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André Gide — La Porte étroite (1909)
르아브르의 외삼촌 집에서 여름을 보내던 열네 살 제롬은 두 살 위 외사촌 알리사를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설교를 함께 들은 그날부터 알리사는 사랑보다 더 높은 것을 향해 조금씩 물러선다. 지드가 1909년에 펴낸, 사랑과 믿음 사이의 소설.
1장
다른 사람이라면 이걸로 책 한 권을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여기 이야기하는 사연은 내 온 힘을 다해 살아 낸 것이고, 거기서 내 미덕은 닳아 버렸다. 그러니 나는 내 기억을 아주 소박하게 적으려 한다. 군데군데 해진 곳이 있더라도 그것을 깁거나 이으려고 무엇 하나 지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다듬느라 애쓰다 보면 그 기억을 이야기하며 맛보리라 기대하는 마지막 즐거움을 해칠 테니까.
아버지를 잃었을 때 나는 열두 살도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르아브르에 더는 붙잡아 둘 것이 없어진 어머니는, 내가 파리에서 공부를 마치는 편이 낫겠다고 여겨 파리로 옮겨 살기로 했다. 어머니는 뤽상부르 공원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얻었고, 애슈버턴 양이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더는 가족이 없던 플로라 애슈버턴 양은 처음엔 어머니의 가정교사였다가, 그다음엔 말벗이 되었고, 곧 친구가 되었다. 나는 똑같이 다정하고 서글픈 얼굴의 이 두 여자 곁에서 살았는데, 이제 그들을 떠올리면 상복 차림으로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 날, 아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꽤 오래 지났을 때였을 텐데, 어머니가 아침에 쓰는 실내 모자의 검은 리본을 연보라색 리본으로 바꾸었다.
"아, 엄마!" 내가 외쳤다. "그 색 정말 안 어울려요!"
이튿날 어머니는 다시 검은 리본을 달았다.
나는 몸이 약했다. 어머니와 애슈버턴 양은 내가 지치지 않도록 온통 마음을 썼는데, 그 보살핌이 나를 게으름뱅이로 만들지 않았다면 그건 내가 정말로 공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화창한 날이 시작되자마자 두 사람은 이제 내가 도시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여기서 내가 창백해진다고 믿어 버린다. 그래서 유월 중순쯤 우리는 르아브르 근처의 퐁괴즈마르로 떠난다. 거기서 뷔콜랭 외삼촌이 해마다 여름이면 우리를 맞아 준다.
그리 크지도 그리 아름답지도 않고, 노르망디의 숱한 다른 정원과 별다를 것 없는 정원 안에, 이층짜리 하얀 뷔콜랭네 집이 지난 세기 전의 숱한 시골집처럼 서 있다. 집은 해 뜨는 쪽 정원 앞쪽으로 큰 창을 스무 개쯤 냈고, 뒤쪽으로도 그만큼 냈다. 옆쪽에는 창이 없다. 창에는 작은 유리가 끼워져 있는데, 얼마 전에 갈아 끼운 몇 장은 곁에 있는 낡은 유리들 사이에서 너무 맑아 보이고, 낡은 것들은 그 곁에서 퍼렇고 흐릿해 보인다. 어떤 유리에는 어른들이 「기포」라고 부르는 흠이 있어서, 그 너머로 보는 나무가 휘청거리고, 그 앞을 지나는 우체부가 갑자기 혹이 난다.
직사각형 정원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집 앞으로는 꽤 넓고 그늘진 잔디밭이 펼쳐지고, 모래와 자갈을 깐 길이 그 둘레를 돈다. 이쪽에서는 담이 낮아져서, 정원을 감싸고 이 고장 방식대로 너도밤나무 가로수 길이 경계를 짓는 농가 마당이 보인다.
집 뒤쪽, 해 지는 쪽으로는 정원이 더 넉넉하게 펼쳐진다. 남쪽 담에 붙여 기른 과일나무 앞으로 꽃이 활짝 웃는 길이 하나 있는데, 두꺼운 포르투갈 월계수 울타리와 나무 몇 그루가 바닷바람을 막아 준다. 북쪽 담을 따라 난 다른 길은 나뭇가지 아래로 사라진다. 사촌 누이들은 그 길을 「검은 길」이라고 불렀고, 저녁 어스름이 지나면 거기 들어가기를 꺼렸다. 이 두 길은 계단 몇 개를 내려가 정원보다 낮게 이어지는 채소밭으로 통한다. 그리고 채소밭 끝 담에 뚫린 작은 비밀 문을 지나 담 저편으로 가면 덤불숲이 있고, 너도밤나무 가로수 길이 오른쪽에서도 왼쪽에서도 거기 와 닿는다. 해 지는 쪽 현관 계단에서 바라보면 이 숲 너머로 다시 고원이 보이고, 그 고원을 덮은 곡식이 감탄스럽다. 그리 멀지 않은 지평선에는 작은 마을의 교회가 있고, 저녁이면, 바람이 잔잔할 때면, 집 몇 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인다.
화창한 여름 저녁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아래 정원」으로 내려갔다. 작은 비밀 문으로 나가 가로수 길의 벤치까지 갔는데, 거기서는 들판이 조금 내려다보였다. 거기, 버려진 이회토 구덩이의 초가지붕 곁에 외삼촌과 어머니와 애슈버턴 양이 앉았다. 우리 앞에서 작은 골짜기가 안개로 가득 차고, 더 먼 숲 위로 하늘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벌써 어두워진 정원 끝에서 꾸물거렸다. 집에 돌아오면 거의 한 번도 우리와 함께 나가지 않는 외숙모가 응접실에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거기서 저녁이 끝났다. 하지만 나중에 어른들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우리는 아주 자주 아직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정원에서 보내지 않는 낮 시간은 거의 다 「공부방」에서 보냈다. 외삼촌의 서재였는데, 거기에 학생용 책상을 들여놓았다. 외사촌 로베르와 나는 나란히 공부했고, 우리 뒤에 쥘리에트와 알리사가 앉았다. 알리사는 나보다 두 살 많고, 쥘리에트는 나보다 한 살 어리다. 우리 넷 가운데 로베르가 가장 어리다.
내가 여기 쓰려는 것은 내 첫 기억들이 아니라, 이 이야기와 관련된 기억들뿐이다. 이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정말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다. 어쩌면 우리 집안의 상(喪) 때문에, 내 슬픔 때문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머니의 슬픔을 본 탓에 지나치게 예민해진 내 감수성이 나를 새로운 감정에 미리 기울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일찍 철이 들었다. 그해 퐁괴즈마르에 다시 갔을 때 쥘리에트와 로베르는 그만큼 더 어려 보였지만, 알리사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갑자기 우리 둘 다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그건 분명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다. 내 기억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애슈버턴 양과 나눈 대화다. 나는 어머니가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던 방에 불쑥 들어갔다. 외숙모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외숙모가 상복을 입지 않았다고, 아니면 벌써 벗어 버렸다고 분개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외숙모 뷔콜랭이 검은 옷을 입은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어머니가 밝은 옷을 입은 모습도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도착한 그날, 내 기억에 뤼실 뷔콜랭은 모슬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늘 그렇듯 너그러운 애슈버턴 양은 어머니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쭈뼛쭈뼛 따졌다.
"그래도 흰옷도 상복이잖아요."
"그럼 그 여자가 어깨에 두른 빨간 숄도 「상복」이라고 할 거예요? 플로라, 정말 기가 막혀요!" 어머니가 외쳤다.
나는 방학 몇 달 동안만 외숙모를 보았으니, 아마 여름 더위 때문에 내가 늘 보아 온 그 얇고 가슴이 깊이 파인 웃옷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숙모가 맨어깨에 걸치는 숄의 강렬한 빛깔보다도 더 어머니를 분개하게 한 건 그 깊이 파인 가슴이었다.
뤼실 뷔콜랭은 무척 아름다웠다. 내가 간직한 그녀의 작은 초상화가 그때의 그녀를 보여 준다. 어찌나 젊어 보이는지 딸들의 언니로 여겼을 정도다. 그녀는 늘 그러던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있다. 왼손에 고개를 기울이고, 그 새끼손가락을 새침하게 입술 쪽으로 구부리고. 성긴 그물 머리망이 반쯤 목덜미로 흘러내린 곱슬곱슬한 머리 뭉치를 붙잡고 있다. 웃옷 파인 곳에는 헐렁한 검은 벨벳 목걸이에 이탈리아 모자이크 메달이 매달려 있다. 넓고 나풀거리는 매듭을 지은 검은 벨벳 허리띠, 의자 등받이에 끈으로 걸어 둔 챙 넓은 부드러운 밀짚모자, 그 모든 것이 그녀를 더 어린애처럼 보이게 한다. 늘어뜨린 오른손에는 덮은 책 한 권이 들려 있다.
뤼실 뷔콜랭은 크레올이었다. 부모를 알지 못했거나 아주 일찍 잃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들려준 바로는, 버려졌는지 고아가 됐는지 몰라도 그녀를 아직 아이가 없던 보티에 목사 부부가 거두었고, 부부는 얼마 뒤 마르티니크를 떠나 뷔콜랭 집안이 자리 잡고 있던 르아브르로 그 아이를 데려왔다. 보티에네와 뷔콜랭네는 서로 왕래했다. 외삼촌은 그때 외국의 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세 해 뒤 가족 곁으로 돌아와서야 어린 뤼실을 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반해 곧바로 청혼했다. 그의 부모와 어머니는 몹시 슬퍼했다. 그때 뤼실은 열여섯 살이었다. 그사이 보티에 부인은 아이를 둘 낳았는데, 달이 갈수록 기이하게 뚜렷해지는 이 양녀의 성격이 자기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살림도 넉넉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보티에네가 오빠의 청혼을 기쁘게 받아들인 까닭을 설명하려고 어머니가 해 준 이야기다. 내가 덧붙여 짐작하는 것은, 어린 뤼실이 그들을 몹시 곤란하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르아브르 사교계를 꽤 알기에 이토록 매혹적인 아이를 사람들이 어떻게 대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중에 내가 알게 된 보티에 목사는 온화하고 신중하면서도 순진한 사람이라 음모에는 속수무책이고 악 앞에서는 완전히 무력했다. 이 훌륭한 사람은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보티에 부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녀는 넷째 아이를 낳다 죽었는데, 그 아이가 나와 나이가 거의 같고, 나중에 내 친구가 될 아이였다…….
뤼실 뷔콜랭은 우리 생활에 거의 끼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뒤에야 방에서 내려왔고, 곧바로 소파나 해먹에 길게 누워 저녁까지 그대로 있다가 나른하게 일어날 뿐이었다. 그녀는 이따금 땀을 닦으려는 듯 손수건을 이마에 댔다. 이마는 완벽하게 보송보송했는데도. 그 손수건은 얇기도 놀라웠고, 꽃향기라기보다 과일 향 같은 냄새도 놀라웠다. 이따금 그녀는 허리띠에서 미끄러지는 은 뚜껑이 달린 아주 작은 거울을 꺼냈다. 시곗줄에 다른 이런저런 물건들과 함께 매달린 거울이었다.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져 침을 조금 묻혀서 눈가를 적셨다. 그녀는 자주 책을 들고 있었지만, 그 책은 거의 늘 덮여 있었다. 책장 사이에는 대모갑 책갈피가 끼어 있었다. 누가 다가가도 그녀의 눈길은 공상에서 돌아와 그 사람을 보지 않았다. 소파 팔걸이에서, 치마 주름에서, 무심한 건지 지친 건지 모를 그녀의 손에서 자주 손수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면 책이, 무슨 꽃이, 책갈피가. 어느 날 책을 주워 들다가, 이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이 시집인 것을 보고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저녁을 먹고 나면 뤼실 뷔콜랭은 가족이 둘러앉은 우리 식탁에 다가오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쇼팽의 느린 마주르카를 흡족한 듯 쳤다. 이따금 박자를 깨뜨리고 한 화음에서 꼼짝 않고 멈추기도 했다…….
외숙모 곁에 있으면 나는 이상한 불편함을 느꼈다. 동요와 일종의 감탄과 두려움이 섞인 느낌이었다. 어쩌면 어떤 어두운 본능이 그녀를 경계하라고 일러 주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그녀가 플로라 애슈버턴과 어머니를 경멸한다는 것을, 애슈버턴 양은 그녀를 두려워하고 어머니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뤼실 뷔콜랭, 나는 더는 당신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당신이 그토록 많은 해를 끼쳤다는 걸 잠시라도 잊고 싶다……. 적어도 분노 없이 당신 이야기를 하려고 애써 보겠다.
그해 여름의 어느 날, 아니면 그다음 여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늘 같은 배경이다 보니 이따금 겹쳐진 기억들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가지러 응접실에 들어간다. 그녀가 있었다. 나는 곧바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여느 때는 나를 거의 보지도 않는 것 같던 그녀가 나를 부른다.
"왜 그렇게 빨리 가니? 제롬! 내가 무섭니?"
가슴을 두근거리며 나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억지로 웃어 보이며 손을 내민다. 그녀는 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는다.
"네 엄마는 옷을 어쩜 이렇게 못 입히니, 가엾은 것!……"
나는 그때 깃이 큰 세일러 웃옷 같은 것을 입고 있었는데, 외숙모가 그것을 구기기 시작한다.
"세일러 깃은 훨씬 더 벌려서 입는 거야!" 그녀가 말하며 셔츠 단추 하나를 톡 끄른다. "자! 이렇게 하니까 낫지 않은지 봐!" 그러고는 작은 거울을 꺼내 내 얼굴을 자기 얼굴 곁으로 끌어당기고, 맨팔로 내 목을 감고, 반쯤 벌어진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웃으며 간지럼을 타느냐고 묻고는 더 안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내가 어찌나 세게 몸을 뺐던지 웃옷이 찢어졌다. 얼굴이 불타는 채로, 그녀가 이렇게 외치는 동안
"쳇! 이 덩치만 큰 바보!" 나는 달아났다. 정원 끝까지 달려가, 채소밭의 작은 물통에 손수건을 적셔 이마에 대고, 뺨과 목과, 그 여자가 만진 모든 곳을 씻고 문질렀다.
어떤 날은 뤼실 뷔콜랭에게 「발작」이 찾아왔다. 그것은 갑자기 그녀를 덮쳐서 온 집안을 뒤흔들었다. 애슈버턴 양은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놀게 했지만, 침실이나 응접실에서 터져 나오는 끔찍한 비명을 아이들에게서 막아 줄 수는 없었다. 외삼촌은 허둥댔다. 그가 수건이며 오드콜로뉴며 에테르를 찾아 복도를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에 외숙모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식탁에서 그는 불안하고 늙어 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발작이 거의 지나가면 뤼실 뷔콜랭은 자식들을 자기 곁으로 불렀다. 적어도 로베르와 쥘리에트는. 알리사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그런 슬픈 날이면 알리사는 자기 방에 틀어박혔고, 이따금 아버지가 그녀를 찾아갔다. 그는 그녀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숙모의 발작은 하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발작이 유난히 심했던 어느 저녁, 응접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덜 들리는 어머니 방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갇혀 있었는데, 요리사가 복도를 뛰어다니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리, 어서 내려오세요. 가엾은 마님께서 돌아가시려고 해요!"
외삼촌은 알리사의 방에 올라가 있었다. 어머니가 그를 맞으러 나갔다. 십오 분 뒤, 내가 남아 있던 방의 열린 창 앞을 두 사람이 무심코 지나갈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말해 줄까, 오빠. 이건 다 연극이야." 그리고 몇 번이고 음절을 끊어 가며. "연, 극, 이, 라, 고."
이것은 방학이 끝나 갈 무렵, 우리 집 상을 당하고 두 해 뒤의 일이다. 그 뒤로 나는 오랫동안 외숙모를 다시 보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우리 집안을 뒤엎은 슬픈 사건과, 결말 바로 앞서 일어나 내가 뤼실 뷔콜랭에게 품고 있던 아직 복잡하고 갈피 없는 감정을 순전한 미움으로 바꿔 버린 작은 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제 사촌 누이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알리사 뷔콜랭이 예쁘다는 것을 나는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나를 그녀 곁으로 이끌고 붙잡아 둔 것은 그저 아름다움과는 다른 매력이었다. 분명 그녀는 어머니를 무척 닮았다. 하지만 눈빛이 너무도 달라서 나는 나중에야 그 닮음을 알아챘다. 나는 얼굴을 묘사할 줄 모른다. 생김새가 나에게서 빠져나간다. 눈 빛깔까지도. 내게 다시 떠오르는 것은 벌써 거의 슬프던 미소의 표정과, 눈 위로 놀랄 만큼 높이 올라가 눈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떨어져 있던 눈썹의 선뿐이다. 그런 눈썹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아니, 있다. 단테 시대의 피렌체 조각상 하나에서. 나는 어린 베아트리체가 그렇게 아주 넓게 휜 눈썹을 지녔으리라고 즐겨 상상한다. 그 눈썹은 그녀의 눈길에, 그녀의 온 존재에 불안하면서도 믿음에 찬 물음의 표정을 주었다. 그렇다, 열렬한 물음의 표정을. 그녀 안의 모든 것은 물음이고 기다림일 뿐이었다……. 이 물음이 어떻게 나를 사로잡고 내 삶을 만들었는지 이야기하겠다.
하지만 쥘리에트가 더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었다. 기쁨과 건강이 그녀를 빛나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언니의 우아함 곁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어서, 모두에게 단번에 다 내보여지는 것 같았다. 사촌 로베르로 말하자면, 그에게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그는 그저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내아이였다. 나는 쥘리에트와 로베르와 함께 놀았다. 알리사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우리 놀이에 거의 끼지 않았다. 아무리 멀리 지난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그녀는 진지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차분히 생각에 잠겨 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두 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곧 그 이야기를 해 보겠지만, 먼저, 그리고 다시는 그녀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 외숙모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해 뒤, 어머니와 나는 부활절 방학을 르아브르에서 보내러 갔다. 우리는 도시에서는 꽤 비좁게 사는 뷔콜랭네가 아니라, 집이 더 넓은 어머니의 언니 집에 묵었다. 내가 좀처럼 만날 일이 없던 플랑티에 이모는 오래전에 남편을 잃었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성품도 아주 다른 이모의 자식들을 나는 거의 알지 못했다. 르아브르에서 「플랑티에네 집」이라고 부르던 그 집은 시내가 아니라 도시를 굽어보는 「언덕」이라는 산비탈 중턱에 있었다. 뷔콜랭네는 상업 지구 근처에 살았다. 가파른 오솔길로 두 집 사이를 꽤 빨리 오갈 수 있어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길을 굴러 내려가고 다시 기어 올라갔다.
그날 나는 외삼촌 댁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 뒤 얼마 안 되어 외삼촌이 나갔다. 나는 그를 사무실까지 바래다주고 어머니를 찾으러 플랑티에네 집으로 다시 올라갔다. 거기서 어머니가 이모와 함께 나가서 저녁때나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곧바로 시내로 다시 내려갔다. 마음대로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는 일은 드물었다. 나는 바다 안개로 음울한 항구에 가서 한두 시간 부두를 헤맸다. 갑자기 방금 헤어진 알리사를 깜짝 놀래 주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도시를 가로질러 달려가 뷔콜랭네 초인종을 누른다. 벌써 계단으로 뛰어오르려는데, 문을 열어 준 하녀가 나를 붙잡는다.
"올라가지 마세요, 제롬 도련님! 올라가지 마세요. 마님이 발작을 일으키셨어요."
하지만 나는 무시하고 지나간다. "외숙모를 보러 온 게 아니에요……." 알리사의 방은 삼층에 있다. 일층은 응접실과 식당, 이층은 외숙모의 침실인데, 거기서 목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지나가야 하는 그 방의 문이 열려 있다. 방에서 빛줄기가 새어 나와 층계참을 가른다. 들킬까 봐 나는 잠깐 머뭇거리며 몸을 숨기고, 기가 막혀서 이런 광경을 본다. 커튼을 친 방 한가운데, 하지만 두 촛대의 촛불이 즐거운 빛을 퍼뜨리는 그 방에서 외숙모가 긴 의자에 누워 있다. 그녀의 발치에 로베르와 쥘리에트가 있고, 그녀 뒤에 모르는 사람이, 중위 제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있다. 이 두 아이가 거기 있었다는 것이 지금은 끔찍하게 여겨진다. 그때의 순진한 나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안심이 되었다. 아이들은 웃으며 모르는 남자를 바라보고, 남자는 피리 같은 목소리로 되풀이한다.
"뷔콜랭! 뷔콜랭!……양이 있으면 틀림없이 뷔콜랭이라고 부를 텐데."
외숙모 자신도 깔깔 웃는다. 그녀가 젊은 남자에게 담배를 내밀자 남자가 불을 붙이고, 그녀가 몇 모금 빤다. 담배가 바닥에 떨어진다. 남자가 그것을 주우려고 달려들다가 숄에 발이 걸린 척하며 외숙모 앞에 무릎을 꿇고 넘어진다…….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 틈에 나는 들키지 않고 빠져나간다.
이제 나는 알리사의 방 앞에 있다. 잠시 기다린다. 웃음소리와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올라온다. 아마 그 소리가 내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덮었는지,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문을 밀자 소리 없이 열린다. 방은 벌써 어두워서 나는 알리사를 곧바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꺼져 가는 빛이 들어오는 창에 등을 돌리고 있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일어나지는 않고 돌아보며 속삭인다.
"아! 제롬, 왜 다시 왔어?"
나는 몸을 숙여 그녀에게 입 맞춘다. 그녀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 있다…….
이 순간이 내 삶을 결정했다. 오늘도 나는 괴로움 없이 그 순간을 떠올릴 수가 없다. 물론 나는 알리사가 왜 그토록 괴로워하는지 아주 어렴풋하게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이 이 작게 떨리는 영혼에게, 흐느낌에 온통 흔들리는 이 가냘픈 몸에게는 너무도 크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꼈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인 그녀 곁에 서 있었다. 내 마음의 새로운 열광을 무엇 하나 말로 할 줄 몰랐다. 다만 그녀의 머리를 내 가슴에 꼭 안고, 내 영혼이 흘러나가는 입술을 그녀의 이마에 댔다. 사랑과 연민과, 열광과 자기희생과 미덕이 흐릿하게 뒤섞인 것에 취해, 나는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불렀고, 나를 바쳤다. 이 아이를 두려움으로부터, 악으로부터, 삶으로부터 감싸 주는 것 말고는 내 삶의 다른 목적을 생각할 수 없었다. 마침내 나는 기도로 가득 찬 채 무릎을 꿇는다. 그녀를 내 품에 피신시킨다. 그녀가 하는 말이 어렴풋이 들린다.
"제롬! 사람들이 너를 못 봤지, 그렇지? 아! 어서 가! 사람들한테 들키면 안 돼……."
그러고는 더 낮게.
"제롬,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가엾은 아빠는 아무것도 몰라……."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플랑티에 이모가 어머니와 끝없이 소곤거리는 것, 두 여자의 비밀스럽고 바쁘고 괴로워하는 기색, 내가 그들의 밀담에 다가갈 때마다 나를 밀어내던 "얘야, 저리 가서 놀아라!" 하는 말, 그 모든 것이 그들이 뷔콜랭네 집의 비밀을 아주 모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전보가 어머니를 르아브르로 다시 불렀다. 외숙모가 달아난 것이다.
"누구하고요?" 나는 어머니가 나를 맡기고 간 애슈버턴 양에게 물었다.
"얘야, 그건 엄마한테 물어봐라.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해 준다." 이 일로 넋이 나간 그 다정한 늙은 친구가 말했다.
이틀 뒤 그녀와 나는 어머니에게 가려고 떠났다. 토요일이었다. 이튿날 교회에서 사촌 누이들을 다시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만이 내 생각을 차지했다. 내 어린 마음은 우리의 재회를 이렇게 거룩하게 하는 것을 몹시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외숙모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고, 어머니에게 캐묻지 않는 것을 내 명예로 여겼다.
그날 아침 작은 예배당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보티에 목사는 아마 일부러 그랬겠지만, 그날의 묵상 본문으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골랐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알리사는 나보다 몇 자리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옆얼굴이 보였다. 나는 나 자신을 어찌나 잊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던지, 정신없이 듣고 있는 그 말씀이 그녀를 통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외삼촌은 어머니 곁에 앉아 울고 있었다.
목사는 먼저 그 구절 전체를 읽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러고는 주제를 나누어 먼저 넓은 길 이야기를 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꿈속에서처럼 나는 외숙모의 방을 다시 보았다. 길게 누워 웃는 외숙모를 다시 보았다. 함께 웃는 그 멋진 장교를 다시 보았다……. 그러자 웃음이라는, 기쁨이라는 생각 자체가 상처를 주고 모욕하는 것이 되어, 죄를 가증스럽게 부풀린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보티에 목사가 되짚었다. 그리고 그는 그려 보였고, 나는 보았다. 차려입은 무리가 웃으며 시시덕거리며 나아가는 행렬을. 나는 거기 내 자리를 찾을 수 없고, 찾고 싶지도 않다고 느꼈다. 그들과 함께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를 알리사에게서 멀어지게 할 테니까. 그리고 목사가 본문의 첫머리로 돌아가자, 나는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그 좁은 문을 보았다. 빠져든 꿈속에서 나는 그것을 일종의 압연기처럼 그렸다. 나는 애쓰며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거기에는 천국의 행복을 미리 맛보는 느낌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은 또 알리사의 방문 자체가 되었다. 들어가려고 나는 몸을 줄이고, 내 안에 남아 있는 이기심을 모두 비워 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착하여」 보티에 목사가 이어 갔다. 그러자 나는 모든 고행과 모든 슬픔 너머에서 또 다른 기쁨을 상상하고 예감했다. 순수하고 신비롭고 천사 같은 기쁨, 내 영혼이 벌써 목말라하던 기쁨을. 나는 그 기쁨을 거의 날카로우면서도 다정한 바이올린 노래처럼, 알리사의 마음과 내 마음이 다 타 버리는 뾰족한 불꽃처럼 상상했다. 우리 둘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흰옷을 입고 손을 잡고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나아갔다……. 이 어린애 같은 꿈이 웃음을 사도 상관없다. 나는 그것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되풀이한다. 거기 보일지 모르는 혼란은 아주 또렷한 감정을 전하기에는 모자란 말과 불완전한 그림에만 있을 뿐이다.
「찾는 자가 적음이라」 보티에 목사가 맺었다. 그는 좁은 문을 어떻게 찾는지 설명했다…….
「적음이라.」 나는 그 적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리라…….
설교가 끝나 갈 무렵 나는 어찌나 정신이 팽팽하게 긴장했던지, 예배가 끝나자마자 사촌 누이를 만나려 하지도 않고 달아났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벌써 내 결심(나는 결심을 했으니까)을 시험해 보고 싶었고, 곧바로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그녀를 더 받을 자격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2장
이 엄격한 가르침은 준비된 영혼을 만났다. 타고나기를 의무 쪽으로 기울어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본보기와 그분들이 내 마음의 첫 충동을 길들인 청교도적 규율이 더해져, 내가 「미덕」이라고 들어 온 것으로 기울어 가던 영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내맡기는 것이 자연스럽듯 나에게는 자기를 억누르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나를 얽어매던 그 엄격함은 나를 질리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우쭐하게 했다. 나는 앞날에서 행복 자체보다 행복에 이르려는 끝없는 노력을 구했고, 벌써 행복과 미덕을 혼동했다. 물론 열네 살 아이로서 나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곧 알리사를 향한 사랑이 나를 일부러 그쪽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내면의 깨달음이었고, 그 빛 아래서 나는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안으로 웅크린, 덜 피어난, 기다림으로 가득한, 남에게 별 관심이 없고 그리 진취적이지도 않은, 자기를 이기는 것 말고는 다른 승리를 꿈꾸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공부를 좋아했다. 놀이 가운데서는 정신을 모으거나 애를 써야 하는 것에만 빠졌다. 또래 친구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고, 그들의 놀이에는 정이나 호의 때문에만 끼었다. 그래도 아벨 보티에와는 가까워졌다. 그는 이듬해 파리로 와서 우리 반에 들어왔다. 그는 우아하고 게으른 아이여서, 나는 그를 존경하기보다는 좋아했지만, 적어도 그와는 내 생각이 쉴 새 없이 날아가는 르아브르와 퐁괴즈마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같은 고등학교 기숙생으로 들어왔지만 두 학년 아래인 외사촌 로베르 뷔콜랭은 일요일에만 만났다. 그가 사촌 누이들의 동생이 아니었다면, 하긴 그는 누이들을 별로 닮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만나는 데서 아무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온통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 두 우정도 그 사랑의 빛을 받고서야 나에게 어떤 중요성을 띠었다. 알리사는 복음서에서 들은 그 값진 진주 같았고, 나는 그것을 얻으려고 가진 것을 다 파는 사람이었다.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내가 사촌 누이에게 느끼던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게 잘못일까? 그 뒤로 내가 알게 된 그 무엇도 그 이름에 더 걸맞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살의 가장 뚜렷한 불안에 시달릴 나이가 되었을 때도 내 감정의 본질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오직 그녀를 받을 자격을 얻겠다고만 하던 나는, 그녀를 더 직접 가지려 하지 않았다. 공부와 노력과 경건한 행실, 나는 그 모든 것을 신비롭게 알리사에게 바쳤고, 오직 그녀를 위해 한 일을 그녀가 모르게 내버려 두는 것을 미덕의 세련됨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나는 그렇게 일종의 취하게 하는 겸손에 취했고, 아아! 내 즐거움은 별로 따지지 않은 채, 어떤 노력의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데 길들어 갔다.
