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Franz Kafka — Der Prozess (1925)
서른 번째 생일 아침, 요제프 K.는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된다. 죄목도 법원도 보이지 않는 소송.
체포 · 그루바흐 부인과의 대화 · 그리고 뷔르스트너 양
누군가 요제프 K.를 모함한 게 틀림없었다. 그는 아무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아침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하숙집 주인 그루바흐 부인의 요리사는 날마다 아침 여덟 시쯤 아침밥을 가져다주었는데, 이번에는 오지 않았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K.는 조금 더 기다리며 베개에 머리를 댄 채 건너편에 사는 노파를 보았다. 노파는 평소 그 사람답지 않은 호기심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상하기도 하고 배도 고파서 그는 초인종을 울렸다. 곧바로 노크 소리가 나더니 이 집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가 들어왔다. 호리호리하면서도 다부진 몸에 몸에 붙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은 여행복처럼 이런저런 주름과 주머니와 버클과 단추와 허리띠가 달려 있어서, 어디에 쓰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주 실용적으로 보였다. "누구십니까?" K.는 물으며 곧바로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나 남자는 제 모습쯤은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듯 그 물음을 흘려 넘기고 자기 쪽에서 이렇게만 말했다. "초인종을 누르셨습니까?" "안나에게 아침밥을 가져오라고 하세요." K.는 말하고, 우선 말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곰곰 따져서 이 남자가 대체 누구인지 알아내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의 눈길 앞에 그리 오래 서 있지 않고 문 쪽으로 돌아서서 문을 조금 열더니, 바로 문 뒤에 서 있는 게 분명한 누군가에게 말했다. "안나더러 아침밥을 가져오라는데." 옆방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뒤따랐는데, 소리로 보아 여러 사람이 함께 웃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웃음으로 이 낯선 남자가 전에 몰랐던 무언가를 알게 되었을 리는 없었는데도, 그는 이제 보고하는 투로 K.에게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그거 새로운 얘기군요." K.는 말하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얼른 바지를 입었다. "옆방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루바흐 부인이 이 소란을 나한테 어떻게 해명하는지 좀 봐야겠습니다." 그런 말은 소리 내어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 그렇게 말함으로써 낯선 남자에게 자기를 감시할 권리가 있다고 어느 정도 인정해 버렸다는 것이 곧바로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낯선 남자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 계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여기 있고 싶지도 않고, 당신이 누구인지 밝히기 전에는 말을 걸어오는 것도 싫습니다." "좋은 뜻으로 한 말입니다." 낯선 남자는 말하고, 이번에는 스스로 문을 열었다. K.는 마음먹은 것보다 느린 걸음으로 옆방에 들어섰는데, 언뜻 보기에 그 방은 어젯밤과 거의 똑같았다. 그곳은 그루바흐 부인의 거실이었다. 가구와 덮개와 도자기와 사진으로 가득 찬 이 방에 오늘은 여느 때보다 조금 더 빈자리가 있는 듯했지만, 그건 곧바로 알아볼 수 없었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한 남자가 와 있다는 점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남자는 열린 창가에 앉아 책을 읽다가 이제 고개를 들었다. "방에 계셨어야죠! 프란츠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 "그래요, 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K.는 말하며 새로 만난 사람에게서 문간에 그대로 서 있는, 프란츠라고 불린 사람에게로, 그리고 다시 새로 만난 사람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열린 창문으로는 또다시 그 노파가 보였다. 노파는 그야말로 늙은이다운 호기심으로 이제는 이쪽을 마주 보는 창가로 자리를 옮겨, 계속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루바흐 부인을 좀……" K.는 말하며,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두 남자를 뿌리치기라도 하는 듯한 몸짓을 하고는 계속 걸어가려 했다. "안 됩니다." 창가의 남자가 말하며 책을 작은 탁자에 던지고 일어섰다. "나가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체포된 몸이니까요." "그런 것 같군요." K.가 말했다. "그런데 대체 왜죠?" 그가 이어 물었다. "우리는 그걸 말해 드리라고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방으로 가서 기다리세요. 절차는 이미 시작됐으니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겁니다. 이렇게 친절하게 타이르는 것도 제 임무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하지만 프란츠 말고는 아무도 듣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프란츠도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당신한테 친절하게 굴고 있고요. 감시인을 배정받을 때처럼 앞으로도 운이 좋으시다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K.는 앉으려 했지만, 그제야 방 안에 창가의 안락의자 말고는 앉을 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말이 다 얼마나 맞는지 곧 아시게 될 겁니다." 프란츠가 말하며 다른 남자와 함께 K.에게 다가왔다. 특히 다른 남자는 K.보다 훨씬 키가 컸고, 자꾸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둘은 K.의 잠옷을 살펴보더니, 이제 훨씬 나쁜 셔츠를 입어야 할 거라고, 하지만 이 셔츠도 다른 속옷들도 자기들이 맡아 두었다가 일이 잘 풀리면 돌려주겠다고 했다. "물건은 보관소보다 우리한테 맡기는 게 낫습니다." 그들이 말했다. "보관소에서는 빼돌리는 일이 자주 있고, 게다가 거기서는 소송이 끝났든 안 끝났든 가리지 않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물건을 다 팔아 버리거든요. 요즘은 이런 소송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모릅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보관소에서 판 돈을 받긴 하겠죠. 하지만 그 돈은 우선 그 자체로도 얼마 안 됩니다. 팔 때는 부르는 값이 아니라 뒷돈의 크기로 정해지니까요. 게다가 겪어 보니 그런 돈은 이 손 저 손으로, 이 해 저 해로 넘어가면서 줄어들더군요." K.는 이런 말에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제 물건에 대한 권리 따위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분명히 아는 게 훨씬 중요했다. 그러나 이 사람들 앞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감시인의 배가 — 감시인일 수밖에 없었다 — 거의 다정하다 싶게 자꾸 그의 몸에 부딪혔고, 고개를 들어 보면 그 뚱뚱한 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메마르고 뼈가 불거진 얼굴이 보였다. 코가 크고 옆으로 비뚤어진 그 얼굴은 그의 머리 너머로 다른 감시인과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체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어느 관청에 속한 사람들인가? K.는 엄연히 법치 국가에 살고 있었다. 어디나 평화로웠고 모든 법이 제대로 서 있었다. 누가 감히 그의 집에 쳐들어온단 말인가? 그는 늘 모든 것을 되도록 가볍게 넘기고, 가장 나쁜 일은 그 일이 실제로 닥쳐서야 믿고, 모든 것이 위태로워 보여도 앞날에 대비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게 옳지 않아 보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장난으로, 오늘이 그의 서른 번째 생일이라서인지 모를 까닭으로 은행 동료들이 꾸민 짓궂은 장난으로 볼 수도 있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어쩌면 어떻게든 감시인들의 얼굴에 대고 웃어 주기만 하면 그들도 따라 웃을지 몰랐다. 어쩌면 길모퉁이의 짐꾼들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감시인 프란츠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는 이 사람들에게 자기가 혹시 가지고 있을지 모를 아주 작은 이점이라도 절대 놓치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가 농담을 못 알아들었다고 말할 위험쯤은 아주 작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 겪은 일에서 배우는 게 그의 버릇은 아니었지만 — 몇몇 일들을 떠올렸다. 그 자체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었지만, 그때 그는 친구들과 달리 알면서도, 무슨 결과가 올지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조심성 없이 굴었다가 결국 그 대가를 치렀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이번에는 안 되었다. 이게 연극이라면 그도 함께 연기해 줄 작정이었다.
그는 아직 자유로웠다. "실례합니다." 그는 말하고 감시인들 사이를 서둘러 빠져나가 자기 방으로 갔다. "말이 통하는 사람 같군." 등 뒤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책상 서랍들을 홱 열어젖혔다.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하필 찾고 있던 신분 증명서만은 흥분한 탓에 곧바로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자전거 면허증을 찾아내어 그것을 들고 감시인들에게 가려다가, 그 서류가 너무 하찮아 보여서 계속 찾았고, 결국 출생 증명서를 찾아냈다. 다시 옆방으로 돌아오자 마침 맞은편 문이 열리며 그루바흐 부인이 들어오려던 참이었다. 그 모습은 잠깐밖에 보이지 않았다. K.를 알아보자마자 부인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용서를 빌고는 사라졌고, 더없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들어오시지요." K.는 겨우 그 말밖에 하지 못했다. 이제 그는 서류를 들고 방 한가운데 서서 다시는 열리지 않는 문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가, 감시인들이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퍼뜩 놀랐다. 그들은 열린 창가의 작은 탁자에 앉아 있었는데, K.가 이제 보니 그의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부인은 왜 안 들어온 거죠?" 그가 물었다. "들어오면 안 되니까요." 키 큰 감시인이 말했다. "당신은 체포됐잖습니까." "내가 어떻게 체포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이런 식으로?" "또 시작하시는군." 감시인이 말하며 버터 바른 빵을 작은 꿀단지에 찍었다. "그런 질문엔 대답 안 합니다." "대답하셔야 할 겁니다." K.가 말했다. "여기 내 신분 증명서가 있습니다. 이제 당신들 증명서를 보여 주세요. 무엇보다 체포 영장을요." "맙소사!" 감시인이 말했다. "어쩌면 이렇게 자기 처지를 못 받아들이고, 지금 세상 모든 사람 가운데 아마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를 쓸데없이 약 올리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까." "정말 그렇다니까요, 믿으세요." 프란츠가 말하며, 손에 든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길고, 아마도 뜻이 담겼겠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눈길로 K.를 바라보았다. K.는 저도 모르게 프란츠와 눈길로 대화를 나누다가, 그래도 서류를 탁 치며 말했다. "여기 내 신분 증명서가 있습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입니까?" 이번에는 키 큰 감시인이 소리쳤다. "애보다 더 고약하게 구시는군요. 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감시인인 우리랑 신분증이니 체포 영장이니 따져서 그 크고 망할 소송을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말단 직원이라 신분증 같은 건 잘 알지도 못하고, 당신 일과 관련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에 열 시간씩 당신을 지키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게 우리가 가진 전부죠. 그래도 우리가 섬기는 높은 관청이 이런 체포를 명령하기 전에 체포 이유와 체포될 사람에 대해 아주 꼼꼼히 알아본다는 것쯤은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잘못은 없습니다. 내가 아는 우리 관청은 — 난 가장 낮은 등급만 알지만 — 국민들 사이에서 죄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법에 적혀 있듯이 죄에 이끌려서 우리 감시인들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게 법입니다.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런 법은 모릅니다." K.가 말했다. "그럼 당신한테 더 나쁘죠." 감시인이 말했다. "그런 법은 당신들 머릿속에나 있겠죠." K.가 말했다. 그는 어떻게든 감시인들의 생각 속으로 슬그머니 파고들어, 그 생각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돌리거나 아예 그 안에 자리 잡고 싶었다. 그러나 감시인은 딱 잘라 이렇게만 말했다. "몸으로 느끼게 될 겁니다." 프란츠가 끼어들었다. "이봐, 빌렘. 이 사람은 법을 모른다고 인정하면서 동시에 자기는 죄가 없다고 우기는군." "네 말이 딱 맞아. 그런데 이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이해시킬 수가 없어." 다른 감시인이 말했다. K.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이 가장 낮은 하수인들의 — 자기들 입으로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가 — 수다에 내가 더 헷갈려야 하나?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이들은 자기들도 전혀 모르는 일에 대해 떠들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자신만만한 건 어리석어서일 뿐이다. 나와 격이 맞는 사람과 몇 마디만 나누면, 이자들과 아무리 길게 떠드는 것보다 모든 게 비교할 수 없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는 방 안의 빈 곳을 몇 번 오갔다. 건너편에는 노파가 보였다. 노파는 자기보다 훨씬 늙은 노인을 창가로 끌고 와 끌어안고 있었다. K.는 이 구경거리를 끝내야 했다. "당신들 상관한테 데려다주시오." 그가 말했다. "그분이 원하실 때요. 그 전에는 안 됩니다." 빌렘이라고 불린 감시인이 말했다. "그리고 이제 충고하는데," 그가 덧붙였다. "방으로 가서 조용히 있으면서 당신에 대해 어떤 처분이 내려지는지 기다리세요. 우리가 충고하는데, 쓸데없는 생각으로 흐트러지지 말고 정신을 가다듬으세요. 당신한테 요구되는 게 많을 테니까요. 당신은 우리 호의에 걸맞게 우리를 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지금 당신 앞에서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걸 잊었어요. 그건 작은 우세가 아닙니다. 그래도 돈이 있으시면 건너편 카페에서 간단한 아침밥을 사다 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 제안에 대답하지 않고 K.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어쩌면 다음 방의 문을, 아니 현관 쪽 문을 열어도 두 사람은 감히 그를 막지 못할지 몰랐다. 어쩌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게 이 모든 일을 가장 간단히 푸는 방법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이 그를 붙잡을지도 몰랐고, 한번 바닥에 쓰러지고 나면 지금 어떤 면에서는 그래도 그들보다 나은 자리에 있다는 이점도 다 잃게 될 터였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가져다줄 해결의 확실함을 택했고, 그의 쪽에서도 감시인들 쪽에서도 더는 말 한마디 오가지 않은 채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세면대에서 먹음직스러운 사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젯밤 아침밥으로 먹으려고 챙겨 둔 것이었다. 이제 그 사과가 그의 유일한 아침밥이었다.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확인했듯이, 감시인들의 은혜로 얻어먹을 수 있었을 지저분한 밤샘 카페의 아침밥보다는 어쨌든 훨씬 나았다. 그는 기분이 좋았고 자신이 있었다. 오늘 오전에 은행 일을 빠지긴 하겠지만, 그가 은행에서 차지한 비교적 높은 자리를 생각하면 쉽게 양해받을 일이었다. 진짜 이유를 대야 할까?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이런 경우에는 그럴 만도 했으니, 그루바흐 부인이나 건너편의 두 노인을 증인으로 세울 수도 있었다. 두 노인은 지금쯤 이쪽을 마주 보는 창가로 행군하는 중일 것이다. K.는 이상했다. 적어도 감시인들의 생각으로 보자면 이상했다. 그들은 그를 방으로 몰아넣고 혼자 두었는데, 이 방에서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방법이 여러 가지 있었다. 물론 동시에 그는 자기 생각으로 보자면, 자기가 그럴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하고도 물었다. 옆방에 두 사람이 앉아서 자기 아침밥을 가로챘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설령 그러고 싶었다 해도 그 터무니없음 때문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감시인들의 머리가 모자란 게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면, 그들도 같은 확신 때문에 그를 혼자 두는 데서 아무 위험도 보지 않았다고 짐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원한다면 이제 지켜보아도 좋았다. 그가 벽장 쪽으로 가는 것을, 거기 넣어 둔 좋은 독주를 꺼내 한 잔은 아침밥 대신 비우고, 두 번째 잔은 용기를 내려고 따르는 것을. 두 번째 잔은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경우를 대비한 조심일 뿐이었다.
그때 옆방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서 그는 깜짝 놀라 이로 잔을 딱 부딪쳤다. "감독관님이 부르십니다." 그런 소리였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외침뿐이었다. 감시인 프란츠가 그럴 줄은 전혀 몰랐던, 짧게 끊어지는 군대식 외침이었다. 명령 자체는 무척 반가웠다. "드디어." 그는 마주 소리치고 벽장을 잠근 뒤 곧바로 옆방으로 달려갔다. 거기 두 감시인이 서 있다가, 그게 당연하다는 듯 그를 다시 방으로 몰아넣었다. "무슨 생각이오?" 그들이 소리쳤다. "셔츠 바람으로 감독관님 앞에 나가겠다고? 그분이 당신을 매질하게 하실 거요. 우리까지." "나 좀 내버려 둬요, 제기랄." K.가 소리쳤다. 그는 벌써 옷장까지 떠밀려 와 있었다. "침대에 있는 사람을 덮쳐 놓고 예복 차림이길 바랄 수는 없잖소." "소용없습니다." 감시인들이 말했다. 그들은 K.가 소리칠 때마다 아주 차분해지고 거의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래서 K.는 헷갈리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정신이 들기도 했다. "우스꽝스러운 격식이군!" 그는 여전히 투덜거렸지만 벌써 의자에서 윗옷 하나를 집어 들고, 감시인들의 판단에 맡기기라도 하듯 두 손으로 한동안 들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검은 윗옷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말했다. 그러자 K.는 윗옷을 바닥에 내던지며 —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자기도 몰랐다 — 말했다. "아직 본재판도 아니잖소." 감시인들은 웃었지만 그들의 말을 굽히지 않았다. "검은 윗옷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이 빨라진다면 나야 좋지." K.는 말하고 제 손으로 옷장을 열어 많은 옷들 사이를 한참 뒤지다가 가장 좋은 검은 옷을 골랐다. 허리선 때문에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화제가 되었던 재킷 정장이었다. 그러고는 다른 셔츠도 꺼내어 공들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속으로 그는 감시인들이 자기에게 목욕을 시키는 걸 잊은 덕분에 일이 빨라졌다고 믿었다. 그들이 혹시 그걸 떠올리지 않을까 지켜보았지만, 물론 그들은 그런 건 떠올리지도 않았다. 그 대신 빌렘은 잊지 않고 프란츠를 감독관에게 보내 K.가 옷을 입고 있다고 알렸다.
옷을 다 입자 그는 빌렘 바로 앞에 서서 빈 옆방을 지나 그다음 방으로 가야 했다. 그 방의 문은 이미 양쪽 문짝이 다 열려 있었다. K.가 잘 알기로 이 방에는 얼마 전부터 뷔르스트너 양이라는 타자수가 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고 밤늦게 돌아오는 사람이라, K.는 그 여자와 인사말 말고는 별로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지금 그 여자 침대 곁의 작은 탁자가 심문용 책상처럼 방 한가운데로 옮겨져 있었고, 감독관이 그 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다리를 꼬고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젊은이 셋이 서서 뷔르스트너 양의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진들은 벽에 걸린 판에 꽂혀 있었다. 열린 창문의 손잡이에는 흰 블라우스가 걸려 있었다. 건너편 창가에는 또 두 노인이 몸을 내밀고 있었는데, 일행이 늘어나 있었다. 그들 뒤에 그들보다 훨씬 키가 큰 남자가 가슴께를 풀어 헤친 셔츠 차림으로 서서 불그스름한 뾰족 수염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비틀고 있었다. "요제프 K.?" 감독관이 물었다. 어쩌면 K.의 흩어진 눈길을 자기에게 돌리려는 것뿐이었는지도 몰랐다. K.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일로 무척 놀라셨겠지요." 감독관이 물으며, 두 손으로 작은 탁자 위에 놓인 몇 가지 물건을, 성냥을 곁들인 초와 책 한 권과 바늘꽂이를 이리저리 옮겼다. 심문에 필요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물론입니다." K.가 말했다. 마침내 말이 통하는 사람과 마주하고 자기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흐뭇함이 그를 사로잡았다. "물론 놀랐습니다. 하지만 결코 무척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무척 놀라지는 않았다고요?" 감독관이 물으며 이번에는 초를 탁자 한가운데 세우고 다른 물건들을 그 둘레에 늘어놓았다.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K.가 서둘러 말했다. "제 말은……" 여기서 K.는 말을 끊고 안락의자를 찾아 둘러보았다. "앉아도 되겠지요?" 그가 물었다. "그런 관례는 없습니다." 감독관이 대답했다. "제 말은," 이번에는 K.가 쉬지 않고 말했다. "물론 무척 놀라기는 했지만, 서른 해를 살면서 저처럼 혼자 힘으로 헤쳐 나와야 했던 사람은 놀랄 일에 단련되어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특히 오늘 일은요." "왜 특히 오늘 일은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게 장난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장난이라기엔 꾸며 놓은 게 너무 대규모니까요. 하숙집 사람들이 다 끼어야 하고 여러분도 다 끼어야 할 테니, 그건 장난의 선을 넘지요. 그러니 장난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요." 감독관이 말하며 성냥갑에 성냥이 몇 개 들었는지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K.가 말을 이으며 모두를 향해 돌아섰다. 사진 곁의 세 사람에게도 돌아서고 싶을 정도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일이 그리 중요할 리도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제가 기소되었는데 저를 기소할 만한 죄를 조금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부차적인 일이고, 중요한 물음은 누가 나를 기소했느냐입니다. 어느 관청이 이 절차를 맡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공무원입니까? 아무도 제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당신 옷을 — 여기서 그는 프란츠를 향해 돌아섰다 — 제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요. 하지만 그건 오히려 여행복이지요. 이 물음들에 분명한 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렇게 분명히 밝히고 나면 우리는 더없이 다정하게 헤어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감독관이 성냥갑을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 "크게 착각하고 계십니다." 그가 말했다. "여기 이분들과 저는 당신 일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는 그 일에 대해 거의 아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더없이 제대로 된 제복을 입는다 해도 당신 일이 조금도 더 나빠지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기소되었다고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니, 기소되었는지 아닌지도 저는 모릅니다. 당신이 체포된 건 맞습니다. 그 이상은 모릅니다. 감시인들이 무슨 다른 소리를 지껄였다면 그건 그냥 지껄인 것일 뿐입니다. 당신 물음에 대답은 못 해 드리지만 충고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 그리고 앞으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덜 생각하시고 차라리 당신 자신을 더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죄가 없다는 느낌을 가지고 그렇게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다른 면에서는 당신이 주는 인상이 나쁘지 않은데 그걸 망칩니다. 말도 좀 더 아끼셔야 합니다. 아까 하신 말씀은 거의 다, 몇 마디만 하셨어도 당신 태도에서 알아챌 수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당신에게 그리 유리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K.는 감독관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기보다 어쩌면 어릴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학교에서나 들을 훈계를 듣는단 말인가? 솔직하게 말했다고 꾸지람으로 벌을 받는단 말인가? 그런데 체포된 이유에 대해서도, 체포를 명한 사람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단 말인가?
그는 조금 흥분해서 이리저리 걸었다.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소맷부리를 뒤로 밀어 올리고 가슴을 더듬고 머리를 매만지다가 세 사람 곁을 지나며 "이건 말도 안 돼"라고 하자, 그들은 그를 향해 돌아서서 호의적이지만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다시 감독관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하스테러 검사가 제 좋은 친구입니다." 그가 말했다. "전화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감독관이 말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와 따로 의논할 개인적인 일이 있으시다면 모를까." "무슨 뜻이냐고요?" K.가 화가 났다기보다 당황해서 소리쳤다. "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뜻을 찾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뜻 없는 짓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돌이라도 울 노릇 아닙니까? 이분들은 처음엔 나를 덮치더니 이제는 여기 앉거나 서서 빈둥거리며 내가 당신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걸 구경하고 있습니다. 체포되었다는 사람이 검사한테 전화하는 게 무슨 뜻이 있겠느냐고요? 좋습니다, 전화 안 하겠습니다." "아니, 하시지요." 감독관이 말하며 전화가 있는 현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서 전화하십시오." "아니요, 이제 안 하겠습니다." K.는 말하고 창가로 갔다. 건너편 창가에는 아직 그 일행이 있었는데, K.가 창가로 다가오자 이제야 편안히 구경하던 것이 조금 방해받은 것 같았다. 노인들은 일어서려 했지만 그 뒤의 남자가 그들을 달랬다. "저기에도 저런 구경꾼들이 있군요." K.는 아주 큰 소리로 감독관에게 외치며 집게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거기서 비키시오." 그러고는 건너편에 대고 소리쳤다. 셋은 곧바로 몇 걸음 물러났고, 두 노인은 아예 그 남자 뒤로 숨었다. 남자는 넓은 몸으로 그들을 가리고서, 입 모양으로 보아 멀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말을 했다. 그러나 아주 사라지지는 않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다시 창가로 다가갈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뻔뻔하고 무례한 사람들!" K.는 방 안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K.가 곁눈질로 보기에 감독관은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전혀 듣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는 한 손을 탁자에 꾹 누르고 손가락들의 길이를 비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감시인은 장식 천을 덮은 트렁크 위에 앉아 무릎을 문지르고 있었다. 세 젊은이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하릴없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느 잊힌 사무실처럼 조용했다. "자, 여러분," K.가 외쳤다. 한순간 모두를 자기 어깨에 짊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러분 표정으로 보아 제 일은 끝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한 일이 옳은지 그른지는 더 따지지 말고 서로 악수로 좋게 마무리하는 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도 같은 생각이라면, 자……" 그리고 그는 감독관의 책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감독관은 눈을 들고 입술을 깨물며 K.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K.는 아직도 감독관이 손을 잡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감독관은 일어서더니 뷔르스트너 양의 침대에 놓여 있던 딱딱하고 둥근 모자를 집어, 새 모자를 써 볼 때처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썼다. "모든 게 참 간단해 보이시나 봅니다!" 그러면서 그가 K.에게 말했다. "일을 좋게 마무리하자고요? 아니, 아닙니다. 그건 정말 안 됩니다. 그렇다고 절망하시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아니, 왜 절망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체포되었을 뿐입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걸 알려 드려야 했고, 알려 드렸고, 당신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니 이제 헤어져도 되겠습니다. 물론 당분간만이지요. 이제 은행에 가시려는 거지요?" "은행에요?" K.가 물었다. "난 체포된 줄 알았는데요." K.는 조금 반항하듯 물었다. 악수는 거절당했지만, 특히 감독관이 일어선 뒤로 그는 이 사람들 모두에게서 점점 더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면 현관문까지 쫓아가서 체포해 가라고 제 몸을 내밀어 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체포된 몸으로 내가 어떻게 은행에 간단 말입니까?" "아, 그렇군요." 벌써 문가에 가 있던 감독관이 말했다.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습니다. 당신은 체포되었습니다, 분명히요. 하지만 그렇다고 직업을 수행하는 데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평소처럼 살아가는 데도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체포되었다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군요." K.가 말하며 감독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는 한 번도 다른 뜻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감독관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체포되었다고 알리는 것조차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군요." K.는 말하며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도 가까이 와 있었다. 이제 모두가 문가의 좁은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게 제 의무였습니다." 감독관이 말했다. "어리석은 의무로군요." K.가 굽히지 않고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감독관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말로 시간을 버리지는 맙시다. 저는 당신이 은행에 가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따지시니 덧붙이자면, 저는 은행에 가라고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가시려는 줄 알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걸 쉽게 해 드리려고, 당신이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은행에 도착하시도록, 이 세 분을, 당신 동료들을 여기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뭐라고요?" K.는 소리치며 놀라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가 아직도 사진 곁의 한 무리로만 기억하던, 이렇다 할 특징 없는 핏기 없는 이 젊은이들은 정말로 그의 은행 직원들이었다. 동료는 아니었다. 그건 지나친 말이었고, 감독관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라는 빈틈이었다. 하지만 은행의 하급 직원들인 것은 분명했다. 어떻게 K.가 그걸 못 알아볼 수 있었을까? 이 셋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그는 얼마나 감독관과 감시인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던가. 뻣뻣하고 두 손을 흔들어 대는 라벤슈타이너, 눈이 움푹 들어간 금발의 쿨리히, 그리고 오랜 근육 경련 때문에 참을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카미너였다. "안녕하십니까!" 잠시 뒤에 K.가 말하며 반듯하게 고개 숙이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혀 못 알아봤습니다. 그럼 이제 일하러 가 볼까요?" 그들은 이 순간만을 줄곧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K.가 제 방에 두고 온 모자를 찾자 그들은 모두 줄지어 그걸 가지러 달려갔는데, 어쨌든 조금은 당황했다는 뜻으로 보였다. K.는 가만히 서서 열린 두 문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맨 뒤는 물론 무심한 라벤슈타이너였는데, 그는 그저 우아하게 종종걸음을 쳤을 뿐이었다. 카미너가 모자를 건넸고, K.는 은행에서도 자주 그래야 했듯이, 카미너의 미소가 일부러 짓는 게 아니며 그는 아예 일부러 웃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분명히 일러두어야 했다. 현관에서는 그루바흐 부인이, 그리 잘못을 느끼는 얼굴도 아니면서, 일행 모두에게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K.는 여느 때처럼 부인의 앞치마 끈을 내려다보았다. 그 끈은 쓸데없이 깊이 부인의 커다란 몸을 파고들어 있었다. 아래로 내려오자 K.는 손에 시계를 들고, 이미 삼십 분이나 늦은 것을 괜히 더 늘리지 않으려고 자동차를 타기로 했다. 카미너가 차를 부르러 길모퉁이로 달려갔고, 다른 두 사람은 누가 봐도 K.의 기분을 돌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쿨리히가 건너편 집 대문을 가리켰다. 마침 금발의 뾰족 수염을 기른 키 큰 남자가 거기 나타났는데, 처음 순간에는 제 큰 키를 다 드러낸 게 조금 멋쩍은 듯 벽 쪽으로 물러서서 몸을 기댔다. 노인들은 아직 계단을 내려오는 중인 것 같았다. K.는 쿨리히가 그 남자에게 눈길을 끈 게 못마땅했다. 그 남자는 자기가 이미 보았고, 아니 기다리고까지 있었던 사람이었다. "쳐다보지 마세요." 그가 불쑥 내뱉었다. 독립된 어른들에게 그런 말투가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는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마침 자동차가 와서 모두 올라타고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K.는 감독관과 감시인들이 떠나는 걸 전혀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감독관은 세 직원을 가렸고, 이제는 직원들이 감독관을 가렸던 것이다. 그리 침착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K.는 이런 점에서 자기를 더 꼼꼼히 살피자고 마음먹었다. 그래도 그는 저도 모르게 다시 돌아서서, 혹시 감독관과 감시인들을 아직 볼 수 있을까 하고 자동차 뒷덮개 위로 몸을 내밀었다. 그러나 곧 다시 돌아앉아, 누군가를 찾아보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편안히 차 구석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지금 그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지친 듯했다. 라벤슈타이너는 차 오른쪽 밖을, 쿨리히는 왼쪽 밖을 내다보았고, 카미너만 히죽 웃는 얼굴로 곁에 있었는데, 그 웃음을 두고 농담을 하는 건 안타깝게도 사람의 도리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봄 K.는 저녁을 대개 이렇게 보냈다. 일이 끝나면, 그럴 수 있으면 — 그는 보통 아홉 시까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 혼자서나 직원들과 함께 잠깐 산책을 하고, 그다음에 맥줏집에 가서 주로 나이 든 신사들과 단골 테이블에 둘러앉아 대개 열한 시까지 있었다. 물론 이 순서에도 예외가 있었다. 이를테면 그의 일솜씨와 믿음직함을 무척 높이 사는 은행장이 드라이브를 가자거나 별장에서 저녁을 먹자고 초대할 때였다. 그 밖에 K.는 일주일에 한 번 엘자라는 여자에게 갔다. 엘자는 밤부터 늦은 아침까지 포도주 술집에서 일하고, 낮에는 침대에 누운 채로만 손님을 맞았다.
그러나 이날 저녁에는 — 하루는 고된 일과 영예롭고 다정한 생일 축하 속에 빨리 지나갔다 — K.는 곧장 집에 가고 싶었다. 하루 일 사이사이 쉴 때마다 그는 그 생각을 했다.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아침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그루바흐 부인의 집 전체가 크게 어질러졌고, 그 질서를 되찾으려면 바로 자기가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일단 질서를 되찾고 나면 그 일들의 흔적은 모두 지워지고 모든 것이 예전대로 돌아갈 것이었다. 특히 세 직원에게서는 두려워할 게 없었다. 그들은 다시 은행의 거대한 직원 무리 속으로 가라앉았고, 그들에게서 달라진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K.는 그들을 몇 번이나 하나씩, 또 한꺼번에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다른 목적은 없었고 그들을 지켜보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매번 흡족하게 그들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저녁 아홉 시 반에 자기가 사는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대문에서 한 젊은 녀석과 마주쳤다. 녀석은 다리를 벌리고 서서 파이프를 피우고 있었다. "누구요?" K.는 곧바로 물으며 녀석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복도가 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관리인 아들입니다, 나리." 녀석이 대답하며 파이프를 입에서 빼고 옆으로 비켜섰다. "관리인 아들이라고?" K.는 묻고 조바심 난 듯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나리,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버지를 불러 올까요?" "아니, 아니." K.는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용서하는 기색이 있었다. 녀석이 무슨 나쁜 짓을 했지만 자기가 용서해 준다는 듯이. "됐어." 그러고는 계속 걸어갔지만, 계단을 오르기 전에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곧장 제 방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루바흐 부인과 이야기하고 싶었기에 그는 바로 부인의 방문을 두드렸다. 부인은 뜨개질하던 양말을 들고 탁자에 앉아 있었고, 탁자 위에는 아직 헌 양말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K.는 이렇게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건성으로 사과했지만, 그루바흐 부인은 무척 다정하게 사과는 듣지 않겠다고 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다고, 그가 자기에게 가장 좋고 가장 아끼는 하숙인이라는 걸 그도 잘 알지 않느냐고 했다. K.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완전히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침에 창가의 작은 탁자에 놓여 있던 아침 식기도 벌써 치워져 있었다. 여자들의 손은 조용히 많은 일을 해내는구나, 그는 생각했다. 자기라면 그 식기를 그 자리에서 깨 버렸을지는 몰라도 들고 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조금 고마운 마음으로 그루바흐 부인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십니까?" 그가 물었다. 이제 둘은 함께 탁자에 앉아 있었고, K.는 이따금 양말 더미 속에 손을 파묻었다. "일이 많아서요." 부인이 말했다. "낮에는 하숙인들 몫이니까, 제 일을 정리하려면 저녁밖에 없어요." "오늘은 제가 또 특별한 일거리를 만들어 드린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부인이 조금 열을 띠며 물었다. 뜨개질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 "오늘 아침 여기 왔던 남자들 말입니다." "아, 그거요." 부인은 말하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건 별로 일거리가 되지 않았어요." K.는 부인이 다시 양말을 집어 드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이상한가 보군, 그는 생각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나이 든 여자하고만 할 수 있다. "아니요, 분명 일거리가 되었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럼요, 다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지요." 부인은 힘주어 말하며 K.에게 거의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K.가 물었다. "네."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면 안 돼요. 세상에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잖아요! K. 씨가 이렇게 속을 터놓고 말씀하시니 저도 털어놓을게요. 제가 문 뒤에서 조금 엿들었고, 감시인 두 사람도 저한테 이것저것 이야기해 줬어요. K. 씨의 행복이 걸린 일이고, 저한테는 정말 마음 쓰이는 일이에요. 어쩌면 제 분수보다 더요. 저는 그냥 하숙집 주인일 뿐이니까요. 아무튼 이것저것 들었는데, 딱히 아주 나쁜 일이라고는 못 하겠어요. 아니에요. K. 씨가 체포되긴 했지만 도둑이 체포되는 것처럼은 아니에요. 도둑처럼 체포되면 나쁜 일이지만, 이 체포는……. 저한테는 무슨 학문 같은 일로 느껴져요. 어리석은 소리를 하더라도 용서하세요. 무슨 학문 같은 일로 느껴져요. 저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꼭 알아들어야 하는 것도 아닌 일이요."
"어리석은 소리가 전혀 아닙니다, 그루바흐 부인. 적어도 저도 어느 정도는 부인과 같은 생각입니다. 다만 저는 이 일을 부인보다 더 엄하게 판단해서, 학문 같은 일이라고조차 보지 않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불시에 당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안나가 오지 않는 데 흔들리지 말고 일어나서, 누가 길을 막든 상관하지 말고 부인에게 갔더라면, 이번만 예외로 부엌에서 아침을 먹고 부인에게 제 방에서 옷가지를 가져다 달라고 했더라면, 한마디로 분별 있게 행동했더라면,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일어나려던 일은 모두 싹부터 잘렸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지요. 이를테면 은행에서는 저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는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제 전담 직원이 있고, 일반 전화와 사무실 전화가 제 책상 위에 놓여 있고, 고객과 직원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고, 게다가 무엇보다 거기서는 늘 일에 몰두해 있으니 정신이 또렷합니다. 거기서 그런 일을 맞닥뜨린다면 오히려 즐거울 겁니다. 뭐, 다 지난 일이고 사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부인의 판단을, 분별 있는 여자의 판단을 듣고 싶었고, 우리 생각이 같아서 무척 기쁩니다. 그럼 이제 손을 내미셔야지요. 이렇게 생각이 같으면 악수로 굳혀야 합니다."
손을 내밀까? 감독관은 내게 손을 내밀지 않았지, 그는 생각하며 예전과 다르게, 살피듯이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일어섰기에 부인도 일어섰다. 부인은 조금 쭈뼛거렸다. K.가 한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쭈뼛거리다가 부인은 전혀 하려던 말이 아니고 그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해 버렸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K. 씨." 부인은 목소리에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고, 물론 악수도 잊어버렸다. "내가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K.는 갑자기 피곤해져서, 이 여자가 동의해 주는 게 다 아무 값어치가 없다는 걸 깨닫고 말했다.
문가에서 그는 한 번 더 물었다. "뷔르스트너 양은 집에 있습니까?" "아니요." 그루바흐 부인은 말하며, 그 무뚝뚝한 대답에 뒤늦게 분별 있는 관심을 담아 미소 지었다. "극장에 갔어요.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전해 드릴까요?" "아, 몇 마디만 하고 싶었습니다." "언제 올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극장에 가면 대개 늦게 오거든요."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K.는 말하고 벌써 숙인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려 나가려 했다. "오늘 그 방을 쓴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K. 씨. 너무 마음을 쓰시네요. 그 아가씨는 아무것도 몰라요. 새벽부터 아직 집에 안 들어왔거든요. 방도 벌써 다 정리해 놨어요. 직접 보세요." 그리고 부인은 뷔르스트너 양의 방문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믿습니다." K.는 말했지만 그래도 열린 문 쪽으로 갔다. 달빛이 어두운 방 안으로 고요히 비쳐 들었다. 보이는 한에서는 정말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고, 블라우스도 더는 창문 손잡이에 걸려 있지 않았다. 침대의 베개들이 눈에 띄게 높아 보였고, 일부는 달빛 속에 놓여 있었다. "아가씨가 자주 늦게 들어오는군요." K.는 말하며 그 책임이 그루바흐 부인에게 있기라도 한 듯 부인을 바라보았다. "젊은 사람들이 원래 그렇잖아요!" 그루바흐 부인이 변명하듯 말했다. "물론이죠, 물론." K.가 말했다. "하지만 도가 지나칠 수도 있지요." "그럴 수 있죠." 그루바흐 부인이 말했다. "정말 옳은 말씀이에요, K. 씨. 어쩌면 이번 경우도 그렇고요. 뷔르스트너 양을 헐뜯으려는 건 절대 아니에요.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예요. 친절하고 깔끔하고 시간 잘 지키고 부지런하고, 저는 그걸 다 무척 높이 사요. 하지만 한 가지는 사실이에요. 좀 더 자존심을 지키고 몸가짐을 조심해야 해요. 이번 달에만 벌써 두 번이나 외진 거리에서, 그것도 매번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봤어요. 저도 무척 난처해요. 정말이지 하느님께 맹세코 K. 씨한테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하고도 직접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 아가씨를 의심하게 되는 게 그것뿐만도 아니고요." "완전히 잘못 짚으셨습니다." K.는 화가 나서, 그걸 거의 감추지도 못하고 말했다. "게다가 아가씨에 대해 내가 한 말도 잘못 알아들으신 게 분명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진심으로 경고하는데, 아가씨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부인은 완전히 착각하고 계십니다. 나는 아가씨를 아주 잘 압니다. 부인 말은 하나도 사실이 아닙니다. 아니, 내가 지나친지도 모르겠군요.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말씀하세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K. 씨." 그루바흐 부인은 애원하듯 말하며 K.가 벌써 열어 둔 그의 방문까지 서둘러 쫓아왔다. "아가씨하고는 아직 이야기할 생각도 없어요. 물론 그 전에 더 지켜봐야지요. 알고 있는 걸 K. 씨한테만 털어놓은 거예요. 결국 하숙집을 깨끗하게 지키려고 애쓰는 건 모든 하숙인을 위한 일이잖아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깨끗함이라!" K.는 문틈으로 여전히 소리쳤다. "하숙집을 깨끗하게 지키고 싶으시면 먼저 나부터 내보내셔야 할 겁니다." 그러고는 문을 쾅 닫았다.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잠이 전혀 오지 않았으므로 깨어 있기로 했고, 이참에 뷔르스트너 양이 언제 들어오는지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면 어쩌면, 아무리 어울리지 않는 일일지라도, 그 여자와 몇 마디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창턱에 기대어 지친 눈을 누르고 있다가, 그는 한순간 그루바흐 부인을 혼내 주고 뷔르스트너 양을 설득해서 함께 방을 빼 버릴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곧 그건 끔찍하게 지나친 생각으로 보였고, 오히려 아침에 일어난 일 때문에 집을 옮기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자기에게 들었다. 그보다 터무니없고, 무엇보다 쓸데없고 한심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텅 빈 거리를 내다보는 데 싫증이 나자, 그는 현관 쪽 문을 조금 열어 두고 소파에 누웠다.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면 누구든 소파에서 곧바로 볼 수 있도록. 열한 시쯤까지 그는 시가를 피우며 소파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때부터는 더 견디지 못하고 조금 현관 쪽으로 나갔다. 그러면 뷔르스트너 양이 더 빨리 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 여자를 특별히 원하는 건 아니었다.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여자와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 여자가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이 하루의 끝에도 불안과 어수선함을 가져온다는 게 약이 올랐다. 그가 오늘 저녁을 먹지 못한 것도, 오늘 하려던 엘자와의 만남을 건너뛴 것도 그 여자 탓이었다. 물론 둘 다 지금 엘자가 일하는 포도주 술집에 가면 채울 수 있었다. 그는 뷔르스트너 양과 이야기를 나눈 뒤 나중에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열한 시 반이 넘었을 때 계단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렸다. 생각에 잠겨 현관을 제 방인 양 소리 내며 오가던 K.는 제 방문 뒤로 숨었다. 들어온 사람은 뷔르스트너 양이었다. 그 여자는 문을 잠그면서 추운 듯 실크 숄을 좁은 어깨에 여몄다. 다음 순간이면 제 방으로 들어갈 것이고, K.는 한밤중에 그 방으로 밀고 들어갈 수는 결코 없었다. 그러니 지금 말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제 방의 전등을 켜 두지 않았기에, 어두운 방에서 불쑥 나서면 덮치는 것처럼 보일 테고 적어도 몹시 놀라게 할 게 뻔했다. 어쩔 줄 모르다가, 시간이 없었기에 그는 문틈으로 속삭였다. "뷔르스트너 양." 부르는 소리라기보다 부탁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누구 있어요?" 뷔르스트너 양이 물으며 커다래진 눈으로 둘러보았다. "접니다." K.는 말하고 앞으로 나섰다. "아, K. 씨!" 뷔르스트너 양이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마디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지금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요?" 뷔르스트너 양이 물었다. "꼭 지금이어야 해요? 좀 이상하잖아요, 안 그래요?" "아홉 시부터 기다렸습니다." "그야, 저는 극장에 있었으니까요. 기다리시는 줄은 몰랐죠." "드리려는 말의 계기가 오늘에야 생겼습니다." "그래요. 뭐, 원칙적으로 반대할 건 없어요. 쓰러질 만큼 피곤하다는 것만 빼면요. 그럼 몇 분만 제 방으로 오세요. 여기서는 절대 이야기 못 해요. 다들 깨울 테니까요. 그건 남들 때문보다 우리 때문에 더 곤란해요. 제가 방에 불을 켤 때까지 여기서 기다렸다가 여기 불을 끄세요." K.는 그렇게 한 뒤, 뷔르스트너 양이 방에서 한 번 더 나직이 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 "앉으세요." 그 여자가 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기는 피곤하다고 해 놓고도 침대 기둥 곁에 꼿꼿이 서 있었다. 작지만 꽃을 잔뜩 꾸민 모자조차 벗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정말 궁금하네요." 그 여자가 다리를 살짝 꼬았다. "어쩌면 지금 이야기할 만큼 급한 일은 아니었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K.가 입을 열었다. "머리말은 늘 흘려들어요." 뷔르스트너 양이 말했다. "그러면 제 일이 쉬워지는군요." K.가 말했다. "오늘 아침 당신 방이 말하자면 제 잘못으로 조금 어질러졌습니다. 제 뜻과 상관없이 낯선 사람들이 한 일이지만, 말씀드렸듯이 그래도 제 잘못입니다. 그걸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방이요?" 뷔르스트너 양이 물으며 방 대신 K.를 살피듯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K.가 말했다. 그제야 둘은 처음으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그 자체로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흥미로운 부분이잖아요." 뷔르스트너 양이 말했다. "아닙니다." K.가 말했다. "그럼," 뷔르스트너 양이 말했다. "남의 비밀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아요. 흥미롭지 않다고 우기시면 저도 더 따지지 않을게요. 사과는 기꺼이 받아 드리죠. 어질러진 흔적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으니 더욱 그렇고요." 그 여자는 두 손바닥을 허리 아래쪽에 댄 채 방을 한 바퀴 돌았다. 사진이 꽂힌 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머, 보세요." 그 여자가 소리쳤다. "제 사진들이 정말 뒤죽박죽이에요. 이건 고약하네요. 그러니까 누가 허락도 없이 제 방에 들어왔던 거예요." K.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분하고 쓸데없는 들뜬 버릇을 도무지 다스리지 못하는 직원 카미너를 속으로 저주했다. "이상하네요." 뷔르스트너 양이 말했다. "당신 스스로 삼가야 할 일을, 그러니까 제가 없을 때 제 방에 들어오는 일을 제가 나서서 금지해야 하다니요." "말씀드렸잖습니까, 뷔르스트너 양." K.는 말하며 자기도 사진 쪽으로 갔다. "당신 사진에 손을 댄 건 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믿지 않으시니 털어놓을 수밖에 없군요. 조사위원회가 은행 직원 세 명을 데려왔는데, 그중 한 명이 아마 사진을 만졌을 겁니다. 그 녀석은 다음 기회에 은행에서 내쫓아 버릴 겁니다." "그래요, 조사위원회가 여기 왔었습니다." K.가 덧붙였다. 그 여자가 묻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당신 때문에요?" 그 여자가 물었다. "네." K.가 대답했다. "설마요." 그 여자가 소리치며 웃었다. "정말입니다." K.가 말했다. "그럼 제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죄가 없다라……" 그 여자가 말했다. "어쩌면 중대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를 판단을 당장 내리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당신을 잘 알지도 못하고요. 그래도 조사위원회를 곧장 보낼 정도면 틀림없이 중범죄자일 텐데요.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자유로우니 — 적어도 이렇게 차분하신 걸 보면 감옥에서 도망쳐 나오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 리는 없겠네요." "네." K.가 말했다. "하지만 조사위원회가 제가 무죄라는 걸, 아니면 적어도 생각했던 것만큼 죄가 있지는 않다는 걸 알았을 수도 있지요." "물론이죠, 그럴 수 있어요." 뷔르스트너 양이 아주 귀 기울이며 말했다. "보십시오." K.가 말했다. "당신은 법정 일에 경험이 별로 없군요." "네, 없어요." 뷔르스트너 양이 말했다. "그래서 자주 아쉬웠어요. 저는 뭐든 다 알고 싶거든요. 법정 일은 특히 너무 흥미로워요. 법정에는 묘한 끌림이 있잖아요, 안 그래요? 하지만 그쪽으로는 분명히 곧 제 지식을 채울 거예요. 다음 달에 변호사 사무실에 사무원으로 들어가거든요." "그거 아주 잘됐군요." K.가 말했다. "그럼 제 소송을 조금 도와주실 수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죠." 뷔르스트너 양이 말했다. "왜 안 되겠어요? 제 지식은 기꺼이 쓰니까요." "저도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K.가 말했다. "아니면 적어도 당신이 반쯤 진심인 만큼은요. 변호사를 부르기엔 일이 너무 사소하지만, 조언해 줄 사람은 정말 필요합니다." "네, 하지만 제가 조언을 하려면 무슨 일인지 알아야죠." 뷔르스트너 양이 말했다.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K.가 말했다. "그걸 저도 모릅니다." "그럼 저를 놀리신 거네요." 뷔르스트너 양이 지나치게 실망해서 말했다. "그러려고 이렇게 늦은 밤을 고르실 필요는 전혀 없었잖아요." 그리고 그 여자는 둘이 그렇게 오래 함께 서 있던 사진 곁을 떠났다. "아니요, 뷔르스트너 양." K.가 말했다. "놀리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저를 안 믿으실 수가 있습니까! 아는 건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아는 것보다 더 말씀드렸지요. 사실 조사위원회 같은 건 전혀 아니었거든요. 달리 부를 이름을 몰라서 그렇게 부르는 겁니다. 아무것도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체포만 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위원회한테요." 뷔르스트너 양은 긴 소파에 앉아 다시 웃었다. "그래서 어땠는데요?" 그 여자가 물었다. "끔찍했습니다." K.는 말했지만, 지금은 그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온통 뷔르스트너 양의 모습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여자는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 팔꿈치는 소파 쿠션 위에 놓여 있었다 — 다른 손으로는 천천히 허리를 쓸고 있었다. "너무 두루뭉술하네요." 뷔르스트너 양이 말했다. "뭐가 두루뭉술합니까?" K.가 물었다. 그러다 생각이 나서 물었다. "어땠는지 보여 드릴까요?" 그는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저 벌써 피곤해요." 뷔르스트너 양이 말했다. "너무 늦게 오셨잖습니까." K.가 말했다. "이제 결국 제가 꾸중을 듣는군요. 그럴 만도 하죠. 들여보내지 말았어야 했으니까요. 결국 보니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곧 아시게 될 겁니다." K.가 말했다. "침대 곁의 작은 탁자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무슨 생각이세요?" 뷔르스트너 양이 말했다. "당연히 안 되죠!" "그럼 보여 드릴 수가 없습니다." K.는 흥분해서 말했다. 그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손해라도 입는 것처럼. "그래요, 보여 주는 데 필요하시다면 탁자를 옮기셔도 돼요." 뷔르스트너 양은 말하고, 잠시 뒤 더 약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무 피곤해서 해도 좋을 것보다 더 많이 허락하네요." K.는 작은 탁자를 방 한가운데 놓고 그 뒤에 앉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 제대로 떠올리셔야 합니다. 아주 흥미로워요. 제가 감독관입니다. 저기 트렁크 위에 감시인 둘이 앉아 있고, 사진 곁에는 젊은이 셋이 서 있습니다. 창문 손잡이에는, 이건 그냥 덧붙이는 말이지만, 흰 블라우스가 걸려 있습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참, 저를 잊고 있었군요. 가장 중요한 인물, 그러니까 저는 여기 작은 탁자 앞에 서 있습니다. 감독관은 더없이 편하게 앉아 있습니다. 다리를 꼬고, 팔은 여기 등받이 너머로 늘어뜨리고. 둘도 없는 건방진 놈이지요. 자, 이제 정말로 시작합니다. 감독관이 나를 깨워야 하는 것처럼 부릅니다. 아예 고함을 지릅니다. 당신이 이해하시게 하려면 유감스럽지만 저도 고함을 질러야 합니다. 그래 봐야 그가 그렇게 외치는 건 제 이름뿐이지만요." 웃으며 듣던 뷔르스트너 양이 K.가 소리치지 못하게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댔지만 이미 늦었다. K.는 역할에 너무 빠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요제프 K.!" 하고 외쳤다. 을러댄 것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내지른 그 외침이 그제야 천천히 방 안에 퍼져 나가는 것 같을 정도는 되었다.
