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하여
Антон Чехов — Человек в футляре · Крыжовник · О любви (1898)
수의사와 김나지움 교사가 사냥을 다니며 하룻밤씩 이야기를 나눈다. 날이 좋아도 덧신에 우산으로 몸을 싸매고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던 교사, 구스베리 덤불 하나를 평생의 꿈으로 삼은 동생, 끝내 말하지 못한 사랑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야 털어놓은 지주. 체호프가 한 해에 써낸 세 단편.
상자 속의 사나이
미로노시츠코예 마을 맨 끝, 촌장 프로코피네 헛간에 사냥하다 늦어진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려고 자리를 잡았다. 둘뿐이었다. 수의사 이반 이바니치와 김나지움 교사 부르킨. 이반 이바니치는 침샤히말라이스키라는 꽤 이상한 겹성을 가졌는데, 그 성이 그에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온 현에서 그를 그냥 이름과 부칭으로만 불렀다. 그는 도시 근처 말 사육장에 살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려고 이번에 사냥을 나온 참이었다. 김나지움 교사 부르킨은 해마다 여름이면 P. 백작 댁에 손님으로 머물러서, 이 고장에서는 오래전부터 한 식구 같은 사람이었다.
둘 다 잠들지 않았다. 이반 이바니치는 키가 크고 마른, 콧수염이 긴 노인으로, 바깥 입구에 앉아 파이프를 피우고 있었다. 달빛이 그를 비추었다. 부르킨은 안쪽 건초 위에 누워 있어서 어둠 속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촌장의 아내 마브라 이야기가 나왔다. 튼튼하고 어리석지도 않은 여자인데, 평생 자기가 태어난 마을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고, 도시도 철도도 본 적이 없으며, 지난 십 년 동안은 줄곧 난로 뒤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밤에만 바깥에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게 뭐 놀랄 일입니까!」 부르킨이 말했다. 「소라게나 달팽이처럼 제 껍데기 속으로 숨으려 드는, 타고나기를 외로운 사람들은 세상에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격세유전, 그러니까 사람의 조상이 아직 무리 지어 사는 동물이 아니라 제 굴에서 혼자 살던 때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저 사람 성격의 한 갈래일 수도 있지요. 누가 알겠습니까? 저는 자연과학자가 아니라서 그런 문제를 건드릴 처지가 못 됩니다. 제 말은 그저 마브라 같은 사람이 드물지 않다는 겁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두 달쯤 전에 우리 도시에서 벨리코프라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스어 교사였고 제 동료였지요. 물론 들어 보셨을 겁니다. 그는 날씨가 아주 좋은 날에도 늘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들고, 꼭 솜을 넣은 두꺼운 외투를 입고 나다니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우산도 덮개에 넣고, 시계도 회색 섀미 가죽 주머니에 넣고, 연필을 깎으려고 주머니칼을 꺼낼 때 보면 칼도 작은 집에 들어 있었습니다. 얼굴까지 덮개에 넣은 것 같았지요. 늘 세운 옷깃 속에 얼굴을 숨겼으니까요. 검은 안경을 쓰고, 털 내의를 입고, 귀는 솜으로 틀어막았고, 마차를 타면 마부에게 지붕을 올리라고 일렀습니다. 한마디로 이 사람에게는 자기 둘레에 껍데기를 두르려는, 말하자면 자기를 남들과 떼어 놓고 바깥의 영향에서 지켜 줄 상자를 만들려는 바람이 늘, 어쩔 수 없이 있었습니다. 현실은 그를 짜증 나게 하고 겁먹게 하고 늘 불안하게 했지요. 그래서인지, 이런 자기 겁과 지금 것에 대한 혐오를 변명하려고 그는 늘 지난날을, 있지도 않았던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가 가르치던 고전어도 따지고 보면 그에게는 덧신이나 우산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진짜 삶을 피해 숨어드는 곳이었지요.
「오, 그리스어는 얼마나 울림이 좋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는 달콤한 얼굴로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고는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을 쳐들며 말했지요. 「안트로포스(사람)!」
벨리코프는 자기 생각도 상자 속에 감추려 했습니다. 그에게 분명한 것은 무언가를 금지하는 훈령과 신문 기사뿐이었습니다. 훈령에서 학생들에게 밤 아홉 시 넘어 거리에 나다니지 말라고 하거나, 어떤 기사에서 육체의 사랑을 금하면, 그에게는 그것이 분명하고 확실했습니다. 금지다, 그러면 끝이다. 허가나 허락에는 언제나 의심스러운 구석, 무언가 덜 말해진 흐릿한 것이 숨어 있었지요. 도시에 연극 모임이나 독서실이나 찻집을 허가하면, 그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야 물론, 그렇긴 그렇지요. 다 좋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요.」
온갖 위반이며 일탈이며 규칙에서 벗어나는 일이 그를 시무룩하게 했습니다. 그와 무슨 상관이 있나 싶은데도요. 동료 누가 기도회에 늦거나, 김나지움 학생들이 무슨 장난을 쳤다는 소문이 들려오거나, 여학교 사감이 밤늦게 장교와 함께 있더라는 말이 돌면, 그는 몹시 안절부절못하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교무 회의에서는 그 조심성과 의심 많은 성미와 순전히 상자 같은 궁리로 우리를 그냥 짓눌렀지요. 남학교며 여학교며 젊은 애들 행실이 나쁘고 교실에서 너무 떠든다, 아, 윗선에 들어가면 어쩌나, 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그러니 2학년에서 페트로프를, 4학년에서 예고로프를 내보내면 아주 좋겠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고요? 그 한숨과 우는소리와 창백하고 조그만 얼굴에 걸친 검은 안경으로, 아시겠지만 족제비 같은 조그만 얼굴로, 그는 우리 모두를 짓눌렀고, 우리는 물러섰습니다. 페트로프와 예고로프의 품행 점수를 깎고, 벌로 가두고, 끝내는 페트로프도 예고로프도 내보냈지요. 그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겁니다. 교사 집에 와서 앉아서는 말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살피는 것 같았지요. 그렇게 말없이 한두 시간 앉아 있다가 갑니다. 그는 이걸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라고 불렀는데, 우리 집에 와서 앉아 있는 게 그에게도 괴로운 일이 분명했고, 그저 동료로서의 의무라고 여겨서 왔던 겁니다. 우리 교사들은 그를 무서워했습니다. 교장까지 무서워했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교사들은 다 생각 있는 사람들이고, 아주 점잖고, 투르게네프와 셰드린을 읽으며 자란 사람들인데, 늘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들고 다니던 이 조그만 사람이 꼬박 십오 년 동안 김나지움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던 겁니다! 김나지움만이겠습니까? 도시 전체를요! 우리 부인네들은 그가 알까 봐 토요일마다 하던 집안 연극을 열지 않았고, 성직자들도 그 앞에서는 고기를 먹거나 카드놀이를 하기를 꺼렸습니다. 벨리코프 같은 사람들 탓에 지난 십 년, 십오 년 사이 우리 도시에서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됐습니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편지 보내기를, 사람 사귀기를, 책 읽기를 두려워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기를, 글 가르치기를 두려워합니다…….
이반 이바니치는 무언가 말하려고 헛기침을 했지만, 먼저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달을 바라본 다음에야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 생각 있고 점잖은 사람들이 셰드린도 읽고 투르게네프도 읽고 버클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읽는데, 그래도 고개를 숙이고 참았단 말이지……. 바로 그게 문제라네.」
「벨리코프는 저와 같은 집에 살았습니다.」 부르킨이 말을 이었다. 「같은 층에 문을 마주 보고요. 우리는 자주 마주쳤고, 저는 그의 집안 생활을 알았습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실내복, 잠자리 모자, 덧창, 빗장, 갖가지 금지와 제한이 줄줄이, 그리고, 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고기 없는 음식은 몸에 해롭고, 고기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벨리코프가 금식을 안 지킨다고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그는 버터에 지진 농어를 먹었습니다. 금식 음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기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는 자기를 나쁘게 생각할까 봐 여자 하인을 두지 않고 요리사 아파나시를 두었습니다. 예순쯤 된 노인으로, 늘 술에 취해 있고 반쯤 정신이 나갔는데, 예전에 장교 당번병 노릇을 해서 그럭저럭 음식을 할 줄 알았지요. 이 아파나시는 보통 팔짱을 끼고 문간에 서서 깊은 한숨과 함께 늘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요즘은 그런 것들이 참 많이도 생겼어!」
벨리코프의 침실은 작아서 꼭 상자 같았고, 침대에는 휘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잠자리에 들 때는 머리까지 이불을 덮었지요. 덥고 숨 막혔고, 닫힌 문을 바람이 두드리고, 난로가 웅웅거렸습니다. 부엌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지요. 불길한 한숨이…….
그는 이불 속에서 무서웠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아파나시가 자기를 칼로 찌르면 어쩌나, 도둑이 들면 어쩌나 두려워했고, 밤새 뒤숭숭한 꿈을 꾸었습니다. 아침에 함께 김나지움에 갈 때면 그는 시무룩하고 창백했고, 그가 가는 사람 많은 김나지움이 그의 온 존재에 무섭고 역겹다는 것이, 타고나기를 외로운 그에게는 저와 나란히 걷는 것조차 괴롭다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우리 교실은 정말 너무 떠듭니다.」 그는 자기의 무거운 기분을 설명할 거리를 찾으려는 듯 말하곤 했지요.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어 교사, 이 상자 속의 사나이가, 믿어지십니까, 하마터면 장가를 갈 뻔했습니다.
이반 이바니치가 헛간 안을 재빨리 돌아보고 말했다.
