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초혼」 「산유화」 「먼 후일」. 김소월이 살아서 낸 단 한 권의 시집, 126편을 원래의 16부 차례대로 담았습니다.
님에게
〈먼 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풀따기〉
우리 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 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립은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던진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헤적헤적 품을 헤쳐요.
그립은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여운 이 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
〈바다〉
뛰노는 흰 물결이 일고 또 잦는
붉은 풀이 자라는 바다는 어디
고기잡이꾼들이 배위에 앉아
사랑노래 부르는 바다는 어디
파랗게 조히 물든 남빛 하늘에
저녁놀 스러지는 바다는 어디
곳없이 떠다니는 늙은 물새가
떼를 지어 좇이는 바다는 어디
건너서서 저편은 딴나라이라
가고싶은 그립은 바다는 어디
〈산 위에〉
산(山) 위에 올라서서 바라다보면
가로막힌 바다를 마주 건너서
님 계시는 마을이 내 눈앞으로
꿈하늘 하늘같이 떠오릅니다
흰모래 모래빗긴 선창(船倉)가에는
한가한 뱃노래가 멀리 잦으며
날 저물고 안개는 깊이 덮여서
흩어지는 물꽃뿐 아득입니다
이윽고 밤 어둡는 물새가 울면
물결 좇아 하나둘 배는 떠나서
저 멀리 한바다로 아주 바다로
마치 가랑잎같이 떠나갑니다
나는 혼자 산(山)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 해 붉은 볕에 몸을 씻으며
귀 기울고 솔곳이 엿듣노라면
님 계신 창(窓) 아래로 가는 물노래
흔들어 깨우치는 물노래에는
내 님이 놀라 일어 찾으신대도
내 몸은 산(山)위에서 그 산(山)위에서
고이 깊이 잠들어 다 모릅니다
〈옛이야기〉
고요하고 어둡은 밤이 오면은
어스러한 燈(등)불에 밤이 오면은
외롭음에 아픔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에 저는 웁니다
제 한몸도 예전엔 눈물 모르고
조그만한 세상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지난날의 옛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님이 가신 뒤에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 뒤에는
前(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때에 외워두웠던
옛이야기 뿐만은 남았습니다
나날이 짙어가는 옛이야기는
부질없이 제 몸을 울려줍니다
〈님의 노래〉
그립은 우리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있어요
긴 날을 문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립은 우리님의 고운 노래는
해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밤들고 잠들도록 귀에 들려요
고히도 흔들리는 노래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한 잠자리에 홀로 누워도
내 잠은 포스근히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잊고말아요
〈실제 1〉
동무들 보십시오 해가 집니다
해지고 오늘날은 가노랍니다
웃옷을 잽시빨리 입으십시오
우리도 산(山)마루로 올라갑시다
동무들 보십시오 해가 집니다
세상의 모든것은 빛이 납니다
이제는 주춤주춤 어둡습니다
예서 더 저문 때를 밤이랍니다
동무들 보십시오 밤이 옵니다
박쥐가 발부리에 일어납니다
두눈을 인제 그만 감으십시오
우리도 골짜기로 나려갑시다
〈님의 말씀〉
세월이 물과 같이 흐른 두달은
길어둔 독엣물도 찌었지마는
가면서 함께 가자 하던 말씀은
살아서 살을 맞는 표적이외다
봄풀은 봄이 되면 돋아나지만
나무는 밑그루를 꺾은 셈이요
새라면 두 죽지가 상(傷)한 셈이라
내 몸에 꽃필 날은 다시 없구나
밤마다 닭소리라 날이 첫시(時)면
당신의 넋맞이로 나가볼때요
그믐에 지는 달이 산(山)에 걸리면
당신의 길신가리 차릴 때외다
세월은 물과 같이 흘러가지만
가면서 함께 가자 하던 말씀은
당신을 아주 잊던 말씀이지만
죽기 전(前) 또 못잊을 말씀이외다
〈님에게〉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축업은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낯모를 딴 세상의 네길거리에
애달피 날 저무는 갓 스물이요
캄캄한 어둡은 밤 들에 헤매도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비오는 모래밭에 오는 눈물의
축업은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마른강 두덕에서〉
서리맞은 잎들만 쌓일지라도
그 밑에야 강(江)물의 자취 아니랴
잎새 위에 밤마다 우는 달빛이
흘러가던 강(江)물의 자취 아니랴
빨래 소리 물소리 선녀(仙女)의 노래
물 싯치던 돌 위엔 물때 뿐이라
물때 묻은 조약돌 마른 갈숲이
이제라고 강(江)물의 터야 아니랴
빨래 소리 물소리 선녀(仙女)의 노래
물 싯치던 돌 위엔 물때 뿐이라
봄 밤
〈봄 밤〉
실버드나무의 검으스렷한 머리결인 낡은 가지에
제비의 넓은 깃나래의 감색 치마에
술집의 창 옆에, 보아라, 봄이 앉았지 않은가.
소리도 없이 바람은 불며, 울며, 한숨지워라.
아무런 줄도 없이 섧고 그립은 새카만 봄밤
보드랍은 습기는 떠돌며 땅을 덮어라.
〈밤〉
홀로 잠들기가 참말 외로와요
맘에는 사무치도록 그리워와요
이리도 무던히
아주 얼굴조차 잊힐듯해요.
벌써 해가 지고 어둡는대요,
이곳은 인천에 제물포, 이름난 곳,
부슬부슬 오는 비에 밤이 더디고
바다바람이 춥기만 합니다.
다만 고요히 누워 들으면
다만 고요히 누워 들으면
하이얗게 밀어드는 봄 밀물이
눈앞을 가루막고 흐느낄 뿐이야요.
〈꿈꾼 그 옛날〉
밖에는 눈, 눈이 와라,
고요히 창(窓)아래로는 달빛이 들어라.
어스름타고서 오신 그 여자(女子)는
내 꿈의 품속으로 들어와 안겨라.
나의 베개는 눈물로 함빡히 젖었어라.
그만 그 여자(女子)는 가고 말았느냐.
다만 고요한 새벽, 별그림자 하나가
창(窓)틈을 엿보아라.
〈꿈으로 오는 한 사람〉
나이 차라지면서 가지게 되었노라
숨어있던 한 사람이, 언제나 나의,
다시깊은 잠속의 꿈으로 와라
붉으렷한 얼굴에 가늣한 손가락의,
모르는 듯한 거동(擧動)도 전(前)날의 모양대로
그는 야젓이 나의 팔위에 누워라
그러나, 그래도 그러나!
말할 아무것이 다시 없는가!
그냥 먹먹할 뿐, 그대로
그는 일어라. 닭의 홰치는 소리.
깨어서도 늘, 길거리에 사람을
밝은 대낮에 빗보고는 하노라
두 사람
〈눈 오는 저녁〉
바람자는 이 저녁
흰눈은 퍼붓는데
무엇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今年)은……
꿈이라도 꾸면은!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눈타고 오시네.
저녁때. 흰눈은 퍼부어라.