그때 옆방 문에서 몇 번 노크 소리가 났다. 세고 짧고 규칙적인 소리였다. 뷔르스트너 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을 가슴에 얹었다. K.가 특히 크게 놀란 건, 그는 한동안 아침에 일어난 일과 그 일을 보여 주고 있던 아가씨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는 뷔르스트너 양에게 달려가 손을 잡았다. "아무것도 겁내지 마세요." 그가 속삭였다.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구일까요? 이 옆방은 거실이라 아무도 자지 않잖습니까." "아니에요." 뷔르스트너 양이 K.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제부터 그루바흐 부인의 조카가 여기서 자요. 대위예요. 마침 빈방이 없어서요. 저도 잊고 있었어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셔야 했다니! 속상해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K.는 말하고, 그 여자가 쿠션 위로 도로 쓰러지자 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저리 가요, 저리 가요." 그 여자는 말하고 서둘러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가세요, 제발 가세요. 뭘 원하시는 거예요. 저 사람이 문에 귀를 대고 다 듣고 있잖아요. 왜 이렇게 저를 괴롭히세요!" "당신이 좀 진정할 때까지는 안 가겠습니다." K.가 말했다. "방 저쪽 구석으로 가요. 거기서는 들을 수 없을 겁니다." 그 여자는 그쪽으로 이끌려 갔다. "생각해 보세요." 그가 말했다. "당신한테 난처한 일이긴 하지만 결코 위험한 일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이 일을 결정하는 건 그루바흐 부인인데, 대위가 조카이니 더욱 그렇지요, 부인은 저를 거의 떠받들다시피 하고 제 말이면 무조건 믿습니다. 게다가 부인은 저한테 기대고 있기도 합니다. 저한테 꽤 큰돈을 빌렸거든요. 우리가 함께 있었던 걸 어떻게 설명할지 당신이 무슨 제안을 하든, 조금이라도 그럴듯하기만 하면 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그루바흐 부인이 그 설명을 남들 앞에서만이 아니라 정말로 진심으로 믿게 만들겠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는 데 저를 조금도 봐주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덮쳤다고 퍼뜨리고 싶으시면 그루바흐 부인에게 그렇게 알리겠습니다. 부인은 그걸 믿으면서도 저에 대한 믿음은 잃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부인은 저를 따르니까요." 뷔르스트너 양은 말없이, 조금 움츠러든 채 앞의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그루바흐 부인이 제가 당신을 덮쳤다는 걸 왜 안 믿겠습니까." K.가 덧붙였다. 그의 눈앞에 그 여자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가르마를 타고, 낮게 부풀려 단단히 묶은 불그스름한 머리카락이었다. 그는 그 여자가 자기 쪽으로 눈길을 돌리리라 생각했지만, 그 여자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노크 소리가 나서 놀란 거예요. 대위가 여기 있어서 생길지 모를 일 때문이 아니라요. 당신이 소리친 뒤로 너무 조용했는데 노크 소리가 나서, 그래서 그렇게 놀랐어요. 게다가 제가 문 가까이 앉아 있어서 거의 바로 옆에서 두드린 것 같았거든요. 제안은 고맙지만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제 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제가 책임질 수 있어요. 누구 앞에서든요. 당신 제안에 저한테 얼마나 모욕적인 게 들어 있는지 모르시는 게 놀라워요. 물론 좋은 뜻도 들어 있고, 그건 분명히 알아요. 하지만 이제 가세요. 저를 혼자 있게 해 주세요. 아까보다 지금 더 그래야 해요. 부탁하신 몇 분이 벌써 삼십 분도 넘었어요." K.는 그 여자의 손을, 그리고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저한테 화나신 건 아니지요?" 그가 말했다. 그 여자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대답했다. "아니요, 아니요. 저는 한 번도, 누구한테도 화내지 않아요." 그는 다시 그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그 여자도 가만히 두었고, 그렇게 그를 문 쪽으로 데려갔다. 그는 나가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문 앞에서, 여기 문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그는 멈칫했다. 뷔르스트너 양은 그 틈을 타서 손을 빼내고 문을 열어 현관으로 빠져나간 뒤, 거기서 K.에게 나직이 말했다. "자, 이제 오세요, 제발. 보세요." — 그 여자는 대위의 방문을 가리켰다. 문 밑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불을 켜고 우리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지금 가요." K.는 말하고 앞으로 달려가 그 여자를 붙잡고 입술에, 그리고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었다. 목마른 짐승이 마침내 찾아낸 샘물을 혀로 핥아 대듯이. 마지막으로 그는 목에, 목울대가 있는 자리에 입을 맞추고 거기에 오래 입술을 대고 있었다. 대위의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가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뷔르스트너 양을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지만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 여자는 지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벌써 반쯤 돌아선 채 아무것도 모르는 듯 입맞춤을 받도록 손을 내맡기고는, 몸을 구부린 채 제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 K.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금방 잠들었다. 잠들기 전에 그는 한동안 자기가 한 일을 곰곰 생각했다. 그는 흡족했지만, 더 흡족하지 않다는 게 이상했다. 대위 때문에 뷔르스트너 양이 몹시 걱정되었다.
첫 심문
K.는 전화로 다음 일요일에 그의 일에 관한 간단한 심문이 있을 거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제부터 이런 심문이 규칙적으로, 어쩌면 매주는 아니더라도 꽤 자주 이어질 거라는 말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소송을 빨리 끝내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문이 모든 면에서 철저해야 하고, 또 그만큼 힘이 드는 일이라 결코 너무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짧은 심문을 빠르게 잇달아 여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심문 날을 일요일로 정한 것은 K.의 직장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려는 뜻이라고 했다. 그가 동의하리라 여기지만, 다른 날을 원한다면 되도록 맞춰 주겠다고 했다. 이를테면 밤에 심문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K.가 그리 맑은 정신이 아닐 거라고 했다. 어쨌든 K.가 이의를 달지 않는 한 일요일로 두겠다고 했다. 그가 반드시 나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니 굳이 일러둘 필요도 없을 거라고 했다. 그가 찾아가야 할 집의 번지도 알려 주었는데, 외진 변두리 거리에 있는 집으로 K.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이 통지를 받자 K.는 대답하지 않고 수화기를 걸었다. 그는 곧바로 일요일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분명 가야 했다. 소송이 굴러가기 시작했고 그는 거기에 맞서야 했다. 이 첫 심문이 마지막 심문이 되어야 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아직 전화기 곁에 서 있는데, 뒤에서 부행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행장은 전화를 쓰려 했는데 K.가 길을 막고 있었다. "나쁜 소식입니까?" 부행장이 가볍게 물었다. 무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K.를 전화기에서 떼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K.는 말하고 옆으로 비켜섰지만 가지는 않았다. 부행장은 수화기를 들고 연결을 기다리는 동안 송화구 너머로 말했다. "하나 여쭤도 될까요, K. 씨? 일요일 아침에 제 요트 놀이에 함께해 주시는 즐거움을 주시겠습니까? 꽤 많은 사람이 올 텐데, 분명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헤스테러 검사도 오고요. 오시겠습니까? 꼭 오세요!" K.는 부행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애썼다. 그에게는 가볍지 않은 일이었다. 한 번도 사이가 그리 좋았던 적이 없는 부행장이 이렇게 초대한다는 건 부행장 쪽에서 화해를 청한다는 뜻이었고, K.가 은행에서 얼마나 중요해졌는지, 그의 우정이, 아니 적어도 그가 어느 편도 들지 않는 것이 은행의 두 번째 높은 사람에게 얼마나 값지게 보이는지를 보여 주었다. 전화 연결을 기다리며 송화구 너머로 한 말일 뿐이라 해도 이 초대는 부행장이 스스로를 낮춘 일이었다. 그러나 K.는 두 번째 굴욕을 안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요일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이미 약속이 있어서요." "아쉽군요." 부행장은 말하고 마침 연결된 통화로 돌아섰다. 짧은 통화가 아니었지만 K.는 정신이 딴 데 팔려 그동안 내내 전화기 곁에 서 있었다. 부행장이 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그는 흠칫 놀라, 쓸데없이 서 있었던 것을 조금이라도 둘러대려고 말했다. "방금 전화를 받았는데 어디로 좀 오라고 하면서 몇 시인지 알려 주는 걸 잊었더군요." "다시 물어보시지요." 부행장이 말했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K.가 말했다. 그 때문에 처음부터 허술했던 그의 핑계는 더 허물어졌지만. 부행장은 가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했다. K.도 억지로 대답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주로 일요일 오전 아홉 시에 가는 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일이면 모든 법원이 그 시각에 일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일요일은 날이 흐렸다. K.는 무척 피곤했다. 단골 모임의 축하 자리가 있어서 밤늦게까지 술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늦잠을 잘 뻔했다. 한 주 동안 짜 둔 여러 계획을 곰곰 따지고 추릴 겨를도 없이 그는 서둘러 옷을 입고 아침도 거른 채 알려 준 변두리로 달려갔다. 이상하게도 주위를 둘러볼 틈이 별로 없었는데도 그는 자기 일에 얽힌 세 직원, 라벤슈타이너와 쿨리히와 카미너를 마주쳤다. 앞의 둘은 전차를 타고 K.가 가는 길을 가로질러 지나갔고, 카미너는 어느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다가 마침 K.가 지나갈 때 궁금한 듯 난간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모두 그를 눈으로 좇으며 자기네 상사가 달려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K.가 차를 타지 않은 것은 무슨 오기 때문이었다. 이 일에서만큼은 남의 도움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끔찍이 싫었다. 누구의 손도 빌리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 아주 조금이라도 누군가를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시간을 칼같이 지켜서 조사위원회 앞에서 비굴해 보이고 싶은 마음도 조금도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는 어떻게든 아홉 시에 닿으려고 달리고 있었다. 정해진 시각을 들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멀리서도 그 집을 알아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무슨 표지가 있든지 — 어떤 표지인지는 자기도 정확히 떠올려 보지 않았지만 — 아니면 입구 앞에 무언가 특별한 움직임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집이 있다는 율리우스 거리는, K.가 거리 초입에서 잠깐 멈춰 섰을 때 보니, 양쪽 모두 거의 똑같은 집들뿐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높다란 잿빛 셋집들이었다. 일요일 아침이라 대부분의 창가에 사람이 있었다. 셔츠 바람의 남자들이 거기 기대어 담배를 피우거나 어린아이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창틀에 세워 붙들고 있었다. 이불을 높이 쌓아 놓은 창도 있었는데, 그 위로 헝클어진 여자의 머리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골목 건너편으로 서로 소리쳐 불렀는데, 마침 K.의 머리 위에서 그런 외침 하나가 터지자 큰 웃음이 일었다. 긴 거리 곳곳에 고르게, 길보다 낮은 곳에 계단 몇 개를 내려가야 닿는 작은 식료품 가게들이 있었다. 여자들이 그곳을 드나들거나 계단에 서서 수다를 떨었다. 창 위쪽을 향해 물건을 권하던 과일 장수는 K.만큼이나 딴 데를 보고 있다가 수레로 그를 칠 뻔했다. 마침 부자 동네에서 쓰다 버린 축음기가 끔찍한 소리로 울리기 시작했다.
K.는 골목 안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갔다. 이제는 시간이 있다는 듯, 아니면 심문 판사가 어느 창에서 그를 보고 있어서 K.가 도착한 걸 안다는 듯 느릿느릿. 아홉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그 집은 꽤 안쪽에 있었고 거의 이상할 만큼 넓었다. 특히 대문 통로가 높고 넓었다. 짐수레가 드나들라고 만든 게 분명했다. 넓은 마당을 여러 창고가 둘러싸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잠겨 있었고 회사 간판들이 붙어 있었다. 그중 몇몇은 K.가 은행 일로 아는 회사였다. 평소 버릇과 달리 이런 겉모습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며, 그는 마당 입구에서도 잠시 멈춰 섰다. 그 가까이 상자 위에 맨발의 남자가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손수레 위에서는 사내아이 둘이 흔들거리며 놀고 있었다. 펌프 앞에는 잠옷 윗도리를 걸친 가냘픈 아가씨가 서서 물통에 물이 차는 동안 K.를 바라보았다. 마당 한구석에서는 두 창문 사이에 밧줄을 걸고 있었는데, 벌써 말리려는 빨래가 걸려 있었다. 한 남자가 아래에 서서 몇 마디씩 외치며 일을 지시하고 있었다.
K.는 심문실로 가려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멈춰 섰다. 이 계단 말고도 마당에는 계단 입구가 세 개나 더 보였고, 게다가 마당 끝의 작은 통로는 두 번째 마당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방이 어디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알려 주지 않은 게 화가 났다. 그를 대하는 태도가 참 이상하게 허술하거나 무심했다. 그는 그 점을 아주 크고 분명하게 지적할 작정이었다. 결국 그는 그냥 첫 번째 계단을 올라가며, 법원은 죄에 이끌린다던 감시인 빌렘의 말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가지고 놀았다. 그 말대로라면 심문실은 K.가 아무렇게나 고른 계단에 있어야 했다.
올라가면서 그는 계단에서 놀던 많은 아이들을 방해했다. 그가 그 줄 사이를 지나가면 아이들은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다음에 또 여기 와야 한다면," 그는 혼잣말을 했다. "아이들 마음을 사게 사탕을 가져오든가, 두들겨 패게 지팡이를 가져와야겠군." 이 층에 거의 다 가서는 구슬 하나가 제 길을 다 굴러갈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하기도 했다. 그동안 어른 불량배처럼 꾀까다로운 얼굴을 한 사내아이 둘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었다. 떼어 내려면 아이들을 아프게 해야 했을 텐데, 그는 아이들이 울며 소리 지를까 봐 겁이 났다.
이 층에서 본격적인 찾기가 시작되었다. 조사위원회가 어디 있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목수 란츠라는 사람을 지어냈다. 그 이름이 떠오른 건 그루바흐 부인의 조카인 대위의 이름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집집마다 목수 란츠가 여기 사느냐고 물어서, 그렇게 방 안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도 대개 없었다. 거의 모든 문이 열려 있었고 아이들이 들락날락했기 때문이다. 대개 창문 하나 달린 작은 방들이었고, 그 안에서 밥도 지었다. 젖먹이를 안고 남은 한 손으로 화덕 앞에서 일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앞치마만 걸친 것 같은 열서너 살 여자아이들이 가장 부지런히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어느 방에서나 침대는 아직 쓰이고 있었다. 거기 아픈 사람이나 아직 자는 사람이나 옷을 입은 채 몸을 쭉 뻗고 있는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문이 닫힌 집에는 K.가 노크를 하고 목수 란츠가 여기 사느냐고 물었다. 대개 여자가 문을 열고 물음을 들은 뒤 방 안에서 침대에서 일어나는 누군가를 돌아보았다. "이 신사분이 목수 란츠가 여기 사느냐고 묻는데." "목수 란츠?" 침대의 사람이 물었다. "네." K.가 말했다. 조사위원회는 분명 여기 없었고, 그러니 그의 할 일도 끝났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K.가 목수 란츠를 찾는 데 무척 매달린다고 여겨 오래 생각하더니, 란츠라는 이름은 아닌 목수를 대거나, 란츠와 아주 조금 닮은 이름을 대거나, 이웃에게 물어보거나, 아니면 K.를 저 멀리 떨어진 문까지 데려갔다. 거기 그런 사람이 셋방에 세 들어 살지도 모른다거나, 자기들보다 더 잘 알려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K.는 직접 물을 필요도 거의 없이 이런 식으로 이 층 저 층으로 끌려다녔다. 처음에는 그렇게 쓸모 있어 보였던 계획이 후회스러웠다. 육 층 앞에서 그는 찾기를 그만두기로 하고, 더 위로 데려다주려던 친절한 젊은 노동자와 작별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헛수고라는 게 다시 화가 나서, 그는 한 번 더 돌아가 육 층의 첫 번째 문을 두드렸다. 작은 방에서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벽시계였는데, 벌써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목수 란츠가 여기 삽니까?" 그가 물었다. "들어가세요." 반짝이는 까만 눈의 젊은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마침 통에다 아이 빨래를 하고 있다가 젖은 손으로 옆방의 열린 문을 가리켰다.
K.는 무슨 집회장에 들어서는 줄 알았다. 온갖 사람들이 북적이며 —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 창문 둘 달린 중간 크기의 방을 채우고 있었다. 천장 바로 밑으로는 회랑이 방을 빙 둘러 있었는데, 거기도 사람들로 꽉 차 있어서 다들 허리를 구부리고 서서 머리와 등을 천장에 대고 있었다. 공기가 너무 탁해서 K.는 다시 밖으로 나와, 아마 자기 말을 잘못 알아들었을 젊은 여자에게 말했다. "목수, 란츠라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는데요?" "네." 여자가 말했다. "어서 들어가세요." 여자가 다가와 문손잡이를 잡으며 "당신이 들어가면 문을 닫아야 해요. 이제 아무도 더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하고 말하지 않았다면 K.는 여자 말을 따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주 분별 있는 일이군요." K.가 말했다. "하지만 벌써 너무 꽉 찼는데요." 그래도 그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문 바로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남자 사이로 — 한 사람은 두 손을 멀리 내밀고 돈을 세는 시늉을 했고, 다른 사람은 그의 눈을 날카롭게 들여다보았다 — 손 하나가 K.를 붙잡았다. 볼이 빨간 작은 사내아이였다. "이리 오세요, 이리 오세요." 아이가 말했다. K.는 아이에게 이끌려 갔다. 뒤죽박죽 우글거리는 사람들 사이에도 좁은 길이 하나 비어 있었는데, 어쩌면 두 편을 가르는 길인 것 같았다. 그렇게 볼 만했던 게, K.가 보니 좌우의 앞줄에는 그를 향한 얼굴이 거의 없고, 제 편 사람들에게만 말하고 몸짓하는 사람들의 등만 보였다. 대부분 검은 옷 차림이었다. 낡아서 길고 헐렁하게 늘어진 명절 나들이옷이었다. 이 옷차림만 아니었다면 K.는 이 모든 게 무슨 구역 정치 집회인 줄 알았을 것이다.
K.가 이끌려 간 홀 저쪽 끝에는 아주 낮은, 마찬가지로 사람이 꽉 들어찬 단상이 있었고, 그 위에 작은 탁자가 가로로 놓여 있었다. 그 뒤, 단상 가장자리 가까이에는 작고 뚱뚱한 남자가 씩씩거리며 앉아서 뒤에 선 사람과 — 그 사람은 팔꿈치를 의자 등받이에 괴고 다리를 꼬고 있었다 — 크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는 누구를 흉내라도 내는 듯 팔을 허공으로 휘둘렀다. K.를 데려온 아이는 제 소식을 전하느라 애를 먹었다. 벌써 두 번이나 발끝으로 서서 무언가 전하려 했지만 위의 남자는 알아채지 못했다. 단상 위의 한 사람이 아이를 가리켜 주고 나서야 남자는 아이 쪽으로 돌아서서 몸을 숙이고 아이가 나직이 전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는 시계를 꺼내더니 재빨리 K. 쪽을 보았다. "한 시간 오 분 전에 나오셨어야죠." 그가 말했다. K.는 무언가 대답하려 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홀 오른쪽 절반에서 여기저기 웅성거림이 일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오 분 전에 나오셨어야죠." 이번에는 남자가 목소리를 높여 되풀이하며 재빨리 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곧 웅성거림도 더 커졌다가, 남자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천천히 잦아들었다. 이제 홀은 K.가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조용했다. 회랑의 사람들만 한마디씩 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위쪽의 어스름과 김과 먼지 속에서 알아볼 수 있는 한, 그들은 아래 사람들보다 옷차림이 초라해 보였다. 어떤 이들은 머리가 쓸리지 않도록 쿠션을 가져와 머리와 천장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K.는 말하기보다 지켜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서 늦었다는 데 대해 변명하지 않고 이렇게만 말했다. "제가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여기 왔습니다." 다시 홀 오른쪽 절반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쉽게 넘어오는 사람들이군, K.는 생각했다. 다만 바로 뒤에 있는 홀 왼쪽 절반이 조용한 게 마음에 걸렸다. 거기서는 드문드문 몇 사람만 손뼉을 쳤을 뿐이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면 모두를 한꺼번에,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잠시나마 다른 사람들도 제 편으로 만들 수 있을지 궁리했다.
"네."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당신을 심문할 의무가 없습니다." — 다시 웅성거림이 일었지만 이번에는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다. 남자가 손을 저어 사람들을 말리며 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오늘은 예외로 심문하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늦는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 앞으로 나오세요!" 누군가 단상에서 뛰어내려 K.가 설 자리가 생겼고, 그는 그 자리로 올라갔다. 그는 탁자에 바짝 붙어 섰다. 뒤에서 미는 힘이 너무 세서, 버티지 않으면 심문 판사의 탁자를, 어쩌면 심문 판사까지 단상 아래로 밀어 떨어뜨릴 판이었다.
그러나 심문 판사는 그런 데는 신경 쓰지 않고 제법 편안히 의자에 앉아 있다가, 뒤의 남자에게 마무리 한마디를 건넨 뒤 작은 수첩을 집어 들었다. 탁자 위에 놓인 유일한 물건이었다. 학교 공책 같은 낡은 수첩으로, 하도 많이 넘겨서 모양이 다 망가져 있었다. "자," 심문 판사가 수첩을 넘기며 확인하는 투로 K.에게 말했다. "당신은 페인트공이지요?" "아닙니다." K.가 말했다. "큰 은행의 수석 간부입니다." 이 대답에 오른쪽 편에서 웃음이 터졌는데, 어찌나 진심으로 웃는지 K.도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심한 기침이라도 하듯 몸을 들썩였다. 회랑에서도 몇몇이 웃었다. 잔뜩 화가 난 심문 판사는 아래 사람들에게는 아마 힘을 쓸 수 없었던지 회랑에다 분풀이를 하려고 벌떡 일어나 회랑을 을러댔다. 평소엔 별로 눈에 띄지 않던 그의 눈썹이 짙고 검고 크게 눈 위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홀 왼쪽 절반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쪽 사람들은 줄지어 서서 얼굴을 단상 쪽으로 향한 채, 위에서 오가는 말도, 다른 편의 소란도 똑같이 차분하게 듣고 있었다. 자기네 줄의 몇몇이 이따금 다른 편과 함께 움직여도 그냥 두었다. 수가 더 적은 왼쪽 편 사람들도 속을 들여다보면 오른쪽 편 사람들만큼이나 보잘것없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차분한 태도가 그들을 더 무게 있어 보이게 했다. 이제 말을 시작하며 K.는 자기가 그들의 뜻을 대변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판사님, 제가 페인트공이냐는 판사님의 물음은 — 아니, 판사님은 묻지도 않으시고 아예 그렇다고 못 박으셨지요 — 저를 상대로 벌어지고 있는 이 절차가 어떤 것인지를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이건 애초에 절차도 아니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제가 절차라고 인정할 때만 절차니까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인정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딱해서요. 이 일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려면 딱하게 여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엉터리 절차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스스로를 돌아보시라고 그 말을 권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K.는 말을 멈추고 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한 말은 날카로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날카로웠지만 그래도 옳았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나올 만했지만 모두 조용했다. 다음 말을 숨죽여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 고요 속에서 모든 것을 끝장낼 폭발이 준비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방해가 된 건 그때 홀 끝의 문이 열리며 그 젊은 빨래하던 여자가, 아마 일을 끝냈는지 들어와서, 아무리 조심했는데도 몇몇 눈길을 끈 것이었다. 심문 판사만이 K.를 곧바로 기쁘게 해 주었다. 그 말에 단박에 찔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태 서서 듣고 있었다. 회랑을 향해 일어섰다가 K.의 연설에 허를 찔린 것이다. 이제 말이 멎은 틈에 그는 남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 듯 천천히 앉았다. 표정을 가라앉히려는지 그는 다시 수첩을 집어 들었다.
"소용없습니다." K.가 말을 이었다. "판사님의 그 수첩도 제 말이 맞다는 걸 보여 주니까요." 낯선 사람들 모임에서 제 차분한 목소리만 울리는 게 흐뭇해서, K.는 대담하게도 심문 판사에게서 수첩을 냉큼 빼앗아, 만지기 싫다는 듯 손가락 끝으로 가운데 한 장을 집어 들어 올렸다. 그러자 빽빽하게 적히고 얼룩지고 가장자리가 누레진 종이들이 양쪽으로 축 늘어졌다. "이게 심문 판사님의 기록이군요." 그가 말하며 수첩을 탁자에 떨어뜨렸다. "마음 놓고 계속 읽으십시오, 판사님. 이 죄의 장부 따위는 정말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들여다볼 수도 없지만요. 손가락 끝 두 개로나 집을 수 있지, 손에 들 수는 없으니까요." 심문 판사가 탁자에 떨어진 그대로의 수첩을 집어 조금 추스르고는 다시 들고 읽기 시작한 것은 깊은 굴욕의 표시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했다.
앞줄 사람들의 얼굴이 어찌나 팽팽하게 K.를 향하고 있는지 그는 한동안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하나같이 나이 든 남자들이었고, 몇몇은 수염이 하얬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이 모임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사람들이 아닐까? K.가 연설을 시작한 뒤로 빠져든 꼼짝 않는 상태에서, 이 모임은 심문 판사가 굴욕을 당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제게 일어난 일은," K.가 전보다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자꾸 앞줄 얼굴들을 훑었기에 그의 말은 조금 산만하게 들렸다. "제게 일어난 일은 하나의 경우일 뿐이고, 그 자체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많은 사람에게 행해지는 절차의 한 징후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위해 여기 섰습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선가 누군가 두 손을 쳐들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브라보! 왜 아니겠어? 브라보! 또 브라보!" 앞줄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수염을 쓰다듬었고, 그 외침에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K.도 그 외침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힘이 났다. 이제 그는 모두가 박수를 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대체로 이 일을 곰곰 생각하기 시작하고, 이따금 누군가 설득되어 넘어오기만 하면 충분했다.
"저는 연설로 성공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이런 생각에서 K.가 말했다. "그런 성공은 제 몫도 아닐 겁니다. 심문 판사님이 아마 훨씬 말씀을 잘하시겠지요. 그게 판사님 직업이니까요. 제가 바라는 건 공공의 폐단을 공개적으로 따져 보는 것뿐입니다. 들어 보십시오. 저는 열흘쯤 전에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웃어넘기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저는 아침에 침대에서 불시에 당했습니다. 어쩌면 — 심문 판사님 말씀으로 보아 그럴 수도 있습니다 — 저만큼 죄 없는 어느 페인트공을 체포하라는 명령이었는데 저를 골랐는지도 모르지요. 옆방은 거친 감시인 둘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위험한 강도였다 해도 이보다 더 철저히 대비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이 감시인들은 타락한 불한당들이었습니다. 제 귀가 따갑도록 떠들어 댔고, 뇌물을 받으려 했고, 그럴듯한 말로 제 속옷과 옷가지를 우려내려 했고, 제 눈앞에서 제 아침밥을 뻔뻔하게 먹어 치워 놓고는 아침밥을 가져다주겠다며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세 번째 방으로 감독관 앞에 끌려갔습니다. 제가 무척 존중하는 어느 숙녀의 방이었는데, 저 때문에, 하지만 제 잘못은 없이, 감시인들과 감독관이 들어와 있는 탓에 그 방이 말하자면 더럽혀지는 걸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침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침착했고, 아주 차분하게 감독관에게 — 그가 여기 있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 제가 왜 체포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감독관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숙녀의 의자에 더없이 멍청한 오만의 본보기처럼 앉아 있던 모습이. 여러분, 그는 사실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정말 아무것도 몰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저를 체포했고, 그걸로 만족했습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그 숙녀의 방에 제 은행의 하급 직원 셋을 데려다 놓았는데, 그들은 그 숙녀의 물건인 사진들을 만지작거리고 뒤섞어 놓는 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직원들을 데려온 데에는 물론 다른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 하숙집 주인과 그 집 하녀처럼 제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퍼뜨리고, 제 평판을 떨어뜨리고, 특히 은행에서 제 자리를 흔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어느 것도, 조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제 하숙집 주인은 아주 소박한 사람인데 — 존경하는 뜻에서 여기 이름을 밝히겠습니다. 그루바흐 부인이라고 합니다 — 그 그루바흐 부인조차 그런 체포는 제대로 감독받지 못한 골목 아이들의 장난 이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볼 만큼 분별이 있었습니다. 되풀이하지만, 이 모든 일은 제게 불쾌함과 잠깐의 짜증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나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K.가 여기서 말을 멈추고 조용한 심문 판사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판사가 막 사람들 속의 누군가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K.는 웃으며 말했다. "방금 여기 제 옆의 심문 판사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가운데는 여기 위에서 지휘받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 신호가 야유를 부르려는 건지 박수를 부르려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미리 밝혀 버림으로써 저는 그 신호의 뜻을 알아낼 기회를 일부러 포기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심문 판사님께 공개적으로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저 아래 돈 받는 부하들을 은밀한 신호로 부리지 마시고 큰 소리로 말해서 부리십시오. 이를테면 한 번은 '이제 야유하라', 다음번엔 '이제 박수 쳐라' 하고요."
당황해서인지 조바심이 나서인지 심문 판사는 의자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아까부터 그와 이야기하던 뒤의 남자가 다시 그에게 몸을 숙였다. 대체로 기운을 북돋우려는 건지, 무슨 특별한 조언을 하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나직하지만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까는 그렇게 생각이 달라 보이던 두 편이 섞였고, 몇몇은 손가락으로 K.를, 다른 이들은 심문 판사를 가리켰다. 방 안의 뿌연 김이 무척 성가셨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살펴볼 수도 없었다. 특히 회랑 사람들에게는 거슬렸을 것이다. 그들은 심문 판사를 겁먹은 눈으로 곁눈질하면서 아래 사람들에게 나직이 물어 형편을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대답도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그만큼 나직이 돌아왔다.
"곧 끝내겠습니다." K.는 말하고, 종이 없었기에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소리에 놀라 심문 판사와 그 조언자의 머리가 순식간에 떨어졌다. "저는 이 일 전체에서 한 발 떨어져 있으니 차분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이른바 법원이라는 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제 말을 들으면 크게 얻는 게 있을 겁니다. 제가 하는 말을 두고 서로 의논하시는 건 나중으로 미뤄 주십시오. 저는 시간이 없고 곧 가야 하니까요."
곧바로 조용해졌다. K.는 벌써 그만큼 모임을 휘어잡고 있었다. 처음처럼 뒤섞여 소리치지도 않았고 박수조차 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설득되었거나 설득되기 직전인 것 같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K.가 아주 나직이 말했다. 모임 전체가 귀를 곤두세우는 게 기뻤던 것이다. 그 고요 속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일었는데, 그 소리는 가장 열광적인 박수보다도 더 사람을 들뜨게 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법원이 하는 모든 일 뒤에는, 그러니까 제 경우라면 체포와 오늘 심문 뒤에는 거대한 조직이 있습니다. 뇌물 받는 감시인과 어리석은 감독관과, 잘 봐줘야 변변찮은 심문 판사들만 거느리는 게 아니라, 어쨌든 높은, 가장 높은 등급의 판사단까지 거느린 조직입니다. 거기에 딸린 수없이 많은, 없어서는 안 될 심부름꾼과 서기와 헌병과 그 밖의 보조 인력들, 어쩌면 사형 집행인까지. 저는 그 말을 입에 올리기를 꺼리지 않습니다. 그럼 여러분, 이 거대한 조직의 뜻은 무엇입니까? 죄 없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그들을 상대로 뜻 없고 대개는 제 경우처럼 아무 결과도 없는 절차를 벌이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뜻 없는데 관리들의 가장 지독한 부패를 어떻게 감출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가장 높은 판사라도 자기 자신에게조차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감시인들은 체포된 사람의 옷을 몸에서 벗겨 훔치려 하고, 그래서 감독관들은 남의 집에 쳐들어오고, 그래서 죄 없는 사람들은 심문을 받기는커녕 모임 전체 앞에서 모욕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감시인들은 체포된 사람의 물건을 가져간다는 보관소 이야기만 했습니다. 저는 그 보관소라는 곳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이 애써 모은 재산이, 도둑 같은 보관소 관리들이 훔쳐 가지 않은 것은 썩어 가고 있을 그곳을요."
홀 끝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K.는 말을 멈췄다. 그는 그쪽을 보려고 손으로 눈 위를 가렸다. 흐린 햇빛이 김을 희뿌옇게 만들어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그 빨래하던 여자였다. K.가 여자가 들어올 때부터 큰 방해가 되리라 알아본 여자였다. 여자에게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다. K.에게 보인 건 한 남자가 여자를 문가 구석으로 끌고 가 끌어안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그런데 비명을 지른 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남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둘레에 작은 원이 생겼다. 가까이 있는 회랑 사람들은 K.가 모임에 불어넣은 진지함이 이런 식으로 끊긴 게 신이 나는 것 같았다. K.는 처음 받은 인상 그대로 곧장 달려가려 했다. 모두가 거기 질서를 잡고 적어도 그 한 쌍을 홀에서 내보내고 싶어 하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앞줄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도 K.를 지나가게 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가로막았다. 누군가의 손이 — 돌아볼 틈도 없었다 — 뒤에서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고, 노인들이 팔을 내밀어 막았다. K.는 이제 그 한 쌍은 더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기 자유가 묶이는 것 같았고, 체포가 정말로 진짜가 되는 것 같아서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단상에서 뛰어내렸다. 이제 그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하고 섰다. 사람들을 잘못 판단했던 걸까? 자기 연설이 효과를 낼 거라고 너무 믿었던 걸까? 그가 말하는 동안에는 시치미를 떼다가, 이제 그가 결론에 이르자 시치미 떼기에 싫증이 난 걸까? 둘레의 얼굴들이란! 작고 까만 눈알들이 이리저리 휙휙 움직였고, 뺨은 술꾼처럼 축 늘어졌고, 긴 수염은 뻣뻣하고 성겨서, 그걸 잡으면 수염을 잡는 게 아니라 그저 손으로 갈퀴를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수염 밑으로 — 이것이 K.가 알아낸 진짜 발견이었다 — 윗옷 깃에 크기와 빛깔이 저마다 다른 배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보이는 한 모두가 그 배지를 달고 있었다. 모두가 한패였다. 오른쪽과 왼쪽의 겉보기 편들이. 그리고 그가 갑자기 돌아서자 심문 판사의 옷깃에도 같은 배지가 보였다. 판사는 두 손을 무릎에 얹고 태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군!" K.는 외치며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갑자기 깨달은 것이 터져 나올 자리를 원했다. "보아하니 너희는 모두 관리들이구나. 내가 규탄한 바로 그 썩은 패거리야. 너희는 청중과 염탐꾼으로 여기 몰려들어서 편을 가른 척하고, 한쪽은 나를 떠보려고 박수를 쳤지. 죄 없는 사람을 어떻게 꾀어내는지 배우고 싶었겠지. 글쎄, 여기 온 게 정말 헛수고였기를 바란다. 너희는 누군가 너희한테서 무죄를 변호해 주길 기대했다고 재미있어했거나, 아니면 — 비켜, 안 비키면 친다." K.는 유난히 가까이 다가붙은, 떨고 있는 노인에게 소리쳤다. — "아니면 정말로 뭔가를 배웠겠지. 그럼 너희 일에 행운을 빈다." 그는 탁자 가장자리에 놓인 모자를 재빨리 집어 들고,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어쨌든 더없이 놀란 고요 속에서 출구 쪽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러나 심문 판사가 K.보다 더 빨랐던 모양이다. 판사는 문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판사가 말했다. K.는 멈춰 섰지만 심문 판사가 아니라 벌써 손잡이를 잡은 문을 보고 있었다. "알려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심문 판사가 말했다. "당신은 오늘 — 아마 아직 깨닫지 못하셨겠지만 — 심문이 체포된 사람에게 어떤 경우에든 주는 이점을 스스로 내던지셨습니다." K.는 문을 보고 웃었다. "이 불한당들아, 심문 따위 몽땅 너희나 가져라." 그는 소리치고 문을 열어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등 뒤에서 다시 살아난 모임의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은 학생들처럼 방금 일어난 일을 두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빈 재판정에서 · 대학생 · 법원 사무처
K.는 그다음 한 주 동안 날마다 새 통지를 기다렸다. 심문을 받지 않겠다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 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통지가 일요일 저녁까지 정말로 오지 않자, 그는 말없이 같은 집 같은 시각으로 다시 불려 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일요일에 다시 그곳으로 갔고, 이번에는 곧장 계단과 복도를 지나갔다. 그를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이 문간에서 인사를 건넸지만 더는 아무에게도 물을 필요가 없었고, 그는 곧 제대로 된 문에 이르렀다. 노크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그는 문가에 서 있는 낯익은 여자에게 더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옆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오늘은 재판이 없어요." 여자가 말했다. "재판이 왜 없단 말입니까?" 그는 믿기지 않아 물었다. 그러나 여자는 옆방 문을 열어 그를 납득시켰다. 방은 정말로 비어 있었고, 비어 있으니 지난 일요일보다 더 초라해 보였다. 단상 위에 그대로 놓인 탁자에는 책이 몇 권 있었다. "저 책들을 좀 봐도 될까요?" K.가 물었다. 딱히 궁금해서가 아니라 여기 온 게 완전히 헛걸음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안 돼요." 여자가 말하며 다시 문을 닫았다. "그건 허락되지 않아요. 그 책들은 심문 판사님 거예요." "아, 그렇군요." K.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책들은 아마 법전이겠지요. 죄가 없는데도,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판결을 받는 게 이 법원이 하는 방식이니까요." "그렇겠지요." 여자가 말했다.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K.가 말했다. "심문 판사님께 뭐라고 전해 드릴까요?" 여자가 물었다. "그분을 아십니까?" K.가 물었다. "그럼요." 여자가 말했다. "제 남편이 법원 직원인걸요." 그제야 K.는 지난번에 빨래통 하나만 놓여 있던 방이 지금은 살림살이를 다 갖춘 거실이 되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여자는 그가 놀라는 걸 보고 말했다. "네, 우리는 여기 공짜로 살아요. 대신 재판이 있는 날에는 방을 비워 줘야 해요. 남편 자리에는 불편한 점이 많아요." "제가 놀란 건 방 때문이라기보다," K.가 여자를 사납게 보며 말했다. "당신이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지난번 재판에서 제가 당신 연설을 방해한 그 일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자가 물었다. "물론이죠." K.가 말했다. "지금이야 다 지나서 거의 잊었지만, 그때는 정말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 입으로 결혼한 여자라고 하시는군요." "연설이 중간에 끊긴 게 당신한테 손해는 아니었어요. 나중에 사람들이 그 연설을 아주 나쁘게 평했거든요." "그럴지도 모르죠." K.는 말을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용서되는 건 아닙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다 저를 용서해요." 여자가 말했다. "그때 저를 끌어안은 사람은 오래전부터 저를 쫓아다녀요. 저는 대체로 남자를 끄는 여자가 아닐지 몰라도, 그 사람한테는 그래요. 막을 방법이 없어요. 남편도 벌써 체념했어요. 자리를 지키려면 참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 사람은 대학생인데 앞으로 더 큰 권력을 쥘 사람이니까요. 늘 제 뒤를 따라다녀요. 바로 당신이 오기 전에 나갔어요." "다른 모든 것과 잘 어울리는군요." K.가 말했다. "놀랍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무언가를 좀 바로잡고 싶으신 거죠?" 여자가 천천히, 살피듯이 물었다. 자기에게도 K.에게도 위험한 말을 하는 것처럼. "당신 연설을 듣고 그렇게 짐작했어요. 저는 그 연설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물론 일부만 들었지만요. 처음은 놓쳤고, 마지막에는 대학생이랑 바닥에 누워 있었으니까요. — 여긴 정말 역겨워요." 여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K.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뭔가 나아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K.는 웃으며 여자의 부드러운 두 손 안에서 제 손을 조금 돌렸다. "사실," 그가 말했다. "당신 말처럼 여기서 무언가를 나아지게 하라고 고용된 사람은 아닙니다. 당신이 이를테면 심문 판사에게 그런 말을 하면 비웃음을 사거나 벌을 받을 겁니다. 사실 내 뜻대로라면 이런 일에 끼어들지도 않았을 거고, 이 법원 제도가 아무리 고쳐야 할 게 많아도 그 때문에 잠을 설친 적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체포되었다는 것 때문에 — 사실 나는 체포된 몸입니다 — 여기 끼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나를 위해서요. 하지만 그러면서 당신한테도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물론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이웃 사랑 때문만은 아닙니다. 당신도 나를 도울 수 있으니까요." "제가 어떻게요?" 여자가 물었다. "이를테면 지금 저 탁자 위의 책들을 보여 주시면요." "물론이죠!" 여자는 소리치며 그를 서둘러 끌고 갔다. 손때 묻은 낡은 책들이었다. 한 권은 표지가 가운데서 거의 부서져 조각들이 실오라기로만 붙어 있었다. "여긴 뭐든 다 더럽군요." K.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여자는 K.가 책을 집기 전에 앞치마로 겉먼지나마 닦아 냈다. K.가 첫 번째 책을 펼치자 음란한 그림이 나왔다.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린 사람의 저속한 뜻은 뚜렷이 알아볼 수 있었지만, 솜씨가 어찌나 서툰지 결국 보이는 건 그림에서 너무 몸뚱이만 불거져 나온 남자와 여자뿐이었다. 둘은 지나치게 꼿꼿이 앉아 있었고, 원근법이 틀려서 서로를 향해 몸을 돌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K.는 더 넘기지 않고 두 번째 책의 속표지만 펼쳐 보았다. 「그레테가 남편 한스에게서 겪어야 했던 괴로움」이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이게 여기서 공부한다는 법전이군요." K.가 말했다. "이런 사람들한테 내가 재판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여자가 말했다. "그러시겠어요?" "정말 당신한테 위험하지 않게 그럴 수 있습니까? 아까 남편이 윗사람들에게 무척 매여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도 도와드리고 싶어요." 여자가 말했다. "이리 오세요, 의논해야 해요. 제 위험 얘기는 더 하지 마세요. 저는 두려워하고 싶은 곳에서만 위험을 두려워해요. 이리 오세요." 여자는 단상을 가리키며 함께 계단에 앉자고 했다. "눈이 참 예쁘고 까맣네요." 둘이 앉자 여자는 아래에서 K.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람들은 제 눈도 예쁘다고 하는데 당신 눈이 훨씬 예뻐요. 사실 처음 여기 들어오셨을 때부터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이 모임 방에 들어왔던 거예요. 평소엔 절대 그러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금지된 일인데도요." 결국 이런 거였군, K.는 생각했다. 나한테 몸을 내미는 거야. 여기 둘레의 모든 사람처럼 타락했어. 법원 관리들에게 싫증이 났겠지. 그럴 만도 해. 그래서 아무 낯선 사람에게나 눈이 예쁘다고 추어올리는 거야. 그리고 K.는 말없이 일어섰다. 제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해서 여자에게 자기 행동을 설명하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이 나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를 정말로 도우려면 높은 관리들과 줄이 닿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분명 여기 떼로 돌아다니는 하급 직원들만 알 겁니다. 그 사람들은 아주 잘 알 테고, 그들에게는 이것저것 통하기도 하겠지요. 그건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통할 수 있는 가장 큰 일도 소송의 최종 결과에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때문에 친구 몇을 잃게 되겠지요. 그건 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과 지금까지의 관계를 그대로 이어 가세요. 당신한테는 그게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으니까요. 아쉬운 마음 없이 하는 말은 아닙니다. 당신의 칭찬에 나도 어떻게든 답하자면, 나도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특히 지금처럼 그렇게 슬프게 나를 볼 때는요. 당신이 그럴 까닭은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당신은 내가 맞서 싸워야 하는 무리에 속해 있고, 그 안에서 아주 편안하게 지냅니다. 당신은 그 대학생을 사랑하기까지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남편보다는 그를 더 좋아하지요. 당신 말에서 그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니에요!" 여자는 소리치며 그대로 앉은 채 K.의 손만 붙잡았다. 그가 재빨리 빼지 못한 것이다. "지금 가시면 안 돼요. 저를 잘못 판단한 채로 가시면 안 돼요. 정말로 지금 가실 수 있어요? 제가 정말 그렇게 하찮아서 조금만 더 여기 있어 주는 호의조차 베풀기 싫으세요?" "나를 오해하시는군요." K.가 말하며 다시 앉았다. "내가 여기 있기를 정말로 바라신다면 기꺼이 있겠습니다. 시간은 있으니까요. 오늘 재판이 있을 줄 알고 온 거니까요. 아까 한 말은, 내 소송에서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려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서운해하실 일은 아닙니다. 나는 소송이 어떻게 끝나든 전혀 관심이 없고, 유죄 판결을 받아도 웃어넘길 거니까요. 소송이 정말로 끝나기나 한다면요. 나는 그것도 무척 의심스럽습니다. 오히려 관리들이 게으르거나 잘 잊어버리거나, 어쩌면 겁이 나서 절차가 이미 중단되었거나 곧 중단될 거라고 봅니다. 물론 무슨 큰 뇌물을 바라고 소송을 계속하는 척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 봐야 헛일입니다. 오늘 벌써 말할 수 있어요. 나는 누구에게도 뇌물을 주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심문 판사나, 중요한 소식을 퍼뜨리기 좋아하는 다른 누구에게, 나는 결코, 그 양반들이 아마 넘치도록 가진 어떤 재주로도 뇌물을 주게 만들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전해 준다면, 그건 그래도 나한테 베풀 수 있는 호의일 겁니다. 그건 전혀 가망 없는 일이라고 대놓고 말해도 됩니다. 어쩌면 그들도 벌써 눈치챘을지 모르지요. 설령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알게 되는 게 나한테 그리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 봐야 그 양반들 수고만 덜어 줄 테니까요. 물론 나한테도 불쾌한 일을 좀 덜어 주겠지만, 그 불쾌한 일 하나하나가 동시에 저쪽에 한 방씩 먹이는 거라면 나는 기꺼이 떠안겠습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되도록 할 겁니다. 그런데 심문 판사를 잘 아십니까?" "그럼요." 여자가 말했다. "도와드리겠다고 했을 때 맨 먼저 떠올린 사람이 그분이에요. 그분이 낮은 관리라는 건 몰랐는데, 당신이 그렇다고 하시니 아마 맞겠지요. 그래도 그분이 위로 올리는 보고서는 어느 정도 힘이 있다고 봐요. 게다가 그분은 보고서를 정말 많이 써요. 관리들이 게으르다고 하셨지만, 다 그렇지는 않아요. 특히 이 심문 판사님은 안 그래요. 무척 많이 쓰거든요. 이를테면 지난 일요일에는 재판이 저녁때까지 이어졌어요. 사람들은 다 갔는데 심문 판사님은 홀에 남아 계셔서 제가 램프를 가져다드려야 했어요. 작은 부엌 램프밖에 없었는데 그분은 그걸로 만족하시고 곧바로 쓰기 시작하셨어요. 그사이 남편도 왔어요. 그 일요일엔 마침 쉬는 날이었거든요. 우리는 가구를 가져와서 다시 방을 꾸몄고, 이웃들도 와서 촛불 하나 켜 놓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한마디로 우리는 심문 판사님을 잊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런데 밤중에, 아주 깊은 밤이었을 거예요, 갑자기 눈을 떠 보니 침대 곁에 심문 판사님이 서서 손으로 램프를 가리고 계셨어요. 남편한테 불빛이 가지 않게요. 쓸데없는 조심이었어요. 남편은 잠이 어찌나 깊은지 불빛쯤으로는 깨지도 않았을 거예요. 저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는데, 심문 판사님은 무척 다정하게 조심하라고 이르시더니, 지금까지 글을 쓰다가 이제 램프를 돌려주러 왔다고, 그리고 제가 자는 모습을 본 그 광경을 절대 잊지 못할 거라고 속삭이셨어요. 이 얘기를 다 한 건, 심문 판사님이 정말로 보고서를 많이 쓴다는 걸 말씀드리려는 거예요. 특히 당신에 대해서요. 당신 심문은 분명 이틀 동안 이어진 재판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을 테니까요. 그렇게 긴 보고서가 아무 뜻도 없을 리는 없잖아요. 게다가 그 일로 심문 판사님이 저한테 마음이 있다는 것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이제 막 저를 눈여겨보기 시작하셨을 테니, 바로 이 처음 무렵에는 제가 그분한테 큰 힘을 쓸 수 있어요. 그분이 저를 무척 아낀다는 증거도 더 있어요. 어제는 그분이 무척 믿고 그분 일을 돕는 그 대학생을 시켜 저한테 실크 스타킹을 선물로 보내셨어요. 제가 재판정을 치우는 데 대한 답례라는데, 그건 핑계일 뿐이에요. 그 일은 제 의무고, 그 대가로 남편이 돈을 받거든요. 예쁜 스타킹이에요, 보세요." — 여자는 다리를 쭉 뻗고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더니 자기도 스타킹을 내려다보았다. — "예쁜 스타킹이지만 사실 저한텐 너무 고급이고 어울리지도 않아요."
갑자기 여자는 말을 끊고 K.를 달래려는 듯 그의 손에 제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쉿, 베르톨트가 보고 있어요." K.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재판정 문간에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작고 다리가 곧지 않았으며, 짧고 성긴 불그스름한 턱수염에 쉴 새 없이 손가락을 넣어 휘저으며 위엄을 부리려 애쓰고 있었다. K.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알 수 없는 법학을 공부하는 대학생 가운데 말하자면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친 건 그가 처음이었다. 아마 언젠가는 더 높은 관리 자리에 오를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학생은 K.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수염에서 잠깐 빼낸 손가락 하나로 여자에게 손짓만 하고는 창가로 갔다. 여자가 K.에게 몸을 숙이고 속삭였다. "화내지 마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저를 나쁘게 생각하지도 마세요. 지금은 저 사람한테 가야 해요. 저 끔찍한 인간한테요. 저 휜 다리 좀 보세요. 하지만 곧 돌아올게요. 그러고 나면 당신이 데려가 주신다면 당신과 함께 갈게요. 가자는 데는 어디든 가겠어요. 저를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여기서 되도록 오래, 아니 영영 떠날 수만 있다면 저는 행복할 거예요." 여자는 K.의 손을 한 번 더 쓰다듬고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K.는 저도 모르게 허공에서 여자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 여자는 정말로 그를 끌어당겼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그럴듯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가 법원을 위해 자기를 옭아매려는 게 아닐까 하는 얼핏 든 의심은 쉽게 떨쳐 버렸다. 여자가 무슨 수로 그를 옭아맨단 말인가? 그는 언제나 자유로워서, 적어도 자기에 관한 한 이 법원 전체를 당장이라도 부숴 버릴 수 있지 않은가? 그 정도의 자신감도 없단 말인가? 그리고 돕겠다는 여자의 제안은 진심으로 들렸고 어쩌면 쓸모가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심문 판사와 그 패거리에게 이 여자를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는 것보다 더 좋은 복수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심문 판사가 K.에 대한 거짓 보고서를 애써 쓰고 난 뒤 늦은 밤 여자의 침대가 비어 있는 걸 보게 될지도 몰랐다. 비어 있는 까닭은 여자가 K.의 것이기 때문이고, 창가의 이 여자, 거칠고 무거운 천의 짙은 옷을 입은 이 풍만하고 나긋나긋하고 따뜻한 몸이 오로지 K.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여자에 대한 망설임을 떨쳐 버리고 나니, 창가에서 나누는 나직한 대화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그는 손가락 마디로 단상을 두드리다가 주먹으로도 두드렸다. 대학생은 여자의 어깨 너머로 잠깐 K.를 보았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여자에게 더 바짝 붙어 여자를 끌어안았다. 여자는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처럼 고개를 깊이 숙였고, 여자가 몸을 숙이자 그는 말을 거의 끊지도 않은 채 여자의 목에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K.는 대학생이 여자를 휘두른다는 여자의 하소연이 사실임을 확인하고는 일어나서 방 안을 오갔다. 그는 대학생을 곁눈질하며 어떻게 하면 그를 되도록 빨리 쫓아낼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래서 대학생이, 이따금 쿵쿵 발을 구르는 데까지 이른 K.의 서성거림이 거슬렸던지 이렇게 말한 게 오히려 반가웠다. "조바심이 나면 가셔도 됩니다. 진작 가셨어도 됐어요.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진작 가셨어야 했어요. 제가 들어왔을 때 곧바로, 그것도 서둘러서요." 이 말에는 온갖 분노가 터져 나오고 있었겠지만, 어쨌든 마음에 들지 않는 피고인에게 말하는 미래의 법원 관리다운 오만도 담겨 있었다. K.는 그 바로 곁에 멈춰 서서 웃으며 말했다. "조바심이 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조바심은 당신이 우리를 두고 떠나면 가장 쉽게 사라질 겁니다. 그런데 혹시 공부하러 오셨다면 — 대학생이라고 들었습니다 — 기꺼이 자리를 비켜 드리고 이 여자분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판사가 되려면 아직 공부를 많이 하셔야겠군요. 당신네 법원 제도를 아직 자세히는 모르지만, 거친 말만으로는 — 물론 뻔뻔할 만큼 잘하시지만 — 턱도 없을 것 같거든요." "이 사람을 이렇게 멋대로 돌아다니게 두지 말았어야 했어." 대학생이 K.의 모욕적인 말을 여자에게 설명이라도 하려는 듯 말했다. "실수였어. 심문 판사님께 말씀드렸는데. 심문과 심문 사이에는 적어도 제 방에 붙잡아 두었어야 했어. 심문 판사님은 가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 "쓸데없는 소리." K.가 말하며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시다." "아, 그러셔?" 대학생이 말했다. "아니, 아니, 이 여자는 못 데려갑니다." 그러더니 누구도 그런 힘이 있을 줄 몰랐을 만큼 번쩍 여자를 한 팔에 안아 들고, 등을 구부린 채 다정하게 여자를 올려다보며 문 쪽으로 달려갔다. K.를 조금 겁내는 기색이 뚜렷했지만, 그래도 그는 남은 손으로 여자의 팔을 쓰다듬고 주무르며 K.를 약 올렸다. K.는 대학생을 붙잡아, 그래야 한다면 목이라도 조를 기세로 몇 걸음 나란히 달렸다. 그때 여자가 말했다. "소용없어요. 심문 판사님이 저를 부르시는 거예요. 저는 당신과 같이 가면 안 돼요. 이 작은 괴물이," 그러면서 여자는 대학생의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이 작은 괴물이 저를 놓아주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은 풀려나고 싶지 않은 거군요!" K.가 소리치며 대학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대학생은 이로 그 손을 덥석 물려고 했다. "아니에요!" 여자가 소리치며 두 손으로 K.를 밀어냈다. "아니, 아니에요, 그것만은 안 돼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끝장이에요. 제발 그냥 두세요, 제발요. 이 사람은 심문 판사님 명령대로 저를 그분께 데려가는 것뿐이에요." "그럼 가라지. 당신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K.는 실망해서 화가 치밀어 말하고는 대학생의 등을 떠밀었다. 대학생은 잠깐 비틀거렸다가, 넘어지지 않은 게 기뻐서 짐을 안은 채 더 높이 뛰어올랐다. K.는 천천히 그들을 따라갔다. 이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의심할 여지 없이 진 것임을 그는 알았다. 물론 그 때문에 겁먹을 까닭은 전혀 없었다. 그가 진 건 싸움을 찾아 나섰기 때문일 뿐이었다. 집에 머물며 평소대로 살아간다면 그는 이 사람들 누구보다 천 배는 나았고, 누구든 발길질 한 번으로 길에서 치워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더없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이 한심한 대학생이, 이 거드름 피우는 어린애가, 이 휜 다리의 수염쟁이가 엘자의 침대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아 용서를 비는 장면을. K.는 그 장면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무슨 기회만 생기면 언젠가 대학생을 엘자에게 데려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K.는 호기심에서 문으로 서둘러 갔다. 여자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보고 싶었다. 설마 대학생이 여자를 안은 채 거리를 가로질러 가지는 않을 것이다. 알고 보니 길은 훨씬 짧았다. 집 현관문 바로 맞은편에 좁은 나무 계단이 있었는데, 아마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인 것 같았다. 계단이 한 번 꺾여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대학생은 그 계단으로 여자를 안고 올라갔는데, 지금까지 달리느라 기운이 빠져서 벌써 무척 느리게 끙끙대며 올라갔다. 여자는 아래의 K.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어깨를 들썩여 자기는 이 납치에 죄가 없다는 걸 보여 주려 했지만, 그 몸짓에 아쉬움은 별로 담겨 있지 않았다. K.는 낯선 사람을 보듯 무표정하게 여자를 바라보았다. 실망했다는 것도, 그 실망쯤은 쉽게 이겨 낼 수 있다는 것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벌써 사라졌지만 K.는 여전히 문간에 서 있었다. 여자가 그를 배신했을 뿐 아니라, 심문 판사에게 간다는 말로 거짓말까지 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설마 심문 판사가 다락에 앉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무 계단은 아무리 오래 바라보아도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때 K.는 계단 입구 곁에 붙은 작은 쪽지를 보았다. 다가가 보니 어린애 같은 서툰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법원 사무처 올라가는 길." 그러니까 이 셋집의 다락에 법원 사무처가 있단 말인가? 그다지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시설은 아니었다. 그리고 피고인으로서는 이 법원이 쓸 돈이 얼마나 적은지 떠올려 보는 게 마음 놓이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장 가난한 축에 드는 세입자들이 쓸모없는 잡동사니를 던져 두는 곳에 사무처를 두었겠는가. 물론 돈은 넉넉한데 법원 일에 쓰이기 전에 관리들이 먼저 달려들어 챙기는 것일 수도 있었다. K.가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그럴 가능성이 아주 컸다. 다만 그렇다면 법원이 이렇게 엉망인 건 피고인에게 굴욕적이긴 해도, 근본적으로는 법원이 가난한 것보다 오히려 더 마음 놓이는 일이었다. 이제 K.는 첫 심문 때 피고인을 다락으로 부르기가 부끄러워서 차라리 그의 집으로 찾아가 괴롭히는 쪽을 택했다는 것도 이해가 갔다. 다락에 앉은 판사에 비하면 K.는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가. 그는 은행에 대기실 딸린 큰 방이 있고,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붐비는 시내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물론 그에게는 뇌물이나 횡령으로 생기는 부수입도 없었고, 심부름꾼을 시켜 여자를 안아다 사무실로 데려오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K.는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그런 건 기꺼이 포기하고 싶었다.