「농담이겠지!」
「정말로 장가를 갈 뻔했습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요. 우리 학교에 새 역사·지리 교사가 왔습니다. 코발렌코, 미하일 사비치라는 우크라이나 사람이었지요. 그는 혼자가 아니라 누이 바렌카와 함께 왔습니다. 그는 젊고 키가 크고 가무잡잡하고 손이 엄청나게 컸는데, 얼굴만 봐도 굵은 목소리로 말할 것 같았고, 실제로 목소리가 통 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부우, 부우, 부우……. 누이는 이제 젊지 않아서 서른쯤 됐지만, 역시 키가 크고 날씬하고 눈썹이 검고 볼이 발갰습니다. 한마디로 아가씨가 아니라 마멀레이드였지요. 어찌나 활달하고 시끌벅적한지 늘 우크라이나 노래를 부르고 깔깔 웃었습니다. 툭하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지요. 하하하! 코발렌코 남매와 제대로 처음 사귄 건, 제 기억에 교장의 명명일 잔치에서였습니다. 명명일 잔치에도 의무감에 오는, 무뚝뚝하고 지루함에 굳은 교사들 사이에서 갑자기 새 아프로디테가 거품에서 태어난 겁니다. 허리에 손을 얹고 다니며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녀는 〈바람이 분다〉를 감정을 담아 부르고, 노래를 또 한 곡, 또 한 곡 불러서 우리 모두를 사로잡았습니다. 모두를, 벨리코프까지요. 그는 그녀 곁에 다가앉아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크라이나어는 부드럽고 듣기 좋은 울림이 고대 그리스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는 그 말에 우쭐해져서, 가댜치 군에 자기네 농장이 있고, 농장에는 엄마가 사는데, 거기는 그런 배가, 그런 멜론이, 그런 카바크가 있다고 정성껏, 믿음직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호박을 카바크라고 하고, 러시아 말로 카바크인 술집은 신카라고 하지요. 그리고 거기서는 빨간 것과 파란 것을 넣어 보르시를 끓이는데 「어찌나 맛있는지, 어찌나 맛있는지, 그냥 끔찍할 정도예요!」
우리는 듣고 또 듣다가, 갑자기 모두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 둘을 맺어 주면 좋겠네요.」 교장 부인이 제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째서인지 우리 벨리코프가 독신이라는 걸 떠올렸고, 지금껏 그의 삶의 그렇게 중요한 대목을 어째서 알아채지 못하고 까맣게 놓치고 있었는지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는 대체 여자를 어떻게 대할까, 이 절실한 문제를 혼자 어떻게 풀고 있을까? 전에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어떤 날씨에도 덧신을 신고 휘장 속에서 자는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우리가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요.
「그 사람은 마흔을 넘은 지 오래고, 그 여자는 서른이니까요…….」 교장 부인이 자기 생각을 풀어 말했습니다. 「제 생각엔 그 여자가 그 사람한테 시집갈 것 같아요.」
우리 시골에서는 심심해서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집니다. 쓸데없고 허튼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해야 할 일은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자, 장가간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이 벨리코프를 우리는 대체 왜 갑자기 장가보내야 했을까요? 교장 부인, 교감 부인, 우리 김나지움의 부인네들이 모두 생기를 되찾았고, 예뻐지기까지 했습니다. 갑자기 삶의 목적을 찾은 것처럼요. 교장 부인이 극장에 칸막이 관람석을 잡으면, 보십시오, 그 칸에는 바렌카가 이런 부채를 들고 환하게, 행복하게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집에서 집게로 끌려 나온 것처럼 조그맣고 웅크린 벨리코프가 앉아 있습니다. 제가 저녁 모임을 열면, 부인네들은 벨리코프와 바렌카를 꼭 부르라고 우깁니다. 한마디로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한 겁니다. 알고 보니 바렌카도 시집가는 걸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빠 집에 사는 게 썩 즐겁지 않았거든요. 둘이서 날마다 말다툼하고 욕만 해 댔으니까요. 이런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코발렌코가 거리를 걸어갑니다. 키 크고 튼튼한 덩치에 수놓은 셔츠를 입고, 모자 밑으로 앞머리가 이마에 흘러내렸습니다. 한 손엔 책 한 묶음, 다른 손엔 마디가 울퉁불퉁한 굵은 지팡이. 그 뒤로 누이가 걸어갑니다. 역시 책을 들고요.
「아니, 미하일리크, 오빠는 그거 안 읽었잖아!」 그녀가 큰 소리로 우깁니다. 「내가 말하잖아, 맹세코, 오빠는 그거 하나도 안 읽었다니까!」
「내가 읽었다고 했잖아!」 코발렌코가 지팡이로 보도를 탕탕 치며 소리칩니다.
「아이고, 세상에, 민치크! 왜 화를 내? 우리는 원칙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잖아.」
「내가 읽었다고 했잖아!」 코발렌코가 더 크게 소리칩니다.
집에서는 남이라도 와 있으면 바로 입씨름이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지겨웠겠지요. 제 보금자리를 갖고 싶었을 테고, 나이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쯤 되면 고르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어서 아무한테나 시집가는 법이지요. 그리스어 교사한테라도요. 하긴 우리 아가씨들 대부분은 누구한테든 시집만 가면 그만이니까요. 어쨌든 바렌카는 우리 벨리코프에게 드러내 놓고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벨리코프는? 그는 코발렌코네 집에도 우리 집에 오듯 찾아갔습니다. 와서 앉아서는 말이 없지요. 그가 말이 없으면 바렌카가 〈바람이 분다〉를 불러 주거나, 검은 눈으로 생각에 잠겨 그를 바라보거나,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하하하!」
연애에서, 특히 결혼에서는 부추김이 큰 몫을 합니다. 동료들도 부인네들도 모두 벨리코프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이제 결혼하는 것 말고는 삶에 남은 게 없다고 다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를 축하하고, 엄숙한 얼굴로 결혼은 중대한 걸음이라는 둥 갖가지 뻔한 소리를 늘어놓았지요. 게다가 바렌카는 인물도 괜찮고 재미있는 여자였고, 오등 문관의 딸에 농장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를 다정하게, 진심으로 대해 준 첫 여자였습니다. 그는 머리가 핑 돌았고, 정말로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바로 그때 덧신이랑 우산을 빼앗았어야지.」 이반 이바니치가 말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더란 말입니다. 그는 책상에 바렌카의 사진을 세워 두고, 줄곧 저를 찾아와 바렌카 이야기며 가정생활 이야기며 결혼은 중대한 걸음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코발렌코네도 자주 드나들었지요. 그런데 생활 방식은 조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결혼하겠다는 결심이 그에게 어딘가 병처럼 작용해서, 그는 야위고 창백해졌고, 상자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버린 것 같았습니다.
「바르바라 사비시나는 제 마음에 듭니다.」 그는 힘없이 일그러진 미소를 띠고 제게 말했지요.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결혼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아시다시피, 너무 갑자기 일어나서요……. 생각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생각할 게 뭐 있습니까?」 제가 말합니다. 「결혼하시면 되지요.」
「아닙니다, 결혼은 중대한 걸음입니다. 먼저 앞으로 질 의무와 책임을 따져 봐야지요…….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요. 그 생각만 하면 불안해서 요즘은 밤마다 잠을 못 잡니다. 솔직히 말하면 겁이 납니다. 그 여자와 오빠는 생각하는 게 어딘가 이상하고, 말하는 것도, 아시다시피, 이상하고, 성격도 몹시 드셉니다. 결혼했다가 자칫하면 무슨 일에 휘말릴지 모르지요.」
그래서 그는 청혼하지 않고 자꾸 미루기만 했습니다. 교장 부인과 우리 부인네들은 무척 속을 끓였지요. 그는 줄곧 앞으로 질 의무와 책임을 따지면서도 거의 날마다 바렌카와 산책을 했습니다. 아마 자기 처지에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리고 가정생활 이야기를 하러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대로 갔으면 아마 그는 끝내 청혼을 했을 테고, 우리 고장에서 심심하고 할 일이 없어서 수천 번씩 벌어지는 쓸데없고 어리석은 결혼 하나가 또 이루어졌을 겁니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스캔들(kolossalische Skandal)이 터지지만 않았다면요. 말씀드려야 할 것이, 바렌카의 오빠 코발렌코는 처음 사귄 날부터 벨리코프를 미워해서 도무지 참아 주지를 못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여러분이 저 고자질쟁이를, 저 역겨운 낯짝을 어떻게 소화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이고, 여러분, 여기서 어떻게 사십니까! 여기 공기는 숨이 막히고 더럽습니다. 여러분이 교육자입니까, 교사입니까? 여러분은 관청 나부랭이고, 여기는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경찰서예요. 경찰 초소처럼 쉰내가 납니다. 아니요, 여러분, 조금만 더 같이 살다가 내 농장으로 돌아가서 가재나 잡고 우크라이나 꼬마들이나 가르치렵니다. 나는 떠날 테니 여러분은 여기서 그 유다하고 남으세요. 그놈 배나 터지라지.」
아니면 그는 웃고 또 웃었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굵은 목소리로 웃다가 가늘고 째지는 목소리로 웃다가, 두 팔을 벌리며 제게 묻곤 했지요.
「저 사람 우리 집에 와서 왜 앉아 있소? 뭘 바라는 거요? 앉아서 쳐다만 보고.」
그는 벨리코프에게 「글리타이 아보시 파우크(고리대금업자 아니면 거미)」라는 별명까지 붙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그의 누이 바렌카가 그 「거미」한테 시집가려 한다는 이야기를 그와 나누지 않으려 했지요. 언젠가 교장 부인이 그에게, 누이를 벨리코프처럼 든든하고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람에게 짝지어 주면 좋겠다고 넌지시 말했더니,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알 바 아닙니다. 누이가 독사한테 시집가든 말든, 나는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거 안 좋아합니다.」
자, 이제 그다음을 들어 보십시오. 어떤 장난꾸러기가 풍자화를 그렸습니다. 벨리코프가 덧신을 신고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데, 바렌카가 그의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밑에는 「사랑에 빠진 안트로포스」라고 적혀 있었지요. 표정을, 아시겠습니까, 놀랍게 잘 잡아냈습니다. 화가는 하룻밤만 애쓴 게 아니었을 겁니다. 남학교와 여학교 교사들, 신학교 교사들, 관리들까지 모두가 한 장씩 받았으니까요. 벨리코프도 받았습니다. 그 그림은 그에게 몹시 무거운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마침 오월 초하루, 일요일이었는데,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김나지움 앞에 모여 함께 걸어서 교외 숲으로 가기로 했었지요. 나서 보니 그는 얼굴이 퍼렇게 질려 먹구름보다 더 어두웠습니다.
