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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조영환 옮김

芥川龍之介 — 羅生門・藪の中・鼻・蜘蛛の糸・地獄変 (1915–1922)

5장 · 114분

굶어 죽을 것이냐 도둑이 될 것이냐. 허물어진 문 아래에서 비를 긋던 사내가 마음을 정하는 「라쇼몬」,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일곱 사람이 저마다 다르게 말하는 「덤불 속」, 딸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도 붓을 놓지 못한 화공의 「지옥변」. 사람 마음의 바닥을 들여다본 다섯 편.

라쇼몬

어느 날 저물녘의 일이다. 하인 하나가 라쇼몬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문 아래에는 이 사내 말고는 아무도 없다. 다만 군데군데 붉은 칠이 벗겨진 굵은 기둥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붙어 있다. 라쇼몬이 주작대로에 서 있는 이상, 이 사내 말고도 비를 긋는 삿갓 쓴 여자나 두건 쓴 남자가 두셋쯤은 있을 법하다. 그런데 이 사내 말고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요 이삼 년 동안 교토에는 지진이며 회오리바람이며 불이며 흉년이며 하는 재앙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래서 도성 안이 쇠락한 꼴은 보통이 아니다. 옛 기록에 따르면 불상과 불구를 때려 부수어, 붉은 칠이 묻고 금은 박이 붙은 그 나무를 길가에 쌓아 놓고 땔감으로 팔았다고 한다. 도성 안이 그 지경이니 라쇼몬을 손보는 일 따위는 애초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자 그 허물어진 꼴을 좋은 구실로 삼아 여우와 너구리가 깃든다. 도둑이 깃든다. 나중에는 거두어 갈 사람 없는 주검을 이 문으로 가져와 버리고 가는 버릇까지 생겼다. 그래서 해가 지고 나면 누구나 으스스해져 이 문 근처에는 발을 들이지 않게 되고 말았다.

그 대신 까마귀가 어디선가 잔뜩 모여들었다. 낮에 보면 그 까마귀가 몇 마리인지 모르게 원을 그리며 높다란 지붕 장식 둘레를 울면서 날아다닌다. 특히 문 위 하늘이 노을로 붉어질 때면 그것이 깨를 뿌려 놓은 듯 또렷하게 보였다. 까마귀는 물론 문 위에 있는 주검의 살을 쪼러 오는 것이다. — 하기야 오늘은 시각이 늦은 탓인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군데군데 허물어져 가고, 그 허물어진 틈으로 긴 풀이 자란 돌계단 위에 까마귀 똥이 점점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하인은 일곱 단인 돌계단 맨 윗단에 빨아서 색이 바랜 감색 웃옷 자락을 깔고 앉아, 오른뺨에 난 큰 여드름을 신경 쓰며 멍하니 비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쓴이는 아까 「하인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하인은 비가 그쳐도 딱히 어쩌겠다는 작정이 없다. 여느 때라면 물론 주인집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 주인에게서 나흘 닷새 전에 쫓겨났다. 앞서 적은 대로 그 무렵 교토는 예사롭지 않게 쇠락해 있었다. 지금 이 하인이 여러 해 부리던 주인에게 쫓겨난 것도 실은 그 쇠락의 작은 여파일 뿐이다. 그러니 「하인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보다 「비에 갇힌 하인이 갈 곳이 없어 막막해하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맞다. 게다가 오늘의 하늘빛도 이 헤이안 시대 하인의 마음결에 적잖이 영향을 주었다. 오후 네 시가 지나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직 걷힐 기미가 없다. 그래서 하인은 무엇보다 당장 내일 살 길을 어떻게 해 보려고 — 말하자면 어떻게도 안 되는 일을 어떻게 해 보려고 — 두서없는 생각을 더듬으며, 아까부터 주작대로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듣고 있었던 것이다.

비는 라쇼몬을 감싸고 멀리서부터 쏴 하는 소리를 그러모아 온다. 땅거미가 차츰 하늘을 낮추어, 올려다보면 문 지붕이 비스듬히 내민 기왓골 끝으로 무겁고 어둑한 구름을 떠받치고 있다.

어떻게도 안 되는 일을 어떻게 해 보려면 수단을 가릴 겨를이 없다. 가리고 있다가는 흙담 밑이나 길가 땅바닥에서 굶어 죽을 뿐이다. 그러고는 이 문 위로 실려 와 개처럼 버려질 뿐이다. 가리지 않는다면 — 하인의 생각은 몇 번이나 같은 길을 맴돈 끝에 겨우 이 자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않는다면」은 언제까지 가도 결국 「않는다면」이었다. 하인은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고 인정하면서도, 이 「않는다면」을 매듭짓기 위해 당연히 그다음에 와야 할 「도둑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을 선뜻 인정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인은 크게 재채기를 하고 나서 힘겹게 일어섰다. 저녁이면 쌀쌀해지는 교토는 벌써 화로가 아쉬울 만큼 춥다. 바람은 문기둥과 기둥 사이를 땅거미와 함께 거침없이 지나간다. 붉은 칠한 기둥에 붙어 있던 귀뚜라미도 어느새 어디론가 가 버렸다.

하인은 목을 움츠린 채, 황매화빛 속옷 위에 겹쳐 입은 감색 웃옷의 어깨를 치켜올리고 문 둘레를 둘러보았다. 비바람 걱정 없고 남의 눈에 띌 염려도 없이 하룻밤 편히 잘 만한 데가 있으면 거기서 어떻게든 밤을 새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침 문 위 다락으로 오르는, 폭이 넓고 역시 붉은 칠을 한 사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위라면 사람이 있다 해도 어차피 죽은 사람뿐이다. 하인은 그래서 허리에 찬 칼이 칼집에서 흘러나오지 않게 조심하면서, 짚신 신은 발을 그 사다리 맨 아랫단에 올려놓았다.

그로부터 몇 분 뒤의 일이다. 라쇼몬 다락으로 오르는 폭 넓은 사다리 중간쯤에 한 사내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인 채 위쪽 기척을 살피고 있었다. 다락에서 비쳐 드는 불빛이 그 사내의 오른뺨을 희미하게 적시고 있다. 짧은 수염 사이로 벌겋게 곪은 여드름이 난 뺨이다. 하인은 처음부터 이 위에 있는 것은 죽은 사람뿐이려니 하고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다리를 두세 단 올라가 보니 위에서는 누군가 불을 켜고, 게다가 그 불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그 흐릿한 누런빛이 구석구석 거미줄 친 천장 안쪽에 흔들리며 비쳤으므로 곧 알 수 있었다. 이 비 오는 밤에 이 라쇼몬 위에서 불을 켜고 있다면 어차피 예사로운 자가 아니다.

하인은 도마뱀붙이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겨우 가파른 사다리를 맨 윗단까지 기다시피 올라갔다. 그러고는 몸을 될 수 있는 대로 납작하게, 목을 될 수 있는 대로 앞으로 빼고 조심조심 다락 안을 들여다보았다.

보니 다락 안에는 소문대로 주검 몇 구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데, 불빛이 닿는 데가 생각보다 좁아 몇 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은 그중에 벌거벗은 주검과 옷 입은 주검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여자도 남자도 섞여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주검들은 하나같이, 한때 살아 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마저 의심스러울 만큼, 흙을 빚어 만든 인형처럼 입을 벌리거나 손을 뻗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게다가 어깨나 가슴처럼 도드라진 데는 흐릿한 불빛을 받고, 꺼진 데의 그림자는 한층 어둡게 하면서, 영영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었다.

하인은 그 주검들의 썩은 냄새에 저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그러나 그 손은 다음 순간 코를 막는 것을 잊고 있었다. 어떤 거센 감정이 이 사내의 코를 거의 몽땅 앗아 가 버렸기 때문이다.

하인의 눈은 그때 처음으로 그 주검들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적갈색 옷을 입은, 키 작고 야위고 머리 흰, 원숭이 같은 노파다. 그 노파는 오른손에 불을 붙인 관솔을 들고, 주검 하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긴 것을 보니 아마 여자의 주검이리라.

하인은 여섯 몫의 두려움과 네 몫의 호기심에 이끌려 한동안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옛 기록을 적은 이의 말을 빌리면 「온몸의 털이 굵어지는」 듯이 느낀 것이다. 그러자 노파는 관솔을 마룻널 틈에 꽂고, 여태 바라보던 주검의 머리에 두 손을 얹더니, 마치 어미 원숭이가 새끼 원숭이의 이를 잡듯 그 긴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손을 따라 쑥쑥 빠지는 모양이다.

그 머리카락이 한 올씩 뽑히는 데 따라 하인의 마음에서는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 노파에 대한 거센 미움이 조금씩 일어났다. — 아니, 이 노파에 대한 것이라고 하면 말이 어긋날지도 모른다. 오히려 온갖 악에 대한 반감이 한 순간마다 세어졌던 것이다. 이때 누군가 이 하인에게, 아까 문 밑에서 이 사내가 생각하던 굶어 죽을 것이냐 도둑이 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다시 꺼냈다면, 아마 하인은 미련 없이 굶어 죽기를 골랐을 것이다. 그만큼 이 사내의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노파가 마룻널에 꽂아 놓은 관솔처럼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인은 물론 노파가 왜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지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이치를 따져 그것을 선악 어느 쪽으로 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인에게는 이 비 오는 밤에 이 라쇼몬 위에서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다는 것이, 그것만으로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악이었다. 물론 하인은 조금 전까지 자기가 도둑이 될 마음이었다는 것 따위는 벌써 잊고 있었다.

그래서 하인은 두 발에 힘을 주어 대뜸 사다리에서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성큼성큼 노파 앞으로 다가갔다. 노파가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노파는 하인을 보자마자 마치 쇠뇌에 튕긴 것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이년, 어디로 가느냐."

하인은 노파가 주검에 발이 걸려 허둥지둥 달아나려는 길을 막아서며 이렇게 호통쳤다. 노파는 그래도 하인을 밀치고 가려 한다. 하인은 또 그것을 보내지 않으려고 밀어젖힌다. 두 사람은 주검들 사이에서 한동안 말없이 맞붙었다. 그러나 승패는 처음부터 뻔하다. 하인은 끝내 노파의 팔을 붙들어 억지로 그 자리에 쓰러뜨렸다. 꼭 닭의 다리 같은, 뼈와 가죽뿐인 팔이다.

"무얼 하고 있었느냐. 말해라. 말하지 않으면 이거다."

하인은 노파를 밀쳐 내고는 대뜸 칼집에서 칼을 뽑아 허연 쇠붙이 빛을 그 눈앞에 들이댔다. 그런데도 노파는 잠자코 있다.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어깨로 숨을 몰아쉬면서,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눈을 부릅뜬 채 벙어리처럼 끈질기게 입을 다물고 있다. 이것을 보고 하인은 비로소 이 노파의 목숨이 온전히 자기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여태 매섭게 타오르던 미움을 어느새 식혀 버렸다. 뒤에 남은 것은 그저 어떤 일을 해내고 그것이 탈 없이 이루어졌을 때의 편안한 뿌듯함과 만족뿐이다. 그래서 하인은 노파를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려 이렇게 말했다.

"나는 관아의 관리 따위가 아니다. 방금 이 문 밑을 지나가던 나그네다. 그러니 너를 묶어 어쩌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문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만 나에게 말하면 된다."

그러자 노파는 부릅뜨고 있던 눈을 한층 크게 뜨고 가만히 하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벌게진, 고기를 뜯어 먹는 새 같은 매서운 눈으로 본 것이다. 그러고는 주름에 묻혀 거의 코와 하나가 된 입술을 무언가 씹기라도 하듯 움직였다. 가느다란 목에서 뾰족한 울대뼈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그때 그 목구멍에서 까마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헐떡헐떡 하인의 귀로 전해져 왔다.

"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말이지, 가발을 만들려고 했다네."

하인은 노파의 대답이 뜻밖에 시시한 데 실망했다. 그리고 실망과 함께 아까의 미움이 싸늘한 업신여김과 더불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그 기색이 저쪽에도 전해졌던 모양이다. 노파는 한 손에 아직 주검 머리에서 빼앗은 긴 머리카락을 쥔 채, 두꺼비가 중얼거리는 것 같은 소리로 더듬더듬 이런 말을 했다.

"그래, 죽은 사람 머리카락을 뽑는 게 얼마나 못된 짓인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여기 있는 죽은 것들은 다들 그 정도 일은 당해도 싼 사람들뿐이라네. 지금 내가 머리카락을 뽑은 이 여자만 해도 그렇지. 뱀을 네 치쯤씩 잘라 말린 것을 말린 생선이라며 호위 무사들 막사에 팔러 다녔다네. 돌림병에 걸려 죽지 않았으면 지금도 팔러 다니고 있었겠지. 그것도 이 여자가 파는 말린 생선은 맛이 좋다며 무사들이 빠짐없이 반찬거리로 사 갔다더군. 나는 이 여자가 한 짓이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네. 하지 않으면 굶어 죽으니 어쩔 수 없이 한 일이겠지. 그러니 지금 또 내가 하던 일도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네. 이것도 역시 하지 않으면 굶어 죽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야. 그러니 그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이 여자는, 아마 내가 하는 짓도 눈감아 주겠지."

노파는 대체로 이런 뜻의 말을 했다.

하인은 칼을 칼집에 꽂고 그 자루를 왼손으로 누른 채 차갑게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물론 오른손으로는 뺨에 벌겋게 곪은 큰 여드름을 신경 쓰면서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듣는 사이에 하인의 마음에는 어떤 용기가 생겨났다. 그것은 아까 문 밑에서 이 사내에게 없던 용기다. 그리고 아까 이 문 위로 올라와 이 노파를 붙잡았을 때의 용기와는 정반대 쪽으로 움직이려는 용기다. 하인은 굶어 죽을 것이냐 도둑이 될 것이냐로 망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때 이 사내의 마음으로 말하자면 굶어 죽는다는 따위는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틀림없으렷다."

노파의 이야기가 끝나자 하인은 비웃는 목소리로 다짐을 두었다. 그리고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느닷없이 오른손을 여드름에서 떼어 노파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물어뜯듯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옷을 벗겨 가도 원망하지 않겠구나. 나도 그러지 않으면 굶어 죽을 몸이니."

하인은 재빨리 노파의 옷을 벗겨 냈다. 그러고는 발에 매달리려는 노파를 거칠게 주검 위로 걷어차 넘어뜨렸다. 사다리 입구까지는 겨우 다섯 걸음이다. 하인은 벗겨 낸 적갈색 옷을 옆구리에 낀 채, 눈 깜짝할 사이에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밤의 밑바닥으로 뛰어 내려갔다.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노파가 주검들 사이에서 그 벌거벗은 몸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노파는 중얼거리는 듯도 하고 신음하는 듯도 한 소리를 내면서, 아직 타고 있는 불빛에 의지해 사다리 입구까지 기어갔다. 그러고는 거기서 짧은 흰머리를 거꾸로 늘어뜨린 채 문 밑을 들여다보았다. 밖에는 그저 캄캄한 밤이 있을 뿐이다.

하인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1915년 9월)

덤불 속

관아에서 심문받은 나무꾼의 이야기

그렇습니다. 그 주검을 찾아낸 것은 틀림없이 저올시다. 저는 오늘 아침 여느 때처럼 뒷산에 삼나무를 베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산그늘 덤불 속에 그 주검이 있었던 것입니다. 있던 자리 말씀입니까? 그것은 야마시나 역참 길에서 오백 걸음쯤 떨어져 있을 겁니다. 대나무에 야윈 삼나무가 섞인, 사람 기척 없는 곳입니다.

주검은 옥색 웃옷에 도읍 차림의 빛바랜 두건을 쓴 채 반듯이 누워 있었습니다. 아무리 한 칼이라고는 해도 가슴을 찌른 상처라서, 주검 둘레의 대나무 낙엽은 검붉게 물든 듯했습니다. 아니요, 피는 이미 흐르지 않았습니다. 상처도 말라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말파리가 한 마리, 제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착 달라붙어 있었지요.