이 경쟁심이 나 혼자에게만 박차를 가한 것일까? 알리사가 거기 민감했던 것 같지는 않고, 오직 그녀를 위해서만 애쓰는 나 때문에, 나를 위해 무언가를 했던 것 같지도 않다. 꾸밈없는 그녀의 영혼 속에서는 모든 것이 더없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의 미덕은 어찌나 편안하고 우아했던지 자기를 내맡기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애 같은 미소 때문에 그녀 눈빛의 진지함은 매혹적이었다. 그토록 부드럽게, 그토록 다정하게 묻는 그 눈길이 들리는 것을 다시 보노라면, 외삼촌이 혼란 속에서 큰딸에게서 버팀목과 조언과 위안을 구했던 것이 이해된다. 그다음 여름 나는 외삼촌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자주 보았다. 슬픔이 그를 많이 늙게 했다. 그는 식탁에서 거의 말이 없었고, 이따금 갑자기 억지로 꾸민 듯한 즐거움을 보였는데, 그것이 침묵보다 더 괴로웠다. 그는 저녁때 알리사가 찾아올 때까지 서재에 남아 담배를 피웠다. 밖에 나가자고 하면 졸라야 나섰다.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가듯 그를 정원으로 데려갔다. 둘은 꽃길을 내려가 채소밭 계단 근처의 둥근 빈터에 가서 앉았다. 우리가 의자를 거기 가져다 두었다.
어느 저녁 나는 커다란 자줏빛 너도밤나무 그늘 아래 잔디밭에 누워 늦게까지 책을 읽고 있었다. 나와 꽃길 사이에는 눈길은 막아도 목소리는 막지 못하는 월계수 울타리만 있었다. 알리사와 외삼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방금 로베르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때 알리사가 내 이름을 말했고, 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 외삼촌이 외쳤다.
"아! 그 애는 언제나 공부를 좋아할 거다."
나도 모르게 엿듣게 된 나는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적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는 무슨 몸짓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기침을 할까? 「나 여기 있어요! 다 들려요!」 하고 외칠까?…… 나를 꼼짝 못 하게 한 건 더 듣고 싶은 호기심보다 오히려 거북함과 수줍음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지나가는 중이었고, 나는 그들의 말을 아주 불완전하게만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천천히 걸었다. 아마 늘 그러듯 알리사는 가벼운 바구니를 팔에 끼고 시든 꽃을 따고, 잦은 바다 안개에 떨어진 아직 퍼런 열매를 담장 과일나무 밑에서 줍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팔리시에 고모부는 훌륭한 분이셨어요?"
외삼촌의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어서 그의 대답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알리사가 다그쳤다.
"아주 훌륭한 분이셨어요, 네?"
다시 너무 흐릿한 대답. 그러고 다시 알리사가.
"제롬은 똑똑하죠, 그렇죠?"
내가 어찌 귀를 기울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아니, 나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빠는 제롬이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때 외삼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얘야, 먼저 네가 훌륭하다는 말을 무슨 뜻으로 하는지 알고 싶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적어도 사람들 눈에는 드러나지 않아도 아주 훌륭할 수 있단다……. 하느님 보시기에 아주 훌륭할 수 있지."
"저도 그런 뜻으로 말한 거예요." 알리사가 말했다.
"그리고……그걸 어떻게 알겠니? 그 애는 아직 너무 어리다……. 그래, 분명히 앞날이 아주 기대되지. 하지만 성공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또 뭐가 있어야 해요?"
"얘야, 내가 뭐라고 말해 주겠니? 믿음이 있어야 하고, 버팀목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지……."
"버팀목이 뭔데요?" 알리사가 말을 끊었다.
"내가 갖지 못했던 애정과 존경이지." 외삼촌이 슬프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그들의 목소리가 아주 멀어졌다.
저녁 기도 시간에 나는 뜻하지 않은 엿듣기를 뉘우쳤고, 사촌 누이에게 털어놓기로 다짐했다. 어쩌면 이번엔 조금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튿날 내가 첫마디를 꺼내자마자.
"어머, 제롬, 그렇게 엿듣는 건 아주 나빠. 알려 주든지 자리를 떴어야지."
"정말 엿들은 게 아니야……. 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들린 거야……. 그리고 너희는 지나가던 중이었잖아."
"우리는 천천히 걸었어."
"그래, 하지만 거의 들리지 않았어. 금방 안 들리게 됐어……. 말해 봐, 성공하려면 뭐가 있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외삼촌이 뭐라고 대답하셨어?"
"제롬."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너 다 들었잖아! 나한테 다시 말하게 하려고 장난치는 거지."
"정말 처음만 들었어……. 믿음이랑 사랑 이야기하실 때."
"그다음에 다른 것도 많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
"그럼 너는 뭐라고 대답했어?"
그녀가 갑자기 아주 진지해졌다.
"아빠가 살면서 버팀목이 있어야 한다고 하실 때, 나는 너한테는 너희 엄마가 계시다고 했어."
"아! 알리사, 엄마가 늘 계시지는 않을 거라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그건 다른 거야……."
그녀가 이마를 숙였다.
"아빠도 그렇게 대답하셨어."
나는 떨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중에 내가 무엇이 되든, 그건 너를 위해 되고 싶은 거야."
"하지만 제롬, 나도 너를 떠날 수 있어."
내 영혼이 내 말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너를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
그녀가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너는 혼자 걸을 만큼 강하지 않아? 우리는 저마다 혼자서 하느님께 가야 하는 거야."
"하지만 길을 가르쳐 주는 건 너잖아."
"왜 그리스도 말고 다른 길잡이를 찾으려고 해?……우리가 저마다 서로를 잊고 하느님께 기도할 때보다 서로에게 더 가까운 때가 있다고 생각해?"
"그래, 우리를 맺어 달라고." 내가 말을 끊었다. "아침저녁으로 내가 하느님께 비는 게 그거야."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게 뭔지 모르겠어?"
"온 마음으로 알아. 우리가 같이 우러르는 하나의 것 안에서 정신없이 서로를 다시 만나는 거야. 네가 우러르는 걸 알기에 내가 그걸 우러르는 건 바로 너를 다시 만나려고 그러는 것 같아."
"네 우러름은 순수하지 않아."
"너무 많이 바라지 마. 거기서 너를 다시 만날 수 없다면 나는 천국도 우습게 여길 거야."
그녀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조금 엄숙하게 말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의 말을 옮겨 적으면서, 어떤 아이들의 말이 얼마나 곧잘 진지한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별로 어린애답지 않게 보이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어쩌겠는가? 변명하려 할까? 더 자연스러워 보이게 꾸미고 싶지 않은 것만큼이나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불가타 라틴어 성경의 복음서를 구해서 긴 구절들을 외우고 있었다. 동생을 돕는다는 핑계로 알리사는 나와 함께 라틴어를 배웠는데, 내 생각에는 오히려 내 독서를 계속 따라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나는 그녀가 함께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 공부에는 재미를 붙일 엄두조차 거의 내지 못했다. 그것이 이따금 나를 가로막았다 해도, 사람들이 생각하듯 내 정신의 도약을 멈추게 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어디서나 자유롭게 나를 앞서가는 것 같았다. 다만 내 정신은 그녀에 따라 제 길을 골랐고, 그때 우리를 사로잡은 것, 우리가 「사상」이라고 부르던 것은 흔히 좀 더 정교한 교감의 핑계, 감정의 변장, 사랑의 겉옷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그 깊이를 아직 가늠하지 못한 감정을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력이 쇠해 가는 것을 느끼는 지금은 어머니로서 우리를 한 품에 함께 안는 것을 좋아했다. 오래전부터 앓아 온 심장병이 점점 더 자주 어머니를 괴롭혔다. 유난히 심한 발작이 왔을 때 어머니는 나를 곁으로 불렀다.
"가엾은 것, 엄마가 많이 늙은 걸 너도 알지." 어머니가 말했다. "언젠가 엄마가 갑자기 너를 두고 떠날 거다."
어머니는 숨이 몹시 가빠 말을 멈췄다. 그러자 나는 참을 수 없이, 어머니가 내가 그 말을 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던 말을 외쳤다.
"엄마……. 내가 알리사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리고 내 말은 분명 어머니의 가장 깊은 생각에 이어지는 것이었는지, 어머니가 곧바로 말했다.
"그래. 엄마가 너한테 하고 싶던 말이 그거다, 우리 제롬."
"엄마!" 나는 흐느끼며 말했다. "엄마는 알리사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시죠, 그렇죠?"
"그래, 얘야." 어머니는 다정하게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래, 얘야." 어머니는 힘겹게 말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주님께서 하시도록 맡겨야 한다." 그러고는 내가 그 곁에 몸을 숙이고 있자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또 말했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지켜 주시기를, 얘들아! 하느님께서 너희 둘을 다 지켜 주시기를." 그러고는 일종의 선잠에 빠졌고, 나는 어머니를 깨우려 하지 않았다.
이 대화는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이튿날 어머니는 나아졌고, 나는 다시 학교로 떠났으며, 이 반쯤 털어놓은 속내 위로 침묵이 다시 닫혔다. 게다가 그 이상 무엇을 알게 되었겠는가? 알리사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나는 한순간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의심했다 해도, 뒤이어 일어난 슬픈 일로 그 의심은 내 마음에서 영영 사라졌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느 저녁 애슈버턴 양과 나 사이에서 아주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를 데려간 마지막 발작은 처음에는 전보다 심해 보이지 않았다. 끝 무렵에야 위급해졌고, 그 전에 친척 누구도 달려올 겨를이 없었다. 첫날 밤 나는 어머니의 오랜 친구 곁에서 소중한 고인을 지켰다. 나는 어머니를 깊이 사랑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도 내 안에서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의아했다. 내가 운 것은 애슈버턴 양이 가여워서였다. 그녀보다 훨씬 젊은 친구가 그렇게 그녀보다 앞서 하느님 앞에 가는 것을 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상(喪)이 사촌 누이를 나에게로 서둘러 데려오리라는 남모를 생각이 내 슬픔을 크게 압도했다.
이튿날 외삼촌이 왔다. 그는 나에게 딸의 편지를 건넸다. 알리사는 그다음 날에야 플랑티에 이모와 함께 왔다.
「……제롬, 내 친구, 내 오빠.」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고모가 기다리시던 그 큰 기쁨을 드렸을 몇 마디를 해 드리지 못한 게 얼마나 슬픈지 몰라. 이제 고모가 나를 용서해 주시기를! 그리고 이제부터는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 둘을 이끄시기를! 잘 있어, 가엾은 내 친구.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너의 알리사가.」
이 편지가 무슨 뜻일 수 있었을까? 그녀가 하지 못해 슬퍼한 그 몇 마디란, 우리의 앞날을 약속했을 그 말 말고 무엇이었겠는가? 하지만 나는 아직 너무 어려서 곧바로 청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약속이 필요했을까? 우리는 이미 약혼한 거나 다름없지 않았던가? 우리의 사랑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는 비밀이 아니었다. 외삼촌도 어머니만큼이나 거기 아무 걸림돌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벌써 나를 아들처럼 대했다.
며칠 뒤 찾아온 부활절 방학을 나는 르아브르에서 보냈다. 플랑티에 이모 집에 묵으면서 거의 모든 끼니를 뷔콜랭 외삼촌 댁에서 먹었다.
펠리시 플랑티에 이모는 더없이 좋은 여자였지만, 사촌 누이들도 나도 이모와 그리 가깝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이느라 이모는 늘 숨이 찼다. 몸짓은 부드럽지 않았고, 목소리에는 가락이 없었다. 하루 중 아무 때나 갑자기 마음을 쏟아 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면 이모는 넘치는 애정으로 우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뷔콜랭 외삼촌은 그녀를 무척 아꼈지만, 그녀에게 말하는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우리 어머니를 얼마나 더 좋아했는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가엾은 것." 어느 저녁 이모가 말을 꺼냈다. "이번 여름에 네가 뭘 할 생각인지 모르겠다만, 네 계획을 알고 나서 내가 할 일을 정하련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직 별로 생각 안 해 봤어요." 내가 대답했다. "어쩌면 여행을 해 볼까 해요."
이모가 말을 이었다.
"우리 집에서도 퐁괴즈마르에서도 너는 언제나 환영이라는 거 알지. 네가 거기 가면 외삼촌하고 쥘리에트가 기뻐할 거다……."
"알리사 말씀이시죠."
"그렇지! 미안하다……. 글쎄 나는 네가 사랑하는 게 쥘리에트인 줄 알았지 뭐냐! 네 외삼촌이 말해 주기 전까지……. 한 달도 안 됐다……. 있잖니, 나는 너희를 좋아하지만 너희를 잘 몰라. 너희를 볼 기회가 거의 없잖니!……게다가 나는 눈썰미도 없고. 나랑 상관없는 걸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 너는 늘 쥘리에트하고 놀더라……. 그래서 생각했지……. 그 애는 아주 예쁘고 아주 명랑하니까."
"네, 아직도 쥘리에트하고는 즐겨 놀아요.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건 알리사예요……."
"좋아! 좋아. 네 마음대로지……. 나는 말이다, 그 애를 모른다고 해도 될 정도야. 그 애는 동생보다 말이 적잖니. 네가 그 애를 골랐다면 다 좋은 이유가 있었겠지."
"하지만 이모, 저는 알리사를 사랑하기로 고른 게 아니에요. 그리고 무슨 이유로……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화내지 마라, 제롬. 나는 나쁜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니야……. 네 덕에 하려던 말을 잊었구나……. 아! 이거다. 물론 이 모든 게 결국 결혼으로 끝나겠지. 하지만 상중이라 지금 바로 약혼하는 건 체면이 서지 않을 거다……. 그리고 너는 아직 아주 어리고…….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이제 엄마 없이 너 혼자 퐁괴즈마르에 가 있으면 남들이 좋지 않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모, 바로 그래서 여행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래. 그래서 얘야, 내가 있으면 일이 수월하겠다 싶어서, 여름 한동안 시간을 낼 수 있게 일을 맞춰 두었다."
"제가 부탁만 했으면 애슈버턴 양이 기꺼이 와 주셨을 거예요."
"그분이 오실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걸로는 모자라! 나도 가겠다……. 아! 내가 너희 곁에서 가엾은 네 엄마를 대신하겠다는 건 아니다." 이모가 갑자기 흐느끼며 덧붙였다. "하지만 살림은 내가 맡으마……. 그러면 너도 외삼촌도 알리사도 거북할 일이 없을 거다."
펠리시 이모는 자기가 있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착각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를 거북하게 한 건 이모뿐이었다. 말한 대로 이모는 칠월부터 퐁괴즈마르에 자리를 잡았고, 애슈버턴 양과 나도 곧 그곳에 갔다. 알리사의 집안일을 돕는다는 핑계로 이모는 그토록 고요하던 집을 끊임없는 웅성거림으로 채웠다. 우리를 즐겁게 해 주려고, 이모 말대로 「일을 수월하게 하려고」 쏟는 열성이 어찌나 두꺼웠던지, 알리사와 나는 이모 앞에서 대개 거북하게 거의 말없이 지냈다. 이모는 우리가 아주 쌀쌀맞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입을 다물지 않았다 한들, 이모가 우리 사랑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반면에 쥘리에트의 성격은 이 넘치는 성미와 꽤 잘 맞았다. 그리고 어쩌면 이모가 조카딸 가운데 동생을 유난히 아끼는 걸 보며 생긴 얼마간의 원망이 이모를 향한 내 애정을 가로막았는지도 모른다.
어느 아침 우편이 오고 나서 이모가 나를 불렀다.
"가엾은 제롬, 정말 미안하구나. 내 딸이 아파서 나를 부르는구나. 너희를 두고 가야겠다……."
쓸데없는 망설임에 부풀어서 나는 외삼촌을 찾아갔다. 이모가 떠난 뒤에도 퐁괴즈마르에 남아 있을 엄두를 낼 수 있을지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첫마디부터.
"가엾은 누이가 또 무슨 생각을 해서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을 꼬아 놓은 거냐? 에이! 제롬, 네가 왜 우리를 떠나니?" 그가 외쳤다. "너는 이미 내 자식이나 다름없지 않니?"
이모가 퐁괴즈마르에 머문 것은 보름 남짓이었다. 이모가 떠나자마자 집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행복과 아주 닮은 그 평온이 다시 집에 깃들었다. 나의 상(喪)은 우리 사랑을 어둡게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무겁게 했다. 단조롭게 흘러가는 삶이 시작되었는데, 아주 잘 울리는 공간에서처럼 우리 마음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 들렸다.
이모가 떠나고 며칠 뒤 어느 저녁, 식탁에서 우리는 이모 이야기를 했다. 기억이 난다.
"어쩜 그렇게 정신이 없으실까!" 우리는 말했다. "삶의 물결이 그분 영혼에 그토록 쉴 틈을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의 아름다운 모습이여, 여기서 네 그림자는 어떻게 되었느냐?" ……괴테가 슈타인 부인을 두고 쓴 말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혼에 세상이 비치는 것을 보면 아름다우리라.」 그러고 우리는 곧바로 무슨 위계 같은 것을 세워, 관조하는 능력을 가장 높이 쳤다. 그때까지 말이 없던 외삼촌이 슬프게 웃으며 우리를 나무랐다.
"얘들아." 그가 말했다. "부서졌어도 하느님은 당신의 형상을 알아보실 거다. 사람을 그 삶의 한순간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 가엾은 내 누이에게서 너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모두, 내가 너무 잘 알아서 너희처럼 엄하게 나무랄 수 없는 일들 때문이란다. 젊은 날의 아무리 사랑스러운 성품도 늙으면서 상하지 않는 것은 없다. 너희가 펠리시에게서 「정신없음」이라고 부르는 것도 처음에는 매혹적인 열기였고, 생기였고, 순간에 몸을 맡기는 것이었고, 우아함이었다……. 정말이지 우리도 지금의 너희와 그리 다르지 않았단다. 나는 너하고 꽤 닮았었다, 제롬. 어쩌면 내가 아는 것보다 더. 펠리시는 지금의 쥘리에트를 무척 닮았었고……. 그래, 생김새까지도. 그리고 갑자기," 그가 딸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네 목소리가 터져 나올 때 이따금 그 애가 다시 보인다. 그 애는 네 미소를 가졌었다. 그리고 그 애가 곧 잃어버린 몸짓도. 너처럼 이따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팔꿈치를 앞으로 내밀고, 깍지 낀 손가락에 이마를 박고 있던 몸짓 말이다."
애슈버턴 양이 나를 돌아보며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너희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건 알리사야."
그해 여름은 찬란했다. 모든 것이 푸른빛에 스며든 것 같았다. 우리의 열정은 악을, 죽음을 이겨 냈다. 어둠이 우리 앞에서 물러났다. 아침마다 나는 내 기쁨에 잠이 깼다. 새벽에 일어나 날을 맞으러 뛰어나갔다……. 그 시절을 꿈꾸면 이슬로 가득한 모습으로 다시 보인다. 밤늦게까지 깨어 있는 언니보다 일찍 일어나는 쥘리에트가 나와 함께 정원에 내려왔다. 그녀는 언니와 나 사이의 전령 노릇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끝없이 우리 사랑 이야기를 했고,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는 데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알리사에게 감히 하지 못하는 말을 그녀에게 했다. 알리사 앞에서는 사랑이 지나쳐 겁이 나고 쭈뼛거렸다. 알리사는 이 놀이에 응하는 듯, 내가 동생에게 그토록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결국 우리가 그녀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아니면 모르는 척하면서.
오, 사랑의, 사랑이 넘쳐서 생긴 아름다운 꾸밈이여, 너는 어떤 은밀한 길로 우리를 웃음에서 눈물로, 가장 순진한 기쁨에서 미덕의 요구로 데려갔던가!
여름은 어찌나 맑고 매끄럽게 달아났던지, 미끄러지듯 지나간 그 나날 가운데 지금 내 기억이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사건이라고는 대화와 독서뿐이었다…….
"슬픈 꿈을 꿨어." 내 방학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어느 아침 알리사가 말했다. "나는 살아 있고 너는 죽었어. 아니, 네가 죽는 걸 본 건 아니야. 그냥 이랬어. 너는 죽었어. 끔찍했어. 너무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나는 그저 네가 없는 거라고 겨우 바꿔 놓았어. 우리는 떨어져 있었고, 너를 다시 만날 방법이 있다는 걸 느꼈어. 나는 어떻게 하면 될지 찾았고, 거기 이르려고 어찌나 애를 썼던지 그 바람에 깨 버렸어.
오늘 아침에도 그 꿈의 느낌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아. 꿈을 계속 꾸는 것 같았어. 아직도 내가 너와 떨어져 있고, 오래오래 떨어져 있을 것 같았어." 그러고는 아주 낮게 덧붙였다. "평생. 그리고 평생 크게 애써야 할 것 같았어……."
"왜?"
"저마다, 서로 다시 만나려고 크게 애써야 하는 거."
나는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면 진지하게 받아들이기가 두려웠다. 거기 맞서기라도 하듯, 가슴을 몹시 두근거리며 갑작스러운 용기를 내어 나는 말했다.
"그럼 나는, 오늘 아침에 너와 결혼하는 꿈을 꿨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을 만큼 굳게. 죽음 말고는."
"너는 죽음이 떼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녀가 말했다.
"내 말은……."
"나는 오히려 죽음이 가깝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 살아 있는 동안 떨어져 있던 것을 가깝게."
이 모든 것이 어찌나 깊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던지, 나는 아직도 우리 말의 억양까지 듣는다. 하지만 그 말들의 무게를 다 이해한 것은 나중이었다.
여름이 달아나고 있었다. 벌써 대부분의 밭이 비어서, 눈길이 뜻밖에 더 멀리까지 뻗었다. 떠나기 전날, 아니, 전전날 저녁 나는 쥘리에트와 함께 아래 정원의 숲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어제 알리사한테 뭘 읊어 줬어?" 그녀가 물었다.
"언제?"
"이회토 구덩이 벤치에서, 우리가 너희를 뒤에 두고 왔을 때……."
"아!……보들레르 시 몇 줄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거? 말해 주기 싫구나."
"곧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라,"
나는 마지못해 읊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가 곧바로 내 말을 끊고 떨리고 달라진 목소리로 이어 갔다.
"잘 가라! 너무 짧은 우리 여름의 생생한 빛이여!"
"아니! 너 이거 알아?" 나는 몹시 놀라 외쳤다. "너는 시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왜? 네가 나한테는 시를 안 읊어 주니까?" 그녀가 웃으며, 하지만 조금 거북한 듯 말했다……. "가끔 너는 내가 완전히 바보인 줄 아는 것 같아."
"아주 똑똑하면서도 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 네가 시를 읊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고, 나한테 읊어 달라고 한 적도 없잖아."
"알리사가 맡아서 하니까……."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물었다.
"모레 떠나는 거야?"
"그래야지."
"이번 겨울엔 뭐 할 거야?"
"고등사범학교 일 학년."
"알리사하고는 언제 결혼할 생각이야?"
"군대 가기 전에는 안 해. 그다음에 뭘 할지 조금 더 잘 알기 전에도 안 하고."
"그럼 아직 모르는 거야?"
"아직 알고 싶지 않아. 관심 가는 게 너무 많아. 하나를 골라서 그것만 해야 하는 때를 될 수 있는 대로 미루는 거야."
"약혼을 미루는 것도 매이는 게 두려워서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가 다그쳤다.
"그럼 약혼하려고 뭘 기다리는 거야? 왜 지금 당장 약혼하지 않아?"
"우리가 왜 약혼을 해야 해? 세상 사람들이 몰라도 우리가 서로의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걸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내가 그녀를 위해 내 평생을 걸고 싶다면, 내 사랑을 약속으로 묶는 게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 나는 아니야. 맹세는 사랑에 대한 모욕 같아……. 내가 약혼하고 싶은 건 그녀를 믿지 못할 때뿐일 거야."
"내가 못 믿는 건 언니가 아니야……."
우리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우리는 예전에 내가 알리사와 아버지의 대화를 뜻하지 않게 들었던 정원의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정원으로 나가는 걸 본 알리사가 어쩌면 둥근 빈터에 앉아 있고, 그녀도 우리 말을 똑같이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녀에게 직접 감히 하지 못하는 말을 듣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곧바로 나를 사로잡았다. 내 꾀가 재미있어서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 나는 그 나이다운 조금 거창한 열광으로 외쳤다. 내 말에 너무 정신을 쏟느라, 쥘리에트의 말을 통해 그녀가 말하지 않은 모든 것을 듣지 못하면서……. "아! 사랑하는 영혼 위로 몸을 숙여, 거울을 보듯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을 남기는지 볼 수만 있다면! 우리 자신 안에서처럼, 우리 자신 안에서보다 더 잘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다정함 속에 얼마나 평온할까! 행동에 얼마나 확신이 있을까! 사랑은 얼마나 순수할까!……"
나는 쥘리에트의 동요를 내 시시한 서정의 효과로 여길 만큼 우쭐했다. 그녀가 갑자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제롬! 제롬! 네가 언니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확신하고 싶어! 언니가 너 때문에도 괴로워해야 한다면, 나는 너를 미워할 것 같아."
"쥘리에트." 나는 그녀를 껴안고 이마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럼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할 거야. 네가 안다면!……내가 아직 진로를 정하고 싶지 않은 건 바로 그녀하고만 내 삶을 시작하려는 거야! 내 앞날을 모두 그녀에게 걸어 두는 거야! 그녀 없이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 그런 건 원하지 않아……."
"언니한테 그런 이야기 하면 언니는 뭐라고 해?"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해! 한 번도. 그래서 우리가 아직 약혼하지 않는 거기도 해. 우리 사이에서는 결혼 이야기도, 그다음에 우리가 뭘 할지도 한 번도 나오지 않아. 오, 쥘리에트! 그녀와의 삶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서 나는 감히……알겠어? 감히 그녀한테 그 이야기를 못 해."
"행복이 언니를 깜짝 놀라게 해 주길 바라는구나."
"아니! 그게 아니야. 나는 무서워……. 그녀를 무섭게 할까 봐, 알겠어?……내가 언뜻 보는 이 엄청난 행복이 그녀를 겁먹게 할까 봐 무서워! 한번은 그녀한테 여행 이야기를 했어. 여행하고 싶으냐고 물었지. 그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그런 나라들이 있다는 것, 그 나라들이 아름답다는 것, 다른 사람들은 거기 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어……."
"너는, 제롬, 너는 여행하고 싶어?"
"어디든지! 삶 전체가 긴 여행 같아. 그녀와 함께, 책과 사람과 나라들을 지나는. 닻을 올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봤어?"
"응, 자주 생각해." 그녀가 속삭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거의 듣지 않고 가엾은 다친 새들처럼 땅에 떨어뜨려 버리던 나는 말을 이었다.
"밤에 떠나는 거야. 눈부신 새벽에 깨어나서, 불확실한 물결 위에 우리 둘만 있다는 걸 느끼는 거야……."
"그리고 어릴 때부터 지도에서 보던 항구에 닿는 거지. 모든 게 낯선 곳에……. 네가 알리사한테 팔을 내주고 배다리를 내려오는 모습이 그려져."
"우리는 서둘러 우체국에 가겠지."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쥘리에트가 우리한테 보낸 편지를 찾으러……."
"퐁괴즈마르에서 보낸 편지 말이지. 그 애는 거기 남아 있을 테고, 퐁괴즈마르는 너희한테 아주 작고 아주 쓸쓸하고 아주 멀게 보이겠지……."
이게 정말 그녀가 한 말인지 나는 장담할 수 없다. 말했듯이 나는 내 사랑으로 너무 가득 차서, 그 곁에서 다른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둥근 빈터 가까이에 와 있었다. 발길을 돌리려는데 알리사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어찌나 창백했던지 쥘리에트가 소리를 질렀다.
"정말 몸이 좀 안 좋아." 알리사가 서둘러 더듬거렸다. "바람이 차. 들어가는 게 좋겠어." 그러고는 곧바로 우리를 떠나 빠른 걸음으로 집 쪽으로 돌아갔다.
"언니가 우리 이야기를 들었어." 알리사가 조금 멀어지자마자 쥘리에트가 외쳤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괴롭게 할 말은 아무것도 안 했잖아. 오히려……."
"놔둬." 그녀가 말하고는 언니를 쫓아 뛰어갔다.
그날 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알리사는 저녁 식탁에 나왔다가 두통을 호소하며 곧바로 물러갔다. 그녀는 우리 대화에서 무엇을 들었을까? 나는 불안하게 우리의 말을 되짚었다. 그러다 어쩌면 쥘리에트에게 너무 붙어 걸으며 팔을 그녀에게 두른 게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린 시절부터의 버릇이었고, 알리사도 우리가 그렇게 걷는 걸 숱하게 보았다. 아! 내 잘못을 더듬어 찾던 나는 얼마나 서글픈 눈먼 사람이었던가. 내가 그토록 건성으로 듣고 그토록 잘 기억하지 못하는 쥘리에트의 말을 어쩌면 알리사가 더 잘 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순간도 하지 못하다니. 어쨌든! 불안에 갈피를 잃고, 알리사가 나를 의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질겁하고, 다른 위험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나는 쥘리에트에게 했던 말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녀가 한 말에 흔들려서, 나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이기고 이튿날 약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떠나기 전날이었다. 그녀가 슬퍼하는 건 그 때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그녀가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그녀를 혼자 만나지 못한 채 하루가 지나갔다. 말도 못 해 보고 떠나야 할까 봐 두려워서 나는 저녁 식사 조금 전에 그녀 방까지 갔다. 그녀는 산호 목걸이를 걸고 있었는데, 고리를 채우려고 두 팔을 들고 몸을 숙인 채 문에 등을 돌리고, 켜 놓은 두 촛대 사이의 거울을 어깨 너머로 보고 있었다. 그녀는 거울 속에서 먼저 나를 보았고, 돌아보지 않은 채 잠시 거울 속에서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 내 방문이 안 닫혀 있었어?" 그녀가 말했다.
