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D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 Unterm Rad (1906)

약 330쪽 · 291분

작은 슈바르츠발트 마을의 수재 한스 기벤라트는 주 시험에 이등으로 붙어 마울브론 신학교에 들어간다. 아버지와 교사들의 기대 속에 밤마다 공부하던 소년은 시인 기질의 친구 하일너를 만나며 흔들리고, 「지치면 수레바퀴 아래 깔린다」는 말 그대로 무너져 간다. 헤세가 자기 학창 시절을 담은 소설.

1장

중개상이자 대리인인 요제프 기벤라트 씨는 이웃 시민들보다 나은 점도 별난 점도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도 남들처럼 넓적하고 튼튼한 몸집에, 그럭저럭 장사 재주가 있었고, 거기에 돈을 향한 진실하고 뜨거운 존경심을 지녔다. 또 정원 딸린 작은 집 한 채, 묘지에 가족 묘 하나, 조금 개명했다가 이제는 닳아서 해진 신앙심, 하느님과 관청에 대한 적당한 존경, 그리고 시민의 체면이라는 무쇠 같은 계명 앞에서의 맹목적인 복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술을 꽤 마셨지만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곁가지로 깨끗하지 못한 거래도 이것저것 했지만, 겉으로 허용된 선을 넘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은 거지 떼라고, 자기보다 부자인 사람은 졸부라고 욕했다. 시민 협회 회원이었고, 금요일마다 〈아들러〉 주점에서 케겔 놀이를 했으며, 빵 굽는 날이며 잔칫날 전야며 돼지 잡는 날 잔치에도 빠지지 않았다. 일할 때는 값싼 여송연을, 식사 뒤와 일요일에는 좀 더 고급인 것을 피웠다.

그의 속마음은 속물의 것이었다. 그에게 마음씨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 해도 오래전에 먼지가 앉아서, 대대로 이어진 무뚝뚝한 가족애와 자기 아들에 대한 자랑과 가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인심 말고는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그의 정신적 능력은 타고난, 딱 정해진 만큼의 약삭빠름과 셈 솜씨를 넘지 않았다. 읽는 것은 신문뿐이었고, 예술을 즐기려는 욕구는 해마다 열리는 시민 협회의 아마추어 공연과 이따금 서커스 구경이면 충분히 채워졌다.

그는 어느 이웃과 이름과 집을 바꿔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영혼 가장 깊은 곳, 자기보다 나은 힘과 인물에 대한 잠들 줄 모르는 의심, 일상을 벗어난 것, 더 자유롭고 섬세하고 정신적인 모든 것에 대해 시기심에서 자라난 본능적인 적의마저 그는 이 도시의 다른 모든 가장들과 나눠 가졌다.

그에 대해서는 이만하면 됐다. 이 얕은 삶과 그 삶이 알지 못하는 비극을 그려 내려면 아주 깊은 풍자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고, 이야기할 것은 그 아이다.

한스 기벤라트는 틀림없이 재능 있는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동떨어진 모습으로 돌아다니는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슈바르츠발트 시골 마을은 그런 인물을 길러 낸 적이 없었다. 이곳에서 좁은 울타리 밖까지 눈길이 닿고 영향을 미친 사람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가 진지한 눈과 영리한 이마와 섬세한 걸음걸이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어머니에게서일까? 어머니는 몇 해 전에 죽었고, 살아 있을 때도 늘 병약하고 근심에 차 있었다는 것 말고는 눈에 띄는 데가 없었다. 아버지는 따질 것도 없었다. 그러니 정말로 한번은 위에서 신비한 불꽃이 이 오래된 마을에 튀어 들어온 것이다. 팔구백 년 동안 착실한 시민은 숱하게 냈어도 재능이나 천재는 한 번도 내지 못한 마을에.

섬세하고 현대식 교육을 받은 관찰자라면 허약한 어머니와 집안의 오랜 내력을 떠올리며, 지능의 비대가 퇴화가 시작되는 증상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도시는 다행히도 그런 부류의 사람을 품고 있지 않았고, 관리와 교사 가운데 젊고 약삭빠른 몇 사람만이 잡지 기사에서 「현대인」이라는 것이 있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몰라도 살 수 있었고 교양 있는 사람일 수 있었다. 결혼 생활은 탄탄하고 흔히 행복했고, 삶 전체가 고칠 수 없을 만큼 구식이었다. 자리를 잡고 넉넉하게 사는 시민들, 그 가운데 몇몇은 지난 이십 년 사이에 수공업자에서 공장주가 된 사람들인데, 이들은 관리들 앞에서 모자를 벗고 그들과 사귀려고 애쓰면서도 자기들끼리는 그들을 거지 떼, 펜대 잡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에게는 자기 아들을 될 수만 있으면 대학에 보내 관리로 만드는 것보다 더 높은 야망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꿈은 거의 언제나 아름답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꿈으로 남았다. 자식들은 대개 라틴어 학교부터 끙끙 앓으며 몇 번씩 낙제를 거듭하고서야 겨우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한스 기벤라트의 재능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교사들, 교장, 이웃들, 목사, 같은 반 아이들, 누구나 그 아이가 머리가 좋고 아무튼 특별하다고 인정했다. 그것으로 그의 앞날은 정해지고 굳어졌다. 슈바벤 땅에서 재능 있는 소년에게는, 부모가 부자가 아니라면, 좁은 길이 딱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주 시험을 거쳐 신학교로, 거기서 튀빙겐 신학원으로, 그리고 그다음엔 설교단 아니면 교단으로. 해마다 이 고장 소년 서너 다스가 이 조용하고 안전한 길에 들어선다. 갓 견신례를 받은, 비쩍 마르고 공부에 지친 아이들이다. 그들은 나랏돈으로 인문학의 여러 분야를 거치고, 여덟아홉 해 뒤에 인생길의 둘째 토막, 대개는 더 긴 토막에 들어선다. 그 길에서 그들은 나라에서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

몇 주 뒤면 다시 「주 시험」이 열릴 참이었다. 해마다 바치는 이 거창한 제물을 그렇게 부르는데, 이 시험으로 「나라」가 이 고장의 정신적 꽃을 골라내고, 시험이 열리는 동안 작은 도시와 마을의 숱한 집안에서 한숨과 기도와 소원이 시험이 치러지는 수도를 향한다.

한스 기벤라트는 이 작은 도시가 그 괴로운 경쟁에 내보내려는 유일한 지원자였다. 큰 영광이었지만, 그 영광은 결코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네 시까지 이어지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교장에게 그리스어 보충 수업을 받았고, 여섯 시에는 목사님이 친절하게도 라틴어와 종교 복습 수업을 해 주었고, 일주일에 두 번은 저녁 식사 뒤에 수학 교사에게 한 시간씩 지도를 받았다. 그리스어에서는 불규칙 동사 다음으로 불변화사로 나타내는 갖가지 문장 연결이 특히 중시되었고, 라틴어에서는 문체가 맑고 간결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운율의 숱한 미묘함을 알아야 했고, 수학에서는 복잡한 비례 계산에 가장 힘을 쏟았다. 수학 선생이 자주 강조했듯이, 그런 계산은 나중의 공부와 삶에 겉보기에는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그건 정말 겉보기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아주 중요했고, 몇몇 주요 과목보다 더 중요했다. 논리적인 능력을 길러 주고, 맑고 냉철하고 성공적인 모든 사고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신이 지나치게 무리하지 않도록, 또 머리를 쓰는 연습에 매달리다 마음을 잊고 메마르게 하지 않도록, 한스는 매일 아침 수업 시작 한 시간 전에 견신례 교육에 나갈 수 있었다. 거기서는 브렌츠 교리문답과, 문답을 외우고 암송하는 자극적인 연습에서 신앙생활의 상쾌한 기운이 젊은 영혼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상쾌한 시간을 스스로 망쳐서 그 축복을 빼앗겼다. 그는 몰래 글을 적은 쪽지를, 그리스어와 라틴어 단어나 연습 문제를 교리문답 책 속에 끼워 넣고, 거의 한 시간 내내 이 세속의 학문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 아주 무뎌지지는 않아서, 그러는 동안 줄곧 괴로운 불안과 은근한 두려움을 느꼈다. 교구장이 가까이 오거나 그의 이름을 부르기라도 하면 그는 매번 흠칫 놀랐고, 대답을 해야 할 때면 이마에 땀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도 대답은 흠잡을 데 없이 맞았고 발음까지 정확했는데, 교구장은 그것을 무척 중시했다.

낮 동안 시간마다 쌓인 숙제, 쓰거나 외우거나 복습하고 예습할 것들은 밤늦게 집에서 아늑한 등불 아래서 해치울 수 있었다. 담임은 집안의 평화가 축복처럼 감싸 주는 이 조용한 공부가 특히 깊고 좋은 영향을 준다고 했는데, 이 공부는 화요일과 토요일에는 보통 열 시쯤까지만, 다른 날에는 열한 시, 열두 시, 이따금 그보다 늦게까지 이어졌다. 아버지는 등잔 기름이 한없이 드는 것을 두고 조금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이 공부를 흐뭇한 자랑으로 바라보았다. 여가가 생길 때와 일요일에는, 일요일이란 우리 삶의 칠분의 일이나 되니까, 학교에서 읽지 않는 몇몇 작가를 읽고 문법을 넉넉히 복습하라고 간곡히 권했다.

"물론 적당히, 적당히 해야지! 일주일에 한두 번 산책하는 건 꼭 필요하고 놀라운 효과가 있다. 날씨가 좋으면 책을 들고 밖에 나가도 되지. 바깥 맑은 공기 속에서 공부가 얼마나 쉽고 즐겁게 되는지 알게 될 거다. 아무튼 고개를 들어라!"

그래서 한스는 될 수 있는 대로 고개를 들고 다녔고, 이제부터는 산책도 공부하는 데 썼다. 그리고 잠이 모자란 얼굴과 둘레가 퍼레진 지친 눈으로, 말없이 겁먹은 채 돌아다녔다.

"기벤라트를 어떻게 보십니까? 붙긴 붙겠지요?" 담임이 언젠가 교장에게 말했다.

"붙고말고요, 붙고말고요." 교장이 환호했다. "아주 영리한 아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세요, 생김새부터가 영락없이 정신적이잖습니까."

마지막 여드레 동안 그 정신적인 모습은 눈에 띄게 뚜렷해졌다. 곱고 여린 소년의 얼굴에서 깊이 들어간 불안한 눈이 흐린 불꽃으로 타올랐고, 아름다운 이마에는 정신을 드러내는 가는 주름이 씰룩였으며, 안 그래도 가늘고 앙상한 팔과 손은 보티첼리를 떠올리게 하는 지친 우아함으로 늘어져 있었다.

마침내 때가 되었다. 내일 아침이면 그는 아버지와 함께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주 시험에서 자기가 신학교의 좁은 수도원 문으로 들어갈 만한지 보여 줘야 했다. 방금 그는 교장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온 참이었다.

"오늘 저녁에는," 그 무서운 지배자가 끝으로 여느 때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더 공부하면 안 된다. 약속해라. 내일 슈투트가르트에는 완전히 맑은 정신으로 나서야 한다. 한 시간쯤 산책하고 일찍 자거라. 젊은 사람은 잠을 자야 해."

한스는 걱정하던 잔소리 대신 그토록 따뜻한 말을 듣고 놀라서, 한숨 돌리며 학교 건물을 나섰다. 교회 언덕의 커다란 보리수들이 늦은 오후의 뜨거운 햇빛 속에서 흐릿하게 빛났고, 장터에서는 커다란 분수 두 개가 찰랑이며 반짝였고, 들쭉날쭉한 지붕들 너머로 가까운 산의 검푸른 전나무 숲이 들여다보였다. 소년은 그 모든 것을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 같았고, 모든 것이 여느 때 없이 아름답고 마음을 끌었다. 머리가 아프긴 했지만, 오늘은 더 공부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천천히 장터를 가로질러 옛 시청 앞을 지나, 장터 골목을 거쳐 칼 대장간 옆을 지나 옛 다리로 갔다. 거기서 한동안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넓은 난간에 걸터앉았다. 몇 주, 몇 달 동안 그는 날마다 네 번씩 이곳을 지나다녔지만, 작은 고딕식 다리 예배당에도, 강에도, 수문과 보와 물방앗간에도, 하다못해 멱 감는 풀밭에도, 버드나무가 늘어선 강둑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강둑에는 무두질 터가 줄지어 있었고, 거기서 강은 깊고 푸르고 호수처럼 고요했고, 휘어진 뾰족한 버들가지가 물속까지 늘어져 있었다.

이제 그는 이곳에서 보낸 숱한 반나절과 하루를 다시 떠올렸다. 이곳에서 얼마나 자주 헤엄치고 자맥질하고 노 젓고 낚시했던가. 아, 낚시! 그것도 이제는 거의 다 잊어버렸다. 지난해에는 시험 공부 때문에 낚시를 금지당하고 그토록 서럽게 울었다. 낚시! 그것이야말로 그 긴 학창 시절 내내 가장 좋은 일이었다. 엷은 버들 그늘 아래 서 있던 것, 가까이서 쏴 하고 울리던 물방앗간 보 소리, 깊고 고요한 물! 그리고 강 위에서 노니는 빛, 긴 낚싯대가 부드럽게 흔들리던 것, 입질이 오고 낚아챌 때의 흥분, 서늘하고 통통하고 꼬리를 파닥이는 물고기를 손에 쥐었을 때의 그 야릇한 기쁨!

그는 살진 잉어를 여러 마리 끌어 올렸고, 황어며 모래무지도, 맛 좋은 텐치도, 작고 드물고 빛깔 고운 연준모치도 낚았다. 그는 오래도록 물 위를 바라보았고, 푸른 강굽이 전체를 보고 있자니 생각에 잠기고 슬퍼져서, 아름답고 자유롭고 거칠던 소년 시절의 기쁨들이 아주 멀리 뒤에 남겨진 것 같았다. 그는 무심코 주머니에서 빵 한 조각을 꺼내 크고 작은 공으로 빚어 물에 던지고, 그것들이 가라앉아 물고기들에게 낚아채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먼저 아주 작은 송사리와 피라미 떼가 와서 작은 조각들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 큰 조각들은 배고픈 주둥이로 이리저리 밀고 다녔다. 그다음엔 좀 더 큰 황어 한 마리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둡고 넓적한 등이 바닥에서 희미하게 드러났다. 놈은 빵 공 둘레를 신중하게 한 바퀴 돌더니 갑자기 벌린 둥근 입속으로 그것을 사라지게 했다. 느릿느릿 흐르는 물에서 축축하고 따뜻한 냄새가 올라왔고, 밝은 구름 몇 점이 초록 수면에 흐릿하게 비쳤고, 물방앗간에서는 둥근 톱이 끙끙거렸고, 두 보가 서늘하고 낮은 소리로 어우러져 울렸다. 소년은 얼마 전에 있었던 견신례 일요일을 떠올렸다. 그날 그는 엄숙하고 감동적인 예식 한가운데서 속으로 그리스어 동사를 외우고 있는 자신을 붙잡았다. 요즘 들어 다른 때에도 그런 일이 잦았다. 생각이 뒤죽박죽되어서, 학교에서도 눈앞의 과제 대신 늘 앞의 것이나 뒤의 것을 생각했다. 이래서야 시험이 잘될 리가 있나!

그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 억센 손이 그의 어깨를 잡고 다정한 남자 목소리가 말을 걸어서 그는 몹시 놀랐다.

"안녕, 한스, 나랑 좀 걷겠니?"

구두장이 장인 플라이크였다. 예전에는 이따금 그의 집에서 저녁 한때를 보내곤 했지만, 지금은 오랫동안 가지 않았다. 한스는 따라 걸으면서 이 경건한 신앙인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플라이크는 시험 이야기를 하며 소년에게 행운을 빌고 용기를 북돋웠는데, 그 말의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시험이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우연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떨어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으며,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하느님은 영혼마다 특별한 뜻을 품고 계시고 저마다 제 길로 이끄신다는 것을 생각하라고 했다.

한스는 이 사람 앞에서 양심이 썩 깨끗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람과 그의 흔들림 없고 위엄 있는 성품을 존경했지만, 경건파 모임 사람들을 두고 하는 우스갯소리를 숱하게 들었고, 자기도 잘 알면서 거기 따라 웃은 적이 많았다. 게다가 자기의 비겁함도 부끄러웠다. 얼마 전부터 그는 구두장이의 날카로운 질문이 무서워 그를 거의 겁먹은 듯이 피해 다녔기 때문이다. 그가 교사들의 자랑이 되고 스스로도 조금 거만해진 뒤로, 플라이크 장인은 자주 그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콧대를 꺾으려 했다. 그러는 사이 소년의 영혼은 이 선량한 인도자에게서 차츰 미끄러져 나갔다. 한스는 소년다운 반항이 한창 피어날 나이여서, 자존심을 건드리는 달갑지 않은 손길에 아주 예민한 더듬이를 세우고 있었다. 이제 그는 말하는 사람 곁에서 걸으면서도, 그 사람이 얼마나 걱정스럽고 다정하게 자기를 내려다보는지 알지 못했다.

크로넨 골목에서 그들은 목사와 마주쳤다. 구두장이는 점잖고 차갑게 인사하고는 갑자기 바빠졌다. 목사는 새 유행을 따르는 사람이라 부활조차 믿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소년을 데리고 갔다.

"어떠니?" 그가 물었다. "이제 때가 되어서 기쁘겠구나."

"네, 차라리 잘됐어요."

"자, 잘해라! 우리 모두 너한테 희망을 걸고 있다는 거 알지. 라틴어에서는 특별히 잘하리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제가 떨어지면요." 한스가 수줍게 말했다.

"떨어진다고?!" 목사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떨어지는 건 그냥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냥 있을 수 없어. 무슨 그런 생각을 하니!"

"그냥, 혹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럴 수 없어, 한스, 그럴 수 없다. 그건 아주 안심해라. 그럼 아버지께 안부 전하고 용기를 내라!"

한스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구두장이 쪽을 돌아보았다. 그 사람은 뭐라고 했더라? 마음이 바른 자리에 있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기만 하면 라틴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 사람이야 말하기 쉽지. 그리고 이번엔 목사. 떨어지면 그 앞에는 아예 얼굴을 내밀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풀이 죽어 슬그머니 집으로, 비탈진 작은 정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오래전부터 쓰지 않는 썩어 가는 정원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 그는 거기에 판자로 우리를 짜서 삼 년 동안 토끼를 길렀다. 지난가을에 시험 때문에 토끼를 빼앗겼다. 그에게는 더 이상 놀 시간이 없었다.

정원에도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빈 우리는 쓰러질 것 같았고, 담 모퉁이의 종유석 장식은 무너졌고, 작은 나무 물레방아는 수도관 옆에 휘고 부서진 채 뒹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짓고 깎으며 즐거워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것도 벌써 두 해 전, 아득한 옛날이었다. 그는 작은 물레방아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구부리다가 아주 부숴 버리고 울타리 너머로 던졌다. 이런 건 치워 버려야지, 다 오래전에 끝난 일인데. 그러다 학교 친구 아우구스트가 떠올랐다. 아우구스트는 물레방아 만드는 것도, 토끼 우리 고치는 것도 도와주었다. 둘이서 오후 내내 여기서 놀았다. 새총을 쏘고, 고양이를 쫓아다니고, 천막을 치고, 새참으로 날 노란 당근을 먹었다. 그러다 출세 공부가 시작되었고, 아우구스트는 한 해 전에 학교를 그만두고 기계공 견습생이 되었다. 그 뒤로 그는 딱 두 번 얼굴을 비쳤다. 하긴 그 애도 이제 시간이 없었다.

구름 그림자가 골짜기 위를 서둘러 달려갔고, 해는 벌써 산등성이 가까이 걸려 있었다. 한순간 소년은 땅바닥에 몸을 던지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 대신 그는 헛간에서 손도끼를 가져와 가냘픈 팔로 허공에 휘두르고는 토끼 우리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판자가 사방으로 튀고, 못이 끼익 소리를 내며 휘었고, 지난여름의 썩은 토끼 먹이가 조금 드러났다. 그는 마치 그것으로 토끼와 아우구스트와 옛 어린 시절의 모든 놀이를 향한 그리움을 때려죽일 수라도 있다는 듯이 마구 내리쳤다.

"아니 아니 아니, 이게 무슨 짓이냐?" 아버지가 창문에서 소리쳤다. "거기서 뭐 하는 거냐?"

"땔감이요."

그는 더는 대답하지 않고 도끼를 내던지고는 마당을 가로질러 골목으로 나가, 강둑을 따라 위로 달렸다. 밖으로 나가 양조장 근처에 뗏목 두 개가 매여 있었다. 예전에 그는 이런 뗏목을 타고 따뜻한 여름 오후에 몇 시간이고 강을 따라 내려가곤 했다. 통나무 사이에서 철썩이는 물 위를 떠가면 흥분되면서도 졸음이 왔다. 그는 물에 뜬 헐거운 통나무로 건너뛰어 버들가지 더미 위에 누웠다. 그리고 뗏목이 떠가는 중이라고 상상해 보려 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머뭇거리며 풀밭과 밭과 마을과 서늘한 숲가를 지나고, 다리 밑과 들어 올린 수문 밑을 지나는 뗏목 위에 자기가 누워 있고,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서, 카프베르크에서 토끼 먹이를 뜯고, 강둑의 무두질 집 뜰에서 낚시를 하고, 아직 두통도 걱정도 없던 그때처럼.

그는 지치고 언짢은 채 저녁을 먹으러 집에 왔다. 아버지는 코앞에 닥친 슈투트가르트 시험 여행 때문에 어쩔 줄 모르게 들떠서, 책은 다 쌌는지, 검은 양복은 꺼내 놓았는지, 가는 길에 문법책을 좀 읽지 않겠는지, 몸은 괜찮은지 열 번도 넘게 물었다. 한스는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조금 먹고는 곧 잘 자라고 인사했다.

"잘 자라, 한스. 푹 자거라! 그럼 내일 여섯 시에 깨우마. 사전책도 안 잊었지?" "네, '사전책' 안 잊었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는 자기 작은 방에서 불도 켜지 않고 오랫동안 깨어 앉아 있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시험 소동이 그에게 가져다준 유일한 축복이었다. 그가 주인이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자기만의 작은 방. 여기서 그는 피로와 졸음과 두통과 싸우며 긴 저녁 시간을 카이사르와 크세노폰과 문법책과 사전과 수학 문제를 붙들고 골몰했다. 끈질기게, 고집스럽게, 야심차게, 때로는 절망에 가까워지면서. 하지만 여기서 그는 잃어버린 소년 시절의 모든 즐거움보다 더 값진 몇 시간도 보냈다. 자부심과 도취와 승리의 용기로 가득한, 꿈처럼 야릇한 몇 시간. 그때 그는 학교와 시험과 모든 것을 넘어 더 높은 존재들의 무리 속으로 꿈꾸며 건너가기를 그리워했다. 그때 자기는 정말로 볼이 통통하고 사람 좋은 동무들과는 다르고 더 나은 사람이며, 언젠가는 아득한 높이에서 그들을 내려다볼지도 모른다는 뻔뻔하고 황홀한 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지금도 그는 이 작은 방에 더 자유롭고 서늘한 공기가 있다는 듯이 한숨을 돌리고, 침대에 앉아 몇 시간 동안 꿈과 소망과 예감 속에서 어스름히 잠겨 들었다. 밝은 눈꺼풀이 지나치게 혹사한 커다란 눈 위로 천천히 내려왔다가, 한 번 더 열려 깜박이고는 다시 내려왔다. 창백한 소년의 머리가 앙상한 어깨로 기울었고, 가는 팔이 지친 듯 뻗었다. 그는 옷을 입은 채 잠들었고, 잠의 부드러운 어머니 같은 손이 그의 불안한 어린 가슴속 물결을 고르게 펴 주고 고운 이마의 작은 주름들을 지워 주었다.

* * *

전에 없던 일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이른 시간인데도 몸소 역까지 나온 것이다. 기벤라트 씨는 검은 프록코트를 입고, 흥분과 기쁨과 자랑으로 가만히 서 있지를 못했다. 그는 교장과 한스 둘레를 신경질적으로 종종거리며 돌았고, 역장과 모든 역무원에게서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아들의 시험에 행운이 있기를 바라는 말을 들었으며, 작고 뻣뻣한 여행 가방을 왼손에 들었다 오른손에 들었다 했다. 우산은 겨드랑이에 꼈다가 무릎 사이에 끼웠다가, 몇 번을 떨어뜨렸고, 그때마다 가방을 내려놓고 우산을 집어 들었다. 누가 보면 그가 왕복표를 끊고 슈투트가르트에 가는 게 아니라 아메리카로 떠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아들은 아주 침착해 보였지만, 남모르는 두려움이 목을 조이고 있었다.

기차가 들어와 섰고, 사람들이 올라탔고, 교장이 손을 흔들었고, 아버지는 여송연에 불을 붙였고, 아래 골짜기에서 도시와 강이 사라졌다. 둘 모두에게 괴로운 여행이었다.

슈투트가르트에 오자 아버지는 갑자기 생기가 돌아 즐겁고 붙임성 있고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처럼 굴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수도에 나온 시골 사람의 기쁨이 그를 들뜨게 했다. 하지만 한스는 더 말이 없어지고 더 겁을 먹었다. 도시를 보자 깊은 답답함이 그를 사로잡았다. 낯선 얼굴들, 으스대듯 높고 요란하게 꾸민 집들, 길고 지치는 길, 마차 철도와 거리의 소음이 그를 주눅 들게 하고 아프게 했다. 그들은 고모 집에 묵었는데, 거기서는 낯선 방들과 고모의 친절하고 수다스러운 말투와 하릴없이 오래 앉아 있는 것과 아버지의 끝없는 격려가 소년을 완전히 바닥까지 짓눌렀다. 그는 낯설고 길 잃은 기분으로 방 안에 웅크리고 있었고, 익숙하지 않은 둘레며 고모와 그 도시풍 차림새며 커다란 무늬 벽지며 탁상시계며 벽에 걸린 그림들이며 창밖의 시끄러운 거리를 바라보노라면, 완전히 버림받은 것 같았고, 집을 떠난 지 아득히 오래되었고 애써 배운 것을 지금은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오후에 그는 그리스어 불변화사를 한 번 더 훑어보려 했지만, 고모가 산책을 하자고 했다. 한순간 한스의 마음속에 초록 풀밭과 숲의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떠올라서 그는 반갑게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큰 도시에서는 산책도 고향에서와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그는 곧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시내에 볼일을 보러 가서 그는 고모와 단둘이 나갔다. 계단에서부터 고생이 시작되었다. 이층에서 뚱뚱하고 거만해 보이는 부인을 만났는데, 고모가 그 앞에서 무릎을 굽혀 인사하자 부인은 곧바로 대단한 말솜씨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렇게 멈춰 선 것이 십오 분도 넘었다. 한스는 계단 난간에 몸을 붙이고 옆에 서 있었는데, 부인의 강아지가 냄새를 맡고 으르렁거렸고, 낯선 뚱뚱한 부인이 코안경 너머로 그를 위아래로 거듭 훑어보는 것을 보니 자기 이야기도 하는 모양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겨우 거리로 나오자 고모는 가게에 들어가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나왔다. 그동안 한스는 수줍게 길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떠밀리고 골목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고모는 가게에서 나와 그에게 판 초콜릿을 하나 건넸고, 그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손히 고맙다고 했다. 다음 모퉁이에서 그들은 마차 철도에 올랐고, 쉴 새 없이 땡땡거리는 만원 차를 타고 거리와 거리를 지나 마침내 커다란 가로수 길과 공원에 닿았다. 거기에는 분수가 솟고, 울타리 친 화단에 꽃이 피고, 작은 인공 연못에 금붕어가 헤엄쳤다. 그들은 다른 산책객 무리 사이에서 오락가락, 이리저리, 빙빙 돌며 거닐었고, 숱한 얼굴과 멋진 옷과 그렇지 않은 옷, 자전거와 환자용 의자차와 유모차를 보았고, 뒤엉킨 목소리를 듣고, 따뜻하고 먼지 낀 공기를 마셨다. 마지막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 곁 벤치에 앉았다. 고모는 거의 내내 쉬지 않고 떠들다가, 이제 한숨을 쉬고 소년에게 다정하게 웃으며 이제 초콜릿을 먹으라고 했다. 그는 먹기 싫었다.

"아이고,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어서 먹어, 먹어!"

그래서 그는 판 초콜릿을 꺼내 은박지를 한동안 잡아당기다가 마침내 아주 작은 조각을 베어 물었다. 그는 초콜릿을 정말이지 죽어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고모에게 그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아직 그 한 조각을 빨며 꾸역꾸역 삼키고 있을 때, 고모가 사람들 속에서 아는 사람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여기 그대로 앉아 있어, 금방 올게."

한스는 한숨 돌리며 그 틈에 초콜릿을 잔디밭 멀리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다리를 박자에 맞춰 흔들며 숱한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자기가 불행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그는 다시 불규칙 동사를 외워 보기 시작했는데, 죽을 만큼 놀랍게도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몽땅 잊어버렸다! 그런데 내일이 주 시험이었다.

고모가 돌아왔는데, 그사이 올해 주 시험 지원자가 백열여덟 명이라는 것을 알아 왔다. 그런데 붙을 수 있는 건 서른여섯 명뿐이었다. 소년은 그만 간이 콩알만 해져서 돌아오는 길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에 오자 머리가 아팠고, 또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 했고, 어찌나 자포자기했던지 아버지가 호되게 나무랐고 고모마저 그를 참을 수 없어 했다. 밤에 그는 무겁고 깊게 잠들었지만 끔찍한 꿈 장면들에 쫓겼다. 그는 백열일곱 명의 동무들과 함께 시험장에 앉아 있었는데, 시험관은 고향의 목사 같다가 고모 같다가 하더니 그의 앞에 먹으라고 초콜릿을 산더미처럼 쌓았다. 그리고 그가 눈물을 흘리며 먹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하나둘 일어나 작은 문으로 사라졌다. 모두 제 산을 다 먹었는데, 그의 산은 눈앞에서 점점 커지더니 책상과 의자 위로 넘쳐흘러 그를 질식시키려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한스가 시험에 늦지 않으려고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커피를 마시는 동안, 고향의 작은 도시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를 생각했다. 먼저 구두장이 플라이크. 그는 아침 수프를 먹기 전에 기도를 올렸는데, 가족과 직공들과 견습생 둘이 식탁을 둘러 서 있었고, 장인은 오늘 여느 아침 기도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오 주여, 오늘 시험에 나가는 학생 한스 기벤라트 위에도 당신의 손을 얹어 주시고, 그를 축복하시고 강하게 하시어, 언젠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바르고 씩씩하게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목사는 그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아침을 먹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지금쯤 기벤라트네 꼬마가 시험을 치러 가겠군. 그 애는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될 거야. 다들 그 애를 눈여겨보게 될 테고, 그러면 내가 라틴어 수업으로 거든 것도 손해는 아니지."

담임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슈투트가르트에서 주 시험이 시작된다. 기벤라트에게 행운을 빌어 주자. 물론 그 애한테는 그럴 필요도 없다. 너희 같은 게으름뱅이라면 열 명쯤은 주머니에 넣고도 남을 아이니까." 그러자 아이들도 거의 모두 그 자리에 없는 아이를 생각했다. 특히 그가 붙느냐 떨어지느냐를 두고 저희끼리 내기를 건 많은 아이들이.

그리고 진심 어린 중보 기도와 간절한 마음은 먼 거리도 쉽게 건너 멀리까지 닿는 법이라, 한스도 고향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아버지와 함께 시험장에 들어갔고, 조수의 지시를 겁먹고 놀란 채 따랐으며, 창백한 소년들로 가득 찬 커다란 방을 고문실에 끌려온 죄인처럼 둘러보았다. 하지만 교수가 들어와 조용히 하라고 하고 라틴어 작문 문제를 불러 주자, 한스는 한숨 돌렸다. 우스울 만큼 쉬웠다. 그는 빠르게, 거의 즐겁게 초안을 쓰고, 그것을 신중하고 깔끔하게 옮겨 적어, 가장 먼저 답안을 낸 몇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뒤로 고모 집 가는 길을 잃어 뜨거운 도시 거리를 두 시간이나 헤맸지만, 되찾은 마음의 균형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모와 아버지에게서 잠시 더 벗어나 있는 게 기뻤고, 낯설고 시끄러운 수도의 거리를 헤매고 다니며 자기가 대담한 모험가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애써 길을 물어물어 집을 찾아오자, 그는 질문 공세를 받았다.

"어떻게 됐니? 어땠어? 잘했니?"

"쉬웠어요." 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정도는 5학년 때도 번역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는 정직한 시장기로 밥을 먹었다.

오후는 비어 있었다. 아빠는 그를 데리고 친척과 친구 몇 집을 돌았다. 그 가운데 한 집에서 검은 옷을 입은 수줍은 소년을 만났는데, 그 아이도 주 시험을 보러 괴핑겐에서 왔다고 했다. 두 소년은 저희끼리 남겨져서 서로를 수줍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라틴어 문제 어땠어? 쉬웠지?" 한스가 물었다.

"엄청 쉬웠어.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야. 쉬운 문제에서 제일 많이 틀리거든. 주의를 안 하니까. 그리고 숨은 함정도 분명 있었을 거야."

"그럴까?"

"당연하지. 그 양반들이 그렇게 바보는 아니야."

한스는 조금 놀라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머뭇거리며 물었다. "문제 아직 가지고 있어?"

그 아이가 공책을 가져왔고, 둘은 함께 답안 전체를 한 낱말 한 낱말 짚어 보았다. 괴핑겐 아이는 라틴어에 아주 능한 것 같았다. 적어도 한스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문법 용어를 두 번이나 썼다.

"내일은 뭐가 나올까?"

"그리스어하고 작문."

그러고 나서 괴핑겐 아이는 한스네 학교에서 시험 보러 온 아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아무도 없어." 한스가 말했다. "나 혼자야."

"와, 우리 괴핑겐에서는 열두 명이나 왔어! 아주 똑똑한 애가 셋 있는데, 걔들은 일등권에 들 거라고들 해. 작년 수석도 괴핑겐 애였어. 그런데 너 떨어지면 김나지움 갈 거야?"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모르겠어……. 아니, 안 갈 것 같아."

"그래? 나는 지금 떨어져도 어떻게든 공부할 거야. 그러면 엄마가 울름으로 보내 주실 거거든."

그 말에 한스는 크게 감명받았다. 아주 똑똑한 셋을 포함한 괴핑겐 아이 열두 명도 무서웠다. 이래서야 얼굴을 들 수가 없겠다.

집에 와서 그는 자리에 앉아 -mi 동사를 한 번 더 훑어보았다. 라틴어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어는 묘했다. 그는 그리스어를 좋아했다. 거의 푹 빠져 있었지만, 그건 읽을 때뿐이었다. 특히 크세노폰은 아름답고 생기 있고 싱그럽게 쓰여서, 모든 것이 밝고 곱고 힘차게 울렸고, 경쾌하고 자유로운 정신이 있었으며, 이해하기도 쉬웠다. 그런데 문법으로 들어가거나 독일어를 그리스어로 옮겨야 할 때면, 서로 엇갈리는 규칙과 형태의 미로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고, 처음 배울 때 그리스 알파벳조차 읽지 못하던 그 시절처럼 이 낯선 언어 앞에서 겁먹은 두려움을 느꼈다.

다음 날은 정말로 그리스어 차례였고, 그다음은 독일어 작문이었다. 그리스어 문제는 꽤 길고 전혀 쉽지 않았고, 작문 주제는 까다로워서 잘못 이해할 수도 있었다. 열 시부터 시험장은 후덥지근하고 더워졌다. 한스는 좋은 펜촉이 없어서 그리스어 답안을 다 옮겨 적을 때까지 종이를 두 장이나 망쳤다. 작문 때는 뻔뻔한 옆자리 아이 때문에 아주 곤경에 빠졌다. 그 아이는 질문을 적은 종이를 그에게 밀어 보내고 옆구리를 찔러 대며 대답하라고 졸랐다. 옆자리 아이와 주고받는 건 가장 엄하게 금지되어 있었고, 걸리면 가차 없이 시험에서 쫓겨났다. 그는 무서워 떨면서 쪽지에 "나 좀 내버려 둬"라고 적고 그 아이에게 등을 돌렸다. 게다가 너무 더웠다. 쉬지 않고 한결같이 시험장을 오가며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감독 교수마저 몇 번이나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한스는 두꺼운 견신례 양복 속에서 땀을 흘렸고, 머리가 아파 왔고, 마침내 답안지에 틀린 데가 가득하고 이제 시험은 끝장났다는 기분으로 아주 비참하게 답안을 냈다.

식탁에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무슨 질문을 받아도 어깨만 으쓱하고 죄인 같은 얼굴을 했다. 고모는 위로했지만 아버지는 흥분해서 언짢아졌다. 식사가 끝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옆방으로 데려가 다시 캐물으려 했다.

"망쳤어요." 한스가 말했다.

"왜 정신을 차리지 않았니? 사람이 정신을 바짝 차릴 수도 있는 거지, 제기랄."

한스는 말이 없다가, 아버지가 야단치기 시작하자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아빠는 그리스어를 하나도 모르잖아요!"

가장 나쁜 건 두 시에 구술시험을 보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가장 무서웠다. 가는 길에 이글거리는 뜨거운 거리에서 그는 몹시 메스꺼워졌고, 괴로움과 두려움과 어지럼증으로 눈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초록 책상 앞에서 세 신사 앞에 십 분 동안 앉아, 라틴어 문장 몇 개를 번역하고 묻는 말에 대답했다. 그러고는 다른 세 신사 앞에 십 분 동안 앉아 그리스어를 번역하고 또 이것저것 질문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불규칙하게 만들어지는 아오리스트 하나를 물었는데,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셔도 됩니다. 저기, 오른쪽 문으로."

그는 나갔는데, 문간에서 그 아오리스트가 생각났다. 그는 멈춰 섰다.

"가세요." 누가 그에게 소리쳤다. "가세요! 아니면 어디 몸이 안 좋으십니까?"

"아니요, 그런데 아오리스트가 지금 생각났어요."

그는 그것을 방 안에 대고 외쳤고, 신사 한 사람이 웃는 것을 보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질문과 자기 대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그의 눈에는 커다란 초록 책상과 프록코트를 입은 늙고 엄숙한 세 신사와 펼쳐진 책과 그 위에 떨며 얹힌 자기 손만 자꾸 보였다. 맙소사, 대체 무슨 대답들을 했던 걸까!

거리를 걷노라니 여기 온 지 벌써 몇 주나 된 것 같았고 다시는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버지의 정원과 전나무가 파랗게 덮인 산과 강가의 낚시터 풍경이 아주 먼 곳의 것처럼, 오래전 언젠가 본 것처럼 떠올랐다. 오, 오늘이라도 집에 갈 수 있다면! 이제 여기 더 있어 봐야 아무 소용 없었다. 시험은 어쨌든 망쳤으니까.

그는 우유 빵 하나를 사서, 아버지에게 해명하지 않으려고 기나긴 오후 내내 거리를 떠돌았다. 마침내 집에 오자 다들 그를 걱정하고 있었고, 그가 지치고 비참해 보였으므로 달걀 수프를 먹이고 침대로 보냈다. 내일은 산수와 종교가 남아 있었고, 그다음엔 다시 떠날 수 있었다.

이튿날 오전은 아주 잘 풀렸다. 어제 주요 과목에서 그렇게 운이 나빴는데 오늘은 모든 게 잘되다니, 한스에게는 쓰디쓴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된다, 집으로!

"시험 끝났어요. 이제 집에 가도 돼요." 그가 고모에게 알렸다.

아버지는 오늘은 더 머물고 싶어 했다. 칸슈타트에 가서 요양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스가 하도 간절히 조르는 바람에 아버지는 오늘 혼자 먼저 떠나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는 기차에 태워졌고, 표를 받고, 고모에게서 입맞춤과 먹을 것을 받아 들고, 지치고 아무 생각 없이 초록 구릉지를 지나 고향으로 향했다. 검푸른 전나무 산들이 나타나자 비로소 기쁨과 해방감이 소년을 덮쳤다. 그는 늙은 하녀가, 자기 작은 방이, 교장 선생님이, 익숙하고 천장 낮은 교실이, 그 모든 것이 반가웠다.

다행히 역에는 호기심 많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는 작은 짐 꾸러미를 들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집으로 서둘러 갔다.

"슈투트가르트는 좋았니?" 늙은 안나가 물었다.

"좋았냐고요? 시험이 뭐 좋은 건 줄 알아요? 다시 돌아와서 기쁠 뿐이에요. 아버지는 내일 오세요."

그는 갓 짠 우유를 한 대접 마시고, 창밖에 걸어 둔 수영복을 걷어 들고 뛰어나갔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모두 멱 감는 풀밭으로는 가지 않았다.

그는 도시 밖 멀리 「저울목」까지 갔다. 거기서는 물이 높은 덤불 사이로 깊고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는 옷을 벗고 서늘한 물에 손을, 이어 발을 더듬어 넣어 보고, 조금 몸을 떨다가 재빨리 강물에 몸을 던졌다. 약한 물살을 거슬러 천천히 헤엄치노라니 지난 며칠의 땀과 두려움이 몸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것 같았고, 강이 그의 가냘픈 몸을 서늘하게 껴안는 동안 그의 영혼은 새로운 기쁨으로 아름다운 고향을 다시 차지했다. 그는 더 빨리 헤엄치다가, 쉬다가, 다시 헤엄쳤고, 기분 좋은 서늘함과 노곤함에 감싸였다. 반듯이 누워 다시 강을 따라 떠내려가면서, 금빛으로 원을 그리며 떼 지어 나는 저녁 날벌레들의 가는 윙윙 소리에 귀 기울였고, 작고 날랜 제비들이 저녁 하늘을 가르는 것을, 이미 산 너머로 진 해가 그 하늘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다시 옷을 입고 꿈꾸듯 어슬렁거리며 집으로 갈 때는 골짜기가 벌써 그늘로 가득했다.

