌지만, 불그레한 테를 두른 눈과 이마의 밝음과 세차게 붉은 입이 그 면에서 깊고 사납게 타올랐다. 나는 그것이 이미 꺼진 뒤에도 오래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차차 어떤 느낌이 왔다. 그것이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아니고 — 나 자신이라는 느낌이었다. 그 그림은 나와 닮지 않았다 — 닮아서도 안 된다고 나는 느꼈다 —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을 이루는 것이었고, 내 속이었고, 내 운명이거나 내 정령이었다. 언젠가 내가 다시 친구를 얻는다면 그 친구가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얻는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내 삶이 이럴 것이고 내 죽음이 이럴 것이며, 이것이 내 운명의 울림이고 가락이었다.

그 몇 주 동안 나는 전에 읽은 어떤 것보다 깊은 인상을 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뒷날에도 책을 그토록 겪은 일은 드물었고, 어쩌면 니체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 그것은 편지와 잠언이 실린 노발리스 한 권이었는데, 많은 부분을 나는 알아듣지 못했으면서도 그 모두가 말할 수 없이 나를 끌어당기고 감쌌다. 그중 한 구절이 이제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펜으로 그림 밑에 적어 넣었다. 「운명과 마음은 한 개념의 두 이름이다.」 이제 나는 그것을 알아들었다.

내가 베아트리체라 부른 그 아가씨를 나는 그 뒤로도 자주 마주쳤다. 그러면서 더는 아무 흔들림도 느끼지 않았고, 다만 늘 부드러운 맞아떨어짐을, 느낌으로 오는 예감을 느꼈다. 그대는 나와 이어져 있다, 그러나 그대가 아니라 그대의 그림이 그렇다, 그대는 내 운명의 한 조각이다.

* * *

막스 데미안을 향한 내 그리움이 다시 세졌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딱 한 번 방학 때 그를 마주친 적이 있다. 이제 보니 나는 그 짧은 만남을 내 기록에서 빼놓았는데, 그것이 부끄러움과 허영 때문이었음을 알겠다. 그것을 채워 넣어야겠다.

그러니까 어느 방학에, 술집을 드나들던 시절의 시들하고 늘 얼마쯤 지친 얼굴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고향 도시를 어슬렁거리고, 여전히 똑같은 속물들의 업신여겨 마땅한 얼굴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예전의 내 친구가 마주 걸어왔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움찔했다. 그리고 번개처럼 프란츠 크로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제발 데미안이 그 일을 정말로 잊었기를! 그에게 이런 빚진 마음을 지고 있다는 것이 그토록 거북했다 — 사실 어리석은 어린애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빚은 빚이었으니까….

그는 내가 인사를 할 것인지 기다리는 듯했고, 내가 되도록 태연하게 인사하자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다시 그 악수였다! 그토록 단단하고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사내다운 악수!

그는 주의 깊게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많이 컸구나, 싱클레어." 그 자신은 나에게 조금도 변하지 않아 보였다. 여느 때처럼 똑같이 늙었고 똑같이 젊었다.

그가 나에게 붙어 우리는 함께 산책을 했고, 온통 곁가지 이야기만 했다. 그때 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에게 여러 번 편지를 썼는데 답을 받지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아아, 그것도 잊었기를, 그 어리석고 어리석은 편지들을! 그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베아트리체도 그림도 없었다. 나는 아직 그 거친 시절 한복판에 있었다. 도시 밖에서 나는 그에게 술집에 함께 가자고 했다. 그가 따라왔다. 나는 으스대며 포도주 한 병을 시키고 잔을 채우고 그와 부딪치고, 학생들 술자리 관습에 아주 익숙하다는 티를 냈으며, 첫 잔은 단숨에 비우기까지 했다.

"너 술집에 많이 다니는구나?" 그가 나에게 물었다.

"뭐 그렇지." 내가 나른하게 말했다. "달리 뭘 하겠어? 따지고 보면 이게 그래도 제일 재미있잖아."

"그렇게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거기에 아주 아름다운 데가 있기는 해 — 취함, 바쿠스적인 것! 그런데 내가 보기엔 술집에 많이 앉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에게서는 바로 그게 아주 없어져 버렸어. 나에게는 오히려 술집을 들락거리는 일이야말로 영락없이 속물다운 것으로 보여. 그래, 하룻밤쯤 횃불을 켜 들고 제대로 아름답게 취하고 어지러워지는 건 좋지! 그렇지만 그렇게 자꾸자꾸, 한 잔 또 한 잔 하는 건 아무래도 진짜가 아니지 않아? 파우스트가 저녁마다 단골 자리에 앉아 있는 걸 상상할 수 있겠어?"

나는 술을 마시며 적의를 품고 그를 보았다.

"그래, 누구나 파우스트인 건 아니니까." 내가 짧게 말했다.

그가 얼마쯤 어리둥절해하며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예전의 그 산뜻함과 여유로 웃었다.

"뭐, 그걸로 다툴 게 있나? 어쨌든 주정뱅이나 난봉꾼의 삶이 흠잡을 데 없는 시민의 삶보다 아마 더 살아 있을 거야. 그리고 — 언젠가 읽은 건데 — 난봉꾼의 삶은 신비가가 되는 가장 좋은 준비 가운데 하나래.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들이 늘 보는 자가 되잖아. 그 사람도 전에는 향락가이자 한량이었고."

나는 미덥지 않아 하며 그에게 눌리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시들하게 말했다. "그래,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거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보는 자니 뭐니 하는 게 될 마음이 조금도 없어."

데미안이 살짝 찡그린 눈으로 아는 듯이 나를 번득였다.

"이봐 싱클레어." 그가 천천히 말했다. "너한테 언짢은 소리를 하려던 게 아니야. 그건 그렇고 — 네가 지금 무슨 목적으로 잔을 비우는지는 우리 둘 다 모르지. 그렇지만 네 안에서 네 삶을 만드는 그것은 이미 알고 있어. 그걸 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우리 안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하는 이가 하나 있다는 것 말이야. — 그런데 미안, 나 집에 가야겠다."

우리는 짧게 헤어졌다. 나는 몹시 언짢은 채로 앉아 병을 마저 비웠고, 가려는데 데미안이 벌써 값을 치러 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나를 더 화나게 했다.

이 작은 일에 이제 내 생각이 다시 머물렀다. 생각은 데미안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도시 밖 그 술집에서 그가 한 말이 내 기억에서 다시 떠올랐다. 야릇하게 싱싱하고 잃어버리지 않은 채로. — "우리 안에 모든 것을 아는 이가 하나 있다는 걸 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나는 창에 걸린, 이제 아주 꺼져 버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 눈이 아직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데미안의 눈길이었다. 아니면 내 안에 있는 그의 눈길이었다. 모든 것을 아는 이의 눈길이었다.

데미안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그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가 아마 어딘가에서 공부하고 있으리라는 것, 그가 김나지움을 마친 뒤 그의 어머니가 우리 도시를 떠났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크로머와의 일까지 거슬러 나는 막스 데미안에 관한 기억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그가 언젠가 나에게 한 말들이 얼마나 많이 다시 울려 왔던가. 그리고 그 모두가 오늘도 뜻이 있었고 지금의 일이었고 나에게 걸린 일이었다! 그토록 언짢았던 마지막 만남에서 난봉꾼과 성인에 대해 그가 한 말도 문득 환하게 내 마음 앞에 섰다. 내가 바로 그렇게 되지 않았던가? 나는 취함과 더러움 속에서, 마취와 잃어버림 속에서 살다가, 새로운 삶의 충동과 함께 바로 그 반대되는 것이 내 안에서 살아나지 않았던가. 깨끗함을 향한 갈망이, 거룩한 것을 향한 그리움이?

그렇게 나는 기억을 계속 좇았다. 진작 밤이 되어 있었고 밖에는 비가 내렸다. 내 기억 속에서도 나는 비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밤나무 아래의 그 시각, 그가 언젠가 프란츠 크로머 때문에 나를 캐묻고 내 첫 비밀을 알아맞힌 그 시각이었다. 하나둘 떠올랐다. 학교 가는 길의 이야기들, 견신례 시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스 데미안과의 맨 처음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 무슨 일이었더라? 나는 얼른 떠올리지 못했지만 서두르지 않았고 온전히 거기 잠겨 있었다. 그러자 그것도 다시 왔다. 그가 카인에 대한 제 생각을 알려 준 뒤 우리는 우리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그는 우리 집 대문 위에 얹힌,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머릿돌에 있는 그 오래되고 뭉개진 문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그것이 흥미롭다고, 그런 것들은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밤 나는 데미안과 그 문장의 꿈을 꾸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었고 데미안이 그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어떤 때는 작고 잿빛이었고 어떤 때는 엄청나게 크고 여러 빛깔이었지만, 그는 그것이 언제나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고 나에게 일러 주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그는 나에게 그 문장을 먹으라고 강요했다. 그것을 삼키자 나는 삼켜진 문장의 새가 내 안에서 살아나 나를 채우고 안에서부터 나를 먹어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엄청난 놀라움으로 느꼈다.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나는 벌떡 일어나 깨어났다.

정신이 들었다. 한밤중이었고 방 안으로 비가 들이치는 소리가 들렸다. 창을 닫으려고 일어나다가 바닥에 놓인 밝은 무언가를 밟았다. 아침에 보니 그것은 내가 그린 그 종이였다. 그것은 젖은 채 바닥에 놓여 우글쭈글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흡수지 사이에 끼워 무거운 책에 넣어 말렸다. 이튿날 다시 보니 말라 있었다. 그런데 달라져 있었다. 붉던 입이 바래고 얼마쯤 좁아져 있었다. 이제 그것은 온전히 데미안의 입이었다.

나는 이제 새 종이에 그 문장의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이제 또렷이 몰랐고, 그중 얼마는 내가 알기로 가까이서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물건이 오래되었고 여러 번 덧칠되었기 때문이다. 새는 무언가 위에 서 있거나 앉아 있었는데, 어쩌면 꽃 위에, 어쩌면 바구니나 둥지 위에, 어쩌면 나무 꼭대기 위였다. 나는 그것에 매이지 않고 또렷한 그림이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욕구에서 나는 곧바로 강한 빛깔로 시작했고, 내 종이에서 새의 머리는 금빛 노랑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이어 그려 며칠 만에 그것을 끝냈다.

이제 그것은 사납고 날카로운 새매의 머리를 한 맹금이었다. 그것은 몸 절반을 어두운 세계의 구 속에 박은 채, 거대한 알에서 나오듯 거기서 몸을 밀어 올리고 있었고, 바탕은 푸른 하늘이었다. 그 종이를 오래 들여다볼수록 그것이 내 꿈에 나온 그 빛깔 있는 문장인 것처럼 점점 더 여겨졌다.

데미안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어디로 보내야 할지 알았다 해도 나로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모든 것을 하던 그 꿈 같은 예감으로, 그 새매 그림을 그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 닿든 닿지 않든. 나는 거기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내 이름도 쓰지 않았으며, 가장자리를 조심스레 잘라 내고 큰 봉투를 하나 사서 내 친구의 예전 주소를 적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부쳤다.

시험이 다가와 나는 여느 때보다 학교 공부를 더 해야 했다. 내가 갑자기 그 고약한 처신을 바꾼 뒤로 선생들은 나를 다시 받아들여 주었다. 지금도 내가 좋은 학생은 아니었겠지만, 반년 전만 해도 내가 벌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을 모두가 있을 법하게 여겼다는 것을 나도 다른 누구도 이제 떠올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제 다시 예전 같은 투로, 나무람도 으름장도 없이 편지를 썼다. 그러나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아버지에게든 누구에게든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 변화가 내 부모와 선생들의 바람과 맞아떨어진 것은 우연이었다. 이 변화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데려가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가까이 해 주지 않았으며, 나를 더 외롭게 만들 뿐이었다. 그것은 어딘가를, 데미안을, 어떤 먼 운명을 겨누고 있었다. 나 자신도 그것을 몰랐다. 나는 그 한복판에 서 있었으니까. 그것은 베아트리체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얼마 전부터 나는 내가 그린 종이들과 데미안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너무나 실제가 아닌 세계에서 살고 있어서 그마저 눈에서도 생각에서도 완전히 잃어버렸다. 내 꿈에 대해, 내 기다림에 대해, 내 속의 변화에 대해 나는 누구에게도 한마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고 싶었다 해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그러고 싶을 수 있었겠는가?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운다

내가 그린 꿈의 새는 길을 가며 내 친구를 찾고 있었다. 더없이 기이한 방식으로 나에게 답이 왔다.

어느 날 두 수업 사이 쉬는 시간이 끝난 뒤 교실 내 자리에서 나는 책에 끼워진 쪽지를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 반 아이들이 이따금 수업 중에 몰래 쪽지를 주고받을 때 하던 방식 그대로 접혀 있었다. 다만 누가 나에게 그런 쪽지를 보냈는지가 이상했다. 나는 어떤 친구와도 그런 왕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내가 끼지도 않을 무슨 장난에 부르는 것이려니 여기고, 읽지 않은 채 책 앞쪽에 끼워 두었다. 수업 중에야 그것이 우연히 다시 손에 잡혔다.

나는 그 종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아무 생각 없이 펴 보았고, 거기 몇 마디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번 눈길을 던졌다가 한 낱말에 걸려 놀랐고, 큰 추위에 닿은 듯 운명 앞에서 심장이 오그라드는 동안 이렇게 읽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몇 줄을 여러 번 읽고 나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데미안이 보낸 답이었다. 그 새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그뿐이었다. 그는 내 그림을 받은 것이다. 그는 알아들었고 내가 풀이하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그리고 — 무엇보다 그것이 나를 괴롭혔는데 — 아프락사스란 무엇일까? 나는 그 말을 들은 적도 읽은 적도 없었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나는 수업에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그 시간을 흘려보냈다. 다음 시간이, 오전의 마지막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시간은 대학에서 갓 온 아주 젊은 보조 교사가 맡았는데, 우리는 그가 그토록 젊고 우리 앞에서 거짓 위엄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좋아했다.

우리는 폴렌 박사의 이끎으로 헤로도토스를 읽었다. 이 읽기는 나에게 흥미로운 몇 안 되는 과목에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거기 있지 않았다. 나는 기계처럼 책을 펴 놓았지만 옮기는 것을 따라가지 않고 내 생각에 잠긴 채였다. 그런데 나는 그때 종교 시간에 데미안이 나에게 한 말이 얼마나 옳은지를 이미 여러 번 겪어 알고 있었다. 충분히 강하게 원한 것은 이루어졌다. 수업 중에 내 생각에 아주 강하게 잠겨 있으면 선생이 나를 가만두리라는 것을 나는 안심하고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 정신이 흩어져 있거나 졸리면 그때는 선생이 갑자기 옆에 와 있었다. 그런 일도 나에게 이미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생각하고 있으면, 정말로 잠겨 있으면 그때는 지켜졌다. 그리고 단단히 눈을 들여다보는 것도 이미 해 보고 효험을 확인했다. 데미안과 함께하던 그 시절에는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눈길과 생각으로 아주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자주 느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렇게 앉아 헤로도토스에서도 학교에서도 멀리 떠나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선생의 목소리가 번개처럼 내 의식을 때려 나는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는 내 바로 옆에 서 있었으며, 나는 그가 벌써 내 이름을 부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목소리가 큰 소리로 이 말을 했다. "아프락사스."

앞부분을 놓쳐 버린 어떤 설명에서 폴렌 박사가 이어 말했다. "고대의 그 분파들과 신비주의 모임의 생각을 이성주의의 관점에서 보이는 대로 그렇게 순진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뜻의 학문을 고대는 아예 몰랐습니다. 그 대신 철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진리를 다루는 일이 있었고 그것은 아주 높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중 얼마에서는 마술과 장난이 나왔고, 그것이 자주 속임수와 범죄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술에도 고결한 내력과 깊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까 예로 든 아프락사스에 관한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의 주문과 함께 불리며, 오늘날에도 미개한 민족에게 있는 것 같은 어떤 마술 악령의 이름으로 여겨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프락사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뜻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이 이름을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하나로 합치는 상징적 과업을 지닌 어떤 신성의 이름쯤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자그마한 학자는 곱고 열심히 계속 말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 이름이 더는 나오지 않자 내 주의도 곧 다시 내 안으로 가라앉았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하나로 합친다.」 그 말이 내 안에서 울렸다. 여기서 나는 이을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우정의 맨 마지막 무렵 데미안과 나눈 이야기에서 익숙한 것이었다. 그때 데미안은 우리에게 우러르는 신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신은 제멋대로 잘라 낸 세계의 절반만을 나타낼 뿐이라고 말했다(그것은 공식적이고 허락된 「밝은」 세계였다). 그러나 온 세계를 우러를 수 있어야 하므로, 악마이기도 한 신을 두든지 아니면 예배 옆에 악마 섬기는 예배도 차려야 한다고 했다. — 그러니까 아프락사스는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그 신이었다.

한동안 나는 큰 열의로 그 자취를 더 좇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도서관 하나를 통째로 뒤졌지만 아프락사스에 대해서는 아무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내 천성은 그렇게 곧장 의식하며 찾는 방식에 결코 잘 맞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는 손안에서 돌멩이로 남아 버리는 진리밖에 찾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동안 그토록 많이 그토록 살갑게 마음을 쏟았던 베아트리체의 모습은 이제 차차 가라앉았다. 아니 그보다는 천천히 나에게서 물러나 점점 더 지평선에 가까워지며 그림자 같아지고 멀어지고 흐려졌다. 그것으로는 영혼이 더는 만족하지 않았다.

몽유병자처럼 이끌어 가던, 야릇하게 내 안에 고치를 튼 내 삶에 이제 새로운 형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삶을 향한 그리움이, 아니 그보다 사랑을 향한 그리움이 내 안에서 피어났고, 한동안 베아트리체 우러르기 속에 풀어 넣을 수 있었던 성의 충동이 새로운 그림과 목표를 요구했다. 여전히 채워짐은 나에게 오지 않았고, 그리움을 속이고 친구들이 저희 행복을 찾던 그런 여자아이들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일은 어느 때보다 나에게 불가능했다. 나는 다시 세차게 꿈을 꾸었는데, 그것도 밤보다 낮에 더 그랬다. 떠올림과 그림과 바람이 내 안에서 솟아올라 나를 바깥 세계에서 끌어냈고, 그래서 나는 내 안의 이 그림들과, 이 꿈이나 그림자들과 실제 내 둘레보다 더 실제처럼 더 생생하게 사귀며 살았다.

되풀이해서 돌아오던 어떤 꿈, 또는 어떤 상상의 놀이가 나에게 뜻깊어졌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오래 남은 이 꿈은 대략 이러했다. 나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 대문 위에는 푸른 바탕에 노란 문장의 새가 빛나고 있다 — 집 안에서 어머니가 나를 맞으러 나온다 — 그런데 들어가서 그를 안으려 하자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크고 힘차고 막스 데미안과 내가 그린 그림을 닮았으면서도 다르고, 그 힘참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여성이었다. 그 모습이 나를 끌어당겨 깊고 떨리는 사랑의 포옹으로 받아들였다. 황홀과 소름이 섞여 있었고, 그 포옹은 예배이면서 또한 죄였다. 나를 안은 그 모습에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너무 많이, 내 친구 데미안에 대한 기억이 너무 많이 어른거렸다. 그 포옹은 온갖 경외를 거스르면서도 복됨이었다. 나는 자주 이 꿈에서 깊은 행복감으로 깨어났고, 자주 무서운 죄에서 깨어나듯 죽음의 두려움과 더없이 시달린 양심으로 깨어났다.