"두드렸는데 대답이 없었어. 알리사, 나 내일 떠나는 거 알지?"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걸지 못한 목걸이를 벽난로 위에 내려놓았다. 「약혼」이라는 말은 너무 맨살 같고 너무 거칠게 느껴져서 나는 그 대신 무슨 에두른 말을 썼다. 알리사가 내 말을 알아듣자마자 비틀거리며 벽난로에 기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 자신도 어찌나 떨렸던지 겁이 나서 그녀 쪽을 쳐다보지 못했다.
나는 그녀 곁에 있었고, 눈을 들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살짝 숙이고 내 손을 조금 들어 올려 거기 입술을 대고, 반쯤 나에게 기대며 속삭였다.
"안 돼, 제롬. 안 돼. 약혼하지 말자, 부탁이야……."
내 심장이 어찌나 세게 뛰었던지 그녀도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더 다정하게 다시 말했다. "안 돼. 아직은……."
그리고 내가 물었을 때
"왜?"
"그건 내가 물어야지. 왜? 왜 바꿔?"
나는 어제 대화 이야기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녀는 내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내 생각에 대답하듯 나를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착각하는 거야, 내 친구. 나는 그렇게 큰 행복은 필요 없어. 우리 지금도 행복하잖아?"
그녀는 웃으려고 애썼지만 헛일이었다.
"아니, 나는 너를 떠나야 하니까."
"들어 봐, 제롬. 오늘 저녁엔 이야기할 수 없어……. 우리 마지막 순간을 망치지 말자…….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 어느 때 못지않게 너를 사랑해. 안심해. 편지할게. 설명할게. 내일 바로 편지하겠다고 약속해……. 네가 떠나자마자. 자, 이제 가! 봐, 나 울잖아……. 나를 내버려 둬."
그녀는 나를 밀어내며 부드럽게 자기에게서 떼어 냈다. 그것이 우리의 작별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녀에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이튿날 내가 떠날 때 그녀는 방에 틀어박혔다. 나를 싣고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그녀가 창가에서 작별의 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3장
그해 나는 아벨 보티에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는 징집을 앞당겨 자원 입대했고, 나는 수사학 반을 한 해 더 다니며 학사 시험을 준비했다. 아벨보다 두 살 어린 나는 우리 둘이 그해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고등사범학교를 마친 뒤로 군 복무를 미뤄 두었다.
우리는 반갑게 다시 만났다. 군대에서 나온 뒤 그는 한 달 넘게 여행을 했다. 그가 변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저 자신감이 더 붙었을 뿐 매력은 하나도 잃지 않았다. 개학 전날 오후 우리는 뤽상부르 공원에서 보냈는데, 나는 털어놓고 싶은 마음을 누르지 못해 내 사랑 이야기를 길게 했다. 하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그해 여자들을 얼마간 겪어 보았고, 그 덕에 조금 건방진 우월감을 내비쳤지만 나는 조금도 언짢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의 말대로 「마지막 한마디를 박아 두지」 못했다고 놀리면서, 여자에게 절대 마음을 추스를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무슨 공리처럼 내세웠다. 나는 그가 말하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그의 훌륭한 논리는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맞지 않으며, 그는 그저 우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도착한 이튿날 나는 이 편지를 받았다.
「네가 나한테 제안한 것을 많이 생각해 봤어(내가 제안한 것이라니! 우리의 약혼을 그렇게 부르다니!). 내가 너한테 나이가 너무 많은 게 아닐까 두려워. 너는 아직 다른 여자들을 볼 기회가 없었으니 아직 그렇게 느끼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너에게 나를 준 뒤에 내가 더는 네 마음에 들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나중에 내가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하게 돼. 이걸 읽으면서 너는 분명 몹시 화가 나겠지. 네가 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래도 나는 네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 그저 네가 삶에서 조금 더 나아갈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거야.
알아줘, 내가 여기서 말하는 건 오직 너를 위해서야. 나로 말하면, 나는 절대로 너를 사랑하기를 그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알리사.」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그친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나 있단 말인가! 나는 슬프다기보다 놀랐다. 하지만 어찌나 마음이 어지러웠던지 곧바로 이 편지를 아벨에게 보여 주러 달려갔다.
"그래! 어쩔 셈이야?" 편지를 다 읽고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꽉 다물고 있던 그가 말했다. 나는 막막하고 서글퍼서 두 팔을 들어 보였다.
"설마 답장을 쓰지는 않겠지! 여자하고 따지기 시작하면 끝장이야……. 들어 봐. 토요일에 르아브르에서 자면 일요일 아침에 퐁괴즈마르에 가 있다가 월요일 첫 수업에 맞춰 돌아올 수 있어. 나는 군대 간 뒤로 너희 친척 어른들을 못 뵈었으니 핑계로 충분하고 체면도 서. 알리사가 이게 핑계일 뿐이라는 걸 알아챈다면 오히려 잘된 거지! 네가 언니 쪽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쥘리에트를 맡을게. 너는 어린애처럼 굴지 않도록 해……. 사실 네 이야기에는 내가 잘 이해 못 하는 데가 있어. 나한테 다 말하지는 않았을 거야……. 상관없어! 내가 밝혀낼게……. 무엇보다 우리가 간다고 미리 알리지 마. 네 사촌 누이를 깜짝 놀라게 해서 무장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해."
정원 울타리 문을 밀 때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쥘리에트가 곧바로 우리를 맞으러 뛰어나왔다. 알리사는 리넨 방에서 일하다가 서둘러 내려오지 않았다. 외삼촌과 애슈버턴 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에야 그녀가 거실로 들어왔다. 우리가 불쑥 찾아와서 마음이 흔들렸다 해도 적어도 그녀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아벨이 한 말을 떠올렸고, 그녀가 그토록 오래 나타나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맞서 무장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다. 쥘리에트가 몹시 들떠 있어서 그녀의 조심스러움이 더욱 차갑게 보였다. 나는 그녀가 내가 다시 온 것을 못마땅해한다고 느꼈다. 적어도 그녀는 얼굴에 못마땅함을 내보이려 애썼고, 나는 그 뒤에 더 뜨거운 남모를 동요가 숨어 있지 않을까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우리와 꽤 떨어진 구석 창가에 앉은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땀을 세는 자수에 온통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아벨이 이야기를 했다. 다행이었다! 나는 그럴 힘이 없었고, 그가 군대에서 보낸 한 해와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면 다시 만난 첫 순간들은 쓸쓸했을 것이다. 외삼촌도 유난히 근심스러워 보였다.
점심을 먹자마자 쥘리에트가 나를 따로 불러 정원으로 끌고 갔다.
"글쎄 나한테 청혼이 들어왔어!" 우리 둘만 남자마자 그녀가 외쳤다. "펠리시 고모가 어제 아빠한테 편지를 보내서 님에 사는 포도 농장주가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알려 왔어. 고모 말로는 아주 괜찮은 사람인데, 올봄에 사교 모임에서 나를 몇 번 보고 반했대."
"너는 그 사람 눈여겨봤어?" 나는 그 구혼자에게 저도 모르게 적의를 느끼며 물었다.
"응, 누군지 알아. 사람 좋은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야. 교양도 없고 아주 못생기고 아주 천박하고 꽤 우스꽝스러워서 고모도 그 사람 앞에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어."
"그 사람……가망이 있어?" 나는 놀리는 투로 말했다.
"제롬도 참! 농담하지 마! 장사꾼이라니!……네가 그 사람을 봤으면 그런 걸 묻지도 않았을 거야."
"그래서……외삼촌은 뭐라고 대답하셨어?"
"내가 대답한 거랑 똑같이, 내가 결혼하기엔 너무 어리다고……. 그런데 안됐게도," 그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고모가 그 핑계를 미리 내다봤어. 추신에 그러더라. 이름이 에두아르 테시에르인 그 사람이 기다리겠다고, 지금 청혼하는 건 그저 「순서를 잡아 두려는」 거라고……. 말도 안 되지. 그런데 내가 어쩌겠어? 그 사람한테 너무 못생겼다고 전하라고 할 수도 없잖아!"
"그건 아니지만, 포도 농장주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는 할 수 있지."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건 고모 머릿속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유야……. 그 얘긴 그만하자. 알리사가 너한테 편지했어?"
그녀는 몹시 빠르게 말했고 몹시 흥분한 것 같았다. 내가 알리사의 편지를 내밀자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읽었다. 그녀가 나에게 물을 때 목소리에 화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쩔 거야?"
"이제 모르겠어." 내가 대답했다. "막상 여기 오니 편지를 쓰는 편이 더 쉬웠겠다 싶고, 벌써 온 걸 후회하고 있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알겠어?"
"언니가 너를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어 한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내가 내 자유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그럼 그녀가 왜 나한테 이런 편지를 쓰는지는 알겠어?"
그녀는 아니, 하고 대답했는데, 어찌나 딱 잘랐던지 나는 진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면서도 그 순간부터 쥘리에트가 어쩌면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고 그녀는 우리가 걷던 길의 모퉁이에서 갑자기 몸을 돌렸다.
"이제 나 좀 내버려 둬. 너는 나하고 이야기하려고 온 게 아니잖아. 우리 너무 오래 같이 있었어."
그녀는 집 쪽으로 달아났고, 잠시 뒤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내가 거실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피아노를 멈추지 않고, 하지만 이제는 느릿하게, 손 가는 대로 즉흥으로 치듯 하면서, 그녀 곁으로 와 있던 아벨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두고 나왔다. 나는 알리사를 찾아 꽤 오래 정원을 헤맸다.
그녀는 과수원 맨 안쪽에서 낮은 담 밑의 첫 국화를 따고 있었다. 국화 향기가 너도밤나무 숲의 낙엽 냄새와 섞였다. 공기에는 가을이 가득 배어 있었다. 해는 담장 과일나무들을 겨우 미지근하게 데울 뿐이었지만 하늘은 동방의 하늘처럼 맑았다. 그녀의 얼굴은 아벨이 여행에서 사다 주자 곧바로 쓴 커다란 제일란트 모자에 감싸여, 그 안쪽에 거의 숨어 있었다. 그녀는 내가 다가가도 처음에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누르지 못한 가벼운 떨림을 보고 그녀가 내 발소리를 알아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벌써 몸을 굳히며 그녀의 꾸지람과 나를 내리누를 엄한 눈길에 맞서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꽤 가까이 가서 벌써 겁먹은 듯 걸음을 늦추자, 그녀는 처음에는 얼굴을 나에게 돌리지 않고 토라진 아이처럼 숙인 채로, 꽃이 가득한 손을 거의 뒤로 나에게 내밀며 오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장난삼아 오히려 그 몸짓에 멈춰 서자, 그녀가 마침내 돌아서서 나에게 몇 걸음 다가오며 얼굴을 들었고, 나는 그 얼굴이 웃음으로 가득한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비추자 모든 것이 갑자기 다시 단순하고 쉬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힘들이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네 편지 때문에 다시 왔어."
"그럴 줄 알았어."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목소리의 억양으로 꾸지람의 가시를 무디게 하며 말을 이었다. "바로 그게 속상해. 내가 한 말을 왜 나쁘게 받아들였어? 아주 간단한 말이었는데……."
(그리고 정말로 슬픔도 어려움도 벌써 상상일 뿐인 것 같았고, 내 머릿속에만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이대로 행복했잖아. 내가 그렇게 말했지. 네가 바꾸자고 하는데 내가 거절하는 게 왜 놀라워?"
정말로 나는 그녀 곁에서 행복했다. 어찌나 완벽하게 행복했던지 내 생각은 그녀의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벌써 그녀의 미소, 그리고 이렇게 꽃이 늘어선 따스한 길을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것 말고는 더 바라는 것이 없었다.
"네가 그게 좋다면," 나는 다른 모든 희망을 단번에 내려놓고 이 순간의 완벽한 행복에 나를 맡기며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그게 좋다면 우리 약혼하지 말자. 네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정말로 내가 행복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 더는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한꺼번에 깨달았어. 오! 내가 누리던 그 행복을 돌려줘. 나는 그것 없이는 못 살아. 평생이라도 너를 기다릴 수 있을 만큼 너를 사랑해. 하지만 네가 나를 사랑하기를 그만둬야 한다거나 내 사랑을 의심한다는 생각은, 알리사, 견딜 수가 없어."
"아아! 제롬, 나는 의심할 수가 없어."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슬펐다. 하지만 그녀를 환히 비추는 미소가 어찌나 평온하게 아름다웠던지, 나는 내 두려움과 하소연이 부끄러워졌다. 그때 나는 그녀 목소리 밑바닥에서 느껴지는 그 슬픈 여운이 오직 내 하소연 때문에 생긴 것 같았다. 나는 아무 이음말도 없이 내 계획과 공부, 그리고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얻으리라 기대하던 새로운 생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고등사범학교는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되지 않았다. 꽤 엄격한 규율이 있었지만 그것은 게으르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은 정신에게만 무거웠고, 공부하려는 의지에게는 오히려 힘이 되었다. 나는 거의 수도원 같은 그 생활이 나를 세상에서 지켜 주리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하긴 세상은 나를 별로 끌지 않았고, 알리사가 그것을 두려워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곧바로 미워 보였을 것이다. 애슈버턴 양은 처음에 어머니와 함께 살던 파리의 아파트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파리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녀뿐이니, 아벨과 나는 일요일마다 몇 시간씩 그녀 곁에서 보낼 것이다. 나는 일요일마다 알리사에게 편지를 쓰고 내 생활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알릴 것이다…….
우리는 이제 열어 둔 온상 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틀 밖으로는 마지막 열매까지 다 딴 커다란 오이 줄기들이 아무렇게나 넘쳐 나와 있었다. 알리사는 내 말을 듣고 나에게 물었다. 그녀의 다정함이 그토록 세심하게, 그녀의 애정이 그토록 간절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두려움도 걱정도, 아주 작은 설렘마저도 그녀의 미소 속에 날아가 버렸고, 안개가 티 없는 하늘의 푸른빛에 스며 사라지듯 그 매혹적인 친밀함 속에 녹아 버렸다.
그런 다음 쥘리에트와 아벨이 우리에게 와서 함께 앉은 너도밤나무 숲의 벤치에서 우리는 스윈번의 「시간의 승리」를 저마다 한 연씩 돌아가며 읽으며 날이 저물 때까지 보냈다. 저녁이 왔다.
"자!" 우리가 떠날 때 알리사가 나에게 입 맞추며 말했다.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어쩌면 나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생겼을, 그리고 그녀가 기꺼이 짓던 그 큰누나 같은 얼굴로. "이제부터는 그렇게 소설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래! 약혼했어?" 우리 둘만 다시 남자마자 아벨이 물었다.
"이 친구야, 이제 그런 이야기는 없어." 나는 대답하고는, 더 묻지 못하게 하는 투로 곧바로 덧붙였다. "이렇게 된 게 훨씬 나아. 오늘 저녁만큼 행복했던 적은 없어."
"나도 그래." 그가 외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내 목에 매달렸다. "놀라운 이야기를 해 줄게, 굉장한 이야기야! 제롬, 나 쥘리에트한테 미친 듯이 빠졌어! 작년에도 벌써 조금 그런 것 같았는데, 그 뒤로 이것저것 겪어 봤고, 네 사촌 누이들을 다시 보기 전에는 너한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어. 이제 끝났어. 내 인생은 붙잡혔어.
「사랑한다, 아니 사랑이라니 — 나는 쥘리에트를 우러러 섬긴다!」
오래전부터 나는 너한테 처남 같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고 그는 웃고 장난치며 나를 마구 껴안고, 우리를 파리로 데려가는 기차 칸의 쿠션 위를 아이처럼 뒹굴었다. 나는 그의 고백에 숨이 막혔고, 거기 섞여 드는 문학 냄새에 조금 거북했다. 하지만 그토록 격렬하고 기쁨에 넘치는 사람을 어떻게 당해 내겠는가?…….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고백은 했어?" 그가 쏟아 내는 사이사이에 나는 겨우 물었다.
"아니! 아니야." 그가 외쳤다. "이야기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을 건너뛰고 싶지 않아.
「사랑의 가장 좋은 때는 /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아니라네……」
아니, 너는 이걸 나무랄 수 없지. 느림의 대가인 네가."
"아니 그러니까," 나는 조금 짜증이 나서 말을 받았다. "너는 그녀 쪽에서도……."
"그럼 너는 나를 다시 봤을 때 그녀가 얼마나 들떴는지 못 봤구나! 우리가 있는 내내 그 들뜬 모습, 그 붉어지는 얼굴, 쏟아지는 말!……그래, 당연히 너는 아무것도 못 봤지. 알리사한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나한테 얼마나 많이 물었는지! 내 말을 얼마나 빨아들이듯 들었는지! 그녀는 일 년 사이에 머리가 무척 깨었어. 그녀가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얻었어? 너는 늘 알리사만 그런 줄 알지……. 그런데 이 친구야, 그녀가 아는 게 얼마나 많은지 놀랄 정도야! 저녁 먹기 전에 우리가 뭘 하고 놀았는지 알아? 단테의 칸초네 하나를 같이 떠올리면서 한 사람이 한 줄씩 읊었어. 내가 틀리면 그녀가 바로잡아 줬고. 너도 알잖아.
「내 마음속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랑이여」
그녀가 이탈리아어를 배운 줄은 말 안 했잖아."
"나도 몰랐어." 나는 꽤 놀라서 말했다.
"뭐라고! 칸초네를 시작할 때 그녀가 그러던데, 너 때문에 알게 된 거라고."
"아마 그녀가 우리 곁에서 바느질이나 수를 놓던 어느 날, 그녀는 자주 그러니까, 내가 그녀 언니한테 읽어 주는 걸 들었겠지. 하지만 알아듣는다는 티는 눈곱만큼도 내지 않았어."
"정말이지! 알리사하고 너는 놀라울 만큼 이기적이야. 너희 사랑에 푹 절어서, 이 지성이, 이 영혼이 놀랍게 피어나는 데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잖아! 내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마침 잘 나타났지……. 아니, 아니야, 너를 탓하는 거 아니야, 봐." 그가 또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그 대신 약속해. 이 이야기는 알리사한테 한마디도 하지 마. 나는 내 일을 혼자 해 나갈 거야. 쥘리에트는 마음을 빼앗겼어. 분명해. 다음 방학 때까지 그냥 둬도 될 만큼 확실하게. 그때까지는 편지도 안 할 생각이야. 그 대신 새해 휴가를 너하고 나하고 르아브르에 가서 보내는 거야.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알리사가 우리 약혼 소식을 한꺼번에 듣게 되는 거지. 나는 이 일을 시원스럽게 해치울 생각이야. 그러면 어떻게 될지 알아? 네가 받아 내지 못하는 알리사의 승낙을 우리가 본보기를 보여서 받아 줄게. 너희보다 먼저 우리가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다고 그녀를 설득하는 거야……."
그는 그칠 줄 모르는 말의 물결로 나를 덮쳤고, 그 말은 기차가 파리에 닿아서도, 우리가 고등사범학교로 돌아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역에서 학교까지 걸어갔고 밤이 꽤 깊었는데도, 아벨은 내 방까지 따라와 우리는 아침까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벨의 열광은 현재와 미래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는 벌써 우리의 두 쌍 결혼식을 눈앞에 보듯 이야기했다. 모두가 놀라고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그려 보였다. 우리의 이야기와 우리의 우정, 내 사랑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나는 그토록 기분 좋은 열기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고, 결국 거기 젖어 들어 그의 허황한 제안의 매력에 슬그머니 넘어갔다. 사랑에 힘입어 우리의 야심과 용기가 부풀었다. 우리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보티에 목사님의 축복을 받으며 두 쌍이 함께 결혼하고, 넷이서 여행을 떠났다. 그러고는 엄청난 일에 뛰어들었는데, 우리의 아내들은 기꺼이 우리의 동료가 되었다. 교직에 별로 끌리지 않고 자기가 글을 쓰려고 태어났다고 믿던 아벨은 몇 편의 성공한 희곡으로 자기에게 모자란 재산을 금세 모았다. 나는 공부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공부 자체에 더 끌렸으므로, 종교 철학에 몸 바쳐 그 역사를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희망을 여기서 되새겨 무엇 하랴?
이튿날 우리는 공부에 몰두했다.
4장
새해 방학까지는 시간이 아주 짧았으므로, 알리사와 마지막으로 나눈 이야기에 온통 들뜬 내 믿음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스스로 약속한 대로 나는 일요일마다 그녀에게 아주 긴 편지를 썼다. 다른 날에는 동무들과 거리를 두고 아벨하고만 어울리며 알리사를 생각하며 살았고, 내가 좋아하는 책들에 그녀를 위한 표시를 잔뜩 해 두었다. 나 자신이 거기서 찾는 흥미를 그녀가 거기서 느낄 흥미에 맞추면서. 그녀의 편지는 나를 꽤 불안하게 했다. 그녀는 내 편지에 꽤 꼬박꼬박 답장을 했지만, 나를 따라오려는 그 열성에서 나는 그녀 정신이 이끌려 오는 것보다는 내 공부를 북돋워 주려는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더구나 나에게 평가나 토론이나 비평은 내 생각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었는데, 그녀는 거꾸로 그 모든 것을 빌려 자기 생각을 나에게 숨기는 것 같았다. 이따금 나는 그녀가 그것을 놀이로 삼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불평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은 나는 편지에서 내 불안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십이월 말께 아벨과 나는 르아브르로 떠났다.
나는 플랑티에 이모 집에 묵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이모는 집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방에 짐을 풀 겨를도 없이 하인이 와서 이모가 거실에서 기다린다고 알렸다.
이모는 내 건강과 거처와 공부에 대해 묻자마자, 더는 조심하지 않고 다정한 호기심에 몸을 맡겼다.
"얘야, 너 아직 퐁괴즈마르에 다녀온 게 좋았는지 말 안 했잖니? 일은 좀 진척이 있었니?"
이모의 서툰 사람 좋음을 견뎌야 했다. 더없이 순수하고 부드러운 말조차 거칠게 다루는 것 같던 감정을 그렇게 간단히 다루는 소리를 듣는 건 괴로웠지만, 그 말투가 어찌나 꾸밈없고 다정했던지 거기 화를 내는 건 어리석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처음에는 조금 발끈했다.
"봄에 약혼은 너무 이르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 알지. 처음엔 다들 그렇게 말하지." 이모가 내 손 하나를 붙잡아 자기 두 손으로 애틋하게 꼭 쥐며 받아쳤다. "게다가 네 공부 때문에, 군대 때문에 너희가 여러 해 동안 결혼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하긴 나는 개인적으로 긴 약혼은 별로 좋게 보지 않아. 처녀들을 지치게 하거든……. 그래도 가끔은 아주 감동적이지……. 그리고 약혼을 공식으로 할 필요는 없어……. 다만 그렇게 해 두면 그 애한테 더는 신랑감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걸, 오! 넌지시 알릴 수 있지. 그리고 너희가 편지를 주고받고 만나는 것도 떳떳해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혼처가 저절로 나타나면, 그럴 수도 있거든," 이모가 뜻 있는 미소를 띠며 넌지시 말했다. "그때 점잖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지.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고. 쥘리에트한테 청혼이 들어온 거 알지! 그 애가 이번 겨울에 사람들 눈에 아주 많이 띄었거든. 그 애는 아직 좀 어려. 그 애도 그렇게 대답했고. 그런데 그 젊은이가 기다리겠다는 거야. 사실 이제 젊은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아주 좋은 혼처야. 아주 믿을 만한 사람이고. 내일 너도 보게 될 거다. 우리 집 성탄 트리 잔치에 오기로 했거든. 네가 보고 어떤지 말해 주렴."
"이모, 그분은 헛수고만 하실 것 같아요. 쥘리에트는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나는 당장 아벨의 이름을 대지 않으려고 무척 애쓰며 말했다.
"흠?" 이모가 미심쩍다는 듯 입을 삐죽이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거 놀랍구나! 그런데 왜 그 애가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을까?"
나는 더 말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쥘리에트는 요즘 몸이 좀 안 좋단다." 이모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은 그 애 이야기가 아니지……. 아! 알리사도 참 사랑스럽지……. 그래서, 했니 안 했니, 그 애한테 고백은 했니?"
나는 너무나 맞지 않게 거칠어 보이는 「고백」이라는 말에 온 마음으로 반발하면서도, 정면으로 물음을 받자 거짓말도 잘하지 못하는지라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네." 그러고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 애가 뭐라더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대답하지 않고 싶었다. 더 얼떨떨하게, 마치 나도 모르게 하듯.
"약혼을 거절했어요."
"그래! 그 애 말이 맞다!" 이모가 외쳤다. "너희는 시간이 넉넉하잖니, 원……."
"아! 이모, 그 얘긴 그만해요." 나는 이모를 막으려 애쓰며 말했지만 헛일이었다.
"하긴 그 애라면 놀랍지도 않다. 네 사촌 누이는 늘 너보다 철이 든 것 같더구나……."
그때 무엇이 나를 사로잡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캐물음에 신경이 곤두섰던지, 갑자기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아이처럼 착한 이모의 무릎에 이마를 묻고 흐느꼈다.
"이모, 아니에요, 이모는 몰라요." 나는 외쳤다. "그녀는 나한테 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뭐란 말이냐! 너를 물리쳤다는 거냐?" 이모가 손으로 내 이마를 들어 올리며 아주 다정하게 가엾어하는 투로 말했다.
"그것도……아니,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나는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그 애가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겁나니?"
"아! 아니요. 제가 두려운 건 그게 아니에요."
"가엾은 것, 내가 알아듣기를 바란다면 좀 더 똑똑히 말해야지."
나는 내 약한 마음에 무너진 것이 부끄럽고 속상했다. 이모는 분명 내가 망설이는 까닭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알리사의 거절 뒤에 무슨 뚜렷한 까닭이 숨어 있다면, 이모가 그녀에게 부드럽게 물어서 그것을 찾아내도록 나를 도와줄지도 몰랐다. 이모가 곧 스스로 그 이야기를 꺼냈다.
"들어 봐라." 이모가 말을 이었다. "알리사가 내일 아침에 나하고 성탄 트리를 꾸미러 오기로 했다. 무슨 일인지 금방 알아내마. 점심때 알려 주지. 그러면 너도 놀랄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될 거다, 틀림없이."
나는 뷔콜랭 외삼촌 댁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정말로 며칠 전부터 몸이 좋지 않던 쥘리에트는 변해 보였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사납고 거의 매몰찬 빛을 띠었고, 그 때문에 언니와 전보다 더 달라 보였다. 그날 저녁 나는 둘 중 누구와도 따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하긴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외삼촌이 피곤해 보였으므로 나는 식사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물러났다.
플랑티에 이모가 준비하는 성탄 트리 잔치에는 해마다 아이들과 친척과 친구들이 많이 모였다. 트리는 계단이 올라가는 현관 홀에 세워졌는데, 그 홀로 첫 번째 대기실과 거실, 그리고 뷔페를 차려 놓은 일종의 겨울 온실의 유리문이 나 있었다. 트리 장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잔칫날 아침, 내가 도착한 이튿날, 이모가 말한 대로 알리사가 꽤 일찍 와서 가지에 장식과 초와 과일과 과자와 장난감을 매다는 것을 도왔다. 나도 그녀 곁에서 그런 일을 하면 무척 즐거웠겠지만, 이모가 그녀와 이야기하도록 비켜 주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보지 못한 채 나갔고, 아침 내내 불안을 달래려 애썼다.
먼저 쥘리에트를 다시 보고 싶어서 뷔콜랭 외삼촌 댁에 갔다. 그런데 아벨이 나보다 먼저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고, 중요한 이야기를 방해할까 봐 곧바로 물러 나왔다. 그러고는 점심때까지 부두와 거리를 헤맸다.
"이 바보 같은 녀석!" 내가 돌아오자 이모가 외쳤다. "어쩌면 그렇게 제 삶을 망칠 수가 있니! 오늘 아침 네가 한 이야기에는 말이 되는 게 한마디도 없더구나……. 아! 나는 에두르지 않았다. 우리를 거든다고 애쓰던 애슈버턴 양을 내보내고, 알리사하고 둘만 되자마자 그냥 대놓고 물었지. 왜 지난여름에 약혼하지 않았느냐고. 그 애가 쩔쩔맸을 것 같니?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주 차분하게 동생보다 먼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더라. 네가 솔직하게 물었으면 나한테 한 것처럼 너한테도 대답했을 거다. 그런 걸로 속을 끓이다니, 안 그러냐? 얘야, 솔직한 것만큼 좋은 건 없단다……. 가엾은 알리사, 그 애는 두고 떠날 수 없는 아버지 이야기도 하더구나……. 아! 우리 이야기 많이 했다. 그 애는 아주 철이 들었어. 자기가 너한테 맞는 사람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도 하더라. 너한테 자기가 나이가 너무 많은 게 아닐까 걱정하고, 차라리 쥘리에트 나이쯤 되는 사람이 낫겠다고……."
이모는 말을 이었지만 나는 더는 듣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만이 중요했다. 알리사는 동생보다 먼저 결혼하기를 거절한다는 것. 그런데 아벨이 있지 않은가! 그 잘난 척하는 녀석 말이 맞았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우리 두 쌍의 결혼을 한꺼번에 따낼 참이었다…….
그토록 단순한 사실이 나를 얼마나 들뜨게 했는지 나는 이모에게 될 수 있는 대로 숨기고 기쁨만 내보였다. 이모에게는 그 기쁨이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고, 마치 자기가 준 것 같아서 더 흐뭇해했다. 하지만 점심을 먹자마자 나는 무슨 핑계를 대고 이모를 떠나 아벨을 찾아 달려갔다.