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느냐고요? 아니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 곁 삼나무 밑동에 노끈이 한 가닥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 아 참, 노끈 말고도 빗이 하나 있었습니다. 주검 둘레에 있던 것은 이 둘뿐입니다. 그런데 풀이며 대나무 낙엽이 온통 짓밟혀 있었으니, 틀림없이 그 남자는 죽기 전에 꽤나 모질게 버텼을 겁니다. 뭐라고요, 말은 없었느냐고요? 거기는 애초에 말 따위는 들어갈 수 없는 데입니다. 말이 다니는 길과는 덤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까요.

관아에서 심문받은 나그네 스님의 이야기

그 주검의 남자는 어제 분명히 만났습니다. 어제, — 글쎄요, 한낮쯤이었을 겁니다. 자리는 세키야마에서 야마시나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 남자는 말 탄 여자와 함께 세키야마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너울을 늘어뜨리고 있어서 얼굴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보인 것은 싸리빛 겹옷인 듯한 옷 빛깔뿐입니다. 말은 담황색이었고 — 갈기를 짧게 깎은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키 말씀입니까? 키는 네 치나 되었을까요? — 어차피 중의 눈이라 그런 것은 또렷이 알지 못합니다. 남자는, — 아니요, 칼도 차고 있었고 활과 화살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특히 검게 칠한 화살통에 화살을 스무 남짓 꽂고 있던 것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 남자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만, 참으로 사람 목숨이란 이슬 같고 번개 같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아아, 뭐라 말할 수 없이 딱한 일을 당했습니다.

관아에서 심문받은 포졸의 이야기

제가 붙잡은 남자 말씀입니까? 이자는 틀림없이 다조마루라는 이름난 도둑입니다. 하기야 제가 붙잡았을 때는 말에서 떨어졌던 모양인지, 아와타구치의 돌다리 위에서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시각 말씀입니까? 시각은 어젯밤 초저녁쯤입니다. 언젠가 제가 놓쳤을 때도 역시 이 감색 웃옷에 장식 박은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밖에도 보시다시피 활과 화살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저 주검의 남자가 지니고 있던 것도 — 그럼 사람을 죽인 것은 이 다조마루가 틀림없습니다. 가죽을 감은 활, 검게 칠한 화살통, 매 깃을 단 화살 열일곱 대 — 이것은 다 그 남자가 지니고 있던 것이겠지요. 예. 말도 말씀하신 대로 갈기를 짧게 깎은 담황색입니다. 그 짐승에게 떨어졌다니 무슨 인연이 있는 모양입니다. 말은 돌다리에서 조금 앞쪽에 긴 고삐를 늘어뜨린 채 길가의 푸른 억새를 뜯고 있었습니다.

이 다조마루라는 놈은 도성 안을 떠도는 도둑 가운데서도 여자를 밝히는 놈입니다. 지난해 가을 도리베 절 빈두로 불상 뒤 산에서, 불공을 드리러 온 듯한 귀부인 하나가 계집아이와 함께 죽어 있던 것도 이놈 짓이라고들 했습니다. 그 담황색 말을 타고 있던 여자도, 이놈이 그 남자를 죽였다면 어디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주제넘습니다만 그것도 살펴 주십시오.

관아에서 심문받은 노파의 이야기

예, 그 주검은 제 딸이 짝지은 남자입니다. 그러나 도읍 사람은 아닙니다. 와카사 관아의 무사입니다. 이름은 가나자와 다케히로, 나이는 스물여섯이었습니다. 아니요,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니 원한을 살 일은 없을 겁니다.

딸 말씀입니까? 딸의 이름은 마사고,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이 아이는 사내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당찬 계집입니다만, 아직 한 번도 다케히로 말고는 남자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얼굴은 가무잡잡하고, 왼쪽 눈꼬리에 점이 있는 갸름한 작은 얼굴입니다.

다케히로는 어제 딸과 함께 와카사로 떠났습니다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무슨 팔자인지요. 그런데 딸은 어찌 되었는지, 사위 일은 단념한다 해도 그것만은 걱정이 되어 못 견디겠습니다. 부디 이 늙은이의 한평생 소원이오니, 풀과 나무를 다 헤치는 한이 있어도 딸의 행방을 찾아 주십시오. 무엇보다 미운 것은 그 다조마루인지 뭔지 하는 도둑놈입니다. 사위뿐 아니라 딸까지도………(뒤는 울음에 묻혀 말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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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조마루의 자백

그 남자를 죽인 것은 나요. 그러나 여자는 죽이지 않았소. 그럼 어디로 갔느냐고? 그건 나도 모르오. 자, 기다려 보시오. 아무리 매를 맞아도 모르는 일은 말할 수 없지 않겠소. 게다가 나도 이렇게 된 바에야 비겁하게 감출 생각은 없소.

나는 어제 한낮이 조금 지나 그 부부를 만났소. 그때 바람이 부는 바람에 너울 자락이 들렸기에 여자의 얼굴이 언뜻 보인 거요. 언뜻 — 보였구나 싶은 순간에는 이미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때문이기도 했겠지, 나에게는 그 여자의 얼굴이 보살처럼 보였소. 나는 그 짧은 사이에, 설령 남자는 죽이더라도 여자는 빼앗겠다고 마음먹었소.

뭐요, 남자를 죽인다는 게 당신들이 여기는 것처럼 대단한 일은 아니오. 어차피 여자를 빼앗자면 남자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소. 다만 나는 죽일 때 허리의 칼을 쓰지만, 당신들은 칼을 쓰지 않고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잘하면 위하는 척하는 말만으로도 죽이지 않소. 과연 피는 흐르지 않고 남자는 멀쩡히 살아 있지 — 그러나 그래도 죽인 거요. 죄의 깊이를 헤아려 보면 당신들이 나쁜지 내가 나쁜지, 어느 쪽이 나쁜지 알 수 없소. (비꼬는 웃음)

그러나 남자를 죽이지 않고도 여자를 빼앗을 수 있다면 달리 아쉬울 것이 없소. 아니, 그때 마음으로는 되도록 남자를 죽이지 않고 여자를 빼앗겠다고 마음먹었소. 하지만 그 야마시나 역참 길에서는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수 없소. 그래서 나는 산속으로 그 부부를 끌어들일 궁리를 했소.

이것도 어려울 것이 없었소. 나는 그 부부와 길동무가 되자, 건너편 산에 오래된 무덤이 있는데 그 무덤을 파 보았더니 거울이며 칼이 잔뜩 나왔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산그늘 덤불 속에 그런 물건을 묻어 두었다,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느 것이든 싼값에 넘기고 싶다 — 하는 이야기를 했소. 남자는 어느새 내 이야기에 차츰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소. 그러고는 — 어떻소, 욕심이란 무서운 것 아니오? 그러고는 반 시간도 되지 않아 그 부부는 나와 함께 산길로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소.

나는 덤불 앞에 이르자, 보물은 이 안에 묻혀 있으니 보러 와 달라고 했소. 남자는 욕심에 목이 말라 있으니 마다할 리가 없소. 그런데 여자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기다리겠다고 하는 거요. 게다가 그 덤불이 우거진 것을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나는 이것도 실은 바라던 대로였으니, 여자 하나를 남겨 둔 채 남자와 덤불 속으로 들어갔소.

덤불은 한동안은 대나무뿐이오. 그런데 백 걸음쯤 간 자리에 조금 트인 삼나무 숲이 있소 — 내 일을 해치우기에 이만큼 좋은 자리는 없소. 나는 덤불을 헤치면서 보물은 삼나무 밑에 묻혀 있다고 그럴듯한 거짓말을 했소. 남자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벌써 야윈 삼나무가 비쳐 보이는 쪽으로 기를 쓰고 나아가오. 그러는 사이 대나무가 성글어지자 삼나무가 여러 그루 늘어서 있소 — 나는 거기 이르기가 무섭게 대뜸 상대를 덮쳐 눌렀소. 남자도 칼을 차고 다니는 만큼 힘은 제법 있는 듯했으나, 불시에 당해서는 견딜 수 없지. 이내 삼나무 한 그루 밑동에 묶이고 말았소. 노끈 말이오? 노끈은 도둑에게 고마운 물건이라, 언제 담을 넘을지 모르니 늘 허리에 차고 있었소. 물론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데도 대나무 낙엽을 물려 놓으면 달리 성가실 것이 없소.

나는 남자를 처리하고 나서, 이번에는 다시 여자가 있는 데로 가 남자가 갑자기 병이 난 모양이니 보러 와 달라고 했소. 이것도 그대로 들어맞은 것은 말할 것도 없소. 여자는 삿갓을 벗은 채 내 손에 이끌려 덤불 안쪽으로 들어왔소. 그런데 거기 와서 보니 남자는 삼나무 밑동에 묶여 있소 — 여자는 그것을 한눈에 보자마자, 어느새 품에서 꺼냈는지 번쩍 단도를 뽑았소. 나는 여태 그만큼 성깔이 매운 여자는 하나도 본 적이 없소. 만약 그때라도 방심하고 있었다면 옆구리를 한 번에 찔렸을 거요. 아니, 몸을 피한다 해도 마구 휘두르는 사이에 무슨 상처든 입지 않고는 못 배겼을 거요. 하지만 나도 다조마루니까, 그럭저럭 칼도 뽑지 않은 채 끝내 단도를 쳐서 떨어뜨렸소. 아무리 기가 센 여자라도 무기가 없으면 어쩔 도리가 없지. 나는 끝내 바라던 대로, 남자의 목숨은 빼앗지 않고도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소.

남자의 목숨은 빼앗지 않고도 — 그렇소. 나는 그러고도 남자를 죽일 생각은 없었소. 그런데 엎드려 우는 여자를 뒤에 두고 덤불 밖으로 나가려 하자, 여자는 갑자기 내 팔에 미친 듯이 매달렸소. 게다가 끊어질 듯 외치는 소리를 들어 보니, 당신이 죽든 남편이 죽든 어느 한 사람 죽어 달라, 두 사내에게 부끄러운 꼴을 보이는 것은 죽기보다 괴롭다는 거요. 아니, 그중 어느 쪽이든 살아남은 남자를 따르고 싶다 — 그렇게도 헐떡이며 말하오. 나는 그때 사납게 남자를 죽이고 싶어졌소. (어두운 흥분)

이런 말씀을 드리면 필시 나는 당신들보다 모진 인간으로 보이겠지. 그러나 그것은 당신들이 그 여자의 얼굴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오. 특히 그 한순간의, 타오르는 듯한 눈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오. 나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설령 벼락을 맞아 죽더라도 이 여자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생각했소. 아내로 삼고 싶다 — 내 머릿속에 있던 것은 오직 이 한 가지뿐이오. 이것은 당신들이 여기는 것처럼 천한 색욕이 아니오. 만약 그때 색욕 말고 아무 바람도 없었다면, 나는 여자를 걷어차고라도 틀림없이 달아났을 거요. 남자도 그리했으면 내 칼에 피를 묻히는 일은 없었을 거요. 그러나 어둑한 덤불 속에서 가만히 여자의 얼굴을 본 그 순간, 나는 남자를 죽이지 않고는 여기를 뜨지 않겠다고 작정했소.

그러나 남자를 죽이더라도 비겁하게 죽이고 싶지는 않았소. 나는 남자의 노끈을 풀어 주고 칼을 맞대자고 했소. (삼나무 밑동에 떨어져 있던 것은 그때 버리는 걸 잊은 노끈이오.) 남자는 낯빛이 달라진 채 굵은 칼을 뽑았소. 그러더니 말도 없이 성이 나 나에게 덤벼들었소. — 그 칼싸움이 어찌 되었는지는 말씀드릴 것도 없겠지. 내 칼은 스물세 합째에 상대의 가슴을 꿰뚫었소. 스물세 합째에 — 부디 그것을 잊지 말아 주시오. 나는 지금도 이것만은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소. 나와 스무 합을 맞선 자는 천하에 그 남자 하나뿐이니까. (밝은 웃음)

나는 남자가 쓰러짐과 동시에 피에 젖은 칼을 늘어뜨린 채 여자 쪽을 돌아보았소. 그런데 — 어떻소, 그 여자가 어디에도 없지 않겠소? 나는 여자가 어느 쪽으로 달아났는지 삼나무 사이를 뒤져 보았소. 그러나 대나무 낙엽 위에는 그럴 만한 자취도 남아 있지 않소. 또 귀를 기울여 보아도 들리는 것은 그저 남자의 목구멍에서 나는 숨넘어가는 소리뿐이오.

어쩌면 그 여자는 내가 칼을 맞대기 시작하기 무섭게 남의 도움이라도 부르려고 덤불을 헤치고 달아난 것인지도 모르오. — 나는 그렇게 생각하자 이번에는 내 목숨이 걸린 일이니, 칼이며 활과 화살을 빼앗아 곧바로 다시 본래의 산길로 나왔소. 거기에는 아직 여자의 말이 조용히 풀을 뜯고 있었소. 그 뒤의 일은 말씀드려 보았자 쓸데없는 군말에 지나지 않겠지. 다만 도읍에 들기 전에 칼만은 이미 넘겨 버렸소. — 내 자백은 이것뿐이오. 어차피 한 번은 나뭇가지 끝에 내걸릴 목이라 여기고 있으니, 부디 가장 무거운 벌을 내려 주시오. (당당한 태도)

기요미즈절에 온 여자의 참회

— 그 감색 웃옷을 입은 남자는 저를 겁탈하고 나서, 묶인 남편을 바라보며 비웃듯이 웃었습니다. 남편은 얼마나 분했을까요.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온몸에 감긴 노끈은 한층 더 살을 파고들 뿐입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남편 곁으로 구르듯이 달려갔습니다. 아니요, 달려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그 순간에 저를 그 자리에 걷어차 넘어뜨렸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저는 남편의 눈 속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빛이 서려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 저는 그 눈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이 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남편은 그 찰나의 눈빛 속에 모든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번득이고 있던 것은 노여움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 그저 저를 업신여기는 차가운 빛이 아니었겠습니까? 저는 남자에게 걷어차인 것보다 그 눈빛에 얻어맞은 듯, 저도 모르게 무어라 외친 것을 끝으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이 들어 보니 그 감색 웃옷의 남자는 이미 어디론가 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그저 삼나무 밑동에 남편이 묶여 있을 뿐입니다. 저는 대나무 낙엽 위에서 겨우 몸을 일으킨 채 남편의 얼굴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눈빛은 조금도 아까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차가운 업신여김 밑에 미움의 빛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움, 슬픔, 분함 — 그때 제 마음속은 뭐라고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비틀비틀 일어서면서 남편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여보. 이렇게 된 이상 당신과 함께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단숨에 죽을 작정입니다. 그러나, — 그러나 당신도 죽어 주십시오. 당신은 제 부끄러운 꼴을 보셨습니다. 저는 이대로 당신 혼자 남겨 둘 수는 없습니다."

저는 기를 쓰고 이만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꺼림칙하다는 듯 저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입니다. 저는 찢어질 듯한 가슴을 누르면서 남편의 칼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도둑에게 빼앗겼는지, 칼은 물론 활과 화살까지도 덤불 속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단도만은 제 발밑에 떨어져 있습니다. 저는 그 단도를 치켜들고 다시 한번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목숨을 거두게 해 주십시오. 저도 곧 뒤따르겠습니다."

남편은 이 말을 들었을 때 겨우 입술을 움직였습니다. 물론 입에는 조릿대 낙엽이 가득 물려 있으니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보고 곧 그 말을 알아차렸습니다. 남편은 저를 업신여긴 채 "죽여라" 하고 한마디 한 것입니다. 저는 거의 꿈결 같은 가운데 남편의 옥색 웃옷 가슴에 푹 하고 단도를 찔러 넣었습니다.