「세상에는 어쩌면 이렇게 고약하고 못된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가 말하는데 입술이 떨렸습니다.
저는 그가 딱하기까지 했습니다. 걸어가는데 갑자기, 믿어지십니까, 코발렌코가 자전거를 타고 굴러오고, 그 뒤로 바렌카가 역시 자전거를 타고 옵니다. 얼굴이 빨갛고 지쳤지만 즐겁고 신이 나서요.
「우리는요,」 그녀가 소리칩니다. 「먼저 가요! 날씨가 어찌나 좋은지, 어찌나 좋은지, 그냥 끔찍할 정도예요!」
둘은 사라졌습니다. 제 벨리코프는 퍼렇던 얼굴이 하얘지더니 얼어붙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멈춰 서서 저를 바라봅니다…….
「잠깐만요, 이게 대체 뭡니까?」 그가 물었습니다. 「아니면 제 눈이 저를 속이는 겁니까? 김나지움 교사와 여자가 자전거를 타는 게 점잖은 일입니까?」
「점잖지 못할 게 뭐 있습니까?」 제가 말했지요. 「타고 싶으면 실컷 타라지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는 제가 태연한 데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는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더 가려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튿날 그는 내내 신경질적으로 손을 비비고 몸을 떨었는데, 얼굴만 봐도 몸이 좋지 않은 게 보였습니다. 그러고는 수업 도중에 집으로 가 버렸지요. 그의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점심도 먹지 않았습니다. 저녁 무렵에는 바깥이 완전히 여름 날씨인데도 옷을 두툼하게 껴입고 코발렌코네로 터덜터덜 갔습니다. 바렌카는 집에 없었고, 오빠만 있었지요.
「앉으십시오, 자.」 코발렌코가 차갑게 말하며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막 점심 뒤 낮잠에서 깬 얼굴로, 기분이 몹시 나빴습니다.
벨리코프는 십 분쯤 말없이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마음의 짐을 덜려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몹시, 몹시 괴롭습니다. 어떤 비방꾼이 저와, 우리 둘 모두에게 가까운 어떤 분을 우스꽝스럽게 그렸습니다. 저는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조롱을 받을 빌미를 조금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내 아주 점잖은 사람으로 처신했습니다.」
코발렌코는 부루퉁하게 앉아 말이 없었습니다. 벨리코프는 조금 기다렸다가 조용하고 슬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또 있습니다. 저는 오래 근무했고, 선생은 이제 막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선배 동료로서 선생께 주의를 드리는 것이 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자전거를 타십니다. 그런데 그런 놀이는 젊은이를 가르치는 사람에게 전혀 점잖지 못합니다.」
「어째서요?」 코발렌코가 굵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니, 그걸 또 설명해야 합니까, 미하일 사비치, 모르시겠습니까? 교사가 자전거를 타면 학생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구나무서서 다니는 수밖에 없지요! 훈령으로 허가되지 않은 일이니, 하면 안 됩니다. 어제는 기겁을 했습니다! 선생 누님을 보았을 때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여자나 아가씨가 자전거를 타다니, 끔찍합니다!」
「그래서 원하시는 게 정확히 뭡니까?」
「제가 원하는 건 딱 하나, 선생께 주의를 드리는 것입니다, 미하일 사비치. 선생은 젊고 앞날이 창창하니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처신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선생은 너무 소홀하십니다, 아, 얼마나 소홀하신지! 수놓은 셔츠를 입고 다니고, 늘 무슨 책들을 들고 거리를 다니더니, 이제는 자전거까지. 선생과 누님께서 자전거를 타신다는 걸 교장이 알게 되고, 그다음엔 감독관 귀에까지 들어갈 겁니다……. 그게 무슨 좋은 일이겠습니까?」
「내가 누이와 자전거를 타든 말든 아무도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코발렌코가 말하며 얼굴이 시뻘게졌습니다. 「내 집안일에 끼어드는 놈은 누구든 썩 꺼지라고 할 겁니다.」
벨리코프는 하얗게 질려 일어섰습니다.
「저한테 그런 투로 말씀하시면 저는 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 앞에서 윗분들에 대해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국은 존경해야 합니다.」
「내가 언제 당국 욕을 했습니까?」 코발렌코가 악에 받쳐 그를 노려보며 물었습니다.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두십시오. 나는 정직한 사람이고, 당신 같은 양반하고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고자질쟁이를 싫어합니다.」
벨리코프는 신경질적으로 허둥대며 겁에 질린 얼굴로 서둘러 외투를 입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그런 막말을 들은 거니까요.
「하고 싶은 말씀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는 현관에서 계단참으로 나가며 말했습니다. 「다만 미리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누가 우리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르니, 우리 대화가 잘못 전해져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저는 교장 선생님께 우리 대화 내용을 보고해야겠습니다……. 요점만요. 저는 그렇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보고? 가서 보고해!」
코발렌코가 뒤에서 그의 옷깃을 움켜잡고 떠밀었고, 벨리코프는 덧신을 덜그럭거리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습니다. 계단은 높고 가팔랐지만 그는 무사히 맨 아래까지 굴러 내려갔습니다. 일어나서 코를 만져 보았지요. 안경은 멀쩡한가? 그런데 하필 그가 계단을 굴러떨어질 때 바렌카가 부인 둘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아래에 서서 보고 있었지요. 벨리코프에게는 그게 무엇보다 끔찍했습니다. 웃음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목이나 두 다리가 부러지는 게 나았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온 도시가 알게 되고, 교장에게, 감독관에게까지 들어갈 테니까요. 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새 풍자화를 그릴 테고, 결국에는 사직서를 내라는 명령이 떨어지겠지…….
그가 일어서자 바렌카는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얼굴과 구겨진 외투와 덧신을 보고,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가 실수로 혼자 넘어졌으려니 하고는, 참지 못하고 온 집이 울리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이 낭랑하게 굴러가는 「하하하」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혼담도, 벨리코프의 이 세상 삶도요. 그는 바렌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더는 듣지 못했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그는 먼저 책상에서 사진을 치우고, 그다음에 자리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사흘쯤 뒤에 아파나시가 저를 찾아와서, 주인 나리가 어딘가 이상하니 의사를 부르러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벨리코프에게 갔습니다. 그는 휘장 속에 이불을 덮고 누워 말이 없었습니다. 물어보면 그저 예, 아니요뿐, 그 밖에는 소리 한마디 없었지요. 그는 누워 있고, 그 곁에서 아파나시가 우울하게 얼굴을 찌푸린 채 서성이며 깊이 한숨을 쉬는데, 그에게서는 술집처럼 보드카 냄새가 났습니다.
한 달 뒤에 벨리코프는 죽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러니까 두 김나지움과 신학교가 그를 묻었지요. 관 속에 누운 그는 온순하고 편안하고 즐겁기까지 한 얼굴이었습니다. 다시는 나오지 않을 상자에 마침내 들어가게 된 것이 기쁜 것처럼요. 그래요, 그는 자기 이상을 이룬 겁니다! 그를 기리기라도 하듯 장례식 날은 흐리고 비가 와서 우리는 모두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들었습니다. 바렌카도 장례식에 왔는데, 관을 무덤에 내릴 때 조금 울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여자들은 울거나 웃거나 둘 중 하나고 그 중간 기분은 없다는 걸 저는 알았지요.
솔직히 말해 벨리코프 같은 사람을 묻는 건 큰 즐거움입니다. 묘지에서 돌아올 때 우리는 다들 점잖고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즐거운 기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요. 그 기분은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집을 비우면 한두 시간 정원을 뛰어다니며 온전한 자유를 누리던 때의 기분과 닮았습니다. 아, 자유, 자유!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낌새만으로도, 희미한 희망만으로도 영혼에 날개가 돋지 않습니까?
우리는 좋은 기분으로 묘지에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한 주도 지나지 않아 삶은 예전처럼 흘러갔습니다. 똑같이 무뚝뚝하고 지치고 갈피 없는 삶, 훈령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허가되지도 않은 삶이었지요. 나아진 게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벨리코프는 묻었지만, 그런 상자 속의 사나이들이 얼마나 많이 남았습니까,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이 나오겠습니까!
「바로 그게 문제라네.」 이반 이바니치가 말하고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이 나오겠습니까!」 부르킨이 되풀이했다.
김나지움 교사는 헛간에서 나왔다. 키가 작고 뚱뚱하고 머리가 완전히 벗어진, 검은 턱수염이 거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사람이었다. 개 두 마리가 그를 따라 나왔다.
「달 좀 보세요, 달!」 그가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벌써 자정이었다. 오른쪽으로는 마을 전체가 보였고, 긴 길이 멀리, 5킬로미터쯤 뻗어 있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깊은 잠에 잠겨 있었다. 움직임도 소리도 없어서, 자연이 이렇게 고요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달밤에 오두막과 건초 더미와 잠든 버드나무가 늘어선 넓은 시골길을 보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밤 그늘 속에 노동과 걱정과 슬픔을 피해 쉬고 있는 그 길은 온순하고 슬프고 아름다워서, 별들도 그 길을 다정하고 애틋하게 내려다보는 것 같고, 이 땅에 더는 악이 없고 모든 것이 평안한 것 같다. 왼쪽으로는 마을 끝에서 들판이 시작되었다. 들판은 멀리 지평선까지 보였고, 달빛이 넘치는 그 넓은 들판 어디에도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바로 그게 문제라네.」 이반 이바니치가 되풀이했다. 「우리가 도시에서 답답하고 비좁게 살면서 쓸데없는 서류를 쓰고 빈트 카드놀이를 하는 것, 그게 상자가 아니고 뭔가? 놀고먹는 자들, 소송꾼들, 어리석고 할 일 없는 여자들 사이에서 평생을 보내며 온갖 허튼소리를 하고 듣는 것, 그게 상자가 아니고 뭔가? 원한다면 내가 아주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아니요, 이제 잘 시간입니다.」 부르킨이 말했다. 「내일 하시지요!」
둘은 헛간에 들어가 건초 위에 누웠다. 둘 다 이불을 덮고 깜박 잠이 들려는데, 갑자기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툭, 툭……. 누군가 헛간 가까이에서 걷고 있었다. 조금 걷다가 멈추고, 잠시 뒤에 다시 툭, 툭……. 개들이 으르렁거렸다.