"어때! 내가 뭐랬어!" 내가 기쁜 소식을 알리자마자 그가 나를 껴안으며 외쳤다. "이 친구야, 오늘 아침 쥘리에트하고 나눈 이야기는 거의 결정적이었다고 벌써 말해 줄 수 있어. 거의 네 이야기만 했지만 말이야. 그런데 그녀가 피곤하고 신경이 날카로워 보여서……너무 나가서 흥분하게 할까 봐, 너무 오래 있어서 들뜨게 할까 봐 걱정했어. 네 말을 들으니 이제 다 됐어! 이 친구야, 나는 지팡이하고 모자를 집어 들고 뛰어나갈 거야. 뷔콜랭 댁 문 앞까지 같이 가 줘. 내가 가다가 날아가 버리면 붙잡아 줘. 나는 에우포리온보다 몸이 가벼운 것 같아……. 자기 때문에 언니가 너한테 승낙을 하지 않는다는 걸 쥘리에트가 알게 되면, 그리고 내가 곧바로 청혼하면……. 아! 친구야, 벌써 보인다. 오늘 저녁 성탄 트리 앞에서 우리 아버지가 기뻐 울며 주님을 찬양하고, 엎드린 약혼자 넷의 머리 위로 축복이 가득한 손을 내미시는 모습이. 애슈버턴 양은 한숨 속에 증발하고, 플랑티에 이모는 코르셋 속에서 녹아내리고, 불이 환한 트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성경의 산들처럼 손뼉을 치겠지."
성탄 트리에 불을 켜고 아이들과 친척과 친구들이 그 둘레에 모이는 것은 해 질 무렵이었다. 할 일 없이 불안하고 조바심이 난 나는 아벨과 헤어진 뒤 기다림을 달래려고 생트아드레스 절벽으로 먼 길을 나섰다가 길을 잃었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플랑티에 이모 집에 돌아왔을 때는 잔치가 시작된 지 꽤 지나 있었다.
현관 홀에서 바로 알리사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곧바로 나에게 왔다. 그녀는 밝은 블라우스의 파인 목둘레에, 어머니를 기념해 내가 준 자수정 박힌 작은 옛 십자가를 걸고 있었다. 내가 그녀가 그것을 거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얼굴은 핼쑥했고, 괴로운 표정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그녀가 숨 가쁘고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절벽에서 길을 잃었어……. 그런데 너 아파 보여……. 아! 알리사, 무슨 일이야?"
그녀는 잠시 얼이 빠진 듯 입술을 떨며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어찌나 불안에 짓눌렸던지 감히 묻지도 못했다. 그녀가 내 얼굴을 끌어당기려는 듯 내 목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한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때 손님들이 들어왔고, 그녀의 맥 빠진 손이 떨어졌다…….
"이제 늦었어." 그녀가 속삭였다. 그러고는 내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그런 어설픈 설명으로 나를 달랠 수 있다는 듯 내 눈길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니야……안심해. 그냥 머리가 아파. 애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서……여기로 피해 와야 했어……. 이제 애들한테 돌아가 봐야 해."
그녀는 갑자기 나를 떠났다. 사람들이 들어와 나와 그녀 사이를 갈라놓았다. 거실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생각이었다. 그녀는 방 반대쪽 끝에서 한 무리 아이들에 둘러싸여 놀이를 이끌고 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그 곁을 지나다가는 붙잡힐 것이 뻔했다. 인사며 이야기며, 나는 그럴 힘이 없었다. 어쩌면 벽을 따라 살그머니 가면……. 나는 해 보았다.
정원으로 난 커다란 유리문 앞을 막 지나려는데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쥘리에트가 커튼에 몸을 감싼 채 창틀 안쪽에 반쯤 숨어 있었다.
"겨울 온실로 가."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너는 따로 가. 나도 곧 갈게." 그러고는 문을 잠시 빠끔 열고 정원으로 달아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벨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 무슨 짓을 했을까?…… 나는 현관 홀 쪽으로 돌아가 쥘리에트가 기다리는 온실로 갔다.
그녀의 얼굴은 불처럼 달아 있었다. 찌푸린 눈썹 때문에 눈빛이 매몰차고 괴로워 보였다. 눈은 열이 있는 것처럼 번득였고, 목소리마저 거칠고 팽팽했다. 일종의 격분이 그녀를 들끓게 했다. 불안한 가운데서도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랐고 거의 거북하기까지 했다. 우리 둘뿐이었다.
"알리사가 너한테 이야기했어?" 그녀가 곧바로 물었다.
"겨우 몇 마디. 내가 아주 늦게 왔거든."
"언니가 나를 자기보다 먼저 결혼시키고 싶어 하는 거 알아?"
"응."
그녀가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럼 언니가 나를 누구하고 결혼시키고 싶어 하는지도 알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야." 그녀가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미친 짓이야!"
"그렇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망과 승리가 함께 있었다. 그녀는 몸을 곧추세웠다. 아니, 오히려 온몸을 뒤로 젖혔다…….
"이제 내가 뭘 해야 할지 알겠어." 그녀는 얼떨떨하게 덧붙이고는 정원 문을 열고 나가 뒤로 거칠게 닫았다.
머릿속도 가슴속도 모든 것이 비틀거렸다. 관자놀이에서 피가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갈피를 잃은 가운데 단 하나의 생각만이 버텼다. 아벨을 찾자. 그라면 두 자매의 이상한 말을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거실로 들어가면 모두가 내 동요를 알아챌 것 같아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정원의 얼음 같은 공기가 나를 가라앉혔다. 나는 거기 얼마 동안 있었다. 저녁이 내리고 있었고 바다 안개가 시내를 가렸다. 나무들은 잎이 없었고, 땅과 하늘이 끝없이 쓸쓸해 보였다…….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성탄 트리 둘레에 모인 아이들의 합창일 것이다. 나는 현관 홀로 들어갔다. 거실과 대기실 문이 열려 있었다. 이제 텅 빈 거실에서, 피아노 뒤에 제대로 숨지도 못한 채 이모가 쥘리에트와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대기실에서는 불 밝힌 트리 둘레로 손님들이 몰려 있었다. 아이들이 찬송을 마치자 조용해졌고, 보티에 목사가 트리 앞에서 설교 비슷한 것을 시작했다. 그는 그가 「좋은 씨를 뿌린다」고 부르는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불빛과 열기가 나를 괴롭혔다. 나는 다시 나가고 싶었다. 문 곁에 아벨이 보였다. 아마 꽤 전부터 거기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적의에 찬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에게 갔다.
"멍청이!" 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아! 저기! 나가자. 좋은 말씀은 지긋지긋해!" 그리고 밖에 나오자마자, 내가 말없이 불안하게 그를 쳐다보자 다시 말했다. "멍청이! 그녀가 사랑하는 건 너란 말이야, 멍청아! 그걸 나한테 말해 줄 수 없었어?"
나는 아연했다. 나는 알아듣기를 거부했다.
"그래, 그렇겠지! 너는 혼자서는 그걸 알아채지도 못했겠지!"
그는 내 팔을 붙잡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꽉 다문 이 사이로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쉿쉿거렸다.
"아벨, 부탁이야." 잠시 말이 없다가 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나를 끌고 아무 데로나 성큼성큼 걸어가는 동안 말했다.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줘. 나는 아무것도 몰라."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가 갑자기 나를 멈춰 세우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와락 끌어당겨 내 어깨에 머리를 묻고 흐느끼며 속삭였다.
"미안해! 나도 멍청이야. 나도 너보다 더 똑똑히 보지 못했어, 가엾은 내 형제."
울고 나니 그는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다시 걸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이제 와서 다시 꺼내 봐야 무슨 소용이야? 아침에 쥘리에트하고 이야기했다고 했잖아. 그녀는 놀랄 만큼 아름답고 들떠 있었어. 나는 나 때문인 줄 알았지. 그런데 그냥 우리가 네 이야기를 해서 그랬던 거야."
"그때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어?……"
"응. 딱히는. 하지만 이제는 아주 작은 낌새까지 다 환해져……."
"잘못 본 게 아니라고 확신해?"
"잘못 봐! 이 친구야, 그녀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못 보려면 눈이 멀어야 해."
"그럼 알리사는……."
"그럼 알리사는 자기를 희생하는 거지. 동생의 비밀을 알아채고 자리를 내주려고 한 거야. 이 친구야!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잖아……. 나는 쥘리에트하고 다시 이야기하려고 했어. 내가 처음 몇 마디를 하자마자, 아니 그녀가 내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우리가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서 「그럴 줄 알았어요」 하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어. 전혀 그럴 줄 몰랐던 사람 같은 말투로……."
"아! 농담하지 마!"
"왜? 나는 이 이야기가 우스꽝스러워……. 그녀는 언니 방으로 뛰어들어 갔어. 거칠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겁이 났어. 쥘리에트를 다시 만나기를 바랐는데, 잠시 뒤에 나온 건 알리사였어.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 거북해하더니 지나가면서 얼른 인사만 했어……. 그게 다야."
"쥘리에트는 다시 못 봤어?"
아벨이 조금 머뭇거렸다.
"봤어. 알리사가 나간 뒤에 방문을 밀었어. 쥘리에트는 벽난로 앞에 꼼짝 않고 서서 대리석에 팔꿈치를 짚고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어. 거울 속의 자기를 뚫어지게 보면서. 내 소리를 듣고도 돌아보지 않고, 발을 구르며 「아! 나 좀 내버려 두세요!」 하고 소리쳤어. 어찌나 매몰찼던지 나는 두말없이 나와 버렸어. 그게 다야."
"그럼 이제는?"
"아! 너한테 이야기하고 나니 좀 낫다……. 이제는? 그야! 너는 쥘리에트의 사랑을 낫게 해 주도록 애써야지. 내가 알리사를 아주 잘못 아는 게 아니라면, 그 전에는 그녀가 너한테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꽤 오래 말없이 걸었다.
"돌아가자!" 마침내 그가 말했다. "이제 손님들은 다 갔을 거야.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실까 봐 걱정돼."
우리는 돌아갔다. 정말로 거실은 비어 있었다. 대기실에는 장식을 다 떼어 내고 불도 거의 꺼진 트리 곁에 이모와 그 자녀 둘, 뷔콜랭 외삼촌, 애슈버턴 양, 목사, 사촌 누이들, 그리고 꽤 우스꽝스러운 사람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이 이모와 오래 이야기하는 걸 보았지만, 쥘리에트가 말한 그 구혼자라는 걸 알아본 것은 그때였다. 우리 누구보다 키가 크고 몸이 다부지고 얼굴이 붉고, 거의 대머리에, 다른 계급, 다른 세계, 다른 족속인 그는 우리 사이에서 낯선 사람이라고 느끼는 듯했다. 그는 커다란 콧수염 밑의 희끗희끗한 턱수염 한 가닥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며 비틀었다. 문이 열린 채로 있던 현관 홀에는 이제 불이 꺼져 있었고, 우리 둘은 소리 없이 들어갔으므로 아무도 우리가 와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끔찍한 예감이 나를 조여 왔다.
"멈춰!" 아벨이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때 그 낯선 사람이 쥘리에트에게 다가가 손을 잡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아무 저항 없이 손을 내맡겼다. 내 가슴속에 밤이 닫혔다…….
"아니, 아벨, 무슨 일이야?"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듯, 아니면 내가 잘못 이해하기를 바라는 듯 속삭였다.
"뻔하지! 꼬마가 언니보다 판돈을 더 거는 거야." 그가 쉿쉿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한테 지고 싶지 않은 거지. 저 위에서 천사들이 박수를 치겠군!……"
외삼촌이 와서, 애슈버턴 양과 이모에게 둘러싸인 쥘리에트를 껴안았다. 보티에 목사가 다가갔다…….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알리사가 나를 보고 떨면서 달려왔다.
"제롬, 이건 안 돼! 쥘리에트는 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오늘 아침에도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좀 막아 줘, 제롬! 아! 그 애가 어떻게 되려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애원하며 내 어깨에 매달렸다. 그녀의 괴로움을 덜어 줄 수 있다면 나는 목숨이라도 내놓았을 것이다.
트리 가까이서 갑자기 비명이 들린다. 웅성거림……. 우리는 달려간다. 쥘리에트가 정신을 잃고 이모의 품에 쓰러져 있다. 모두가 서둘러 그녀에게 몸을 숙이고, 나는 그녀를 겨우 볼 수 있을 뿐이다. 풀어진 머리카락이 끔찍하게 창백해진 얼굴을 뒤로 끌어당기는 것 같다. 몸이 들썩이는 것을 보니 예사로운 기절이 아닌 듯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모가 큰 소리로 말한다. 겁에 질린 뷔콜랭 외삼촌을 안심시키려는 것이다. 보티에 목사가 벌써 집게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외삼촌을 위로하고 있다. "아니야! 아무 일 아니야. 너무 놀라서 그래. 그냥 신경 발작이야. 테시에르 씨, 좀 도와주세요, 힘이 세시잖아요. 내 방으로 올려 가요. 내 침대에……내 침대에……." 그러고는 맏아들에게 몸을 숙여 귀에 무어라 속삭이고, 아들이 곧바로 나가는 것이 보인다. 의사를 부르러 가는 것이리라.
이모와 구혼자가 쥘리에트의 어깨 밑을 받쳐, 그녀는 그들의 팔에 반쯤 뒤로 젖혀져 있다. 알리사는 동생의 발을 들어 올려 다정하게 입 맞춘다. 아벨은 뒤로 떨어질 머리를 받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몸을 숙여, 자기가 그러모은 그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입맞춤을 퍼붓는 것을 본다.
방문 앞에서 나는 멈춰 선다. 사람들이 쥘리에트를 침대에 눕힌다. 알리사가 테시에르 씨와 아벨에게 내게는 들리지 않는 몇 마디를 한다. 그녀는 그들을 문까지 배웅하고, 동생을 쉬게 해 달라고, 자기가 플랑티에 이모하고만 곁에 남겠다고 우리에게 부탁한다……. 아벨이 내 팔을 붙잡고 밖으로, 밤 속으로 끌고 나간다. 우리는 목적도 용기도 생각도 없이 오래 걷는다.
5장
나는 내 사랑 말고는 내 삶의 다른 까닭을 찾지 못했다. 나는 거기 매달렸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으며, 내 연인에게서 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이튿날 그녀를 보러 가려고 채비를 하는데 이모가 나를 붙잡고 방금 받은 이 편지를 내밀었다.
「……쥘리에트는 몹시 흥분해 있다가 의사 선생님이 지어 준 물약을 먹고 새벽녘에야 가라앉았어요. 제롬에게 며칠 동안은 오지 말아 달라고 꼭 부탁해 주세요. 쥘리에트가 그의 발소리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도 있는데, 그 애에게는 무엇보다 안정이 필요해요…….
쥘리에트 상태 때문에 저는 여기 붙잡혀 있을 것 같아요. 제롬이 떠나기 전에 다시 만나지 못하면, 이모, 제가 편지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 금지는 나만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모도, 다른 누구도 뷔콜랭 댁 초인종을 누르는 건 자유였다. 이모는 바로 그날 아침에 그 집에 갈 생각이었다.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라니? 참 시시한 핑계였다……. 상관없었다!
"알았어요. 안 갈게요."
알리사를 곧바로 다시 보지 못하는 건 무척 괴로웠다. 하지만 나는 다시 만나는 게 두렵기도 했다. 그녀가 동생의 상태를 내 탓으로 여길까 봐 두려웠고, 화난 그녀를 보느니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을 더 쉽게 견딜 수 있었다.
적어도 아벨은 다시 보고 싶었다.
그의 집 문 앞에서 하녀가 쪽지를 건넸다.
「네가 걱정하지 않도록 이 쪽지를 남겨. 쥘리에트에게서 그토록 가까운 르아브르에 머무는 건 견딜 수가 없었어. 어제저녁, 너와 헤어지고 거의 곧바로 사우샘프턴행 배를 탔어. 남은 방학은 런던의 S. 집에서 보낼 거야. 학교에서 보자.」
……사람이 줄 수 있는 도움은 한꺼번에 모두 내게서 빠져나갔다. 나는 괴로움밖에 남지 않은 그곳에 더 오래 머물지 않고, 개학보다 먼저 파리로 돌아갔다. 내가 눈길을 돌린 것은 하느님 쪽이었다. 「모든 참된 위로와 모든 은총과 모든 온전한 선물이 흘러나오는」 그분 쪽이었다. 나는 그분께 내 괴로움을 바쳤다. 알리사도 그분께 피하리라고 생각했고, 그녀가 기도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내 기도를 북돋우고 뜨겁게 했다.
명상과 공부의 긴 시간이 흘렀다. 알리사의 편지와 내가 그녀에게 쓴 편지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그녀의 편지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 이제부터 흐릿한 내 기억은 그 편지들에 기대어 길을 찾는다…….
르아브르 소식은 이모를 통해, 처음에는 오직 이모를 통해서만 들었다. 쥘리에트의 딱한 상태가 처음 며칠 동안 얼마나 걱정을 끼쳤는지 이모에게서 들었다. 내가 떠나고 열이틀 만에 마침내 알리사에게서 이 쪽지가 왔다.
「제롬, 더 일찍 편지하지 못한 걸 용서해 줘. 가엾은 쥘리에트 때문에 거의 틈이 없었어. 네가 떠난 뒤로 나는 그 애 곁을 거의 떠나지 않았어. 이모에게 우리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마 그러셨을 거야. 그러니 사흘 전부터 쥘리에트가 나아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벌써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만 아직 기뻐할 엄두는 나지 않아.」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거의 이야기하지 않은 로베르도 나보다 며칠 늦게 파리로 돌아와서 누이들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나는 누이들 때문에 내 성격대로라면 그랬을 것보다 더 그를 돌보았다. 그가 들어간 농업 학교에서 풀려날 때마다 나는 그를 맡아 기분을 풀어 주려고 애썼다.
알리사에게도 이모에게도 감히 묻지 못한 것을 나는 그를 통해 알았다. 에두아르 테시에르가 무척 부지런히 쥘리에트의 안부를 물으러 왔지만, 로베르가 르아브르를 떠날 때까지 그녀는 아직 그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는 것. 또 쥘리에트가 내가 떠난 뒤로 언니 앞에서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고집스러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고 얼마 뒤 이모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알리사는 쥘리에트의 그 약혼이 곧바로 깨지기를 바랐으리라고 나는 짐작했는데, 쥘리에트가 스스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약혼을 공식으로 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충고도, 엄명도, 애원도 부서지고 마는 그 결심이 그녀의 이마를 가로막고, 그녀의 눈을 가리고, 그녀를 침묵 속에 가두었다…….
시간이 흘렀다. 하긴 나도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랐지만, 알리사에게서는 더없이 실망스러운 쪽지만 왔다. 짙은 겨울 안개가 나를 감쌌다. 내 공부 등불도, 내 사랑과 믿음의 그 모든 열기도, 아아! 내 마음의 밤과 추위를 제대로 몰아내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갑자기 봄이 온 어느 아침, 그때 르아브르를 떠나 있던 이모에게 알리사가 보낸 편지 한 통을 이모가 나에게 보여 주었다. 이 이야기를 밝혀 줄 수 있는 대목을 옮겨 적는다.
「……제가 얼마나 고분고분한지 보세요……. 이모가 권하신 대로 테시에르 씨를 맞았고 오래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분이 흠잡을 데 없이 처신했다는 걸 인정해요. 그리고 털어놓자면, 이 결혼이 처음에 걱정했던 것만큼 불행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고 믿게 될 정도예요. 쥘리에트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건 분명해요. 하지만 그분은 주가 갈수록 사랑받을 자격이 없지 않은 사람으로 보여요. 그분은 상황을 꿰뚫어 보며 이야기하고 제 동생의 성격도 잘못 보지 않아요. 그런데 자기 사랑의 힘을 크게 믿어서, 자기가 꾸준하기만 하면 이겨 내지 못할 것이 없다고 자신해요. 그만큼 깊이 빠졌다는 이야기지요.
정말이지 제롬이 그렇게 제 동생을 돌봐 주는 걸 보니 몹시 고마워요. 로베르의 성격은 그의 성격과 별로 맞지 않으니 그건 그저 의무감에서, 그리고 어쩌면 조금은 저를 기쁘게 하려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는 벌써 알았을 거예요. 떠맡은 의무가 힘들수록 그것이 영혼을 더 가르치고 높여 준다는 걸요. 거창한 생각이지요! 큰조카를 너무 비웃지는 마세요. 이런 생각들이 저를 버티게 하고, 쥘리에트의 결혼을 좋은 일로 보려고 애쓰게 도와주니까요.
이모가 다정하게 마음 써 주시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하지만 제가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도 될 정도예요. 쥘리에트를 뒤흔든 시련이 저에게도 되울림을 남겼거든요. 별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되뇌던 성경 말씀이 갑자기 환해졌어요. 『사람을 믿으며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저는 그 말씀을 성경에서 다시 찾기 훨씬 전에, 제롬이 열두 살도 안 되고 제가 막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가 보내 준 작은 성탄 카드에서 읽었어요. 그 카드에는 그때 우리 눈에 무척 예뻐 보이던 꽃다발 그림 곁에 코르네유가 풀어 쓴 시라는 이 구절이 있었어요.
세상을 이기는 어떤 매혹이 / 오늘 나를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는가? / 불행하여라, 사람에게 / 제 의지할 곳을 두는 자는!
털어놓자면 저는 이 시보다 예레미야의 꾸밈없는 말씀이 훨씬 더 좋아요. 제롬은 아마 그때 그 말씀에 별 뜻을 두지 않고 카드를 골랐을 거예요. 하지만 그의 편지를 보면 요즘 그의 마음가짐이 제 마음가짐과 꽤 비슷해서, 우리 둘을 한꺼번에 당신께 더 가까이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날마다 감사드려요.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기억해서, 그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이제는 예전처럼 그에게 길게 편지하지 않아요. 그 대신 그의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하며 벌충한다고 이모는 생각하시겠지요. 더 계속할까 봐 얼른 편지를 끝낼게요. 이번만은 너무 꾸짖지 마세요.」
이 편지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던가! 나는 이모의 경솔한 간섭을 저주했다(알리사가 넌지시 말하는, 그 때문에 그녀가 나에게 침묵하게 된 그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이 편지를 나에게 보여 주게 한 이모의 서툰 친절도 저주했다. 그러지 않아도 알리사의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데, 아! 그녀가 나에게 더는 하지 않는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쓰고 있다는 걸 차라리 모르게 두는 편이 천 배는 낫지 않았을까! 여기서는 모든 것이 나를 짜증 나게 했다. 그녀가 우리 둘 사이의 자잘한 비밀을 이모에게 그토록 쉽게 털어놓는 것도, 그 자연스러운 말투도, 그 평온함도, 진지함도, 쾌활함도…….
"아니야, 이 친구야! 이 편지에서 너를 짜증 나게 하는 건 이게 너한테 온 편지가 아니라는 것뿐이야." 날마다 붙어 다니던 아벨이 나에게 말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외로움 속에서 약한 마음과 공감을 구하는 애처로운 바람과 나 자신에 대한 불신, 그리고 갈피를 못 잡을 때면 우리 둘의 성품이 다른데도, 아니 오히려 달라서 그의 충고를 믿는 마음이 나를 끊임없이 그에게로 다시 기울게 했다…….
"이 종이를 연구해 보자." 그가 편지를 책상 위에 펼치며 말했다.
나는 벌써 사흘 밤을 분한 마음을 품고 지냈고, 나흘 동안은 그것을 혼자 간직할 수 있었다! 나는 거의 저절로 친구가 할 줄 알았던 말에 이르러 있었다.
"쥘리에트와 테시에르 쪽은 사랑의 불길에 맡겨 두자, 그렇지? 그 불꽃이 어떤지는 우리가 알잖아. 아무렴! 테시에르는 거기 타 죽기 딱 알맞은 나방 같아……."
"그 얘긴 그만해." 나는 그의 농담에 기분이 상해서 말했다. "나머지로 넘어가자."
"나머지?" 그가 말했다……. "나머지는 다 너를 위한 거야. 불평하라고! 네 생각이 가득 차 있지 않은 줄은 한 줄도, 한 단어도 없어. 편지 전체가 너한테 쓴 거나 마찬가지야. 펠리시 이모는 그걸 너한테 보내면서 진짜 받을 사람에게 돌려준 것뿐이야. 알리사는 네가 없으니까 그 착한 아주머니한테, 아쉬운 대로 맨 처음 손에 닿는 사람한테 말하는 거야. 코르네유의 시가 네 이모한테 무슨 상관이겠어! 그런데 말이 나온 김에, 그건 라신의 시야. 그녀는 너하고 이야기하는 거라니까. 이 모든 말을 하는 상대는 너야. 보름 안에 네 사촌 누이가 너한테도 이렇게 길고 편하고 즐겁게 편지하지 않는다면 너는 바보야……."
"그런 쪽으로는 영 가지 않는걸!"
"그쪽으로 가게 하는 건 너한테 달렸어! 내 충고를 듣고 싶어? 앞으로……오랫동안 너희 사이에서 사랑이니 결혼이니 하는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마. 동생 일이 있고 나서 그녀가 꺼리는 게 바로 그거라는 걸 모르겠어? 형제의 정을 건드려. 로베르 이야기를 지치지 말고 해 줘. 그 멍청이를 돌볼 참을성까지 있으니 말이야. 그저 그녀의 머리를 계속 즐겁게 해 줘.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올 거야. 아! 내가 그녀한테 편지를 쓴다면!……"
"너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을 거야."
그래도 나는 아벨의 충고를 따랐다. 그러자 정말로 알리사의 편지가 곧 다시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쥘리에트의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녀의 처지가 자리 잡기 전에는, 알리사에게서 참된 기쁨이나 거리낌 없는 마음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사이 알리사가 전해 주는 동생 소식은 좋아지고 있었다. 결혼식은 칠월에 올리기로 했다. 알리사는 그때쯤이면 아벨과 내가 공부에 붙잡혀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썼다……. 나는 그녀가 우리가 식에 나타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는 걸 알아들었고, 우리는 무슨 시험을 핑계 삼아 축하 인사만 보냈다.
결혼식이 있고 보름쯤 지나 알리사가 이런 편지를 보냈다.
「어제 네가 준 예쁜 라신 시집을 아무 데나 펼쳤다가, 내가 거의 십 년째 성경 속에 간직하고 있는 네 옛 성탄 카드의 그 네 줄을 거기서 다시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세상을 이기는 어떤 매혹이 / 오늘 나를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는가? / 불행하여라, 사람에게 / 제 의지할 곳을 두는 자는!
나는 그게 코르네유가 풀어 쓴 시에서 따온 줄 알았고, 솔직히 그리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데 「영성 찬가」 넷째 편을 계속 읽다가 너무 아름다운 연들을 만나서 너한테 옮겨 적지 않을 수가 없어. 네가 책 여백에 남겨 둔 눈치 없는 머리글자로 보면 너는 벌써 이걸 알고 있겠지(정말로 나는 내 책과 알리사의 책에, 내가 좋아해서 그녀에게 알려 주고 싶은 대목마다 맞은편에 그녀 이름의 첫 글자를 뿌려 두는 버릇이 있었다). 상관없어! 내가 좋아서 옮겨 적는 거니까. 내가 찾아냈다고 생각한 걸 네가 나한테 건넨 거라는 걸 알고 처음엔 조금 샘이 났는데, 그 못난 마음은 네가 나처럼 이걸 좋아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 앞에서 물러났어. 옮겨 적으면서 너와 함께 다시 읽는 것 같아.
영원한 지혜의 / 목소리가 우레처럼 울려 우리를 가르친다. / 『사람의 자식들아, 하고 그 목소리는 말한다, / 너희 수고의 열매는 무엇이냐? / 헛된 영혼들아, 무슨 미혹으로 / 너희 핏줄의 가장 맑은 피를 주고
그토록 자주 사느냐, / 너희를 배불릴 빵이 아니라 / 너희를 전보다 더 굶주리게 / 내버려 두는 그림자를? / 내가 너희에게 내미는 빵은 / 천사들의 양식이다. / 하느님 몸소 당신 밀의 / 가장 고운 가루로 빚으신 것. / 너희가 좇는 세상은 / 제 식탁에 이 맛난 빵을 / 결코 차려 내지 않는다. / 나를 따르려는 이에게 나는 이것을 준다. / 가까이 오너라. 살고 싶으냐? / 받아라, 먹어라, 그리고 살아라.』 / 기꺼이 사로잡힌 영혼은 / 당신의 멍에 아래 평화를 찾고 / 결코 마르지 않는 / 생수를 마신다. / 누구나 이 물을 마실 수 있으니 / 물은 모두를 부른다. /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 흙탕물 샘을 찾아
아니면 물이 쉴 새 없이 새어 나가는 / 속이는 웅덩이를 찾아 달려간다.
아름답지 않아! 제롬, 아름답지 않아! 정말 너도 나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해? 내 책의 작은 주석을 보니, 맹트농 부인이 도말 양이 이 찬가를 부르는 걸 듣고 감탄한 듯 『눈물을 몇 방울 흘리고』 그 곡의 한 부분을 다시 부르게 했대. 나는 이제 이걸 다 외워서 읊고 또 읊어도 질리지 않아. 여기서 내 유일한 슬픔은 네가 이걸 읽어 주는 걸 듣지 못했다는 거야.
여행 떠난 두 사람 소식은 계속 아주 좋아. 끔찍한 더위에도 쥘리에트가 바욘과 비아리츠를 얼마나 즐겼는지는 너도 벌써 알지. 그 뒤로 그들은 푸엔테라비아에 들렀고, 부르고스에 머물렀고, 피레네산맥을 두 번 넘었어……. 지금은 몬세라트에서 신이 나서 편지를 보내왔어. 바르셀로나에서 열흘 더 머물다가 님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봐. 에두아르가 포도 수확 준비를 다 해 두려고 구월 전에 돌아가고 싶어 하거든.
일주일 전부터 아빠와 나는 퐁괴즈마르에 와 있어. 애슈버턴 양이 내일, 로베르가 나흘 뒤에 우리한테 오기로 했어. 가엾은 로베르가 시험에 떨어진 건 알지. 어려워서가 아니라 시험관이 하도 엉뚱한 걸 물어서 당황했대. 네가 그 애 열성에 대해 써 준 걸 보면 로베르가 준비가 안 돼 있었다고는 믿을 수 없어. 그런데 그 시험관은 그렇게 학생들을 쩔쩔매게 하는 걸 즐긴다더라.