K.가 아직 그 쪽지 앞에 서 있는데 한 남자가 계단을 올라와, 열린 문으로 거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실에서는 재판정 안도 보였다. 마침내 남자는 K.에게 조금 전 여기서 웬 여자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법원 직원이시죠?" K.가 물었다. "네." 남자가 말했다. "아, 피고인 K. 씨군요. 이제 알아보겠네요. 잘 오셨습니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K.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오늘은 재판이 공지되지 않았는데요." K.가 말이 없자 법원 직원이 말했다. "압니다." K.는 말하며 법원 직원의 평상복 윗옷을 바라보았다. 관리임을 나타내는 표시라곤 평범한 단추 몇 개 곁에 달린 금박 단추 두 개뿐이었는데, 낡은 장교 외투에서 떼어 낸 것 같았다. "조금 전에 부인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부인은 이제 여기 없습니다. 대학생이 부인을 심문 판사에게 안고 갔습니다." "보세요." 법원 직원이 말했다. "늘 이렇게 아내를 채 간다니까요. 오늘은 일요일이라 저는 일할 의무도 없는데, 저를 여기서 떼어 놓으려고 쓸데없는 전갈을 들려 내보내요. 그것도 멀리 보내지는 않으니, 아주 서두르면 어쩌면 제때 돌아올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되죠. 그래서 저는 있는 힘껏 달려가서, 심부름 간 관청 문틈에 대고 숨이 턱에 차서 전갈을 외치니 알아듣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다시 달려오는데, 대학생이 저보다 더 서둘렀어요. 물론 그놈은 길도 짧았죠. 다락 계단만 뛰어 내려오면 됐으니까요. 제가 이렇게 매인 몸만 아니라면 그놈을 진작 여기 벽에 짓뭉개 버렸을 거예요. 여기 이 쪽지 옆에요. 늘 그런 꿈을 꿔요. 여기 바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놈이 납작하게 눌려 붙어 있는 거예요. 팔을 쭉 뻗고 손가락을 쫙 벌리고, 휜 다리는 동그랗게 비틀리고 둘레엔 피가 튀어 있고요. 하지만 여태 꿈일 뿐이었어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K.가 웃으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법원 직원이 말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나빠져요. 여태는 그놈이 아내를 제 방으로만 안고 갔는데, 이제는 — 물론 오래전부터 그럴 줄 알았지만 — 심문 판사한테까지 안고 가요." "부인한테는 전혀 잘못이 없습니까?" K.가 물었다. 그는 이 물음을 던지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 자신도 지금 그만큼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있지요." 법원 직원이 말했다. "아내 잘못이 제일 커요. 그놈한테 매달렸으니까요. 그놈 얘기를 하자면, 여자란 여자는 다 쫓아다녀요. 이 집에서만 벌써 몰래 기어들어 간 집 다섯 곳에서 쫓겨났어요. 물론 제 아내가 이 집에서 제일 예쁘죠. 그런데 하필 저는 맞설 수가 없어요." "사정이 그렇다면 정말 방법이 없군요." K.가 말했다. "왜 없어요?" 법원 직원이 물었다. "그 대학생은 겁쟁이니까, 제 아내를 건드리려 할 때 한번 흠씬 두들겨 패서 다시는 엄두도 못 내게 하면 돼요. 그런데 저는 그럴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은 그 호의를 베풀어 주지 않아요. 다들 그놈의 권력을 무서워하니까요. 당신 같은 분만 할 수 있어요." "어째서 내가요?" K.가 놀라서 물었다. "당신은 피고인이잖아요." 법원 직원이 말했다. "그렇죠." K.가 말했다. "그런데 그러니까 더더욱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소송 결과에는 몰라도 예비 심문에는 아마 영향을 미칠 테니까요." "네, 물론이죠." 법원 직원이 말했다. K.의 생각도 자기 생각만큼 옳다는 듯이. "하지만 우리 쪽에서는 대개 가망 없는 소송은 벌이지 않아요."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K.가 말했다. "그렇다고 그 대학생을 언젠가 손봐 주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그래 주시면 정말 고맙겠어요." 법원 직원이 조금 격식을 차려 말했다. 사실 자기의 가장 큰 소원이 이루어지리라고는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K.가 말을 이었다. "당신네 다른 관리들도, 어쩌면 모두가 똑같은 대접을 받아 마땅할 겁니다." "그럼요, 그럼요." 법원 직원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그러더니 여태껏 아무리 친절해도 그러지 않았던, 믿음 어린 눈길로 K.를 보며 덧붙였다. "사람들은 늘 반항하니까요." 그러나 대화가 조금 거북해졌는지 그는 이렇게 말하며 이야기를 끊었다. "이제 사무처에 가서 보고해야 해요. 같이 가시겠어요?" "거기서는 볼일이 없는데요." K.가 말했다. "사무처를 구경하시면 되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볼 만한 곳입니까?" K.는 머뭇거리며 물었지만 사실은 몹시 따라가고 싶었다. "글쎄요," 법원 직원이 말했다. "관심 있으실 줄 알았어요." "좋습니다." 마침내 K.가 말했다. "같이 가죠." 그리고 그는 법원 직원보다 더 빨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들어서다가 그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문 뒤에 계단이 한 칸 더 있었기 때문이다. "민원인들 생각은 별로 안 하는군요." 그가 말했다. "아예 안 해요." 법원 직원이 말했다. "여기 대기실 좀 보세요." 기다란 복도였다. 거기서 거칠게 짠 나무 문들이 다락의 칸칸으로 이어져 있었다. 빛이 곧바로 들어오는 데는 없었지만 아주 캄캄하지는 않았다. 어떤 칸은 복도 쪽이 판자벽이 아니라 천장까지 닿는 나무 창살로만 되어 있어서, 그 틈으로 빛이 조금 들어왔고, 책상에 앉아 무언가 쓰거나 아예 창살 곁에 서서 틈 사이로 복도의 사람들을 지켜보는 관리들도 보였다. 일요일이라서인지 복도에는 사람이 몇 없었다. 그들은 무척 초라해 보였다. 복도 양쪽에 두 줄로 놓인 긴 나무 의자에 거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아 있었다. 모두 옷차림이 허술했지만, 얼굴 표정이나 자세나 수염 모양, 그리고 딱 짚어 말하기 어려운 여러 사소한 점들로 보아 대부분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옷걸이가 없어서 그들은 아마 서로 따라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 모자를 의자 밑에 두고 있었다. 문 가까이 앉은 사람들이 K.와 법원 직원을 보자 일어서서 인사했고, 그걸 본 다음 사람들도 인사해야 한다고 여겼는지, 둘이 지나갈 때마다 모두가 일어섰다. 그들은 한 번도 완전히 똑바로 서지 않았다. 등은 굽고 무릎은 꺾여서 거리의 거지처럼 서 있었다. K.는 조금 뒤에서 오는 법원 직원을 기다렸다가 말했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굴욕스러울까요." "네." 법원 직원이 말했다. "피고인들이에요. 여기 보이는 사람은 다 피고인이에요." "정말요!" K.가 말했다. "그럼 내 동료들이군요." 그러고는 맨 가까이 있던,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고 머리가 벌써 거의 센 남자에게 돌아섰다. "여기서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K.가 공손히 물었다. 그러나 뜻밖에 말을 걸자 남자는 쩔쩔맸다.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사람이 분명해서 더 딱해 보였다. 다른 데서라면 분명 자기를 다스릴 줄 알고 많은 사람보다 나은 자리를 쉽게 내주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 간단한 물음에도 대답을 못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도와야 할 의무라도 있다는 듯, 그 도움이 없으면 아무도 자기에게 대답을 요구할 수 없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법원 직원이 다가와 남자를 진정시키고 기운을 북돋우려고 말했다. "이 신사분은 뭘 기다리시느냐고 물으시는 것뿐이에요. 대답하세요." 아마 귀에 익었을 법원 직원의 목소리가 더 잘 통했다. "저는 기다립니다……" 그는 말을 꺼냈다가 막혔다. 물음에 정확히 맞춰 대답하려고 그렇게 시작했는데 이제 다음 말을 찾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기다리던 사람 몇이 다가와 무리를 둘러쌌다. 법원 직원이 그들에게 말했다. "비켜요, 비켜. 복도를 비워요." 그들은 조금 물러났지만 아까 앉았던 자리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사이 질문받은 남자는 정신을 가다듬고 작은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한 달 전에 제 사건에 관해 증거 신청을 몇 가지 했는데, 그 처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척 애를 쓰시는 것 같군요." K.가 말했다. "네." 남자가 말했다. "제 일이니까요." "다들 당신처럼 생각하지는 않지요." K.가 말했다. "이를테면 나도 피고인이지만, 하늘에 맹세코 증거 신청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고 그 비슷한 무엇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남자가 다시 완전히 자신 없어하며 말했다. K.가 자기를 놀린다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무슨 새 실수라도 할까 봐 아까 한 대답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싶었겠지만, K.의 조바심 어린 눈길 앞에서 그는 이렇게만 말했다. "저로서는 증거 신청을 했습니다." "내가 피고인이라는 걸 안 믿으시는군요." K.가 물었다. "아, 아닙니다, 물론 믿지요." 남자는 말하며 조금 옆으로 비켜섰지만, 그 대답에는 믿음이 아니라 두려움만 있었다. "그러니까 날 안 믿으시는 거군요?" K.는 물으며, 남자의 비굴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이끌려 믿으라고 억지로라도 강요하려는 듯 그의 팔을 잡았다.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고 아주 가볍게 잡았을 뿐인데, 남자는 K.가 손가락 두 개가 아니라 시뻘겋게 달군 집게로 집기라도 한 듯 비명을 질렀다. 이 우스꽝스러운 비명에 K.는 결국 진저리가 났다. 자기가 피고인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면 더 잘된 일이었다. 어쩌면 그를 판사로 여기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는 헤어지는 인사로 이번에는 정말로 더 세게 붙잡았다가 남자를 의자로 도로 밀쳐 놓고 계속 걸어갔다. "피고인들은 대개 이렇게 예민해요." 법원 직원이 말했다. 그들 뒤로 이제 기다리던 거의 모든 사람이, 벌써 비명을 멈춘 남자 둘레에 모여 방금 일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것 같았다. 이제 K.를 향해 감시인 하나가 다가왔다. 무엇보다 칼로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 칼집은 적어도 빛깔로 보아서는 알루미늄이었다. K.는 그게 신기해서 손을 대 보기까지 했다. 비명을 듣고 온 감시인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법원 직원이 몇 마디로 달래려 했지만 감시인은 직접 가서 봐야겠다며 경례를 하고는 아주 급하지만 아주 짧은 걸음으로, 아마 통풍 때문에 그렇게 재는 걸음으로 가 버렸다.
K.는 그 감시인과 복도의 사람들에게 오래 신경 쓰지 않았다. 특히 복도 중간쯤에서 오른쪽으로 문 없는 입구를 지나 꺾어 들 수 있는 길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법원 직원에게 그게 맞는 길이냐고 눈짓으로 물었고, 법원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말로 그쪽으로 꺾어 들었다. 그는 늘 법원 직원보다 한두 걸음 앞서 걸어야 하는 게 거슬렸다. 적어도 이런 곳에서는 체포되어 끌려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법원 직원을 기다렸지만, 법원 직원은 곧 다시 뒤처졌다. 마침내 K.는 이 거북함을 끝내려고 말했다. "이제 여기가 어떤지 봤으니 가 보겠습니다." "아직 다 보지 않으셨는데요." 법원 직원이 아무 속셈 없이 말했다. "다 보고 싶지 않습니다." K.가 말했다. 그는 사실 정말 피곤했다. "가고 싶습니다. 출구는 어떻게 갑니까?" "벌써 길을 잃으신 건 아니죠?" 법원 직원이 놀라서 물었다. "여기서 모퉁이까지 가서 오른쪽으로 복도를 따라 곧장 가시면 문이 나와요." "같이 갑시다." K.가 말했다. "길을 알려 주세요. 길을 잃을 겁니다. 여기는 길이 너무 많아요." "그 길 하나뿐이에요." 법원 직원이 이제는 나무라듯 말했다. "당신이랑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요. 보고를 해야 하고, 벌써 당신 때문에 시간을 많이 버렸어요." "같이 갑시다." K.가 이번에는 더 날카롭게 되풀이했다. 마침내 법원 직원의 거짓말을 잡아내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세요." 법원 직원이 속삭였다. "여긴 사방이 사무실이에요. 혼자 돌아가기 싫으시면 저랑 조금 더 가시든가, 제가 보고를 마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세요. 그러면 기꺼이 같이 돌아가 드릴게요." "아니, 아니요." K.가 말했다.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나랑 같이 가야 합니다." K.는 자기가 서 있는 곳을 아직 둘러보지도 않았다. 둘레에 늘어선 많은 나무 문 가운데 하나가 이제 열리자 그제야 그쪽을 보았다. K.가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불려 나온 듯한 아가씨가 들어와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그 뒤로 멀리 어스름 속에서 한 남자가 다가오는 것도 보였다. K.는 법원 직원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더니 벌써 둘이나 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관리들이 그를 눈여겨보고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설명을 요구할 것이다.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여질 만한 설명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피고인이며 다음 심문 날짜를 알고 싶다는 것. 그러나 바로 그 설명을 그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호기심에 왔을 뿐이었다. 아니면, 설명으로는 더더욱 말도 안 되지만, 이 법원 제도가 속도 겉만큼 역겹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 짐작은 맞는 것 같았다. 그는 더 깊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숨이 막혔다. 어느 문 뒤에서든 나타날 수 있는 높은 관리를 마주할 형편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나가고 싶었다. 법원 직원과 함께, 그래야 한다면 혼자서라도.
그러나 말없이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정말로 아가씨와 법원 직원은 곧 그에게 무슨 큰 변화라도 일어날 것처럼, 그걸 놓치지 않고 지켜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간에는 K.가 아까 멀리서 보았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낮은 문틀 위 들보를 붙잡고, 조바심 난 구경꾼처럼 발끝으로 조금씩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K.의 태도가 조금 몸이 안 좋은 탓이라는 걸 먼저 알아챈 건 아가씨였다. 아가씨는 의자를 가져와서 물었다. "좀 앉으시겠어요?" K.는 곧바로 앉아, 더 단단히 버티려고 팔꿈치를 팔걸이에 댔다. "조금 어지러우시죠?" 아가씨가 물었다. 이제 그의 바로 앞에 아가씨의 얼굴이 있었다. 몇몇 여자들이 가장 아름다운 젊은 시절에 띠는 엄한 표정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가 말했다. "여기선 별일 아니에요. 처음 오면 거의 누구나 이런 발작을 겪어요. 처음 오셨죠? 네, 그래도 별일 아니에요. 여기는 해가 지붕 들보에 내리쬐어서, 달아오른 나무 때문에 공기가 이렇게 탁하고 무거워요. 그래서 사무실로 쓰기엔 그리 알맞지 않아요. 물론 다른 점에서는 좋은 점이 많지만요. 하지만 공기로 말하자면, 민원인이 많이 오는 날에는, 그러니까 거의 날마다인데,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에요. 게다가 여기에 빨래도 자주 널어 말린다는 걸 생각하시면 — 세입자들한테 완전히 막을 수는 없거든요 — 속이 좀 안 좋아지신 게 이상하지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결국엔 이 공기에도 아주 잘 익숙해져요. 두세 번째 오시면 답답한 걸 거의 못 느끼실 거예요. 좀 나아지셨어요?" K.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기운이 빠져 여기 사람들 손에 맡겨진 게 너무 창피했다. 게다가 속이 안 좋은 까닭을 듣고 나니 나아지기는커녕 조금 더 나빠졌다. 아가씨는 그걸 곧 알아채고 K.에게 바람을 쐬어 주려고 벽에 기대 세워 둔 갈고리 장대를 집어, 바로 K.의 머리 위에 난, 바깥으로 통하는 작은 채광창을 밀어 열었다. 그런데 그을음이 어찌나 쏟아져 들어오는지 아가씨는 곧 채광창을 다시 닫고 손수건으로 K.의 손에 묻은 그을음을 닦아 주어야 했다. K.는 너무 지쳐서 스스로 닦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갈 만큼 기운을 차릴 때까지 여기 조용히 앉아 있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그에게 신경을 덜 쓸수록 그건 더 빨리 해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아가씨가 한술 더 떠 말했다. "여기 계시면 안 돼요. 여기 있으면 통행에 방해가 돼요." — K.는 여기서 대체 무슨 통행을 방해한다는 거냐고 눈으로 물었다. — "원하시면 환자실로 모셔다 드릴게요." "좀 도와주세요." 아가씨가 문간의 남자에게 말하자 남자도 곧 다가왔다. 그러나 K.는 환자실에 가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걸 피하고 싶었다. 더 안으로 끌려가는 것. 더 깊이 들어갈수록 더 나빠질 게 뻔했다. "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고, 편히 앉아 있던 탓에 버릇이 들어 떨면서 일어섰다. 그러나 곧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안 되겠군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고 한숨을 쉬며 다시 앉았다. 그는 그래도 자기를 쉽게 밖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법원 직원을 떠올렸지만, 법원 직원은 벌써 오래전에 가 버린 것 같았다. K.는 앞에 선 아가씨와 남자 사이로 내다보았지만 법원 직원을 찾을 수 없었다.
"제 생각엔," 남자가 말했다. 그는 옷차림이 멋졌는데, 특히 두 개의 길고 날카롭게 재단된 끝으로 마무리된 회색 조끼가 눈에 띄었다. "이분이 불편하신 건 여기 공기 때문이니까, 환자실이 아니라 아예 사무처 밖으로 모셔다 드리는 게 가장 좋고 이분도 가장 반기실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K.는 소리치며, 너무 기뻐서 남자의 말에 거의 끼어들 뻔했다. "틀림없이 곧 나아질 겁니다. 그리 약하지도 않아요. 겨드랑이만 좀 받쳐 주시면 됩니다. 크게 폐 끼치지 않을게요. 길도 멀지 않으니 문까지만 데려다주세요. 그러면 계단에 좀 앉아 있다가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사실 이런 발작은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저도 놀랐습니다. 저도 사무를 보는 사람이라 사무실 공기에는 익숙한데, 여기는 너무 심한 것 같군요. 당신들도 그렇게 말씀하시잖습니까. 그러니 친절을 베푸셔서 조금만 부축해 주시겠습니까. 어지러워서 혼자 일어나면 속이 안 좋아집니다." 그리고 그는 두 사람이 팔 밑을 잡기 쉽게 어깨를 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 부탁을 따르지 않고 두 손을 느긋하게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큰 소리로 웃었다. "보세요." 그가 아가씨에게 말했다. "제 말이 맞았잖아요. 이분은 여기서만 불편하신 거지 몸이 안 좋은 게 아니에요." 아가씨도 웃었지만, 남자가 K.를 두고 지나친 농담을 했다는 듯 손가락 끝으로 남자의 팔을 가볍게 쳤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남자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이분을 밖으로 모셔다 드릴 거예요." "그럼 됐어요." 아가씨가 앙증맞은 머리를 잠깐 숙이며 말했다. "웃음에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아가씨가 K.에게 말했다. K.는 다시 서글퍼져서 앞만 멍하니 바라보며 아무 설명도 필요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분은 — 소개해도 되죠?" (그 신사는 손짓으로 허락했다) "그러니까 이분은 안내원이에요. 기다리는 민원인들에게 필요한 안내를 다 해 드리죠. 우리 법원 제도가 사람들한테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안내를 원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이분은 어떤 물음에도 답을 아세요. 언제 마음이 내키시면 한번 시험해 보셔도 돼요. 하지만 그게 이분의 유일한 장점은 아니에요. 두 번째 장점은 멋진 옷차림이에요. 우리, 그러니까 관리들이 언젠가, 늘 민원인을 가장 먼저 상대하는 안내원은 첫인상이 품위 있어야 하니 옷도 멋지게 입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나머지는 저를 보시면 곧 아시겠지만, 안타깝게도 무척 허름하고 유행 지난 옷을 입어요. 옷에 돈을 쓰는 것도 별 의미가 없어요. 거의 쉬지 않고 사무처에 있으니까요. 잠도 여기서 자요.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안내원한테는 좋은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런 점에서 좀 이상한 우리 행정실에서 그 옷을 받을 수가 없어서, 우리끼리 돈을 모았어요 — 민원인들도 보탰고요 — 그래서 이분께 이 멋진 옷이랑 다른 옷들도 사 드렸어요. 이제 좋은 인상을 줄 준비는 다 됐는데, 이분이 웃는 바람에 다시 망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해요." "그렇죠." 신사가 비웃듯 말했다. "그런데 아가씨가 왜 이분한테 우리 속사정을 다 이야기하는지, 아니 떠안기는지 모르겠군요. 이분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보세요, 자기 일에만 정신이 팔려 앉아 있잖아요." K.는 반박할 마음도 없었다. 아가씨의 뜻은 좋았을 것이다. 아마 그의 기분을 돌리거나 정신을 가다듬을 틈을 주려는 것이었겠지만, 방법이 틀렸다. "당신이 웃은 걸 설명해 드려야 했어요." 아가씨가 말했다. "모욕적이었잖아요." "결국 내가 밖으로 모셔다 드리면 더한 모욕도 용서하실 겁니다."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을 들지도 않았다. 둘이 자기를 두고 물건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그냥 두었다. 오히려 그게 가장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쪽 팔에 안내원의 손이, 다른 팔에 아가씨의 손이 느껴졌다. "자, 일어나세요, 약하신 분." 안내원이 말했다. "두 분 다 정말 고맙습니다." K.는 기쁘게 놀라 말하며 천천히 일어나서, 낯선 손들을 가장 받쳐 주어야 할 곳으로 제 손으로 이끌었다. "제가 안내원을 좋게 보이게 하려고 특별히 애쓰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복도 쪽으로 다가가며 아가씨가 K.의 귀에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믿든 안 믿든 저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요. 이분은 마음이 모질지 않아요. 아픈 민원인을 밖으로 모셔다 드릴 의무도 없는데, 보시다시피 그렇게 해요. 어쩌면 우리 가운데 모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몰라요. 우리 다 기꺼이 돕고 싶은지도 몰라요. 하지만 법원 관리라서 우리는 쉽게 모질고 아무도 돕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저는 그게 정말 괴로워요." "여기 좀 앉으시겠어요?" 안내원이 물었다. 그들은 벌써 복도에 들어서 있었고, 마침 K.가 아까 말을 걸었던 피고인 앞이었다. K.는 그 앞에서 거의 부끄러웠다. 아까는 그렇게 꼿꼿이 그 앞에 서 있었는데 지금은 두 사람이 부축해야 했다. 안내원은 그의 모자를 벌린 손가락 위에 얹어 균형을 잡고 있었고, 머리 모양은 망가져서 땀에 젖은 이마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피고인은 그런 걸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안내원 앞에 비굴하게 서서, 자기가 여기 있는 것을 변명하기에만 바빴다. "압니다." 그가 말했다. "제 신청은 오늘 아직 처리될 수 없다는 걸요. 그래도 왔습니다. 여기서 기다려도 되겠다 싶어서요. 일요일이라 시간도 있고, 여기서는 방해도 안 되니까요." "그렇게까지 변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안내원이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꼼꼼한 건 칭찬할 만합니다. 쓸데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가 귀찮아지지 않는 한 당신이 당신 일을 꼼꼼히 챙기는 걸 결코 막지 않겠습니다. 제 의무를 부끄럽게 내팽개치는 사람들을 보고 나면, 당신 같은 사람들한테는 참을성을 갖게 되지요. 앉으세요." "민원인들한테 어쩌면 저렇게 말을 잘하시는지." 아가씨가 속삭였다. K.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안내원이 다시 "여기 좀 앉으시겠어요?" 하고 묻자 곧바로 펄쩍 뛰었다. "아니요." K.가 말했다. "쉬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되도록 단호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앉을 수 있다면 무척 좋았을 것이다. 그는 뱃멀미를 하는 것 같았다. 거센 파도 속의 배 위에 있는 것 같았다. 물이 나무 벽에 부딪치는 것 같았고, 복도 깊은 곳에서 물이 넘쳐흐르는 듯한 소리가 밀려오는 것 같았고, 복도가 옆으로 흔들리며 양쪽에서 기다리는 민원인들이 가라앉았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그를 데려가는 아가씨와 남자의 침착함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들 손에 맡겨져 있었다. 그들이 놓으면 그는 널빤지처럼 쓰러질 것이다. 그들의 작은 눈에서 날카로운 눈길이 이리저리 오갔다. K.는 그들의 고른 발걸음을 느꼈지만 함께 걷지는 못했다. 그는 거의 한 걸음 한 걸음 들려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가득 채운 소음만 들렸고, 그 소음을 뚫고 사이렌 같은 변함없는 높은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더 크게요."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속삭이고는 부끄러워졌다. 그들이 충분히 크게, 다만 그가 알아듣지 못하게 말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내 앞의 벽이 찢어지기라도 한 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곁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 "처음엔 나가겠다더니, 여기가 출구라고 백 번을 말해도 꼼짝을 안 하네요." K.는 자기가 아가씨가 열어 놓은 출구 앞에 서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한꺼번에 모든 기운이 돌아온 것 같았다. 자유를 미리 맛보려고 그는 곧바로 계단 한 칸에 발을 딛고 서서, 거기서 자기에게 몸을 숙이는 동행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되풀이하며 두 사람의 손을 거듭 잡았다. 사무처 공기에 익숙한 그들이 계단에서 올라오는 비교적 맑은 공기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느끼고서야 그는 손을 놓았다. 그들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K.가 재빨리 문을 닫지 않았다면 아가씨는 어쩌면 굴러떨어졌을지도 몰랐다. K.는 잠시 가만히 서서 손거울을 꺼내 머리를 매만지고, 다음 층계참에 떨어져 있던 모자를 주웠다. 안내원이 던져 놓은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너무나 상쾌하게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이 급작스러운 변화가 거의 두려울 정도였다. 평소 아주 튼튼한 그의 몸이 이런 뜻밖의 일을 벌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옛 소송을 너무 거뜬히 견디니 몸이 반란을 일으켜 새 소송을 벌이려는 걸까? 다음 기회에 의사에게 가 볼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어쨌든 앞으로 일요일 오전은 모두 — 이건 스스로에게 조언할 수 있었다 — 이번보다 잘 쓰기로 했다.
뷔르스트너 양의 친구
그 뒤 한동안 K.는 뷔르스트너 양과 몇 마디조차 나눌 수가 없었다. 그는 온갖 방법으로 그 여자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 여자는 늘 그걸 피할 줄 알았다. 그는 사무실에서 곧장 집으로 와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제 방 소파에 앉아 현관만 지켜보았다. 하녀가 지나가다가 빈 것처럼 보이는 그의 방문을 닫으면 그는 조금 있다가 일어나서 다시 문을 열었다. 아침에는 여느 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 뷔르스트너 양이 출근할 때 혼자 있는 그 여자를 마주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어느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여자의 사무실로도, 집으로도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기 행동을 변명하고, 어떤 보상이든 하겠다고 했고, 그 여자가 정해 주는 선을 절대 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한 번만 이야기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무엇보다 그 여자와 먼저 의논하지 않고서는 그루바흐 부인에게도 아무 일도 벌일 수 없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다음 일요일 하루 종일 제 방에서 그 여자의 신호를 기다리겠다고 알렸다.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신호든, 아니면 모든 걸 그 여자 뜻대로 따르겠다고 약속했는데도 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지 적어도 설명해 주는 신호든. 편지는 되돌아오지 않았지만 답장도 없었다. 그 대신 일요일에 충분히 분명한 신호가 있었다. 아침 일찍 K.는 열쇠 구멍으로 현관에서 무언가 특별한 움직임을 보았는데, 그게 무엇인지 곧 밝혀졌다. 프랑스어 교사인 — 사실은 독일 사람이었는데 — 몬탁이라는 가냘프고 창백하고 다리를 조금 저는 아가씨가, 여태 따로 방을 쓰다가 뷔르스트너 양의 방으로 옮겨 가는 것이었다. 몇 시간이고 그 아가씨가 현관을 발을 끌며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속옷 한 벌이나 작은 덮개나 책 한 권을 늘 잊어버려서 따로 가지러 가 새 방으로 날라야 했다.
그루바흐 부인이 K.에게 아침밥을 가져왔을 때 — 부인은 K.를 그렇게 화나게 한 뒤로 아주 작은 시중조차 하녀에게 맡기지 않았다 — K.는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현관이 왜 이렇게 시끄럽습니까?" 그는 커피를 따르며 물었다. "좀 그만두게 할 수 없습니까? 하필 일요일에 청소를 해야 합니까?" K.는 그루바흐 부인을 올려다보지 않았지만, 부인이 한시름 놓은 듯 숨을 내쉬는 걸 알아챘다. 부인은 K.의 이 엄한 물음조차 용서로, 아니면 용서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청소하는 게 아니에요, K. 씨." 부인이 말했다. "몬탁 양이 뷔르스트너 양 방으로 옮기면서 짐을 나르는 것뿐이에요." 부인은 더 말하지 않고, K.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더 말해도 되는지 기다렸다. 그러나 K.는 부인을 시험하듯 곰곰 생각하는 얼굴로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부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뷔르스트너 양에 대한 전날의 의심은 벌써 거두셨습니까?" "K. 씨!" 바로 그 물음만 기다리던 그루바흐 부인이 소리치며 모은 두 손을 K.에게 내밀었다. "지난번에 지나가듯 한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셨어요. K. 씨든 누구든 마음 상하게 하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어요. K. 씨는 저를 오래 알아 오셨으니 그건 확신하실 수 있잖아요. 제가 요 며칠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르실 거예요! 제가 하숙인을 헐뜯다니요! 그리고 K. 씨는 그걸 믿으셨어요! 그리고 방을 빼라고 하라니요! K. 씨한테 방을 빼라니요!" 마지막 외침은 벌써 눈물에 막혀 버렸다. 부인은 앞치마를 얼굴로 가져가 소리 내어 흐느꼈다.
"울지 마세요, 그루바흐 부인." K.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는 뷔르스트너 양이, 그리고 그 여자가 낯선 아가씨를 제 방에 받아들였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울지 마세요." 방 안으로 돌아섰을 때 그루바흐 부인이 아직도 울고 있자 그가 다시 말했다. "그때 나도 그렇게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오해했을 뿐이지요. 오랜 친구 사이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루바흐 부인은 K.가 정말로 마음이 풀렸는지 보려고 앞치마를 눈 밑으로 내렸다. "네, 그렇습니다." K.가 말했다. 그러고는 그루바흐 부인의 태도로 보아 대위가 아무것도 일러바치지 않은 것 같아서 감히 덧붙였다. "설마 내가 낯선 아가씨 때문에 부인과 사이가 틀어질 수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바로 그거예요, K. 씨." 그루바흐 부인이 말했다. 조금만 마음이 풀리면 곧바로 서툰 말을 해 버리는 게 부인의 불행이었다. "저는 자꾸 생각했어요. K. 씨는 왜 그렇게 뷔르스트너 양을 감싸실까? 자기가 한마디만 모질게 해도 내가 잠을 못 잔다는 걸 알면서 왜 그 아가씨 때문에 나랑 다투실까? 저는 그 아가씨에 대해 제 눈으로 본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K.는 거기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가는 첫마디에 부인을 방에서 내쫓아야 했을 텐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그루바흐 부인이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걸 느끼게 하는 걸로 그쳤다. 밖에서 다시 현관을 가로지르는 몬탁 양의 질질 끄는 발소리가 들렸다. "들리십니까?" K.가 손으로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그루바흐 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와주려고 했고 하녀한테도 돕게 하려 했는데, 고집이 세서 다 제 손으로 옮기겠대요. 뷔르스트너 양이 이상해요. 저는 몬탁 양한테 세를 주는 것도 자주 귀찮은데, 뷔르스트너 양은 아예 자기 방에 들이다니요." "그런 건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K.는 말하며 잔 바닥에 남은 설탕을 짓이겼다. "그래서 부인이 손해 보는 게 있습니까?" "아니요." 그루바흐 부인이 말했다. "그것 자체는 오히려 반가워요. 방이 하나 비니까 조카인 대위를 거기 들일 수 있거든요. 요 며칠 옆 거실에서 지내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동안 K. 씨를 방해했을까 봐 진작부터 걱정했어요. 남 생각을 별로 안 하는 애라서요." "별생각을 다 하시는군요!" K.가 말하며 일어섰다. "그런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몬탁 양의 이 순례를 — 지금 또 돌아가는군요 — 견디지 못하니까 나를 너무 예민한 사람으로 여기시나 봅니다." 그루바흐 부인은 무척 무력해졌다. "K. 씨, 남은 짐은 나중에 옮기라고 할까요? 원하시면 당장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그 아가씨는 뷔르스트너 양 방으로 옮겨야 하잖습니까!" K.가 말했다. "네." 그루바흐 부인이 말했다. K.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K.가 말했다. "짐을 날라야지요." 그루바흐 부인은 고개만 끄덕였다. 겉으로는 고집과 다름없어 보이는 이 말없는 무력함이 K.를 더 약 올렸다. 그는 방 안을 창가에서 문까지 오가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그루바흐 부인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부인은 아마 나갔을 것이다.
K.가 또 한 번 문 앞까지 왔을 때 노크 소리가 났다. 하녀였다. 몬탁 양이 K. 씨와 몇 마디 나누고 싶어 하니 식당으로 와 달라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K.는 생각에 잠겨 하녀의 말을 듣더니, 거의 비웃는 눈길로 겁먹은 그루바흐 부인을 돌아보았다. 그 눈길은 몬탁 양의 이 초대를 벌써 오래전에 내다보았다고, 이 초대는 이 일요일 오전 그루바흐 부인의 하숙인들에게서 겪어야 하는 괴롭힘과도 아주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곧 가겠다는 대답과 함께 하녀를 돌려보내고 윗옷을 갈아입으러 옷장으로 갔다. 그루바흐 부인이 그 귀찮은 사람을 두고 나직이 투덜거리자, 그는 아침 식기나 치워 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거의 손도 안 대셨잖아요." 그루바흐 부인이 말했다. "아, 그냥 치우세요." K.가 소리쳤다. 모든 것에 어떻게든 몬탁 양이 섞여 들어 모든 걸 역겹게 만드는 것 같았다.
현관을 지나며 그는 닫힌 뷔르스트너 양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초대받은 곳은 거기가 아니라 식당이었고, 그는 노크도 하지 않고 식당 문을 벌컥 열었다.
아주 길지만 폭이 좁고 창문 하나 달린 방이었다. 문 쪽 두 구석에 장 두 개를 비스듬히 세워 둘 만한 자리만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긴 식탁이 다 차지하고 있었다. 식탁은 문 가까이에서 시작해 큰 창문 바로 앞까지 이어져 있어서, 창문에는 거의 다가갈 수도 없었다. 식탁은 벌써 차려져 있었는데, 여러 사람 몫이었다. 일요일에는 하숙인들이 거의 다 여기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이다.
K.가 들어서자 몬탁 양이 창가에서 식탁 한쪽을 따라 K.에게 다가왔다. 둘은 말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몬탁 양이 늘 그렇듯 고개를 유난히 꼿꼿이 든 채 말했다. "저를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K.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물론이죠." 그가 말했다. "벌써 꽤 오래 그루바흐 부인 집에 사시잖습니까." "하지만 하숙집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 같던데요." 몬탁 양이 말했다. "없습니다." K.가 말했다. "앉으시겠어요?" 몬탁 양이 말했다. 둘은 말없이 식탁 맨 끝의 의자 두 개를 빼내어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나 몬탁 양은 곧 다시 일어섰다. 손가방을 창턱에 두고 와서 가지러 간 것이다. 그 여자는 방을 가로질러 발을 끌며 갔다. 손가방을 가볍게 흔들며 돌아오더니 그 여자가 말했다. "제 친구의 부탁으로 몇 마디만 드리려고요. 친구가 직접 오려고 했는데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친구를 이해해 주시고 대신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친구가 왔어도 제가 드릴 말씀과 다른 말은 못 했을 거예요. 오히려 저는 비교적 이 일에 얽혀 있지 않으니 더 많은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겁니까?" K.가 대답했다. 몬탁 양의 눈이 자꾸 자기 입술에만 머무는 걸 보는 데 지쳐 있었다. 그 여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이제 막 하려는 말까지 쥐고 흔들려는 것 같았다. "뷔르스트너 양은 내가 부탁한 개인적인 대화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거로군요." "그거예요." 몬탁 양이 말했다. "아니,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이상하게 날카롭게 말씀하시네요. 대개 대화라는 건 허락하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대화가 필요 없다고 여길 수는 있지요. 이번이 바로 그래요. 이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저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겠네요. 당신은 제 친구한테 글로든 말로든 이야기를 나누자고 청하셨죠. 그런데 제 친구는 — 적어도 저는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 그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건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모르는 이유로, 그 이야기가 정말로 이루어진다 해도 아무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어요. 그건 그렇고 친구는 어제야 그 얘기를, 그것도 아주 스치듯 했어요. 그러면서 당신도 그 대화에 그렇게 매달리지는 않을 거라고 했어요. 우연히 그런 생각이 드셨을 뿐이고,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이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아시게 될 거라고요. 저는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완전히 분명히 해 두려면 당신께 딱 부러진 대답을 전하는 게 낫겠다고 했어요. 제가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섰고, 친구는 조금 망설이다가 제게 맡겼어요. 이제 당신 뜻에도 맞게 한 거였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하면 늘 괴롭잖아요. 이번처럼 쉽게 없앨 수 있다면 당장 없애는 게 낫지요." "고맙습니다." K.는 곧바로 말하고, 천천히 일어나서 몬탁 양을 보고, 식탁 너머를 보고, 창밖을 보았다. 건너편 집이 햇빛 속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문 쪽으로 갔다. 몬탁 양은 그를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는 듯 몇 걸음 따라왔다. 그러나 문 앞에서 둘은 물러서야 했다. 문이 열리며 란츠 대위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K.는 처음으로 그를 가까이서 보았다. 마흔 살쯤 된 키 큰 남자로, 햇볕에 그은 살집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K.에게도 향한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몬탁 양에게 가서 공손히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몸놀림이 무척 세련되었다. 몬탁 양에게 보이는 그의 정중함은 그 여자가 K.에게서 받은 대접과 눈에 띄게 대조되었다. 그런데도 몬탁 양은 K.에게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K.가 보기에 그 여자는 오히려 그를 대위에게 소개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K.는 소개받고 싶지 않았다. 대위에게도 몬탁 양에게도 조금도 다정하게 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손등에 한 입맞춤이 그들을 한패로 묶어 버렸다. 더없이 순진하고 사심 없는 척하면서 그를 뷔르스트너 양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한패로. 그런데 K.는 그것만 알아챈 게 아니었다. 몬탁 양이 좋은, 그러나 양날의 칼 같은 방법을 골랐다는 것도 알아챘다. 그 여자는 뷔르스트너 양과 K.의 관계를, 무엇보다 그가 청한 대화의 무게를 부풀리면서, 동시에 모든 걸 부풀리는 게 K.인 것처럼 돌리려 했다. 그 여자는 착각하고 있었다. K.는 아무것도 부풀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뷔르스트너 양이 자기에게 오래 버티지 못할 보잘것없는 타자수 아가씨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루바흐 부인에게서 뷔르스트너 양에 대해 들은 이야기는 일부러 셈에 넣지 않았다. 이 모든 걸 생각하며 그는 인사도 거의 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곧장 제 방으로 가려 했지만, 등 뒤 식당에서 몬탁 양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리자, 어쩌면 대위와 몬탁 양 둘 다를 놀라게 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둘러보며 주위의 방 가운데 어디서든 방해가 올지 귀를 기울였다. 사방이 조용했다. 식당의 이야기 소리와, 부엌으로 가는 복도에서 들리는 그루바흐 부인의 목소리뿐이었다. 기회가 좋아 보였다. K.는 뷔르스트너 양의 방문으로 가서 나직이 노크했다. 아무 기척이 없자 한 번 더 두드렸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자고 있나? 아니면 정말로 몸이 안 좋은가? 아니면 이렇게 나직이 두드리는 사람은 K.밖에 없으리라 짐작하고 없는 척하는 걸까? K.는 없는 척하는 거라고 여기고 더 세게 두드렸다. 두드려도 소용이 없자 마침내 그는 무언가 옳지 않은, 게다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한 채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K.가 알던 방과는 거의 딴판이었다. 벽을 따라 이제 침대 두 개가 앞뒤로 놓여 있었고, 문 가까이 의자 세 개에는 옷과 속옷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장 하나가 열려 있었다. 몬탁 양이 식당에서 K.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뷔르스트너 양은 아마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K.는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뷔르스트너 양을 그렇게 쉽게 만나리라고는 이제 거의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해 본 것도 거의 몬탁 양에 대한 오기에서였다. 그만큼 더 난처했던 건, 문을 다시 닫는데 열린 식당 문간에서 몬탁 양과 대위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K.가 문을 열었을 때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K.를 지켜보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직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야기 도중에 무심히 둘러보듯 K.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눈길은 K.에게 무겁게 얹혔고, 그는 서둘러 벽을 따라 제 방으로 갔다.
매질하는 사람
며칠 뒤 어느 저녁, K.가 자기 사무실과 중앙 계단 사이의 복도를 지나가는데 — 이번에는 거의 맨 마지막으로 퇴근하는 길이었고, 발송부에서만 직원 둘이 전구 하나의 작은 불빛 속에서 아직 일하고 있었다 — 늘 잡동사니 창고려니 여겼을 뿐 직접 본 적은 없는 어느 문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놀라서 멈춰 서서,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확인하려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또 한숨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증인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직원 하나를 불러오려 했지만, 곧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치밀어 그는 문을 거의 부서져라 열어젖혔다. 짐작대로 잡동사니 창고였다. 문턱 너머에 쓸모없는 낡은 인쇄 양식들과 쓰러진 빈 도자기 잉크병들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 창고 안에는 세 남자가 천장 낮은 공간에 몸을 구부리고 서 있었다. 선반에 붙여 세운 초 하나가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요?" K.가 흥분해서 말이 엉키면서도 큰 소리는 내지 않고 물었다. 나머지 둘을 부리는 게 분명하고 맨 먼저 눈길을 끄는 한 남자는 일종의 검은 가죽옷을 입고 있었는데, 목부터 가슴 깊이까지, 그리고 두 팔은 온통 드러나 있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둘이 외쳤다. "나리! 나리가 심문 판사한테 우리를 고발해서 우리가 매를 맞게 됐습니다." 그제야 K.는 그들이 정말로 감시인 프란츠와 빌렘이라는 것을, 그리고 세 번째 남자가 그들을 때리려고 손에 회초리를 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런," K.가 그들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고발하지 않았소. 내 집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을 뿐이오. 그리고 당신들 행동이 흠잡을 데 없지는 않았잖소." "나리," 빌렘이 말했다. 그사이 프란츠는 세 번째 남자를 피해 빌렘 뒤로 몸을 숨기려 애쓰는 것 같았다. "우리가 얼마나 박봉인지 아시면 우리를 더 너그럽게 보실 겁니다. 저는 먹여 살릴 식구가 있고 여기 프란츠는 장가를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다들 어떻게든 한몫 챙기려 하죠. 그냥 일만 해서는, 아무리 죽어라 일해도 안 됩니다. 나리의 좋은 속옷에 눈이 멀었습니다. 물론 감시인이 그런 짓을 하는 건 금지돼 있고 잘못된 일이었죠. 하지만 속옷은 감시인 몫이라는 게 관례입니다. 늘 그래 왔어요. 믿어 주십시오. 그럴 만도 하지요. 체포당하는 불행을 겪는 사람한테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이 그걸 공개적으로 문제 삼으면 벌이 내려질 수밖에 없죠." "지금 한 말은 나도 몰랐소. 그리고 당신들을 벌하라고 요구한 적은 절대 없소. 나는 원칙을 따진 것뿐이오." "프란츠," 빌렘이 다른 감시인을 돌아보았다. "내가 뭐랬어, 이분은 우리를 벌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고 했지. 이제 들었지?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셨대." "그런 말에 마음 약해지지 마." 세 번째 남자가 K.에게 말했다. "이 벌은 정당하고 피할 수도 없어." "저놈 말 듣지 마십시오." 빌렘이 말했다. 그는 회초리를 한 대 맞은 손을 재빨리 입으로 가져가느라 잠깐 말을 끊었을 뿐이었다. "우리가 벌을 받는 건 나리가 우리를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안 그랬으면 우리가 한 짓이 알려졌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이걸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둘은, 특히 저는 오랫동안 감시인으로서 인정을 받아 왔습니다. 관청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감시를 잘했다는 건 나리도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우리는 앞날이 있었고 틀림없이 곧 매질꾼도 됐을 겁니다. 이놈처럼요. 이놈은 그저 운 좋게 아무한테도 고발당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런 고발은 정말 아주 드물거든요. 그런데 이제, 나리, 다 끝났습니다. 우리 앞날은 끝났어요. 이제 감시 일보다 훨씬 낮은 일을 해야 할 테고, 게다가 지금 이 끔찍하게 아픈 매까지 맞게 됐습니다." "회초리가 그렇게 아플 수 있소?" K.가 물으며 매질꾼이 눈앞에서 휘두르는 회초리를 살펴보았다. "홀딱 벗어야 하니까요." 빌렘이 말했다. "아, 그렇군." K.는 말하며 매질꾼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선원처럼 햇볕에 그을렸고, 거칠고 생기 있는 얼굴이었다. "이 둘이 매를 맞지 않게 할 방법은 없나?" 그가 매질꾼에게 물었다. "없어." 매질꾼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벗어." 그가 감시인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K.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이놈들 말을 다 믿으면 안 돼. 매가 무서워서 벌써 좀 모자라졌거든. 이를테면 이놈이" — 그는 빌렘을 가리켰다 — "제 앞날이 어쩌고 한 건 정말 웃기는 소리야. 이놈이 얼마나 뚱뚱한지 좀 봐. 처음 몇 대는 아예 기름에 파묻혀 버릴걸. 이놈이 왜 이렇게 뚱뚱해졌는지 알아? 체포된 사람들 아침밥을 죄다 먹어 치우는 버릇이 있어서야. 네 아침밥도 먹어 치우지 않았어? 거봐, 내 말이 맞지. 그런데 이런 배를 가진 놈은 절대로 매질꾼이 될 수 없어. 그건 턱도 없는 소리야." "그런 매질꾼도 있어." 마침 바지 허리띠를 풀던 빌렘이 우겼다. "없어." 매질꾼이 말하며 회초리로 빌렘의 목을 스치듯 긋자 빌렘이 움찔했다. "넌 듣지 말고 벗기나 해." "이 둘을 놓아주면 두둑이 사례하지." K.가 말하며, 매질꾼을 다시 쳐다보지 않고 — 이런 거래는 양쪽 다 눈을 내리깔고 해야 가장 잘 풀린다 — 지갑을 꺼냈다. "그러고 나서 나까지 고발해서 나도 매를 맞게 하려고?" 매질꾼이 말했다. "안 돼, 안 돼!" "분별 있게 굴어." K.가 말했다. "내가 이 둘이 벌받기를 원했다면 지금 이렇게 돈을 주고 빼내려 하겠나. 그냥 여기 문을 닫아 버리고 아무것도 보고 듣지 않은 척 집에 가면 그만이야. 그런데 나는 그러지 않아. 오히려 이 둘을 정말로 풀어 주고 싶어. 이들이 벌을 받게 될 줄, 아니 벌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 이름을 대지 않았을 거야. 나는 이들에게 죄가 있다고 보지 않아. 죄가 있는 건 조직이고, 높은 관리들이야." "그렇습니다!" 감시인들이 외쳤다가, 벌써 벗은 등에 곧바로 한 대씩 맞았다. "네 회초리 밑에 높은 판사가 있다면," K.가 말하며, 말하는 동안 다시 쳐들리려는 회초리를 눌러 내렸다. "정말이지 때리는 걸 막지 않을 거야. 오히려 좋은 일에 힘쓰라고 돈까지 얹어 주겠어." "네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매질꾼이 말했다. "난 뇌물은 안 받아. 난 때리라고 고용된 사람이니 때리는 거야." 어쩌면 K.가 끼어들어 일이 잘 풀리기를 기대하며 여태 꽤 잠자코 있던 감시인 프란츠가, 이제 바지만 입은 채 문 쪽으로 오더니 무릎을 꿇고 K.의 팔에 매달려 속삭였다. "우리 둘 다 봐주게 할 수 없으면 적어도 저라도 풀어 주십시오. 빌렘은 저보다 나이도 많고 뭐로 보나 저보다 둔해요. 게다가 몇 해 전에 가벼운 매질을 한 번 받은 적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아직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어요. 제가 그런 짓을 한 것도 좋든 나쁘든 제 스승인 빌렘 때문이었습니다. 은행 앞 아래에서 가엾은 제 약혼녀가 어떻게 될지 기다리고 있어요. 저는 너무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K.의 윗옷에 닦았다. "더는 못 기다려." 매질꾼이 말하더니 두 손으로 회초리를 움켜쥐고 프란츠를 내리쳤다. 그동안 빌렘은 구석에 웅크리고 고개도 감히 돌리지 못한 채 몰래 지켜보았다. 그때 프란츠가 지르는 비명이 솟아올랐다. 끊기지도 변하지도 않는 비명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고문당하는 무슨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 같았다. 복도 전체가 그 소리로 신음했고, 건물 전체가 다 들었을 게 틀림없었다. "소리 지르지 마!" K.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리고 직원들이 올 쪽을 긴장해서 바라보며 프란츠를 밀쳤다. 세게는 아니었지만, 정신을 잃은 프란츠가 쓰러져 경련하며 두 손으로 바닥을 더듬을 만큼은 셌다. 그래도 매를 피하지는 못했다. 회초리는 바닥에서도 그를 찾아냈다. 그가 그 밑에서 뒹구는 동안 회초리 끝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그리고 벌써 멀리서 직원 하나가 나타났고, 몇 걸음 뒤에 또 하나가 따라왔다. K.는 재빨리 문을 쾅 닫고 가까운 안뜰 쪽 창가로 가서 창을 열었다. 비명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직원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고 그가 외쳤다. "나요." "안녕하십니까, 간부님."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아니요." K.가 대답했다. "안뜰에서 개가 짖는 것뿐이오." 직원들이 그래도 꼼짝하지 않자 그가 덧붙였다. "하던 일 계속하시오."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려고 그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잠시 뒤 다시 복도를 보니 그들은 벌써 가고 없었다. 그러나 K.는 이제 창가에 그대로 있었다. 잡동사니 창고에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고 집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내려다보는 곳은 작은 네모난 안뜰이었다. 둘레에 사무실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창문은 이제 모두 어두웠고, 맨 위층 창문들만 달빛을 되비치고 있었다. K.는 손수레 몇 대가 뒤엉켜 있는 안뜰 한구석의 어둠 속을 애써 꿰뚫어 보려 했다. 매질을 막지 못한 게 괴로웠다. 그러나 막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프란츠가 소리만 지르지 않았더라면 — 물론 무척 아팠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참아야 하는 법이다 — 소리만 지르지 않았더라면 K.는 적어도 아마도 매질꾼을 설득할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가장 낮은 관리들이 모두 불한당이라면, 하필 가장 비인간적인 일을 맡은 매질꾼만 예외일 까닭이 있겠는가. K.는 지폐를 보자 매질꾼의 눈이 반짝이는 것도 잘 보았다. 매질꾼이 정말로 때린 건 뇌물 액수를 조금 더 올리려는 것뿐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K.는 돈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감시인들을 풀어 주고 싶었다. 이 법원 제도의 타락과 싸우기 시작한 이상, 이쪽에서도 손을 쓰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프란츠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순간 물론 모든 게 끝났다. K.는 직원들이, 어쩌면 온갖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가 창고 안의 무리와 흥정하는 걸 보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런 희생까지 K.에게 요구할 수는 정말 없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K. 자신이 옷을 벗고 감시인들 대신 매질꾼에게 몸을 내미는 편이 더 간단했을 것이다. 물론 매질꾼은 그런 대신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무 이득도 없이 의무를 크게 어기게 될 테고, 아마 두 배로 어기게 될 테니까. K.는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모든 법원 직원에게 건드릴 수 없는 몸일 테니 말이다. 물론 여기에도 특별한 규정이 있을 수는 있었다. 어쨌든 K.는 문을 쾅 닫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도 K.에게서 모든 위험이 사라진 건 결코 아니었지만. 마지막에 프란츠를 밀친 건 안타까운 일이었고, 흥분했다는 것 말고는 변명할 길이 없었다.