「마브라가 다니는 겁니다.」 부르킨이 말했다.
발소리가 잦아들었다.
「남들이 거짓말하는 걸 보고 듣고,」 이반 이바니치가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 거짓말을 참는다고 도리어 바보 소리를 듣고, 모욕과 굴욕을 견디고, 정직하고 자유로운 사람들 편이라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거짓말하고 웃음 짓고, 그게 다 빵 한 조각 때문에, 따뜻한 구석 때문에, 한 푼어치 값도 없는 하찮은 벼슬 때문이라니. 아니,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네!」
「그건 또 딴 이야기네요, 이반 이바니치.」 교사가 말했다. 「잡시다.」
십 분쯤 지나자 부르킨은 벌써 잠들었다. 그러나 이반 이바니치는 줄곧 이리저리 뒤척이며 한숨을 쉬다가, 일어나 다시 밖으로 나가서 문 앞에 앉아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구스베리
이른 아침부터 하늘 가득 비구름이 덮여 있었다. 조용하고, 덥지 않고, 지루했다. 잿빛으로 흐린 날, 들판 위에 구름이 오래 드리워 있어 비를 기다리는데 비는 오지 않을 때처럼. 수의사 이반 이바니치와 김나지움 교사 부르킨은 벌써 걷기에 지쳤고, 들판은 끝이 없어 보였다. 저 멀리 앞에 미로노시츠코예 마을의 풍차가 겨우 보였고, 오른쪽으로는 언덕이 줄지어 이어지다가 마을 너머 멀리에서 사라졌다. 둘 다 그것이 강둑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는 풀밭과 푸른 버드나무와 지주들의 저택이 있고, 언덕 하나에 올라서면 거기서도 똑같이 드넓은 들판과 전신주와, 멀리서 보면 기어가는 애벌레 같은 기차가 보이고, 맑은 날에는 도시까지 보인다. 지금, 온 자연이 온순하고 생각에 잠긴 듯한 고요한 날씨 속에서 이반 이바니치와 부르킨은 이 들판을 향한 사랑에 젖어, 이 나라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했다.
「지난번에 촌장 프로코피네 헛간에 있을 때,」 부르킨이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 주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래, 그때 내 동생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
이반 이바니치는 길게 한숨을 쉬고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파이프에 불을 붙였는데, 바로 그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오 분쯤 지나자 벌써 세찬 비가 쏟아졌다. 하늘을 다 덮은 비라 언제 그칠지 알 수 없었다. 이반 이바니치와 부르킨은 멈춰 서서 망설였다. 벌써 젖은 개들은 꼬리를 말아 넣고 서서 애틋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디든 들어가서 비를 피해야겠습니다.」 부르킨이 말했다. 「알료힌네로 가시지요. 여기서 가깝습니다.」
「가세.」
그들은 옆으로 꺾어 풀을 벤 들판을 곧장 가다가 오른쪽으로 비켜 가다가 하며 한참 걸어 마침내 길로 나왔다. 곧 포플러와 정원이 보이고, 이어 곳간의 빨간 지붕들이 보였다. 강이 반짝였고, 물레방아와 하얀 목욕간이 있는 넓은 물굽이가 눈앞에 펼쳐졌다. 알료힌이 사는 소피노였다.
물레방아가 빗소리를 덮으며 돌아가고 있었다. 둑이 떨렸다. 짐수레 곁에는 젖은 말들이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었고, 사람들이 자루를 뒤집어쓰고 오갔다. 축축하고 질척하고 을씨년스러웠고, 물굽이는 차갑고 성나 보였다. 이반 이바니치와 부르킨은 벌써 온몸이 젖고 더럽고 불편했다. 다리는 진흙에 무거워졌고, 둑을 지나 주인집 곳간 쪽으로 올라갈 때는 서로에게 화라도 난 것처럼 말이 없었다.
곳간 하나에서 풍구가 웅웅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문턱에는 알료힌이 직접 서 있었다. 마흔쯤 된 사내로, 키가 크고 뚱뚱하고 머리가 길어서, 지주라기보다 교수나 화가 같아 보였다. 그는 오래 빨지 않은 흰 셔츠에 노끈 허리띠를 매고, 바지 대신 속바지를 입었고, 장화에도 진흙과 지푸라기가 붙어 있었다. 코와 눈이 먼지로 새까맸다. 그는 이반 이바니치와 부르킨을 알아보고 무척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들어가시지요, 여러분, 집으로.」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금방, 바로 가겠습니다.」
집은 크고 이층이었다. 알료힌은 아래층의 둥근 천장에 작은 창이 난 방 두 칸에 살았다. 예전에 관리인들이 살던 방이었다. 살림은 소박했고, 호밀빵과 싸구려 보드카와 마구 냄새가 났다. 위층의 손님용 방들에는 손님이 올 때나 드물게 올라갔다. 집에서 이반 이바니치와 부르킨을 맞은 것은 젊은 하녀였는데, 어찌나 아름다운지 둘은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여러분을 뵈니 제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실 겁니다.」 알료힌이 그들을 따라 현관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펠라게야,」 그가 하녀에게 말했다. 「손님들께 갈아입으실 옷을 좀 드려요. 그러고 보니 나도 갈아입어야겠군. 그 전에 먼저 씻으러 가야겠습니다. 봄부터 씻지 않은 것 같거든요. 여러분, 목욕간에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여기서 준비를 해 둘 겁니다.」
몸가짐이 그토록 고상하고 보기에도 그토록 부드러운 아름다운 펠라게야가 홑이불과 비누를 가져왔고, 알료힌은 손님들과 함께 목욕간으로 갔다.
「네, 정말 오래 안 씻었습니다.」 그가 옷을 벗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목욕간은 좋습니다. 아버지가 지으셨지요. 그런데 어째 씻을 틈이 통 없네요.」
그는 계단에 앉아 긴 머리와 목에 비누칠을 했고, 그 둘레의 물이 갈색이 되었다.
「그래, 정말이지…….」 이반 이바니치가 그의 머리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말 오래 안 씻었습니다…….」 알료힌이 멋쩍게 되풀이하고 한 번 더 비누칠을 하자, 그 둘레의 물이 잉크처럼 짙푸르게 되었다.
이반 이바니치는 밖으로 나가 첨벙 물에 뛰어들어, 빗속에서 팔을 크게 휘저으며 헤엄쳤다. 그에게서 물결이 퍼져 나갔고, 물결 위에서 하얀 수련이 흔들렸다. 그는 물굽이 한가운데까지 헤엄쳐 가서 잠수했다가, 잠시 뒤 다른 곳에서 떠올라 계속 헤엄치며 바닥에 닿아 보려고 자꾸 잠수했다. 「아, 세상에……」 그는 즐거워하며 되풀이했다. 「아, 세상에……」 그는 물레방아까지 헤엄쳐 가서 거기 농부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는 돌아섰고, 물굽이 한가운데서 반듯이 누워 얼굴로 비를 맞았다. 부르킨과 알료힌은 벌써 옷을 입고 돌아가려는데, 그는 여전히 헤엄치고 잠수했다.
「아, 세상에…….」 그가 말했다. 「아,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만하세요!」 부르킨이 그에게 소리쳤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위층 큰 응접실에 램프를 켜고, 부르킨과 이반 이바니치가 비단 실내복에 따뜻한 실내화 차림으로 안락의자에 앉고, 알료힌이 씻고 머리를 빗고 새 프록코트를 입고 응접실을 거닐며, 따뜻하고 깨끗하고 마른 옷과 가벼운 신발을 즐겁게 느끼는 것 같을 때, 그리고 아름다운 펠라게야가 소리 없이 양탄자를 밟으며 부드럽게 웃음 짓고 쟁반에 잼을 곁들인 차를 내올 때, 그제야 이반 이바니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부르킨과 알료힌만이 아니라, 금빛 액자 속에서 차분하고 엄하게 내다보는 늙고 젊은 부인들과 군인들도 함께인 것 같았다.
「우리는 형제가 둘이었네.」 그가 시작했다. 「나 이반 이바니치와, 두 살쯤 아래인 니콜라이 이바니치. 나는 공부를 해서 수의사가 됐고, 니콜라이는 열아홉 살부터 벌써 재무국에 앉아 있었지. 우리 아버지 침샤히말라이스키는 소년병 출신이었는데, 장교 계급까지 올라가서 우리에게 세습 귀족 신분과 조그만 영지를 남겼다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조그만 영지는 빚 때문에 빼앗겼지만, 어쨌든 우리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마음껏 뛰놀며 보냈지. 우리는 농부의 아이들과 다름없이 밤낮을 들판에서, 숲에서 보냈네. 말을 지키고, 나무껍질을 벗기고, 물고기를 잡고, 뭐 그런 것들 말이야……. 자네들도 알겠지만, 살면서 한 번이라도 작은 농어를 낚아 봤거나, 가을에 철새 개똥지빠귀들이 맑고 서늘한 날 마을 위로 떼 지어 날아다니는 걸 본 사람은 이미 도시 사람이 아니라네. 죽을 때까지 탁 트인 곳이 그리워지지. 내 동생은 재무국에서 우울해했네. 해가 가도 그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늘 같은 서류를 쓰면서 늘 같은 생각만 했지. 어떻게든 시골로 가고 싶다고. 그리고 이 그리움은 차츰 분명한 바람으로, 어디 강가나 호숫가에 조그만 영지를 사겠다는 꿈으로 굳어졌다네.
