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시집
「광야」 「청포도」 「절정」 「꽃」. 여러 차례 옥살이 끝에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숨진 시인의 유고 시집. 시 20편을 싣고, 한자에는 한글 음을 달았습니다.
육사시집
〈황혼〉
내 골ㅅ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메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십이 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쎄멘트 장판우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할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ㅅ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정정히 사라지긴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오월(五月)의 병상(病床)에서-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노정기〉
목숨이란 마치 깨여진 배쪼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틔끌만 오래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였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것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짱크」와 같애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프러 올랐다.
항상 흐렸한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쌋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즌 소라 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드려다보며
〈연보〉
'너는 돌다리목에 줘왔다'던
할머니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江)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받이였은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港口)의 밤
눈물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붙여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밟고 걸어간 새벽길 우에
간(肝)입만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을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눈 우에 걸어가면 자욱이 지리라고
때로는 설래이며 파람도 불지
〈절정〉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아편〉
나릿한 남만(南蠻)의 밤
번제(燔祭)의 두렛불 타오르고
옥(玉)돌보다 찬 넋이 있어
홍역(紅疫)이 만발하는 거리로 쏠려
거리엔 「노아」의 홍수(洪水) 넘쳐나고
위태한 섬 우에 빛난 별 하나
너는 그 알몸동아리 향기를
봄바다 바람 실은 돛대처럼 오라
무지개같이 황홀(恍惚)한 삶의 광영(光榮)
죄(罪)와 곁드려도 삶직한 누리.
〈나의 뮤-즈〉
아주 헐벗은 나의 뮤―즈는
한번도 기야 싶은 날이 없어
사뭇 밤만을 왕자(王者)처럼 누려왔소
아무것도 없는 주제언만도
모든 것이 제 것인듯 버티는 멋이야
그냥 인드라의 영토(領土)를 날아도 다닌다오
고향은 어데라 물어도 말은 않지만
처음은 정녕 북해안(北海岸) 매운 바람속에 자라
대곤(大鯤)을 타고 다녔단 것이 일생(一生)의 자랑이죠
계집을 사랑커든 수염이 너무 주체스럽다도
취(醉)하면 행랑 뒷골목을 돌아서 다니며
복보다 크고 흰 귀를 자조 망토로 가리오
그러나 나와는 몇 천겁(千劫) 동안이나
바루 비취(翡翠)가 녹아나는 듯한 돌샘가에
향연(饗宴)이 벌어지면 부르는 노래란 목청이 외곬수요
밤도 지진하고 닭소래 들릴 때면
그만 그는 별 계단(階段)을 성큼성큼 올라가고
나는 촛불도 꺼져 백합(百合)꽃밭에 옷깃이 젖도록 잤소
〈교목〉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리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아미〉
향수(鄕愁)에 철나면 눈섶이 기나니요
바다랑 바람이랑 그 사이 태어났고
나라마다 어진 풍속에 자랐겠죠.
짓푸른 깁장(帳)을 나서면 그 몸매
하이얀 깃옷은 휘둘러 눈부시고
정녕 「왈쓰」라도 추실란가봐요.
햇살같이 펼쳐진 부채는 감춰도
도톰한 손결야 교소(驕笑)를 가루어서
공주의 홀(笏)보다 깨끗이 떨리오.
언제나 모듬에 지쳐서 돌아오면
꽃다발 향기조차 기억만 서러워라
찬 젓대소리에다 옷끈을 흘려보내고.
촛불처럼 타오른 가슴속 사념(思念)은
진정 누구를 애끼시는 속죄(贖罪)라오
발 아래 가득히 황혼이 나우리치오
달빛은 서늘한 원주(圓柱)아래 듭시면
장미(薔薇)쩌 이고 장미쪄 흩으시고
아련히 가시는 곳 그 어딘가 보이오.
〈자야곡〉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래 치쟎으면 못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소리
숨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들리라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우에 이끼만 푸르리라.
〈호수〉
내여달리고 저운 마음이련마는
바람에 씿은 듯 다시 명상(瞑想)(명상)하는 눈동자
때로 백조(白鳥)(백조)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하건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어 흑흑 느끼는 밤
희미한 별 그림자를 씹어 노외는 동안
자주빛 안개 가벼운 명모(暝帽)(명모)같이 나려 씨운다.