멀리서 직원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그는 창을 닫고 중앙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잡동사니 창고 문 앞에서 그는 잠깐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아주 조용했다. 그 남자가 감시인들을 때려죽였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그 남자 손에 맡겨져 있었으니까. K.는 벌써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이제 누구도 도울 수 없었고 직원들이 곧 올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꼭 문제 삼겠다고, 그리고 진짜 죄인들, 아직 한 명도 감히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한 높은 관리들을 힘닿는 데까지 마땅히 벌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은행의 바깥 계단을 내려가며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꼼꼼히 살폈지만, 꽤 먼 주변까지 둘러보아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가씨는 보이지 않았다. 약혼녀가 기다린다던 프란츠의 말은, 용서할 만하기는 해도, 동정을 더 사려는 거짓말이었던 셈이다.
이튿날에도 K.는 감시인들을 머릿속에서 떨칠 수 없었다. 일하면서도 정신이 흐트러져서, 일을 해치우려고 전날보다 조금 더 사무실에 남아 있어야 했다. 집에 가는 길에 다시 잡동사니 창고 앞을 지나다가 그는 버릇처럼 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어둠 대신 눈앞에 보인 것 앞에서 그는 넋이 나갔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전날 저녁 문을 열었을 때 본 그대로였다. 문턱 바로 뒤의 인쇄 양식과 잉크병, 회초리를 든 매질꾼, 아직 옷을 다 입고 있는 감시인들, 선반 위의 초. 그리고 감시인들이 하소연을 시작하며 외쳤다. 나리! 곧바로 K.는 문을 쾅 닫고, 그러면 더 단단히 잠기기라도 할 듯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직원들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복사기 앞에서 조용히 일하다가 놀라서 손을 멈췄다. "저 잡동사니 창고 좀 제발 치우시오." 그가 외쳤다. "이러다 쓰레기 속에 파묻히겠소." 직원들은 이튿날 하겠다고 했고, K.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그럴 작정이었지만, 이렇게 늦은 저녁에 억지로 일을 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직원들을 잠시라도 곁에 두려고 조금 앉아서, 복사본 몇 장을 이리저리 뒤섞어 검토하는 척했다. 그러다 직원들이 감히 자기와 함께 퇴근하지 못하리라는 걸 깨닫고, 지치고 멍한 채 집으로 갔다.
삼촌 · 레니
어느 오후 — K.는 마침 우편 마감을 앞두고 몹시 바빴다 — 서류를 들고 들어오는 직원 둘 사이를 비집고 K.의 삼촌 카를이 방으로 밀고 들어왔다. 시골의 작은 지주였다. K.는 삼촌을 보고도, 한참 전에 삼촌이 오리라 상상했을 때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삼촌은 올 수밖에 없었다. K.는 벌써 한 달쯤 전부터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이미 그는 삼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조금 구부정하게, 찌그러진 파나마모자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은 멀리서부터 그에게 내밀고, 앞을 가로막는 건 다 넘어뜨리면서 막무가내로 서둘러 책상 너머로 그 손을 뻗치는 모습이. 삼촌은 늘 서둘렀다. 수도에 올 때는 늘 하루만 머무는데, 그동안 마음먹은 일을 다 해치워야 하고, 게다가 우연히 생기는 이야기나 거래나 즐길 거리도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딱한 생각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K.는 삼촌이 한때 자기 후견인이었기에 특히 신세를 진 몸이라, 온갖 일을 거들어야 했고 삼촌을 자기 집에서 재워야 했다. K.는 삼촌을 「시골에서 온 유령」이라고 부르곤 했다.
인사를 하자마자 — K.가 권한 안락의자에 앉을 시간도 없었다 — 삼촌은 K.에게 단둘이서 잠깐 이야기하자고 했다. "꼭 해야 해." 삼촌이 힘겹게 침을 삼키며 말했다. "내 마음을 놓으려면 꼭 해야 해." K.는 곧바로 직원들을 방에서 내보내며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일렀다. "요제프,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거냐?" 둘만 남자 삼촌이 소리치며 책상에 걸터앉더니, 더 편히 앉으려고 쳐다보지도 않고 여러 서류를 엉덩이 밑으로 쑤셔 넣었다. K.는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된 일에서 갑자기 풀려난 참이라 우선 기분 좋은 나른함에 몸을 맡기고 창밖으로 맞은편 거리를 내다보았다. 그의 자리에서는 두 가게 진열창 사이의 텅 빈 건물 벽 한 조각만, 작은 세모꼴로 보였다. "창밖이나 보고 있구나." 삼촌이 두 팔을 쳐들며 소리쳤다. "제발, 요제프, 대답 좀 해라. 사실이냐? 그게 사실일 수 있단 말이냐?" "삼촌," K.가 멍하던 정신을 추스르며 말했다. "저한테 뭘 원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요제프." 삼촌이 경고하듯 말했다. "내가 알기로 너는 늘 사실대로 말했다. 방금 네 말을 나쁜 징조로 받아들여야 하겠느냐?" "무슨 말씀인지 짐작은 가요." K.가 순순히 말했다. "아마 제 소송 얘기를 들으셨겠지요." "그래." 삼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소송 얘기를 들었다." "누구한테서요?" K.가 물었다. "에르나가 편지에 썼더구나." 삼촌이 말했다. "그 애는 너하고 왕래도 없고, 너도 안타깝게 그 애를 별로 챙기지 않는데도 알게 됐더라. 오늘 편지를 받고 물론 곧장 달려왔다. 다른 이유는 없다만, 그거면 충분한 이유 같구나. 너에 관한 대목을 읽어 주마." 그는 지갑에서 편지를 꺼냈다. "여기 있다. 이렇게 썼다. 요제프 오빠는 오래 못 봤어요. 지난주에 은행에 한 번 갔는데, 오빠가 너무 바빠서 들여보내 주지를 않았어요.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피아노 레슨이 있어서 집에 가야 했어요. 오빠랑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아마 곧 기회가 있겠지요. 제 축일에 오빠가 커다란 초콜릿 상자를 보내 줬어요. 정말 다정하고 세심했어요. 그때 편지에 쓰는 걸 잊었는데, 두 분이 물어보시니 이제야 생각이 나네요. 아셔야 할 게, 초콜릿은 기숙사에서 금세 사라져요. 초콜릿을 선물 받았다는 걸 깨닫기가 무섭게 벌써 없어져 버려요. 그런데 요제프 오빠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더 있어요. 말씀드렸듯이 은행에서 오빠를 만나지 못한 건 오빠가 마침 어떤 신사분과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한동안 얌전히 기다리다가 직원한테 이야기가 오래 걸리겠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럴 거라고, 아마 간부님을 상대로 벌어지고 있는 소송 이야기일 거라고 했어요. 무슨 소송이냐고, 잘못 아신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잘못 안 게 아니라고, 소송이 맞다고, 그것도 무거운 소송이라고, 하지만 그 이상은 모른다고 했어요. 자기도 간부님을 돕고 싶다고, 좋고 공정한 분이시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힘 있는 분들이 간부님을 돌봐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고 결국 잘 끝나겠지만, 간부님 기분으로 보아 지금은 전혀 좋지 않다고 했어요. 물론 저는 그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어요. 순진한 직원을 달래 주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고, 다 뜬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사랑하는 아버지, 다음에 오실 때 한번 알아보시면 좋겠어요. 아버지라면 자세한 걸 쉽게 알아내실 수 있을 테고, 정말 필요하다면 아버지의 크고 힘 있는 인맥으로 나서 주실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필요하지 않다면, 아마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겠지만, 그래도 딸이 곧 아버지를 안아 볼 기회는 생기겠지요. 그러면 저는 무척 기쁠 거예요." "착한 아이야." 삼촌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말하며 눈물 몇 방울을 닦아 냈다. K.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어서 에르나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생일도 잊었다. 초콜릿 이야기는 분명 삼촌과 숙모 앞에서 그를 감싸 주려고 지어낸 것이었다. 무척 뭉클한 일이었고, 앞으로 꼬박꼬박 보내 주려는 극장표로는 절대 다 갚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기숙사로 찾아가 열여덟 살짜리 어린 여고생과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지금 그는 알맞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래서 이제 뭐라고 할 거냐?" 삼촌이 물었다. 편지 때문에 서두르던 것도 흥분도 다 잊고 편지를 한 번 더 읽는 것 같았다. "네, 삼촌." K.가 말했다. "사실이에요." "사실이라고?" 삼촌이 소리쳤다. "뭐가 사실이냐? 어떻게 그게 사실일 수 있어? 무슨 소송이냐? 설마 형사 소송은 아니겠지?" "형사 소송이에요." K.가 대답했다. "그런데 너는 형사 소송을 목에 걸고 여기 태연히 앉아 있단 말이냐?" 삼촌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쳤다. "제가 태연할수록 결과에는 더 좋아요." K.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걱정 마세요." "그걸로는 마음이 안 놓인다." 삼촌이 소리쳤다. "요제프, 요제프야, 너를 생각해라. 네 친척들을, 우리의 좋은 이름을 생각해. 너는 여태 우리의 자랑이었다. 우리의 수치가 되어서는 안 돼. 네 태도가,"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K.를 보았다. "마음에 안 든다. 아직 기운이 있는, 죄 없이 기소된 사람은 이렇게 굴지 않아.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해 봐라. 그래야 내가 도와줄 수 있지. 물론 은행 일이겠지?" "아니에요." K.가 말하며 일어섰다.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크세요, 삼촌. 직원이 아마 문가에 서서 엿듣고 있을 거예요. 그건 싫어요. 차라리 나가요. 그다음에 궁금하신 걸 다 되도록 대답해 드릴게요. 제가 집안에 해명할 의무가 있다는 건 잘 알아요." "그렇지!" 삼촌이 외쳤다. "그렇고말고. 어서 서둘러라, 요제프, 서둘러." "몇 가지만 지시하고요." K.는 말하고 전화로 대리를 불렀다. 대리는 곧 들어왔다. 흥분한 삼촌은 K.가 그를 불렀다고 손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지 않아도 의심할 여지는 없었는데. K.는 책상 앞에 서서, 차갑지만 귀 기울여 듣는 젊은이에게 여러 서류를 짚어 가며, 오늘 자기가 없는 동안 처리해야 할 일을 나직이 설명했다. 삼촌은 방해가 되었다. 처음에는 눈을 크게 뜨고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곁에 서 있었는데, 듣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해가 되었다. 그러다가 방 안을 오가며 이따금 창 앞이나 그림 앞에서 멈춰 서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구나" 라든가 "대체 이게 어떻게 되려는 건지 말 좀 해 봐라" 같은 외침을 터뜨렸다. 젊은이는 아무것도 못 알아챈 척하며 K.의 지시를 끝까지 차분히 듣고, 몇 가지 적어 두기도 하고는, K.에게 그리고 삼촌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나갔다. 삼촌은 마침 등을 돌리고 창밖을 내다보며 두 손을 뻗어 커튼을 구기고 있었다.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삼촌이 외쳤다. "드디어 저 꼭두각시가 갔구나. 이제 우리도 갈 수 있겠다. 드디어!" 안타깝게도, 직원 몇몇과 심부름꾼들이 서 있고 마침 부행장도 지나가던 로비에서 소송 이야기를 묻지 말라고 삼촌을 설득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 요제프." 삼촌은 둘레 사람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가볍게 경례로 답하며 말을 꺼냈다. "이제 솔직히 말해 봐라. 무슨 소송이냐." K.는 몇 마디 아무 뜻 없는 말을 하고 조금 웃기도 하다가, 계단에 가서야 사람들 앞에서는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삼촌에게 설명했다. "그렇지." 삼촌이 말했다. "그럼 이제 말해라." 그는 고개를 숙이고 짧고 급하게 시가를 빨며 들었다. "무엇보다, 삼촌," K.가 말했다. "이건 보통 법원에서 하는 소송이 아니에요." "그거 나쁘구나." 삼촌이 말했다. "네?" K.가 삼촌을 보며 말했다. "그게 나쁘다는 말이다." 삼촌이 되풀이했다. 둘은 거리로 내려가는 바깥 계단에 서 있었다. 경비원이 엿듣는 것 같아서 K.는 삼촌을 끌고 내려갔다. 붐비는 거리가 그들을 삼켰다. K.의 팔에 팔짱을 낀 삼촌은 소송에 대해 더는 그렇게 다급하게 묻지 않았고,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걷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 마침내 삼촌이 물으며 갑자기 멈춰 서는 바람에 뒤에서 오던 사람들이 놀라 비켜 갔다. "이런 일은 갑자기 생기지 않아. 오래전부터 준비되는 거야. 무슨 징조가 있었을 텐데 왜 나한테 편지하지 않았니. 내가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는 거 알잖니. 나는 말하자면 아직도 네 후견인이고, 오늘까지 그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물론 지금도 도와주마. 다만 소송이 이미 진행 중이면 무척 어려워. 어쨌든 가장 좋은 건 지금 잠깐 휴가를 내고 시골 우리 집으로 오는 거다. 너 좀 야위었구나, 이제 보니. 시골에서 기운을 차리면 좋을 거야. 분명 힘든 일들이 앞에 있을 테니까. 게다가 그러면 말하자면 법원 손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서는 그자들이 온갖 힘을 가지고 있어서 너한테도 저절로 그 힘을 쓸 수밖에 없지만, 시골까지는 먼저 사람을 보내거나, 편지나 전보나 전화로만 너를 움직이려 들 수밖에 없어. 그러면 당연히 힘이 약해지지. 너를 풀어 주지는 못해도 숨은 돌리게 해 줄 거다." "나가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잖아요." 삼촌의 말에 조금 생각이 이끌린 K.가 말했다. "그러지는 않을 거다." 삼촌이 곰곰 생각하며 말했다. "네가 떠난다고 그자들이 잃는 힘이 그렇게 크지는 않으니까." "저는," K.는 삼촌이 멈춰 서지 못하게 팔을 끼며 말했다. "삼촌이 이 일을 저보다도 더 가볍게 보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네요." "요제프!" 삼촌이 소리치며 멈춰 서려고 팔을 빼려 했지만 K.가 놓아주지 않았다. "너 달라졌구나. 늘 그렇게 판단력이 좋더니 하필 지금 그게 너를 떠나 버린 거냐? 소송에서 지고 싶으냐? 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그냥 지워져 버린다는 뜻이야. 그리고 친척들까지 다 휩쓸려 들어가거나, 적어도 바닥까지 굴욕을 당한다는 거지. 요제프, 정신 차려라. 네 무심함 때문에 내가 미치겠다. 너를 보면 이런 속담을 믿고 싶어질 지경이다. 「그런 소송을 가졌다는 건 이미 진 것이다.」" "삼촌," K.가 말했다. "흥분해 봐야 소용없어요. 삼촌 쪽에서도 그렇고, 제 쪽에서도 그럴 거예요. 흥분해서 소송에 이기지는 못해요. 삼촌의 경험을 — 놀랄 때가 있어도 — 제가 늘, 지금도 무척 존중하듯이, 제 실제 경험도 좀 인정해 주세요. 소송 때문에 집안까지 피해를 본다고 하시니 — 저로서는 전혀 이해가 안 되지만 그건 부차적인 일이고요 — 뭐든 기꺼이 삼촌 말씀을 따를게요. 다만 시골에 가 있는 건 삼촌 입장에서 봐도 이롭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건 도망치는 거고 죄를 인정하는 거니까요. 게다가 여기서는 더 쫓기긴 해도 제가 직접 일을 더 밀고 나갈 수 있어요." "그렇지." 삼촌이 이제야 서로 다가가는 것 같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제안을 한 건, 네가 여기 있으면 네 무심함 때문에 일이 위태로울 것 같아서, 네 대신 내가 너를 위해 뛰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하지만 네가 온 힘을 다해 직접 밀고 나가겠다면야 물론 그게 훨씬 낫지." "그럼 거기엔 뜻이 맞네요." K.가 말했다. "그럼 이제 제가 우선 뭘 해야 할지 제안이 있으세요?" "물론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 삼촌이 말했다. "내가 벌써 이십 년 동안 거의 줄곧 시골에 있었다는 걸 생각해라. 그러다 보면 이런 쪽으로는 감이 무뎌지지. 여기 사정을 더 잘 알 만한 인사들과의 중요한 연줄도 여럿 저절로 느슨해졌고. 나는 시골에서 좀 외톨이야. 너도 알잖니. 이런 일이 있어야 비로소 스스로 느끼게 되지. 네 일은 좀 뜻밖이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에르나의 편지를 받고 벌써 뭔가 이런 일을 짐작했고, 오늘 너를 보고는 거의 확신했지만.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시간을 버리지 않는 거야." 말하는 동안 이미 삼촌은 발끝으로 서서 자동차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그는 운전사에게 주소를 외치면서 K.를 뒤로 끌어 차에 태웠다. "지금 훌트 변호사한테 간다." 그가 말했다. "내 학교 동창이야. 너도 이름은 들어 봤겠지? 못 들었어? 그거 이상하구나. 변호인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로 이름이 꽤 났는데. 나는 특히 사람으로서 그를 무척 믿는다." "삼촌이 하시는 일이면 저는 다 좋아요." K.가 말했다. 그러나 삼촌이 이 일을 서두르며 다급하게 다루는 게 불편했다. 피고인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에게 가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일에도 변호사를 댈 수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가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삼촌이 말했다. "당연한 일 아니냐. 왜 안 되겠어? 자, 이제 내가 자세히 알 수 있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다 이야기해 봐라." K.는 곧바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소송이 큰 수치라는 삼촌의 생각에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항의는 이렇게 모든 걸 털어놓는 것뿐이었다. 뷔르스트너 양의 이름은 딱 한 번 스치듯 말했지만, 그렇다고 솔직함이 덜한 건 아니었다. 뷔르스트너 양은 소송과 아무 관련이 없었으니까. 이야기하면서 그는 창밖을 내다보다가, 차가 마침 법원 사무처가 있는 그 변두리로 다가가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가 삼촌에게 그걸 일러 주었지만, 삼촌은 그 우연을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다. 차는 어두운 집 앞에 섰다. 삼촌은 곧장 일 층 첫 번째 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기다리는 동안 삼촌은 커다란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속삭였다. "여덟 시라, 민원인이 찾아오기엔 이상한 시간이지. 하지만 훌트는 나한테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문의 작은 들창에 크고 까만 눈 두 개가 나타나 두 손님을 잠시 바라보더니 사라졌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삼촌과 K.는 서로 두 눈을 보았다고 확인했다. "낯선 사람을 무서워하는 새 하녀구나." 삼촌이 말하며 다시 두드렸다. 다시 그 눈이 나타났다. 이제는 거의 슬퍼 보인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그건 머리 바로 위에서 쉿쉿 세게 타면서도 빛은 별로 내지 않는 가스 불꽃 때문에 생긴 착각인지도 몰랐다. "여세요." 삼촌이 소리치며 주먹으로 문을 쳤다. "변호사님 친구들이오." "변호사님은 편찮으십니다." 등 뒤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작은 복도 저편 끝의 문간에 잠옷 가운 차림의 신사가 서서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알렸다. 오래 기다리느라 벌써 화가 난 삼촌이 홱 돌아서며 외쳤다. "아프다고? 아프다고 했소?" 그러고는 그 신사가 병이라도 되는 양 거의 위협하듯 그에게 다가갔다. "벌써 열렸습니다." 신사가 변호사 집 문을 가리키며 말하고는 가운을 여미고 사라졌다. 문은 정말로 열려 있었다. 한 아가씨가 — K.는 조금 튀어나온 그 까만 눈을 다시 알아보았다 — 길고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초를 든 채 현관에 서 있었다. "다음엔 좀 더 일찍 여세요." 아가씨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는 동안 삼촌은 인사 대신 그렇게 말했다. "가자, 요제프." 삼촌은 천천히 아가씨 곁을 비집고 지나가는 K.에게 말했다. "변호사님은 편찮으세요." 삼촌이 멈추지 않고 어느 문으로 서둘러 가자 아가씨가 말했다. 아가씨가 벌써 돌아서서 현관문을 다시 잠그는 동안에도 K.는 아가씨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인형처럼 동그란 얼굴이었다. 창백한 뺨과 턱만이 아니라 관자놀이와 이마 가장자리까지 둥글었다. "요제프!" 삼촌이 다시 불렀다. 그리고 아가씨에게 물었다. "심장병이오?" "그런 것 같아요." 아가씨가 말했다. 아가씨는 어느새 초를 들고 앞장서서 방문을 열어 두었다. 촛불이 아직 닿지 않는 방 한구석에서, 침대 위로 턱수염이 긴 얼굴이 몸을 일으켰다. "레니, 누가 왔니?" 촛불에 눈이 부셔 손님을 알아보지 못한 변호사가 물었다. "알베르트, 자네 옛 친구일세." 삼촌이 말했다. "아, 알베르트." 변호사는 말하며 이 손님 앞에서는 꾸밀 필요가 없다는 듯 베개 위로 도로 쓰러졌다. "정말 그렇게 안 좋은가?" 삼촌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난 안 믿어. 자네 심장병이 도진 거고, 예전처럼 지나갈 거야." "그럴지도." 변호사가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여태 어느 때보다 더 나빠. 숨쉬기 힘들고, 잠은 한숨도 못 자고, 날마다 기운이 빠지고 있어." "그렇군." 삼촌은 말하며 커다란 손으로 파나마모자를 무릎 위에 꾹 눌렀다. "나쁜 소식이군. 그건 그렇고 간병은 제대로 받고 있나? 여긴 너무 우울하고 어둡구먼. 마지막으로 온 게 오래전인데, 그땐 더 밝아 보였어. 여기 자네 아가씨도 그리 명랑해 보이지 않는군. 아니면 시치미를 떼는 건지." 아가씨는 여전히 초를 들고 문 가까이 서 있었다. 흐릿한 눈길로 보아 알 수 있는 한, 삼촌이 지금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도 아가씨는 삼촌보다 오히려 K.를 보고 있었다. K.는 아가씨 가까이 끌어다 놓은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나처럼 아픈 사람은," 변호사가 말했다. "조용해야 해. 나는 우울하지 않아."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레니가 간병을 잘해 줘. 착한 아이야." 그러나 삼촌은 그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간병하는 여자에게 뚜렷이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 환자에게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간병하는 여자가 이제 침대로 가서 초를 작은 탁자에 놓고 환자에게 몸을 숙여 베개를 매만지며 그와 속삭이는 것을 엄한 눈길로 좇았다. 그는 환자에 대한 배려도 거의 잊고 일어나 간병하는 여자 뒤를 오갔다. 그가 여자의 치맛자락을 붙잡아 침대에서 끌어내도 K.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K. 자신은 모든 걸 차분히 지켜보았다. 변호사가 아픈 게 오히려 아주 싫지만은 않았다. 삼촌이 그의 일에 보이는 열성에 맞설 수는 없었는데, 그 열성이 이제 그가 손쓰지 않아도 딴 데로 쏠리는 걸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때 삼촌이, 어쩌면 간병하는 여자를 모욕하려는 뜻만으로 말했다. "아가씨, 우리끼리 잠깐 있게 해 주시오. 친구와 의논할 사적인 일이 있소." 아직 환자에게 한껏 몸을 숙이고 벽 쪽 시트를 펴고 있던 여자는 고개만 돌려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분노로 막혔다가 다시 넘쳐흐르는 삼촌의 말과는 눈에 띄게 달랐다. "보시다시피 이분은 너무 아프셔서 무슨 일을 의논하실 수가 없어요." 아마 그저 편해서 삼촌의 말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듣기에도 비웃는 말로 들릴 수 있었는데, 삼촌은 물론 칼에 찔린 듯 펄쩍 뛰었다. "이 망할 것이……" 그는 흥분해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첫 소리로 아직 알아듣기 힘들게 말했다. 비슷한 일을 예상하긴 했지만 K.는 놀라서, 두 손으로 삼촌의 입을 막을 작정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그때 아가씨 뒤에서 환자가 몸을 일으켰다. 삼촌은 무언가 역겨운 걸 삼키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좀 더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도 물론 아직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소. 내가 청하는 게 안 되는 일이라면 청하지도 않았을 거요. 이제 나가 주시오." 간병하는 여자는 침대 곁에 꼿꼿이 서서 삼촌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K.가 보기에 여자는 한 손으로 변호사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레니 앞에서는 무슨 말이든 해도 돼." 환자가 틀림없이 간절히 부탁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 관한 일이 아니야." 삼촌이 말했다. "내 비밀이 아니라고." 그러고는 더는 흥정할 생각이 없지만 생각할 시간은 조금 더 주겠다는 듯 돌아섰다. "그럼 누구 일인가?" 변호사가 꺼져 가는 목소리로 물으며 다시 누웠다. "내 조카." 삼촌이 말했다. "데리고 왔네." 그리고 그는 소개했다. 은행 간부 요제프 K. "오!" 환자가 훨씬 생기 있게 말하며 K.에게 손을 내밀었다. "용서하십시오. 전혀 못 봤습니다. 레니, 가 보렴." 그러고는 이제 조금도 버티지 않는 간병하는 여자에게, 오래 헤어지기라도 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자네는," 마침내 그가 마음이 풀려 다가온 삼촌에게 말했다. "병문안을 온 게 아니라 볼일이 있어 왔군." 병문안이라는 생각이 여태 변호사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이제 무척 기운이 나 보였다. 꽤 힘들었을 텐데도 줄곧 한쪽 팔꿈치로 몸을 괴고, 턱수염 한가운데의 한 가닥을 자꾸 잡아당겼다. "그 마녀가 나가고 나니 벌써 훨씬 건강해 보이는군." 삼촌이 말했다. 그러다 말을 끊고 "분명 엿듣고 있을 거야" 하고 속삭이더니 문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삼촌은 돌아왔는데, 실망하지는 않았다. 엿듣지 않는 게 더 큰 심술로 보였으니까. 다만 씁쓸해했다. "자네가 그 아이를 잘못 보는 거야." 변호사가 간병하는 여자를 더 감싸지는 않고 말했다. 어쩌면 감쌀 필요가 없는 아이라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마음을 쓰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네 조카분 일이라면, 이 무척 어려운 일에 내 힘이 모자라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정말 기쁘겠네. 모자랄까 봐 무척 걱정되지만, 어쨌든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보겠네. 내 힘이 모자라면 다른 사람을 더 댈 수도 있고. 솔직히 말하면 이 일에 관심이 너무 많아서 전혀 관여하지 않을 수는 없겠네. 내 심장이 견디지 못한다면, 적어도 여기서 완전히 멈추는 건 품위 있는 기회가 되겠지." K.는 이 연설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무슨 설명이라도 찾으려고 삼촌을 보았지만, 삼촌은 초를 손에 들고 작은 탁자에 걸터앉아 — 거기서 벌써 약병 하나가 양탄자 위로 굴러떨어졌다 — 변호사의 말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 찬성했고, 이따금 K.에게도 똑같이 찬성하라는 눈길을 보냈다. 혹시 삼촌이 전에 벌써 변호사에게 소송 얘기를 했던 걸까?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여태 있었던 일이 모두 그렇지 않다고 말해 주었다. "무슨 말씀인지……" 그래서 그는 말했다. "아, 제가 잘못 알아들었나요?" 변호사가 K.만큼이나 놀라고 당황해서 물었다. "제가 너무 앞서 나갔는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 소송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요?" "물론이지." 삼촌이 말하고 K.에게 물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냐?" "네, 하지만 저와 제 소송에 대해 어떻게 아십니까?" K.가 물었다. "아, 그거요."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변호사니까요. 법조계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여러 소송 이야기가 나오고, 눈에 띄는 건, 특히 친구의 조카에 관한 거라면 기억해 두지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대체 뭘 원하는 거냐?" 삼촌이 K.에게 다시 물었다. "너 왜 이렇게 불안해하니." "그 법조계 사람들과 어울리십니까?" K.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애처럼 묻는구나." 삼촌이 말했다. "제 분야 사람들 말고 누구와 어울리겠습니까?" 변호사가 덧붙였다. 반박할 수 없게 들려서 K.는 아예 대꾸하지 않았다. '당신은 다락방 법원이 아니라 법원 청사에 있는 법원에서 일하시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정말로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변호사가 당연한 이야기를 쓸데없이 곁들여 설명하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런 교류에서 저는 제 의뢰인들을 위해 큰 이득을 얻기도 합니다. 여러 면에서요. 늘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물론 지금은 병 때문에 조금 거동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법원의 좋은 친구들이 찾아와서 이것저것 알게 됩니다. 어쩌면 아주 건강해서 온종일 법원에서 지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지도 모르지요. 이를테면 지금도 반가운 손님이 와 계십니다." 그러고는 방의 어두운 구석을 가리켰다. "어디요?" K.는 처음 놀란 김에 거의 무례하게 물었다. 그는 불안하게 둘러보았다. 작은 촛불은 맞은편 벽까지 전혀 닿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로 거기 구석에서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촌이 이제 높이 쳐든 촛불 속에, 작은 탁자 곁에 나이 든 신사 하나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렇게 오래 눈에 띄지 않았던 걸 보면 아예 숨도 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제 그는 자기에게 눈길이 쏠린 게 못마땅한 듯 거드름 피우며 일어섰다. 짧은 날개처럼 두 손을 파닥이며 모든 소개와 인사를 물리치려는 것 같았다. 자기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는 결코 않다는 듯, 다시 어둠 속으로 보내 주고 자기가 있다는 걸 잊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걸 들어줄 수는 없었다. "자네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지 뭔가." 변호사가 설명하며 그 신사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해 격려했다. 신사는 천천히, 머뭇거리며, 두리번거리면서도 어떤 위엄을 갖추고 다가왔다. "사무처장님께서 — 아, 참, 실례했습니다. 소개를 안 했군요 — 여기는 제 친구 알베르트 K., 여기는 그 조카 은행 간부 요제프 K., 그리고 여기는 사무처장님이십니다 — 그러니까 사무처장님께서 친절하게도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이런 방문이 얼마나 값진지는 사무처장님이 얼마나 일에 파묻혀 계신지 아는 사람만 제대로 알 수 있지요. 아무튼 그래도 와 주셨고, 저희는 제 기운이 허락하는 만큼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레니한테 손님을 들이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올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저희끼리만 있자는 생각이었는데, 그때 자네 주먹질이 들렸지, 알베르트. 그래서 사무처장님께서 의자와 탁자를 들고 구석으로 옮기셨는데, 이제 보니 우리가 혹시, 그러니까 원하신다면, 함께 의논할 일이 있어서 다시 모여 앉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사무처장님." 그는 고개를 숙이고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침대 가까이의 안락의자를 가리켰다. "안타깝지만 몇 분밖에 못 있습니다." 사무처장은 상냥하게 말하며 안락의자에 넓게 앉아 시계를 보았다. "일이 부르니까요. 어쨌든 제 친구의 친구를 알게 될 기회는 놓치고 싶지 않군요." 그는 삼촌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삼촌은 새로 알게 된 사람이 무척 흡족한 것 같았지만, 타고난 성품 탓에 공손한 마음을 드러낼 줄 몰라서 사무처장의 말에 당황하면서도 큰 웃음을 곁들였다. 보기 흉한 광경이었다! K.는 모든 걸 차분히 지켜볼 수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무처장은 이왕 끌려 나온 김에, 버릇인 듯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었다. 처음에 기운 없어 보였던 게 어쩌면 새 손님을 쫓아내려는 것뿐이었을지도 모를 변호사는 손을 귀에 대고 귀 기울여 들었다. 초를 든 삼촌은 — 그는 초를 허벅지 위에 얹어 균형을 잡고 있었고 변호사는 자주 걱정스럽게 그쪽을 보았다 — 곧 당황한 기색을 떨치고, 사무처장이 말하는 방식에도, 말하면서 곁들이는 부드러운 물결 같은 손짓에도 그저 황홀해했다. 침대 기둥에 기대선 K.는 사무처장에게 어쩌면 일부러 완전히 무시당했고, 늙은 신사들의 청중 노릇만 했다. 게다가 그는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거의 알지 못한 채, 간병하는 여자와 그 여자가 삼촌에게 받은 푸대접을 생각하다가, 사무처장을 전에 한 번 본 적이 없는지, 어쩌면 첫 심문 때 모임에서 본 게 아닌지 생각했다. 그가 착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사무처장은 첫 줄의 모임 사람들, 수염이 성긴 그 늙은 신사들 사이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때 현관에서 도자기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서 모두 귀를 곤두세웠다. "무슨 일인지 보고 오겠습니다." K.는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붙잡을 틈을 주기라도 하듯 천천히 나갔다. 현관에 들어서서 어둠 속에서 방향을 찾으려는데, 아직 문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 위에 작은 손 하나가, K.의 손보다 훨씬 작은 손이 얹히더니 문을 살며시 닫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간병하는 여자였다. "아무 일도 없어요." 여자가 속삭였다. "당신을 불러내려고 접시 하나를 벽에 던졌을 뿐이에요." 쭈뼛해진 K.가 말했다. "나도 당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 더 좋죠." 간병하는 여자가 말했다. "이리 오세요." 몇 걸음 가자 불투명 유리문이 나왔고, 여자가 K. 앞에서 그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여자가 말했다. 아무래도 변호사의 서재 같았다. 지금은 두 큰 창문 앞마다 바닥의 작은 네모만 환히 비추는 달빛으로 볼 수 있는 한, 방에는 묵직한 옛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여기요." 여자가 말하며 등받이에 나무 조각을 새긴 거무스름한 긴 궤 의자를 가리켰다. 앉고 나서도 K.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천장이 높고 커다란 방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여기서 길을 잃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K.는 손님들이 커다란 책상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은 잊고 오로지 간병하는 여자에게만 눈길이 갔다. 여자는 그의 바로 곁에 앉아서 그를 팔걸이 쪽으로 거의 밀어붙이고 있었다. "저는," 여자가 말했다. "제가 부르지 않아도 혼자서 저한테 나오실 줄 알았어요. 이상했어요. 처음 들어오셨을 때는 줄곧 저를 쳐다보시더니 그다음엔 기다리게 하셨잖아요. 그건 그렇고 저를 레니라고 부르세요." 여자는 이 이야기의 한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듯 서둘러 불쑥 덧붙였다. "좋습니다." K.가 말했다. "하지만 이상했다는 건, 레니, 쉽게 설명할 수 있어요. 첫째로 나는 늙은 신사들의 수다를 들어야 했고 까닭 없이 뛰쳐나올 수 없었어요. 둘째로 나는 뻔뻔하기는커녕 오히려 수줍음을 타는 편이고, 레니 당신도 정말이지 단숨에 넘어올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그게 아니에요." 레니가 팔을 등받이 위에 걸치고 K.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거고, 아마 지금도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요." "마음에 드는 것쯤이야 대단한 게 아니죠." K.가 얼버무렸다. "어머!"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K.의 말과 이 짧은 외침으로 여자는 어떤 우위를 얻었다. 그래서 K.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방 안의 어둠에 벌써 익숙해져서 그는 가구의 여러 세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특히 문 오른쪽에 걸린 커다란 그림 하나가 눈에 띄어 그는 더 잘 보려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법복을 입은 남자를 그린 그림이었다. 그는 높은 옥좌 같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의자의 금박이 그림 여기저기서 도드라져 보였다. 이상한 것은 이 판사가 차분하고 위엄 있게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왼팔은 등받이와 팔걸이에 꽉 붙이고 오른팔은 완전히 비운 채 손으로만 팔걸이를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 순간 격렬하게, 어쩌면 분개해서 몸을 돌려 벌떡 일어나 무언가 결정적인 말을 하거나 아예 판결을 선고하려는 것 같았다. 피고인은 아마 계단 발치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란 양탄자를 깐 계단의 맨 위 몇 칸이 그림에 아직 보였다. "어쩌면 저 사람이 내 판사일지도 모르겠군요." K.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 알아요." 레니도 그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기 자주 와요. 젊었을 때 그림인데, 저 그림하고 조금이라도 닮았던 적은 없었을 거예요. 거의 조그마할 정도로 작거든요. 그런데도 그림에선 저렇게 늘여서 그리게 했어요. 여기 사람들이 다 그렇듯 말도 안 되게 허영심이 강하거든요. 하지만 저도 허영심이 있어서 당신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게 무척 속상해요." 이 마지막 말에 K.는 레니를 끌어안아 당기는 것으로만 대답했다. 레니는 조용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머지 말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 사람은 무슨 직급이죠?" "심문 판사예요." 레니가 말하며 자기를 끌어안은 K.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가지고 놀았다. "또 심문 판사뿐이군." K.가 실망해서 말했다. "높은 관리들은 숨어 있어. 그래도 옥좌에 앉아 있잖아요." "그건 다 지어낸 거예요." 레니가 K.의 손 위로 얼굴을 숙이며 말했다. "실제로는 낡은 말 담요를 접어 깐 부엌 의자에 앉아 있어요. 그런데 꼭 줄곧 소송 생각만 하셔야 해요?" 레니가 천천히 덧붙였다. "아니요, 전혀." K.가 말했다. "오히려 너무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당신 실수는 그게 아니에요." 레니가 말했다. "너무 굽히지 않는 게 문제예요. 그렇게 들었어요." "누가 그래요?" K.가 물었다. 가슴에 레니의 몸이 느껴졌고, 그는 풍성하고 까맣고 단단히 땋아 올린 레니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걸 말하면 너무 많이 털어놓는 거예요." 레니가 대답했다. "제발 이름은 묻지 마세요. 대신 실수를 고치세요. 그렇게 굽히지 마세요. 이 법원한테는 맞설 수가 없어요. 자백을 해야 해요. 다음 기회에 자백하세요. 그래야 빠져나갈 가능성이 생겨요. 그래야만요. 하지만 그것도 남의 도움 없이는 안 돼요. 그 도움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도와드릴게요." "이 법원도, 여기서 필요한 속임수도 잘 아는군요." K.는 말하며, 레니가 너무 세게 파고들자 레니를 제 무릎 위로 들어 올렸다. "이게 좋아요." 레니는 치마를 펴고 블라우스를 바로잡으며 그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그의 목에 매달린 채 몸을 뒤로 젖히고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자백하지 않으면 날 도울 수 없는 건가요?" K.가 떠보듯 물었다. 나는 돕는 여자들을 모으고 있구나, 그는 거의 놀라며 생각했다. 처음엔 뷔르스트너 양, 다음엔 법원 직원의 아내, 그리고 이제 알 수 없게 나를 원하는 것 같은 이 작은 간병인. 마치 거기가 딱 제자리라는 듯 내 무릎에 앉아 있구나! "네." 레니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도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제 도움을 원하지도 않잖아요. 관심도 없고, 고집이 세서 설득되지도 않아요." "애인 있어요?" 잠시 뒤 레니가 물었다. "없습니다." K.가 말했다. "에이, 있잖아요." 레니가 말했다. "네, 사실은 있어요." K.가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애인을 없다고 해 놓고 사진까지 가지고 다니다니." 레니가 조르자 그는 엘자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레니는 그의 무릎 위에 웅크린 채 사진을 뜯어보았다. 순간을 찍은 사진이었다. 엘자가 포도주 술집에서 즐겨 추는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고 난 뒤에 찍혀서, 치마가 아직 도는 바람에 주름지며 몸 둘레로 날리고 있었다. 엘자는 두 손을 단단한 허리에 얹고 목을 곧게 세운 채 웃으며 옆을 보고 있었다. 그 웃음이 누구를 향한 건지는 사진으로는 알 수 없었다. "코르셋을 꽉 조였네요." 레니가 말하며 자기가 보기에 그게 드러나는 곳을 가리켰다. "마음에 안 들어요. 굼뜨고 거칠어요. 하지만 당신한테는 부드럽고 다정할지도 모르겠네요. 사진으로 보면 그럴 것도 같아요. 이렇게 크고 튼튼한 여자들은 부드럽고 다정한 것 말고는 할 줄 모를 때가 많거든요. 하지만 이 여자가 당신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K.가 말했다. "부드럽고 다정하지도 않고, 나를 위해 희생할 수도 없을 겁니다. 나도 여태 둘 중 어느 것도 요구한 적이 없고요. 아니, 이 사진을 당신만큼 자세히 들여다본 적도 없어요." "그럼 이 여자한테 별 관심이 없는 거네요." 레니가 말했다. "그러니까 애인도 아닌 거예요." "애인 맞아요." K.가 말했다. "한 말은 물리지 않겠습니다." "그럼 지금은 애인이라고 쳐요." 레니가 말했다. "하지만 이 여자를 잃거나 다른 사람하고, 이를테면 저하고 바꿔도 그리 아쉬워하지는 않으시겠죠." "물론이죠." K.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 여자는 당신보다 나은 점이 하나 있어요. 내 소송을 전혀 모르고, 설령 안다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나더러 굽히라고 설득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건 나은 점이 아니에요." 레니가 말했다. "다른 나은 점이 없다면 저는 기죽지 않아요. 그 여자 몸에 무슨 흠이 있나요?" "몸에 흠이요?" K.가 물었다. "네." 레니가 말했다. "저한테는 그런 작은 흠이 있거든요. 보세요." 레니는 오른손 가운뎃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을 벌렸다. 그 사이에 이어진 얇은 막이 짧은 손가락의 거의 맨 윗마디까지 닿아 있었다. K.는 어둠 속에서 레니가 무얼 보여 주려는지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고, 그래서 레니는 그가 만져 볼 수 있게 그의 손을 그리로 이끌었다. "자연의 장난이군." K.가 말하고, 손 전체를 다 살펴본 뒤 덧붙였다. "참 예쁜 발톱이네요!" 레니는 일종의 자랑스러움을 품고, K.가 놀라서 그 두 손가락을 자꾸 벌렸다 붙였다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는 그 손가락에 살짝 입을 맞추고 놓았다. "어머!" 그러나 레니는 곧바로 외쳤다. "저한테 입 맞췄어요!" 서둘러, 입을 벌린 채 레니는 무릎으로 그의 무릎 위를 기어올랐다. K.는 거의 당황해서 레니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오자 레니에게서 후추 같은 씁쓸하고 자극적인 냄새가 풍겼다. 레니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 위로 몸을 숙여 그의 목을 깨물고 입 맞추었고, 머리카락까지 깨물었다. "저랑 바꿨어요!" 레니가 이따금 외쳤다. "보세요, 결국 저랑 바꿨잖아요!" 그때 레니의 무릎이 미끄러졌고, 레니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양탄자 위로 떨어질 뻔했다. K.는 붙잡으려고 레니를 끌어안았다가 함께 끌려 내려갔다. "이제 넌 내 거야." 레니가 말했다.
"여기 집 열쇠 있어.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와." 그것이 레니의 마지막 말이었고, 나오는 그의 등에 방향 없는 입맞춤 하나가 떨어졌다. 대문을 나서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혹시 창가의 레니를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해서 거리 한가운데로 나가려는데, 집 앞에 서 있던 — 정신이 팔린 K.가 전혀 알아채지 못한 — 자동차에서 삼촌이 뛰쳐나와 그의 두 팔을 붙잡고 대문에 못 박기라도 하듯 그를 밀어붙였다. "이 녀석아!" 삼촌이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잘 풀려 가던 네 일을 끔찍하게 망쳐 놨다. 지저분한 계집애랑 숨어 들어가서, 게다가 그건 누가 봐도 변호사의 애인인데, 몇 시간이나 안 나타나다니. 핑계조차 대지 않고, 숨기지도 않고, 아니, 아주 대놓고 그 애한테 달려가서 붙어 있었어. 그동안 우리는 모여 앉아 있었다. 너를 위해 애쓰는 삼촌, 네 편으로 만들어야 할 변호사, 무엇보다 사무처장, 지금 단계에서 네 일을 그야말로 쥐고 흔드는 그 높은 분이. 너를 어떻게 도울지 의논하려 했지. 나는 변호사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고, 변호사는 또 사무처장을 그래야 하는데, 너는 적어도 나를 거들 이유가 충분하지 않았냐. 그런데 너는 사라져 버렸어. 결국 숨길 수가 없게 됐지. 그래, 다들 점잖고 노련한 사람들이라 그 얘기는 안 하고 나를 배려하더라만, 결국 그 사람들도 더는 참지 못했어. 그 일은 입에 올릴 수 없으니 입을 다물어 버리더구나. 우리는 몇 분이나 말없이 앉아서 혹시 네가 오지 않나 귀를 기울였다. 다 헛일이었지. 마침내 원래 생각보다 훨씬 오래 머문 사무처장이 일어나서 작별 인사를 하더라. 나를 도울 수 없으면서도 딱하게 여기는 게 뚜렷했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상냥하게 문간에서 한참 더 기다리다가 가더구나. 물론 나는 그가 가서 기뻤다. 벌써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니까. 아픈 변호사한테는 이 모든 게 더 크게 닥쳤어. 그 착한 사람이 내가 작별할 때 말도 제대로 못 하더라. 너는 아마 그 사람이 완전히 쓰러지는 데 한몫했고, 네가 기대야 할 사람의 죽음을 앞당긴 거야. 그리고 나, 네 삼촌을 여기 빗속에서 — 만져 봐라, 흠뻑 젖었다 —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했어."