〈자주 구름〉
물 고운 자주(紫朱) 구름,
하늘은 개여 오네.
밤중에 몰래 온 눈
솔숲에 꽃피었네.
아침볕 빛나는데
알알이 뛰노는 눈
밤새에 지난 일을……
다 잊고 바라보네.
움직거리는 자주(紫朱) 구름.
〈두 사람〉
흰눈은 한 잎
또 한 잎
영(嶺)기슭을 덮을 때.
짚신에 감발하고 길심매고
우뚝 일어나면서 돌아서도......
다시금 또 보이는,
다시금 또 보이는.
〈닭소리〉
그대만 없게 되면
가슴 뒤노는 닭소리 늘 들어라.
밤은 아주 새어올 때
잠은 아주 달아날 때
꿈은 이루기 어려워라.
저리고 아픔이여
살기가 왜 이리 고달프냐.
새벽 그림자 산란(散亂)한 들풀 위를
혼자서 거닐어라.
〈못잊어〉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립어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립을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림자같은 벗 하나이 내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쓸데없는 괴롭음으로만 보내었겠습니까!
오늘은 또다시 당신의 가슴속, 속모를 곳을
울면서 나는 휘저어버리고 떠납니다그려.
허수한 맘, 둘 곳 없는 심사(心事)에 쓰라린 가슴은
그것이 사랑, 사랑이던줄이 아니도 잊힙니다.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해가 산(山)마루에 저물어도
내게 두고는 당신때문에 저뭅니다.
해가 산(山)마루에 올라와도
내게 두고는 당신때문에 밝은 아침이라고 할 것입니다.
땅이 꺼져도 하늘이 무너져도
내게 두고는 끝까지 모두다 당신때문에 있습니다.
다시는, 나의 이러한 맘뿐은, 때가 되면,
그림자같이 당신한테로 가우리다.
오오, 나의 애인(愛人)이었던 당신이여.
무주공산
〈꿈 1〉
닭 개 짐승조차도 꿈이 있다고
이르는 말이야 있지 않은가,
그러하다, 봄날은 꿈꿀 때.
내 몸에야 꿈이나 있으랴,
아아 내 세상의 끝이여,
나는 꿈이 그립어, 꿈이 그립어.
〈맘 켱기는 날〉
오실 날
아니 오시는 사람!
오시는 것 같게도
맘 켱기는 날!
어느덧 해도 지고 날이 저무네!
〈하늘끝〉
불연듯
집을 나서 산(山)을 치달아
바다를 내다보는 나의 신세(身勢)여!
배는 떠나 하늘로 끝을 가누나!
〈개아미〉
진달래 꽃이 피고
바람은 버들가지에서 울 때,
개아미는
허리 가늣한 개아미는
봄날의 한나절, 오늘 하루도
고달피 부지런히 집을 지어라.
〈제비〉
하늘로 날아다니는 제비의 몸으로도
일정(一定)한 깃을 두고 돌아오거든!
어찌 섧지 않으랴, 집도 없는 몸이야!
〈부헝새〉
간밤에
뒷 창(窓)밖에
부헝새가 와서 울더니,
하루를 바다위에 구름이 캄캄.
오늘도 해 못 보고 날이 저무네.
〈만리성〉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룻밤!
쌓았다 헐었다
긴 만리성(萬里城)!
〈수아〉
섧다 해도
웬만한,
봄이 아니어,
나무도 가지마다 눈을 텄어라!
한때 한때
〈담배〉
나의 긴 한숨을 동무하는
못 잊게 생각나는 나의 담배 !
내력을 잊어버린 옛 시절에
났다가 새없이 몸이 가신
아씨님 무덤 위의 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어라.
어물어물 눈앞에 스러지는 검은 연기,
다만 타붓고 없어지는 불꽃.
아 나의 괴롭은 이 맘이어.
나의 하염없이 쓸쓸한 많은 날은
너와 한가지로 지나가라.
〈실제 2〉
이 가람과 저 가람이 모두 처흘러
그 무엇을 뜻하는고?
미덥음을 모르는 당신의 맘
죽은듯이 어둡은 깊은 골의
꺼림직한 괴롭은 몹쓸 꿈의
퍼르죽죽한 불길은 흐르지만
더듬기에 지치운 두 손길은
불어가는 바람에 식히셔요
밝고 호젓한 보름달이
새벽의 흔들리는 물 노래로
수줍음에 추움에 숨을듯이
떨고있는 물밑은 여기외다.
미덥음을 모르는 당신의 맘
저 산(山)과 이 산(山)이 마주서서
그 무엇을 뜻하는고?
〈어버이〉
잘살며 못살며 할일이 아니라
죽지못해 산다는 말이 있나니
바이 죽지 못할것도 아니지만은
금년에 열네살, 아들딸이 있어서
순복에 아부님은 못 하노란다.
〈부모〉
낙엽(落葉)이 우수수 떨어질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來日)날에
내가 부모(父母)되어서 알아보랴?
〈후살이〉
홀로된 그 여자(女子)
근일(近日)에 와서는 후살이 간다 하여라.
그렇지 않으랴, 그 사람 떠나서
이제 십년(十年), 저 혼자 더 살은 오늘날에 와서야……
모두다 그럴듯한 사람사는 일레요.
〈잊었던 맘〉
집을 떠나 먼 저곳에
외로이도 다니던 내 심사를!
바람 불어 봄꽃이 필 때에는
어찌타 그대는 또 왔는가.
저도 잊고나니 저 모르던 그대
어찌하여 옛날의 꿈조차 함께 오는가.
쓸데도 없이 서럽게만 오고가는 맘.
〈봄비〉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달피 고운비는 그어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비단안개〉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만나서 울던 때도 그런 날이오,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홀목숨은 못 살 때러라.
눈 풀리는 가지에 당치마귀로
젊은 계집 목매고 달릴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종달새 솟을 때러라.
들에랴, 바다에랴, 하늘에서랴,
아지 못할 무엇에 취(醉)할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첫사랑 있던 때도 그런 날이오
영이별 있던 날도 그런 때러라.
〈기억〉
달 아래 시멋없이 섰던 그 여자,
서있던 그 여자의 해슥한 얼굴,
해슥한 그 얼굴 적이 파릇함.
다시금 실벗듯한 가지 아래서
시꺼먼 머릿길은 번쩍거리며.
다시금 하룻밤의 식는 강물을
평양의 긴 단장은 싣고가던 때.
오오 그 시멋없이 섰던 여자여!
그립다 그 한밤을 내게 가깝던
그대여 꿈이 깊던 그 한동안을
슬픔에 귀엽음에 다시 사랑의
눈물에 우리 몸이 맏기웠던 때.
다시금 고즈넉한 성밖 골목의
사월의 늦어가는 뜬눈의 밤을
한두 등불 불빛은 울어새던 때.
오오 그 시멋없이 섰던 여자여!
〈애모〉
왜 아니 오시나요.
영창(映窓)에는 달빛, 매화(梅花)꽃이
그림자는 산란(散亂)히 휘젓는데.