〈소년에게〉
차듸찬 아침이슬
진주가 빛나는 못가
연꽃 하나 다복히 피고
소년아 네가 낳다니
맑은 넋에 깃드려
박꽃처럼 자랐세라
큰강 목놓아 흘러
여울은 흰 돌쪽마다
소리 석양을 새기고
너는 준마(駿馬) 달리며
죽도(竹刀) 져 곧은 기운을
목숨같이 사랑했거늘
거리를 쫓아 단여도
분수(噴水)있는 풍경속에
동상답게 서봐도 좋다
서풍 뺨을 스치고
하늘 한가 구름 뜨는곳
희고 푸른 지음을 노래하며
그래 가락은 흔들리고
별들 춥다 얼어붙고
너조차 미친들 어떠랴
〈강 건너간 노래〉
섣달에도 보름께 달발근밤
압내강(江) 쨍쨍어러 조이든밤에
내가부른 노래는 강(江)건너갓소
강(江)건너 하늘끗에 사막(沙漠)도 다은곳
내노래는 제비가티 날러서갓소
못이즐 게집애 집조차 업다기에
가기는 갓지만 어린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모래불에 떠러져 타서죽겟죠。
사막(沙漠)은 끗업시 푸른하늘이 덥혀
눈물 먹은 별들이 조상오는밤
밤은옛일을무지개 보다곱게 짜내나니
한가락 여기두고 또한가락 어데맨가
내가부른 노래는 그밤에 강(江)건너 갓소。
〈파초〉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芭蕉)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 타는 입술을 축여주렴
그 옛적 『사라센』의 마지막 날엔
기약(期約)없이 흩어진 두 낱 넋이었어라
젊은 여인(女人)들의 잡아 못 논 소매끝엔
고운 손금조차 아직 꿈을 짜는데
먼 성좌(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 때마다
잊었던 계절(季節)을 몇 번 눈 우에 그렷느뇨
차라리 천년(千年) 뒤 이 가을밤 나와 함께
빗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어보자
그리고 새벽하늘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어지세
〈반묘〉
어느 사막의 나라 유폐된 후궁(后宮)의 넋이기에
몸과 마음도 아롱져 근심스러워라.
칠색(七色) 바다를 건너서 와도 그냥 눈동자에
고향의 황혼을 간직해 서럽지 않뇨.
사람의 품에 깃들면 등을 굽히는 짓새
산맥을 느낄사록 끝없이 게을러라.
그 적은 포효는 어느 조선(祖先) 때 유전이길래
마노(瑪瑙)의 노래야 한층 더 잔조우리라.
그보다 뜰 아래 흰나비 나즉이 날아올 땐
한낮의 태양과 튜립 한 송이 지킴직하고
〈독백〉
운모(雲母)처럼 희고 찬 얼굴
그냥 주검에 물든 줄 아나
내 지금 달 아래 서서 있네
돛대보다 높다란 어깨
얕은 구름쪽 거미줄 가려
파도나 바람을 귀밑에 듣네
갈매긴 양 떠도는 심사
어데 하난들 끝간 델 아리
오롯한 사념(思念)을 기폭(旗幅)에 흘리네
선창(船窓)마다 푸른 막 치고
촛불 향수(鄕愁)에 찌르르 타면
운하(運河)는 밤마다 무지개 지네
박쥐 같은 날개나 펴면
아주 흐린 날 그림자 속에
떠서는 날쟎는 사복이 됨세
닭소리나 들리면 가랴
안개 뽀얗게 나리는 새벽
그곳을 가만히 나려서 감세
〈일식〉
쟁반에 먹물을 담아 비쳐본 어린 날
불개는 그만 하나밖에 없는 내 날을 먹었다
날과 땅이 한줄 우에 돈다는 그 순간(瞬間)만이라도
차라리 헛말이기를 밤마다 정녕 빌어도 보았다
마침내 가슴은 동굴(洞窟)보다 어두워 설레인고녀
다만 한 봉오리 피려는 장미(薔薇) 벌레가 좀치렸다
그래서 더 예쁘고 진정 덧없지 아니하냐
또 어데 다른 하늘을 얻어 이슬 젖은 별빛에 가꾸련다.
〈해후〉
모든 별들이 비취계단(翡翠階段)을 나리고 풍악소래 바루 조수처럼
부푸러 오르던 그밤 우리는 바다의 전당(殿堂)을 떠났다
가을 꽃을 하직하는 나비모냥 떨어져선 다시 가까이 되돌아 보곤
또 멀어지던 흰 날개우엔 볕ㅅ살도 따겁더라
머나먼 기억(記憶)은 끝없는 나그네의 시름속에 자라나는
너를 간직하고 너도 나를 아껴 항상 단조한 물껼에 익었다
그러나 물껼은 흔들려 끝끝내 보이지 않고 나조차
계절풍(季節風)의 넋이 가치 휩쓸려 정치못 일곱 바다에 밀렸거늘
너는 무삼 일로 사막(沙漠)의 공주(公主)같아 연지(脂)찍은 붉은 입술을
내 근심에 표백(漂白)된 돛대에 거느뇨 오―안타까운 신월(新月)
때론 너를 불러 꿈마다 눈덮인 내 섬속 투명(透明)한 영락(玲珞)으로
세운 집안에 머리 푼 알몸을 황금(黃金) 항쇄(項鎖) 족쇄(足鎖)로 매여 두고
귀ㅅ밤에 우는 구슬과 사슬 끊는 소리 들으며 나는 일흠도
모를 꽃밭에 물을 뿌리며 머―ㄴ 다음 날을 빌었더니
꽃들이 피면 향기에 취(醉)한 나는 잠든 틈을 타
너는 온갖 화판(花瓣)을 따서 날개를 붙이고 그만 어데로 날러 갔더냐
지금 놀이 나려 선창(船窓)이 고향(故鄕)의 하늘보다 둥글거늘
검은 망토를 두르기는 지나간 세기(世紀)의 상장(喪章)같애 슬프지 않은가
차라리 그 고은 손에 흰 수건을 날리렴 허무(虛無)의 분수령(分水嶺)에
앞날의 기(旗)빨을 걸고 너와 나와는 또 흐르자 부끄럽게 흐르자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방울 나리쟎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북(北)쪽「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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