변호사 · 공장주 · 화가
어느 겨울 오전 — 밖에는 흐린 빛 속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 K.는 이른 시각인데도 벌써 몹시 지친 채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적어도 가장 낮은 직원들에게서는 몸을 지키려고, 그는 큰일을 하고 있으니 그들 가운데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심부름꾼에게 일러두었다. 그러나 그는 일하는 대신 의자에 앉아 이리저리 몸을 돌리고, 책상 위 물건 몇 개를 천천히 옮기다가, 저도 모르게 한 팔을 책상 위에 쭉 뻗어 놓은 채 고개를 숙이고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소송 생각이 더는 그를 떠나지 않았다. 변론서를 써서 법원에 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벌써 여러 번 했다. 거기에 짧은 이력을 적고, 조금이라도 중요한 일마다 자기가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 지금 판단으로 그 행동이 버려야 할 것인지 옳다고 할 것인지, 이런저런 판단에 어떤 근거를 댈 수 있는지 밝힐 생각이었다. 그런 변론서가, 게다가 다른 점에서도 흠잡을 데 없지 않은 변호사에게 변호를 맡겨 두기만 하는 것보다 나을 것은 틀림없었다. K.는 변호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든 많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한 달째 그를 부르지도 않았고, 전에 몇 번 의논했을 때도 이 사람이 자기를 위해 많은 걸 해낼 수 있으리라는 인상은 한 번도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변호사는 그에게 거의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여기는 물어볼 게 그렇게 많은데. 묻는 게 가장 중요했다. K.는 여기 필요한 물음을 다 자기가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변호사는 묻는 대신 제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말없이 그와 마주 앉아 있었다. 아마 귀가 어두워서인지 책상 위로 몸을 조금 숙이고, 턱수염 속의 한 가닥을 잡아당기며, 양탄자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바로 K.가 레니와 누웠던 자리를. 이따금 그는 어린애에게나 하는 알맹이 없는 훈계를 K.에게 늘어놓았다. 쓸모없고 지루한 말들이었다. K.는 마지막 셈을 치를 때 그 값으로는 한 푼도 낼 생각이 없었다. 변호사는 K.에게 충분히 굴욕을 주었다고 여기면 대개 다시 조금씩 기운을 북돋우기 시작했다. 그의 말로는 비슷한 소송을 여럿 다 이기거나 일부 이겼다고 했다. 실제로는 이번만큼 어렵지 않았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더 가망 없어 보이던 소송들이었다. 그런 소송 목록이 여기 서랍에 있다고 했다 — 그러면서 책상의 아무 서랍이나 두드렸다 — 서류는 직무상 비밀이라 안타깝게도 보여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이 모든 소송에서 얻은 큰 경험이 이제 K.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곧바로 일을 시작했고 첫 청원서는 거의 다 되었다고 했다. 그 청원서는 무척 중요하다고 했다. 변호가 처음에 주는 인상이 절차 전체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다만 안타깝게도, 이건 K.에게 일러 두어야겠는데, 첫 청원서를 법원에서 아예 읽지 않는 일도 가끔 있다고 했다. 그냥 기록에 끼워 넣고, 당분간은 쓴 것보다 피고인을 심문하고 지켜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청원인이 다그치면,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자료가 다 모이면 당연히 모든 기록을, 그러니까 이 첫 청원서도 함께 살펴보겠다고 덧붙인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말도 대개는 맞지 않다고 했다. 첫 청원서는 대개 어디 치워 두거나 아예 없어지고, 끝까지 남아 있더라도, 변호사가 그저 소문으로 들은 바로는, 거의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안타깝지만 아주 근거가 없는 건 아니라고 했다. K.는 절차가 공개되지 않는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법원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공개될 수 있지만, 법이 공개를 정해 두지는 않았다. 그래서 법원의 서류, 무엇보다 공소장은 피고인과 변호인이 볼 수 없다. 그러니 대개는 첫 청원서가 무엇에 맞서야 하는지 모르거나 적어도 정확히는 모르고, 그래서 사실상 우연히만 사건에 의미 있는 무언가를 담을 수 있다. 정말로 들어맞고 증거를 갖춘 청원서는 나중에야, 피고인을 심문하는 동안 하나하나의 공소 사실과 그 근거가 더 뚜렷해지거나 짐작할 수 있게 될 때에야 쓸 수 있다. 이런 사정이니 변호는 물론 무척 불리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변호는 사실 법으로 허용된 게 아니라 묵인될 뿐이고, 그 조항에서 적어도 묵인이라도 읽어 내야 하는지를 두고도 다툼이 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법원이 인정하는 변호사란 아예 없고, 이 법원 앞에 변호사로 나서는 사람은 모두 근본적으로 무허가 변호사일 뿐이다. 그게 물론 변호사라는 신분 전체를 무척 비참하게 만들고, 다음에 K.가 법원 사무처에 가게 되면 그것도 한번 보아 두게 변호사실을 구경해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거기 모인 무리를 보면 아마 깜짝 놀랄 거라고. 그들에게 내준 좁고 낮은 방만 봐도 법원이 이 사람들을 얼마나 업신여기는지 알 수 있다. 방에는 작은 채광창으로만 빛이 드는데, 그 창이 어찌나 높은지 밖을 내다보려면 — 그러면 바로 앞의 굴뚝 연기가 코로 들어오고 얼굴이 새까매지지만 — 먼저 자기를 업어 줄 동료를 찾아야 한다. 이 방 바닥에는 — 이런 형편의 예를 하나만 더 들자면 — 벌써 일 년도 넘게 구멍이 나 있다. 사람이 빠질 만큼 크지는 않지만 다리 하나는 푹 빠질 만큼 크다. 변호사실은 두 번째 다락에 있어서, 누가 빠지면 다리가 첫 번째 다락으로, 그것도 하필 민원인들이 기다리는 복도로 늘어진다. 변호사들 사이에서 이런 형편을 수치라고 부르는 건 지나친 말이 아니다. 행정실에 항의해도 조금도 소용이 없는데, 변호사가 제 돈으로 방에서 무언가를 고치게 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변호사를 이렇게 대하는 데에도 까닭이 있다. 변호를 되도록 배제하고 모든 걸 피고인 자신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나쁜 입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법원에서는 피고인에게 변호사가 필요 없다고 결론짓는 것만큼 잘못된 일은 없다. 오히려 어느 법원에서도 이 법원에서만큼 변호사가 필요하지 않다. 절차는 대개 대중에게만이 아니라 피고인에게도 비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가능한 한에서지만, 그건 아주 넓은 범위에서 가능하다. 피고인도 법원 서류를 들여다볼 수 없고, 심문 내용으로 그 바탕이 된 서류를 짐작하기는 무척 어렵다. 특히 경황이 없고 온갖 걱정으로 정신이 흩어진 피고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여기서 변호가 나선다. 심문 자리에는 대개 변호인이 함께할 수 없으니, 변호인은 심문이 끝난 뒤, 되도록 심문실 문 앞에서 곧바로 피고인에게 심문 내용을 캐물어서, 벌써 흐릿해진 그 이야기에서 변호에 쓸모 있는 것을 건져 내야 한다. 그러나 그게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으니까. 물론 여기서도 어디서나처럼 유능한 사람이 남보다 많이 알아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래도 변호사의 개인적인 연줄이고, 변호의 가장 큰 가치는 거기에 있다. K.도 제 경험으로 벌써 알았겠지만, 법원의 가장 낮은 조직은 완벽하지 않아서 의무를 잊은 직원, 뇌물 받는 직원이 있고, 그 때문에 법원의 엄격한 폐쇄에도 말하자면 틈이 생긴다. 대부분의 변호사는 바로 거기로 파고든다. 거기서 뇌물을 주고 엿듣고, 적어도 예전에는 기록을 훔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당장은 피고인에게 놀랄 만큼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걸로 이 작은 변호사들은 으스대며 돌아다니고 새 손님을 끌어들이지만, 소송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아무 의미가 없거나 좋지 않은 의미가 있을 뿐이다. 정말로 가치 있는 건 정직한 개인적 연줄뿐이고, 그것도 높은 관리와의 연줄이다. 물론 여기서 높은 관리란 낮은 등급 가운데 높은 관리를 말한다. 그래야만 소송의 흐름에, 처음엔 눈에 띄지 않게, 나중엔 점점 뚜렷하게 영향을 줄 수 있다. 물론 그걸 할 수 있는 변호사는 몇 안 되고, 이 점에서 K.는 무척 잘 고른 것이라고 했다. 훌트 박사만 한 연줄을 내보일 수 있는 변호사는 기껏해야 한둘뿐일 거라고. 그들은 물론 변호사실의 무리에는 신경 쓰지 않고 그들과 아무 상관도 없다. 그 대신 법원 관리들과는 그만큼 더 가깝다. 훌트 박사는 늘 법원에 나가서 심문 판사들의 대기실에서 그들이 우연히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그들 기분에 따라 대개는 겉보기뿐인 성과를 얻거나 그마저 얻지 못할 필요도 없다. 아니, K.도 직접 보았듯이, 관리들이, 그것도 꽤 높은 관리들이 직접 찾아와 기꺼이 알려 주고 — 드러내 놓고, 아니면 적어도 쉽게 풀어 읽을 수 있게 — 소송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의논하고, 어떤 경우에는 설득되어 남의 의견을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다만 바로 이 마지막 점에서는 그들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변호에 유리한 새 뜻을 아무리 단호하게 말해도, 그들은 곧장 제 사무실로 가서 이튿날 정반대의 결정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버렸다고 장담한 처음 생각보다 피고인에게 훨씬 더 가혹한 결정을. 물론 거기에 맞설 방법은 없다. 단둘이 한 말은 단둘이 한 말일 뿐, 공적인 결론을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변호는 어차피 그 양반들의 호의를 지키려고 애써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양반들이 그저 인류애나 우정 때문에 변호와, 물론 전문가다운 변호와만 손을 잡는 것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도 변호에 기대야 한다. 처음부터 비밀 보고를 원칙으로 삼는 법원 조직의 약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관리들에게는 사람들과의 끈이 없다. 흔한 중간 정도의 소송에는 충분히 대비가 되어 있어서, 그런 소송은 거의 저절로 제 궤도를 굴러가고 이따금 한 번씩 밀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아주 단순한 사건이나 유난히 어려운 사건 앞에서는 자주 어쩔 줄 모른다. 밤낮없이 제 법에만 갇혀 있으니 사람 사이의 일을 헤아리는 감각이 없고, 그런 경우 그게 없어서 몹시 곤란해진다. 그러면 그들은 변호사를 찾아와 조언을 구하고, 그들 뒤로 심부름꾼이 평소엔 그렇게 비밀스러운 기록을 들고 온다. 이 창가에서,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양반들이 그야말로 절망스러운 얼굴로 골목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 그동안 변호사는 좋은 조언을 해 주려고 책상에서 기록을 연구했다. 그건 그렇고 바로 그런 때 그 양반들이 얼마나 자기 직업을 진지하게 여기는지, 타고난 한계로 넘을 수 없는 장애물 앞에서 얼마나 크게 절망하는지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의 처지도 결코 쉽지 않으니, 그들에게 부당하게 굴거나 그들 처지를 쉽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법원의 서열과 단계는 끝이 없어서 속사정을 아는 사람조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법정에서의 절차는 대개 낮은 관리들에게도 비밀이라, 그들은 자기가 다루는 사건이 그 뒤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끝까지 따라가 볼 수가 거의 없다. 그러니 사건은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채 그들 앞에 나타났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넘어간다. 소송의 단계 하나하나와 마지막 판결과 그 근거를 살펴서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을 이 관리들은 놓친다. 그들은 법이 자기 몫으로 정해 준 소송의 한 부분만 다룰 수 있고, 그다음 일은, 그러니까 자기 일의 결과는 대개 변호인보다 모른다. 변호인은 대개 거의 소송이 끝날 때까지 피고인과 연락하니까. 이 방면에서도 관리들은 변호에서 값진 것을 얻을 수 있다. 이 모든 걸 염두에 둔다면, 관리들이 때때로 민원인에게 — 누구나 겪는 일인데 — 모욕적으로 짜증을 부리는 것도 K.는 놀랍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관리들은 모두 조용해 보여도 모두 짜증이 나 있다. 물론 작은 변호사들이 특히 많이 당한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일 것 같다고 했다. 착하고 조용한 늙은 관리 하나가, 특히 변호사의 청원서 때문에 꼬여 버린 어려운 사건 하나를 하루 밤낮을 쉬지 않고 들여다보았다 — 이 관리들은 정말로 누구보다 부지런하다. 그런데 아침 무렵, 스물네 시간 동안, 아마 그리 성과도 없는 일을 하고 나서, 그는 출입문으로 가서 숨어 기다리다가 들어오려는 변호사를 하나같이 계단 아래로 내던졌다. 변호사들은 아래 층계참에 모여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 한편으로 그들에게는 들어갈 권리가 딱히 없으니 법적으로 그 관리에게 어찌할 수도 없고, 앞서 말했듯 관리들을 자기들에게 등 돌리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법원에서 보내지 못한 하루는 그들에게 버린 하루라서, 어떻게든 들어가는 게 중요했다. 결국 그들은 그 노인을 지치게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변호사 하나가 줄곧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되도록 버티면서도 손은 쓰지 않고 내던져졌고, 아래에서 동료들이 그를 받아 냈다. 한 시간쯤 그렇게 하자 노인은, 밤샘으로 이미 기진맥진한 터라 정말로 지쳐서 제 사무실로 돌아갔다. 아래 사람들은 처음엔 믿지 못하고 먼저 한 사람을 보내 문 뒤가 정말 비었는지 살피게 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들어갔고, 아마 투덜거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변호사들은 — 가장 작은 변호사라도 형편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내다볼 수 있으니 — 법원에 무슨 개선을 들여오거나 밀어붙일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 이게 무척 의미심장한데 — 거의 모든 피고인은, 아주 순진한 사람들조차, 소송에 들어서자마자 개선안을 궁리하기 시작하고, 그 때문에 다른 데 훨씬 잘 쓸 수 있었을 시간과 힘을 자주 낭비한다. 유일하게 옳은 길은 있는 그대로의 형편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설령 세세한 걸 고칠 수 있다 해도 — 하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미신인데 — 잘해야 앞으로의 사건을 위해 무언가를 이룰 뿐이고, 늘 복수심에 찬 관리들의 특별한 주의를 끄는 바람에 자기 자신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해를 끼치게 된다. 제발 눈에 띄지 말 것! 아무리 뜻에 거슬려도 조용히 있을 것! 이 거대한 법원 유기체는 말하자면 영원히 허공에 떠 있어서, 자기 자리에서 멋대로 무언가를 바꾸면 발밑의 땅을 스스로 빼 버려 제가 떨어질 수 있지만, 거대한 유기체는 작은 방해쯤은 다른 곳에서 — 모든 게 이어져 있으니 — 쉽게 메워 버리고 그대로 남는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큰데, 더 닫히고 더 주의 깊고 더 엄하고 더 사나워진다는 것을 깨달으려 애쓸 것! 일은 변호사에게 맡기고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무라 봐야 별 소용이 없고, 특히 그 원인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없을 때는 더 그렇지만, 그래도 K.가 사무처장에게 한 행동으로 제 일에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는 말해 두어야겠다고 했다. 그 힘 있는 사람은 K.를 위해 무언가를 해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에서 거의 지워야 할 판이라고 했다. 소송 이야기를 스치듯 꺼내기만 해도 그는 뚜렷이 일부러 못 들은 척한다고 했다. 관리들은 여러모로 어린애 같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도 — 물론 K.의 행동은 안타깝게도 거기 들지 않지만 — 어찌나 상처를 받는지, 좋은 친구와도 말을 끊고, 마주치면 외면하고, 온갖 일에서 훼방을 놓는다. 그러다 어느 날 뜻밖에, 별 까닭도 없이, 모든 게 가망 없어 보여서 그냥 한번 던져 본 작은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고 화해한다. 그들을 대하는 건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해서, 원칙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다고 했다. 여기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며 일할 수 있을 만큼 알게 되는 데 평범한 한평생으로 충분하다는 게 가끔은 놀랍다고 했다. 물론 누구에게나 있듯 우울한 때도 온다. 조금도 해낸 게 없다고 여겨질 때, 처음부터 좋게 끝나도록 정해진 소송만 도움 없이도 그랬을 것처럼 좋게 끝나고, 다른 소송은 온갖 뒷바라지와 온갖 수고와, 그렇게 기뻐했던 작고 겉보기뿐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모두 져 버린 것처럼 보일 때. 그러면 정말로 아무것도 확실해 보이지 않고, 누가 딱 짚어 묻는다면, 본래 잘 풀려 가던 소송을 바로 자기가 거들어서 엇나가게 했다는 것조차 감히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자신감이지만, 그때 남는 건 그것뿐이다. 변호사들은 특히, 꽤 멀리 만족스럽게 끌고 온 소송을 갑자기 빼앗길 때 이런 발작에 — 물론 발작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 시달린다. 그게 변호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일 것이다. 피고인이 소송을 거둬 가는 게 아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다. 한번 어느 변호사를 쓴 피고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변호사 곁에 남아야 한다. 한번 도움을 받고 나서 어떻게 혼자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런 일은 없지만, 소송이 변호사가 더는 따라갈 수 없는 방향으로 가는 일은 가끔 있다. 소송도 피고인도 모든 것이 그냥 변호사의 손을 떠난다. 그러면 관리들과의 가장 좋은 연줄도 더는 소용이 없다. 그들도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소송이 더는 도움을 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다가갈 수 없는 법정들이 그것을 다루고, 피고인에게도 변호사가 더는 닿을 수 없는 단계에. 그러면 어느 날 집에 와 보면, 이 사건에 온 정성과 가장 아름다운 희망을 담아 써 낸 그 많은 청원서가 모두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새 소송 단계로 넘겨서는 안 되기에 돌려보낸 것이다. 값어치 없는 종잇조각들이다. 그렇다고 소송에 진 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적어도 그렇게 여길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그저 소송에 대해 더는 아무것도 모르고, 앞으로도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뿐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예외이고, 설령 K.의 소송이 그런 경우라 해도 아직은 그 단계와 한참 멀다고 했다. 지금은 변호사가 할 일이 아직 넉넉하고, 그 기회를 살리리라는 건 K.도 믿어도 된다고 했다. 청원서는, 말했듯이, 아직 내지 않았지만 그것도 급하지 않다고 했다. 훨씬 중요한 건 결정권 있는 관리들과의 사전 의논인데, 그건 이미 이루어졌다고 했다. 솔직히 인정하자면 성과는 들쭉날쭉했다고. 당분간은 세부를 밝히지 않는 게 훨씬 낫다고 했다. K.에게 나쁜 영향만 주어서 지나치게 희망에 들뜨게 하거나 지나치게 겁먹게 할 테니까. 다만 몇몇은 무척 호의적으로 말하고 기꺼이 돕겠다는 뜻을 보였고, 다른 몇몇은 덜 호의적으로 말했지만 그래도 도움을 결코 거절하지는 않았다는 것만 말해 두겠다고 했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결과는 무척 기쁘지만, 거기서 무슨 특별한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전 교섭은 다 비슷하게 시작하고, 그 값어치는 전적으로 그 뒤의 전개가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어쨌든 아직 잃은 건 없고, 그래도 사무처장을 끝내 제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 그러려고 벌써 이것저것 손을 써 두었다고 했다 — 모든 것은 외과 의사들 말처럼 깨끗한 상처여서, 다음 일을 마음 놓고 기다려도 된다고 했다.
변호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았다. 찾아갈 때마다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었다. 늘 진척이 있었지만, 그게 어떤 진척인지는 한 번도 알려 줄 수 없었다. 첫 청원서는 줄곧 쓰고 있었지만 끝나지 않았고, 다음번에 가 보면 대개 그게 오히려 이로운 일이었다고 했다. 요즘은, 미리 내다볼 수 없었지만, 제출하기에 무척 불리한 때였을 거라는 것이다. 이야기에 완전히 지친 K.가 이따금, 온갖 어려움을 다 헤아리더라도 진척이 너무 느리지 않으냐고 하면, 전혀 느리지 않다고, 다만 K.가 제때 변호사를 찾아왔더라면 벌써 훨씬 앞서 있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걸 놓쳤고, 그 때문에 시간만이 아니라 다른 불리함도 더 생길 거라고 했다.
이런 방문에서 유일하게 반가운 쉼표는 레니였다. 레니는 늘 K.가 있을 때 변호사에게 차를 가져가도록 일을 꾸밀 줄 알았다. 그러면 레니는 K. 뒤에 서서, 변호사가 일종의 탐욕스러운 몸짓으로 찻잔 쪽으로 깊이 몸을 숙이고 차를 따라 마시는 것을 지켜보는 척하며, 몰래 K.에게 손을 맡겼다. 온통 고요했다. 변호사는 마시고, K.는 레니의 손을 쥐고, 레니는 가끔 K.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기까지 했다. "아직 여기 있니?" 다 마신 변호사가 물었다. "찻잔을 치우려고요." 레니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한 번 더 쥐고 나면, 변호사는 입을 닦고 새 힘을 내어 K.를 붙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변호사가 바라는 건 위로였을까, 절망이었을까? K.는 알 수 없었지만, 자기 변호가 좋은 손에 맡겨져 있지 않다는 건 곧 확실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변호사가 한 이야기는 다 맞을지도 몰랐다. 되도록 자기를 앞세우려 한다는 게 빤히 보이고, K.의 소송이 그의 말대로 큰 소송이라면 그런 소송은 아마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러나 줄곧 강조하는 관리들과의 개인적인 연줄은 여전히 수상했다. 그 연줄을 꼭 K.를 위해서만 써야 하나? 변호사는 그들이 낮은 관리들, 그러니까 남에게 크게 매인 자리에 있는 관리들일 뿐이라는 말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출세하는 데는 소송이 어떤 쪽으로 틀어지느냐가 아마 중요할 수 있었다. 혹시 그들이 변호사를 이용해서, 물론 피고인에게는 늘 불리한 그런 방향으로 소송을 틀어 놓는 건 아닐까? 모든 소송에서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리는 없었다. 변호사가 봉사한 대가로 이득을 챙겨 주는 소송도 있을 것이다. 그들도 변호사의 평판이 흠 없이 유지되기를 바랄 테니까.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변호사 말대로 무척 어려운, 그러니까 중요한 소송이고 처음부터 법원에서 크게 주목받은 K.의 소송에는 그들이 어떻게 끼어들까? 그들이 무엇을 할지는 그리 의심스럽지 않았다. 그 징조는 소송이 벌써 몇 달째인데 첫 청원서조차 아직 제출되지 않았고, 변호사 말로는 모든 게 아직 첫 단계에 있다는 데서 이미 볼 수 있었다. 그건 물론 피고인을 잠재우고 무력하게 붙잡아 두었다가 갑자기 판결로, 아니면 적어도 그에게 불리하게 끝난 조사를 더 높은 관청에 넘긴다는 통보로 덮치기에 딱 좋은 방법이었다.
K.가 직접 나서야 했다. 반드시. 바로 이 겨울 오전처럼 모든 게 멋대로 머릿속을 흘러 다니는 몹시 지친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 확신을 물리칠 수 없었다. 전에 소송을 업신여기던 마음은 이제 통하지 않았다. 세상에 혼자였다면 소송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소송이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게 분명하지만. 그러나 이제 삼촌이 벌써 그를 변호사에게 끌고 갔고, 집안 체면도 끼어 있었다. 그의 자리도 소송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와 더는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부주의하게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흐뭇함까지 느끼며 아는 사람들 앞에서 소송 이야기를 꺼냈고,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없는 경로로 알게 되었다. 뷔르스트너 양과의 관계도 소송에 맞춰 흔들리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그는 이제 소송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고를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그 한복판에 서 있었고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지쳐 있다면 그건 나쁜 일이었다.
물론 당장 지나치게 걱정할 까닭은 없었다. 그는 은행에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고,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그 자리를 지켜 왔다. 이제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준 능력을 조금만 소송 쪽으로 돌리면 되었다. 그러면 틀림없이 잘 끝날 것이다. 무엇보다 무언가를 이루려면 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물리쳐야 했다. 죄는 없었다. 소송은 그가 은행에 이롭게 벌써 여러 번 성사시킨 큰 거래와 다를 게 없었다. 늘 그렇듯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막아 내야 하는 거래. 그러려면 물론 무슨 죄 따위를 생각하며 장난쳐서는 안 되고, 되도록 제 이익만을 굳게 붙들어야 했다. 이렇게 보면 변호사에게서 변호를 곧, 되도록 오늘 저녁에라도 거두어들이는 것도 피할 수 없었다. 변호사 말로는 그건 전례 없는 일이고 아마 몹시 모욕적인 일이겠지만, K.는 소송에서 자기가 애쓰는 일에 어쩌면 제 변호사가 만든 장애물이 가로막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일단 변호사를 떨쳐 내면 곧바로 청원서를 내고, 되도록 날마다 그걸 살펴보라고 재촉해야 했다. 그러려면 물론 K.가 다른 사람들처럼 복도에 앉아 모자를 의자 밑에 두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 자신이, 아니면 여자들이나 다른 심부름꾼들이 날마다 관리들을 찾아가 들볶아서, 창살 너머로 복도나 내다보지 말고 책상에 앉아 K.의 청원서를 들여다보게 만들어야 했다. 이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되고, 모든 걸 짜임새 있게 꾸리고 살펴야 했다. 법원도 한번은 제 권리를 지킬 줄 아는 피고인과 부딪쳐 봐야 했다.
그러나 K.가 이 모든 걸 해낼 자신이 있다 해도, 청원서를 쓰는 어려움은 엄청났다. 전에는, 한 주 전쯤만 해도, 언젠가 그런 청원서를 직접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부끄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그게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언젠가 오전에 일이 산더미였는데 갑자기 모든 걸 밀쳐 두고 메모장을 꺼내 그런 청원서의 대강을 시험 삼아 짜 보려 했던 일을 떠올렸다. 어쩌면 굼뜬 변호사에게 넘겨주려고. 그런데 바로 그때 행장실 문이 열리며 부행장이 크게 웃으며 들어왔다. 그때 K.는 무척 난처했다. 물론 부행장이 웃은 건 알지도 못하는 청원서 때문이 아니라 방금 들은 증권가 농담 때문이었다. 알아들으려면 그림이 필요한 농담이라, 부행장은 K.의 책상 위로 몸을 숙이고 K.의 손에서 연필을 빼앗아 청원서를 쓰려던 그 메모장에 그림을 그렸다.
오늘 K.는 부끄러움 같은 건 더는 몰랐다. 청원서는 써야 했다. 사무실에서 쓸 시간이 없다면, 그럴 가능성이 아주 컸는데, 집에서 밤에 써야 했다. 밤으로도 모자라면 휴가를 내야 했다. 중간에 멈춰서만은 안 되었다. 그건 사업에서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다. 청원서는 물론 거의 끝없는 일을 뜻했다. 아주 소심한 성격이 아니어도, 청원서를 끝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쉽게 믿게 될 수 있었다. 변호사만 가로막을 수 있는 게으름이나 꿍꿍이 때문이 아니라, 지금 걸려 있는 공소 사실도, 더구나 그게 앞으로 넓어질지도 모른다는 것도 모르는 채, 삶 전체를 가장 사소한 행동과 사건까지 되살려 적고 모든 면에서 따져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일은 얼마나 서글픈가. 은퇴한 뒤 어린애처럼 된 머리를 바쁘게 하고 긴 하루를 보내게 돕는 데나 알맞을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K.가 모든 생각을 제 일에 쏟아야 하고, 아직 오르막길에 있으면서 벌써 부행장에게 위협이 되는 지금, 한 시간 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짧은 저녁과 밤을 젊은이답게 즐기고 싶은 지금, 이 청원서를 쓰기 시작해야 한다니. 다시 그의 생각은 한탄으로 끝났다. 거의 저도 모르게, 그저 이 생각을 끝내려고, 그는 손가락으로 대기실로 이어진 전기 초인종 단추를 더듬었다. 단추를 누르며 그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열한 시였다. 두 시간을, 길고 귀한 시간을 멍하니 보냈고, 물론 전보다 더 기운이 빠져 있었다. 그래도 시간을 버린 건 아니었다. 값질 수도 있는 결심을 했으니까. 심부름꾼들이 여러 우편물과 함께 벌써 한참 K.를 기다리고 있는 신사 둘의 명함을 가져왔다. 하필 은행의 무척 중요한 고객들이었다. 사실 절대로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왜 이렇게 형편 나쁜 때에 왔단 말인가? — 그리고 닫힌 문 뒤의 신사들은 또 왜 부지런한 K.가 가장 좋은 업무 시간을 사적인 일에 쓰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앞의 일로 지치고 뒤의 일을 기다리느라 지친 채 K.는 첫 번째 손님을 맞으려고 일어섰다.
K.가 잘 아는 작고 쾌활한 신사, 공장주였다. 그는 중요한 일을 하는 K.를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했고, K.는 K.대로 공장주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미안하다는 말부터가 어찌나 기계적이고 억양도 거의 틀리게 나왔던지, 공장주가 사업 이야기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서둘러 온 주머니에서 계산서와 표를 꺼내 K. 앞에 펼치고, 여러 항목을 설명하고, 이렇게 대충 훑어보는데도 눈에 띈 작은 계산 착오를 바로잡고, 한 해쯤 전에 K.와 맺은 비슷한 거래를 떠올리게 하고, 이번에는 다른 은행이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며 이 거래를 따내려 한다는 말을 지나가듯 하고는, 마침내 K.의 생각을 들으려고 입을 다물었다. K.는 처음에는 정말로 공장주의 말을 잘 따라갔다. 중요한 거래라는 생각이 그도 사로잡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곧 듣지 않게 되었고, 그 뒤로도 한동안은 공장주가 더 크게 외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결국 그것도 그만두고, 서류 위로 숙인 대머리를 바라보며 공장주가 언제쯤 자기 이야기가 다 쓸데없다는 걸 깨달을지 생각하는 데 그쳤다. 이제 공장주가 입을 다물자, K.는 처음에는 정말로 자기가 들을 수 없는 상태라고 털어놓을 기회를 주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떤 반론이든 맞받아칠 태세가 분명한 공장주의 긴장한 눈길을 보고서야, 그는 아쉽게도 사업 이야기를 이어 가야 한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그는 명령이라도 받은 듯 고개를 숙이고 연필로 서류 위를 천천히 오가기 시작했다. 이따금 멈춰 서서 숫자 하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공장주는 반론이 있는 줄 알았다. 어쩌면 숫자가 정말 확정된 게 아니었을지도, 어쩌면 숫자가 결정적인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공장주는 서류를 손으로 덮고 K.에게 바짝 다가앉아 거래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렵군요." K.가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던 서류가 가려지자 그는 기댈 데 없이 팔걸이 쪽으로 무너졌다. 행장실 문이 열리고 거기 부행장이, 얇은 거즈 장막 너머처럼 흐릿하게 나타났을 때도 그는 힘없이 눈을 들었을 뿐이었다. K.는 그걸 더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나타난 결과만 지켜보았다. 그에게는 무척 반가운 결과였다. 공장주가 곧바로 의자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나 부행장에게 달려갔기 때문이다. K.는 그를 열 배는 더 재빠르게 만들고 싶었다. 부행장이 다시 사라질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신사들은 만나서 악수를 하고 함께 K.의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공장주는 간부님이 이 거래에 도무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며 K.를 가리켰다. K.는 부행장의 눈길을 받으며 다시 서류 위로 몸을 숙였다. 그러고 나서 둘이 책상에 기대고 공장주가 부행장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자, K.는 자기 머리 위에서, 실제보다 크게 느껴지는 두 남자가 자기를 두고 흥정하는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레 눈을 치켜뜨고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천천히 알아보려 했고, 쳐다보지도 않고 책상에서 서류 한 장을 집어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자기도 일어서면서 그것을 천천히 신사들에게로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무슨 뚜렷한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자기를 완전히 벗어나게 해 줄 그 큰 청원서를 언젠가 다 쓰고 나면 이렇게 행동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으로 그랬을 뿐이다. 온 정신을 기울여 이야기에 끼어 있던 부행장은 서류를 흘끗 보기만 하고 거기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지도 않았다. 간부에게 중요한 건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K.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 "고맙습니다, 다 압니다" 하고는 태연히 다시 책상에 내려놓았다. K.는 씁쓸하게 그를 곁눈질했다. 그러나 부행장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거나, 알아챘더라도 오히려 기운이 났는지 자주 크게 웃었고, 한 번은 재치 있게 받아쳐서 공장주를 눈에 띄게 난처하게 만들었다가 곧바로 스스로 반론을 제기해 그를 건져 주고는, 마침내 이야기를 마저 끝내자며 자기 사무실로 건너오라고 청했다. "아주 중요한 일이군요." 그가 공장주에게 말했다.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리고 간부님께서도" — 이 말을 할 때조차 그는 사실 공장주에게만 이야기했다 — "우리가 이 일을 덜어 드리면 분명 반기실 겁니다. 차분히 따져 봐야 할 일인데, 간부님은 오늘 무척 바쁘신 것 같군요. 대기실에서 몇 사람이 벌써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요." K.는 겨우 정신을 차려 부행장에게서 몸을 돌리고, 다정하지만 굳은 미소를 공장주에게만 지어 보일 수 있었다. 그 밖에는 전혀 끼어들지 않고, 계산대 뒤의 점원처럼 조금 몸을 숙인 채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서, 두 신사가 이야기를 이어 가며 책상에서 서류를 가져다 행장실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간에서 공장주가 한 번 더 돌아서더니, 아직 작별하는 게 아니라며 물론 간부님께 의논 결과를 알려 드릴 것이고, 따로 전할 작은 소식도 하나 있다고 했다.
마침내 K.는 혼자가 되었다. 다른 민원인을 들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밖의 사람들이 그가 아직 공장주와 이야기하는 줄 알고, 그래서 아무도, 심부름꾼조차 들어올 수 없다고 여기는 게 얼마나 편한지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그는 창가로 가서 창턱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잡고 광장을 내다보았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날은 조금도 개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사실 무엇이 걱정인지도 몰랐다. 이따금 대기실 문 쪽에서 무슨 소리가 난 줄 잘못 알고 조금 놀라서 어깨 너머로 돌아볼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는 세면대로 가서 찬물로 세수하고 좀 맑아진 머리로 창가 자리로 돌아왔다. 변호를 스스로 떠맡겠다는 결심은 이제 처음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변호를 변호사에게 떠넘겨 두는 동안에는 근본적으로 소송이 그를 그리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멀리서 소송을 지켜보았고, 소송이 그에게 직접 닿는 일은 거의 없었다. 원할 때 자기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원할 때 다시 고개를 거둬들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변호를 직접 맡는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법원 앞에 온몸을 드러내야 했다. 그 결과로 나중에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풀려나겠지만, 거기 이르려면 당분간은 여태보다 훨씬 큰 위험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걸 의심하고 싶었다 해도 오늘 부행장, 공장주와 함께 있었던 일이 반대로 충분히 확신시켜 주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변호하겠다는 결심만으로도 그는 얼마나 넋이 나간 채 앉아 있었던가? 그렇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어떤 나날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가! 모든 것을 뚫고 좋은 끝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꼼꼼한 변호는 — 다른 건 다 무의미했다 — 꼼꼼한 변호는 동시에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되도록 자기를 차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그걸 무사히 견뎌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은행에서는 어떻게 해낸단 말인가? 청원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거라면 휴가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하필 지금 휴가를 청하는 건 큰 모험이었겠지만. 이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소송 전체의 문제였다. K.의 앞길에 갑자기 얼마나 큰 장애물이 던져진 것인가!
그런데 이제 은행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 그는 책상을 바라보았다. — 이제 민원인들을 들여서 그들과 거래를 의논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소송이 굴러가고, 위쪽 다락에서 법원 관리들이 이 소송 서류를 붙들고 앉아 있는 동안, 은행 일을 돌봐야 한단 말인가? 그건 법원이 인정한, 소송에 딸려서 소송과 함께 가는 고문 같지 않은가? 은행에서 그의 일을 평가할 때 그의 특별한 처지를 헤아려 줄까? 아무도, 절대로. 그의 소송이 아주 알려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누가 얼마나 아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았지만. 부행장에게까지는 소문이 아직 닿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랬다면 부행장이 동료다운 마음도 사람다운 마음도 없이 그걸 K.에게 불리하게 써먹는 모습이 벌써 뚜렷이 보였을 것이다. 그럼 은행장은? 물론 은행장은 K.에게 호의적이었고, 소송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자기 힘이 닿는 데까지 K.의 짐을 덜어 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을 관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태 K.가 맡아 온 균형추가 약해지기 시작하자 은행장은 점점 더 부행장의 영향 아래 들어갔고, 부행장은 게다가 은행장이 아픈 것까지 제 힘을 키우는 데 이용했다. 그러니 K.가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이런 생각으로 그는 버틸 힘을 스스로 약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모든 걸 또렷이 보는 것도 필요했다.
딱히 까닭 없이, 그저 아직은 책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그는 창문을 열었다. 창은 잘 열리지 않아서 두 손으로 손잡이를 돌려야 했다. 그러자 연기 섞인 안개가 창문 가득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와 은은한 탄내로 방을 채웠다. 눈송이 몇 개도 날려 들어왔다. "궂은 가을이군요." K. 뒤에서 공장주가 말했다. 부행장에게서 돌아오다가 모르는 새 방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K.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하게 공장주의 서류 가방을 바라보았다. 이제 거기서 서류를 꺼내 부행장과의 협의 결과를 알려 줄 것 같았다. 그러나 공장주는 K.의 눈길을 좇더니 가방을 두드리며 열지는 않고 말했다. "어떻게 됐는지 들으시고 싶으시겠지요. 거래가 거의 성사돼서 가방에 들어 있다고 해도 됩니다. 매력적인 사람이더군요, 부행장님은. 하지만 결코 만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는 웃으며 K.의 손을 흔들고 K.도 웃게 만들려 했다. 그러나 K.는 이제 공장주가 서류를 보여 주지 않으려는 게 다시 수상했고, 공장주의 말에서 웃을 거리를 찾지 못했다. "간부님," 공장주가 말했다. "날씨 탓에 힘드신가 봅니다. 오늘 무척 우울해 보이시네요." "네." K.가 손을 관자놀이에 대며 말했다. "두통에 집안 걱정까지요." "그렇지요." 성급해서 누구의 말도 차분히 듣지 못하는 공장주가 말했다. "누구나 제 십자가를 지고 사는 법이지요." K.는 공장주를 배웅이라도 하려는 듯 저도 모르게 문 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그런데 공장주가 말했다. "간부님, 작은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필 오늘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게 아닐까 무척 걱정이지만, 요즘 벌써 두 번이나 찾아뵙고도 번번이 잊었습니다. 더 미루면 아마 아무 소용이 없어질 겁니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지요. 제 소식이 따지고 보면 아주 쓸모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K.가 대답할 틈도 없이 공장주는 그에게 바짝 다가와 손가락 마디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톡톡 치며 나직이 말했다. "소송이 있으시죠?" K.는 물러서며 곧바로 소리쳤다. "부행장이 말했군요." "아니, 아닙니다." 공장주가 말했다. "부행장님이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당신한테서요?" K.가 한결 침착해져서 물었다. "제가 이따금 법원 소식을 좀 듣습니다." 공장주가 말했다. "제가 드리려던 소식이 바로 그겁니다." "법원과 줄이 닿은 사람이 참 많군요!" K.는 고개를 숙인 채 말하며 공장주를 책상으로 데려갔다. 둘은 아까처럼 다시 앉았고, 공장주가 말했다. "알려 드릴 게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에서는 아무리 작은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요. 게다가 제 도움이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어떻게든 돕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여태 좋은 사업 친구였잖습니까? 그러니까요." K.는 오늘 의논 때 자기 태도를 사과하려 했지만, 공장주는 말을 끊지 못하게 하고, 바쁘다는 걸 보여 주려고 서류 가방을 겨드랑이 위로 끼며 말을 이었다. "소송 이야기는 티토렐리라는 사람한테서 들었습니다. 화가인데, 티토렐리는 화가로서 쓰는 이름이고 진짜 이름은 저도 몰라요. 벌써 몇 해째 이따금 제 사무실에 작은 그림들을 들고 오는데, 저는 늘 — 그 사람은 거의 거지나 다름없거든요 — 일종의 적선으로 돈을 줍니다. 그건 그렇고 예쁜 그림들이에요. 황야 풍경 같은 것들이요. 이렇게 사고파는 건 — 우리 둘 다 익숙해져서 — 아주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너무 자주 찾아오기에 제가 나무랐더니 이야기가 오가게 됐어요. 그림만 그려서 어떻게 먹고사는지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주된 벌이가 초상화라고 하더군요. 법원 일을 한다고 했어요. 무슨 법원이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 법원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간부님이 가장 잘 짐작하시겠지요. 그 뒤로 그 사람이 올 때마다 법원 소식을 이것저것 듣고, 그렇게 차츰 속사정을 꽤 알게 됐습니다. 물론 티토렐리는 수다스러워서 자주 말을 막아야 해요. 분명 거짓말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저 같은 장사꾼은 제 사업 걱정만으로도 쓰러질 지경이라 남의 일까지 신경 쓸 수가 없으니까요. 아무튼 그건 그렇고요. 어쩌면 — 이제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 티토렐리가 간부님께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판사들을 많이 알거든요. 그 사람 자신은 큰 힘이 없다 해도, 여러 힘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조언은 해 줄 수 있을 겁니다. 그 조언이 그 자체로는 결정적이지 않다 해도, 간부님 손에 들어가면 제 생각엔 아주 큰 의미가 있을 겁니다. 간부님은 거의 변호사나 다름없으시니까요. 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K. 간부님은 거의 변호사다. 아, 간부님 소송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럼 티토렐리한테 가 보시겠습니까? 제 추천이라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줄 겁니다. 정말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오늘이 아니어도 됩니다. 언제 한번, 기회 될 때요. 다만 — 이것도 말씀드려야겠는데 — 제가 이런 조언을 드린다고 해서 정말로 티토렐리한테 가셔야 할 의무는 조금도 없습니다. 아니, 티토렐리 없이도 되겠다 싶으시면 아예 제쳐 두시는 게 분명 낫습니다. 어쩌면 벌써 아주 꼼꼼한 계획이 있으신데 티토렐리가 방해가 될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물론 절대 가지 마십시오. 그런 녀석한테 조언을 듣는 게 내키지 않으실 수도 있고요. 뭐, 뜻대로 하십시오. 여기 추천장이 있고 여기 주소가 있습니다."
K.는 실망해서 편지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가장 좋게 보아도 추천장이 가져다줄 이득은, 공장주가 그의 소송을 알고 화가가 그 소식을 퍼뜨린다는 데서 오는 손해보다 비교적 작았다. 그는 벌써 문 쪽으로 가는 공장주에게 몇 마디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도 겨우 억지로 했다. "가 보겠습니다." 문가에서 공장주와 작별하며 그가 말했다. "아니면 지금은 무척 바쁘니, 한번 제 사무실로 와 달라고 편지를 쓰든지요." "간부님이라면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실 줄 알았습니다." 공장주가 말했다. "다만 저는 이 티토렐리 같은 사람을 은행에 불러서 여기서 소송 이야기를 나누는 건 피하고 싶으실 줄 알았어요. 그런 사람한테 편지를 써 보내는 것도 늘 이롭지는 않고요. 하지만 분명 다 생각해 보셨을 테고 무엇을 해도 되는지 아시겠지요." K.는 고개를 끄덕이고 공장주를 대기실까지 배웅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몹시 놀라 있었다. 티토렐리에게 편지를 쓰겠다는 말은 사실 추천을 고맙게 여기며 티토렐리와 만날 방법을 곧바로 궁리하고 있다는 걸 공장주에게 어떻게든 보여 주려고 한 말일 뿐이었다. 그러나 티토렐리의 도움이 값지다고 여겼다면 정말로 편지를 쓰는 데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은 공장주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정말로 벌써 자기 머리를 이렇게 믿을 수 없게 된 걸까? 수상쩍은 사람을 버젓한 편지로 은행에 불러들여, 문 하나 건너 부행장이 있는 데서 소송에 관한 조언을 청할 수 있을 정도라면, 다른 위험도 못 보고 지나치거나 그 속으로 뛰어들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지 않을까? 늘 곁에서 경고해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 온 힘을 모아 나서려는 지금, 여태 몰랐던, 자기 경계심에 대한 이런 의심이 생기다니! 사무실 일을 하며 느끼던 어려움이 이제 소송에서도 시작되는 걸까? 이제 와서는 티토렐리에게 편지를 써서 은행으로 부르려 했다는 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아직 그 일로 고개를 젓고 있는데 심부름꾼이 곁으로 와서, 여기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신사 셋을 일러 주었다. 그들은 K.를 만나려고 벌써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심부름꾼이 K.와 이야기하자 그들은 일어섰고, 저마다 좋은 기회를 틈타 남보다 먼저 K.에게 다가가려 했다. 은행 쪽에서 그들을 여기 대기실에서 시간을 버리게 할 만큼 배려가 없으니, 그들도 더는 배려할 생각이 없었다. "간부님." 벌써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러나 K.는 심부름꾼에게 겨울 외투를 가져오게 해서 심부름꾼의 도움을 받아 입으며 셋 모두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안타깝게도 여러분을 맞을 시간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급한 업무로 곧바로 나가야 합니다. 방금 제가 얼마나 오래 붙잡혀 있었는지 보셨잖습니까. 내일이든 언제든 다시 와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전화로 의논할까요? 아니면 지금 무슨 일인지 짧게 말씀해 주시면 나중에 자세히 글로 답을 드리지요. 물론 가장 좋은 건 다음에 와 주시는 겁니다." K.의 이런 제안에, 완전히 헛되이 기다린 셈이 된 신사들은 너무 놀라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지요?" K.는 이제 모자까지 가져온 심부름꾼 쪽으로 돌아서며 물었다. K.의 방으로 난 열린 문 너머로, 밖에 눈이 훨씬 거세진 게 보였다. 그래서 K.는 외투 깃을 세우고 목 밑까지 단추를 채웠다.
바로 그때 옆방에서 부행장이 나오더니, 겨울 외투 차림으로 신사들과 이야기하는 K.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지금 나가십니까, 간부님?" "네." K.가 몸을 곧게 펴며 말했다. "업무로 나갈 데가 있어서요." 그러나 부행장은 벌써 신사들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그럼 이분들은요?" 그가 물었다. "벌써 오래 기다리신 것 같은데요." "벌써 이야기가 됐습니다." K.가 말했다. 그러나 이제 신사들은 더는 참지 않고 K.를 둘러싸더니, 일이 중요하지 않았다면 몇 시간씩 기다리지 않았을 거라고, 지금, 그것도 자세히 단둘이서 의논해야 한다고 따졌다. 부행장은 잠시 그들의 말을 듣고, 모자를 손에 들고 여기저기 먼지를 털고 있는 K.도 살펴보더니 말했다. "여러분,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간부님 대신 기꺼이 제가 맡겠습니다. 여러분 일은 물론 당장 의논해야지요. 저희도 여러분처럼 사업하는 사람이라 사업가의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압니다. 이리 들어오시겠습니까?" 그러고는 자기 사무실 대기실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K.가 지금 어쩔 수 없이 내놓아야 하는 걸 부행장은 어쩌면 저렇게 다 제 것으로 만들 줄 아는가! 그런데 K.는 꼭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내놓고 있는 건 아닐까? 막연한, 그리고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듯이 아주 작은 희망을 안고 모르는 화가에게 달려가는 동안, 여기서 그의 평판은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있었다. 아마 겨울 외투를 도로 벗고, 적어도 어차피 옆방에서 또 기다려야 할 신사 둘이라도 제 쪽으로 되찾아 오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K.는 어쩌면 그렇게 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제 방에서 부행장이 제 것인 양 책장에서 무언가를 찾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K.가 흥분해서 문으로 다가가자 부행장이 외쳤다. "아, 아직 안 나가셨군요." 그는 K.에게 얼굴을 돌렸다. 팽팽한 주름이 많은 그 얼굴은 나이가 아니라 힘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곧 다시 찾기 시작했다. "계약서 사본을 찾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 회사 대리인 말로는 간부님께 있다더군요. 좀 같이 찾아 주시겠습니까?" K.가 한 걸음 다가서자 부행장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벌써 찾았습니다." 그러고는 계약서 사본만이 아니라 분명 다른 것도 많이 들어 있을 커다란 서류 뭉치를 들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내가 저 사람을 당할 수 없다, K.는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어려움이 한번 치워지고 나면, 정말이지 저 사람이 가장 먼저, 그것도 되도록 쓰라리게 그걸 맛보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에 조금 마음이 가라앉자 K.는 벌써 한참 복도 문을 열어 들고 있던 심부름꾼에게, 기회가 되면 은행장에게 자기가 업무로 나갔다고 알려 달라고 이르고는, 한동안 온전히 자기 일에 매달릴 수 있다는 게 거의 행복하기까지 해서 은행을 나섰다.
그는 곧바로 화가에게 갔다. 화가는 법원 사무처가 있는 곳과는 정반대편 변두리에 살았다. 거기보다 더 가난한 동네였다. 집들은 더 어두웠고, 골목에는 녹은 눈 위로 오물이 천천히 떠다녔다. 화가가 사는 집의 큰 대문은 한쪽 문짝만 열려 있었고, 다른 쪽 문짝 아래 벽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K.가 다가가자 마침 거기서 역겨운 노란 김이 나는 액체가 쏟아져 나왔고, 쥐 한 마리가 그걸 피해 가까운 하수구로 달아났다. 계단 아래에는 어린아이 하나가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었지만, 대문 통로 맞은편 함석 공방에서 나는, 모든 걸 덮어 버리는 소음 때문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 공방 문은 열려 있었고, 직공 셋이 무슨 물건을 반원으로 둘러싸고 망치로 두드리고 있었다. 벽에 걸린 커다란 함석판이 창백한 빛을 던져 두 직공 사이로 스며들며 얼굴과 작업 앞치마를 비추었다. K.는 모든 걸 흘끗 보기만 했다. 되도록 빨리 여기 일을 마치고, 화가에게 몇 마디만 캐물은 뒤 곧바로 은행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기서 아주 작은 성과라도 얻는다면 오늘 은행 일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삼 층에서 그는 걸음을 늦춰야 했다. 완전히 숨이 찼다. 계단도 층도 지나치게 높았고, 화가는 맨 꼭대기 다락방에 산다고 했다. 공기도 무척 답답했다. 계단참의 뜰도 없이 좁은 계단은 양쪽이 벽으로 막혀 있었고, 그 벽 거의 맨 위쪽에 여기저기 작은 창만 나 있었다. 마침 K.가 잠깐 멈춰 섰을 때 어린 여자아이 몇이 어느 집에서 뛰어나와 웃으며 계단을 더 올라갔다. K.는 천천히 따라가다가, 넘어져서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진 한 아이를 따라잡아 나란히 올라가며 물었다. "여기 티토렐리라는 화가가 사니?" 열세 살이 될까 말까 하고 등이 조금 굽은 그 아이는 대답 대신 팔꿈치로 그를 툭 치더니 옆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린 나이도 몸의 흠도 아이가 벌써 완전히 타락하는 걸 막지 못했다. 아이는 웃지도 않고, 날카롭게 무언가를 부추기는 눈길로 진지하게 K.를 바라보았다. K.는 아이의 태도를 못 본 척하고 물었다. "화가 티토렐리를 아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되물었다. "그 사람한테 뭐 하시게요?" K.는 티토렐리에 대해 얼른 조금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하려고." 그가 말했다. "초상화를요?" 아이가 물으며 입을 지나치게 크게 벌리더니, 그가 무슨 엄청나게 놀랍거나 어설픈 말을 했다는 듯 손으로 K.를 가볍게 치고는, 가뜩이나 짧은 치마를 두 손으로 치켜들고 있는 힘껏 다른 아이들을 쫓아 달려갔다. 아이들의 외침은 벌써 위쪽에서 흐릿하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계단 모퉁이에서 K.는 다시 아이들을 모두 만났다. 등 굽은 아이에게 K.가 무얼 하려는지 들은 게 분명했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계단 양쪽에 서서 K.가 편히 지나가도록 벽에 몸을 붙이고 손으로 앞치마를 매만졌다. 얼굴마다, 그리고 이렇게 줄지어 선 모습에도 천진함과 타락이 뒤섞여 있었다. 이제 웃으며 K. 뒤로 몰려드는 아이들 맨 앞에서 등 굽은 아이가 앞장섰다. K.가 곧바로 맞는 길을 찾은 건 그 아이 덕분이었다. 그는 곧장 계속 올라가려 했는데, 아이가 티토렐리에게 가려면 계단의 갈림길로 가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에게로 가는 계단은 유난히 좁고 아주 길었으며, 꺾인 데 없이 끝까지 한눈에 보였고, 꼭대기에서 곧바로 티토렐리의 문으로 막혀 있었다. 그 문은 위쪽에 비스듬히 박힌 작은 채광창 덕분에 계단 다른 곳과 달리 비교적 밝았다. 칠도 하지 않은 각목을 짜 맞춘 문이었고, 거기 붉은 물감으로 굵게 붓질해서 티토렐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K.가 뒤따르는 아이들을 거느리고 계단 한가운데쯤 왔을 때, 많은 발소리 때문인지 위에서 문이 조금 열리더니 아마 잠옷 한 벌만 걸친 남자가 문틈에 나타났다. "오!" 사람들이 몰려오는 걸 보고 그는 외치더니 사라졌다. 등 굽은 아이는 좋아서 손뼉을 쳤고 다른 아이들은 K.를 더 빨리 몰아가려고 그의 뒤를 밀어 댔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다 올라가기도 전에 위에서 화가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깊이 고개 숙여 K.에게 들어오라고 청했다. 아이들은 막았다. 아무리 조르고, 허락을 못 받으면 억지로라도 밀고 들어오려 해도 하나도 들이지 않았다. 등 굽은 아이만 그가 뻗은 팔 밑으로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지만, 화가는 쫓아가서 그 아이의 치마를 붙잡고 한 바퀴 빙 돌리더니 문 앞의 다른 아이들 곁에 내려놓았다. 다른 아이들은 화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감히 문턱을 넘지 못했다. K.는 이 모든 걸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다. 모두가 다정하게 합의해서 벌이는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문가의 아이들은 하나씩 목을 쭉 빼고 화가에게 K.가 알아듣지 못하는 이런저런 장난스러운 말을 외쳤고, 화가도 웃었다. 그러는 동안 등 굽은 아이는 그의 손에서 거의 날아다녔다. 그러고 나서 그는 문을 닫고 K.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손을 내밀며 자기를 소개했다. "화가 티토렐리입니다." K.가 아이들이 속삭이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집에서 인기가 많으신 모양이군요." "아, 저 꼬맹이들!" 화가가 말하며 잠옷 목단추를 채우려 했지만 헛일이었다. 그 밖에 그는 맨발이었고, 헐렁한 누런 리넨 바지 하나만 입고 있었는데, 바지를 동여맨 끈의 긴 끝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저 꼬맹이들 때문에 정말 골치가 아픕니다." 그는 마지막 단추가 마침 떨어져 나간 잠옷을 포기하고 의자를 가져와 K.에게 앉으라고 권하며 말을 이었다. "한번 저 애들 가운데 하나를 — 오늘은 그 애가 끼지도 않았어요 — 그렸는데, 그 뒤로 다들 저를 쫓아다녀요. 제가 여기 있을 때는 허락해야만 들어오지만, 제가 나가기만 하면 늘 적어도 하나는 와 있어요. 제 방 열쇠를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돌려 쓰거든요. 얼마나 성가신지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이를테면 그려 드려야 할 숙녀분과 함께 집에 와서 제 열쇠로 문을 열면, 등 굽은 애가 저 작은 탁자에 앉아 붓으로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있고, 그 애가 돌봐야 할 동생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방 구석구석을 더럽혀 놓고 있지요. 아니면 바로 어제 그랬듯이 밤늦게 집에 와서 — 그러니 제 꼴이며 방이 어질러진 건 좀 봐주세요 — 그러니까 밤늦게 와서 침대에 올라가려는데 뭔가가 다리를 꼬집는 거예요. 침대 밑을 보면 또 그런 녀석이 하나 끌려 나와요. 왜 이렇게 저한테 몰려드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꾀어 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건 방금 보셨을 테고요. 물론 그 때문에 일에도 방해가 됩니다. 이 작업실을 공짜로 쓰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오래전에 나갔을 거예요." 마침 문 뒤에서 가냘프고 겁먹은 작은 목소리가 불렀다. "티토렐리, 이제 들어가도 돼?" "안 돼." 화가가 대답했다. "나 혼자만도 안 돼?" 그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그것도 안 돼." 화가는 말하고 문으로 가서 잠가 버렸다.