아이. 눈 꽉 감고 요대로 잠을 들자.
저 멀리 들리는 것!
봄철의 밀물소리
물나라의 영롱(玲瓏)한 구중궁궐(九重宮闕), 궁궐(宮闕)의 오요한 곳,
잠 못 드는 용녀(龍女)의 춤과 노래, 봄철의 밀물소리.
어둡은 가슴속의 구석구석……
환연한 거울속에, 봄구름 잠긴 곳에,
소솔비 나리며, 달무리 둘러라.
이대도록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몹쓸 꿈〉
봄 새벽의 몹쓸 꿈
깨고 나면!
울짖는 까막까치, 놀라는 소리,
너희들은 눈에 무엇이 보이느냐.
봄철의 좋은 새벽, 풀이슬 맺혔어라.
볼지어다, 세월(歲月)은 도무지 편안(便安)한데,
두새없는 저 까마귀, 새들게 울짖는 저 까치야,
나의 흉(凶)한 꿈 보이느냐?
고요히 또 봄바람은 봄의 빈 들을 지나가며,
이윽고 동산에서는 꽃잎들이 흩어질 때,
말 들어라, 애틋한 이 여자(女子)야, 사랑의 때문에는
모두다 사납은 조짐(兆朕)인 듯, 가슴을 뒤노아라.
〈그를 꿈꾼 밤〉
야밤중, 불빛이 밝하게
어렴풋이 보여라.
들리는 듯, 마는 듯,
발자국 소리.
스러져가는 발자국 소리.
아무리 혼자 누어 몸을 뒤재도
잃어버린 잠은 다시 안와라.
야밤중, 불빛이 밝하게
어렴풋이 보여라.
〈여자의 냄새〉
푸른 구름의 옷 입은 달의 냄새.
붉은 구름의 옷 입은 해의 냄새.
아니, 땀 냄새, 때묻은 냄새,
비에 맞아 축업은 살과 옷 냄새.
푸른 바다…… 어즈리는 배……
보드랍은 그립은 어떤 목숨의
조그마한 푸릇한 그무러진 영(靈)
어우러져 빗기는 살의 아우성……
다시는 장사(葬事) 지나간 숲속에 냄새.
유령(幽靈) 실은 널뛰는 뱃간에 냄새.
생고기의 바다의 냄새.
늦은 봄의 하늘을 떠도는 냄새.
모래언덕 바람은 그물안개를 불고
먼 거리의 불빛은 달저녁을 울어라.
냄새 많은 그 몸이 좋습니다.
냄새 많은 그 몸이 좋습니다.
〈분 얼굴〉
불빛에 떠오르는 새뽀얀 얼굴,
그 얼굴이 보내는 호젓한 냄새,
오고가는 입술의 주고받는 잔(盞),
가느스름한 손길은 아른대여라.
검으스러하면서도 붉으스러한
어렴풋하면서도 다시 분명(分明)한
줄그늘 위에 그대의 목노리,
달빛이 수풀 위를 떠 흐르는가.
그대하고 나하고 또는 그 계집
밤에 노는 세 사람, 밤의 세 사람,
다시금 술잔 위의 긴 봄밤은
소리도 없이 창(窓)밖으로 새여 빠져라.
〈아내 몸〉
들고 나는 밀물에
배 떠나간 자리야 있으랴.
어질은 아내인 남의 몸인 그대요,
'아주 엄마 엄마라고 불리우기 전에.'
굴뚝이기에 연기가 나고
돌바위 안이기에 좀이 들어라.
젊으나 젊으신 청하늘인 그대요,
'착한 일 하신분네는 천당 가옵시리라.'
〈서울 밤〉
붉은 전등(電燈).
푸른 전등(電燈).
넓다란 거리면 푸른 전등(電燈).
막다른 골목이면 붉은 전등(電燈).
전등(電燈)은 반짝입니다.
전등(電燈)은 그무립니다.
전등(電燈)은 또다시 어스렷합니다.
전등(電燈)은 죽은듯한 긴 밤을 지킵니다.
나의 가슴의 속모를 곳의
어둡고 밝은 그 속에서도
붉은 전등(電燈)이 흐드겨 웁니다.
푸른 전등(電燈)이 흐드겨 웁니다.
붉은 전등(電燈).
푸른 전등(電燈).
머나먼 밤하늘은 새캄합니다.
머나먼 밤하늘은 새캄합니다.
서울 거리가 좋다고 해요.
서울 밤이 좋다고 해요.
붉은 전등(電燈).
푸른 전등(電燈).
나의 가슴의 속모를 곳의
푸른 전등(電燈)은 고적(孤寂)합니다.
붉은 전등(電燈)은 고적(孤寂)합니다.
반달
〈가을 아침에〉
어둑한 퍼스렷한 하늘 아래서
회색(灰色)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섭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 말락하는 멧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히 흘러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쌓여 오는 모든 기억(記憶)은
피흘린 상처(傷處)조차 아직 새롭은
가주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영(靈)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속이 가뷔엽던 날
그립은 그 한때는 언제였었노!'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리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밉음도 부끄럼도 잊은 소리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가을 저녁에〉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 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 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言約)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반달〉
희멀끔하여 떠돈다, 하늘 위에,
빛죽은 반달이 언제 올랐나!
바람은 나온다, 저녁은 춥구나,
흰 물가엔 뚜렷이 해가 드누나.
어둑컴컴한 풀없는 들은
찬 안개 우흐로 떠흐른다.
아, 겨울은 깊었다, 내 몸에는,
가슴이 무너져 나려앉는 이 설움아!
가는 님은 가슴에 사랑까지 없애고 가고
젊음은 늙음으로 바뀌어든다.
들가시나무의 밤드는 검은 가지
잎새들만 저녁빛에 희그무려히 꽃지듯한다.
귀뚜라미
〈만나려는 심사〉
저녁해는 지고서 어스름의 길,
저 먼 산(山)엔 어두워 잃어진 구름,
만나려는 심사는 웬 셈일까요,
그 사람이야 올 길 바이없는데,
발길은 누 마중을 가잔 말이냐.
하늘엔 달 오르며 우는 기러기.
〈옛낯〉
생각의 끝에는 졸음이 오고
그립음의 끝에는 잊음이 오나니,
그대여, 말을 말어라, 이후부터
우리는 옛낯없는 설움을 모르리.
〈깊이 믿던 심성〉
깊이 믿던 심성(心誠)이 황량(荒凉)한 내 가슴속에,
오고가는 두서너 구우(舊友)를 보면서 하는 말이
'인제는, 당신네들도 다 쓸데없구려!'
〈꿈 2〉
꿈? 영(靈)의 헤적임. 설움의 고향(故鄕).
울자, 내 사랑, 꽃지고 저무는 봄.
〈님과 벗〉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서 향기(香氣)로운 때를
고초(苦椒)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지연〉
오후(午後)의 네길거리 해가 들었다,
시정(市井)의 첫겨울의 적막(寂寞)함이어,
우둑히 문어귀에 혼자 섰으면,
흰눈의 잎사귀, 지연(紙鳶)이 뜬다.
