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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심훈, 한성도서 1949

11장 · 87분

「그날이 오면」 「밤」 「어머님께」. 「상록수」의 심훈이 1932년 내려다 일제의 검열로 막힌 시가 수필집. 해방 뒤 1949년에야 세상에 나왔습니다.

머리말씀

〈머리말씀〉

나는 쓰기를 위해서 시(詩)를 써 본 적이 없읍니다. 더구나 시인(詩人)이 되려는 생각도 해 보지 아니하였읍니다. 다만 닫다가 미칠 듯이 파도(波濤)치는 정열(情熱)에 마음이 부다끼면 죄수(罪囚)가 손톱 끝으로 감방(監房)의 벽을 긁어 낙서(落書)하듯한 것이 그럭저럭 근백수(近百首)나 되기에 한곳에 묶어보다가 이 보잘것없는 시가집(詩歌集)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가(詩歌)에 관한 이론(理論)이나 예투(例套)의 겸사(謙辭)는 늘어놓지 않습니다마는 막상 책상(冊床) 머리에 어중이떠중이 모인 것들을 쓰다듬어 보자니 이목(耳目)이 반듯한 놈은 거의 한 수(首)도 없었읍니다. 그러나 병신(病身)자식이기 때문에 참아 버리기 어렵고 솔직(率直)한 내 마음의 결정(結晶)인지라 지구(知舊)에게 하소연이나 해보고 싶은 서글픈 충동(衝動)으로 누더기를 기워서 조각보를 만들어 본 것입니다.
◇ ◇

삼십(三十)이면 선(立)다는데 나는 아직 배밀이도 하지 못합니다. 부질없는 번뇌로 마음의 방황으로 머리 둘 곳을 모르다가 고개를 쳐드니 어느듯 내 몸이 삼십(三十)의 마루터기 위에 섰읍니다. 걸어온 길바닥에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못한채 나이만 들었으니 하욤없게 생명(生命)이 좀썰린 생각을 할 때마다 몸서리를 치는 자아(自我)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제법 걸음발을 타게 되는 날까지 내 정감(情感)의 파동(波動)은 이따위 변변ㅎ자 못한 기록(記錄)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리라고 스스로 믿고 기다립니다.

일구삼이년구월(一九三二年九月) 가배절(嘉俳節) 이튿날
당진(唐津) 향제(鄕第)에서 침(沈) 훈(熏)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어머님께〉

1
어머님!

오늘 아침에 차입해 주신 고의적삼을 받고서야 제가 이 곳에 와 있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잠시도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던 막내둥이의 생사를 한 달 동안이나 아득히 아실 길 없으셨으니 그 동안에 오죽이나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저는 이 곳까지 굴러 오는 동안에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고생을 겪었건만 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큰집에 와서 지냅니다. 고랑을 차고 용수는 쎴을망정 난생 처음으로 자동차에다가 보호 순사까지 앉히고 거들먹거리며 남산 밑애세 무학재 밑까지 내려 긁는 맛이란 바로 개선문으로 들어가는 듯하였습니다.

2
어머님!

제가 들어 있는 방은 28호실인데 성명 3자도 떼어버리고 2007호로만 행세합니다. 두간도 못되는 방 속에 열 아홉명이나 비웃두름 엮이듯 했는데 그 중에는 목사님도 있고 시골서 온 상투장이도 있구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수염 잘난 천도교 도사도 계십니다. 그밖에는 그날 함께 날뛰던 저의 동무들인데 제 나이가 제일 어려서 귀염을 받는답니다.

3
어머님!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노인네의 얼굴은 앞날을 점치는 선지자처럼, 고행하는 도승처럼 그 표정조차 엄숙합니다. 날마다 이른 아침 전등불이 꺼지는 것을 신호삼아 몇천 명이 같은 시간에 마음을 모아서 정성껏 같은 발원으로 기도를 올릴 때면 극성맞은 간수도 칼자루 소리를 내지 못하며 감히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발꿈치를 돌립니다.

4
어머님!

우리가 천번 만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무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함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누구나 맹세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길래 나이 어린 저까지도 이러한 고초를 그다지 괴로와하여 하소연해본 적이 없읍니다.

5
어머님!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으신 어머니가 몇천 분이요, 또 몇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마다 눈물겨워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져도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먹기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6
어머님!

오늘 아침에는 목사님한테 사식(私食)이 들어왔는데 첫술을 뜨다가 목이 메어 넘기지를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외다. 아내는 태중에 놀라서 병들어 눕고 열 두살 먹은 어린 딸이 아침마다 옥문 밖으로 쌀을 날라다가 지어드리는 밥이라 합니다. 저도 돌아앉으며 남 모르게 소매를 적셨읍니다.

7
어머니!

며칠 전에는 생후 처음으로 감방 속에서 죽는 사람의 임종을 같이하였습니다. 돌아간 사람은 먼 시골의 무슨 교를 믿는 노인이었는데, 경찰서에서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되어 나와서 이 곳에 온 뒤에도 밤이면 몹시 앓았습니다. 병감은 만원이라고 옮겨 주지도 않고, 쇠잔한 몸에 그 독은 나날이 뼈에 사무쳐 그 날에는 아침부터 신음하는 소리가 더 높았습니다.

밤이 깊어 악박골 약물터에서 단소 부는 소리도 끊어졌을 때,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그의 머리맡을 에워싸고 앉아서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덮쳐 오는 그의 얼굴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희미한 눈초리로 5촉밖에 안 되는 전등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무슨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추억의 날개를 펴서 기구한 일생을 더듬는 듯하였습니다. 그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본 저는 무릎을 베게삼아 거의 머리를 괴었더니, 그는 떨리는 손을 더듬더듬하여 제 손을 찾아 쥐더이다. 금세 운명을 할 노인의 손아귀힘이 어쩌면 그다지도 굳셀까요, 전기나 통한 듯이 뜨거울까요?

8
어머니!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몸을 벌떡 솟구치더니 ‘여러분!’하고 큰 목소리로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찢어질 듯이 긴장된 얼굴의 힘줄과 표정, 그날 수천 명 교도 앞에서 연설을 할 때의 그 목소리가 이와 같이 우렁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는 마침내 그의 연설을 듣지 못했습니다. ‘여러분!’하고는 뒤미처 목에 가래가 끓어올랐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분이 유언할 것이 없느냐 물으매 그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흐려지는 눈은 꼭 무엇을 애원하는 듯합니다마는, 그의 마지막 소청을 들어줄 그 무엇이나 우리가 가졌겠습니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그 날에 여럿이 떼지어 부르던 노래를 일제히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첫 소절도 다 부르기 전에 설움이 북받쳐서, 그와 같은 신도인 상투 달린 사람은 목을 놓고 울더이다.

9
어머님!

그가 애원하던 것은 그 노래가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일각의 원혼을 위로하기에는 가슴 한복판을 울리는 그 노래밖에 없었습니다. 후렴이 끝나자 그는 한 덩이 시뻘건 선지피를 제 옷자락에 토하고는 영영 숨이 끊어지고 말더이다.

그러나 야릇한 미소를 띤 그의 영혼은 우리가 부른 노래에 고이고이 싸이고 받들려 쇠창살을 새어 나가 새벽 하늘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저는 감지 못한 그의 두 눈을 쓰다듬어 내리고 날이 밝도록 그의 머리를 제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10
어머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록사록이 아프고 쓰라렸던 지난날의 모든 일을 큰 모험삼아 몰래몰래 적어두는 이 글월에 어찌 다 시원스러이 사뢰올 수가 있사오리까? 이제야 겨우 가시밭을 밟기 시작한 저로서 어느새 부러 이만 고생을 호소할 것이오리까?

오늘은 아침부터 창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더위가 씻겨내리고 높은 담안에 시원한 바람이 휘돕니다. 병든 누에가이 늘어졌던 감방 속의 여러 사람도 하나 둘 생기가 나서 목침돌림 이야기에 꽃이 핍니다.

11
어머니!

며칠 동안이나 비밀히 적은 이 글월을 들키지 않고 내어보낼 궁리를 하는 동안에 비는 어느덧 멈추고 날은 오늘도 저물어 갑니다.

구름 걷힌 하늘을 우러러 어머니의 건강을 비올 때, 비 뒤의 신록은 담 밖에 더욱 아름답사온 듯 먼 천의 개구리 소리만 철창에 들리나이다.

서시

〈밤〉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 비인 방 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장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 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에서 자맥질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 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 소리……
별 없는 하늘 밑에 들어 줄 사람 없구나!

1923년 겨울, 집에서

봄의 서곡

〈봄의 서곡〉

동무여,
봄의 서곡(序曲)을 아뢰라,
심금(心琴)엔 먼지 앉고 줄은 낡았으나마
그 줄이 가닥가닥 끊어지도록
새 봄의 해조(諧調)를 뜯으라!

그대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줄이야 말 아니 한들 어느 누가 모르랴
그러나 그 아픔은 묵은 설음이
엉기어 붙은 영혼(靈魂)의 동통(疼痛)이 아니요
입술을 깨물며 새로운 우리의 봄을
빚어 내려는 창조(創造)의 고통(苦痛)이다.