이 온전히 내 안의 그림과 바깥에서 온 그 신에 관한 귀띔 사이에 이어짐이 생긴 것은 차차, 그리고 나도 모르게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더 좁고 더 살가워졌고, 나는 바로 이 예감의 꿈에서 내가 아프락사스를 부르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홀과 소름이 섞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가장 거룩한 것과 가장 끔찍한 것이 서로 얽히고, 깊은 죄가 더없이 여린 무구함을 뚫고 떨리는 것 — 내 사랑의 꿈 그림이 그러했고, 아프락사스도 그러했다. 사랑은 더 이상 내가 처음에 겁먹고 느꼈던 짐승처럼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고, 베아트리체의 그림에 바쳤던 경건하게 정신화된 우러름도 아니었다. 그것은 둘 다였고, 둘 다이면서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그것은 천사의 모습이자 사탄이었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인 것이었고, 사람이자 짐승이었고, 가장 높은 선이자 가장 끝의 악이었다. 이것을 살아 내는 것이 나에게 정해진 일 같았고, 이것을 맛보는 것이 내 운명 같았다. 나는 그것을 그리워하면서 두려워했고, 그것을 좇아 꿈꾸면서 그것에게서 달아났지만, 그것은 늘 거기 있었고 늘 내 위에 있었다.

이듬해 봄이면 나는 김나지움을 떠나 대학에 가야 했는데,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지 아직 몰랐다. 입술 위에는 작은 수염이 자라 나는 다 자란 사람이었으나 완전히 어쩔 줄 몰랐고 목표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내 안의 목소리, 그 꿈의 그림이었다. 나는 이 이끎을 눈감고 따라야 하는 과업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힘겨웠고 나는 날마다 거스르며 버텼다. 어쩌면 나는 미친 것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드물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남들이 해내는 것은 나도 다 할 수 있었다. 조금만 부지런히 애쓰면 플라톤을 읽을 수 있었고, 삼각법 문제를 풀 수 있었고, 화학 분석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다만 하나를 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어둡게 숨은 그 목표를 뜯어내어 남들처럼 어딘가 내 앞에 그려 놓는 일이었다. 남들은 자기가 교수나 판사가 되고 싶은지 의사나 예술가가 되고 싶은지, 그것이 얼마나 걸리고 어떤 이득이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을 나는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 그런 무엇이 될지 몰랐지만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쩌면 나는 여러 해 동안 찾고 또 찾아야 하고,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어떤 목표에도 이르지 못할지 몰랐다. 어쩌면 어떤 목표에 이르기는 하되 그것이 악하고 위험하고 무서운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내 안에서 저절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살아 보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나는 자주 내 꿈에 나오는 그 힘찬 사랑의 모습을 그려 보려 했다. 그러나 한 번도 되지 않았다. 되었더라면 나는 그 종이를 데미안에게 보냈을 것이다. 그는 어디 있었을까? 나는 몰랐다. 다만 그가 나와 이어져 있다는 것만 알았다. 언제 그를 다시 보게 될까?

베아트리체 시절의 그 몇 주, 몇 달 동안의 다정한 고요는 진작 지나갔다. 그때 나는 섬 하나에 이르러 평화를 찾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늘 그랬다 — 어떤 상태가 정들 만하자마자, 어떤 꿈이 나를 어루만져 주자마자 그것은 이내 시들고 눈멀었다. 그것을 두고 한탄해 봐야 헛일이었다! 나는 이제 채워지지 않은 갈망의, 팽팽한 기다림의 불 속에서 살았고, 그것이 나를 자주 완전히 사납고 미치게 만들었다. 꿈속 연인의 그림을 나는 자주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또렷하게 내 앞에서 보았다. 내 손보다 훨씬 또렷했다. 나는 그것과 이야기했고, 그 앞에서 울었고, 그것을 저주했다. 나는 그것을 어머니라 부르며 그 앞에 눈물로 무릎 꿇었고, 그것을 연인이라 부르며 모든 것을 채워 주는 그 무르익은 입맞춤을 예감했고, 그것을 악마라 창녀라 흡혈귀라 살인자라 불렀다. 그것은 나를 더없이 여린 사랑의 꿈으로도 거친 파렴치로도 꾀어냈고, 그것에게 너무 좋고 값진 것도 너무 나쁘고 천한 것도 없었다.

그해 겨우내 나는 말로 그리기 어려운 속의 폭풍 속에서 살았다. 외로움에는 오래 익숙해져 있어서 그것이 나를 짓누르지는 않았다. 나는 데미안과, 새매와, 내 운명이자 내 연인인 그 큰 꿈의 모습과 더불어 살았다. 그 안에서 살기에는 그것으로 넉넉했다. 모든 것이 크고 넓은 데를 바라보았고 모든 것이 아프락사스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꿈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내 생각 가운데 어느 것도 나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어느 것도 내가 부를 수 없었고, 어느 것에도 내 마음대로 빛깔을 줄 수 없었다. 그것들이 와서 나를 붙잡았고, 나는 그것들에게 다스려졌고, 그것들에게 살아졌다.

겉으로 보자면 나는 안전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것을 내 친구들도 배워서 나에게 은근한 존중을 보내 왔는데 그것이 자주 나를 웃게 했다. 마음만 먹으면 나는 그들 대부분을 아주 잘 꿰뚫어 볼 수 있었고 이따금 그것으로 그들을 놀라게 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드물거나 아예 없었다. 나는 늘 나에게, 늘 나 자신에게 매여 있었다. 그러면서 이제 마침내 한 조각이나마 살아 보기를, 내 안에서 무언가를 세상으로 내보내기를, 세상과 관계를 맺고 다투기를 애타게 바랐다. 저녁에 거리를 쏘다니다가 안절부절못해 자정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할 때면, 이따금 나는 지금 곧 내 연인이 나와 마주칠 것 같다고, 다음 모퉁이를 지나갈 것 같다고, 다음 창에서 나를 부를 것 같다고 여겼다. 그러다 이따금 이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워 보여, 언젠가 내 목숨을 끊게 되리라고 각오하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야릇한 피난처를 하나 찾았다 — 사람들이 말하는 「우연」으로. 그러나 그런 우연이란 없다. 무언가를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그 필요한 것을 찾아낸다면, 그것을 그에게 주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자신이다. 그 자신의 갈망과 어쩔 수 없음이 그를 그리로 이끄는 것이다.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두세 번 변두리의 작은 교회에서 오르간 소리를 들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다음번에 그 앞을 지나며 다시 그것을 들었을 때 나는 바흐를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문으로 가 보니 잠겨 있었고, 골목에 사람이 거의 없기에 나는 교회 옆 차막이돌에 앉아 외투 깃을 여미고 귀를 기울였다. 큰 오르간은 아니었지만 좋은 오르간이었고, 연주는 기이했다. 잘했고 거의 거장에 가까웠으나, 야릇하고 더없이 개인적인 의지와 끈덕짐의 표현이 담겨 기도처럼 들렸다. 나는 이런 느낌이 들었다. 저기서 연주하는 사람은 이 음악 안에 보물이 하나 갇혀 있음을 알고, 제 목숨을 걸듯 그 보물을 얻으려 구애하고 두드리고 애쓰고 있다고. 나는 기술의 뜻으로는 음악을 그리 많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이 영혼의 표현만은 어릴 때부터 본능으로 알아들었고, 음악적인 것을 내 안에서 당연한 무엇으로 느껴 왔다.

그 음악가는 이어서 현대의 것도 연주했는데 레거의 것일 수 있었다. 교회는 거의 완전히 어두웠고 바로 옆 창으로 아주 가느다란 빛줄기만 들어왔다. 나는 음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르간 연주자가 나오는 것을 볼 때까지 오락가락했다. 아직 젊은 사람이었지만 나보다는 나이가 많았고, 몸집이 다부지고 땅딸막했으며, 힘차면서도 어쩐지 내키지 않는 듯한 걸음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때부터 나는 이따금 저녁 시간에 그 교회 앞에 앉아 있거나 오락가락했다. 한번은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반 시간 동안 오슬오슬 떨면서도 행복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동안 오르간 연주자는 위에서 성긴 가스등 불빛 아래 연주했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서 나는 그 자신만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것이 서로 친족 같고 은밀한 이어짐을 지닌 것처럼 여겨졌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것이 믿음에 차 있었고, 자기를 내주었고, 경건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나 목사들처럼 경건한 것이 아니라 중세의 순례자와 거지처럼 경건했고, 모든 신조 위에 있는 세계 감정에 거리낌 없이 자기를 내주는 그런 경건함이었다. 바흐 이전의 거장들이 부지런히 연주되었고 옛 이탈리아 사람들도 그랬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것을 말했고, 모두가 그 악사가 영혼에 품은 바로 그것을 말했다. 그리움, 세계를 더없이 살갑게 붙잡음과 그 세계에서 더없이 사납게 다시 갈라섬, 저 자신의 어두운 영혼에 타는 듯이 귀 기울임, 자기를 내주는 도취, 그리고 놀라운 것을 향한 깊은 궁금함이었다.

한번은 그 오르간 연주자가 교회를 나선 뒤 몰래 뒤를 밟았는데, 그가 도시 변두리 멀찍한 곳에서 작은 선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여기서 처음으로 나는 그를 또렷이 보았다. 그는 작은 방 한 모퉁이 술집 탁자에 앉아 검은 펠트 모자를 쓰고 포도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있었고, 그 얼굴은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추하고 얼마쯤 사나웠으며, 무언가를 찾고 있고 고집스러웠으며, 제 뜻이 세고 의지가 가득했다. 그러면서 입가는 부드럽고 어린애 같았다. 사내다움과 강함은 모두 눈과 이마에 앉아 있었고, 얼굴 아랫부분은 여리고 덜 여물었으며 다스려지지 않고 얼마쯤 무른 데가 있었다. 망설임으로 가득한 턱이 이마와 눈길에 맞서는 모순처럼 소년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랑과 적의로 가득한 짙은 갈색 눈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잠자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술집에는 달리 아무도 없었다. 그가 나를 쫓아 보내려는 듯 번득이며 노려보았다. 그러나 나는 버티며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았고, 마침내 그가 퉁명스럽게 투덜거렸다. "뭘 그렇게 지독히 날카롭게 보시오? 나한테 뭐 바라는 거라도 있소?"

"당신에게 바라는 건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이미 당신에게서 많은 걸 받았습니다."

그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래, 음악에 미친 사람이오? 음악에 미쳐 날뛰는 건 역겹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 바깥 그 교회에서 당신 연주를 이미 여러 번 들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폐를 끼치려는 건 아닙니다. 당신에게서 뭔가를, 뭔가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 말은 아예 듣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들으면 되니까요."

"나는 늘 문을 잠그는데."

"요전에는 잊으셨더군요. 그래서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느 때는 밖에 서 있거나 차막이돌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요? 다음엔 안으로 들어와도 됩니다, 더 따뜻하니까. 그냥 문을 두드리면 돼요. 그런데 세게, 그리고 내가 연주하는 동안은 말고. 자 이제 — 무슨 말을 하려던 거요? 아주 젊은 사람이군, 아마 학생이거나 대학생이겠지. 음악 하시오?"

"아닙니다. 저는 음악 듣는 걸 좋아하지만, 당신이 연주하는 그런 음악만 좋아합니다. 아주 무조건적인 음악, 저기서 한 사람이 하늘과 지옥을 뒤흔들고 있구나 하고 느껴지는 그런 음악 말입니다. 음악이 저에게 몹시 정다운 건 그것이 그토록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도덕적인데, 저는 그렇지 않은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도덕적인 것 아래서 괴로워하기만 했습니다. 제대로 말하지를 못하겠군요. —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런 신이 있었다고들 하던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음악가가 챙 넓은 모자를 조금 뒤로 밀고 넓은 이마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털어 냈다. 그러면서 나를 꿰뚫어 보듯 바라보며 탁자 너머로 얼굴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가 나직하고 팽팽하게 물었다. "지금 말한 그 신 이름이 뭐요?"

"안타깝게도 저는 그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사실 이름밖에는요. 아프락사스라고 합니다."

그 악사는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싶은 듯 미덥지 않은 눈으로 둘레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나에게 바짝 다가앉아 속삭이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소. 당신 누구요?"

"저는 김나지움 학생입니다."

"아프락사스를 어떻게 알았소?"

"우연히요."

그가 탁자를 내리쳐 포도주 잔이 넘쳤다.

"우연이라고! 무슨 개… 헛소리를 하는 거요, 젊은이! 아프락사스는 우연히 알게 되는 게 아니오, 그걸 명심하시오. 내가 그에 대해 더 말해 주겠소. 나는 그에 대해 조금 알고 있소."

그는 입을 다물고 의자를 뒤로 물렸다. 내가 기대에 차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서는 안 되오! 다음에 합시다. — 자, 이거나 드시오!"

그러면서 그는 벗지 않고 있던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 구운 밤 몇 개를 꺼내 나에게 던져 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 먹었고 몹시 흡족했다.

"그래서!" 얼마 뒤 그가 속삭였다. "그분을 — 어떻게 알았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저는 혼자였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내가 이야기했다. "그때 지난 시절의 친구 하나가 떠올랐는데, 그가 아주 많은 것을 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뭔가를 그렸습니다. 세계의 구에서 나오는 새 한 마리를요. 그것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얼마 지나 제가 더는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 종이 한 조각이 제 손에 들어왔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우리는 밤을 까서 포도주와 함께 먹었다.

"한 잔 더 할까요?" 그가 물었다.

"고맙지만 됐습니다. 저는 술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쯤 실망한 듯 웃었다.

"좋을 대로! 나는 다르오. 나는 여기 더 있겠소. 이제 가시오!"

그다음에 오르간 연주가 끝난 뒤 그와 함께 갔을 때 그는 그리 말이 많지 않았다. 그는 오래된 골목의 오래되고 번듯한 집으로 나를 데리고 올라가 크고 얼마쯤 침침하고 손보지 않은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피아노 말고는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대신 큰 책장과 책상이 그 방에 학자다운 느낌을 주었다.

"책이 참 많으시군요!" 내가 감탄하며 말했다.

"일부는 아버지 서재에서 온 거요. 나는 아버지 집에 살고 있소. — 그렇소, 젊은이,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지만 두 분께 당신을 소개할 수는 없소. 내가 사귀는 사람들은 이 집에서 그리 존중받지 못하니까. 나는 탕자요, 알겠소. 내 아버지는 놀랍도록 존경할 만한 분이고 이 도시의 이름난 목사이자 설교자요. 그리고 나는, 바로 알아 두시라고 말하는데, 재능 있고 앞날이 촉망되던 그분의 아드님인데 탈선해서 얼마쯤 미쳐 버린 사람이오. 나는 신학을 했고 국가시험을 코앞에 두고 그 착실한 학부를 떠났소. 내 개인 공부로 치자면 사실 아직도 그 분야에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어떤 신들을 생각해 냈는가 하는 것은 나에게 여전히 더없이 중요하고 흥미롭소. 그 밖에 나는 지금 음악가이고, 보아하니 곧 자그마한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얻게 될 것 같소. 그러면 나도 다시 교회에 몸담게 되는 셈이지."

나는 책등을 따라 눈길을 옮기며, 작은 탁상등의 약한 불빛으로 볼 수 있는 데까지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 제목들을 찾아냈다. 그러는 동안 내 아는 사람은 어둠 속 벽 쪽 바닥에 누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이리 오시오." 얼마 뒤 그가 불렀다. "이제 철학을 좀 해 봅시다. 그러니까 입 다물고 배를 깔고 엎드려 생각하는 거요."

그가 성냥을 그어 자기가 누운 앞의 벽난로에 종이와 장작을 지폈다. 불꽃이 높이 솟았고, 그는 각별한 주의로 불을 쑤석이고 먹였다. 나도 그의 옆 해진 양탄자에 누웠다. 그는 불을 뚫어지게 보았고 그 불은 나도 끌어당겼다. 우리는 한 시간쯤 잠자코 배를 깔고 타닥거리는 장작불 앞에 엎드려, 불이 타오르고 울부짖고 내려앉고 몸을 구부리고 잦아들고 떨다가 마침내 고요히 잠긴 불씨로 바닥에서 뜸 들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불을 섬긴 것은 사람이 생각해 낸 것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짓은 아니었소." 언젠가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밖에는 우리 둘 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굳은 눈으로 불에 매달려 꿈과 고요에 잠겨, 연기 속에서 형상을 보고 재 속에서 그림을 보았다. 한번은 소스라쳤다. 내 친구가 불씨에 송진 조각을 던져 넣자 작고 가느다란 불꽃이 솟았고, 나는 그 안에서 노란 새매 머리를 한 그 새를 보았다. 꺼져 가는 벽난로의 불씨에서 금빛으로 타는 실들이 모여 그물을 이루었고, 글자와 그림이 나타났고, 얼굴에 대한, 짐승에 대한, 풀에 대한, 벌레와 뱀에 대한 기억이 나타났다. 깨어나 곁의 사람을 보니 그는 주먹에 턱을 괸 채 넋을 놓고 광신하듯 재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가 봐야겠습니다." 내가 나직이 말했다.

"그래요, 그럼 가시오. 또 봅시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고, 등불이 꺼져 있어서 나는 어두운 방과 어두운 복도와 계단을 힘겹게 더듬어 그 홀린 듯한 옛집을 빠져나와야 했다. 길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옛집을 올려다보았다. 어느 창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문 앞 가스등 불빛에 작은 놋쇠 문패가 반짝였다.

「피스토리우스, 수석 목사」라고 나는 거기서 읽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내 작은 방에 혼자 앉아서야, 내가 아프락사스에 대해서도 피스토리우스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가 통틀어 열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그를 찾아간 일에 몹시 흡족했다. 그리고 다음번을 위해 그는 나에게 아주 빼어난 옛 오르간 곡을,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약속해 두었다.

* * *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는 나에게 첫 번째 가르침을 주었다. 그 흐릿한 은자의 방 바닥에서 그와 함께 벽난로 앞에 누워 있던 그때 말이다. 불을 들여다본 것이 나에게 좋았다. 그것은 내가 늘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가꾼 적 없는 성향을 내 안에서 굳혀 주고 확인해 주었다. 나는 차차 그것을 얼마쯤 또렷이 알게 되었다.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는 이따금 자연의 기이한 모양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의 마법에, 그 구불구불하고 깊은 말에 나를 내맡기는 것이었다. 길게 목질이 된 나무뿌리, 돌 속의 빛깔 있는 결, 물 위에 뜬 기름 얼룩, 유리에 간 금 — 그 비슷한 모든 것이 때때로 나에게 큰 마법이었고, 무엇보다 물과 불과 연기와 구름과 먼지가 그러했으며, 특히 눈을 감으면 보이는 맴도는 빛깔의 얼룩들이 그러했다. 피스토리우스를 처음 찾아간 뒤 며칠 동안 이것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로 느끼던 어떤 굳세짐과 기쁨이, 나 자신에 대한 느낌이 높아진 것이 오로지 열린 불을 오래 들여다본 덕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놀랍도록 좋았고 나를 넉넉하게 해 주었다!