저는 이때도 또 정신을 잃었던 모양입니다. 겨우 둘레를 둘러보았을 때는 남편은 이미 묶인 채 벌써 숨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 파리해진 얼굴 위에는 대나무에 섞인 삼나무 사이의 하늘에서 저녁 해가 한 줄기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울음을 삼키며 주검의 노끈을 풀어 던졌습니다. 그러고는 — 그러고는 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것만은 이제 저에게 말씀드릴 힘도 없습니다. 아무튼 저는 아무리 해도 죽을 힘이 없었습니다. 단도를 목에 들이대 보기도 하고 산기슭 못에 몸을 던져 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해 보았습니다만, 죽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한 이것도 자랑은 되지 않겠지요. (쓸쓸한 웃음) 저같이 못난 것은 그 크고 어지신 관세음보살도 버리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을 죽인 저는, 도둑에게 겁탈당한 저는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요? 대체 저는, — 저는, — (갑자기 터지는 흐느낌)

무당의 입을 빌린 죽은 이의 넋 이야기

— 도둑은 아내를 겁탈하고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이런저런 말로 아내를 달래기 시작했다. 나는 물론 입을 열 수 없다. 몸도 삼나무 밑동에 묶여 있다. 그러나 나는 그사이 몇 번이나 아내에게 눈짓을 했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을 곧이듣지 마라, 무슨 말을 하든 거짓으로 여겨라 — 나는 그런 뜻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풀 죽은 채 조릿대 낙엽에 앉아 가만히 무릎에 눈을 두고 있다. 그것이 아무래도 도둑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나는 질투에 몸부림쳤다. 그런데 도둑은 이 말 저 말로 교묘하게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한 번이라도 몸을 더럽혔다면 남편과 사이도 예전 같지 않으리라. 그런 남편을 따라 사느니 내 아내가 될 생각은 없느냐? 나는 그대가 사랑스러웠기에 이런 엄청난 짓도 저지른 것이다 — 도둑은 끝내 대담하게도 그런 이야기까지 꺼냈다.

도둑이 이렇게 말하자 아내는 넋을 놓은 듯 얼굴을 들었다. 나는 아직 그때만큼 아름다운 아내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아내는 지금 묶여 있는 나를 앞에 두고 도둑에게 뭐라고 대답했던가? 나는 저승 어름을 헤매면서도 아내의 대답을 떠올릴 때마다 노여움에 타오르지 않은 적이 없다. 아내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 "그럼 어디로든 데려가 주세요." (긴 침묵)

아내의 죄는 그것만이 아니다. 그것뿐이라면 이 어둠 속에서 지금만큼 내가 괴로워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아내는 꿈결처럼 도둑에게 손을 잡힌 채 덤불 밖으로 나가려다가, 갑자기 낯빛을 잃고 삼나무 밑동의 나를 가리켰다. "저 사람을 죽여 주세요. 저는 저 사람이 살아 있으면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 아내는 미친 사람처럼 몇 번이나 이렇게 외쳤다. "저 사람을 죽여 주세요." — 이 말은 폭풍처럼 지금도 먼 어둠의 밑바닥으로 나를 거꾸로 떨어뜨리려 한다. 한 번이라도 이만큼 미워할 만한 말이 사람의 입에서 나온 적이 있는가? 한 번이라도 이만큼 저주스러운 말이 사람의 귀에 닿은 적이 있는가? 한 번이라도 이만큼, — (갑자기 터져 나오는 비웃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도둑마저 낯빛을 잃고 말았다. "저 사람을 죽여 주세요." — 아내는 그렇게 외치며 도둑의 팔에 매달려 있다. 도둑은 가만히 아내를 바라본 채 죽이겠다고도 죽이지 않겠다고도 대답하지 않는다. — 그런가 싶은 사이에 아내는 대나무 낙엽 위로 단번에 걷어차여 넘어졌다. (다시 터져 나오는 비웃음) 도둑은 조용히 두 팔을 낀 채 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 여자를 어찌할 생각이냐? 죽일까, 아니면 살려 줄까? 대답은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 죽일까?" — 나는 이 말만으로도 도둑의 죄는 용서해 주고 싶다. (다시, 긴 침묵)

아내는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무어라 한마디 외치기 무섭게 덤불 안쪽으로 달려 나갔다. 도둑도 순간 달려들었으나 이번에는 소맷자락조차 잡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그저 허깨비처럼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둑은 아내가 달아난 뒤 칼이며 활과 화살을 집어 들고, 내 노끈을 한 군데만 끊었다. "이번에는 내 신세다." — 나는 도둑이 덤불 밖으로 모습을 감출 때 이렇게 중얼거린 것을 기억한다. 그 뒤로는 어디나 고요했다. 아니, 아직 누군가 우는 소리가 난다. 나는 노끈을 풀면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나 그 소리도 알고 보니 나 자신이 우는 소리가 아니었던가? (세 번째, 긴 침묵)

나는 겨우 삼나무 밑동에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일으켰다. 내 앞에는 아내가 떨어뜨린 단도가 하나 빛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단숨에 내 가슴에 찔렀다. 무언가 비릿한 덩어리가 내 입으로 치밀어 올라온다. 그러나 괴로움은 조금도 없다. 다만 가슴이 차가워지자 둘레가 한층 고요해지고 말았다. 아아, 이 무슨 고요함인가. 이 산그늘 덤불의 하늘에는 작은 새 한 마리 지저귀러 오지 않는다. 그저 삼나무며 대나무 끝에 쓸쓸한 햇빛이 떠돌고 있다. 햇빛이, — 그것도 차츰 엷어져 온다. — 이제 삼나무도 대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 채 깊은 고요에 싸여 있다.

그때 누군가 살금살금 내 곁으로 오는 것이 있다. 나는 그쪽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내 둘레에는 어느새 어스름이 자욱하다. 누군가, — 그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살며시 가슴의 단도를 뽑았다. 동시에 내 입안에는 다시 한번 피가 넘쳐 온다. 나는 그것을 끝으로 영영 저승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1921년 12월)

코

젠치 스님의 코라고 하면 이케노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길이는 대여섯 치나 되어 윗입술 위에서 턱 밑까지 드리워져 있다. 생김새는 밑동도 끝도 똑같이 굵다. 말하자면 가느다랗고 긴 순대 같은 것이 얼굴 한가운데에서 축 늘어져 있는 것이다.

쉰을 넘긴 스님은 어린 사미 시절부터 궁중 법회에 드는 자리에 오른 오늘까지, 속으로는 내내 이 코를 근심하며 지내 왔다. 물론 겉으로는 지금도 그다지 마음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태연하다. 이것은 오로지 다가올 극락을 우러러야 할 중의 몸으로 코 걱정을 하는 것이 나쁘다고 여겨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코를 마음 쓰고 있다는 것을 남이 아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일상의 이야기 가운데 코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스님이 코를 주체하지 못한 까닭은 둘이다. — 하나는 실제로 코가 긴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우선 밥을 먹을 때도 혼자서는 먹을 수 없다. 혼자 먹으면 코끝이 밥그릇 속의 밥에 닿아 버린다. 그래서 스님은 제자 하나를 밥상 건너편에 앉혀 놓고, 밥을 먹는 동안 내내 너비 한 치 길이 두 자쯤 되는 널빤지로 코를 들고 있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밥을 먹는다는 것은 들고 있는 제자에게도, 들어 올려지는 스님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번은 이 제자를 대신하던 동자승이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손이 흔들려 코를 죽 속에 떨어뜨린 이야기가 그때 교토까지 자자하게 퍼졌다. — 그러나 이것은 스님에게 코를 근심하게 한 주된 까닭이 결코 아니다. 스님은 실로 이 코 때문에 다치는 자존심 때문에 괴로워한 것이다.

이케노오 마을 사람들은 이런 코를 하고 있는 젠치 스님에게, 스님이 속인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저런 코로는 아내가 될 여자가 아무도 없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또 저 코이니까 중이 된 것이라고 평하는 자마저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자기가 중이기 때문에 이 코 때문에 시달리는 일이 조금이라도 줄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스님의 자존심은 아내를 얻고 못 얻고 하는 결과 따위에 좌우되기에는 너무나 여린 것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이 다친 자존심을 되돌리려 애써 보았다.

먼저 스님이 생각해 낸 것은 이 긴 코를 실제보다 짧아 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사람이 없을 때 거울을 마주하고 여러 각도에서 얼굴을 비추어 보며 열심히 궁리해 보았다. 어떤 때는 얼굴 자리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턱을 괴거나 턱 끝에 손가락을 대 보거나 하며 끈질기게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할 만큼 코가 짧아 보인 적은 여태 한 번도 없다. 때로는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더 길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스님은 이럴 때면 거울을 상자에 넣으면서 새삼스레 한숨을 쉬고, 마지못해 또 본래의 책상으로 돌아가 관음경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또 스님은 늘 남의 코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케노오의 절은 법회와 설법이 자주 열리는 절이다. 절 안에는 승방이 빈틈없이 죽 이어져 있고, 목욕간에서는 절의 중들이 날마다 물을 끓인다. 따라서 여기 드나드는 중과 속인도 매우 많다. 스님은 이런 사람들의 얼굴을 끈질기게 살폈다. 한 사람이라도 자기 같은 코를 가진 사람을 찾아내어 마음을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님의 눈에는 감색 웃옷도 흰 홑옷도 들어오지 않는다. 하물며 귤빛 두건이나 잿빛 법복 따위는 눈에 익은 만큼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 스님은 사람을 보지 않고 오직 코를 보았다. — 그러나 매부리코는 있어도 스님 같은 코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일이 거듭될수록 스님의 마음은 차츰 또 언짢아졌다. 스님이 남과 이야기하다가 저도 모르게 축 늘어진 코끝을 만져 보고 나이값도 못 하게 얼굴을 붉힌 것은, 오로지 이 언짢음에 떠밀린 탓이다.

끝으로 스님은 불경과 바깥 책 가운데서 자기와 같은 코를 가진 인물을 찾아내어 그나마 조금이라도 위로를 삼으려고까지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목련이나 사리불의 코가 길었다고는 어느 경문에도 적혀 있지 않다. 물론 용수도 마명도 남만 한 코를 갖춘 보살이다. 스님은 중국 이야기 끝에 촉한의 유현덕은 귀가 길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코였다면 자기 마음이 얼마나 든든해졌을까 하고 생각했다.

스님이 이렇게 소극적으로 애를 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적극적으로 코를 짧게 하는 방법을 시험해 본 것은 굳이 여기 적을 것도 없다. 스님은 이쪽으로도 거의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하늘타리를 달여 마셔 본 적도 있다. 쥐 오줌을 코에 발라 본 적도 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도 코는 여전히 대여섯 치 길이로 입술 위에 축 늘어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 해 가을, 스님의 볼일을 겸해 도읍에 올라갔던 제자 중이 아는 의원에게서 긴 코를 짧게 하는 법을 배워 왔다. 그 의원이라는 이는 본디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으로, 그때는 조라쿠절의 중이 되어 있었다.

스님은 여느 때처럼 코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낯빛으로, 일부러 그 방법도 당장 해 보자고는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가벼운 말투로 끼니때마다 제자를 번거롭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속으로는 물론 제자 중이 자기를 구슬려 이 방법을 해 보게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 중도 스님의 이런 속셈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감보다는 스님이 그런 속셈을 부리는 마음이 더 세게 이 제자 중의 동정을 움직였을 것이다. 제자 중은 스님이 바란 대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 방법을 해 보시라고 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님도 또한 그 바람대로 결국 이 열성스러운 권유에 따르게 되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은 그저 뜨거운 물에 코를 삶아 그 코를 남에게 밟게 한다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물은 절의 목욕간에서 날마다 끓이고 있다. 그래서 제자 중은 손가락도 넣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물을 곧바로 주전자에 담아 목욕간에서 길어 왔다. 그러나 이 주전자에 코를 바로 넣으면 김에 얼굴을 데일 염려가 있다. 그래서 네모진 소반에 구멍을 뚫어 그것을 주전자 뚜껑으로 삼고, 그 구멍으로 코를 물속에 넣기로 했다. 코만은 이 뜨거운 물속에 담가도 조금도 뜨겁지 않은 것이다. 한참 있다가 제자 중이 말했다.

— 이제 다 삶겼을 때올시다.

스님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말만 들어서는 누구도 코 이야기인 줄 알아채지 못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코는 뜨거운 물에 쪄져 벼룩이 문 것처럼 근질근질하다.

제자 중은 스님이 소반 구멍에서 코를 빼자, 아직 김이 오르고 있는 그 코를 두 발에 힘을 주며 밟기 시작했다. 스님은 옆으로 누워 코를 마룻바닥 위에 늘어놓은 채, 제자 중의 발이 오르내리는 것을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이다. 제자 중은 이따금 딱하다는 얼굴로 스님의 벗어진 머리를 내려다보며 이런 말을 했다.

—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의원은 힘껏 밟으라 했습니다만. 그래도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스님은 고개를 저어 아프지 않다는 뜻을 나타내려 했다. 그런데 코를 밟히고 있으니 마음대로 고개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눈을 치뜨고, 제자 중의 발에 튼 자리를 바라보며 성난 듯한 목소리로,

— 아프지 않대도.

하고 대답했다. 실제로 코는 근질근질한 데를 밟히는 터라 아프기보다 오히려 시원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한참 밟고 있으려니 이윽고 좁쌀 같은 것이 코에 돋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털을 뽑은 작은 새를 통째로 구워 놓은 듯한 꼴이다. 제자 중은 이것을 보자 발을 멈추고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 이것을 족집게로 뽑으라고 했습니다.

스님은 못마땅한 듯 뺨을 부풀리고, 잠자코 제자 중이 하는 대로 두었다. 물론 제자 중의 친절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알아도 자기 코를 마치 물건처럼 다루는 것이 언짢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스님은 믿지 않는 의원에게 수술을 받는 병자 같은 얼굴로, 마지못해 제자 중이 코의 털구멍에서 족집게로 기름을 뽑아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름은 새의 깃대 같은 모양으로 손톱만 한 길이로 뽑히는 것이다.

이윽고 이것이 한차례 끝나자 제자 중은 한숨 돌린 듯한 얼굴로,

— 한 번 더 이것을 삶으면 됩니다.

하고 말했다.

스님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못마땅한 얼굴로 제자 중이 하자는 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고서 두 번째로 삶은 코를 꺼내 보니 과연 여느 때 없이 짧아져 있다. 이만하면 여느 매부리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스님은 그 짧아진 코를 쓰다듬으며, 제자 중이 내미는 거울을 겸연쩍은 듯 조심조심 들여다보았다.

코는 — 그 턱 밑까지 드리워져 있던 코는 거의 거짓말처럼 오그라들어, 지금은 겨우 윗입술 위에서 힘없이 남은 숨을 잇고 있다. 군데군데 얼룩덜룩 붉어진 것은 아마 밟혔을 때의 자국이리라. 이렇게 되면 이제 아무도 비웃을 사람이 없을 것이 틀림없다. — 거울 속에 있는 스님의 얼굴은 거울 밖에 있는 스님의 얼굴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눈을 껌벅였다.