진달래 동산에 새 소리 들리거든
너도 나도 즐거이 노래 부르자
범나비 쌍쌍이 날아 들거든
우리도 덩달아 어깨춤 추자.
밤낮으로 탄식(嘆息)만 한다고 우리 봄은
저절로 굴러들지 않으리니--
그대와 나, 개미 떼처럼
한데 뭉쳐 꾸준하게 부지런하게
땀을 흘리며 폐허(廢墟)를 지키고
또 굽히지 말고 싸우며 나가자.
우리의 역사(歷史)는 눈물에 미끄러져
뒷걸음치지 않으리니--

동무여,
봄의 서곡(序曲)을 아뢰라
심금(心琴)엔 먼지 앉고 줄은 낡았으나마
그 줄이 가닥가닥 끊어지도록
닥쳐올 새 봄의 해조(諧調)를 뜯으라.

1931.2.23

〈피리〉

내가 부는 피리 소리 곡조는 몰라도
그 사람이 그리워 마디마디 꺾이네.
길고 가늘게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어서--
봄 저녁의 별들만 눈물에 젖네.

1929.4

〈봄비〉

하나님이 깊은 밤에 피아노를 두드리시네
건반(鍵盤)위에 춤추는 하얀 손은 보이지 않아도
섬돌에, 양철 지붕에, 그 소리만 동당 도드랑,
이 밤엔 하나님도 답답하셔서 잠 한숨도 못 이루시네.

1929.4.

〈거리의 봄〉

지난 겨울 눈밤에 얼어 죽은 줄 알았던
늙은 가 쓰레기통 곁에 살아 앉았네.
허리를 펴며 먼산(山)을 바라다보는 저 눈초리!
봄이 비최는구나 봄빛이 떠도는구나!

원망스러워도 정(情)든 고토(故土)에 찾어드는 봄을
한번이라도 저 눈으로 더 보고 싶어서
무쇠도 얼어 붙는 그 치운 겨울에
잇발을 앙물고 살아 왔구나
죽지만 않으면 팔다리 뻗어볼 시절이 올 것을
점(占)쳐 아는 늙은 거지여 그대는 이 땅의 선지자(先知者)로다.

사랑하는 젊은 벗이여,
그대의 눈에 미지근한 눈물을 걷우라!
그대의 가슴을 헤치고 헛된 탄식(嘆息)의 뿌리를 뽑아 버리라!
저 늙은 거지도 기를 쓰고 살아 왔거늘
그 봄도 우리의 봄도, 눈앞에 오고야 말 것을
아아, 어찌 하여 그대들은 믿지 않는가?

1929.4.19

〈영춘 삼수〉

책상(冊床) 위에 꺾어다 꽂은 복숭아 꽃
잎잎이 시들어선 향기(香氣) 없이 떨어지니
네 열매는 어느 곳에 맺으려는고.
×
개천 바닥을 뚫고서 언덕 위로
파릇파릇 피어 오르는 풀 잎새
망아지나 되어지고 송아지나 되어지고.
×
창경원(昌慶苑) 벚꽃(夜櫻) 구경을
휩쓸려 들어 갔다가 등을 밀려 나오니
가등(假燈) 밑에 기다란 내 그림자여!

1929.4.28

〈나의 강산이여〉

높은 곳에 올라 이 땅을 굽어 보니
큰 봉오리와 작은 뫼뿌리의 어여쁨이여.
아지랑이 속으로 시선(視線)이 녹아드는 곳까지
오똑오똑 솟았다가는 굽이쳐 달리는 그 산(山)줄기
네 품에 안켜 딩굴고 싶도록 아름답고나.

소나무 감송감송 목멱(木覓)의 등어리는
젖 물고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허리와 같고
삼각산(三角山)은 적(敵)의 앞에 뽑아든 칼끝처럼
한번만 찔르면 먹장구름 쏟아질듯이
아직도 네 기상(氣象)이 늠늠(凜凜)하구나.

에워싼 것이 바다로되 물결이 성내지 않고
샘과 시내로 가늘게 수(繡) 놓았건만
그 물이 맑고 그 바다 푸르러서,
한목음 마시면 한백년(限百年)이나 수(壽)를 할듯
퐁퐁퐁 솟아서는 넘쳐넘쳐 흐르는구나.

할아버지 주무시는 저 산기슭에
할미꽃이 졸고 뻐꾹새는 울어예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도 돌아만 가면
저 언덕 위에 편안히 묻어 드리고
그 발치에 나도 누워 깊은 설음 잊으오리다.

바가지 쪽 걸머지고 집 떠난 형제(兄弟),
거칠은 벌판에 강냉이 이삭을 줍는 자매(姉妹)여
부디부디 백골(白骨)이나마 이 흙속에 돌아와 묻히소서,
오오 바라다볼쑤록 아름다운 나의 강산이여!

1926.5.

〈어린이날〉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비가 내립니다.
여러분의 행열에 먼지 일지 말라고
실비 내려 보슬보슬 길바닥을 추겨 줍니다.
비 바람 속에서 자라난 이 땅의 자손들이라,
일년의 한번 나드리에도 옷깃이 젓습니다그려.

여러분은 어머님께서 새 옷감을 매만지실 때
물을 뿜어 주름살 펴는 것을 보셨겠지요?
그것처럼 몇 번만 더 빗발이 뿌리고 지나만 가면
이 강산의 주름살도 비단 같이 펴진답니다.

시들은 풀잎만 얼크러진 벌판에도 봄이 오며는
하늘로 뻗어 오르는 파란 싹을 보셨겠지요?
당신네 팔다리에도 그 싹처럼 물이 올라서
지둥치듯 비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말라고 비가 옵니다.
높이 든 깃발이 그 비에 젖습니다.

1929.5.5

〈돌아가지이다〉

돌아가지이다, 돌아가지이다.
동요(童謠)의 나라 동화(童話)의 세계(世界)로
다시 한번 이몸이 돌아가지이다.

세상 티끌에 파묻히고
살길에 시달린 몸은
선잠 깨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루만지던 엄마의 젖가슴에 안키고 싶습니다, 품기고 싶습니다.
그 보드랍고 따뜻하던 옛날의 보금자리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를 어찌하오리까
엄마의 젖꼭지는 말라 붙었고
제 입은 계집의 혀를 빨았습니다
엄마의 젖가슴은 식어버리고
제 염통에는 더러운 피가 괴었습니다.

바람이 부더이다, 바람이 차더이다.
온세상이 거칠고 쓸쓸하더이다.
가는 곳마다 차디찬 바람을
등어리에 끼얹어 주더이다.

오오 와다오, 포근한 잠아!
하욤없는 희망을 덮고
끊임없시 근심스러운 마음우에
한번 다시 그 잠이 와주려무나.
「자장자장 잘두 잔다
얼뚱아기 잘두 잔다
자장골에 들어가니
그 골에는 잠두많어
센둥이두 자드란다
검둥이두 자드란다」
엄마도 이 노래를 부르시다가 꼬박꼬박 졸음이 와서
내 이마에다 이마둑도 하셨었지.

노근한 봄날
낮잠 주무시는 할아버지의
은실 같은 수염을 뽑아 가지고
개나리 회초리에 파리를 매어
「잠자리 종조옹
파아리 종조옹
이리 오면 사느니라
저리 가면 죽느니라…………」

고초자지 달랑거리고
논둑 건너 밭이랑 넘어
나비 같이 돌아 다니던
귀여운 어린 천사(天使)야
아아 지금은 어디로 갔느냐?

함박눈이 울안을 덮고
밭전(田)자 들창에 달빛이 물들 때
언니하고 자리속에서 듣던
할머니의 까치 이야기는
어쩌면 그렇게도 재미가 있었을까요?
여우한테 물려간 까치 새끼가
가엾고 불쌍해서 울었었지요.
찾아다 달라고 떼를 쓰며 울었었지요.

아아 옛날의 보금자리에
이몸을 포근히 품어 주소서.
하루도 열두번이나 거짓말을 시키고도
얼굴도 붉히지 말라는 세상이외다.
사람의 마음도 돈으로 팔고 사는
알뜰히도 더러운 세상이외다
돌아가지이다, 돌아가지이다.
동요의 나라, 동화의 세게로
한번만 다시 돌아가지이다.

1922.2

〈필경〉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우를 갈(耕)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犁)요, 유일(唯一)한 연장이다.
거치른 산기슭에 한 이랑(畝)의 화전(火田)을 일려면
돌뿌리와 나무 등걸에 호미 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었던고?

그러나 파랗고 빨간 「잉크」는 정맥(靜脈)과 동맥(動脈)의 피
최후(最後)의 일적(一滴)까지 종이 우에 그 피를 뿌릴 뿐이다.
비바람이 험궂다고 역사(歷史)의 바퀴가 역전(逆轉)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審判)날을 기약(期約)하는 우리의 정성(精誠)이 굽힐 것인가
동지(同志)여 우리는 퇴각(退却)을 모르는 전위(前衛)의 투사(鬪士)다.
「박탈(剝奪)」, 「아사(餓死)」, 「음독(飮毒)」, 「자살(自殺)」의 경과보고(經過報告)가 우리의 밥벌이냐
「아연(俄然)활동(活動)」, 「검거(檢擧)」, 「송국(送局)」, 「판결언도(判決言渡)」, 「오년(五年)」, 「십년(十年)」의
를 적는 것이 허구한 날의 직책(職責)이란 말이냐
창(槍)끝 같이 철필(鐵筆)촉을 베려 모든 암흑면(暗黑面)을 파헤치자
샅샅이 파헤쳐 온갖 죄악(罪惡)을 백주(白晝)에 폭로(暴露)하자.