그사이 K.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 초라한 작은 방을 작업실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고는 스스로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길이로도 너비로도 큰 걸음 두 번 이상은 거의 걸을 수 없었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모두 나무였고, 각목 사이로 좁은 틈이 보였다. K. 맞은편 벽가에는 알록달록한 이불이 잔뜩 쌓인 침대가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이젤 위에 그림 한 점이 셔츠로 덮여 있었는데, 셔츠 소매가 바닥까지 늘어져 있었다. K. 뒤로는 창문이 있었지만, 안개 때문에 눈 덮인 이웃집 지붕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물쇠에서 열쇠 돌리는 소리에 K.는 곧 떠나려 했다는 걸 떠올렸다. 그래서 주머니에서 공장주의 편지를 꺼내 화가에게 건네며 말했다. "당신의 지인인 이분에게서 당신 이야기를 듣고 그분 권유로 왔습니다." 화가는 편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침대 위로 던졌다. 공장주가 티토렐리를 자기 지인이라고, 자기가 주는 적선에 기대 사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딱 잘라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정말로 티토렐리가 공장주를 모르거나 적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게다가 화가가 이렇게 물었다. "그림을 사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초상화를 그리시려는 겁니까?" K.는 놀라서 화가를 바라보았다. 편지에 대체 뭐라고 적혀 있었던 걸까? K.는 공장주가 편지에서, K.는 소송에 관해 알아보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화가에게 알렸으리라 당연히 여겼다. 너무 서둘러, 생각 없이 여기로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화가에게 무어라 대답은 해야 했기에, 그는 이젤을 흘끗 보며 말했다. "마침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군요?" "네." 화가가 말하며 이젤에 걸린 셔츠를 편지를 따라 침대 위로 던졌다. "초상화입니다. 잘된 작품인데 아직 다 끝나지는 않았어요." 우연이 K.를 도왔다. 법원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그야말로 눈앞에 차려진 셈이었다. 누가 봐도 판사의 초상화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변호사의 서재에 걸린 그림과 눈에 띄게 닮았다. 물론 여기서는 전혀 다른 판사였다. 옆으로 뺨 높이까지 뻗친 검고 덥수룩한 턱수염을 기른 뚱뚱한 남자였고, 그 그림은 유화였는데 이건 파스텔로 흐리고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다 비슷했다. 여기서도 판사가 옥좌 같은 의자의 팔걸이를 붙잡고 위협하듯 막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이건 판사군요.' K.는 곧바로 그렇게 말하려다가 우선은 참고, 세부를 살펴보려는 듯 그림에 다가갔다. 옥좌 등받이 위 한가운데에 선 커다란 형상 하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그는 화가에게 물었다. 조금 더 다듬어야 한다고 화가가 대답하더니, 작은 탁자에서 파스텔을 집어 그 형상의 가장자리를 조금 긁적였지만, 그런다고 K.에게 더 뚜렷해지지는 않았다. "정의의 여신입니다." 마침내 화가가 말했다. "이제 알아보겠군요." K.가 말했다. "여기 눈가리개가 있고, 여기 저울이 있군요. 그런데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려 있고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네." 화가가 말했다. "주문받은 대로 그려야 했어요. 사실 정의의 여신과 승리의 여신을 하나로 합친 겁니다." "좋은 조합은 아니군요." K.가 웃으며 말했다. "정의의 여신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저울이 흔들려서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저는 그 점에선 주문한 분 뜻을 따릅니다." 화가가 말했다. "물론이죠." K.가 말했다.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저 형상이 실제로 옥좌 위에 서 있는 대로 그리셨겠지요." "아닙니다." 화가가 말했다. "저는 그 형상도 옥좌도 본 적이 없어요. 다 지어낸 거지만, 무얼 그려야 하는지는 정해 주더군요." "네?" K.가 물었다. 그는 일부러 화가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한 척했다. "그래도 재판석에 앉은 판사잖습니까." "네." 화가가 말했다. "하지만 높은 판사가 아니고, 이런 옥좌에 앉아 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엄숙한 자세로 그리게 한다고요? 꼭 법원장처럼 앉아 있는데요." "네, 그 양반들은 허영심이 강하거든요." 화가가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리게 해도 된다는 윗선의 허락을 받았어요. 저마다 어떻게 그려져도 되는지 정확히 정해져 있지요. 다만 안타깝게도 바로 이 그림으로는 옷차림과 앉은 자리의 세부를 판단할 수 없어요. 파스텔은 이런 그림에 알맞지 않거든요." "그렇군요." K.가 말했다. "파스텔로 그렸다는 게 이상하네요." "판사가 그렇게 원했어요." 화가가 말했다. "어느 숙녀에게 줄 거라서요." 그림을 보니 일할 마음이 생겼는지 그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파스텔 몇 개를 손에 쥐었다. K.는 떨리는 파스텔 끝 아래에서 판사의 머리에 이어 불그스름한 그림자가 생겨나, 그림 가장자리 쪽으로 빛살처럼 퍼지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림자의 이 놀이는 차츰 무슨 장식이나 높은 훈장처럼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정의의 여신 둘레는 눈에 띄지 않는 색조 말고는 밝게 남았고, 그 밝음 속에서 형상은 유난히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이제 그 형상은 정의의 여신도, 승리의 여신도 거의 떠올리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락없이 사냥의 여신처럼 보였다. 화가의 작업은 K.가 원한 것보다 더 그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벌써 이렇게 오래 여기 있으면서 사실 제 일을 위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나무랐다. "이 판사 이름이 뭡니까?" 그가 불쑥 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화가가 대답했다. 그는 그림 쪽으로 깊이 몸을 숙인 채, 처음엔 그렇게 정중하게 맞았던 손님을 눈에 띄게 소홀히 대했다. K.는 그걸 변덕이라고 여기고, 그 때문에 시간이 가는 게 화가 났다. "법원의 신임을 받는 분이시죠?" 그가 물었다. 곧바로 화가는 파스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두 손을 비비며 웃는 얼굴로 K.를 보았다. "늘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는군요." 그가 말했다. "추천장에도 적혀 있듯이 법원에 대해 알고 싶으신 건데, 저를 제 편으로 만들려고 먼저 제 그림 이야기를 하셨지요. 하지만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한테는 그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모르셨을 테니까요. 아, 괜찮습니다!" K.가 무언가 반박하려 하자 그는 날카롭게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저는 법원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에요." 그는 K.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려는 듯 말을 멈췄다. 이제 다시 문 뒤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아마 열쇠 구멍 둘레에 몰려 있을 것이다. 어쩌면 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K.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화가의 이야기를 딴 데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화가가 너무 우쭐해져서 말하자면 닿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물었다. "공적으로 인정받는 자리입니까?" "아니요." 화가가 짧게 말했다. 그 물음에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그러나 K.는 그를 입 다물게 두고 싶지 않아서 말했다. "뭐, 이런 인정받지 못한 자리가 인정받은 자리보다 힘이 더 센 경우도 많지요." "제가 바로 그래요." 화가가 이마를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제 공장주와 당신 일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당신을 도와줄 생각이 없느냐고 묻기에 '그 사람이 언제 한번 저한테 오면 되지요'라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오시니 기쁘군요. 이 일이 무척 마음에 걸리시나 봅니다. 물론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요. 우선 윗옷을 벗으시겠어요?" K.는 아주 잠깐만 있을 생각이었지만 화가의 이 권유가 무척 반가웠다. 방 안 공기가 점점 숨 막혀 왔다. 구석의 작은 쇠 난로를 벌써 몇 번이나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분명 불을 때지 않은 난로였는데 방 안이 이렇게 후텁지근한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겨울 외투를 벗고 윗옷 단추까지 풀자 화가가 변명하듯 말했다. "저는 따뜻해야 해요. 여기 무척 아늑하죠? 그 점에서 이 방은 자리를 잘 잡았어요."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불편하게 한 건 사실 따뜻함이 아니라, 숨쉬기조차 힘든 탁한 공기였다. 방을 오랫동안 환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불쾌함은 화가가 그에게 침대에 앉으라고 하고 자기는 이젤 앞의 방 안 하나뿐인 의자에 앉는 바람에 더 심해졌다. 게다가 화가는 K.가 왜 침대 가장자리에만 앉아 있는지 오해했는지, 편히 앉으라고 권하더니 K.가 머뭇거리자 직접 와서 그를 이불과 쿠션 속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의자로 돌아가 마침내 처음으로 실질적인 물음을 던졌고, 그 물음에 K.는 다른 모든 걸 잊었다. "죄가 없으십니까?" 그가 물었다. "네." K.가 말했다. 이 물음에 대답하는 게 그야말로 즐거웠다. 특히 개인에게, 그러니까 아무 책임 없이 대답하는 것이었기에. 아직 누구도 그에게 이렇게 대놓고 묻지 않았다. 이 즐거움을 한껏 누리려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완전히 죄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화가는 말하고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고 말했다. "죄가 없으시다면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K.의 눈빛이 흐려졌다. 법원의 신임을 받는다는 이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말하고 있었다. "내가 죄가 없다고 일이 간단해지지는 않습니다." K.가 말했다. 그래도 그는 웃지 않을 수 없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법원이 빠져드는 수많은 미묘한 점들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결국 법원은 원래 아무것도 없던 어딘가에서 커다란 죄를 끄집어냅니다." "네, 네, 물론이죠." 화가는 K.가 쓸데없이 자기 생각을 방해한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죄가 없으시잖아요?" "그렇죠." K.가 말했다. "그게 가장 중요해요." 화가가 말했다. 반대 근거로는 그를 흔들 수 없었다. 다만 그렇게 단호한데도, 그게 확신에서 나온 말인지 그저 무관심해서 하는 말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K.는 먼저 그걸 알아보려고 말했다. "당신은 분명 나보다 법원을 훨씬 잘 알겠지요. 나는 물론 아주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 것 말고는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모두 한결같이, 가벼이 기소하는 일은 없고, 법원이 한번 기소하면 피고인의 죄를 굳게 확신하며, 그 확신을 돌려놓기가 무척 어렵다고 하더군요." "어렵다고요?" 화가가 한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법원은 절대로 돌려놓을 수 없어요. 제가 여기 판사들을 모두 나란히 캔버스 하나에 그리고 당신이 그 캔버스 앞에서 변론한다면, 진짜 법원 앞에서보다 더 성과가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K.는 혼잣말을 하며, 화가를 캐물으려고 왔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다시 문 뒤에서 아이 하나가 묻기 시작했다. "티토렐리, 저 사람 곧 안 가?" "조용히 해." 화가가 문 쪽에 대고 소리쳤다. "이분이랑 의논하는 거 안 보여?" 그러나 아이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물었다. "저 사람 그려 줄 거야?" 그리고 화가가 대답하지 않자 또 말했다. "제발 그리지 마. 저렇게 못생긴 사람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맞장구치는 외침이 뒤죽박죽 이어졌다. 화가가 문으로 펄쩍 뛰어가서 문을 한 뼘쯤 열자 — 애원하듯 내민 아이들의 모은 손들이 보였다 — 그가 말했다. "조용히 안 하면 다 계단 아래로 던져 버릴 거야. 여기 계단에 앉아서 얌전히 있어." 아이들이 곧바로 따르지 않았는지 그는 명령해야 했다. "계단에 앉아!" 그러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죄송합니다." 화가가 K.에게 돌아오며 말했다. K.는 문 쪽으로 거의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화가가 자기를 감싸 줄지, 어떻게 감싸 줄지는 전적으로 화가에게 맡겨 두었다. 화가가 밖에서 들리지 않게 몸을 숙여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을 때도 그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저 아이들도 법원에 속해 있어요." "뭐라고요?" K.가 물으며 고개를 옆으로 비키고 화가를 보았다. 그러나 화가는 다시 의자에 앉더니 반은 농담으로, 반은 설명하듯 말했다. "모든 게 다 법원에 속해 있어요." "그건 아직 몰랐군요." K.가 짧게 말했다. 화가의 두루뭉술한 말 때문에 아이들을 두고 한 말에서 불안한 느낌이 다 빠져 버렸다. 그래도 K.는 한동안 아이들이 이제 조용히 계단에 앉아 있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한 아이만 각목 사이의 틈으로 밀짚 하나를 들이밀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법원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화가가 말했다. 그는 두 다리를 쩍 벌리고 발끝으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죄가 없으시니 그럴 필요도 없을 겁니다. 제가 혼자서 당신을 빼내 드리지요." "어떻게 하시려고요?" K.가 물었다. "조금 전에 법원은 증거 따위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직접 말씀하셨잖습니까." "법원 앞에 내놓는 증거에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화가가 말하며, K.가 미묘한 구분을 놓쳤다는 듯 집게손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공개된 법정 뒤에서, 그러니까 협의실이나 복도나, 이를테면 여기 작업실에서 이런 점을 두고 해 보는 건 사정이 다르지요." 화가가 이제 하는 말은 K.에게 그리 믿기지 않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K.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말과 무척 잘 맞았다. 아니, 아주 희망적이기까지 했다. 변호사가 말한 것처럼 판사를 개인적인 연줄로 정말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있다면, 허영심 많은 판사들과 화가의 연줄은 특히 중요했고, 어쨌든 결코 얕잡아 볼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화가는 K.가 차츰 둘레에 모으고 있는 조력자들 무리에 아주 잘 들어맞았다. 은행에서 언젠가 그의 조직 능력을 칭찬한 적이 있었는데, 완전히 혼자 힘으로 버텨야 하는 이곳에서 그걸 끝까지 시험해 볼 좋은 기회가 보였다. 화가는 자기 설명이 K.에게 준 효과를 살피더니 조금 불안한 듯 말했다. "제가 거의 법률가처럼 말한다는 게 느껴지지 않으세요? 법원 양반들과 쉴 새 없이 어울리다 보니 이렇게 물들었어요. 물론 얻는 것도 많지만, 예술가다운 기운은 많이 잃어버렸어요." "처음에 어떻게 판사들과 연줄이 닿았습니까?" K.가 물었다. 그를 제 일에 대놓고 부리기 전에 먼저 화가의 믿음을 얻고 싶었다. "아주 간단했어요." 화가가 말했다. "그 연줄을 물려받았거든요. 아버지도 법원 화가였어요. 이건 늘 대물림되는 자리예요. 새 사람은 쓸 수가 없어요. 관리 등급마다 그리는 방법에 대해 워낙 다양하고 복잡하고 무엇보다 비밀스러운 규칙이 정해져 있어서, 정해진 집안 밖으로는 아예 알려지지 않거든요. 이를테면 저기 서랍에 아버지가 적어 둔 기록이 있는데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않아요.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만 판사를 그릴 자격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잃어버린다 해도 제 머릿속에만 담아 둔 규칙이 워낙 많아서 아무도 제 자리를 넘보지 못할 거예요. 판사라면 다 옛 위대한 판사들이 그려진 것처럼 그려지고 싶어 하는데, 그걸 할 수 있는 건 저뿐이거든요." "부럽군요." 은행에서의 자기 자리를 생각하며 K.가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 자리는 흔들리지 않는 거로군요?" "네, 흔들리지 않아요." 화가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서 이따금 소송에 걸린 가난한 사람을 도와줄 엄두도 낼 수 있는 거지요." "그럼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K.가 물었다. 방금 그 남자가 가난한 사람이라고 부른 게 자기가 아니라는 듯이. 그러나 화가는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이를테면 당신 경우에는, 완전히 죄가 없으시니 이렇게 하겠습니다." 죄가 없다는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게 K.는 벌써 거슬렸다. 가끔은 화가가 그런 말로 소송이 좋게 끝나는 것을 도움의 전제로 삼는 것 같았다. 그러면 물론 그 도움은 저절로 무너져 버리는 셈이다.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K.는 참고 화가의 말을 끊지 않았다. 화가의 도움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마음먹었다. 게다가 이 도움은 변호사의 도움보다 조금도 더 수상해 보이지 않았다. K.는 오히려 이쪽이 훨씬 나았다. 더 순진하고 더 솔직하게 내밀어졌기 때문이다.
화가는 의자를 침대 가까이 끌어당기고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먼저 어떤 식으로 풀려나고 싶으신지 여쭤보는 걸 잊었군요. 세 가지 길이 있어요. 진정한 무죄 판결, 외견상 무죄 판결, 그리고 지연이요. 물론 진정한 무죄 판결이 가장 좋지만, 그런 식으로 푸는 데는 제가 조금도 힘을 쓸 수 없어요. 제 생각엔 진정한 무죄 판결에 힘을 쓸 수 있는 개인은 아예 없어요. 거기서는 아마 피고인이 죄가 없다는 것만이 결정할 거예요. 당신은 죄가 없으시니 정말로 당신의 무죄만 믿고 계셔도 될지 모르죠. 하지만 그러면 저도, 다른 어떤 도움도 필요 없어요."
이 정연한 설명에 K.는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화가처럼 나직이 말했다. "당신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군요." "어째서요?" 화가가 참을성 있게 묻고는 웃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 웃음을 보자 K.는 자기가 이제 화가의 말이 아니라 소송 절차 자체에서 모순을 찾아내려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그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처음에는 법원이 증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하셨다가, 나중엔 그걸 공개 법정에만 한정하셨고, 이제는 죄 없는 사람은 법원 앞에서 아무 도움도 필요 없다고까지 하시는군요. 벌써 거기서 앞뒤가 안 맞습니다. 게다가 처음에는 판사들을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당신이 말하는 진정한 무죄 판결은 개인적인 영향력으로는 결코 얻어 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게 두 번째 모순입니다." "그 모순들은 쉽게 풀립니다." 화가가 말했다. "여기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법에 적혀 있는 것과 제가 직접 겪은 것. 그걸 헷갈리시면 안 됩니다. 법에는 — 물론 저는 읽어 보지 못했지만 — 한편으로는 당연히 죄 없는 사람은 무죄 판결을 받는다고 적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판사를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은 없지요. 그런데 저는 바로 그 반대를 겪었어요. 진정한 무죄 판결은 하나도 모르지만, 영향력을 쓴 경우는 많이 알아요. 물론 제가 아는 모든 경우에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잖아요? 그 많은 경우에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집에서 소송 이야기를 하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어요. 아버지 작업실에 오는 판사들도 법원 이야기를 했고요. 우리 쪽에서는 아예 그 이야기밖에 안 해요. 저 스스로 법원에 갈 수 있게 되자마자 늘 그 기회를 썼어요. 셀 수 없이 많은 소송의 중요한 단계를 들었고 보이는 만큼 지켜보았는데 —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 진정한 무죄 판결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무죄 판결은 한 번도 없었군요." K.가 제 자신과 제 희망에게 말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벌써 법원에 대해 가진 생각이 맞는 거로군요. 이쪽으로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지요. 사형 집행인 하나면 법원 전체를 대신할 수 있겠군요." "그렇게 일반화하시면 안 됩니다." 화가가 못마땅해하며 말했다. "저는 제 경험을 말했을 뿐이에요." "그거면 충분하지요." K.가 말했다. "아니면 옛날의 무죄 판결 이야기라도 들어 보셨습니까?" "그런 무죄 판결이," 화가가 대답했다. "있었다고는 합니다. 다만 그걸 확인하기가 무척 어려워요. 법원의 최종 판결은 공개되지 않아요. 판사들조차 볼 수 없어요. 그래서 옛 사건에 대해서는 전설만 남아 있지요. 물론 그 전설들에는 오히려 대부분 진정한 무죄 판결이 담겨 있어요. 믿을 수는 있지만 증명할 수는 없지요. 그래도 아주 무시해서는 안 돼요. 어느 정도 진실은 분명 담겨 있을 테고, 무척 아름답기도 하거든요. 저도 그런 전설을 소재로 그림을 몇 점 그렸어요." "전설만으로는 내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K.가 말했다. "법정에서 그 전설을 근거로 댈 수도 없겠지요?" 화가가 웃었다. "네, 그건 안 되지요." 그가 말했다. "그럼 그 얘기는 해 봐야 소용없군요." K.가 말했다. 그는 당분간 화가의 생각을 그게 믿기지 않고 다른 이야기와 어긋나더라도 모두 받아들이기로 했다. 화가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사실인지 따지거나 반박할 시간은 지금 없었다. 화가가 어떤 식으로든, 결정적이지 않은 식으로라도 자기를 돕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걸로 최선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그럼 진정한 무죄 판결은 빼놓지요. 그런데 다른 두 가지 길도 말씀하셨지요." "외견상 무죄 판결과 지연이요. 그 둘만 문제가 될 수 있어요." 화가가 말했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윗옷을 벗으시겠어요? 더우신가 봐요." "네." K.가 말했다. 여태 화가의 설명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더위 얘기를 듣자 이마에 땀이 흥건히 솟았다. "거의 못 견디겠군요." 화가는 K.의 불편함을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열 수는 없습니까?" K.가 물었다. "안 돼요." 화가가 말했다. "그냥 붙박이 유리판이라 열 수가 없어요." 그제야 K.는 자기가 줄곧 화가든 자기든 갑자기 창가로 가서 창을 활짝 열어젖히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입을 벌리고 안개라도 들이마실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바깥 공기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느낌에 어지러웠다. 그는 곁의 깃털 이불을 손으로 가볍게 치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편하고 건강에도 나쁘겠군요." "아, 아닙니다." 화가가 자기 창문을 두둔하며 말했다. "열 수 없으니까, 홑겹 유리인데도 이중창보다 따뜻함이 더 잘 붙들려 있어요. 환기하고 싶으면 — 그리 필요하지도 않아요, 각목 틈으로 사방에서 바람이 들어오니까요 — 문 하나나 아예 둘 다 열면 돼요." 이 설명에 조금 위안을 얻은 K.는 두 번째 문을 찾아 둘러보았다. 화가가 그걸 보고 말했다. "당신 뒤에 있어요. 침대로 가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제야 K.는 벽에 난 작은 문을 보았다. "여긴 뭐든 작업실로 쓰기엔 너무 작아요." 화가가 K.의 나무람을 미리 막으려는 듯 말했다. "할 수 있는 만큼 꾸려야 했어요. 문 앞에 침대를 둔 건 물론 아주 나쁜 자리지요. 이를테면 지금 그리고 있는 판사는 늘 침대 옆 문으로 들어오는데, 제가 집에 없어도 여기 작업실에서 기다릴 수 있게 그 문 열쇠도 드렸어요. 그런데 그분은 대개 제가 아직 자는 이른 아침에 와요. 침대 옆에서 문이 열리면 물론 늘 깊은 잠에서 깨지요. 그분이 아침 일찍 제 침대를 넘어갈 때 제가 퍼붓는 욕을 들으시면 판사에 대한 경외심이 싹 사라지실 거예요. 물론 열쇠를 도로 빼앗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더 나빠질 뿐이에요. 여기 문은 다 힘 하나 안 들이고 경첩에서 떼어 낼 수 있거든요." 이 이야기를 하는 내내 K.는 윗옷을 벗을지 궁리하다가, 벗지 않으면 여기 더 있을 수 없다는 걸 마침내 깨달았다. 그래서 윗옷을 벗었지만, 의논이 끝나면 다시 입을 수 있게 무릎 위에 걸쳐 두었다. 그가 윗옷을 벗자마자 아이 하나가 외쳤다. "벌써 윗옷 벗었어!" 그러자 모두 제 눈으로 구경하려고 틈으로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화가가 말했다. "제가 당신을 그릴 거고 그래서 옷을 벗으시는 줄 알아요." "그렇군요." K.는 별로 재미있어하지 않으며 말했다. 셔츠 바람으로 앉아 있는데도 아까보다 나아진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짜증스럽게 물었다. "나머지 두 가지를 뭐라고 하셨지요?" 그는 그 말을 벌써 다시 잊어버렸다. "외견상 무죄 판결과 지연이요." 화가가 말했다. "무얼 고르실지는 당신한테 달렸어요. 둘 다 제 도움으로 얻을 수 있지요. 물론 수고가 없지는 않아요. 그 점에서 차이는, 외견상 무죄 판결은 한때 힘을 한데 모아야 하고, 지연은 힘은 훨씬 덜 들지만 줄곧 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먼저 외견상 무죄 판결부터요. 그걸 원하시면 저는 종이 한 장에 당신의 무죄 확인서를 써요. 그런 확인서의 문안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거라 흠잡을 데가 없어요. 이 확인서를 들고 제가 아는 판사들을 한 바퀴 돌아요. 이를테면 지금 그리고 있는 판사가 오늘 저녁 그림 그리러 앉으러 오면 먼저 그분께 확인서를 내밀어요. 확인서를 내밀고 당신이 죄가 없다고 설명하고 당신의 무죄를 보증하지요. 그건 그냥 겉치레가 아니라 정말로 책임을 지는 보증이에요." 화가의 눈빛에는 K.가 자기에게 그런 보증의 짐을 지우려 한다는 나무람 같은 게 서려 있었다. "그건 정말 고마운 일이군요." K.가 말했다. "그런데 판사는 당신 말을 믿으면서도 나를 진짜로 무죄 방면하지는 않는다는 겁니까?" "말씀드렸듯이요." 화가가 대답했다. "게다가 누구나 제 말을 믿으리라는 보장도 전혀 없어요. 이를테면 어떤 판사는 당신을 직접 데려오라고 할 거예요. 그러면 한번 같이 가셔야겠지요. 물론 그런 경우엔 벌써 반은 이긴 거예요. 특히 그 판사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제가 미리 자세히 일러 드릴 테니까요. 더 나쁜 건 처음부터 저를 — 그런 일도 있을 거예요 — 물리치는 판사들이에요. 그런 판사는, 물론 몇 번이고 시도는 해 보겠지만, 포기해야 해요. 그래도 괜찮아요. 판사 한두 명이 결판을 내지는 못하니까요. 이 확인서에 판사들 서명이 충분히 모이면, 그걸 들고 지금 당신 소송을 맡고 있는 판사에게 가요. 어쩌면 그 판사 서명도 받아 두었을 수 있고, 그러면 모든 게 여느 때보다 조금 더 빨리 풀리지요. 대체로 그다음엔 걸림돌이 별로 없어요. 피고인에게는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 때예요. 이상하지만 사실이에요. 사람들은 무죄 판결을 받은 뒤보다 이때 더 자신만만해요. 이제 특별히 애쓸 것도 없어요. 판사는 확인서에 여러 판사의 보증을 쥐고 있으니 걱정 없이 당신을 무죄 방면할 수 있고, 몇 가지 형식 절차를 거친 뒤 저와 다른 지인들 체면을 봐서 틀림없이 그렇게 해 줄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법원을 나와 자유로워지지요." "그러면 나는 자유로운 거군요." K.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네." 화가가 말했다. "하지만 외견상으로만 자유로운 거예요. 더 정확히 말하면 한동안만 자유로운 거죠. 제 지인들이 속한 가장 낮은 판사들에게는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할 권리가 없어요. 그 권리는 당신에게도 저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최고 법원에만 있어요. 거기가 어떤지는 우리도 모르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 판사들에게는 공소에서 벗어나게 해 줄 큰 권리는 없지만, 공소에서 떼어 놓을 권리는 있어요. 이런 식으로 무죄 판결을 받으면 당분간은 공소에서 벗어나지만, 공소는 여전히 당신 머리 위에 떠 있다가 더 높은 데서 명령만 내려오면 곧바로 다시 효력을 내요. 제가 법원과 연줄이 워낙 좋다 보니, 법원 사무처 규정에서 진정한 무죄 판결과 외견상 무죄 판결이 겉으로 어떻게 다른지도 말씀드릴 수 있어요. 진정한 무죄 판결을 받으면 소송 기록을 완전히 치워 버려야 해요. 절차에서 깡그리 사라지지요. 공소만이 아니라 소송도, 무죄 판결까지도 없애 버려요. 모든 걸 없애요. 외견상 무죄 판결은 달라요. 기록에는 무죄 확인서와 무죄 판결과 그 이유가 더해졌다는 것 말고는 아무 변화가 없어요. 나머지는 그대로 절차 안에 남아서, 법원 사무처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대로 더 높은 법원으로 넘어갔다가 낮은 법원으로 돌아오고, 그렇게 크고 작게 흔들리며, 크고 작게 멈칫거리며 오르내려요. 그 길은 헤아릴 수가 없어요. 밖에서 보면 가끔은 모든 게 벌써 오래전에 잊히고 기록도 없어지고 무죄 판결이 완벽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믿지 않아요. 기록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아요. 법원에는 망각이 없어요. 어느 날 —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 어느 판사가 그 기록을 주의 깊게 집어 들고, 이 사건은 공소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아보고는 즉시 체포하라고 명령해요. 여기서는 외견상 무죄 판결과 새 체포 사이에 긴 시간이 흐른다고 쳤는데, 그럴 수도 있고 그런 경우도 알아요. 하지만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법원에서 집에 와 보니 벌써 다시 체포하려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똑같이 있어요. 그러면 물론 자유로운 삶은 끝이지요." "그러면 소송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됩니까?" K.가 거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물론이죠." 화가가 말했다. "소송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돼요. 하지만 전처럼 다시 외견상 무죄 판결을 얻어 낼 가능성도 있어요. 다시 온 힘을 모아야 하고 포기하면 안 돼요." 이 마지막 말은 조금 무너져 내린 듯한 K.를 보고 한 말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K.는 화가가 무슨 폭로를 하기 전에 먼저 막으려는 듯 물었다. "두 번째 무죄 판결을 얻어 내는 건 처음보다 더 어렵지 않습니까?" "그 점에선," 화가가 대답했다. "딱 잘라 말할 수 없어요. 두 번째로 체포되면 판사들이 판단할 때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판사들은 무죄 판결을 내릴 때 이미 이 체포를 내다봤어요. 그러니 그 사정은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아요. 하지만 다른 수많은 이유로 판사들의 기분이나 사건에 대한 법적 판단이 달라졌을 수는 있어요. 그러니 두 번째 무죄 판결을 얻으려는 노력은 달라진 사정에 맞춰야 하고, 대체로 첫 번째 무죄 판결 전만큼 힘을 들여야 하지요." "하지만 그 두 번째 무죄 판결도 또 최종적인 건 아니잖습니까." K.가 거부하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물론 아니죠." 화가가 말했다. "두 번째 무죄 판결 다음엔 세 번째 체포, 세 번째 무죄 판결 다음엔 네 번째 체포, 그런 식으로 이어지지요. 그게 바로 외견상 무죄 판결이라는 말에 들어 있는 뜻이에요." K.는 말이 없었다. "외견상 무죄 판결은 이로워 보이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화가가 말했다. "어쩌면 지연이 더 맞으실지도 몰라요. 지연이 어떤 건지 설명해 드릴까요?" K.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는 의자에 넓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잠옷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는 그 밑으로 한 손을 넣어 가슴과 옆구리를 쓸고 있었다. "지연은," 화가가 완전히 들어맞는 설명을 찾으려는 듯 잠시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연은 소송을 늘 가장 낮은 단계에 붙잡아 두는 거예요. 그러려면 피고인과 돕는 사람이, 특히 돕는 사람이 법원과 쉼 없이 개인적으로 닿아 있어야 해요. 되풀이하지만, 외견상 무죄 판결을 얻을 때만큼 힘이 들지는 않아요. 하지만 훨씬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해요. 소송에서 눈을 떼면 안 돼요. 그 판사에게 정기적으로, 그리고 특별한 때에도 찾아가서 어떻게든 호의를 잃지 않게 해야 해요. 그 판사를 개인적으로 모르면 아는 판사들을 통해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다고 직접 의논하는 걸 그만둬서도 안 되고요. 이 점에서 아무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 소송이 첫 단계를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꽤 확실히 믿어도 돼요. 소송이 끝나는 건 아니지만, 피고인은 자유로운 것과 거의 다름없이 유죄 판결에서 안전해요. 외견상 무죄 판결에 비해 지연은 피고인의 앞날이 덜 불확실하다는 장점이 있어요. 갑작스러운 체포의 공포를 겪지 않아도 되고, 하필 다른 형편이 가장 좋지 않을 때 외견상 무죄 판결을 얻는 데 따르는 수고와 흥분을 떠안게 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요. 물론 지연에도 피고인에게 얕잡아 봐서는 안 될 몇 가지 불리한 점이 있어요. 여기서 피고인이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걸 말하는 건 아니에요. 외견상 무죄 판결에서도 제대로 된 뜻으로는 자유롭지 않으니까요. 다른 불리한 점이에요. 소송은 적어도 겉보기로라도 이유가 없으면 멈춰 설 수 없어요. 그러니 소송에서 겉으로 무언가가 일어나야 해요. 이따금 여러 조치를 내려야 하고, 피고인을 심문해야 하고, 조사를 해야 하고, 그런 것들이요. 소송은 인위적으로 좁혀 놓은 작은 원 안에서 줄곧 돌아가야 해요. 그게 물론 피고인에게 좀 성가신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나쁘게 상상하실 필요는 없어요. 다 겉치레일 뿐이니까요. 이를테면 심문은 아주 짧아요. 시간이 없거나 가고 싶지 않으면 핑계를 대도 돼요. 어떤 판사하고는 앞으로의 조치를 오랫동안 미리 함께 정해 둘 수도 있어요. 본질적으로는, 피고인이니까 이따금 자기 판사에게 얼굴을 비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마지막 말이 나올 때 벌써 K.는 윗옷을 팔에 걸치고 일어서 있었다. "벌써 일어났어!" 곧바로 문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났다. "벌써 가시려고요?" 화가도 일어서며 물었다. "여기 공기 때문에 쫓겨 가시는 거겠지요. 정말 미안합니다. 아직 말씀드릴 게 많은데. 아주 짧게 줄여야 했어요. 그래도 알아들으셨기를 바랍니다." "아, 네." K.가 말했다. 억지로 귀 기울이느라 애쓴 탓에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대답했는데도 화가는, K.가 돌아가는 길에 위안이라도 챙겨 주려는 듯 모든 걸 한 번 더 정리해 말했다. "두 방법 다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는 걸 막아 준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하지만 진정한 무죄 판결도 막지요." K.가 그걸 깨달은 게 부끄럽다는 듯 나직이 말했다. "핵심을 짚으셨군요." 화가가 재빨리 말했다. K.는 겨울 외투에 손을 얹었지만 윗옷을 입을 결심조차 서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싸 들고 바깥 맑은 공기 속으로 달려 나가고 싶었다. 아이들이 벌써 성급하게 그가 옷을 입는다고 서로 외쳐 댔지만 그래도 그는 옷을 입을 수가 없었다. 화가는 K.의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 보고 싶었는지 말했다. "제 제안에 대해서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셨나 보군요. 좋습니다. 오히려 당장 정하지 마시라고 말렸을 거예요. 이롭고 해로운 점이 머리카락 한 올 차이예요. 모든 걸 꼼꼼히 따져 봐야 해요. 물론 시간을 너무 버려서도 안 되고요." "곧 다시 오겠습니다." K.는 말하고 갑자기 마음을 굳혀 윗옷을 입고,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문 쪽으로 서둘러 갔다. 문 뒤에서 이제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K.는 소리 지르는 아이들이 문 너머로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약속은 지키셔야 해요." 따라오지 않은 화가가 말했다. "안 그러면 제가 은행으로 찾아가서 직접 물어볼 거예요." "문 좀 열어 주세요." K.가 말하며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되미는 힘으로 보아 아이들이 밖에서 붙잡고 있었다. "아이들한테 시달리고 싶으세요?" 화가가 물었다. "차라리 이쪽 출구로 나가세요." 그러고는 침대 뒤의 문을 가리켰다. K.는 그러자고 하고 침대 쪽으로 도로 뛰어갔다. 그런데 화가는 그 문을 여는 대신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더니 밑에서 물었다. "잠깐만요. 제가 팔 수 있는 그림을 하나 더 보시겠어요?" K.는 무례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화가는 정말로 그를 보살펴 주었고 앞으로도 돕겠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K.가 깜빡하는 바람에 도움의 대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K.는 이제 거절할 수 없어서, 작업실을 벗어나고 싶어 조바심에 떨면서도 그림을 보여 달라고 했다. 화가는 침대 밑에서 틀도 없는 그림 한 무더기를 끌어냈다. 먼지가 어찌나 두껍게 앉았던지, 화가가 맨 위 그림의 먼지를 불어 날리자 먼지가 한참 동안 숨 막히게 K.의 눈앞에 소용돌이쳤다. "황야 풍경이에요." 화가가 말하며 그림을 K.에게 건넸다. 어두운 풀밭에 서로 멀리 떨어져 선 가냘픈 나무 두 그루를 그린 그림이었다. 뒤편에는 알록달록한 저녁노을이 있었다. "좋군요." K.가 말했다. "사겠습니다." K.는 생각 없이 그렇게 짧게 말해 버렸기에, 화가가 그걸 언짢아하는 대신 바닥에서 두 번째 그림을 집어 들자 반가웠다. "이 그림과 짝을 이루는 그림이에요." 화가가 말했다. 짝으로 그리려 한 건지는 몰라도, 첫 번째 그림과 조금도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 나무들, 여기 풀밭, 저기 저녁노을. 그러나 K.는 그런 건 상관없었다. "아름다운 풍경화군요." 그가 말했다. "둘 다 사서 제 사무실에 걸겠습니다." "이 주제가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화가가 말하며 세 번째 그림을 꺼냈다. "마침 비슷한 그림이 하나 더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러나 비슷한 게 아니라 아예 똑같은 옛 황야 풍경이었다. 화가는 오래된 그림을 팔 이 기회를 잘 살렸다. "이것도 사겠습니다." K.가 말했다. "세 점에 얼마입니까?"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지요." 화가가 말했다. "지금은 바쁘시고, 우리야 계속 연락할 테니까요. 그건 그렇고 그림이 마음에 드신다니 기뻐요. 여기 밑에 있는 그림을 다 들려 보내 드릴게요. 모두 황야 풍경이에요. 황야 풍경을 벌써 많이 그렸거든요. 너무 음울하다고 이런 그림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신 같은 사람들은 바로 그 음울함을 좋아하지요." 그러나 K.는 지금 이 거지 화가의 직업 경험담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그림을 다 싸 주세요." 그가 화가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 "내일 제 심부름꾼이 가지러 올 겁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화가가 말했다. "지금 같이 갈 짐꾼을 구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러고는 마침내 침대 위로 몸을 숙여 문을 열었다. "망설이지 말고 침대를 밟고 가세요." 화가가 말했다. "여기 들어오는 사람은 다 그래요." K.는 그런 권유가 없어도 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벌써 한 발을 깃털 이불 한가운데 올려놓았는데, 열린 문 너머를 보고는 발을 도로 거두었다. "저게 뭡니까?" 그가 화가에게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화가가 도리어 놀라서 물었다. "법원 사무처예요. 여기 법원 사무처가 있는 거 모르셨어요? 법원 사무처는 거의 모든 다락에 있어요. 왜 하필 여기만 없겠어요? 제 작업실도 사실 법원 사무처에 속해 있는데, 법원이 저한테 쓰라고 내준 거예요." K.는 여기서도 법원 사무처를 찾아냈다는 데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가 놀란 건 주로 자기 자신, 법원 일에 대한 자신의 무지 때문이었다. 피고인이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은 늘 준비되어 있는 것, 결코 허를 찔리지 않는 것, 판사가 왼쪽에 서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오른쪽을 보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그 기본 원칙을 그는 번번이 어기고 있었다. 그의 앞에 긴 복도가 뻗어 있었고, 거기서 불어오는 공기에 비하면 작업실 공기는 상쾌할 정도였다. 복도 양쪽에는 K.를 맡은 사무처의 대기실과 똑같이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사무처를 꾸미는 데에도 정확한 규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민원인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남자는 반쯤 누운 채 의자 위에서 팔에 얼굴을 파묻고 자는 것 같았고, 다른 한 남자는 복도 끝 어스름 속에 서 있었다. K.는 이제 침대를 넘어갔고, 화가가 그림을 들고 뒤따랐다. 그들은 곧 법원 직원 하나와 마주쳤다. K.는 이제 법원 직원이라면 모두 평상복의 평범한 단추들 사이에 단 금단추로 알아보았다. 화가는 그 직원에게 그림을 들고 K.를 배웅하라고 일렀다. K.는 걷는다기보다 비틀거렸다. 손수건을 입에 꼭 대고 있었다. 출구에 거의 다 왔을 때 아이들이 그들에게 몰려왔다. 결국 K.는 아이들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아이들은 작업실의 두 번째 문이 열린 걸 보고 이쪽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빙 돌아온 게 분명했다. "더는 배웅해 드릴 수가 없네요!" 화가가 아이들에게 떠밀리며 웃으며 외쳤다. "잘 가세요. 그리고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마세요!" K.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골목에서 그는 처음 눈에 띈 마차를 잡아탔다. 법원 직원을 떼어 내고 싶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아마 띄지 않겠지만 그 금단추가 쉴 새 없이 그의 눈을 찔렀다. 직원은 친절을 베풀겠다고 마부석에 앉으려 했지만 K.는 그를 쫓아 내려 보냈다. K.가 은행 앞에 닿았을 때는 정오가 한참 지나 있었다. 그림들을 마차에 두고 내리고 싶었지만, 언제 무슨 일로 화가 앞에서 그걸 내보여야 할지도 몰라 겁이 났다. 그래서 그는 그림들을 사무실로 옮기게 해서, 적어도 앞으로 며칠 동안은 부행장의 눈에 띄지 않도록 책상 맨 아래 서랍에 넣고 잠갔다.
상인 블로크 · 변호사 해임
마침내 K.는 변호사에게서 변호를 거두어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는 게 옳은지에 대한 의심은 뿌리 뽑을 수 없었지만, 그래야 한다는 확신이 더 컸다. 변호사에게 가려던 날, 이 결심 때문에 K.는 일할 기운을 많이 빼앗겼다. 일이 유난히 더뎠고, 사무실에 아주 오래 남아 있어야 했다. 마침내 변호사의 집 문 앞에 섰을 때는 벌써 밤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그는 전화나 편지로 해임을 알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직접 만나 이야기하면 틀림없이 무척 난처할 것이다. 그래도 K.는 결국 만나기로 했다. 다른 방식으로 알리면 변호사는 말없이, 아니면 몇 마디 형식적인 말로 해임을 받아들일 테고, 레니가 무언가 알아내 주지 않는 한 K.는 변호사가 해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변호사의 가볍지 않은 생각으로는 이 해임이 K.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가 K.와 마주 앉아 있다가 해임 통보에 허를 찔린다면, 변호사가 별로 말을 흘리지 않더라도 K.는 그 얼굴과 태도에서 원하는 걸 다 쉽게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결국 변호사에게 변호를 맡기는 게 좋겠다고 설득당해서 해임을 거둬들일 수도 있었다.
변호사 집 문의 첫 번째 초인종은 여느 때처럼 소용이 없었다. 레니가 좀 더 재빠르면 좋으련만, K.는 생각했다. 그래도 다른 집 사람이 여느 때처럼 끼어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잠옷 가운 차림의 그 남자든 다른 누구든 성가시게 굴기 시작할 수도 있었으니까. 두 번째로 단추를 누르며 K.는 다른 집 문을 돌아보았지만, 이번에는 그 문도 닫힌 채였다. 마침내 변호사 집 문의 작은 들창에 눈 두 개가 나타났는데, 레니의 눈이 아니었다. 누군가 문을 열고도 아직은 문에 몸을 버틴 채 집 안쪽으로 "그 사람이야" 하고 외치고 나서야 문을 활짝 열었다. K.는 문을 밀고 있었다. 벌써 뒤에서 다른 집 문의 자물쇠에 열쇠가 다급하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문이 열리자 그는 그야말로 현관으로 뛰어들었고, 방들 사이로 난 복도로 레니가 셔츠 바람으로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다. 문을 연 사람의 경고는 레니를 향한 것이었다. 그는 잠시 레니를 눈으로 좇다가 문을 연 사람을 돌아보았다. 턱수염을 기른 작고 비쩍 마른 남자로, 손에 초를 들고 있었다. "여기서 일하십니까?" K.가 물었다. "아닙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저는 여기 사람이 아니에요. 변호사님은 제 대리인일 뿐이고, 법률 문제로 와 있습니다." "윗옷도 안 입고요?" K.가 손짓으로 남자의 허술한 옷차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남자가 말하며, 자기 모습을 처음 보기라도 하듯 초로 자기를 비춰 보았다. "레니가 당신 애인입니까?" K.가 짧게 물었다. 그는 다리를 조금 벌리고 모자를 든 두 손을 등 뒤로 깍지 끼고 있었다. 두툼한 외투를 걸쳤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 비쩍 마른 작은 남자보다 한참 우월하다고 느꼈다. "아이고, 하느님." 남자가 말하며 놀라서 막듯 한 손을 얼굴 앞으로 들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믿을 만해 보이는군요." K.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 이리 오시죠." 그는 모자로 손짓하고 남자를 앞세웠다. "이름이 뭡니까?" K.가 가면서 물었다. "블로크, 상인 블로크입니다." 작은 남자가 자기를 소개하며 K. 쪽으로 돌아섰지만 K.는 그를 멈춰 서게 두지 않았다. "그게 진짜 이름입니까?" K.가 물었다. "물론이죠." 대답이 돌아왔다. "왜 의심하세요?" "이름을 숨길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서요." K.가 말했다. 그는 낯선 곳에서 신분 낮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나 느끼는 그런 자유로움을 느꼈다. 자기와 관계된 건 모두 제 안에 담아 두고, 남의 이해관계에 대해서만 무심하게 이야기하며, 그렇게 해서 그들을 제 눈앞에서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마음대로 내팽개칠 수도 있는 자유로움. 변호사 서재 문 앞에서 K.는 멈춰 서서 문을 열고, 고분고분 계속 걸어가던 상인에게 외쳤다. "그렇게 서두르지 말고 여기 좀 비춰 봐요." 레니가 여기 숨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K.는 상인에게 구석구석을 뒤지게 했지만 방은 비어 있었다. 판사 그림 앞에서 K.는 상인의 멜빵을 뒤에서 붙잡아 세웠다. "이 사람을 압니까?" 그가 집게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상인은 초를 쳐들고 눈을 끔벅이며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판사군요." "높은 판사입니까?" K.가 물으며, 그림이 상인에게 주는 인상을 살피려고 상인 앞 비스듬한 자리에 섰다. 상인은 감탄하듯 위를 올려다보았다. "높은 판사네요." 그가 말했다. "잘 모르시는군요." K.가 말했다. "낮은 심문 판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사람입니다." "이제 생각나네요." 상인이 초를 내리며 말했다.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물론 그렇겠지요." K.가 외쳤다. "내가 깜빡했군요. 물론 벌써 들으셨겠지요." "아니, 왜요, 왜 그러세요?" 상인이 물으며 K.의 손에 떠밀려 문 쪽으로 움직였다. 밖으로 나와 복도에서 K.가 말했다. "레니가 어디 숨었는지 아시지요?" "숨었다고요?" 상인이 말했다. "아니에요. 부엌에서 변호사님께 수프를 끓이고 있을 거예요." "왜 그걸 진작 말하지 않았습니까?" K.가 물었다. "모셔다 드리려고 했는데 도로 부르셨잖아요." 상인이 서로 어긋나는 명령에 헷갈린 듯 대답했다. "자기가 꽤 영리하다고 생각하나 보군요." K.가 말했다. "그럼 데려다주시죠!" K.는 부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부엌은 놀랄 만큼 크고 살림이 잘 갖춰져 있었다. 화덕만 해도 보통 화덕의 세 배나 되었다. 다른 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부엌은 지금 입구에 걸린 작은 램프 하나로만 밝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화덕 앞에는 레니가 늘 그렇듯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서서, 알코올 불 위에 올린 냄비에 달걀을 깨 넣고 있었다. "안녕, 요제프." 레니가 곁눈질하며 말했다. "안녕." K.는 말하고, 한쪽에 떨어져 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상인더러 거기 앉으라는 것이었고 상인은 그렇게 했다. K.는 레니 바로 뒤로 바짝 다가가 어깨 너머로 몸을 숙이며 물었다. "저 남자 누구야?" 레니는 한 손으로 K.를 끌어안아 앞으로 당기고 다른 손으로는 수프를 저으며 말했다. "딱한 사람이야. 가난한 상인인데, 블로크라고 해. 저 사람 좀 봐." 둘은 함께 돌아보았다. 상인은 K.가 가리킨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 필요 없어진 촛불을 불어 끄고, 연기가 나지 않게 손가락으로 심지를 누르고 있었다. "너 셔츠 바람이었어." K.가 말하며 손으로 레니의 머리를 다시 화덕 쪽으로 돌렸다. 레니는 말이 없었다. "저 사람이 네 애인이야?" K.가 물었다. 레니는 수프 냄비를 잡으려 했지만 K.가 레니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자, 대답해!" 레니가 말했다. "서재로 가자. 다 설명해 줄게." "싫어." K.가 말했다. "여기서 설명해." 레니는 그에게 매달려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K.는 레니를 밀어내며 말했다. "지금은 입 맞추기 싫어." "요제프." 레니가 애원하듯, 그러면서도 솔직하게 K.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설마 블로크 씨를 질투하는 건 아니지?" "루디," 레니가 상인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좀 도와줘. 봐, 내가 의심받고 있잖아. 초는 그만 만지고." 그는 딴 데 정신이 팔린 것 같았지만 사실 다 알아듣고 있었다. "왜 질투하셔야 하는지 저도 모르겠네요." 그가 별로 재치 없게 말했다. "사실 저도 모르겠군요." K.가 상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레니는 크게 웃고, K.가 방심한 틈에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이제 저 사람은 내버려 둬. 어떤 사람인지 보이잖아. 변호사님의 큰 고객이라서 좀 챙겨 줬을 뿐이야.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런데 너는? 오늘 변호사님이랑 얘기하려고? 오늘 많이 편찮으신데, 원하면 그래도 알려 드릴게. 하지만 밤에는 틀림없이 나랑 있는 거야. 너 우리 집에 너무 오래 안 왔어. 변호사님도 네 얘기를 물으셨어. 소송을 소홀히 하지 마! 나도 알아낸 걸 이것저것 말해 줄 게 있어. 그건 그렇고 우선 외투부터 벗어!" 레니는 그가 외투를 벗는 걸 돕고 모자를 받아 들고는 현관에 걸러 달려갔다가 다시 뛰어와서 수프를 보았다. "너부터 알려 드릴까, 아니면 수프부터 갖다 드릴까?" "나부터 알려." K.가 말했다. 그는 언짢았다. 원래는 레니와 자기 일, 특히 해임 문제를 꼼꼼히 의논할 생각이었는데, 상인이 있어서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 일이 이 작은 상인이 어쩌면 결정적으로 끼어들어도 될 만큼 하찮지 않다고 여기고, 벌써 복도에 나가 있는 레니를 다시 불렀다. "먼저 수프를 갖다 드려." 그가 말했다. "나랑 이야기하려면 기운을 차리셔야 할 거야. 그럴 필요가 있을걸." "당신도 변호사님 의뢰인이시군요." 상인이 구석에서 확인하듯 나직이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K.가 말했고, 레니도 말했다. "좀 조용히 해." "그럼 먼저 수프부터 갖다 드릴게." 레니가 K.에게 말하며 수프를 접시에 부었다. "그러면 곧 잠드실까 봐 걱정이야. 드시고 나면 금방 주무시거든." "내가 할 말을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들 거야." K.가 말했다. 그는 변호사와 무언가 중요한 일을 의논하려 한다는 걸 줄곧 내비치고 싶었다. 레니가 그게 뭐냐고 물어 주면 그제야 레니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레니는 입 밖에 낸 명령만 꼬박꼬박 따랐다. 잔을 들고 그의 곁을 지나가며 레니는 일부러 살짝 그에게 부딪히고 속삭였다. "수프 드시는 동안 너 왔다고 곧바로 알려 드릴게. 그래야 너를 빨리 다시 차지하지." "어서 가." K.가 말했다. "어서." "좀 다정하게 해." 레니가 말하며 잔을 든 채 문간에서 한 번 더 완전히 돌아섰다.