그는 상인 자크만네 정원 앞을 지났다. 아주 꼬마였을 때 다른 아이 몇과 함께 덜 익은 자두를 훔친 정원이었다. 그리고 키르히너네 목재소 앞을 지났다. 하얀 전나무 각목이 널려 있었고, 예전에는 그 밑에서 늘 낚싯밥으로 쓸 지렁이를 찾곤 했다. 그는 검사관 게슬러네 작은 집 앞도 지났다. 그 집 딸 엠마에게 두 해 전 스케이트장에서 그토록 구애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 도시에서 가장 맵시 있고 세련된 여학생이었고 그와 동갑이었는데, 그때 그는 한동안 그녀와 한번 말을 해 보거나 손을 잡아 보는 것만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없었다. 끝내 그러지 못했다. 너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 뒤로 그녀는 기숙 학교로 보내졌고, 그는 이제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꼬마 시절 이야기들이 지금 아득히 먼 곳에서 오듯 다시 떠올랐고, 그것들은 그 뒤로 겪은 어떤 일보다도 강렬한 빛깔과 야릇하게 무언가를 예감하게 하는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저녁이면 나숄트네 리제 집 대문 통로에 앉아 감자 껍질을 벗기며 이야기를 듣던 시절, 일요일 꼭두새벽에 바지를 걷어붙이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아래쪽 보로 가재를 잡거나 송사리를 잡으러 가서, 나중에 흠뻑 젖은 나들이옷 때문에 아버지에게 매를 맞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수수께끼 같고 야릇한 것들과 사람들이 참 많았는데, 이제 그는 그것들을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목이 비뚤어진 꼬마 구두장이, 아내를 독살한 게 틀림없다고 다들 알던 슈트로마이어, 그리고 지팡이와 배낭을 메고 온 군을 떠돌던 괴짜 「벡 씨」. 사람들은 그를 「씨」라고 불렀는데, 예전에 부자여서 말 네 필에 마차까지 가졌기 때문이었다. 한스는 그들에 대해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고, 이 어둑하고 자그마한 골목 세계를 잃어버렸는데 그 대신 생생하고 겪을 만한 것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다음 날도 휴가였으므로 그는 아침 늦게까지 자며 자유를 즐겼다. 점심때 그는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아버지는 아직도 슈투트가르트의 온갖 즐거움으로 흐뭇하게 들떠 있었다.

"붙으면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마." 그가 기분 좋게 말했다. "생각해 봐라!"

"아니에요, 아니에요." 소년이 한숨을 쉬었다. "틀림없이 떨어졌어요."

"쓸데없는 소리, 떨어지긴 뭘 떨어져! 내 마음 변하기 전에 어서 소원이나 말해 봐."

"방학에 다시 낚시하고 싶어요. 해도 돼요?"

"좋다, 해도 된다. 시험에 붙으면."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뇌우가 치고 소나기가 쏟아져서 한스는 몇 시간이고 자기 방에서 책을 읽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슈투트가르트에서 한 것을 다시 꼼꼼히 되짚어 보았고, 번번이 자기가 지독히 운이 나빴고 훨씬 더 잘할 수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제 붙기는 절대 틀렸다. 그 바보 같은 두통! 차츰 커지는 불안이 그를 짓눌렀고, 마침내 무거운 걱정이 그를 아버지에게로 떠밀었다.

"저, 아버지!"

"뭐냐?"

"뭐 좀 여쭤보려고요. 소원 말인데요. 낚시는 그만둘래요."

"그래, 이번엔 또 왜?"

"왜냐하면 저……. 아, 여쭤보고 싶었던 건, 혹시 제가……."

"어서 말해 봐, 무슨 연극이냐! 그래서 뭔데?"

"제가 떨어지면 김나지움에 가도 되는지요."

기벤라트 씨는 말문이 막혔다.

"뭐? 김나지움?" 그러다 그가 버럭 소리쳤다. "네가 김나지움에? 누가 그런 생각을 네 머리에 넣어 줬니?"

"아무도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그의 얼굴에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쓰여 있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가, 가." 그가 언짢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들뜬 생각이야. 김나지움이라니! 네 아버지가 무슨 상업 고문관이라도 되는 줄 아니."

그가 어찌나 세차게 손을 내저었던지 한스는 포기하고 절망해서 나갔다.

"저런 녀석이 있나!" 아버지가 그의 뒤에 대고 투덜거렸다. "세상에! 이제는 김나지움까지 가겠단다! 어림도 없다, 꿈 깨라."

한스는 반 시간 동안 창턱에 앉아 새로 닦은 마룻바닥을 노려보며, 이제 정말로 신학교도 김나지움도 대학 공부도 다 틀린다면 어떻게 될지 떠올려 보려 했다. 사람들은 그를 치즈 가게나 사무실에 견습생으로 넣을 테고, 그는 평생 그가 경멸하고 반드시 넘어서고 싶었던 평범하고 가련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의 곱고 영리한 학생 얼굴이 분노와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침을 뱉고, 거기 놓인 라틴어 독본을 집어 들어 있는 힘껏 가까운 벽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월요일 아침 그는 다시 학교에 갔다.

"잘 지냈니?" 교장이 손을 내밀며 물었다. "어제쯤 나한테 올 줄 알았는데. 그래, 시험은 어땠니?"

한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 왜 그러니? 잘 안 됐니?"

"그런 것 같아요."

"자, 조금만 참아라!" 노신사가 위로했다. "아마 오늘 오전에 슈투트가르트에서 결과가 올 거다."

오전은 끔찍하게 길었다. 결과는 오지 않았고, 점심을 먹을 때 한스는 속으로 흐느끼느라 음식을 거의 삼키지 못했다.

오후 두 시에 그가 교실에 들어가니 담임이 벌써 와 있었다.

"한스 기벤라트." 그가 크게 불렀다.

한스가 앞으로 나갔다. 담임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기벤라트. 너는 주 시험에 이등으로 붙었다."

엄숙한 침묵이 흘렀다. 문이 열리고 교장이 들어왔다.

"축하한다. 자, 이제 뭐라고 하겠니?"

소년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온몸이 굳어 있었다.

"아니, 아무 말도 안 하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아예 일등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자, 이제 집에 가거라." 교장이 말했다. "그리고 아빠한테 알려 드려라. 이제 학교에는 안 나와도 된다. 어차피 여드레 뒤면 방학이니까."

소년은 어질어질한 채 거리로 나섰다. 보리수가 서 있고 장터가 햇볕 속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았지만, 모든 것이 더 아름답고 더 뜻깊고 더 기뻤다. 그는 붙었다! 그것도 이등으로! 첫 기쁨의 폭풍이 지나가자 뜨거운 감사의 마음이 그를 가득 채웠다. 이제 목사를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제 치즈 가게도 사무실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낚시도 할 수 있었다. 그가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마침 현관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그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별일 아니에요. 학교에서 쫓겨났어요."

"뭐? 왜?"

"이제 신학생이 됐으니까요."

"아니, 이런, 붙었단 말이냐?"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이등이에요."

그건 노인도 기대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서 아들의 어깨를 연신 두드리며 웃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만 저었다.

"세상에!" 마침내 그가 소리쳤다. 그리고 한 번 더. "세상에!"

한스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계단을 올라 다락으로 갔다. 비어 있는 지붕 밑 방의 벽장을 활짝 열고 이것저것 뒤져서 상자며 실 뭉치며 코르크 조각을 끄집어냈다. 그의 낚시 도구였다. 이제 무엇보다 먼저 멋진 낚싯대를 하나 깎아야 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내려갔다.

"아빠, 주머니칼 좀 빌려주세요!"

"뭐 하게?"

"낚싯대 깎을 가지를 잘라야 해요."

아빠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자," 그가 환하게, 통 크게 말했다. "여기 2마르크다. 네 칼을 하나 사거라. 그런데 한프리트네 말고 건너편 칼 대장간으로 가."

이제 그는 냅다 달렸다. 칼 대장장이는 시험이 어떻게 됐는지 묻더니, 기쁜 소식을 듣고는 아주 멋진 칼을 내주었다. 강 아래쪽, 브뤼엘 다리 밑에는 날씬하고 아름다운 오리나무와 개암나무 덤불이 서 있었다. 거기서 그는 한참을 고른 끝에 흠 하나 없고 질기게 휘는 가지를 잘라 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발그레한 얼굴과 반짝이는 눈으로 낚시 채비라는 즐거운 일에 매달렸다. 그에게는 그 일이 낚시 자체만큼이나 좋았다. 그는 오후 내내, 저녁 내내 그 일에 매달렸다. 하얗고 갈색이고 초록인 낚싯줄을 골라 꼼꼼히 살피고, 고치고, 묵은 매듭과 엉킨 데를 풀었다. 갖가지 모양과 크기의 코르크 조각과 깃대를 맞춰 보거나 새로 깎았고, 무게가 저마다 다른 작은 납 조각을 두드려 동그랗게 만들고 칼집을 내서 낚싯줄에 다는 봉돌로 썼다. 그다음은 낚싯바늘이었는데,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바늘은 네 겹으로 꼰 검은 바느질 실에, 남은 장선 줄에, 꼬아 만든 말총 줄에 나눠 맸다. 저녁 무렵 모든 것이 다 되었고, 한스는 이제 일곱 주나 되는 긴 방학 동안 심심할 일은 없겠다고 확신했다. 낚싯대만 있으면 온종일 혼자 물가에서 보낼 수 있었으니까.

2장

여름 방학이란 이래야 한다! 산 위로는 용담꽃처럼 파란 하늘, 몇 주 동안 눈부시게 뜨거운 날이 이어지고, 이따금 짧고 세찬 뇌우가 지나갈 뿐이다. 강은 그 숱한 사암 바위와 전나무 그늘과 좁은 골짜기를 지나오는데도 어찌나 따뜻해졌는지 저녁 늦게까지 멱을 감을 수 있었다. 작은 도시 둘레에는 마른풀과 두 번째 벤 풀 냄새가 났고, 몇 뙈기 안 되는 좁은 밀밭은 노랗게, 금갈색으로 익어 갔다. 개울가에는 독미나리 같은 흰 꽃 풀이 사람 키만큼 무성하게 자랐는데, 그 꽃은 우산 모양이고 언제나 아주 작은 딱정벌레가 덮여 있으며, 속 빈 줄기로는 피리와 호루라기를 깎을 수 있었다. 숲가에는 털이 보송한 노란 꽃의 당당한 우단담배풀이 길게 줄지어 뽐냈고, 털부처꽃과 분홍바늘꽃이 가늘고 질긴 줄기 위에서 흔들리며 비탈 전체를 보랏빛 붉은색으로 덮었다. 전나무 숲 안쪽에는 높고 곧은 붉은 디기탈리스가 은빛 솜털이 난 넓은 뿌리잎과 굵은 줄기와 높이 줄지어 달린 고운 붉은 종 모양 꽃을 달고 엄숙하고 아름답고 낯설게 서 있었다. 그 곁에는 갖가지 버섯이 있었다. 빨갛게 빛나는 광대버섯, 살지고 넓적한 그물버섯, 괴상하게 생긴 노루궁뎅이, 가지가 많은 붉은 싸리버섯, 그리고 이상하게 빛깔 없고 병든 듯 통통한 구상난풀. 숲과 풀밭 사이의 숱한 황무지 둑에서는 질긴 금작화가 불붙은 듯 노랗게 타올랐고, 이어 보랏빛 붉은 헤더가 길게 띠를 이루었고, 그다음엔 풀밭 자체였다. 풀밭은 대개 두 번째 베기를 앞두고 있었고, 황새냉이와 동자꽃과 샐비어와 체꽃이 알록달록 뒤덮고 있었다. 활엽수 숲에서는 되새들이 쉬지 않고 노래했고, 전나무 숲에서는 여우처럼 붉은 다람쥐들이 우듬지 사이를 달렸고, 둑과 담과 마른 도랑에서는 초록 도마뱀들이 햇볕 속에서 기분 좋게 숨 쉬며 반짝였고, 풀밭 위로는 높고 우렁차고 지칠 줄 모르는 매미 노래가 끝없이 울렸다.

이맘때 도시는 아주 시골 같은 인상을 주었다. 건초 수레와 건초 냄새와 낫 두드리는 소리가 거리와 공기를 가득 채웠다. 공장 두 개만 없었다면 마을에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방학 첫날 이른 아침, 늙은 안나가 겨우 일어났을까 말까 할 때 한스는 벌써 부엌에 서서 조바심치며 커피를 기다렸다. 그는 불 피우는 것을 돕고, 빵집에서 빵을 가져오고, 갓 짠 우유로 식힌 커피를 후딱 들이켜고, 빵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달려 나갔다. 위쪽 철둑에서 그는 멈춰 서서 바지 주머니에서 둥근 양철 상자를 꺼내 부지런히 메뚜기를 잡기 시작했다. 기차가 지나갔다. 그곳은 선로가 가파르게 오르막이라 쏜살같이는 아니고 느긋하게, 창문을 죄다 열어 놓고 승객 몇 명을 태우고, 연기와 김으로 된 길고 즐거운 깃발을 뒤로 펄럭이며 지나갔다. 그는 기차를 눈으로 좇으며, 희끄무레한 연기가 소용돌이치다가 곧 햇살 비치는 맑은 아침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모든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가! 그는 잃어버린 아름다운 시간을 이제 갑절로 되찾고 다시 한번 아무 거리낌도 걱정도 없는 꼬마가 되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메뚜기 상자와 새 낚싯대를 들고 다리를 건너 정원들 뒤로 해서 강에서 가장 깊은 곳인 「말 웅덩이」로 걸어갈 때, 그의 가슴은 남모르는 기쁨과 사냥꾼의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거기에는 버드나무 줄기에 기대 다른 어느 곳보다 편하게, 방해받지 않고 낚시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그는 줄을 풀고 작은 납 봉돌을 달고, 살진 메뚜기 한 마리를 무자비하게 바늘에 꿰어 크게 휘둘러 강 한가운데로 던졌다. 오래되고 익숙한 놀이가 시작되었다. 작은 피라미들이 떼를 지어 미끼 둘레로 몰려와 바늘에서 뜯어 가려고 했다. 곧 미끼가 먹혀 버렸고, 둘째 메뚜기 차례가 왔고, 또 하나, 넷째, 다섯째. 그는 점점 더 조심스럽게 미끼를 바늘에 꿰었고, 마침내 봉돌을 하나 더 달아 줄을 무겁게 했더니, 이제 처음으로 제법 큰 물고기가 미끼를 건드렸다. 놈은 미끼를 조금 잡아당기다가 다시 놓고, 또 건드려 보았다. 이제 물었다. 좋은 낚시꾼은 그것을 줄과 낚싯대를 거쳐 손가락으로 움찔하는 느낌으로 안다! 한스는 슬쩍 낚아채고 아주 조심스럽게 당기기 시작했다. 물고기가 걸렸고, 모습이 드러나자 한스는 그것이 붉은눈황어라는 것을 알았다. 넓적하고 흰빛 도는 누런 몸통과 세모난 머리, 특히 배지느러미가 붙은 자리의 고운 살빛 붉은색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무게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가 가늠하기도 전에 물고기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겁에 질려 수면 위로 소용돌이치더니 빠져나갔다. 놈이 물속에서 서너 번 몸을 뒤채다가 은빛 번개처럼 깊은 데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바늘을 깊이 물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낚시꾼 속에서 사냥의 흥분과 열띤 집중이 깨어났다. 그의 눈길은 가는 갈색 낚싯줄이 물에 닿는 곳에 날카롭게, 꼼짝 않고 매달렸고, 뺨은 발그레했고, 움직임은 짧고 빠르고 확실했다. 두 번째 붉은눈황어가 물려 올라왔고, 다음엔 작은 잉어 한 마리, 놓아주기 아까울 정도로 작은 놈이었다. 그다음엔 잇달아 모래무지 세 마리. 모래무지는 아버지가 즐겨 먹어서 특히 반가웠다. 기껏해야 손바닥만 하게 자라고, 비늘이 잘고 통통한 몸통에 우스꽝스러운 흰 수염이 난 굵은 머리, 작은 눈, 날씬한 꼬리를 지녔다. 빛깔은 초록과 갈색 사이인데, 물 밖으로 나오면 강철 같은 파란빛을 띤다.

그사이 해가 높이 솟았고, 위쪽 보의 물거품은 눈처럼 하얗게 빛났고, 물 위로는 따뜻한 공기가 아른거렸다. 올려다보면 묵베르크 위에 손바닥만 한 눈부신 구름 몇 점이 떠 있었다. 더워졌다. 맑은 한여름 날의 열기를 그 무엇보다 잘 드러내는 것은, 파란 하늘 중간쯤에 하얗게 가만히 떠 있는 고요하고 작은 구름 몇 점이다. 빛으로 가득 차 흠뻑 젖어 있어서 오래 바라볼 수도 없다. 그 구름이 없으면 얼마나 더운지 미처 모를 때가 많다. 파란 하늘을 봐도, 반짝이는 강물을 봐도 모른다. 하지만 물거품처럼 하얗고 단단하게 뭉친 한낮의 돛단배 몇 척을 보는 순간, 갑자기 해가 따갑게 느껴지고, 그늘을 찾고, 손으로 축축한 이마를 훔치게 된다.

한스는 차츰 낚싯대에 덜 신경 썼다. 조금 지쳤고, 어차피 한낮에는 거의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법이다. 이 시간이면 황어들은 가장 늙고 큰 놈들까지 햇볕을 쬐러 위로 올라온다. 놈들은 수면 바로 아래서 크고 어두운 무리를 지어 꿈꾸듯 강을 거슬러 헤엄치고, 이따금 아무 까닭도 없이 갑자기 놀라며, 이 시간에는 어떤 낚시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는 버드나무 가지 위로 낚싯줄을 걸쳐 물에 드리워 두고, 땅바닥에 앉아 초록빛 강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물고기들이 위로 올라왔고, 검은 등이 하나둘 수면에 나타났다. 조용히, 느릿느릿 헤엄치는, 따뜻함에 이끌려 올라와 홀린 무리였다. 따뜻한 물속에서 놈들은 참 좋겠구나! 한스는 장화를 벗고 발을 물에 담갔다. 수면 쪽 물은 아주 미지근했다. 그는 잡은 물고기들을 바라보았다. 놈들은 커다란 물뿌리개 속에서 꼼짝 않고 떠 있다가 이따금 살그머니 찰랑거렸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양, 갈색, 초록, 은색, 흐린 금빛, 파랑과 그 밖의 빛깔들이 움직일 때마다 비늘과 지느러미에서 반짝였다.

아주 조용했다. 다리를 건너는 수레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고, 물방앗간의 덜거덕 소리도 여기서는 아주 희미하게만 들렸다. 하얀 보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물소리만 고요하고 서늘하고 졸리게 울렸고, 뗏목 말뚝께에서 흘러가는 물이 소용돌이치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문법과 문체론, 산수와 암기, 길고 쉴 틈 없고 쫓기던 한 해의 그 모든 고문 같은 소동이 졸리게 따뜻한 이 시간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한스는 머리가 조금 아팠지만 여느 때만큼 심하지는 않았고, 이제 다시 물가에 앉아 보에서 흩날리는 물거품을 보고, 낚싯줄을 향해 눈을 깜박일 수 있었다. 곁의 물뿌리개 속에서는 잡은 물고기들이 헤엄쳤다. 참으로 좋았다. 그러다 문득 자기가 주 시험에 이등으로 붙었다는 것이 떠올라서, 그는 맨발로 물을 찰방 차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곡조를 휘파람으로 불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휘파람을 제대로 불 줄 몰랐다. 그건 오래된 고민거리였고, 그 때문에 학교 동무들에게 놀림도 숱하게 받았다. 그는 이 사이로만, 그것도 작게만 불 수 있었지만 혼자 즐기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고, 지금은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지금 학교에 앉아 지리 수업을 듣고 있고, 그 혼자만 자유롭게 풀려났다. 그는 그들을 앞질렀고, 이제 그들은 그보다 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그를 꽤나 괴롭혔다. 그가 아우구스트 말고는 친구가 없었고 그들의 싸움질과 놀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그들은 그의 뒷모습이나 바라보면 된다, 그 멍청이들, 그 고집불통들. 그는 그들을 어찌나 경멸했던지 입을 삐죽이느라 잠깐 휘파람을 멈췄다. 그러고는 낚싯줄을 감아올리다가 웃음이 났다. 바늘에 미끼가 한 오라기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상자에 남은 메뚜기들은 풀어 주었더니, 놈들은 정신이 멍한지 시큰둥하게 짧은 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웃 무두질 공장에서는 벌써 점심 쉬는 시간이었다. 밥 먹으러 갈 시간이었다.

점심 식탁에서는 거의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뭐 좀 잡았니?" 아빠가 물었다.

"다섯 마리요."

"오, 그래? 그럼 늙은 놈은 잡지 않도록 조심해라. 안 그러면 나중에 새끼가 없다."

이야기는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너무 더웠다. 그리고 점심 먹고 바로 멱 감으러 가면 안 되는 게 참 아쉬웠다. 대체 왜? 몸에 해롭단다! 해롭긴 뭐가 해로워. 한스는 더 잘 알았다. 금지를 어기고 숱하게 갔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버릇없는 짓을 하기에는 이제 너무 어른이 되었다. 세상에, 시험장에서는 사람들이 그에게 존댓말을 썼다!

결국 정원의 붉은 전나무 아래 한 시간 누워 있는 것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늘은 넉넉했고, 책을 읽거나 나비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두 시까지 거기 누워 있었고, 하마터면 잠들 뻔했다. 그런데 이제 멱 감으러 가자! 멱 감는 풀밭에는 꼬마 몇 명뿐이었다. 큰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앉아 있었고, 한스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그것을 누리라고 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 그는 따뜻함과 서늘함을 번갈아 즐길 줄 알았다. 조금 헤엄치고 자맥질하고 첨벙거리다가, 강가에 엎드려 금방 마르는 살갗 위로 해가 이글거리는 것을 느꼈다. 꼬마들은 공손하게 그의 둘레를 살금살금 맴돌았다. 그렇고말고, 그는 유명 인사가 된 것이다. 생김새도 다른 아이들과 아주 달랐다. 가늘고 햇볕에 그을린 목 위에 정신적인 얼굴과 남을 내려다보는 눈을 가진 섬세한 머리가 자유롭고 우아하게 얹혀 있었다. 그 밖에는 몹시 마르고 팔다리가 가늘고 여렸다. 가슴과 등에서는 갈비뼈를 셀 수 있었고, 장딴지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거의 오후 내내 그는 햇볕과 물 사이를 오갔다. 네 시가 넘자 그의 반 아이들 대부분이 서둘러 떠들썩하게 달려왔다.

"오호, 기벤라트! 너는 이제 좋겠다."

그는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그럭저럭, 응."

"신학교에는 언제 가야 해?"

"구월에야. 지금은 방학이야."

그는 부러움을 받도록 내버려 두었다. 뒤에서 놀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이런 노래를 불러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도 그렇게 지냈으면, 슐체네 리자베트처럼! 그 애는 대낮에도 침대에 누워 있지, 나는 그렇게 못 하네.

그는 웃기만 했다. 그사이 아이들이 옷을 벗었다. 하나는 냅다 물에 뛰어들었고, 다른 아이들은 먼저 조심스럽게 몸을 식혔고, 몇몇은 그 전에 잠깐 풀밭에 누웠다. 자맥질 잘하는 아이는 감탄을 받았다. 겁쟁이 하나는 뒤에서 물속으로 떠밀려 사람 살려라 소리를 질렀다. 서로 쫓고, 달리고, 헤엄치고, 물에 안 들어오고 뭍에서 볕만 쬐는 아이들에게 물을 튀겼다. 첨벙거리는 소리와 고함이 요란했고, 강폭 전체가 밝고 젖고 반들거리는 몸뚱이들로 번쩍였다.

한 시간 뒤에 한스는 자리를 떴다. 물고기들이 다시 무는 따뜻한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저녁 먹을 때까지 그는 다리 위에서 낚시를 했는데 거의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물고기들은 걸신들린 듯 낚시를 쫓아다녀서 미끼는 번번이 금세 먹혀 버렸지만, 걸리는 놈은 없었다. 그는 미끼로 버찌를 꿰었는데, 보아하니 너무 크고 물렀다. 그는 나중에 한 번 더 해 보기로 했다.

저녁을 먹으며 그는 아는 사람들이 잔뜩 축하하러 왔다 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오늘 나온 주간 신문을 보여 주었는데, 「공고」란 아래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하급 신학교 입학시험에 이번에 우리 시는 한스 기벤라트 단 한 명의 지원자를 보냈다. 방금 기쁘게도 그가 이등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는 신문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자랑과 기쁨으로 터질 것 같았다. 그러고는 다시 낚시하러 갔다. 이번에는 미끼로 치즈 몇 조각을 가져갔다. 치즈는 물고기들이 좋아하고, 어스름 속에서도 잘 보인다.

그는 낚싯대는 두고 아주 간단한 손낚시만 들고 갔다. 그게 그가 가장 좋아하는 낚시였다. 낚싯대도 찌도 없이 줄을 손에 쥐고 있어서, 낚시 전체가 줄과 바늘뿐인 것이다. 좀 더 힘들지만 훨씬 재미있었다. 그렇게 하면 미끼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 다 손에 잡히고, 건드리는 것과 무는 것을 하나하나 느끼고, 줄이 움찔거리는 것으로 눈앞에 보듯 물고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낚시는 할 줄 알아야 한다. 손가락이 재빨라야 하고 첩자처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좁고 깊게 파이고 굽이진 강 골짜기에는 어스름이 일찍 찾아왔다. 다리 밑의 물은 검고 고요했고, 아래쪽 물방앗간에는 벌써 불이 켜져 있었다. 이야기 소리와 노랫소리가 다리와 골목을 지나갔고, 공기는 조금 후덥지근했으며, 강에서는 시시때때로 검은 물고기가 짧게 꼬리를 치며 뛰어올랐다. 이런 저녁이면 물고기들이 이상하게 들떠서 이리저리 갈지자로 쏘다니고,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낚싯줄에 부딪히고, 앞뒤 가리지 않고 미끼에 달려든다. 마지막 치즈 조각을 다 쓸 때까지 한스는 작은 잉어 네 마리를 끌어 올렸다. 그것들은 내일 목사님께 가져다드리기로 했다.

따뜻한 바람이 골짜기를 따라 내려갔다. 날이 꽤 어두워졌지만 하늘은 아직 밝았다. 어두워져 가는 작은 도시 전체에서 교회 탑과 성의 지붕만이 밝은 하늘로 검고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아주 먼 어딘가에서 뇌우가 치는지 이따금 부드럽고 아득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열 시에 침대에 올라갈 때 한스는 머리와 팔다리가 오랜만에 기분 좋게 노곤하고 졸렸다.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름날들이 길게 줄지어, 마음을 놓이게 하고 손짓하며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빈둥거리고, 멱 감고, 낚시하고, 꿈꾸며 보낼 날들. 딱 하나, 아예 일등을 하지 못한 것만은 마음에 걸렸다.

* * *

이른 오전부터 한스는 목사관 현관에 서서 물고기를 건넸다. 목사가 서재에서 나왔다.

"아, 한스 기벤라트! 잘 잤니? 축하한다, 진심으로 축하해. 그런데 거기 그건 뭐니?"

"물고기 몇 마리예요. 어제 낚았어요."

"아니, 이것 봐라! 고맙다. 자, 그럼 들어오너라."

한스는 잘 아는 서재로 들어갔다. 사실 이곳은 목사의 방처럼 보이지 않았다. 화분 냄새도 담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꽤 큰 장서는 거의 모두 새것이고 깔끔하게 칠하고 금박을 입힌 책등을 보였다. 목사관 서고에서 흔히 보는, 닳고 기울고 좀먹고 곰팡이 얼룩이 핀 책들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가지런히 꽂힌 책들의 제목에서도 새로운 정신이 느껴졌다. 사라져 가는 세대의 구식이고 존경스러운 어르신들 속에 살던 정신과는 다른 정신이었다. 목사관 서고의 존경스러운 자랑거리들, 뫼리케가 「탑 위의 수탉」에서 그토록 아름답고 다정하게 노래한 벵겔, 외팅거, 슈타인호퍼와 경건한 찬송 시인들의 책은 여기 없거나, 있어도 숱한 현대 저작들 속에 묻혀 버렸다. 잡지 철이며 서서 쓰는 책상이며 종이가 흩어진 커다란 책상까지, 모든 것이 학구적이고 진지해 보였다. 여기서 일을 많이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여기서는 일을 많이 했다. 다만 설교나 교리 교육이나 성경 공부보다는 학술지에 실을 연구와 논문, 자기 책을 위한 예비 연구를 더 많이 했다. 꿈꾸는 신비주의와 예감에 찬 골똘한 사색은 이곳에서 쫓겨났고, 학문의 깊은 골짜기를 건너뛰어 목마른 민중의 영혼에게 사랑과 연민으로 몸을 숙이는 순박한 마음의 신학도 쫓겨났다. 그 대신 여기서는 열심히 성서 비평을 하고 「역사적 그리스도」를 찾아 헤맸다. 현대 신학자들의 입에서는 물 흐르듯 술술 나오지만 손가락 사이로는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는 그 그리스도를.

신학도 다른 데와 다를 것이 없다. 예술인 신학이 있고, 학문인 신학, 아니면 적어도 학문이 되려고 애쓰는 신학이 있다. 그건 옛날에도 지금과 같았고, 학문 하는 이들은 늘 새 부대에 정신이 팔려 묵은 포도주를 놓쳤으며, 예술가들은 겉으로 드러난 오류를 태평하게 지닌 채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그것은 비판과 창조, 학문과 예술 사이의 오래되고 고르지 않은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늘 옳은 쪽은 앞의 것이지만 그 덕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뒤의 것은 믿음과 사랑과 위로와 아름다움과 영원에 대한 예감의 씨앗을 거듭 뿌리고 거듭 좋은 땅을 찾아낸다. 삶은 죽음보다 강하고, 믿음은 의심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다.

한스는 처음으로 서서 쓰는 책상과 창문 사이의 작은 가죽 소파에 앉았다. 목사는 더없이 친절했다. 그는 아주 동무처럼 신학교 이야기를, 거기서 어떻게 생활하고 공부하는지를 들려주었다.

"거기서 겪을 가장 중요한 새 일은," 그가 끝으로 말했다. "신약 그리스어에 입문하는 거다. 그걸로 네게 새로운 세계가 열릴 거야. 일거리도 많고 기쁨도 많은 세계지. 처음엔 언어가 힘들 거다. 그건 이제 아티카 그리스어가 아니라 새로운 정신이 만들어 낸 새로운 말이거든."

한스는 귀 기울여 들으며 참된 학문에 가까워졌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이 새로운 세계에 학교식으로 입문하면," 목사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 매력이 꽤 사라지지. 게다가 신학교에서는 처음에 히브리어가 너를 너무 한쪽으로만 붙들어 둘지도 모른다. 그러니 네가 마음이 있다면 이번 방학에 조금 시작해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신학교에서 다른 일에 쓸 시간과 힘이 남아서 기쁠 거다. 누가복음을 몇 장 함께 읽으면 너는 거의 놀이 삼아 곁들여 그 말을 배우게 될 거야. 사전은 내가 빌려줄 수 있다. 하루에 한 시간쯤, 많아야 두 시간쯤 거기 들이면 될 거다. 물론 그 이상은 안 된다. 무엇보다 지금은 네가 마땅히 누려야 할 휴식을 취해야 하니까. 물론 이건 그냥 제안이다. 네 즐거운 방학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구나."

한스는 물론 그러겠다고 했다. 이 누가복음 시간이 그의 자유라는 즐겁고 파란 하늘에 낀 엷은 구름처럼 여겨지긴 했지만, 거절하기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방학에 곁들여 새 언어를 배우는 건 분명 일이라기보다 즐거움일 것이었다. 게다가 신학교에서 배워야 할 숱한 새것들, 특히 히브리어가 은근히 두렵기도 했다.

그는 꽤 흐뭇하게 목사 집을 나와 낙엽송 길을 따라 숲으로 올라갔다. 작은 언짢음은 이미 날아가 버렸고, 곰곰이 생각할수록 그 일이 더 받아들일 만하게 여겨졌다. 신학교에서도 동무들을 뒤에 두고 싶다면 거기서는 더 야심차고 끈질기게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꼭 그러고 싶었다. 대체 왜? 그건 그 자신도 몰랐다. 삼 년 전부터 다들 그를 눈여겨보았고, 교사들과 목사와 아버지와 특히 교장이 그를 부추기고 찔러 대며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그 긴 시간 내내, 학년이 바뀔 때마다 그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일등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차츰 그 자신도 맨 위에 서서 곁에 아무도 두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삼게 되었다. 게다가 바보 같은 시험 걱정은 이제 끝났다.

물론 방학이야말로 정말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 말고는 산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아침 시간에, 숲은 다시 얼마나 낯설 만큼 아름다웠던가! 붉은 전나무가 기둥처럼 줄지어 서서 끝없는 회랑에 청록빛 둥근 천장을 이루었다. 덤불은 별로 없고 여기저기 산딸기 덤불이 무성할 뿐이었고, 그 대신 몇 시간을 걸어도 끝없을 것 같은, 낮은 월귤나무와 헤더가 자란 부드럽고 털가죽 같은 이끼 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이슬은 벌써 말랐고, 화살처럼 곧은 줄기들 사이로 숲의 아침 특유의 후덥지근함이 흔들렸다. 햇볕의 온기와 이슬 김과 이끼 내음과 송진과 전나무 잎과 버섯 냄새가 뒤섞여, 가벼운 마취처럼 모든 감각에 달콤하게 스며드는 그 후덥지근함이었다. 한스는 이끼 위에 몸을 던지고, 빽빽이 자란 검은 블루베리 덤불을 훑어 따 먹으며, 여기저기서 딱따구리가 줄기를 두드리는 소리와 시샘 많은 뻐꾸기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거무스름한 전나무 우듬지 사이로 티 없이 짙푸른 하늘이 들여다보였고, 멀리로는 수천수만의 곧은 줄기가 한데 몰려 엄숙한 갈색 벽을 이루었으며, 여기저기 노란 햇볕 얼룩이 따뜻하고 진하게 빛나며 이끼 위에 흩뿌려져 있었다.

사실 한스는 크게 산책을 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뤼첼러 농장이나 크로커스 풀밭까지는. 그런데 지금 그는 이끼 위에 누워 블루베리를 먹으며 나른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지친 것이 스스로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서너 시간 걷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힘을 내서 제대로 한참 걷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몇백 걸음을 걸었다. 그러다 어찌 된 일인지 그는 벌써 다시 이끼 위에 누워 쉬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누워 있었고, 그의 눈길은 깜박이며 줄기와 우듬지 사이를, 초록 바닥 위를 헤맸다. 이 공기가 이렇게 사람을 노곤하게 하다니!

점심 무렵 집에 왔을 때 그는 다시 머리가 아팠다. 눈도 아팠다. 숲길에서 햇빛이 지독히 눈부셨던 것이다. 그는 오후의 반나절을 언짢게 집 안에 앉아 있다가, 멱을 감고서야 다시 기운이 났다. 이제 목사에게 갈 시간이었다.

가는 길에 구두장이 플라이크가 작업장 창가의 세발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를 보고 불러들였다.

"어디 가니, 얘야? 통 얼굴을 볼 수가 없구나?"

"지금 목사님께 가야 해요."

"아직도? 시험은 끝났잖니."

"네, 이제 다른 걸 해요. 신약 성경이요. 신약 성경은 그리스어로 쓰였는데, 제가 배운 거하고는 또 아주 다른 그리스어래요. 그걸 이제 배워야 해요."

구두장이는 모자를 뒷덜미까지 밀어 올리고,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의 넓은 이마에 굵은 주름을 잡았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한스," 그가 나직이 말했다. "너한테 해 줄 말이 있다. 지금까지는 시험 때문에 잠자코 있었는데, 이제는 일러 줘야겠구나. 너는 목사가 믿음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해. 그 사람은 너한테 거룩한 성경이 틀렸고 거짓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보여 줄 거다. 그러면 너는 그 사람하고 신약 성경을 다 읽고 나면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는 새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플라이크 아저씨, 그냥 그리스어 문제예요. 어차피 신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거고요."

"너는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경건하고 양심 있는 선생들한테서 성경 공부를 배우는 거하고, 하느님을 더는 믿지 않는 사람한테서 배우는 건 다른 일이다."

"그래도 그분이 정말 안 믿는지는 모르잖아요."

"아니다, 한스, 안타깝게도 알려진 일이다."

"그럼 어떡해요? 벌써 가겠다고 약속했는데요."

"그럼 가야지, 그야 당연하다. 하지만 너무 자주는 가지 마라. 그리고 그 사람이 성경을 두고, 사람이 지은 거라느니 거짓이라느니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게 아니라느니 하는 말을 하거든 나한테 와라. 같이 이야기해 보자. 그러겠니?"

"네, 플라이크 아저씨. 그래도 분명 그렇게 나쁘진 않을 거예요."

"두고 봐라. 내 말 잊지 말고!"

목사는 아직 집에 없어서 한스는 서재에서 그를 기다려야 했다. 금박 책 제목들을 바라보는 동안 구두장이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목사와 새 유행의 성직자들 전반에 대한 그런 말은 전에도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이제 처음으로 그는 자기도 이 문제 속으로 끌려 들어간 것을 긴장과 호기심을 품고 느꼈다. 구두장이에게처럼 그토록 중요하고 끔찍한 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여기서 오래되고 커다란 비밀 뒤로 파고들 수 있겠다는 낌새를 맡았다. 예전 학창 시절에는 하느님이 어디에나 계시는가,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악마와 지옥은 어떤가 하는 물음이 이따금 그를 공상 같은 골똘한 생각으로 들뜨게 했지만, 지난 몇 해 엄하고 부지런하던 동안 그 모든 것은 잠들어 버렸고, 그의 학교식 기독교 신앙은 구두장이와 이야기할 때나 가끔 조금이나마 제 생명을 얻어 깨어났다. 구두장이를 목사와 견주어 보니 웃음이 났다. 쓰라린 세월 속에서 얻은 구두장이의 꿋꿋함을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고, 게다가 플라이크는 영리하긴 해도 소박하고 한쪽으로만 치우친 사람이라, 그의 경건파 신앙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조롱을 받았다. 경건파 모임에서는 엄한 형제 재판관이자 대단한 성경 해석자로 나섰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신앙 모임도 열었지만, 그 밖에는 그저 작은 수공업자였고 다른 모든 이들처럼 좁은 사람이었다. 반면에 목사는 말솜씨 좋고 능란한 설교자일 뿐 아니라 부지런하고 엄격한 학자였다. 한스는 경외심을 품고 책장을 올려다보았다.

목사는 곧 와서 프록코트를 가벼운 검은 실내용 웃옷으로 갈아입고, 학생에게 그리스어 누가복음 원문을 쥐여 주며 읽어 보라고 했다. 그건 라틴어 수업 시간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몇 문장만 읽었고, 그 문장들을 꼼꼼하게 낱말 그대로 옮긴 다음, 선생은 보잘것없는 예문에서 이 언어의 독특한 정신을 능란하고 유창하게 풀어냈다. 그는 이 책이 쓰인 시대와 방식을 이야기했고, 단 한 시간 만에 소년에게 배움과 읽기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심어 주었다. 한스는 구절 하나, 낱말 하나에 얼마나 많은 수수께끼와 과제가 숨어 있는지, 옛날부터 수천의 학자와 사색가와 연구자가 이 물음들과 씨름해 왔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았고, 이 한 시간 동안 자기도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무리에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그는 사전과 문법책을 빌려 집에서 저녁 내내 공부를 이어 갔다. 이제 그는 참된 연구로 가는 길이 얼마나 많은 공부와 지식의 산을 넘어야 하는지 느꼈고, 그 길을 헤치고 나아가며 아무것도 길가에 남겨 두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구두장이는 당분간 잊혔다.

며칠 동안 이 새로운 일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는 저녁마다 목사에게 갔고, 날마다 참된 학문이 더 아름답고 더 어렵고 더 애써 얻을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침 이른 시간에는 낚시하러 가고, 오후에는 멱 감는 풀밭에 가고, 그 밖에는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시험의 두려움과 승리 속에 잠겨 있던 야심이 다시 깨어나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동시에 지난 몇 달 동안 그토록 자주 느꼈던 머릿속의 그 야릇한 느낌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픔이 아니라, 빨라진 맥박과 세차게 들뜬 힘이 서둘러 의기양양하게 몰아치는 것, 조급하고 맹렬하게 앞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이었다. 물론 그다음에는 두통이 왔지만, 그 가는 열기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읽기와 공부가 폭풍처럼 나아갔다. 그럴 때면 평소에는 십오 분씩 걸리던 크세노폰의 가장 어려운 문장들을 놀이하듯 읽었고, 사전도 거의 필요 없이 날카로워진 이해력으로 어려운 쪽 전체를 빠르고 기쁘게 날아 넘었다. 이렇게 높아진 공부 열기와 앎에 대한 목마름에 오만한 자의식까지 겹쳤다. 마치 학교와 교사와 배우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뒤에 남겨졌고, 이제 자기만의 길을 걸어 지식과 능력의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았다.

그것이 이제 다시 그를 덮쳤고, 동시에 자주 끊기는 얕은 잠과 이상하게 또렷한 꿈도 찾아왔다. 밤에 가벼운 두통과 함께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할 때면,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조바심이 그를 덮쳤고, 자기가 모든 동무보다 얼마나 앞서 있는지, 교사들과 교장이 자기를 얼마나 존경하고 감탄하기까지 하며 바라보았는지 떠올리면 우월한 자부심이 솟았다.