를 젖쳤느냐 윤전기(輪轉機)가 돌아 가느냐
깊은밤 맹수(猛獸)의 포효(咆哮)와 같은 굉음(轟音)과 함께
한 시간(時間)에도 몇 만(萬)장이나 박아 돌리는 활자(活字)의 위력(威力)은,
민중(民衆)의 맥박(脈搏)을 이어 주는 우리의 혈압(血壓)이다.
오오 붓을 잡은 자(者)여 위대(偉大)한 심장(心臟)의 파수병(把守兵)이여!

1930.7.

〈명사십리〉

시푸른 성낸 파도(波濤) 백사장(白沙場)에 몸 부딪고
먹장구름 꿈틀거려 바다우를 짓누르네
동해(東海)도 우울(憂鬱)한 품이 날만 못지않구나.

풍덩실 몸을 던져 물결과 태껸하니
조알만한 세상근심 거품 같이 흩어지네,
물가에 가제집 지며 하루해를 보내다.

〈해당화〉

해당화(海棠花) 해당화(海棠花) 명사십리(明沙十里) 해당화(海棠花)야
한떨기 홀로 핀게 가엾어서 꺾었더니
내 어찌 가시로 찔러 앙갚음을 하느뇨.
×
빨간 피 솟아 올라 꽃잎술에 물이 드니
손끝에 핏방울은 내 입에도 꽃이로다
바닷가 흰 모래 속에 토닥토닥 묻었네.

〈송도원〉

꺾어라 창랑(滄浪)우에 굴러라 백사장(白沙場)에
여름이 한철이니 기를 펴고 뛰놀아라
과 의 후예(後裔)어니 무슨 설음 있으랴.
×
물넘어 지는 해에 흰 돛이 번득이고
백구(白鷗)도 돌아들제 뭍(陸)에 올른
송풍(松風)에 머리 말리며 파도(波濤)소리 듣더라.

〈총석정〉

멀리선 생황(笙篁)이요 다가보니 일세
촉촉(矗矗) 릉릉(稜稜) 온갖 형용(形容) 엄청나 못붙일레
신기(神奇)하다, 조물주(造物主)의 손장난도 이만하면 관주러라.
×
벌집 같이 모난 돌이 창(槍)대처럼 뻗어 올라
창공(蒼空)이 구녕날듯 비바람 쏟아질듯
격랑(激浪)에 돌뿌리 꺾어질까 소름 오싹 돋더라.

1932.8.10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散散)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던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1930.3.1

〈통곡 속에서〉

큰 길에 넘치는 백의(白衣)의 물결 속에서 울음 소리 일어난다.
총검(銃劍)이 번득이고 군병(軍兵)의 말굽소리 소란(騷亂)한 곳에
분격(憤激)한 무리는 몰리며 짓밟히며
따에 엎디어 마지막 비명(悲鳴)을 지른다.
땅을 뚜드리며 또 하늘을 우러러
외오치는 소리 느껴 우는 소리 구소(九霄)에 사모친다.

검은 「댕기」 드린 소녀(少女)여
눈송이 같이 소복(素服) 입은 소년(少年)이여
그 무엇이 너희의 작은 가슴을
안타깝게도 설움에 떨게 하더냐
그 뉘라서 저다지도 뜨거운 눈물을
어여쁜 너희의 두눈으로 짜내라 하더냐?

가지마다 신록(新綠)의 아지랑이가 되어 오르고
종달새 시내를 따르는 즐거운 봄날에
어찌하여 너희는 벌써 기쁨의 노래를 잊어버렸는가?
천진(天眞)한 너희의 행복(幸福)마저 참아 어떤 사람이 빼앗아 가던가?

할아버지여! 할머니여!
오직 무덤 속의 안식(安息)밖에 희망(希望)이 끊긴 노인네여!
조팝에 주름잡힌 얼굴은 누르렀고 세고(世苦)에 등은 굽었거늘
장자(腸子)를 쥐어 짜며 애통(哀痛)하시든 양은 참아 뵙기 어렵소이다.
그치시지요 그만 눈물을 걷으시지요.
당신네의 쇠잔(衰殘)한 백골(白骨)이나마 편안히 묻히고저 하던 이 땅은
남의 「호미」가 샅샅이 파헤친 지 이미 오래어늘
지금에 피나게 우신들 한번 간 옛날이
다시 돌아올 줄 아십니까?

해마다 봄마다 새 주인(主人)은
인정전(仁政殿) 「벗꽃」 그늘에 잔치를 베풀고
이화(梨花)의 휘장(徽章)은 낡은 수레에 붙어
티끌만 날리는 (廢墟)를 굴러 다녀도
일후(日後)란 뉘 있어 길이 설어나 하랴마는……

오오 쫓겨 가는 무리여
쓰러져버린 한낱 우상(偶像) 앞에 무릎을 꿇치 말라!
덧없는 인생(人生) 죽고야 마는 것이 우리의 숙명(宿命)이어니
한 사람의 돌아오지 못함을 굳이 설어하지 말라.

그러나 오오 그러나
철천(徹天)의 한(恨)을 품은 청상(靑孀)의 설음이로되
이웃집 제단(祭壇)조차 무너져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목매쳐 울고저 하나 눈물마저 말라붙은
억색(抑塞)한 가슴을 이 한날에 두드리며 울자!
이마로 흙을 비비며 눈으로 피를 뿜으며―

4.29

〈생명의 한 토막〉

내가 음악가(音樂家)가 된다면
가느다란 줄이나 뜯는
제금가(提琴家)는 아니 되려오.
Higth C까지 목청을 끌어 올리는
「카루소」같은 성악가(聲樂家)가 되거나
「샬랴핀」만치나 우렁찬 로,
내 설음과 우리의 설음을 버무려
목구멍에 피를 끓이며 영탄(咏嘆) 노래를 부르고 싶소.

창자(腸子) 끝이 묻어나도록 성량(聲量)껏 내뽑다가
설음이 복받쳐 몸둘 곳이 없으면
몇만(萬) 청중(聽衆) 앞에서 거꾸러져도 좋겠소.

내가 화가(畫家)가 된다면
「피아드리」처럼 고리삭고
「미레이」처럼 유한(悠閑)한 그림은 마음이 간지러워서 못 그리겠소.
뭉툭하고 굵다란 선(線)이 살아서
구름속 용(龍)같이 꿈틀거리는
「반•고호」의 필력(筆力)을 빌어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꺼멓고 싯붉은 원색(原色)만 써서
우리의 사는 꼴을 그려는 보아도,
대대손손(代代孫孫)이 전(傳)하여 보여주고 싶지는 않소.
그 그림은 한칼로 찢어버리기를 바라는 까닭에......

무엇이 되든지 내 생명(生命)의 한 토막을
짧고 굵다랗게 태워버리고 싶소!

1932.10.8

〈너에게 무엇을 주랴〉

맥(脈)이 각각(刻刻)으로 끊어지고
마지막 숨을 가쁘게 드리모는
사랑하는 너에게 무엇을 주랴

눈물도 소매를 쥐어짜도록 흘려 보았다.
한숨도 땅이 꺼지도록 쉬어 보았다.
그래도 내 숨소리는 더욱 가늘어만 가고
시방은 신음(呻吟)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눈물도 한숨도 소용(所用)이 없다.
「죽음」이란 엄숙(嚴肅)한 사실(事實) 앞에는
경(經) 읽거나 무꾸리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당장에 숨이 끊어지는 너를
손끝맺고 드려다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에게 딸린 생명(生命)이 하나요 둘도 아닌 것을…………

오직 한가지 길이 남았을 뿐이다.
손가락을 깨물어 따끈한 피를
그 입속에 방울방울 떨어뜨리자!
우리는 반드시 소생(蘇生)할 것을 굳게 믿는다.
마지막으로 붉은 정성(精誠)을 다하여
산 제물(祭物)로 우리의 몸을 너에게 바칠뿐이다!

1927.3

〈박군의 얼굴〉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朴君)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콜병에 담거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말르다못해 해면(海綿) 같이 부풀어 오른 두뺨
두개골(頭蓋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果然) 자네의 얼굴이던가?

쇠사슬에 네 몸이 얽히기 전(前)까지도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肉色)에
양미간(兩眉間)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威嚴)이 떠돌았고
침묵(沈默)에 잠긴 입은 한번 벌이면
사람을 끌어다리는 매력(魅力)이 있었더니라.

사년(四年)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사람의 박(朴)은
교수대(絞首臺) 곁에서 목숨을 생(生)으로 말리고 있고
C사(社)에 마주 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사람의 박(朴)은
모진 매에 창자(腸子)가 뀌어져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朴)은
음습(陰濕)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上海)의 깊은밤
어느 지하실(地下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朴君)은
눈을 뜬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獄門)을 나섰구나.