K.는 레니를 눈으로 좇았다. 이제 변호사를 해임하는 건 완전히 정해졌다. 그 전에 레니와 그 얘기를 더 나누지 못한 것도 아마 잘된 일이었다. 레니는 전체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니 틀림없이 말렸을 테고, 어쩌면 이번에는 정말로 K.가 해임하지 못하게 막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는 계속 의심과 불안 속에 있다가 얼마 뒤 결국 결심을 실행했을 것이다. 이 결심은 너무나 절박했으니까. 그리고 빨리 실행할수록 더 많은 손해를 막을 수 있었다. 어쩌면 상인이 이 일에 대해 무언가 말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K.가 돌아서자, 그걸 알아채기가 무섭게 상인이 곧바로 일어서려 했다. "그냥 앉아 계세요." K.는 말하고 그 곁으로 의자를 끌어왔다. "변호사님의 오랜 의뢰인이십니까?" K.가 물었다. "네." 상인이 말했다. "아주 오랜 의뢰인이지요." "벌써 몇 해나 대리를 맡기셨습니까?" K.가 물었다. "무슨 뜻으로 물으시는지 모르겠네요." 상인이 말했다. "사업상 법률 문제로는 — 제가 곡물상을 하거든요 — 가게를 물려받은 뒤로, 그러니까 한 이십 년쯤 맡기고 있어요. 아마 말씀하시려는 제 소송으로는 처음부터 맡기고 있는데, 벌써 오 년이 넘었어요. 네, 오 년이 훨씬 넘었지요." 그러고는 낡은 지갑을 꺼내며 덧붙였다. "여기 다 적어 두었어요. 원하시면 정확한 날짜를 말씀드릴게요. 다 기억하기가 어려워서요. 제 소송은 아마 훨씬 더 오래됐을 거예요. 아내가 죽고 얼마 안 돼서 시작됐는데, 그게 벌써 오 년 반도 넘었거든요." K.는 그에게 더 다가앉았다. "그러니까 변호사님이 보통 법률 사건도 맡는단 말입니까?" 그가 물었다. 사업과 법학이 이렇게 이어져 있다는 게 K.에게는 무척 마음 놓였다. "그럼요." 상인이 말하더니 K.에게 속삭였다. "그런 법률 사건에서 다른 사건보다 더 유능하다는 말까지 있어요." 그러나 그러고는 한 말을 후회하는지 K.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제발 제가 말했다고 하지 마세요." K.는 안심하라고 그의 허벅지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요, 나는 고자질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은 복수심이 강하거든요." 상인이 말했다. "이렇게 충실한 의뢰인한테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K.가 말했다. "아니요, 해요." 상인이 말했다. "흥분하면 사람을 가리지 않아요. 그리고 사실 저는 그분한테 그리 충실하지도 않아요." "어째서요?" K.가 물었다. "말씀드려도 될까요?" 상인이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그래도 될 것 같습니다." K.가 말했다. "그럼," 상인이 말했다. "조금만 털어놓을게요. 대신 당신도 비밀 하나를 말씀해 주셔야 해요. 변호사님에 맞서 우리가 서로 붙들고 있을 수 있게요." "무척 조심성이 많으시군요." K.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을 완전히 안심시켜 줄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지요. 그래서 변호사님께 어떻게 충실하지 않다는 겁니까?" "저는," 상인이 머뭇거리며,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걸 고백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분 말고도 다른 변호사들이 있어요." "그게 뭐 그리 나쁜 일입니까." K.가 조금 실망해서 말했다. "여기서는 나빠요." 고백하고 나서 아직 숨이 가쁘던 상인이 K.의 말에 조금 더 마음을 놓으며 말했다. "그건 허용되지 않아요. 무엇보다 이른바 변호사 말고 무허가 변호사까지 두는 건 절대 안 돼요. 그런데 바로 제가 그렇게 했어요. 그분 말고 무허가 변호사가 다섯이나 있어요." "다섯이요!" K.가 외쳤다. 그 숫자에 비로소 놀랐다. "이분 말고 변호사가 다섯이나요?" 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섯 번째하고도 이야기 중이에요." "대체 왜 그렇게 많은 변호사가 필요합니까?" K.가 물었다. "다 필요해요." 상인이 말했다.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K.가 물었다. "그러지요." 상인이 말했다. "무엇보다 저는 소송에서 지고 싶지 않아요.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니 도움이 될 만한 건 하나도 놓치면 안 돼요. 어떤 경우에 도움이 될 가망이 아주 작더라도 버리면 안 돼요. 그래서 가진 걸 다 소송에 쏟아부었어요. 이를테면 가게에서 돈을 다 빼냈어요. 전에는 가게 사무실이 거의 한 층을 다 차지했는데, 지금은 뒷채의 작은 방 하나면 돼요. 거기서 견습생 하나랑 일해요. 이렇게 기운 건 물론 돈을 빼낸 탓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제가 일할 힘을 빼낸 탓이에요. 소송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면 다른 일에는 거의 신경 쓸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직접 법원에서도 뛰신단 말이군요." K.가 물었다. "바로 그 얘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그건 별로 말씀드릴 게 없어요." 상인이 말했다. "처음엔 해 보기도 했는데 곧 그만뒀어요. 너무 지치고 성과도 별로 없어요. 거기서 직접 뛰고 교섭하는 건 적어도 저한테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게 드러났어요. 거기선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것만도 큰 고역이에요. 사무처의 탁한 공기는 직접 아시잖아요." "내가 거기 갔었다는 걸 어떻게 아십니까?" K.가 물었다. "당신이 지나가실 때 마침 대기실에 있었거든요." "이런 우연이!" K.는 완전히 이야기에 빠져서, 아까 상인이 우스꽝스러웠던 것도 까맣게 잊고 외쳤다. "그러니까 나를 보셨군요! 내가 지나갈 때 대기실에 계셨다니. 네, 한 번 거기를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 대단한 우연도 아니에요." 상인이 말했다. "저는 거의 날마다 거기 있으니까요." "이제 나도 자주 가야 할 것 같습니다." K.가 말했다. "다만 그때처럼 그렇게 영예로운 대접은 더는 받지 못하겠지요. 다들 일어서더군요. 아마 나를 판사로 여긴 모양입니다." "아니에요." 상인이 말했다. "그때 우리는 법원 직원한테 인사한 거예요. 당신이 피고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런 소식은 무척 빨리 퍼지거든요." "그러니까 벌써 아셨군요." K.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 태도가 거만해 보였겠군요. 그런 얘기는 안 나왔습니까?" "아니요." 상인이 말했다. "오히려 반대였어요. 하지만 다 쓸데없는 얘기예요." "무슨 쓸데없는 얘기요?" K.가 물었다. "그건 왜 물으세요?" 상인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거기 사람들을 아직 모르시는 것 같으니 잘못 받아들이실지도 몰라요. 이 절차에서는 머리로는 더 따라갈 수 없는 일들이 자꾸 입에 오르내린다는 걸 생각하셔야 해요. 많은 일에 너무 지치고 정신이 흐트러져 있으니까 그 대신 미신에 매달리게 되지요. 남들 얘기를 하지만 저도 조금도 나을 게 없어요. 이를테면 많은 사람이 피고인의 얼굴, 특히 입술 모양을 보고 소송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있다고 믿는 게 그런 미신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당신 입술로 보아 당신이 틀림없이 곧 유죄 판결을 받을 거라고 했어요. 되풀이하지만 우스꽝스러운 미신이고 대개는 사실로 완전히 반박돼요. 하지만 그런 무리 속에서 살다 보면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요. 그 미신이 얼마나 힘이 센지 생각해 보세요. 거기서 한 사람한테 말을 거셨지요? 그 사람이 거의 대답을 못 했잖아요. 물론 거기선 쩔쩔맬 이유가 많지만, 그중 하나는 당신 입술을 본 거였어요. 나중에 그 사람이, 당신 입술에서 자기가 유죄 판결을 받을 징조까지 본 것 같다고 하더군요." "내 입술이요?" K.는 묻고 손거울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내 입술에서 특별한 건 전혀 안 보이는데요. 당신은 보입니까?" "저도 안 보여요." 상인이 말했다. "전혀요." "이 사람들 정말 미신이 대단하군요." K.가 외쳤다. "제가 그랬잖아요?" 상인이 물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 많이 어울리며 생각을 주고받습니까?" K.가 말했다. "나는 여태 완전히 따로 지냈는데요." "대체로 서로 어울리지 않아요." 상인이 말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워낙 많으니까요. 공통된 이해관계도 별로 없어요. 가끔 어느 무리에서 공통된 이해관계가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도 곧 착각으로 드러나요. 함께 힘을 합쳐서는 법원에 맞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요. 사건마다 따로 조사하거든요. 더없이 꼼꼼한 법원이에요. 그러니 함께 이룰 수 있는 건 없고, 한 사람이 몰래 무언가를 이룰 때가 가끔 있을 뿐이에요. 이루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지요. 어떻게 된 건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 공통점이 없어요. 대기실에서 이따금 만나긴 하지만 거기서 이야기는 별로 안 해요. 미신 같은 생각들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고 그야말로 저절로 불어나요." "거기 대기실에서 그분들을 봤습니다." K.가 말했다. "기다리는 게 참 쓸데없어 보이더군요." "기다리는 건 쓸데없지 않아요." 상인이 말했다. "쓸데없는 건 혼자 나서는 거예요. 제가 지금 이분 말고도 변호사가 다섯이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제 일을 그들에게 완전히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완전히 틀렸어요. 변호사가 하나뿐일 때보다 오히려 덜 맡길 수 있어요. 이해가 안 되시지요?" "안 됩니다." K.는 말하고, 상인이 너무 빨리 말하는 걸 막으려고 달래듯 그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다만 조금 천천히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 나한테 무척 중요한 이야기인데 잘 따라가지 못하겠어요." "일깨워 주셔서 다행이네요." 상인이 말했다. "당신은 새내기시죠. 젊은 분이고요. 소송이 반년 됐지요? 네, 그렇게 들었어요. 그렇게 어린 소송이라니! 저는 이런 일들을 셀 수 없이 곱씹어 봐서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 됐거든요." "소송이 벌써 그렇게 많이 진행돼서 기쁘시겠군요?" K.가 물었다. 상인의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대놓고 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대답도 듣지 못했다. "네, 소송을 오 년 동안 굴려 왔지요." 상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작은 일은 아니에요." 그러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K.는 레니가 오지 않나 귀를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레니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직 물어볼 게 많았고, 상인과 이렇게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걸 레니에게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가 와 있는데도 레니가 수프를 갖다 드리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오래 변호사 곁에 머무는 게 화가 났다. "그때가 아직 똑똑히 기억나요." 상인이 다시 말을 꺼냈고, K.는 곧바로 온 신경을 기울였다. "제 소송이 지금 당신 소송만큼 됐을 때요. 그때는 이 변호사님 한 분뿐이었는데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여기서 다 알게 되겠구나, K.는 생각하며, 그러면 상인이 알 만한 걸 다 털어놓도록 북돋울 수 있기라도 할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소송은," 상인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어요. 심문은 열렸고, 저도 빠짐없이 나갔고, 자료를 모으고, 장부를 다 법원에 맡겼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요. 변호사님한테 자꾸 달려갔고, 변호사님도 여러 청원서를 냈어요……." "여러 청원서를요?" K.가 물었다. "네, 그럼요." 상인이 말했다. "그게 나한테는 아주 중요합니다." K.가 말했다. "내 경우엔 아직도 첫 청원서를 쓰고 있다더군요. 아직 아무것도 안 한 겁니다. 이제 보니 나를 부끄러울 만큼 소홀히 하고 있군요." "청원서가 아직 안 끝난 데는 여러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어요." 상인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제 청원서들은 나중에 보니 전혀 쓸모가 없었어요. 어느 법원 관리가 친절을 베풀어 준 덕에 그중 하나를 직접 읽어 보기까지 했어요. 학식은 있었지만 사실 알맹이가 없었어요. 무엇보다 제가 모르는 라틴어가 잔뜩 있었고, 몇 쪽씩 법원에 두루뭉술하게 호소하고,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군지 짐작할 수밖에 없는 몇몇 관리에게 아첨하고, 변호사가 자기 자랑을 하면서 법원 앞에 그야말로 개처럼 굽실거리고, 마지막으로 제 사건과 비슷하다는 옛날 법률 사건들을 연구해 놓았어요. 그 연구는 물론 제가 따라갈 수 있는 한에서는 무척 꼼꼼했어요. 이걸로 변호사님 일을 평가하려는 건 아니에요. 제가 읽은 건 여러 청원서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고요. 어쨌든,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이건데, 그때 저는 제 소송에서 아무 진척도 볼 수 없었어요." "어떤 진척을 보고 싶으셨는데요?" K.가 물었다. "아주 분별 있게 물으시는군요." 상인이 웃으며 말했다. "이 절차에서는 진척을 보는 일이 아주 드물어요. 하지만 그땐 그걸 몰랐어요. 저는 상인이고,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상인다웠어요. 손에 잡히는 진척을 원했어요. 모든 게 끝을 향해 가든지, 적어도 제대로 올라가는 길을 타야 했어요. 그런데 대개 똑같은 내용의 심문만 있었어요. 대답은 기도문처럼 벌써 외우고 있었어요. 일주일에 몇 번씩 법원 심부름꾼들이 제 가게로, 집으로, 저를 찾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로든 왔어요. 물론 성가셨지요. (지금은 적어도 그 점에서는 훨씬 나아요. 전화로 부르니까 덜 성가시거든요.) 사업 친구들 사이에서도, 특히 친척들 사이에서 제 소송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사방에서 손해를 봤는데, 첫 공판조차 곧 열리리라는 조짐은 조금도 없었어요. 그래서 변호사님한테 가서 따졌어요. 긴 설명을 해 주시긴 했지만 제 뜻대로 무언가를 하는 건 딱 잘라 거절했어요. 공판 날짜를 정하는 데는 아무도 힘을 쓸 수 없다고, 제가 원한 대로 청원서로 그걸 재촉하는 건 그야말로 전례 없는 일이고 저도 자기도 망치게 될 거라고요. 저는 생각했어요. 이 변호사가 안 하려 하거나 못 하는 걸 다른 변호사는 하려 하고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다른 변호사들을 찾아다녔어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아무도 본재판 날짜를 요구하거나 받아 내지 못했어요. 그건, 물론 나중에 말씀드릴 단서가 하나 붙지만, 정말로 불가능해요. 그 점에서는 이 변호사님이 저를 속이지 않은 거지요. 하지만 그 밖에는 다른 변호사들을 찾아간 걸 후회하지 않았어요. 훌트 박사한테서 무허가 변호사들 얘기를 벌써 이것저것 들으셨겠지요. 아마 아주 형편없는 사람들로 말했을 테고, 실제로 그래요. 다만 그분이 그들 얘기를 하면서 자기와 동료들을 그들과 견줄 때마다 작은 실수를 하는데, 그것도 지나가는 김에 일러 드리고 싶어요. 그분은 늘 구별하느라 자기 쪽 변호사들을 「큰 변호사」라고 불러요. 그건 틀렸어요. 누구나 마음 내키면 자기를 「큰」 변호사라고 부를 수 있지만, 여기서는 법원의 관례만이 결정해요. 그 관례에 따르면 무허가 변호사 말고도 작은 변호사와 큰 변호사가 있어요. 그런데 이 변호사님과 동료들은 작은 변호사일 뿐이에요. 제가 소문으로만 들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큰 변호사들은, 작은 변호사들이 업신여김받는 무허가 변호사들보다 높은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높은 자리에 있어요." "큰 변호사요?" K.가 물었다. "그게 누굽니까?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 닿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들 이야기를 아직 못 들으셨군요." 상인이 말했다. "그들 얘기를 듣고 나서 한동안 그들을 꿈꾸지 않는 피고인은 거의 없어요. 차라리 그 꾐에 넘어가지 마세요. 큰 변호사가 누군지 저는 몰라요. 그들에게 닿을 방법은 아마 아예 없을 거예요. 그들이 끼어들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건은 하나도 몰라요. 그들이 변호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제 뜻으로 그렇게 만들 수는 없어요. 그들은 자기들이 변호하고 싶은 사람만 변호해요. 그런데 그들이 맡는 사건은 아마 이미 낮은 법원을 넘어선 사건이어야 할 거예요. 아무튼 그들 생각은 안 하는 게 나아요. 안 그러면 다른 변호사들과의 의논이며 그들의 조언이며 도움이 너무 역겹고 쓸모없게 느껴져서 — 저도 겪어 봤어요 — 다 내던지고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더 듣고 싶지 않아지거든요. 물론 그러면 또 가장 어리석은 짓이 되겠지요. 침대에서도 오래 편히 쉬지는 못할 테고요." "그러니까 그때는 큰 변호사들을 생각하지 않으셨군요?" K.가 물었다. "오래는 아니었어요." 상인이 말하며 다시 웃었다. "안타깝게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어요. 특히 밤이면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하지만 그때는 당장 성과를 원했으니까 무허가 변호사들한테 갔어요."
"둘이 여기 붙어 앉아 있는 꼴 좀 봐." 잔을 들고 돌아온 레니가 문간에 멈춰 서서 외쳤다. 둘은 정말로 바짝 붙어 앉아 있어서 조금만 몸을 돌려도 머리가 부딪칠 판이었다. 작은 데다 등까지 구부정하게 굽힌 상인 때문에 K.도 다 들으려면 몸을 깊이 숙여야 했다. "조금만 더." K.가 레니를 막으며 외치고, 아직도 상인의 손 위에 얹어 둔 손을 조바심 난 듯 까딱였다. "이분이 제 소송 얘기를 해 달라고 하셔서요." 상인이 레니에게 말했다. "해, 해." 레니가 말했다. 레니는 상인에게 다정하게, 그러면서도 깔보듯 말했다. K.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알게 되었듯이 이 남자에게는 어떤 값어치가 있었다. 무엇보다 경험이 있었고, 그걸 잘 전할 줄 알았다. 레니는 아마 그를 잘못 보고 있을 것이다. K.는 레니가 이제 상인이 줄곧 쥐고 있던 초를 받아 들고, 앞치마로 그의 손을 닦아 주고, 그 곁에 무릎을 꿇고 바지에 떨어진 촛농을 긁어내는 것을 언짢게 바라보았다. "무허가 변호사들 얘기를 하시려던 참이었지요." K.는 말하고 아무 말 없이 레니의 손을 밀어냈다. "왜 그래?" 레니가 묻더니 K.를 가볍게 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네, 무허가 변호사들요." 상인이 생각하는 듯 이마를 쓸며 말했다. K.는 거들어 주려고 말했다. "당장 성과를 원하셔서 무허가 변호사들한테 가셨다고요." "맞아요." 상인이 말했지만 이야기를 잇지 않았다. 레니 앞에서는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K.는 생각하고, 나머지를 당장 듣고 싶은 조바심을 누르며 더는 캐묻지 않았다.
"알려 드렸어?" 그가 레니에게 물었다. "그럼." 레니가 말했다. "기다리고 계셔. 이제 블로크는 놔둬. 블로크하고는 나중에도 얘기할 수 있어. 여기 계속 있으니까." K.는 아직 머뭇거렸다. "여기 계속 계십니까?" 그가 상인에게 물었다. 상인 자신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레니가 상인을 없는 사람처럼 말하는 게 싫었다. 오늘 그는 레니에게 은근히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레니만 대답했다. "여기서 자주 자." "여기서 잔다고?" K.가 외쳤다. 그는 자기가 변호사와 얼른 이야기를 끝내는 동안 상인이 여기서 기다리고, 그다음에 함께 나가서 방해받지 않고 모든 걸 꼼꼼히 의논할 줄 알았다. "그래." 레니가 말했다. "요제프, 누구나 너처럼 아무 때나 변호사님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야. 변호사님이 편찮으신데도 밤 열한 시에 너를 만나 주시는 게 넌 전혀 놀랍지도 않나 봐. 친구들이 너를 위해 해 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겨. 뭐, 네 친구들은, 아니 우선 나는 기꺼이 해 줘. 다른 고마움은 바라지도 않고 필요도 없어. 네가 나를 사랑해 주기만 하면 돼." 사랑해 달라고? K.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가, 그제야 머릿속에 스쳤다. 그래,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하지. 그런데도 그는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말했다. "내가 의뢰인이니까 만나 주시는 거야. 그러는 데까지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한 걸음 뗄 때마다 빌고 고마워해야 할 거야." "오늘 이 사람 정말 못됐지?" 레니가 상인에게 물었다. 이제 내가 없는 사람이 됐군, K.는 생각했다. 그리고 상인이 레니의 무례를 그대로 이어받아 이렇게 말하자 상인에게까지 거의 화가 났다. "변호사님이 이분을 만나 주시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어요. 이분 사건이 제 사건보다 더 흥미롭거든요. 게다가 이분 소송은 아직 초기라서 아마 아직 크게 꼬이지 않았을 테니 변호사님도 기꺼이 붙들고 계시는 거죠. 나중엔 달라질 거예요." "그래, 그래." 레니가 상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어쩜 이렇게 수다스러울까! 이 사람 말은," 레니가 K.를 돌아보았다. "하나도 믿으면 안 돼. 착한 만큼 수다스럽거든. 어쩌면 그래서 변호사님도 이 사람을 싫어하시는지 몰라. 어쨌든 기분 내키실 때만 만나 주셔. 그걸 바꿔 보려고 무척 애썼는데 안 돼. 생각해 봐. 내가 블로크 왔다고 알려 드려도 사흘 뒤에야 만나 주실 때가 있어. 그런데 불려 갈 때 블로크가 자리에 없으면 다 끝이고 처음부터 다시 알려 드려야 해. 그래서 블로크한테 여기서 자도 된다고 했어. 밤중에 블로크를 찾으시며 종을 울리신 적도 있거든. 이제 블로크는 밤에도 준비가 돼 있어. 물론 요즘은 또 블로크가 와 있다는 걸 아시면 들이라고 하셨던 걸 거두실 때도 있지만." K.는 묻는 눈길로 상인을 보았다. 상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 K.와 이야기할 때만큼 솔직하게, 어쩌면 부끄러워서 정신이 없었는지 말했다. "네, 나중엔 변호사에게 무척 매이게 돼요." "겉으로만 투덜대는 거야." 레니가 말했다. "여기서 자는 거 무척 좋아해. 나한테 벌써 여러 번 그렇게 털어놨어." 레니는 작은 문으로 가서 문을 밀어 열었다. "이 사람 침실 볼래?" 레니가 K.에게 물었다. K.는 가서 문턱에서, 좁은 침대 하나로 꽉 찬 창문 없는 낮은 방을 들여다보았다. 침대에 들어가려면 침대 기둥을 넘어가야 했다. 침대 머리맡 벽에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는데, 거기 초와 잉크병과 펜, 그리고 아마 소송 서류인 듯한 종이 뭉치가 지나칠 만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녀 방에서 주무십니까?" K.가 상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레니가 내줬어요." 상인이 대답했다. "아주 편해요." K.는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상인에게서 받은 첫인상이 어쩌면 맞았는지도 몰랐다. 경험은 있었다. 소송이 벌써 오래 이어졌으니까. 그러나 그 경험의 값을 비싸게 치렀다. 갑자기 K.는 상인을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 좀 재워." 그가 레니에게 외쳤다. 레니는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자신은 변호사에게 가서, 해임으로 변호사에게서만이 아니라 레니와 상인에게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문에 이르기도 전에 상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간부님." K.는 성난 얼굴로 돌아섰다. "약속을 잊으셨어요." 상인이 앉은 채 애원하듯 K.에게 몸을 뻗으며 말했다. "저한테도 비밀 하나를 말씀해 주시기로 했잖아요." "정말 그렇군요." K.가 말하며 자기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레니에게도 눈길을 스쳤다. "그럼 들어 보세요. 사실 이제 거의 비밀도 아닙니다. 나는 지금 변호사를 해임하러 갑니다." "해임한대!" 상인이 외치며 의자에서 뛰어내려 두 팔을 쳐들고 부엌 안을 뛰어다녔다. 그는 자꾸만 외쳤다. "변호사를 해임한대!" 레니는 곧바로 K.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상인이 길을 막았고, 레니는 주먹으로 그를 한 대 쳤다. 레니는 아직 주먹을 쥔 채 K.를 쫓아갔지만 K.는 한참 앞서 있었다. 레니가 따라잡았을 때 그는 벌써 변호사의 방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등 뒤로 문을 꼭 닫았지만, 레니는 발로 문짝을 버티고 그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기려 했다. 그러나 그가 레니의 손목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레니는 한숨을 쉬며 그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레니는 곧바로 방에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K.는 열쇠로 문을 잠갔다.
"아주 오래 기다렸습니다." 변호사가 침대에서 말하며, 촛불 아래서 읽던 서류를 작은 탁자에 내려놓고 안경을 쓰더니 그 안경 너머로 K.를 날카롭게 보았다. K.는 사과하는 대신 말했다. "곧 다시 가겠습니다." 변호사는 사과가 아니었기에 K.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말했다. "앞으로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들이지 않겠습니다." "제 용건에 잘 맞는 말씀이군요." K.가 말했다. 변호사는 묻는 눈길로 그를 보았다. "앉으세요." 그가 말했다. "원하신다니까요." K.는 말하고 안락의자를 작은 탁자 쪽으로 끌어와 앉았다. "문을 잠그신 것 같던데요." 변호사가 말했다. "네." K.가 말했다. "레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감싸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변호사가 물었다. "또 들러붙던가요?" "들러붙다니요?" K.가 물었다. "네." 변호사가 말하며 웃었다. 그러다 기침 발작이 일었고, 그게 지나가자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 애가 들러붙는 걸 벌써 알아채셨겠지요." 그가 물으며 K.의 손을 톡톡 쳤다. K.가 멍하니 작은 탁자에 짚고 있던 손이었는데, K.는 얼른 손을 거두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군요." K.가 말이 없자 변호사가 말했다. "그럼 더 좋습니다. 안 그러면 제가 사과드려야 했을지도 모르니까요. 레니의 별난 점인데, 저는 벌써 오래전에 용서했고, 당신이 방금 문을 잠그지 않았다면 이야기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 별난 점은 — 당신한테야 제가 설명할 필요가 가장 없겠지만, 그렇게 당황한 눈으로 보시니 말씀드리지요 — 레니가 피고인들 대부분을 아름답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 애는 모두에게 매달리고, 모두를 사랑하고, 물론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허락하면 저를 즐겁게 해 주려고 가끔 그 이야기를 해 주지요. 저는 당신만큼 그 일에 놀라지 않습니다. 제대로 볼 줄 알면 피고인들은 정말로 아름다운 경우가 많아요. 물론 그건 이상한, 말하자면 자연과학적인 현상입니다. 기소되었다고 해서 뚜렷하고 정확히 짚어 낼 수 있는 외모의 변화가 생기는 건 물론 아닙니다. 다른 법률 사건과는 달라서, 대부분은 평소대로 살아가고, 자기를 돌봐 주는 좋은 변호사가 있으면 소송 때문에 크게 방해받지도 않지요. 그런데도 경험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 무리 속에서도 피고인을 한 사람 한 사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요? 하고 물으시겠지요. 제 대답은 만족스럽지 않으실 겁니다. 피고인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겁니다. 그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죄일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 적어도 변호사로서 저는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 모두에게 죄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벌써부터 그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마땅한 벌일 수도 없어요. 모두가 벌을 받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 그들에게 제기된 절차, 어떻게든 그들에게 들러붙어 있는 절차 때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아름다운 사람들 가운데 특히 아름다운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모두 아름다워요. 블로크조차도요. 그 비참한 벌레조차도."
변호사가 말을 마쳤을 때 K.는 완전히 침착해져 있었다. 마지막 말에는 눈에 띄게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고, 그렇게 해서 오래된 자기 생각을 스스로 확인했다. 변호사는 늘 그랬듯 이번에도 일과 상관없는 두루뭉술한 이야기로 그의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변호사가 K.의 일을 위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느냐는 중요한 물음에서 딴 데로 돌리려 한다는 생각이었다. 변호사도 K.가 이번에는 여느 때보다 더 버틴다는 걸 알아챘는지, K.가 직접 말할 수 있게 입을 다물었다가, K.가 말없이 있자 물었다. "오늘 무슨 뜻이 있어서 오셨습니까?" "네." K.가 말하며 변호사를 더 잘 보려고 손으로 촛불을 조금 가렸다. "오늘부로 변호를 거두어들이겠다고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제가 제대로 들은 겁니까?" 변호사가 물으며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베개를 짚었다. "그런 줄 압니다." K.가 말했다. 그는 먹잇감을 노리듯 꼿꼿이 몸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글쎄요, 그 계획도 의논해 볼 수 있겠지요." 잠시 뒤 변호사가 말했다. "이제 계획이 아닙니다." K.가 말했다. "그럴지도요." 변호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서두르지는 맙시다." 그는 「우리」라는 말을 썼다. K.를 놓아줄 생각이 없고, 대리인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조언자로라도 남고 싶다는 듯이. "서두르는 게 아닙니다." K.가 말하며 천천히 일어나 안락의자 뒤로 갔다. "충분히, 어쩌면 너무 오래 생각한 일입니다. 결심은 최종적입니다." "그럼 몇 마디만 더 하게 해 주십시오." 변호사가 말하며 깃털 이불을 걷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흰 털이 난 맨다리가 추위에 떨었다. 그는 K.에게 소파에서 담요를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K.는 담요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쓸데없이 감기 드시겠습니다." "그럴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변호사가 깃털 이불로 윗몸을 감싸고 다리를 담요로 둘둘 말며 말했다. "당신 삼촌은 제 친구이고, 당신도 그동안 제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인정합니다.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고요." 늙은이의 이 감상적인 말이 K.는 무척 달갑지 않았다. 피하고 싶었던 자세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스스로 솔직히 인정하듯 그를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로 그의 결심을 되돌릴 수는 결코 없었지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가 말했다. "제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제게 이롭다고 보시는 만큼 무척 애써 주셨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보다 훨씬 나이 많고 경험 많은 분을 제 생각으로 설득하려 들지는 않겠습니다. 가끔 저도 모르게 그러려 했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일이 충분히 중요하고, 제 생각엔 여태보다 훨씬 힘차게 소송에 개입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조바심이 나시는군요." "조바심 나는 게 아닙니다." K.가 조금 짜증이 나서 말했다. 그는 이제 말을 그리 가려 하지 않았다. "제가 삼촌과 함께 처음 찾아왔을 때 제가 소송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걸 아셨을 겁니다. 말하자면 억지로 떠올리게 하지 않으면 저는 소송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하지만 삼촌이 변호를 맡기라고 고집하셨고, 저는 삼촌 비위를 맞추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소송이 전보다 더 가벼워지리라 기대하는 게 당연하지 않았겠습니까. 소송의 짐을 조금 덜려고 변호사에게 변호를 맡기는 거니까요. 그런데 정반대였습니다. 변호사님이 저를 대리하신 뒤로만큼 소송 때문에 걱정한 적은 없었습니다. 혼자였을 때는 제 일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걸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리인이 생기자 무언가 일어나도록 모든 게 갖춰졌고, 저는 쉴 새 없이, 점점 더 초조하게 변호사님이 나서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물론 다른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을 법원 이야기를 이것저것 들었지요. 하지만 소송이 그야말로 은밀하게 점점 제 몸에 다가붙는 지금,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K.는 안락의자를 밀쳐 내고 두 손을 윗옷 주머니에 넣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때부터는," 변호사가 나직이 차분하게 말했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일은 더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송의 비슷한 단계에서 얼마나 많은 민원인들이 당신처럼 제 앞에 서서 비슷한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K.가 말했다. "그 비슷한 민원인들도 모두 저만큼 옳았던 겁니다. 그걸로 제 말이 반박되지는 않습니다." "당신 말을 반박하려던 게 아닙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다만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판단력을 기대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습니다. 특히 다른 민원인들에게 하는 것보다 법원 제도와 제 일에 대해 더 많이 보여 드렸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보니 그런데도 저를 충분히 믿지 않으시는군요. 저를 편하게 해 주지 않으시는군요." 변호사가 K. 앞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낮추는가! 바로 이 점에서 가장 예민할 법한 직업의 체면도 전혀 돌보지 않고. 그는 왜 그러는 걸까? 겉보기에는 무척 바쁜 변호사였고, 게다가 부자였다. 그 자체로는 수입이 줄거나 의뢰인 하나를 잃는 게 그리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병약해서 오히려 일을 덜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K.를 이렇게 꽉 붙들었다! 왜? 삼촌에 대한 개인적인 정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K.의 소송을 그렇게 특별하게 여겨서 거기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은 걸까? K.를 위해서든, 아니면 — 이 가능성은 결코 떨칠 수 없었는데 — 법원의 친구들을 위해서든? K.가 아무리 거리낌 없이 뜯어보아도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일부러 닫아 건 얼굴로 제 말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 기다리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을 잇는 걸 보면 K.의 침묵을 너무 제 쪽에 유리하게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보셨겠지만 제 사무실은 크지만 보조 인력은 하나도 두지 않습니다. 예전엔 달랐어요. 젊은 법률가 몇이 저를 위해 일하던 때가 있었지요. 지금은 혼자 일합니다. 그건 한편으로는 제가 점점 당신 사건 같은 법률 사건만 맡게 되면서 일이 달라졌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법률 사건을 점점 깊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뢰인에게, 그리고 떠맡은 일에 죄를 짓고 싶지 않다면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맡겨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모든 일을 직접 하겠다는 결심에는 당연한 결과가 따랐습니다. 대리해 달라는 부탁을 거의 다 거절하고, 특히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 부탁만 들어줄 수 있었지요. 뭐, 제가 던지는 부스러기라면 무엇에든 달려드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게다가 저는 과로로 병이 났습니다. 그래도 그 결심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거절한 것보다 더 많이 거절해야 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맡은 소송에 온 마음을 바친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고, 성과로 보답받았습니다. 언젠가 어느 글에서 보통 법률 사건의 대리와 이런 법률 사건의 대리가 어떻게 다른지 아주 멋지게 표현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한 변호사는 의뢰인을 실 한 가닥으로 이끌어 판결까지 데려가지만, 다른 변호사는 의뢰인을 곧바로 어깨에 들쳐 메고 한 번도 내려놓지 않은 채 판결까지, 아니 그 너머까지 데려간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큰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 건 꼭 맞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당신 경우처럼 그게 이렇게 완전히 오해를 받으면, 그러면 거의 후회가 됩니다." K.는 이 말에 설득되기는커녕 더 조바심이 났다. 변호사의 말투에서 자기가 굽히면 무엇이 기다리는지 어떻게든 들리는 것 같았다. 다시 달래는 말이 시작될 것이다. 청원서가 진척되고 있다는 둥, 법원 관리들 기분이 나아졌다는 둥, 그러나 일을 가로막는 큰 어려움들도 있다는 둥. 한마디로 신물 나게 들은 이야기가 다 다시 나와서, K.를 또다시 막연한 희망으로 속이고 막연한 위협으로 괴롭힐 것이다. 그건 이번에 끝장을 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변호를 계속 맡으신다면 제 일에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변호사는 이 모욕적인 물음에도 순순히 대답했다. "이미 당신을 위해 해 온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K.가 말했다. "이제 더 할 말은 없군요." "한 번만 더 해 보겠습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K.를 흥분시키는 일이 K.가 아니라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기라도 한 듯이. "제 짐작으로는 당신이 제 법률 조력을 잘못 판단하는 것도, 그 밖의 태도도, 피고인인데도 너무 잘 대접받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소홀하게, 겉보기에 소홀하게 대접받기 때문이지요. 이 마지막 것에도 까닭이 있습니다. 자유로운 것보다 사슬에 묶여 있는 게 나을 때가 많으니까요. 그래도 다른 피고인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보여 드리고 싶군요. 어쩌면 거기서 교훈을 얻으실지도 모르지요. 지금 블로크를 부르겠습니다. 문을 여시고 여기 작은 탁자 곁에 앉으세요." "좋습니다." K.는 말하고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는 언제나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일을 대비해 한 번 더 물었다. "그런데 제가 변호를 거두어들인다는 건 알아들으신 거지요?" "네." 변호사가 말했다. "하지만 오늘 안에는 아직 되돌리실 수 있습니다." 그는 다시 침대에 눕더니 깃털 이불을 무릎까지 끌어올리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러고는 종을 울렸다.
종소리와 거의 동시에 레니가 나타났다. 레니는 재빠른 눈길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려 했다. K.가 변호사 침대 곁에 조용히 앉아 있는 걸 보자 마음이 놓인 것 같았다. 레니는 자기를 뚫어지게 보는 K.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블로크를 데려와라." 변호사가 말했다. 그러나 레니는 블로크를 데려오는 대신 문 앞에 나가서 "블로크! 변호사님께!" 하고 부르기만 하고는, 아마 변호사가 벽 쪽으로 돌아누운 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인지, K.의 의자 뒤로 슬쩍 들어왔다. 그때부터 레니는 의자 등받이 너머로 몸을 숙이거나, 물론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이긴 했지만, 두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쓸고 뺨을 쓰다듬으며 그를 방해했다. 마침내 K.는 그걸 막으려고 레니의 한 손을 붙잡았다. 레니는 조금 버티다가 손을 내맡겼다.
블로크는 부르는 소리에 곧바로 왔지만 문 앞에 멈춰 서서 들어가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변호사에게 오라는 명령이 한 번 더 들리지 않을까 귀 기울이는 듯이. K.는 들어오라고 북돋워 줄 수도 있었지만, 변호사하고만이 아니라 이 집의 모든 것과 완전히 끊기로 마음먹었기에 꼼짝하지 않았다. 레니도 잠자코 있었다. 블로크는 적어도 아무도 자기를 쫓아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얼굴을 잔뜩 긴장한 채 두 손을 등 뒤로 꽉 움켜쥐고 발끝으로 들어왔다. 혹시 물러나야 할 때를 대비해 문은 열어 두었다. 그는 K.는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높이 쌓인 깃털 이불만 바라보았다. 변호사가 벽에 바짝 붙어 누워 있어서 이불 밑의 그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블로크 왔느냐?" 그가 물었다. 벌써 꽤 앞으로 다가와 있던 블로크는 이 물음에 가슴을 한 번, 그리고 등을 한 번 떠밀린 것처럼 비틀거리다가 깊이 허리를 숙인 채 멈춰 서서 말했다. "대령했습니다." "무슨 일이냐?" 변호사가 물었다. "때를 잘못 맞춰 왔구나."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블로크는 변호사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묻듯 말하며, 막으려는 듯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달아날 준비를 했다. "불렀지." 변호사가 말했다. "그래도 때를 잘못 맞춰 왔어." 그리고 잠시 뒤에 덧붙였다. "너는 늘 때를 잘못 맞춰 와." 변호사가 말을 시작하자 블로크는 더는 침대 쪽을 보지 않고, 어느 구석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귀만 기울였다. 말하는 사람의 곁눈질이 너무 눈부셔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듣는 것도 어려웠다. 변호사가 벽을 향해, 그것도 나직하고 빠르게 말했기 때문이다. "제가 나가길 바라십니까?" 블로크가 물었다. "이왕 왔으니," 변호사가 말했다. "있어라!" 변호사가 블로크의 바람을 들어준 게 아니라 매질이라도 하겠다고 을러댄 것처럼 보였다. 이제 블로크가 정말로 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제," 변호사가 말했다. "내 친구인 세 번째 판사한테 가서 슬슬 네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으냐?" "아, 제발요." 블로크가 말했다. 변호사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블로크는 다시 한번 청하며 무릎이라도 꿇으려는 듯 몸을 숙였다. 그때 K.가 그에게 버럭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레니가 그 외침을 막으려 했기에 K.는 레니의 다른 손까지 붙잡았다. 사랑의 손길로 붙잡은 게 아니었다. 레니는 자꾸 한숨을 쉬며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런데 K.의 외침 때문에 벌을 받은 건 블로크였다. 변호사가 그에게 물었다. "네 변호사가 누구냐?" "변호사님이십니다." 블로크가 말했다. "그럼 나 말고는?" 변호사가 물었다. "변호사님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블로크가 말했다. "그럼 다른 누구 말도 따르지 마라." 변호사가 말했다. 블로크는 그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사나운 눈길로 K.를 훑어보며 그를 향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몸짓을 말로 옮겼다면 거친 욕설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과 K.는 자기 일을 다정하게 의논하려 했던 것이다!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K.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무릎을 꿇든 네 발로 기든 마음대로 하세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블로크에게도 적어도 K. 앞에서는 체면이 있었다. 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K.에게 다가가, 변호사 곁에서 감히 낼 수 있는 한 가장 큰 소리로 외쳤다.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허용되지 않아요. 왜 저를 모욕하십니까? 그것도 여기 변호사님 앞에서, 당신도 저도 자비로 겨우 받아들여지는 이 자리에서요? 당신이라고 저보다 나은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도 기소됐고 당신도 소송이 걸려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당신이 신사라면 저도 똑같은 신사예요. 더 큰 신사가 아니라면요. 그리고 저도 그렇게 대접받고 싶어요. 바로 당신한테서요. 당신 말대로 제가 네 발로 기는 동안 당신은 여기 앉아서 느긋하게 들을 수 있다고 해서 특별하다고 여기신다면, 옛 법언 하나를 일깨워 드리지요. 혐의를 받는 사람에게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게 낫다. 가만히 있는 사람은 저도 모르는 새 언제든 저울 위에 올라 제 죄와 함께 달릴 수 있으니까."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꼼짝 않는 눈으로 이 혼란에 빠진 사람을 놀라 바라볼 뿐이었다. 지난 한 시간 사이에만 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가! 소송이 이 사람을 이리저리 내던져서, 누가 친구고 누가 적인지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걸까? 변호사가 일부러 자기를 욕보이고 있다는 걸, 이번에는 K. 앞에서 제 권력을 뽐내고 그렇게 해서 어쩌면 K.까지 굴복시키려는 것 말고는 아무 목적도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그런데 블로크가 그걸 알아볼 능력이 없거나, 알아봐야 소용없을 만큼 변호사를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또 변호사를 속이고 다른 변호사들도 부리고 있다는 걸 숨길 만큼 영리하거나 대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K.가 당장이라도 그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데 어떻게 감히 K.에게 덤빈단 말인가? 그런데 그는 더한 짓도 했다. 변호사의 침대로 가서 거기서도 K.에 대해 하소연하기 시작한 것이다. "변호사님," 그가 말했다. "이 사람이 저한테 어떻게 말했는지 들으셨습니까? 소송이 몇 시간째인지 셀 수 있을 정도인데, 벌써 오 년째 소송에 걸린 저한테 훈계를 하려 들어요. 욕까지 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를 욕해요. 저는 제 약한 힘이 닿는 데까지 예의와 의무와 법원 관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꼼꼼히 공부했는데요." "아무한테도 신경 쓰지 마라." 변호사가 말했다. "옳다고 여기는 대로 해라." "그럼요." 블로크가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듯 말하고, 짧게 곁눈질하고는 이번에는 침대 바로 곁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 꿇었습니다, 변호사님." 그가 말했다. 그러나 변호사는 말이 없었다. 블로크는 한 손으로 조심스레 깃털 이불을 쓰다듬었다. 이제 찾아온 고요 속에서 레니가 K.의 손에서 풀려나며 말했다. "아파. 놔줘. 블로크한테 갈래." 레니는 가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블로크는 레니가 오자 무척 기뻐하며, 곧바로 생생하지만 말없는 손짓으로 변호사에게 자기를 위해 말 좀 해 달라고 레니에게 부탁했다. 그는 변호사가 들려줄 소식이 몹시 급하게 필요한 게 분명했다. 어쩌면 다른 변호사들에게 그걸 써먹게 하려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레니는 변호사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잘 아는 모양이었다. 레니는 변호사의 손을 가리키고 입 맞추듯 입술을 내밀었다. 블로크는 곧바로 손에 입을 맞추었고, 레니가 시키자 두 번 더 되풀이했다. 그래도 변호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자 레니가 변호사 위로 몸을 숙였다. 그렇게 몸을 뻗자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났다. 레니는 그의 얼굴 가까이 깊이 고개를 숙이고 그의 긴 흰머리를 쓸었다. 그러자 결국 대답이 나왔다. "그 애한테 말해 줘야 할지 망설여지는구나." 변호사가 말했다. 레니 손길을 더 받으려는지 그는 고개를 조금 저었다. 블로크는 이렇게 엿듣는 것으로 무슨 계명이라도 어기는 듯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왜 망설이세요?" 레니가 물었다. K.는 벌써 여러 번 되풀이되었고 앞으로도 여러 번 되풀이될, 블로크에게만 새로울 수밖에 없는 연습된 대화를 듣는 것 같았다. "오늘은 이 애가 어떻게 지냈느냐?" 변호사가 대답 대신 물었다. 레니는 대답하기 전에 블로크를 내려다보며, 그가 두 손을 자기 쪽으로 쳐들고 애원하듯 비비는 것을 잠시 지켜보았다. 마침내 레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변호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얌전하고 부지런했어요." 긴 수염을 기른 늙은 상인이 젊은 아가씨에게 좋은 평을 해 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무슨 속셈이 있다 해도, 같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를 변명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모습은 보는 사람까지 거의 욕보였다. 그러니까 이게 변호사의 방식이 낳은 결과였다. 다행히 K.는 거기 오래 노출되지 않았다. 의뢰인은 결국 온 세상을 잊고, 오직 이 잘못된 길로 소송의 끝까지 질질 끌려가기만을 바라게 된다. 이건 이제 의뢰인이 아니라 변호사의 개였다. 변호사가 침대 밑을 개집 삼아 기어들어 가서 거기서 짖으라고 명령했다면 그는 신이 나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K.는 여기서 오가는 모든 말을 빠짐없이 받아들였다가 더 높은 곳에 고발하고 보고하라는 임무라도 받은 듯, 살피며 내려다보듯 귀를 기울였다. "하루 종일 뭘 했느냐?" 변호사가 물었다. "제가 일하는 데 방해가 안 되게," 레니가 말했다. "평소 지내는 하녀 방에 가둬 뒀어요. 틈으로 이따금 뭘 하나 들여다봤어요. 늘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빌려주신 서류를 창턱에 펼쳐 놓고 읽고 있었어요. 그게 좋은 인상을 줬어요. 그 창은 환기 통로로만 나 있어서 빛이 거의 안 들거든요. 그런데도 블로크가 읽는 걸 보니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알겠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구나." 변호사가 말했다. "그런데 알아듣고 읽었느냐?" 이 대화 내내 블로크는 쉬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레니에게서 듣고 싶은 대답을 속으로 지어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물론," 레니가 말했다. "확실히 대답할 수 없어요. 어쨌든 꼼꼼히 읽는 건 봤어요. 하루 종일 같은 쪽을 읽으면서 손가락으로 줄을 짚어 갔어요. 들여다볼 때마다 한숨을 쉬었어요. 읽는 게 무척 힘든 것처럼요. 빌려주신 서류가 아마 알아듣기 어려운가 봐요." "그래." 변호사가 말했다. "물론 어렵지. 이 애가 그걸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거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이 애를 변호하려고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하려는 거야. 그런데 나는 누구를 위해 이 힘든 싸움을 하느냐? — 입에 올리기도 거의 우습다만 — 블로크를 위해서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이 애가 깨우쳐야 해. 쉬지 않고 공부했느냐?" "거의 쉬지 않았어요." 레니가 대답했다. "한 번 마실 물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채광창으로 물 한 잔을 건네줬어요. 여덟 시에 꺼내 주고 먹을 걸 좀 줬어요." 블로크는 무슨 칭찬이라도 듣는 양, 그게 K.에게도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듯 곁눈으로 K.를 훑었다. 이제 그는 희망이 생긴 듯 몸을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이며 무릎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러니 이어지는 변호사의 말에 그가 굳어 버리는 게 더욱 뚜렷했다. "이 애를 칭찬하는구나." 변호사가 말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말하기가 어렵다. 판사가 좋게 말하지 않았거든. 블로크에 대해서도, 블로크의 소송에 대해서도." "좋게 말하지 않았다고요?" 레니가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블로크는 레니가 이제라도 오래전에 내뱉은 판사의 말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돌려놓을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 잔뜩 긴장한 눈길로 레니를 보았다. "좋지 않았어." 변호사가 말했다. "내가 블로크 이야기를 꺼내자 오히려 불쾌해하더군. 블로크 얘기는 하지 마시오, 하더라. 내 의뢰인이오, 했지. 이용당하고 계시오, 하더라. 나는 그의 사건이 진 거라고 보지 않소, 했지. 이용당하고 계시오, 그가 되풀이했어. 나는 그렇게 믿지 않소, 했지. 블로크는 소송에 부지런하고 늘 제 일을 쫓아다니오. 늘 사정을 알려고 거의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하오. 그런 열성은 흔치 않소. 물론 사람으로서는 달갑지 않고, 태도도 고약하고, 지저분하지만, 소송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소. 흠잡을 데가 없다고 했지. 일부러 부풀린 거다. 그랬더니 그가 말하더군. 블로크는 영악할 뿐이오. 경험을 많이 쌓았고 소송을 지연시킬 줄 알지. 하지만 그의 무지는 그의 영악함보다 훨씬 크오. 자기 소송이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걸 알면, 소송 시작을 알리는 종조차 아직 울리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군. 가만있어라, 블로크." 변호사가 말했다. 블로크가 마침 비틀거리는 무릎으로 일어나 설명해 달라고 청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좀 더 길게 블로크에게 직접 말을 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지친 눈으로 반은 멍하니, 반은 블로크를 내려다보았다. 블로크는 그 눈길 아래서 다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판사의 그 말은 너한테 아무 의미도 없다." 변호사가 말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놀라지 마라.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더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겠다. 말을 꺼낼 때마다 너는 이제 최종 판결이라도 내려지는 양 사람을 쳐다보는구나. 여기 내 의뢰인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알아라! 너는 그가 나에게 거는 믿음까지 흔들고 있어. 대체 뭘 원하느냐? 너는 아직 살아 있고, 아직 내 보호 아래 있다. 뜻 없는 두려움이야! 어디선가 읽었겠지. 어떤 경우에는 최종 판결이 아무 입에서나 아무 때나 불쑥 나온다고. 여러 단서를 붙이면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네 두려움이 역겹다는 것, 거기서 필요한 믿음이 모자라다는 걸 본다는 것도 똑같이 맞는 말이다. 내가 뭐라고 했느냐? 한 판사의 말을 전했을 뿐이다. 알다시피 절차를 둘러싸고 온갖 견해가 쌓여서 도무지 꿰뚫어 볼 수가 없다. 이를테면 이 판사는 절차가 시작되는 때를 나와 다르게 본다. 의견 차이일 뿐 그 이상은 아니야. 소송의 어느 단계에서 옛 관습에 따라 종을 울린다. 이 판사 생각으로는 그때 소송이 시작된다는 거다. 거기에 반대하는 근거를 지금 다 말해 줄 수는 없다. 말해 줘도 알아듣지 못할 거고. 반대하는 근거가 많다는 것만 알면 된다." 블로크는 아래에서 당황한 듯 침대 앞 깔개의 털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판사의 말이 두려워서 그는 이따금 변호사에게 굽실거리는 것도 잊고,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며 판사의 말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블로크." 레니가 경고하는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윗옷 깃을 잡아 조금 끌어올렸다. "털은 그만 만지고 변호사님 말씀 들어." K.는 변호사가 어떻게 이런 광경을 보여 주어 자기를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벌써 변호사를 쫓아내지 않았다면, 이 장면으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대성당에서
K.는 은행에 무척 중요하고 이 도시에 처음 온 이탈리아 사업 파트너에게 미술 유적 몇 곳을 안내하라는 일을 맡았다. 다른 때라면 틀림없이 영예로 여겼을 일이지만, 은행에서 체면을 지키는 것만도 몹시 힘에 부치는 지금은 마지못해 맡았다. 사무실에서 빼앗기는 시간은 한 시간 한 시간이 괴로웠다. 사실 이제는 사무실 시간을 예전만큼 잘 쓰지도 못했다. 겨우 일하는 척만 하며 보내는 시간도 많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무실에 없을 때의 걱정은 더 컸다. 그러면 늘 기회를 엿보던 부행장이 이따금 그의 사무실에 와서 그의 책상에 앉아 그의 서류를 뒤지고, K.와 여러 해 동안 거의 친구처럼 지내 온 고객들을 맞아 그에게서 빼앗아 가고, 어쩌면 실수까지 찾아내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요즘 K.는 일하는 동안 늘 천 갈래에서 실수가 자기를 위협하는 것 같았고, 더는 그 실수를 피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영예로운 방식이라 해도 업무로 외출하라거나 짧은 출장이라도 가라는 일을 맡으면 — 요즘 그런 일이 아주 우연히도 잦아졌다 — 잠시 그를 사무실에서 떼어 놓고 그의 일을 살펴보려는 게 아닐까, 아니면 적어도 사무실에서 그가 없어도 그만인 사람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하는 짐작이 들 만도 했다. 그런 일은 대부분 어렵지 않게 거절할 수 있었지만 그는 감히 그러지 못했다. 걱정이 조금이라도 근거가 있다면, 거절은 두렵다고 자백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런 일을 겉으로는 태연히 받아들였고, 고된 이틀짜리 출장을 가야 했을 때는 심한 감기까지 숨겼다. 마침 비 오는 가을 날씨를 핑계로 출장을 가지 말라고 붙잡힐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다. 그 출장에서 지독한 두통을 안고 돌아왔을 때, 그는 다음 날 이탈리아 사업 파트너를 안내하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이번 한 번만은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무척 컸다. 무엇보다 그에게 맡긴 일은 사업과 곧바로 이어진 일이 아니었다. 사업 파트너에게 이런 사교상의 의무를 다하는 건 그 자체로는 분명 충분히 중요했지만, K.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일로 성과를 내야만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잘 알았고, 그게 안 된다면 이 이탈리아인을 뜻밖에 매료시킨다 해도 아무 값어치가 없었다. 그는 단 하루라도 일의 영역에서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움이 너무 컸다. 그 두려움이 지나치다는 걸 아주 잘 알았지만 그래도 숨이 막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받아들일 만한 반대 이유를 지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K.의 이탈리아어 실력은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결정적인 건 K.가 예전부터 미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게 은행에 엄청나게 부풀려져 알려진 건, K.가 한동안 — 그것도 순전히 사업상의 이유로 — 시립 미술 유적 보존 협회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문으로 듣기에 이 이탈리아인은 미술 애호가라니, K.를 안내인으로 고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비바람이 몹시 치는 아침이었다. K.는 앞으로 닥칠 하루에 잔뜩 짜증이 나서, 손님 때문에 모든 걸 빼앗기기 전에 조금이라도 일을 해 두려고 벌써 일곱 시에 사무실에 나왔다. 그는 무척 피곤했다. 조금이라도 준비하려고 밤의 절반을 이탈리아어 문법책을 공부하며 보냈기 때문이다. 요즘 너무 자주 앉곤 하던 창가가 책상보다 더 그를 끌어당겼지만 그는 버티고 앉아 일을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마침 심부름꾼이 들어와서, 간부님이 벌써 나오셨는지 보고 오라고 은행장님이 보내셨다고, 나와 계시면 응접실로 건너와 주시라고, 이탈리아에서 오신 분이 벌써 와 계시다고 알렸다. "곧 가겠습니다." K.는 말하고 작은 사전을 주머니에 넣고, 손님에게 주려고 준비한 시내 명소 사진첩을 옆구리에 끼고 부행장의 사무실을 지나 행장실로 갔다. 이렇게 일찍 사무실에 나와서 곧바로 응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아무도 진지하게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행장의 사무실은 물론 한밤중처럼 아직 비어 있었다. 아마 심부름꾼이 부행장도 응접실로 불러야 했지만 헛일이었던 모양이다. K.가 응접실에 들어서자 두 신사가 깊숙한 안락의자에서 일어섰다. 은행장은 다정하게 웃었다. K.가 온 게 무척 반가운 게 분명했다. 그가 곧바로 소개를 했고, 이탈리아인은 K.의 손을 힘차게 흔들며 웃으면서 누군가를 두고 아침형 인간이라고 했다. K.는 누구를 두고 한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게다가 이상한 낱말이라 K.는 잠시 뒤에야 그 뜻을 짐작했다. 그는 매끄러운 문장 몇 개로 대답했고, 이탈리아인은 다시 웃으며 그 말을 받으면서 신경질적인 손으로 회청색의 덥수룩한 콧수염을 여러 번 쓸었다. 그 수염에서는 향수 냄새가 나는 게 분명했다.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아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모두 앉아서 짧은 첫인사가 오가기 시작하자, K.는 몹시 불편하게도 이탈리아인의 말을 띄엄띄엄밖에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 그가 아주 차분하게 말할 때는 거의 다 알아들었지만 그건 드문 예외였다. 대개는 말이 입에서 콸콸 쏟아져 나왔고, 그는 그게 즐거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말할 때면 그는 번번이 무슨 사투리에 빠져들었는데, K.에게는 그게 더는 이탈리아어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은행장은 그 사투리를 알아들을 뿐 아니라 말하기까지 했다. 사실 K.도 미리 알 수 있었던 일이다. 이탈리아인은 남부 이탈리아 출신이었고, 은행장도 거기서 몇 해 지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K.는 이탈리아인과 말이 통할 가능성을 대부분 빼앗겼다는 걸 알았다. 그의 프랑스어도 알아듣기 어려웠고, 수염이 입술 움직임을 가려서 입 모양을 보며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K.는 여러 불쾌한 일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당분간 그는 이탈리아인을 알아들으려는 걸 포기했다. 그를 그렇게 쉽게 알아듣는 은행장 앞에서 그러는 건 쓸데없는 수고였다. 그 대신 그는 언짢은 얼굴로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안락의자에 깊숙하면서도 가볍게 몸을 맡긴 모습, 짧고 날렵하게 재단한 윗옷을 자꾸 잡아당기는 모습, 한번은 두 팔을 쳐들고 손목을 느슨하게 흔들며 무언가를 흉내 내 보이려는 모습. K.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그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는데도 무얼 흉내 내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달리 할 일 없이 기계적으로 말이 오가는 쪽으로만 눈길을 옮기던 K.에게 아까의 피로가 몰려왔고, 한번은 정신이 없어서 막 일어나 돌아서서 나가 버리려던 참이었다는 걸 알아채고 깜짝 놀랐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마침내 이탈리아인이 시계를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는 은행장과 작별 인사를 하고 K.에게 바짝 다가왔는데, 어찌나 가까이 붙었던지 K.는 움직이려면 안락의자를 뒤로 밀어야 했다. 은행장은 이탈리아어 앞에서 K.가 얼마나 곤란한지 그의 눈빛을 보고 분명 알아챘을 것이다. 그는 대화에 끼어들었는데, 어찌나 영리하고 부드럽게 하는지 작은 조언만 곁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이탈리아인이 지칠 줄 모르고 그의 말에 끼어들며 내놓는 말을 모두 짧게 줄여 K.에게 알아듣게 해 주고 있었다. K.가 그에게서 들은 바로는, 이탈리아인이 당분간 볼일을 몇 가지 더 봐야 하고, 안타깝게도 전체적으로 시간이 별로 없을 것이며, 명소를 서둘러 다 돌아볼 생각은 결코 없고, 오히려 — 물론 K.가 동의한다면, 결정은 전적으로 K.에게 달렸다는데 — 대성당 하나만, 대신 꼼꼼히 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학식 있고 친절한 분과 함께 — K.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K.는 이탈리아인의 말은 흘려듣고 은행장의 말을 재빨리 알아듣는 데만 온통 매달려 있었다 — 구경하게 되어 무척 기쁘다고, 괜찮은 시간이라면 두 시간 뒤, 열 시쯤 대성당으로 와 달라고 했다. 자기도 그 시간이면 틀림없이 거기 가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K.가 거기에 맞게 몇 마디 대답하자, 이탈리아인은 먼저 은행장과, 다음에 K.와, 그리고 다시 은행장과 악수를 하고는 둘의 배웅을 받으며, 반만 그들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여전히 말을 그치지 않고 문 쪽으로 갔다. K.는 그 뒤로 은행장과 잠시 더 함께 있었다. 은행장은 오늘 유난히 아파 보였다. 그는 K.에게 어떻게든 변명해야 할 것 같았는지 — 둘은 허물없이 가까이 서 있었다 — 처음에는 자기가 이탈리아인과 함께 가려 했지만 그다음에 — 자세한 이유는 대지 않았다 — K.를 보내는 게 낫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이탈리아인의 말을 처음에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당황할 필요는 없다고, 금방 알아듣게 된다고, 설령 많이 알아듣지 못해도 그리 나쁠 건 없다고, 이탈리아인에게는 남이 자기 말을 알아듣는 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라고 했다. 그건 그렇고 K.의 이탈리아어는 놀랄 만큼 훌륭하니 틀림없이 멋지게 해낼 거라고 했다. 그것으로 K.는 물러났다. 아직 남은 시간은 대성당 안내에 필요한 드문 낱말들을 사전에서 뽑아 적으며 보냈다. 무척 성가신 일이었다. 심부름꾼들이 우편물을 가져왔고, 직원들이 이런저런 문의를 들고 왔다가 K.가 바쁜 걸 보고 문가에 멈춰 섰지만, K.가 말을 들어 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행장은 K.를 방해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주 들어와서 그의 손에서 사전을 빼앗아 아무 뜻 없이 뒤적였다. 문이 열리면 대기실의 어스름 속에 고객들까지 나타나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자기를 알아봐 주기를 바랐지만 눈에 띄었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K.를 한가운데 두고 그 둘레를 맴돌았다. 그동안 그는 필요한 낱말을 추리고, 사전에서 찾고, 적고, 발음을 연습하고, 마지막으로 외우려 애썼다. 그러나 예전의 좋은 기억력이 그를 완전히 버린 것 같았다. 가끔은 이런 수고를 끼치는 이탈리아인에게 너무 화가 나서, 더는 준비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사전을 서류 밑에 파묻었다. 그러다 대성당의 미술품 앞을 이탈리아인과 말없이 오갈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 더 큰 분노에 차서 다시 사전을 꺼냈다.