네가 잘된 일은, 친구야, 축하한다고 말하기도 어색할 만큼 당연해 보여. 나는 너를 그토록 믿어, 제롬! 너를 생각하기만 하면 내 마음은 희망으로 가득 차. 네가 말했던 그 일을 이제 바로 시작할 수 있어……?
……여기 정원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그런데 집은 참 텅 비어 보여! 내가 왜 올해는 오지 말아 달라고 했는지 너는 알아들었겠지? 그게 더 낫다고 느껴. 날마다 나 자신한테 그렇게 되뇌어. 너를 이렇게 오래 보지 못하는 게 괴로우니까……. 가끔 나도 모르게 너를 찾아. 읽던 책을 멈추고 갑자기 고개를 돌려……. 네가 거기 있는 것 같아!
다시 편지를 이어 써. 밤이야. 모두 자고 있어. 나는 열린 창 앞에서 너한테 편지를 쓰느라 늦게까지 깨어 있어. 정원은 온통 향기롭고 공기는 따스해……. 기억나? 우리가 어렸을 때 무언가 아주 아름다운 걸 보거나 들으면 바로 이렇게 생각했잖아. 하느님, 이걸 만드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밤 나는 온 영혼으로 생각했어. 하느님, 이 밤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드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네가 여기, 내 곁에 있기를 바랐고, 네가 여기 있다고 느꼈어. 어찌나 세게 느꼈던지 너도 그걸 느꼈을지 몰라.
그래, 네가 편지에 잘 썼더라. 『잘 태어난 영혼들에게서는』 감탄이 감사와 하나가 된다고……. 너한테 쓰고 싶은 게 아직도 얼마나 많은지! 쥘리에트가 이야기하는 그 눈부신 고장을 생각해. 더 넓고 더 눈부시고 더 쓸쓸한 다른 고장들도 생각해. 언젠가 어떻게 해서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함께 무슨 크고 신비로운 고장을 보게 되리라는 이상한 믿음이 내 안에 깃들어 있어…….」
내가 얼마나 기뻐 날뛰며, 얼마나 사랑에 겨워 흐느끼며 이 편지를 읽었을지 여러분은 쉽게 짐작할 것이다. 다른 편지들이 뒤를 이었다. 물론 알리사는 내가 퐁괴즈마르에 오지 않는 것을 고마워했고, 물론 올해는 그녀를 다시 만나려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없는 것을 아쉬워했고, 이제 나를 바랐다. 쪽마다 같은 부름이 울렸다. 나는 어디서 거기 버틸 힘을 얻었을까? 아마 아벨의 충고에서, 내 기쁨을 단번에 무너뜨릴까 하는 두려움에서, 그리고 마음이 끌려가는 것에 맞서 저절로 굳어지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이어진 편지들에서 이 이야기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을 모두 옮겨 적는다.
「네 편지를 읽으면 기뻐서 녹아내릴 것 같아. 오르비에토에서 보낸 편지에 답장하려는데 페루자와 아시시에서 보낸 편지가 한꺼번에 왔어. 내 생각은 나그네가 되고, 내 몸만 여기 있는 척해. 사실 나는 너와 함께 움브리아의 하얀 길 위에 있어. 너와 함께 아침에 길을 나서고, 아주 새로운 눈으로 새벽을 바라봐……. 코르토나의 테라스에서 정말 나를 불렀어? 나는 들었어……. 아시시 위쪽 산에서는 몹시 목이 말랐지! 하지만 프란치스코회 수사가 준 물 한 잔은 얼마나 맛있었는지!…… 오, 친구야! 나는 너를 통해 모든 것을 봐.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 네가 써 보낸 이야기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그래, 그렇지? 찾아야 하는 건 생각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드높이는 거야. 해방은 끔찍한 교만 없이는 되지 않아. 반항하는 데가 아니라 섬기는 데 뜻을 두는 거야…….
님에서 오는 소식이 아주 좋아서, 하느님께서 내가 기쁨에 몸을 맡겨도 된다고 허락하시는 것 같아. 이번 여름의 유일한 그늘은 가엾은 아빠야. 내가 정성을 다해도 아빠는 여전히 슬퍼하셔. 아니, 내가 아빠를 혼자 두는 순간 다시 슬픔에 빠지시고, 거기서 빠져나오시기가 점점 더 힘들어져. 우리 둘레에서 자연의 모든 기쁨이 아빠에게는 낯설어져 가는 말로 이야기해. 아빠는 이제 그걸 알아들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셔. 애슈버턴 양은 잘 지내. 나는 두 분께 네 편지를 읽어 드려. 편지 한 통이면 사흘은 이야깃거리가 생기고, 그러면 새 편지가 와…….
……로베르는 그저께 우리를 떠났어. 남은 방학을 친구 R. 집에서 보낸대. 그 친구 아버지가 모범 농장을 운영하신대. 우리가 여기서 사는 모습이 그 애한테는 분명 그리 즐겁지 않겠지. 떠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그 계획을 북돋워 줄 수밖에 없었어…….
……너한테 할 말이 너무 많아. 끝없이 이야기하고 싶어 목이 말라! 가끔은 말도, 또렷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오늘 저녁엔 꿈꾸듯 글을 써. 주고받을 끝없는 풍요로움이 숨 막힐 듯 느껴질 뿐이야.
그 긴 몇 달 동안 우리는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아마 겨울잠을 자고 있었나 봐. 오! 그 끔찍한 침묵의 겨울이 영영 끝났기를! 너를 되찾은 뒤로 삶도, 생각도, 우리 영혼도, 모든 것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끝없이 풍요로워 보여…….」
9월 12일.
「피사에서 보낸 편지 잘 받았어. 여기도 날씨가 눈부셔. 노르망디가 이렇게 아름다워 보인 적은 없었어. 그저께는 혼자서 걸어서 들판을 가로질러 발길 닿는 대로 엄청나게 먼 산책을 했어. 지치기보다는 들떠서, 햇빛과 기쁨에 흠뻑 취해서 돌아왔어. 뜨거운 햇볕 아래 짚가리들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모든 걸 감탄스럽게 여기려고 이탈리아에 와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었어.
그래, 친구야, 네 말대로 내가 자연의 『어렴풋한 찬가』 속에서 듣고 알아듣는 건 기뻐하라는 권유야. 새가 노래할 때마다 그걸 듣고, 꽃향기마다 그걸 들이마셔. 그래서 이제는 기도의 형식으로 오직 찬양밖에 모르게 됐어. 형언할 수 없는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되뇌면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다른 것은 없나이다』.
그래도 내가 책은 멀리하는 신심가가 되어 간다고 걱정하지는 마! 요즘 책을 많이 읽었어. 며칠 비가 온 덕에 내 찬양을 책 속에 접어 넣은 셈이야……. 말브랑슈를 다 읽고 곧바로 라이프니츠의 『클라크에게 보낸 편지』를 들었어. 그러고는 쉬려고 셸리의 『첸치 일가』를 읽었는데 재미가 없었어. 『미모사』도 읽었고……. 네가 화낼지도 모르겠다. 지난여름 우리가 함께 읽은 키츠의 송가 네 편을 위해서라면 나는 셸리 전부, 바이런 전부를 거의 다 내줄 거야. 보들레르의 소네트 몇 편을 위해서라면 위고 전부를 내줄 것처럼. 위대한 시인이라는 말은 아무 뜻이 없어. 중요한 건 순수한 시인이 되는 거야……. 오, 내 오빠! 이 모든 걸 알게 해 주고 이해하게 해 주고 사랑하게 해 줘서 고마워.
……아니, 며칠 만나는 즐거움 때문에 여행을 줄이지는 마.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우리는 아직 다시 만나지 않는 게 나아. 내 말을 믿어. 네가 내 곁에 있다고 해서 내가 너를 더 생각할 수는 없을 거야. 너를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이제, 지금은, 네가 곁에 있기를 바라지 않게 됐어. 털어놓을까? 네가 오늘 저녁 온다는 걸 안다면……나는 달아날 거야.
오! 이……감정을 설명해 달라고는 하지 마, 부탁이야. 내가 아는 건, 내가 끊임없이 너를 생각한다는 것(그것으로 네 행복은 충분하겠지), 그리고 이대로 내가 행복하다는 것뿐이야.」
이 마지막 편지가 오고 얼마 안 되어,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군에 소집되어 낭시로 갔다. 거기서 나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혼자인 것이 기뻤다. 그래야 그녀의 편지만이 나의 유일한 피난처이고, 그녀에 대한 기억이 롱사르의 말을 빌리면 「나의 단 하나뿐인 혼」이라는 것이 연인으로서의 내 자존심에도, 알리사에게도 더 똑똑히 드러날 테니까.
사실 나는 우리에게 지워진 꽤 혹독한 규율을 아주 씩씩하게 견뎌 냈다. 나는 모든 것에 맞서 몸을 굳혔고, 알리사에게 쓰는 편지에서는 떨어져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불평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이 긴 이별에서 우리의 용기에 걸맞은 시련을 보았다. 「한 번도 불평하지 않는 너, 쓰러지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너……」 하고 알리사는 썼다. 이 말에 보답하려고 내가 무엇인들 견디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지 거의 한 해가 흘렀다. 그녀는 그걸 생각하지 않는 듯, 이제부터 비로소 기다림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탓했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너와 함께 있지 않았어?」 그녀는 답장했다. 「배은망덕하기는! 나는 하루도 너를 떠나지 않았어. 알아줘. 이제는 한동안 내가 너를 따라갈 수 없다는 걸. 그것을, 오직 그것을 나는 이별이라고 불러. 사실 너를 군인으로 상상해 보려고 애써……. 잘 안 돼. 기껏해야 저녁에 강베타 거리의 작은 방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너를 떠올리는 정도야……. 아니, 그것도 아니야. 사실 나는 일 년 뒤 퐁괴즈마르나 르아브르에서만 너를 다시 만나.
일 년! 이미 지나간 날들은 세지 않아. 내 희망은 천천히, 천천히 다가오는 앞날의 그 한 점에 박혀 있어. 기억나? 정원 맨 안쪽, 밑에 국화를 들여놓던 그 낮은 담. 우리가 겁 없이 그 위에 올라가곤 했잖아. 쥘리에트와 너는 곧장 천국으로 가는 이슬람 신자들처럼 그 위를 대담하게 걸었지. 나는 첫걸음부터 어지러웠고, 너는 밑에서 나한테 외쳤어. 『발밑을 보지 마! 앞을 봐! 계속 걸어! 목표를 봐!』 그러다 마침내, 그건 네 말보다 더 나았는데, 너는 담 끝에 올라가 나를 기다렸어. 그러면 나는 더 떨지 않았어. 어지럽지도 않았어. 너만 바라보며 벌린 네 팔 안으로 달려갔어…….
너를 믿지 못하면, 제롬, 나는 어떻게 될까? 네가 강하다고 느껴야 해. 너한테 기대야 해. 약해지지 마.」
일종의 도전으로, 일부러 즐기기라도 하듯 기다림을 늘이며, 또 불완전한 만남이 두렵기도 해서, 우리는 새해 무렵의 내 며칠 휴가를 파리에서 애슈버턴 양 곁에서 보내기로 했다…….
말했듯이 나는 이 편지들을 다 옮겨 적지는 않는다. 이것은 이월 중순께 받은 편지다.
「그저께 파리 거리를 지나다가, 네가 알려 줬지만 정말 나왔으리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던 아벨의 책이 M. 서점 진열창에 아주 염치없이 펼쳐져 있는 걸 보고 몹시 놀랐어. 참을 수가 없어서 들어갔어. 그런데 제목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점원한테 말하기가 망설여졌어. 아무 다른 책이나 들고 가게를 나올 뻔한 순간도 있었어. 다행히 계산대 곁에 『허물없는 짓』이 작게 쌓여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말할 필요도 없이 한 권을 집어 들고 거기 5프랑을 던져 놓았어.
아벨이 나한테 자기 책을 보내지 않은 게 고마워! 나는 부끄러워서 그 책을 넘겨 볼 수가 없었어. 책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하긴 거기서 나는 상스러움보다 어리석음을 더 많이 보지만, 그걸 아벨이, 네 친구 아벨 보티에가 썼다는 생각에 부끄러웠어. 『르 탕』의 비평가가 거기서 찾아낸 그 『큰 재능』을 쪽마다 찾아봤지만 헛일이었어. 아벨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르아브르의 우리 작은 모임에서는 그 책이 크게 성공하고 있다고 들었어. 그 정신의 고칠 수 없는 경박함을 『가벼움』이니 『우아함』이니 하고 부르는 걸 들어. 물론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고 내가 읽은 이야기는 너한테만 해. 처음에는 마땅히 낙심하던 가엾은 보티에 목사님이 결국 오히려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묻게 되셨어. 둘레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게 하려고 애쓰거든. 어제 플랑티에 이모 댁에서 V. 부인이 대뜸 목사님께 말했어.
『목사님, 아드님이 크게 성공해서 참 기쁘시겠어요!』 목사님은 조금 쩔쩔매며 대답하셨어. 『글쎄요, 아직 거기까지는……』 『하지만 그렇게 되실 거예요! 그렇게 되실 거예요!』 이모가 말씀하셨어. 분명 아무 악의 없이 하신 말이지만 어찌나 북돋우는 투였던지 모두 웃음을 터뜨렸어. 목사님까지도.
아벨이 무슨 큰길가 극장에 올리려고 준비한다는, 벌써 신문에 이야기가 나온다는 『새 아벨라르』가 무대에 오르면 어떻게 될까!…… 가엾은 아벨! 정말 그게 그가 바라는 성공이고, 그걸로 만족할까!
어제 『내면의 위안』에서 이 말씀을 읽었어. 『참되고 영원한 영광을 참으로 바라는 이는 덧없는 영광을 셈에 넣지 않는다. 마음으로 덧없는 영광을 업신여기지 않는 이는 하늘의 영광을 사랑하지 않음을 참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생각했어. 『하느님, 제롬을 그 하늘의 영광으로 골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곁에서는 다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몇 주가, 몇 달이 단조로운 일과 속에 흘러갔다. 하지만 추억이나 희망에만 생각을 붙들어 맬 수 있었던 나는 시간이 더딘 것도, 하루가 긴 것도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외삼촌과 알리사는 유월에, 그 무렵 아이를 낳을 예정인 쥘리에트를 만나러 님 근처로 가기로 했다. 조금 좋지 않은 소식이 와서 둘은 떠나는 날을 앞당겼다.
「르아브르로 보낸 네 마지막 편지는」 알리사가 썼다. 「우리가 막 떠난 뒤에 도착했어. 그게 어떻게 여드레나 지나서야 여기 나한테 왔는지 모르겠어. 일주일 내내 내 영혼은 모자라고, 얼어붙고, 의심스럽고, 줄어든 것 같았어. 오, 내 오빠! 나는 너와 함께일 때만 정말 나 자신이고, 나 이상이야…….
쥘리에트는 다시 좋아졌어. 우리는 오늘내일 그 애가 아이를 낳기를 기다리는데, 그리 걱정하지는 않아. 그 애는 내가 오늘 아침 너한테 편지 쓰는 걸 알아. 우리가 에그비브에 도착한 이튿날 그 애가 물었어. 『그런데 제롬은 어떻게 지내?…… 여전히 언니한테 편지해?……』 내가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하자 그 애가 말했어. 『언니가 편지할 때 이렇게 전해 줘……』 그 애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어. 『……나는 다 나았다고.』 늘 밝기만 한 그 애의 편지를 보면서, 그 애가 나한테 행복한 척 연극을 하고 스스로도 거기 넘어가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했어……. 그 애가 지금 자기 행복으로 삼는 것은 그 애가 꿈꾸던 것, 그 애의 행복이 거기 달려 있을 것만 같던 것과 너무도 달라!…… 아!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영혼과 가까운 것이고, 바깥에서 행복을 이루는 것 같은 요소들은 얼마나 하찮은지! 나는 『가리그』를 혼자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는데, 그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내가 가장 놀라는 건 내가 더 기쁘지 않다는 거야. 쥘리에트의 행복이 나를 가득 채워야 할 텐데……. 왜 내 마음은 이해할 수 없는 우울에 지고, 나는 거기 맞서지 못할까? 내가 느끼는, 아니 적어도 알아보는 이 고장의 아름다움마저 이 까닭 모를 슬픔을 더할 뿐이야……. 네가 이탈리아에서 편지할 때 나는 너를 통해 모든 것을 볼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은 너 없이 바라보는 모든 것을 너한테서 훔치는 것 같아. 그리고 나는 퐁괴즈마르와 르아브르에서 비 오는 날을 견디는 미덕을 길러 두었는데, 여기서는 그 미덕이 쓸모가 없고, 그게 쓰일 데가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려. 이곳 사람들과 이 고장의 웃음이 나를 거북하게 해. 어쩌면 나는 그들만큼 떠들썩하지 않은 것을 그냥 슬프다고 부르는지도 몰라……. 아마 예전에는 내 기쁨에 얼마간 교만이 섞여 있었나 봐. 지금 이 낯선 명랑함 속에서 내가 느끼는 건 굴욕 같은 거니까.
여기 온 뒤로 기도를 거의 하지 못했어. 하느님이 더는 같은 자리에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어린애 같은 느낌이 들어. 잘 있어. 얼른 끝낼게. 이 불경한 말이, 내 약함이, 내 슬픔이 부끄럽고, 그걸 털어놓는 것도, 이 모든 걸 너한테 쓰는 것도 부끄러워. 오늘 저녁 우편이 가져가지 않는다면 내일 찢어 버렸을 거야…….」
다음 편지는 그녀가 대모가 될 조카딸의 탄생, 쥘리에트의 기쁨, 외삼촌의 기쁨 이야기뿐이었다……. 그녀 자신의 감정 이야기는 더 없었다.
그다음에는 다시 퐁괴즈마르에서 보낸 편지들이 왔다. 칠월에 쥘리에트가 그리로 그녀를 찾아왔다…….
「에두아르와 쥘리에트가 오늘 아침 떠났어. 무엇보다 내 어린 대녀가 아쉬워. 여섯 달 뒤에 다시 볼 때면 그 애 몸짓을 다 알아보지 못하겠지. 그 애가 몸짓 하나하나를 지어내는 걸 내가 거의 다 지켜봤는데. 무언가가 자라나는 건 늘 신비롭고 놀라워. 우리가 더 자주 놀라지 않는 건 주의가 모자라서야. 희망으로 가득한 그 작은 요람 위에 몸을 숙이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무슨 이기심 때문에, 무슨 자만 때문에, 더 나아지려는 욕구가 없어서, 자라는 일이 그렇게 빨리 멈추고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에게서 그토록 먼 채로 굳어 버릴까? 오! 우리가 그분께 조금 더 다가갈 수만 있다면, 그러기를 바라기만 한다면……얼마나 뜨거운 겨룸이 될까!
쥘리에트는 무척 행복해 보여. 처음엔 그 애가 피아노와 책을 그만두는 걸 보고 슬펐어. 하지만 에두아르 테시에르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고 책에도 별 취미가 없어. 쥘리에트는 남편이 따라올 수 없는 데서 기쁨을 찾지 않으니 분명 지혜롭게 하는 거야. 그 대신 그 애는 남편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남편은 자기 일을 모두 그 애한테 알려 줘. 올해 일이 많이 커졌대. 그는 결혼 덕에 르아브르에 큰 거래처가 생겼다고 농담처럼 말해. 로베르가 그의 지난번 출장에 따라갔어. 에두아르는 로베르를 무척 살뜰히 챙기고, 그 애 성격을 이해한다면서 그 애가 이런 일에 진지하게 재미를 붙이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
아빠는 훨씬 나아지셨어. 딸이 행복한 걸 보니 젊어지셨어. 다시 농장과 정원에 관심을 가지시고, 아까는 애슈버턴 양과 함께 시작했다가 테시에르 부부가 머무는 동안 멈췄던 소리 내어 읽기를 다시 하자고 하셨어. 그렇게 두 분께 읽어 드리는 건 휘브너 남작의 여행기야. 나도 무척 재미있어. 이제 나 혼자서도 책을 읽을 시간이 더 생길 거야. 그런데 네가 몇 권 일러 주기를 기다려. 오늘 아침 책을 이것저것 집어 들었는데 어느 것에도 마음이 가지 않았어!……」
이때부터 알리사의 편지는 더 흐트러지고 더 다급해졌다.
「너를 걱정시킬까 봐 내가 얼마나 너를 기다리는지 말하지 못하겠어.」 여름이 끝나 갈 무렵 그녀는 이렇게 썼다. 「너를 다시 보기 전에 지나가야 할 하루하루가 나를 짓누르고 숨 막히게 해. 아직 두 달이나! 너와 떨어져 이미 보낸 시간 전부보다 더 길게 느껴져! 기다림을 달래려고 하는 일은 모두 우스울 만큼 임시방편으로 보여서 아무것에도 마음을 붙일 수가 없어. 책은 힘도 매력도 없고, 산책은 즐겁지 않고, 자연 전체가 빛을 잃었고, 정원은 빛깔도 향기도 없어. 나는 네 고된 일이 부러워. 네가 고르지 않은, 꼭 해야 하는 그 훈련들이 끊임없이 너를 너 자신에게서 떼어 내고, 지치게 하고, 하루를 서둘러 보내게 하고, 저녁이면 지친 너를 잠 속에 던져 넣잖아. 네가 들려준 기동 훈련 이야기가 가슴에 남아 자꾸 떠올라. 잠을 설치던 요 며칠 밤, 나는 몇 번이나 기상나팔 소리에 퍼뜩 깼어……. 정말로 그 소리가 들렸어. 네가 말한 그 가벼운 취기, 그 아침의 기쁨, 그 반쯤 어지러운 느낌이 눈에 선해……. 얼음처럼 눈부신 새벽에 그 말제빌 고원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요즘 몸이 조금 덜 좋아. 오! 대단한 건 아니야. 그냥 너를 조금 너무 세게 기다리나 봐.」
그리고 여섯 주 뒤.
「이게 내 마지막 편지야, 친구야. 네가 돌아올 날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더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아. 퐁괴즈마르에서 너를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날씨가 나빠졌어. 무척 춥고 아빠는 시내로 돌아가자는 말씀만 하셔. 이제 쥘리에트도 로베르도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니 너를 쉽게 묵게 할 수 있겠지만, 펠리시 이모 댁에 묵는 게 나아. 이모도 너를 맞이하면 기뻐하실 거야.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다가올수록 기다림이 더 초조해져. 거의 두려움이야. 그토록 바라던 네가 오는 게, 이제는 겁나는 것 같아.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써. 네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 계단을 올라오는 네 발소리를 상상하면 심장이 멎거나 아파 와……. 무엇보다 내가 너한테 말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마……. 내 과거가 거기서 끝나는 것 같아. 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내 삶이 멈춰…….」
그런데 나흘 뒤, 그러니까 내가 제대하기 일주일 전에 아주 짧은 편지가 한 통 더 왔다.
「친구야, 르아브르에 머무는 기간과 우리가 처음 다시 만나는 시간을 너무 늘리려 하지 않는 네 생각에 나는 전적으로 찬성해. 이미 편지로 하지 않은 말 가운데 우리가 서로 할 말이 무엇이 있겠어? 그러니 등록 때문에 28일에 파리로 돌아가야 한다면 망설이지 마. 우리한테 이틀밖에 내주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지도 마. 우리에겐 평생이 있지 않아?」
6장
우리가 처음 다시 만난 것은 플랑티에 이모 집에서였다. 나는 군대 생활 탓에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고 둔해진 것 같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녀는 내가 변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짓된 첫인상이 우리 사이에서 무슨 대수였겠는가? 나로 말하면, 그녀를 예전처럼 온전히 알아보지 못할까 봐 처음에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니, 우리를 오히려 당황하게 한 것은 우리에게 억지로 떠맡긴 약혼자라는 우스꽝스러운 역할, 우리 둘만 남겨 두려고, 우리 앞에서 자리를 비켜 주려고 저마다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이모, 이모는 조금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아요. 우리는 서로 할 비밀 이야기가 없어요." 그 뚱뚱한 여자가 눈치 없이 자리를 비켜 주려고 애쓰자 마침내 알리사가 외쳤다.
"아니야! 아니야, 얘들아! 다 안다. 오래 못 만났으면 서로 할 자잘한 이야기가 잔뜩 있는 법이지……."
"제발요, 이모. 가시면 저희가 정말 곤란해요." 거의 짜증 섞인 말투여서 나는 그것이 알리사의 목소리라는 걸 겨우 알아보았다.
"이모, 정말이에요. 이모가 가시면 우리는 한마디도 안 할 거예요!" 나는 웃으며 덧붙였지만, 둘만 남는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도 어떤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고는 우리 셋 사이에 다시 이야기가 이어졌다. 억지로 밝고, 시시하고, 저마다 동요를 숨기는 그 꾸민 활기에 채찍질 당하는 이야기였다. 외삼촌이 나를 점심에 불렀으므로 우리는 이튿날 다시 만나기로 했고, 그래서 그 첫날 저녁 우리는 이 연극을 끝내게 된 것을 기뻐하며 어렵지 않게 헤어졌다.
나는 식사 시간보다 훨씬 일찍 갔지만, 알리사는 친구 하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리사는 그 친구를 돌려보낼 힘이 없었고, 친구는 알아서 일어날 눈치가 없었다. 마침내 그 친구가 우리 둘만 남겨 두고 갔을 때, 나는 알리사가 그녀를 점심에 붙잡지 않은 게 놀랍다는 시늉을 했다. 우리 둘 다 잠을 못 자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외삼촌이 왔다. 알리사는 내가 외삼촌이 늙었다고 느낀다는 걸 알아챘다. 외삼촌은 귀가 어두워져 내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듣게 하려면 소리를 질러야 해서 내 말은 멍청하게 들렸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약속대로 플랑티에 이모가 마차를 끌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이모는 우리를 오르셰로 데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알리사와 나 둘이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걸어오게 할 생각이었다.
철에 맞지 않게 더웠다. 우리가 걷던 해안 길은 해가 내리쬐고 볼품이 없었다. 잎 떨어진 나무들은 아무 그늘도 되어 주지 않았다. 이모가 기다리는 마차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걱정에 쫓겨 우리는 불편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두통이 가로지르는 이마에서는 생각 하나 짜낼 수 없었다. 체면 때문인지, 아니면 그 몸짓이 말을 대신할 수 있어서인지, 나는 걸으면서 알리사가 내맡긴 손을 잡고 있었다. 마음의 동요와 걸음에 찬 숨, 침묵의 거북함 때문에 얼굴로 피가 몰렸다. 관자놀이가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알리사의 얼굴은 보기 싫게 붉어져 있었다. 곧 축축한 손이 서로 붙어 있는 게 거북해서 우리는 손을 놓았고, 손은 저마다 서글프게 떨어졌다.
우리는 너무 서둘러서 마차보다 훨씬 먼저 갈림길에 닿았다. 이모는 우리에게 이야기할 시간을 주려고 다른 길로 마차를 아주 천천히 몰게 했던 것이다. 우리는 둑에 앉았다. 갑자기 찬 바람이 일어 땀에 젖은 우리를 얼어붙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일어나 마차를 맞으러 갔다……. 하지만 가장 나쁜 건 우리가 실컷 이야기를 나눴으리라 믿고 우리 약혼에 대해 캐물을 채비를 한 가엾은 이모의 극성스러운 관심이었다. 견디다 못해 눈에 눈물이 고인 알리사는 심한 두통을 핑계로 댔다. 돌아오는 길은 말없이 끝났다.
이튿날 나는 온몸이 쑤시고 감기에 걸려 몹시 앓아서 오후가 되어서야 뷔콜랭 댁에 다시 가기로 마음먹었다. 공교롭게도 알리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펠리시 이모의 손녀 가운데 하나인 마들렌 플랑티에가 와 있었다. 알리사가 즐겨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마들렌은 며칠 할머니 집에 묵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가자 외쳤다.
"여기서 나가서 코트로 돌아가시면 같이 올라가요."
나는 얼떨결에 그러자고 했다. 그 바람에 알리사를 혼자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어서 분명 도움이 되었다. 전날의 견딜 수 없는 거북함은 다시 느끼지 않았다. 곧 우리 셋 사이에 이야기가 쉽게 이어졌고, 처음에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덜 시시했다. 내가 작별 인사를 하자 알리사가 묘하게 웃었다. 그때까지 내가 이튿날 떠난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긴 곧 다시 만나리라는 전망 덕에 내 작별에는 비극적인 데가 없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나서 막연한 불안에 떠밀려 나는 다시 시내로 내려갔고, 한 시간 가까이 헤매다가 뷔콜랭 댁 초인종을 다시 누르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맞은 건 외삼촌이었다. 알리사는 몸이 좋지 않아 벌써 방에 올라갔고 아마 곧바로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외삼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나왔다…….
이 엇갈림들이 아무리 언짢았다 해도 그것을 탓하는 건 헛일일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를 도왔다 해도 우리는 거북함을 지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알리사도 그것을 느꼈다는 것만큼 나를 서글프게 하는 건 없었다.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이 편지를 받았다.
「친구야, 이 무슨 슬픈 만남이었을까! 너는 다른 사람들 탓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너 자신도 그렇게 믿지는 못했을 거야. 그리고 이제 나는 늘 이럴 거라고 생각해. 아니, 알아. 아! 부탁이야, 우리 다시 만나지 말자!
서로 할 이야기가 그토록 많은데 왜 이렇게 거북하고, 왜 이렇게 엉뚱한 자리에 놓인 것 같고, 왜 이렇게 굳어 버리고 말문이 막힐까? 네가 돌아온 첫날에는 그 침묵조차 기뻤어. 그 침묵이 걷히고 네가 나한테 놀라운 이야기를 해 주리라 믿었으니까. 그 전에는 네가 떠날 리 없다고.