박(朴)아 박군(朴君)아 ××아!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殘骸)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同志)들이 네 손을 잡는다
잇발을 앙물고 하늘을 저주(詛呪)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表情)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朴君)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心臟)의 고동(鼓動)이 끊칠 때까지.

1927.12.2

〈조선은 술을 먹인다〉

조선은 마음 약(弱)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
입을 어기고 독(毒)한 술잔으로 드리붓는다.

그네들의 마음은 화장(火葬) 터의 새벽과 같이 쓸쓸하고
그네들의 생활(生活)은 해수욕장(海水浴場)의 가을처럼 공허(空虛)하여
그 마음 그 생활(生活)에서 순간(瞬間)이라도 떠나고저 술을 마신다.
아편(阿片)대신으로 죽음대신으로 을 삼킨다.

가는 곳마다 양조장(釀造場)이요 골목마다 색주가(色酒家)다
카페의 의자(椅子)를 부시고 술잔을 깨뜨리는 사나이가
피를 아끼지 않는 조선의 「테로리스트」요,
파출소(派出所) 문(門)앞에 오줌을 깔기는 주정(酒酊)꾼이
이땅의 가장 용감(勇敢)한 반역아(反逆兒)란 말이냐?
그렇다면 전목(電桿木)을 붙안고 통곡(痛哭)하는 친구는
이바닥의 비분(悲憤)을 독차지한 지사(志士)로구나.

아아 조선은, 마음 약(弱)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
뜻이 굳지 못한 청춘(靑春)들의 골(腦)을 녹이려 한다.
생재목(生材木)에 알콜을 끼얹어 태워 버리려 한다.

1929.12.10

〈독백〉

사랑하는 벗이여,
슬픈 빛 감추기란 매맞기보다도 어렵소이다.
온갖 설음을 꿀꺽꿀꺽 참아 넘기고
낮에는 히히 허허 실없은 체하건만
쥐죽은듯한 깊은 밤은 사나이의 통곡장(痛哭場)이외다.

사랑하는 벗이여,
분(憤)한 일 참기란 생목숨 끊기보다도 힘드오이다.
적(廭)덩이처럼 치밀어 오르는 가슴의 불길을
분화구(噴火口)와 같이 하늘로 뿜어 내지도 못하고
청춘(靑春)의 염통을 「알콜」에나 젓 담그려는
이놈의 등어리에 채찍이라도 얹어주소서.

사랑하는 그대여,
조상에게 그저 받은 뼈와 살이어늘
남은 것이라고는 벌거벗은 알몸 뿐이어늘
그것이 아까와 놈들 앞에 절하고 무릎을 꿇는 나는 「샤롴」보다도 더 인색(吝嗇)한 놈이외다.
쌀 삶은 것 먹을줄 아니 그 이름이 사람이외다,

1923.6,13

〈조선의 자매여〉

나는 그대들의 죽음이 너무나 참혹(慘酷)하여 눈물지었노라
그대들의 흘린 피가 너무나 값 없음을 아끼어 울었노라
우리는 흙 한줌 보태기에도 오히려 작은 알몸 뿐이다
강아지에게 던져도 씹지 않을 고기덩이 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러나 생선(生鮮) 같은 청춘(靑春)의 몸을 철로(鐵路)바탕에 쌍(雙)으로 던져
이십년(二十年)이나 자라난 사지(四肢)를 짤리고 뼈를 갈아 버리다니
그 한점의 살 한방울의 피가 그다지 값 없는줄 알았던가

오 약하고 가엾은 이땅의 누이들이여,
그대들이 저주(詛呪)한 모든 제도(制度)는 본디 사람이 만든 것이다.
사랑도 허무(虛無)도 마음 속에 떠도는 한조각의 구름장인걸
무엇을 꺼리어 주순(朱脣)을 열어 부르짖지도 못하고
가냘픈 손에나마 반역(反逆)의 깃대를 들지 못했는가
「청천백일(靑天白日)」밑에 팔을 뽐내는 이웃 나라의 여성(女性)을 보라.

사랑에 취(鴆醉)하여 쥐잡는 약(藥)을 사람이 삼키고
인생(人生)이 허무(虛無)ㅎ다 하여 헛되이 생명(生命)을 태질치던 것은
이미 세기(世紀)가 몇번이나 바뀌인 옛날의 비극(悲劇)이다
우리에게서 청산(淸算)된지 오래인 소극(消極)의 감정(感情)이다
가엾다!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그 잔혹(殘酷)을 마시며
생목숨 끊는 것으로 유일(唯一)한 자유(自由)를 삼으려는가
어버이와 형제(兄弟)의 은혜(恩惠)를 자멸(自滅)로써 갚으려 하는가

젊고 아름다운 이땅의 여성(女性)이여,
지금은 봄이다! 사월(四月)의 태양(太陽)이 굴르는 폐허(廢墟)위에
기를 펴고 우리와 함께 달음질할 준비(準備)를 하자!
개천 바닥에 콸콸콸 얼음장 뚫는 목소리 들리나니
한 방울의 피라도 혈관(血管) 밖으로 쏟아버리지 말라
가슴 속에는 정의(正義)에 불붙는 새빨간 염통이 방아를 찧거늘
그 소중(所重)한 염통을 양잿물로 썩히거나 철로(鐵路) 바탕에 버리지 말라
나의 사랑하는 조선(朝鮮)의 자매(姉妹)여!

1931.4.5

짝 잃은 기러기

〈짝 잃은 기러기〉

짝 잃은 기러기 새벽 하늘에
외마디 소리 이끌며 별밭을 가(耕)네.
단 한잠도 못맺은 기나긴 겨울 밤을
기러기 홀로 나 홀로 잠든 천지(天地)에 울며 헤매네.

허구헌날 밤이면 밤을
마음 속으로 파고만 드는 그의 그림자,
덩이피에 벌릉거리는 사나이의 염통이
조그만 소녀(少女)의 손에 사로잡히고 말았네.

1926.2

〈고독〉

진종일(盡終日) 앓아누워 다녀간 것들 손꼽아 보자니
창(窓)살을 걸어간 햇발과 마당에 강아지 한마리
두손길 펴서 가슴에 얹은채 임종(臨終) 때를 생각해 보다.

그림자하고 단 둘이서만 지내는 살림이어늘
천장이 울리도록 그의 이름은 왜 불렀는고
쥐라도 들었을사라 혼자서 얼굴 붉히네.

밤 깊어 첩첩(疊疊)히 닫힌 덧문(門)밖에 그 무엇이 뒤설레는고
미닫이 열어 젖치자 굴러드느니 낙엽(落葉) 한잎새
머리맡에 어루만져 재우나 바시락거리며 잠은 안 자네.

값 없는 눈물 흘리지 말자고 몇번이나 맹세했던고
울음을 씹어서 웃음으로 삼키기도 한 버릇 되었으련만
밤중이면 이불 속에서 그 울음을 깨물어 죽이네.

1929.10.10

〈한강의 달밤〉

은하수(銀河水)가 흘러 나리는듯 쏟아지는 달빛이
잉어(鯉魚)의 비늘처럼 물결우에 뛰노는 여름 밤에
나와 뽀오트를 같이 탄 세 사람의 여성(女性)이 있었다.

으늑한 포풀라 그늘에 뱃머리를 대고
손길을 마주 잡고서 꿈속 같이 사랑을 속삭이려면
달도 부끄럼을 타는듯 구름 속으로 얼굴을 가렸었다.

물결도 잠자는 백사장(白沙場)에 찍혀진 발자국은
어느 곳에 끝이 나려는 두 줄기 레일(軌道)이던가
몇번이나 두 몸이 한덩이로 뭉쳤었던가.

아아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모든 것이 꿈이다
초저녁에 꾸다가 버린 꿈보다도 허무(虛無)하고
기억(記憶)조차 저 물결 같이 흐르고 말려 한다.

그 중(中)에 가장 어여쁘던 패성(浿城)의 계집아이는,
돈 있는 놈에게 속아서 못된 병(病)까지 옮아,
피를 토(吐)하다가 청춘(靑春)을 북망산(北邙山)에 파묻었다.

「당신 아니면 죽겠어요」 하던 또 한 사람은,
배맞았던 사나이와 벌어진 틈에 나를 끼워서
얕은 꾀로 이용(利用)하고는 발굼치를 돌렸다.

마지막 동혈(同穴)의 굳은 맹세로 지내오던 목소리 고운 여자(女子)는
「집 한 간(間)도 없는 당신과는 살 수 없어요」 라고
일전(一錢)오리(五厘) 엽서(葉書) 한장을 던지더니 남의 첩(妾)이 되었다.

그들은 달콤한 것만 핥아 가는 꿀벌과 같이
내 마음의 순진(純眞)과 정열(情熱)을 다투어 빨아 가고
물안개처럼 내 품에서 감돌다가는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 밤도 그 강변(江邊)에 그 물결이 노닐고 그 달이 밝다
하욤없이 좀썰려 꺼풀만 남은 청춘(靑春)의 그림자를
길로 솟은 포풀라 그늘이 가로 세로 비질을 할뿐…………

1930.8

〈풀밭에 누워서〉

가을날 풀밭에 누워서
우러러보는 조선의 하늘은
어쩌면 저다지도 맑고 푸르고 높을까요?
닦아 논 거울인들 저보다 더 깨끗하오리까.