교장에게는 자기가 일깨운 이 아름다운 야심을 이끌고 그것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진심 어린 기쁨이었다. 교사들에게는 마음이 없고 그들은 뼛속까지 굳어 버린 영혼 없는 현학자라고 말하지 마라! 오, 아니다. 오랫동안 아무리 자극해도 꿈쩍 않던 한 아이의 재능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볼 때, 한 소년이 나무칼과 새총과 활과 그 밖의 유치한 장난감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기 시작하는 것을 볼 때, 공부의 진지함이 거칠고 볼 통통한 꼬마를 섬세하고 진지하고 거의 금욕적인 소년으로 바꿔 놓는 것을 볼 때, 그 얼굴이 더 어른스럽고 정신적으로 되고, 눈길이 더 깊고 목표를 의식하게 되고, 손이 더 차분하고 하얗고 조용해지는 것을 볼 때, 교사의 영혼은 기쁨과 자랑으로 웃는다. 어린 소년 속의 거친 자연의 힘과 욕망을 길들이고 뿌리 뽑아, 그 자리에 조용하고 절도 있고 나라가 인정한 이상을 심는 것, 그것이 그의 의무이고 나라가 그에게 맡긴 직분이다. 지금 만족한 시민이자 열성적인 관리가 된 사람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가, 학교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갈피를 잃고 날뛰는 혁신가나 열매 없이 생각에 잠기는 몽상가가 되었겠는가! 그 사람 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거칠고, 규칙 없고, 교양 없는 무언가. 그것을 먼저 부숴야 했다. 위험한 불꽃 하나, 그것을 먼저 끄고 밟아 버려야 했다. 자연이 만든 대로의 인간은 헤아릴 수 없고, 꿰뚫어 볼 수 없고, 적대적인 무엇이다. 그는 알 수 없는 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급류이고,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그리고 원시림을 솎아 내고 치우고 억지로 가두어야 하듯이, 학교는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부수고 꺾고 억지로 가두어야 한다. 학교의 과제는 그를 위에서 승인한 원칙에 따라 사회의 쓸모 있는 일원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그런 성질들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 성질들을 완전히 길러 내는 일은 그다음 병영의 꼼꼼한 규율이 화룡점정으로 마무리한다.

꼬마 기벤라트는 얼마나 훌륭하게 자랐는가! 쏘다니고 노는 것은 거의 저절로 그만두었고, 수업 시간에 바보같이 웃는 일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으며, 정원 가꾸기도 토끼 기르기도 그 성가신 낚시도 그만두도록 길들여졌다.

어느 날 저녁 교장 선생님이 몸소 기벤라트네 집에 나타났다. 우쭐해진 아버지를 정중하게 떼어 놓은 다음, 그는 한스의 방에 들어갔다가 누가복음을 붙들고 앉은 소년을 보았다. 그는 더없이 다정하게 인사했다.

"좋구나, 기벤라트, 벌써 또 열심이네! 그런데 왜 통 얼굴을 안 비치니? 날마다 기다렸는데."

"벌써 찾아뵈었어야 했는데요," 한스가 변명했다. "적어도 멋진 물고기 한 마리는 가져다드리고 싶어서요."

"물고기? 무슨 물고기?"

"그러니까, 잉어나 뭐 그런 거요."

"아, 그래. 그럼 다시 낚시를 하는 거냐?"

"네, 조금만요. 아버지가 허락하셨어요."

"흠. 그래. 아주 재미있니?"

"네, 그럼요."

"좋다, 아주 좋아. 방학은 네가 떳떳하게 얻은 거니까. 그럼 지금은 곁들여 공부할 마음은 별로 없겠구나?"

"아니에요, 교장 선생님, 물론 있어요."

"하지만 네가 스스로 마음이 없는 걸 억지로 시키고 싶지는 않다."

"물론 마음 있어요."

교장은 몇 번 깊이 숨을 쉬고, 숱 적은 수염을 쓰다듬고는 의자에 앉았다.

"보렴, 한스," 그가 말했다. "일이 이렇다. 시험을 아주 잘 본 바로 뒤에 갑자기 뒷걸음질하는 일이 많다는 건 오래된 경험이다. 신학교에서는 여러 새 과목을 익혀야 해. 그런데 늘 방학 동안 미리 공부해 온 학생들이 몇 있지. 그것도 시험을 그만 못 본 아이들이 그러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그 아이들이 방학 동안 월계관 위에서 쉰 아이들을 제치고 갑자기 위로 올라오는 거다."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여기 학교에서는 늘 일등을 하는 게 쉬웠지. 하지만 신학교에서는 다른 동무들을 만날 거다. 모두 재능 있거나 아주 부지런한 아이들이라, 그렇게 쉽게 따라잡히지 않아. 알겠니?"

"네, 그럼요."

"그래서 이번 방학에 조금 미리 공부해 두라고 권하고 싶었다. 물론 적당히! 너는 지금 푹 쉴 권리가 있고 의무도 있다. 하루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쯤이면 알맞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쉽게 궤도에서 벗어나서, 나중에 다시 제대로 속도가 붙기까지 몇 주가 걸린다. 어떻게 생각하니?"

"저는 아주 좋아요, 교장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좋다. 신학교에서는 히브리어 다음으로 특히 호메로스가 너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줄 거다. 지금부터 튼튼한 바탕을 다져 두면 갑절로 즐기고 이해하며 읽게 될 거다. 호메로스의 언어, 옛 이오니아 방언과 호메로스의 운율은 아주 독특해서 그것 자체로 하나의 세계라, 그 시들을 제대로 즐기려면 부지런하고 철저해야 한다."

한스는 물론 이 새로운 세계에도 기꺼이 파고들 마음이 있었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고약한 끝이 뒤따라왔다. 교장은 헛기침을 하고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수학에도 몇 시간 들여 주면 좋겠다. 너는 셈을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수학이 네 강점은 아니었지. 신학교에서는 대수와 기하를 시작해야 하니, 준비 수업을 몇 번 받아 두는 게 좋겠다."

"네, 교장 선생님."

"나한테는 언제든 와도 좋다, 그건 알지. 네가 뭔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걸 보는 건 내 명예가 걸린 일이다. 다만 수학은 아버지께 부탁드려서 교수님께 개인 수업을 받게 해 달라고 해야겠구나. 일주일에 서너 번쯤."

"네, 교장 선생님."

* * *

이제 공부는 다시 더없이 기쁘게 꽃을 피웠고, 한스는 어쩌다 한 시간쯤 낚시를 하거나 산책을 하면 양심이 찔렸다. 몸 바쳐 가르치는 수학 선생은 그가 늘 멱 감던 시간을 수업 시간으로 골랐다.

한스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 대수 시간이 즐겁지가 않았다. 뜨거운 한낮에 멱 감는 풀밭 대신 교수의 더운 방에 가서, 먼지 끼고 모기 윙윙대는 공기 속에서 지친 머리와 마른 목소리로 a 더하기 b, a 빼기 b를 외우는 것은 정말 쓰라린 일이었다. 그럴 때면 공기 속에 무언가 사람을 마비시키고 몹시 짓누르는 것이 있었고, 나쁜 날에는 그것이 막막함과 절망으로 바뀌기도 했다. 수학은 대체로 그에게 묘했다. 그는 수학이 닫혀 있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학생은 아니었다. 이따금 좋은, 아니 우아한 풀이를 찾아내고 그것을 기뻐하기도 했다. 그가 수학에서 좋아한 건 여기에는 헷갈림도 속임수도 없고, 주제에서 벗어나 엉뚱한 곁가지를 건드릴 여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같은 이유로 그는 라틴어를 무척 좋아했다. 그 언어는 맑고 확실하고 뜻이 하나뿐이며 의심이라는 걸 거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셈에서는 답이 다 맞아도 정작 제대로 된 것이 나오지 않았다. 수학 공부와 수업은 평평한 신작로를 걷는 것 같았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고, 날마다 어제 몰랐던 것을 하나씩 이해하지만, 갑자기 너른 풍경이 열리는 산에는 결코 오르지 못했다.

교장의 수업은 그보다 조금 활기찼다. 물론 목사가 신약의 타락한 그리스어로 만들어 내는 것이, 교장이 싱싱하고 젊은 호메로스의 언어로 만들어 내는 것보다 늘 훨씬 매혹적이고 화려했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호메로스였다. 첫 어려움 바로 뒤에 벌써 놀라움과 즐거움이 튀어나와 저항할 수 없이 더 앞으로 이끄는 호메로스. 한스는 신비롭게 아름다운 울림을 지닌, 이해하기 어려운 시구 앞에 앉아 떨리는 조바심과 긴장으로 가득 차서, 고요하고 밝은 정원을 열어 줄 열쇠를 사전에서 아무리 서둘러 찾아도 모자랄 때가 많았다.

이제 숙제도 다시 넉넉해서, 그는 숱한 저녁 무슨 과제에 꽉 물고 늘어져 다시 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기벤라트는 이 부지런함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의 둔한 머릿속에는 좁고 보잘것없는 숱한 사람들이 품는 이상이 어렴풋이 살아 있었다. 제 줄기에서 가지 하나가 자기를 넘어, 자기가 막연한 존경심으로 우러르는 높은 곳까지 자라는 것을 보고 싶다는 이상이었다.

방학 마지막 주에 교장과 목사는 갑자기 다시 눈에 띄게 너그럽고 걱정스러워졌다. 그들은 소년을 산책하러 내보냈고, 수업을 그만두었으며, 그가 싱싱하고 원기를 되찾은 채 새 길에 들어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한스는 몇 번 더 낚시하러 갔다. 그는 두통이 심했고, 이제 초가을의 밝고 파란 하늘이 비치는 강가에 앉아서도 제대로 정신을 쏟지 못했다. 그때 왜 그토록 여름 방학을 고대했는지 그는 수수께끼 같았다. 이제는 오히려 방학이 끝나서, 완전히 다른 생활과 공부가 시작될 신학교에 가게 되어 기뻤다. 마음이 없으니 물고기도 거의 잡히지 않았고, 아버지가 한번 그걸 두고 농담을 하자 그는 더는 낚시를 하지 않고 낚싯줄을 다시 지붕 밑 방 벽장에 올려 두었다.

마지막 며칠이 되어서야 그는 몇 주째 구두장이 플라이크에게 가지 않았다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도 그는 억지로 마음을 먹어야 그를 찾아갈 수 있었다. 저녁이었고, 장인은 거실 창가에 앉아 무릎마다 어린아이를 하나씩 앉히고 있었다. 창문이 열려 있는데도 가죽과 구두약 냄새가 온 집 안에 배어 있었다. 한스는 쭈뼛거리며 장인의 단단하고 넓은 오른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그래, 잘 지냈니?" 장인이 물었다. "목사한테는 부지런히 다녔니?"

"네, 날마다 가서 많이 배웠어요."

"뭘?"

"주로 그리스어요. 하지만 다른 것도 이것저것요."

"그런데 나한테는 오고 싶지 않았니?"

"오고 싶긴 했어요, 플라이크 아저씨. 그런데 통 그렇게 되질 않았어요. 목사님께 날마다 한 시간, 교장 선생님께 날마다 두 시간, 그리고 일주일에 네 번은 수학 선생님께 가야 했거든요."

"지금 방학에?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모르겠어요. 선생님들이 그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공부는 저한테 어렵지 않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플라이크가 소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공부야 좋다. 그런데 이 팔뚝이 이게 뭐냐? 얼굴도 이렇게 말랐고. 아직도 머리 아프니?"

"가끔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야, 한스. 게다가 죄다. 네 나이에는 바깥 공기도 실컷 쐬고 몸도 움직이고 제대로 쉬어야 해. 방학은 뭐 하라고 주는 거냐? 방구석에 처박혀 계속 공부하라고 주는 건 아니잖니. 너 아주 뼈만 남았다."

한스가 웃었다.

"그래, 너는 어떻게든 이겨 내겠지. 하지만 지나친 건 지나친 거다. 그런데 목사한테 받은 수업은 어땠니? 그 사람이 뭐라고 하더냐?"

"이것저것 많이 말씀하셨지만, 나쁜 말은 하나도 없었어요. 엄청나게 많이 아세요."

"성경을 두고 깔보는 말을 한 적은 없니?"

"아니요, 한 번도요."

"그럼 됐다. 이건 내가 일러 두마. 영혼을 다치느니 몸이 열 번 망가지는 게 낫다! 너는 나중에 목사가 되려고 하지. 그건 귀하고 어려운 직분이고, 너희 젊은이들 대부분과는 다른 사람이 필요한 일이다. 어쩌면 네가 그 사람이라서 언젠가 영혼을 돕고 가르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지.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라고, 그걸 위해 기도하마."

그는 일어서서 두 손을 소년의 어깨에 단단히 얹었다.

"잘 가거라, 한스, 그리고 선한 데 머물러라! 주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아멘."

엄숙함과 기도와 표준어로 말하는 것이 소년에게는 답답하고 거북했다. 목사는 작별할 때 그런 걸 하나도 하지 않았다.

준비하고 작별하느라 며칠은 빠르고 어수선하게 지나갔다. 침구와 옷과 속옷과 책을 넣은 궤짝은 벌써 부쳤고, 이제 여행 자루를 꾸렸다. 그리고 어느 서늘한 아침, 아버지와 아들은 마울브론으로 떠났다. 고향을 떠나 아버지 집에서 낯선 기관으로 옮겨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고 마음을 짓누르는 일이었다.

3장

이 고장의 서북쪽 맨 끝, 숲 덮인 언덕과 작고 고요한 호수들 사이에 커다란 시토회 수도원 마울브론이 있다. 아름다운 옛 건물들이 널찍하고 튼튼하게, 잘 보존된 채 서 있어서 살고 싶어지는 곳이다. 안팎으로 화려하고, 여러 세기에 걸쳐 고요하고 아름다운 초록 둘레와 고귀하고 정답게 한 몸으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수도원을 찾는 사람은 높은 담을 뚫고 난 그림 같은 문을 지나 아주 고요하고 너른 광장에 들어선다. 거기서는 분수가 흐르고, 늙고 엄숙한 나무들이 서 있고, 양쪽으로는 오래되고 단단한 돌집들이 있으며, 안쪽에는 웅장한 본당의 정면이 있다. 「낙원」이라 불리는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현관은 비할 데 없이 우아하고 황홀하게 아름답다. 교회의 거대한 지붕 위에는 바늘처럼 뾰족하고 익살맞은 작은 탑이 올라타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종을 지탱하는지 알 수가 없다. 고스란히 남은 회랑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작품인데, 보석처럼 귀한 분수 예배당을 품고 있다. 힘차고 고귀한 교차 궁륭을 지닌 경이로운 공간인 수도사 식당, 그리고 기도실, 면회실, 평수사 식당, 수도원장 거처, 두 채의 교회가 육중하게 이어 붙어 있다. 그림 같은 담과 돌출 창과 문과 작은 정원과 물방앗간과 살림집들이 이 묵직한 옛 건물들을 아늑하고 밝게 둘러싸고 있다. 너른 앞마당은 고요하고 텅 빈 채 잠결에 나무 그림자와 장난을 친다. 점심 뒤 한 시간 동안만 그 위로 잠깐 겉보기 생기가 찾아온다. 그때 젊은이 한 무리가 수도원에서 나와 너른 마당에 흩어져서, 약간의 움직임과 외침과 이야기와 웃음을 가져오고, 공놀이도 하다가, 한 시간이 지나면 재빨리 흔적도 없이 담 뒤로 사라진다. 이 광장에서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여기야말로 힘찬 삶과 기쁨이 있을 자리다, 여기서는 무언가 살아 있고 행복을 주는 것이 자라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성숙하고 선한 사람들이 기쁜 생각을 하고 아름답고 밝은 작품을 지어야 한다고.

정부는 사랑 어린 배려로, 언덕과 숲 뒤에 숨어 세상과 멀리 떨어진 이 훌륭한 수도원을 개신교 신학교 학생들에게 내주었다. 아름다움과 고요가 감수성 예민한 젊은 마음을 감싸도록 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도시와 가정생활의 산만하게 하는 영향에서 떨어져, 활동하는 삶의 해로운 광경을 보지 않게 된다. 그 덕에 젊은이들에게 몇 해 동안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와 그 밖의 과목 공부를 진지하게 삶의 목표로 여기게 하고, 젊은 영혼의 목마름을 온통 순수하고 이상적인 공부와 즐거움에 쏟게 할 수 있다. 여기에 기숙 생활이 중요한 요인으로 더해진다.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는 것, 한 몸이라는 소속감. 신학생들이 그 돈으로 먹고 공부하는 정부는 이로써 그 생도들이 특별한 정신의 자식이 되어 나중에 언제든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섬세하고 확실한 낙인찍기이고, 스스로 원한 예속의 의미심장한 상징이다. 이따금 고삐를 끊고 달아나는 야생아들을 빼면, 슈바벤의 신학생은 누구든 평생 신학생으로 알아볼 수 있다. 사람은 얼마나 다르고, 그들이 자라는 환경과 처지는 또 얼마나 다른가! 정부는 그것을 일종의 정신적 제복 혹은 하인 옷으로 제 보호 아래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공평하고 철저하게 고르게 맞춘다.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갈 때 어머니가 있었던 사람은 평생 그날들을 감사와 미소 어린 감동으로 떠올린다. 한스 기벤라트는 그렇지 않아서 아무 감동 없이 그날을 지나 넘겼지만, 낯선 어머니들을 숱하게 지켜볼 수 있었고 그것이 야릇한 인상을 남겼다.

벽장이 둘러선 커다란 복도, 이른바 도르멘트에는 궤짝과 바구니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부모와 함께 온 소년들은 자잘한 살림을 풀고 정리하느라 바빴다. 저마다 번호 매긴 벽장을 하나씩, 공부방에는 번호 매긴 책꽂이를 하나씩 배정받았다. 아들과 부모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짐을 풀었고, 관리인은 그 사이를 제후처럼 거닐며 이따금 친절한 조언을 했다. 꺼낸 옷을 펼치고, 셔츠를 개고, 책을 쌓고, 장화와 실내화를 줄지어 세웠다. 갖춰 온 물건은 중요한 것에서는 모두 같았다. 가져와야 할 속옷의 가짓수와 그 밖의 살림살이에서 꼭 필요한 것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새긴 양철 세숫대야들이 나와 세면실에 놓였고, 그 옆에 해면과 비누 그릇과 빗과 칫솔이 놓였다. 그 밖에도 저마다 등잔과 석유통과 식기 한 벌을 가져왔다.

소년들은 하나같이 몹시 바쁘고 들떠 있었다. 아버지들은 웃음 지으며 돕는 시늉을 하다가, 회중시계를 자주 들여다보고, 꽤 지루해하며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영혼은 어머니들이었다. 그들은 옷과 속옷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주름을 펴고 끈을 바로잡고, 조심스럽게 맞춰 보며 될 수 있는 대로 깔끔하고 쓰기 좋게 벽장에 나누어 넣었다. 그 사이사이 당부와 조언과 다정한 말이 흘러들었다.

"새 셔츠는 특히 아껴 입어야 한다. 3마르크 50페니히나 줬단다."

"빨랫감은 네 주마다 기차 편으로 부쳐라. 급하면 우편으로. 검은 모자는 일요일에만 쓰고."

뚱뚱하고 푸근한 부인 하나가 높은 궤짝 위에 앉아 아들에게 단추 다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집이 그리우면," 다른 데서는 이런 말이 들렸다. "언제든 편지만 써. 크리스마스까지 그렇게 끔찍하게 길지도 않잖니."

아직 꽤 젊은 예쁜 부인 하나는 꽉 찬 아들의 벽장을 훑어보며 차곡차곡 쌓인 속옷과 웃옷과 바지를 쓰다듬듯 어루만졌다. 그 일을 마치자 그녀는 어깨가 떡 벌어진 볼 통통한 아들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들은 부끄러워서 쑥스럽게 웃으며 손을 뿌리쳤고, 다정해 보이지 않으려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기까지 했다. 작별은 아들보다 어머니에게 더 힘든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은 거꾸로였다. 그들은 바쁜 어머니를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며, 할 수만 있으면 다시 따라 집에 가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에게서 작별에 대한 두려움과 한껏 높아진 다정함과 애착이, 남의 눈을 꺼리는 마음과 처음 맛보는 사내다움의 고집스러운 체면과 무겁게 싸우고 있었다. 할 수만 있으면 울고 싶은 아이들도 억지로 태평한 얼굴을 하고 아무것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 척했다. 그러면 어머니들은 그걸 보고 웃음 지었다.

거의 모두가 궤짝에서 꼭 필요한 것 말고도 사치품 몇 가지씩을 꺼냈다. 사과 한 자루, 훈제 소시지, 과자 한 바구니 같은 것들이었다. 많은 아이가 스케이트를 가져왔다. 영리해 보이는 작은 젊은이 하나는 햄을 통째로 가지고 와서 엄청난 소동을 일으켰는데, 그는 그것을 전혀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어느 아이들이 집에서 곧장 왔고 어느 아이들이 전에 학원이나 기숙 학교에 있었는지 쉽게 가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서도 흥분과 긴장이 보였다.

기벤라트 씨는 아들이 짐 푸는 것을 도우며 영리하고 실속 있게 굴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일찍 끝내서, 한스와 함께 한동안 지루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도르멘트를 서성였다. 사방에서 당부하고 가르치는 아버지들, 위로하고 조언하는 어머니들, 답답한 얼굴로 귀 기울이는 아들들을 보자, 그도 자기 한스에게 인생길에 가져갈 금언 몇 마디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는 오랫동안 궁리하며 말없는 소년 곁에서 괴로운 듯 어슬렁거리다가, 갑자기 말을 쏟아 내기 시작해 엄숙한 말씀들의 작은 선집을 꺼내 놓았다. 한스는 그것을 의아해하며 잠자코 받아들였다. 그러다 옆에 서 있던 목사 하나가 아버지의 연설을 듣고 재미있다는 듯 웃는 것을 보자, 그는 부끄러워서 연설자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

"그러니까, 집안의 명예를 빛내 주겠지? 윗사람들 말도 잘 듣고?"

"그럼요." 한스가 말했다.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한숨 돌렸다. 그는 지독히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한스도 꽤 길 잃은 기분이 들어서, 창문 너머로 고요한 회랑을 답답한 호기심으로 내려다보다가, 아직 아무도 모르는 바쁜 동무들을 쭈뼛쭈뼛 살피다가 했다. 회랑의 고풍스럽고 은자 같은 위엄과 고요는 위층에서 떠드는 젊은 생기와 야릇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슈투트가르트의 그 시험 동무는 괴핑겐식 능란한 라틴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떨어진 모양이었다. 적어도 한스는 어디에서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별생각 없이 앞으로 함께 공부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모든 소년의 짐이 종류도 개수도 비슷했지만, 도시 아이와 농부의 아들, 넉넉한 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는 쉽게 가려낼 수 있었다. 물론 부잣집 아들은 신학교에 거의 오지 않았는데, 그건 한편으로는 부모의 자존심이나 더 깊은 통찰을,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재능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도 교수나 고위 관리 가운데 자기의 수도원 시절을 떠올리며 아들을 마울브론에 보내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검은 웃옷을 입은 마흔 명 사이에서도 옷감과 재단이 이것저것 달랐고, 젊은이들은 몸가짐과 사투리와 태도에서 더욱 달랐다. 팔다리가 뻣뻣하고 깡마른 슈바르츠발트 아이들, 짚처럼 노란 머리에 입이 큰 튼실한 알프 고원 아이들, 몸놀림이 날래고 행동이 자유롭고 밝은 저지대 아이들, 뾰족한 장화를 신고 망가진, 말하자면 세련된 사투리를 쓰는 고상한 슈투트가르트 아이들이 있었다. 이 젊은 꽃들 가운데 거의 다섯에 하나는 안경을 썼다. 그 가운데 가냘프고 거의 우아하기까지 한 슈투트가르트의 마마보이 하나는 뻣뻣하고 고급스러운 펠트 모자를 쓰고 귀족처럼 굴었는데, 그 낯선 장식이 첫날부터 벌써 동무들 가운데 대담한 녀석들에게 나중에 놀리고 괴롭히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했다.

좀 더 섬세한 관찰자라면 이 쭈뼛거리는 작은 무리가 이 고장 젊은이 가운데 결코 나쁘게 고른 것이 아님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억지로 머릿속에 부어 넣은 공부 티가 멀리서도 나는 평범한 머리들 곁에, 반반한 이마 뒤에 더 높은 삶이 아직 반쯤 꿈속에 잠겨 있을 법한 섬세한 녀석들도, 고집스럽고 단단한 녀석들도 있었다. 어쩌면 그 가운데에는 시대마다 이따금 넓은 세상 한복판으로 밀고 들어가 늘 조금 메마르고 고집스러운 자기 생각을 새롭고 힘센 사상 체계의 중심으로 만든, 영리하고 끈질긴 슈바벤 머리도 한둘 있었을지 모른다. 슈바벤은 저 자신과 세상에 가장 잘 길들여진 신학자를 공급할 뿐 아니라, 철학적 사변의 전통적인 재능도 자랑스럽게 지니고 있어서, 거기서 이미 여러 번 이름난 예언자나 이단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위대한 전통은 아득히 뒤에 두고 이제 부리 날카로운 북쪽 독수리에게 순한 병아리처럼 바싹 붙어 있는 이 기름진 고장은, 적어도 신학과 철학이라는 정신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세상에 확실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곁에 이 고장 사람들 속에는 예부터 아름다운 형식과 꿈꾸는 시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따금 시원찮지 않은 시인과 문인이 자라난다. 물론 요즘에는 그들이 별로 대접받지 못한다. 시에서도 북쪽에 사는 우리 형님들이 주도권을 쥐어서, 남쪽 말은 세련되지 못하다며 더 날카로운 혀로 가락을 정하는데, 그 가락은 흙냄새를 좇기도 하고 베를린식 세련을 좇기도 하며, 날렵한 맛에서는 우리의 구식 리라를 훨씬 앞선다. 안타깝게도 여기서든 어디서든 그에 맞서 버둥거려 봐야 소용이 없고, 저 자랑스러운 베를린 사람들에게서 아직 아주 새로 낀 고귀한 녹을 벗겨 낼 수도 없다. 또 우리는 저마다 제 몫을 기꺼이 인정한다. 우리 슈바벤 사람에게는 고요한 숲 위에서 아득한 옛 영광의 몇 조각이 잠자며 꿈꾸는 우리의 옛 호엔슈타우펜을, 다른 이들에게는 반들반들하고 지나치게 깨끗한 찻길이 번쩍이는 대포 곁을 지나는 그들의 호엔촐레른을. 둘 다 저 나름의 좋은 점이 있으니까.

마울브론 신학교의 제도와 관습에서는 겉으로 보아 슈바벤다운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원 시절부터 남은 라틴어 이름들 곁에 요즘 들어 고전풍 딱지가 여러 개 새로 붙었다. 생도들이 나뉘어 들어간 방들은 포룸, 헬라스, 아테네,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렸고, 가장 작은 마지막 방의 이름이 게르마니아라는 것은, 게르만의 현재를 될 수 있는 대로 로마와 그리스의 꿈같은 모습으로 만들려는 까닭이 있다는 것을 거의 가리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도 겉치레일 뿐이었고, 사실은 히브리어 이름이 더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래서 즐거운 우연으로 아테네 방에는 가장 너그럽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필 고지식한 따분이 몇이 들어갔고, 스파르타에는 전사나 금욕가가 아니라 명랑하고 넉넉한 청강생 한 줌이 살게 되었다. 한스 기벤라트는 동무 아홉 명과 함께 헬라스 방에 배정되었다.

저녁에 처음으로 그 아홉 명과 함께 서늘하고 휑한 침실에 들어가 좁은 학생용 침대에 누웠을 때, 그는 마음이 묘했다. 천장에는 커다란 석유등이 매달려 있었고, 그 붉은 불빛 아래서 옷을 벗었는데, 등은 열 시 십오 분에 관리인이 껐다. 이제 그들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침대 둘 사이마다 옷을 얹은 작은 의자가 하나씩 놓였고, 기둥에는 아침 종을 울리는 줄이 늘어져 있었다. 소년들 가운데 두셋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라 쭈뼛쭈뼛 몇 마디 소곤거리다가 곧 조용해졌다. 다른 아이들은 서로 낯설어서, 저마다 조금 짓눌린 채 죽은 듯이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든 아이들은 깊은 숨소리를 냈고, 누군가 자다가 팔을 움직이면 리넨 이불이 사각거렸다. 아직 깨어 있는 아이는 꼼짝 않고 있었다. 한스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그는 이웃들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잠시 뒤 하나 건너 침대에서 이상하게 겁먹은 소리를 들었다. 거기 누운 아이가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울고 있었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은 그 나직한 흐느낌이 한스를 묘하게 흔들었다. 그 자신은 집이 그립지 않았지만, 집에 있던 고요한 작은 방이 아쉬웠다. 거기에 불확실한 새것과 숱한 동무들에 대한 쭈뼛한 두려움이 더해졌다. 아직 자정도 되기 전에 방 안에는 깨어 있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젊은 잠꾼들이 줄무늬 베개에 뺨을 묻고 나란히 누워 있었다. 슬픈 아이, 고집 센 아이, 명랑한 아이, 쭈뼛거리는 아이가 모두 똑같이 달콤하고 깊은 휴식과 망각에 사로잡혔다. 오래된 뾰족한 지붕과 탑과 돌출 창과 첨탑과 성가퀴와 뾰족 아치 회랑 위로 창백한 반달이 떠올랐다. 그 빛은 처마와 문턱에 머물고, 고딕식 창과 로마네스크식 문 위로 흘러, 회랑 분수의 크고 고귀한 수반 속에서 창백한 금빛으로 떨렸다. 노르스름한 빛줄기와 빛 얼룩 몇 개가 세 개의 창으로 헬라스 방 침실에도 떨어져, 예전에 수도사 세대들의 꿈 곁에 머물렀듯 잠든 소년들의 꿈 곁에 이웃처럼 머물렀다.

이튿날 기도실에서 엄숙한 입학식이 열렸다. 교사들은 프록코트를 입고 서 있었고, 원장이 연설을 했고, 학생들은 생각에 잠겨 몸을 굽힌 채 의자에 앉아 이따금 뒤쪽에 앉은 부모를 곁눈질하려 했다. 어머니들은 생각에 잠겨 미소 지으며 아들을 바라보았고, 아버지들은 꼿꼿이 앉아 연설을 따라가며 진지하고 결연한 얼굴을 했다. 자랑스럽고 갸륵한 감정과 아름다운 희망이 그들의 가슴을 부풀렸고, 오늘 자기 자식을 돈 이득과 바꿔 나라에 팔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한 명씩 이름이 불려 대열 앞으로 나갔고, 원장과 악수하며 입학이 허락되고 서약을 했다. 이로써 그는 행실만 바르면 평생 나라가 먹여 주고 거두어 주게 되었다. 그것이 어쩌면 아주 공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훨씬 더 엄숙하고 가슴 뭉클하게 여겨진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부모들은 걸어서, 우편 마차를 타고, 서둘러 잡아탄 이런저런 탈것을 타고 남겨진 아들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손수건이 부드러운 구월 공기 속에서 오래도록 나부꼈고, 마침내 숲이 떠나는 이들을 삼키자, 아들들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자, 이제 부모님들은 떠나셨습니다." 관리인이 말했다.

이제 서로 바라보고 알아 가기 시작했다. 먼저 방마다 저희끼리. 잉크병에 잉크를,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책과 공책을 정리하고, 새 방에 정을 붙여 보려 했다. 그러면서 서로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붙이고, 고향과 다니던 학교를 묻고, 함께 진땀 흘린 주 시험을 떠올렸다. 이 책상 저 책상 둘레에 수다 떠는 무리가 생겼고, 여기저기서 맑은 소년의 웃음이 용기 내어 터져 나왔으며, 저녁 무렵 한방 동무들은 항해 끝 무렵의 배 승객들보다 훨씬 더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헬라스 방에서 한스와 함께 사는 동무 아홉 가운데 넷은 뚜렷한 개성을 지닌 아이들이었고, 나머지는 대체로 괜찮은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먼저 슈투트가르트 교수의 아들 오토 하르트너. 재능 있고, 차분하고, 자신만만하고, 몸가짐이 흠잡을 데 없었다. 그는 어깨가 넓고 풍채가 좋고 옷을 잘 입었으며, 확고하고 야무진 태도로 방 아이들을 압도했다.

그다음은 알프 고원 작은 마을 촌장의 아들 카를 하멜. 그를 알려면 꽤 시간이 걸렸다. 그는 모순투성이였고, 겉보기 무던함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빠져나오면 열정적이고 걷잡을 수 없고 난폭했지만, 오래가지 않아 다시 제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면 그가 조용한 관찰자인지 그저 음흉한 겁쟁이인지 알 수 없었다.

눈에 띄지만 덜 복잡한 아이는 좋은 집안 출신의 슈바르츠발트 아이 헤르만 하일너였다. 첫날부터 다들 그가 시인이자 멋쟁이 문학 소년이라는 것을 알았고, 주 시험 작문을 육보격 시로 썼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말을 많이, 생기 있게 했고, 좋은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기 본성을 겉에 드러내 놓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 본성은 주로 감상과 경솔함이 덜 익은 채 섞인 젊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덜 보이게 더 깊은 것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몸도 마음도 나이보다 자라 있었고, 벌써 시험 삼아 자기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헬라스 방에서 가장 별난 아이는 에밀 루치우스였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 엷은 금발의 작은 사내로, 늙은 농부처럼 끈질기고 부지런하고 메말랐다. 몸집과 얼굴이 아직 다 자라지 않았는데도 그는 소년 같은 인상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어른 같은 데가 있어서, 마치 그에게는 이제 더 바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첫날부터, 다른 아이들이 지루해하고 떠들고 익숙해지려 애쓰는 동안 그는 문법책을 붙들고 조용하고 태연하게 앉아, 엄지로 귀를 틀어막고 잃어버린 몇 해를 되찾으려는 듯 무작정 외웠다.

이 조용한 괴짜의 속셈은 차츰차츰에야 드러났는데, 알고 보니 그는 어찌나 교묘한 구두쇠이자 이기주의자인지, 바로 그 악덕의 완벽함 덕에 일종의 존경, 적어도 묵인을 받았다. 그에게는 빈틈없는 절약과 이득 체계가 있었고, 그 하나하나의 묘수는 차츰차츰 드러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루치우스는 세면실에 맨 먼저 들어가거나 맨 나중에 들어가서, 남의 수건과 될 수 있으면 남의 비누까지 쓰고 자기 것은 아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수건은 늘 두 주 넘게 버텼다. 그런데 수건은 여드레마다 갈아야 했고, 월요일 오전마다 수석 관리인이 그것을 검사했다. 그래서 루치우스도 월요일 아침마다 번호 매긴 제 못에 새 수건을 걸었다가, 점심 쉬는 시간에 그것을 걷어 깔끔하게 개어 궤짝에 도로 넣고 아껴 둔 헌 수건을 다시 걸었다. 그의 비누는 딱딱해서 거품이 잘 나지 않았지만 그 대신 몇 달을 갔다. 그렇다고 에밀 루치우스의 겉모습이 지저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늘 말쑥했고, 숱 적은 금발을 정성껏 빗어 가르마를 탔으며, 속옷과 옷을 더없이 아껴 입었다.

세면실에서 나오면 아침 식사였다. 커피 한 잔과 설탕 한 조각과 빵 하나가 나왔다. 대부분은 그것이 넉넉하지 않다고 여겼다. 젊은이들은 여덟 시간 자고 나면 대개 아침 시장기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루치우스는 만족했고, 날마다 나오는 설탕 한 조각을 먹지 않고 아껴 두었다가 늘 사 갈 사람을 찾아냈다. 두 조각에 1페니히, 스물다섯 조각에 공책 한 권. 비싼 기름을 아끼려고 저녁이면 남의 등잔 불빛 아래서 즐겨 공부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그가 가난한 부모의 자식인 것도 아니었고, 아주 넉넉한 집 출신이었다. 하긴 정말 가난한 사람의 자식들은 살림을 꾸리고 아낄 줄을 잘 모르고, 오히려 늘 가진 만큼 다 쓰고 모아 둘 줄을 모르는 법이다.

에밀 루치우스는 그의 체계를 물건과 손에 잡히는 재산에만 펼친 것이 아니라, 정신의 나라에서도 할 수 있는 대로 이득을 끌어내려 했다. 이때 그는 모든 정신적 재산이 상대적인 값어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않을 만큼 영리했다. 그래서 그는 나중 시험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과목에만 진짜 부지런함을 쏟았고, 나머지 과목에서는 적당한 평균 성적에 겸손하게 만족했다. 그는 자기가 배우고 해낸 것을 늘 동무들이 해낸 것에 견주어서만 쟀고, 갑절로 알고 이등을 하느니 반만 알고 일등을 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녁에 동무들이 이런저런 소일거리며 놀이며 독서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조용히 공부하며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는 조금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고, 그는 이따금 시기심 없이 흐뭇한 눈길을 그쪽에 던지기까지 했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공부했다면 그의 수고는 남는 장사가 아니었을 테니까.

이 부지런한 출세주의자의 이 모든 꾀와 수를 아무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굴고 지나치게 잇속을 차리는 모든 이처럼 그도 곧 어리석은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수도원의 모든 수업이 무료였으므로, 그는 이것을 이용해 바이올린 수업을 받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무슨 기초 소양이나 음감이나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음악에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그는 결국 바이올린도 라틴어나 산수처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들은 바로는 음악은 나중에 살아가는 데 쓸모가 있어서 그 사람을 인기 있고 호감 가게 해 주며, 어쨌든 이 일은 돈이 들지 않았다. 신학교에서 연습용 바이올린까지 내주었기 때문이다.

루치우스가 찾아와 바이올린 수업을 받고 싶다고 하자 음악 교사 하스는 머리털이 곤두섰다. 그는 노래 시간을 통해 루치우스를 알고 있었는데, 루치우스의 노래 솜씨는 모든 동급생을 크게 즐겁게 했지만 선생인 그는 절망에 빠뜨렸다. 그는 아이를 말려 보려 했지만, 사람을 잘못 골랐다. 루치우스는 섬세하고 겸손하게 웃으며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내세우고, 음악을 향한 자기의 열망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연습용 바이올린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을 받아 들고,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을 받고, 날마다 반 시간씩 연습했다. 그런데 첫 연습 시간이 끝나자 방 동무들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그 끔찍한 신음 소리는 사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때부터 루치우스는 바이올린을 들고 연습할 조용한 구석을 찾아 쉴 새 없이 수도원을 돌아다녔고, 그런 데서는 긁고 끽끽대고 낑낑거리는 기이한 소리가 새어 나와 이웃들을 불안하게 했다. 시인 하일너의 말로는, 괴롭힘당하는 늙은 바이올린이 온몸의 벌레 구멍으로 살려 달라고 절망적으로 애원하는 것 같았다. 아무 진전이 없자 시달리던 선생은 신경질적이고 거칠어졌고, 루치우스는 점점 더 절박하게 연습했으며, 지금까지 자기만족에 차 있던 그의 장사꾼 얼굴에는 쓰라린 근심 주름이 잡혔다. 그건 그야말로 비극이었다. 마침내 선생이 그를 완전히 가망 없다고 선언하고 수업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이 홀린 배움꾼은 피아노를 골라 그것과도 길고 열매 없는 몇 달 동안 씨름하다가 지쳐서야 조용히 단념했다. 그러다 몇 해 뒤 음악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자기도 예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다 배웠는데 형편 때문에 이 아름다운 예술과 안타깝게도 차츰 멀어졌을 뿐이라고 넌지시 내비치곤 했다.

그래서 헬라스 방은 익살맞은 식구들 덕에 자주 즐거울 수 있었다. 멋쟁이 문학 소년 하일너도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숱하게 연출했기 때문이다. 카를 하멜은 비꼬기 좋아하는 재치 있는 관찰자 노릇을 했다.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 많았고, 그것이 그에게 어떤 우월함을 주었지만, 존경받는 역할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는 변덕스러웠고, 여드레쯤마다 한 번씩 싸움질로 제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 했는데, 그럴 때면 사납고 거의 잔인했다.

한스 기벤라트는 그것을 놀라워하며 지켜보았고, 착하지만 조용한 동무로서 제 조용한 길을 걸었다. 그는 부지런했다. 루치우스만큼이나 부지런했고, 하일너를 빼고는 방 동무들의 존경을 받았다. 하일너는 천재다운 경솔함을 제 깃발에 써 붙이고 다녔고, 이따금 그를 출세주의자라고 놀렸다. 대체로 나이에 걸맞게 빠르게 자라는 숱한 소년들은 서로 잘 어울렸다. 물론 저녁마다 도르멘트에서 벌어지는 싸움질이 드물지는 않았다. 다들 어른이 된 기분을 느끼려 애쓰고, 아직 익숙지 않은 교사들의 존댓말을 학문적 진지함과 좋은 몸가짐으로 걸맞게 받으려고 열심이었으며, 막 떠나온 라틴어 학교를 적어도 갓 들어간 대학생이 김나지움을 돌아보듯 거만하고 딱하게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따금 그 꾸민 위엄을 뚫고 꾸밈없는 개구쟁이 기질이 터져 나와 제 권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면 도르멘트에는 시원하게 허공을 가르는 주먹질 소리와 짭짤한 소년들의 욕설이 울렸다.