그는 착하고 온순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평생 자기 영지에 틀어박히겠다는 그 바람에는 한 번도 공감하지 않았네. 사람에게는 세 아르신의 땅만 있으면 된다고들 하지. 하지만 세 아르신이 필요한 건 시체지 사람이 아니야. 요즘은 또 우리 지식인들이 땅에 끌려 영지로 가려 하는 게 좋은 일이라고들 하더군. 하지만 그런 영지도 결국 세 아르신의 땅이야. 도시에서, 싸움에서, 세상의 소란에서 떠나 제 영지에 숨는 것, 그건 삶이 아니라 이기심이고 게으름이네. 일종의 수도 생활이지만 고행 없는 수도 생활이야. 사람에게 필요한 건 세 아르신의 땅이 아니고 영지도 아니고, 지구 전체, 자연 전체라네. 그 넓은 곳에서 자기의 자유로운 정신이 가진 모든 성질과 특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말이야.
내 동생 니콜라이는 사무실에 앉아서, 자기 집 양배추 수프를 먹는 꿈을 꾸었네. 온 마당에 맛있는 냄새가 퍼지는 수프를 푸른 풀밭에서 먹고, 햇볕 아래서 자고, 대문 밖 벤치에 몇 시간이고 앉아 들판과 숲을 바라보는 꿈 말이야. 농사책과 달력에 실린 갖가지 조언이 그의 기쁨이고 즐겨 먹는 정신의 양식이었지. 신문 읽기도 좋아했지만, 신문에서 읽는 건 몇 헥타르의 밭과 풀밭에 저택과 강과 정원과 물레방아와 물 흐르는 연못까지 딸린 땅을 판다는 광고뿐이었네. 그러면 그의 머릿속에는 정원의 오솔길, 꽃, 과일, 찌르레기 집, 연못의 붕어, 그리고, 알다시피, 그런 갖가지 것들이 그려졌지. 이 상상의 그림들은 눈에 띈 광고에 따라 저마다 달랐지만, 어째서인지 어느 그림에나 꼭 구스베리가 있었네. 그는 구스베리 없는 영지는, 구스베리 없는 시적인 구석은 하나도 떠올릴 수가 없었지.
「시골 생활에는 시골 생활대로 좋은 점이 있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네. 「발코니에 앉아 차를 마시면 연못에서는 우리 집 오리들이 헤엄치고, 냄새는 얼마나 좋고, 그리고…… 그리고 구스베리가 자라지.」
그는 자기 영지의 설계도를 그렸는데, 그릴 때마다 설계도에는 똑같은 것이 나왔네. 가) 주인집, 나) 하인 숙소, 다) 채소밭, 라) 구스베리. 그는 인색하게 살았지. 덜 먹고 덜 마시고, 거지처럼 아무렇게나 입고, 줄곧 모아서 은행에 넣었네. 지독하게 욕심을 부렸어. 나는 그를 보기가 괴로워서 이것저것 주기도 하고 명절이면 보내기도 했지만, 그는 그것마저 감춰 두었네. 사람이 한번 생각에 사로잡히면 어쩔 도리가 없는 법이야.
해가 가고, 그는 다른 현으로 옮겨 갔고, 벌써 마흔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신문 광고를 읽으며 돈을 모았네. 그러다 들으니 결혼을 했다더군. 구스베리 있는 영지를 사겠다는 똑같은 목적으로, 늙고 못생긴 과부와 아무 감정 없이, 그저 그 여자에게 돈푼이 있다는 이유로 결혼한 거야. 그는 아내와도 인색하게 살았네. 늘 배를 곯게 하고, 아내의 돈은 자기 이름으로 은행에 넣었지. 그 여자는 전에 우체국장의 아내여서 파이와 과실주에 익숙했는데, 두 번째 남편 곁에서는 검은 빵조차 넉넉히 보지 못했네. 그런 생활에 시들시들하더니 삼 년쯤 지나 그만 하느님께 영혼을 돌려드렸지. 물론 내 동생은 자기가 아내를 죽게 했다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하지 않았네. 돈은 보드카처럼 사람을 괴짜로 만들지. 우리 도시에서 어떤 장사꾼이 죽어 가고 있었네. 그는 죽기 전에 꿀 한 접시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아무에게도 돌아가지 않게 자기 돈과 복권을 꿀과 함께 다 먹어 버렸어. 언젠가 내가 기차역에서 가축 떼를 검사하고 있을 때, 마소 장수 하나가 기관차에 치여 다리가 잘렸네. 우리가 그를 응급실로 옮기는데 피가 줄줄 흘러, 끔찍한 일이었지. 그런데 그는 자꾸 자기 다리를 찾아 달라고 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잘린 다리에 신긴 장화 속에 이십 루블이 있는데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고.
「그건 또 딴 이야기네요.」 부르킨이 말했다.
「아내가 죽은 뒤,」 이반 이바니치는 반 분쯤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내 동생은 영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네. 물론 오 년을 찾아다녀도 결국은 실수해서 꿈꾸던 것과 전혀 다른 걸 사기 마련이지. 니콜라이는 중개인을 통해 빚을 떠안는 조건으로 120헥타르 남짓한 땅을 샀네. 주인집과 하인 숙소와 공원은 있었지만, 과수원도 구스베리도 오리 떠다니는 연못도 없었지. 강이 있긴 했는데 물빛이 커피 같았네. 영지 한쪽에는 벽돌 공장이, 다른 쪽에는 뼈를 태우는 공장이 있었거든. 하지만 우리 니콜라이 이바니치는 별로 슬퍼하지 않았네. 구스베리 덤불 스무 그루를 주문해서 심고는 지주로 살기 시작했지.
작년에 나는 그를 보러 갔네. 가서 어떻게 사는지 좀 봐야지 싶었지. 동생은 편지에 자기 영지를 이렇게 불렀네. 춤바로클로바 황무지, 일명 히말라이스코예. 나는 오후에 그 「일명 히말라이스코예」에 닿았네. 더웠지. 사방에 도랑이며 담장이며 울타리가 있고, 전나무가 줄줄이 심겨 있어서 어떻게 마당에 들어가야 할지, 말을 어디 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네. 집 쪽으로 가는데 돼지 같은 뚱뚱한 누렁개가 나를 맞으러 나왔네. 짖고 싶은데 귀찮은 눈치였지. 부엌에서 맨다리의 뚱뚱한 식모가 나왔는데, 그 여자도 돼지 같았네. 그 여자가 나리는 점심 뒤에 쉬고 계신다더군. 동생 방에 들어가 보니 그는 침대에 앉아 무릎에 이불을 덮고 있었네. 늙고 살찌고 몸이 늘어졌더군. 뺨과 코와 입술이 앞으로 튀어나와서, 금방이라도 이불에 대고 꿀꿀거릴 것 같았지.
우리는 껴안고 조금 울었네. 기뻐서, 그리고 언젠가는 젊었는데 이제는 둘 다 머리가 세고 죽을 때가 됐다는 서글픈 생각에. 그는 옷을 입고 나를 데리고 영지를 보여 주러 나섰네.
「그래, 여기서 어떻게 지내나?」 내가 물었네.
「뭐 그럭저럭, 하느님 덕분에 잘 지내.」
그는 이제 예전의 겁 많은 가난한 관리가 아니라 진짜 지주, 나리였네. 이곳에 자리 잡고 익숙해져서 맛을 들였더군. 많이 먹고, 목욕탕에서 씻고, 살이 찌고, 벌써 마을 공동체며 두 공장과 소송을 벌이고 있었고, 농부들이 자기를 「영감마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몹시 언짢아했네. 자기 영혼도 나리답게 점잖게 돌보았고, 좋은 일도 그냥 하지 않고 거드름을 피우며 했지. 무슨 좋은 일이냐고? 농부들의 온갖 병을 소다와 피마자기름으로 고쳐 주고, 자기 명명일에는 마을 한가운데서 감사 기도회를 올린 다음 보드카를 반 통 내놓았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던 거야. 아, 그 끔찍한 보드카 반 통! 오늘은 뚱뚱한 지주가 가축이 밭을 망쳤다며 농부들을 지방 행정관에게 끌고 가고, 내일 잔칫날에는 보드카를 반 통 내놓으면, 농부들은 마시고 만세를 부르고 취해서 그의 발치에 엎드려 절을 하지. 생활이 나아지고 배부르고 할 일이 없어지면 러시아 사람에게는 자만심이, 그것도 가장 뻔뻔한 자만심이 자라나네. 예전에 재무국에서는 자기 혼자만의 생각을 갖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니콜라이 이바니치가 이제는 진리만 말했고, 그것도 장관 같은 말투로 말했네. 「교육은 필요하지만 민중에게는 아직 이르다」, 「매질은 대체로 해롭지만 어떤 경우에는 쓸모 있고 대신할 것이 없다」.
「나는 민중을 알고 다룰 줄 알아.」 그는 말했네. 「민중은 나를 좋아해.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민중은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줄 거야.」
그리고 이 모든 말을, 잘 들어 보게, 영리하고 선량한 미소를 띠고 했다네. 그는 「우리 귀족은」, 「나는 귀족으로서」라는 말을 스무 번은 되풀이했네. 우리 할아버지가 농부였고 아버지가 병사였다는 건 이미 잊은 게 분명했지. 따지고 보면 어울리지도 않는 우리 성 침샤히말라이스키조차 이제 그에게는 울림이 좋고 고귀하고 아주 듣기 좋은 이름으로 여겨졌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네. 그의 영지에 있던 그 몇 시간 동안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야기하고 싶네. 저녁에 차를 마실 때, 식모가 구스베리를 한 접시 가득 식탁에 내왔네. 산 것이 아니라 그 집에서 난 구스베리, 덤불을 심은 뒤로 처음 딴 구스베리였지. 니콜라이 이바니치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잠시 말없이, 눈물을 글썽이며 구스베리를 바라보았네. 너무 벅차서 말을 못 했던 거야. 그러고는 한 알을 입에 넣고, 마침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네.