바라면 바라볼쑤록
천리(千里) 만리(萬里) 생각이 아득하여
구름장을 타고 같이 떠도는 내 마음은,
애달픈 심란스럽기 비길 데 없소이다.
오늘도 만주(滿洲) 벌에서는 몇 천명(千名)이나 우리 동포(同胞)가
놈들에게 쫓겨나 모진 악형(惡刑)까지 당하고
몇 십명(十名)씩 묶여서 총(銃)을 맞고 꺼꾸러졌다는 소식(消息)!

거짓말이외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거짓말 같사외다.
고국(故國)의 하늘은 저다지도 맑고 푸르고 무심(無心)하거늘
같은 하늘 밑에서 그런 비극(悲劇)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소이다

안땅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상팔자지요.
철창 속에서라도 이 맑은 공기(空氣)를 호흡(呼吸)하고
이 명랑(明朗)한 햇발을 쬐어 볼 수나 있지 않습니까?

논 두렁에 버티고 선 허자비처럼
찢어진 옷 걸치고 남의 농사(農事)에 손톱 발톱 달리다가
풍년(豊年) 든 벌판에서 총(銃)을 맞고 그 흙에 피를 흘리다니………

미쳐날듯이 심란한 마음 걷잡을 길 없어서
다시금 우러르니 높고 맑고 새파란 가을 하늘이외다
분(憤)한 생각 내뿜으면 저 하늘이 새빨갛게 물이 들듯하외다

1930.9.18

〈가배절〉

팔이 곱지 않았으니 더덩실 춤을 못추며
다리 못펴 병신(病身) 아니니 가로 세로 뛰진들 못하랴
벼 이삭은 고개 숙여 벌판에 금(金)물결이 일고
달빛은 초가(草家)집 용마루를 어루만지는 이 밤에―

뒷동산에 솔잎 따서 송편을 찌고
아랫목에 신청주(新淸酒) 익어선 밥풀이 동동
내고향(故鄕)의 추석(秋夕)도 그 옛날엔 풍성(豊盛)했다네
비렁뱅이도 한가위엔 배를 두드렸다네.

기쁨에 넘쳐 동네방네 모여드는 그날이 오면 기저귀로 고깔 쓰고 무둥 서지 않으리
쓰레받기로 꽹가리치며 미처나지 않으리
오오 명절(名節)이 그립구나! 단 하루의 경절(慶節)이 가지고 싶구나!

1929.9.17

〈고향은 그리워도〉

나는 내고향(故鄕)에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십년(十年)이나 되건만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넘어연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文化住宅)이 서고
사당(祠堂)헐린 자리엔 신사(神社)가 들어 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 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오대(五代)나 내려오며 살던 내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후원(後苑)의 은행(銀杏)나무나 부둥켜 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어느 누구를 만나려고 내가 가겠소?
잔뼈가 긁도록 정(情)이 든 그 산(山)과 그 들을
무슨, 낯작을 쳐들고 보드란 말이요?
번접하던 식구는 거미 같이 흩어졌는데
누가 내 손목을 잡고 옛날 이야기나 해줄 상 싶소?

무얼 하려고 내가 그 땅을 다시 밟겠소?
손수 가꾸던 화단 아래 턱이나 고이고 앉아서
지나간 꿈의 자최나 더듬어 보라는 말이요?
추억(追憶)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찢기면 어찌 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山)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前)엔
목을 매어 끌어도 내고향(故鄕)엔 가지 않겠소.

1932.10.6

〈추야장〉

귀뜨라미는 문지방을 쪼아내고
뭇버레 덩달아 밤을 써는데
눈 감고 책상 머리에 앉았으려면
내 마음은 가볍고 무서운 생각에 눌려,
깊이 모를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백(百)길 천(千)길 한정(限定)없이 가라앉는다.

그 물속에서 가만히 눈을 뜨면
작은 걱정은 송사리 떼처럼 모여들어
머리를 마주 모았다가는 흩어지고,
큰 근심은 낙지발 같은 흡반(吸盤)(흡반)으로
온 몸을 칭칭 감고 떨어질줄 모른다.
나는 그 근심을 떼치려고 몸을 뒤튼다.

그럴때마다 내 눈앞에 반짝 띠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꽃같이 새빨간 산호(珊瑚)다.
파아란 해초(海草) 속에서 불이 붙는 산호(珊瑚) 가지는
내 가슴에 둘도 없는 귀여운 패물(佩物)이다.
가지마다 새로운 정열(情熱)을 부채질하는
꺼지지않는 사랑의 조그만 표상(表象)이다.

바닷속은 캄캄하고 차디찬 물결이 흘러도
그 산호(珊瑚) 가지만 움켜쥐고 놓지 않으면
무서울 것이 없다. 괴로울 것이 없다.
불타는 사랑과 뜨거운 정열(情熱)로
이몸을 태우는 동안에는 온갖 세상 근심이
고기밥이 된다 거품처럼 흩어지고 만다.

귀뜨라미야 밤을 새워가며 울거나 말거나
바람이야 삭장귀에 몸을 매달거나 말거나
나는 잠자코 내 가슴의 보배를 어루만진다.
밝을줄 모르는 가을 밤, 깊이 모르는 바다 속에서
눈을 감고 그 산호(珊瑚) 가지를 어루만진다.

1931.10.9

〈소야락〉

달빛 같이 창백(蒼白)한 각광(脚光)을 받으며
흰 구름장 같은 를 가벼이 끌면서
처음으로 그는 를 추었다.

「챠이코프스키」의 애달픈 멜로디에 맞춰
사뿟사뿟 때어놓는 길고 희멀건 다리는
무대(舞臺)를 바다삼아 물생선처럼 뛰었다.

그 가 고대로 귀에 젖어 있다.
두 손을 젖가슴에 얹고 끝마칠 때의 가
대리석(大理石)의 조각(彫刻)인듯 지금도 내 눈속에 새긴채 있다.

그 때까지 그는 참으로 깨끗한 소녀(少女)였다.
돈과 명예(名譽)와 사나이를 모르는 귀여운 처녀(處女)였다.
나의 청춘(靑春)의 반(半)을 가져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930.9

〈첫 눈〉

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립니다.
삼승버선 엎어 신고 사뿟사뿟 내려 앉습니다.
논과 들과 초가집 용마루우에
배꽃처럼 흩어져 송이송이 내려 앉습니다.

조각조각 흩날리는 눈의 날개는
내 마음을 고이 고이 덮어 줍니다.
소복 입은 아가씨 처럼 치맛자락 벌이고
구석구석 자리를 펴고 들어앉습니다.

그 눈이 녹습니다, 녹아 내립니다.
남몰래 짓는 눈물이 속으로 흘러들듯
내 마음이 뜨거워 그 눈이 녹습니다.
추녀 끝에, 내 가슴 속에, 줄줄이 흘러 내립니다.

1930.11

〈눈 밤〉

소리 없이 내리는 눈, 한 치(寸), 두 치 마당 가득 쌓이는 밤엔
생각이 길어서 한 자(尺)외다. 한 길(丈)이외다.
편편(片片)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편지나 써서 온 세상에 뿌렸으면 합니다.

1929.12.23

〈패성의 가인〉

네 무덤에 눈이 덮였구나
흰 조갑지를 씻어서 엎어 논듯
새하얀 눈이 소복히 쌓였구나.

흑진주(黑珍珠)같이 영롱(玲瓏)하던 너의 눈도
복숭아를 쪼개논듯 연붉던 너의 입도
그리고 풀솜처럼 희고 부드럽던 너의 살도,
저 눈속에, 저 흙속에 파묻히고 말았구나.
네 마음 속의 조그만 허영(虛榮)이
죄(罪) 없는 네 몸을 죽음의 길로 이끌었다.
참새가 한섬 곡식을 다 먹지 못하고
비단 옷도 열겹 스무겹 껴입지는 못할 것을
논에 몸을 팔아 일찌감치 죽음을 샀구나.

를 전당(典當)잡혀 고무신짝을 끌고
네게로 달려 갔을 때 너는 나를 보지도 않았더니라.
병(病)든 네 몸을 위하여 그 사나이와 칼부림할 때
너는 돌아 앉아 나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더니라.
대동강(大同江)은 얼음만 풀리면 전(前)과 같이 흐르려니
이제 청류벽(淸流壁)을 끼고 도는 내 그림자만 외롭구나!
봄이나 와야 저 산(山)기슭에 새들이 울어 주지 않으랴
꽃이나 피어야 네 무덤에 한 송이 꽂아 주지 않으랴.

1925.2

〈동우〉

저 비가 줄기줄기 눈물일찐대
세어보면 천만(千萬) 줄기나 되엄즉허이,
단 한줄기 내 눈물엔 벼개만 젖지만
그 많은 눈물비엔 사태(沙汰)가 나지 않으랴
남산(南山)인들 삼각산(三角山)인들 허물어지지 않으랴.

야반(夜半)에 기적(汽笛)소리!
고기에 주린 맹수(猛獸)의 으르렁대는 소리냐
우리네 젊은 사람의 울분(鬱憤)을 뿜어내는
저력(底力) 있는 그 소리에 주돌이 움직이니
구들장 밑에서 지진(地震)이나 터지지 않으려는가?