* * *

이런 기관의 책임자나 교사라면 지켜보는 것이 유익하고 흐뭇했을 것이다. 함께 산 지 몇 주가 지나면 소년 무리가 가라앉는 화학 혼합물처럼 되어, 흔들리던 구름과 덩어리가 뭉쳤다가 다시 풀리고 다른 모양을 이루다가 마침내 몇 개의 단단한 형체가 생기는 모습을. 처음의 수줍음을 이겨 내고 서로 충분히 알게 되자, 출렁이며 서로 찾아 헤매는 움직임이 시작되어, 무리가 모이고 우정과 반감이 드러났다. 같은 고향 출신이나 예전 학교 동무끼리 뭉치는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다양함과 보완을 향한 은밀한 충동을 따라 새로 사귄 이에게로 향했다. 도시 아이는 농부의 아들에게, 알프 고원 아이는 저지대 아이에게. 젊은 존재들은 머뭇거리며 서로를 더듬어 찾았고, 똑같다는 의식 곁에 따로 떨어지고 싶은 바람이 생겨났으며, 이때 여러 소년에게서 처음으로 싹트는 개성의 형성이 어린 시절의 잠에서 깨어났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애정과 질투의 작은 장면들이 펼쳐져 우정의 동맹이나 고집스러운 선전포고로 자라났고, 경우에 따라 다정한 사이와 친구끼리의 산책으로, 아니면 날카로운 레슬링과 주먹싸움으로 끝났다.

한스는 겉으로는 이런 움직임에 끼지 않았다. 카를 하멜이 그에게 뚜렷하고 거세게 우정을 청했을 때 그는 놀라서 뒷걸음질했다. 그러자 하멜은 곧 스파르타 방 아이 하나와 친해졌고, 한스는 혼자 남았다. 강한 감정이 우정의 나라를 지평선 위에 그리움의 빛깔로 황홀하게 떠오르게 했고, 그를 조용한 충동으로 그쪽으로 끌었다. 하지만 수줍음이 그를 붙잡았다. 엄격하고 어머니 없는 소년 시절 동안 남에게 기대는 재주가 시들어 버렸고, 겉으로 열광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소름이 끼쳤다. 거기에 소년다운 자존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성가신 야심이 더해졌다. 그는 루치우스와 달리 정말로 앎을 원했지만, 루치우스처럼 공부에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부지런히 책상에 붙어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이 우정을 즐기는 것을 보면 부러움과 그리움에 시달렸다. 카를 하멜은 맞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다른 누가 와서 그를 힘차게 끌어당기려 했다면 기꺼이 따라갔을 것이다. 그는 수줍은 소녀처럼 앉아서 누군가 자기를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자기보다 강하고 용감한 누군가가 와서 자기를 끌고 가 억지로라도 행복하게 해 주기를.

이런 일들 말고도 수업이, 특히 히브리어가 할 일을 많이 주었으므로, 처음 한동안은 젊은이들에게 무척 빨리 지나갔다. 마울브론을 둘러싼 숱한 작은 호수와 연못에는 창백한 늦가을 하늘과 시들어 가는 물푸레나무와 자작나무와 떡갈나무와 긴 어스름이 비쳤고, 아름다운 숲에서는 겨울을 앞둔 마지막 춤이 신음하고 환호하며 휘몰아쳤으며, 벌써 몇 번 엷은 서리가 내렸다.

서정적인 헤르만 하일너는 마음 맞는 친구를 얻으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이제 그는 날마다 외출 시간에 혼자 숲을 쏘다녔고, 특히 숲속 호수를 좋아했다. 갈대가 둘러싸고 시들어 가는 오래된 나뭇잎 왕관이 드리운, 울적한 갈색 연못이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 숲 구석이 몽상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여기서 그는 꿈꾸듯 회초리로 고요한 물에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었고, 레나우의 「갈대의 노래」를 읽을 수 있었으며, 낮은 물가 골풀 속에 누워 죽음과 사라짐이라는 가을의 주제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낙엽 지는 소리와 헐벗은 우듬지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거기에 울적한 화음을 보탰다. 그럴 때면 그는 자주 주머니에서 작고 검은 공책을 꺼내 연필로 시 한두 줄을 적었다.

시월 말, 반쯤 흐린 어느 한낮에도 그는 그러고 있었는데, 혼자 산책하던 한스 기벤라트가 같은 곳에 들어섰다. 한스는 시인 소년이 작은 수문의 널판 다리에 앉아 무릎에 공책을 얹고 깎은 연필을 생각에 잠겨 입에 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펼친 책 한 권이 곁에 놓여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갔다.

"안녕, 하일너. 뭐 해?"

"호메로스 읽어. 너는, 꼬마 기벤라트?"

"거짓말. 너 뭐 하는지 알아."

"그래?"

"당연하지. 시 지었잖아."

"그렇게 생각해?"

"그럼."

"이리 앉아!"

기벤라트는 하일너 곁 널판에 앉아 다리를 물 위로 흔들거리며, 여기저기서 갈색 잎이 하나 또 하나 고요하고 서늘한 공기 속을 맴돌며 내려와 갈색 수면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여기 쓸쓸하다." 한스가 말했다.

"응, 응."

둘은 길게 반듯이 누웠다. 그러자 가을 풍경 가운데 드리운 우듬지 몇 개만 겨우 보이고, 그 대신 구름 섬들이 조용히 떠가는 밝고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구름 참 예쁘다!" 한스가 기분 좋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꼬마 기벤라트." 하일너가 한숨을 쉬었다. "저런 구름이 될 수만 있다면!"

"그러면?"

"그러면 우리는 저 위에서 돛단배를 타고 가겠지. 숲과 마을과 고을과 나라 위로, 아름다운 배처럼. 너 배 본 적 없어?"

"없어, 하일너. 너는?"

"그럼 있지. 하지만 세상에, 너는 그런 거 하나도 모르잖아. 공부하고 애쓰고 달달 외우기만 하면 되는 너는!"

"그러니까 나를 바보 멍청이로 생각하는 거야?"

"그런 말 안 했어."

"나 네 생각만큼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그런데 배 이야기 더 해 줘."

하일너가 몸을 돌리다가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했다. 이제 그는 엎드려 두 손에 턱을 괴고 팔꿈치를 짚었다.

"라인강에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 배를 봤어, 방학 때. 한번은 일요일이었는데, 밤에 배에서 음악을 연주했고 색색의 등불이 있었어. 불빛이 물에 비치고,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강을 따라 내려갔어. 다들 라인 포도주를 마셨고, 아가씨들은 하얀 옷을 입었지."

한스는 귀 기울이며 대꾸하지 않았지만, 눈을 감고 그 배가 음악과 붉은 불빛과 하얀 옷의 아가씨들을 싣고 여름밤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다른 아이가 말을 이었다. "그래, 그건 지금과는 달랐어. 여기서 누가 그런 걸 알아? 죄다 따분이들, 죄다 겁쟁이들뿐이야! 죽어라 일하고 고생하면서 히브리어 알파벳보다 높은 건 아무것도 몰라. 너도 다를 거 없어."

한스는 말이 없었다. 이 하일너는 정말 별난 녀석이었다. 몽상가, 시인. 그는 이미 여러 번 하일너를 의아하게 여겼다. 다들 알다시피 하일너는 공부를 지독히 안 했는데도 아는 게 많았고, 대답도 잘했고, 그런데도 그 지식을 또 경멸했다.

"호메로스를 읽는데," 그가 계속 비웃었다. "마치 『오디세이아』가 요리책인 것처럼 읽어. 한 시간에 두 줄, 그러고는 그걸 한 낱말씩 되새김질하고 파헤치다가 신물이 나게 만들지. 그런데 수업이 끝날 때마다 꼭 이래. '여러분, 시인이 이걸 얼마나 섬세하게 돌려 말했는지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시 창작의 비밀을 들여다본 겁니다!' 불변화사랑 아오리스트 둘레에 소스처럼 끼얹는 거야, 아주 숨 막혀 죽지는 말라고. 그런 식이라면 호메로스 전부 가져가라고 해. 도대체 그 옛날 그리스 것들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야? 우리 가운데 누가 한번 그리스식으로 좀 살아 보려 했다간 당장 쫓겨날걸. 그런데도 우리 방 이름이 헬라스래! 순 조롱이지! 왜 「휴지통」이나 「노예 우리」나 「겁쟁이 소굴」이라고 안 하는 거야? 고전이란 고전은 다 사기야."

그는 허공에 침을 뱉었다.

"너, 아까 시 지었지?" 이제 한스가 물었다.

"응."

"뭐에 대해?"

"여기, 호수하고 가을에 대해."

"보여 줘!"

"싫어, 아직 덜 됐어."

"다 되면?"

"응, 그러든지."

둘은 일어나 천천히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이거 봐, 이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 본 적 있어?" 「낙원」 앞을 지날 때 하일너가 말했다. "회당, 아치 창, 회랑, 식당, 고딕에 로마네스크, 다 화려하고 정교하고 예술가의 작품이야. 그런데 이 마법이 다 누굴 위한 거야? 목사가 되겠다는 가난한 사내아이 서너 다스를 위해서야. 나라는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지."

한스는 오후 내내 하일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한스가 아는 걱정과 소원 같은 건 그에게는 아예 없었다. 그는 자기만의 생각과 말이 있었고, 더 뜨겁고 자유롭게 살았으며, 이상한 고통에 시달리고, 둘레의 모든 것을 경멸하는 것 같았다. 그는 오래된 기둥과 담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자기 영혼을 시에 비추고 공상으로 겉보기에 살아 있는 자기만의 삶을 짓는, 신비롭고 기이한 재주를 부렸다. 그는 날렵하고 거침없었으며, 하루에 한스가 일 년에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농담을 했다. 그는 울적했고, 자기의 슬픔을 낯설고 드물고 귀한 무엇처럼 즐기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하일너는 방 아이들 모두에게 자기의 얼룩덜룩하고 눈에 띄는 성격을 한 번 보여 주었다. 오토 벵거라는 허풍쟁이에 속 좁은 동무 하나가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한동안 하일너는 차분하고 재치 있고 여유롭게 굴다가, 그만 욱해서 따귀를 한 대 갈겼다. 곧바로 두 적수는 열을 올리며 떼어 낼 수 없이 서로 뒤엉켜 물고 늘어졌고, 키 잃은 배처럼 들이받고 반원을 그리고 경련하며 헬라스 방을 휩쓸었다. 벽을 따라, 의자를 넘어, 바닥에서, 둘 다 말없이 헐떡이고 씩씩거리고 거품을 물며. 동무들은 비평가 같은 얼굴로 둘러서서 지켜보며, 뒤엉킨 덩어리를 피하고, 제 다리와 책상과 등잔을 구해 내며 즐거운 긴장 속에서 결말을 기다렸다. 몇 분 뒤 하일너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떨어져 나와 숨을 몰아쉬며 섰다. 그는 만신창이였다. 눈은 빨갛고, 셔츠 깃은 찢기고, 바지 무릎에는 구멍이 났다. 상대가 다시 덤벼들려 했지만, 그는 팔짱을 끼고 서서 거만하게 말했다. "나는 그만할 거야. 원하면 때려." 오토 벵거는 욕을 하며 가 버렸다. 하일너는 자기 책상에 기대 스탠드를 만지작거리다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점점 더 많이. 그건 전에 없던 일이었다. 우는 것은 신학생이 할 수 있는 가장 창피한 짓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감추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을 나가지도 않고, 창백해진 얼굴을 등잔 쪽으로 향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눈물을 닦지도 않았고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도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호기심과 심술을 품고 그를 둘러싸 바라보았는데, 마침내 하르트너가 그 앞에 서서 말했다. "야, 하일너, 너 부끄럽지도 않냐?"

우는 아이가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천천히 둘레를 둘러보았다.

"부끄러워하라고, 너희 앞에서?" 그러고는 크게, 경멸스럽게 말했다. "아니, 이 친구야."

그는 얼굴을 닦고, 언짢게 웃고, 자기 등잔을 불어 끄고는 방을 나갔다.

한스 기벤라트는 그 장면 내내 제자리에 있으면서, 놀라고 겁먹은 채 하일너 쪽을 곁눈질하기만 했다. 십오 분 뒤 그는 사라진 아이를 따라가 볼 용기를 냈다. 하일너는 어둡고 싸늘한 도르멘트의 깊은 창턱 하나에 꼼짝 않고 앉아 회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에서 보니 그의 어깨와 가늘고 날카로운 머리가 묘하게 진지하고 소년 같지 않아 보였다. 한스가 다가가 창가에 멈춰 서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고, 한참 뒤에야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야." 한스가 수줍게 말했다.

"뭘 원해?"

"아무것도."

"그래? 그럼 다시 가도 돼."

한스는 마음이 상해서 정말로 가려고 했다. 그때 하일너가 그를 붙잡았다.

"기다려," 그가 억지로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이제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마 둘 다 이 순간 처음으로 상대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이 젊고 매끈한 얼굴 뒤에 저만의 특징을 지닌 특별한 한 인간의 삶이, 저만의 방식으로 새겨진 특별한 영혼이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려 했을 것이다.

헤르만 하일너가 천천히 팔을 뻗어 한스의 어깨를 잡고, 얼굴이 아주 가까워질 때까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한스는 갑자기 야릇한 놀라움과 함께 상대의 입술이 자기 입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의 가슴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답답함으로 뛰었다. 어두운 도르멘트에 함께 있는 것과 이 갑작스러운 입맞춤은 무언가 모험 같고 새롭고 어쩌면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다 들키면 얼마나 끔찍했을지 떠올랐다. 이 입맞춤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아까의 울음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럽고 수치스럽게 보이리라는 것을 그는 확실한 느낌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피가 머리로 거세게 솟구쳤고, 할 수만 있으면 달아나고 싶었다.

이 작은 장면을 본 어른이 있었다면, 어쩌면 그는 남몰래 기뻐했을 것이다. 부끄러워하는 우정 고백의 어설프고 수줍은 다정함과, 둘 다 곱고 앞날이 기대되는 진지하고 가는 두 소년의 얼굴을 보고서. 반쯤은 아직 어린아이의 귀여움을 지녔고, 반쯤은 이미 젊은이 시절의 수줍고 아름다운 고집이 스쳐 간 얼굴들이었다.

차츰 젊은 무리는 함께 사는 법을 익혔다. 서로를 알게 되었고, 저마다 다른 아이에 대해 어느 정도 앎과 생각을 지니게 되었으며, 숱한 우정이 맺어졌다. 히브리어 단어를 함께 외우는 단짝,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산책하거나 실러를 읽는 단짝들이 있었다. 라틴어는 잘하지만 셈은 못하는 아이들이 라틴어는 못하지만 셈은 잘하는 아이들과 손을 잡고 공동 작업의 열매를 누렸다. 다른 종류의 계약과 재산 공유를 바탕으로 한 우정도 있었다. 이를테면 모두가 부러워하던 햄 주인은 궤짝 바닥에 고운 사과를 가득 깔아 둔 슈탐하임 출신의 정원사 아들에게서 자기를 채워 줄 반쪽을 찾았다. 햄을 먹다가 목이 마르자 그는 사과 하나를 청하며 그 대가로 햄을 권했다. 둘은 함께 앉았고, 조심스러운 대화 끝에 햄이 떨어지면 곧 새로 채워질 것이고 사과 주인도 봄이 한참 깊어질 때까지 아버지가 보내 주는 몫으로 버틸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렇게 해서 탄탄한 관계가 이루어졌고, 그것은 더 이상적이고 더 열렬하게 맺어진 숱한 동맹보다 오래갔다.

혼자 남은 아이는 몇 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루치우스가 있었는데, 그의 탐욕스러운 예술 사랑은 그때 한창 꽃피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짝들도 있었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짝으로 꼽힌 것이 헤르만 하일너와 한스 기벤라트였다. 경솔한 아이와 성실한 아이, 시인과 출세주의자. 둘 다 영리하고 재능 있는 아이로 꼽혔지만, 하일너는 반쯤 놀리는 뜻으로 천재라는 평판을 누렸고, 다른 하나는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다들 저마다 자기 우정에 붙들려 저희끼리 지내기를 좋아했으므로, 둘을 꽤 내버려 두었다.

그렇다고 이런 개인적인 관심사와 사건들 때문에 학교가 뒷전으로 밀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학교는 커다란 악장이자 리듬이었고, 루치우스의 음악이며 하일너의 시 짓기며 온갖 동맹과 다툼과 이따금의 싸움질은 그 곁에서 장난스럽게 흘러가는 사소한 변주곡이자 작은 별도 오락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히브리어가 할 일을 많이 주었다. 여호와의 기이하고 아득히 오래된 언어는 뻣뻣하고 메말랐으면서도 신비하게 아직 살아 있는 나무처럼, 낯설고 옹이투성이에 수수께끼처럼 젊은이들의 눈앞에서 자라났다. 기묘하게 갈라진 가지로 눈길을 끌고, 이상한 빛깔과 향기의 꽃으로 놀라게 했다. 그 가지와 구멍과 뿌리에는 소름 끼치거나 다정한 천 년 묵은 정령들이 살았다. 공상적이고 무시무시한 용, 순박하고 사랑스러운 옛이야기, 주름진 진지하고 메마른 노인의 머리들이 아름다운 소년과 눈이 고요한 소녀나 싸움 잘하는 여자들 곁에 있었다. 아늑한 루터 성경에서는 구약의 안개에 부드럽게 감싸여 멀고 꿈같이 울리던 것이, 이제 거칠고 진짜인 언어 속에서 피와 목소리를 얻고, 낡아서 굼뜨지만 질기고 섬뜩한 생명을 얻었다. 적어도 하일너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는 모세 오경 전체를 날마다 시간마다 저주하면서도, 단어를 다 알고 더는 읽다가 틀리지 않는 숱한 참을성 있는 학생들보다 거기서 더 많은 생명과 영혼을 찾아 빨아들였다.

그 곁에 신약이 있었다. 거기서는 더 부드럽고 밝고 내면적이었고, 그 언어는 덜 오래되고 덜 깊고 덜 풍부했지만 더 섬세했고, 젊고 열렬하고 꿈꾸는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오디세이아』가 있었다. 힘차고 아름답게 울리며 힘 있고 고르게 흘러가는 그 시구에서는, 하얗고 둥근 물의 요정의 팔처럼, 가라앉아 버린, 형식이 맑고 행복한 삶에 대한 소식과 예감이 솟아올랐다. 어떤 때는 힘차게 윤곽 잡힌 투박한 어느 한 줄에서 단단하고 손에 잡히게, 어떤 때는 몇 낱말과 시구에서 꿈과 아름다운 예감으로만 아련히 비치며.

그 곁에서 역사가 크세노폰과 리비우스는 사라졌다. 아니면 적어도 덜 밝은 빛으로 겸손하게, 거의 빛을 잃은 채 한쪽에 비켜서 있었다.

한스는 친구에게는 모든 것이 자기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하일너에게는 추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상상하고 공상의 빛깔로 칠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안 되는 것은 마지못해 다 내버려 두었다. 수학은 그에게 음흉한 수수께끼를 잔뜩 짊어진 스핑크스였다. 그 서늘하고 사악한 눈길이 제물을 얼어붙게 했고, 그는 그 괴물을 멀찍이 돌아서 피해 다녔다.

두 아이의 우정은 이상한 관계였다. 하일너에게 그것은 즐거움이고 사치이고 편안함이고 변덕이기도 했지만, 한스에게는 어떤 때는 자랑스럽게 지키는 보물이었고, 어떤 때는 지기 힘든 커다란 짐이었다. 지금까지 한스는 저녁 시간을 늘 공부하는 데 썼다. 그런데 이제는 거의 날마다 헤르만이 달달 외우는 공부에 질리면 그에게 건너와 책을 빼앗고 그를 붙잡았다. 마침내 한스는 친구가 아무리 좋아도 저녁마다 그가 올까 봐 떨었고, 의무로 정해진 공부 시간에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갑절로 열심히, 서둘러 공부했다. 하일너가 그의 부지런함을 이론으로도 공격하기 시작하자 그는 더 괴로웠다.

"그건 날품팔이야." 이런 식이었다. "너는 그 공부를 하나도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선생들이나 네 영감이 무서워서 하는 거야. 일등이나 이등을 하면 너한테 뭐가 남는데? 나는 이십 등이지만 그렇다고 너희 출세주의자들보다 멍청하지 않아."

하일너가 교과서를 어떻게 다루는지 처음 보았을 때도 한스는 기겁했다. 한번은 강의실에 책을 두고 와서, 다음 지리 시간을 준비하려고 하일너의 지도책을 빌렸다. 그런데 하일너가 지도 몇 장을 통째로 연필로 칠해 놓은 것을 보고 그는 소름이 끼쳤다. 이베리아반도 서해안은 괴상한 옆얼굴로 그려져서, 코가 포르투에서 리스본까지 뻗어 있었고, 피니스테레곶 언저리는 곱슬곱슬한 머리 장식으로 꾸며졌으며, 상비센테곶은 멋지게 꼬아 올린 턱수염 끝이 되어 있었다. 장마다 그런 식이었다. 지도 뒤쪽 흰 면에는 풍자화가 그려지고 뻔뻔한 장난 시가 적혀 있었으며, 잉크 얼룩도 빠지지 않았다. 한스는 자기 책을 성물이나 보물처럼 다루는 데 익숙했으므로, 이런 대담한 짓을 반은 신전 모독으로, 반은 범죄이긴 해도 영웅적인 무용담으로 느꼈다.

착한 기벤라트는 친구에게 그저 기분 좋은 장난감, 말하자면 집고양이 같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고, 한스 자신도 이따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하일너는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에게 매달렸다. 그에게는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고, 자기 말을 들어 주고, 자기를 우러러보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 학교와 삶에 대한 혁명적인 연설을 늘어놓을 때 조용히, 솔깃해서 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울적한 시간이 오면 자기를 위로해 주고 그 무릎에 머리를 묻을 수 있는 누군가도 필요했다. 그런 성품의 모든 이들처럼 이 젊은 시인도 까닭 없고 조금 교태 섞인 우울의 발작에 시달렸다. 그 원인은 한편으로는 어린 영혼이 조용히 작별을 고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힘과 예감과 욕망이 아직 목표 없이 넘쳐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사내가 되어 가는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몸부림이다. 그럴 때면 그는 동정받고 귀여움받고 싶은 병적인 욕구를 느꼈다. 예전에 그는 어머니의 귀염둥이였는데, 이제 아직 여자를 사랑할 만큼 익지 않은 동안에는 고분고분한 친구가 위로자 노릇을 했다.

그는 자주 저녁에 죽을 것처럼 불행한 얼굴로 한스에게 와서 그를 공부에서 끌어내 함께 도르멘트로 나가자고 했다. 거기 차가운 복도에서, 아니면 높고 어스름한 기도실에서 둘은 나란히 오락가락 거닐거나, 오들오들 떨며 창가에 앉았다. 그러면 하일너는 서정적이고 하이네를 읽는 젊은이들처럼 온갖 처량한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조금 유치한 슬픔의 구름에 휩싸였다. 한스는 그것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인상을 받았고, 이따금은 거기 물들기까지 했다. 예민한 멋쟁이 문학 소년은 특히 흐린 날씨에 발작을 일으켰고, 대개 그 하소연과 신음이 절정에 이르는 것은 늦가을 비구름이 하늘을 어둡게 덮고, 그 뒤에서 흐린 베일과 틈 사이로 내다보며 감상적인 달이 제 길을 그려 가는 저녁이었다. 그럴 때면 그는 오시안풍 기분에 흠뻑 젖어 안개 같은 비애에 녹아들었고, 그 비애는 한숨과 말과 시가 되어 죄 없는 한스 위로 쏟아졌다.

이런 처량한 고통의 장면들에 짓눌리고 시달린 한스는 남는 시간이면 서두르는 열의로 공부에 뛰어들었지만, 공부는 갈수록 힘들어졌다. 오래된 두통이 다시 찾아온 건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 하고 지친 시간이 점점 잦아지고, 꼭 해야 할 것만 하려 해도 자기를 채찍질해야 한다는 것이 그를 몹시 걱정스럽게 했다. 그는 이 별난 아이와의 우정이 자기를 지치게 하고, 지금까지 건드려지지 않았던 자기 존재의 어느 부분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친구가 침울하고 울먹일수록 그는 더 딱해 보였고, 친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의식이 그를 더 다정하고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이 병적인 비애가 남아도는 건강하지 못한 충동을 내뿜는 것일 뿐, 그가 진실하고 정직하게 우러러보는 하일너의 본성에 속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잘 느꼈다. 친구가 자기 시를 읽어 주거나, 시인의 이상을 이야기하거나, 실러와 셰익스피어의 독백을 열정과 큰 몸짓으로 읊을 때면, 한스에게는 그가 자기에게 없는 마법의 재능으로 허공을 걸으며 신 같은 자유와 불타는 열정 속에서 움직이고, 호메로스의 하늘 사자처럼 날개 달린 신을 신고 자기와 자기 같은 이들에게서 멀리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 시인들의 세계는 그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는데, 이제 그는 처음으로 아름답게 흐르는 말과 속이는 형상과 아첨하는 운율의 기만적인 힘을 저항할 수 없이 느꼈고, 새로 열린 이 세계에 대한 숭배는 친구에 대한 감탄과 함께 자라서 떼어 낼 수 없는 하나의 감정이 되었다.

* * *

그러는 사이 폭풍 치는 어두운 십일월 날들이 왔다. 등잔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몇 시간밖에 안 되었고, 검은 밤이면 폭풍이 커다랗게 구르는 구름 산을 캄캄한 하늘로 몰고 가며 신음하거나 다투듯 오래되고 단단한 수도원 건물에 부딪쳤다. 나무들은 이제 잎이 다 떨어졌다. 그 나무 많은 고장의 왕인 우람하고 옹이진 가지의 떡갈나무들만이 시든 잎 왕관을 달고 다른 어떤 나무보다 시끄럽고 퉁명스럽게 웅성거렸다. 하일너는 몹시 침울해져서, 요즘에는 한스 곁에 앉아 있는 대신 혼자 외딴 연습실에서 바이올린을 휘몰아치듯 켜거나 동무들에게 싸움을 거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저녁 그 방을 찾아갔더니, 열성적인 루치우스가 악보대 앞에서 연습하고 있었다. 그는 화가 나서 갔다가 반 시간 뒤에 다시 왔다. 루치우스는 여전히 연습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하일너가 퍼부었다. "연습하고 싶은 사람이 또 있다고. 네 깽깽이 소리는 안 그래도 온 나라의 재앙이야."

루치우스는 물러서려 하지 않았고, 하일너는 거칠어졌다. 상대가 태연하게 다시 긁기 시작하자 그는 악보대를 발로 걷어차 넘어뜨렸다. 악보가 방 안에 흩날리고 악보대가 바이올린 켜는 아이의 얼굴을 쳤다. 루치우스는 악보를 주우려고 몸을 굽혔다.

"원장님께 이를 거야."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하일너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럼 내가 덤으로 개 걷어차듯 한 대 더 걷어찼다고도 말해." 그러고는 곧바로 실행에 옮기려 했다.

루치우스는 옆으로 뛰어 달아나 문에 이르렀다. 쫓는 아이가 그 뒤를 따랐고, 복도와 강당을 지나, 계단과 마루를 거쳐 수도원의 가장 먼 곳, 고요하고 위엄 있게 원장 거처가 있는 날개 건물까지 뜨겁고 요란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하일너는 원장 서재 문 바로 앞에서야 도망자를 따라잡았는데, 루치우스는 이미 문을 두드리고 열린 문간에 서 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약속된 발길질을 한 대 맞고, 문을 미처 닫지도 못한 채 폭탄처럼 지배자의 지성소로 날아 들어갔다.

전에 없던 사건이었다. 다음 날 아침 원장은 젊은이의 타락에 대해 빛나는 연설을 했고, 루치우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 그 말에 수긍하며 들었으며, 하일너는 무거운 감금 처벌을 선고받았다.

"벌써 여러 해 동안," 원장이 그에게 호통쳤다. "여기서 이런 처벌은 없었소. 당신이 십 년 뒤에도 이 일을 기억하도록 해 주겠소. 너희 다른 학생들에게는 이 하일너를 본보기로 세워 경계로 삼게 하겠다."

동기생 전체가 그를 쭈뼛쭈뼛 곁눈질했다. 그는 창백하고 고집스럽게 서서 원장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속으로 그를 감탄하는 아이가 많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떠들썩하게 복도를 채울 때 그는 나병 환자처럼 혼자 따돌림을 받았다. 지금 그의 편에 서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한스 기벤라트도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자기의 의무라는 것을 그는 잘 느꼈고, 자기의 비겁함을 의식하며 괴로웠다. 그는 불행하고 부끄러워하며 창가에 몸을 붙이고 눈을 들지 못했다. 친구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고, 남의 눈에 띄지 않고 그럴 수만 있다면 많은 것을 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감금 처벌을 받은 학생은 수도원에서 꽤 오랫동안 낙인찍힌 것이나 다름없다. 다들 그가 이제부터 특별히 감시받고, 그와 사귀는 것이 위험하고 나쁜 평판을 불러온다는 것을 안다. 나라가 생도들에게 베푸는 은혜에는 날카롭고 엄한 규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은 입학식의 그 긴 연설에도 나왔다. 한스도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친구에 대한 의무와 야심 사이의 싸움에서 졌다. 그의 이상은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름난 시험을 치르고 한몫을 하는 것이었지, 낭만적이고 위험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겁먹은 채 제 구석에 머물렀다. 아직은 나서서 용감해질 수 있었지만, 그것은 순간마다 더 어려워졌고, 그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의 배신은 행동이 되어 있었다. 하일너는 그것을 똑똑히 알아챘다. 그 열정적인 소년은 다들 자기를 피한다는 것을 느꼈고 그걸 이해했지만, 한스만은 믿고 있었다. 지금 느끼는 아픔과 분노 곁에서는 지금까지의 그 내용 없는 처량한 감정들이 스스로에게도 공허하고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그는 잠깐 기벤라트 곁에 멈춰 섰다. 그는 창백하고 거만해 보였고, 나직이 말했다. "너는 비열한 겁쟁이야, 기벤라트. 퉤!" 그러고는 나직이 휘파람을 불며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가 버렸다.

다른 생각과 일거리가 젊은이들을 붙잡아 준 것은 다행이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갑자기 눈이 내리더니, 이어 서리 내린 맑은 겨울 날씨가 찾아와 눈싸움도 하고 스케이트도 탈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 갑자기 크리스마스와 방학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 이야기를 했다. 하일너는 덜 주목받게 되었다. 그는 조용히, 고집스럽게,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거만한 얼굴로 돌아다니며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고, 검은 방수포 표지에 「어느 수도사의 노래」라는 제목을 단 공책에 자주 시를 적었다.

떡갈나무와 오리나무와 너도밤나무와 버드나무에는 서리와 얼어붙은 눈이 섬세하고 환상적인 모양으로 매달렸다. 연못에서는 맑은 얼음이 추위 속에서 바스락거렸다. 회랑 안뜰은 고요한 대리석 정원 같았다. 즐겁고 축제 같은 들뜸이 방마다 퍼졌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설렘은 흠잡을 데 없고 절도 있는 두 교수에게까지 부드러움과 밝은 들뜸의 작은 빛을 주었다. 교사와 학생 가운데 크리스마스에 무심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일너도 덜 이를 악물고 덜 비참해 보이기 시작했고, 루치우스는 방학에 어떤 책과 어떤 구두를 가져갈지 궁리했다. 집에서 오는 편지에는 아름답고 무언가를 예감하게 하는 것들이 적혀 있었다. 가장 갖고 싶은 게 뭐냐는 물음, 빵 굽는 날 이야기, 곧 있을 깜짝 선물에 대한 귀띔,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는 기쁨.

방학 여행을 앞두고 동기생들, 특히 헬라스 방은 작고 즐거운 일을 하나 더 겪었다. 교사들을 저녁 크리스마스 축하 모임에 초대하기로 했는데, 모임은 가장 큰 방인 헬라스에서 열기로 했다. 축사 하나, 시 낭송 둘, 플루트 독주 하나, 바이올린 이중주 하나가 준비되었다. 그런데 프로그램에 꼭 우스운 순서도 하나 넣어야 했다. 다들 의논하고 협상하고 안을 냈다가 물렸지만 의견이 모이지 않았다. 그때 카를 하멜이 지나가는 말로, 사실 가장 웃긴 건 에밀 루치우스의 바이올린 독주일 거라고 했다. 그 말이 먹혔다. 부탁과 약속과 위협으로 다들 이 불운한 악사를 설득해 무대에 서게 했다. 그리하여 정중한 초대장과 함께 교사들에게 보낸 프로그램에는 특별 순서로 이렇게 적혔다. 「고요한 밤, 바이올린을 위한 노래, 연주 에밀 루치우스, 실내악 거장」. 그 칭호는 그 외딴 음악실에서 부지런히 연습한 덕에 얻은 것이었다.

원장, 교수들, 조교들, 음악 교사, 수석 관리인이 초대받아 축하 모임에 왔다. 루치우스가 하르트너에게서 빌린 검은 연미복을 입고, 머리를 빗어 넘기고 다림질한 차림으로 부드럽고 겸손한 미소를 띠고 나서자 음악 교사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의 인사부터가 벌써 웃어 달라는 초대 같았다. 그의 손가락 아래서 「고요한 밤」은 가슴을 저미는 하소연, 신음하는 고통스러운 수난의 노래가 되었다. 그는 두 번 다시 시작했고, 선율을 찢고 토막 내고, 발로 박자를 구르며, 한겨울 추위 속의 나무꾼처럼 일했다.

원장 선생님은 분개해서 창백해진 음악 교사에게 즐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치우스는 세 번째로 노래를 시작했다가 이번에도 막히자 바이올린을 내리고 청중을 향해 사과했다. "안 되네요. 하지만 저는 지난가을부터 바이올린을 켰거든요."

"좋소, 루치우스." 원장이 소리쳤다. "애써 줘서 고맙소. 계속 그렇게 배우시오. 고난을 넘어 별에 이르리라(Per aspera ad astra)!"

십이월 이십사일에는 새벽 세 시부터 모든 침실에 생기와 소란이 가득했다. 창문에는 결 고운 성에꽃이 두껍게 피었고, 세숫물은 얼어붙었고, 수도원 안뜰에는 살을 에는 얇은 찬 바람이 불었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식당에서는 커다란 커피 통이 김을 뿜었고, 곧이어 외투와 목도리로 꽁꽁 싸맨 학생들이 어두운 무리를 지어 희미하게 빛나는 하얀 들판을 지나고 말없는 숲을 지나 멀리 떨어진 역으로 걸어갔다. 모두 수다를 떨고 농담하고 크게 웃었지만, 그러면서도 저마다 남모르는 소원과 기쁨과 기대로 가득했다. 온 나라 곳곳의 도시와 마을과 외딴 농가의 따뜻하고 축제답게 꾸민 방에서 부모와 형제자매가 자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대부분에게는 멀리서 집으로 돌아가는 첫 크리스마스였고, 대부분은 사람들이 사랑과 자랑으로 자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다.

눈 덮인 숲 한가운데 있는 작은 역에서 매서운 추위 속에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한마음이고 너그럽고 즐겁게 함께 있었다. 하일너만 혼자 말없이 있다가, 기차가 오자 동무들이 다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혼자 다른 칸으로 갔다. 다음 역에서 갈아탈 때 한스는 그를 한 번 더 보았지만, 부끄러움과 후회의 덧없는 감정은 귀향의 흥분과 기쁨 속에 금세 다시 가라앉았다.

집에 오니 아빠는 싱글벙글 만족해 있었고, 선물을 넉넉히 차린 탁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기벤라트네 집에는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 축제가 없었다. 노래도 축제의 감격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전나무도 없었다. 기벤라트 씨는 축제를 지내는 법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아들이 자랑스러웠고, 이번에는 선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한스는 다른 식으로 지내 본 적이 없어서 아쉬운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좋지 않다고, 너무 마르고 너무 창백하다고 하며 수도원 밥이 그렇게 부실하냐고 물었다. 그는 열심히 아니라고 하며, 잘 지내고 있는데 다만 머리가 자주 아프다고 했다. 이 일로 목사가 그를 위로했다. 목사도 젊을 때 같은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 괜찮았다.

강은 반들반들하게 얼어붙어서 명절 동안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스는 거의 온종일 밖에 있었다. 새 옷을 입고 초록색 신학생 모자를 쓰고, 예전 동급생들이 부러워하는 더 높은 세계로 멀리 자라 나간 모습으로.

4장

경험으로 보면 어느 신학생 동기에서든 수도원의 네 해 동안 동무 하나나 여럿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따금 누가 죽어서 노래 속에 묻히거나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고향으로 옮겨진다. 이따금 누가 억지로 뛰쳐나가거나 특별한 죄 때문에 쫓겨난다. 드물게, 그리고 상급반에서만, 어쩔 줄 모르는 어느 소년이 젊은 날의 괴로움에서 짧고 어두운 출구를 총 한 방이나 물속으로 뛰어드는 데서 찾는 일도 이따금 있다.

한스 기벤라트의 동기에서도 동무 몇이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상한 우연으로 그들은 모두 헬라스 방 아이들이었다.

방 식구 가운데 힌딩어라는 수수한 금발의 작은 사내가 있었다. 별명은 힌두였고, 알고이 지방 어느 개신교 소수 마을의 재단사 장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조용한 시민이었고, 떠난 뒤에야 조금 입에 오르내렸는데, 그때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아끼기 좋아하는 실내악 거장 루치우스의 옆자리 아이였던 그는 루치우스와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다정하고 수수하게 지냈지만, 그 밖에는 친구가 없었다. 그가 없어지고 나서야 헬라스 방 아이들은 그를 바라는 것 없는 좋은 이웃으로, 자주 들뜨는 방 생활 속의 쉼터로 좋아했다는 것을 알았다.

일월 어느 날 그는 로스 연못으로 나가는 스케이트 패를 따라갔다. 스케이트는 없었고, 그냥 한번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곧 추워져서 몸을 데우려고 연못가를 쿵쿵 밟으며 돌았다. 그러다 달리게 되었고, 들판을 지나 한참 멀리 가서 다른 작은 호수에 이르렀다. 그 호수는 더 따뜻하고 센 샘물 때문에 얼음이 얇게만 얼어 있었다. 그는 갈대를 헤치고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그토록 작고 가벼운데도, 물가 가까이에서 얼음이 깨져 빠졌고, 잠시 버둥거리며 소리치다가 아무도 모르는 새 어둡고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오후 두 시 첫 수업이 시작되고서야 그가 없는 것을 알았다.

"힌딩어는 어디 있습니까?" 조교가 외쳤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헬라스 방에 가서 보십시오!"

하지만 거기에도 그의 흔적은 없었다.

"늦는 모양이니 그 학생 없이 시작합시다. 74쪽 일곱째 절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십시오. 시간은 정확히 지켜야 합니다."

세 시를 쳐도 힌딩어가 여전히 없자 교사는 덜컥 겁이 나서 원장에게 사람을 보냈다. 원장은 곧바로 몸소 강의실에 나타나 이것저것 캐묻고는, 학생 열 명을 관리인과 조교 한 사람에게 딸려 찾으러 보냈다. 남은 학생들에게는 받아쓰기 과제가 주어졌다.

네 시에 조교가 노크도 없이 강의실에 들어와 원장에게 소곤소곤 보고했다.

"조용히!" 원장이 명령하자, 학생들은 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 기대에 차서 그를 바라보았다.

"여러분의 동무 힌딩어가," 그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연못에 빠져 죽은 것 같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그를 찾는 것을 도와야 합니다. 마이어 교수님이 여러분을 이끄실 것이니, 그분 말씀을 정확히 그대로 따르고 제멋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

다들 놀라서 소곤거리며 길을 나섰다. 교수가 앞장섰다. 작은 도시에서 남자 몇이 밧줄과 장대와 막대를 들고 서두르는 행렬에 합류했다. 지독히 추웠고, 해는 벌써 숲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다.

마침내 소년의 작고 뻣뻣한 몸을 찾아 눈 덮인 골풀 속에서 들것에 눕혔을 때는 벌써 어스름이 짙었다. 신학생들은 겁먹은 새들처럼 불안하게 둘러서서 시신을 바라보며 퍼렇게 곱은 손가락을 비볐다. 그리고 물에 빠져 죽은 동무가 앞에서 들려 가고 그들이 말없이 눈 덮인 들판을 지나 뒤따를 때에야, 답답하던 그들의 영혼에 갑자기 오싹한 전율이 스쳤고, 노루가 적을 알아채듯 그들은 무서운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처량하게 떠는 그 작은 무리 속에서 한스 기벤라트는 우연히 옛 친구 하일너 곁에서 걷게 되었다. 둘은 같은 들판 둔덕에 걸려 비틀거리면서 동시에 서로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죽음을 본 것이 그를 압도하고 한순간 모든 이기심의 덧없음을 깨우쳐 주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뜻밖에 친구의 창백한 얼굴을 그토록 가까이서 보자, 한스는 까닭 모를 깊은 아픔을 느끼고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친구의 손을 잡았다. 하일너는 마지못한 듯 손을 빼고 언짢은 듯 고개를 돌리더니, 곧바로 다른 자리를 찾아 행렬 맨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모범생 한스의 가슴은 아픔과 부끄러움으로 뛰었고, 얼어붙은 들판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동안 서리에 퍼레진 뺨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또 한 방울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잊을 수 없고 어떤 뉘우침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와 잘못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앞의 높이 든 들것 위에 누운 것이 작은 재단사의 아들이 아니라 자기 친구 하일너이고, 그가 자기의 배신에 대한 아픔과 분노를 저 멀리 다른 세상으로 가져가는 것 같았다. 성적표와 시험과 성공이 아니라 오직 양심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만 셈하는 세상으로.