내 본디 삶의 목표로 가는 길에서 여태 찾아낸 몇 안 되는 경험에 이 새로운 것이 더해졌다. 그런 형상들을 들여다보는 일, 자연의 비이성적이고 구불구불하고 야릇한 모양에 나를 내맡기는 일은 우리 안에 우리 속과 그 형상들을 있게 한 의지가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을 낳는다 — 우리는 곧 그것들을 우리 자신의 변덕으로, 우리 자신의 창조물로 여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 우리는 우리와 자연 사이의 경계가 떨리고 녹아 흐르는 것을 보고, 우리 망막 위의 그림들이 바깥의 인상에서 온 것인지 안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상태를 알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창조자인지를, 우리 영혼이 세계의 끊임없는 창조에 얼마나 늘 함께하고 있는지를 이 연습에서만큼 간단하고 쉽게 알아내는 데는 없다. 아니 그보다, 우리 안에서 일하는 신성과 자연 안에서 일하는 신성은 나눌 수 없는 같은 하나여서, 바깥 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우리 가운데 하나가 그것을 다시 지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산과 강, 나무와 잎, 뿌리와 꽃, 자연 속에 형상을 이룬 모든 것이 우리 안에 미리 형상 지어져 있고, 그 본질이 영원인 영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영혼의 본질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대개 사랑의 힘이자 창조의 힘으로 우리에게 느껴진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나는 이 관찰이 어느 책에서 확인되는 것을 보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여러 사람이 침을 뱉어 놓은 담벼락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깊이 마음을 움직이는지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그 축축한 담벼락의 얼룩들 앞에서 그가 느낀 것은 피스토리우스와 내가 불 앞에서 느낀 것과 같았다.

다음에 만났을 때 오르간 연주자가 나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는 우리 인격의 경계를 늘 너무 좁게 긋소! 우리는 개별로 구별되는 것, 남과 다르다고 알아본 것만을 늘 우리 사람됨에 넣지. 그러나 우리는 저마다 세계의 온 재고로 이루어져 있소. 우리 몸이 물고기까지,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는 발달의 계보를 제 안에 지니고 있듯, 우리는 영혼 안에 사람의 영혼 속에 살았던 모든 것을 지니고 있소. 여태 있었던 모든 신과 악마가, 그리스 사람에게서든 중국 사람에게서든 줄루족에게서든, 모두 우리 안에 함께 있소. 가능성으로, 바람으로, 빠져나갈 길로 거기 있소. 인류가 아무 가르침도 받지 않은 그럭저럭 재능 있는 아이 하나만 남기고 죽어 없어진다 해도, 그 아이는 온갖 일의 흐름을 다시 찾아낼 것이오. 신들과 정령들과 낙원들과 계율과 금기와 구약과 신약을, 그 모두를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오."

"그렇군요, 좋습니다." 내가 반박했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낱낱의 사람이 지니는 값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모든 것을 우리 안에 갖추고 있다면 우리는 왜 아직도 애를 씁니까?"

"잠깐!" 피스토리우스가 세차게 외쳤다. "세계를 그저 제 안에 지니고 있는 것과 그것을 알기까지 하는 것은 큰 차이요! 미친 사람도 플라톤을 떠올리게 하는 생각을 내놓을 수 있고, 헤른후트파 학교의 경건한 어린 학생도 그노시스파나 조로아스터에게 나오는 깊은 신화의 이어짐을 창조하듯 되짚어 생각할 수 있소.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모르오! 모르는 동안 그는 나무거나 돌이고, 잘해야 짐승이오. 그러다 이 앎의 첫 불꽃이 밝아 오면 그때 그는 사람이 되오. 설마 저기 길을 걸어 다니는 두 발 짐승을 모두, 그저 곧게 걷고 제 새끼를 아홉 달 배고 다닌다고 해서 사람으로 여기는 건 아니겠지요? 그중 얼마나 많은 수가 물고기이거나 양이고 벌레이거나 거머리인지, 얼마나 많은 수가 개미이고 얼마나 많은 수가 꿀벌인지 보고 있지 않소! 자, 그들 하나하나 안에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소. 그러나 그것을 예감할 때, 그것을 얼마간 의식할 줄 알게 될 때 비로소 그 가능성이 그의 것이 되오."

우리 이야기는 대략 이런 식이었다. 그 이야기가 나에게 아주 새로운 것을, 완전히 놀라운 것을 가져다주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가장 뻔한 것까지도 나직하고 한결같은 망치질로 내 안의 같은 자리를 때렸고, 모두가 나를 빚는 것을 도왔고, 모두가 내게서 껍질을 벗기고 알껍데기를 깨는 것을 도왔으며,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자유롭게 들었다. 마침내 내 노란 새가 부서진 세계의 껍질에서 그 아름다운 맹금의 머리를 내밀 때까지.

우리는 서로 꿈 이야기도 자주 했다. 피스토리우스는 꿈에 풀이를 줄 줄 알았다. 기이한 예가 지금 떠오른다. 나는 날 수 있는 꿈을 꾸었는데, 다만 내가 다스릴 수 없는 어떤 큰 도약에 실려 공중으로 내던져지는 식이었다. 이 낢의 느낌은 사람을 들어 올렸지만, 내가 뜻과 상관없이 아슬아슬한 높이로 끌려 올라가는 것을 보자 곧 두려움이 되었다. 그때 나는 숨을 멈추고 흘려보내는 것으로 오르내림을 다스릴 수 있다는 구원 같은 발견을 했다.

거기에 피스토리우스가 말했다. "당신을 날게 하는 그 도약, 그것은 누구나 지닌 우리 인류의 큰 재산이오. 그것은 모든 힘의 뿌리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인데, 그러면서 곧 겁이 나지! 그건 지독히 위험하니까! 그래서 대부분은 나는 것을 기꺼이 그만두고 법이 정한 규정을 따라 보도로 걸어 다니는 쪽을 고르오. 그런데 당신은 아니오. 당신은 계속 나는데, 그게 제대로 된 젊은이에게 어울리는 일이지. 그런데 보시오, 거기서 당신은 기이한 것을 발견하오. 당신이 차차 그것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을, 당신을 채가는 그 크고 일반적인 힘에 곱고 작은 당신만의 힘이, 기관 하나가, 키 하나가 더해진다는 것을 말이오! 그건 훌륭한 일이오. 그게 없으면 사람은 뜻 없이 공중으로 올라가 버리는데, 미친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그들에게는 보도 위의 사람들보다 깊은 예감이 주어져 있지만, 거기에 쓸 열쇠도 키도 없어서 바닥없는 데로 곤두박질치오. 그런데 당신은, 싱클레어, 당신은 그 일을 해내고 있소! 그런데 어떻게 해내느냐 하면. 아직 전혀 모르시겠지요? 당신은 새로운 기관 하나로, 호흡 조절기로 그것을 하고 있소. 그리고 이제 당신은 당신 영혼이 그 깊은 데서 얼마나 「개인의 것」이 아닌지를 볼 수 있소. 당신 영혼이 이 조절기를 지어낸 게 아니거든! 그건 새것이 아니오! 그건 빌려 온 것이고 몇천 년 전부터 있어 왔소. 그건 물고기의 균형 기관, 곧 부레요.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에도 부레가 동시에 일종의 허파여서 형편에 따라 정말로 숨 쉬는 데 쓰이는 야릇하고 보수적인 물고기가 몇 종 있소. 그러니까 당신이 꿈에서 나는 데 쓰는 부레 같은 그 허파와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지!"

그는 나에게 동물학 책 한 권을 가져다주기까지 하며 그 구식 물고기들의 이름과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야릇한 떨림과 함께 이른 발달 시기에서 온 어떤 기능이 내 안에서 살아 있음을 느꼈다.

야곱의 싸움

그 야릇한 음악가 피스토리우스에게서 아프락사스에 대해 알게 된 것을 나는 짧게 다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로 가는 길에서 내디딘 또 한 걸음이었다. 그때 열여덟쯤이던 나는 남다른 젊은이였다. 백 가지 일에서 조숙했고 다른 백 가지 일에서는 몹시 뒤처지고 서툴렀다. 이따금 남들과 나를 견주어 볼 때면 자주 자랑스럽고 우쭐했지만, 그만큼 자주 짓눌리고 초라해졌다. 나는 자주 나를 천재로 여겼고 자주 반쯤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 또래들의 기쁨과 삶에 끼어드는 일은 되지 않았고, 자주 나는 가망 없이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듯, 나에게 삶이 닫혀 있는 듯 자책과 걱정으로 나를 태웠다.

자신이 다 자란 별종이던 피스토리우스는 나에게 용기와 나 자신에 대한 존중을 지키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내 말에서, 내 꿈에서, 내 상상과 생각에서 늘 값진 것을 찾아냈고, 늘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진지하게 이야기함으로써 나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당신은 나에게 이야기했지요." 그가 말했다. "음악이 도덕적이지 않아서 좋다고. 좋소. 그런데 당신 자신도 도덕가가 되어서는 안 되오! 남들과 자기를 견주면 안 되고,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지었다면 타조가 되려 해서는 안 되오. 당신은 이따금 자기를 이상하다고 여기고, 대부분과 다른 길을 간다고 자책하지. 그건 잊어버려야 하오. 불을 들여다보시오, 구름을 들여다보시오. 그리고 예감이 오고 당신 영혼 속의 목소리들이 말하기 시작하거든 그것들에게 자기를 내맡기시오. 그게 선생님 마음에나 아버님 마음에나 어떤 사랑하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인지 먼저 묻지 마시오! 그러다 사람이 망가지오. 그러다 보도로 나앉아 화석이 되지. 이보시오 싱클레어, 우리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요. 그는 신이면서 사탄이고,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제 안에 지니고 있소. 아프락사스는 당신의 어떤 생각에도, 당신의 어떤 꿈에도 딴지를 걸지 않소. 그것을 결코 잊지 마시오. 그러나 당신이 한번 흠잡을 데 없고 정상인 사람이 되어 버리면 그는 당신을 떠나오. 그때 그는 당신을 떠나 제 생각을 끓일 새 냄비를 찾아 나서지."

내 모든 꿈 가운데 그 어두운 사랑의 꿈이 가장 한결같았다. 나는 그 꿈을 자주자주 꾸었다. 문장의 새 아래를 지나 우리 옛집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끌어안으려 했는데, 그 대신 반은 남자이고 반은 어머니인 그 큰 여자를 안고 있었다. 나는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더없이 타는 갈망으로 그에게 끌렸다. 그리고 이 꿈만은 내 친구에게 결코 이야기할 수 없었다. 다른 모든 것을 그에게 열어 보인 뒤에도 이것만은 남겨 두었다. 그것은 내 구석이었고 내 비밀이었고 내 피난처였다.

마음이 짓눌릴 때면 나는 피스토리우스에게 옛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면 나는 저녁의 어두운 교회에 앉아, 야릇하고 살갑고 제 안에 잠겨 제 소리를 엿듣는 그 음악에 나를 잃었다. 그 음악은 그때마다 나를 어루만졌고, 영혼의 목소리들을 옳다 하도록 나를 더 채비시켜 주었다.

오르간 소리가 이미 잦아든 뒤에도 우리는 이따금 한동안 교회에 앉아, 높고 뾰족한 아치 창으로 약한 빛이 들어와 스러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우습게 들리겠지." 피스토리우스가 말했다. "내가 한때 신학도였고 하마터면 목사가 될 뻔했다는 게. 그렇지만 그때 내가 저지른 건 형식에서의 착오일 뿐이었소. 사제가 되는 것은 내 천직이고 내 목표요. 다만 내가 너무 일찍 만족해서, 아프락사스를 알기도 전에 여호와에게 나를 내주었을 뿐이지. 아아, 어느 종교나 아름답소. 종교는 영혼이오. 기독교의 성찬을 받든 메카로 순례를 가든 매한가지요."

"그렇다면," 내가 말했다. "사실 목사가 되셔도 되었겠군요."

"아니오, 싱클레어, 아니오. 나는 거짓말을 해야 했을 거요. 우리 종교는 마치 종교가 아닌 것처럼 행해지고 있소. 그것은 자기가 이성의 산물인 척하지. 굳이 하자면 가톨릭 신자는 될 수 있었겠지만 개신교 사제는 — 아니오! 정말로 믿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 나도 그런 이들을 아오 — 글자에 매달리기를 좋아하는데, 그들에게 나는 이를테면 그리스도가 나에게는 한 사람이 아니라 영웅이고 신화이며, 인류가 자기 자신을 영원의 벽에 그려 놓고 바라보는 엄청난 그림자상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거요. 그리고 영리한 말 한마디 들으려고, 의무를 다하려고, 빠뜨리지 않으려고 교회에 오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했겠소? 그들을 돌아서게 하라는 말이오? 그런데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소. 사제는 사람을 돌아서게 하려는 게 아니오. 그저 믿는 이들 틈에서, 저와 같은 이들 틈에서 살고자 할 뿐이고, 우리가 우리 신들을 만들어 내는 그 감정을 떠받치고 나타내는 자이고자 할 뿐이오."

그가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이어 갔다. "우리가 지금 아프락사스라는 이름을 골라 붙인 우리의 새 믿음은 아름답소, 벗이여.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젖먹이요! 아직 날개가 자라지 않았소. 아아, 외로운 종교, 그건 아직 진짜가 아니오. 그것은 함께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예배와 도취를, 잔치와 비의를 지녀야 하오…."

그는 골똘해지더니 제 안으로 잠겼다.

"비의를 혼자서, 또는 아주 작은 무리에서 치를 수는 없습니까?" 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할 수야 있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진작부터 치르고 있소. 알려지면 몇 해쯤 징역을 살아야 할 예배도 치러 봤소. 그렇지만 그게 아직 옳은 것이 아니라는 걸 나도 아오."

갑자기 그가 내 어깨를 쳐서 나는 움찔했다. "젊은이." 그가 힘주어 말했다. "당신에게도 비의가 있소. 당신이 나에게 말하지 않는 꿈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아오. 그걸 알고 싶지는 않소. 그렇지만 이 말은 하겠소. 그것들을 살아 내시오, 그 꿈들을 연기하시오, 그것들에게 제단을 세우시오! 그게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길이오. 언젠가 당신과 나와 몇몇이 세계를 새롭게 할지는 두고 볼 일이오. 그러나 우리 안에서는 날마다 그것을 새롭게 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오. 그걸 명심하시오! 당신은 열여덟이오, 싱클레어. 당신은 거리의 여자들에게 달려가지 않으니, 사랑의 꿈과 사랑의 바람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소. 어쩌면 그것들이 당신 자신이 무서워할 만한 것일지도 모르지. 무서워하지 마시오! 그것들은 당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이오! 나를 믿어도 좋소. 나는 당신 나이에 내 사랑의 꿈을 짓밟아서 많은 것을 잃었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소. 아프락사스를 아는 사람은 더는 그러면 안 되오. 우리 안의 영혼이 바라는 것은 무엇도 무서워해서도 안 되고 무엇도 금지된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되오."

나는 놀라서 반박했다. "그렇지만 떠오르는 대로 다 할 수는 없잖습니까! 누가 밉다고 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거잖습니까."

그가 나에게 더 다가앉았다.

"형편에 따라서는 그것도 해도 되오. 다만 대개는 그것이 착오일 뿐이지. 그리고 내 말은 머리에 스치는 것을 그냥 다 하라는 게 아니오. 아니오, 다만 나름의 좋은 뜻을 지닌 그 떠오름들을 쫓아 버리고 그것들을 두고 도덕을 따지는 식으로 해로운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거요. 자기든 남이든 십자가에 못 박는 대신, 잔에 담긴 포도주를 엄숙한 생각으로 마시며 제물의 비의를 생각할 수도 있소. 그런 행위 없이도 제 충동과 이른바 시험이라는 것을 존중과 사랑으로 다룰 수 있소. 그러면 그것들이 제 뜻을 드러내고, 그것들에게는 모두 뜻이 있소. — 언젠가 또 아주 미친 것이나 죄스러운 것이 떠오르거든, 싱클레어, 누구를 죽이고 싶거나 어마어마하게 더러운 짓을 저지르고 싶거든, 그때 잠깐 생각하시오. 당신 안에서 그렇게 상상하고 있는 것이 아프락사스라는 것을! 당신이 죽이고 싶은 그 사람은 결코 아무개 씨가 아니오. 그건 틀림없이 변장일 뿐이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 모습에서 우리 자신 안에 앉아 있는 무언가를 미워하는 거요.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흔들지 못하오."

피스토리우스가 나에게 그토록 깊이 은밀한 데를 때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가장 세게, 가장 야릇하게 나를 건드린 것은 이 말이 여러 해 전부터 내가 품고 다니던 데미안의 말과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몰랐는데 둘 다 나에게 같은 것을 말했다.

"우리가 보는 것들은," 피스토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것들이오. 우리가 우리 안에 지닌 것 말고 다른 현실은 없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요. 바깥의 그림들을 현실로 여기고 제 안의 제 세계는 아예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니까. 그러고도 행복할 수는 있소. 그러나 다른 것을 한번 알고 나면 그때는 대부분의 길을 갈 선택지가 더는 없소. 싱클레어, 대부분의 길은 쉽고 우리 길은 어렵소. — 이제 갑시다."

며칠 뒤, 두 번이나 헛되이 그를 기다린 끝에 나는 늦은 저녁 거리에서 그를 마주쳤다. 그는 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외로이 모퉁이를 돌아 비틀거리며 잔뜩 취해 불려 오고 있었다. 나는 그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한 채 지나갔고, 알 수 없는 곳에서 오는 어두운 부름을 따르기라도 하듯 타오르고 외로운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한 거리쯤 그를 뒤따랐다. 그는 보이지 않는 줄에 끌리듯 흘러갔다. 광신에 찬, 그러면서도 풀어진 걸음이 유령 같았다. 나는 서글프게 집으로, 풀려나지 못한 내 꿈들에게로 돌아갔다.

'저렇게 그는 지금 자기 안에서 세계를 새롭게 하고 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바로 그 순간 그것이 천하고 도덕적인 생각임을 느꼈다. 내가 그의 꿈에 대해 무엇을 알았던가? 어쩌면 그는 제 취함 속에서 내가 내 불안 속에서 가는 것보다 더 확실한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 * *

수업 사이 쉬는 시간에 나는 여태 눈여겨본 적 없는 어느 친구가 내 곁을 찾는다는 것을 이따금 알아챘다. 자그맣고 약해 보이고 가냘픈 젊은이였는데, 불그레한 금빛의 성긴 머리카락에 눈빛과 몸가짐에 저만의 무언가가 있었다. 어느 저녁 내가 집에 돌아오자 그가 골목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나를 지나가게 두었다가 다시 뒤쫓아 와서는 우리 집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내가 물었다.

"그냥 너하고 한번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부탁인데 몇 걸음만 같이 가 줘."

나는 그를 따라갔고, 그가 깊이 흥분해 기대에 차 있음을 느꼈다. 그의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너 심령술 하니?" 그가 아주 갑자기 물었다.

"아니, 크나우어."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전혀.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어?"

"그렇지만 신지학은 하지?"

"그것도 아니야."

"아이, 그렇게 닫아 두지 마! 너한테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건 내가 아주 잘 느껴. 눈에 그게 있어. 나는 네가 영들과 왕래한다고 틀림없이 믿어. —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야, 싱클레어, 아니라고! 나도 찾는 사람이야, 알잖아. 그리고 나는 너무 외로워."

"이야기해 봐!" 내가 그를 북돋웠다. "나는 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 꿈속에서 살아. 그걸 네가 느낀 거야. 다른 사람들도 꿈속에서 살지만 제 꿈속에서는 아니야. 그게 다른 점이지."

"응, 어쩌면 그렇겠다." 그가 속삭였다. "결국 중요한 건 사람이 어떤 종류의 꿈속에서 사느냐지. — 너 백마술이라고 들어 봤어?"

나는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자기를 다스리는 법을 익히는 거야. 사람이 죽지 않게 될 수도 있고 마법도 부릴 수 있어. 너 그런 연습 해 본 적 없어?"

그 연습에 대해 내가 궁금해하며 묻자 그는 처음에는 비밀스럽게 굴다가, 내가 가려고 몸을 돌리자 털어놓았다.