그러나 그날은 아직 하루 내내 코가 또 길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다. 그래서 스님은 경을 읽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틈만 나면 손을 뻗어 살며시 코끝을 만져 보았다. 그러나 코는 얌전히 입술 위에 얹혀 있을 뿐, 딱히 그보다 아래로 늘어질 낌새도 없다. 그러고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일찍 눈을 뜨자 스님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 코를 쓰다듬어 보았다. 코는 여전히 짧다. 스님은 그제야 몇 해 만인지 모르게, 법화경을 베껴 공덕을 쌓았을 때처럼 후련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이삼 일 지나는 사이에 스님은 뜻밖의 일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마침 볼일이 있어 이케노오의 절을 찾아온 무사가 전보다 한층 우스워 죽겠다는 얼굴로, 말도 제대로 하지 않고 힐끔힐끔 스님의 코만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스님의 코를 죽 속에 떨어뜨린 적이 있는 동자승 같은 이는, 법당 밖에서 스님과 엇갈렸을 때 처음에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고 있더니, 끝내 참지 못했는지 한꺼번에 푹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심부름을 받은 아랫중들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만은 조심스레 듣고 있다가, 스님이 등만 돌리면 곧 킥킥거리기 시작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스님은 처음에 이것을 자기 얼굴이 달라진 탓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풀이만으로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는 듯하다. — 물론 동자승이나 아랫중이 비웃는 까닭은 거기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같이 비웃더라도 코가 길던 예전과는 비웃는 모양새가 어딘가 다르다. 눈에 익은 긴 코보다 눈에 설은 짧은 코가 더 우스워 보인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 무언가 더 있는 것 같다.

— 전에는 저렇게 대놓고 비웃지는 않았는데.

스님은 읽던 경문을 멈추고 벗어진 머리를 갸웃하며 이따금 이렇게 중얼거리는 일이 있었다. 가여운 스님은 그럴 때가 되면 반드시 멍하니 곁에 걸린 보현보살 그림을 바라보면서, 코가 길던 너덧새 전 일을 떠올리고 「이제는 형편없이 낮아진 사람이 잘나가던 옛날을 그리워하듯」 풀이 죽고 마는 것이다. — 스님에게는 안타깝게도 이 물음에 답을 줄 밝은 눈이 없었다.

— 사람의 마음에는 서로 어긋나는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물론 누구든 남의 불행에 동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불행을 어떻게든 헤어 나오게 되면, 이번에는 이쪽에서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든다. 조금 부풀려 말하면 한 번 더 그 사람을 같은 불행에 빠뜨려 보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그러고는 어느새 드러나지는 않아도 어떤 적의를 그 사람에게 품게 되는 것이다. — 스님이 까닭도 모른 채 어쩐지 언짢게 여긴 것은, 이케노오의 중과 속인들의 태도에서 이 구경꾼의 이기심을 어렴풋이 알아차렸기 때문일 뿐이다.

그래서 스님은 날마다 기분이 나빠졌다. 두 마디째면 누구에게든 심술궂게 호통을 친다. 나중에는 코를 고쳐 준 그 제자 중까지도 "스님은 가르침을 아끼는 죄를 받으실 거요" 하고 뒤에서 흉을 볼 지경이 되었다. 특히 스님을 성나게 한 것은 그 장난꾸러기 동자승이다. 어느 날 개가 요란하게 짖는 소리가 나기에 스님이 무심코 밖에 나가 보니, 동자승이 두 자쯤 되는 나뭇조각을 휘두르며 털 긴 여윈 삽살개를 쫓아다니고 있다. 그것도 그냥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코를 맞지 마라. 옳지, 코를 맞지 마라" 하고 놀려 대면서 쫓아다니는 것이다. 스님은 동자승의 손에서 그 나뭇조각을 빼앗아 호되게 그 얼굴을 때렸다. 나뭇조각은 예전에 코를 들어 올리던 그 널빤지였던 것이다.

스님은 공연히 코가 짧아진 것이 도리어 원망스러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의 일이다. 해가 진 뒤 갑자기 바람이 인 모양인지, 탑의 풍경 울리는 소리가 성가실 만큼 베갯머리로 들려왔다. 게다가 추위도 부쩍 더해져, 늙은 스님은 잠들려 해도 잠들 수가 없다. 그래서 이불 속에서 말똥말똥하고 있으려니 문득 코가 여느 때 없이 근질근질한 것을 알아차렸다. 손을 대 보니 물이 오른 듯 부어 있다. 아무래도 거기만 열까지 있는 모양이다.

— 무리하게 짧게 한 탓에 병이 난 것인지도 모르지.

스님은 부처 앞에 향과 꽃을 올리는 듯한 공손한 손길로 코를 누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튿날 아침, 스님이 여느 때처럼 일찍 눈을 떠 보니, 절 안의 은행나무와 상수리나무가 하룻밤 사이에 잎을 떨구어 뜰은 황금을 깔아 놓은 듯 환하다. 탑 지붕에 서리가 내린 탓이리라. 아직 엷은 아침 해에 탑 꼭대기의 쇠바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젠치 스님은 덧문을 올린 마루에 서서 깊이 숨을 들이켰다.

거의 잊으려 하던 어떤 느낌이 다시 스님에게 돌아온 것은 이때다.

스님은 허둥지둥 코로 손을 가져갔다. 손에 닿는 것은 어젯밤의 짧은 코가 아니다. 윗입술 위에서 턱 밑까지 대여섯 치 넘게 늘어진, 옛날의 긴 코다. 스님은 코가 하룻밤 사이에 다시 본래대로 길어진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코가 짧아졌을 때와 똑같은 후련한 마음이 어디선지 모르게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 이렇게 되면 이제 아무도 비웃을 사람이 없을 것이 틀림없다.

스님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자기에게 속삭였다. 긴 코를 새벽녘 가을바람에 흔들거리면서.

(1916년 1월)

거미줄

1

어느 날의 일입니다. 부처님은 극락의 연못가를 혼자 어슬렁어슬렁 거니시고 계셨습니다. 연못에 피어 있는 연꽃은 하나같이 구슬처럼 새하얗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금빛 꽃술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끊임없이 둘레로 넘쳐 나오고 있습니다. 극락은 마침 아침인 모양입니다.

이윽고 부처님은 그 연못가에 멈춰 서시더니, 물 위를 덮고 있는 연잎 사이로 문득 아래쪽 모습을 내려다보셨습니다. 이 극락의 연못 밑은 바로 지옥 밑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수정 같은 물을 꿰뚫고 삼도천이며 바늘산의 풍경이 마치 들여다보는 유리로 보듯 또렷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지옥 밑바닥에 간다타라는 남자 하나가 다른 죄인들과 함께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간다타라는 남자는 사람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고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른 큰 도둑입니다만, 그래도 딱 하나 착한 일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언젠가 이 남자가 깊은 숲속을 지나가는데 작은 거미 한 마리가 길가를 기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간다타는 얼른 발을 들어 밟아 죽이려 했습니다만, "아니, 아니지, 이것도 작지만 목숨이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 목숨을 함부로 빼앗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가엾은 일이다" 하고 문득 마음을 고쳐먹고 끝내 그 거미를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지옥의 모습을 내려다보시면서 이 간다타가 거미를 살려 준 적이 있음을 떠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만한 착한 일을 한 값으로, 될 수 있으면 이 남자를 지옥에서 건져 주자고 생각하셨습니다. 마침 곁을 보니 비취빛 연잎 위에 극락의 거미가 한 마리 아름다운 은빛 줄을 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 거미줄을 살며시 손에 쥐시고, 구슬 같은 흰 연꽃 사이로 저 아래 지옥 밑바닥을 향해 곧장 그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2

한편 지옥 밑바닥의 피못에서 다른 죄인들과 함께 떴다 가라앉았다 하고 있던 것이 간다타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캄캄하고, 어쩌다 그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 있구나 싶으면 그것은 무시무시한 바늘산의 바늘이 번득이는 것이니, 그 막막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둘레는 무덤 속처럼 쥐 죽은 듯 조용해서, 어쩌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죄인이 내쉬는 희미한 한숨뿐입니다. 이것은 여기까지 떨어져 오는 사람이면 이미 갖가지 지옥의 형벌에 지칠 대로 지쳐, 울 힘조차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큰 도둑 간다타도 역시 피못의 피에 목이 메어 가며, 마치 죽어 가는 개구리처럼 그저 허우적거리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의 일입니다. 무심코 간다타가 고개를 들어 피못의 하늘을 바라보니, 그 고요한 어둠 속을 아득히 먼 하늘에서 은빛 거미줄이 마치 남의 눈에 띌까 두려워하듯 한 줄기 가늘게 빛나며 스르르 자기 위로 내려오고 있지 않겠습니까. 간다타는 이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이 줄에 매달려 어디까지고 올라가면 틀림없이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잘하면 극락에 들어갈 수조차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이제 바늘산으로 쫓겨 올라갈 일도 없어지고, 피못에 가라앉을 일도 있을 리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했으므로 간다타는 얼른 그 거미줄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기를 쓰고 위로 위로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본디 큰 도둑이니 이런 일에는 예전부터 아주 익숙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과 극락 사이는 몇만 리인지 모르니, 아무리 서둘러 보아야 쉽게 위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한참 오르는 사이에 끝내 간다타도 지쳐서 이제 한 뼘도 위로는 오를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선 한숨 돌릴 셈으로 줄 중간에 매달린 채 아득한 발밑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러자 기를 쓰고 오른 보람이 있어, 아까까지 자기가 있던 피못은 이제 어느새 어둠의 밑바닥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어렴풋이 빛나던 무시무시한 바늘산도 발밑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대로 올라가면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뜻밖에 어렵지 않을지 모릅니다. 간다타는 두 손을 거미줄에 감은 채, 여기 온 뒤로 몇 해 동안 내 본 적 없는 목소리로 "됐다. 됐다" 하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거미줄 아래쪽에는 수없이 많은 죄인들이 자기가 오른 뒤를 따라 마치 개미 행렬처럼 역시 위로 위로 한마음으로 기어 올라오고 있지 않겠습니까. 간다타는 이것을 보고 놀랍고 무서워서 한동안은 그저 바보처럼 입을 크게 벌린 채 눈만 굴리고 있었습니다. 자기 혼자라도 끊어질 듯한 이 가느다란 거미줄이 어떻게 저만한 사람 수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도중에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애써 여기까지 올라온 소중한 자기까지 본래의 지옥으로 거꾸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큰일입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죄인들은 몇백 몇천이나 캄캄한 피못 밑바닥에서 꾸역꾸역 기어올라, 가늘게 빛나는 거미줄을 한 줄로 늘어서서 부지런히 오르고 있습니다. 지금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줄은 한가운데서 두 동강이 나 떨어지고 말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간다타는 큰 소리를 내어 "이놈들, 죄인들아. 이 거미줄은 내 것이다. 너희는 대체 누구에게 물어보고 올라왔느냐.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고 고함쳤습니다.

바로 그 순간입니다. 여태 아무렇지도 않던 거미줄이 갑자기 간다타가 매달려 있는 데서 뚝 소리를 내며 끊어졌습니다. 그러니 간다타도 견딜 수 없습니다. 앗 할 사이도 없이 바람을 가르며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순식간에 어둠의 밑바닥으로 거꾸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뒤에는 그저 극락의 거미줄이 반짝반짝 가늘게 빛나며, 달도 별도 없는 하늘 한복판에 짧게 드리워져 있을 뿐입니다.

3

부처님은 극락의 연못가에 서서 이 처음부터 끝까지를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만, 이윽고 간다타가 피못 밑바닥으로 돌처럼 가라앉고 말자 슬픈 얼굴을 하시며 다시 어슬렁어슬렁 거닐기 시작하셨습니다. 자기만 지옥에서 빠져나오려 한 간다타의 매정한 마음이, 그리고 그 마음에 걸맞은 벌을 받아 본래의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 부처님 눈에는 딱하게 여겨지신 것이겠지요.

그러나 극락 연못의 연꽃은 그런 일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 구슬 같은 흰 꽃은 부처님 발치 둘레에서 한들한들 꽃받침을 움직이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금빛 꽃술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끊임없이 둘레로 넘쳐 나오고 있습니다. 극락도 이제 한낮에 가까워진 모양입니다.

(1918년 4월 16일)

지옥변

1

호리카와 영주님 같은 분은 이제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아마 둘은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소문에 듣자니 그분이 태어나시기 전에는 대위덕명왕의 모습이 어머님의 꿈자리에 서셨다고들 합니다만, 아무튼 타고나기를 여느 사람과는 다르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하신 일치고 저희 생각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장 호리카와 저택의 규모만 보아도 웅장하다고 할지 호방하다고 할지, 도저히 저희 좁은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할 과감한 데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또 그런 것을 이러쿵저러쿵 따지며 영주님의 성품과 행실을 진시황이나 수양제에 견주는 자도 있습니다만, 그것이야말로 속담에 이르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겠지요. 그분의 뜻은 결코 그렇게 혼자만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아랫사람들 일까지 헤아리시는, 말하자면 천하와 더불어 즐기신다고나 할 큰 도량이 있으셨습니다.

그러하니 니조오미야의 백귀야행을 만나셨을 때도 별 탈이 없으셨던 것이겠지요. 또 무쓰의 시오가마 풍경을 옮겨 놓은 것으로 이름난 저 히가시산조의 가와라인에 밤마다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던 도루 좌대신의 넋조차, 영주님의 호통을 듣고는 자취를 감추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만한 위엄이시니, 그 무렵 도성 안의 남녀노소가 영주님이라 하면 마치 부처가 다시 오신 것처럼 우러렀던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언젠가 궁중 매화 잔치에서 돌아오시는 길에 수레의 소가 풀려나 마침 지나가던 노인을 다치게 했을 때조차, 그 노인은 두 손을 모아 영주님의 소에 받힌 것을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그런 터이니 영주님 한평생에는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일이 퍽 많았습니다. 큰 잔치의 선물로 흰말만 서른 마리를 내리신 적도 있고, 나가라 다리의 다릿기둥에 아끼시던 아이를 세우신 적도 있고, 또 화타의 의술을 이어받은 중국 승려에게 넓적다리의 종기를 째게 하신 적도 있고 — 하나하나 세고 있자면 도저히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화 가운데서도 지금은 집안의 보물이 된 지옥변 병풍의 내력만큼 무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여느 때는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으시는 영주님조차 그때만은 과연 놀라신 듯했습니다. 하물며 곁에서 모시던 저희가 넋이 나갈 만큼 느낀 것은 말씀드릴 것도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저 같은 사람은 영주님을 이십 년이나 모셔 왔습니다만, 그런데도 그런 끔찍한 구경을 만난 일은 그때 말고는 두 번 다시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그 지옥변 병풍을 그린 요시히데라는 화공에 대해 미리 말씀드려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2

요시히데라고 하면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그 남자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무렵 붓을 들면 요시히데 위에 설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는 말을 들을 만큼 이름난 화공입니다. 그 일이 있었을 때는 이럭저럭 쉰 고개에 손이 닿아 있었을까요. 보기에는 그저 키 작고 뼈와 가죽만 남게 여윈, 심술궂어 보이는 늙은이였습니다. 그것이 영주님 저택에 올 때는 곧잘 정향빛으로 물들인 겉옷에 두건을 쓰고 있었습니다만, 사람됨은 지극히 상스러운 편이라, 어찌 된 셈인지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게 입술이 유난히 붉은 것이 그 위에 또 섬뜩하고 짐승 같은 느낌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그중에는 저것은 붓을 핥아서 붉은 물이 든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어떤지 모를 일입니다. 하기야 그보다 입이 험한 누구누구는 요시히데의 몸가짐이 원숭이 같다면서 「원숭이 요시히데」라는 별명까지 붙인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 원숭이 요시히데라고 하니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무렵 영주님 저택에는 열다섯 된 요시히데의 외동딸이 시녀로 들어와 있었습니다만, 이 아이는 또 낳아 준 아비와는 닮지도 않은 싹싹한 처녀였습니다. 게다가 일찍 어미를 여읜 탓인지 속이 깊고 나이보다 철이 들고 영리하게 타고나, 어린데도 이것저것 잘 살피는 아이였으므로 마님을 비롯해 다른 시녀들에게도 귀염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때 단바 지방에서 사람을 잘 따르는 원숭이 한 마리를 바친 이가 있었는데, 마침 장난이 한창이던 도련님이 거기에 요시히데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가만있어도 그 원숭이 꼴이 우스운 판에 그런 이름이 붙었으니, 저택 안에서 웃지 않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도 웃기만 하면 좋겠습니다만, 다들 재미 삼아 뜰의 소나무에 올라갔다는 둥 방의 다다미를 더럽혔다는 둥 그때마다 요시히데야, 요시히데야 하고 불러 대고는 어떻게든 못살게 굴려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의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요시히데의 딸이 편지를 매단 홍매화 가지를 들고 긴 복도를 지나가는데, 저편 미닫이 너머에서 그 새끼 원숭이 요시히데가 아마 발이라도 삐었던 모양인지 여느 때처럼 기둥으로 뛰어오를 기운도 없이 절뚝절뚝 절면서 한달음에 달아나 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뒤에서는 회초리를 치켜든 도련님이 "귤 도둑놈, 게 섰거라. 게 섰거라" 하시며 쫓아오시지 않겠습니까. 요시히데의 딸은 이것을 보고 잠깐 망설인 듯했습니다만, 마침 그때 달아나 온 원숭이가 치맛자락에 매달리며 애처로운 소리로 울부짖자 — 갑자기 가엾다는 마음을 누를 수 없게 되었던 것이겠지요. 한 손에 매화 가지를 든 채 한 손으로 보랏빛 겉옷 소매를 가볍게 펼치더니, 부드럽게 그 원숭이를 안아 올리고 도련님 앞에 허리를 굽히며 "황송하오나 짐승이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맑은 목소리로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도련님 쪽은 기세를 올려 달려오시던 참이라 굳은 얼굴을 하시고, 두세 번 발을 구르시며,

"어째서 감싸느냐. 그 원숭이는 귤 도둑이다."