그러는 사이 그들은 신작로에 나섰고, 서둘러 수도원에 닿았다. 원장을 앞세운 모든 교사가 죽은 힌딩어를 맞았다. 살아 있을 때라면 그런 영광은 생각만 해도 달아났을 아이였다. 교사들은 죽은 학생을 언제나 산 학생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본다. 그럴 때면 그들은 한순간 모든 삶과 모든 젊음의 값어치와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평소에는 너무도 자주 아무렇지 않게 거기에 죄를 짓는 그것을.

그날 저녁과 이튿날 하루 내내, 보잘것없는 시신이 거기 있다는 것이 마법처럼 작용해서, 모든 행동과 말을 누그러뜨리고 가라앉히고 베일로 덮었다. 그 짧은 동안 다툼과 화와 소란과 웃음은 물의 요정들이 잠깐 수면에서 사라져 물을 꼼짝 않고 생명 없는 듯 남겨 두듯 숨어 버렸다. 둘이서 물에 빠진 아이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그의 이름을 다 불렀다. 죽은 이 앞에서는 힌두라는 별명이 걸맞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여느 때는 눈에 띄지도 않고 불리지도 않은 채 무리 속에 묻혀 있던 조용한 힌두가, 이제 그 큰 수도원 전체를 자기 이름과 자기 죽음으로 가득 채웠다.

이틀째 되는 날 아버지 힌딩어가 왔다. 그는 아들이 누워 있는 작은 방에 몇 시간 혼자 있다가, 원장에게 차 대접을 받고 〈히르셴〉 여관에서 묵었다.

그리고 장례식이었다. 관은 도르멘트에 놓였고, 알고이에서 온 재단사가 그 곁에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영락없는 재단사 꼴이었다. 끔찍하게 마르고 뾰족했으며, 초록빛이 도는 검은 연미복에 꼭 끼는 초라한 바지를 입고, 옛 민병대 시절의 낡은 예모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의 작고 가는 얼굴은 바람 속의 한 푼짜리 촛불처럼 근심스럽고 슬프고 약해 보였고, 그는 원장과 교수님들 앞에서 줄곧 쩔쩔매며 공손했다.

마지막 순간, 운구하는 사람들이 관을 들기 전에 슬픈 작은 사내가 한 번 더 앞으로 나와 쑥스럽고 수줍은 다정한 몸짓으로 관 뚜껑을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눈물을 참으며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크고 고요한 공간 한가운데 겨울의 마른 어린나무처럼, 어찌나 버림받고 희망 없고 내팽개쳐진 모습이던지 보기에 딱했다. 목사가 그의 손을 잡고 곁에 있어 주자, 그는 기묘하게 휜 실크해트를 쓰고 맨 앞에서 관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 수도원 안뜰을 지나, 옛 문을 지나, 하얀 땅을 건너 낮은 묘지 담을 향해 갔다. 무덤가에서 신학생들이 찬송을 부르는 동안, 지휘하던 음악 교사가 언짢게도 대부분은 박자를 젓는 그의 손 대신 작은 재단사 장인의 외롭고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 속에 슬프고 얼어붙은 채 서서, 고개를 숙이고 목사와 원장과 수석 학생의 추도사를 들었고, 노래하는 학생들에게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으며, 이따금 왼손으로 연미복 자락에 숨은 손수건을 더듬었지만 꺼내지는 않았다.

"그분 대신 우리 아빠가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나중에 오토 하르트너가 말했다. 그러자 모두가 맞장구쳤다. "맞아, 나도 꼭 똑같은 생각을 했어."

나중에 원장이 힌딩어의 아버지를 데리고 헬라스 방에 왔다. "여러분 가운데 고인과 특별히 친했던 사람이 있습니까?" 원장이 방 안에 대고 물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힌두의 아버지는 불안하고 비참하게 젊은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루치우스가 앞으로 나왔고, 힌딩어는 그의 손을 잡아 잠깐 꼭 쥐었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곧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나갔다. 그러고는 떠났다. 그는 밝은 겨울 들판을 꼬박 하루 동안 기차로 달려야 집에 닿아, 아내에게 그들의 카를이 이제 어떤 곳에 누워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

* * *

수도원에서는 마법이 곧 다시 풀렸다. 교사들은 다시 꾸짖었고, 문은 다시 쾅쾅 닫혔고, 사라진 헬라스 아이는 별로 생각나지 않았다. 몇몇은 그 슬픈 연못가에 오래 서 있느라 감기에 걸려 병실에 누워 있거나, 펠트 실내화를 신고 목에 붕대를 감은 채 돌아다녔다. 한스 기벤라트는 목도 발도 멀쩡했지만, 그 불행한 날 이후로 더 진지하고 나이 들어 보였다.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달라졌다. 소년에서 젊은이가 되었고, 그의 영혼은 마치 다른 나라로 옮겨진 듯, 거기서 불안하고 낯설게 이리저리 날갯짓하며 아직 쉴 자리를 몰랐다. 그건 죽음의 공포 탓도, 착한 힌두를 잃은 슬픔 탓도 아니었고, 오로지 하일너에게 지은 잘못을 갑자기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일너는 다른 둘과 함께 병실에 누워 뜨거운 차를 마셔야 했고, 힌딩어의 죽음에서 받은 인상을 정리해 나중에 시에 쓰려고 갈무리할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데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비참하고 괴로워 보였으며 함께 앓는 아이들과 거의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감금 처벌 이후 억지로 떠안게 된 외로움이 그의 예민하고 자주 털어놓아야 하는 마음을 다치게 하고 쓰라리게 했다. 교사들은 그를 불만에 찬 혁명가 기질로 보고 엄하게 감시했고, 학생들은 그를 피했고, 관리인은 비웃는 듯한 너그러움으로 그를 대했고, 그의 친구인 셰익스피어와 실러와 레나우는 그를 짓누르고 굴욕을 주며 둘러싼 세계보다 더 강하고 웅장한 다른 세계를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은자의 울적한 가락에만 맞춰져 있던 「수도사의 노래」는 차츰 수도원과 교사와 동급생을 향한 쓰라리고 증오에 찬 시의 모음이 되었다. 그는 외로움 속에서 시큼한 순교자의 쾌락을 맛보았고, 아무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서 흡족함을 느꼈으며, 거침없이 불경한 수도사 시를 쓰면서 자기가 작은 유베날리스라도 된 것 같았다.

장례식 여드레 뒤, 다른 두 동무는 나았고 하일너만 혼자 병실에 누워 있을 때 한스가 그를 찾아갔다. 그는 수줍게 인사하고, 의자를 침대 곁으로 가져와 앉아 환자의 손을 잡았다. 환자는 마지못한 듯 벽 쪽으로 돌아누워 전혀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잡은 손을 꽉 쥐고 옛 친구가 자기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하일너는 짜증스럽게 입술을 비죽였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한스는 손을 놓지 않았다.

"내 말 좀 들어." 그가 말했다. "그때 나는 비겁했고 너를 버렸어. 하지만 너도 내가 어떤지 알잖아. 신학교에서 맨 위에 남고 될 수 있으면 아예 일등이 되겠다는 게 내 굳은 결심이었어. 너는 그걸 출세 공부라고 했지. 그래, 네 말이 옳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그냥 내 나름의 이상이었어. 그보다 나은 걸 몰랐어."

하일너는 눈을 감고 있었고, 한스는 아주 나직이 말을 이었다. "있잖아, 미안해. 네가 다시 내 친구가 되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용서는 해 줘야 해."

하일너는 말이 없었고 눈도 뜨지 않았다. 그의 안의 착하고 기쁜 모든 것이 친구를 향해 웃었지만, 그는 이제 매정하고 외로운 역할에 익숙해져서 적어도 당분간은 그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 한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야 해, 하일너! 이렇게 계속 네 주위를 맴도느니 차라리 꼴찌가 될래. 네가 원하면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되고, 다른 애들한테 우리는 걔들이 필요 없다는 걸 보여 주자."

그러자 하일너가 그의 손을 마주 쥐고 눈을 떴다.

며칠 뒤 그도 침대와 병실을 떠났고, 수도원에서는 새로 구워 낸 이 우정을 두고 적잖은 소동이 일었다. 하지만 둘에게는 이제 묘한 몇 주가 찾아왔다.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지만, 함께라는 이상하게 행복한 느낌과 말 없는 남모를 통함으로 가득한 몇 주였다. 예전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몇 주 동안의 헤어짐이 둘을 바꿔 놓았다. 한스는 더 다정하고 따뜻하고 몽상적이 되었고, 하일너는 더 힘차고 사내다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둘 다 요즘 서로를 그토록 그리워했기에 다시 하나가 된 것이 큰 사건이자 귀한 선물처럼 여겨졌다.

둘 다 일찍 철든 소년들은 자기들의 우정 속에서 무언가를 예감하는 수줍음으로, 첫사랑의 여린 비밀을 모르는 사이에 조금 미리 맛보았다. 게다가 그들의 동맹에는 익어 가는 사내다움의 떫은 매력이 있었고, 똑같이 떫은 양념으로 동무들 전체에 대한 반항심이 있었다. 동무들에게 하일너는 달갑지 않았고 한스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동무들의 숱한 우정은 그때 모두 아직 해롭지 않은 소년의 장난이었다.

한스가 우정에 더 깊고 행복하게 매달릴수록 학교는 그에게 더 낯설어졌다. 새로운 행복감이 햇포도주처럼 그의 피와 생각 속에서 끓어올랐고, 그 곁에서 리비우스도 호메로스도 그 중요성과 빛을 잃었다. 그런데 교사들은 지금까지 흠잡을 데 없던 학생 기벤라트가 문제 많은 아이로 바뀌어 수상한 하일너의 나쁜 영향에 넘어간 것을 보고 기겁했다. 교사들이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그러잖아도 위험한 나이인 젊음의 발효가 시작될 무렵 일찍 자란 소년들에게서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들이다. 하일너에게서 그들은 진작부터 어떤 천재 기질을 섬뜩하게 느꼈다. 천재와 교사 집단 사이에는 예부터 깊은 골이 굳게 패어 있고, 학교에서 그런 부류가 보이면 교수들에게는 처음부터 질색할 일이다. 그들에게 천재란 그 고약한 녀석들이다. 자기들을 존경하지 않고, 열네 살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고, 열다섯에 사랑에 빠지고, 열여섯에 술집에 드나들고, 금서를 읽고, 뻔뻔한 작문을 쓰고, 이따금 교사를 비웃듯 노려보고, 생활 기록부에 반항아이자 감금 후보로 오르는 녀석들. 교사는 반에 천재 하나보다 이름난 당나귀 열을 두는 편을 좋아하고, 따져 보면 그게 옳다. 그의 과제는 엉뚱한 정신을 길러 내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 잘하고 셈 잘하는 고지식한 사람들을 길러 내는 것이니까. 하지만 누가 누구 때문에 더 많이, 더 심하게 괴로워하는지, 교사가 소년 때문인지 그 반대인지, 둘 가운데 누가 더 폭군이고 더 괴롭히는 쪽인지, 둘 가운데 누가 상대의 영혼과 삶의 일부를 망치고 더럽히는지는, 쓰라려지지 않고, 분노와 부끄러움 없이 자기 젊은 날을 떠올리지 않고는 따져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위안이 있다. 정말로 천재다운 이들에게서는 상처가 거의 언제나 잘 아물고, 그들은 학교에 아랑곳없이 좋은 작품을 짓는 사람이 되며, 나중에 죽어서 먼 거리의 기분 좋은 후광에 둘러싸이면 다른 세대의 학생들에게 교사들이 자랑스러운 본보기이자 고귀한 모범으로 내세운다는 위안이다. 그래서 학교마다 법과 정신 사이의 싸움이라는 연극이 되풀이되고, 우리는 나라와 학교가 해마다 나타나는 몇 안 되는 더 깊고 값진 정신들을 때려죽이고 뿌리째 꺾으려고 숨 가쁘게 애쓰는 것을 거듭 본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 민족의 보물을 늘리는 것은 거듭, 무엇보다 교사들이 미워한 이들, 자주 벌받은 이들, 달아난 이들, 쫓겨난 이들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조용한 반항 속에 스스로를 태우다 스러진다.

좋고 오래된 학교의 원칙에 따라, 무언가 수상한 낌새가 보이자마자 이 젊은 두 별종에게도 사랑이 아니라 엄격함을 갑절로 했다. 한스를 가장 부지런한 히브리어 학생으로 자랑스러워하던 원장만이 서툰 구조 시도를 했다. 그는 한스를 자기 집무실로 불렀다. 옛 수도원장 거처의 그림 같은 돌출 창 방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가까운 크니틀링겐 출신의 파우스트 박사가 거기서 엘핑거 포도주를 숱하게 마셨다고 한다. 원장은 그리 못난 사람은 아니었다. 통찰과 실제적인 지혜가 모자라지 않았고, 생도들에게 어떤 너그러운 호의도 품고 있어서 그들에게 말 놓기를 즐겼다. 그의 큰 약점은 강한 허영심이었다. 그것 때문에 교단에서 자주 자랑하는 재주를 부렸고, 자기 힘과 권위가 조금이라도 의심받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어떤 반론도 견디지 못했고, 어떤 잘못도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줏대 없거나 정직하지 못한 학생들은 그와 아주 잘 지냈지만, 바로 힘 있고 정직한 학생들이 힘들었다. 넌지시 내비친 반대에도 그는 사납고 부당해졌기 때문이다. 격려하는 눈길과 감동한 목소리를 한 아버지 같은 친구 역할을 그는 거장처럼 해냈고, 지금도 그 역할을 했다.

"앉으십시오, 기벤라트." 그는 쭈뼛거리며 들어온 소년의 손을 힘차게 잡고 나서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과 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말을 놓아도 되겠소?"

"그러세요, 원장님."

"요즘 네 성적이 좀 떨어졌다는 건 너도 느꼈겠지, 기벤라트. 적어도 히브리어에서는. 너는 지금까지 아마 우리의 가장 뛰어난 히브리어 학생이었을 거다. 그래서 갑자기 떨어진 걸 보니 안타깝구나. 혹시 히브리어에 더는 별 재미가 없니?"

"아니에요, 원장님."

"잘 생각해 봐라! 그런 일도 있는 법이다. 혹시 다른 과목에 특히 마음을 쏟게 된 거냐?"

"아니요, 원장님."

"정말 아니냐? 그럼 다른 원인을 찾아봐야겠구나. 실마리를 좀 줄 수 있겠니?"

"모르겠어요……. 숙제는 늘 했는데요……."

"물론이지, 얘야, 물론이야. 하지만 구별해야 할 것은 구별해야지(differendum est inter et inter). 숙제야 물론 했겠지. 그건 네 의무였으니까. 하지만 너는 예전에는 더 많이 해냈다. 더 부지런했을 수도 있고, 어쨌든 더 관심을 가지고 했지. 그래서 네 열의가 갑자기 시든 게 어디서 오는지 궁금하다. 설마 아픈 건 아니지?"

"아니에요."

"아니면 머리가 아프니? 썩 혈색이 좋아 보이진 않는구나."

"네, 가끔 머리가 아파요."

"매일 공부가 너무 많니?"

"아니요, 전혀요."

"아니면 개인적으로 책을 많이 읽니? 솔직히 말해 봐!"

"아니요, 거의 아무것도 안 읽어요, 원장님."

"그럼 잘 모르겠구나, 젊은 친구. 어딘가 모자란 데가 있을 텐데. 제대로 애써 보겠다고 약속하겠니?"

한스는 엄숙하고 부드럽게 자기를 바라보는 권력자가 내민 오른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그래야지, 그래야 옳다, 얘야. 지치면 안 된다. 그러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는 거다."

그는 한스의 손을 꼭 쥐었고, 한스는 한숨 돌리며 문으로 갔다. 그때 원장이 그를 다시 불렀다.

"하나 더, 기벤라트. 너 하일너하고 많이 어울리지?"

"네, 꽤 많이요."

"다른 아이들보다 많이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아니냐?"

"맞아요. 제 친구예요."

"어쩌다 그렇게 됐니? 너희는 사실 성품이 아주 다르잖니."

"모르겠어요. 그냥 제 친구예요."

"내가 네 친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 그 아이는 불만 많고 불안한 정신이다. 재능은 있을지 모르지만 해내는 게 없고, 너한테 좋은 영향을 주지 않아. 네가 그 아이와 좀 더 거리를 두면 참 좋겠다. 어떠냐?"

"그럴 수 없어요, 원장님."

"그럴 수 없다고? 아니, 왜?"

"제 친구니까요. 그냥 버릴 수는 없잖아요."

"흠. 하지만 다른 아이들하고도 좀 더 어울릴 수 있지 않니? 이 하일너의 나쁜 영향에 그렇게 넘어가는 건 너 하나뿐이고, 그 결과는 이미 보이고 있다. 대체 그 아이의 무엇이 너를 그렇게 붙잡니?"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그 애를 버리는 건 비겁한 짓일 거예요."

"그래, 그래. 뭐, 억지로 시키진 않겠다. 하지만 네가 차츰 그 아이한테서 떨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면 좋겠다. 아주 좋겠다."

마지막 말에는 아까의 부드러움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한스는 가도 좋았다.

그때부터 그는 다시 공부에 매달려 애썼다. 물론 예전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 뒤처지지 않으려고 힘겹게 따라가는 쪽에 가까웠다. 그도 그것이 어느 정도는 우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우정을 손해나 방해로 보지 않고 오히려 놓친 모든 것을 메워 주는 보물로 보았다. 예전의 메마른 의무의 삶과는 견줄 수 없는, 높아지고 더 따뜻해진 삶. 그는 젊은 연인들 같았다. 큰 영웅적 행동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날마다의 지루하고 하찮은 일은 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절망적인 한숨과 함께 거듭 멍에를 졌다. 겉핥기로 공부하며 꼭 필요한 것만 빠르게, 거의 억지로 서둘러 익혀 버리는 하일너처럼 하는 것은 그는 할 줄 몰랐다. 친구가 거의 저녁마다 쉬는 시간에 그를 붙잡았으므로, 그는 억지로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나 특히 히브리어 문법과 적과 싸우듯 씨름했다. 기쁨을 느끼는 건 사실 호메로스와 역사 시간뿐이었다. 그는 어둡게 더듬는 느낌으로 호메로스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다가갔고, 역사에서는 영웅들이 차츰 이름과 숫자이기를 그치고 가까이서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 있는 붉은 입술을 지니고, 저마다 제 얼굴과 제 손을 가졌다. 누구는 붉고 두툼하고 거친 손, 누구는 조용하고 서늘하고 돌 같은 손, 또 누구는 가늘고 뜨겁고 핏줄이 섬세한 손을.

그리스어 원문으로 복음서를 읽을 때도 그는 이따금 인물들이 그토록 뚜렷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데 놀랐고, 압도되기까지 했다. 특히 한번은 마가복음 6장, 예수가 제자들과 배에서 내리는 대목에서 이런 구절이 나왔다. 「에우튀스 에피그논테스 아우톤 페리에드라몬」, "사람들이 곧 그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그때 그도 사람의 아들이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고, 곧 그를 알아보았다. 몸집이나 얼굴로가 아니라, 사랑이 담긴 눈의 크고 빛나는 깊이와, 섬세하면서도 강한 영혼이 빚고 그 안에 깃든 듯한 날씬하고 아름다운 갈색 손이 살며시 손짓하는, 아니 맞아들이며 반기는 몸짓으로. 일렁이는 물가와 무거운 거룻배의 뱃머리가 한순간 함께 떠올랐다가, 그림 전체가 겨울날 김 서린 입김처럼 사라졌다.

이따금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났다. 책에서 어느 인물이나 역사의 한 조각이 다시 한번 살아서 살아 있는 눈에 제 눈길을 비추고 싶어 하는 듯 탐욕스럽게 튀어나왔다. 한스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의아해하며, 늘 이미 달아나고 있는 그 재빠른 환영들 앞에서 깊고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검은 땅을 유리처럼 꿰뚫어 본 것 같기도 하고, 하느님이 자기를 바라본 것 같기도 했다. 이 귀한 순간들은 부르지 않아도 왔다가 아쉬워할 새도 없이 사라졌다. 순례자처럼, 다정한 손님처럼. 그들은 둘레에 낯설고 신성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어서 말을 걸거나 머물러 달라고 붙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이런 경험을 혼자 간직했고 하일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일너에게서는 예전의 우울이 불안하고 날카로운 정신으로 바뀌어, 수도원과 교사와 동무와 날씨와 인생과 하느님의 존재를 비판했고, 이따금 싸움을 걸거나 갑작스러운 어리석은 장난을 치게 했다. 어차피 따로 떨어져 다른 아이들과 맞서 있었으므로, 그는 생각 없는 자존심으로 이 맞섬을 아예 고집스럽고 적대적인 관계로 날카롭게 벼리려 했고, 기벤라트도 막으려 하지 않은 채 거기 함께 휩쓸려서, 두 친구는 눈에 띄고 미움받는 섬처럼 무리에서 떨어져 있었다. 한스는 차츰 거기서 덜 불편해졌다. 원장만 없었더라면. 그는 원장에게 어렴풋한 두려움을 느꼈다. 예전에는 아끼는 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차갑게 대접받고 뚜렷한 의도로 무시당했다. 그리고 하필 원장의 전공인 히브리어에서 그는 차츰 흥미를 다 잃었다.

몇 달 만에 마흔 명의 신학생이 몸과 마음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는 건 재미있었다. 성장이 멈춘 몇몇을 빼면 말이다. 많은 아이가 폭을 크게 희생하며 위로 부쩍 자라서, 함께 자라지 않은 옷 밖으로 팔다리의 복사뼈와 손목뼈를 희망차게 내밀었다. 얼굴들은 사라져 가는 어린 티와 쭈뼛쭈뼛 뽐내기 시작하는 사내다움 사이의 온갖 그늘을 보였고, 아직 성장기의 모난 몸매를 벗지 못한 아이에게도 모세 오경 공부가 적어도 임시로나마 사내다운 진지함을 매끈한 이마에 얹어 주었다. 볼 통통한 아이는 아예 드물어졌다.

한스도 달라졌다. 키와 마른 몸은 이제 하일너와 비슷해졌고, 오히려 그보다 나이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예전에는 여리게 비치던 이마의 모서리가 도드라졌고, 눈은 더 깊이 들어갔으며, 얼굴빛은 건강하지 못했고, 팔다리와 어깨는 뼈가 드러나고 앙상했다.

학교 성적에 스스로 덜 만족할수록, 그는 하일너의 영향 아래 더 매정하게 동무들과 담을 쌓았다. 모범생이자 미래의 일등으로서 그들을 내려다볼 까닭이 더는 없었으므로, 거만함은 그에게 지독히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내비치고 그 자신도 그것을 아프게 느낀다는 것을 그는 용서하지 않았다. 특히 흠잡을 데 없는 하르트너, 그리고 그 건방진 오토 벵거와 여러 번 다툼이 있었다. 어느 날 벵거가 또 그를 놀리고 약 올리자, 한스는 그만 정신을 잃고 주먹으로 대답했다. 고약한 싸움이 벌어졌다. 벵거는 겁쟁이였지만 약한 상대쯤은 쉽게 해치울 수 있어서 사정없이 때렸다. 하일너는 그 자리에 없었고, 다른 아이들은 한가롭게 구경하며 한스가 혼나는 것을 고소해했다. 그는 제대로 얻어맞아서 코피가 나고 갈비뼈가 다 아팠다. 밤새 부끄러움과 아픔과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친구에게 그 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철저하게 담을 쌓고 방 동무들과 거의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봄이 가까워지자 비 오는 한낮과 비 오는 일요일과 긴 어스름 탓에 수도원 생활에 새로운 모임과 움직임이 생겼다.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 하나와 플루트 부는 아이 둘이 사는 아크로폴리스 방은 정기 음악회 저녁을 두 번 열었고, 게르마니아 방에서는 희곡 낭독회를 열었으며, 젊은 경건주의자 몇몇은 성경 모임을 만들어 저녁마다 칼프 성경의 주석까지 곁들여 성경 한 장씩을 읽었다.

하일너는 게르마니아 방의 낭독회에 회원으로 가입하려다 거절당했다. 그는 분해서 펄펄 끓었다. 복수하려고 그는 이번엔 성경 모임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그를 원하지 않았지만 그는 억지로 끼어들어, 대담한 말과 불경한 빗댐으로 겸손한 작은 형제단의 경건한 대화에 다툼과 불화를 들여왔다. 그는 곧 이 장난에도 싫증이 났지만, 비꼬는 성경 말투는 한동안 더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를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이제 동기 전체가 일을 벌이고 모임을 만드는 기운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재능 있고 재치 있는 스파르타 방 아이 하나였다. 그가 노린 것은 개인적 명성 다음으로는 그저 방에 생기를 좀 불어넣고, 갖가지 재치 있는 장난으로 단조로운 공부 생활에서 더 자주 숨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의 별명은 던스턴이었는데, 그는 화제를 일으켜 어느 정도 명성에 오르는 기발한 길을 찾아냈다.

어느 아침 학생들이 침실에서 나오자 세면실 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스파르타에서 온 여섯 편의 경구」라는 제목 아래, 눈에 띄는 동무 몇 명을 골라 그들의 바보짓과 장난과 우정을 이행시로 재치 있게 놀린 것이었다. 기벤라트와 하일너 짝도 한 방 맞았다. 이 작은 국가에 엄청난 소동이 일었다. 다들 극장 입구처럼 그 문 앞에 몰려들었고, 무리 전체가 여왕벌이 날아오를 채비를 하는 벌 떼처럼 웅웅거리고 밀치고 수군거렸다.

다음 날 아침에는 문 전체가 경구와 풍자시로 빼곡했다. 응수, 동의, 새로운 공격들이었다. 하지만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은 거기 다시 끼어들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헛간에 불쏘시개를 던진다는 목적을 이룬 그는 손을 비볐다. 이제 며칠 동안 거의 모든 학생이 이 풍자시 싸움에 끼어들었고, 다들 이행시 하나 지어 보려고 생각에 잠겨 돌아다녔다. 여느 때처럼 태평하게 공부만 한 건 아마 루치우스뿐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교사 하나가 그것을 알아채고 이 들뜬 놀이를 더 하지 말라고 금지했다.

영리한 던스턴은 월계관 위에서 쉬지 않고, 그사이 회심의 한 방을 준비해 두었다. 그는 이제 신문 창간호를 냈다. 초고 종이에 등사판으로 찍은 아주 작은 판형으로, 몇 주 전부터 기삿거리를 모아 둔 것이었다. 제목은 「호저」였고 주로 우스개 신문이었다. 여호수아서를 쓴 사람과 마울브론 신학생 사이의 명랑한 대화가 창간호의 백미였다. 신문은 방마다 두 부씩 무료로 나눠 주었고, 앞으로는 일주일에 두 번 나오며 값은 5페니히라고 했다. 수익금은 오락 기금으로 쓰기로 했다.

성공은 대단했다. 이제 바쁜 편집장이자 발행인의 표정과 몸가짐을 갖춘 던스턴은 수도원에서, 그 옛날 베네치아 공화국의 그 유명한 아레티노가 누렸던 것과 비슷한 아슬아슬한 명성을 누렸다.

헤르만 하일너가 열정적으로 편집에 끼어들어 이제 던스턴과 함께 날카로운 풍자 검열관 노릇을 하자 모두 놀랐다. 그에게는 재치도 독도 모자라지 않았다. 네 주쯤 이 작은 신문이 수도원 전체의 숨을 죽이게 했다.

기벤라트는 친구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자기는 끼고 싶은 마음도 재주도 없었다. 처음에는 하일너가 요즘 저녁마다 그렇게 자주 스파르타 방에서 지내는 것조차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얼마 전부터 다른 일들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나른하고 멍하니 돌아다녔고, 느리게 마지못해 공부했다. 그러다 한번은 리비우스 시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교수가 그에게 번역하라고 했다. 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왜 일어서지 않습니까?" 교수가 화가 나서 외쳤다.

한스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꼿꼿이 앉아 고개를 조금 숙이고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부르는 소리에 그는 꿈에서 반쯤 깨어났지만, 선생의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옆자리 아이가 세게 찌르는 것도 느꼈다. 그건 그와 상관이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다른 손들이 그를 만지고 다른 목소리들이 그에게 말했다. 가깝고 나직하고 깊은 목소리들, 낱말은 없이 그저 샘물 소리처럼 깊고 부드럽게 흐르는 목소리들이었다. 그리고 많은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낯설고, 무언가를 예감하는, 크고 빛나는 눈들. 어쩌면 방금 리비우스에서 읽은 로마 군중의 눈이었을지도 모르고, 꿈에서 보았거나 언젠가 그림에서 본 낯모르는 사람들의 눈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벤라트!" 교수가 소리쳤다. "자고 있습니까?"

학생은 천천히 눈을 뜨고 의아한 듯 선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고 있었잖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어느 문장을 하고 있는지 말해 보시겠습니까? 자?"

한스는 손가락으로 책을 가리켰다. 어디를 하고 있는지 그는 잘 알았다.

"이제 일어서기도 하시겠습니까?" 교수가 비꼬며 물었다. 그러자 한스가 일어섰다.

"대체 뭘 하는 겁니까? 나를 보십시오!"

그는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교수는 그 눈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의아한 듯 고개를 저었다.

"어디 아픕니까, 기벤라트?"

"아니요, 교수님."

"다시 앉고, 수업이 끝나면 내 방으로 오십시오."

한스는 앉아서 리비우스 위로 몸을 숙였다. 그는 완전히 깨어 있었고 모든 것을 이해했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의 눈은 숱한 낯선 인물들을 좇고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먼 곳으로 물러나면서도 빛나는 눈을 늘 그에게 향하고 있다가, 마침내 아득한 곳에서 안개 속으로 가라앉았다. 동시에 선생의 목소리와 번역하는 학생의 목소리와 강의실의 모든 작은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여느 때처럼 다시 현실이 되어 눈앞에 있었다. 의자와 교단과 칠판이 늘 그렇듯 거기 있었고, 벽에는 커다란 나무 컴퍼스와 삼각자가 걸려 있었고, 둘레에는 동무들이 모두 앉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아이가 호기심에 차서 뻔뻔하게 그를 곁눈질했다. 그러자 한스는 덜컥 겁이 났다.

"수업이 끝나면 내 방으로 오십시오." 그는 그 말을 들었다.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수업이 끝나자 교수가 그에게 손짓하더니, 눈을 부릅뜬 동무들 사이를 지나 그를 데리고 갔다.

"자, 대체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자고 있었던 건 아니지요?"

"네."

"내가 불렀을 때 왜 일어서지 않았습니까?"

"모르겠어요."

"아니면 내 말을 못 들었습니까? 귀가 어둡습니까?"

"아니요. 들었어요."

"그런데 일어서지 않았다? 그다음에도 눈이 아주 이상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아무 생각도요. 일어서려고 했어요."

"왜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럼 몸이 안 좋았던 겁니까?"

"그런 것 같진 않아요.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어요."

"머리가 아팠습니까?"

"아니요."

"됐습니다. 가 보십시오."

점심 전에 그는 다시 불려 나가 침실로 갔다. 거기서 원장이 군 의사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진찰을 받고 이것저것 질문을 받았지만, 뚜렷한 것은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 좋게 웃으며 일을 가볍게 여겼다.

"작은 신경 증세입니다, 원장님." 그가 부드럽게 킬킬 웃었다. "일시적인 허약 상태, 가벼운 현기증 같은 겁니다. 이 젊은이가 날마다 바깥바람을 쐬도록 하셔야겠습니다. 두통에는 물약 몇 방울을 처방해 드리지요."

그때부터 한스는 날마다 점심 뒤에 한 시간씩 밖에 나가야 했다. 그는 불만이 없었다. 더 나쁜 것은 원장이 이 산책에 하일너가 따라가는 것을 분명하게 금지한 것이었다. 하일너는 분통을 터뜨리며 욕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스는 늘 혼자 걸었고, 거기서 어떤 기쁨을 찾았다. 이른 봄이었다. 둥글고 아름답게 솟은 언덕들 위로 싹트는 초록이 얇고 밝은 물결처럼 번져 갔고, 나무들은 뚜렷한 윤곽의 갈색 그물 같은 겨울 모습을 벗고, 어린 잎의 놀이 속에서 서로에게, 풍경의 빛깔 속으로 녹아들어 끝없이 흐르는 살아 있는 초록 물결이 되었다.

예전 라틴어 학교 시절에 한스는 봄을 이번과는 다르게 바라보았다. 더 생기 있고 호기심 있게, 더 하나하나 따져 가며. 돌아오는 새들을 한 종류씩 지켜보았고, 나무에 꽃이 피는 차례를 살폈으며, 오월이 되면 곧바로 낚시를 시작했다. 이제 그는 새 종류를 가려내거나 꽃눈으로 덤불을 알아보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전체가 움트는 것을, 곳곳에서 돋아나는 빛깔을 보고, 어린 잎의 냄새를 맡고, 더 부드럽고 들끓는 공기를 느끼며 의아한 마음으로 들판을 걸었다. 그는 금세 지쳤고, 늘 눕고 싶고 잠들고 싶었으며, 거의 줄곧 실제로 둘레에 있는 것과는 다른 갖가지 것들을 보았다. 그것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 자신도 몰랐고, 곰곰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밝고 여리고 별난 꿈이었다. 초상화처럼, 아니면 낯선 나무들이 늘어선 가로수 길처럼 그를 둘러싸고 서 있었지만, 그 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순수한 그림들. 하지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 또한 하나의 겪음이었다. 다른 고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데려가지는 것이었다. 낯선 땅 위를, 밟기 좋은 부드러운 땅 위를 거니는 것이었고, 낯선 공기, 가볍고 섬세하고 꿈같은 향기로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이었다. 이 그림들 대신 이따금 어떤 느낌이 오기도 했다. 어둡고 따뜻하고 흥분시키는, 마치 가벼운 손이 부드럽게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책을 읽거나 공부할 때 한스는 집중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관심 없는 것은 그림자처럼 손아래서 빠져나갔고, 히브리어 단어는 수업 시간에 기억하려면 마지막 반 시간 동안에야 외워야 했다. 그런데 몸으로 보는 것 같은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읽다 보면 묘사된 모든 것이 갑자기 눈앞에 서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바로 둘레의 것보다 훨씬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그리고 기억력이 더는 아무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거의 날마다 더 무디고 불확실해지는 것을 절망 속에 알아채는 동안, 이따금 옛 기억들이 섬뜩할 만큼 또렷하게 그를 덮쳐서 그는 그것이 이상하고 두려웠다. 수업 도중이나 책을 읽다가 때때로 아버지나 늙은 안나나 예전 선생이나 동급생 가운데 누군가가 떠올라 눈앞에 보이게 서서 한동안 그의 주의를 온통 사로잡았다. 슈투트가르트에 머물던 때, 주 시험, 방학의 장면들도 거듭 다시 겪었고, 아니면 낚싯대를 들고 강가에 앉아 햇볕 받은 물의 김 냄새를 맡는 자기를 보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꿈꾸는 그 시절이 길고 긴 여러 해 전의 일처럼 여겨졌다.

미지근하고 축축한 어두운 어느 저녁, 그는 하일너와 도르멘트를 오락가락 거닐며 집 이야기를, 아빠 이야기를, 낚시와 학교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눈에 띄게 말이 없었다. 그는 한스가 말하게 내버려 두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거나, 온종일 가지고 놀아야 하는 작은 자로 허공을 생각에 잠겨 몇 번 내리그었다. 차츰 한스도 말이 없어졌다. 밤이 되었고, 둘은 창턱에 앉았다.

"있잖아, 한스?" 마침내 하일너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불안하고 들떠 있었다.

"뭐?"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야, 말해 봐!"

"그냥 생각했어. 네가 이것저것 이야기하니까."

"뭘?"

"말해 봐, 한스. 너 여자애를 쫓아다녀 본 적 정말 없어?"

침묵이 흘렀다. 그건 둘이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는 것이었다. 한스는 그게 두려우면서도, 그 수수께끼 같은 영역이 동화 속 정원처럼 그를 끌어당겼다. 그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고, 손가락이 떨렸다.

"딱 한 번." 그가 속삭였다. "아직 바보 같은 꼬마였을 때."

다시 침묵.

"너는, 하일너?"

하일너가 한숨을 쉬었다.

"아, 관둬! 있잖아, 그런 이야기는 아예 하지 말아야 해. 아무 가치도 없거든."

"아니야, 해 봐."

"……나 애인 있어."

"네가? 정말?"

"고향에. 이웃집 애야. 그리고 이번 겨울에 그 애한테 입맞춤을 했어."

"입맞춤을……?"

"응. 그러니까, 벌써 어두웠어. 저녁에 얼음판에서, 내가 그 애 스케이트 벗는 걸 도와줘도 됐거든. 그때 입맞춤을 했어."

"그 애가 아무 말도 안 했어?"

"말은 안 했어. 그냥 달아났어."

"그다음엔?"

"그다음엔! 아무것도."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고, 한스는 금지된 정원에서 돌아온 영웅을 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종이 울렸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등이 꺼지고 모두 조용해진 뒤에도 한스는 한 시간 넘게 깨어 누워, 하일너가 애인에게 한 입맞춤을 생각했다.

다음 날 그는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부끄러웠고, 하일너는 한스가 묻지 않으니 먼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기가 쑥스러웠다.

학교에서 한스는 점점 더 나빠졌다. 교사들은 성난 얼굴을 하고 이상한 눈길을 던지기 시작했고, 원장은 침울하고 언짢아했으며, 동급생들도 기벤라트가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고 있고 일등을 노리기를 그만두었다는 것을 오래전에 알아챘다. 하일너만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 자신에게 학교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스 자신은 모든 것이 일어나고 바뀌는 것을 보면서도 거기 마음 쓰지 않았다.

그사이 하일너는 신문 편집에 싫증이 나서 완전히 친구에게 돌아왔다. 그는 금지를 무릅쓰고 여러 번 한스의 날마다의 산책을 따라가서, 그와 함께 햇볕 속에 누워 꿈꾸고, 시를 읽어 주고, 원장을 두고 농담을 했다. 한스는 그가 연애 모험 이야기를 더 털어놓기를 날마다 바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을 묻기가 더 어려워졌다. 동무들 사이에서 둘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다. 하일너가 「호저」에 쓴 심술궂은 농담으로 누구의 신뢰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문은 이 무렵 어차피 문을 닫았다. 한물갔고, 애초에 겨울과 봄 사이의 지루한 몇 주만 노리고 만든 것이었다. 이제 막 시작된 좋은 계절이 식물 채집과 산책과 바깥 놀이로 즐길 거리를 넉넉히 주었다. 날마다 점심때면 체조하는 아이, 레슬링하는 아이, 달리기하는 아이, 공 치는 아이들이 수도원 앞마당을 고함과 생기로 채웠다.

그러다 새로운 큰 화제가 생겼는데, 그 장본인이자 중심은 이번에도 모두의 걸림돌인 헤르만 하일너였다.

원장은 친절한 학생들을 통해 하일너가 자기 금지를 비웃으며 거의 날마다 산책하는 기벤라트를 따라간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 그는 한스는 내버려 두고, 주범이자 오랜 적만 집무실로 불렀다. 그는 하일너에게 말을 놓았는데, 하일너는 곧바로 그러지 말라고 했다. 원장은 그의 불복종을 나무랐다. 하일너는 자기는 기벤라트의 친구이며 누구에게도 둘이 어울리는 것을 금지할 권리는 없다고 선언했다. 고약한 장면이 벌어졌고, 그 결과 하일너는 몇 시간 감금과 함께 당분간 기벤라트와 함께 외출하지 말라는 엄한 금지를 받았다.

그래서 다음 날 한스는 정해진 산책을 다시 혼자 했다. 그는 두 시에 돌아와 다른 아이들과 함께 강의실에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되자 하일너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모든 것이 그때 힌두가 사라졌을 때와 꼭 같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늦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 시에 동기 전체가 교사 셋과 함께 사라진 아이를 찾아 나섰다. 다들 흩어져 숲을 뛰어다니며 소리쳐 불렀고, 몇몇은, 교사 가운데 둘까지도, 그가 스스로 해를 입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섯 시에 그 일대의 모든 경찰서에 전보를 쳤고, 저녁에는 하일너의 아버지에게 속달 편지를 보냈다. 늦은 저녁까지 아무 흔적도 찾지 못했고, 밤늦도록 모든 침실에서 수군거리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났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가 물에 뛰어들었다는 추측을 가장 많이 믿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가 그냥 집으로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망자가 돈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사람들은 한스를 그 일을 알고 있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놀라고 근심했다. 밤에 침실에서 다른 아이들이 묻고 짐작하고 지어내고 농담하는 것을 듣자, 그는 이불 속 깊이 파고들어 친구를 생각하며 괴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길고 나쁜 시간을 보냈다. 친구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그의 겁먹은 가슴을 사로잡아 그를 두려운 비애로 가득 채웠고, 마침내 그는 지치고 근심에 찬 채 잠들었다.

같은 시간 하일너는 이삼십 킬로미터 떨어진 덤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는 추워서 잠들지 못했지만, 좁은 우리에서 빠져나온 듯 깊은 자유를 느끼며 힘껏 숨을 쉬고 팔다리를 쭉 뻗었다. 그는 한낮부터 걸었고, 크니틀링겐에서 빵을 사서 이따금 한 입씩 떼어 먹으며, 아직 봄이라 성긴 나뭇가지 사이로 밤의 어둠과 별과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결국 어디에 닿든 상관없었다. 적어도 이제 그는 그 미운 수도원에서 빠져나왔고, 자기 의지가 명령과 금지보다 강하다는 것을 원장에게 보여 주었다.