〈오시는 눈〉
땅 위에 새하얗게 오시는 눈.
기다리는 날에는 오시는 눈.
오늘도 저 안온날 오시는 눈.
저녁불 켤때마다 오시는 눈.
〈설움의 덩이〉
꿇어앉아 올리는 향로(香爐)의 향(香)불.
내 가슴에 조그만 설움의 덩이.
초닷새 달그늘에 빗물이 운다.
내 가슴에 조그만 설움의 덩이.
〈낙천〉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맘을 그렇게나 먹어야지,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꽃지고 잎진 가지에 바람이 운다.
〈바람과 봄〉
봄에 부는 바람, 바람부는 봄,
적은가지 흔들리는 부는 봄바람,
내 가슴 흔들리는 바람, 부는 봄,
봄이라 바람이라 이내 몸에는
꽃이라 술잔이라 하며 우노라.
〈눈〉
새하얀 흰눈, 가비엽게 밟을 눈,
재 같아서 날릴 듯 꺼질듯한 눈,
바람엔 흩어져도 불길에야 녹을 눈.
계집의 마음. 님의 마음.
〈깊고 깊은 언약〉
몹쓸은 꿈을 깨여 돌아눕을 때,
봄이 와서 맷나물 돋아나올 때,
아름답은 젊은이 앞을 지날 때,
잊어버렸던듯이 저도 모르게,
얼결에 생각나는 '깊고 깊은 언약'
〈붉은 조수〉
바람에 밀려드는 저 붉은 조수
저 붉은 조수가 밀어들 때마다
나는 저 바람 위에 올라서서
푸릇한 구름의 옷을 입고
불같은 저 해를 품에 안고
저 붉은 조수와 나는 함께
뛰놀고 싶구나, 저 붉은 조수와.
〈남의 나라 땅〉
돌아다 보이는 무쇠다리
얼결에 띄워 건너서서
숨 고르고 발 놓는 남의 나라 땅.
〈천리만리〉
말리지 못할만치 몸부림하며
마치 천리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이라고나 하여볼까.
한줄기 쏜살같이 벋은 이 길로
줄곧 치달아 올라가면
불붙는 산의, 불붙는 산의
연기는 한두 줄기 피어올라라.
〈생과 사〉
살았대나 죽었대나 같은 말을 가지고
사람은 살아서 늙어서야 죽나니,
그러하면 그 역시(亦是) 그럴듯도 한 일을,
하필(何必)코 내 몸이라 그 무엇이 어째서
오늘도 산(山)마루에 올라서서 우느냐.
〈어인〉
헛된줄 모르고나 살면 좋아도!
오늘도 저 너머편(便) 마을에서는
고기잡이 배 한척 길 떠났다고.
작년(昨年)에도 바닷놀이 무서웠건만.
〈귀뚜라미〉
산(山)바람 소리.
찬비 뜯는 소리.
그대가 세상(世上)고락(苦樂) 말하는 날 밤에,
순막집 불도 지고 귀뚜라미 울어라.
〈월색〉
달빛은 밝고 귀뚜라미 울 때는
우둑히 시멋없이 잡고섰던 그대를
생각하는 밤이어, 오오 오늘밤
그대 찾아 데리고 서울로 가나?
바다가 변하야 뽕나무밭 된다고
〈불운에 우는 그대여〉
불운에 우는 그대여, 나는 아노라
무엇이 그대의 불운을 지었는지도,
부는 바람에 날려,
밀물에 흘러,
굳어진 그대의 가슴 속도.
모다 지나간 나의 일이면.
다시금 또 다시금
적황의 포말은 북고여라, 그대의 가슴속의
암청의 이끼어, 거칠은 바위
치는 물가의.
〈바다가 변하야 뽕나무밭 된다고〉
걷잡지 못할만한 나의 이 설움,
저무는 봄저녁에 져가는 꽃잎,
져가는 꽃잎들은 나부끼어라.
예로부터 일러오며 하는 말에도
바다가 변하야 뽕나무밭 된다고.
그러하다, 아름답은 청춘의 때의
있다던 온갖 것은 눈에 설고
다시금 낯 모르게 되나니,
보아라, 그대여, 서럽지 않은가,
봄에도 삼월의 져가는 날에
붉은 피같이도 쏟아져 나리는
저기 저 꽃잎들을, 저기 저 꽃잎들을.
〈황촉불〉
황촉불, 그저도 까맣게
스러져가는 푸른 창(窓)을 기대고
소리조차 없는 흰 밤에,
나는 혼자 거울에 얼굴을 묻고
뜻없이 생각없이 들여다보노라.
나는 이르노니, '우리 사람들
첫날밤은 꿈속으로 보내고
죽음은 조는 동안에 와서,
별(別) 좋은 일도 없이 스러지고 말어라'.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 보냐〉
하소연하며 한숨을 지으며
세상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어!
말을 나쁘지 않도록 조히 꾸밈은
달아진 이 세상의 버릇이라고, 오오 그대들!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두세 번(番) 생각하라, 위선(爲先) 그것이
저부터 밑지고 들어가는 장사일진댄.
사는 법(法)이 근심은 못 갈은다고,
남의 설움을 남은 몰라라.
말 마라, 세상, 세상 사람은
세상에 좋은 이름 좋은 말로서
한 사람을 속옷마저 벗긴 뒤에는
그를 네길거리에 세워 놓아라, 장승도 마치한가지.
이 무슨 일이냐, 그날로부터,
세상 사람들은 제각금 제 비위(脾胃)의 헐한 값으로
그의 몸값을 매마쟈고 덤벼들어라.
오오 그러면, 그대들은 이후에라도
하늘을 우러르라, 그저 혼자, 섧거나 괴롭거나.
〈훗길〉
어버이님네들이 외우는 말이
'딸과 아들을 기르기는
훗길을 보자는 심성(心誠)이로라.'.
그러하다, 분명(分明)히 그네들도
두 어버이 틈에서 생겼어라.
그러나 그 무엇이냐, 우리 사람!
손들어 가르치던 먼 훗날에
그네들이 또다시 자라 커서
한길같이 외우는 말이
'훗길을 두고 가자는 심성(心誠)으로
아들딸을 늙도록 기르노라.'.
〈부부〉
오오 아내여, 나의 사랑!
하늘이 묶어준 짝이라고
믿고 살음이 마땅치 아니한가.
아직 다시 그러랴, 안 그러랴?
이상하고 별납은 사람의 맘,
저 몰라라, 참인지, 거짓인지?
정분(情分)으로 얽은 딴 두 몸이라면.
서로 어그점인들 또 있으랴.
한평생(限平生)이라도 반백년(半百年)
못 사는 이 인생(人生)에!
연분(緣分)의 긴 실이 그 무엇이랴?
나는 말하려노라, 아무려나,
죽어서도 한 곳에 묻히더라.