막 나가려던 아홉 시 반에 전화가 왔다. 레니가 아침 인사를 하며 잘 지내느냐고 물었다. K.는 서둘러 고맙다고 하고, 지금은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다고, 대성당에 가야 한다고 했다. "대성당에?" 레니가 물었다. "그래, 대성당에." "대성당엔 왜?" 레니가 말했다. K.가 짧게 설명하려는데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레니가 불쑥 말했다. "그자들이 너를 몰아대는 거야." 청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은 동정을 K.는 견디지 못했다. 그는 두 마디로 작별했지만, 수화기를 제자리에 걸면서 반은 자기에게, 반은 더는 듣지 못하는 먼 곳의 아가씨에게 말했다. "그래, 그자들이 나를 몰아대고 있어."
그런데 이제 벌써 늦어서 제때 도착하지 못할 위험까지 있었다. 그는 자동차를 타고 갔다. 마지막 순간에 아침에 건넬 기회가 없었던 사진첩이 생각나서 가지고 갔다. 그는 사진첩을 무릎에 놓고 가는 내내 불안하게 그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비는 약해졌지만 축축하고 서늘하고 어두웠다. 대성당에서는 별로 보이는 게 없을 테고, 차가운 돌바닥에 오래 서 있다 보면 K.의 감기는 몹시 나빠질 것이다.
대성당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K.는 어릴 때부터 이 좁은 광장의 집들이 늘 거의 모든 창에 커튼을 내리고 있는 게 눈에 띄었던 걸 떠올렸다. 오늘 같은 날씨에는 물론 여느 때보다 이해가 갔다. 대성당 안도 비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지금 여기 올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K.는 양쪽 옆 통로를 모두 둘러보았지만, 따뜻한 숄을 두르고 성모상 앞에 무릎 꿇고 그걸 올려다보는 노파 하나를 만났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멀리서 다리를 저는 성당지기 하나가 벽에 난 문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K.는 시간을 지켜 왔다. 그가 들어설 때 마침 열 시를 쳤다. 그러나 이탈리아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K.는 정문으로 돌아가 한동안 망설이며 서 있다가, 이탈리아인이 혹시 옆문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나 보려고 빗속에서 대성당을 한 바퀴 돌았다. 어디에도 없었다. 은행장이 시간을 잘못 알아들은 걸까? 하긴 그런 사람 말을 어떻게 제대로 알아듣겠는가. 어떻든 간에 K.는 우선 삼십 분은 그를 기다려야 했다. 피곤해서 앉고 싶었다. 그는 다시 대성당으로 들어가, 계단 위에서 양탄자 같은 작은 천 조각을 찾아 발끝으로 가까운 의자 앞으로 끌어다 놓고, 외투를 더 단단히 여미고 깃을 세운 뒤 앉았다. 기분을 돌리려고 사진첩을 펼쳐 조금 넘겨 보았지만 곧 그만두어야 했다. 어찌나 어두워졌던지, 눈을 들자 가까운 옆 통로의 세부조차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멀리 중앙 제단 위에서 촛불로 된 커다란 삼각형이 반짝였다. K.는 그걸 전에도 보았는지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제야 켜졌는지도 몰랐다. 성당지기들은 직업상 살금살금 다니는 사람들이라 눈에 띄지 않는다. 우연히 돌아보니 뒤쪽 멀지 않은 곳에 기둥에 붙인 높고 굵은 초 하나도 타고 있었다. 아름답기는 했지만, 대개 옆 제단들의 어둠 속에 걸린 제단화를 비추기에는 턱없이 모자랐고, 오히려 어둠을 더 짙게 했다. 이탈리아인이 오지 않은 건 무례한 만큼 분별 있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을 테고, K.의 손전등으로 그림 몇 점을 한 뼘씩 더듬어 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얼 기대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려고 K.는 가까운 작은 옆 예배실로 가서 계단 몇 칸을 올라 낮은 대리석 난간까지 가서는, 그 위로 몸을 숙여 손전등으로 제단화를 비추었다. 꺼지지 않는 등불이 그 앞에 거슬리게 흔들렸다. K.가 맨 처음 본, 그리고 일부는 짐작한 것은 그림 맨 가장자리에 그려진 갑옷 입은 큰 기사였다. 그는 앞의 맨땅에 — 풀잎 몇 가닥만 여기저기 돋아 있었다 — 꽂은 칼에 기대 있었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멈춰 선 채 다가가지 않는다는 게 놀라웠다. 어쩌면 파수를 서도록 정해진 사람인지도 몰랐다. 오랫동안 그림을 보지 못했던 K.는 손전등의 초록빛을 견디지 못해 자꾸 눈을 깜박이면서도 한참 그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불빛을 그림의 나머지 부분으로 옮기자 흔한 방식으로 그린 그리스도의 매장 장면이 나왔다. 그건 그렇고 근래의 그림이었다. 그는 손전등을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이탈리아인을 기다리는 건 아마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밖에는 틀림없이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을 테고, 여기는 K.가 생각한 만큼 춥지 않았기에 그는 당분간 여기 있기로 했다. 가까이에 큰 설교단이 있었다. 설교단의 작고 둥근 지붕 위에는 빈 금빛 십자가 두 개가 반쯤 누운 채 맨 끝이 서로 엇갈리게 달려 있었다. 난간 바깥 벽과 그것을 받치는 기둥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초록 잎 장식으로 되어 있었고, 거기 작은 천사들이 활기차게, 또는 쉬는 듯이 손을 뻗고 있었다. K.는 설교단 앞으로 가서 사방에서 살펴보았다. 돌을 다룬 솜씨가 더없이 꼼꼼했다. 잎 장식 사이와 그 뒤의 깊은 어둠은 붙잡혀 갇혀 있는 것 같았다. K.는 그런 틈에 손을 넣어 조심스레 돌을 더듬어 보았다. 이런 설교단이 있다는 걸 그는 여태 전혀 몰랐다. 그때 우연히 바로 다음 의자 줄 뒤에서 성당지기 하나가 늘어진 주름진 검은 옷을 입고, 왼손에 코담배 갑을 든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걸 보았다. 저 사람은 뭘 원하는 거지? K.는 생각했다. 내가 수상한가? 팁을 바라나? 그런데 성당지기는 K.가 자기를 알아챈 걸 보자, 두 손가락 사이에 아직 코담배 한 줌을 쥔 오른손으로 어딘지 모를 방향을 가리켰다. 그 태도는 거의 알 수 없었다. K.는 잠시 더 기다렸지만, 성당지기는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기를 그치지 않고 고개까지 끄덕이며 힘주어 가리켰다. "대체 뭘 원하는 거지?" K.는 나직이 물었다. 여기서 소리쳐 부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러고는 지갑을 꺼내 바로 앞 의자 줄을 헤치고 그 남자에게 가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곧바로 손을 저어 막는 몸짓을 하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절뚝거리며 가 버렸다. 이 서두르는 절뚝걸음과 비슷한 걸음으로 K.는 어릴 때 말 타는 흉내를 내 보곤 했다. 어린애 같은 노인이군, K.는 생각했다. 머리가 성당 일이나 볼 정도밖에 안 남았어. 내가 서면 저도 서고, 내가 계속 가려는지 엿보는 꼴이라니. K.는 웃으며 노인을 따라 옆 통로를 거의 끝까지, 중앙 제단 높이까지 갔다. 노인은 무언가를 가리키기를 그치지 않았지만 K.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그 손짓은 그를 노인의 뒤에서 떼어 놓으려는 것 말고는 아무 목적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정말로 노인을 놓아주었다. 너무 겁주고 싶지 않았고, 혹시 이탈리아인이 끝내 올 경우에 대비해 이 사람을 완전히 쫓아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사진첩을 두고 온 자리를 찾으려고 본당으로 들어서다가, 그는 성가대석 의자들과 거의 맞닿은 기둥에 붙은 작은 보조 설교단 하나를 보았다. 아무 꾸밈도 없는 창백한 맨돌로 된 아주 소박한 설교단이었다. 어찌나 작은지 멀리서 보면 조각상을 들여놓으려고 비워 둔 벽감처럼 보였다. 설교하는 사람은 난간에서 한 걸음도 제대로 물러설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설교단의 돌 천장은 유난히 낮은 데서 시작해서, 아무 장식도 없이, 그러나 굽이지며 위로 올라가서, 중간 키의 남자도 거기서 꼿꼿이 서지 못하고 줄곧 난간 너머로 몸을 숙이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모든 게 설교자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 같았다. 그렇게 공들여 꾸민 다른 큰 설교단이 있는데 이 설교단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위쪽에 설교 직전에 준비해 두곤 하는 램프가 달려 있지 않았다면 K.는 분명 이 작은 설교단도 눈여겨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설교가 있으려나? 텅 빈 성당에서? K.는 기둥에 바짝 붙어 설교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오르라고 만든 게 아니라 기둥을 꾸미려고 만든 것처럼 좁은 계단이었다. 그런데 설교단 아래에 — K.는 놀라서 웃었다 — 정말로 신부가 서서, 손을 난간에 얹고 올라갈 채비를 하며 K.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K.는 성호를 긋고 고개를 숙였다. 벌써 했어야 할 일이었다. 신부는 몸을 살짝 추어올리더니 짧고 빠른 걸음으로 설교단을 올라갔다. 정말로 설교가 시작되려는 걸까? 성당지기가 그렇게 정신이 나간 건 아니어서 K.를 설교자 쪽으로 몰아가려 했던 걸까? 텅 빈 성당에서는 물론 무척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어딘가 성모상 앞에 노파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 노파도 와야 했다. 그리고 설교를 하려면 왜 오르간으로 시작하지 않는 걸까? 그러나 오르간은 조용했고, 까마득히 높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날 뿐이었다.
K.는 지금 서둘러 떠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설교 도중에 떠날 수 있는 가망은 없었다. 그러면 설교가 끝날 때까지 있어야 했다. 사무실에서 그만큼 시간을 잃는 것이었고, 이탈리아인을 기다려야 할 의무는 벌써 오래전에 끝났다. 시계를 보니 열한 시였다. 그런데 정말로 설교를 할 수 있을까? K. 혼자서 신자들을 대신할 수 있을까? 그가 그저 성당을 구경하러 온 이방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사실 그도 그 이상은 아니었다. 평일 열한 시에, 이렇게 지독한 날씨에 설교를 하리라고 생각하는 건 터무니없었다. 신부는 — 틀림없이 신부였다. 매끈하고 거무스름한 얼굴의 젊은 남자였다 — 아마 잘못 켜진 램프를 끄려고 올라가는 것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신부는 오히려 불을 살펴보더니 심지를 조금 더 올리고는, 천천히 난간 쪽으로 돌아서서 앞쪽의 모난 테두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렇게 한동안 서서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둘러보았다. K.는 한참 뒤로 물러나 맨 앞 의자에 팔꿈치를 기대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는, 어딘지 정확히 짚지는 못했지만, 성당지기가 일을 다 마친 듯 굽은 등으로 평화롭게 웅크리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대성당은 얼마나 고요한가! 그러나 K.는 그 고요를 깨야 했다. 여기 머물 생각은 없었다. 형편이야 어떻든 정해진 시간에 설교하는 게 신부의 의무라면 하라지. K.가 거들지 않아도 잘될 것이고, K.가 있다고 효과가 더 커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K.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자를 따라 발끝으로 더듬어 가다가 넓은 중앙 통로로 나왔고, 거기서도 아무 방해 없이 걸었다. 다만 아무리 살짝 디뎌도 돌바닥이 울렸고, 둥근 천장들이 희미하지만 끊임없이, 여러 겹으로, 규칙적으로 이어지며 그 소리를 되울렸다. 어쩌면 신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빈 의자들 사이를 혼자 지나가자니 K.는 조금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대성당의 크기도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딱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아까 앉았던 자리에 이르자 그는 그야말로 머뭇거리지도 않고 거기 두고 온 사진첩을 낚아채 챙겼다. 의자들이 늘어선 곳을 거의 벗어나 의자들과 출구 사이의 빈터로 다가갈 때, 그는 처음으로 신부의 목소리를 들었다. 힘차고 단련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받아들일 채비가 된 대성당을 얼마나 꿰뚫고 퍼져 나갔는지! 그러나 신부가 부르는 건 신자들이 아니었다. 아주 분명했고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그는 외쳤다. 요제프 K.!
K.는 멈칫하고 앞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당분간은 아직 자유로웠다. 그는 계속 걸어가서 멀지 않은 앞쪽의 작고 어두운 나무 문 세 개 가운데 하나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건 그저 못 알아들었거나, 알아들었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돌아선다면 그는 붙잡힌다. 그러면 잘 알아들었다고, 자기가 정말 부름받은 사람이라고, 따를 생각도 있다고 자백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신부가 한 번 더 불렀다면 K.는 틀림없이 가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K.가 아무리 기다려도 모든 게 조용하자, 그는 신부가 지금 무얼 하는지 보고 싶어서 결국 고개를 조금 돌렸다. 신부는 아까처럼 설교단에 조용히 서 있었지만, K.가 고개를 돌린 걸 알아챘다는 게 뚜렷이 보였다. 이제 K.가 완전히 돌아서지 않는다면 어린애 같은 숨바꼭질이 될 것이다. 그는 돌아섰고, 신부는 손가락을 까딱여 그를 가까이 불렀다. 이제 모든 게 드러내 놓고 일어날 수 있었기에, 그는 — 호기심에서, 그리고 일을 짧게 끝내려고 — 성큼성큼 날듯이 설교단 쪽으로 달려갔다. 맨 앞 의자들에서 멈춰 섰지만, 신부에게는 거리가 아직 먼 것 같았다. 신부는 손을 뻗어 날카롭게 내리꽂은 집게손가락으로 설교단 바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K.는 그것도 따랐다. 그 자리에서 신부를 보려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했다. "자네가 요제프 K.로군." 신부가 말하며 난간 위에서 한 손을 어정쩡하게 들어 올렸다. "네." K.가 말했다. 그는 예전엔 늘 얼마나 거리낌 없이 제 이름을 댔던가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이름이 짐이 되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이제 그의 이름을 알았다. 먼저 자기를 소개하고 그다음에야 알려지는 게 얼마나 좋았던가. "자네는 기소되었지." 신부가 유난히 나직하게 말했다. "네." K.가 말했다. "그렇게 통지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찾는 사람이 자네로군." 신부가 말했다. "나는 교도소 신부일세." "아, 그러시군요." K.가 말했다. "자네와 이야기하려고 여기로 불렀네." 신부가 말했다. "몰랐습니다." K.가 말했다. "저는 이탈리아 사람에게 대성당을 보여 주려고 왔습니다." "곁가지 일은 놔두게." 신부가 말했다. "손에 든 게 뭔가? 기도서인가?" "아닙니다." K.가 대답했다. "시내 명소 사진첩입니다." "내려놓게." 신부가 말했다. K.가 어찌나 세게 내던졌던지 사진첩은 펼쳐져서 구겨진 종이들을 매단 채 바닥을 한참 미끄러졌다. "자네 소송이 좋지 않다는 걸 아나?" 신부가 물었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K.가 말했다. "온갖 애를 썼지만 여태 성과가 없습니다. 물론 청원서는 아직 다 쓰지 못했고요." "끝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나?" 신부가 물었다. "전에는 틀림없이 잘 끝나리라 생각했습니다." K.가 말했다. "이제는 저도 가끔 의심이 듭니다.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어요. 신부님은 아십니까?" "모르네." 신부가 말했다. "하지만 나쁘게 끝날까 봐 걱정이네. 사람들은 자네에게 죄가 있다고 보네. 자네 소송은 어쩌면 낮은 법원을 아예 넘어가지도 못할 걸세. 적어도 당분간은 자네 죄가 입증되었다고 여기고 있네." "하지만 저는 죄가 없습니다." K.가 말했다. "착오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여기 우리는 모두 사람이잖습니까. 누구나 똑같이." "그건 맞네." 신부가 말했다. "하지만 죄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말하지." "신부님도 저에게 선입견이 있으십니까?" K.가 물었다. "자네에게 선입견은 없네." 신부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K.가 말했다. "하지만 절차에 관여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에게 선입견이 있습니다.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그걸 불어넣고요. 제 처지는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사실을 잘못 보고 있네." 신부가 말했다. "판결은 한꺼번에 내려지는 게 아니야. 절차가 차츰 판결로 넘어가는 걸세." "그렇군요." K.는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자네 일에서 무엇을 하려나?" 신부가 물었다. "도움을 더 찾아보려고 합니다." K.는 말하며 신부가 그걸 어떻게 보는지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아직 써 보지 않은 가능성이 몇 가지 있습니다." "자네는 남의 도움을 너무 찾네." 신부가 못마땅해하며 말했다. "특히 여자들에게서. 그게 참된 도움이 아니라는 걸 모르겠나?" "가끔은, 아니 자주 신부님 말씀이 옳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K.가 말했다.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자들에게는 큰 힘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여자 몇을 설득해서 함께 저를 위해 뛰게 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뚫고 나갈 겁니다. 특히 거의 여자 사냥꾼들로만 이루어진 이 법원에서는요. 심문 판사에게 멀리서 여자 하나만 보여 줘 보십시오. 늦지 않으려고 재판 탁자며 피고인이며 다 밀치고 달려갈 겁니다." 신부는 난간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설교단 지붕이 그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밖은 대체 어떤 날씨일까? 이건 더는 흐린 날이 아니라 벌써 깊은 밤이었다. 큰 창문들의 어떤 스테인드글라스도 어두운 벽을 한 줄기 빛으로라도 끊어 놓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성당지기가 중앙 제단의 초를 하나씩 끄기 시작했다. "화나셨습니까?" K.가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은 어떤 법원을 섬기고 계신지 모르시는지도 모릅니다." 대답이 없었다. "제 경험일 뿐입니다." K.가 말했다. 위에서는 여전히 조용했다. "모욕하려던 건 아닙니다." K.가 말했다. 그때 신부가 K.에게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두 걸음 앞도 안 보이나?" 화가 나서 지른 소리였지만, 동시에 누군가 넘어지는 걸 보고 자기가 놀라서 저도 모르게 조심성 없이 지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둘은 오래 말이 없었다. 아래의 어둠 속에서 신부는 분명 K.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K.는 작은 램프 불빛 속의 신부를 또렷이 볼 수 있었지만. 신부는 왜 내려오지 않을까? 설교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K.에게 몇 가지를 알려 주었을 뿐이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아마 득보다 해가 더 클 것이다. 그러나 K.는 신부의 선의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신부가 내려온다면 서로 뜻이 맞을지도 몰랐다. 결정적이고 받아들일 만한 조언을 들을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소송을 어떻게 움직일지가 아니라, 소송에서 어떻게 빠져나올지, 어떻게 소송을 비켜 갈지, 어떻게 소송 바깥에서 살 수 있을지를 알려 주는 조언을. 그런 가능성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K.는 요즘 자주 그걸 생각했다. 신부가 그런 가능성을 안다면, 청하면 어쩌면 알려 줄지도 몰랐다. 그 자신이 법원에 속해 있고, K.가 법원을 공격하자 온화한 성품을 누르고 K.에게 소리까지 질렀는데도.
"내려오시지 않겠습니까?" K.가 말했다. "설교할 것도 없잖습니까. 저한테 내려오세요." "이제는 내려가도 되겠군." 신부가 말했다. 소리친 걸 후회하는지도 몰랐다. 고리에서 램프를 떼어 내며 그가 말했다. "먼저 멀리서 자네와 이야기해야 했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너무 쉽게 흔들려서 내 직분을 잊거든."
K.는 계단 아래에서 그를 기다렸다. 신부는 내려오면서 벌써 위쪽 계단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한테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K.가 물었다. "자네에게 필요한 만큼." 신부가 말하며 작은 램프를 K.에게 건네 들게 했다. 가까이서도 그의 몸가짐에서는 어떤 엄숙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저한테 무척 친절하시군요." K.가 말했다. 둘은 어두운 옆 통로를 나란히 오갔다. "법원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신부님만은 예외입니다. 벌써 많은 사람을 알지만 그 누구보다 신부님을 믿습니다. 신부님과는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착각하지 말게." 신부가 말했다. "제가 무엇을 착각한다는 겁니까?" K.가 물었다. "법원을 착각하고 있네." 신부가 말했다. "법의 머리말 격인 경전에 이 착각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네. 법 앞에 문지기가 서 있다. 이 문지기에게 시골에서 한 사람이 와서 법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들여보내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곰곰 생각하더니, 그럼 나중에는 들어가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럴 수도 있지." 문지기가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늘 그렇듯 열려 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서니, 그 사람은 문 안쪽을 들여다보려고 몸을 숙인다. 문지기는 그걸 보고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 끌린다면 내가 막는데도 들어가 보렴. 하지만 알아 둬라. 나는 힘이 세다. 그리고 나는 가장 낮은 문지기일 뿐이다. 방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뒤로 갈수록 더 힘이 세다. 세 번째 문지기는 나조차 쳐다보기도 힘들다." 시골 사람은 이런 어려움을 예상하지 못했다. 법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모피 외투를 입은 문지기를, 그 크고 뾰족한 코와 길고 가늘고 검은 타타르식 수염을 이제 자세히 뜯어보더니,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먹는다. 문지기는 그에게 걸상을 하나 주고 문 옆에 앉게 한다. 거기서 그는 여러 날, 여러 해를 앉아 있다. 들어가려고 여러 번 애쓰고, 부탁을 거듭해서 문지기를 지치게 한다. 문지기는 자주 그에게 짧은 심문 같은 걸 한다. 고향이 어디냐, 이것저것 묻는다. 그러나 높은 양반들이 던지는 것 같은 무심한 물음들이고, 끝에 가서는 늘 아직은 들여보내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여행을 떠나며 이것저것 많이 챙겨 온 그 사람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모두 문지기에게 뇌물로 준다. 문지기는 다 받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언가 해 보지 않은 게 있다고 여기지 않게 하려고 받아 두는 것뿐이다." 여러 해 동안 그 사람은 거의 쉬지 않고 문지기를 지켜본다. 다른 문지기들은 잊어버리고, 이 첫 번째 문지기가 법으로 들어가는 데 유일한 걸림돌인 것 같다. 그는 이 불운을 처음 몇 해 동안은 큰 소리로 저주하다가, 나중에 늙어서는 혼자 중얼거릴 뿐이다. 그는 어린애처럼 되고, 여러 해 동안 문지기를 뜯어보다가 모피 깃에 붙은 벼룩까지 알아보게 되어, 벼룩들에게도 자기를 도와 문지기의 마음을 돌려 달라고 빈다. 마침내 그의 눈이 흐려지고, 그는 정말로 주위가 어두워지는 건지 눈이 자기를 속이는 건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그는 어둠 속에서 법의 문으로부터 꺼지지 않고 터져 나오는 빛을 알아본다. 이제 그는 오래 살지 못한다. 죽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서 그동안의 모든 경험이 하나의 물음으로 모인다. 여태 문지기에게 한 번도 던지지 않은 물음이다. 굳어 가는 몸을 더는 일으킬 수 없어서 그는 문지기에게 손짓한다. 문지기는 그에게 깊이 몸을 숙여야 한다. 둘의 키 차이가 그 사람에게 몹시 불리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또 뭘 알고 싶은 거냐?" 문지기가 묻는다. "넌 만족할 줄을 모르는구나." "모두가 법을 찾아오는데," 그 사람이 말한다. "어째서 그 여러 해 동안 나 말고는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문지기는 그 사람이 이미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걸 알아보고, 사라져 가는 그의 귀에 아직 닿도록 소리쳐 말한다. "여기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이 입구는 너만을 위해 정해진 것이었으니까. 이제 나는 가서 문을 닫겠다."
"그러니까 문지기가 그 사람을 속였군요." 이야기에 몹시 끌린 K.가 곧바로 말했다. "서두르지 말게." 신부가 말했다. "남의 생각을 따져 보지도 않고 받아들이지 말게. 나는 경전에 적힌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네. 거기에는 속였다는 말은 없어." "하지만 분명하지 않습니까." K.가 말했다. "그리고 신부님의 첫 해석이 완전히 맞았어요. 문지기는 그 사람을 구원할 말을, 이미 그 사람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때에야 했으니까요." "그 전에는 아무도 묻지 않았네." 신부가 말했다. "그리고 그가 문지기일 뿐이었다는 걸 생각하게. 문지기로서 그는 제 의무를 다했네." "왜 그가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십니까?" K.가 물었다. "다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낯선 사람을 모두 막는 게 그의 의무였겠지요. 하지만 그 입구가 정해져 있던 이 사람은 들여보냈어야 했어요." "자네는 경전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고 이야기를 바꾸고 있네." 신부가 말했다. "이야기에는 법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관해 문지기가 한 중요한 말이 두 번 나오네. 한 번은 처음에, 한 번은 끝에. 하나는 지금은 들여보내 줄 수 없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입구는 너만을 위해 정해진 것이었다는 말일세. 이 두 말 사이에 모순이 있다면 자네가 옳고 문지기가 그 사람을 속인 셈이겠지. 그런데 모순이 없네. 오히려 첫 번째 말이 두 번째 말을 넌지시 가리키기까지 하지. 문지기가 앞으로 들어갈 가능성을 그 사람에게 내비친 걸 보면, 그가 제 의무를 넘어섰다고까지 할 수 있네. 그때 그의 의무는 그 사람을 돌려보내는 것뿐이었던 것 같거든. 실제로 경전을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이 문지기가 그런 암시를 했다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네. 그는 정확한 걸 좋아하고 제 직무를 엄하게 지키는 것 같으니까. 여러 해 동안 그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맨 마지막에야 문을 닫네. 그는 제 직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네. '나는 힘이 세다'고 하니까. 그는 윗사람들을 경외하네. '나는 가장 낮은 문지기일 뿐이다'라고 하니까. 그는 수다스럽지 않네. 그 여러 해 동안 적혀 있듯이 '무심한 물음'만 던지니까. 그는 뇌물에 넘어가지 않네. 선물을 두고 '네가 무언가 해 보지 않은 게 있다고 여기지 않게 하려고 받아 두는 것뿐'이라고 하니까. 그는 의무를 다하는 일에서는 마음이 흔들리지도 화가 나지도 않네. 그 사람에 대해 '부탁을 거듭해서 문지기를 지치게 한다'고 적혀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그의 겉모습도, 그 크고 뾰족한 코와 길고 가늘고 검은 타타르식 수염도 꼼꼼한 성격을 보여 주네. 이보다 의무에 충실한 문지기가 있을 수 있겠나? 그런데 문지기에게는 다른 성품도 섞여 있네. 들어가려는 사람에게 무척 유리한 성품이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의무를 조금 넘어설 수 있었던 까닭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해 주는 성품이지. 그가 조금 단순하고, 그와 맞물려 조금 우쭐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네. 자기 힘에 대해, 다른 문지기들의 힘에 대해, 자기조차 쳐다보기 힘들다는 그들의 모습에 대해 한 말이 — 그 말이 모두 그 자체로는 옳다 해도, 그 말을 늘어놓는 방식을 보면 그의 생각이 단순함과 우쭐함으로 흐려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네. 해석자들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네. '어떤 일을 옳게 이해하는 것과 그 일을 잘못 이해하는 것은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 단순함과 우쭐함이, 아무리 대수롭지 않게 드러나더라도, 입구를 지키는 일을 약하게 만든다고 보아야 하네. 문지기의 성격에 난 틈이지. 게다가 문지기는 타고난 성품이 다정한 것 같네. 늘 관리 노릇만 하는 게 결코 아니야. 처음부터 그는 금지를 분명히 유지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들어가 보라고 농담을 하고, 그러고는 그를 쫓아 보내기는커녕 적혀 있듯이 걸상을 주어 문 옆에 앉게 하네. 그 여러 해 동안 그 사람의 부탁을 참아 내는 인내, 짧은 심문들, 선물을 받는 것, 문지기를 여기 세워 둔 불운을 그 사람이 곁에서 큰 소리로 저주하도록 두는 너그러움 — 이 모든 게 동정심이 움직였음을 짐작하게 하네. 모든 문지기가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걸세.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손짓 한 번에 그 사람에게 깊이 몸을 숙여 마지막 물음을 던질 기회를 주네. '넌 만족할 줄을 모르는구나'라는 말에만 가벼운 조바심이 — 문지기는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아니까 — 드러날 뿐이지. 어떤 이들은 이런 해석을 더 밀고 나가서, '넌 만족할 줄을 모르는구나'라는 말이 일종의 다정한 감탄을 나타낸다고까지 하네. 물론 내려다보는 기색이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보면 문지기의 모습은 자네가 믿는 것과 다르게 완성되네." "신부님은 저보다 그 이야기를 더 잘, 더 오래 아셨군요." K.가 말했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K.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속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를 오해하지 말게." 신부가 말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두고 나온 의견들을 보여 줄 뿐이네. 의견에 너무 마음 쓰지 말게. 경전은 바뀌지 않고, 의견들은 그 앞에서의 절망을 드러낼 뿐인 경우가 많네. 이 경우엔 오히려 바로 문지기가 속은 사람이라는 의견까지 있네." "대담한 의견이군요." K.가 말했다. "근거가 뭡니까?" "근거는," 신부가 대답했다. "문지기의 단순함에서 출발하네. 그는 법의 안쪽을 모르고, 입구 앞에서 늘 되풀이해 오가야 하는 길만 안다는 거야. 그가 안쪽에 대해 품은 생각은 어린애 같다고 여기고, 그가 그 사람에게 겁주려는 것을 그 자신이 두려워한다고 보네. 아니, 그 사람보다 더 두려워한다고. 그 사람은 안쪽의 무시무시한 문지기들 이야기를 듣고도 들어가고 싶어 할 뿐이지만, 문지기는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 물론 다른 이들은 그가 이미 안쪽에 들어가 봤을 게 틀림없다고 하네. 그도 한때는 법을 섬기도록 받아들여졌을 텐데, 그건 안쪽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지. 거기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네. 그는 안쪽에서 부르는 소리로 문지기에 임명되었을 수도 있고, 적어도 안쪽 깊이 들어가 보지는 않았을 거라고.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조차 벌써 견딜 수 없다고 하니까. 게다가 그 여러 해 동안 문지기들에 대해 한 말 말고는 안쪽에 대해 무엇 하나 이야기했다는 대목도 없네. 금지되었을 수도 있지만,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지.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그는 안쪽의 모습과 뜻을 전혀 모르고 거기에 대해 착각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네. 그런데 그는 시골 사람에 대해서도 착각하고 있다고 하네. 그는 이 사람보다 아래에 있는데 그걸 모른다는 거야. 그가 그 사람을 아랫사람처럼 대한다는 건 자네도 아직 기억할 여러 대목에서 알 수 있네. 그런데 이 의견에 따르면 그가 실제로는 그 사람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도 똑같이 뚜렷하다는 거야.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람이 매인 사람보다 위에 있네. 그런데 그 사람은 실제로 자유롭네. 가고 싶은 데로 갈 수 있고, 법으로 들어가는 것만 금지되어 있는데, 그것도 단 한 사람, 문지기에게서 금지되었을 뿐이지. 그가 문 옆 걸상에 앉아 평생을 거기 머문다면 그건 스스로 원해서지. 이야기에는 아무 강제도 나오지 않네. 반대로 문지기는 직무 때문에 제자리에 매여 있네. 바깥으로 떠나서도 안 되고, 겉보기로는 원한다 해도 안쪽으로 들어가서도 안 되네. 게다가 그는 법을 섬기기는 하지만 이 입구 하나만을 위해, 그러니까 이 입구가 오로지 정해져 있는 이 사람만을 위해 섬기네. 이 까닭으로도 그는 그 사람보다 아래에 있는 거지. 그는 여러 해 동안, 한 사내의 한창때 내내 말하자면 빈 직무만 수행했다고 보아야 하네. 한 사람이, 그러니까 한창때의 사내가 온다고 했으니, 문지기는 제 목적이 이루어지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했고, 그것도 제 발로 온 그 사람이 내킬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거지. 직무의 끝도 그 사람의 생이 끝나는 데 따라 정해지니, 끝까지 그는 그 사람보다 아래에 있는 셈이네. 그리고 문지기는 이 모든 걸 전혀 모르는 것 같다는 점이 거듭 강조되네. 그런데 거기서 별로 이상한 점을 보지 않는 까닭은, 이 의견에 따르면 문지기가 훨씬 더 무거운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네. 그의 직무에 관한 착각이지. 마지막에 그는 입구에 대해 '이제 나는 가서 문을 닫겠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법으로 들어가는 문이 늘 그렇듯 열려 있다고 되어 있네. 그런데 문이 늘, 그러니까 그 문이 정해져 있는 사람의 생애와 상관없이 열려 있다면 문지기도 닫을 수 없을 걸세. 문지기가 문을 닫겠다고 알린 게 그저 대답을 한 건지, 자기 직무를 내세운 건지, 마지막 순간에 그 사람을 후회와 슬픔에 빠뜨리려 한 건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네. 그러나 그가 문을 닫을 수 없으리라는 데는 많은 이가 동의하네. 적어도 끝에 가서는 그가 아는 것에서도 그 사람보다 아래에 있다고까지 믿지. 그 사람은 법의 입구에서 터져 나오는 빛을 보지만, 문지기는 문지기로서 아마 입구를 등지고 서 있을 테고,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는 말도 전혀 없으니까." "근거가 탄탄하군요." 신부의 설명 가운데 몇 대목을 혼자 나직이 되뇌던 K.가 말했다. "근거가 탄탄하고, 이제 저도 문지기가 속았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제 전의 생각을 버린 건 아닙니다. 둘이 어느 정도 겹치니까요. 문지기가 똑똑히 보든 속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속았다고 했습니다. 문지기가 똑똑히 본다면 그걸 의심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문지기가 속았다면, 그 착각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옮겨 갑니다. 그러면 문지기는 사기꾼은 아니지만, 당장 직무에서 쫓겨나야 할 만큼 어리석은 거지요. 문지기가 빠진 착각은 문지기 자신에게는 아무 해도 끼치지 않지만 그 사람에게는 천 배의 해를 끼친다는 걸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자네는 반대 의견에 부딪히네." 신부가 말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가 누구에게도 문지기를 판단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고 하네.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든 그는 법의 종이니, 법에 속해 있고, 그러니 사람의 판단 밖에 있다는 거야. 그렇다면 문지기가 그 사람보다 아래에 있다고 믿어서도 안 되지. 직무로 법의 입구에만 매여 있다 해도, 그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일이네. 그 사람은 이제야 법으로 오는 거지만, 문지기는 이미 거기 있네. 그는 법이 직무에 세운 사람이니, 그의 자격을 의심하는 건 법을 의심하는 것이라는 거지."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K.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의견을 따르면 문지기가 하는 말은 모두 참이라고 여겨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신부님이 직접 자세히 밝히셨잖습니까." "아닐세." 신부가 말했다. "모든 걸 참이라고 여길 필요는 없네. 필연이라고 여기기만 하면 되네." "서글픈 의견이군요." K.가 말했다. "거짓이 세상의 질서가 되는군요."
K.는 끝맺듯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그의 최종 판단은 아니었다. 그는 이야기에서 나오는 모든 결론을 헤아리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이야기가 이끄는 생각의 길은 익숙하지 않았다. 현실 같지 않은 것들이라, 그보다는 법원 관리들끼리 의논하기에 더 알맞았다. 단순한 이야기가 형체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그걸 떨쳐 내고 싶었고, 이제 큰 배려를 보여 준 신부는 그걸 받아 주며 K.의 말을 말없이 받아들였다. 그 말이 분명 자기 생각과 같지 않았는데도.
둘은 한동안 말없이 계속 걸었다. K.는 어둠 속에서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신부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손에 든 램프는 벌써 오래전에 꺼져 있었다. 한번은 바로 앞에서 성인의 은빛 조각상이 은빛으로만 반짝하더니 곧 어둠 속으로 넘어갔다. 신부에게만 완전히 기대지 않으려고 K.가 물었다. "지금 정문 근처 아닙니까?" "아닐세." 신부가 말했다. "한참 멀리 있네. 벌써 가려고?" 마침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도 K.는 곧바로 말했다. "그럼요, 가야 합니다. 저는 은행 간부이고, 사람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외국 사업 파트너에게 대성당을 보여 주려고 왔을 뿐입니다." "그럼," 신부가 말하며 K.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게." "하지만 어두워서 혼자서는 길을 못 찾겠습니다." K.가 말했다. "왼쪽 벽으로 가게." 신부가 말했다. "그다음엔 벽을 떠나지 말고 계속 벽을 따라가면 출구가 나올 걸세." 신부가 겨우 몇 걸음 멀어졌을 때 K.가 벌써 아주 크게 외쳤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기다리고 있네." 신부가 말했다. "저한테 더 바라시는 건 없습니까?" K.가 물었다. "없네." 신부가 말했다. "아까는 저한테 그렇게 친절하게 다 설명해 주시더니," K.가 말했다. "이제는 제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저를 보내시는군요." "자네가 가야 하지 않나." 신부가 말했다. "그렇지요." K.가 말했다. "그걸 좀 알아주세요." "자네가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지." 신부가 말했다. "교도소 신부시죠." K.가 말하며 신부에게 더 다가갔다. 곧바로 은행에 돌아가야 한다는 건 그가 말한 만큼 급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 더 있어도 괜찮았다. "그러니까 나는 법원에 속해 있네." 신부가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왜 자네에게 무엇을 바라겠나. 법원은 자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네. 자네가 오면 받아들이고, 자네가 가면 보내 줄 뿐이네."
끝
서른한 번째 생일 전날 저녁 — 밤 아홉 시쯤, 거리가 고요해지는 때였다 — 신사 둘이 K.의 집에 왔다. 프록코트를 입고, 창백하고 뚱뚱했으며, 절대 벗겨지지 않을 것 같은 실크해트를 쓰고 있었다. 현관문에서 누가 먼저 들어가느냐를 두고 작은 예의를 차리더니, K.의 방문 앞에서 같은 예의를 더 길게 되풀이했다. 방문이 온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도 K.는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고 문 가까이 안락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자세로 손가락에 꼭 끼는 새 장갑을 천천히 끼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 신사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나를 맡은 사람들이군요." 그가 물었다. 신사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 사람이 손에 든 실크해트로 다른 사람을 가리켰다. K.는 다른 손님을 기다렸다는 걸 스스로 인정했다. 그는 창가로 가서 어두운 거리를 한 번 더 내다보았다. 길 건너편의 창도 거의 다 아직 어두웠고, 커튼을 내린 창이 많았다. 불 켜진 어느 층의 창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난간 뒤에서 함께 놀면서, 아직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채로 작은 손으로 서로를 더듬고 있었다. 늙은 삼류 배우들을 나한테 보냈군, K.는 혼잣말을 하며 그걸 한 번 더 확인하려고 둘러보았다. 싸구려로 나를 해치우려는 거야. K.는 갑자기 그들에게 돌아서서 물었다. "어느 극장에서 연기하십니까?" "극장이라뇨?" 한 신사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다른 신사에게 도움을 청하듯 물었다. 다른 신사는 말을 듣지 않는 몸뚱이와 씨름하는 벙어리처럼 굴었다. 질문받을 준비는 안 되어 있군, K.는 혼잣말을 하고 모자를 가지러 갔다.
벌써 계단에서 신사들이 K.와 팔짱을 끼려 했지만 K.가 말했다. "거리에 나가서요. 나는 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문 바로 앞에서 그들은 K.가 여태 누구와도 걸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팔을 끼었다. 그들은 어깨를 그의 어깨 바로 뒤에 바짝 붙이고, 팔을 굽히지 않고 K.의 팔을 그 길이 그대로 휘감는 데 썼으며, 아래에서는 훈련된, 익숙한, 뿌리칠 수 없는 손아귀로 K.의 손을 붙잡았다. K.는 몸을 꼿꼿이 편 채 그들 사이에서 걸었다. 이제 셋은 하나로 뭉쳐서, 그중 하나를 부수면 모두가 부서졌을 것이다. 거의 생명 없는 것들만 이룰 수 있는 그런 하나됨이었다.
가로등 밑에서 K.는, 이렇게 바짝 붙어서는 쉽지 않았지만, 자기 방의 어스름 속에서보다 동행들을 더 똑똑히 보려고 몇 번 애썼다. 어쩌면 테너 가수들인지도 모르겠군, 그는 그들의 묵직한 이중 턱을 보며 생각했다. 그들 얼굴의 깨끗함이 역겨웠다. 눈가를 훔치고, 윗입술을 문지르고, 턱의 주름을 긁어낸 씻어 주는 손길이 그야말로 아직 보이는 것 같았다.
K.는 그걸 알아채자 멈춰 섰고, 그러자 다른 둘도 멈춰 섰다. 그들은 꽃밭으로 꾸민, 사람 하나 없는 빈 광장 가장자리에 있었다. "왜 하필 당신들을 보냈단 말이오!" 그는 묻는다기보다 외쳤다. 신사들은 대답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환자가 쉬고 싶어 할 때의 간병인처럼, 남은 팔을 늘어뜨린 채 기다렸다. "더는 안 가겠소." K.가 떠보듯 말했다. 신사들은 거기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손아귀를 늦추지 않고 K.를 그 자리에서 들어 옮기려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K.는 버텼다. 이제 힘을 많이 쓸 일도 없을 테니 남은 힘을 다 쓰겠다, 그는 생각했다. 끈끈이 막대에서 다리가 찢어지며 벗어나려 버둥대는 파리들이 떠올랐다. 이 신사들, 힘깨나 쓰겠군.
그때 그들 앞에, 낮은 골목에서 작은 계단을 올라 뷔르스트너 양이 광장으로 올라왔다. 정말 그 여자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무척 닮았다. 그러나 K.에게는 그게 틀림없이 뷔르스트너 양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다만 자기가 버티는 게 아무 값어치가 없다는 게 곧바로 뚜렷해졌을 뿐이다. 버티는 것, 지금 신사들을 애먹이는 것, 지금 맞서면서 삶의 마지막 빛을 누려 보려는 것에는 아무런 영웅다움도 없었다. 그는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신사들에게 준 기쁨이 조금은 그에게도 옮아왔다. 이제 그들은 그가 길을 정하게 두었고, 그는 그 아가씨가 앞서 가는 길을 따라 길을 정했다. 그 여자를 따라잡으려는 것도, 되도록 오래 보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 여자가 자기에게 뜻하는 경고를 잊지 않으려는 것뿐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는, 그는 혼잣말을 했다. 그의 걸음과 다른 두 사람의 걸음이 고르게 맞는 것이 그의 생각을 확인해 주었다. 지금 내가 하는 단 하나는, 끝까지 차분히 헤아리는 분별을 지키는 것이다. 나는 늘 스무 개의 손으로 세상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것도 옳다고 할 수 없는 목적으로. 그건 잘못이었다. 이제 와서 한 해 동안의 소송조차 나를 가르치지 못했다는 걸 보여 주어야 하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으로 떠나야 하나? 소송이 시작될 때는 끝내려 하고, 이제 끝에 와서는 다시 시작하려 한다는 말을 들어야 하나?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이 길에 이렇게 반쯤 벙어리인,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신사들을 딸려 보내 주어서, 그리고 필요한 말은 나 스스로에게 하도록 맡겨 주어서 고맙다.
그사이 아가씨는 옆 골목으로 꺾어 들었지만, K.는 이제 그 여자 없이도 되었고 동행들에게 몸을 맡겼다. 이제 셋은 완전히 한마음이 되어 달빛 속의 다리를 건넜다. K.가 조금만 움직여도 신사들은 기꺼이 따라 주었다. 그가 난간 쪽으로 조금 몸을 돌리자 그들도 온몸을 그쪽으로 돌렸다. 달빛에 반짝이며 떨리는 물이 작은 섬을 둘러 갈라져 흘렀고, 섬에는 나무와 덤불의 잎사귀 더미가 떼 지어 쌓여 있었다. 그 밑으로,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편한 벤치가 놓인 자갈길들이 나 있었다. 여러 해 여름에 K.가 거기서 몸을 쭉 뻗고 기지개를 켜곤 했다. "멈춰 서려던 건 아니었소." 그들이 선뜻 따라 주는 게 부끄러워서 그가 동행들에게 말했다. 한 사람이 K.의 등 뒤에서 오해를 부른 멈춤을 두고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나무라는 것 같더니, 그들은 다시 걸었다.
그들은 오르막 골목 몇 개를 지났다. 여기저기 경찰들이 서 있거나 걸어 다녔다. 멀리서, 때로는 바로 가까이서. 덥수룩한 콧수염을 기르고 손을 칼자루에 얹은 경찰 하나가 일부러 그러는 듯 아주 수상쩍지 않다고는 할 수 없는 이 무리 가까이 다가왔다. 신사들이 멈칫했고, 경찰이 벌써 입을 열려는 것 같았다. 그때 K.가 있는 힘껏 신사들을 앞으로 끌고 갔다. 그는 경찰이 따라오지 않나 여러 번 조심스레 돌아보았다. 그러다 경찰과 자기들 사이에 모퉁이 하나가 생기자 K.는 달리기 시작했고, 신사들도 숨이 몹시 찼지만 함께 달려야 했다.
그렇게 그들은 금세 도시를 벗어났다. 이쪽으로 가면 도시는 거의 끊김 없이 곧바로 들판으로 이어졌다. 아직 완전히 도시의 집 같은 건물 가까이에 버려진 황량한 작은 채석장이 있었다. 여기서 신사들은 멈춰 섰다. 처음부터 이곳이 목적지였는지, 너무 지쳐서 더 달릴 수 없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이제 그들은 말없이 기다리는 K.를 놓아주고, 실크해트를 벗고 채석장을 둘러보며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사방에 달빛이 깔려 있었다. 다른 어떤 빛에도 없는 자연스러움과 고요함으로.
다음 일은 누가 맡을지를 두고 몇 마디 예의를 주고받더니 — 신사들은 임무를 나누지 않고 함께 받은 것 같았다 — 한 사람이 K.에게 가서 윗옷과 조끼와 마지막으로 셔츠를 벗겼다. K.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자 신사는 달래듯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옷가지를, 당장은 아니어도 나중에 다시 쓸 물건처럼 꼼꼼히 개어 놓았다. 그리고 K.를 서늘한 밤공기 속에 움직이지 않은 채 두지 않으려고 그의 팔을 끼고 잠시 이리저리 걸었다. 그동안 다른 신사는 채석장에서 알맞은 자리를 찾았다. 자리를 찾자 그가 손짓했고, 다른 신사가 K.를 그리로 데려갔다. 채석장 벽 가까운 곳이었고, 떨어져 나온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신사들은 K.를 땅바닥에 앉히고 돌에 기대게 한 뒤 그 위에 머리를 누였다. 그들이 온갖 애를 쓰고 K.도 순순히 따랐지만, 그의 자세는 무척 억지스럽고 어색했다. 그래서 한 신사가 잠시 K.를 눕히는 일을 혼자 하게 해 달라고 다른 신사에게 부탁했지만,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K.를 이미 해 본 자세들 가운데 가장 나은 것도 아닌 자세로 두었다. 그러고 나서 한 신사가 프록코트를 열더니, 조끼에 두른 허리띠에 매단 칼집에서 길고 가늘고 양쪽에 날이 선 정육점 칼을 꺼내 높이 들고 불빛에 날을 살폈다. 다시 역겨운 예의 차리기가 시작되었다. 한 사람이 K. 위로 다른 사람에게 칼을 건넸고, 받은 사람은 다시 K. 위로 도로 건넸다. K.는 이제 똑똑히 알았다. 칼이 손에서 손으로 그의 머리 위를 떠다닐 때 그걸 스스로 붙잡아 제 몸에 찔러 넣는 것이 그의 의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고, 아직 자유로운 목을 돌려 둘레를 둘러보았다. 그는 끝까지 제 몫을 다할 수는 없었다. 관청의 일을 모두 덜어 줄 수는 없었다. 이 마지막 잘못의 책임은 그에게 그러는 데 필요한 남은 힘을 주지 않은 자에게 있었다. 그의 눈길이 채석장에 맞닿은 집의 맨 위층에 닿았다. 불빛이 번쩍하듯 거기 창문 하나의 창짝이 활짝 열리더니, 멀고 높은 데서 가냘프고 흐릿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불쑥 몸을 멀리 내밀고 두 팔을 더 멀리 뻗었다. 누구였을까? 친구? 좋은 사람? 마음을 써 주는 사람? 도와주려는 사람? 한 사람이었을까? 모두였을까? 아직 도움이 있었을까? 잊고 있던 반론이 있었을까? 틀림없이 있었다. 논리는 흔들리지 않지만, 살고 싶은 사람을 당해 내지는 못한다.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판사는 어디 있었나? 그가 한 번도 닿지 못한 높은 법원은 어디 있었나? 그는 두 손을 들어 올리고 손가락을 모두 쫙 폈다.
그러나 K.의 목에 한 신사의 두 손이 얹혔고, 다른 신사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 비틀었다. 꺼져 가는 눈으로 K.는 신사들이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뺨을 서로 맞대고 결말을 지켜보는 것을 보았다. "개 같군!" 그가 말했다. 부끄러움만은 그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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