"짐승이옵니다. 그러니……"

딸은 다시 한번 이렇게 되뇌었습니다만, 이윽고 쓸쓸히 웃고는,

"게다가 요시히데라고 하면 아비가 매를 맞는 것 같아서 도무지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마음먹은 듯 아뢰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그 도련님도 고집을 꺾으셨던 것이겠지요.

"그러냐. 아비의 목숨을 비는 것이라면 굽혀서 용서해 주기로 하자."

마지못해 이렇게 이르시고는 회초리를 그 자리에 버리시더니, 본래 오셨던 미닫이 쪽으로 그대로 돌아가고 마셨습니다.

3

요시히데의 딸과 이 새끼 원숭이의 사이가 좋아진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딸은 아가씨께 받은 금방울을 고운 다홍 끈에 달아 그것을 원숭이 목에 걸어 주었고, 원숭이는 또 어떤 일이 있어도 좀처럼 딸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언젠가 딸이 고뿔 기운으로 자리에 누웠을 때도 새끼 원숭이는 얌전히 그 머리맡에 앉아, 마음 탓인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신 손톱을 깨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또 묘한 것이, 아무도 여태처럼 이 새끼 원숭이를 못살게 구는 이가 없습니다. 아니, 도리어 차츰 귀여워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도련님까지도 이따금 감이며 밤을 던져 주셨을 뿐 아니라, 무사 누군가가 이 원숭이를 걷어찼을 때는 몹시 성을 내셨다고 합니다. 그 뒤 영주님이 일부러 요시히데의 딸에게 원숭이를 안고 앞에 나오라고 분부하신 것도, 이 도련님이 성내셨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뒤라고들 했습니다. 그 김에 자연히 딸이 원숭이를 귀여워하는 까닭도 귀에 들어가셨던 것이겠지요.

"효성스러운 것이로다. 상을 내리마."

이런 분부로 딸은 그때 붉은 옷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옷을 또 흉내를 내어 원숭이가 공손히 머리 위로 받들어 올렸으므로, 영주님의 기분은 한결 좋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영주님이 요시히데의 딸을 아끼신 것은 오로지 이 원숭이를 귀여워한 그 효성과 은애의 정을 기리신 것이지, 결코 세상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처럼 여색을 좋아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기야 그런 소문이 난 데에도 무리가 아닌 구석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또 뒤에 가서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는 그저 영주님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화공 나부랭이의 딸 따위에게 마음을 두실 분이 아니라는 것만 말씀드려 두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요시히데의 딸은 낯이 서서 물러 나왔습니다만, 본디 영리한 계집이니 다른 시녀들에게 채신없는 시샘을 사는 일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 뒤로 원숭이와 함께 이래저래 귀염을 받아, 특히 아가씨 곁에서는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나들이 수레의 수행에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딸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 두고, 이제 다시 아비 요시히데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과연 원숭이 쪽은 이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에게 귀염을 받게 되었습니다만, 정작 요시히데는 여전히 누구에게나 미움을 받아 변함없이 뒤에서는 원숭이 요시히데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또 저택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실제로 요카와의 승도님도 요시히데라고 하면 마귀라도 만나신 듯 낯빛을 바꾸시고 미워하셨습니다. (하기야 이것은 요시히데가 승도님의 행실을 우스개 그림으로 그렸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만, 아무래도 아랫것들의 소문이니 확실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아무튼 그 남자의 나쁜 평판은 어느 쪽에 여쭈어 보아도 그런 가락뿐입니다. 만약 나쁘게 말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두어 사람의 화공 동료이거나 아니면 그 남자의 그림만 알 뿐 그 남자의 사람됨은 모르는 이들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요시히데에게는 겉모습이 상스러웠을 뿐 아니라 더 사람에게 미움받을 나쁜 버릇이 있었으니, 그것도 모두 제가 지은 업이라고 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4

그 버릇이라는 것은 인색하고, 탐욕스럽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게으르고, 욕심 사납고 — 아니 그중에서도 특히 심한 것은 거만하고 우쭐대며 늘 이 나라 으뜸가는 화공이라는 것을 코끝에 매달고 다니는 일이겠지요. 그것도 그림에 대해서만이라면 그나마 낫겠습니다만, 그 남자가 지지 않으려 들면 세상의 관습이니 관례니 하는 것까지 죄다 업신여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해 요시히데의 제자였던 남자의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날 어느 댁에서 이름난 히가키의 무당에게 원령이 씌어 무시무시한 신탁이 내렸을 때도, 그 남자는 딴 데 귀를 두고 마침 있던 붓과 먹으로 그 무당의 소름 끼치는 얼굴을 정성껏 옮겨 그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원령의 앙갚음도 그 남자 눈으로 보면 아이 속임수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그런 남자이니 길상천을 그릴 때는 천한 떠돌이 광대의 얼굴을 옮기고, 부동명왕을 그릴 때는 건달 포졸의 모습을 본떠 그리는 등 온갖 불경한 짓을 했습니다만, 그래도 당사자를 나무라면 "요시히데가 그린 신과 부처가 그 요시히데에게 벌을 내린다니 별소리를 다 듣겠소" 하고 시치미를 떼지 않겠습니까. 이 지경이니 제자들도 어이가 없어, 그중에는 뒷날이 무서워 서둘러 떠나 버린 이도 적지 않았던 듯합니다. —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만이 겹겹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때 천하에 자기만큼 훌륭한 사람은 없다고 여기던 남자입니다.

따라서 요시히데가 그림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라앉아 있었는지는 말씀드릴 것도 없겠지요. 하기야 그 그림조차 그 남자의 것은 붓놀림이든 색이든 여느 화공과는 아주 달랐으므로, 사이가 나쁜 화공 동료들 사이에서는 사기꾼이라는 평판도 제법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무리의 말인즉, 가와나리니 가나오카니 하는 옛 명인의 붓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 널문의 매화꽃이 달밤마다 향기를 풍겼다느니 병풍의 궁중 사람이 피리 부는 소리까지 들렸다느니 하는 우아한 소문이 도는 법인데, 요시히데의 그림이 되면 언제나 반드시 섬뜩하고 괴상한 평판밖에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 남자가 류가이절 문에 그린 오취생사 그림만 해도, 밤이 깊어 문 아래를 지나가면 천인이 한숨 쉬는 소리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아니, 그중에는 죽은 사람이 썩어 가는 냄새를 맡았다는 이마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주님 분부로 그린 시녀들의 초상 같은 것도, 그 그림에 옮겨진 사람은 하나같이 삼 년도 못 되어 다들 넋이 빠진 듯한 병이 들어 죽었다지 않습니까. 나쁘게 말하는 이들 말로는 그것이 요시히데의 그림이 그릇된 길에 떨어져 있다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 어깃장 놓기 좋아하는 남자이니, 그것이 도리어 요시히데에게는 큰 자랑이라, 언젠가 영주님이 농담으로 "너는 아무래도 흉한 것을 좋아하는가 보구나" 하셨을 때도,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붉은 입술로 씩 섬뜩하게 웃으며 "그러하옵니다. 어설픈 화공들이야 흉한 것의 아름다움 따위는 알 턱이 없사옵니다" 하고 건방지게 아뢰었습니다. 아무리 이 나라 으뜸가는 화공이라 한들 용케도 영주님 앞에 나와 그런 큰소리를 쳤습니다. 아까 끌어댄 제자가 남몰래 스승에게 「지라에이주」라는 별명을 붙여 그 잘난 체를 비웃고 있었습니다만, 그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아시겠습니다만 「지라에이주」라 함은 옛날 중국에서 건너온 천구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요시히데에게조차 — 이 뭐라 말할 수 없는 비뚤어진 요시히데에게조차 단 하나 사람다운, 정 있는 데가 있었습니다.

5

무슨 말인가 하면, 요시히데가 그 외동딸 시녀를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귀여워한 일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딸도 지극히 마음이 곱고 아비를 생각하는 계집이었습니다만, 그 남자의 자식 사랑도 결코 그에 못지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딸의 옷이니 머리 장식이니 하는 일이라면, 어느 절의 시주에도 돈 한 푼 낸 적 없는 그 남자가 돈에는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 없이 마련해 준다는 것이니, 거짓말 같은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시히데가 딸을 귀여워하는 것은 그저 귀여워할 뿐, 머지않아 좋은 사위를 들이자는 따위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딸에게 함부로 수작이라도 거는 자가 있으면 도리어 거리의 건달들이라도 끌어모아 몰매쯤은 안기고도 남을 속셈입니다. 그러니 그 딸이 영주님의 분부로 시녀로 들어갔을 때도 늙은 아비 쪽은 몹시 못마땅해서, 한동안은 앞에 나와도 잔뜩 찌푸리고만 있었습니다. 영주님이 딸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려 어버이가 마다하는 것도 아랑곳없이 불러들이셨다는 소문은 아마 이런 꼴을 본 이들의 짐작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하기야 그 소문은 거짓이라 해도, 자식 사랑 하나로 요시히데가 내내 딸이 내려오기를 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언젠가 영주님 분부로 동자 문수보살을 그렸을 때도 아끼시던 아이의 얼굴을 옮겨 훌륭하게 되었으므로, 영주님도 몹시 만족하시어,

"상으로 바라는 것을 주마. 사양 말고 말해라" 하는 고마운 말씀이 내렸습니다. 그러자 요시히데는 황송해하며 무슨 말을 할까 했더니,

"부디 제 딸을 내려 주시옵소서" 하고 거리낌 없이 아뢰었습니다. 다른 댁이라면 몰라도 호리카와 영주님 곁에서 모시고 있는 것을, 아무리 귀엽다고 한들 이처럼 버릇없이 물러나게 해 달라고 비는 자가 어느 나라에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도량 넓으신 영주님도 다소 언짢으셨던 모양으로, 한동안은 그저 잠자코 요시히데의 얼굴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만, 이윽고,

"그것은 아니 된다" 하고 뱉듯이 이르시고는 갑자기 그대로 일어서고 마셨습니다. 이런 일이 앞뒤로 네댓 번쯤 있었을까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영주님이 요시히데를 보시는 눈은 그때마다 차츰 차가워지셨던 듯합니다. 그러자 또 그런 일 때문인지 딸 쪽은 아비의 신세가 걱정되어서인지, 방에 물러나 있을 때면 곧잘 겉옷 소매를 깨물고 훌쩍훌쩍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주님이 요시히데의 딸에게 마음을 두셨다는 소문이 점점 퍼지게 된 것이겠지요. 그중에는 지옥변 병풍의 내력도 실은 딸이 영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자도 있습니다만, 본디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습니다.

저희 눈으로 보면 영주님이 요시히데의 딸을 내려 주지 않으신 것은 오로지 딸의 신세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이고, 그렇게 고집스러운 아비 곁으로 보내느니 저택에 두어 아무 불편 없이 지내게 해 주자는 고마운 생각이셨던 듯합니다. 물론 마음씨 고운 그 딸을 아끼신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색을 좋아하셨다고 하는 것은 아마 억지로 갖다 붙인 말이겠지요. 아니,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정도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렇게 딸 일로 요시히데에 대한 영주님의 마음이 퍽 나빠졌을 때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영주님은 갑자기 요시히데를 부르시어 지옥변 병풍을 그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6

지옥변 병풍이라 하면 저는 벌써 그 무서운 그림의 광경이 눈앞에 또렷이 떠오르는 것만 같습니다.

같은 지옥변이라 해도 요시히데가 그린 것은 다른 화공의 것에 견주면 우선 짜임새부터 닮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병풍 한 첩 귀퉁이에 작게 시왕을 비롯한 권속들의 모습을 그려 놓고, 나머지는 온통 홍련 대홍련의 사나운 불길이 칼산 칼나무마저 문드러질까 싶을 만큼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중국풍 저승 관리들의 옷차림이 점점이 누런빛과 쪽빛을 수놓은 것 말고는, 어디를 보아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 빛이고, 그 속을 마치 만(卍) 자처럼 먹을 뿌린 검은 연기와 금가루를 날린 불똥이 미친 듯 춤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퍽 사람 눈을 놀라게 하는 붓기운입니다만, 그 위에 또 업화에 타며 이리저리 뒹굴며 괴로워하는 죄인도 거의 하나같이 여느 지옥 그림에 있는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시히데는 이 많은 죄인 가운데 위로는 높은 벼슬아치부터 아래로는 거지와 천민까지 온갖 신분의 사람을 옮겨 그려 넣었기 때문입니다. 관복 차림의 위엄 있는 궁중 벼슬아치, 다섯 겹 옷을 입은 아리따운 젊은 시녀, 염주를 건 염불승, 굽 높은 나막신을 신은 무사 집안 서생, 긴 옷을 입은 계집아이, 흰 종이 술을 치켜든 음양사 — 하나하나 세고 있자면 도저히 끝이 없겠지요. 아무튼 그런 갖가지 사람들이 불과 연기가 거꾸로 치솟는 속에서 소머리 말머리 옥졸들에게 시달리며, 큰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어지러이 사방팔방으로 달아나며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쇠스랑에 머리채가 감겨 거미보다 더 손발을 오그리고 있는 여자는 무당 따위일까요. 창에 가슴을 꿰뚫려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남자는 지방관 나부랭이임에 틀림없겠지요. 그 밖에 어떤 이는 쇠 채찍에 맞고, 어떤 이는 천 사람이 끌 바위에 눌리고, 어떤 이는 괴조의 부리에 걸리고, 또 어떤 이는 독룡의 턱에 물리고 — 형벌 또한 죄인의 수만큼 몇 가지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난히 하나 눈에 띄게 끔찍해 보이는 것은, 마치 짐승의 어금니 같은 칼나무 꼭대기를 반쯤 스치며 (그 칼나무 우듬지에도 많은 망자가 줄줄이 온몸을 꿰뚫린 채 있었습니다만) 하늘 한복판에서 떨어져 내리는 수레 한 채이겠지요. 지옥의 바람에 불려 올라간 그 수레의 발 안에는 후궁에나 견줄 만큼 곱게 차려입은 시녀가 긴 검은 머리를 불길 속에 나부끼며 흰 목을 젖힌 채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만, 그 시녀의 모습이며 활활 타오르는 수레며, 어느 하나 염열지옥의 형벌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넓은 화면의 무서움이 이 한 사람에게 몰려 있다고나 할까요. 이것을 보는 이의 귓속에는 절로 소름 끼치는 아우성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을 만큼 신들린 솜씨였습니다.