〈나의 집〉
들가에 떨어져 나가앉은 멧기슭의
넓은 바다의 물가 뒤에,
나는 지으리, 나의 집을,
다시금 큰길을 앞에다 두고.
길로 지나가는 그 사람들은
제각금 떨어져서 혼자 가는 길.
하이얀 여울턱에 날은 저물 때.
나는 門(문)간에 서서 기다리리
새벽새가 울며 지새는 그늘로
세상은 희게, 또는 고요하게,
번쩍이며 오는 아침부터,
지나가는 길손을 눈여겨보며,
그대인가고, 그대인가고.
〈새벽〉
낙엽(落葉)에 발이 숨는 못물가에
웃둑웃둑한 나무그림자
물빛조차 어섬프러히 떠오르는데,
나 혼자 섰노라 아직도 아직도,
동(東)녘 하늘은 어둡은가.
천인(天人)에도 사랑눈물, 구름되어,
외롭은 꿈의 베개 흐렸는가
나의 님이어, 그러나 그러나
고히도 붉으스레 물질러와라
하늘 밟고 저녁에 섰는 구름.
반(半)달은 중천(中天)에 지새일 때.
〈구름〉
저기 저 구름을 잡아타면
붉게도 피로 물든 저 구름을,
밤이면 새캄한 저 구름을.
잡아타고 내 몸은 저 멀리로
구만리(九萬里) 긴 하늘을 날아 건너
그대 잠든 품속에 안기렸더니,
애스러라, 그리는 못한대서,
그대여, 들으라 비가 되어
저 구름이 그대한테로 나리거든,
생각하라, 밤저녁, 내 눈물을.
여름의 달밤
〈여름의 달밤〉
서늘하고 달 밝은 여름 밤이어
구름조차 희미한 여름 밤이어
그지없이 거룩한 하늘로서는
젊음의 붉은 이슬 젖어 나려라.
행복(幸福)의 맘이 도는 높은 가지의
아슬아슬 그늘 잎새를
배불러 기어 도는 어린 벌레도
아아 모든 물결은 복(福) 받았어라.
뻗어뻗어 오르는 가시덩굴도
희미(稀微)하게 흐르는 푸른 달빛이
기름같은 연기(煙氣)에 멱감을러라.
아아 너무 좋아서 잠 못 들어라.
우긋한 풀대들은 춤을 추면서
갈잎들은 그윽한 노래 부를 때.
오오 나려 흔드는 달빛 가운데
나타나는 영원(永遠)을 말로 새겨라.
자라는 물벼이삭 벌에서 불고
마을로 은(銀) 씻듯이 오는 바람은
눅 잣추는 향기(香氣)를 두고 가는데
인가(人家)들은 잠들어 고요하여라.
하루종일(終日) 일하신 아기 아버지
농부(農夫)들도 편안(便安)히 잠들었어라.
영기슭의 어둑한 그늘 속에선
쇠스랑과 호미뿐 빛이 피어라.
이윽고 식새리의 우는 소리는
밤이 들어가면서 더욱 잦을 때
나락밭 가운데의 우물가에는
농녀(農女)의 그림자가 아직 있어라.
달빛은 그무리며 넓은 우주(宇宙)에
잃어졌다 나오는 푸른 별이요.
식새리의 울음의 넘는 곡조(曲調)요.
아아 기쁨 가득한 여름 밤이어.
삼간집에 불붙는 젊은 목숨의
정열(情熱)에 목맺히는 우리 청춘(靑春)은
서느럽은 여름 밤 잎새 아래의
희미한 달빛 속에 나부끼어라.
한때의 자랑 많은 우리들이어
농촌(農村)에서 지나는 여름보다도
여름의 달밤보다 더 좋은 것이
인간(人間)에 이 세상에 다시 있으랴.
조그만 괴롭음도 내어 버리고
고요한 가운데서 귀 기울이며
흰달의 금물결에 노(櫓)를 저어라
푸른 밤의 하늘로 목을 놓아라.
아아 찬양(讚揚)하여라 좋은 한때를
흘러가는 목숨을 많은 행복(幸福)을.
여름의 어스러한 달밤 속에서
꿈같은 즐겁음의 눈물 흘러라.
〈오는 봄〉
봄날이 오리라고 생각하면서
쓸쓸한 긴 겨울을 지나보내라.
오늘 보니 백양(白楊)의 뻗은 가지에
전(前)에 없이 흰새가 앉아 울어라.
그러나 눈이 깔린 언덕 밑에는
그늘이냐 안개냐 아지랑이냐.
마을들은 곳곳이 움직임 없이
저편(便) 하늘 아래서 평화(平和)롭건만.
새들께 지껄이는 까치의 무리.
바다를 바라보며 우는 까마귀.
어디로서 오는지 종경소리는
젊은 아기 나가는 조곡(吊曲)일러라.
보라 때에 길손도 머뭇거리며
지향없이 갈 발이 곳을 몰라라.
사무치는 눈물은 끝이 없어도
하늘을 쳐다보는 살음의 기쁨.
저마다 외롭음의 깊은 근심이
오도가도 못하는 망상거림에
오늘은 사람마다 님을 여의고
곳을 잡지 못하는 설움일러라.
오기를 기다리는 봄의 소리는
때로 여윈 손끝을 울릴지라도
수풀 밑에 서리운 머릿길들은
걸음걸음 괴로이 발에 감겨라.
〈물마름〉
주으린 새무리는 마른 나무의
해지는 가지에서 재갈이던 때.
온종일 흐르던 물 그도 곤(困)하여
놀지는 골짜기에 목이 메던 때.
그 누가 알았으랴 한쪽 구름도
걸려서 흐드끼는 외롭은 영(嶺)을
숨차게 올라서는 여윈 길손이
달고 쓴 맛이라면 다 겪은 줄을.
그곳이 어디더냐 남이장군(南怡將軍)이
말 먹여 물 찌었던 푸른 강(江)물이
지금에 다시 흘러 둑을 넘치는
천백리(千百里) 두만강(豆滿江)이 예서 백십리(百十里).
무산(茂山)의 큰 고개가 예가 아니냐
누구나 네로부터 의(義)를 위하야
싸우다 못 이기면 몸을 숨겨서
한때의 못난이가 되는 법이라.
그 누가 생각하랴 삼백년래(三百年來)에
참아 받지 다 못할 한(恨)과 모욕(侮辱)을
못 이겨 칼을 잡고 일어섰다가
인력(人力)의 다함에서 스러진 줄을.
부러진 대쪽으로 활을 메우고
녹슬은 호미쇠로 칼을 별러서
도독된 삼천리(三千里)에 북을 울리며
정의(正義)의 기(旗)를 들던 그 사람이어.
그 누가 기억(記憶)하랴 다북동에서
피물든 옷을 입고 외치던 일을
정주성(定州城) 하룻밤의 지는 달빛에
애그친 그 가슴이 숫기 된 줄을.
물 위의 뜬 마름에 아침이슬을
불붙는 산(山)마루에 피었던 꽃을
지금에 우러르며 나는 우노라
이루며 못 이룸에 박(薄)한 이름을.