"이를테면 잠들려 하거나 정신을 모으려 할 때 나는 그런 연습을 해. 무언가를 하나 생각해. 이를테면 낱말이나 이름, 또는 기하 도형 같은 것을. 그러고는 그걸 할 수 있는 한 세게 내 안으로 생각해 넣어. 머릿속 안쪽에 그것을 그려 보려고 애쓰다가 그게 거기 들어 있다고 느껴지면, 그다음엔 그걸 목으로 생각해 넣고, 그런 식으로 내가 온통 그것으로 채워질 때까지 해. 그러면 나는 아주 단단해져서 아무것도 나를 고요에서 끌어낼 수 없어."

나는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어느 정도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할 말이 더 있음을 잘 느꼈다. 그는 야릇하게 들떠 있었고 서둘렀다. 나는 그가 묻기 쉽게 해 주려 했고, 곧 그가 진짜 용건을 꺼냈다.

"너도 금욕하지?" 그가 겁먹은 듯 나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성에 관한 걸 말하는 거야?"

"응, 응. 나는 그 가르침을 안 뒤로 두 해째 금욕하고 있어. 그전에는 못된 짓을 했지, 너도 알 거야. — 그러니까 너는 여자와 있어 본 적 없어?"

"없어." 내가 말했다. "맞는 사람을 못 찾았거든."

"그렇지만 이 사람이 맞는 사람이다 싶은 사람을 찾으면, 그럼 그 사람과 자겠구나?"

"응, 그럼. — 그쪽에서 싫다고 하지 않는다면." 내가 얼마쯤 비꼬듯 말했다.

"아, 그럼 너는 잘못된 길에 있는 거야! 속의 힘은 완전히 금욕할 때만 길러 낼 수 있어. 나는 그렇게 해 왔어, 두 해 동안. 두 해하고 한 달 남짓! 그게 얼마나 어려운데! 어떤 때는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들어 봐, 크나우어, 나는 금욕이 그렇게 무섭도록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도 알아." 그가 물리쳤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 그렇지만 너한테서는 그런 말을 기대하지 않았어. 더 높은 정신의 길을 가려는 사람은 깨끗하게 있어야 해, 무조건!"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그렇지만 제 성을 억누르는 사람이 왜 다른 누구보다 더 「깨끗한」 사람이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어. 아니면 너는 성에 관한 것을 온갖 생각과 꿈에서도 지워 버릴 수 있어?"

그가 절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니, 바로 그게 안 돼! 맙소사, 그런데도 그래야만 하는데. 나는 밤에 나 자신에게조차 이야기할 수 없는 꿈을 꿔! 무서운 꿈이야, 정말!"

나는 피스토리우스가 나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말이 옳다고 아무리 느껴도 그것을 남에게 옮길 수는 없었다. 내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대로 따를 만큼 나 자신도 아직 자라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충고를 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말이 없어졌고, 누군가 나에게 충고를 구하는데 줄 것이 없다는 사실에 초라해졌다.

"나는 다 해 봤어!" 크나우어가 내 옆에서 한탄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찬물로도, 눈으로도, 체조와 달리기로도.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어. 밤마다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는 꿈에서 깨어나. 그리고 끔찍한 건 이거야. 그러면서 정신으로 익혀 둔 것을 차차 다시 다 잃어버려. 이제는 정신을 모으거나 스스로 잠드는 일을 거의 해내지 못해. 자주 밤새 깨어 누워 있어. 이걸 오래는 못 견뎌. 결국 이 싸움을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무너져서 다시 나를 더럽히게 되면, 그러면 나는 아예 싸워 본 적도 없는 다른 모두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거야. 그건 너도 알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거기에 아무 말도 보탤 수 없었다. 그가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눈에 보이는 그의 곤경과 절망이 나에게 더 깊은 인상을 주지 않는다는 데 나 자신이 놀랐다. 나는 이렇게만 느꼈다. 나는 너를 도울 수 없다.

"그럼 나한테 해 줄 말이 전혀 없는 거야?" 마침내 그가 지치고 서글프게 말했다. "전혀 없어? 길이 있을 거 아냐! 너는 어떻게 하는데?"

"너한테 해 줄 말이 없어, 크나우어. 이런 일에서는 서로 도울 수 없어. 나도 아무한테서 도움을 받지 못했어. 너는 너 자신을 돌아봐야 하고, 그다음엔 정말로 네 본성에서 나오는 것을 해야 해. 다른 건 없어. 네가 너 자신을 찾지 못하면 영도 찾지 못할 거야, 내 생각엔."

실망해서 갑자기 말문이 막힌 그 작은 녀석이 나를 보았다. 그러다 그 눈빛이 느닷없는 미움으로 타올랐고, 그는 나에게 얼굴을 찡그리며 성이 나서 소리쳤다. "아, 참 훌륭한 성인 나셨네! 너도 네 못된 짓이 있어, 나는 알아! 현자인 척하면서 몰래 나나 다른 모두랑 똑같은 오물에 매달려 있잖아! 너는 돼지야, 돼지, 나랑 똑같이. 우리는 다 돼지야!"

나는 그를 거기 세워 둔 채 걸어갔다. 그가 두세 걸음 나를 뒤따라오다가 처졌고, 돌아서서 달려가 버렸다. 딱함과 역겨움이 뒤섞인 느낌에 속이 메스꺼웠고, 집에 돌아와 내 작은 방에서 몇 안 되는 그림들을 둘레에 세워 놓고 더없이 간절한 살가움으로 내 꿈에 나를 내맡길 때까지 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곧바로 내 꿈이 다시 왔다. 대문과 문장의 꿈, 어머니와 그 낯선 여자의 꿈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자의 이목구비를 너무나 또렷이 보아서, 바로 그날 저녁에 그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며칠 뒤 이 그림이 다 되었을 때 — 꿈결 같은 십오 분씩을 의식 없이 그어 나간 것이었다 — 나는 저녁에 그것을 벽에 걸고 앞에 책상등을 옮겨 놓은 뒤, 결판이 날 때까지 싸워야 하는 정령 앞에 선 듯 그 앞에 섰다. 그것은 앞의 것과 닮은, 내 친구 데미안과 닮은, 몇몇 이목구비는 나 자신과도 닮은 얼굴이었다. 한쪽 눈이 다른 쪽보다 눈에 띄게 높았고, 눈길은 나를 지나쳐 넘어가 잠긴 채 굳어 있었으며 운명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속의 안간힘으로 가슴속까지 차가워졌다. 나는 그 그림에게 물었고, 그것을 나무랐고, 그것을 어루만졌고, 그것에게 기도했다. 나는 그것을 어머니라 불렀고, 연인이라 불렀고, 창녀라 불렀고, 아프락사스라 불렀다. 그사이 피스토리우스의 말이 — 아니면 데미안의 말이었나? — 떠올랐다. 그 말이 언제 나온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것을 다시 듣는 것 같았다. 야곱이 하느님의 천사와 싸운 일에 대한 말이었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지 못하게 하겠나이다」라는 말이었다.

등불 빛 속의 그 그린 얼굴은 부를 때마다 모습을 바꾸었다. 환해지고 빛나다가 검어지고 침침해졌고, 죽은 눈 위로 파리한 눈꺼풀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 타는 눈빛을 번득였고, 여자였다가 남자였다가 소녀였다가 어린아이였다가 짐승이었고, 얼룩으로 번졌다가 다시 크고 또렷해졌다. 마침내 나는 강한 속의 부름을 따라 눈을 감았고, 이제 그 그림을 내 안에서 더 세고 더 힘차게 보았다. 나는 그 앞에 무릎 꿇으려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내 안에 있어서 더는 나에게서 떼어 낼 수 없었다. 온통 나 자신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봄 폭풍 같은 어둡고 무거운 울부짖음을 들었고, 두려움과 겪음의 말할 수 없이 새로운 느낌에 떨었다. 별들이 내 앞에 떠올랐다가 꺼졌고, 첫 기억, 가장 잊힌 어린 시절까지, 아니 태어나기 전과 되어 감의 이른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들이 밀치듯 내 곁을 흘러갔다. 그러나 내 온 삶을 가장 은밀한 데까지 되풀이해 보이는 듯하던 그 기억들은 어제와 오늘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미래를 비추었으며, 나를 오늘에서 떼어 내어 새로운 삶의 꼴들 속으로 채갔다. 그 그림들은 엄청나게 밝고 눈부셨지만 나중에 그중 어느 것도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밤중에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옷을 입은 채 침대에 가로누워 있었다. 불을 켜고, 중요한 무언가를 떠올려야 한다고 느꼈지만 몇 시간 전의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불을 켜자 기억이 차차 왔다. 나는 그 그림을 찾았다. 그것은 더 이상 벽에 걸려 있지 않았고 책상 위에도 없었다. 그때 내가 그것을 태워 버렸다는 것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했다. 아니면 그것을 내 손으로 태워 그 재를 먹었다는 것이 꿈이었을까?

크고 떨리는 불안이 나를 몰았다. 나는 모자를 쓰고 억지에 떠밀리듯 집과 골목을 지나, 폭풍에 불려 가듯 거리와 광장을 지나 달리고 또 달렸으며, 내 친구의 어두운 교회 앞에서 귀를 기울였고, 무엇인지도 모른 채 어두운 충동으로 찾고 또 찾았다. 나는 사창가가 늘어선 변두리를 지났는데 거기에는 아직 여기저기 불이 켜져 있었다. 더 바깥에는 새로 짓는 건물과 벽돌 더미가 있었고 얼마쯤은 잿빛 눈에 덮여 있었다. 몽유병자처럼 낯선 압박에 밀려 이 황무지를 지나가는데, 고향 도시의 그 새 건물이 떠올랐다. 언젠가 나를 괴롭히던 크로머가 첫 셈을 치르려고 나를 끌고 들어갔던 그 건물이었다. 잿빛 밤 속에 그와 비슷한 건물이 내 앞에 놓여 검은 문 구멍을 벌리고 나를 향해 하품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끌어당겼고, 나는 피해 가려다 모래와 부스러기에 걸려 비틀거렸다. 그 이끌림이 더 셌다. 나는 들어가야 했다.

널빤지와 깨진 벽돌을 넘어 나는 휑한 공간으로 휘청거리며 들어갔다. 축축한 추위와 돌의 냄새가 흐릿하게 났다. 모래 더미 하나가 잿빛으로 밝게 얼룩져 있었고, 그 밖에는 모두 어두웠다.

그때 소스라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맙소사, 싱클레어, 너 어디서 왔어?"

그리고 내 옆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작고 마른 젊은이가 정령처럼 일어섰고, 나는 아직 머리카락이 곤두선 채로 내 학교 친구 크나우어를 알아보았다.

"어떻게 여기 왔어?" 그가 흥분해서 미친 듯이 물었다. "어떻게 나를 찾아낼 수 있었어?"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너를 찾은 게 아니야." 내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힘겨웠고, 죽고 무겁고 얼어붙은 듯한 입술을 겨우 넘어왔다.

그가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찾은 게 아니라고?"

"응. 뭔가가 나를 여기로 끌었어. 네가 나를 불렀어? 네가 나를 불렀을 거야. 그런데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밤인데."

그가 가느다란 팔로 나를 발작하듯 끌어안았다.

"응, 밤이야. 곧 아침이 될 거야. 아 싱클레어, 나를 잊지 않았구나!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어?"

"뭘?"

"아 내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잖아!"

그제야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기억났다. 그게 나흘, 닷새 전이었던가? 그 뒤로 한평생이 지난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을 알았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이 아니라, 내가 왜 여기 왔는지, 크나우어가 여기 바깥에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알았다.

"그러니까 너 목숨을 끊으려 했구나, 크나우어?"

그가 추위와 두려움으로 떨었다.

"응, 그러려고 했어. 내가 그럴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어.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

나는 그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하루의 첫 가로줄 빛살이 말할 수 없이 차갑고 내키지 않는 듯 잿빛 공기 속에서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팔을 잡고 한참을 걸었다. 내 안에서 말이 나왔다. "이제 집에 가. 그리고 아무한테도 아무 말 하지 마! 너는 잘못된 길을 갔어, 잘못된 길을! 우리는 네 말처럼 돼지가 아니야. 우리는 사람이야. 우리는 신들을 만들고 그들과 싸우고,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축복해 줘."

우리는 잠자코 더 걷다가 헤어졌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날이 밝아 있었다.

* * *

St.에서 지낸 그 시절이 나에게 가져다준 가장 좋은 것은 피스토리우스와 오르간 앞에서, 또는 벽난로 불 앞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우리는 아프락사스에 관한 그리스어 글을 함께 읽었고, 그는 나에게 베다 번역의 몇 대목을 읽어 주었으며 거룩한 「옴」을 소리 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내 속을 밀어 준 것은 이런 학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를 어루만진 것은 나 자신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 내 꿈과 생각과 예감에 대한 커져 가는 믿음, 그리고 내가 안에 지닌 힘에 대한 커져 가는 앎이었다.

피스토리우스와 나는 온갖 방식으로 통했다. 그를 세게 생각하기만 하면 그가 오거나 그의 인사가 나에게 오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데미안에게 그랬듯 나는 그가 곁에 없어도 그에게 무언가를 물을 수 있었다. 그를 단단히 그려 보고 내 물음을 강렬한 생각으로 그에게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그 물음에 쏟은 영혼의 힘이 모두 답이 되어 내 안으로 돌아왔다. 다만 내가 그려 보는 것은 피스토리우스라는 사람도 막스 데미안이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꿈꾸고 그린 그림, 내 정령의 그 남자이자 여자인 꿈의 그림이었고, 나는 그것을 불러야 했다. 그것은 이제 내 꿈속에만 살지도, 종이에 그려진 채로만 있지도 않았다. 그것은 내 안에, 바람의 그림이자 나 자신이 높아진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자살에 실패한 크나우어가 나와 맺게 된 관계는 야릇하고 이따금 우스웠다. 내가 그에게 보내진 그 밤 이후로 그는 충직한 하인이나 개처럼 나에게 매달렸고, 제 삶을 내 삶에 붙들어 매려 했으며 눈감고 나를 따랐다. 그는 더없이 기이한 물음과 바람을 들고 나에게 와서 영을 보고 싶어 했고 카발라를 배우고 싶어 했으며, 내가 그런 것들을 하나도 모른다고 딱 잘라 말해도 나를 믿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온갖 힘이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야릇한 것은, 내 안에서 무슨 매듭이 풀려야 할 때면 바로 그때 그가 기이하고 어리석은 물음을 들고 자주 찾아왔다는 것이고, 그의 변덕스러운 착상과 부탁이 자주 나에게 그 매듭을 푸는 실마리와 밀침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주 나에게 성가셨고 나는 그를 거만하게 쫓아 보내곤 했지만, 그래도 나는 느꼈다. 그도 나에게 보내진 사람이었고, 그에게도 내가 준 것이 곱절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으며, 그도 나에게 인도자였거나 적어도 하나의 길이었다. 그가 자기 구원을 찾던 그 미친 책과 글들을 나에게 날라다 주었는데, 그것들은 그때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 크나우어는 나중에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내 길에서 사라졌다. 그와는 결판을 낼 일이 없었다. 그러나 피스토리우스와는 있었다. St.에서의 학교 시절이 끝나 갈 무렵 나는 이 친구와 또 하나의 야릇한 일을 겪었다.

해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살면서 한 번이나 몇 번쯤은 공경과 고마움이라는 아름다운 덕과 부딪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누구나 언젠가는 제 아버지에게서, 제 스승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걸음을 내디뎌야 하고, 누구나 외로움의 모짊을 얼마쯤 느껴야 한다. 대부분은 그것을 조금밖에 견디지 못하고 곧 다시 기어들어 가지만. — 내 부모와 그들의 세계, 곧 내 아름다운 어린 시절의 「밝은」 세계에서 나는 격렬한 싸움 끝에 갈라선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거의 알아채지 못하게 그들에게서 멀어지고 낯설어졌다. 그것이 안타까웠고, 고향에 다녀올 때면 자주 쓰라린 시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슴까지 닿지는 않았고 견딜 만했다.

그러나 우리가 버릇이 아니라 가장 저다운 충동으로 사랑과 경외를 바친 곳, 우리가 가장 저다운 마음으로 제자이자 벗이었던 곳 — 거기서는 우리 안의 이끄는 흐름이 사랑하는 이에게서 멀어지려 한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리는 순간이 쓰라리고 무섭다. 그때는 벗이자 스승을 밀어내는 생각 하나하나가 독 있는 가시로 우리 가슴을 겨누고, 밀쳐 내는 매질 하나하나가 제 얼굴에 떨어진다. 그때는 제 안에 온당한 도덕을 지녔다고 여기던 사람에게 「배신」이니 「배은망덕」이니 하는 이름이 부끄러운 외침이자 낙인처럼 떠오르고, 놀란 가슴은 겁에 질려 어린 시절 덕의 정다운 골짜기로 되달아나며, 이 끊음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 끈도 끊어져야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시간이 가면서 내 안에서는 내 친구 피스토리우스를 그토록 무조건 인도자로 받드는 데 맞서는 느낌이 천천히 자라났다. 내 젊은 시절의 가장 중요한 몇 달 동안 내가 겪은 것은 그와의 우정이었고, 그의 충고였고, 그의 위로였고, 그의 가까움이었다. 그를 통해 신이 나에게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내 꿈이 맑혀지고 풀이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그는 나에게 나 자신에 대한 용기를 주었다. — 아아, 그런데 이제 나는 그에게 맞서는 마음이 천천히 자라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에서 가르치려 드는 소리가 너무 많이 들렸고, 그가 내 한 부분만을 온전히 알아본다고 느꼈다.

우리 사이에 다툼도 소란도 없었고, 갈라섬도 셈을 치르는 일조차 없었다. 나는 그에게 딱 한마디, 사실 해로울 것 없는 말을 했을 뿐이다 — 그러나 그 순간이 바로 우리 사이의 환상이 빛깔 있는 조각으로 부서진 순간이었다.

그 예감이 얼마 전부터 나를 짓눌러 오다가, 어느 일요일 그의 오래된 학자 방에서 또렷한 느낌이 되었다. 우리는 불 앞 바닥에 누워 있었고, 그는 자기가 연구하고 골똘히 생각하며 그 있을 법한 앞날에 마음을 쏟고 있는 비의와 종교의 형태들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삶에 중요하다기보다 진기하고 흥미로울 뿐으로 여겨졌다. 거기서 학식이 들렸고, 지나간 세계의 잔해 아래를 뒤지는 지친 찾기가 들렸다. 그러다 문득 나는 이 방식 전체에, 이 신화 숭배에, 물려받은 믿음의 형식을 가지고 노는 이 모자이크 놀이에 거스르는 마음을 느꼈다.

"피스토리우스." 나 자신에게도 놀랍고 소스라칠 만큼 튀어나온 심술로 내가 갑자기 말했다. "언제 다시 꿈 이야기를 해 주시죠. 밤에 실제로 꾼 진짜 꿈 말입니다. 지금 하시는 그 말씀은 너무 — 너무 지독하게 골동품 같습니다!"

그는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나 자신도 그 순간 부끄러움과 놀라움과 함께 번개처럼 느꼈다. 내가 그에게 쏘아 그의 심장을 맞힌 그 화살이 그 자신의 무기고에서 꺼낸 것이라는 것을 — 그가 이따금 비꼬는 투로 저 자신에게 하던 자책을 내가 이제 날을 세워 심술궂게 그에게 던졌다는 것을.

그는 곧바로 그것을 느꼈고 곧바로 조용해졌다. 나는 겁먹은 가슴으로 그를 보았고, 그가 무섭도록 창백해지는 것을 보았다.