하늘과 땅이 맛붙어서 맷돌질이나 하기를
빌고 바라는 마음 몹시도 간절하건만
단 한 길(丈) 솟지도 못하는 가엾은 이몸이여
달리다 뛰면 바단들 못 건느리만
걸음발 타는 동안에 그 비가 너무나 차구나

1929.12.14

〈선생님 생각〉

날이 몹시도 춥습니다.
방속에서 떠다 놓은 이 얼구요,
오늘밤엔 영하(零下)로도 이십도나 된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속에서 오직이나 추우시리까?
얼음장 같이 차디찬 마루방우에
담요 자락으로 노쇠(老衰)한 몸을 둘르신
선생님의 그 모양 뵈옵는 듯합니다.

석탄(石炭)을 한아궁이나 지펴넣은 온돌(溫突)우에서
홀로 딩굴며 생각하는 제 마음 속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습니다그려.
아아 무엇을 망사리고 진작 따르지 못했을까요?
남아 있어 저 한몸은 편하고 부드러워도
가슴 속엔 가 슬고 눈물이 고드름 됩니다.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보다 나이가 젊은데요
어째서 벌써 혈관(血管)의 피가 말랐을까요?
이 한밤엔 창(窓) 밖에 장사의 외치는 소리도
떨리다가는 길 바닥에 얼어 붙고
제 마음은 선생님의 신변(身邊)에 엉기어 붙습니다.
그 마음이 스러져가는 화로(火爐)(화로) 속에 깜박거리는
한 덩이 숯(木炭) 만치나 더웠으면 합니다.

1930.1.5

태양의 임종

〈태양의 임종〉

나는 너를 겨누고 눈을 흘긴다.
아침과 저녁, 너의 그림자가 살아질 때까지
「태양(太陽)이여, 네게는 운명(殞命)할 때가 돌아오지 않는가」하고.

억만년(億萬年)이나 꾸준히 우주(宇宙)를 밭갈고 있는
무서운 힘과 의지(意志)를 가지고도 너는 눈이 멀었다

사람은 뒷간 속에 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정의(正義)의 심장(心臟)은 미친 개의 잇발에 물려 뜯기되
못본체하고 세기(世紀)와 세기(世紀)를 밟고 지나가는 너의 발자최!

너는 ○억만(億萬) 촉광(燭光)의
엄청난 빛을 무심(無心)한 공간(空間)에 발사(發射)하면서
백주(白晝)에 캄캄한 지옥(地獄) 속에서 울부짖는 무리에게는
반딧불 만한 편광(片光)조차 아끼는 인색(吝嗇)한 놈이다.

네 얼굴에 여드름이 돋으면 지각(地殼)에 화산(火山)이 터지고
네 한번 진노(震怒)하면 문명(文明)을 자랑하던 도시(都市)도
하루 아침에 핥아버리는 몇만도(萬度)의
잠열(潛熱)을 지배(支配)하는 위력(偉力)을 땅속에 감추어 두고도
한 자루의 총칼을 녹일 만한 작은 힘조차
우리 젊은 사람에게 빌려주고저 하지않는다.

해여 태양(太陽)이여!
대륙(大陸)에 매어달린 조그만 이 반도(半島)가
네 눈에는 쓸 데 없는 맹장(盲腸)과 같이 보이는가?
우주(宇宙)를 창조(創造)하신 하나님도
이다지도 이다지도 짓밟혀만 살라고
악착한 운명(運命)의 부작(符爵)을 붙여서
우리의 시조(始祖)부터 흙으로 빚엇더란 말이냐?

오오 위대(偉大)한 항성(恒星)이여,
일분(一分) 동안만 네 궤도(軌道)를 미끄러져
한 걸음만 가까이 지구(地球)로 다가오라!
그러면 우리는 모조리 타죽고나 말리라.
그도 못하겠거던 한 걸음 뒤로 물러서라……
북극(北極)의 흰 곰들이나 우리의 시체(屍體)우에서
즐거이 뛰놀며 자유(自由)롭게 살리라.

나는 너를 겨누고 눈을 흘긴다.
아침과 저녁 네가 지평선(地平線)을 넘은 뒤까지도
「차라리 너의 임종(臨終) 때가 돌아오지나 않는가」하고……

1928.10

〈광란의 꿈〉

불어라, 불어!
하늘 꼭대기에서
내리질리는 하늬바람,
땅덩이 복판에 자루를 박고
모든 것을 휩싸서 핑핑 돌려라.
머릿속에 맷돌이 돌듯이
세상은 마지막이다, 불어 오너라.

쏟아져라, 쏟아져!
바다가 가꾸로 흐르듯
폭포수(瀑布水) 같은 굵은 빗발이
쉴새 없이 기울여 쏟아져서
사람의 새끼가 짓밟은
땅우의 모든 것을
부신듯이 씻어 버려라.

번갯불이 뻔쩍
으지끈 뚜욱 따악
벼락 불똥이 튀어
뾰족집을 후려갈기고
우상(偶像), 동상(銅像)을 자빠뜨리고
선정비(善政碑)(선정비), 송덕비(頌德碑)(송덕비),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영세불망비),
닥치는대로 깨뜨려서
모든 거룩하다는 것위에
벼락불의 세례(洗禮)를 내려라.

지진(地震)이다, 지진(地震), 대지진(大地震)이다!
나무뿌리가 하늘로 솟고
바윗덩이가 굴러 내린다.
지심(地心)에서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라
지구(地球)는 두 쪽에 갈라지고
모든 것은 가꾸로 섰다, 뒤집혀졌다.

불이야 불이야!
분(粉) 바른 계집의 얼굴을 끄스르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조동아리를 지져 놓아라!
길로 쌓인 인류(人類)의 역사(歷史)를
첫페지부터 살라 버리고
천만권(千萬券) 거짓말의 기록(記錄)을
모조리 깡그리 태워 버려라.

우루루, 우루루!
집채가 넘어가고 산(山)이 무너진다.
십육억(十六億) 사람의 씨알들이
악마구리 끓듯한다, 아우성을 친다.
사람은 잇발을 갈며
사람의 고기를 물어 뜯고
뼉다귀를 다투어 깨무는
주린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해골(骸骨)을 쪼아 먹는 까마귀의 떼울음!

불길이 훨훨 날으며
온 지구(地球)를 둘러쌌다,
새빨간 혀 끝이 하늘을 핥는다
모든 것은 죽어 버렸다,
영원(永遠)히 영원(永遠)히 죽어 버렸다,
명예(名譽)도, 욕망(慾望)도 권력(權力)도 야만(野蠻)도 문명(文明)도……

바람소리 빗소리!
해가 떨어지고 별은 흩어지며
땅이 울고 바다가 끓는다.
모든 것은 원소(元素)(원소)로 돌아가고
남은 것이란 희멀건 공간(空間) 뿐이다,
오오 이제까지의 인류(人類)는 멸망(滅亡)하였다!
오오 오늘까지의 우주(宇宙)는 개벽(開闢)(개벽)하고 말았다!

1923.10

〈마음의 낙인〉

마음 한복판에 속 깊이 찍혀진 낙인(烙印)을
몇 줄기 더운 눈물로 지어보려 하는가
칼끝으로 도려낸들 하나도 아닌 상처(傷處)가 가시어질 것인가
죽음은 홍소(哄笑)한다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살(自殺)한 사람의 시집(詩集)을 어루만지다 밤은 깊어서
추녀 끝의 풍경(風磬) 소리 내 상여(喪輿)머리에 요령(搖鈴)이 흔들리는듯.
혼백(魂魄)은 시꺼먼 바닷속에 잠겨 자맥질하고
허무(虛無)히 그림자 악어(鰐魚)의 입을 벌이고 등어리에 소름을 끼얹는다.
×
쓰라린 기억(記憶)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앞길은
행복(幸福)이란 도깨비가 길라잡이 노릇을 한다.
꿈속에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어릿광대들
떼처럼 뒤를 따라 바퀴를 돌고 도는걸………
×
「캄풀」주사(注射) 한 대로 절맥(絶脈)되는 목숨을 이어 보듯이
젊은이여 연애(戀愛)의 한 찰나(刹那)에 목을 매달려는가?
혈관(血管)을 토막토막 끊으면 불이라도 붙을상 싶어도
불 꺼져 재만 남은 화로(火爐)를 헤집는 마음이여!
×
모든 것이 모래밭우의 소꼽장난이나 아닌줄 알았더면
앞장을 서서 놈들과 겯고 틀어나 볼것을
길거리로 달려나가 실컷 분(憤)풀이나 할 것을
아아 지금엔 희멀건 허공(虛空)만이 내 눈 앞에 티어 있을뿐……