다음 날 하루 종일 그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그는 둘째 밤을 어느 마을 근처 들판의 짚단 사이에서 보냈고, 아침이면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가, 저녁 무렵 다시 마을에 들르려다 시골 경찰에게 붙잡혔다. 경찰은 다정하게 놀리며 그를 맞아 마을 회관으로 데려갔고, 그는 거기서 재치와 아첨으로 촌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촌장은 그를 집으로 데려가 재워 주었고, 자기 전에 햄과 달걀을 넉넉히 먹였다. 이튿날 그사이 서둘러 온 아버지가 그를 데려갔다.

달아났던 아이가 붙잡혀 오자 수도원은 크게 술렁였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꼿꼿이 들었고, 자기의 작은 천재 여행을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것 같았다. 사과하라는 요구에 그는 거절했고, 교사 회의라는 비밀 재판 앞에서도 결코 쭈뼛거리거나 공손하지 않았다. 그를 붙잡아 두려고 했지만, 이제 잔이 넘쳤다. 그는 불명예스럽게 퇴학당했고, 저녁에 아버지와 함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났다. 친구 기벤라트와는 악수 한 번으로밖에 작별할 수 없었다.

원장 선생님이 이 전대미문의 반항과 타락 사건을 두고 한 긴 연설은 아름답고 힘찼다. 슈투트가르트의 상급 관청에 보낸 그의 보고서는 훨씬 더 온순하고 사무적이고 힘이 없었다. 신학생들에게는 떠난 괴물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한스 기벤라트는 물론 거기에 웃기만 했다. 몇 주 동안 하일너와 그의 도주만큼 많이 이야기된 것은 없었다. 거리와 흘러가는 시간이 모두의 판단을 바꿔 놓아서, 그때는 겁먹고 피하던 이 도망자를 나중에는 날아가 버린 독수리처럼 바라보는 아이도 많았다.

헬라스 방에는 이제 빈 책상이 둘이었고, 마지막으로 사라진 아이는 앞의 아이만큼 빨리 잊히지 않았다. 원장만은 둘째 아이도 조용히 땅에 묻혀 처리된 것을 알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일너는 수도원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친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에게서는 편지 한 통 오지 않았다. 그는 떠나 소식이 끊겼고, 그의 모습과 도주는 차츰 역사가 되었다가 마침내 전설이 되었다. 그 열정적인 소년은 나중에 갖가지 천재다운 짓과 방황을 더 겪은 뒤 삶의 괴로움이 엄한 규율로 붙들어 주었고, 그는 영웅까지는 아니어도 곧고 훌륭한 사내가 되었다.

남은 한스에게는 하일너의 도주를 알고 있었다는 의심이 드리웠고, 그 의심이 그에게서 교사들의 호의를 마저 빼앗았다. 수업 시간에 그가 여러 질문에 대답을 못 하자 교사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 "그 잘난 친구 하일너하고 왜 같이 가지 그랬습니까?"

원장은 그를 내버려 두고, 바리새인이 세리를 보듯 경멸 섞인 동정으로 곁눈질했다. 이 기벤라트는 이제 셈에 넣지 않았다. 그는 나병 환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5장

햄스터가 쌓아 둔 먹이로 버티듯, 한스는 예전에 얻은 학식으로 한동안 더 목숨을 이어 갔다. 그러다 괴로운 굶주림이 시작되었다. 짧고 힘없는 새 시도로 이따금 끊기긴 했지만, 그 시도들이 하도 가망 없어서 그 자신도 거의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이제 그는 쓸데없이 애쓰기를 그만두었다. 호메로스를 모세 오경 뒤로, 대수를 크세노폰 뒤로 내던졌고, 교사들 사이에서 자기의 좋은 평판이 한 계단씩 내려가는 것을 동요 없이 지켜보았다. 우에서 양으로, 양에서 가로, 마침내 영으로. 머리가 아프지 않을 때면, 이제 다시 아픈 게 보통이었지만, 그는 헤르만 하일너를 생각하며 가볍고 눈 큰 꿈을 꾸었고, 몇 시간이고 반쯤 생각에 잠긴 채 멍하니 보냈다. 점점 늘어나는 모든 교사의 꾸지람에 그는 요즘 착하고 순한 미소로 대답했다. 친절한 젊은 교사인 조교 비드리히만이 그 어쩔 줄 모르는 미소에 마음 아파하며, 궤도에서 벗어난 소년을 딱하게 여기며 너그럽게 대했다. 다른 교사들은 그에게 분개해서 경멸하듯 내버려 두는 것으로 벌주거나, 이따금 잠든 야심을 비꼬는 말로 간질여 깨워 보려 했다.

"혹시 마침 주무시고 계신 게 아니라면, 이 문장을 좀 읽어 주십사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원장은 점잖게 분개했다. 이 허영심 많은 사람은 자기 눈길의 힘을 대단하게 여겼는데, 기벤라트가 그의 위엄 있게 위협하는 눈 굴림에 번번이 겸손하게 순종하는 미소로 맞서자 펄쩍 뛰었다. 그 미소가 차츰 그를 신경질 나게 했다.

"그렇게 한없이 멍청하게 웃지 마시오. 당신은 오히려 울어야 할 판이오."

아버지의 편지가 더 큰 인상을 남겼다. 아버지는 질겁해서 제발 정신을 차리라고 애원했다. 원장이 아버지 기벤라트에게 편지를 썼고, 아버지는 지독히 놀랐던 것이다. 한스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이 성실한 사람이 가진 온갖 격려하는 말과 도덕적으로 분개하는 말의 모음이었는데, 그런데도 뜻하지 않게 울먹이는 처량함이 비쳐 나와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원장에서 아빠 기벤라트까지, 교수들과 조교들까지, 제 의무에 열심인 이 모든 젊은이의 인도자들은 한스에게서 나쁜 요소를, 자기들의 바람을 가로막는 것을, 억지로라도 좋은 길로 되돌려 놓아야 할 고집스럽고 게으른 무언가를 보았다. 아마 그 딱하게 여기던 조교를 빼고는 아무도, 가는 소년 얼굴의 어쩔 줄 모르는 미소 뒤에서 가라앉아 가는 영혼이 괴로워하며, 물에 빠져 가며 겁에 질려 절망적으로 둘러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학교와, 아버지와 교사 몇몇의 야만적인 야심이 그들 앞에 죄 없이 펼쳐진 여린 아이의 영혼 속에서 거리낌 없이 날뛰어 이 연약하고 섬세한 존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예민하고 위험한 소년 시절에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는가? 왜 그의 토끼를 빼앗고, 라틴어 학교에서 일부러 동무들과 떼어 놓고, 낚시와 빈둥거림을 금지하고, 초라하고 사람을 닳게 하는 야심이라는 공허하고 천박한 이상을 그에게 접종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마땅히 누려야 할 방학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나치게 몰아친 망아지는 길가에 쓰러져 더는 쓸모가 없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군 의사는 다시 한번, 이건 그저 신경 쇠약 상태일 뿐이고 주로 성장기 탓이라고 했다. 한스가 방학 동안 실컷 몸을 추스르고, 넉넉히 먹고, 숲을 많이 걸으면 곧 나아질 거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일은 거기까지 가지 않았다. 방학을 세 주 앞둔 어느 오후 수업에서 한스는 교수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교사가 아직 꾸짖고 있는데 한스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겁먹은 듯 떨기 시작했고,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 발작적인 울음을 터뜨려 수업 전체가 중단되었다. 그러고는 반나절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 * *

이튿날 수학 시간에 그는 칠판에 기하 도형을 그리고 증명을 해 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앞으로 나갔지만 칠판 앞에서 어지러웠다. 분필과 자를 들고 칠판 위를 의미 없이 이리저리 휘젓다가 둘 다 떨어뜨렸고,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굽혔다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군 의사는 환자가 그런 짓을 벌인 것에 꽤 언짢아했다. 그는 말을 조심스럽게 고르면서 즉시 요양 휴가를 명하고 신경과 의사의 진찰을 받아 보라고 권했다.

"이러다 무도병에 걸리겠습니다." 그가 원장에게 속삭였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못마땅하게 언짢은 얼굴을 아버지처럼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여겼다. 그건 그에게 쉬웠고 잘 어울렸다.

그와 의사는 저마다 한스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소년의 주머니에 넣어 주고 그를 집으로 보냈다. 원장의 언짢음은 무거운 걱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일너 사건으로 이제 막 술렁인 학무 당국이 이 새로운 불행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는 모두가 놀랍게도 이 사건에 걸맞은 연설을 하지 않았고, 마지막 몇 시간 동안 한스에게 섬뜩할 만큼 붙임성 있게 굴었다. 한스가 요양 휴가에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에게 분명했다. 낫는다 해도 이미 한참 뒤처진 학생이 놓친 몇 달, 아니 몇 주라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할 터였다. 그는 격려하듯 다정하게 "다시 보자"며 그를 떠나보냈지만, 그 뒤로 헬라스 방에 들어가 빈 책상 셋을 볼 때마다 마음이 거북했고, 재능 있는 생도 둘이 사라진 데 어쩌면 자기에게도 책임의 일부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속으로 눌러 이기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용감하고 도덕적으로 강한 사람인 그는 이 쓸데없고 어두운 의심을 영혼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작은 여행 자루를 들고 떠나는 신학생 뒤로 교회와 문과 박공과 탑을 거느린 수도원이 가라앉았고, 숲과 이어지는 언덕들이 가라앉았다. 그 자리에 바덴 접경 지방의 기름진 과수원 풀밭이 나타났고, 이어 포르츠하임이 나왔고, 그 바로 뒤에서 숱한 개울 골짜기가 갈라놓은 슈바르츠발트의 푸르스름하게 검은 전나무 산들이 시작되었다. 뜨거운 여름 볕 속에서 산들은 여느 때보다 더 푸르고 서늘하고 그늘을 약속하는 듯했다. 소년은 바뀌어 가며 점점 고향다워지는 풍경을 즐거움 없지 않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향 도시가 가까워지자 아버지가 떠올랐고, 아버지가 자기를 어떻게 맞을지에 대한 괴로운 두려움이 작은 여행의 기쁨을 송두리째 망쳐 버렸다. 슈투트가르트 시험을 보러 가던 길과 마울브론에 입학하러 가던 여행이 그 긴장과 겁먹은 기쁨과 함께 다시 떠올랐다. 대체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그는 원장만큼이나 잘 알았다. 자기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제 신학교도 대학 공부도 모든 야심 찬 희망도 끝났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그것이 그를 슬프게 하지는 않았다. 희망을 저버린 실망한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만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제 그는 쉬는 것, 실컷 자고, 실컷 울고, 실컷 꿈꾸는 것, 그 모든 괴로움 끝에 한번 가만히 내버려 두어지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집에서 아버지 곁에서는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 두려웠다. 기차 여행이 끝날 무렵 그는 심한 두통이 나서 더는 창밖을 보지 않았다. 지금 지나는 곳은 그가 예전에 열정적으로 쏘다니던 언덕과 숲이 있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고장인데도. 그리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마터면 잘 아는 고향 역에서 내리는 것을 놓칠 뻔했다.

이제 그는 우산과 여행 자루를 들고 거기 서 있었고, 아빠가 그를 바라보았다. 원장의 마지막 보고는 그릇되어 가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실망과 분개를 어쩔 줄 모르는 경악으로 바꿔 놓았다. 그는 한스가 망가지고 끔찍한 몰골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막상 보니 야위고 허약하긴 해도 아직 멀쩡하고 제 발로 걷고 있었다. 그것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건 그의 숨은 두려움, 의사와 원장이 편지에 쓴 신경병에 대한 공포였다. 그의 집안에는 지금까지 신경병을 앓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 환자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이해 못 하겠다는 조롱이나 정신 병원 사람을 대하듯 경멸 섞인 동정으로 말했는데, 이제 자기 한스가 그런 일을 가지고 집에 온 것이다.

첫날 소년은 꾸지람을 듣지 않아서 기뻤다. 그러다 아버지가 자기를 대하는 쭈뼛하고 겁먹은 조심스러움이 눈에 띄었는데, 아버지는 눈에 보이게 억지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는 아버지가 자기를 이상하게 살피는 눈길로, 섬뜩한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낮추고 거짓된 목소리로 말하며, 자기가 모르게 지켜보는 것도 알아챘다. 그는 더 주눅이 들었고, 자기 상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으면 그는 몇 시간이고 밖의 숲에 누워 있었고, 그것이 몸에 좋았다. 거기서는 이따금 옛 소년 시절의 행복이 희미하게 비쳐 그의 다친 영혼 위를 스쳤다. 꽃이나 딱정벌레를 보는 기쁨, 새소리를 엿듣거나 짐승 발자국을 좇는 기쁨. 하지만 그건 늘 잠깐뿐이었다. 대개 그는 머리가 무거운 채 이끼 위에 나른하게 누워 무엇이든 생각해 보려 했지만 헛일이었고, 그러다 다시 꿈들이 찾아와 그를 멀리 다른 공간으로 데려갔다. 두통은 거의 늘 있었고, 수도원이나 라틴어 학교를 떠올리면 숱한 책과 과목과 의무의 모습이 사나운 가위처럼 그에게 덮쳐 왔고, 그의 아픈 머릿속에서 리비우스와 카이사르, 크세노폰과 산수 문제가 뒤죽박죽 괴로운 춤을 추었다.

한번은 이런 꿈을 꾸었다. 친구 헤르만 하일너가 죽어서 들것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가려 했는데, 원장과 교사들이 그를 밀어냈고 그가 다시 다가갈 때마다 아프게 때렸다. 신학교 교수들과 조교들만이 아니라 교장과 슈투트가르트 시험관들까지 거기 있었고, 모두 사나운 얼굴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어, 들것에는 물에 빠져 죽은 힌두가 누워 있고 높은 실크해트를 쓴 그의 우스꽝스러운 아버지가 휜 다리로 서글프게 그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꿈. 그는 달아난 하일너를 찾아 숲을 달렸고, 그가 멀리 나무줄기 사이로 걸어가는 것을 거듭 보았지만, 부르려고 하면 그때마다 그는 사라졌다. 마침내 하일너가 멈춰 서서 그가 다가오게 두고는 말했다. 있잖아, 나 애인 있어. 그러고는 지나치게 크게 웃더니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고요하고 신성한 눈과 아름답고 평화로운 손을 지닌 아름답고 마른 사람이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모든 것이 다시 흩어졌고 그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려다가, 「에우튀스 에피그논테스 아우톤 페리에드라몬」이라고 쓰인 복음서 구절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자 이제 「페리에드라몬」이 어떤 활용형인지, 그 동사의 현재와 부정사와 완료와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떠올려야 했다. 단수와 쌍수와 복수로 다 활용해 보아야 했고, 막히면 곧 두려움과 진땀에 빠졌다. 그러다 정신이 들면 머릿속이 온통 헐어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체념과 죄책감의 그 졸린 미소로 일그러지면, 곧바로 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멍청한 미소는 대체 뭡니까? 당신이 지금 웃을 처지입니까!"

대체로 한스의 상태는, 이따금 좀 나은 날도 있었지만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뒷걸음질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어머니를 치료하고 사망을 선고했으며 이따금 통풍을 조금 앓는 아버지를 찾아오던 집안 의사는 얼굴을 길게 늘이고 날마다 자기 의견을 말하기를 미루었다.

그 몇 주 동안에야 한스는 라틴어 학교 마지막 두 해 동안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의 동무들은 더러는 떠났고, 더러는 견습생이 되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는데, 그 누구와도 그를 잇는 것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볼일이 없었으며,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늙은 교장이 두 번 다정한 말을 몇 마디 걸었고, 라틴어 선생과 목사도 길에서 호의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한스는 이제 그들과 상관이 없었다. 그는 더는 이것저것 쑤셔 넣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고, 갖가지 씨를 뿌릴 밭이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을 보람이 없었다.

목사가 그를 조금 돌봐 주었다면 어쩌면 좋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줄 수 있는 것, 학문이나 적어도 학문을 찾는 일은 그때 소년에게 아끼지 않고 주었고, 그 이상은 그에게 없었다. 그는 라틴어 실력은 의심스럽고 설교는 잘 알려진 출처에서 퍼 왔지만, 모든 괴로움에 좋은 눈과 다정한 말을 지니고 있어서 나쁜 때에 사람들이 즐겨 찾아가는 그런 목사가 아니었다. 아버지 기벤라트도 한스에 대한 실망의 언짢음을 감추려고 온갖 애를 썼지만 친구나 위로자는 되지 못했다.

그래서 한스는 버림받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작은 정원에서 햇볕을 쬐거나 숲에 누워 몽상이나 괴로운 생각에 빠졌다. 책을 읽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읽다 보면 곧 머리와 눈이 아팠고, 어느 책이든 펼치는 순간 수도원 시절과 그곳의 두려움이라는 유령이 되살아나 그를 숨 막히는 불안한 꿈의 구석으로 몰아넣고 거기서 불타는 눈길로 붙박아 두었기 때문이다.

* * *

이런 고난과 외로움 속에서 다른 유령 하나가 거짓 위로자로 병든 소년에게 다가와 차츰 그에게 친숙하고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 총 한 자루를 구하거나 숲 어딘가에 밧줄 올가미를 거는 건 쉬운 일이었다. 거의 날마다 이런 생각들이 그의 산책길을 따라다녔다. 그는 외지고 조용한 곳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마침내 아름답게 죽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그곳을 자기가 죽을 자리로 최종 정했다. 그는 그곳을 거듭 찾아가 앉아서, 머지않아 누가 자기를 거기서 죽은 채로 발견하리라는 상상에서 야릇한 기쁨을 찾았다. 밧줄을 걸 가지도 정해 두고 그 튼튼함도 시험해 보았다. 이제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다. 차츰, 긴 틈을 두고, 아버지에게 보낼 짧은 편지와 헤르만 하일너에게 보낼 아주 긴 편지도 썼다. 시신 곁에서 발견되도록.

준비와 안심되는 느낌은 그의 마음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 운명의 가지 아래 앉아 있으면 짓누르던 것이 물러가고 거의 기쁜 듯한 편안함이 찾아오는 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아버지도 그의 상태가 나아진 것을 알아챘고, 한스는 아버지가 기분이 좋아진 아들을 보고 기뻐하는 것을 비꼬는 즐거움으로 지켜보았다. 그 기분의 원인은 다름 아니라 곧 끝장을 내리라는 확신이었는데.

왜 그가 진작 그 멋진 가지에 매달리지 않았는지는 그 자신도 잘 몰랐다. 생각은 굳혔고, 그의 죽음은 정해진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당분간은 기분이 좋아서, 먼 여행을 앞두고 흔히 그러듯 이 마지막 며칠 동안 아름다운 햇볕과 외로운 꿈을 더 맛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떠나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또 스스로 원해서 옛 둘레에 조금 더 머물며, 자기의 위험한 결심을 짐작도 못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그에게는 특별한 쓰라린 기쁨이었다. 의사를 만날 때마다 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두고 보시지!'

운명은 그가 어두운 계획을 즐기도록 내버려 두고, 그가 날마다 죽음의 잔에서 기쁨과 생명력 몇 방울을 맛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망가진 젊은 존재에게 걸린 것은 별로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제 바퀴는 다 돌아야 했고, 삶의 쓴 단맛을 조금 더 맛보기 전에 판에서 사라져서는 안 되었다.

벗어날 수 없이 괴롭히던 생각들은 드물어지고, 지친 듯 자기를 내맡기는 마음, 아픔 없이 나른한 기분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 기분 속에서 한스는 시간과 날들이 생각 없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고, 태연하게 허공을 바라보았으며, 이따금 몽유병자 같거나 어린애 같아 보였다. 한번은 나른한 어스름 기분으로 작은 정원의 전나무 아래 앉아, 라틴어 학교 시절부터 알던, 마침 떠오른 옛 노래 한 구절을 저도 모르게 거듭 흥얼거렸다.

아, 나는 너무 지쳤네, 아, 나는 너무 고단하네, 지갑엔 돈 한 푼 없고, 주머니에도 한 푼 없네.

그는 옛 가락에 맞춰 그것을 흥얼거렸고, 스무 번째로 부르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창가 가까이 서서 그것을 듣고 크게 놀랐다. 메마른 그의 성품으로는 이 생각 없고 기분 좋게 멍한 흥얼거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것을 가망 없는 정신 박약의 징후로 풀이했다. 그때부터 그는 아들을 더 겁먹은 눈으로 지켜보았고, 아들은 물론 그것을 알아채고 괴로워했다. 그래도 그는 아직 밧줄을 들고 가서 그 튼튼한 가지를 쓰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사이 더운 계절이 왔고, 주 시험과 그때의 여름 방학으로부터 벌써 한 해가 지났다. 한스는 이따금 그것을 떠올렸지만 별다른 감동은 없었다. 그는 꽤 무뎌져 있었다. 다시 낚시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에게 부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가에 설 때마다 그것이 그를 괴롭혔고, 이따금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 강가에 오래 머물며 소리 없이 헤엄치는 검은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뜨거운 눈으로 좇았다. 저녁 무렵이면 날마다 강을 따라 조금 올라가 멱을 감았는데, 그때마다 검사관 게슬러네 작은 집 앞을 지나야 했으므로, 세 해 전 그가 열을 올렸던 엠마 게슬러가 다시 집에 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호기심에 몇 번 그녀를 눈으로 좇았지만, 그녀는 예전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팔다리가 가늘고 아주 고운 꼬마 아가씨였는데, 이제는 자라서 몸짓이 모나고, 어린애답지 않은 요즘식 머리 모양을 해서 아주 볼품이 없어졌다. 긴 치마도 어울리지 않았고, 숙녀처럼 보이려는 시도는 분명히 실패였다. 한스는 그녀가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때 그녀를 볼 때마다 얼마나 이상하게 달콤하고 어둡고 따뜻한 기분이었는지 떠올리면 동시에 아쉬웠다. 하긴 그때는 모든 게 달랐다. 훨씬 아름답고, 훨씬 밝고, 훨씬 생생했다! 오랫동안 그는 라틴어, 역사, 그리스어, 시험, 신학교, 두통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는 동화책과 도둑 이야기책이 있었고, 작은 정원에서는 손수 만든 망치 물방아가 돌았고, 저녁이면 나숄트네 대문 통로에서 리제의 모험 이야기를 들었고, 한동안 이웃의 늙은 그로스요한, 별명이 가리발디인 그를 강도 살인범으로 여겨 꿈에까지 보았고, 일 년 내내 달마다 무언가를 기다렸다. 건초 말리기를, 클로버 베기를, 그다음엔 첫 낚시나 가재잡이를, 홉 따기를, 자두 털기를, 감자 줄기 태우는 불을, 타작 시작을, 그 사이사이 사랑스러운 일요일과 명절을 따로따로. 그때는 신비한 마법으로 그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직 숱하게 있었다. 집, 골목, 계단, 헛간 다락, 우물, 울타리, 갖가지 사람과 짐승이 그에게는 사랑스럽고 익숙하거나 수수께끼처럼 마음을 끌었다. 홉 따기를 거들며 큰 처녀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고, 그 노래의 구절들을 외웠다. 대부분은 웃음이 날 만큼 익살맞았지만, 어떤 것은 이상하게 구슬퍼서 듣다 보면 목이 메었다.

그 모든 것이 가라앉아 끝나 버렸는데, 그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처음에는 리제네 저녁이 끝났고, 다음엔 일요일 오전의 송사리 잡이가, 다음엔 동화 읽기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홉 따기와 정원의 망치 물방아까지. 오, 그 모든 것이 어디로 가 버렸을까?

그리하여 일찍 철든 젊은이는 이제 앓는 나날에 현실 같지 않은 두 번째 어린 시절을 겪게 되었다. 교사들에게 어린 시절을 도둑맞은 그의 마음은 이제 갑자기 터져 나온 그리움으로 그 아름다운 어스름의 시절로 달아나, 어쩌면 병적일 만큼 강하고 또렷한 기억의 숲속을 홀린 듯 헤맸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예전에 실제로 겪을 때 못지않은 따뜻함과 열정으로 다시 겪었다. 속고 짓밟힌 어린 시절이 오래 막혀 있던 샘처럼 그의 안에서 터져 나왔다.

나무의 우듬지를 잘라 내면 나무는 흔히 뿌리 가까이에서 새 싹을 틔운다. 그처럼 한창 피어날 때 병들어 망가진 영혼도 흔히 시작의 봄날 같은 시절로, 무언가를 예감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거기서 새 희망을 찾아내고 끊어진 삶의 실을 다시 이을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뿌리 싹은 물이 올라 서둘러 무성하게 자라지만, 그건 겉보기 생명일 뿐이고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한스 기벤라트도 그랬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라를 헤매는 그의 꿈길을 조금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기벤라트네 집은 옛 돌다리 가까이에 있었고, 아주 다른 두 골목이 만나는 모퉁이를 이루었다. 집이 속한 쪽 골목은 이 도시에서 가장 길고 넓고 점잖은 골목으로, 무두장이 골목이라고 불렸다. 다른 골목은 가파르게 비탈을 오르는 짧고 좁고 초라한 골목으로, 「매」라고 불렸다. 오래전에 문을 닫은 아주 오래된 여관 이름을 딴 것인데, 그 여관 간판이 매였다.

무두장이 골목에는 집집마다 착실하고 탄탄한 토박이 시민들만 살았다. 제 집과 교회의 제 자리와 제 정원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정원은 집 뒤로 층층이 가파르게 비탈을 올라가서, 울타리가 칠십 년에 쌓은, 노란 금작화가 덮인 철둑에 닿았다. 점잖기로 무두장이 골목과 겨룰 수 있는 곳은 장터뿐이었다. 거기에는 교회와 군청과 법원과 시청과 교구장 관사가 서 있어서, 그 깔끔한 위엄으로 영락없이 도시다운 고상한 인상을 주었다. 무두장이 골목에는 관청 건물은 없었지만, 당당한 현관문을 단 옛날과 요즘의 시민 집들, 예쁘고 구식인 목골조 집들, 산뜻하고 밝은 박공들이 있었다. 그리고 집이 한 줄로만 늘어서 있다는 것이 골목에 다정함과 아늑함과 빛을 넘치게 주었다. 길 건너편에는 각목 난간을 두른 담 아래로 강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무두장이 골목이 길고 넓고 밝고 널찍하고 점잖았다면, 「매」는 그 반대였다. 거기에는 얼룩지고 부스러지는 회벽에, 짓눌린 모자 같은 처마가 앞으로 쑥 나온 기울고 어두운 집들이 서 있었다. 문과 창은 여기저기 금 가고 덧대져 있었고, 굴뚝은 굽고 물받이는 망가져 있었다. 집들은 서로에게서 자리와 빛을 빼앗았고, 골목은 좁고 기묘하게 휘어 영원한 어스름에 싸여 있었는데, 비 오는 날이나 해 진 뒤에는 그 어스름이 축축하고 고약한 어둠으로 바뀌었다. 창마다 장대와 줄에 빨래가 늘 잔뜩 걸려 있었다. 골목은 작고 초라했지만 숱한 집안이 거기 살았기 때문이다. 셋방살이와 잠만 자는 하숙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기울고 늙어 가는 집들의 구석구석에 사람이 빽빽이 살았고, 가난과 악덕과 병이 거기 터를 잡고 있었다. 경찰과 병원은 나머지 도시 전체보다 이 몇 채의 「매」 집들과 더 많은 일을 치렀다. 장티푸스가 돌면 거기서였고, 살인이 한번 나면 그것도 거기서였으며, 도시에서 도둑질이 일어나면 다들 먼저 「매」를 뒤졌다. 떠돌이 행상들이 거기에 묵을 곳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익살맞은 광택 가루 장수 호테호테와, 온갖 범죄와 악덕을 다 저질렀다는 소문이 도는 칼갈이 아담 히텔이 있었다.

* * *

학교에 들어가고 처음 몇 해 동안 한스는 「매」에 자주 드나들었다. 짚처럼 노란 머리에 누더기를 걸친 수상쩍은 사내아이 패거리와 함께, 그 악명 높은 로테 프로뮐러의 살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작은 술집 주인과 이혼한 여자로, 다섯 해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한때는 이름난 미인이어서 공장 일꾼들 사이에 애인이 숱했고, 그 때문에 추문과 칼부림이 자주 났다. 이제 그녀는 외롭게 살면서, 공장이 끝난 뒤 저녁이면 커피를 끓이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럴 때면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아낙들과 젊은 일꾼들 말고도 언제나 이웃 아이 한 무리가 문턱에서 황홀해하고 오싹해하며 귀 기울였다. 검은 돌 화덕 위에서 주전자의 물이 끓었고, 그 곁에 수지 촛불이 타면서 파란 숯불과 함께 꽉 들어찬 어두운 방을 기괴하게 일렁이며 비추었고, 듣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엄청난 크기로 벽과 천장에 던져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채웠다.

거기서 여덟 살 소년은 핑켄바인 형제를 알게 되었고, 아버지의 엄한 금지를 무릅쓰고 한 해쯤 그들과 우정을 이어 갔다. 형제의 이름은 돌프와 에밀이었는데, 이 도시에서 가장 약삭빠른 골목 아이들로, 과일 서리와 자잘한 숲 도둑질로 이름났고, 셀 수 없이 많은 재주와 장난에 완벽한 달인이었다. 그들은 곁가지로 새알, 납 탄알, 새끼 까마귀, 찌르레기, 토끼를 사고팔았고, 금지된 밤낚시를 놓았으며, 도시의 모든 정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아무리 뾰족한 울타리도, 유리 조각을 아무리 빽빽이 꽂은 담도 그들이 쉽게 넘지 못할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스가 가까이 지낸 건 「매」에 사는 헤르만 레히텐하일이었다. 그는 고아였고, 병약하고 조숙하고 별난 아이였다. 한쪽 다리가 너무 짧아서 늘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고, 골목 놀이에 낄 수 없었다. 그는 가냘팠고, 핏기 없는 고통스러운 얼굴에 입은 너무 일찍 쓴맛을 알았고 턱은 지나치게 뾰족했다. 그는 갖가지 손재주가 남달리 뛰어났고, 특히 낚시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 있어서 그것을 한스에게 옮겨 주었다. 한스는 그때 아직 낚시 허가증이 없었지만, 둘은 그래도 숨은 곳에서 몰래 낚시를 했다. 사냥이 기쁨이라면 몰래 하는 사냥은 알다시피 더없는 즐거움이다. 다리 굽은 레히텐하일은 한스에게 알맞은 낚싯대를 깎는 법, 말총을 땋는 법, 줄을 물들이는 법, 실 올가미를 꼬는 법, 낚싯바늘을 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날씨를 살피는 법, 물을 지켜보고 밀기울로 흐리는 법, 알맞은 미끼를 고르고 제대로 꿰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물고기 종류를 가려내는 법, 낚시하며 물고기를 엿보는 법, 줄을 알맞은 깊이에 두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말없이, 오로지 본보기와 곁에 있음으로, 손놀림과 당기거나 늦출 순간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그리고 섬세한 낚시에 없어서는 안 될 손의 그 이상한 예민함을 전해 주었다. 가게에서 파는 멋진 낚싯대와 코르크와 유리 줄과 온갖 인공 낚시 도구를 그는 열심히 경멸하고 비웃었고, 모든 부분을 제 손으로 만들어 맞추지 않은 낚시로는 도저히 고기를 잡을 수 없다고 한스를 설득했다.

핑켄바인 형제와 한스는 화가 나서 갈라섰다. 조용한 절름발이 레히텐하일은 다툼 없이 그를 떠났다. 어느 이월 날 그는 초라한 작은 침대에 몸을 뉘고, 목발 지팡이를 의자 위 옷가지에 걸쳐 놓더니, 열이 나기 시작해 빠르게,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매」 골목은 곧바로 그를 잊었고, 한스만이 오랫동안 그를 좋게 기억했다.

하지만 「매」의 별난 주민들이 그로써 다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술버릇 때문에 쫓겨난 우체부 뢰텔러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는 두 주마다 곤드레만드레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밤중에 소란을 피웠지만, 그 밖에는 아이처럼 착했고 늘 호의에 차서 웃었다. 그는 한스에게 타원형 상자에서 코담배를 맡게 해 주었고, 이따금 한스에게서 물고기를 선물로 받아 버터에 구워서 한스를 함께 먹자고 불렀다. 그에게는 유리 눈을 박은 말똥가리 박제와, 가늘고 고운 작은 소리로 옛 춤곡을 연주하는 낡은 오르골이 있었다. 그리고 맨발로 다닐 때도 늘 커프스를 차던 아주 늙은 기계공 포르슈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옛날식 엄한 시골 교사의 아들인 그는 성경 반쪽과 속담과 도덕 격언을 귀가 따갑도록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눈처럼 흰 머리도 그가 모든 아낙 앞에서 바람둥이 노릇을 하고 자주 술에 취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조금 취하면 그는 기벤라트네 집 모퉁이의 차 막이 돌에 즐겨 앉아, 지나가는 사람마다 이름을 불러 격언을 넉넉히 대접했다.

"한스 기벤라트 2세, 내 귀한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 집회서는 뭐라고 하더냐? 나쁜 꾀를 주지 않고 그 때문에 양심이 찔리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아름다운 나무의 푸른 잎이 더러는 떨어지고 더러는 다시 돋듯이, 사람도 그러하니, 더러는 죽고 더러는 태어난다. 자, 이제 집에 가도 된다, 이 물개 녀석아."

이 늙은 포르슈는 경건한 격언과는 상관없이 유령 같은 것들에 대한 어둡고 전설 같은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는 유령이 나도는 곳들을 알았고, 자기 이야기를 믿다가 안 믿다가 늘 오락가락했다. 대개 그는 이야기를 미심쩍어하며 허세 부리듯 하찮게 여기는 투로, 마치 이야기와 듣는 사람들을 놀리듯 시작했지만, 이야기하는 동안 차츰 겁먹은 듯 몸을 웅크리고 목소리를 점점 낮추다가, 나직하고 파고드는 오싹한 속삭임으로 끝맺었다.

이 가난한 작은 골목에는 얼마나 많은 섬뜩한 것, 속을 알 수 없는 것, 어둡게 마음을 끄는 것이 들어 있었던가! 장사가 망하고 버려진 작업장이 완전히 엉망이 된 뒤에는 자물쇠공 브렌들레도 그 골목에 살았다. 그는 반나절씩 작은 창가에 앉아 북적이는 골목을 음울하게 내다보았고, 이따금 이웃집의 누더기 입은 꾀죄죄한 아이가 손에 걸리면 사나운 고소함으로 괴롭혔다. 귀와 머리를 잡아당기고 온몸을 꼬집어 퍼렇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자기 집 계단에 아연 철사 한 토막으로 목을 매달았는데, 몰골이 어찌나 끔찍했던지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마침내 늙은 기계공 포르슈가 뒤에서 양철 가위로 철사를 끊자, 시신이 혀를 내민 채 앞으로 고꾸라져 계단을 쿵쿵 굴러 경악한 구경꾼들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한스는 밝고 넓은 무두장이 골목에서 어둡고 축축한 「매」로 들어설 때마다, 이상하게 답답한 공기와 함께 황홀하게 오싹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호기심과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과 행복한 모험의 예감이 뒤섞인 것이었다. 「매」는 아직 동화나 기적이나 들어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마법과 유령 같은 것이 믿을 만하고 그럴듯한 곳, 전설을 읽을 때나 교사들이 압수하던 로이틀링겐의 추잡한 싸구려 이야기책을 읽을 때와 똑같이 아프도록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책들은 존넨비르틀레, 신더한네스, 메서카를레, 포스트미헬 같은 어두운 영웅들과 흉악범과 모험가들의 악행과 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매」 말고도 다른 어디와도 다른 곳이 하나 더 있었다. 무언가를 겪고 듣고, 어두운 다락과 별난 방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곳. 그건 가까이 있는 커다란 무두질 공장이었다. 반쯤 어두운 다락에 커다란 가죽이 걸려 있고, 지하실에는 덮개 덮인 구덩이와 금지된 통로가 있고, 저녁이면 리제가 모든 아이에게 아름다운 동화를 들려주던 오래되고 거대한 집이었다. 거기는 건너편 「매」보다 조용하고 다정하고 사람다웠지만, 수수께끼 같기로는 못하지 않았다. 구덩이와 지하실과 무두질 껍질 마당과 다락에서 일하는 무두장이 직공들의 모습은 이상하고 독특했고, 크게 입 벌린 공간들은 고요해서 마음을 끄는 만큼 섬뜩했으며, 힘세고 퉁명스러운 집주인은 식인귀처럼 두려움과 꺼림을 받았고, 리제는 그 별난 집을 요정처럼 돌아다녔다. 모든 아이와 새와 고양이와 강아지의 보호자이자 어머니였고, 선함과 신기하고 이상한 동화와 노래 구절로 가득했다.

이제 소년의 생각과 꿈은 오래전에 멀어진 이 세계 속을 오갔다. 그는 크나큰 실망과 절망에서 지나간 좋은 시절로 달아났다. 아직 희망으로 가득했고, 세상이 무시무시한 위험과 마법에 걸린 보물과 에메랄드 성들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깊은 곳에 숨긴 거대한 마법의 숲처럼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던 시절로. 그는 이 황야로 조금 들어갔지만, 기적이 오기 전에 지쳐 버렸고, 이제 다시 수수께끼처럼 어스름한 입구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쫓겨난 사람으로서, 할 일 없는 호기심을 품고.

한스는 몇 번 다시 「매」를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옛 어스름과 옛 고약한 냄새, 옛 구석과 빛 없는 계단 통로를 보았다. 다시 늙은 남자와 여자들이 문 앞에 앉아 있었고, 꾀죄죄한 노란 머리 아이들이 고함치며 뛰어다녔다. 기계공 포르슈는 더 늙어서 한스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의 수줍은 인사에 비웃듯 염소처럼 매에 하는 소리로만 대답했다. 가리발디라 불리던 그로스요한은 죽었고, 로테 프로뮐러도 죽었다. 우체부 뢰텔러는 아직 있었다. 그는 아이들이 자기 오르골을 망가뜨렸다고 하소연하더니, 코담배를 권했다가 그에게 구걸을 하려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핑켄바인 형제 이야기를 했다. 하나는 지금 여송연 공장에 다니는데 벌써 늙은이처럼 술을 퍼마시고, 다른 하나는 교회 축제 날 칼부림을 하고 달아나 벌써 한 해째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처량하고 궁상스러운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한번은 저녁에 무두질 공장으로 건너갔다. 마치 그 크고 오래된 집에 자기의 어린 시절이 잃어버린 모든 기쁨과 함께 숨어 있기라도 한 듯, 무언가가 그를 대문 통로로, 축축한 마당으로 이끌었다.

그는 굽은 계단과 돌 깐 현관 통로를 지나 어두운 계단에 이르렀고, 가죽이 펼쳐 걸린 다락까지 더듬어 올라가, 거기서 날카로운 가죽 냄새와 함께 갑자기 몰려드는 기억의 구름을 통째로 들이마셨다. 그는 다시 내려와 뒷마당을 찾아갔다. 무두질 껍질 구덩이와, 껍질 찌꺼기 덩어리를 말리는 좁게 지붕 덮은 높은 시렁이 있는 곳이었다. 정말로 리제가 담장 벤치에 앉아 감자 한 바구니를 앞에 두고 껍질을 벗기고 있었고, 귀 기울이는 아이 몇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스는 어두운 문간에 멈춰 서서 그쪽에 귀를 기울였다. 크나큰 평화가 어스름 내리는 무두질 마당을 채우고 있었다. 마당 담 뒤로 흘러가는 강의 희미한 물소리 말고는, 감자 껍질 벗기는 리제의 칼 소리와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만 들렸다. 아이들은 아주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성 크리스토포루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밤에 아이 목소리가 강을 건너 달라고 그를 부르는 이야기였다.

한스는 한동안 귀 기울이다가 조용히 어두운 현관 통로를 지나 되돌아 집으로 갔다. 이제 다시 아이가 되어 저녁마다 무두질 마당에서 리제 곁에 앉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다시 무두질 집도 「매」만큼 피했다.

6장

가을이 벌써 깊었다. 검은 전나무 숲에서 드문드문 선 활엽수들이 횃불처럼 노랗고 빨갛게 빛났고, 골짜기에는 벌써 짙은 안개가 끼었으며, 강은 아침마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김을 피워 올렸다.

창백한 전 신학생은 여전히 날마다 바깥을 쏘다녔고, 시들하고 지쳐서 그나마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과의 어울림도 피했다. 의사는 물약과 대구 간유와 달걀과 냉수마찰을 처방했다.

아무것도 제대로 듣지 않는 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건강한 삶이라면 모두 내용과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젊은 기벤라트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이제 아버지는 그를 서기로 만들든지 기술을 배우게 하든지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는 아직 허약해서 우선 조금 더 기운을 차려야 했지만, 이제 곧 그를 두고 진지하게 일을 정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처음의 혼란스러운 인상들이 누그러지고 자살도 더는 믿지 않게 된 뒤로, 한스는 들뜨고 오락가락하던 불안 상태에서 고른 우울로 넘어가, 부드러운 진흙 바닥에 빠지듯 천천히, 저항 없이 그 속에 가라앉았다.

이제 그는 가을 들판을 돌아다니며 계절의 영향에 굴복했다. 가을의 끝물, 소리 없이 지는 낙엽, 갈색으로 변하는 풀밭, 짙은 아침 안개, 식물들의 익고 지쳐서 죽고 싶어 하는 모습이, 모든 환자에게 그렇듯 그를 무겁고 희망 없는 기분과 슬픈 생각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함께 사라지고, 함께 잠들고, 함께 죽고 싶었고, 그의 젊음이 그것을 거스르며 말없는 끈기로 삶에 매달리는 것이 괴로웠다.