바리운 몸
〈우리 집〉
이 바로
외따로 와 지나는 사람 없으니
'밤 자고 가자' 하며 나는 앉어라.
저 멀리, 하느편(便)에
배는 떠나나가는
노래 들리며
눈물은
흘러나려라
스르르 나려감는 눈에.
꿈에도 생시에도 눈에 선한 우리 집
또 저 산(山) 넘어넘어
구름은 가라.
〈들돌이〉
들꽃은
피어
흩어졌어라.
들풀은
들로 한 벌 가득히 자라 높았는데
뱀의 헐벗은 묵은 옷은
길 분전의 바람에 날아돌아라.
저 보아, 곳곳이 모든 것은
번쩍이며 살아있어라.
두 나래 펄쳐 떨며
소리개도 높이 떴어라.
때에 이 내 몸
가다가 또다시 쉬기도 하며,
숨에 찬 내 가슴은
기쁨으로 채워져 사뭇 넘쳐라.
걸음은 다시금 또 더 앞으로……
〈바리운 몸〉
꿈에 울고 일어나
들에
나와라.
들에는 소슬비
머구리는 울어라.
풀그늘 어둡은데
뒷짐지고 땅 보며 머뭇거릴 때.
누가 반딧불 괴어드는 수풀 속에서
'간다 잘 살어라'하며, 노래 불러라.
〈엄숙〉
나는 혼자 뫼 위에 올랐어라.
솟아 퍼지는 아침 햇볕에
풀잎도 번쩍이며
바람은 속삭여라.
그러나
아아 내 몸의 상처(傷處)받은 맘이어
맘은 오히려 저푸고 아픔에 고요히 떨려라
또 다시금 나는 이 한때에
사람에게 있는 엄숙을 모다 느끼면서.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즈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夕陽)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歎息)을 얻으면서.
동(東)이랴, 남북(南北)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希望)의 반짝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 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른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밭고랑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은
키높이 가득 자란 보리밭, 밭고랑 위에 앉았어라.
일을 필하고 쉬이는 동안의 기쁨이어.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꽃이 필 때.
오오 빛나는 태양은 나려 쪼이며
새무리들도 즐겁은 노래, 노래 불러라.
오오 은혜여, 살아있는 몸에는 넘치는 은혜여
모든 은근스럽음이 우리의 맘 속을 차지하여라.
세계의 끝은 어디?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혔는데,
우리 두 사람은 일하며, 살아있어서,
하늘과 태양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
새라새롭은 환희를 지어내며, 늘 같은 땅 위에서.
다시한번 활기있게 웃고나서, 우리 두 사람은
바람에 일리우는 보리밭 속으로
호미들고 들어갔어라, 가즈런히 가즈런히
걸어나아가는 기쁨이어, 오오 생명의 향상이어.
〈저녁때〉
마소의 무리와 사람들은 돌아들고, 적적히 빈 들에,
엉머구리 소리 우거져라.
푸른 하늘은 더욱 낮추, 먼 산비탈길 어둔데
웃둑웃둑한 드높은 나무, 잘새도 깃들어라.
볼수록 넓은 벌의
물빛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고개 숙우리고 박은 듯이 홀로 서서
긴 한숨을 짓느냐, 왜 이다지!
온 것을 아주 잊었어라, 깊은 밤 예서 함께
몸이 생각에 가뷔엽고, 맘이 더 높이 떠오를 때.
문득, 멀지 않은 갈숲 새로
별빛이 솟구어라.
〈합장〉
들이라. 단 두 몸이라. 밤빛은 배여와라.
아, 이것 봐, 우거진 나무 아래로 달 들어라.
우리는 말하며 걸었어라, 바람은 부는 대로.
등(燈)불 빛에 거리는 헤적여라, 희미한 하느편에
고히 밝은 그림자 아득이고
퍽도 가까인, 풀밭에서 이슬이 번쩍여라.
밤은 막 깊어, 사방(四方)은 고요한데,
이마즉, 말도 안하고, 더 안가고,
길가에 우두커니. 눈 감고 마주서서.
먼 먼 산(山). 산(山)절의 절 종(鍾)소리. 달빛은 지새여라.
〈묵념〉
이슥한 밤, 밤기운 서늘할 제
홀로 창(窓)턱에 걸터앉아, 두 다리 늘리우고,
첫 머구리 소리를 들어라.
애처롭게도, 그대는 먼저 혼자서 잠드누나.
내 몸은 생각에 잠잠할 때. 희미한 수풀로서
촌가(村家)의 액(厄)맥이제(祭) 지내는 불빛은 새여오며,
이윽고, 비난수도 머구소리와 함께 잦아져라.
가득히 차오는 내 심령(心靈)은…… 하늘과 땅 사이에.
나는 무심히 일어걸어 그대의 잠든 몸 위에 기대여라
움직임 다시 없이, 만뢰는 구적(俱寂)한데,
조요(照耀)히 나려비추는 별빛들이
내 몸을 이끌어라, 무한(無限)히 더 가깝게.
고독
〈열락〉
어둡게 깊게 목메인 하늘.
꿈의 품속으로서 구러나오는
애달피 잠 안오는 유령(幽靈)의 눈결.
그림자검은 개버드나무에
쏟아쳐 나리는 비의 줄기는
흐느껴 빗기는 주문(呪文)의 소리.
시커먼 머리채 풀어헤치고
아우성하면서 가시는 따님.
헐벗은 벌레들은 꿈틀일 때,
흑혈(黑血)의 바다. 고목(枯木)동굴(洞窟).
탁목조(啄木鳥)의
쪼아리는 소리, 쪼아리는 소리.
〈무덤〉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붉으스름한 언덕, 여기저기
돌무더기도 움직이며, 달빛에,
소리만 남은 노래 서러워 엉겨라,
옛 조상(祖上)들의 기록(記錄)을 묻어둔 그곳!
나는 두루 찾노라, 그곳에서,
형적없는 노래 흘러퍼져,
그림자 가득한 언덕으로 여기저기,
그 누구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내 넋을 잡아끌어 헤내는 부르는 소리.
〈비난수 하는 맘〉
함께 하려노라, 비난수 하는 나의 맘,
모든 것을 한짐에 묶어가지고 가기까지,
아침이면 이슬맞은 바위의 붉은 줄로,
기어오르는 해를 바라다보며, 입을 벌리고.
떠돌어라, 비난수하는 맘이어, 갈매기같이,
다만 무덤뿐이 그늘을 어른이는 하늘 위를,
바닷가의. 잃어버린 세상의 있다던 모든 것들은
차라리 내 몸이 죽어가서 없어진 것만도 못하건만.
또는 비난수하는 나의 맘, 헐벗은 산(山) 위에서,
떨어진 잎 타서오르는, 냇내의 한줄기로,
바람에 나부끼라 저녁은, 흩어진 거미줄의
밤에 매던 이슬은 곧 다시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함께하려 하노라, 오오 비난수하는 나의 맘이여,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에는
오직 날과 날이 닭소리와 함께 달아나 버리며,
가까웁는, 오오 가까웁는 그대뿐이 내게 있거라!