1930.5.24

〈토막 생각〉

날마다 불러 가는 아내의 배,
낳는 날부터 돈 들것 꼽아보다가
손가락 못편채로 잠이 들었네.
×
뱃속에 꼬물거리는 조그만 생명(生命)
「네 대(代)에나 기를 펴고 잘 살아라!」
한 마디 축복(祝福) 밖에 선사할 게 없구나.
×
「아버지」 소리를 내 어찌 들으리
나이 삼십(三十)에 해논것 없고
물려 줄것이라곤 「선인(鮮人)」밖에 없구나
×
급사(給仕)의 봉투 속이 부럽던
월급(月給)날도 다시는 안올상 싶다
그나마 실직(失職)하고 스무닷샛날.
×
전등(電燈) 끊어 가던날 밤 촉(燭)불 밑에서
나어린 아내 눈물 지며 하는 말
「시골 가 삽시다, 두더지처럼 흙이나 파먹게요.」
×
오관(五官)으로 며드는 봄
가을 바람인듯 몸서리 쳐진다.
조선(朝鮮) 팔도(八道) 어느 구석에 봄이 왔느냐.
×
불 꺼진 화로(火爐) 헤집어
담배 꼬토리를 찾아내듯이
식어버린 정열(情熱)을 더듬어 보는 봄저녁.
×
옥중(獄中)에서 처자(妻子) 잃고
길거리로 미쳐난 머리 긴 친구
밤마다 백화점(百貨店) 기웃거리며 휘파람 부네.
×
선술 한잔 내라는걸
주머니 뒤집어 털어 보이고
돌아서니 의 붉고 푸른 불.
×
그만하면 신경(神經)도 죽었으련만
알뜰한 신문(新聞)만 펴들면
불끈불끈 주먹이 쥐어지네.
×
몇 백년(百年)이나 묵어 구멍 뚫린 고목(古木)에도
가지마다 파릇파릇 새엄이 돋네
뿌리마저 썩지 않은줄이야 파보지 않은들 모르리.

1932.4.24

〈어린것에게〉

고요한 밤 너의 자는 얼굴을 무심ㅎ고 드려다볼 때,
새근새근 쉬는 네 숨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아비의 마음은 해면(海綿)처럼 사랑에 붇(潤)는다.
사랑에 겨워 고사리 같은 네 손을 가만히 쥐어도 본다.

이 손으로 너는 장차 무엇을 하려느냐
네가 씩씩하게 자라나면 무슨 일을 하려느냐,
붓대는 잡지마라, 행여 붓대만은 잡지 말아라
죽기전 아비의 유언이다 호미를 쥐어라! 쇠마치를 잡아라!

실눈을 뜨고 엄마의 젖가슴에 달려 붙어서
배냇짓으로 젖 빠는 흉내를 내는 너의 얼굴은
평화의 보드러운 날개가 고히고히 쓰다듬고
잠의 신(神)은 네 눈에 들락날락 하는구나.

내가 너를 왜 낳아 놓았는지 나도 모른다.
네가 이 알뜰한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너도 모르리라
그러나 네가 땅에 떨어지자 으아 소리를 우렁차게 지를 때
나는 들었다 그 뜻을 알았다. 억세인 삶의 소리인 것을!

(이하(以下) 십이행(十二行) 략(略))

조선 사람의 피를 백대(百代)나 천대(千代)나 이어줄 너이길래
팔 다리를 자근자근 깨물고 싶도록 네가 귀엽다.
내가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루고야말 우리 집의 업둥이길래
남달리 네가 귀엽다 꼴딱 삼키고 싶도록 네가 귀여운 것이다.

모든 무거운 짐을 요 어린것의 어깨에만 지울 것이랴
온갖 희망을 염체 네게다만 붙이고야 어찌 살겠느냐
그러나 너와 같은 앞날의 일군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든든하구나 우리의 뿌리가 열길 스무길이나 박혀 있구나.

그믐밤에 반딧불처럼 저 하늘의 별들처럼
반득여라 빛나거라 가는 곳마다 횃불을 들어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어서어서 저 주먹에 힘이 올라라
오오 우리의 강산은 온통 꽃밭이 아니냐? 별투성이가 아니냐!

1932.9.4. 재건이 낳은 지 넉달 열흘 되는날

〈R씨의 초상〉

내가 화가(畫家)여서 당신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린다면
지금 십년(十年)만에 대(對)한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면
채색(彩色)이 없어 를 들지 못하겠소이다.
화필(畫筆)이 떨려서 획(劃)하나도 긋지 못하겠소이다.

당신의 얼골에 저다지 찌들고 바래인 빛갈을 칠할
물감은 쓰리라고 생각도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마에 수(數) 없이 잡힌 주름살을 그릴
가느다란 붓은 준비(準備)도 하지않았기 때문입니다.

물결 거칠은 황포탄(黃浦灘)에서 생선(生鮮) 같이 날뛰던 당신이
고랑을 차고 삼년(三年) 동안이나 그물을 뜨다니 될뻔이나 한 일입니까
나무처럼 꿋꿋하고 물오른 버들만치나 싱싱하던 당신이
때아닌 서리를 맞아 가랑잎이 다 될줄 누가 알았으리까

「이것만 뜯어먹고도 살겠다」던 여덟 팔자(八字) 수염은
흔적(痕迹)도 없이 깎이고 그 터럭에 백발(白髮)까지 섞였습니다그려.
오오 그러나 눈만은 샛별인듯 전(前)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불똥이 떨어져도 꿈쩍도 아니하던 저 눈만은 살았소이다!

내가 화가(畫家)여서 지금 당신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린다면
백호(百號)나 되는 큰 에서 저 눈만을 그리겠소이다.
절망(絶望)을 모르고 끝까지 조금도 비관(悲觀)ㅎ지 않는
저 형형(炯炯)한 눈동자만을 전신의 힘을 다하여 한 획(劃)으로 그리겠소이다.

1932.9.5.

〈만가〉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黃昏)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同志)의 관(棺)을 메고 나간다
만장(輓章)도 명정(銘旌)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襚衣)조차 못입힌 시체(屍體)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떠메어 내오던 옥문(獄門)을 지나
철벅철벅 말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같이 껌벅이는데
동지(同志)들은 옷을 벗어 관위에 덮는다.
평생(平生)을 헐벗던 알몸이 추울상 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준다

(이하 6행은 일본 총독부 검열로 잘려져 나감)

동지(同志)들은 여전(如前)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친척(親戚)도 애인(愛人)도 따르는 이 없어도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는 산 송장들은
관(棺)을 메고 철벅철벅 무학재를 넘는다

1927.9.

〈곡 서해〉

온 종일(終日)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仁旺山)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 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 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절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이 감아집니까?

손소 내 어린것의 약(藥)을 지어다주던 그대여
어린것은 나아서 요람(搖籃)위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번 와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주시려오?

그 유모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그 사기(邪氣) 없는 표정(表情)은 어느 얼굴에서 찾드란 말이요?
사람을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읍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遺言) 한마디 아니한 그대의 심사(心思)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는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노모(老母)약처(弱妻)를 길바닥에 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삼십(三十) 평생(平生)을 숨도 크게 못쉬도록 청춘(靑春)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現實)에 치(齒)가 떨릴 뿐이외다!

1932.7.10

거국편(去國篇)

〈잘 있거라 나의 서울이여〉

오오 잘 있거라! 저주(咀呪)받은 도시(都市)여,
「폼페이」같이 폭삭 파묻히지도 못하고,
지진(地震)때 동경(東京)처럼 활활 타보지도 못하는
꺼풀만 남은 도시(都市)여, 나의 서울이여!

성벽(城壁)은 토막이 나고 문루(門樓)는 헐려
「해태」조차 주인(主人) 잃은 궁전(宮殿)을 지키지 못하며
반(半) 천년(千年)이나 네 품속에 자라난 백성들은
산(山)으로 기어오르고 두더지처럼 토막(土幕) 속을 파고들거니
이제 젊은 사람까지 등을 밀려 너를 버리고 가는구나!

남산(南山)아 잘 있거라, 한강(漢江)아 너도 잘 있거라
너희만은 옛모양을 길이길이 지켜다오!
그러나 이 길이 영원(永遠)히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겠느냐
내 눈물이 마지막 너를 조상(弔喪)하는 눈물이겠느냐
오오 빈사(瀕死)의 도시(都市), 나의 서울이여!

1927.2. 경부선(京釜線) 차(車)중(中)에서

〈현해탄〉

달밤에 현해탄(玄海灘)을 건느며
갑판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몇해 전 이 바다 어복(魚腹)에 생목숨을 던진
청춘(靑春) 남녀(男女)의 얼굴이 환등(幻燈) 같이 떠오른다.
값 비싼 오뇌(懊惱)에 백랍(白蠟)같이 창백(蒼白)한 의 얼굴
허영(虛榮)에 찌들어 여류(女流)예술가(藝術家)의 풀어 헤친 머리털,
서로 얼싸안고 물우에서 소용도리를 한다.

바다우에 바람이 일고 물결은 거칠어진다,
우국지사(憂國志士)의 한숨은 저 바람에 몇번이나 스치고
그들의 불타는 가슴 속에서 졸아 붙는 눈물은
몇번이나 비에 섞여 이 바다우에 뿌렸던가
그 동안에 얼마나 수(數) 많은 물건너 사람들은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을 부르며 새땅으로 건너 왔던가.

갑판(甲板)위에 섰자니 시름이 겨워
선실(船室)로 내려가니 「만열도항(漫熱渡航)」의 백의군(白衣群)이다.
발가락을 억지로 째어 를 꾀고
상투 자른 자리에 벙거지를 뒤집어 쓴 꼴
먹다가 버린 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강아지처럼 핥아 먹는 어린것들!