그는 나무들이 노래지고, 갈색이 되고, 헐벗는 것을 지켜보았다. 숲에서 피어오르는 우윳빛 안개를, 마지막 과일을 거둔 뒤 생명이 꺼져서 빛깔 고운 채 시들어 가는 과꽃을 아무도 돌보지 않는 정원들을, 멱 감기도 낚시도 끝나 버린 강을 지켜보았다. 강은 마른 잎으로 덮였고, 서리 내린 강가에는 질긴 무두장이들만 버티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강은 과즙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잔뜩 실어 날랐다. 즙 짜는 터와 모든 물방앗간에서 지금 한창 사과즙을 짜고 있었고, 도시에는 은근히 발효하는 과일즙 냄새가 골목마다 퍼졌다.

아래쪽 물방앗간에서는 구두장이 플라이크도 작은 압착기를 하나 빌렸는데, 그는 한스를 즙 짜는 데 불렀다.

물방앗간 앞마당에는 크고 작은 과즙 압착기와 수레와 과일을 가득 담은 바구니와 자루, 통과 큰 통과 들통과 나무통, 갈색 찌꺼기 더미, 나무 지레, 손수레, 빈 수레들이 놓여 있었다. 압착기들은 일하며 삐걱이고, 끽끽대고, 신음하고, 매에 하고 울었다. 대부분 초록 칠을 했는데, 이 초록이 찌꺼기의 누런 갈색과 사과 바구니의 빛깔과 밝은 초록 강과 맨발의 아이들과 맑은 가을 햇살과 어우러져, 보는 사람마다 기쁨과 삶의 즐거움과 넉넉함의 마음 끄는 인상을 받았다. 으깨지는 사과가 바스러지는 소리는 떫으면서도 입맛을 돋웠다. 다가와서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얼른 사과 하나를 주먹에 쥐고 베어 물지 않을 수 없었다. 관에서는 달콤한 햇과즙이 굵은 줄기로 흘러나왔다. 붉고 누런 빛으로 햇빛 속에서 웃었다. 다가와서 그것을 본 사람은 한 잔 달라고 해서 얼른 맛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이 촉촉해지며 달콤함과 편안함의 물결이 몸을 통과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달콤한 과즙이 그 즐겁고 진하고 귀한 냄새로 온 둘레의 공기를 채웠다. 이 향기는 사실 한 해를 통틀어 가장 좋은 것이고, 익음과 거둠의 정수다. 겨울을 앞두고 이렇게 그것을 들이마시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면서 숱한 좋고 놀라운 것들을 감사하게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오월의 비, 쏴아 쏟아지는 여름비, 서늘한 가을 아침 이슬, 다정한 봄 햇살과 이글이글 뜨거운 여름 볕, 하얗고 장밋빛으로 빛나는 꽃, 거두기 전 과일나무의 익은 적갈색 윤기, 그리고 그 사이사이 한 해가 가져다준 모든 아름답고 기쁜 것들을.

모두에게 빛나는 날들이었다. 부자와 졸부들은 몸소 나타나는 수고를 할 때면 곱고 살진 사과를 손에 올려 무게를 가늠하고, 열두 자루나 그 이상을 세고, 은 휴대 잔으로 맛을 보며, 자기네 과즙에는 물 한 방울 들어가지 않는다고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과일 자루가 딱 하나뿐이었고, 유리잔이나 질그릇으로 맛을 보며 물을 탔지만, 그렇다고 덜 자랑스럽거나 덜 즐겁지는 않았다. 어떤 까닭으로든 즙을 짤 수 없는 사람은 아는 사람과 이웃을 찾아 이 압착기 저 압착기로 돌아다니며 어디서나 한 잔씩 얻어 마시고 사과 하나씩 주머니에 넣고, 감정가 같은 말로 자기도 이 일에 대해 한몫 안다는 것을 증명했다. 가난하든 부자든 숱한 아이들은 작은 잔을 들고 뛰어다녔고, 저마다 베어 문 사과 하나와 빵 한 조각을 손에 들고 있었다. 과즙을 짤 때 빵을 실컷 먹으면 나중에 배가 아프지 않다는, 근거 없는 말이 예부터 전해 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소란은 말할 것도 없고 백 개의 목소리가 뒤섞여 외쳤는데, 그 모든 목소리가 바쁘고 들뜨고 즐거웠다.

"한네스, 이리 와! 나한테로! 딱 한 잔만!"

"고맙지만 됐어, 벌써 배가 살살 아파."

"백 근에 얼마 줬어?"

"4마르크. 그런데 일품이야. 자, 맛 좀 봐!"

이따금 작은 사고가 났다. 사과 자루 하나가 너무 일찍 풀려 몽땅 바닥에 굴렀다.

"제기랄, 내 사과! 사람들, 좀 도와줘요!"

모두가 함께 주워 담았고, 몇몇 개구쟁이만 그 틈에 한몫 챙기려 했다.

"주머니에 넣지 마, 이 녀석들아! 배에 들어가는 만큼은 먹어도 되지만 주머니엔 넣지 마. 기다려, 이 멍청한 녀석!"

"이봐요, 이웃 양반, 그렇게 뻐기지 말고! 이거 한번 맛보시오!"

"꿀 같구먼! 딱 꿀 같아. 얼마나 짜시오?"

"두 통이오, 더는 아니고. 그래도 나쁘진 않지."

"한여름에 즙을 안 짜니 다행이지, 안 그러면 다 그냥 퍼마셔 버릴 거야."

올해도 빠지면 안 되는 투덜이 노인 몇이 와 있다. 그들은 직접 즙을 짠 지 오래됐지만 무엇이든 더 잘 알고, 과일을 거저나 다름없이 얻던 옛날 옛적 이야기를 한다. 무엇이든 훨씬 싸고 좋았고, 설탕을 넣는다는 건 아예 몰랐으며, 아무튼 그때는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부터가 전혀 달랐다고.

"그땐 수확이라고 할 만했지. 나한테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놈 혼자서 오백 근을 떨궜다니까."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나빠졌어도 투덜이 노인들은 올해도 넉넉히 맛보기를 거들고, 아직 이가 남은 노인들은 저마다 사과를 씹어 댄다. 한 노인은 커다란 바델 배를 두 개나 억지로 먹고 지독한 배앓이를 했다.

"내 말이 그거야." 그가 투덜거린다. "예전엔 그놈들을 열 개씩 먹었다고." 그리고 그는 꾸밈없는 한숨을 쉬며 배앓이가 나기 전에 바델 배를 열 개씩 먹어 치울 수 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 * *

북적이는 한가운데에 플라이크 씨가 압착기를 세워 두고 나이 많은 견습생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는 바덴에서 사과를 들여왔고, 그의 과즙은 늘 최상품이었다. 그는 조용히 흐뭇해하며 누구에게나 「맛보기」 한 모금을 마다하지 않았다. 더 흐뭇한 건 그의 아이들이었는데, 아이들은 둘레를 뛰어다니며 행복하게 무리 속에 휩쓸려 헤엄쳤다. 하지만 가장 흐뭇한 건, 조용히 그랬지만, 그의 견습생이었다. 그는 위쪽 숲의 가난한 농가 출신이라, 오랜만에 밖에서 힘껏 몸을 놀리며 일할 수 있는 것이 온 뼈마디에 좋았고, 맛 좋은 단 과즙도 기막히게 넘어갔다. 그의 건강한 농부 소년 얼굴은 사티로스 가면처럼 히죽거렸고, 그의 구두장이 손은 일요일보다도 깨끗했다.

한스 기벤라트가 그 자리에 왔을 때 그는 말이 없고 겁먹어 있었다. 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첫 압착기에서부터 누가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나숄트네 리제였다. 그는 맛을 보았고, 삼키는 순간 달콤하고 힘찬 과즙 맛과 함께 예전 가을들의 웃음 띤 기억들이 숱하게 밀려왔고, 동시에 다시 한번 조금 끼어서 즐거워지고 싶은 쭈뼛한 바람이 생겼다. 아는 사람들이 말을 걸었고 잔을 권했다. 플라이크네 압착기에 이르렀을 때는 모두의 즐거움과 술기운이 벌써 그를 사로잡아 바꿔 놓았다. 그는 아주 명랑하게 구두장이에게 인사하고 흔히 하는 과즙 농담을 몇 마디 했다. 장인은 놀라움을 감추고 그를 즐겁게 맞았다.

반 시간쯤 지났을 때, 파란 치마를 입은 아가씨 하나가 와서 플라이크와 그의 견습생에게 웃어 보이고는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아, 그렇지." 구두장이가 말했다. "이 애는 하일브론에서 온 내 조카딸이다. 이 애 고향에서는 포도주가 많이 나서, 물론 다른 가을걷이에 익숙하지."

그녀는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되어 보였고, 저지대 사람들이 그렇듯 날렵하고 명랑했다. 키는 크지 않지만 몸매가 좋고 풍만했다. 둥근 얼굴에서 따뜻하게 바라보는 검은 눈과 입 맞추고 싶게 생긴 예쁜 입이 즐겁고 영리해 보였다. 대체로 그녀는 건강하고 밝은 하일브론 아가씨처럼 보였지, 경건한 구두장이 장인의 친척처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철저히 이 세상 사람이었고, 그녀의 눈은 저녁과 밤에 성경과 고스너의 『보물 상자』를 읽는 사람의 눈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스는 갑자기 다시 근심스러운 얼굴이 되어, 엠마가 어서 가 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남아서 웃고 떠들며 농담마다 재빠르게 받아쳤고, 한스는 부끄러워서 아주 조용해졌다. 존댓말을 써야 하는 젊은 아가씨와 어울리는 건 그러잖아도 끔찍했는데, 이 아가씨는 어찌나 생기 있고 말이 많은지, 그가 곁에 있는 것도 그의 수줍음도 전혀 개의치 않아서,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조금 마음이 상한 채 수레바퀴에 스친 길 달팽이처럼 더듬이를 거두고 움츠러들었다. 그는 가만히 있으며 지루해하는 사람처럼 보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고, 그 대신 방금 누가 죽기라도 한 듯한 얼굴을 했다.

아무도 거기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엠마 자신이 가장 그랬다. 한스가 듣기로 그녀는 두 주 전부터 플라이크네에 와 있었는데, 벌써 온 도시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체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새 과즙을 맛보고, 조금 농담하고 웃다가 돌아와서 열심히 일하는 척하고, 아이들을 안아 주고, 사과를 나눠 주며 둘레에 웃음과 즐거움만 퍼뜨렸다. 그녀는 골목 아이마다 불러 세웠다. "사과 줄까?" 그러고는 볼 빨간 예쁜 사과 하나를 집어 두 손을 등 뒤로 감추고 맞혀 보게 했다. "오른손일까, 왼손일까?" 그런데 사과는 늘 맞힌 손에 없었고, 아이들이 투덜대기 시작해야 사과를 하나 내주었는데, 더 작고 퍼런 것이었다. 그녀는 한스에 대해서도 들은 모양이었다. 그에게 늘 머리가 아프다는 애가 너냐고 묻더니,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벌써 이웃 사람들과 다른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한스가 슬그머니 빠져 집에 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플라이크가 그의 손에 지레를 쥐여 주었다.

"자, 이제 네가 좀 해라. 엠마가 도와줄 거다. 나는 작업장에 가 봐야 해."

장인은 갔고, 견습생은 장인 부인과 함께 과즙을 날라 가라는 일을 맡았다. 한스는 엠마와 단둘이 압착기에 남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원수처럼 일했다.

그러다 지레가 왜 이렇게 무겁나 싶어 고개를 들었더니, 아가씨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장난으로 반대쪽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한스가 화가 나서 다시 당기자 그녀는 또 그랬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레 저쪽에서 아가씨의 몸이 버티는 그 지레를 밀고 있자니, 갑자기 부끄럽게 답답해졌고, 차츰 그는 돌리는 것을 아예 그만두었다. 달콤한 두려움이 그를 덮쳤고, 그 젊은 것이 뻔뻔하게 그의 얼굴에 대고 웃자, 그녀가 갑자기 달라 보였다. 더 친근하면서도 더 낯설게. 그러자 그도 조금 웃었다. 서툴게 친근하게.

그리고 지레는 아예 멈춰 버렸다.

엠마가 말했다. "우리 이렇게 죽어라 일하지 말자." 그러고는 방금 자기가 마시던 반쯤 찬 잔을 그에게 건넸다.

이 한 모금의 과즙은 아주 독하고 아까 것보다 달게 느껴졌다. 그것을 마시고 나서 그는 빈 잔을 갈망하듯 들여다보며, 가슴이 왜 이렇게 세차게 뛰고 숨쉬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의아했다.

그러고 둘은 다시 조금 일했다. 한스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아가씨의 치마가 자기를 스치고 그녀의 손이 자기 손에 닿을 수밖에 없도록 자리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가슴은 두려운 환희로 멎을 듯했고, 기분 좋게 달콤한 기운 빠짐이 찾아와 무릎이 조금 떨리고 머릿속에서 어지러운 윙윙 소리가 울렸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지만, 그는 그녀에게 꼬박꼬박 대꾸하고, 그녀가 웃으면 따라 웃고, 그녀가 바보짓을 하면 몇 번 손가락으로 을러대고, 그녀의 손에서 잔을 두 번 더 받아 비웠다. 동시에 숱한 기억들이 무리 지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저녁이면 남자들과 현관에 서 있던 하녀들, 이야기책에서 읽은 몇 문장, 헤르만 하일너가 그때 그에게 했던 입맞춤, 그리고 「여자애들」과 「애인이 있으면 어떤지」를 두고 학생들끼리 나누던 숱한 말과 이야기와 은밀한 대화. 그리고 그는 비탈을 끄는 말처럼 무겁게 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둘레의 사람들과 북적임은 빛깔 고운 웃음 띤 구름처럼 풀어져 버렸다. 하나하나의 목소리와 욕설과 웃음은 흐릿한 커다란 웅성거림 속에 가라앉았고, 강과 옛 다리는 멀리 그림처럼 보였다.

엠마도 모습이 달라졌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더는 보지 못했다. 검고 즐거운 눈과 빨간 입, 그 뒤의 하얗고 뾰족한 이만 보였다. 그녀의 모습은 녹아 흩어지고 몇 조각만 보였다. 어떤 때는 검은 스타킹 위의 단화, 어떤 때는 목덜미에 흘러내린 곱슬 한 가닥, 어떤 때는 파란 옷감 속으로 사라지는 햇볕에 그을린 둥근 목, 어떤 때는 탄탄한 어깨와 그 아래 숨 쉬며 출렁이는 것, 어떤 때는 불그스름하게 비치는 귀.

그리고 또 얼마 뒤 그녀가 잔을 통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굽혔는데, 그때 통 가장자리에서 그녀의 무릎이 그의 손목을 눌렀다. 그도 몸을 굽혔지만 더 천천히 굽혀서, 얼굴이 거의 그녀의 머리에 닿을 뻔했다. 머리에서는 희미한 향기가 났고, 그 아래 헐렁하고 곱슬곱슬한 잔머리의 그늘 속에서 아름다운 목덜미가 따뜻한 갈색으로 빛나며 파란 웃옷 허리로 이어졌는데, 팽팽하게 당겨진 후크 사이 틈으로 그 목덜미가 조금 더 비쳐 보였다.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그녀의 무릎이 그의 팔을 따라 미끄러지고, 그녀의 머리칼이 그의 뺨을 스치고, 그녀가 몸을 굽힌 탓에 얼굴이 새빨개졌을 때, 세찬 전율이 한스의 온 팔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는 창백해졌고, 한순간 깊고 깊은 피로를 느껴 압착기 나사를 붙잡아야 했다. 가슴이 경련하듯 오르내렸고, 팔은 힘이 빠져 어깨가 아팠다.

그때부터 그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아가씨의 눈길을 피했다. 그 대신 그녀가 다른 데를 볼 때마다 알지 못하던 쾌감과 양심의 가책이 뒤섞인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찢어졌고, 멀고 파란 해안을 가진 새롭고 낯설게 마음을 끄는 나라가 그의 영혼 앞에 열렸다. 그는 자기 안의 이 두려움과 달콤한 괴로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몰랐고, 다만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괴로움과 기쁨 가운데 무엇이 더 큰지도 몰랐다.

그런데 기쁨은 그의 젊은 사랑의 힘이 이겼다는 것, 거대한 삶에 대한 첫 예감을 뜻했고, 괴로움은 아침의 평화가 깨졌다는 것, 그의 영혼이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나라를 떠났다는 것을 뜻했다. 그의 가벼운 작은 배는 첫 난파를 가까스로 피했는데, 이제 새로운 폭풍의 손아귀에, 기다리는 여울과 목을 부러뜨릴 암초 가까이에 들어섰다. 그 사이를 지날 때는 아무리 잘 이끌린 젊음에게도 길잡이가 없고, 제 힘으로 길과 구원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견습생이 돌아와 압착기에서 그를 넘겨받았다. 한스는 한동안 더 거기 있었다. 그는 엠마가 한 번 더 닿아 주거나 다정한 말을 해 주기를 바랐다. 엠마는 다시 남의 압착기 둘레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스는 견습생 앞에서 쑥스러워서 십오 분 뒤에 인사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집으로 갔다.

모든 것이 이상하게 달라졌다. 아름답고 가슴 설레게. 찌꺼기를 먹고 살찐 참새들이 요란하게 하늘을 가로질렀고, 하늘은 그토록 높고 아름답고 그리움에 찬 파란빛이었던 적이 없었다. 강이 그토록 맑고 청록빛으로 웃는 수면을 가진 적도, 보가 그토록 눈부시게 하얗게 소리친 적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맑고 새 유리창 뒤에 새로 칠한 고운 그림처럼 서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큰 축제의 시작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 자신의 가슴속에서도 이상하게 대담한 감정과 별나고 강렬한 희망이 답답하리만큼 세차게, 불안하고 달콤하게 출렁이는 것이 느껴졌고, 그와 함께 이건 꿈일 뿐이고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으리라는 수줍게 의심하는 두려움도 느껴졌다. 부풀어 오르면서 이 엇갈리는 감정들은 어둡게 솟구치는 샘이 되었다. 무언가 너무 강한 것이 그의 안에서 풀려나 숨통을 트려는 것 같은 느낌. 흐느낌일지도, 노래나 외침이나 큰 웃음일지도 몰랐다. 집에 와서야 이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물론 거기는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았다.

"어디 갔다 오냐?" 기벤라트 씨가 물었다.

"방앗간의 플라이크 아저씨네요."

"그 사람은 얼마나 짰냐?"

"두 통인 것 같아요."

그는 아버지가 즙을 짤 때 플라이크네 아이들을 불러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지." 아빠가 투덜거렸다. "나는 다음 주에 짠다. 그때 데려와라!"

저녁 먹기까지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한스는 정원으로 나갔다. 전나무 두 그루 말고는 초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개암나무 회초리를 꺾어 허공에 휙휙 휘두르며 시든 잎을 헤집었다. 해는 벌써 산 뒤로 넘어갔고,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그어진 전나무 끝을 단 산의 검은 윤곽이 푸르스름하게 초록빛 도는, 촉촉하고 맑은 저녁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노랗고 갈색으로 물든 길게 뻗은 잿빛 구름 하나가 돌아오는 배처럼 천천히, 기분 좋게 엷고 금빛 도는 공기를 지나 골짜기 위쪽으로 떠갔다.

익고 빛깔 짙은 저녁의 아름다움에 낯설고 이상하게 사로잡혀 한스는 정원을 거닐었다. 이따금 멈춰 서서 눈을 감고 엠마를 떠올려 보려 했다. 압착기 앞에서 그녀가 마주 서 있던 모습, 자기 잔으로 그에게 마시게 하던 모습, 통 위로 몸을 굽혔다가 얼굴을 붉히며 다시 일어서던 모습. 그는 그녀의 머리칼과, 꼭 끼는 파란 옷 속의 몸매와, 목과, 검은 잔머리로 갈색 그늘이 진 목덜미를 보았고, 그 모든 것이 그를 기쁨과 떨림으로 채웠다. 다만 그녀의 얼굴만은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해가 다 지자 그는 서늘함을 느끼지 못했고, 짙어 가는 어스름이 그가 이름도 모르는 비밀들로 가득한 베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기가 하일브론 아가씨에게 반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핏속에서 깨어나는 사내다움이 하는 일은 낯설고 예민하고 지치게 하는 상태로 어렴풋이밖에 알지 못했다.

저녁을 먹으며, 바뀐 자기를 데리고 오래 익숙한 둘레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이 이상했다. 아버지와 늙은 하녀와 식탁과 그릇과 방 전체가 갑자기 늙어 보였고, 그는 긴 여행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놀라움과 낯섦과 다정함이 섞인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그 죽음의 가지에 눈독을 들이던 때에는 같은 사람과 물건들을 떠나는 사람의 서글프고 우월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는데, 이제는 돌아옴이었고, 놀람이었고, 미소였고, 되찾음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한스가 일어서려는데, 아버지가 늘 그렇듯 짧게 말했다. "한스, 기계공이 되고 싶으냐, 아니면 서기가 좋으냐?"

"왜요?" 한스가 놀라서 되물었다.

"다음 주말에 기계공 슐러네 작업장에 들어가든지, 다다음 주에 시청에 견습생으로 들어가든지 할 수 있다. 잘 생각해 봐라!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한스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갑작스러운 물음이 그를 어리둥절하고 눈부시게 했다. 몇 달 동안 낯설어졌던 날마다의 바쁘고 싱싱한 삶이 뜻밖에 그의 앞에 나타났다. 손짓하는 얼굴과 위협하는 얼굴을 하고, 약속하고 요구하며. 그는 기계공에도 서기에도 별 마음이 없었다. 손기술의 고된 몸 노동은 조금 겁이 났다. 그러다 기계공이 된 학교 친구 아우구스트가 떠올랐다. 그에게 물어보면 되었다.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그의 생각은 흐려지고 빛이 바래서, 그 일이 그렇게 급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다른 무언가가 그를 몰아대고 붙잡았다. 그는 불안하게 현관을 오락가락하다가 갑자기 모자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서 천천히 골목으로 나갔다. 오늘 엠마를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까운 술집에서 고함과 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몇몇 창에는 불이 켜졌고, 여기저기서 하나씩 또 하나씩 켜지며 어두운 공기 속에 희미한 붉은빛을 드리웠다. 팔짱을 낀 젊은 아가씨들이 길게 줄지어 크게 웃고 떠들며 즐겁게 골목을 내려갔다. 불확실한 불빛 속에서 흔들리며, 잠들어 가는 골목들 사이로 젊음과 즐거움의 따뜻한 물결처럼 지나갔다. 한스는 오래도록 그들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목까지 뛰었다. 커튼 친 창 뒤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우물가에서는 아낙 하나가 상추를 씻고 있었다. 다리 위에서는 두 젊은이가 애인과 산책하고 있었다. 하나는 아가씨의 손을 느슨하게 잡고 그 팔을 흔들며 여송연을 피웠다. 다른 짝은 꼭 껴안은 채 천천히 걸었다. 젊은이가 아가씨의 허리를 감쌌고, 아가씨는 어깨와 머리를 그의 가슴에 꼭 기댔다. 한스는 그런 것을 백 번은 보았지만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이제 그것에는 은밀한 뜻이, 흐릿하지만 탐스럽게 달콤한 의미가 있었다. 그의 눈길이 그 짝에게 머물렀고, 그의 상상은 무언가를 예감하며 곧 다가올 이해를 향해 밀려갔다. 답답하고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린 채 그는 커다란 비밀 가까이에 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이 귀한 것일지 끔찍한 것일지 몰랐지만, 둘 다를 떨며 미리 조금 느꼈다.

플라이크네 작은 집 앞에서 그는 멈춰 섰지만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 뭘 하고 뭐라고 말하겠는가? 열한두 살 꼬마였을 때 이곳에 자주 오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플라이크는 그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지옥과 악마와 유령에 대한 그의 거센 호기심의 질문들을 다 받아 주었다. 그 기억들은 불편했고 양심을 찔렀다. 그는 무엇을 하려는지도, 사실 무엇을 바라는지도 몰랐지만, 무언가 은밀하고 금지된 것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들어가지도 않고 어둠 속에서 그의 집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구두장이에게 잘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만약 그가 여기 서 있는 자기를 보거나 지금 문을 열고 나온다면, 아마 꾸짖지도 않고 비웃을 텐데, 그게 무엇보다 무서웠다.

그는 집 뒤로 살금살금 돌아가서, 이제 정원 울타리에서 불 켜진 거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장인은 보이지 않았다. 부인은 무엇을 꿰매거나 뜨는 것 같았고, 큰아들은 아직 깨어 식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엠마는 이리저리 오가며 정리하는 모양이라, 그녀는 잠깐씩만 보였다. 어찌나 조용한지 골목의 가장 먼 발소리와 정원 너머 강물이 나직이 흐르는 소리까지 또렷이 들렸다. 어둠과 밤의 서늘함이 빠르게 짙어졌다.

거실 창들 곁에 좀 더 작은 복도 창 하나가 어둡게 있었다. 한참 뒤 이 작은 창에 흐릿한 모습 하나가 나타나 몸을 내밀고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한스는 몸매를 보고 그것이 엠마라는 것을 알았고, 두려운 기대로 심장이 멎었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오래,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녀가 자기를 보고 알아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팔다리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녀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확신 없는 머뭇거림 속에서, 그녀가 자기를 알아보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며.

그리고 흐릿한 모습이 다시 창에서 사라지더니, 곧이어 작은 정원 문 걸쇠가 딸깍하고 엠마가 집에서 나왔다. 한스는 처음 놀란 김에 달아나려 했지만, 의지를 잃은 채 울타리에 기대 서서 아가씨가 어두운 정원을 지나 천천히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 걸음 디딜 때마다 그를 달아나라고 떠미는 것이 있었고, 그보다 강한 무언가가 그를 붙잡았다.

이제 엠마가 바로 그의 앞에, 반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섰다. 사이에는 낮은 울타리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유심히,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가 나직이 물었다.

"뭘 원해?"

"아무것도." 그가 말했다. 그녀가 자기에게 말을 놓았다는 것이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처럼 그를 스쳤다.

그녀가 울타리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수줍고 다정하게 그 손을 잡아 살짝 쥐었다. 그녀가 손을 빼지 않는 것을 알아채자 용기를 내어 따뜻한 아가씨의 손을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래도 손이 여전히 순순히 맡겨져 있자, 그는 그것을 자기 뺨에 댔다. 파고드는 쾌감과 이상한 온기와 행복한 노곤함의 물결이 그의 존재를 휩쓸었다. 둘레의 공기가 미지근하고 푄 바람처럼 축축하게 느껴졌고, 이제 골목도 정원도 보이지 않고 가까운 밝은 얼굴과 검은 머리칼의 엉킴만 보였다.

그리고 아가씨가 아주 나직이 물었을 때, 그 목소리는 멀고 먼 밤에서 울려오는 것 같았다.

"나한테 입맞춤해 줄래?"

밝은 얼굴이 다가오고, 몸의 무게가 울타리 살을 조금 바깥쪽으로 휘게 했고, 헐렁하고 은은한 향기가 나는 머리칼이 한스의 이마를 스쳤다. 하얗고 넓은 눈꺼풀과 검은 속눈썹에 덮인 감은 눈이 그의 눈 바로 앞에 있었다. 수줍은 입술로 아가씨의 입에 닿았을 때 세찬 전율이 그의 몸을 훑었다. 그는 곧바로 떨며 물러섰지만, 그녀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고 얼굴을 그의 얼굴에 누르며 그의 입술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입이 불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입이 달라붙어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는 것이, 마치 그의 목숨을 들이켜려는 것 같았다. 깊은 무력감이 그를 덮쳤다. 낯선 입술이 그를 놓아주기도 전에 떨리는 쾌감은 죽을 것 같은 피로와 괴로움으로 바뀌었고, 엠마가 그를 놓아주자 그는 비틀거리며 경련하듯 매달리는 손가락으로 울타리를 붙잡았다.

"있잖아, 내일 저녁에 또 와." 엠마가 말하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나와 있던 건 오 분도 안 되었는데, 한스에게는 긴 세월이 흐른 것 같았다. 그는 텅 빈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히 판자를 붙잡고 있었고, 한 걸음 내딛기에도 너무 지쳤다고 느꼈다. 그는 꿈꾸듯 자기 피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피가 머릿속에서 망치질하며 고르지 않은 아픈 물결로 심장에서 나갔다 돌아왔고, 그의 숨을 막았다.

* * *

그때 방 안에서 문이 열리고 장인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 아직 작업장에 있었던 모양이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덮쳐 달아나게 했다. 그는 천천히, 마지못해, 살짝 취한 사람처럼 불안하게 걸었고, 걸음마다 무릎이 꺾일 것 같았다. 졸린 박공과 흐릿한 붉은 창 눈을 단 어두운 골목들이 창백한 무대 배경처럼 그의 곁을 흘러 지나갔고, 다리와 강과 마당과 정원도 그렇게 흘러갔다. 무두장이 골목 우물이 이상하게 크고 울리게 찰랑거렸다. 꿈에 사로잡힌 채 한스는 문을 열고, 칠흑같이 어두운 통로를 지나, 계단을 올라, 문 하나를 열고 닫고 또 하나를 열고 닫고, 거기 있는 탁자에 걸터앉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집의 자기 방에 있다는 느낌이 들며 정신이 들었다. 다시 한참이 걸려서야 옷을 벗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멍하니 옷을 벗고는, 옷을 벗은 채 창가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가을밤 추위가 온몸에 스며들어 베개 속으로 쫓겨 들어갔다.

그는 금방 잠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눕자마자, 몸이 조금 따뜻해지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고 피가 고르지 않게, 거세게 들끓었다. 눈을 감자마자 아가씨의 입이 아직 그의 입에 매달려 영혼을 빨아내고 괴로운 열기로 그를 채우는 것 같았다.

그는 늦게야 잠들었고, 쫓기듯 달아나며 이 꿈에서 저 꿈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겁이 날 만큼 깊은 어둠 속에 서 있었는데, 더듬다가 엠마의 팔을 붙잡았고, 그녀가 그를 껴안자 둘은 함께 천천히 떨어지며 따뜻하고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갑자기 구두장이가 거기 서서 왜 더는 자기를 찾아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스는 웃음이 났는데, 알고 보니 그건 플라이크가 아니라 헤르만 하일너였다. 하일너는 마울브론 기도실 창가에 그와 나란히 앉아 농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곧 날아가 버리고, 그는 과즙 압착기 앞에 서 있었다. 엠마가 지레에 버티고 그는 온 힘을 다해 거기 맞서 싸웠다. 그녀가 몸을 기울여 그의 입을 찾았고, 조용해지고 캄캄해지더니, 이제 그는 다시 따뜻하고 검은 깊은 곳으로 가라앉으며 현기증과 죽을 것 같은 두려움 속에 사라져 갔다. 동시에 원장이 연설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이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고 그는 아침 늦게까지 잤다. 밝은 금빛 날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정원을 오락가락하며 깨어나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끈적한 졸린 안개에 싸여 있었다. 정원의 마지막 꽃인 보라색 과꽃이 아직 팔월이기라도 한 듯 햇볕 속에서 아름답게 웃으며 서 있는 것이 보였고, 이른 봄이기라도 한 듯 따뜻하고 다정한 빛이 마른 잔가지와 가지와 헐벗은 덩굴 둘레로 부드럽고 달콤하게 넘쳐흐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보기만 했을 뿐 겪지는 않았고, 그것은 그와 상관이 없었다. 갑자기 맑고 강한 기억 하나가 그를 사로잡았다. 이 정원에서 아직 그의 토끼들이 뛰어다니고 그의 물레방아와 작은 망치 장치가 돌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세 해 전 구월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스당 기념일 전날 저녁이었다. 아우구스트가 담쟁이를 가지고 그에게 왔고, 둘은 깃대를 반짝반짝 닦고 금빛 깃대 끝에 담쟁이를 매달며 내일 이야기를 하고 내일을 기다렸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둘은 축제의 예감과 커다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깃발은 햇볕 속에서 빛났고, 안나는 자두 케이크를 구웠고, 밤에는 높은 바위 위에서 스당 기념 불을 피우기로 되어 있었다.

한스는 왜 하필 오늘 그 저녁을 떠올려야 하는지, 이 기억이 왜 이토록 아름답고 힘센지, 그리고 왜 그것이 그를 이토록 비참하고 슬프게 하는지 몰랐다. 이 기억의 옷을 입고 그의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이 다시 한번 즐겁게 웃으며 그의 앞에 일어서서 작별을 고하고, 지나가 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커다란 행복의 가시를 남기려 한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는 다만 이 기억이 엠마와 어젯밤에 대한 생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그때의 행복과는 함께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안에서 일어섰다는 것을 느꼈다. 금빛 깃대 끝이 반짝이는 것이 다시 보이고, 친구 아우구스트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갓 구운 케이크 냄새가 맡아지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어찌나 밝고 행복하며 그에게서 멀어지고 낯설어졌는지, 그는 커다란 붉은 전나무의 거친 줄기에 기대어 희망 없는 흐느낌을 터뜨렸다. 그 흐느낌이 잠시나마 위로가 되고 구원이 되었다.

점심때 그는 아우구스트에게 달려갔다. 아우구스트는 이제 수석 견습생이 되었고, 몸이 엄청나게 불고 자라 있었다. 한스는 기계공이 되는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게 말이지." 아우구스트가 세상 물정 아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너는 약골이잖아. 첫해에는 대장일 할 때 늘 그 망할 메질을 해야 하는데, 큰 쇠망치는 수프 숟가락이 아니거든. 쇳덩이도 날라야 하고 저녁엔 청소도 해야 하고, 줄질하는 데도 힘이 들어. 처음에 뭘 좀 할 줄 알게 될 때까지는 헌 줄밖에 안 주는데, 그건 하나도 안 갈리고 원숭이 엉덩이처럼 반들반들해."

한스는 금세 풀이 죽었다.

"그럼 차라리 그만두는 게 좋을까?"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이고, 내가 언제 그랬냐! 그렇게 맥 빠지지 마! 처음엔 춤판이 아니라는 것뿐이야. 그 밖에는, 그래, 기계공은 멋진 일이야, 알지? 머리도 좋아야 하고. 안 그러면 그냥 대장장이나 되는 거지. 이것 좀 봐!"

그는 반짝이는 강철로 정교하게 만든 작은 기계 부품 몇 개를 가져와 한스에게 보여 주었다.

"자, 여기선 0.5밀리미터도 어긋나면 안 돼. 나사 빼고는 다 손으로 만든 거야. 눈을 바짝 떠야 해! 이건 이제 광을 내고 담금질하면 끝이야."

"그래, 멋지다. 내가 알 수만 있으면……."

아우구스트가 웃었다.

"겁나? 그래, 견습생은 들볶이는 법이야.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나도 있잖아. 내가 도와줄게. 네가 다음 금요일에 시작하면 나는 딱 견습 이 년 차를 마치고 토요일에 첫 주급을 받아. 일요일에는 축하를 할 거야. 맥주에, 케이크에, 다들 모여. 너도 와. 그럼 우리 사는 게 어떤지 보게 될 거야. 그래, 놀랄걸!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예전에도 그렇게 좋은 친구였잖아."

점심을 먹으며 한스는 아버지에게 기계공이 되고 싶다고, 여드레 뒤에 시작해도 되겠느냐고 말했다.

"그래, 좋다." 아빠가 말했고, 오후에 한스를 데리고 슐러네 작업장에 가서 등록했다.

그런데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자 한스는 그 모든 것을 벌써 거의 잊어버렸고, 저녁에 엠마가 자기를 기다린다는 것만 생각했다. 벌써부터 숨이 막혔다. 시간은 너무 길었다가 너무 짧았다가 했고, 그는 뱃사공이 급류를 향해 가듯 그 만남을 향해 떠밀려 갔다. 그날 저녁은 먹는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우유 한 잔을 겨우 넘겼다. 그러고는 나갔다.

모든 게 어제와 같았다. 어둡고 졸린 골목, 붉은 창,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천천히 거니는 연인들.

구두장이네 정원 울타리 앞에서 큰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그는 작은 소리에도 흠칫 놀랐고, 어둠 속에 서서 귀 기울이는 자기가 도둑처럼 느껴졌다. 일 분도 기다리지 않았는데 엠마가 그의 앞에 서서,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쓸어 주고 정원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들어섰고, 그녀가 그를 이끌고 덤불로 둘러싸인 길을 조용히 지나 뒷문으로 어두운 집 통로로 들어갔다.

거기서 둘은 지하실 계단 맨 위 단에 나란히 앉았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어둠 속에서 서로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아가씨는 기분이 좋아서 소곤소곤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녀는 이미 여러 번 입맞춤을 맛보았고 사랑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았다. 수줍고 다정한 소년이 그녀에게는 딱 좋았다. 그녀는 그의 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이마와 눈과 뺨에 입 맞추었고, 입 차례가 와서 그녀가 다시 그렇게 길게, 빨아들이듯 입 맞추자 소년은 어지러워져 힘없이, 의지를 잃은 채 그녀에게 기대 늘어졌다. 그녀는 나직이 웃으며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계속 떠들었고, 그는 들었지만 무엇을 듣는지 몰랐다. 그녀는 손으로 그의 팔과 머리와 목과 손을 쓰다듬었고, 뺨을 그의 뺨에,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는 말없이 모든 것을 내버려 두었다. 달콤한 공포와 깊고 행복한 불안으로 가득 차서, 이따금 열에 들뜬 사람처럼 짧고 가볍게 움찔했다.

"너 무슨 애인이 이래!" 그녀가 웃었다. "아무것도 할 엄두를 못 내잖아."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아 자기 목덜미와 머리칼 사이로 쓸어 가다가 자기 가슴에 얹고 몸을 거기 기댔다. 그는 부드러운 모양과 달콤하고 낯선 출렁임을 느끼며 눈을 감았고, 끝없는 깊이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안 돼! 그만!" 그녀가 다시 입 맞추려 하자 그가 막으며 말했다.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가까이 끌어당겨 그의 옆구리를 자기 옆구리에 붙이고 팔로 감쌌다. 그녀의 몸을 느끼며 그는 정신을 완전히 잃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좋아해?" 그녀가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개만 끄덕일 수 있었고, 한참 동안 계속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그의 손을 잡아 장난스럽게 자기 코르셋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낯선 생명의 맥박과 숨결을 뜨겁고 가깝게 느끼자 그의 심장이 멎었고, 숨이 어찌나 무거운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손을 빼며 신음했다. "이제 집에 가야 해."

일어서려다 그는 비틀거렸고, 하마터면 지하실 계단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왜 그래?" 엠마가 놀라서 물었다.

"모르겠어. 너무 지쳤어."

정원 울타리로 가는 길에 그녀가 그를 부축하며 몸을 기댄 것도 그는 느끼지 못했고, 그녀가 잘 자라고 말하고 그의 뒤로 작은 문을 닫은 것도 듣지 못했다. 그는 어떻게인지도 모르게 골목들을 지나 집으로 왔다. 큰 폭풍이 그를 휩쓸어 가거나 거센 물결이 그를 흔들며 실어 가는 것 같았다.

양옆으로 창백한 집들이 보였고, 그 위 높이 산등성이와 전나무 끝과 밤의 어둠과 크고 고요한 별들이 보였다. 바람이 부는 것이 느껴졌고, 강물이 다리 기둥에 부딪혀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으며, 물속에 정원과 창백한 집과 밤의 어둠과 가로등과 별이 비친 것이 보였다.

다리 위에서 그는 앉아야 했다. 너무 지쳐서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난간에 앉아 기둥에 비벼 대고 보에서 부서지고 방앗간 창살에서 오르간처럼 울리는 물소리에 귀 기울였다. 손이 차가웠다. 가슴과 목에서 피가 막혔다가 곤두박질치듯 일하며 눈앞을 캄캄하게 했다가, 갑작스러운 물결로 다시 심장으로 흘러들며 머리를 어지럽게 남겨 두었다.

그는 집에 와서 자기 방을 찾아 누웠고, 곧바로 잠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거대한 공간을 지나 깊은 데서 더 깊은 데로 떨어졌다. 한밤중에 그는 시달리고 지쳐서 깨어났고, 아침까지 잠과 깸 사이에 누워 있었다. 타는 듯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서, 다스릴 수 없는 힘들에 이리저리 내던져지다가, 이른 새벽 그의 모든 괴로움과 답답함이 긴 울음으로 터져 나왔고, 그는 눈물에 젖은 베개 위에서 다시 한번 잠들었다.

7장

기벤라트 씨는 위엄 있게, 요란하게 과즙 압착기를 다루었고 한스는 거들었다. 구두장이네 아이들 가운데 둘이 초대에 응해 와서 과일을 만지작거리며 맛보기 잔 하나를 둘이 함께 쓰고, 엄청나게 큰 검은 빵 조각을 주먹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엠마는 함께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통장이와 함께 반 시간쯤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한스는 그녀에 대해 물어볼 용기를 냈다.

"엠마는 어디 있니? 오기 싫대?"

꼬마들이 입에 든 것을 다 삼키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갔어." 아이들이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고, 어디로?"

"집에."

"떠났어? 기차 타고?"

아이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오늘 아침에."

꼬마들은 다시 사과로 손을 뻗었다. 한스는 압착기를 이리저리 누르며 과즙 통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깨닫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왔고, 다들 일하고 웃었고, 아이들은 고맙다고 하며 뛰어갔고, 저녁이 되어 다들 집으로 갔다.

저녁을 먹고 한스는 자기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열 시가 되고 열한 시가 되었지만 그는 불을 켜지 않았다. 그러고는 깊고 오래 잤다.

여느 때보다 늦게 깨어났을 때 그는 무언가 불행하고 잃어버렸다는 흐릿한 느낌만 있다가, 엠마가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떠났다. 인사도 작별도 없이. 그가 마지막 저녁 그녀 곁에 있었을 때 그녀는 틀림없이 이미 언제 떠날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웃음과 입맞춤과 자기를 내려다보던 태도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를 조금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일에 대한 분한 아픔과, 들뜨고 채워지지 않은 사랑의 힘이 주는 불안이 한데 흘러 흐린 괴로움이 되었고, 그것이 그를 집에서 정원으로, 거리로, 숲으로, 다시 집으로 몰아댔다.