그런데 오르셰로 가는 그 침울한 산책이 말없이 끝나는 걸 보았을 때, 무엇보다 우리 손이 서로 떨어져 희망 없이 늘어졌을 때, 나는 괴로움과 아픔으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그리고 나를 가장 서글프게 한 건 네 손이 내 손을 놓았다는 게 아니라, 네 손이 그러지 않았다면 내 손이 먼저 그랬으리라는 걸 느낀 거야. 내 손도 이제 네 손 안에서 편하지 않았으니까.
이튿날, 그러니까 어제, 나는 아침 내내 미친 듯이 너를 기다렸어. 집에 있기에는 너무 불안해서 방파제로 나를 찾아오라는 쪽지를 남겨 두었어. 오래도록 거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너 없이 바라보는 게 너무 괴로웠어. 갑자기 네가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 집으로 돌아왔어. 오후에는 시간이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 마들렌이 전날 찾아오겠다고 했는데, 아침에 너를 볼 줄 알고 오라고 해 두었거든. 그런데 어쩌면 이번 만남에서 좋았던 몇 순간은 다 그 애 덕이었는지도 몰라. 잠시 동안 나는 그 편안한 이야기가 오래오래 이어지리라는 이상한 착각에 빠졌어……. 그러다 네가 내가 그 애와 함께 앉아 있던 소파로 다가와 나한테 몸을 숙이고 작별 인사를 했을 때,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어. 모든 게 끝나는 것 같았어. 네가 떠난다는 걸 갑자기 그제야 알았어.
네가 마들렌과 함께 나가자마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견딜 수 없는 일로 느껴졌어. 내가 다시 나갔던 거 알아? 너한테 다시 말하고 싶었어. 끝내 하지 못한 이야기를 다 하고 싶었어. 벌써 플랑티에 이모 댁으로 달려가고 있었어……. 늦은 시간이었어. 시간이 없었고, 용기가 없었어……. 나는 절망해서 돌아와 너한테 편지를 썼어……. 이제 너한테 편지하지 않겠다고……. 작별 편지를…….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가 모두 거대한 신기루일 뿐이고, 아아!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한테 편지를 썼을 뿐이라는 걸 마침내 너무 똑똑히 느꼈으니까. 그리고……. 제롬! 제롬! 아! 우리는 늘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사실 그 편지는 찢었어. 하지만 지금 거의 똑같이 다시 쓰고 있어. 오! 내가 너를 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친구야! 오히려 네가 다가오기만 하면 일던 동요와 거북함 때문에, 내가 너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이토록 잘 느낀 적은 없었어. 하지만 절망적으로 사랑해. 알겠어? 털어놓아야겠어. 멀리 있을 때 나는 너를 더 사랑했어. 벌써 그런 줄 짐작하고 있었어, 아아! 그토록 바라던 이번 만남이 그걸 똑똑히 가르쳐 주었어. 친구야, 너도 그걸 꼭 깨달아야 해. 잘 있어, 사랑하는 내 오빠. 하느님께서 너를 지키고 이끄시기를. 벌 받지 않고 다가갈 수 있는 건 그분뿐이야.」
그리고 이 편지만으로는 아직 충분히 아프지 않다는 듯 그녀는 이튿날 이런 추신을 덧붙였다.
「이 편지를 보내기 전에 우리 둘에 관한 일에서는 좀 더 입이 무거워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 너와 나 사이에만 있어야 할 일을 쥘리에트나 아벨한테 이야기해서 너는 여러 번 나를 아프게 했어. 그래서 네가 그걸 짐작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네 사랑이 무엇보다 머리로 하는 사랑, 다정함과 충실함에 대한 아름다운 지적 고집이라고 생각하게 됐어.」
내가 이 편지를 아벨에게 보여 줄까 봐 두려워서 마지막 몇 줄을 쓴 게 틀림없었다. 대체 어떤 의심 많은 눈치가 그녀를 경계하게 했을까? 그녀는 예전에 내 말에서 친구의 충고가 비치는 것을 알아챘던 걸까?……
이제 나는 그와 몹시 멀어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갈라지는 두 길을 가고 있었다. 내 슬픔의 괴로운 짐을 혼자 지는 법을 가르치는 데는 이런 당부가 필요 없었다.
그다음 사흘은 오직 탄식으로 채워졌다. 나는 알리사에게 답장하고 싶었다. 너무 차분한 따짐으로, 너무 격한 항의로, 아주 작은 서툰 말 한마디로 우리 상처를 고칠 수 없게 덧낼까 봐 두려웠다. 나는 내 사랑이 몸부림치는 편지를 스무 번이나 다시 썼다. 마침내 보내기로 한 편지의 사본, 눈물로 얼룩진 그 종이를 나는 지금도 울지 않고는 다시 읽을 수 없다.
「알리사! 나를, 우리 둘을 가엾게 여겨 줘!…… 네 편지가 아파. 네 두려움을 웃어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네가 쓴 건 나도 다 느끼고 있었어. 하지만 나 자신한테 그렇게 말하기가 두려웠어. 상상일 뿐인 것에 너는 얼마나 끔찍한 현실을 입히고, 그걸 우리 사이에서 얼마나 두껍게 만드는지!
네가 나를 덜 사랑한다고 느낀다면……. 아! 네 편지 전체가 부인하는 그런 잔인한 가정은 나한테서 멀리 가 버리기를! 그렇다면 네 한때의 걱정이 무슨 대수야? 알리사! 따져 보려고만 하면 내 문장은 얼어붙어. 내 마음이 신음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서 영리할 수가 없고, 너를 사랑할수록 너한테 말하는 법을 모르겠어. 『머리로 하는 사랑』이라니……. 거기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를 바라? 온 영혼으로 너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내 지성과 마음을 가를 수 있겠어? 하지만 우리 편지가 너한테 그런 모욕적인 비난을 하게 한 원인이라면, 편지 때문에 들떠 있다가 현실로 떨어지면서 우리가 그토록 심하게 다쳤다면, 이제 네가 나한테 편지를 써도 너 자신한테만 쓰는 거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이번 같은 편지를 또 견딜 힘이 나한테 없다면, 부탁이야, 우리 한동안 편지를 모두 멈추자.」
편지 뒷부분에서 나는 그녀의 판결에 이의를 내세우며 항소했고, 새로운 만남의 기회를 우리에게 한 번 더 달라고 애원했다. 이번 만남은 모든 것이 불리했다. 무대도, 곁의 사람들도, 계절도, 그리고 우리를 그토록 경솔하게 거기 대비시킨 들뜬 편지들까지도. 이번에는 오직 침묵만이 우리의 만남에 앞설 것이다. 나는 그 만남을 봄에 퐁괴즈마르에서 갖기를 바랐다. 거기라면 지난날이 내 편을 들어 주리라 생각했고, 외삼촌은 부활절 방학 동안 그녀가 좋다고 여기는 만큼, 많든 적든 며칠이라도 나를 기꺼이 맞아 주실 것이다.
내 결심은 굳게 서 있었고, 편지를 부치자마자 나는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 * *
나는 그해가 다 가기 전에 알리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몇 달 전부터 건강이 나빠지던 애슈버턴 양이 성탄절 나흘 전에 세상을 떠났다. 제대한 뒤로 나는 다시 그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나는 그녀 곁을 거의 떠나지 않았고,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지킬 수 있었다. 알리사가 보낸 카드는 그녀가 내 상(喪)보다도 침묵의 약속을 더 마음에 두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외삼촌이 올 수 없는 장례식에만 참석하러, 기차를 갈아타는 사이에 오겠다고 했다.
장례식에도, 관을 따라가는 길에도 거의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나란히 걸으며 우리는 겨우 몇 마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 곁에 앉은 교회에서 나는 여러 번 그녀의 눈길이 다정하게 나에게 머무는 것을 느꼈다.
"약속한 거야." 헤어질 무렵 그녀가 말했다. "부활절 전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래. 하지만 부활절에는……."
"기다릴게."
우리는 묘지 문 앞에 있었다. 나는 역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차를 불러 세우고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나를 두고 떠났다.
7장
"알리사는 정원에서 너를 기다린다." 사월 말 내가 퐁괴즈마르에 도착하자 외삼촌이 나를 아버지처럼 껴안고 나서 말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서둘러 나를 맞으러 나오지 않아서 서운했지만, 곧바로 다시 만나는 첫 순간의 뻔한 감격을 우리 둘 다 겪지 않게 해 준 그녀가 고마웠다.
그녀는 정원 맨 안쪽에 있었다. 나는 덤불이 빽빽하게 둘러싼 그 둥근 빈터로 걸어갔다. 그 철이면 라일락, 마가목, 금사슬나무, 붉은병꽃나무가 온통 꽃을 피웠다. 너무 멀리서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아니면 그녀가 내가 오는 걸 보지 못하게 하려고, 나는 정원 반대쪽, 가지 밑의 공기가 서늘한 어두운 길로 갔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하늘은 내 기쁨처럼 따뜻하고 반짝이고 섬세하게 맑았다. 그녀는 아마 내가 다른 길로 오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가 내 발소리를 듣지 못한 사이에 나는 그녀 곁에, 그녀 뒤에 와 있었다. 나는 멈춰 섰다……. 그리고 시간이 나와 함께 멈출 수 있기라도 한 듯 생각했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어쩌면 가장 달콤한 순간. 행복 자체보다 앞서는, 행복 자체도 미치지 못할 순간…….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내가 한 걸음 내딛자 그녀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일어서며 하던 자수를 땅에 굴러떨어지게 두고 나에게 두 팔을 내밀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그녀는 팔을 내민 채 웃음 띤 얼굴을 기울이고 아무 말 없이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온통 흰옷을 입고 있었다. 거의 지나치게 진지한 그 얼굴에서 나는 그녀의 어린 시절 미소를 다시 보았다…….
"들어 봐, 알리사." 나는 갑자기 외쳤다. "나한테 열이틀의 시간이 있어. 네가 바라는 것보다 하루도 더 머물지 않을게. 내일은 퐁괴즈마르를 떠나야 한다는 뜻의 신호를 하나 정하자. 그러면 이튿날 나는 따지지도 불평하지도 않고 떠날게. 그러겠어?"
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말이 쉽게 나왔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저녁 먹으러 내려올 때 네가 좋아하는 그 자수정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지 않은 저녁……. 알아들을 수 있겠어?"
"그날이 나의 마지막 저녁이라는 걸."
"그런데 떠날 수 있겠어?" 그녀가 다시 말했다. "눈물도 한숨도 없이……."
"작별 인사도 없이. 그 마지막 저녁에도 전날처럼 아주 담담하게 너와 헤어질게. 그래서 너는 처음에 이렇게 생각하겠지. 이 사람이 못 알아들었나? 하지만 이튿날 아침 네가 나를 찾을 때면 나는 그냥 거기 없을 거야."
"이튿날이면 나는 너를 찾지 않을 거야."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 손을 입술에 가져가자 나는 또 말했다.
"그 운명의 저녁까지는 내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게, 넌지시 비치는 말도 하지 마."
"너도 그다음에 올 이별 이야기는 넌지시라도 하지 마."
이제는 이 만남의 엄숙함이 우리 사이에 쌓아 올릴지 모를 거북함을 깨뜨려야 했다.
"이 며칠을 네 곁에서 보내는 게," 나는 말을 이었다. "다른 날들과 똑같이 느껴지면 정말 좋겠어……. 그러니까 우리 둘 다 특별한 날이라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처음부터 너무 이야기하려고 애쓰지 않을 수 있다면……."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덧붙였다.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우리는 언제나 정원 일을 좋아했다. 얼마 전부터 경험 없는 정원사가 예전 정원사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두 달 동안 내버려 둔 정원에는 할 일이 많았다. 장미 덤불들은 가지치기가 엉망이었다. 기운차게 자라는 것들은 마른 가지에 뒤덮여 있었고, 덩굴장미들은 제대로 받쳐 주지 않아 무너져 내렸고, 웃자란 곁가지가 다른 것들의 기운을 빨아먹고 있었다. 대부분 우리가 접붙인 것들이어서 우리는 우리가 키운 녀석들을 알아보았다. 그것들이 바라는 손질에 우리는 오래 매달렸고, 덕분에 처음 사흘 동안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입을 다물 때에도 침묵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다시 익숙해졌다. 나는 어떤 해명보다 이 익숙해짐을 믿었다. 우리가 헤어져 있었다는 기억마저 벌써 우리 사이에서 지워져 가고 있었고, 내가 자주 그녀에게서 느끼던 두려움, 그녀가 나에게서 두려워하던 영혼의 움츠림도 벌써 줄어들고 있었다. 슬펐던 가을의 방문 때보다 젊어 보이는 알리사는 그 어느 때보다 예뻐 보였다. 나는 아직 그녀에게 입 맞추지 않았다. 저녁마다 나는 그녀의 블라우스 위에서 작은 금줄에 매달린 자수정 십자가가 반짝이는 것을 다시 보았다. 믿음이 생기자 내 마음에 희망이 다시 태어났다. 희망이라니? 그건 벌써 확신이었고, 나는 알리사에게서도 똑같은 확신을 느낀다고 상상했다. 나 자신을 거의 의심하지 않았으니 그녀를 더는 의심할 수 없었다. 우리 말은 조금씩 대담해졌다.
"알리사." 어느 아침, 상쾌한 공기가 웃음 짓고 우리 마음이 꽃처럼 열리던 때 나는 말했다. "이제 쥘리에트가 행복하니, 우리도……."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녀가 갑자기 어찌나 창백해졌던지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친구야!" 그녀는 나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꺼냈다. "나는 네 곁에서, 사람이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보다 더 행복해……. 하지만 내 말을 믿어. 우리는 행복하려고 태어나지 않았어."
"영혼이 행복보다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어?" 나는 격하게 외쳤다. 그녀가 속삭였다.
"거룩함……."
어찌나 작게 말했던지 나는 그 말을 들었다기보다 짐작했다.
내 모든 행복이 날개를 펴고 나에게서 하늘로 달아났다.
"너 없이는 나는 거기 이르지 못할 거야."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에 이마를 묻고, 슬픔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아이처럼 울면서 다시 말했다. "너 없이는 안 돼. 너 없이는 안 돼!"
그러고 그날도 다른 날들처럼 흘러갔다. 그런데 저녁에 알리사는 그 작은 자수정 장신구 없이 나타났다. 약속을 지켜 나는 이튿날 새벽에 떠났다.
그다음 날 나는 이 이상한 편지를 받았다. 머리글처럼 셰익스피어의 시 몇 줄이 적혀 있었다.
그 가락을 다시. 스러지듯 잦아드는 가락이었다. / 오, 제비꽃 핀 둑 위로 숨을 내쉬며 / 향기를 훔치고 또 건네는 달콤한 남풍처럼 / 내 귀에 스며들었지. 됐다, 그만. / 아까만큼 달콤하지가 않구나…….
「그래! 나도 모르게 아침 내내 너를 찾았어, 오빠. 네가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 우리 약속을 지킨 네가 원망스러웠어.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어. 덤불마다 그 뒤에서 네가 나타날 것만 같았어. 그런데 아니야! 너는 정말 떠났어. 고마워.
남은 하루 동안 나는 어떤 생각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들러붙어서 시달렸어. 너한테 그 생각들을 전하고 싶어. 그리고 이상하고도 또렷한 두려움이 있었어. 그걸 전하지 않으면 나중에 너한테 잘못했다고, 네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낄 것 같은 두려움…….
네가 퐁괴즈마르에 온 처음 몇 시간 동안 나는 네 곁에서 느끼는, 내 온 존재의 그 이상한 만족에 놀랐고, 곧 불안해졌어. 『너무나 만족해서 그 이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하고 너는 말했지. 아아!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게 바로 그거야…….
친구야, 네가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을까 봐 걱정이야. 무엇보다, 내 영혼의 가장 격렬한 감정을 표현한 것일 뿐인 이 말에서 네가 무슨 교묘한 따짐을 볼까 봐(오! 그렇다면 얼마나 서툰 따짐일까) 걱정이야.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면 그건 행복이 아닐 거야.』 너는 그렇게 말했지, 기억나?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어. 아니야, 제롬, 그걸로는 우리한테 충분하지 않아. 제롬, 그걸로 충분해서는 안 돼. 그 달콤함이 가득한 만족을 나는 참된 것으로 여길 수가 없어. 지난가을 우리는 그 밑에 어떤 괴로움이 숨어 있는지 알게 되지 않았어?……
참된 것이라니! 아! 하느님, 그것이 참된 것이 되지 않게 지켜 주시기를! 우리는 다른 행복을 위해 태어났어…….
예전에 우리 편지가 가을의 만남을 망쳤듯이, 어제 네가 곁에 있었던 기억이 오늘 내 편지에서 마법을 앗아가. 너한테 편지를 쓰면서 느끼던 그 황홀함은 어디로 갔을까? 편지로, 그리고 곁에 있음으로, 우리 사랑이 바랄 수 있는 기쁨의 순수한 것은 다 써 버렸어. 그리고 이제 나는 나도 모르게 「십이야」의 오르시노처럼 외쳐. 『됐다! 그만! 아까만큼 달콤하지가 않구나.』
잘 있어, 친구야. 여기서 하느님의 사랑이 시작된다(Hic incipit amor Dei). 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는 언젠가 알게 될까……. 끝까지 나는 너의
알리사.」
미덕의 덫 앞에서 나는 아무 방비가 없었다. 모든 영웅적인 것은 나를 눈부시게 하며 끌어당겼다. 나는 그것을 사랑과 떼어 놓지 않았으니까……. 알리사의 편지는 더없이 무모한 열광으로 나를 취하게 했다. 내가 더 높은 미덕을 향해 애쓴 것은 오직 그녀를 위해서였음을 하느님은 아신다. 어떤 오솔길이든 오르막이기만 하면 그녀를 다시 만날 곳으로 나를 데려가리라. 아! 그 땅이 아무리 빨리 좁아져도, 우리 둘만 디딜 수 있을 만큼 좁아지기를 바랐다! 아아! 나는 그녀의 속임수가 얼마나 교묘한지 짐작하지 못했고, 그녀가 이번에는 산꼭대기를 통해 다시 나에게서 달아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긴 답장을 썼다. 그 편지에서 그래도 앞을 내다본 듯한 유일한 대목이 기억난다.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이 들어. 내 사랑이 내가 내 안에 간직한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라고. 내 모든 미덕이 거기 매달려 있다고. 내 사랑이 나를 나 자신보다 높이 올려 주고, 그게 없으면 나는 아주 평범한 본성의 그 시시한 높이로 다시 떨어지리라고. 너를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 덕에 가장 험한 오솔길이 언제나 가장 좋은 길로 보일 거야.」 내가 무슨 말을 덧붙였기에 그녀가 이런 답장을 보냈을까.
「하지만 친구야, 거룩함은 고르는 게 아니야. 해야만 하는 거야(이 말에는 세 번이나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네가 내가 믿었던 그 사람이라면 너도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야.」
그게 다였다. 나는 우리 편지가 거기서 멈추리라는 걸 알았다. 아니, 짐작했다. 그리고 아무리 교활한 충고도, 아무리 굳은 의지도 거기에는 어쩔 수 없으리라는 것도.
그래도 나는 다시 길고 다정한 편지를 썼다. 세 번째 편지를 보낸 뒤 이 쪽지가 왔다.
「내가 너한테 편지하지 않기로 무슨 결심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냥 이제 편지에 마음이 가지 않아. 그래도 네 편지는 아직 즐거워. 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네 생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점점 더 마음에 걸려.
여름이 멀지 않았어. 한동안 편지는 그만두고, 구월 마지막 보름을 퐁괴즈마르에 와서 내 곁에서 보내. 그러겠어? 그렇다면 답장은 필요 없어. 네 침묵을 승낙으로 받아들일게. 그러니 답장하지 않기를 바라.」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이 침묵은 그녀가 나에게 내린 마지막 시험일 뿐이었을 것이다. 몇 달 공부하고 몇 주 여행한 뒤 퐁괴즈마르에 돌아갔을 때 나는 더없이 차분한 확신에 차 있었다.
그때는 나 자신도 그토록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그저 이야기만으로 어떻게 단번에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때부터 내가 온통 빠져든 괴로움의 계기 말고 여기서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지금 나는 더없이 꾸민 겉모습 밑에서 아직도 사랑이 고동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나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그때는 처음에 그 겉모습밖에 보지 못했고, 내 연인을 다시 찾지 못해서 그녀를 탓했다……. 아니, 그때에도 나는 당신을 탓하지 않았어요, 알리사! 다만 당신을 더는 알아볼 수 없어서 절망하며 울었을 뿐이에요. 당신 사랑의 힘을 그 침묵의 꾀와 잔인한 솜씨로 가늠하는 지금, 당신이 나를 더 끔찍하게 괴롭힐수록 나는 당신을 그만큼 더 사랑해야 할까요?……
경멸? 쌀쌀함? 아니다.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조차 아무것도 없었다. 그 원인이 너무 미묘하고 알리사가 그걸 모르는 척하는 데 너무 능숙해서, 나는 이따금 내가 내 불행을 지어내는 게 아닌가 망설이고 의심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불평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토록 살뜰하고 세심하게 군 적이 없었다. 첫날에는 나도 거의 속아 넘어갈 뻔했다……. 납작하게 바짝 당겨 빗은 새 머리 모양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려는 듯 얼굴을 딱딱하게 만든 게, 칙칙한 빛깔에 손에 닿는 감촉도 흉한 천으로 된 어울리지 않는 블라우스가 그녀 몸의 섬세한 가락을 일그러뜨린 게 결국 무슨 대수였겠는가……. 그런 건 그녀가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이었고, 나는 눈먼 채로 생각했다. 내일이면 그녀가 스스로, 아니면 내 부탁을 듣고……. 오히려 나를 더 마음 아프게 한 건 우리 사이에 그토록 낯선 그 세심함과 살뜰함이었다. 거기서 나는 마음의 끌림보다 결심을, 감히 말하자면 사랑보다 예의를 보게 될까 두려웠다.
저녁에 거실에 들어가다가 피아노가 늘 있던 자리에 없어서 놀랐다. 내가 실망해서 소리를 지르자.
"피아노는 손보러 보내야 해, 친구야." 알리사가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내가 여러 번 말했잖니, 얘야." 외삼촌이 거의 엄하게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지금까지 그걸로 충분했으니 제롬이 떠난 뒤에 보내도 됐을 텐데. 네가 서두르는 바람에 큰 즐거움을 놓치는구나……."
"하지만 아빠,"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감추려고 돌아서며 말했다. "요즘 소리가 너무 텅 비어서 제롬이라도 거기서 아무것도 끌어내지 못했을 거예요."
"네가 칠 때는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던데." 외삼촌이 말했다.
그녀는 안락의자 덮개의 치수를 재기라도 하는 듯 잠시 어둠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방을 나가 한참 뒤에야 외삼촌이 저녁마다 마시는 탕약을 쟁반에 받쳐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튿날 그녀는 머리 모양도 블라우스도 바꾸지 않았다. 집 앞 벤치에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그녀는 전날 저녁에도 하던 바느질, 아니 기우는 일을 다시 했다. 곁의 벤치나 탁자 위에 해진 긴 양말과 짧은 양말이 가득한 커다란 바구니가 있었고, 그녀는 거기서 하나씩 꺼냈다. 며칠 뒤에는 냅킨과 홑이불이었다……. 이 일이 그녀를 온통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입술이 아무 표정도 잃고 눈이 아무 빛도 잃을 만큼.
"알리사!" 첫날 저녁 나는 외쳤다.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시정을 잃어버린 그 얼굴에 거의 질겁해서. 나는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내 눈길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그녀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내 말이 들리나 보려고. 네 생각이 나한테서 너무 멀리 가 있는 것 같아서."
"아니야. 나 여기 있어. 그런데 이렇게 기우는 건 정신을 많이 쏟아야 해."
"네가 바느질하는 동안 책을 읽어 줄까?"
"잘 듣지 못할 것 같아."
"왜 그렇게 정신을 빼앗기는 일을 골라?"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
"이걸로 밥벌이를 할 가난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설마 돈을 아끼려고 이런 보람 없는 일을 억지로 하는 건 아니지?"
그녀는 곧바로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없다고, 오래전부터 다른 일은 하지 않았고, 아마 그래서 다른 일에는 솜씨가 다 무뎌졌을 거라고 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나를 이토록 서글프게 하면서 그녀의 목소리가 이보다 부드러웠던 적은 없었다. 「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말을 할 뿐인데, 왜 그런 걸로 슬퍼해?」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마음의 모든 항변은 입술까지 올라오지도 못하고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이틀 뒤 우리는 장미를 땄고, 그녀가 그것을 자기 방에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해 들어 내가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방이었다. 나는 곧바로 얼마나 큰 희망을 품었던가! 나는 그때까지도 내 슬픔을 나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한마디면 내 마음이 나았을 것이다.
나는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무엇 때문인지 거기에는 알리사를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음악 같은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창과 침대 둘레에 드리운 커튼의 푸른 그늘, 반들거리는 마호가니 가구, 그 정돈됨, 그 깔끔함, 그 고요함, 모든 것이 그녀의 순수함과 생각에 잠긴 우아함을 내 마음에 이야기해 주었다.
그날 아침 나는 그녀 침대 곁의 벽에, 내가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마사초의 커다란 사진 두 장이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것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려는데, 바로 곁에 그녀가 머리맡에 두고 읽는 책들을 꽂아 두는 선반에 눈길이 떨어졌다. 그 작은 서가는 반은 내가 준 책들, 반은 우리가 함께 읽은 다른 책들로 천천히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책들이 모두 치워지고, 그녀가 경멸하리라 믿었던 하찮고 통속적인 신앙 소책자들로만 채워진 것을 막 알아보았다. 갑자기 눈을 들자 알리사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 나를 지켜보며 웃고 있었다.
"미안해." 그녀가 곧바로 말했다. "네 얼굴 때문에 웃었어. 내 서가를 보더니 얼굴이 갑자기 확 일그러지잖아……."
나는 도무지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 정말, 알리사, 요즘 네가 읽는 게 이거야?"
"그럼. 뭐가 놀라워?"
"알찬 양식에 익숙한 지성이라면 이런 싱거운 것을 구역질 없이 맛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이건 나와 꾸밈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박한 영혼들이야. 그들은 할 수 있는 만큼 자기를 표현하고, 나는 그들과 어울리는 게 좋아. 그들은 아름다운 말의 어떤 덫에도 넘어가지 않을 거고, 나도 그들을 읽으면서 어떤 세속적인 감탄에도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걸 미리 알아."
"그럼 이제 이런 것만 읽어?"
"거의. 그래, 몇 달 전부터. 게다가 이제는 책 읽을 시간이 별로 없어. 그리고 털어놓자면, 아주 최근에 네가 감탄하도록 가르쳐 준 그 위대한 작가들 가운데 하나를 다시 읽어 보려고 했는데, 성경에 나오는, 자기 키를 한 자라도 더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어."
"너한테 너 자신에 대해 그렇게 이상한 생각을 하게 만든 그 『위대한 작가』가 누군데?"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건 아니야. 그를 읽다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지……. 파스칼이었어. 어쩌면 덜 좋은 대목을 펼쳤는지도 몰라……."
나는 참지 못하고 몸짓을 했다. 그녀는 맑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마치 외운 것을 읊듯 말했고, 끝없이 다듬고 있는 꽃에서 더는 눈을 들지 않았다. 내 몸짓에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같은 투로 이어 갔다.
"그토록 거창한 말에 그토록 애를 쓰니 놀라워. 그런데 증명하는 건 그토록 적어. 가끔은 그 비장한 어조가 믿음보다는 오히려 의심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해. 완전한 믿음은 목소리에 그토록 많은 눈물도, 떨림도 없어."
"그 떨림이, 그 눈물이 그 목소리를 아름답게 하는 거야." 나는 받아치려 했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 말들에서 내가 알리사에게서 소중히 여기던 것을 하나도 알아볼 수 없었으니까. 나는 그 말들을 기억나는 대로, 나중에 꾸밈이나 논리를 보태지 않고 옮겨 적는다.
"그가 먼저 지금의 삶에서 기쁨을 비워 내지 않았다면,"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삶이 저울에서 더 무거웠을 거야. 그보다……."
"그보다 뭐?" 나는 그 이상한 말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가 내세우는 그 불확실한 지복보다."
"그럼 너는 그걸 믿지 않아?" 나는 외쳤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게 불확실한 채로 남기를 바라. 거래라는 의심이 조금도 끼어들지 않도록.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이 미덕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건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 타고난 고귀함 때문이야."
"그래서 파스칼 같은 사람의 고귀함이 그 숨은 회의주의로 피하는 거지."
"회의주의가 아니라 얀센주의야."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런 걸 알아서 뭐 하겠어? 여기 이 가엾은 영혼들은," 그녀는 자기 책들 쪽으로 돌아섰다. "자기가 얀센파인지 정적주의자인지 다른 무엇인지 말하라면 무척 난처할 거야. 그들은 바람에 눌린 풀처럼 하느님 앞에 고개를 숙여. 꾀도 없고, 동요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이. 그들은 자기가 별로 대단치 않다고 여기고, 자기에게 무슨 값어치가 있다면 그건 오직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지우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
"알리사!" 나는 외쳤다. "왜 너는 너의 날개를 뜯어내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어찌나 차분하고 자연스러웠던지, 내 외침은 그만큼 더 우스꽝스럽게 과장되게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웃었다.
"파스칼을 마지막으로 찾아가서 내가 붙잡아 둔 건 오직……."
"뭔데?" 그녀가 말을 멈췄으므로 나는 물었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머지는," 그녀는 더 크게 웃으며 내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정말이지 거의 이해하지 못했어. 이 작은 이들과 한동안 어울리다 보면, 위대한 이들의 숭고함에 얼마나 빨리 숨이 차는지 놀라울 정도야."