아아, 이것입니다. 이것을 그리기 위해 그 무서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요시히데라 한들 어떻게 이토록 생생하게 지옥의 고통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그 남자는 이 병풍 그림을 마친 값으로 목숨까지 버리는 참혹한 일을 당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의 지옥은 이 나라 으뜸가는 화공 요시히데가 언젠가 제 발로 떨어져 갈 지옥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진기한 지옥변 병풍 이야기를 하는 데 너무 서두른 나머지 어쩌면 이야기 순서를 뒤집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다시 이어서, 영주님께 지옥 그림을 그리라는 분부를 받은 요시히데의 이야기로 옮기겠습니다.

7

요시히데는 그 뒤 대여섯 달 동안 저택에는 들르지도 않고 병풍 그림에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만한 자식 사랑이 막상 그림을 그린다는 마당이 되면 딸의 얼굴을 볼 마음조차 없어진다니 이상한 일 아닙니까. 아까 말씀드린 제자의 이야기로는, 아무튼 그 남자는 일에 손을 대면 마치 여우라도 들린 것처럼 되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 무렵 소문에는 요시히데가 그림으로 이름을 이룬 것은 복덕대신에게 빌었기 때문이며, 그 증거로 그 남자가 그림을 그리는 자리를 남몰래 구석에서 엿보면 반드시 어둑하게 신령한 여우의 모습이 한 마리가 아니라 앞뒤 좌우로 몰려 있는 것이 보인다고 하는 이마저 있었습니다. 그만한 사람이니 막상 붓을 들면 그 그림을 다 그린다는 것 말고는 무엇이고 죄다 잊어버리는 것이겠지요. 밤낮으로 방 하나에 틀어박힌 채 좀처럼 햇빛도 본 적이 없습니다. — 특히 지옥변 병풍을 그릴 때에는 이렇게 빠져드는 것이 유난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가 낮에도 덧문을 내린 방 안에서 등잔대 불빛 아래 비법의 물감을 개거나, 제자들에게 이 옷 저 옷을 갖가지로 차려입혀 그 모습을 하나하나 정성껏 옮겨 그리거나 — 그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정도의 별난 일이라면 굳이 저 지옥변 병풍을 그리지 않더라도, 일에 손을 대고 있을 때라고만 하면 언제든 하고도 남을 남자입니다. 아니, 실제로 류가이절의 오취생사 그림을 그릴 때 같은 때는 여느 사람이라면 일부러 눈을 돌리고 지나갈 길가의 주검 앞에 느긋이 주저앉아, 반쯤 썩어 가는 얼굴이며 손발을 머리카락 한 올 틀리지 않게 옮겨 그려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유난히 빠져든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이냐고, 아무래도 알 수 없으신 분도 계시겠지요. 그것은 지금 자세한 것을 말씀드릴 틈은 없습니다만, 중요한 이야기만 들려 드리자면 대체로 이런 형편입니다.

요시히데의 제자 하나가 (이 사람도 역시 앞서 말씀드린 남자입니다만) 어느 날 물감을 개고 있는데 갑자기 스승이 와서,

"나는 좀 낮잠을 자려 한다. 그런데 요즘은 아무래도 꿈자리가 사납구나"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딱히 드문 일도 무엇도 아니므로 제자는 손을 멈추지 않고 그저,

"그러십니까" 하고 예사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시히데는 여느 때 없이 쓸쓸한 얼굴로,

"그래서 말인데, 내가 낮잠을 자는 동안 내내 머리맡에 앉아 있어 주었으면 한다" 하고 조심스레 청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는 여느 때 없이 스승이 꿈 따위를 마음에 두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만, 그것도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므로,

"그리하겠습니다" 하니, 스승은 아직도 걱정스러운 듯,

"그럼 곧 안으로 와 다오. 다만 뒤에 다른 제자가 오더라도 내가 자는 데로는 들이지 않도록" 하고 머뭇거리며 일렀습니다. 안이라 함은 그 남자가 그림을 그리는 방으로, 그날도 밤처럼 문을 죄다 닫아 건 속에 어슴푸레 불을 밝힌 채, 아직 숯붓으로 밑그림만 잡아 놓은 병풍이 빙 둘러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오자 요시히데는 팔을 베고 마치 지칠 대로 지친 사람처럼 새근새근 잠들고 말았습니다만,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머리맡에 있던 제자의 귀에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섬뜩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8

그것이 처음에는 그저 소리였습니다만, 한참 있자 차츰 끊어질 듯한 말이 되어, 말하자면 물에 빠져 가는 사람이 물속에서 신음하듯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뭐, 나더러 오라는 말이냐. — 어디로 — 어디로 오라고? 지옥으로 오라고. 염열지옥으로 오라고. — 누구냐. 그렇게 말하는 너는. — 너는 누구냐 — 누군가 했더니"

제자는 저도 모르게 물감 개던 손을 멈추고 조심조심 스승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살펴보니, 주름투성이 얼굴이 하얘진 데다 굵은 땀방울이 배어 나오고, 마른 입술에 이가 성긴 입을 헐떡이듯 크게 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입안에서 무언가 실이라도 매달아 잡아당기고 있나 싶을 만큼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 싶더니, 그것이 그 남자의 혀였다지 않습니까. 끊어질 듯한 말은 물론 그 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누군가 했더니 — 음, 너로구나. 나도 너이려니 했다. 뭐, 데리러 왔다고? 그러면 오너라. 지옥으로 오너라. 지옥에는 — 지옥에는 내 딸이 기다리고 있다."

그때 제자의 눈에는 어렴풋한 기괴한 그림자가 병풍 면을 스치며 스멀스멀 내려오는 것처럼 보일 만큼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제자는 곧 요시히데에게 손을 대어 있는 힘을 다해 흔들어 깨웠습니다만, 스승은 여전히 잠결에 혼잣말을 이어 가며 좀처럼 깰 낌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는 마음먹고 곁에 있던 붓 씻는 그릇의 물을 철썩 그 남자의 얼굴에 끼얹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니 이 수레를 타고 오너라 — 이 수레를 타고 지옥으로 오너라 —" 하는 말이 그와 동시에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으로 바뀌었다 싶더니, 겨우 요시히데는 눈을 뜨고 바늘에 찔린 것보다 더 황급하게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만, 아직 꿈속의 괴상한 것들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 것이겠지요. 한동안은 그저 무서운 눈빛으로 여전히 입을 크게 벌린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만, 이윽고 제정신이 든 낯빛으로,

"이제 됐으니 저리로 가 다오" 하고 이번에는 참으로 쌀쌀맞게 이르는 것입니다. 제자는 이럴 때 거스르면 언제나 크게 꾸지람을 듣는 터라 서둘러 스승의 방에서 나왔습니다만, 아직 환한 바깥 햇빛을 보았을 때는 마치 자기가 악몽에서 깨어난 듯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래도 나은 편으로, 그 뒤 한 달쯤 지나서 이번에는 또 다른 제자가 일부러 안으로 불려 갔더니, 요시히데는 역시 어둑한 기름불 빛 속에서 붓을 깨물고 있었습니다만, 대뜸 제자 쪽으로 돌아앉아,

"수고스럽겠지만 또 벗어 주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때까지도 이따금 스승이 이르던 일이므로 제자가 얼른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되자, 그 남자는 묘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나는 쇠사슬에 묶인 사람이 보고 싶은데, 안됐지만 잠깐 동안 내가 하는 대로 있어 주지 않겠느냐" 하고, 그러면서도 조금도 안됐다는 낯빛 따위는 보이지 않고 차갑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디 이 제자는 붓 따위를 잡기보다 칼이라도 잡는 편이 나을 듯한 다부진 젊은이였습니다만, 여기에는 과연 놀랐던 모양으로, 뒷날까지도 그때 이야기를 할 때면 "이것은 스승이 미쳐서 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고 되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시히데 쪽에서는 상대가 꾸물거리는 것이 못마땅해졌던 것이겠지요. 어디서 꺼냈는지 가느다란 쇠사슬을 잘그락잘그락 끌어당기면서 거의 덤벼들 듯한 기세로 제자의 등에 올라타더니, 다짜고짜 그대로 두 팔을 비틀어 올려 칭칭 감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그 사슬 끝을 매정하게 홱 잡아당겼으니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제자의 몸은 그 기세에 밀려 요란하게 마루를 울리며 데굴 하고 그 자리에 옆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습니다.

9

그때 제자의 꼴은 마치 술독을 굴려 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손도 발도 참혹하게 꺾여 있으니 움직이는 것은 목뿐입니다. 거기에 살진 온몸의 피가 사슬에 막혀 돌지 못하니, 얼굴이고 몸통이고 온통 살갗 빛이 벌겋게 달아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시히데에게는 그것도 딱히 마음에 걸리지 않는 듯, 그 술독 같은 몸뚱이 둘레를 이리저리 돌며 바라보면서 똑같은 본뜬 그림을 몇 장이고 그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묶여 있는 제자의 몸이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굳이 따로 말씀드릴 것도 없겠지요.

그러나 만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괴로움은 아마 그 뒤로도 더 이어졌을 것입니다. 다행히 (라기보다 어쩌면 불행히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한참 있자 방 구석에 있는 항아리 그늘에서 마치 검은 기름 같은 것이 한 줄기 가늘게 굽이치며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꽤나 끈적이는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습니다만, 차츰 매끄럽게 미끄러지기 시작해 이윽고 번들번들 빛나며 코앞까지 흘러온 것을 보자, 제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고,

"뱀이 — 뱀이"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때는 정말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만, 그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뱀은 실제로 조금만 더 하면 사슬이 파고든 목의 살에 그 차가운 혀끝을 대려는 참이었던 것입니다. 이 뜻밖의 일에는 아무리 비뚤어진 요시히데라도 흠칫했던 것이겠지요. 허둥지둥 붓을 내던지며 순간 몸을 굽혔다 싶더니, 잽싸게 뱀의 꼬리를 붙잡아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았습니다. 뱀은 매달린 채로도 고개를 쳐들고 빙글빙글 제 몸을 감아 올렸습니다만, 아무리 해도 그 남자의 손까지는 닿지 않습니다.

"네놈 때문에 아까운 한 붓을 그르쳤구나."

요시히데는 분한 듯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뱀은 그대로 방 구석의 항아리 속에 던져 넣고, 그러고 나서 자못 마지못한 듯 제자의 몸에 감긴 사슬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것도 그저 풀어 주었다는 것뿐이지, 정작 제자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습니다. 아마 제자가 뱀에게 물리는 것보다 본뜬 그림 한 붓을 그르친 것이 분했던 것이겠지요. — 뒤에 들으니 이 뱀도 역시 모습을 옮겨 그리려고 일부러 그 남자가 기르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만한 이야기를 들으신 것만으로도 요시히데의 미친 듯한, 섬뜩하게 빠져드는 모양은 대충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 이번에는 아직 열서넛밖에 안 된 제자가 역시 지옥변 병풍 탓에 말하자면 목숨까지도 잃을 뻔한 무서운 일을 당했습니다. 그 제자는 타고나기를 살결이 흰 계집애 같은 아이였습니다만, 어느 날 밤 무심코 스승의 방에 불려 가 보니, 요시히데는 등잔불 아래에서 손바닥에 무언가 비릿한 고기를 올려놓고 처음 보는 새 한 마리를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크기는 우선 여느 고양이만이나 될까요. 그러고 보면 귀처럼 양쪽으로 뻗친 깃털이며 호박빛을 띤 크고 둥근 눈이며, 보기에도 어쩐지 고양이를 닮아 있었습니다.

10

본디 요시히데라는 남자는 무엇이든 자기가 하는 일에 참견하는 것을 몹시 싫어해서, 아까 말씀드린 뱀도 그렇습니다만, 자기 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런 일은 일절 제자들에게도 알린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때는 책상 위에 해골이 놓여 있고, 어떤 때는 또 은 사발이며 옻칠한 굽다리 그릇이 늘어서 있고, 그때 그리는 그림에 따라 퍽 뜻밖의 물건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느 때는 이런 물건을 대체 어디에 간수해 두는지, 그것은 또 아무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 남자가 복덕대신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소문도 하나는 분명 그런 일이 빌미가 되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제자는 책상 위의 그 괴이한 새도 역시 지옥변 병풍을 그리는 데 쓰이는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스승 앞에 조아려 "무슨 볼일이십니까" 하고 공손히 아뢰니, 요시히데는 마치 그것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어떠냐. 잘 길들지 않았느냐" 하고 새 쪽으로 턱짓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이라 하는 것입니까. 저는 여태 본 적이 없습니다만."

제자가 이렇게 말하면서 이 귀 달린 고양이 같은 새를 섬뜩한 듯 힐끔힐끔 바라보니, 요시히데는 여전히 여느 때처럼 비웃는 듯한 말투로,

"뭐, 본 적이 없다고? 도읍에서 자란 인간은 그래서 딱하다. 이것은 두어 날 전에 구라마의 사냥꾼이 나에게 준 수리부엉이라는 새다. 다만 이만큼 길든 것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 남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 마침 먹이를 다 먹은 수리부엉이의 등털을 살며시 아래에서 쓸어 올렸습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입니다. 새는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로 짧게 한 번 울었다 싶더니, 순식간에 책상 위에서 날아올라 두 발의 발톱을 세운 채 다짜고짜 제자의 얼굴로 덤벼들었습니다. 만약 그때 제자가 소매를 치켜들어 황급히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상처 한둘은 입고 말았을 것입니다. 앗 하면서 그 소매를 휘둘러 쫓아내려 하는 참에, 수리부엉이는 그 틈을 노려 부리를 딱딱거리며 또 한 번 내리찍고 — 제자는 스승 앞인 것도 잊고 일어서서 막고 주저앉아 쫓으며, 저도 모르게 좁은 방 안을 이리저리 달아나며 헤맸습니다. 괴이한 새도 물론 그를 따라 높이 낮게 날며, 틈만 있으면 곧장 눈을 노리고 날아옵니다. 그때마다 푸드덕푸드덕 무시무시하게 날개를 울리는 것이, 낙엽 냄새인지 폭포의 물보라인지 아니면 또 원숭이 술이 쉰 김인지 무언가 괴이한 것의 기운을 불러 그 섬뜩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 제자도 어둑한 기름불 빛조차 어렴풋한 달빛인가 싶어, 스승의 방이 그대로 먼 산속의 요기에 갇힌 골짜기 같은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더랍니다.

그러나 제자가 무서웠던 것은 그저 수리부엉이에게 덮친다는 그 일만이 아닙니다. 아니, 그보다 한층 소름이 끼쳤던 것은 스승 요시히데가 그 소동을 차갑게 바라보면서 천천히 종이를 펴고 붓을 핥아, 계집애 같은 소년이 괴이한 새에게 시달리는 소름 끼치는 꼴을 옮겨 그리고 있던 일입니다. 제자는 한눈에 그것을 보자 이내 뭐라 말할 수 없는 무서움에 쫓겨, 실제로 한때는 스승 손에 죽는 것이 아닌가 하고까지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11

실제로 스승 손에 죽는다는 일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실은 그날 밤 일부러 제자를 불러들인 것부터가 수리부엉이를 부추겨 제자가 달아나며 헤매는 꼴을 옮겨 그리려는 속셈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제자는 스승의 낌새를 한눈에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두 소매로 머리를 감싸며, 자기도 무어라 했는지 모를 비명을 지르고 그대로 방 구석 미닫이 아래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 서슬에 요시히데도 무언가 다급한 소리를 지르며 일어선 낌새였습니다만, 이내 수리부엉이의 날갯소리가 아까보다 한층 사나워지고 물건이 넘어지는 소리며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여기에는 제자도 다시 한번 정신을 잃고, 저도 모르게 감싸고 있던 머리를 들어 보니, 방 안은 어느새 캄캄해져 있고 스승이 제자들을 불러 대는 소리가 그 속에서 짜증스럽게 나고 있습니다.