그렇게 그는, 어쩌면 너무 일찍, 사랑의 비밀 가운데 제 몫을 겪었고, 그것은 그에게 달콤함은 조금, 쓰라림은 많이 담고 있었다. 열매 없는 한탄과 그리운 기억과 위안 없는 생각으로 가득한 낮들, 가슴 두근거림과 답답함 때문에 잠들지 못하거나 짓누르는 끔찍한 꿈속으로 떨어지는 밤들. 꿈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핏속의 들끓음은 괴물 같은, 겁나게 하는 전설의 형상이 되었다. 죽음으로 휘감는 팔, 눈이 뜨거운 환상, 어지러운 낭떠러지, 이글이글 타는 거대한 눈. 깨어나면 그는 혼자였고, 서늘한 가을밤의 외로움에 감싸인 채 자기 아가씨를 그리워하며 신음하면서 눈물 젖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기계 작업장에 들어가기로 한 금요일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그에게 파란 아마포 작업복과 반은 모직인 파란 모자를 사 주었다. 그는 그것을 입어 보았고, 철공 제복을 입은 자기가 달라 보이고 꽤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학교 건물이나 교장 집이나 수학 선생 집이나 플라이크네 작업장이나 목사관 앞을 지날 때면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 숱한 고생과 부지런함과 땀, 바쳐 버린 그 숱한 작은 기쁨, 그 숱한 자부심과 야심과 희망찬 꿈, 그 모든 게 헛것이었다. 모두 다 그가 이제 어느 동무보다 늦게, 모두에게 비웃음을 받으며 가장 어린 견습생으로 작업장에 들어가게 되려고 있었던 것이다!

하일너라면 뭐라고 할까?

차츰차츰에야 그는 파란 철공 작업복과 화해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처음 입게 될 금요일을 조금 기다리게 되었다. 적어도 다시 무언가를 겪을 수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어두운 구름에서 번쩍이는 짧은 번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아가씨가 떠난 것을 잊지 않았고, 그의 피는 그 며칠의 자극을 더욱 잊지도 이겨 내지도 못했다. 피는 더 많은 것을 향해 몰아치고 외쳤다. 깨어난 그리움을 풀어 줄 것을, 아니면 혼자 풀기에는 너무 어려운 수수께끼들을 지나도록 이끌어 줄 길잡이를. 그렇게 시간은 둔하게, 괴롭도록 느리게 흘러갔다.

가을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햇살로 가득했고, 은빛 이른 아침과 빛깔 고운 웃음 띤 한낮과 맑은 저녁이 있었다. 먼 산들은 깊은 벨벳 같은 파란빛을 띠었고, 밤나무들은 금빛 노랗게 빛났으며, 담과 울타리 너머로 담쟁이 잎이 진홍빛으로 늘어졌다.

한스는 쉴 새 없이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있었다. 낮에는 도시와 들판을 쏘다니며 사람들을 피했다. 사람들이 자기의 사랑의 고통을 알아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녁이면 골목으로 나가 하녀마다 바라보았고, 연인마다 지독히 꺼림칙한 양심으로 몰래 뒤따랐다. 엠마와 함께 삶의 탐나는 모든 것과 모든 마법이 가까이 있었다가 심술궂게 다시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녀 곁에서 느꼈던 괴로움과 답답함은 더는 떠올리지 않았다. 지금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다시는 수줍어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모든 비밀을 빼앗아 이제 코앞에서 문이 쾅 닫힌 마법에 걸린 사랑의 정원 속으로 끝까지 들어갈 것 같았다. 그의 상상 전체가 이 후덥지근하고 위험한 덤불에 얽혀 그 안을 절망하며 헤맸고, 좁은 마법의 원 밖에 아름답고 너른 공간이 밝고 다정하게 놓여 있다는 것은 고집스러운 자기 학대 속에 알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처음에는 불안하게 기다리던 금요일이 오자 기뻤다. 아침 일찍 그는 새 파란 작업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조금 머뭇거리며 무두장이 골목을 내려가 슐러네 집으로 갔다. 아는 사람 몇이 호기심에 차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하나는 묻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야, 너 철공이 됐냐?"

작업장에서는 벌써 신나게 일하고 있었다. 장인은 마침 대장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벌겋게 달군 쇳덩이를 모루에 올려놓았고, 직공 하나가 무거운 큰 쇠망치를 휘둘렀으며, 장인은 모양을 잡는 섬세한 타격을 하고 집게를 다루면서, 그 사이사이 손에 맞는 단조 망치로 모루를 두드려 박자를 맞췄다. 그 소리가 활짝 열린 문으로 맑고 밝게 아침 속에 울려 퍼졌다.

기름과 쇳가루로 시커메진 긴 작업대에는 나이 많은 직공이 서 있었고, 그 곁에 아우구스트가 서서 저마다 바이스 앞에서 일하고 있었다. 천장에서는 선반과 숫돌과 풀무와 드릴을 돌리는 벨트들이 빠르게 윙윙거렸다. 수력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트는 들어오는 동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장인이 짬이 날 때까지 문가에서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한스는 화덕과 멈춰 있는 선반과 쌩쌩 도는 벨트와 헛도는 바퀴를 수줍게 바라보았다. 장인은 하던 것을 다 두드리고 나서 다가와 크고 단단하고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모자는 저기 걸어라." 그가 벽의 빈 못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와라. 여기가 네 자리고 네 바이스다."

그러고는 그를 맨 뒤쪽 바이스로 데려가, 무엇보다 먼저 바이스를 어떻게 다루는지, 작업대와 연장을 어떻게 정돈해 두어야 하는지 보여 주었다.

"네 아버지가 네가 헤라클레스는 아니라고 하더라. 보니 그렇구나. 뭐, 우선은 좀 튼튼해질 때까지 대장일에서는 빠져 있어도 된다."

그는 작업대 밑에 손을 넣어 주철로 된 작은 톱니바퀴 하나를 꺼냈다.

"자, 이걸로 시작해라. 이 바퀴는 주물 공장에서 막 나온 그대로라 여기저기 작은 혹과 거스러미가 있다. 그걸 긁어내야 해. 안 그러면 나중에 섬세한 연장들이 거기 걸려서 망가진다."

그는 바퀴를 바이스에 물리고 헌 줄을 집어 들어 어떻게 하는지 보여 주었다.

"자, 이제 계속해라. 다른 줄은 절대 쓰지 말고! 점심때까지는 그걸로 할 일이 넉넉할 거다. 그때 나한테 보여 줘라. 그리고 일할 때는 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마라. 견습생은 생각 같은 거 안 해도 된다."

한스는 줄질을 시작했다.

"멈춰!" 장인이 외쳤다. "그렇게 말고. 왼손은 줄 위에 이렇게 얹는 거다. 아니면 너 왼손잡이냐?"

"아니요."

"그럼 됐다. 하다 보면 될 거다."

그는 문가 첫 바이스인 자기 자리로 가 버렸고, 한스는 혼자 어떻게든 해 나가야 했다.

처음 몇 번 긁을 때 그는 쇠가 이렇게 무르고 쉽게 깎이는 것이 의아했다. 그러다 그것은 맨 위의 바스러지는 주물 껍질일 뿐이라 헐겁게 벗겨지는 것이고, 그 밑에야 그가 매끈하게 해야 할 오돌토돌한 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일했다. 소년 시절의 장난스러운 만들기 이후로, 자기 손 아래서 눈에 보이고 쓸모 있는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맛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천천히!" 장인이 이쪽에 대고 외쳤다. "줄질할 때는 박자를 맞춰야 한다. 하나 둘, 하나 둘. 그리고 꾹 눌러라. 안 그러면 줄이 망가진다."

그때 가장 나이 많은 직공이 선반에서 할 일이 생겼고, 한스는 그쪽을 곁눈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철 축 하나가 척에 물리고 벨트가 옮겨 걸리자, 축이 반짝이며 빠르게 돌며 윙윙거렸고, 그동안 직공이 거기서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반짝이는 쇳밥을 깎아 냈다.

그리고 사방에 연장이 널려 있었다. 쇠와 강철과 놋쇠 조각들, 반쯤 된 작업물, 반짝이는 작은 바퀴, 끌과 드릴, 갖가지 모양의 선반 날과 송곳. 화덕 옆에는 망치와 정형 망치, 모루 받침, 집게와 인두가 걸려 있었고, 벽을 따라 줄과 밀링 날이 줄줄이 걸려 있었으며, 선반에는 기름 걸레, 작은 빗자루, 사포 줄, 쇠톱이 놓여 있었고, 기름통, 산 병, 못 상자와 나사 상자가 여기저기 서 있었다. 숫돌은 쉴 새 없이 쓰였다.

한스는 자기 손이 벌써 새카매진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작업복도 곧 좀 더 입은 티가 나기를 바랐다. 지금 그의 작업복은 다른 사람들의 시커멓고 기운 작업복 곁에서 우스울 만큼 새것이고 파랬다.

오전이 흘러가면서 바깥에서도 작업장에 생기가 들어왔다. 이웃 기계 편물 공장 일꾼들이 작은 기계 부품을 갈거나 고치러 왔다. 농부 하나가 고치러 맡긴 빨래 짜는 기계를 물으러 왔다가, 아직 다 안 됐다는 말을 듣고 험하게 욕을 했다. 그다음에는 멋쟁이 공장주가 와서 장인과 옆방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 곁에서, 그 사이사이 사람과 바퀴와 벨트가 한결같이 일을 이어 갔고, 그렇게 한스는 생전 처음으로 노동의 찬가를 듣고 이해했다. 그 찬가는 적어도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무언가 가슴을 울리고 기분 좋게 취하게 하는 것이 있었고, 그는 자기의 작은 몸과 작은 삶이 커다란 리듬 속에 끼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홉 시에 십오 분 쉬는 시간이 있었고, 모두 빵 한 조각과 과즙 한 잔을 받았다. 그제야 아우구스트가 새 견습생에게 인사했다. 그는 격려하는 말을 하고, 다음 일요일에 동료들과 첫 주급을 신나게 쓸 거라며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한스가 자기가 줄질하는 바퀴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이 탑시계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아우구스트는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돌아가고 일하는지 보여 주려 했지만, 그때 수석 직공이 다시 줄질을 시작해서 모두 서둘러 제자리로 갔다.

열 시와 열한 시 사이가 되자 한스는 지치기 시작했다. 무릎과 오른팔이 조금 아팠다. 그는 이 발 저 발로 바꿔 디디며 몰래 팔다리를 펴 보았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잠깐 줄을 놓고 바이스에 기댔다. 아무도 그를 보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 쉬며 머리 위에서 벨트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가벼운 몽롱함이 찾아와 그는 일 분쯤 눈을 감았다. 하필 그때 장인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아니, 왜 그러냐? 벌써 지쳤냐?"

"네, 조금요." 한스가 털어놓았다.

직공들이 웃었다.

"그건 곧 괜찮아진다." 장인이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땜질하는 거 한번 봐라. 이리 와!"

한스는 호기심에 차서 땜질하는 것을 구경했다. 먼저 인두를 달구고, 땜할 자리에 땜 약을 바른 다음, 뜨거운 인두에서 하얀 금속이 똑똑 떨어지며 살짝 지글거렸다.

"걸레를 가져다 그걸 잘 닦아라. 땜 약은 부식시키니까 어떤 금속에도 남겨 두면 안 된다."

그러고 한스는 다시 자기 바이스 앞에 서서 줄로 작은 바퀴를 긁었다. 팔이 아팠고, 줄을 눌러야 하는 왼손은 빨개져서 쓰리기 시작했다.

점심때 수석 직공이 줄을 내려놓고 손을 씻으러 가자, 한스는 자기 작업물을 장인에게 가져갔다. 장인은 대충 훑어보았다.

"됐다, 그대로 둬도 되겠다. 네 자리 밑 상자에 똑같은 바퀴가 하나 더 있다. 오후에는 그걸 해라."

이제 한스도 손을 씻고 나갔다. 점심 먹을 시간이 한 시간 있었다.

예전 학교 동무였던 상점 견습생 둘이 길에서 그의 뒤를 따라오며 그를 비웃었다.

"주 시험 철공이다!" 하나가 외쳤다.

그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는 자기가 만족하는지 아닌지 잘 몰랐다. 작업장은 꽤 마음에 들었다. 다만 너무 지쳤다. 지독히 지쳤다.

그리고 현관 밑에서, 앉아서 밥 먹을 생각에 벌써 기뻐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엠마가 떠올랐다. 오전 내내 그녀를 잊고 있었다. 이제 어제와 그제의 아픔이 갑자기 다시 목덜미에 올라앉았다. 그 어느 때 못지않게 무겁게. 그는 조용히 자기 작은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지고 깊은 괴로움에 신음했다. 울고 싶었지만 눈은 말라 있었다. 그는 다시 희망 없이, 목표가 무엇인지 어렴풋한 채 잔인한 병처럼 자기를 갉아먹는 그 태우는 그리움에 내맡겨진 자기를 보았다. 머리가 휘몰아치며 아팠고, 목이 막힌 흐느낌으로 아팠다.

점심은 고역이었다. 아버지에게 대답하고 이야기하고 갖가지 자잘한 농담을 받아 줘야 했다. 아빠는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다 먹자마자 그는 정원으로 뛰어나가 햇볕 속에서 반쯤 꿈꾸며 십오 분을 보냈다. 그러고는 다시 작업장에 갈 시간이었다.

오전에 벌써 손에 빨간 굳은살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제 그것이 정말로 아프기 시작했고, 저녁에는 어찌나 부었던지 무엇을 잡든 아팠다. 그리고 일을 마치기 전에 그는 아우구스트의 지시를 받으며 작업장 전체를 청소해야 했다.

토요일은 더 나빴다. 손이 화끈거렸고, 굳은살은 물집으로 커졌다. 장인은 기분이 나빠서 아주 작은 일에도 욕을 했다. 아우구스트는 굳은살은 며칠만 가고 그다음엔 손이 단단해져서 아무 느낌도 없다고 위로했지만, 한스는 죽을 것처럼 불행했고 온종일 시계를 곁눈질하며 가망 없이 작은 바퀴를 긁었다.

* * *

저녁에 청소하면서 아우구스트가 그에게 소곤소곤 알렸다. 내일 동무 몇과 함께 비엘라흐로 나가는데, 신나고 즐거울 거라고, 한스는 절대 빠지면 안 된다고, 두 시에 데리러 가겠다고. 한스는 그러겠다고 했다. 할 수만 있으면 일요일 내내 집에 누워 있고 싶을 만큼 비참하고 지쳤는데도. 집에서 늙은 안나가 상처 난 손에 바를 연고를 주었고, 그는 여덟 시에 벌써 잠자리에 들어 오전 늦게까지 잤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점심을 먹으며 그는 아우구스트 이야기를 꺼내고 오늘 그와 함께 들판으로 나가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50페니히를 주며 저녁 먹을 때까지는 돌아와야 한다고만 했다.

화창한 햇볕 속에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걷노라니, 한스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다시 일요일이 즐거웠다. 시커먼 손과 지친 팔다리로 일한 날들을 뒤에 두고 나니, 거리는 더 엄숙하고, 해는 더 밝고, 모든 것이 더 축제답고 아름다웠다. 이제 그는 집 앞 볕 드는 벤치에 앉아 왕처럼 흐뭇해 보이는 푸줏간 주인과 무두장이와 빵장수와 대장장이를 이해했고, 그들을 더는 비참한 속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모자를 조금 비뚜름히 쓰고 흰 셔츠 깃에 솔질한 나들이옷을 입고 줄지어 산책하거나 술집에 가는 일꾼과 직공과 견습생들을 눈으로 좇았다. 대개,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수공업자들은 끼리끼리 어울렸다. 목수는 목수끼리, 미장이는 미장이끼리 뭉쳐서 제 신분의 명예를 지켰고, 그 가운데 철공이 가장 지체 높은 동업 조합이었으며, 그 맨 위가 기계공이었다. 이 모든 것에는 무언가 정다운 데가 있었다. 더러 조금 순진하고 우스운 데가 있다 해도, 그 뒤에는 수공업의 아름다움과 자부심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언가 기쁘고 야무진 것을 보여 주고, 가장 초라한 재단사 견습생도 거기서 작은 빛 한 줄기를 얻는다. 공장 일꾼도 상인도 갖지 못한 빛이다.

슐러네 집 앞에 젊은 기계공들이 차분하고 자랑스럽게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저희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믿음직한 공동체를 이루고 일요일에 놀 때조차 낯선 사람이 필요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한스도 그것을 느꼈고, 그들 무리에 속하게 된 것이 기뻤다. 하지만 계획된 일요일 놀이가 조금 두려웠다. 기계공들이 삶을 즐기는 방식이 묵직하고 넉넉하다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춤까지 출지 몰랐다. 춤은 할 줄 몰랐지만, 그 밖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내답게 굴고, 필요하면 숙취 조금쯤은 무릅쓸 생각이었다. 그는 맥주를 많이 마셔 본 적이 없었고, 담배는 애써서 겨우 여송연 하나를 조심조심 끝까지 피워도 괴로움과 망신을 겪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을 뿐이었다.

아우구스트는 축제 같은 기쁨으로 그를 맞았다. 그는 나이 많은 직공은 같이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대신 다른 작업장의 동료 하나가 오니 적어도 넷이고, 그거면 마을 하나를 뒤집어엎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오늘 맥주는 저마다 원하는 만큼 마셔도 되는데, 자기가 모두를 위해 낸다고 했다. 그는 한스에게 여송연을 하나 권했고, 넷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해 느긋하고 자랑스럽게 도시를 거닐다가, 아래쪽 보리수 광장에서야 비엘라흐에 제때 닿으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강물이 파랗고 금빛이고 하얗게 반짝였다. 잎이 거의 다 떨어진 가로수 길의 단풍나무와 아카시아 사이로 부드러운 시월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었고, 높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밝게 파랬다. 고요하고 맑고 다정한 가을날 가운데 하루였다. 지난여름의 모든 아름다운 것이 아픔 없는 미소 어린 기억처럼 부드러운 공기를 채우는 날, 아이들이 계절을 잊고 꽃을 찾아야 한다고 여기는 날,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창가나 집 앞 벤치에서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날이었다. 한 해의 정다운 기억만이 아니라 지나온 평생의 기억이 맑은 파란 하늘 속으로 눈에 보이게 날아가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젊은이들은 기분이 좋아서, 저마다 재능과 성품에 따라 이 좋은 날을 기린다. 술을 바치거나 짐승을 바치거나, 노래나 춤으로, 술잔치나 거창한 싸움질로. 곳곳에서 갓 구운 과일 케이크가 나왔고, 햇사과즙이나 포도주가 지하실에서 발효하고 있었고, 바이올린이나 손풍금이 술집 앞과 보리수 광장에서 한 해의 마지막 좋은 날들을 기리며 춤과 노래와 사랑의 놀이로 불러 모았다.

젊은이들은 빠르게 걸어갔다. 한스는 태평한 척 여송연을 피우며,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에 스스로 놀랐다. 직공은 떠돌이 시절 이야기를 했고, 그가 허풍을 떨어도 아무도 거슬려하지 않았다. 그건 원래 그런 것이었다. 가장 겸손한 수공업 직공도 일자리를 잡고 증인이 없는 게 확실하면 자기의 떠돌이 시절을 거창하고 시원스럽게, 아니 전설처럼 이야기한다. 떠돌이 직공 생활의 놀라운 시정은 민중의 공동 재산이라, 저마다에게서 옛 전통의 모험을 새로운 아라베스크로 새로 지어내게 하고, 떠돌이 동무라면 누구나 이야기를 시작하면 불멸의 오일렌슈피겔 한 조각과 불멸의 떠돌이 슈트라우빙거 한 조각을 지니게 된다.

"그러니까 프랑크푸르트에, 내가 그때 있던 데 말이야, 아이고, 거긴 사는 맛이 있었지! 내가 이 얘기 아직 안 했나? 돈 많은 장사꾼 하나가, 그 매끈한 원숭이 같은 놈이 우리 장인 딸하고 결혼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그 애가 그놈을 돌려보냈어. 내가 한 수 더 좋았던 거지. 넉 달 동안 내 애인이었어. 영감하고 싸우지만 않았으면 지금쯤 거기 눌러앉아 그 집 사위가 됐을 거야."

그러고 그는 이야기를 이었다. 그 망할 장인이, 그 비열한 인간 장사꾼이 그를 들볶으려 했고, 한번은 감히 그에게 손을 뻗었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단조 망치를 휘두르며 영감을 이렇게 쳐다만 봤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영감은 제 머리통이 아까웠는지 아주 조용히 가 버렸고, 나중에 서면으로 해고 통지를 했다고, 그 비겁한 얼간이가. 그리고 그는 오펜부르크의 큰 싸움 이야기를 했다. 거기서 철공 셋이, 자기도 끼어서, 공장 일꾼 일곱을 반쯤 죽여 놨다는 것이다. 오펜부르크에 가거든 키다리 쇼르시만 찾으면 된다고, 그 친구 아직 거기 있고 그때 같이 있었다고.

이 모든 이야기가 서늘하고 거친 말투로, 하지만 속으로는 대단한 열의와 흐뭇함을 품고 전해졌다. 모두가 깊은 즐거움으로 듣고, 나중에 다른 데서 다른 동무들에게 이 이야기를 자기도 한번 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철공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장인 딸을 애인으로 두었고, 한 번쯤 못된 장인에게 망치를 들고 덤볐고, 한 번쯤 공장 일꾼 일곱을 흠씬 두들겨 팼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어떤 때는 바덴이고 어떤 때는 헤센이나 스위스이며, 어떤 때는 망치 대신 줄이나 달군 쇠이고, 어떤 때는 공장 일꾼 대신 빵장수나 재단사지만, 언제나 그 옛이야기들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늘 기꺼이 듣는다. 오래되고 좋은 이야기이고 동업 조합의 명예를 높여 주니까. 그렇다고 떠돌이 직공들 가운데 겪는 데 천재이거나 지어내는 데 천재인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 둘은 같은 것이다.

특히 아우구스트는 넋을 잃고 즐거워했다. 그는 줄곧 웃으며 맞장구쳤고, 벌써 반은 직공이 된 기분으로 경멸 섞인 쾌락가의 얼굴을 하고 담배 연기를 금빛 공기 속으로 내뿜었다. 이야기꾼은 제 역할을 계속했다. 그는 자기가 함께 온 것을 너그럽게 내려와 준 것으로 보이게 하는 데 신경을 썼다. 직공인 그는 사실 일요일에 견습생들과 어울릴 처지가 아니었고, 꼬마의 푼돈을 함께 마셔 주는 걸 부끄러워해야 마땅했으니까.

신작로를 따라 강 아래쪽으로 한참 걸었다. 이제 천천히 오르며 크게 굽이져 산으로 올라가는 찻길과, 거리가 반밖에 안 되는 가파른 오솔길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다. 그들은 멀고 먼지 나는 찻길을 골랐다. 오솔길은 평일과 산책하는 신사들을 위한 것이다. 민중은, 특히 일요일에는, 아직 시정을 잃지 않은 신작로를 좋아한다.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는 건 농부나 도시의 자연 애호가가 하는 일이고, 그건 노동이거나 운동이지 민중의 즐거움이 아니다. 반면 신작로에서는 느긋하게 나아가며 이야기할 수 있고, 장화와 나들이옷을 아낄 수 있고, 수레와 말을 보고, 다른 한량들을 만나 앞지르고, 차려입은 아가씨들과 노래하는 젊은이 무리를 마주치고, 등 뒤로 날아오는 농담에 웃으며 되받아치고, 멈춰 서서 수다를 떨고, 혼자 몸이면 아가씨들 무리를 따라가며 웃을 수도 있고, 저녁이면 좋은 동무들과의 사사로운 의견 차이를 행동으로 드러내어 풀 수도 있다! 떠돌이 직공이 이 즐겁고 편하고 넉넉한 길을 오솔길과 바꿀 만큼 어리석은 법이 없듯이, 도시의 소시민도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찻길로 갔다. 찻길은 시간 많고 땀 흘리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크게 굽이지며 조용하고 다정하게 산으로 올라갔다. 직공은 웃옷을 벗어 지팡이에 걸어 어깨에 메고, 이야기 대신 이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더없이 대담하고 삶을 즐기는 투로. 그렇게 한 시간 뒤 비엘라흐에 닿을 때까지 불었다. 한스에게 놀리는 말이 몇 마디 날아왔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 그보다 아우구스트가 더 열심히 막아 주었다. 그리고 이제 비엘라흐 앞에 섰다.

* * *

마을은 빨간 기와지붕과 은회색 초가지붕을 이고 가을빛 과일나무 사이에 들어앉아 있었고, 뒤로 어두운 산림이 솟아 있었다.

젊은이들은 들어갈 술집을 두고 의견이 모이지 않았다. 〈안커〉는 맥주가 가장 좋았고, 〈슈반〉은 케이크가 가장 좋았고, 〈샤르페 에크〉에는 예쁜 주인 딸이 있었다. 마침내 아우구스트가 〈안커〉로 가자고 밀어붙이며, 몇 잔 마시는 동안 〈샤르페 에크〉가 어디 달아나지는 않을 테고 나중에도 찾을 수 있을 거라며 눈을 찡긋했다. 모두 그게 좋았다. 그래서 마을로 들어가 외양간들과 제라늄 화분을 놓은 낮은 농가 창문들을 지나 〈안커〉로 향했다. 〈안커〉의 금빛 간판이 둥글고 어린 밤나무 두 그루 너머 햇볕 속에서 번쩍이며 손짓했다. 꼭 안에 앉고 싶어 한 직공에게는 안타깝게도 술청은 꽉 차서 정원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안커〉는 손님들 생각으로는 고급 가게였다. 그러니까 옛 시골 술집이 아니라, 창이 너무 많은 요즘식 벽돌 상자였고, 벤치 대신 의자가 있고, 양철로 된 알록달록한 광고판이 잔뜩 붙어 있었다. 그리고 도시풍으로 차려입은 여급과, 셔츠 바람으로 있는 걸 한 번도 볼 수 없고 늘 유행하는 갈색 양복을 빼입은 주인이 있었다. 주인은 사실 파산했는데, 가장 큰 채권자인 큰 양조업자에게서 자기 집을 빌려 쓰게 된 뒤로 더 점잔을 빼게 되었다. 정원은 아카시아 한 그루와, 담쟁이가 아직 반쯤만 덮은 커다란 철망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건강을 위하여, 여러분!" 직공이 외치며 셋과 잔을 부딪쳤다. 그러고는 보여 주려고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아가씨, 예쁜 아가씨, 여기 아무것도 안 들어 있었는데. 당장 한 잔 더 가져와요!" 그가 여급에게 외치며 식탁 너머로 잔을 내밀었다.

맥주는 훌륭했다. 시원하고 너무 쓰지 않았다. 한스는 즐겁게 자기 잔을 맛보았다. 아우구스트는 감정가의 얼굴로 마시며 혀를 차고, 곁들여 고장 난 난로처럼 담배를 피워 댔는데, 한스는 그것을 속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신나는 일요일을 보내며, 그럴 자격이 있고 마땅히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삶과 즐기는 법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술집 식탁에 앉아 있는 건 정말 나쁘지 않았다. 함께 웃고 이따금 자기도 농담 한마디를 던져 보는 건 좋았다. 다 마신 잔을 힘주어 식탁에 탁 내려놓고 태평하게 "한 잔 더요, 아가씨!" 하고 외치는 건 좋고 사내다웠다. 다른 식탁의 아는 사람에게 잔을 들어 보이고, 식은 여송연 꽁초를 왼손에 늘어뜨리고, 다른 이들처럼 모자를 뒷덜미로 밀어 올리는 건 좋았다.

함께 온 다른 작업장의 직공도 이제 몸이 풀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울름의 어떤 철공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좋은 울름 맥주를 스무 잔이나 마실 수 있었고, 다 마시면 입을 닦고 말했다는 것이다. 자, 이제 좋은 포도주 한 병! 또 그는 칸슈타트의 화부 하나를 알았는데, 그 사람은 크낙 소시지 열두 개를 잇달아 먹을 수 있어서 그걸로 내기에 이겼다. 그런데 두 번째 그런 내기에서는 졌다. 작은 식당의 차림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먹겠다고 큰소리를 쳤고, 정말 거의 다 먹었는데, 차림표 끝에 치즈가 네 가지 나왔다. 세 번째 치즈에서 그는 접시를 밀어내며 말했다. 이제 한 입 더 먹느니 차라리 죽겠소!

이 이야기들도 큰 박수를 받았고, 이 세상 여기저기에 끈질긴 술꾼과 먹보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저마다 그런 영웅과 그 위업 이야기를 하나씩 알고 있었으니까. 누구에게는 「슈투트가르트의 어떤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는 「루트비히스부르크였던가, 어떤 기병」이었으며, 누구에게는 감자 열일곱 개였고, 누구에게는 샐러드를 곁들인 팬케이크 열한 장이었다. 다들 이 일화들을 사무적인 진지함으로 이야기했고, 세상에는 갖가지 훌륭한 재능과 별난 사람들이, 그 가운데에는 괴짜도 있다는 깨달음에 흐뭇하게 빠졌다. 이 흐뭇함과 사무적인 태도는 단골 술자리 속물들의 오래되고 존경스러운 유산이고, 젊은이들은 그것을 술 마시기와 정치 이야기와 담배와 결혼과 죽음만큼이나 잘 흉내 낸다.

세 번째 잔을 마실 때 한스가 케이크는 없느냐고 물었다. 여급을 불러 물으니, 아니요, 케이크는 없다고 했고, 다들 그 말에 끔찍하게 흥분했다. 아우구스트가 일어서서 케이크조차 없다면 다른 집으로 가면 된다고 했다. 다른 작업장 직공은 이 형편없는 가게를 욕했고, 프랑크푸르트 사나이만 남자고 했다. 그는 여급과 조금 사귀어서 벌써 여러 번 진하게 쓰다듬었던 것이다. 한스는 그것을 지켜보았고, 그 광경과 맥주가 그를 이상하게 들뜨게 했다. 그는 이제 떠나게 되어 기뻤다.

술값을 치르고 모두 거리로 나서자 한스는 세 잔의 술기운을 조금 느끼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반은 피로, 반은 무엇이든 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고, 눈앞에 얇은 베일 같은 것이 드리워서 그 너머로 모든 것이 꿈에서처럼 더 멀고 거의 현실 같지 않게 보였다. 그는 자꾸 웃음이 났고, 모자를 좀 더 대담하게 비뚜름히 썼으며, 자기가 기막히게 명랑한 녀석처럼 느껴졌다. 프랑크푸르트 사나이가 다시 군가 같은 투로 휘파람을 불었고, 한스는 거기 박자를 맞춰 걸어 보려 했다.

〈샤르페 에크〉는 꽤 조용했다. 농부 몇이 햇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생맥주는 없고 병맥주뿐이었는데, 곧바로 저마다 앞에 한 병씩 놓였다. 다른 작업장 직공이 통 크게 보이려고 모두가 함께 먹을 커다란 사과 케이크를 주문했다. 한스는 갑자기 엄청난 시장기를 느껴 잇달아 몇 조각을 먹었다. 오래된 갈색 술청의 튼튼하고 넓은 벽 벤치에 앉아 있으니 어스름하고 편안했다. 구식 찬장과 커다란 난로는 어둠 속에 묻혔고, 나무 살로 된 큰 새장에서는 박새 두 마리가 퍼덕였는데, 먹이로 빨간 마가목 열매가 달린 가지 하나가 살 사이로 꽂혀 있었다.

주인이 잠깐 식탁에 와서 손님들을 반겼다. 그러고는 이야기가 제대로 굴러가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한스는 독한 병맥주를 몇 모금 마시며, 한 병을 다 비울 수 있을까 궁금했다.

프랑크푸르트 사나이는 다시 라인 지방 포도밭 축제며 떠돌이 생활이며 여인숙 생활이며 지독하게 허풍을 떨었다. 다들 즐겁게 들었고, 한스도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자기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시시때때로 방과 식탁과 병과 잔과 동무들이 부드러운 갈색 구름으로 한데 녹아들었고, 힘껏 정신을 차려야 다시 모양을 되찾았다. 이따금 이야기와 웃음이 거세게 부풀면 그도 크게 따라 웃거나 무슨 말을 했는데, 그 말은 곧바로 잊어버렸다. 건배할 때면 그도 함께했고, 한 시간 뒤 그는 자기 병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너 잘 마시는구나." 아우구스트가 말했다. "한 병 더 할래?"

한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런 술자리를 훨씬 위험하게 상상했었다. 그리고 이제 프랑크푸르트 사나이가 노래를 시작하고 모두가 따라 부르자 그도 목청껏 따라 불렀다.

그사이 술청이 꽉 찼고, 주인 딸이 여급의 시중을 거들러 나왔다. 그녀는 키가 크고 몸매가 아름다웠으며, 건강하고 힘찬 얼굴에 차분한 갈색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새 병을 한스 앞에 놓자, 옆에 앉은 직공이 곧바로 가장 멋 부린 수작을 퍼부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무시를 보여 주려 했는지, 아니면 섬세한 소년의 머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한스 쪽으로 돌아서서 재빨리 그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고는 찬장 쪽으로 돌아갔다.

벌써 세 병째인 직공은 그녀를 따라가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키 큰 아가씨는 그를 태연히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고, 곧 등을 돌렸다. 그러자 그는 식탁으로 돌아와 빈 병으로 북을 치며 갑자기 열을 올려 외쳤다. "신나게 놀자, 얘들아. 건배!"

그러고는 질펀한 여자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스에게는 흐릿하게 뒤섞인 목소리만 들렸고, 두 번째 병을 거의 비웠을 때는 말하는 것도, 웃는 것조차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박새 새장으로 가서 새들을 조금 놀려 주고 싶었지만, 두 걸음 만에 어지러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조심스럽게 되돌아왔다.

그때부터 그의 들뜬 즐거움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는 자기가 취했다는 것을 알았고, 술자리 전체가 더는 재미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득히 먼 곳에서처럼 갖가지 불행이 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집에 가는 길, 아버지와의 고약한 장면, 그리고 내일 아침 다시 작업장. 차츰 머리도 아파 왔다.

다른 이들도 실컷 마셨다. 정신이 맑아진 틈에 아우구스트가 계산을 청했고, 그의 탈러 은화에서 거스름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들 떠들고 웃으며 거리로 나섰고, 밝은 저녁 햇살에 눈이 부셨다. 한스는 몸을 거의 가누지 못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아우구스트에게 기대 끌려갔다.

다른 작업장의 철공은 감상에 젖었다. 그는 〈내일이면 여기를 떠나야 하네〉를 부르며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실 집에 가려고 했는데, 〈슈반〉 앞을 지나자 직공이 한 번 더 들어가자고 우겼다. 문 앞에서 한스는 몸을 빼냈다.

"나 집에 가야 해."

"너 이제 혼자 걷지도 못하잖아." 직공이 웃었다.

"아니야, 걸어. 나…… 집에…… 가야 해."

"그럼 꼬마야, 적어도 화주 한 잔은 해라! 그게 다리에 힘을 주고 속을 다스려 준다. 정말이야, 두고 봐."

한스는 손에 작은 잔이 쥐어진 것을 느꼈다. 그는 많이 흘렸고, 남은 것을 삼키자 그것이 목구멍에서 불처럼 타는 것이 느껴졌다. 거센 욕지기가 그를 흔들었다. 그는 혼자 비틀거리며 현관 계단을 내려갔고,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마을 밖으로 나왔다. 집과 울타리와 정원이 비뚤고 뒤죽박죽으로 그의 곁을 돌아 지나갔다.

그는 사과나무 아래 축축한 풀밭에 누웠다. 역겨운 느낌과 괴로운 걱정과 덜 된 생각들이 숱하게 몰려와 잠들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더럽혀지고 욕보인 것 같았다. 어떻게 집에 가지?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지? 그리고 내일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는 이제 영원토록 쉬고 자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처럼 꺾이고 비참했다. 머리와 눈이 아팠고, 일어나서 계속 걸어갈 만큼의 힘도 자기 안에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늦게 온 덧없는 물결처럼 아까의 즐거움이 살짝 되돌아왔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혼자 노래를 불렀다.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든 게 다 끝났네.

노래를 다 부르자마자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아파 왔고, 흐릿한 생각과 기억과 부끄러움과 자책의 흐린 물결이 그에게 덮쳐 왔다. 그는 크게 신음하며 흐느끼면서 풀밭에 엎어졌다.

한 시간 뒤, 벌써 어둑해질 무렵 그는 일어나 불안하게, 힘겹게 산을 내려갔다.

아들이 저녁 먹을 때 오지 않자 기벤라트 씨는 실컷 욕을 했다. 아홉 시가 되어도 한스가 오지 않자 그는 오랫동안 쓰지 않던 튼튼한 등나무 회초리를 꺼내 두었다. 녀석이 이제 아버지 매를 맞을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집에 오기만 해 봐라, 어디!

열 시에 그는 현관문을 잠갔다. 도련님이 밤에 쏘다니고 싶으면 어디서 지내든 알아서 하라지.

그래도 그는 잠들지 않고, 점점 커지는 분노로 시간마다 손이 문고리를 더듬고 쭈뼛쭈뼛 초인종을 당기기를 기다렸다. 그는 그 장면을 상상했다. 이 떠돌이 녀석, 어디 혼 좀 나 봐라! 아마 그 개구쟁이는 취해 있겠지만, 그럼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마. 그 녀석, 그 음흉한 녀석, 그 못된 녀석! 뼈를 다 부러뜨려야 한다 해도.

마침내 잠이 그와 그의 분노를 이겼다.

같은 시간, 그렇게 위협받던 한스는 벌써 서늘하고 조용히, 천천히 어두운 강을 따라 골짜기 아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역겨움과 부끄러움과 괴로움은 그에게서 걷혔다. 어둡게 떠가는 그의 가냘픈 몸을 차갑고 푸르스름한 가을밤이 내려다보았고, 검은 물이 그의 손과 머리칼과 핏기 잃은 입술과 장난쳤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날이 밝기 전에 사냥하러 나온 겁 많은 수달만이 그를 교활하게 곁눈질하며 소리 없이 곁을 미끄러져 지나갔을 뿐. 그가 어떻게 물에 빠졌는지도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길을 잃고 가파른 곳에서 미끄러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물을 마시려다 균형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름다운 물을 보고 이끌려 그 위로 몸을 숙였는데, 밤과 창백한 달빛이 평화와 깊은 안식으로 가득 차 그를 마주 바라보자, 피로와 두려움이 조용한 강제로 그를 죽음의 그늘 속으로 몰아넣었을지도 모른다.

낮에 그를 찾아 집으로 옮겨 왔다. 놀란 아버지는 회초리를 치우고 쌓아 둔 분노를 거두어야 했다. 그는 울지 않았고 별로 내색하지도 않았지만, 다음 날 밤 다시 깨어 있으며 이따금 문틈으로 조용해진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깨끗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섬세한 이마와 창백하고 영리한 얼굴로 여전히 무언가 특별한 존재이고 남들과 다른 운명을 지닐 타고난 권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마와 손에는 살갗이 조금 푸르스름하게 붉게 긁혀 있었고, 고운 얼굴은 잠들어 있었다. 눈 위에는 하얀 눈꺼풀이 덮였고, 다 닫히지 않은 입은 흡족하고 거의 밝아 보였다. 소년이 갑자기 한창 피어날 때 꺾이고 기쁜 길에서 끌려 나간 것처럼 보였고, 아버지도 지치고 외로운 슬픔 속에서 이 미소 짓는 착각에 넘어갔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문객과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한스 기벤라트는 다시 모두가 관심을 갖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다시 교사들과 교장과 목사가 그의 운명에 마음을 썼다. 그들은 모두 프록코트에 엄숙한 실크해트 차림으로 나타나 운구 행렬을 따랐고, 무덤가에서 잠깐 멈춰 서서 저희끼리 소곤거렸다. 라틴어 선생은 유난히 울적해 보였고, 교장이 그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래요, 교수님, 저 아이는 뭔가가 될 수도 있었는데요. 하필 가장 뛰어난 아이들한테 거의 늘 운이 없다니, 딱한 일 아닙니까?"

쉴 새 없이 울어 대는 늙은 안나와 아버지 곁에 플라이크 장인이 무덤가에 남았다.

"정말 이건 쓰라린 일입니다, 기벤라트 씨." 그가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 "나도 그 아이를 좋아했어요."

"알 수가 없소." 기벤라트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재능이 있었고, 다 잘됐잖소. 학교도, 시험도. 그런데 갑자기 불행이 하나 또 하나!"

구두장이가 묘지 문으로 빠져나가는 프록코트들을 가리켰다.

"저기 가는 양반들 몇이," 그가 나직이 말했다. "저 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드는 데 거든 사람들입니다."

"뭐요?" 기벤라트가 펄쩍 뛰며 구두장이를 의심스럽고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이런, 그게 무슨 말이오?"

"진정하세요, 이웃 양반. 나는 그냥 선생들 말을 한 거요."

"어째서? 어떻게?"

"아, 별말 아니오. 그리고 당신하고 나도 어쩌면 그 아이한테 이것저것 소홀했는지도 모르지요, 안 그렇소?"

작은 도시 위로 즐겁게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골짜기에서는 강이 반짝였고, 전나무 산들은 부드럽고 그립게 먼 곳까지 파랗게 이어졌다. 구두장이는 섬세하고 슬프게 웃으며 그 사람의 팔을 잡았다. 그 사람은 이 시간의 고요와 이상하게 아픈 생각들의 넘침에서 빠져나와, 머뭇거리며 쑥스럽게 익숙한 삶의 낮은 땅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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