무겁고 긴 침묵 뒤에 그는 불에 새 장작을 얹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 말이 아주 옳소, 싱클레어. 당신은 영리한 사람이오. 골동품 같은 것들로 당신을 괴롭히지 않겠소."

그는 아주 차분하게 말했지만 나는 상처의 아픔을 똑똑히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몸을 돌리고 싶었고, 용서를 빌고 싶었고, 내 사랑과 다정한 고마움을 다짐하고 싶었다. 뭉클한 말들이 떠올랐다 —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누운 채 불을 들여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그도 잠자코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누워 있었고, 불은 타들어 가 사그라졌으며, 꺼져 가는 불꽃마다 나는 다시 올 수 없는 아름답고 살가운 무언가가 타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저를 잘못 이해하신 것 같아 걱정입니다." 마침내 내가 몹시 짓눌린 채 마르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어리석고 뜻 없는 말이 신문 연재소설을 읽어 주기라도 하듯 기계처럼 내 입술을 넘어왔다.

"나는 당신을 아주 옳게 이해했소." 피스토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당신 말이 옳으니까." 그는 잠시 기다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이어 갔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옳을 수 있는 만큼은 말이오."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고 내 안에서 외쳤다, 내가 그르다고! —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내 그 짧은 한마디로 그의 본질적인 약점을, 그의 곤경과 상처를 짚어 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저 자신을 미덥지 않게 여길 수밖에 없는 그 지점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의 이상은 「골동품 같은」 것이었고, 그는 뒤를 향해 찾는 사람이었고, 낭만주의자였다. 그리고 문득 나는 깊이 느꼈다. 피스토리우스가 나에게 되어 주고 주었던 바로 그것을, 그는 저 자신에게는 되어 주지도 주지도 못했다는 것을. 그는 나를 어떤 길로 이끌었는데, 그 길은 인도자인 그마저 넘어서서 떠나야 하는 길이었다.

그런 한마디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는 하느님만 아신다! 나는 그것을 조금도 나쁘게 뜻하지 않았고 파국이 오리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나는 말하는 그 순간에 나 자신도 전혀 알지 못하던 무언가를 말해 버렸고, 조금 재치 있고 조금 심술궂은 작은 착상에 넘어갔을 뿐인데, 그것이 운명이 되었다. 나는 작고 무심한 거친 짓을 하나 저질렀는데, 그에게 그것은 심판이 되었다.

아아, 그때 나는 그가 성을 냈으면, 그가 저를 변호했으면, 나에게 소리를 질렀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던가! 그는 그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을 내가 내 안에서 스스로 해야 했다. 그가 할 수만 있었다면 웃어 보였을 것이다. 그가 그러지 못했다는 데서 나는 내가 그를 얼마나 세게 맞혔는지 가장 잘 알아보았다.

그리고 피스토리우스가 나에게서, 건방지고 배은망덕한 제자에게서 받은 그 매질을 그토록 소리 없이 받아들이면서, 잠자코 나를 옳다고 두면서, 내 말을 운명으로 인정하면서, 그는 나를 나 자신에게 미운 사람으로 만들었고 내 경솔함을 천 배로 키워 놓았다. 내려칠 때 나는 강하고 방어할 줄 아는 사람을 맞히는 줄 알았다 — 그런데 그것은 조용히 견디는 사람, 잠자코 항복하는 무방비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꺼져 가는 불 앞에 누워 있었고, 그 불 속의 타는 형상 하나하나가, 구부러지는 재의 막대 하나하나가 나에게 행복하고 아름답고 넉넉했던 시간들을 떠올려 주었으며 피스토리우스에게 진 빚을 점점 더 크게 쌓아 올렸다. 마침내 나는 더 견디지 못했다. 나는 일어나 갔다. 그의 문 앞에 오래 서 있었고, 어두운 계단에 오래 서 있었고, 집 밖에서도 오래, 혹시 그가 나와서 나를 뒤따라오지 않을까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걸음을 옮겨 저녁이 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도시와 변두리를, 공원과 숲을 쏘다녔다. 그리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이마에 있는 카인의 표를 느꼈다.

생각은 차차 돌아왔다. 내 생각은 모두 나를 고발하고 피스토리우스를 두둔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두 그 반대로 끝났다. 나는 천 번이나 그 성급한 한마디를 뉘우치고 거두어들일 채비가 되어 있었다 — 그러나 그것은 참말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피스토리우스를 이해하고 그의 꿈 전체를 내 앞에 세워 볼 수 있었다. 그 꿈은 사제가 되는 것, 새로운 종교를 알리는 것, 드높임과 사랑과 우러름의 새로운 형식을 주는 것, 새로운 상징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힘도 그의 몫도 아니었다. 그는 지나간 것 안에 너무 따스하게 머물렀고, 옛것을 너무 정확히 알았으며, 이집트와 인도와 미트라와 아프락사스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았다. 그의 사랑은 땅이 이미 본 그림들에 매여 있었고, 그러면서도 그는 가장 깊은 데서 새것이란 새롭고 다른 것이어야 하며 수집과 도서관에서 길어 올릴 것이 아니라 싱싱한 흙에서 솟아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몫은 어쩌면 나에게 해 주었듯 사람들이 저 자신에게로 가도록 돕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들어 본 적 없는 것을, 새로운 신들을 주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서 문득 날카로운 불꽃처럼 깨달음이 나를 태웠다. — 저마다에게 「몫」이 있었지만, 스스로 고르고 규정하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몫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로운 신들을 바라는 것은 그른 일이었고, 세상에 무언가를 주려 하는 것은 완전히 그른 일이었다! 깨어난 사람에게 의무란 오직 하나뿐, 다른 것은 없고 없고 없었다. 저 자신을 찾는 것, 제 안에서 단단해지는 것, 어디로 이어지든 제 길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 그것이 나를 깊이 뒤흔들었고, 그것이 이 겪음이 나에게 준 열매였다. 나는 자주 앞날의 그림을 가지고 놀았고, 나에게 정해졌을지 모를 배역을 꿈꾸었다. 어쩌면 시인으로, 어쩌면 예언자로, 어쩌면 화가로, 아니면 그 비슷하게. 그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기 위해, 설교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다른 어떤 사람도 그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곁가지로 생겨날 뿐이었다. 저마다의 참된 천직은 오직 하나, 저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그가 시인으로 끝나든 미친 사람으로 끝나든, 예언자로 끝나든 범죄자로 끝나든 — 그것은 그의 일이 아니었고, 따지고 보면 대수롭지도 않았다. 그의 일은 아무 운명이나가 아니라 제 운명을 찾아내어 그것을 제 안에서 온전히, 부서짐 없이 살아 내는 것이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반쪽이었고, 빠져나가려는 시도였고, 무리의 이상으로 되달아나는 도피였고, 맞춤이었고, 제 속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무섭고 거룩하게 새로운 그림이 내 앞에 솟아올랐다. 백 번은 예감했고 어쩌면 이미 여러 번 입에 올렸으면서도 이제야 비로소 겪은 그림이었다. 나는 자연이 던진 하나의 던짐이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어쩌면 새것으로,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던져진 던짐이었다. 그리고 태초의 깊은 데서 온 이 던짐이 제 일을 하게 두는 것, 그 뜻을 내 안에서 느끼고 그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는 것, 그것만이 내 천직이었다. 그것 하나뿐이었다!

나는 이미 외로움을 많이 맛보았다. 이제 나는 더 깊은 외로움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예감했다.

나는 피스토리우스와 화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벗으로 남았지만 그 관계는 달라졌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딱 한 번 이야기했는데, 사실은 그 혼자 한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사제가 되고 싶은 바람이 있소, 당신도 알지요. 나는 무엇보다 우리가 그토록 여러 예감을 품고 있는 그 새로운 종교의 사제가 되고 싶었소. 나는 결코 그리 될 수 없을 거요 — 그것을 나도 알고, 나 자신에게 온전히 털어놓지는 못한 채 진작부터 알고 있었소. 나는 그저 다른 사제 노릇을 하게 되겠지. 어쩌면 오르간으로, 어쩌면 다른 식으로.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가 아름답고 거룩하다고 느끼는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어야 하오. 오르간 음악과 비의, 상징과 신화 말이오. 나는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놓고 싶지 않소. — 그게 내 약점이오. 싱클레어, 나는 이따금 아오. 때때로 나는 내가 그런 바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이 사치이고 약함이라는 것을 아오. 아무 요구도 없이 그저 운명 앞에 나를 내놓는 편이 더 크고 더 옳을 거요.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하오. 그것이 내가 못하는 유일한 것이오. 어쩌면 당신은 언젠가 할 수 있을 거요. 그건 어렵소. 이 세상에 있는 정말로 어려운 유일한 것이오, 젊은이. 나는 자주 그것을 꿈꾸었지만 하지 못하오. 그 앞에서 소름이 끼치오. 나는 그렇게 온전히 벌거벗고 외롭게 설 수 없소. 나도 얼마쯤 온기와 먹이가 필요하고 이따금 저와 같은 이들의 가까움을 느끼고 싶은 가엾고 약한 개요. 정말로 제 운명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저와 같은 이가 없소. 그는 아주 혼자 서서 둘레에 차가운 우주 공간만을 두고 있소. 알겠소, 그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요.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힌 순교자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영웅은 아니었고 자유롭지도 않았소. 그들도 자기에게 정답고 익숙한 무언가를 바랐고, 그들에게는 본보기가 있었고 이상이 있었소. 오직 운명만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본보기도 이상도 더는 없고, 정다운 것도 위로가 되는 것도 없소! 그리고 실은 이 길을 가야 하는 거요. 나 같은 사람과 당신 같은 사람은 꽤 외롭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고, 남과 다르다는, 거스른다는, 남다른 것을 바란다는 은밀한 흡족함이 있소. 그 길을 온전히 가려는 사람에게는 그것마저 없어져야 하오. 그는 혁명가가 되려 해서도, 본보기가 되려 해서도, 순교자가 되려 해서도 안 되오. 그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오 —"

그렇다, 그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꿈꿀 수는 있었고, 미리 느낄 수는 있었고, 예감할 수는 있었다. 아주 고요한 시간을 얻을 때면 나는 몇 번인가 그 무엇을 느꼈다. 그러면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보며 내 운명의 그림이 크게 뜨고 굳은 눈을 마주 보았다. 그 눈은 지혜로 가득할 수도, 광기로 가득할 수도 있었고, 사랑을 뿜을 수도 깊은 심술을 뿜을 수도 있었으며, 그것은 매한가지였다. 그중 무엇도 골라서는 안 되었고 무엇도 바라서는 안 되었다. 오직 「자기」를, 오직 제 운명만을 바랄 수 있었다. 거기까지 피스토리우스가 나에게 한동안 인도자 노릇을 해 주었다.

그 무렵 나는 눈먼 사람처럼 쏘다녔다. 내 안에서 폭풍이 울부짖었고 걸음마다 위험이었다. 여태의 모든 길이 흘러들어 가라앉는 바닥없는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 속에서 나는 데미안을 닮은, 그 눈 속에 내 운명이 담긴 그 인도자의 그림을 보았다.

나는 종이에 이렇게 썼다. 「한 인도자가 나를 떠났다. 나는 온전히 어둠 속에 서 있다. 나는 혼자서는 한 걸음도 뗄 수 없다. 나를 도와다오!」

그것을 데미안에게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만두었다. 보내려 할 때마다 그것이 유치하고 뜻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나는 그 짧은 기도를 외고 있었고 자주 속으로 되뇌었다. 그것이 시간마다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기도가 무엇인지 예감하기 시작했다.

* * *

내 학교 시절이 끝났다. 나는 방학 여행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해 두었고, 그다음에는 대학에 가야 했다. 어느 학부로 갈지는 몰랐다. 나에게는 철학 한 학기가 허락되었다. 나는 다른 무엇이었어도 마찬가지로 흡족했을 것이다.

에바 부인

방학 중에 나는 한번 여러 해 전 막스 데미안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으로 가 보았다. 나이 든 여자가 정원을 거닐고 있기에 말을 걸었더니 그 집이 자기 것이라고 했다. 데미안 집안을 물었다. 그는 그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어디 사는지는 몰랐다. 내가 관심을 보이는 것을 느끼고 그는 나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가죽 앨범을 하나 찾아내어 데미안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 사람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그 작은 사진을 보자 심장이 멎었다. — 그것은 내 꿈의 그림이었다! 그 사람이었다. 크고 거의 남자 같은 여자의 모습, 제 아들을 닮은 모습, 어머니다움이 어린 이목구비, 엄격함이 어린 이목구비, 깊은 열정이 어린 이목구비, 아름답고 사람을 끌면서 아름답고 다가설 수 없는, 정령이자 어머니, 운명이자 연인. 그 사람이었다!

내 꿈의 그림이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알게 되자 사나운 기적처럼 무언가가 나를 관통했다! 그렇게 생긴 여자가, 내 운명의 이목구비를 지닌 여자가 있었다! 그는 어디 있는가? 어디에? — 그리고 그는 데미안의 어머니였다!

얼마 뒤 나는 여행을 떠났다. 야릇한 여행이었다! 나는 쉬지 못하고 이 고장 저 고장으로, 떠오르는 대로 옮겨 다니며 늘 이 여자를 찾았다. 어떤 날은 온통 그를 떠올리게 하는, 그와 비슷한 울림이 나는, 그를 닮은 모습들만 마주쳤고, 그것들이 뒤엉킨 꿈속에서처럼 나를 낯선 도시의 골목으로, 역으로, 기차 안으로 꾀어냈다. 또 어떤 날은 내 찾기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러면 나는 어느 공원이나 호텔 정원이나 대합실에 하릴없이 앉아 내 안을 들여다보며 그 그림을 살아나게 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겁 많고 덧없어져 있었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었고, 알지 못하는 풍경을 지나는 기차 안에서만 십오 분씩 졸았다. 한번은 취리히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따라붙었다. 곱고 얼마쯤 뻔뻔한 여자였다. 나는 그를 거의 보지도 않고 마치 그가 공기이기라도 한 듯 지나쳐 갔다. 다른 여자에게 한 시간이나마 마음을 나눠 주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내 운명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고, 이루어짐이 가깝다는 것을 느꼈으며, 거기에 내가 아무것도 보탤 수 없다는 데 조바심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언젠가 어느 역에서, 인스브루크였던 것 같은데, 막 떠나는 기차의 창가에서 그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을 보고 며칠을 괴로워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 모습이 밤에 꿈속에서 다시 나타났고, 나는 내 사냥이 뜻 없다는 부끄럽고 삭막한 느낌으로 깨어나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몇 주 뒤 나는 H. 대학에 등록했다. 모든 것이 나를 실망시켰다. 내가 듣는 철학사 강의는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몸짓만큼이나 알맹이 없고 공장 같았다. 모든 것이 본에 박은 듯했고, 하나가 다른 하나와 똑같이 굴었으며, 앳된 얼굴들에 달아오른 즐거움은 어찌나 서글프도록 비어 있고 사서 갖춘 것 같아 보이던지! 그러나 나는 자유로웠고 하루가 온통 내 것이었으며, 도시 앞 오래된 성벽 곁에 조용하고 아름답게 살았고, 책상에는 니체 몇 권을 놓아두었다. 나는 그와 더불어 살았고, 그 영혼의 외로움을 느꼈고, 그를 멈추지 않고 몰아간 운명의 냄새를 맡았고, 그와 함께 괴로워했으며, 그토록 가차 없이 제 길을 간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복되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휘몰아치는 가을바람 속에서 도시를 어슬렁거리다가 술집에서 학생 모임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열린 창으로 담배 연기가 구름처럼 밀려 나왔고, 그와 함께 노래가 두꺼운 물결로 밀려 나왔다. 크고 팽팽했으나 날개가 없고 생기 없이 한결같았다.

나는 길모퉁이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두 술집에서 시간 맞춰 치르는 젊음의 흥겨움이 밤 속으로 울려 나왔다. 어디서나 함께함, 어디서나 모여 웅크리기, 어디서나 운명을 부려 놓고 따뜻한 무리 곁으로 달아나기!

내 뒤로 남자 둘이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그들 이야기의 한 대목을 들었다.

"아프리카 마을의 젊은 남자들 집하고 똑같지 않소?" 하나가 말했다. "다 맞아떨어지지요. 문신하는 것까지 아직 유행이니. 보십시오, 저것이 젊은 유럽입니다."

그 목소리가 나에게 기이하게 일깨우듯 — 낯익게 울렸다. 나는 어두운 골목에서 그 둘을 뒤따라갔다. 하나는 일본 사람이었고 작고 우아했다. 가로등 아래서 그의 누런 웃는 얼굴이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때 다른 하나가 다시 말했다.

"뭐, 일본이라고 더 나을 것은 없겠지요. 무리를 좇아 달리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나 드뭅니다. 여기에도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하고요."

한마디 한마디가 기쁜 놀라움으로 나를 꿰뚫었다. 나는 그 말하는 사람을 알았다. 데미안이었다.

바람 부는 밤에 나는 그와 그 일본 사람을 따라 어두운 골목을 지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데미안 목소리의 울림을 누렸다. 그 목소리는 예전의 그 가락이었고, 예전의 그 아름다운 확신과 고요를 지녔으며, 나를 다스리던 예전의 그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좋았다. 나는 그를 찾아냈다.

변두리 거리 끝에서 일본 사람이 작별을 하고 어느 집 문을 열었다. 데미안이 왔던 길을 되짚어 왔고, 나는 걸음을 멈춘 채 길 한복판에서 그를 기다렸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나는 그가 나를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 곧고 탄력 있는 걸음에 갈색 고무 외투를 입고 가느다란 지팡이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그는 한결같은 걸음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내 바로 앞까지 와서 모자를 벗고, 단호한 입과 넓은 이마의 그 야릇한 밝음을 지닌 예전의 환한 얼굴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데미안!" 내가 외쳤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왔구나, 싱클레어!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어?"

"딱히 안 건 아니지만 틀림없이 그러기를 바랐지. 너를 본 건 오늘 저녁이 처음이야. 너 내내 우리를 따라왔잖아."

"그럼 나를 바로 알아봤어?"

"당연하지. 물론 너는 달라졌어. 그렇지만 너한테는 그 표가 있잖아."

"표? 무슨 표?"

"우리가 예전에 카인의 표라고 불렀잖아, 아직 기억하고 있다면. 그건 우리 표야. 너는 늘 그걸 지니고 있었고, 그래서 내가 네 친구가 된 거야. 그런데 이제 그게 더 또렷해졌어."

"나는 몰랐어. 아니 사실은 알았지. 언젠가 네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 데미안. 그런데 그게 나하고도 닮아서 놀랐어. 그게 그 표였을까?"

"그거였어. 네가 이제 여기 와서 다행이야! 우리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야."

나는 소스라쳤다.

"너희 어머니? 여기 계셔? 그분은 나를 전혀 모르시잖아."

"아니, 어머니는 너를 알고 계셔. 내가 네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너를 알아보실 거야. — 너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지."

"아, 자주 쓰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얼마 전부터 곧 너를 찾아야 한다는 걸 느꼈어. 날마다 그걸 기다렸어."

그가 내 팔에 제 팔을 끼고 나와 함께 걸었다. 그에게서 고요가 나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곧 예전처럼 재잘거렸다. 우리는 학교 시절을, 견신례 수업을, 그리고 그때 방학의 그 불행했던 만남까지 떠올렸다 — 다만 우리 사이의 가장 이르고 가장 가까운 끈이었던 프란츠 크로머 이야기만은 이번에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우리는 야릇하고 예감에 찬 이야기 한복판에 있었다. 우리는 데미안이 일본 사람과 나눈 그 이야기에 이어 학생들의 삶에 대해 말하다가 거기서 아주 멀리 떨어져 보이는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그것이 데미안의 말 속에서 살가운 하나의 이어짐으로 엮였다.