「정말 맛있어!」
그리고 그는 허겁지겁 먹으며 자꾸 되풀이했네.
「아, 정말 맛있어! 형도 먹어 봐!」
딱딱하고 시었네. 하지만 푸시킨이 말했듯이 「수많은 진실보다 우리를 높여 주는 속임수가 더 소중하다」. 나는 행복한 사람을 보았네. 소중한 꿈이 그렇게 뚜렷하게 이루어진 사람, 삶의 목표에 이르러 원하던 것을 얻은 사람, 자기 운명과 자기 자신에게 만족한 사람을.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면 어째서인지 늘 무언가 서글픈 것이 섞여들었는데, 이제 행복한 사람을 보자 절망에 가까운 무거운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네. 밤이 특히 괴로웠지. 내 잠자리는 동생 침실 옆방에 마련됐는데, 동생이 잠들지 못하고 일어나 구스베리 접시로 가서 한 알씩 집어 먹는 소리가 들렸네. 나는 생각했지. 따지고 보면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 얼마나 짓누르는 힘인가! 이 삶을 보게. 강한 자들의 뻔뻔함과 게으름, 약한 자들의 무지와 짐승 같은 처지, 사방에 말도 안 되는 가난, 비좁음, 타락, 술주정, 위선, 거짓말……. 그런데도 모든 집과 거리에는 고요와 평온뿐이야. 도시에 사는 오만 명 가운데 소리 지르는 사람, 큰 소리로 분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 우리는 장 보러 시장에 가고, 낮에 먹고 밤에 자고, 제 헛소리를 하고, 결혼하고 늙고, 태평하게 제 죽은 이들을 묘지로 끌고 가는 사람들은 보지만,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네. 삶에서 무서운 일은 어딘가 무대 뒤에서 벌어지지. 모든 것이 조용하고 평온하고, 항의하는 건 말 없는 통계뿐이야. 몇 명이 미쳤고, 술이 몇 통 들어갔고, 아이 몇이 굶어 죽었다고……. 그리고 이런 질서가 필요한 게 분명하네. 행복한 사람이 기분 좋은 건 불행한 사람들이 말없이 제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고, 이 침묵이 없다면 행복은 있을 수 없는 게 분명하지. 이건 모두가 걸린 최면이네.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의 문 뒤에는 누군가 작은 망치를 들고 서서,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가 아무리 행복해도 삶은 머지않아 그에게 발톱을 드러내고 불행이, 병이, 가난이, 잃음이 닥치리라는 것을, 그러면 지금 그가 남들을 보지도 듣지도 않듯이 아무도 그를 보지도 듣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두드려서 늘 일깨워 주어야 하네. 하지만 망치를 든 사람은 없고, 행복한 사람은 그저 제 살길을 살고, 자잘한 살림 걱정이 바람이 사시나무를 흔들듯 그를 살짝 흔들 뿐이지. 그리고 모든 것이 다 평안하네.
「그날 밤 나는 나도 얼마나 만족하고 행복했는지 알게 됐네.」 이반 이바니치가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나도 점심을 먹으며, 사냥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민중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가르쳤지. 나도 배움은 빛이고 교육은 필요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직 글만 깨쳐도 충분하다고 했네. 자유는 좋은 것이다, 자유 없이는 공기 없이 못 살듯 살 수 없다, 하지만 기다려야 한다고 나는 말했지. 그래, 나는 그렇게 말했네. 그런데 이제 묻겠네. 무엇을 위해 기다린단 말인가?」 이반 이바니치가 화난 얼굴로 부르킨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을 위해 기다린단 말인가, 내가 묻는 걸세. 무슨 이유로? 사람들은 내게 모든 게 한꺼번에 되지는 않는다고, 어떤 생각이든 삶에서는 차츰,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고 하지. 하지만 누가 그런 말을 하나? 그게 옳다는 증거가 어디 있나? 자네들은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를, 현상의 법칙을 들먹이지. 하지만 살아 있고 생각하는 사람인 내가 도랑 앞에 서서, 어쩌면 그걸 뛰어넘거나 그 위에 다리를 놓을 수도 있는데, 도랑이 저절로 메워지거나 진흙으로 덮이기를 기다리는 것에 무슨 질서와 법칙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다시 묻네만, 무엇을 위해 기다린단 말인가? 살 힘이 없는데도 기다리라니, 그런데 살아야 하고 살고 싶은데!
그때 나는 아침 일찍 동생 집을 떠났고, 그 뒤로 나는 도시에 있는 게 견딜 수 없어졌네. 고요와 평온이 나를 짓누르고, 창문을 보기가 두렵네. 식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행복한 가족보다 더 괴로운 광경이 이제 내게는 없거든. 나는 이미 늙어서 싸움에는 쓸모가 없고, 미워할 힘조차 없네. 그저 마음으로 슬퍼하고, 짜증 내고, 속을 끓일 뿐이지. 밤이면 밀려드는 생각에 머리가 달아올라 잠을 잘 수가 없네……. 아, 내가 젊다면!」
이반 이바니치는 흥분해서 방 이쪽 구석에서 저쪽 구석으로 거닐며 되풀이했다.
「내가 젊다면!」
그는 갑자기 알료힌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이 손 저 손 번갈아 잡고 흔들었다.
「파벨 콘스탄티니치,」 그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주하지 말게, 잠들지 말게! 젊고 튼튼하고 기운이 있는 동안, 좋은 일 하기를 지치지 말게! 행복은 없고, 있어서도 안 되네. 삶에 뜻과 목적이 있다면, 그 뜻과 목적은 결코 우리의 행복에 있지 않고 무언가 더 지혜롭고 위대한 것에 있네. 좋은 일을 하게!」
이반 이바니치는 이 모든 말을 마치 자기 자신을 위해 부탁하듯 애처롭게 비는 미소를 띠고 했다.
그런 다음 셋은 응접실 서로 다른 구석의 안락의자에 앉아 말이 없었다. 이반 이바니치의 이야기는 부르킨도 알료힌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어스름 속에서 살아 있는 것 같은 장군들과 부인들이 금빛 액자 속에서 내다보는데, 구스베리를 먹은 가난한 관리 이야기를 듣는 건 지루했다. 어째서인지 우아한 사람들 이야기, 여자들 이야기를 하고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응접실에 앉아 있다는 것, 덮개를 씌운 샹들리에도 안락의자도 발밑의 양탄자도 모두, 지금 액자 속에서 내다보는 바로 그 사람들이 언젠가 여기를 거닐고 앉고 차를 마셨다고 말해 준다는 것, 그리고 지금 여기를 아름다운 펠라게야가 소리 없이 오간다는 것, 그것이 어떤 이야기보다 나았다.
알료힌은 몹시 졸렸다. 그는 농장 일 때문에 새벽 세 시도 안 돼 일어났고, 지금은 눈꺼풀이 자꾸 붙었지만, 자기 없이 손님들이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까 봐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반 이바니치가 방금 한 말이 지혜로운지, 옳은지는 깊이 따져 보지 않았다. 손님들이 곡식이나 건초나 타르가 아니라 자기 삶과 바로 닿아 있지 않은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그는 기뻤고, 그들이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제 잘 시간이군요.」 부르킨이 일어서며 말했다. 「편히 주무십시오.」
알료힌은 인사하고 아래층 자기 방으로 내려갔고, 손님들은 위층에 남았다. 둘에게는 밤 동안 큰 방 하나가 내어졌다. 조각 장식이 있는 오래된 나무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구석에는 상아로 만든 십자고상이 있었다. 아름다운 펠라게야가 깔아 준 넓고 서늘한 잠자리에서는 새로 빤 침구 냄새가 기분 좋게 났다.
이반 이바니치는 말없이 옷을 벗고 누웠다.
「주여, 저희 죄인들을 용서하소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머리까지 이불을 덮었다.
탁자 위에 놓인 그의 파이프에서 묵은 담배 냄새가 짙게 났고, 부르킨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고 이 무거운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빗줄기가 밤새 창을 두드렸다.
사랑에 대하여
이튿날 아침 식사로는 아주 맛있는 피로시키와 가재와 양고기 커틀릿이 나왔다. 그리고 다들 먹는 동안 요리사 니카노르가 위층으로 올라와 손님들이 점심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그는 중간 키에 얼굴이 통통하고 눈이 작은 사내였는데, 수염을 말끔히 밀어서 콧수염도 깎은 게 아니라 뽑아낸 것 같았다.
알료힌은 아름다운 펠라게야가 이 요리사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술꾼에다 성미가 사나워서 펠라게야는 그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냥 함께 사는 건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신앙심이 아주 깊어서 종교적 믿음 때문에 그렇게 살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졸랐고, 그렇지 않으면 싫다고 했으며, 취하면 그녀에게 욕을 하고 때리기까지 했다. 그가 취하면 그녀는 위층에 숨어 흐느껴 울었고, 그러면 알료힌과 하인들은 여차하면 그녀를 지키려고 집을 비우지 않았다.
사랑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사랑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료힌이 말했다. 「펠라게야가 왜 마음으로나 겉모습으로나 자기에게 더 어울리는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하필 니카노르를, 이 낯짝을(여기서는 다들 그를 낯짝이라고 부르거든요) 사랑하게 됐는지, 사랑에서는 개인의 행복이 걸린 문제가 중요한 만큼 이 모든 건 알 수가 없고, 이 모든 걸 얼마든지 제멋대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랑에 대해 말해진 반박할 수 없는 진리는 딱 하나, 「이 비밀이 크도다」라는 것뿐이지요. 사랑에 대해 쓰고 말한 나머지 모든 것은 답이 아니라 물음을 던진 것일 뿐이고, 그 물음들은 끝내 풀리지 않은 채 남았습니다. 한 경우에 들어맞는 듯한 설명이 다른 열 경우에는 벌써 들어맞지 않으니, 제 생각에 가장 좋은 건 일반화하려 들지 말고 경우마다 따로 설명하는 겁니다. 의사들 말처럼 경우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다뤄야 하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부르킨이 맞장구쳤다.