〈찬 저녁〉
퍼르스렷한 달은, 성황당의
데군데군 헐어진 담 모도리에
우둑히 걸리웠고, 바위 위의
까마귀 한 쌍, 바람에 나래를 펴라.
엉긔한 무덤들은 들먹거리며,
눈 녹아 황토(黃土) 드러난 멧기슭의,
여기라, 거리 불빛도 떨어져 나와,
집 짓고 들었노라, 오오 가슴이여
세상은 무덤보다도 다시 멀고
눈물은 물보다 더 덥음이 없어라.
오오 가슴이여, 모닥불 피어오르는
내 한세상, 마당가의 가을도 갔어라.
그러나 나는, 오히려 나는
소리를 들어라, 눈석임 물어 씨거리는,
땅 위에 누워서, 밤마다 누워,
담 모도리에 걸린 달을 내가 또 봄으로.
〈초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主人)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心中)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여수
〈여수〉
1
육월(六月) 어스름 때의 빗줄기는
암황색(暗黃色)의 시골(屍骨)을 묶어세운 듯,
뜨며 흐르며 잠기는 손의 널쪽은
지향(支向)도 없어라, 단청(丹靑)의 홍문(紅門)!
2
저 오늘도 그립은 바다,
건너다 보자니 눈물 겨워라!
조그마한 보드랍은 그 옛적 심정(心淸)의
분결같은 그대의 손의
사시나무 보다도 더한 아픔이
내 몸을 에워싸고 휘떨며 찔러라,
나서 자란 고향(故鄕)의 해돋는 바다요.
진달래꽃
〈개여울의 노래〉
그대가 바람으로 생겨났으면!
달 돋는 개여울의 빈 들 속에서
내 옷의 앞자락을 불기나 하지.
우리가 굼벙이로 생겨났으면!
비오는 저녁 캄캄한 녕기슭의
미욱한 꿈이나 꾸어를 보지.
만일에 그대가 바다난 끝의
벼랑에 돌로나 생겨났더면,
둘이 안고 굴며 떨어나지지.
만일에 나의 몸이 불귀신이면
그대의 가슴 속을 밤도와 태워
둘이 함께 재 되어 스러지지.
〈길〉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집에
까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십리(十里)
어디로 갈까.
산(山)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곽산(定州郭山)
차(車)가고 배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十字)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山)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江)물 뒷강(江)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지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원앙침〉
바드득 이를 갈고
죽어 볼까요
창(窓)가에 아롱아롱
달이 비춘다
눈물은 새우잠의
팔굽베개요
봄꿩은 잠이 없어
밤에 와 운다.
두동달이베개는
어디 갔는고
언제는 둘이 자던 베갯머리에
'죽자 사자' 언약도 하여 보았지.
봄메의 멧기슭에
우는 접동도
내 사랑 내 사랑
조히 울것다.
두동달이베개는
어디 갔는고
창(窓)가에 아롱아롱
달이 비춘다.
〈무심〉
시집와서 삼년
오는 봄은
거친 벌 난 벌에 왔습니다
거친 벌 난 벌에 피는 꽃은
졌다가도 피노라 이릅디다
소식없이 기다린
이태삼년
바로 가던 앞강이 간 봄부터
굽이돌아 휘돌아 흐른다고
그러나 말 마소, 앞여울의
물빛은 예대로 푸르렀소
시집와서 삼년
어느 때나
터진개 개여울의 여울물은
거친 벌 난 벌에 흘렀습니다.
〈산〉
산(山)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山)새는 왜 우노, 시메산(山)골
영(嶺) 넘어 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나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七八十里)
돌아서서 육십리(六十里)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不歸), 다시 불귀(不歸),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不歸).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十五年)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山)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三水甲山) 가는 길은 고개의 길.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삭주구성〉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넘는 먼 삼천리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을 넘은 육천리요
물맞아 함빡이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
밤에 높은 산
삭주구성은 산 넘어
먼 육천리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리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으로 오며가며 아니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있을텐고
삭주구성은 산 넘어
먼 육천리
〈널〉
성촌(城村)의 아가씨들
널 뛰노나
초파일 날이라고
널을 뛰지요
바람 불어요
바람이 분다고!
담 안에는 수양(垂楊)의 버드나무
채색(彩色)줄 층층(層層)그네 매지를 말아요
담밖에는 수양(垂楊)의 늘어진 가지
늘어진 가지는
오오 누나!
휘젓이 늘어져서 그늘이 깊소.
좋다 봄날은
몸에 겹지
널뛰는 성촌(城村)의 아가씨네들
널은 사랑의 버릇이라오
〈춘향과 이도령〉
평양(平壤)에 대동강(大同江)은
우리나라에
곱기로 으뜸가는 가람이지요
삼천리(三千里) 가다가다 한가운데는
웃둑한 삼각산(三角山)이
솟기도 했소
그래 옳소 내 누님, 오오 누이님
우리나라 섬기던 한 옛적에는
춘향(春香)과 이도령(李道令)도 살았다지요
이편(便)에는 함양(咸陽), 저편(便)에 담양(潭陽),
꿈에는 가끔가끔 산(山)을 넘어
오작교(烏鵲橋) 찾아찾아 가기도 했소
그래 옳소 누이님 오오 내 누님
해돋고 달돋아 남원(南原)땅에는
성춘향(成春香) 아가씨가 살았다지요
〈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웁이나 남아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잊어 차마 못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집생각〉
산(山)에나 올라서서
바다를 보라
사면(四面)에 백(百)열리(里), 창파(滄波) 중에
객선(客船)만 중중…… 떠나간다.
명산대찰(名山大刹)이 그 어디메냐
향안(香案), 향합(香盒), 대그릇에,
석양(夕陽)이 산(山)머리 넘어가고
사면(四面)에 백(百)열리(里), 물소리라
'젊어서 꽃같은 오늘날로
금의(錦衣)로 환고향(還故鄕) 하옵소사.'
객선(客船)만 중중…… 떠나간다
사면(四面)에 백(百)열리(里), 나 어찌갈까
까투리도 산(山)속에 새끼치고
타관만리(他關萬里)에 와 있노라고
산(山)중만 바라보며 목메인다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고
들에나 나려오면
치어다보라
해님과 달님이 넘나든 고개
구름만 첩첩…… 떠돌아간다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지네
꽃촉불 켜는 밤
〈꽃촉불 켜는 밤〉
꽃촉(燭)불 켜는 밤, 깊은 골방에 만나라.
아직 젊어 모를 몸, 그래도 그들은
'해달같이 밝은 맘, 저저마다 있노라.'
그러나 사랑은, 한두 번(番)만 아니라, 그들은 모르고.
꽃촉(燭)불 켜는 밤, 어스러한 창(窓)아래 만나라.
아직 앞길 모를 몸, 그래도 그들은
'솔대같이 굳은 맘, 저저마다 있노라.'