그는 유럽의 정신과 이 시대의 징조에 대해 말했다. 어디서나 뭉침과 무리 짓기가 판을 치지만 어디에도 자유와 사랑은 없다고 그는 말했다. 학생회와 합창단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함께함은 억지로 지어낸 것이고, 두려움에서 겁에서 어색함에서 나온 공동체이며, 속으로는 썩고 낡아 무너지기 직전이라고 했다.

"함께함은," 데미안이 말했다. "아름다운 것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사방에서 보는 그것은 함께함이 전혀 아니야. 그건 낱낱의 사람들이 서로를 아는 데서 새로 생겨날 거고, 한동안 세상을 바꿔 놓을 거야. 지금 있는 함께함이란 그저 무리 짓기일 뿐이야. 사람들은 서로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서로에게로 달아나는 거야 — 나리들은 나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학자는 학자끼리! 그런데 왜 무서워할까? 사람은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했을 때만 무서워해. 그들이 무서워하는 건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야. 자기 안의 알 수 없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공동체라니! 그들은 모두 제 삶의 법칙이 더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들이 낡은 판에 새겨진 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느껴. 그들의 종교도 그들의 도덕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에 맞지 않아. 백 년이 넘도록 유럽은 공부만 하고 공장만 지었어! 사람 하나를 죽이는 데 화약이 몇 그램 드는지는 정확히 알면서, 어떻게 신에게 기도하는지는 모르고, 한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법조차 몰라. 저런 학생 술집을 한번 봐! 아니면 부자들이 드나드는 놀이터를 보든지! 가망이 없어! — 이봐 싱클레어, 저 모든 것에서 밝은 것은 나올 수 없어. 저렇게 겁먹은 채 뭉치는 사람들은 두려움과 심술로 가득하고, 아무도 서로를 믿지 않아. 그들은 더는 이상이 아닌 이상에 매달리고, 새 이상을 세우는 사람은 누구든 돌로 쳐. 나는 다툼이 있으리라는 걸 느껴. 올 거야, 나를 믿어, 곧 올 거야! 물론 그게 세상을 「낫게」 하지는 않겠지. 노동자가 공장주를 때려죽이든,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에게 총을 쏘든, 주인이 바뀔 뿐이야. 그렇다고 헛되지는 않을 거야. 그건 오늘날 이상들이 값없다는 것을 드러낼 거고, 석기시대의 신들을 치우는 일이 있을 거야. 지금 이대로의 이 세계는 죽고 싶어 해, 무너지고 싶어 해. 그리고 그렇게 될 거야."

"그러면 그러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물었다.

"우리? 아, 어쩌면 우리도 함께 무너지겠지. 우리 같은 사람도 때려죽일 수 있으니까. 다만 그것으로 우리가 끝나지는 않아. 우리에게서 남는 것을 둘레로, 또는 살아남은 우리를 둘레로 미래의 뜻이 모일 거야. 우리 유럽이 한동안 기술과 학문의 장터로 소리쳐 덮어 버린 인류의 뜻이 드러날 거야. 그리고 그때 드러날 거야. 인류의 뜻은 언제 어디서도 오늘날의 공동체, 국가와 민족, 단체와 교회의 뜻과 같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자연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낱낱의 사람 안에 적혀 있어. 너와 내 안에. 그것은 예수 안에 적혀 있었고 니체 안에 적혀 있었어. 오직 이 흐름들만이 중요한데 — 물론 날마다 다르게 보일 수 있지 — 오늘날의 공동체가 무너지면 그것들에게 자리가 생길 거야."

우리는 늦은 시각에 강가의 어느 정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데미안이 말했다. "곧 우리 집에 와! 우리는 너를 몹시 기다리고 있어."

기뻐하며 나는 서늘해진 밤을 지나 먼 귀갓길을 걸었다. 여기저기서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떠들고 비틀거리며 도시를 지나갔다. 나는 그들의 우스운 즐거움과 내 외로운 삶 사이의 차이를 자주 느껴 왔다. 자주 무언가 빼앗긴 느낌으로, 자주 비웃음으로. 그러나 오늘처럼 고요와 은밀한 힘으로, 그것이 나와 얼마나 상관없는지, 저 세계가 나에게 얼마나 멀고 사라져 버린 것인지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고향 도시의 관리들이 떠올랐다. 나이 들고 점잖은 어른들이었는데, 그들은 술로 지새운 학창 시절의 기억에 복된 낙원의 유물처럼 매달렸고, 사라져 버린 학생 시절의 「자유」를 두고 시인이나 낭만주의자가 어린 시절에 바치는 것 같은 숭배를 바쳤다. 어디서나 같았다! 어디서나 그들은 「자유」와 「행복」을 어딘가 제 뒤에서 찾았다. 제 책임이 떠오를까 봐, 제 길로 오라는 재촉을 받을까 봐 겁이 나서였다. 몇 해 퍼마시고 흥청거리다가 그다음에는 기어들어 가 관청의 점잖은 나리가 되었다. 그렇다, 썩었다, 우리 쪽이 썩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의 어리석음은 다른 백 가지보다 덜 어리석고 덜 고약했다.

그러나 외진 내 집에 이르러 잠자리를 찾을 때는 이 모든 생각이 날아가 버렸고, 내 온 마음이 이날이 나에게 준 큰 약속에 기다리며 매달려 있었다. 내가 바라기만 하면 내일이라도 데미안의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이 술판을 벌이든 제 얼굴에 문신을 하든, 세계가 썩어 제 몰락을 기다리든 —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오직 내 운명이 새로운 그림으로 내 앞에 나서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아침 늦게까지 깊이 잤다. 새로운 날이 나에게 엄숙한 잔칫날로 밝아 왔다. 소년 시절의 성탄절 이후로 그런 날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속 깊은 데까지 들떠 있었으나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나에게 중요한 날이 밝았음을 느꼈고, 내 둘레의 세계가 달라져 기다리고 있고 뜻으로 가득하고 엄숙한 것을 보고 느꼈다. 조용히 흐르듯 내리는 가을비마저 아름다웠고, 고요했고, 진지하면서 기쁜 음악으로 가득한 잔칫날 같았다. 처음으로 바깥 세계가 내 속 세계와 맑게 어우러졌다 — 그럴 때가 영혼의 잔칫날이고, 그럴 때 살아 볼 만한 것이다. 어느 집도, 어느 진열창도, 골목의 어느 얼굴도 나를 거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마땅히 그래야 할 대로였으면서도 날마다 보는 익숙한 것의 빈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기다리는 자연이었고, 경외에 차서 운명 앞에 채비하고 서 있었다. 어린 사내아이였을 때 큰 명절 아침에, 성탄날과 부활절에 나는 세계를 그렇게 보았다. 이 세계가 아직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나는 내 안으로 들어가 사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저 바깥에 대한 감각이 끝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빛나는 빛깔을 잃는 것은 어린 시절을 잃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맞물려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영혼의 자유와 어른됨은 말하자면 그 고운 어른거림을 포기하는 값을 치러야 얻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나는 황홀하게 보았다. 이 모든 것이 그저 파묻히고 어두워졌을 뿐이며, 자유로워진 사람으로서, 어린 시절의 행복을 포기한 사람으로서도 세계가 빛나는 것을 보고 어린아이의 봄이 주는 살가운 떨림을 맛보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간밤에 막스 데미안과 헤어졌던 그 변두리 정원을 다시 찾은 시각이 왔다. 비에 젖어 잿빛이 된 높은 나무들 뒤에 가려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환하고 살기 좋아 보였고, 큰 유리벽 뒤에는 키 큰 화초가, 말끔한 창 뒤에는 그림과 책 줄이 늘어선 어두운 방 벽이 있었다. 대문은 곧바로 데워진 작은 홀로 이어졌고, 검은 옷에 흰 앞치마를 두른 말 없는 늙은 하녀가 나를 들여보내고 외투를 받아 들었다.

그는 나를 홀에 혼자 두었다. 나는 둘레를 둘러보았고, 곧바로 내 꿈 한복판에 있었다. 어두운 나무 벽 위쪽, 어느 문 위에 검은 액자에 끼워진 낯익은 그림 하나가 유리 아래 걸려 있었다. 세계의 껍질에서 몸을 떨쳐 나오는, 금빛 노란 새매 머리를 한 내 새였다. 사로잡힌 채 나는 서 있었다 — 내가 여태 하고 겪은 모든 것이 이 순간 답이자 이루어짐으로 나에게 돌아오기라도 하는 듯 가슴이 기쁘고도 아팠다. 번개처럼 수많은 그림이 내 마음 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문 아치 위에 오래된 돌 문장이 있던 고향의 아버지 집, 그 문장을 그리던 소년 데미안, 내 적 크로머의 못된 주술에 겁먹고 얽혀 들던 소년인 나 자신, 학생 방의 조용한 책상에서 제 그리움의 새를 그리며 제 실그물에 영혼이 뒤엉키던 젊은이인 나 자신 — 그리고 이 순간까지의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다시 울렸고, 내 안에서 그렇다고 인정받고 답을 얻고 옳다고 여겨졌다.

젖은 눈으로 나는 내 그림을 뚫어지게 보며 나 자신 안에서 읽고 있었다. 그러다 눈길이 아래로 내려갔다. 새 그림 아래 열린 문에 어두운 옷을 입은 큰 여자가 서 있었다. 그였다.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제 아들의 얼굴처럼 시간도 나이도 없고 혼이 깃든 의지로 가득한 얼굴에서, 아름답고 존귀한 그 여인이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이루어짐이었고, 그의 인사는 집으로 돌아옴을 뜻했다. 나는 잠자코 그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그가 단단하고 따뜻한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싱클레어 씨군요. 바로 알아보았어요. 잘 오셨습니다!"

그 목소리는 낮고 따뜻했다. 나는 그것을 달콤한 포도주처럼 마셨다. 그리고 이제 고개를 들어 그 고요한 얼굴을, 검고 헤아릴 수 없는 눈을, 싱싱하고 무르익은 입을, 그 표를 지닌 넓고 기품 있는 이마를 들여다보았다.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내가 그에게 말하며 그의 손에 입 맞추었다. "저는 평생 내내 길 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이제 집에 왔습니다."

그가 어머니처럼 웃었다.

"집에는 결코 이르지 못해요."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벗이 된 길들이 만나는 곳에서는 온 세상이 한 시간쯤 고향처럼 보이지요."

그는 내가 그에게 오는 길에서 느낀 것을 말로 옮겼다. 그의 목소리도 그의 말도 제 아들의 것과 몹시 닮았으면서도 아주 달랐다. 모든 것이 더 무르익고 더 따뜻하고 더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예전에 막스가 누구에게도 소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어머니도 다 자란 아들을 둔 어머니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과 머리카락 위에 감도는 기운은 그토록 젊고 달았으며, 그 금빛 살결은 그토록 팽팽하고 주름이 없었고, 입은 그토록 피어 있었다. 내 꿈에서보다 더 여왕 같은 모습으로 그가 내 앞에 서 있었고, 그의 가까움은 사랑의 행복이었고, 그의 눈길은 이루어짐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내 운명이 나에게 보여 주는 새로운 그림이었다. 더는 엄하지 않고, 더는 외롭게 만들지 않고, 그렇다, 무르익고 즐거움에 찬 그림이었다! 나는 아무 결심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맹세도 하지 않았다 — 나는 하나의 목적지에, 길의 높은 자리에 이르렀고, 거기서는 앞길이 멀고 훌륭하게 보였다. 약속의 땅을 향해 뻗어 나가고, 가까운 행복의 나무 꼭대기가 그늘을 드리우고, 온갖 즐거움의 가까운 정원이 서늘하게 해 주는 길이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이 여인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그 목소리를 마시고 그 가까움을 들이쉬는 것만으로 복되었다. 그가 나에게 어머니가 되든 연인이 되든 여신이 되든 — 그저 거기 있어 주기만 한다면! 그저 내 길이 그의 길에 가깝기만 하다면!

그가 내 새매 그림 쪽을 가리켰다.

"이 그림보다 우리 막스를 더 기쁘게 한 것은 없었어요." 그가 골똘히 말했다. "나도 그랬고요.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그림이 오자 당신이 우리에게 오는 길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당신이 어린 소년이던 시절에 어느 날 내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이렇게 말했어요. 이마에 표를 지닌 아이가 하나 있는데 그 애는 내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그게 당신이었어요. 당신은 쉽지 않았지만 우리는 당신을 믿었어요. 언젠가 방학에 집에 왔을 때 당신은 막스와 다시 마주쳤지요. 그때 당신은 열여섯쯤이었고요. 막스가 나에게 그 이야기를 했는데 —"

내가 말을 끊었다. "아, 그 이야기를 하셨군요! 그때가 제 가장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네, 막스가 나에게 말했어요. 이제 싱클레어 앞에 가장 어려운 일이 놓여 있다고. 그가 다시 한번 공동체로 달아나려 하고 있고 술집 친구까지 되었지만 그것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그의 표가 가려져 있지만 그것이 그를 남몰래 태우고 있다고. — 그렇지 않았나요?"

"아 예, 그랬습니다, 꼭 그랬습니다. 그러다 베아트리체를 찾았고, 그러고 나서 마침내 다시 인도자가 왔습니다. 피스토리우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제 소년 시절이 왜 그토록 막스에게 매여 있었는지, 왜 제가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또렷이 알게 되었습니다. 부인 — 어머니, 저는 그때 자주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길이란 누구에게나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까?"

그가 공기처럼 가볍게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태어난다는 건 언제나 어려워요. 알잖아요, 새는 알에서 나오느라 애를 쓰지요. 돌이켜 보고 물어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기도 하지 않았나요?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고 있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려웠습니다." 내가 잠결처럼 말했다. "그 꿈이 올 때까지는 어려웠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꿰뚫어 보았다.

"그래요, 제 꿈을 찾아야 해요. 그러면 길이 쉬워지지요. 그렇지만 영원히 이어지는 꿈은 없어요. 꿈은 저마다 새 꿈에게 자리를 내주고, 어느 꿈도 붙들어 두려 해서는 안 돼요."

나는 깊이 소스라쳤다. 이것이 벌써 경고인가? 이것이 벌써 밀어냄인가?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에게 이끌리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그 끝을 묻지 않을 채비가 되어 있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제 꿈이 얼마나 이어져야 하는지. 저는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그 새 그림 아래서 제 운명이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어머니처럼, 그리고 연인처럼. 저는 그 운명의 것이고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 꿈이 당신의 운명인 동안에는 그 꿈에 충실하세요." 그가 진지하게 확인해 주었다.

서글픔이 나를 붙들었고, 이 홀린 시각에 죽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나를 붙들었다. 나는 눈물이 — 얼마나 한없이 오래 나는 울지 않았던가! — 걷잡을 수 없이 내 안에서 솟아올라 나를 덮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세차게 그에게서 몸을 돌려 창가로 가서 눈먼 눈으로 화분 너머를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차분하게 울렸으면서도 포도주가 가장자리까지 찬 잔처럼 다정함으로 가득했다.

"싱클레어, 당신은 아이로군요! 당신 운명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이 충실하게 있기만 하면 언젠가 그것이 당신 꿈 그대로 온전히 당신 것이 될 거예요."

나는 나를 다잡고 다시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에게는 벗이 몇 있어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주 적은, 아주 가까운 벗들인데 그들은 나를 에바 부인이라고 불러요. 당신도 원한다면 그렇게 부르세요."

그가 나를 문으로 데려가 문을 열고 정원 쪽을 가리켰다. "막스는 저 바깥에 있을 거예요."

높은 나무들 아래서 나는 얼떨떨하고 뒤흔들린 채 서 있었다. 여느 때보다 깨어 있는 것인지 꿈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지에서 빗방울이 가만가만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은 강기슭을 따라 멀리 뻗어 있었다. 마침내 나는 데미안을 찾아냈다. 그는 열린 정자에서 웃통을 벗은 채 매달아 놓은 모래 자루 앞에서 권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데미안은 훌륭해 보였다. 넓은 가슴, 단단한 사내다운 머리, 팽팽한 근육으로 들어 올린 팔이 강하고 야무졌으며, 몸놀림이 허리와 어깨와 팔 관절에서 뛰노는 샘처럼 솟아 나왔다.

"데미안!" 내가 외쳤다.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그가 즐겁게 웃었다.

"연습하는 중이야. 그 작은 일본 사람한테 씨름 한판을 약속했거든. 그 친구는 고양이처럼 재빠르고 물론 그만큼 짓궂어. 그렇지만 나를 당해 내지는 못할 거야. 내가 그에게 진 빚이 아주 작은 창피 하나거든."

그가 셔츠와 웃옷을 걸쳤다.

"우리 어머니한테 벌써 갔었지?" 그가 물었다.

"응. 데미안, 너 어쩌면 그렇게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니! 에바 부인이라니! 그 이름이 그분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려.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어머니 같으셔."

그가 한순간 골똘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그 이름을 알았어? 자랑스러워해도 돼, 친구! 어머니가 첫 시간에 그 이름을 말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그날부터 나는 아들처럼 형제처럼, 그러면서 사랑하는 사람처럼 그 집을 드나들었다. 등 뒤로 대문을 닫을 때면, 아니 멀리서 정원의 높은 나무들이 떠오르는 것을 볼 때부터 나는 넉넉하고 행복했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고, 바깥에는 거리와 집과 사람과 기관과 도서관과 강의실이 있었다 — 그러나 이 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고, 여기에는 옛이야기와 꿈이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결코 세상과 닫아걸고 산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생각과 이야기 속에서 자주 세상 한복판에 살았고, 다만 다른 마당에서 그랬을 뿐이다. 우리는 대다수 사람들과 경계로 갈린 것이 아니라 다른 보는 방식으로 갈려 있었다. 우리 과업은 세상 안에서 하나의 섬을 이루는 것, 어쩌면 하나의 본보기가 되는 것, 어쨌든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오래 외로웠던 나는 완전한 홀로 있음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 가능한 공동체를 알게 되었다. 나는 다시는 행복한 이들의 식탁으로, 즐거운 이들의 잔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남들이 함께하는 것을 보아도 다시는 시샘이나 그리움이 나를 덮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그 표」를 지닌 이들의 비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표를 지닌 우리는 세상에게 야릇하게, 아니 미치고 위험하게 여겨질 만했다. 우리는 깨어난 사람이거나 깨어나는 사람이었고, 우리의 애씀은 점점 더 온전한 깨어 있음을 향했다. 반면 다른 이들의 애씀과 행복 찾기는 제 의견과 제 이상과 의무를, 제 삶과 행복을 점점 더 좁게 무리의 그것에 붙들어 매는 쪽을 향했다. 거기에도 애씀이 있었고 거기에도 힘과 큼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생각으로는, 표를 지닌 우리가 새것과 낱낱의 것과 앞으로 올 것을 향한 자연의 뜻을 나타냈다면, 다른 이들은 머무름의 뜻 속에서 살았다. 그들에게 인류는 — 우리처럼 그들도 인류를 사랑했다 — 지키고 보호해야 할 다 완성된 무엇이었다. 우리에게 인류는 우리 모두가 그리로 가는 중인 먼 미래였고, 그 그림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그 법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에바 부인과 막스와 나 말고도 우리 무리에는 가깝거나 멀게 아주 여러 종류의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더러는 남다른 길을 갔고 저마다 떨어진 목표를 세워 두었으며 남다른 의견과 의무에 매달렸다. 그 가운데는 점성술사와 카발라 학자가 있었고, 톨스토이 백작을 따르는 사람도 있었고, 온갖 여리고 겁 많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 새로운 분파를 따르는 사람들, 인도식 수행을 돌보는 사람들, 푸성귀만 먹는 사람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와 우리가 정신에서 함께 지닌 것이라고는, 저마다 남의 은밀한 삶의 꿈에 보내는 존중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더 가까운 이들은 인류가 지난날에 신들과 새로운 바람의 그림들을 찾아온 자취를 좇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연구는 자주 내 피스토리우스의 연구를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책을 가져왔고, 옛 언어의 글을 우리에게 옮겨 주었고, 옛 상징과 예식의 그림을 보여 주었으며, 여태 인류가 지녀 온 이상이란 모두 의식하지 못하는 영혼의 꿈에서 나온 것임을, 인류가 제 앞날의 가능성에 대한 예감을 더듬어 좇던 그 꿈에서 나온 것임을 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옛 세계의 놀랍고 머리가 천 개나 되는 신들의 뭉치를 지나 기독교의 돌아섬이 밝아 오는 데까지 훑었다. 외로운 경건한 이들의 고백을 알게 되었고, 민족에서 민족으로 옮겨 가는 종교의 변화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모은 모든 것에서 우리 시대와 오늘날 유럽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유럽은 엄청난 애씀으로 인류의 힘센 새 무기를 만들어 냈지만 끝내는 정신의 깊고 마침내 비명을 지르는 황폐함에 이르러 있었다. 온 천하를 얻고도 그 대가로 제 영혼을 잃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어떤 희망과 구원의 가르침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럽을 돌아서게 하려는 불교도가 있었고, 톨스토이를 따르는 이들이 있었고, 다른 신조들도 있었다. 좁은 무리의 우리는 귀를 기울였지만 이 가르침 가운데 어느 것도 상징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표를 지닌 우리에게 미래를 어떻게 꾸릴 것인가 하는 걱정은 맡겨져 있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어떤 신조도 어떤 구원의 가르침도 미리부터 죽고 쓸모없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이것만을 의무이자 운명으로 느꼈다. 우리 저마다가 그토록 온전히 저 자신이 되는 것, 제 안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씨앗에 그토록 온전히 맞갖게 되는 것,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가 무엇을 가져오든 우리가 그 모든 것에 채비되어 있도록 그 뜻대로 사는 것이었다.