이윽고 제자 하나가 멀찍이서 대답하고, 그러고는 등불을 치켜들고 서둘러 왔습니다만, 그 그을음 냄새 나는 불빛으로 보니 등잔대가 넘어져 마루도 다다미도 온통 기름투성이가 된 자리에 아까의 수리부엉이가 한쪽 날개만 괴로운 듯 퍼덕이며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요시히데는 책상 건너편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채 과연 어이없다는 얼굴로 무언가 남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중얼 읊고 있었습니다. — 그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 수리부엉이의 몸에는 새까만 뱀이 한 마리 목에서 한쪽 날개에 걸쳐 칭칭 감겨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제자가 주저앉는 서슬에 거기 있던 항아리를 엎어, 그 속의 뱀이 기어 나온 것을 수리부엉이가 공연히 덤벼들어 붙잡으려 한 탓에 끝내 이런 큰 소동이 벌어진 것이겠지요. 두 제자는 서로 눈과 눈을 마주보며 한동안은 그저 이 괴이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만, 이윽고 스승에게 말없이 절하고 슬금슬금 방으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뱀과 수리부엉이가 그 뒤에 어찌 되었는지 그것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습니다. —

이런 일은 그 밖에도 아직 수없이 많았습니다. 앞서 빠뜨렸습니다만 지옥변 병풍을 그리라는 분부가 있었던 것은 가을 초입이었으니, 그 뒤로 겨울 끝까지 요시히데의 제자들은 내내 스승의 괴이한 짓에 시달린 셈입니다. 그런데 그 겨울 끝에 요시히데는 무언가 병풍 그림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겼던 것이겠지요, 그때까지보다 한층 낯빛도 어두워지고 말투도 눈에 띄게 거칠어졌습니다. 그와 함께 병풍 그림도 밑그림이 팔 할쯤 되어 가던 채로 더 나아갈 낌새가 없습니다. 아니, 어떤 때는 여태 그려 놓은 데마저 덧칠해 지워 버릴 듯한 낌새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병풍의 무엇이 뜻대로 되지 않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또 아무도 알려고 한 이도 없었겠지요. 앞서의 갖가지 일에 데인 제자들은 마치 범이며 이리와 한 우리에 있는 듯한 마음이라, 그 뒤로 스승의 곁에는 되도록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꾀를 부리고 있었으니까요.

12

따라서 그동안의 일에 대해서는 딱히 들어 말씀드릴 만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굳이 말씀드린다면 그 고집스러운 늙은이가 어찌 된 셈인지 묘하게 눈물이 헤퍼져서 사람이 없는 데서는 이따금 혼자 울고 있었다는 이야기 정도이겠지요. 특히 어느 날 무슨 볼일로 제자 하나가 뜰 앞에 갔을 때 같은 때는, 복도에 서서 멍하니 봄이 가까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스승의 눈이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합니다. 제자는 그것을 보자 도리어 이쪽이 부끄러운 느낌이 들어 잠자코 슬그머니 되돌아왔다고 합니다만, 오취생사 그림을 그리려고 길가의 주검까지 옮겨 그렸다는 그 거만한 남자가 병풍 그림이 뜻대로 그려지지 않는 정도의 일로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다니, 퍽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한쪽에서 요시히데가 이렇게 도무지 제정신인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빠져들어 병풍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또 한쪽에서는 그 딸이 어쩐 일인지 차츰 마음이 울적해져서, 저희에게까지 눈물을 참고 있는 낌새가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그러잖아도 시름겨운 얼굴에 살결이 희고 얌전한 계집이니만큼, 이렇게 되니 어쩐지 속눈썹이 무거워지고 눈 둘레에 그늘이 진 듯해 한결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비를 생각해서라는 둥 상사병이 났다는 둥 이런저런 억측을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만, 중간쯤부터는 아니 저것은 영주님이 뜻을 따르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그 뒤로는 다들 잊은 듯 뚝 그 딸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무렵의 일이겠지요. 어느 날 밤 깊은 시각에 제가 혼자 복도를 지나가는데, 그 원숭이 요시히데가 난데없이 어디선가 뛰어와 제 바짓자락을 자꾸만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아마 이제 매화 향이라도 날 듯한, 엷은 달빛이 비치는 따뜻한 밤이었습니다만, 그 빛으로 비추어 보니 원숭이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 콧등에 주름을 지으며 미치기라도 한 듯 요란하게 울어 대지 않겠습니까. 저는 섬뜩한 마음이 서너 푼, 새 바지를 잡아당기는 괘씸함이 예닐곱 푼이라 처음에는 원숭이를 걷어차고 그대로 지나칠까도 싶었습니다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전에 이 원숭이를 때렸다가 도련님의 미움을 산 무사의 본보기도 있습니다. 게다가 원숭이의 몸짓이 아무래도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끝내 저도 마음먹고 그 끄는 쪽으로 열 걸음 남짓 걷는 둥 마는 둥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복도가 한 굽이 돌아, 밤눈에도 희끄무레한 연못 물이 가지 모양 부드러운 소나무 너머로 넓게 내다보이는, 바로 거기까지 갔을 때의 일입니다. 어딘가 가까운 방 안에서 사람이 다투는 듯한 기척이 다급하게, 또 묘하게 은밀하게 제 귀를 위협했습니다. 둘레는 어디나 쥐 죽은 듯 조용하고, 달빛인지 안개인지 알 수 없는 것 속에서 물고기가 뛰는 소리 말고는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데에 이 소리가 나니, 저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만약 무뢰한이라도 있다면 따끔한 맛을 보여 주리라 하고, 살며시 그 미닫이 밖으로 숨을 죽이며 몸을 붙였습니다.

13

그런데 원숭이는 제가 하는 짓이 굼떴던 것이겠지요. 요시히데는 자못 답답한 듯 두세 번 제 발 둘레를 뛰어다녔다 싶더니, 마치 목이 졸린 듯한 소리로 울면서 대뜸 제 어깨께로 단번에 뛰어올랐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목을 젖혀 그 발톱에 긁히지 않으려 하고, 원숭이는 또 옷소매에 매달려 제 몸에서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 그 서슬에 저는 저도 모르게 두세 걸음 비틀거리다가 그 미닫이에 등으로 세게 몸을 부딪쳤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 한시도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저는 대뜸 미닫이를 열어젖히고 달빛이 닿지 않는 안쪽으로 뛰어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제 눈을 가로막은 것은 — 아니, 그보다도 저는 동시에 그 방 안에서 튕겨 나오듯 달려 나오려던 여자 쪽에 더 놀랐습니다. 여자는 마주치는 서슬에 하마터면 저와 부딪칠 뻔하더니 그대로 밖으로 굴러 나왔습니다만, 어찌 된 셈인지 거기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며 제 얼굴을 무언가 무서운 것이라도 보듯 벌벌 떨며 올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시히데의 딸이었다는 것은 굳이 말씀드릴 것도 없겠지요. 그러나 그날 밤의 그 여자는 마치 사람이 달라진 듯 생생하게 제 눈에 비쳤습니다. 눈은 크게 빛나고 있습니다. 뺨도 붉게 타오르고 있었겠지요. 거기에 헝클어진 바지며 겉옷이 여느 때의 앳됨과는 딴판으로 요염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정말 그 가냘프고 무슨 일에나 삼가던 요시히데의 딸이겠습니까. — 저는 미닫이에 몸을 기댄 채 이 달빛 속에 있는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급히 멀어져 가는 또 한 사람의 발소리를 가리키듯 손가락질하며, 누구냐고 조용히 눈으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딸은 입술을 깨물며 잠자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 모습이 또 참으로 분해하는 듯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몸을 굽혀 딸의 귀에 입을 대듯 하고 이번에는 "누구냐"고 나직이 물었습니다. 그러나 딸은 역시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와 함께 긴 속눈썹 끝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아까보다 더 세게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입니다.

타고나기를 아둔한 저에게는 지나치게 뻔한 일 말고는 공교롭게도 무엇 하나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말 붙일 길도 몰라 한동안은 그저 딸의 가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마음으로 가만히 거기 서 있었습니다. 하기야 이것은 한편으로는 어쩐지 더 캐묻는 것이 나쁜 일 같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윽고 열어젖힌 미닫이를 닫으면서, 조금은 달아오른 것이 가라앉은 듯한 딸 쪽을 돌아보고 "이제 방으로 돌아가시오"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저도 스스로 무언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듯한 불안한 마음에 쫓겨,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부끄러운 생각을 하면서 슬며시 오던 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열 걸음도 걷지 않아 누군가 또 제 바짓자락을 뒤에서 조심조심 잡아 멈추게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놀라서 돌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보니 그것은 제 발밑에 그 원숭이 요시히데가 사람처럼 두 손을 짚고 금방울을 울리면서 몇 번이고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14

그런데 그날 밤 일이 있고 나서 보름쯤 뒤의 일입니다. 어느 날 요시히데는 갑자기 저택에 와서 영주님을 직접 뵙기를 청했습니다. 신분이 천한 자입니다만 평소부터 유난히 마음에 들어 하셨기 때문이겠지요. 누구에게나 쉽게 만나 주시는 법이 없는 영주님이 그날도 선뜻 허락하시고 곧바로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그 남자는 여느 때처럼 향물 들인 겉옷에 후줄근한 두건을 쓰고, 평소보다 한층 까다로운 얼굴을 하면서 공손히 앞에 엎드렸습니다만, 이윽고 쉰 목소리로 아뢰기를,

"전부터 분부하신 지옥변 병풍 말씀입니다만, 저도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붓을 잡은 보람이 보여 이제 거의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그것 참 잘되었구나. 나도 만족한다."

그러나 이렇게 이르시는 영주님의 목소리에는 어찌 된 셈인지 묘하게 힘이 없고 맥이 빠진 데가 있었습니다.

"아니옵니다, 그것이 도무지 잘되지 않았사옵니다." 요시히데는 다소 성이 난 듯한 낯빛으로 가만히 눈을 내리깔며, "거의 다 되기는 했습니다만, 딱 하나 아직까지 제가 그리지 못하는 데가 있사옵니다."

"뭐, 그리지 못하는 데가 있다고?"

"그러하옵니다. 저는 무릇 본 것이 아니면 그리지 못하옵니다. 설령 그린다 해도 마음에 차지 않사옵니다. 그러면 그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옵니까."

이 말을 들으시자 영주님 얼굴에는 비웃는 듯한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 지옥변 병풍을 그리려면 지옥을 보아야겠구나."

"그러하옵니다. 그러나 저는 몇 해 전 큰불이 났을 때 염열지옥의 사나운 불길에도 견줄 만한 불길을 눈앞에 보았사옵니다. 「요지리 부동」의 불꽃을 그린 것도 실은 그 불을 만났기 때문이옵니다. 영주님께서도 그 그림은 아시겠지요."

"그러나 죄인은 어찌할 것이냐. 옥졸은 본 적이 없겠지." 영주님은 마치 요시히데가 아뢰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으신 듯한 낯빛으로 이렇게 잇달아 물으셨습니다.

"저는 쇠사슬에 묶인 자를 본 적이 있사옵니다. 괴이한 새에게 시달리는 자의 모습도 낱낱이 옮겨 그렸사옵니다. 그러니 죄인이 형벌에 괴로워하는 꼴도 모른다고는 할 수 없사옵니다. 또 옥졸은 —" 하고는 요시히데는 섬뜩한 쓴웃음을 흘리며, "또 옥졸은 꿈결에 몇 번이고 제 눈에 비쳤사옵니다. 더러는 소머리, 더러는 말머리, 더러는 삼면육비의 귀신 모습이 소리 없는 손뼉을 치고 소리 나지 않는 입을 벌리며 저를 괴롭히러 오는 것은 거의 날마다 밤마다라고 해도 좋을 것이옵니다. — 제가 그리려 해도 그리지 못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이 말에는 영주님도 과연 놀라셨겠지요. 한동안은 그저 짜증스러운 듯 요시히데의 얼굴을 노려보고 계셨습니다만, 이윽고 눈썹을 험하게 움직이시며,

"그러면 무엇을 그리지 못한다는 말이냐" 하고 내뱉듯 이르셨습니다.

15

"저는 병풍 한복판에 빈랑잎을 인 수레 한 채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자리를 그리려 하고 있사옵니다." 요시히데는 이렇게 말하고 비로소 날카롭게 영주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남자는 그림 이야기만 나오면 미친 사람이나 다름없어진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때의 눈길에는 분명 그런 무서움이 있었던 듯합니다.

"그 수레 안에는 지체 높은 여인이 하나, 사나운 불길 속에 검은 머리를 흩뜨린 채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얼굴은 연기에 그을리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하늘 쪽으로 수레 지붕을 우러르고 있겠지요. 손은 발을 쥐어뜯어 쏟아지는 불똥 비를 막으려 하고 있을지도 모르옵니다. 그리고 그 둘레에는 괴이한 사나운 새가 열 마리인지 스무 마리인지 부리를 딱딱거리며 어지러이 날아돌고 있는 것이옵니다. — 아아, 그것이, 그 수레 안의 여인이 아무리 해도 저에게는 그려지지 않사옵니다."

"그래서 — 어찌하겠다는 것이냐."

영주님은 무슨 까닭인지 묘하게 기뻐하시는 낯빛으로 이렇게 요시히데를 재촉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시히데는 그 붉은 입술을 열이라도 난 때처럼 떨면서, 꿈을 꾸고 있는가 싶은 말투로,

"그것이 저에게는 그려지지 않사옵니다" 하고 다시 한번 되뇌더니, 갑자기 물어뜯을 듯한 기세가 되어,

"부디 빈랑잎을 인 수레 한 채를 제가 보는 앞에서 불태워 주시옵소서. 그리고 만약 될 수 있다면 —"

영주님은 얼굴을 어둡게 하셨다 싶더니 갑자기 요란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러고는 그 웃음소리에 숨이 막히시며 이르시기를,

"오냐, 만사 네가 아뢰는 대로 해 주마. 될지 안 될지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저는 그 말씀을 듣자 무슨 예감인지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또 영주님의 낯빛도 입가에는 허옇게 거품이 고여 있고 눈썹께에는 씰룩씰룩 번개가 지나가고 있어, 마치 요시히데의 미친 기운이 옮으신 것인가 싶을 만큼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잠깐 말을 끊으시더니, 곧 또 무언가 터진 듯한 기세로 끝없이 목을 울리며 웃으시면서,

"빈랑잎을 인 수레에도 불을 지르마. 또 그 안에는 아리따운 여자를 하나, 지체 높은 여인의 차림으로 태워 주마. 불꽃과 검은 연기에 시달려 수레 안의 여자가 몸부림치며 죽는다 — 그것을 그릴 생각을 해내다니 과연 천하 으뜸가는 화공이로다. 칭찬해 주마. 오냐, 칭찬해 주고말고."

영주님 말씀을 듣자 요시히데는 갑자기 낯빛을 잃고 헐떡이듯 그저 입술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만, 이윽고 온몸의 힘줄이 풀린 듯 털썩 다다미에 두 손을 짚고,

"고마우신 일이옵니다" 하고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목소리로 공손히 절을 올렸습니다. 이것은 아마 자기가 생각하던 그 뜻의 무서움이 영주님 말씀을 따라 또렷이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한평생에 단 한 번, 이때만은 요시히데가 가여운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16

그러고서 이삼 일 지난 밤의 일입니다. 영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요시히데를 부르시어 빈랑잎을 인 수레가 타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게 해 주셨습니다. 하기야 이것은 호리카와 저택에서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흔히 유키게 별궁이라 하는, 옛날 영주님의 누이동생께서 계시던 도성 밖 산장에서 태우신 것입니다.