「우리 러시아 사람들, 점잖은 사람들은 이렇게 풀리지 않고 남는 물음들을 몹시 좋아합니다. 보통 사랑은 시로 노래하고 장미와 꾀꼬리로 꾸미는데, 우리 러시아 사람들은 이런 숙명적인 물음들로 사랑을 꾸미고, 그것도 그 가운데 가장 재미없는 것들을 고르지요. 제가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 모스크바에서 저에게 동거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사랑스러운 여자였는데, 제가 안아 줄 때마다 제가 다달이 얼마를 줄지, 요즘 쇠고기가 한 근에 얼마인지 생각하더군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하면서도 끝없이 자기에게 묻습니다. 이게 정직한 일인가 아닌가, 현명한가 어리석은가, 이 사랑이 어디로 이어질까 하고요. 그게 좋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방해가 되고 만족을 주지 못하고 짜증 나게 한다는 건 압니다.」
그는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았다. 홀로 사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늘 기꺼이 털어놓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도시의 독신 남자들은 오직 말을 나누려고 일부러 목욕탕이나 식당에 가서, 때로는 목욕탕 일꾼이나 웨이터에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시골에서는 대개 손님들 앞에서 마음을 쏟아 놓는다. 지금 창밖으로는 잿빛 하늘과 비에 젖은 나무들이 보였다. 이런 날씨에는 갈 데도 없고, 이야기하고 듣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저는 소피노에 살면서 농사를 지은 지 오래됐습니다.」 알료힌이 시작했다. 「대학을 마친 뒤로 줄곧이지요. 자라기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자랐고, 성향으로는 서재에 틀어박히는 사람인데, 제가 여기 왔을 때 영지에는 큰 빚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빚을 진 건 어느 정도는 제 교육에 돈을 많이 쓰셨기 때문이라, 저는 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여기를 떠나지 않고 일하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렇게 마음먹고 여기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얼마간 진저리를 치면서요. 이곳 땅은 소출이 많지 않아서, 농사로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농노나 머슴의 품을 쓰거나, 그 둘은 거의 같은 거지만요, 아니면 농부처럼, 그러니까 제 식구와 함께 직접 밭에 나가 일해야 합니다. 그 중간은 없지요. 하지만 그때는 그런 세세한 데까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땅 한 뙈기도 놀리지 않았고, 이웃 마을 농부와 아낙들을 다 불러 모았고, 일이 미친 듯이 들끓었습니다. 저도 직접 밭 갈고 씨 뿌리고 풀 베었는데, 그러면서도 지루해하고 역겨워 얼굴을 찌푸렸지요. 배가 고파서 텃밭의 오이를 먹는 시골 고양이처럼요. 몸은 쑤시고, 걸으면서도 졸았습니다. 처음에는 이 노동하는 생활을 제 교양 있는 습관과 쉽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려면 삶에서 어느 정도 겉모양의 질서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저는 여기 위층 손님용 방에 자리 잡고, 아침과 점심 뒤에는 리큐어를 곁들인 커피를 내오게 하고, 잠자리에 들 때는 밤마다 〈유럽 통보〉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우리 신부님 이반 신부가 와서 한자리에서 제 리큐어를 다 마셔 버렸고, 〈유럽 통보〉도 신부님 딸들에게 가 버렸습니다. 여름에는, 특히 풀 벨 때는 침대까지 갈 틈도 없어서 헛간의 썰매 안이나 숲속 산지기 오두막 같은 데서 잠들었으니, 독서는 무슨 독서겠습니까? 저는 조금씩 아래층으로 내려가 하인들 부엌에서 점심을 먹게 됐고, 예전의 호사에서 남은 건 아버지 때부터 일하던 이 하인들뿐입니다. 이들을 내보내기는 마음이 아팠을 테니까요.
여기 온 지 처음 몇 해 만에 저는 명예 치안판사로 뽑혔습니다. 가끔 도시에 나가 치안판사 회의며 지방법원 재판에 참석해야 했는데, 그게 기분 전환이 됐지요. 여기서 두세 달 꼼짝 않고 지내다 보면, 특히 겨울에는, 결국 검은 프록코트가 그리워집니다. 지방법원에는 프록코트도, 제복도, 연미복도 있었고, 모두 법률가들, 교육받은 사람들이라 말 상대가 있었지요. 썰매 안에서 자고 하인들 부엌에서 먹다가, 깨끗한 속옷에 가벼운 구두를 신고 가슴에 시곗줄을 늘어뜨리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으면, 그게 얼마나 호사인지요!
도시에서는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저도 기꺼이 사람들을 사귀었습니다. 그 모든 사귐 가운데 가장 깊고, 사실을 말하자면 가장 즐거웠던 건 지방법원 부원장 루가노비치와의 사귐이었지요. 두 분 다 그를 아실 겁니다. 아주 좋은 사람이지요. 마침 그 유명한 방화 사건 재판이 끝난 직후였습니다. 심리가 이틀이나 이어져서 우리는 지쳐 있었지요. 루가노비치가 저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저기,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드시지요.」
뜻밖이었습니다. 저는 루가노비치와 공적으로만 조금 알았지 한 번도 그의 집에 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저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잠깐 제 숙소에 들렀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루가노비치의 아내 안나 알렉세예브나와 알게 될 기회가 생겼지요. 그때 그녀는 아직 아주 젊어서 스물두 살이 넘지 않았고, 반년 전에 첫아이를 낳았습니다. 지난 일이라, 지금은 그녀의 무엇이 그토록 특별했는지, 무엇이 그렇게 제 마음에 들었는지 딱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그때 저녁 식탁에서는 모든 것이 물리칠 수 없을 만큼 분명했습니다. 저는 젊고 아름답고 선하고 교양 있고 매혹적인 여자를, 그때까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여자를 보았지요. 그리고 곧바로 그녀에게서 가깝고 이미 낯익은 존재를 느꼈습니다. 마치 이 얼굴을, 이 다정하고 영리한 눈을 언젠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서랍장 위에 놓여 있던 사진첩에서 본 것처럼요.
방화 사건에서는 유대인 넷이 기소되어 일당으로 인정됐는데, 제 생각에는 전혀 근거가 없었습니다. 저녁 식탁에서 저는 몹시 흥분했고 마음이 무거웠지요.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안나 알렉세예브나는 줄곧 고개를 저으며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드미트리,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루가노비치는 사람 좋은 이였습니다. 사람이 일단 재판에 걸리면 죄가 있는 것이고, 판결이 옳은지 의심하려면 법에 정한 절차대로 서류로 해야지 저녁 식탁이나 사사로운 대화에서 할 일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을 굳게 지키는, 그런 순박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지요.
「우리는 불을 지르지 않았잖습니까.」 그가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재판도 안 받고 감옥에도 안 가지요.」
부부는 둘 다 제가 더 먹고 더 마시도록 애썼습니다. 몇 가지 사소한 것들로, 이를테면 둘이 함께 커피를 끓이는 모습이나 말을 반만 해도 서로 알아듣는 모습으로, 저는 그들이 화목하고 평안하게 살며 손님을 반가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지요. 저녁 뒤에는 둘이 피아노를 연탄했고, 그러다 날이 어두워져서 저는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이른 봄이었지요. 그 뒤로 여름 내내 저는 소피노에서 꼼짝 않고 지냈고 도시를 떠올릴 틈조차 없었지만, 날씬한 금발 여자의 기억은 날마다 제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녀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옅은 그림자가 제 영혼 위에 드리워 있는 것 같았지요.
늦가을에 도시에서 자선 공연이 있었습니다. 제가 지사의 칸막이 관람석에 들어가 보니(막간에 그리로 초대를 받았거든요), 지사 부인 옆에 안나 알렉세예브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똑같은, 물리칠 수 없는, 가슴을 치는 아름다움과 사랑스럽고 다정한 눈의 인상이, 다시 그 똑같은 가까움이 느껴졌지요.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가, 그다음엔 휴게실을 거닐었습니다.
「야위셨네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편찮으셨어요?」
「네. 어깨에 감기가 들어서, 비 오는 날이면 잠을 잘 못 잡니다.」
「기운이 없어 보이세요. 그때, 봄에 저녁 드시러 오셨을 때는 더 젊고 기운차 보이셨는데. 그때는 열정이 넘쳐서 말씀도 많이 하시고 아주 재미있으셨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도 조금 끌렸어요. 어째서인지 여름 동안 자주 생각났고, 오늘 극장에 오려고 준비할 때는 뵐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웃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기운이 없어 보이세요.」 그녀가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면 나이 들어 보여요.」
이튿날 저는 루가노비치네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아침 뒤에 부부는 겨울나기 준비를 하러 별장에 갔고, 저도 함께 갔지요. 그들과 함께 도시로 돌아와, 한밤중에 조용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차를 마셨습니다. 벽난로가 타고 있었고, 젊은 엄마는 딸아이가 잘 자는지 보러 자꾸 자리를 떴지요. 그 뒤로 저는 도시에 갈 때마다 꼭 루가노비치네에 들렀습니다. 그들은 제게 익숙해졌고, 저도 익숙해졌지요. 저는 보통 집안 사람처럼 알리지도 않고 들어갔습니다.
「누구예요?」 저 안쪽 방에서 길게 끄는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제게는 그 목소리가 그토록 아름답게 들렸습니다.
「파벨 콘스탄티니치예요.」 하녀나 유모가 대답했지요.
안나 알렉세예브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와서 매번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래 안 오셨어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녀의 눈길, 제게 내미는 우아하고 고결한 손, 그녀의 집안 옷차림, 머리 모양, 목소리, 발소리는 매번 제게 똑같은 인상을, 제 삶에서 무언가 새롭고 특별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래 이야기하고, 오래 말없이 저마다 제 생각에 잠기기도 했고, 그녀가 저에게 피아노를 쳐 주기도 했지요. 집에 아무도 없으면 저는 남아서 기다렸습니다. 유모와 이야기하거나 아이와 놀거나, 서재의 터키식 소파에 누워 신문을 읽었지요. 그러다 안나 알렉세예브나가 돌아오면 현관에서 맞이해 그녀가 산 물건들을 다 받아 들었는데, 어째서인지 매번 그 물건들을 어린 소년처럼 그토록 사랑스럽게, 그토록 의기양양하게 들고 갔습니다.