그러나 세상은, 눈물날 일 많아라, 그들은 모르고.
〈부귀공명〉
거울들어 마주 온 내 얼굴을
좀 더 미리부터 알았던들!
늙는 날 죽는 날을
사람은 다 모르고 사는 탓에,
오오 오직 이것이 참이라면,
그러나 내 세상이 어디인지?
지금부터 두여덟 좋은 연광
다시 와서 내게도 있을 말로
전보다 좀 더 전보다 좀 더
살음즉이 살런지 모르련만.
거울들어 마주 온 내 얼굴을
좀 더 미리부터 알았던들!
〈추회〉
나쁜 일까지라도 생의 노력,
그 사람은 선사도 하였어라
그러나 그것도 허사라고!
나 역시 알지마는, 우리들은
끝끝내 고개를 넘고 넘어
짐 싣고 닫던 말도 순막집의
허청가 석양 손에
고요히 조으는 한때는 다 있나니,
고요히 조으는 한때는 다 있나니.
〈무신〉
그대가 돌이켜 물을 줄도 내가 아노라,
'무엇이 무신(無信)함이 있더냐?' 하고,
그러나 무엇하랴 오늘날은
야속히도 당장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것을, 물과 같이
흘러가서 없어진 맘이라고 하면.
검은 구름은 멧기슭에서 어정거리며,
애처롭게도 우는 산(山)의 사슴이
내 품에 속속들이 붙안기는 듯.
그러나 밀물도 쌓이고 밤은 어둡어
닻 주었던 자리는 알 길이 없어라.
시정(市井)의 흥정 일은
외상(外上)으로 주고 받기도 하건마는.
〈꿈길〉
물구슬의 봄새벽 아득한 길
하늘이며 들사이에 넓은 숲
젖은향기 불긋한 잎위의 길
실그물의 바람비쳐 젖은 숲
나는 걸어가노라 이러한 길
밤저녁의 그늘진 그대의 꿈
흔들리는 다리위 무지개 길
바람조차 가을봄 걷히는 꿈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하루라도 몇 번(番)씩 내 생각은
내가 무엇하려고 살려는지?
모르고 살았노라, 그럴 말로
그러나 흐르는 저 냇물이
흘러가서 바다로 든댈진댄.
일로조차 그러면, 이 내 몸은
애쓴다고는 말부터 잊으리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그러나, 다시 내 몸,
봄빛의 불붙는 사태흙에
집 짓는 저 개아미
나도 살려 하노라, 그와 같이
사는 날 그날까지
살음에 즐거워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뜻이면
오오 그러면 내 몸에는
다시는 애쓸 일도 더 없어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하다못해 죽어 달려가 올라〉
아주 나는 바랄 것 더 없노라
빛이랴 허공이랴,
소리만 남은 내 노래를
바람에나 띄워서 보낼밖에.
하다못해 죽어 달려가 올라
좀 더 높은 데서나 보았으면!
한세상 다 살아도
살은 뒤 없을 것을,
내가 다 아노라 지금까지
살아서 이만큼 자랐으니.
예전에 지나 본 모든 일을
살았다고 이를 수 있을진댄!
물가의 닳아져 널린 굴꺼풀에
붉은 가시덤불 뻗어늙고
어득어득 저문 날을
비바람에 울지는 돌무더기
하다못해 죽어 달려가 올라
밤의 고요한 때라도 지켰으면!
〈희망〉
날은 저물고 눈이 나려라
낯설은 물가으로 내가 왔을 때.
산(山)속의 올빼미 울고울며
떨어진 잎들은 눈 아래로 깔려라
아아 숙살(肅殺)스럽은 풍경(風景)이어
지혜(智慧)의 눈물을 내가 얻을 때!
이제금 알기는 알았건마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한갓 아름답은 눈얼님의
그림자뿐인 줄을.
이우러 향기(香氣)깊은 가을밤에
우무주러진 나무그림자
바람과 비가 우는 낙엽(落葉)위에.
〈전망〉
뿌옇한 하늘, 날도 채 밝지 않았는데,
흰눈이 우멍구멍 쌓인 새벽,
저 남편(便) 물가 위에
이상한 구름은 층층대(層層臺) 떠올라라.
마을 아기는
무리지어 서제(書齊)로 올라들 가고,
시집살이하는 젊은이들은
가끔가끔 우물길 나들어라.
소삭(蕭索)한 난간(欄干) 위를 거닐으며
내가 볼 때 온 아침, 내 가슴의,
좁혀 옮긴 그림장(張)이 한 너풀,
한갓 더운 눈물로 어룽지게.
어깨 위에 총(銃) 메인 사냥받이
반백(半白)의 머리털에 바람 불며
한번 달음박질. 올 길 다왔어라.
흰눈이 만산편야(滿山遍野)에 쌓인 아침.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가고 오지 못한다' 하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나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苦樂)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怜悧)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 고 하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산(帝釋山)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
금잔디
〈금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강촌〉
날 저물고 돋는 달에
흰물은 솰솰……
금모래 반짝…….
청(靑)노새 몰고 가는 낭군(郎君)!
여기는 강촌(江村)
강촌(江村)에 내 몸은 홀로 사네.
말하자면, 나도 나도
늦은 봄 오늘이 다 진(盡)토록
백년처권(百年妻眷)을 울고 가네.
길새 저문 나는 선비,
당신은 강촌(江村)에 홀로된 몸.
〈첫치마〉
봄은 가나니 저문 날에,
꽃은 지나니 저문 봄에,
속없이 우나니,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나니 가는 봄을.
꽃지고 잎진 가지를 잡고
미친듯 우나니, 집난이는
해 다 지고 저문 봄에
허리에도 감은 첫치마를
눈물로 함빡이 쥐어짜며
속없이 우노나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노나 가는 봄을.
〈달맞이〉
정월대보름날 달맞이,
달맞이 달마중을, 가자고!
새라새옷은 갈아입고도
가슴엔 묵은 설움 그대로,
달맞이 달마중을, 가자고!
달마중 가자고 이웃집들!
산 위에 수면에 달 솟을 때,
돌아들 가자고, 이웃집들!
모작별 삼성이 떨어질 때.
달맞이 달마중을 가자고!
다니던 옛동무 무덤가에
정월대보름날 달맞이!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닭은 꼬꾸요
〈닭은 꼬꾸요〉
닭은 꼬꾸요, 꼬꾸요 울 제,
헛잡으니 두 팔은 밀려났네.
애도 타리만치 기나긴 밤은……
꿈 깨친 뒤엔 감도록 잠 아니 오네.
위에는 청초(靑草)언덕, 곳은 깊섬,
엊저녁 대인 남포(南浦)뱃간.
몸을 잡고 뒤재며 누웠으면
솜솜하게도 감도록 그리워오네.
아무리 보아도
밝은 등(燈)불, 어스렷한데.
감으면 눈 속엔 흰 모래밭,
모래에 어린 안개는 물 위에 슬 제
대동강(大同江) 뱃나루에 해 돋아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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