이 유키게 별궁이라 하는 곳은 오래도록 아무도 머물지 않으신 데라 넓은 뜰도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있었습니다만, 아마 이 사람 기척 없는 꼴을 본 이들의 짐작이겠지요. 여기서 돌아가신 누이동생의 신세에도 이런저런 소문이 나서, 그중에는 또 달 없는 밤마다 지금도 괴이한 다홍 바지 빛이 땅에 닿지도 않고 복도를 걷는다는 말을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 그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낮에도 쓸쓸한 이 별궁은 한번 해가 지고 나면 뜰의 물소리가 한결 음산하게 울리고, 별빛에 나는 해오라기도 괴물인가 싶을 만큼 섬뜩하니까요.

마침 그날 밤은 역시 달이 없는 캄캄한 밤이었습니다만, 큰 등잔 불빛으로 보니 마루 가까이 자리를 잡으신 영주님은 연한 옥빛 겉옷에 짙은 보랏빛 무늬 바지를 입으시고, 흰 바탕 비단으로 가를 두른 방석에 높다랗게 책상다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앞뒤 좌우에 곁에서 모시는 이들이 대여섯 사람 공손히 늘어앉아 있던 것은 굳이 들어 말씀드릴 것도 없겠지요. 그러나 그중에 하나, 유난히 무슨 일이 있을 듯이 보이던 것은, 몇 해 전 무쓰의 싸움에서 굶주려 사람 고기를 먹은 뒤로 사슴의 산 뿔마저 찢게 되었다는 힘센 무사가 안에 가슴 갑옷을 껴입은 차림으로 칼을 비스듬히 차고 마루 아래에 삼엄하게 엎드려 있던 일입니다. — 그것이 모두 밤바람에 흔들리는 등불 빛에 더러는 밝게 더러는 어둡게, 거의 꿈인지 생시인지 가릴 수 없는 낌새로 어쩐지 으스스하게 보였습니다.

게다가 또 뜰에 끌어다 놓은 빈랑잎을 인 수레가 높다란 지붕으로 묵직하게 어둠을 누르고, 소는 매지 않은 채 검은 끌채를 비스듬히 받침대에 걸친 채로 쇠붙이 금박을 별처럼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것을 보자니, 봄이라고는 해도 어쩐지 살갗이 서늘해집니다. 하기야 그 수레 안은 무늬 비단으로 가를 두른 푸른 발이 무겁게 가리고 있으니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둘레에는 하인들이 저마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연기가 마루 쪽으로 쏠리는 것을 마음 쓰면서 조심스레 대기하고 있습니다.

정작 요시히데는 조금 떨어져 마침 마루 정면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만, 이 사람은 여느 때의 향물 들인 듯한 겉옷에 후줄근한 두건을 쓰고, 별 많은 하늘의 무게에 눌린 것인가 싶을 만큼 여느 때보다 더 작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 뒤에 또 한 사람, 같은 두건에 같은 겉옷 차림으로 웅크린 것은 아마 데려온 제자 가운데 하나이겠지요. 그것이 마침 둘 다 먼 어스름 속에 웅크리고 있어서, 제가 있던 마루 아래에서는 옷 빛깔조차 또렷이 알 수 없었습니다.

17

시각은 이럭저럭 한밤중에 가까웠겠지요. 뜰과 못을 감싼 어둠이 조용히 숨을 삼키고 모두의 숨소리를 엿듣고 있는가 싶은 가운데, 그저 희미한 밤바람이 지나는 소리가 나고 횃불 연기가 그때마다 그을음 냄새를 실어 옵니다. 영주님은 한동안 잠자코 이 기이한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습니다만, 이윽고 무릎을 앞으로 내미시더니,

"요시히데" 하고 날카롭게 부르셨습니다.

요시히데는 무어라 대답을 한 듯했습니다만, 제 귀에는 그저 신음 같은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습니다.

"요시히데. 오늘 밤은 네 바람대로 수레에 불을 질러 보여 주마."

영주님은 이렇게 이르시고 곁에서 모시는 이들 쪽을 곁눈으로 보셨습니다. 그때 무언가 영주님과 곁의 누구누구 사이에는 뜻 있는 웃음이 오간 듯도 보였습니다만, 이것은 어쩌면 제 탓일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요시히데는 조심조심 고개를 들어 마루 위를 우러른 듯했습니다만, 여전히 아무 말씀도 아뢰지 않고 엎드려 있습니다.

"잘 보아라. 그것은 내가 평소 타는 수레다. 너도 기억이 있을 것이다. — 나는 그 수레에 이제 불을 질러 눈앞에 염열지옥을 나타나게 할 작정이다만."

영주님은 또 말을 멈추시고 곁의 이들에게 눈짓을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씁쓸한 말투로, "그 안에는 죄지은 여자가 하나 묶인 채 태워져 있다. 그러니 수레에 불을 지르면 필시 그 계집은 살을 태우고 뼈를 그슬리며 죽도록 괴로워하다 끝을 맞겠지. 네가 병풍을 마무리하는 데는 다시없는 좋은 본보기다. 눈처럼 흰 살결이 타서 문드러지는 것을 놓치지 마라. 검은 머리가 불똥이 되어 날아오르는 꼴도 잘 보아 두어라."

영주님은 세 번째로 입을 다무셨습니다만, 무엇을 생각하셨는지 이번에는 그저 어깨만 흔들며 소리도 내지 않고 웃으시면서,

"두고두고 다시없을 구경거리다. 나도 여기서 구경하겠다. 여봐라 여봐라, 발을 걷고 요시히데에게 안의 여자를 보여 주지 않겠느냐."

분부를 듣자 하인 하나가 한 손에 횃불을 높이 치켜든 채 성큼성큼 수레로 다가가더니, 대뜸 한 손을 뻗어 발을 사르르 걷어 보였습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타는 횃불 빛은 한바탕 붉게 흔들리면서 이내 좁은 수레 안을 또렷이 비추어 냈습니다만, 자리 위에 참혹하게 쇠사슬에 묶인 여자는 — 아아, 누가 잘못 볼 수 있겠습니까. 화려한 수를 놓은 벚꽃빛 겉옷에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가 고이 드리우고, 비스듬히 기운 금빛 비녀도 아름답게 빛나 보였습니다만, 차림새야 다를지언정 자그마한 몸매며 살결 흰 목덜미며, 그리고 그 쓸쓸할 만큼 얌전한 옆얼굴은 요시히데의 딸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그때입니다. 저와 마주 보고 있던 무사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칼자루 머리를 한 손으로 누르며 매섭게 요시히데 쪽을 노려보았습니다. 놀라서 보니 그 남자는 이 광경에 반쯤 제정신을 잃었던 것이겠지요. 여태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것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싶더니,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수레 쪽으로 저도 모르게 달려들려 했습니다. 다만 공교롭게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 먼 그늘 속에 있었으므로 얼굴 모습은 또렷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주 잠깐이고, 낯빛을 잃은 요시히데의 얼굴은, 아니 마치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허공에 매달아 올린 듯한 요시히데의 모습은, 이내 어스름을 도려내고 또렷이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딸을 태운 빈랑잎 수레가 이때 "불을 질러라" 하는 영주님 말씀과 함께 하인들이 던지는 횃불을 뒤집어쓰고 활활 타올랐던 것입니다.

18

불은 순식간에 수레 지붕을 감쌌습니다. 처마에 달린 보랏빛 술이 부채질당한 듯 확 나부끼자, 그 아래에서 자욱하게 밤눈에도 흰 연기가 소용돌이치고, 더러는 발이, 더러는 소매가, 더러는 마룻대의 쇠붙이가 한꺼번에 부서져 날았는가 싶을 만큼 불똥이 비처럼 날아오릅니다 — 그 무시무시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넘실넘실 혀를 내밀며 수레 창살에 휘감겨 하늘 한복판까지 치솟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빛은, 마치 해가 땅에 떨어져 하늘의 불이 쏟아진 것 같다고나 할까요. 아까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 저도 이제는 아주 넋이 나가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이 무서운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비인 요시히데는 —

요시히데의 그때 얼굴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저도 모르게 수레 쪽으로 달려가려 하던 그 남자는 불이 타오름과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여전히 손을 뻗은 채 파고들 듯한 눈빛으로 수레를 감싼 불길과 연기를 빨려 들어가듯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만, 온몸에 뒤집어쓴 불빛으로 주름투성이 추한 얼굴은 수염 끝까지 잘 보입니다. 그러나 그 크게 부릅뜬 눈 속이며, 일그러진 입가며, 또 끊임없이 씰룩이는 뺨살의 떨림이며, 요시히데의 마음속에 번갈아 오가는 두려움과 슬픔과 놀라움이 또렷이 얼굴에 그려졌습니다. 목이 잘리기 전의 도둑이라도, 또는 시왕의 관아로 끌려 나온 온갖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저토록 괴로운 얼굴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에는 과연 그 힘센 무사조차 저도 모르게 낯빛을 바꾸고 조심조심 영주님 얼굴을 우러렀습니다.

그러나 영주님은 굳게 입술을 깨무시며 이따금 섬뜩하게 웃으시고는, 눈도 떼지 않고 가만히 수레 쪽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수레 안에는 — 아아, 저는 그때 그 수레에서 어떤 처녀의 모습을 보았는지, 그것을 자세히 말씀드릴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습니다. 그 연기에 목이 메어 젖힌 얼굴의 흼, 불꽃을 떨치며 흩어진 머리의 긺, 그리고 또 보는 사이에 불로 변해 가는 벚꽃빛 겉옷의 아름다움 — 이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었을까요. 특히 밤바람이 한 번 내리불어 연기가 저편으로 쏠렸을 때, 붉은 바탕에 금가루를 뿌린 듯한 불꽃 속에서 떠올라 머리카락을 입에 문 채 묶인 사슬도 끊어질 만큼 몸부림치던 모습은, 지옥의 형벌을 눈앞에 옮겨 놓은 것인가 싶어 저를 비롯해 힘센 무사까지 절로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러자 그 밤바람이 또 한 차례 뜰의 나무 우듬지에 쏴 하고 지나간다 — 고 누구나 여겼겠지요. 그런 소리가 어두운 하늘을 어딘지 모르게 달렸다 싶더니, 이내 무언가 검은 것이 땅에 닿지도 않고 허공에 날지도 않으며 공처럼 튀면서 별궁 지붕에서 불이 활활 타는 수레 안으로 곧장 뛰어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붉게 칠한 듯한 수레 창살이 우수수 타서 떨어지는 속에서, 뒤로 젖혀진 처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비단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뭐라 말할 수 없이 괴롭게 길게 연기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이어서 또 두 번 세 번 — 저희는 저도 모르게 앗 하고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휘장 같은 불꽃을 등지고 처녀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것은, 호리카와 저택에 매어 두었던 그 요시히데라는 별명의 원숭이였으니 말입니다. 그 원숭이가 어디를 어떻게 해서 이 별궁까지 몰래 왔는지, 그것은 물론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평소 귀여워해 준 처녀였기에 원숭이도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든 것이겠지요.

19

그러나 원숭이 모습이 보인 것은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금박을 뿌린 칠기 같은 불똥이 한바탕 확 하늘로 솟았나 싶은 사이에 원숭이는 물론 처녀의 모습도 검은 연기 밑바닥에 가려지고, 뜰 한복판에는 그저 한 채의 불수레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듯 타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불수레라기보다 차라리 불기둥이라고 하는 편이 저 별 많은 하늘을 찌르며 끓어오르는 무서운 불꽃의 모습에는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그 불기둥을 앞에 두고 굳어 버린 듯 서 있는 요시히데는 — 이 무슨 기이한 일일까요. 그 아까까지 지옥의 형벌에 시달리는 듯하던 요시히데는 이제 뭐라 말할 수 없는 빛을, 마치 넋을 놓은 듯한 기쁨의 빛을 주름투성이 온 얼굴에 띠고, 영주님 앞인 것도 잊었는지 두 팔을 가슴에 단단히 낀 채 우두커니 서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그 남자의 눈 속에는 딸이 몸부림치며 죽어 가는 모습이 비치지 않는 듯한 것입니다. 오직 아름다운 불꽃 빛과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여인의 모습이 한없이 마음을 기쁘게 한다 — 그런 낯빛으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기이한 것은 그 남자가 외동딸이 숨을 거두는 것을 기쁜 듯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때의 요시히데에게는 어쩐지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꿈에 보는 사자왕의 노여움을 닮은 괴이한 엄숙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느닷없는 불길에 놀라 울부짖으며 날아다니는 수없이 많은 밤새들조차, 마음 탓인지 요시히데의 두건 둘레에는 다가오지 않았던 듯합니다.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새들의 눈에도 그 남자 머리 위에 둥근 빛처럼 걸려 있는 알 수 없는 위엄이 보였던 것이겠지요.

새조차 그러합니다. 하물며 저희는 하인들까지도 모두 숨을 죽이며 몸속까지 떨릴 만큼 야릇한 기쁨으로 가득 차, 마치 눈을 새로 뜬 부처라도 보듯 눈도 떼지 않고 요시히데를 지켜보았습니다. 하늘 가득 울리는 수레의 불과 거기에 넋을 빼앗겨 굳어 서 있는 요시히데와 — 이 얼마나 장엄하고 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 오직 마루 위의 영주님만은 마치 딴사람인가 싶을 만큼 얼굴빛도 파리해지시고, 입가에 거품을 고이신 채 보랏빛 바지의 무릎을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시고 꼭 목마른 짐승처럼 계속 헐떡이고 계셨습니다.……

20

그날 밤 유키게 별궁에서 영주님이 수레를 태우신 일은 누구의 입에서랄 것도 없이 세상에 새어 나갔습니다만, 그것에 대해서는 퍽 이런저런 말을 하는 이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선 첫째로 왜 영주님이 요시히데의 딸을 태워 죽이셨는가 — 이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원한에서 하신 것이라는 소문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러나 영주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수레를 태우고 사람을 죽여서까지 병풍 그림을 그리려 하는 화공의 비뚤어진 근성을 벌하시려는 작정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저는 영주님이 몸소 그렇게 이르시는 것을 들은 적조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요시히데가 눈앞에서 딸을 태워 죽이고도 여전히 병풍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는, 그 나무와 돌 같은 마음도 역시 이러쿵저러쿵 따져진 모양입니다. 그중에는 그 남자를 욕하며 그림을 위해서는 부모 자식의 정마저 잊어버리는, 사람 얼굴에 짐승 마음을 가진 자라고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 요카와의 승도님 같은 분은 이런 생각의 편을 드신 한 분으로, "아무리 한 가지 재주에 뛰어나다 한들 사람으로서 도리를 분간하지 못하면 지옥에 떨어질밖에 없다"고 곧잘 이르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 한 달쯤 지나 드디어 지옥변 병풍이 다 되자, 요시히데는 곧바로 그것을 저택으로 들고 나와 공손히 영주님께 보여 드렸습니다. 마침 그때는 승도님도 자리에 계셨습니다만, 병풍 그림을 한눈에 보시자 과연 그 한 첩의 하늘과 땅에 몰아치는 불의 폭풍이 무서워 놀라셨던 것이겠지요. 그때까지는 씁쓸한 얼굴로 요시히데 쪽을 힐끔힐끔 노려보고 계셨는데,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훌륭하도다" 하고 이르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영주님이 쓴웃음을 지으셨을 때의 낯빛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 뒤로 그 남자를 나쁘게 말하는 이는 적어도 저택 안에서만은 거의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누구든 그 병풍을 보는 이는 평소 아무리 요시히데를 밉게 여기고 있든, 이상하게 엄숙한 마음에 맞아 염열지옥의 큰 고통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무렵에는 요시히데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수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병풍이 다 된 이튿날 밤에 자기 방 들보에 노끈을 걸고 목을 매어 죽은 것입니다. 외동딸을 앞세운 그 남자는 아마 태평하게 살아남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주검은 지금도 그 남자의 집터에 묻혀 있습니다. 하기야 작은 표석은 그 뒤 몇십 년의 비바람에 씻겨, 벌써 오래전에 누구의 무덤인지도 모르게 이끼가 끼어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 1918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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