걱정 없던 아낙이 돼지 새끼를 사서 걱정을 샀다는 속담이 있지요. 걱정 없던 루가노비치 부부는 저와 친해져서 걱정을 샀습니다. 제가 한동안 도시에 오지 않으면 제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이었고, 두 사람은 몹시 걱정했습니다. 그들은 외국어도 아는 교육받은 사람인 제가 학문이나 글쓰기를 하지 않고 시골에 살면서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맴돌고, 일은 많이 하는데 늘 빈털터리인 것을 걱정했지요. 그들 눈에는 제가 괴로워하고, 제가 말하고 웃고 먹는 것도 다 괴로움을 감추려는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기분이 좋은 즐거운 순간에도 저는 그들의 살피는 눈길을 느꼈지요. 그들은 제가 정말로 힘들 때, 어떤 채권자가 저를 몰아붙이거나 급히 갚을 돈이 모자랄 때 특히 마음을 울렸습니다. 부부가 창가에서 소곤거리다가, 그가 진지한 얼굴로 제게 다가와 말했지요.
「파벨 콘스탄티니치, 지금 돈이 필요하시면, 저와 아내가 부탁드리니 어려워 마시고 저희한테서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그의 귀가 흥분으로 빨개졌습니다. 또 그렇게 창가에서 소곤거린 다음 그가 귀가 빨개져서 제게 다가와 이렇게 말할 때도 있었지요.
「저와 아내가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그러고는 커프스단추나 담뱃갑이나 램프를 건넸고, 저는 그 답례로 시골에서 잡은 새와 버터와 꽃을 보냈습니다. 덧붙이자면 두 사람 다 넉넉한 사람들이었지요. 처음에 저는 돈을 자주 꾸었고, 별로 가리지도 않고 꿀 수 있는 데서는 다 꿨지만, 루가노비치네에서만은 어떤 힘도 저에게 돈을 꾸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얘기는 해서 뭐 하겠습니까!
저는 불행했습니다. 집에서도 밭에서도 헛간에서도 그녀를 생각했고, 젊고 아름답고 영리한 여자가 재미없는 남자, 거의 노인과 다름없는 남자(남편은 마흔이 넘었습니다)에게 시집가서 그의 아이를 낳는 비밀을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이 재미없는 남자의 비밀도 이해하려 애썼지요. 그토록 지루한 상식으로 따지고, 무도회나 저녁 모임에서는 점잖은 사람들 곁에 붙어 있는, 기운 없고 쓸모없고, 팔려고 끌려 나온 것처럼 순순하고 무심한 표정을 한 이 사람 좋고 순박한 사람이, 그런데도 자기가 행복할 권리, 그녀에게서 아이를 얻을 권리를 믿는다는 것을요. 그리고 저는 줄곧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왜 그녀가 하필 그를 만나고 저를 만나지 못했는지, 우리 삶에 이토록 끔찍한 잘못이 일어나야 했던 건 무엇 때문인지.
도시에 갈 때마다 저는 그녀의 눈을 보고 그녀가 저를 기다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녀도 아침부터 어딘가 특별한 느낌이 들어서 제가 오리라는 걸 짐작했다고 털어놓았지요. 우리는 오래 이야기하고 말없이 있었지만,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고, 그것을 수줍게, 질투하듯 감추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조차 우리 비밀을 드러낼 수 있는 모든 것이 두려웠지요. 저는 부드럽게, 깊이 사랑했지만 따졌습니다. 우리에게 이 사랑과 싸울 힘이 없다면 우리 사랑이 어디로 이어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었지요. 제 이 조용하고 슬픈 사랑이 갑자기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과, 저를 그토록 사랑하고 믿어 주던 이 집 전체의 행복한 삶의 흐름을 거칠게 끊어 버린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게 정직한 일일까요? 그녀는 저를 따라왔겠지만, 어디로요? 제가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었겠습니까? 제게 아름답고 흥미로운 삶이 있었다면, 이를테면 제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거나 이름난 학자나 배우나 화가였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 하나에서 그와 똑같은, 아니 더 평범한 일상으로 그녀를 끌고 가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 행복은 얼마나 오래갔을까요? 제가 병들거나 죽으면, 아니면 그저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녀도 비슷하게 따졌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아이들을, 남편을 아들처럼 사랑하는 자기 어머니를 생각했지요. 자기 감정에 몸을 맡긴다면 거짓말을 하거나 진실을 말해야 했을 텐데, 그녀 처지에서는 둘 다 똑같이 무섭고 거북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물음이 그녀를 괴롭혔지요. 자기 사랑이 저에게 행복을 줄까, 그러잖아도 힘들고 온갖 불행으로 가득한 제 삶을 더 꼬이게 하지 않을까? 그녀는 자기가 이제 제게는 충분히 젊지 않고, 새 삶을 시작할 만큼 부지런하고 기운차지도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자주, 제가 영리하고 훌륭한 아가씨, 좋은 안주인이자 내조자가 될 아가씨와 결혼해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곧바로 온 도시를 뒤져도 그런 아가씨는 찾기 어려울 거라고 덧붙였지요.
그러는 사이 해가 갔습니다. 안나 알렉세예브나에게는 벌써 아이가 둘이었지요. 제가 루가노비치네에 가면 하인들은 반갑게 웃었고, 아이들은 파벨 콘스탄티니치 아저씨가 왔다고 소리치며 제 목에 매달렸습니다. 모두가 기뻐했지요. 제 영혼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몰랐고, 저도 기뻐하는 줄 알았습니다. 모두가 저를 고결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방 안을 고결한 존재가 거닐고 있다고 느꼈고, 그것이 저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어떤 특별한 매력을 더했지요. 마치 제가 있으면 그들의 삶도 더 깨끗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처럼요. 안나 알렉세예브나와 저는 함께 극장에 갔는데, 매번 걸어서 갔습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어깨가 닿았고, 저는 말없이 그녀 손에서 오페라글라스를 받아 들었지요. 그럴 때면 그녀가 제게 가깝다는 것을, 그녀가 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서로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상한 착오 때문인지, 극장을 나오면 우리는 매번 남남처럼 작별하고 헤어졌습니다. 도시에서는 벌써 우리를 두고 별의별 말이 다 돌았지만, 그 모든 말 가운데 진실은 한마디도 없었지요.
마지막 몇 해 동안 안나 알렉세예브나는 어머니 집에, 언니 집에 더 자주 가 있었습니다. 기분이 우울할 때가 잦아졌고, 남편도 아이들도 보고 싶지 않을 때면 만족스럽지 못한, 망가진 삶이라는 의식이 찾아왔지요. 그녀는 벌써 신경 쇠약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이 없었고, 줄곧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들 앞에서는 그녀가 저에게 어딘가 이상하게 짜증을 냈지요. 제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제 말에 동의하지 않았고, 제가 누구와 논쟁하면 제 상대편을 들었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떨어뜨리면 그녀는 차갑게 말했지요.
「축하드려요.」
극장에 가면서 제가 오페라글라스를 잊고 오면, 나중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잊으실 줄 알았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삶에는 언젠가 끝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별할 때가 왔지요. 루가노비치가 서부 어느 현의 법원장으로 임명됐거든요. 가구며 말이며 별장을 팔아야 했습니다. 별장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정원과 초록 지붕을 마지막으로 보려고 뒤돌아볼 때, 모두가 서글펐고, 저는 작별해야 할 것이 별장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팔월 말에 의사들이 보내는 크림반도로 안나 알렉세예브나를 우리가 먼저 배웅하고, 조금 뒤에 루가노비치가 아이들을 데리고 서부의 그 현으로 떠나기로 정해졌지요.
우리는 여럿이 함께 안나 알렉세예브나를 배웅했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아이들과 이미 작별하고 세 번째 종이 울리기까지 한순간밖에 남지 않았을 때, 저는 그녀가 하마터면 잊고 갈 뻔한 바구니 하나를 선반에 올려 주려고 그녀의 객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해야 했지요. 거기, 객실 안에서 우리 눈길이 마주쳤을 때, 우리 둘 다 마음의 힘이 다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그녀를 껴안았고, 그녀는 제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눈에서 눈물이 흘렀지요. 눈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과 어깨와 손에 입 맞추며, 오, 우리는 얼마나 불행했는지! 저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타는 듯한 가슴 아픔과 함께 깨달았지요.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게 막던 모든 것이 얼마나 쓸데없고 하찮고 거짓된 것이었는지를. 사랑할 때는 그 사랑에 대해 따지더라도, 흔히 말하는 행복이나 불행, 죄나 미덕보다 더 높고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아니면 아예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고 손을 꼭 잡았고,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영영. 기차는 벌써 움직이고 있었지요. 저는 옆 객실에 앉아, 객실은 비어 있었습니다, 첫 역까지 거기 앉아 울었습니다. 그러고는 소피노까지 걸어서 돌아왔지요…….」
알료힌이 이야기하는 동안 비가 그치고 해가 났다. 부르킨과 이반 이바니치는 발코니로 나갔다. 거기서는 정원과, 이제 햇빛 아래 거울처럼 반짝이는 물굽이가 아름답게 보였다. 그들은 경치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 안타까워했다. 그토록 진솔하게 이야기해 준 이 착하고 영리한 눈을 가진 사람이, 학문이나 그 밖에 자기 삶을 더 즐겁게 해 줄 무언가를 하지 않고, 정말로 여기 이 거대한 영지에서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맴돌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들은 그가 객실에서 작별하며 얼굴과 어깨에 입 맞출 때 그 젊은 부인의 얼굴이 얼마나 슬펐을지 생각했다. 둘 다 도시에서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고, 부르킨은 그녀와 아는 사이이기까지 해서 그녀를 아름답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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