말로 하든 하지 않든 우리 모두에게 느낌으로 또렷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태어남과 지금 것의 무너짐이 가깝고 이미 느껴진다는 것이. 데미안은 이따금 나에게 말했다. "올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야. 유럽의 영혼은 한없이 오래 묶여 있던 짐승이야. 그것이 풀려나면 첫 몸짓이 가장 사랑스럽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자꾸자꾸 거짓말로 덮고 마취해 온 영혼의 참된 곤경이 드러나기만 한다면 길이든 돌아가는 길이든 대수롭지 않아. 그때 우리 날이 올 거고, 그때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할 거야. 인도자나 새로운 입법자로서가 아니라 — 새 법을 우리는 더 겪지 못해 — 그보다는 기꺼이 하려는 자로서, 운명이 부르는 곳으로 함께 가서 거기 설 채비가 된 자로서 말이야. 봐, 사람은 누구나 제 이상이 위협받으면 믿을 수 없는 일도 할 채비가 되어 있어. 그런데 새로운 이상이, 어쩌면 위험하고 섬뜩한 새 자람의 몸짓이 문을 두드릴 때는 아무도 거기 없어. 그때 거기 있어서 함께 갈 몇 안 되는 사람이 우리일 거야. 그러라고 우리에게 표가 있는 거지 — 카인이 두려움과 미움을 불러일으키고 그때의 인류를 좁은 목가에서 위험한 넓은 데로 몰아내라고 표를 받았듯이. 인류의 걸음에 영향을 미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가 운명에 채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럴 힘이 있었고 그럴 수 있었어. 그건 모세와 부처에게 들어맞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에게도 들어맞아. 누가 어떤 물결을 섬기는지, 어느 극에서 다스려지는지는 그의 선택에 있지 않아. 비스마르크가 사회민주당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맞추었다면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겠지만 운명의 사람은 아니었을 거야. 나폴레옹도 카이사르도 로욜라도 다 그랬어! 이건 늘 생물학으로, 발달사로 생각해야 해! 지구 표면의 뒤바뀜이 물짐승을 뭍으로, 뭍짐승을 물로 던졌을 때, 새롭고 들어 본 적 없는 일을 해내고 새로운 맞춤으로 제 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운명에 채비된 개체들이었어. 그것이 전에 제 종에서 보수적이고 지키는 쪽으로 뛰어나던 개체들이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별종과 혁명가들이었는지 우리는 몰라. 그들은 채비되어 있었고, 그래서 제 종을 새로운 발달로 건너 구해 낼 수 있었어. 그건 우리가 알아. 그러니 우리도 채비되어 있으려는 거야."

이런 이야기 자리에 에바 부인이 자주 함께 있었지만 그 자신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제 생각을 말하는 우리 하나하나에게 듣는 사람이자 메아리였고, 믿음으로 가득하고 이해로 가득했으며, 마치 그 생각들이 모두 그에게서 나와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의 곁에 앉아 이따금 그 목소리를 듣고 그를 두른 무르익음과 영혼의 공기에 함께하는 것이 나에게는 행복이었다.

내 안에 무슨 변화가, 흐려짐이나 새로워짐이 일고 있으면 그는 곧바로 느꼈다. 나에게는 잠결에 꾼 꿈들이 그가 불어넣어 준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것을 자주 그에게 이야기했고, 그에게 그 꿈들은 알아들을 만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그가 맑은 느낌으로 따라가지 못할 야릇함이란 없었다. 한동안 나는 우리가 낮에 나눈 이야기를 본떠 만든 것 같은 꿈을 꾸었다. 온 세상이 들끓고 있고 내가 혼자서, 또는 데미안과 함께 팽팽하게 큰 운명을 기다리는 꿈이었다. 그 운명은 가려진 채였지만 어쩐지 에바 부인의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 그에게 뽑히느냐 내쳐지느냐, 그것이 운명이었다.

이따금 그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 꿈은 온전하지 않아요, 싱클레어. 가장 좋은 것을 잊으셨네요 —" 그러면 그것이 다시 떠올라, 내가 그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때로 나는 흡족하지 못하고 갈망에 시달렸다. 그를 팔에 안지 않고 곁에서 보고만 있는 것을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도 그는 곧바로 알아챘다. 언젠가 내가 며칠 동안 발을 끊었다가 넋이 나간 채 다시 오자 그가 나를 옆으로 데려가 말했다. "당신이 믿지 않는 바람에 자기를 내주어서는 안 돼요. 나는 당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요. 당신은 그 바람을 놓을 수 있거나, 아니면 그것을 온전히 옳게 바랄 수 있어야 해요. 언젠가 당신이 그 이루어짐을 제 안에서 온전히 확신하며 청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이루어짐도 거기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바라면서 그것을 다시 뉘우치고 거기서 겁을 내지요. 그것을 다 이겨 내야 해요. 당신에게 옛이야기를 하나 들려줄게요."

그러고서 그는 어느 별을 사랑한 젊은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바닷가에 서서 손을 뻗어 그 별에게 기도했고, 그 별을 꿈꾸었고, 제 생각을 그 별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별이 사람에게 안길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안다고 여겼다. 그는 이루어짐의 희망 없이 별 하나를 사랑하는 것을 제 운명으로 여겼고, 이 생각에서 단념과 말없이 충실한 괴로움으로 이루어진 삶의 시 한 편을 통째로 지어냈다. 그것이 자기를 낫게 하고 맑게 해 주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의 꿈은 모두 그 별을 향했다. 한번은 그가 다시 밤에 바닷가 높은 벼랑에 서서 그 별을 바라보며 그 별을 향한 사랑으로 타올랐다. 그리고 가장 큰 그리움의 한순간에 그는 몸을 던져 별을 향해 허공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뛰어드는 그 순간에도 그는 번개처럼 생각했다. 이건 역시 될 수 없는 일이야! 그러고는 저 아래 바닷가에 떨어져 부서졌다. 그는 사랑할 줄 몰랐던 것이다. 뛰는 그 순간에 이루어짐을 굳게 확신하며 믿을 영혼의 힘이 있었더라면 그는 위로 날아올라 그 별과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사랑은 빌어서는 안 돼요." 그가 말했다. "요구해서도 안 되고요. 사랑은 제 안에서 확신에 이를 힘이 있어야 해요.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리지 않고 끌어당기지요. 싱클레어, 당신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그것이 언젠가 나를 끌어당기면 그때는 내가 갈 거예요. 나는 선물을 주고 싶지 않아요. 나는 얻어지고 싶어요."

또 한번은 그가 나에게 다른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온전히 제 영혼 속으로 물러나 사랑으로 타 버릴 것 같았다. 세상이 그에게서 사라졌고, 그는 푸른 하늘도 초록 숲도 더는 보지 못했고, 시냇물도 그에게 소리 내지 않았고, 하프도 그에게 울리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가라앉아 그는 가난하고 비참해졌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자랐고, 그는 사랑하는 그 아름다운 여인을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 스러지고자 했다. 그때 그는 제 사랑이 자기 안의 다른 모든 것을 태워 버린 것을 느꼈고, 그 사랑이 힘차져서 끌어당기고 또 끌어당겼으며, 그 아름다운 여인은 따라올 수밖에 없어 그에게 왔다. 그는 그를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앞에 섰을 때 그는 온통 달라져 있었고, 그는 자기가 잃어버렸던 온 세상을 제게로 끌어당겼음을 떨면서 느끼고 보았다. 세상이 그 앞에 서서 그에게 자기를 내주었다. 하늘도 숲도 시내도 모두 새로운 빛깔로 싱그럽고 훌륭하게 그를 맞으러 왔고, 그의 것이 되었고, 그의 말을 했다. 그리고 여인 하나를 얻는 대신 그는 온 세상을 가슴에 품었으며, 하늘의 별 하나하나가 그 안에서 타오르며 그의 영혼을 지나 기쁨을 반짝였다. — 그는 사랑했고 그러면서 저 자신을 찾아냈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랑하면서 저 자신을 잃는다.

에바 부인을 향한 내 사랑은 내 삶의 유일한 내용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날마다 다르게 보였다. 이따금 나는 내 본성이 끌려가 애쓰는 대상이 그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는 다만 내 속의 상징일 뿐이며 나를 더 깊이 나 자신 속으로 이끌려 할 뿐이라고 분명히 느끼는 듯했다. 나는 자주 그에게서 나를 흔들던 타는 물음에 대한 내 무의식의 답처럼 들리는 말을 들었다. 그러다가 또 그의 곁에서 몸의 갈망으로 타올라 그가 만졌던 물건에 입 맞추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차차 몸의 사랑과 몸 아닌 사랑이, 현실과 상징이 서로 겹쳐졌다. 그러다 집에 있는 내 방에서 고요하고 살가운 마음으로 그를 생각하다가 그의 손을 내 손에, 그의 입술을 내 입술에 느끼는 듯할 때가 있었다. 또는 그의 곁에서 그의 얼굴을 보고 그와 이야기하고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것이 진짜인지 꿈이 아닌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나는 사랑을 어떻게 오래도록 죽지 않게 지닐 수 있는지 예감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것이 에바 부인의 입맞춤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무르익고 향기로운 온기를 웃어 보내면, 내 안에서 한 걸음 나아갔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나에게 중요하고 운명인 모든 것이 그의 모습을 띨 수 있었다. 그는 내 생각 하나하나로 바뀔 수 있었고, 생각 하나하나가 그로 바뀔 수 있었다.

부모 곁에서 지낸 성탄절 명절을 나는 두려워했다. 에바 부인에게서 떨어져 두 주를 사는 것이 괴로우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롭지 않았고, 집에 있으면서 그를 생각하는 것이 훌륭했다. H.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이 확신과 그의 몸의 있음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누리려고 이틀을 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하나가 되는 일이 새로운 비유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꿈도 꾸었다. 그는 바다였고 나는 흘러 그리로 들었다. 그는 별이었고 나 자신도 별이 되어 그에게로 가는 중이었으며, 우리는 만나 서로에게 끌리는 것을 느꼈고, 함께 머물러 영원토록 복되게 가깝고 소리 나는 궤도로 서로의 둘레를 돌았다.

이 꿈을 나는 그를 처음 다시 찾아갔을 때 이야기했다.

"아름다운 꿈이네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것을 참되게 만드세요!"

이른 봄에 내가 결코 잊지 못한 날이 하나 왔다. 홀에 들어서니 창 하나가 열려 있었고 미지근한 바람이 히아신스의 무거운 냄새를 방 안으로 굴려 왔다. 아무도 보이지 않기에 나는 계단을 올라 막스 데미안의 서재로 갔다. 나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여느 때 버릇대로 부르는 소리를 기다리지 않고 들어섰다.

방은 어두웠고 커튼이 모두 쳐져 있었다. 막스가 화학 실험실을 차려 둔 작은 옆방 문이 열려 있었다. 거기서 비구름을 뚫고 비치는 봄볕의 밝고 흰 빛이 들어왔다. 나는 아무도 없으려니 여기고 커튼 하나를 젖혔다.

그때 나는 커튼 친 창 가까이 걸상에 막스 데미안이 웅크리고 앉아 야릇하게 달라진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았고, 번개처럼 한 느낌이 나를 관통했다. 이건 전에 이미 겪은 일이다! 그는 두 팔을 꼼짝하지 않고 늘어뜨린 채 손을 무릎에 얹고 있었고, 얼마쯤 앞으로 숙인 얼굴은 눈을 뜬 채 보고 있지 않았고 죽어 있었으며, 눈동자에는 유리 조각에서처럼 작고 날카로운 빛이 죽은 듯 반짝였다. 창백한 얼굴은 제 안에 잠겨 엄청난 굳음 말고는 아무 표정이 없었고, 신전 문에 걸린 아주 오래된 짐승 가면 같아 보였다. 그는 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기억이 소름처럼 나를 훑었다 — 이렇게, 꼭 이렇게 나는 그를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여러 해 전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그때도 눈이 그렇게 안쪽을 응시하고 있었고, 두 손이 그렇게 생명 없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파리 한 마리가 그의 얼굴 위를 걸어갔다. 그리고 그때, 여섯 해쯤 전에 그는 꼭 이만큼 늙고 이만큼 시간 밖에 있어 보였으며, 오늘 그 얼굴의 주름 하나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두려움에 덮쳐 나는 조용히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홀에서 에바 부인과 마주쳤다. 그는 창백했고 지쳐 보였는데 그에게서 보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림자가 창을 스쳐 지나갔고, 날카롭던 흰 볕이 갑자기 사라졌다.

"막스에게 갔었습니다." 내가 얼른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자는 건지 잠긴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에도 한 번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를 깨우지는 않았지요?" 그가 얼른 물었다.

"예. 그는 제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곧 다시 나왔습니다. 에바 부인, 말씀해 주십시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그가 손등으로 이마를 쓸었다.

"마음 놓으세요, 싱클레어. 그에게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는 물러가 있는 거예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가 일어나 정원으로 나갔다.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도 그랬다. 나는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그래서 홀을 오락가락하며 정신을 흐리게 하는 히아신스 향을 맡고, 문 위의 내 새 그림을 뚫어지게 보며, 그날 아침 그 집을 채우고 있던 야릇한 그림자를 답답하게 들이쉬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에바 부인이 곧 돌아왔다. 검은 머리카락에 빗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그가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에게 지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 곁으로 가서 몸을 숙여 그 머리카락의 물방울에 입 맞추었다. 그의 눈은 맑고 고요했지만 그 물방울은 나에게 눈물 맛이 났다.

"제가 가서 그를 보고 올까요?" 내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세요, 싱클레어!" 그가 제 안의 주술을 깨뜨리기라도 하려는 듯 큰 소리로 타일렀다. "이제 가세요. 나중에 다시 오세요. 지금은 당신과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나는 나와서 집과 도시를 벗어나 산 쪽으로 달렸다. 비스듬한 가는 비가 나를 맞으러 왔고, 구름은 겁먹은 듯 무거운 압박 아래 낮게 흘러갔다. 아래쪽에는 바람이 거의 없었는데 높은 데서는 폭풍이 이는 듯했고, 여러 번 잠깐씩 볕이 강철빛 잿빛 구름을 뚫고 창백하고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그때 성긴 노란 구름 한 덩이가 하늘을 가로질러 밀려와 잿빛 벽에 부딪혀 쌓였고, 바람이 몇 초 만에 그 노랑과 파랑으로 하나의 그림을, 거대한 새 한 마리를 빚어냈다. 그 새는 푸른 뒤엉킴에서 몸을 떨쳐 내어 넓은 날갯짓으로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폭풍 소리가 들렸고, 우박 섞인 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매질당하는 들판 위로 짧고 믿기 어려울 만큼 소름 끼치게 울리는 천둥이 우르릉 갈라졌고, 곧이어 다시 햇살이 뚫고 나와 가까운 산의 갈색 숲 위에서 창백한 눈이 흐릿하고 실제 같지 않게 빛났다.

몇 시간 뒤 젖고 바람에 시달린 채 돌아오자 데미안이 직접 대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제 방으로 올라갔다. 실험실에는 가스 불꽃이 타고 있었고 종이가 널려 있었다. 그는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앉아." 그가 청했다. "피곤하겠구나. 날씨가 고약했지. 밖에 꽤 있었던 게 보인다. 차가 곧 올 거야."

"오늘 무슨 일이 있어." 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깟 뇌우 때문만은 아닐 거야."

그가 살피듯 나를 보았다.

"뭘 봤어?"

"응. 구름 속에서 한순간 또렷하게 그림 하나를 봤어."

"무슨 그림?"

"새였어."

"새매? 그거였어? 네 꿈의 새?"

"응, 내 새매였어. 노랗고 거대했고 검푸른 하늘 속으로 날아 들어갔어."

데미안이 깊이 숨을 내쉬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늙은 하녀가 차를 가져왔다.

"들어, 싱클레어. — 내 생각엔 네가 그 새를 우연히 본 게 아닐 것 같은데?"

"우연히? 그런 걸 우연히 보나?"

"그래, 아니지. 그건 무언가를 뜻해. 뭔지 알겠어?"

"아니. 그저 그것이 뒤흔들림을, 운명의 한 걸음을 뜻한다고 느낄 뿐이야. 그게 우리 모두에게 걸린 일이라고 생각해."

그가 세차게 오락가락했다.

"운명의 한 걸음!"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도 간밤에 같은 꿈을 꿨어. 그리고 어머니가 어제 같은 것을 말하는 예감을 하셨고. — 나는 사다리를 올라가는 꿈을 꿨어. 나무줄기인지 탑인지에 걸린 사다리를. 꼭대기에 올라서니 온 땅이 보였는데, 큰 벌판이었고 도시와 마을이 불타고 있었어. 아직 다 이야기할 수는 없어. 나에게도 아직 다 또렷하지 않거든."

"그 꿈을 너에 관한 것으로 풀이해?" 내가 물었다.