갈피를 잃은 나는 아무 대답도 찾지 못하는 걸까?……
"내가 오늘 너와 함께 이 설교며 묵상이며 하는 걸 다 읽어야 한다면……."
"아니," 그녀가 말을 끊었다. "네가 그걸 읽는 걸 보면 나는 몹시 속상할 거야! 정말 너는 그보다 훨씬 나은 것을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해."
그녀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고, 우리 두 삶을 이렇게 갈라놓는 그 말들이 내 가슴을 찢을 수 있다는 걸 짐작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머리가 불처럼 달아올랐다. 더 말하고 울고 싶었다. 어쩌면 내 눈물에 그녀가 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벽난로에 팔꿈치를 짚고 두 손에 이마를 묻은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고통을 하나도 보지 못한 채, 아니면 보지 못하는 척하며 차분하게 꽃을 계속 다듬었다…….
그때 식사를 알리는 첫 종이 울렸다.
"이러다 점심 준비를 못 하겠어." 그녀가 말했다. "얼른 나가 줘." 그러고는 그저 놀이였다는 듯 말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이 이야기는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알리사는 끊임없이 나에게서 빠져나갔다. 그녀가 피하는 것처럼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우연히 생긴 일은 무엇이든 곧바로 훨씬 다급하고 중요한 의무가 되었다. 나는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늘 새로 생겨나는 살림살이 뒤에, 곳간에서 해야 했던 공사를 살피는 일 뒤에, 소작인들을 찾아가는 일 뒤에, 그녀가 점점 더 돌보는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는 일 뒤에야 왔다. 나에게는 남는 시간이 돌아왔고, 그건 아주 적었다. 나는 늘 바쁜 그녀만 보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자잘한 일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녀를 쫓아다니기를 그만두었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빼앗겼는지를 그나마 덜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주 짧은 대화가 오히려 그걸 더 일깨웠다. 알리사가 나에게 잠깐의 시간을 내줄 때면 그건 정말이지 더없이 어색한 대화를 위해서였고, 그녀는 아이의 놀이에 응해 주듯 거기 응했다. 그녀는 딴 데 정신을 팔고 웃으며 내 곁을 빠르게 지나갔고, 나는 그녀가 한 번도 알지 못했던 사람보다 더 멀어졌다고 느꼈다. 이따금 나는 그녀의 미소에서 어떤 도전을, 적어도 어떤 빈정거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내 바람을 피해 가는 걸 그녀가 재미있어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곧 나는 모든 불만을 나 자신에게 돌렸다. 탓하는 마음에 빠지고 싶지 않았고,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기대했는지, 그녀에게 무엇을 탓할 수 있는지도 더는 잘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많은 행복을 약속했던 나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는 그 날들이 달아나는 것을 아연하게 바라보았지만, 그 수를 늘리고 싶지도, 그 흐름을 늦추고 싶지도 않았다. 하루하루가 내 괴로움을 더할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떠나기 이틀 전, 알리사가 나와 함께 버려진 이회토 구덩이의 벤치까지 갔을 때, 안개 없는 지평선까지 모든 것이 푸르스름하게 하나하나 또렷이 보이고 지난날의 가장 아련한 기억까지 또렷이 보이는 맑은 가을 저녁이었는데, 나는 탄식을 참지 못하고 오늘의 내 불행이 어떤 행복을 잃은 슬픔으로 이루어졌는지 보여 주었다.
"하지만 친구야, 그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어?" 그녀가 곧바로 말했다. "너는 유령을 사랑하고 있는 거야."
"아니, 유령이 아니야, 알리사."
"상상 속의 얼굴이지."
"아아, 내가 지어내는 게 아니야. 그녀는 나의 연인이었어. 나는 그녀를 불러. 알리사! 알리사! 당신이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었어요.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한 거예요?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 되게 한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꽃잎 하나를 천천히 뜯으며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말했다.
"제롬, 그냥 나를 덜 사랑한다고 털어놓으면 안 돼?"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사실이 아니니까." 나는 분개해서 외쳤다. "나는 너를 이보다 더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
"너는 나를 사랑해……. 그러면서 나를 그리워해!" 그녀가 웃으려고 애쓰며 어깨를 조금 으쓱했다.
"나는 내 사랑을 과거형으로 둘 수 없어."
땅이 내 발밑에서 꺼지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든 매달렸다…….
"다른 모든 것과 함께 그것도 지나가야 할 거야."
"그런 사랑은 나와 함께가 아니면 지나가지 않을 거야."
"천천히 약해질 거야. 네가 아직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알리사는 벌써 네 기억 속에만 있어. 네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만 기억하는 날이 올 거야."
"너는 마치 무엇이든 내 마음속에서 그녀를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아니면 내 마음이 사랑하기를 그쳐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너 자신도 나를 사랑했다는 걸 잊었어? 그래서 이렇게 나를 괴롭히며 즐길 수 있는 거야?"
그녀의 창백한 입술이 떨리는 게 보였다. 그녀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야. 아니야. 알리사 안에서 그건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거야."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더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마디면 다 설명될 텐데. 왜 그 말을 하지 못해?"
"무슨 말?"
"내가 늙었다는 말."
"그만해……."
나는 곧바로 나도 그녀만큼 늙었다고, 우리 사이의 나이 차이는 그대로라고 항의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마음을 다잡았다. 단 한 번뿐인 순간은 지나갔고, 따지는 데 휩쓸리면서 나는 모든 유리함을 내던졌다. 나는 발 디딜 곳을 잃었다.
이틀 뒤 나는 그녀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불만을 품은 채, 내가 아직도 「미덕」이라고 부르던 것에 대한 막연한 증오와, 늘 내 마음을 차지하던 것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서 퐁괴즈마르를 떠났다. 이번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리고 바로 내 사랑의 지나침 때문에, 나는 내 열정을 다 써 버린 것 같았다. 처음에는 반발했던 알리사의 말 하나하나가, 내 항변이 잠잠해진 뒤에도 내 안에 살아서 의기양양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 분명 그녀 말이 옳았다! 나는 이제 유령만을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아직도 사랑하는 알리사는 이제 없었다……. 그래! 분명 우리는 늙었다! 내 온 마음을 얼어붙게 하던 그 끔찍한 시정의 상실도 결국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간 것일 뿐이었다. 내가 천천히 그녀를 높이 들어 올렸다면, 그녀를 우상으로 만들어 내가 반한 모든 것으로 꾸몄다면, 내 수고에서 남은 것은 피로 말고 무엇이겠는가?…… 그녀 자신에게 맡겨지자마자 알리사는 제 높이로, 평범한 높이로 돌아왔다. 거기서 나도 나 자신을 다시 보았지만, 거기서는 더는 그녀를 바라지 않았다. 아! 오직 내 노력만으로 그녀를 올려놓은 그 높은 곳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려는, 미덕을 향한 그 진 빠지는 노력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허황하게 보이던지. 조금만 덜 오만했다면 우리 사랑은 쉬웠을 텐데……. 하지만 이제 대상 없는 사랑을 고집하는 게 무슨 뜻이 있을까. 그건 고집일 뿐, 더는 충실함이 아니었다. 무엇에 대한 충실함인가? 잘못에 대한 충실함이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나 자신에게 털어놓는 것이 가장 지혜롭지 않을까…….
그사이 나는 아테네 프랑스 학원에 추천되었고, 아무 야심도 흥미도 없이, 하지만 떠난다는 생각에 탈출이라도 하는 듯 미소 지으며 곧바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8장
그래도 나는 알리사를 한 번 더 보았다……. 삼 년 뒤, 여름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그보다 열 달 전에 나는 그녀를 통해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여행하던 팔레스타인에서 곧바로 그녀에게 꽤 긴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없었다…….
무슨 핑계였는지는 잊었지만 르아브르에 와 있던 나는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퐁괴즈마르에 이르렀다. 거기 가면 알리사를 만나리라는 건 알았지만 그녀 혼자가 아닐까 봐 걱정했다. 나는 간다고 알리지 않았다. 여느 손님처럼 찾아간다는 생각이 싫어서 나는 망설이며 걸었다. 들어갈까? 아니면 그녀를 보지도, 보려고 애쓰지도 않고 차라리 돌아갈까……. 그래, 그게 좋겠다. 가로수 길을 거닐기만 하고, 어쩌면 그녀가 아직도 와서 앉는 벤치에 앉아 보기만 하자……. 그러면서 나는 벌써 내가 떠난 뒤에 내가 다녀갔음을 그녀에게 알려 줄 무슨 표시를 남길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느린 걸음으로 걸었고, 그녀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로는 가슴을 조이던 조금 쓰라린 슬픔이 거의 달콤한 우울로 바뀌었다. 나는 벌써 가로수 길에 이르렀고, 들킬까 봐 농가 마당을 둘러싼 둑을 따라 길가 한쪽으로 걸었다. 나는 둑에서 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를 알고 있었다. 거기 올라가 보았다.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정원사가 길을 갈퀴질하다가 곧 내 눈에서 사라졌다. 새 울타리가 마당을 막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소리에 개가 짖었다. 더 가서 가로수 길이 끝나는 곳에서 나는 오른쪽으로 돌아 다시 정원 담을 만났고, 방금 지나온 가로수 길과 나란히 뻗은 너도밤나무 숲 쪽으로 가려는데, 채소밭의 작은 문 앞을 지나다가 갑자기 그리로 정원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안쪽 빗장은 그리 단단하지 않아서 어깨로 한 번 밀면 부서질 것 같았다……. 그 순간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담이 움푹 들어간 곳에 숨었다.
누가 정원에서 나오는지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알리사라는 걸 들었고, 느꼈다. 그녀는 세 걸음 앞으로 나와 힘없이 불렀다.
"제롬, 너야?……"
세차게 뛰던 내 심장이 멎었다. 조여든 목에서 말이 나오지 않자 그녀가 더 크게 다시 불렀다.
"제롬! 너야?"
그녀가 그렇게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 북받치는 감정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나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내가 여전히 대답하지 않자 알리사는 몇 걸음 앞으로 나와 담 모퉁이를 돌았고, 나는 갑자기 그녀가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곧바로 보는 게 두렵기라도 한 듯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내 곁에. 그녀는 잠시 나에게 몸을 숙이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가냘픈 손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왜 숨어 있었어?" 그녀가 말했다. 삼 년의 이별이 겨우 며칠이었던 것처럼 담담하게.
"어떻게 나인 줄 알았어?"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기다렸다고?" 나는 너무 놀라서 그녀의 말을 물음으로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무릎을 꿇은 채로 있자.
"벤치까지 가자." 그녀가 말했다. "그래, 너를 한 번은 더 보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 사흘 전부터 저녁마다 여기 와서 오늘 저녁처럼 너를 불렀어……. 왜 대답하지 않았어?"
"네가 나를 찾아내지 않았으면 너를 보지 않고 돌아갈 참이었어." 나는 처음에 나를 무너뜨렸던 감정에 맞서 몸을 굳히며 말했다. "그냥 르아브르에 들른 김에 가로수 길을 걷고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네가 아직도 와서 앉으리라 생각한 이회토 구덩이의 그 벤치에서 잠깐 쉬었다가, 그러고는……."
"사흘 저녁째 내가 여기 와서 뭘 읽는지 봐." 그녀가 내 말을 끊고 편지 한 묶음을 내밀었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그녀에게 쓴 편지들이었다. 그때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몰라볼 만큼 변해 있었다. 그 야윔, 그 창백함에 내 가슴이 끔찍하게 조여들었다. 그녀는 내 팔에 기대 몸무게를 싣고 무섭거나 춥기라도 한 듯 나에게 바짝 붙었다. 그녀는 아직 깊은 상복 차림이었고, 머리쓰개 삼아 얼굴을 감싼 검은 레이스가 창백함을 더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지금 퐁괴즈마르에 그녀 혼자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었다. 로베르가 함께 살고 있었다. 쥘리에트와 에두아르와 그들의 세 아이가 팔월을 그들 곁에서 보내러 왔었다……. 우리는 벤치에 이르러 앉았고, 이야기는 잠시 시시한 소식들을 따라 질질 끌렸다. 그녀가 내 일에 대해 물었다.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내 일이 이제 나에게 아무 흥미도 없다는 걸 그녀가 느끼기를 바랐다. 그녀가 나를 실망시켰듯이 나도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원망과 사랑으로 함께 가득 찬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메마르게 말하려 애썼고, 이따금 내 목소리를 떨리게 하는 감정이 원망스러웠다.
얼마 전부터 구름에 가려 있던 지는 해가 거의 우리 맞은편 지평선 바로 위에 다시 나타나, 텅 빈 들판을 떨리는 호사로 뒤덮고 우리 발밑에 열린 좁은 골짜기를 갑작스러운 풍요로 채웠다. 그러고는 사라졌다. 나는 눈이 부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황금빛 황홀이 아직도 나를 감싸고 내 안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 속에서 내 원망은 증발하고, 내 안에서는 사랑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 몸에 기대 숙이고 있던 알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블라우스에서 얇은 종이에 싼 작은 꾸러미를 꺼내 나에게 내밀려다가 머뭇거리는 듯 멈췄다. 내가 놀라서 바라보자.
"들어 봐, 제롬. 여기 있는 건 내 자수정 십자가야. 사흘 저녁째 이걸 가지고 나왔어. 오래전부터 너한테 주고 싶었거든."
"그걸 나더러 어쩌라고?" 나는 꽤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를 기억하며 간직해 줘. 네 딸을 위해."
"무슨 딸?" 나는 알리사를 알아듣지 못한 채 바라보며 외쳤다.
"부탁이야, 아주 차분하게 내 말을 들어 줘. 아니, 그렇게 보지 마. 나를 보지 마. 지금도 말하기가 무척 힘들어. 하지만 이건 꼭 말하고 싶어. 들어 봐, 제롬. 언젠가 너는 결혼하겠지?…… 아니, 대답하지 마. 말을 끊지 마, 부탁이야. 그저 내가 너를 무척 사랑했다는 걸 기억해 주면 좋겠어. 그리고……벌써 오래전부터……삼 년 전부터……네가 좋아하던 이 작은 십자가를 언젠가 네 딸이 나를 기억하며 걸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오! 누구를 기억하는지는 모르는 채로……. 그리고 어쩌면 그 애한테……내 이름을 붙여 줄 수도……."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멈췄다. 나는 거의 적의에 차서 외쳤다.
"왜 네가 직접 그 애한테 주지 않아?"
그녀는 다시 말하려고 애썼다. 흐느끼는 아이처럼 입술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눈빛의 놀라운 광채가 사람 같지 않은, 천사 같은 아름다움으로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알리사! 내가 누구와 결혼하겠어! 내가 너밖에 사랑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리고 갑자기 나는 그녀를 정신없이, 거의 거칠게 품에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한순간 그녀는 몸을 내맡긴 듯했고, 나는 그녀를 반쯤 뒤로 젖힌 채 안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는 눈꺼풀이 감겼고, 나에게는 무엇도 그 맞음과 가락을 따를 수 없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우리를 가엾게 여겨 줘, 친구야! 아! 우리 사랑을 망가뜨리지 마."
어쩌면 그녀는 비겁하게 굴지 마! 하고 덧붙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는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그녀를 두 팔로 감쌌다.
"그렇게 나를 사랑했다면 왜 늘 나를 밀어냈어? 봐! 나는 처음엔 쥘리에트가 결혼하기를 기다렸어. 너도 그 애가 행복해지기를 기다린다는 거 알았어. 그 애는 행복해. 네가 직접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오랫동안 나는 네가 아버지 곁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 우리 둘뿐이야."
"오! 지난 일은 아쉬워하지 말자." 그녀가 속삭였다. "이제 나는 그 장을 넘겼어."
"아직 늦지 않았어, 알리사."
"아니야, 친구야, 이제 늦었어. 사랑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보다 더 나은 것을 언뜻 본 그날부터 늦었어. 당신 덕분에, 친구야, 내 꿈은 너무 높이 올라가서 사람의 어떤 만족도 그것을 떨어뜨렸을 거야. 우리가 함께했다면 우리 삶이 어땠을까 자주 생각해 봤어. 그 삶이 더는 완전하지 않게 되는 순간, 나는 견딜 수 없었을 거야……우리 사랑을."
"우리가 서로 없이 살면 우리 삶이 어떨지는 생각해 봤어?"
"아니! 한 번도."
"이제 알겠지! 삼 년 동안 너 없이 나는 힘겹게 헤매고 있어……."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
"추워." 그녀는 일어서서 숄을 몸에 꽁꽁 둘렀다. 내가 다시 그녀의 팔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너 그 성경 구절 기억나?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잘 이해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던 구절.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음이라』……."
"아직도 그 말씀을 믿어?"
"믿어야 해."
우리는 더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나란히 걸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상상할 수 있어, 제롬? 더 좋은 것!"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그녀는 또 되뇌었다. "더 좋은 것!"
우리는 아까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았던 채소밭의 작은 문에 다시 이르렀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잘 있어!" 그녀가 말했다. "아니, 더 따라오지 마. 잘 있어, 사랑하는 내 친구. 이제부터 시작될 거야……더 좋은 것이."
한순간 그녀는 두 팔을 뻗어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나를 붙잡는 동시에 밀어내며,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문이 다시 닫히자마자, 그녀가 문 안쪽에서 빗장을 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더없이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그 문에 쓰러졌고, 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울며 흐느꼈다.
하지만 그녀를 붙잡는다는 것,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는 것, 어떻게든 집 안으로, 그래 봐야 나에게 닫혀 있지도 않았을 그 집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니, 이 모든 지난날을 다시 살려고 되돌아가는 오늘도……아니, 나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금까지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견딜 수 없는 불안 때문에 며칠 뒤 나는 쥘리에트에게 편지를 썼다. 퐁괴즈마르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알리사의 창백함과 야윔이 얼마나 걱정되는지 말했다. 그녀를 잘 살펴 달라고, 알리사 자신에게서는 더는 기대할 수 없는 소식을 전해 달라고 간청했다.
한 달도 안 되어 이 편지를 받았다.
「아주 슬픈 소식을 전해야 해. 가엾은 알리사가 세상을 떠났어……. 아아! 네 편지에 적힌 걱정은 너무나 옳았어. 몇 달 전부터 딱히 아픈 건 아니었지만 언니는 시들어 가고 있었어. 그래도 내가 애원하니까 르아브르의 A. 박사한테 진찰을 받겠다고 했고, 박사는 나한테 대단한 건 아니라고 편지했어. 그런데 네가 다녀가고 사흘 뒤 언니가 갑자기 퐁괴즈마르를 떠났어. 나는 로베르의 편지로 언니가 떠난 걸 알았어. 언니는 나한테 편지를 워낙 드물게 해서, 로베르가 아니었으면 언니가 그렇게 떠나 버린 걸 까맣게 몰랐을 거야. 언니가 연락이 없어도 금방 걱정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언니를 그렇게 떠나게 두고 파리까지 따라가지 않았다고 로베르를 몹시 나무랐어. 믿겠어? 그때부터 우리는 언니 주소도 모르고 지냈어. 내가 얼마나 애가 탔을지 짐작하겠지. 만날 수도 없고 편지할 수조차 없었으니. 로베르가 며칠 뒤에 파리에 가긴 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어. 워낙 굼뜬 애라 우리는 그 애가 정말 애썼는지 의심했어. 경찰에 알려야 했어. 그렇게 지독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에두아르가 떠났고,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알리사가 숨어든 작은 요양원을 찾아냈어. 아아! 너무 늦었어. 언니가 죽었다는 요양원 원장의 편지와, 언니를 다시 보지도 못한 에두아르의 전보를 동시에 받았어. 마지막 날 언니는 우리가 연락받을 수 있게 봉투에 우리 주소를 써 두었고, 다른 봉투에는 르아브르의 우리 공증인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넣어 두었어. 유언이 담긴 편지야. 그 편지의 한 대목이 너와 관련 있는 것 같아. 곧 알려 줄게. 에두아르와 로베르는 그저께 있었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어. 관을 따라간 건 둘만이 아니었어. 요양원 환자 몇이 꼭 장례식에 나와 묘지까지 시신을 따라가겠다고 했대. 나는 오늘내일 다섯째 아이를 낳을 참이라 안타깝게도 갈 수가 없었어.
제롬, 이 죽음이 너를 얼마나 깊이 슬프게 할지 알아. 나도 찢어지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 이틀 전부터 자리보전을 하고 있어서 글을 쓰기가 힘들어. 하지만 다른 누구에게도, 에두아르나 로베르에게조차 우리 둘만이 알았을 언니 이야기를 너한테 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이제 나도 늙은 엄마가 다 됐고, 뜨거웠던 과거 위로 재가 많이 덮였으니 너를 다시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있어. 언젠가 일이나 놀러 갈 일로 님 쪽에 오게 되면 에그비브까지 와 줘. 에두아르도 너를 알게 되면 기뻐할 거고, 우리 둘이 알리사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야. 잘 있어, 제롬. 아주 슬프게 너를 안아.」
며칠 뒤 나는 알리사가 퐁괴즈마르를 동생에게 남기고, 자기 방의 물건 모두와 자기가 지정한 가구 몇 점은 쥘리에트에게 보내 달라고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녀가 내 이름으로 봉해 둔 서류를 곧 받게 되어 있었다. 또 그녀가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 받기를 거절한 그 작은 자수정 십자가를 자기 목에 걸어 달라고 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에두아르를 통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공증인이 보내 준 봉투에는 알리사의 일기가 들어 있었다. 여기 그 가운데 여러 쪽을 옮겨 적는다. 아무 덧붙임 없이 옮겨 적는다. 그것을 읽으며 내가 한 생각들과, 내가 너무도 불완전하게밖에 그려 낼 수 없을 내 마음의 뒤흔들림은 여러분이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알리사의 일기
에그비브.
그저께 르아브르를 떠났다. 어제 님에 닿았다. 나의 첫 여행! 살림도 부엌일도 걱정할 게 없어서 생긴 가벼운 한가함 속에서, 188…년 5월 23일, 스물다섯 번째 생일인 오늘 나는 일기를 시작한다. 큰 재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조금은 말동무 삼으려고.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외롭다고 느낀다. 다른, 거의 낯선 땅, 아직 사귀지 못한 땅에서. 이 땅이 나에게 할 말은 아마 노르망디가 들려주던 것, 내가 퐁괴즈마르에서 지치지 않고 듣던 것과 같으리라. 하느님은 어디서도 당신 자신과 다르지 않으시니까. 하지만 이 남쪽 땅은 내가 아직 배우지 못한 말로 이야기하고, 나는 그것을 놀라며 듣는다.
5월 24일.
쥘리에트가 내 곁의 긴 의자에서 졸고 있다. 이 이탈리아식 집의 매력인, 정원에 이어진 모래 깔린 마당과 같은 높이의 트인 회랑에서……. 쥘리에트는 긴 의자를 떠나지 않고도 잔디밭이 물결치며 연못까지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연못에서는 알록달록한 오리 떼가 노닐고 백조 두 마리가 떠다닌다. 어떤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개울이 연못에 물을 대고, 정원을 가로질러 달아난다. 정원은 갈수록 거친 숲이 되어 메마른 덤불 들판과 포도밭 사이에 점점 좁게 끼이다가 이윽고 완전히 막혀 버린다.
……어제 에두아르 테시에르가 아빠에게 정원과 농장과 술 곳간과 포도밭을 구경시키는 동안 나는 쥘리에트 곁에 있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아주 일찍 혼자서 처음으로 공원을 둘러보는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이름을 알고 싶은 낯선 풀과 나무가 많았다. 점심때 이름을 물어보려고 하나하나에서 잔가지를 꺾는다. 그 가운데 제롬이 보르게세 별장이나 도리아팜필리 별장에서 감탄하던 털가시나무를 알아본다……. 우리 북쪽 나무들과 아주 먼 친척인, 그토록 다른 얼굴의 나무들. 그 나무들은 공원 거의 끝에서 좁고 신비로운 빈터를 감싸고, 발에 부드러운 풀밭 위로 몸을 기울여 요정들의 합창을 부르는 것 같다. 퐁괴즈마르에서는 그토록 깊이 그리스도교적이던 나의 자연에 대한 느낌이 여기서는 나도 모르게 조금 신화적이 되어 가는 것에 나는 놀라고, 거의 겁이 난다. 그래도 점점 더 나를 짓누르던 그 두려움 같은 것은 여전히 경건한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기 숲이 있다(hic nemus). 공기는 수정처럼 맑았고 이상한 고요가 감돌았다. 오르페우스를, 아르미드를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새 한 마리의 노래가, 오직 하나뿐인 노래가 내 바로 곁에서 일어났다. 어찌나 애절하고 맑던지 온 자연이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가슴이 몹시 뛰었다. 나는 잠시 나무에 기대 서 있다가 아직 아무도 일어나기 전에 돌아왔다.
5월 26일.
여전히 제롬에게서 편지가 없다. 르아브르로 편지를 했더라도 여기로 보내졌을 텐데……. 이 불안은 이 공책에만 털어놓을 수 있다. 어제 레보에 다녀온 것도, 책 읽기도, 기도도, 사흘째 한순간도 나를 이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 다른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에그비브에 온 뒤로 나를 괴롭히는 그 이상한 우울도 어쩌면 다른 까닭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내 안 아주 깊은 곳에서 느끼기에, 이제는 그것이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고 내가 자랑스러워하던 기쁨은 그것을 덮고 있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5월 27일.
왜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까? 내가 쥘리에트의 행복을 기뻐하는 건 머리로 따져서다. 내 행복을 바치겠다고 할 만큼 그토록 바랐던 그 행복을, 그 애가 힘들이지 않고 얻은 것을, 그리고 그 애와 내가 그러리라 상상했던 것과 다른 것을 보고 나는 괴로워한다. 얼마나 복잡한가! 그래……. 끔찍하게 되살아난 이기심이, 그 애가 나의 희생이 아닌 다른 데서 행복을 찾았다는 것에, 행복해지는 데 나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에 상처 입었다는 걸 나는 똑똑히 알아본다.
그리고 제롬의 침묵이 나를 얼마나 불안하게 하는지 느끼며 이제 나는 묻는다. 그 희생이 정말로 내 마음속에서 이루어졌던가? 하느님께서 더는 그것을 나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마치 굴욕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나는 그럴 능력이 없었던 걸까?
5월 28일.
내 슬픔을 이렇게 파헤치는 건 얼마나 위험한가! 나는 벌써 이 공책에 정이 들어 간다. 이겨 냈다고 믿었던 겉치레가 여기서 다시 고개를 드는 걸까? 아니다. 이 일기가 내 영혼이 몸단장을 하는 비위 맞추는 거울이 되지 않기를! 내가 쓰는 건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한가해서가 아니라 슬퍼서다. 슬픔은 죄의 상태다. 내가 더는 알지 못했던, 내가 미워하는, 내 영혼에서 풀어 버리고 싶은 상태. 이 공책은 내 안에서 행복을 되찾도록 나를 도와야 한다.
슬픔은 꼬임이다. 나는 내 행복을 파헤치려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퐁괴즈마르에서도 나는 혼자였다. 더 혼자였다……. 그런데 왜 그걸 느끼지 못했을까? 그리고 제롬이 이탈리아에서 편지할 때 나는 그가 나 없이 보고 나 없이 사는 걸 받아들였다. 생각으로 그를 따라가며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지금은 나도 모르게 그를 부른다. 그가 없으니 내가 보는 새것은 모두 귀찮다…….
6월 10일.
겨우 시작한 일기가 오래 끊겼다. 어린 리즈가 태어났다. 쥘리에트 곁에서 긴 밤을 새웠다. 제롬에게 쓸 수 있는 건 여기 쓰는 게 하나도 즐겁지 않다.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지닌 그 견딜 수 없는 흠, 너무 많이 쓰는 버릇을 멀리하고 싶다. 이 공책을 나를 다듬는 도구로 여길 것.
(그 뒤로 책을 읽으며 적은 메모와 옮겨 적은 대목 따위가 몇 쪽 이어졌다. 그러고는 다시 퐁괴즈마르에서 쓴 날짜가 붙어 있었다.)
7월 16일.
쥘리에트는 행복하다. 그 애가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보인다. 나에게는 그걸 의심할 권리도 까닭도 없다……. 그런데 그 애 곁에 있으면 왜 지금 이런 불만족과 거북함이 드는 걸까? 어쩌면 그토록 실용적이고, 그토록 쉽게 얻은, 그토록 완벽하게 「몸에 맞춘」 그 행복이 영혼을 옥죄고 숨 막히게 하는 것 같아서일까…….
그리고 이제 나는 묻는다. 내가 바라는 것이 정말 행복인지, 아니면 오히려 행복을 향해 가는 길인지. 오, 주님! 너무 빨리 닿을 수 있는 행복에서 저를 지켜 주소서! 제 행복을 미루는 법을, 당신에게까지 물리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그다음 많은 장이 뜯겨 나가 있었다. 아마 르아브르에서의 괴로운 재회를 적은 것이었으리라. 일기는 이듬해에야 다시 이어졌다. 날짜는 없지만 틀림없이 내가 퐁괴즈마르에 머물던 때 쓴 장들이었다.)
이따금 그가 말하는 걸 들으면 내가 생각하는 걸 바라보는 것 같다. 그는 나를 나 자신에게 설명해 주고 드러내 준다. 그가 없으면 내가 있을까? 나는 그와 함께일 때만 있다…….
이따금 나는 내가 그에게 느끼는 것이 정말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망설인다. 흔히 그려지는 사랑의 모습은 내가 그리고 싶은 모습과 그토록 다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 줄도 모르고 그를 사랑하고 싶다. 무엇보다 그가 모르게 그를 사랑하고 싶다.