"나에 관한 거냐고? 당연하지. 자기와 상관없는 것을 꾸는 사람은 없어. 그렇지만 나 혼자에게만 걸린 일은 아니야, 네 말이 맞아. 나는 내 영혼 안의 움직임을 알려 주는 꿈과, 인류 전체의 운명이 어렴풋이 비치는 아주 드문 다른 꿈을 꽤 정확히 가려. 그런 꿈은 드물게 꾸었고, 그중에 예언이었고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꿈은 하나도 없었어. 풀이란 너무 불확실하니까. 그렇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나 혼자에게만 걸린 것이 아닌 무언가를 내가 꿨다는 것을. 이 꿈은 전에 꾼 다른 꿈들에 이어지고 그것을 이어 가는 꿈이거든. 싱클레어, 내가 너에게 이미 말한 그 예감들은 바로 이 꿈들에서 온 거야. 우리 세계가 꽤 썩었다는 건 우리도 알지. 그것만으로는 그 몰락이니 뭐니를 예언할 까닭이 못 돼. 그런데 나는 여러 해 전부터 꿈을 꿔 왔고, 거기서 나는 오래된 세계의 무너짐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헤아리거나 느끼거나 — 네 마음대로 불러도 좋아 — 아무튼 그렇게 느껴. 처음에는 아주 희미하고 먼 예감이었는데 점점 또렷하고 세졌어. 아직도 나는 크고 무서운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고 그것이 나에게도 걸린 일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 싱클레어, 우리가 이따금 이야기하던 그것을 우리가 겪게 될 거야! 세계는 저를 새롭게 하려 해. 죽음 냄새가 나. 죽음 없이 오는 새것은 없어. —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해." 나는 놀라서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네 꿈의 나머지는 이야기해 줄 수 없어?" 내가 머뭇거리며 청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문이 열리고 에바 부인이 들어왔다.

"둘이 여기 앉아 있었군요! 얘들아, 설마 서글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는 싱그러워 보였고 더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데미안이 그에게 웃어 보였고, 그는 겁먹은 아이들에게 오는 어머니처럼 우리에게 왔다.

"서글퍼하는 건 아니에요, 어머니. 그저 이 새로운 징조를 두고 좀 수수께끼를 풀어 보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지요. 올 것은 갑자기 와 있을 거고, 그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알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내 마음은 좋지 않았고, 작별하고 홀을 혼자 지나갈 때 히아신스 향이 시들고 밍밍하고 주검 같게 느껴졌다. 우리 위로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져 있었다.

종말의 시작

나는 여름 학기까지 H.에 머무는 것을 관철시켰다. 우리는 이제 집 안이 아니라 거의 늘 강가 정원에 있었다. 씨름에서 정말로 진 그 일본 사람은 떠났고, 톨스토이를 따르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말을 한 마리 두고 날마다 끈기 있게 탔다. 나는 자주 그의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다.

이따금 나는 내 삶의 평화로움에 놀랐다. 나는 그토록 오래 혼자 있는 데에, 단념하는 데에, 내 괴로움과 힘겹게 뒹구는 데에 익숙해져 있어서, H.에서의 이 몇 달이 나에게는 꿈의 섬처럼 여겨졌다. 그 섬에서 나는 홀린 채 편안히 아름답고 기분 좋은 것과 느낌 속에서만 살아도 되었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던 그 새롭고 더 높은 공동체의 앞소리임을 예감했다. 그러면서 이따금 이 행복 위로 깊은 서글픔이 나를 붙들었다. 그것이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넉넉함과 안락 속에서 숨 쉬는 것은 나에게 정해진 몫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괴로움과 쫓김이 필요했다. 나는 느꼈다. 언젠가 나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그림에서 깨어나 다시 혼자 서게 되리라고. 아주 혼자, 다른 이들의 차가운 세계에, 나에게는 외로움이나 싸움만 있고 평화도 함께 사는 일도 없는 그곳에.

그러면 나는 곱절의 다정함으로 에바 부인의 곁에 파고들었다. 내 운명이 아직도 이 아름답고 고요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기뻤다.

여름 몇 주가 빠르고 가볍게 지나갔고 학기가 이미 저물고 있었다. 작별이 곧 닥쳐올 참이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해서는 안 되었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나비가 꿀 있는 꽃에 매달리듯 그 아름다운 날들에 매달렸다. 이제 이것이 내 행복한 시절이었고, 내 삶의 첫 이루어짐이었으며, 내가 그 언약에 받아들여진 일이었다 — 그러면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나는 다시 싸워 헤쳐 나가고, 그리움에 괴로워하고, 꿈을 꾸고, 혼자일 것이었다.

그런 어느 날 이 예감이 너무나 세게 나를 덮쳐, 에바 부인을 향한 내 사랑이 갑자기 아프게 타올랐다. 하느님,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나는 그를 더 보지 못하고, 집 안을 지나는 그 단단하고 좋은 발소리를 더 듣지 못하고, 내 책상에서 그의 꽃을 더 찾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이루었던가? 나는 그를 얻는 대신, 그를 두고 싸워 그를 영영 내 쪽으로 채가는 대신 꿈만 꾸고 안락에 겨워 흔들거렸다! 참된 사랑에 대해 그가 나에게 한 모든 말이 떠올랐다. 백 마디의 곱고 일깨우는 말, 백 마디의 나직한 이끎, 어쩌면 약속들이 — 나는 그것으로 무엇을 했던가? 아무것도! 아무것도!

나는 내 방 한복판에 서서 내 온 의식을 모으고 에바를 생각했다. 나는 내 영혼의 힘을 그러모아 그가 내 사랑을 느끼게 하고 그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그가 와서 내 품을 그리워해야 했고, 내 입맞춤이 그 무르익은 사랑의 입술을 물리지 않고 파고들어야 했다.

나는 서서 손가락과 발끝부터 차가워질 때까지 나를 팽팽히 조였다. 힘이 나에게서 나가는 것을 느꼈다. 몇 순간 동안 내 안에서 무언가가 단단하고 좁게 오그라들었다. 밝고 서늘한 무엇이었다. 한순간 나는 가슴에 수정 하나를 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것이 내 자아임을 알았다. 그 차가움이 가슴까지 올라왔다.

그 무서운 조임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무언가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죽도록 지쳐 있었지만, 에바가 타오르며 황홀하게 방으로 들어서는 것을 볼 채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말발굽 소리가 긴 거리를 두드리며 다가와 가깝고 딱딱하게 울리다가 갑자기 멎었다. 나는 창가로 뛰어갔다. 아래에서 데미안이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나는 뛰어 내려갔다.

"무슨 일이야, 데미안?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몹시 창백했고, 땀이 이마 양옆으로 뺨을 타고 흘렀다. 그는 달아오른 말의 고삐를 정원 울타리에 매고 내 팔을 잡아 함께 거리를 내려갔다.

"너 벌써 뭔가 알고 있어?"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데미안이 내 팔을 눌러 잡고 어둡고 딱해하는 야릇한 눈길로 나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래, 이제 시작이야. 러시아와 크게 긴장이 있다는 건 너도 알지 —"

"뭐? 전쟁이 나? 나는 그런 건 한 번도 믿지 않았는데."

그는 가까이에 아무도 없는데도 나직이 말했다.

"아직 선포되진 않았어. 그렇지만 전쟁이 나. 틀림없어. 그동안은 그 일로 너를 성가시게 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나는 새로운 조짐을 세 번 보았어. 그러니까 세상의 종말도, 지진도, 혁명도 아니야. 전쟁이야. 그게 어떻게 들이닥치는지 너도 보게 될 거야!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황홀이 될 거야. 벌써 지금부터 다들 한판 붙을 생각에 기뻐하고 있어. 그만큼 삶이 밍밍해진 거지. — 그렇지만 싱클레어, 너도 보게 될 거야, 이건 시작일 뿐이야. 어쩌면 큰 전쟁이 될 거야, 아주 큰 전쟁이. 그렇지만 그것마저 시작일 뿐이야. 새것이 시작되는 거고, 옛것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그 새것은 끔찍할 거야.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당황했다. 그 모든 것이 아직 낯설고 있을 법하지 않게 들렸다.

"모르겠어 — 너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동원령이 내리는 대로 나는 입대해. 나는 소위야."

"네가? 그런 건 한마디도 몰랐는데."

"응, 그것도 내가 맞춘 것 가운데 하나였어. 알잖아, 나는 밖으로 눈에 띄는 걸 좋아한 적이 없고 오히려 반듯해 보이려고 늘 좀 지나치게 해 왔지. 내 생각엔 여드레쯤이면 전선에 있을 거야 —"

"맙소사 —"

"이봐, 그걸 감상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돼. 살아 있는 사람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하는 게 나에게도 물론 즐거울 리 없지만 그건 곁가지일 거야. 이제 우리 하나하나가 그 큰 바퀴 속으로 들어가게 돼. 너도. 너도 틀림없이 징집될 거야."

"그럼 너희 어머니는, 데미안?"

그제야 나는 십오 분 전에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는가! 나는 가장 달콤한 그림을 불러내려고 온 힘을 그러모았는데, 이제 운명이 갑자기 위협하듯 소름 끼치는 가면을 쓰고 나를 새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아, 어머니는 걱정할 것 없어. 안전하셔. 오늘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안전하셔. — 너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하니?"

"알고 있었어, 데미안?" 그가 환하고 아주 후련하게 웃었다.

"이 어린애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 우리 어머니를 에바 부인이라고 부르면서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어.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된 거야? 너 오늘 어머니를 불렀거나 나를 불렀지?"

"응, 불렀어 — — 에바 부인을 불렀어."

"어머니가 그걸 느끼셨어. 갑자기 나를 보내면서 너에게 가 보라고 하셨어. 마침 내가 러시아 소식을 말씀드린 참이었는데."

우리는 돌아섰고 더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풀어 올라탔다.

위층 내 방에 와서야 나는 내가 얼마나 지쳤는지를 느꼈다. 데미안의 소식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서의 그 조임 때문이 훨씬 컸다. 그러나 에바 부인이 나를 들은 것이다! 나는 내 생각으로 그의 마음에 닿았다. 그가 직접 왔을 것이다 — 만약 — —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야릇하고, 따지고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 전쟁이 온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자꾸자꾸 이야기하던 그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것을 그토록 많이 미리 알고 있었다. 이제 세상의 흐름이 더는 어딘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지 않고 갑자기 우리 심장 한복판을 지난다는 것이, 모험과 사나운 운명이 우리를 부른다는 것이, 그리고 이제 또는 곧 세상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세상이 저를 바꾸려 하는 순간이 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야릇한가. 데미안 말이 옳았다. 그것을 감상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다. 다만 묘한 것은, 그토록 외로운 일이던 「운명」을 이제 그토록 많은 사람과, 온 세상과 함께 겪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나는 채비되어 있었다. 저녁에 도시를 지나가는데 온갖 구석이 큰 들뜸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어디서나 「전쟁」이라는 말!

나는 에바 부인의 집으로 갔고 우리는 정자에서 저녁을 먹었다. 손님은 나뿐이었다. 아무도 전쟁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늦은 시각, 내가 떠나기 직전에 에바 부인이 말했다. "싱클레어, 오늘 나를 불렀지요. 내가 왜 직접 가지 않았는지 당신도 알 거예요. 그렇지만 잊지 마세요. 당신은 이제 그 부름을 알아요. 표를 지닌 누군가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다시 부르세요!"

그가 일어나 정원의 어스름을 앞서 걸어갔다. 그 비밀스러운 이가 크고 기품 있게 말없는 나무들 사이를 걸었고, 그 머리 위에서 수많은 별이 작고 여리게 반짝였다.

이제 끝에 이른다. 일은 빠르게 제 길을 갔다. 곧 전쟁이 났고, 은회색 외투를 두른 군복 차림으로 기이하게 낯설어진 데미안이 떠나갔다. 나는 그의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다 드렸다. 곧 나도 그에게 작별을 했다. 그가 내 입에 입 맞추고 한순간 나를 제 가슴에 안았으며, 그 큰 눈이 가까이서 단단히 내 눈 속으로 타올랐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형제가 된 듯했다. 그들은 조국과 명예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이었고, 그들 모두가 한순간 그 가리지 않은 얼굴을 들여다본 것이었다. 젊은 남자들이 병영에서 나와 기차에 올랐고, 나는 많은 얼굴에서 표를 하나 보았다 — 우리 것은 아닌 — 사랑과 죽음을 뜻하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표였다. 나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안겼고, 그것을 알아들었고 기꺼이 되갚았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도취에서였지 운명의 뜻에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도취는 거룩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운명의 눈을 그 짧고 뒤흔드는 눈길로 들여다본 데서 온 것이었다.

내가 전선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거의 겨울이었다.

처음에 나는 총격이 주는 자극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실망했다. 전에 나는 왜 사람이 어떤 이상을 위해 사는 일이 그토록 지극히 드문가를 많이 생각했다. 이제 나는 많은 사람이, 아니 모든 사람이 어떤 이상을 위해 죽을 수 있음을 보았다. 다만 그것이 개인의 이상, 자유로운 이상, 스스로 고른 이상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함께 나눈 이상, 물려받은 이상이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나는 내가 사람들을 낮추어 보았음을 알았다. 복무와 함께 겪는 위험이 그들을 아무리 똑같은 꼴로 만들어도, 나는 살아 있는 이든 죽어 가는 이든 많은 사람이 운명의 뜻에 훌륭하게 다가서는 것을 보았다. 많은 사람이, 아주 많은 사람이 돌격할 때만이 아니라 언제나 그 단단하고 먼, 얼마쯤 홀린 듯한 눈길을 하고 있었다. 목표라고는 모르고 엄청난 것에 온전히 자기를 내주는 눈길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여기든 — 그들은 채비되어 있었고, 쓸모가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미래가 빚어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전쟁과 영웅다움에, 명예와 그 밖의 낡은 이상에 아무리 굳게 맞춰진 듯 보여도, 사람다움을 내세우는 목소리가 아무리 멀고 있을 법하지 않게 들려도, 그것은 모두 겉면일 뿐이었다. 전쟁의 겉으로 드러난 정치적 목표를 묻는 일이 겉면에 머물렀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깊은 데서는 무언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다움 같은 것이. 내가 볼 수 있었던 많은 이들이, 그중 더러는 내 곁에서 죽어 갔는데, 미움과 노여움이, 때려죽임과 부숨이 그 대상에 매인 것이 아님을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대상도 목표와 마찬가지로 아주 우연한 것이었다. 근원의 감정은, 가장 사나운 것까지도 적을 겨눈 것이 아니었다. 그 피 어린 일은 다만 속에서, 제 안에서 갈라진 영혼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 미쳐 날뛰고 죽이고 부수고 죽고자 하는 영혼이었다.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고, 그 알은 세계였으며, 세계는 부서져야 했다.

우리가 차지한 농가 앞에서 나는 이른 봄밤에 보초를 서고 있었다. 힘없는 바람이 변덕스럽게 몰아쳤고, 높은 플랑드르 하늘 위로 구름의 군대가 달렸으며, 그 어딘가 뒤에 달의 기척이 있었다. 나는 온종일 안절부절못했고 무슨 걱정인지가 나를 흔들었다. 이제 어두운 초소에서 나는 여태 내 삶의 그림들을, 에바 부인을, 데미안을 살갑게 생각했다. 나는 포플러에 기대 서서 움직이는 하늘을 뚫어지게 보았고, 그 남몰래 떨리는 밝음들이 곧 크고 솟구치는 그림의 이어짐이 되었다. 내 맥박이 야릇하게 가늘어진 것에서, 바람과 비에 무디어진 살갗에서, 반짝이는 속의 깨어 있음에서 나는 어떤 인도자가 내 둘레에 있음을 느꼈다.

구름 속에 큰 도시 하나가 보였고 거기서 수백만 사람이 쏟아져 나와 떼를 지어 넓은 들판으로 퍼졌다. 그 한복판으로 힘찬 신의 모습이 걸어 들어왔다. 머리카락에 반짝이는 별을 달고 산맥처럼 크며 에바 부인의 이목구비를 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행렬이 거대한 동굴로 들어가듯 그 안으로 사라져 없어졌다. 그 여신이 땅바닥에 웅크렸고, 그 이마의 표가 환하게 어른거렸다. 어떤 꿈이 그를 사로잡은 듯 그는 눈을 감았고 그 큰 얼굴이 아픔으로 일그러졌다. 갑자기 그가 높이 소리를 질렀고, 그 이마에서 별들이 튀어나왔다. 수천 개의 빛나는 별이 훌륭한 활과 반원을 그리며 검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 별 가운데 하나가 맑은 소리를 내며 곧장 나를 향해 달려와 나를 찾는 듯했다. — 그러다 그것이 울부짖으며 천 개의 불꽃으로 터졌고, 무언가가 나를 위로 채올렸다가 다시 땅에 내던졌으며, 우레 같은 소리로 세계가 내 위로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은 포플러 가까이에서 흙에 덮인 채 상처투성이인 나를 찾아냈다.

나는 어느 지하실에 누워 있었고 머리 위에서 대포가 웅웅거렸다. 나는 어느 수레에 누워 텅 빈 들판을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대개 잠들어 있거나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깊이 잠들수록 무언가가 나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나를 다스리는 어떤 힘을 내가 따르고 있다는 것을 더 세게 느꼈다.

나는 어느 외양간 짚 위에 누워 있었고 어두웠으며 누가 내 손을 밟았다. 그러나 내 속은 더 나아가려 했고 무언가가 나를 더 세게 끌어냈다. 다시 나는 수레에 누웠고, 나중에는 들것인지 사다리인지에 누웠으며, 어딘가로 오라는 명령을 점점 더 세게 느꼈고, 마침내 거기 이르고 싶다는 밀침 말고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목적지에 이르렀다. 밤이었고 나는 온전히 깨어 있었으며, 방금까지도 내 안의 그 끌어당김과 밀침을 힘차게 느끼고 있었다. 이제 나는 어느 큰 방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워, 내가 불려 온 그곳에 와 있음을 느꼈다. 둘레를 둘러보니 내 요 바로 옆에 다른 요가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가 있었는데,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나를 보았다. 그는 이마에 그 표를 지니고 있었다.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말할 수 없었고 그도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는 그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그 위 벽에 걸린 등불 빛이 어려 있었다. 그가 나에게 웃어 보였다.

한없이 긴 시간 동안 그는 내 눈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얼굴을 나에게 가까이 밀어 와, 우리는 거의 닿을 듯했다.

"싱클레어!" 그가 속삭이며 말했다.

나는 그를 알아듣는다는 표시를 눈으로 보냈다.

그가 다시 웃었다. 거의 딱해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이 어린애야!"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의 입이 내 입에 아주 가까이 있었다. 그가 나직이 이어 말했다.

"프란츠 크로머를 아직 기억할 수 있어?" 그가 물었다.

나는 그에게 눈을 깜빡여 보였고 웃을 수도 있었다.

"어린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야 할 거야. 너는 어쩌면 언젠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할지도 몰라. 크로머 같은 자를 상대할 때든 다른 일에서든. 그때 네가 나를 부르면 나는 이제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고 오거나 기차를 타고 오지 않아. 그때는 네 안으로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걸 알아챌 거야. 알겠어? — 그리고 하나 더! 에바 부인이 말씀하시길, 언젠가 네가 힘들어지면 당신이 나에게 맡긴 입맞춤을 너에게 전해 주라고 하셨어… 눈을 감아, 싱클레어!"

나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늘 조금씩 피가 맺혀 있고 결코 줄어들려 하지 않던 내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이 닿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잠들었다.

아침에 나는 깨워졌다. 붕대를 갈아야 했다. 마침내 제대로 깨어났을 때 나는 얼른 옆 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 누워 있었다.

붕대를 가는 일은 아팠다. 그 뒤로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나 자신 속으로 온전히 내려가면,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그림들이 잠들어 있는 그곳에 이르면, 그때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제 온전히 그를 닮은 내 모습이 보인다. 그를, 내 친구이자 인도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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