그 없이 살아야 하는 모든 것 가운데 이제 나에게 기쁨이 되는 건 하나도 없다. 내 모든 미덕은 오직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한 것인데, 그의 곁에서는 내 미덕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피아노 공부를 좋아했다. 날마다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그것이 외국어로 된 책을 읽을 때 내가 느끼는 즐거움의 비밀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외국어도 우리말보다 좋아해서가 아니고, 내가 감탄하는 우리 작가들이 외국 작가들보다 못해 보여서도 아니다. 다만 뜻과 감동을 좇는 데 따르는 가벼운 어려움, 그리고 그것을 이겨 내고 점점 더 잘 이겨 내는 데서 오는 어렴풋한 자부심이, 정신의 즐거움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영혼의 만족을 보태 주고, 나는 그것 없이는 지낼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복된 상태라도 나아짐이 없는 상태는 바랄 수 없다. 나는 하늘의 기쁨을 하느님 안에 녹아드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끊임없이 가까워지는 것으로 그려 본다……. 말장난이 될까 두렵지 않다면, 나아가지 않는 기쁨은 하찮게 여기겠다고 말하리라.
오늘 아침 우리 둘은 가로수 길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나에게 내세를 믿느냐고 물었다.
"아니, 제롬," 나는 곧바로 외쳤다. "그건 나한테 희망 이상이야. 확신이야……."
그런데 갑자기 내 믿음이 모두 이 외침 속으로 쏟아져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알고 싶어." 그가 덧붙였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믿음이 없다면 너는 다르게 행동할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친구야, 너도 너도 모르게, 더없이 뜨거운 믿음으로 움직이는 사람과 다르게 행동할 수는 없어. 그리고 다른 너라면 나는 사랑하지 않을 거야."
아니야, 제롬, 아니야. 우리의 미덕이 애써 향하는 건 앞날의 보상이 아니야. 우리 사랑이 찾는 것도 보상이 아니야. 수고의 대가라는 생각은 잘 태어난 영혼에게는 모욕이야. 그런 영혼에게 미덕은 장신구도 아니야. 아니, 그건 그 아름다움의 형태야.
아빠가 다시 덜 좋으시다. 대단한 건 아니기를 바라지만, 사흘 전부터 다시 우유만 드셔야 했다.
어젯밤 제롬이 막 자기 방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나와 함께 늦게까지 앉아 계시던 아빠가 잠시 나를 혼자 두셨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니, 왜인지 모르겠지만 거의 그러지 않는데 몸을 눕히고 있었다. 갓이 내 눈과 윗몸을 불빛에서 가려 주었다. 나는 옷자락 밖으로 조금 나와 램프 불빛이 비치는 발끝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오셔서 잠시 문 앞에 서서 웃는 듯 슬픈 듯 이상하게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왠지 부끄러워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빠가 손짓하셨다.
"이리 와서 내 곁에 앉아라." 아빠가 말씀하셨다. 그리고 벌써 늦었는데도 엄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두 분이 헤어진 뒤로 한 번도 하지 않으신 일이었다. 엄마와 어떻게 결혼했는지,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처음에 엄마가 자기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셨다.
"아빠," 마침내 나는 말했다. "왜 오늘 저녁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말해 주세요. 무엇 때문에 하필 오늘 저녁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아까 거실에 들어왔을 때, 네가 그렇게 소파에 누워 있는 걸 보고 한순간 네 엄마를 다시 본 것 같아서다."
내가 이렇게 다그친 건 바로 그날 저녁……. 제롬이 내 안락의자에 기대 서서 나에게 몸을 숙이고 내 어깨 너머로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숨결과, 그 몸의 온기와 떨림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계속 읽는 척했지만 더는 이해하지 못했다. 줄조차 가려 볼 수 없었다. 어찌나 이상한 동요가 나를 사로잡았던지 아직 그럴 수 있을 때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나야 했다. 다행히 그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잠시 방을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 뒤 거실에 혼자 남아 아빠가 내가 엄마를 닮았다고 하신 그 소파에 누웠을 때, 바로 그때 나는 엄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간밤엔 잠을 몹시 설쳤다. 불안하고, 숨 막히고, 비참하고, 회한처럼 내 안에 다시 올라오는 지난날의 기억에 시달리며.
주님, 악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쳐 주소서.
가엾은 제롬! 이따금 몸짓 하나면 된다는 걸, 이따금 내가 그 몸짓을 기다린다는 걸 그가 안다면…….
어렸을 때도 나는 그 때문에 예뻐지고 싶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나는 오직 그를 위해서만 「완전함을 향해 애썼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완전함에는 그 없이만 닿을 수 있다니, 오 하느님! 당신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그것이 내 영혼을 가장 당황하게 합니다.
미덕이 사랑과 하나인 영혼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따금 나는 사랑하는 것,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점점 더 사랑하는 것 말고 다른 미덕이 있는지 의심한다……. 그런데 어떤 날에는, 아아! 미덕이 사랑에 맞서 버티는 것으로만 보인다. 아니 어떻게! 내 마음의 가장 자연스러운 끌림을 감히 미덕이라고 부르다니! 오, 매혹적인 궤변이여! 그럴듯한 부름이여! 행복의 짓궂은 신기루여!
오늘 아침 라브뤼예르에서 이런 글을 읽는다.
「살다 보면 이따금 우리에게 금지된 아주 소중한 즐거움과 아주 다정한 인연이 있어서, 적어도 그것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토록 큰 매혹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미덕을 위해 그것을 단념할 줄 아는 매혹뿐이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서 금지를 지어냈을까? 사랑의 매혹보다 더 강하고 더 감미로운 매혹이 남몰래 나를 끄는 걸까? 오! 사랑의 힘으로 우리 두 영혼을 함께 사랑 너머로 이끌 수 있다면!……
아아! 이제는 너무 잘 알겠다. 하느님과 그 사이에는 나 말고 다른 걸림돌이 없다. 그의 말대로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처음에는 그를 하느님 쪽으로 기울게 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 사랑이 그를 가로막는다. 그는 나에게 머물고, 나를 더 좋아하고, 나는 그가 미덕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게 붙잡는 우상이 된다. 우리 둘 가운데 하나는 거기 닿아야 한다. 비겁한 내 마음속에서 내 사랑을 이겨 낼 가망이 없으니, 하느님, 그가 나를 더는 사랑하지 않도록 가르칠 힘을 저에게 허락해 주소서. 그리하여 제 공덕 대신, 그보다 한없이 나은 그의 공덕을 당신께 바치게 해 주소서……. 그리고 오늘 제 영혼이 그를 잃는 것에 흐느낀다면, 그것은 나중에 당신 안에서 그를 다시 찾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말씀해 주소서, 오 하느님! 어떤 영혼이 그보다 더 당신께 걸맞았습니까?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가 나에게서 멈춰야 한다면 내가 그를 이만큼 사랑할까요? 영웅적일 수 있는 모든 것이 행복 속에서는 얼마나 좁아지는지!……
일요일.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음이라.」
5월 3일 월요일.
행복이 거기,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 그것이 다가온다는 것……. 손만 뻗으면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
오늘 아침 그와 이야기하면서 나는 희생을 마쳤다.
월요일 저녁.
그는 내일 떠난다…….
사랑하는 제롬, 나는 여전히 끝없는 다정함으로 너를 사랑해. 하지만 다시는 그 말을 할 수 없을 거야. 내 눈에, 내 입술에, 내 영혼에 지우는 억제가 너무 혹독해서, 너를 떠나는 것이 나에게는 해방이자 쓰라린 만족이야.
나는 이성에 따라 행동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행동하는 순간이 오면, 나를 행동하게 하던 이유들이 빠져나가거나 미친 소리처럼 보인다. 더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를 피하게 하는 이유들? 더는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피한다. 슬퍼하며, 왜 그를 피하는지도 모른 채.
주님! 제롬과 제가 함께, 서로를 통해 당신께 나아가기를. 순례자 둘처럼 평생을 걸어가며, 하나가 이따금 다른 하나에게 「형제여, 지쳤거든 나에게 기대라」 하면, 다른 하나가 「네가 곁에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충분해……」 하고 대답하기를. 그런데 아닙니다! 주님, 당신께서 가르치시는 길은 좁은 길, 둘이 나란히 걸을 수 없을 만큼 좁은 길입니다.
7월 4일.
이 공책을 다시 펼치지 않은 지 여섯 주가 넘었다. 지난달 몇 쪽을 다시 읽다가 거기서 잘 쓰려는 터무니없는, 죄스러운 마음을 들켰다……. 그것도 그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 없이 지내는 걸 도우려고 시작한 이 공책에서 마치 그에게 계속 편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잘 썼다 싶은 쪽은 모두 찢었다(무슨 뜻인지는 나도 안다). 그의 이야기가 나오는 쪽을 모두 찢었어야 했다. 다 찢었어야 했다……. 그럴 수 없었다.
그 몇 쪽을 뜯어낸 것만으로도 나는 벌써 조금 우쭐했다……. 내 마음이 그토록 아프지 않다면 비웃었을 우쭐함이었다.
정말이지 마치 내가 무슨 공을 세운 것 같았고, 내가 없앤 것이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7월 6일.
내 서가에서 내쫓아야 했다…….
이 책에서 저 책으로 나는 그를 피하고 다시 만난다. 그 없이 내가 찾아낸 쪽마저도 그가 읽어 주는 목소리가 아직 들린다. 나는 그가 관심을 두는 것에만 마음이 가고, 내 생각은 그의 생각을 닮아 버려서, 둘을 섞으며 즐거워할 수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둘을 가려낼 수 없다.
이따금 그의 문장 가락에서 벗어나려고 일부러 못 쓰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와 싸우는 것도 여전히 그에게 마음을 쓰는 것이다. 한동안 성경(어쩌면 『그리스도를 본받아』도)만 읽고, 이 수첩에는 날마다 읽은 것 가운데 마음에 남은 구절만 적기로 마음먹는다.
(그다음에는 일종의 「일용할 양식」이 이어졌다. 7월 1일부터 하루하루의 날짜에 성경 구절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여기서는 무슨 덧붙임이 함께 있는 것만 옮겨 적는다.)
7월 20일.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내가 오직 제롬만을 위해 쓰는 이 마음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동시에 그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닐까……. 주님, 저에게 그 용기를 주소서.
7월 24일.
『내면의 위안』을 그만 읽었다. 그 옛말이 무척 재미있었지만 마음을 흩뜨렸고, 거기서 맛보는 거의 이교도 같은 즐거움은 내가 거기서 얻으려던 마음의 깨우침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다시 들었다. 그것도 알아듣는 게 너무 자랑스러운 라틴어 원문이 아니라. 내가 읽는 번역본에 옮긴이 이름조차 없는 게 좋다. 개신교 번역이긴 하지만 제목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교 교파에 맞춘」 것이다.
「오! 네가 미덕에서 나아감으로써 얼마나 큰 평화를 얻고 남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줄지 안다면, 나는 네가 더 정성껏 거기 힘쓰리라 확신한다.」
8월 10일.
하느님, 제가 어린아이의 믿음이 솟구치듯, 천사들의 사람 같지 않은 목소리로 당신께 부르짖을 때…….
이 모든 것이 제롬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온다는 걸 저는 압니다.
그런데 왜 당신과 저 사이 어디에나 그의 모습을 놓으십니까?
8월 14일.
이 일을 끝마치기까지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오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
8월 20일.
나는 똑똑히 느낀다. 내 슬픔으로 느낀다. 희생이 내 마음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하느님, 오직 그만이 알게 해 주던 그 기쁨을 오직 당신께만 빚지게 해 주소서.
8월 28일.
내가 이른 미덕은 얼마나 초라하고 슬픈가!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이 바라는 걸까? 더는 괴로워하지 말 것.
얼마나 비겁하면 늘 하느님께 힘을 구걸할까! 이제 내 기도는 모두 하소연이다.
8월 29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이토록 단순한 말씀이 오늘 아침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는 슬픔에 나를 빠뜨렸다. 들판으로 나갔다. 나도 모르게 끝없이 되뇌던 이 말씀이 내 가슴과 눈을 눈물로 채웠다. 쟁기에 몸을 숙인 농부가 힘겹게 일하는 텅 빈 넓은 들판을 바라보았다……. 「들의 백합화……」 그런데 주님, 그 꽃들은 어디 있습니까?……
9월 16일, 밤 10시.
그를 다시 보았다. 그가 여기, 이 지붕 아래 있다. 그의 창에서 비치는 불빛이 잔디 위에 보인다. 내가 이 줄을 쓰는 동안 그는 깨어 있다. 어쩌면 나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나도 그렇게 느낀다. 그의 사랑이 나를 버리도록, 내가 되기로 마음먹은 모습으로 그에게 나를 보일 수 있을까…….
9월 24일.
오! 끔찍한 대화. 마음이 내 안에서 까무러칠 듯한데 나는 무관심과 쌀쌀함을 꾸밀 줄 알았다……. 지금까지 나는 그를 피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오늘 아침에는 하느님께서 이겨 낼 힘을 주시리라고, 늘 싸움에서 몸을 빼는 것은 비겁함 없이는 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었다. 내가 이겼을까? 제롬이 나를 조금 덜 사랑할까?…… 아아! 그것을 나는 바라고, 동시에 두려워한다……. 나는 그를 이보다 더 사랑한 적이 없다.
주님, 그를 저에게서 구하시려고 제가 망가져야 한다면, 그렇게 하소서!……
「제 마음과 영혼에 들어오시어 제 고통을 짊어지시고, 당신의 수난에서 아직 남은 고통을 제 안에서 계속 견디소서.」
우리는 파스칼 이야기를 했다…….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얼마나 부끄럽고 터무니없는 말이었던가! 말하면서도 이미 괴로웠지만, 오늘 저녁 나는 그것을 불경한 말처럼 뉘우친다. 『팡세』의 무거운 책을 다시 들었더니 저절로 로아네즈 양에게 보낸 편지의 이 대목이 펼쳐졌다.
「끌고 가는 이를 스스로 따라갈 때는 자기를 묶은 끈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버티기 시작하여 멀어지며 걸으면 몹시 괴롭다.」
이 말이 너무나 바로 나를 건드려서 계속 읽을 힘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곳을 펼치자, 내가 몰랐던 놀라운 대목이 나왔고, 나는 방금 그것을 옮겨 적었다.
(일기의 첫 공책은 여기서 끝났다. 다음 공책은 아마 없애 버린 것이리라. 알리사가 남긴 서류에서 일기는 삼 년 뒤에야, 역시 퐁괴즈마르에서, 구월에,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나기 얼마 전에야 다시 이어졌으니까.)
(다음 문장들이 이 마지막 공책의 첫머리다.)
9월 17일.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려면 제게 그가 필요하다는 걸 당신은 잘 아십니다.
9월 20일.
하느님, 그를 제게 주소서. 그러면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하느님, 그를 한 번만 다시 보게 해 주소서.
하느님,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제 사랑이 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소서. 남은 삶은 오직 당신께만 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이 비루한 기도를 용서하소서. 하지만 저는 그의 이름을 입술에서 떼어 놓을 수도, 제 마음의 아픔을 잊을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이 괴로움 속에 저를 버리지 마소서.
9월 21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주님! 당신의 이름으로는 감히…….
하지만 제가 기도를 말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께서 제 마음의 미칠 듯한 바람을 덜 아시겠습니까?
9월 27일.
아침부터 크나큰 고요. 밤을 거의 꼬박 묵상과 기도로 보냈다. 갑자기 어린 시절 내가 성령을 상상하던 모습 같은, 빛나는 평화 같은 것이 나를 감싸고 내 안에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 기쁨이 신경이 들뜬 탓일까 봐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 지복이 떠나지 않은 채 꽤 빨리 잠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것은 온전히 거기 있다. 이제 나는 그가 오리라고 확신한다.
9월 30일.
제롬! 친구야, 아직도 오빠라고 부르지만 오빠보다 한없이 더 사랑하는 너……. 너도밤나무 숲에서 네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는지!…… 저녁마다 해 질 녘이면 채소밭의 작은 문으로 나가 벌써 어두운 가로수 길을 내려간다……. 네가 갑자기 대답한다면, 내 눈길이 서둘러 돌아보던 돌투성이 둑 뒤에서 네가 나타난다면, 아니면 멀리 벤치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네가 보인다면, 내 가슴은 놀라 뛰지도 않을 거야……. 오히려 네가 보이지 않는 게 놀라워.
10월 1일.
아직 아무것도 없다. 해가 비할 데 없이 맑은 하늘로 졌다. 나는 기다린다. 머지않아 이 벤치에 그와 함께 앉게 되리라는 걸 안다……. 벌써 그의 말소리가 들린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듣는 게 얼마나 좋은지……. 그가 여기 있으리라!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으리라.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리라. 그의 곁에서 숨 쉬리라……. 어제 벌써 다시 읽으려고 그의 편지 몇 통을 가지고 나갔다. 하지만 그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좋아하던 자수정 십자가도 몸에 지니고 나갔다. 지난 어느 여름, 그가 떠나기를 바라지 않던 동안 저녁마다 걸던 그 십자가.
그 십자가를 그에게 주고 싶다. 오래전부터 이런 꿈을 꾸었다. 그는 결혼하고, 나는 그의 첫딸, 어린 알리사의 대모가 되어, 그 아이에게 이 장신구를 주는 꿈……. 왜 그에게 그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했을까?
10월 2일.
오늘 내 영혼은 하늘에 둥지를 튼 새처럼 가볍고 즐겁다. 그는 오늘 온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안다. 모두에게 외치고 싶다. 여기 써야만 한다. 이제 기쁨을 숨길 수가 없다. 늘 딴 데 정신이 팔려 있고 나에게 무심한 로베르조차 그걸 알아챘다. 그 애가 묻는 바람에 당황해서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저녁까지 어떻게 기다릴까?……
무슨 투명한 띠 같은 것이 어디서나 그의 모습을 크게 보여 주고, 사랑의 모든 빛살을 내 가슴의 단 한 점에 모아 불타게 한다.
오! 기다림은 얼마나 나를 지치게 하는지!……
주님! 행복의 넓은 문짝을 제 앞에 잠시만 빠끔히 열어 주소서!
10월 3일.
모든 것이 꺼졌다. 아아! 그는 그림자처럼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그가 여기 있었다! 여기 있었다! 아직도 그가 느껴진다. 나는 그를 부른다. 내 손이, 내 입술이 어둠 속에서 헛되이 그를 찾는다…….
기도할 수도 잠들 수도 없다. 나는 다시 어두운 정원으로 나갔다. 내 방에서도, 집 어디에서도 무서웠다. 괴로움에 이끌려 그를 두고 들어온 그 문까지 다시 갔다. 미친 희망을 품고 그 문을 다시 열었다. 그가 돌아와 있다면! 불러 보았다. 어둠 속을 더듬었다. 그에게 편지를 쓰려고 돌아왔다. 이 상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무슨 짓을 했던가? 그의 앞에서 왜 늘 내 미덕을 부풀려야 했을까? 내 온 마음이 부인하는 미덕이 무슨 값어치가 있을까. 하느님께서 내 입술에 주시는 말에 나는 남몰래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내 가슴을 부풀게 하던 것은 하나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제롬! 제롬, 그 곁에서는 내 가슴이 찢기고 그에게서 멀어지면 내가 죽는 괴로운 내 친구야, 아까 내가 한 말 가운데 내 사랑을 이야기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듣지 마.
편지를 찢었다. 그러고는 다시 썼다……. 새벽이다. 잿빛이고, 눈물에 젖어, 내 생각만큼 슬프다……. 농장의 첫 소리가 들리고, 잠들어 있던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난다……. 「이제 일어나라. 때가 왔다……」
내 편지는 부쳐지지 않을 것이다.
10월 5일.
나를 빼앗아 가신 질투하시는 하느님, 그렇다면 제 마음을 차지하소서. 이제 모든 온기가 거기서 떠나고 무엇도 더는 마음을 끌지 못할 것입니다. 저 자신의 이 서글픈 나머지를 이겨 내도록 도와주소서. 이 집이, 이 정원이 견딜 수 없이 제 사랑을 북돋웁니다. 오직 당신만 보게 될 곳으로 달아나고 싶습니다.
제가 가졌던 재산을 당신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도록 도와주소서. 쉽게 팔 수 없는 퐁괴즈마르는 로베르에게 주게 해 주소서. 유언장을 쓰긴 했지만 필요한 절차는 거의 모릅니다. 어제는 공증인이 제가 내린 결정을 눈치채고 쥘리에트나 로베르에게 알릴까 봐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파리에서 마저 하겠습니다.
10월 10일.
여기 도착했을 때 너무 지쳐서 처음 이틀은 누워 있어야 했다. 내 뜻과 상관없이 불려 온 의사는 꼭 필요하다며 수술 이야기를 한다. 반대해 봐야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나는 그 수술이 무섭고 「기운을 좀 차린 뒤」 받고 싶다고 쉽게 믿게 했다.
이름도 주소도 숨길 수 있었다. 요양원 사무실에 돈을 넉넉히 맡겨 두었다. 나를 받아 주고, 하느님께서 아직 필요하다고 보시는 만큼 머물게 해 주는 데 어려움이 없을 만큼.
이 방이 마음에 든다. 티 없이 깨끗한 것만으로도 벽이 충분히 꾸며진다. 내가 거의 즐겁다고 느끼는 데 놀랐다. 이제 삶에서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느님으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고, 그분의 사랑은 우리 안의 모든 자리를 차지할 때에만 더없이 감미롭기 때문이다…….
성경 말고는 아무 책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거기서 읽는 말씀보다 더 크게 파스칼의 이 미칠 듯한 흐느낌이 내 안에서 울린다.
「하느님이 아닌 것은 모두 내 기다림을 채울 수 없다.」
오, 경솔한 내 마음이 바라던 너무나 인간적인 기쁨이여……. 주님! 이 외침을 얻어 내시려고 저를 절망하게 하셨습니까?
10월 12일.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제 안에 오게 하소서. 오직 당신만이 저를 다스리시도록, 저를 온전히 다스리시도록. 이제 당신과 제 마음을 흥정하지 않겠습니다.
아주 늙은 것처럼 지쳤는데도 내 영혼은 이상하게 어린아이 같다. 나는 아직도 방 안이 다 정돈되고 벗은 옷이 머리맡에 잘 개켜져 있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던 그 어린 소녀다…….
그렇게 죽을 채비를 하고 싶다.
10월 13일.
일기를 없애기 전에 다시 읽었다. 「제 마음의 동요를 남에게 퍼뜨리는 것은 큰마음에 걸맞지 않다.」 이 아름다운 말은 클로틸드 드 보의 말인 것 같다.
이 일기를 불에 던지려는 순간, 무슨 경고 같은 것이 나를 붙잡았다. 이것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것을 제롬에게서 빼앗을 권리가 나에게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오직 그를 위해서만 이것을 썼던 것 같았다. 내 불안과 의심이 오늘은 너무 하찮아 보여서, 거기 무슨 중요성을 둘 수도, 제롬이 그것 때문에 흔들릴 수 있다고 믿을 수도 없다. 하느님, 내가 닿을 가망이 없던 미덕의 그 꼭대기까지 그를 밀어 올리고 싶어 미칠 듯이 애쓰던 마음의 서툰 목소리를, 그가 이따금 거기서 알아듣게 해 주소서.
「하느님, 제가 이를 수 없는 저 바위로 저를 이끄소서.」
10월 15일.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사람의 기쁨 위로, 모든 고통 너머로, 그래, 나는 그 찬란한 기쁨을 미리 느낀다. 내가 이를 수 없는 그 바위, 나는 그 이름이 행복이라는 걸 잘 안다……. 행복에 이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내 삶 전체가 헛되다는 걸 안다……. 아! 그런데 주님, 당신은 그것을 단념하는 순결한 영혼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말씀은 「지금부터 복이 있도다, 지금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여기서 제 믿음이 흔들립니다. 주님! 온 힘을 다해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저는 밤 속에 있습니다. 새벽을 기다립니다. 죽을 때까지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오셔서 제 마음의 목마름을 풀어 주소서. 그 행복에 저는 지금 당장 목마릅니다……. 아니면 그것을 가졌다고 저 자신을 설득해야 합니까? 그리고 날이 밝기도 전에 울어, 날을 알린다기보다 부르는 성급한 새처럼, 밤이 희붐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노래해야 합니까?
10월 16일.
제롬, 너에게 완전한 기쁨을 가르쳐 주고 싶어.
오늘 아침 구토 발작에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어찌나 기운이 없던지 한순간 죽기를 바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처음에는 온 존재에 크나큰 고요가 깃들었다. 그러고는 고뇌가, 몸과 영혼의 떨림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마법이 풀리듯 내 삶이 갑자기 환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내 방의 끔찍하게 텅 빈 벽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겁이 났다. 지금도 나를 안심시키고 가라앉히려고 쓴다. 오 주님! 불경한 말 없이 끝까지 이를 수 있기를.
그래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아이처럼 무릎을 꿇었다…….
이제 죽고 싶다. 빨리, 내가 혼자라는 걸 다시 깨닫기 전에.
* * *
나는 지난해 쥘리에트를 다시 만났다. 알리사의 죽음을 알려 온 그녀의 마지막 편지 뒤로 십 년이 넘게 흘렀다. 프로방스 여행길에 님에 들를 기회가 생겼다. 테시에르 부부는 시내 한복판의 시끄러운 푀셰르 거리에 꽤 번듯한 집에 살고 있었다. 간다고 미리 편지를 했는데도 문턱을 넘을 때 나는 꽤 떨렸다.
하녀가 나를 거실로 안내했고, 잠시 뒤 쥘리에트가 들어왔다. 나는 플랑티에 이모를 보는 줄 알았다. 같은 걸음걸이, 같은 다부진 몸집, 같은 숨찬 다정함. 그녀는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질문을 퍼부었다. 내 경력, 파리의 거처, 하는 일, 사귀는 사람들. 남쪽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 왜 에두아르가 그토록 반가워할 에그비브까지 가지 않느냐?…… 그러고는 모두의 소식을 전했다. 남편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남동생 이야기, 지난 수확 이야기, 포도주가 잘 팔리지 않는 이야기……. 나는 로베르가 퐁괴즈마르를 팔고 에그비브로 와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제 에두아르의 동업자였고, 덕분에 에두아르는 여행을 다니며 사업의 장사 쪽을 더 맡을 수 있었고, 로베르는 농장에 남아 포도밭을 가꾸고 넓혔다.
그사이 나는 지난날을 떠올리게 할 무언가를 불안하게 눈으로 찾고 있었다. 거실의 새 가구들 사이에서 퐁괴즈마르의 가구 몇 점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내 안에서 떨리고 있는 그 지난날을 쥘리에트는 이제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일부러 우리를 거기서 떼어 놓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열두 살, 열세 살쯤 된 사내아이 둘이 계단에서 놀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불러 나에게 인사시켰다. 맏이인 리즈는 아버지를 따라 에그비브에 가 있었다. 열 살 된 다른 사내아이는 산책에서 곧 돌아올 참이었다. 쥘리에트가 우리의 상(喪)을 알리면서 곧 태어날 거라고 알렸던 아이였다. 그 마지막 임신은 순탄하게 끝나지 않아서 쥘리에트는 오래 몸이 상해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마음을 고쳐먹기라도 한 듯 딸아이를 하나 낳았고, 그녀의 말을 들어 보면 다른 아이들보다 그 아이를 더 아끼는 것 같았다.
"그 애가 자는 내 방이 바로 옆이야." 그녀가 말했다. "와서 봐." 그러고는 내가 따라가자 말했다. "제롬, 편지로는 차마 못 물어봤는데……. 이 아이 대부가 되어 줄 수 있겠어?"
"네가 좋다면 기꺼이 그럴게." 나는 조금 놀라서 요람 쪽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내 대녀 이름은 뭐야?"
"알리사……." 쥘리에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닮은 것 같지 않아?"
나는 대답하지 않고 쥘리에트의 손을 꼭 쥐었다. 엄마가 안아 올린 어린 알리사가 눈을 떴다. 나는 아이를 받아 안았다.
"너는 정말 좋은 아빠가 될 텐데!" 쥘리에트가 웃으려 애쓰며 말했다. "결혼하려고 뭘 기다리는 거야?"
"많은 걸 잊기를." 그러고는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았다.
"곧 잊기를 바라는 거야?"
"결코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이야."
"이쪽으로 와." 그녀가 갑자기 말하며 앞장서서 더 작고 벌써 어두운 방으로 갔다. 문 하나는 그녀의 방으로, 다른 하나는 거실로 나 있었다. "잠깐 틈이 나면 나는 여기로 피해. 집에서 가장 조용한 방이야. 여기 있으면 삶에서 거의 숨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작은 응접실의 창은 다른 방들처럼 시내의 소음 쪽이 아니라 나무를 심은 안뜰 같은 곳으로 나 있었다.
"앉자." 그녀가 안락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네가 충실하려는 건 알리사에 대한 기억이구나."
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보다는 그녀가 나에 대해 품었던 생각에……. 아니, 그걸 내 공으로 여기지는 마. 나는 달리 할 수가 없는 것 같아.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면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척밖에 할 수 없을 거야."
"아!" 그녀는 무심한 듯 말하고는, 무언가 떨어진 것이라도 찾는 듯 바닥 쪽으로 숙인 얼굴을 나에게서 돌렸다. "그럼 너는 희망 없는 사랑을 그렇게 오래 마음에 간직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 쥘리에트."
"그리고 삶이 날마다 그 위에 바람을 불어도 꺼지지 않는다고?……"
저녁이 잿빛 밀물처럼 차올라, 물건 하나하나에 닿아 잠기게 했다. 그 어스름 속에서 물건들은 되살아나 저마다 낮은 목소리로 자기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알리사의 방을 다시 보고 있었다. 쥘리에트가 그 가구를 모두 이곳에 모아 두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가 나에게로 얼굴을 돌렸지만 나는 그 생김새를 더는 알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그녀가 눈을 감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우리 둘은 이제 아무 말 없이 있었다.
"자!"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이제 깨어나야지……." 그녀가 일어나 한 걸음 내딛다가 힘이 빠진 듯 곁의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고, 나는 그녀가 우는 것 같았다…….
하녀가 램프를 들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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