동포(同胞)의 꼴을 똑바루 볼수 없어
다시금 갑판(甲板)위로 뛰어 올라서
물속에 시선(視線)을 잠그고 맥(脈) 없이 섰자니
달빛에 명경(明鏡)같은 현해탄(玄海灘) 우에
조선(朝鮮)의 얼굴이 떠오른다!
너무나 또렷하게 조선(朝鮮)의 얼굴이 떠오른다.
눈 둘곳없어 마음 붙일곳 없어
이슥하도록 하늘의 별수(數)만 세노라.

1926.2.

〈무장야에서〉

초겨울의 무장야(無藏野)는
몹시도 쓸쓸하였다.
석양(夕陽)은 잡목림(雜木林) 삭장귀에
오렌지 빛의 낙조(落照)를 던지고
쌀쌀바람은 등어리에
우수수 낙엽(落葉)을 끼얹는데
나는 그와 어깨를 겯고
마른 풀을 밟으며 거닐었다.

두사람의 시선(視線)은 아득이
고향(故鄕)의 하늘을 더듬으며
「쏘프라노」와 「바리톤」은
나직이 망향(望鄕)의 노래를 불렀다,
내 손등에 떨어진 한 방울의
따끈한 그의 눈물은
어린 정(情)에 아름다운 결정(結晶)이매
참아 씻지를 못했었다.

이윽고 나는 참다못하여
끓어 오르는 마음을
그의 가슴에 뿜고 말았다
손을 잡고 사랑을 하소연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말이 없었다
능금 같이 빨개진 얼굴을
내 가슴에 파묻은채…………

그의 작은 가슴은
비 맞은 참새처럼 떨리고
그의 순진한 마음은
때아닌 파도(波濤)에 쓰러지는
해초(海草)와 같이 흔들렸을 것이다.
햇발이 우리의 발치를 지난 뒤에야
그는 조심스러이 입을 열었다.
내가 좀더 자라거든요
인제 세상을 알게 되거든요

나는 입을 다문채
무안에 취(醉)해서 얼굴을 붉혔다.
깨끗한 눈우에다가
모닥불을 끼얹어 준것 같아서…………
가냘픈 꽃가지를 은 것처럼
무슨 큰 죄(罪)나 저질른듯하여서…………
말없이 일어서 지향 없이 거닐었다.
쓸쓸한 황혼(黃昏)의 무장야(無藏野)를—

1927.2.

〈북경의 걸인〉

나에게 무엇을 비는가?
푸른옷 입은 린방(隣邦)의 걸인(乞人)이여
숨도 크게 못쉬고 쫓겨오는 내 행색(行色)을 보라,
선불 맞은 어린 짐승이 광야를 헤매는 꼴 같지 않으냐.

정양문(正陽門) 문루(門樓) 위에 아침 햇발을 받아
펄펄 날리는 오색기(五色旗)를 치어다보라.
네 몸은 비록 헐벗고 굶주렸어도
저 깃발 그늘에서 자라나지 않았는가?

거리거리 병영(兵營)의 유량(嚠喨)한 나팔(喇叭) 소리!
내 평생(平生)엔 한번도 못들어 보던 소리로구나
(胡同) 속에서 채상(菜商)의 웨치는 굵다란 목청
너희는 마음껏 소리 질러보고 살아 왔구나.

저 깃발은 바랬어도 대중화(大中華)의 자랑이 남고
너희 동족(同族)은 늙었어도 「잠든 사자(獅子)」의 위엄(威嚴)이 떨치거니
저다지도 허리를 굽혀 구구(區區)히 무엇을 비는고
천년(千年)이나 만년(萬年)이나 따로 살아온 백성(百姓)이어늘―

때 묻은 너희 남루(襤樓)와 바꾸어 준다면
눈물에 젖은 단거리 주의(周衣)라도 벗어 주지 않으랴
마디마디 사무친 원한을 나눠 준다면
살이라도 저며서 길바닥에 뿌려 주지 않으랴
오오 푸른옷 입은 북국(北國)의 걸인(乞人)이여!

[호동(胡同)은 골목]

1919.12.

〈고루의 삼경〉

눈이 쌓이고 쌓여
객창(客窓)을 길로 덮고
몽고(蒙古)바람 씽씽 불어
왈각달각 잠 못드는데
북이 운다 종(鍾)이 운다.
대륙(大陸)의 도시(都市), 북경(北京)의 겨울 밤에―

화로(火爐)에 메춴(매탄(煤炭))도 꺼지고
벽(壁)에는 성애가 슬어
얼음장 같은 위에
새우처럼 오그린 몸이
북소리 종(鍾)소리에 부들부들 떨린다.
지구(地球)의 맨 밑바닥에 동그마니 앉은듯
마음조차 고독(孤獨)에 덜덜덜 떨린다.

거리에 땡그렁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호콩장사도 인제는 얼어 죽었나보다.
입술을 꼭꼭 깨물고 이 한밤을 새우면
집에서 편지나 올까? 돈이나 올까?
한 조각 얻어먹고 긴밤을 떠는데
고루(鼓樓)에 북이 운다 종(鍾)이 운다

(은 나무침상(寢床) 는 밀가루떡)

1919.12.12. 북경(北京)에서

〈심야과황하〉

별그림자……그믐밤의 적막(寂寞)을 헤치며
화차는 황하(黃河)의 철교(鐵橋) 위를 달린다
산(山) 하나 없는 양안(兩岸)의 묘망(渺茫)한 평야(平野)는
태고(太古)의 신비(神祕)를 감춘듯 등(燈)불만 깜박이고
황하(黃河)는 장사(長蛇)와 같이 꿈틀거리며
중원(中源)의 복판을 뚫고 묵묵(默默)히 흐른다.

찬란(燦爛)하던 동방(東方)의 문명(文明)은
이 강(江)의 물줄기를 따라 일어났고
사억(四億)이나 되는 중화(中華)의 족속(族屬)은
이 연안(沿岸)에서 역사(歷史)의 첫페지를 꾸몄거니.

이제 천년(千年) 만년(萬年) 굽이져 흐르는
물줄기는 싯누렇게 지쳐 늘어지고
이 물을 마시고 자라난 백성(百姓)들은
아직도 고달픈 옛꿈에 잠이 깊은데
난데 없는 우렁찬 철마(鐵馬)의 울음소리!
무심(無心)한 나그네를 싣고 화차(火車)는 황하(黃河)를 건는다.

1920.2

〈상해의 밤〉

우중충한 (弄堂) 속으로
장사 모여들어 딱딱이 칠 때면
두 어깨 웅승그린 년놈의 떠드는 세상
집집마다 마작(麻雀)판 뚜드리는 소리에
아편에 취(醉)한듯 상해(上海)의 밤은 깊어가네.

발 벗은 소녀(少女), 눈먼 늙은이를 이끌며
구슬푼 호궁(胡弓)에 맞춰 부르는 맹강녀(孟姜女)노래,
애처롭구나 객창(客窓)에 그 소리 창자(膓子)를 끊네.

사마로(四馬路) 오마로(五馬路) 골목 골목엔
「이래양듸」, 「량쾌양듸」 인육(人肉)의 저자
침의(寢衣)바람으로 숨바꼭질하는 의 콧잔등이엔
매독(梅毒)이 우굴우굴 악취(惡臭)를 풍기네

집 떠난 젊은이들은 노주(老酒)잔을 기울여
걷잡을 길 없는 향수(鄕愁)에 한숨이 길고
취(醉)하고 취(醉)하여 뼛속까지 취(醉)하여서는
팔을 뽑아 장검(長劍)인 듯 내두르다가
채관(菜舘) 에 쓰러지며 통곡(痛哭)을 하네.

어제도 오늘도 산란(散亂)한 혁명(革命)의 꿈자리!
용솟음치는 붉은 피 뿌릴 곳을 찾는
「」 망명객(亡命客)의 심사를 뉘라서 알고
영희원(影戱院)의 만 눈물에 젖네.

1920.11

(弄堂)……세(貰)주는집
……조그만 만두속 같은 것을 빚어넣은 탕(湯)
……『야계(野鷄)』 매소부(賣笑婦)중(中)에도 저급(低級)한 종류(種類)
……고려(高麗)

항주유기(杭州遊記)

〈항주유기〉

항주(杭州)는 나의 제이(第二)의 고향(故鄕)이다. 미면(未免)계관(鷄冠)의 가장 하던 시절(時節)은 이개(二個)성상(星霜)이나 서자호(西子湖)와 전당강변(錢塘江邊)에 핍류(逼留)하였다. 벌써 십년(十年)이나 되는 옛날이언만 그 명미(明眉)한 산천(山川)이 몽매간(夢寐間)에도 잊히지 않고 그 곳의 단려(端麗)한 풍물(風物)이 달콤한 애상(哀傷)과 함께 지금도 머릿속에 채를 잡고 있다. 더구나 그 때에 유배(流配)나 당(當)한듯이 호반(湖畔)에 소요(逍遙)하시던 석오(石吾), 성재(省齋) 두분 선생(先生)님과 고생(苦生)을 같이 하며 허심탄회(虛心坦懷)로 교유(交遊)하던 엄일파(嚴一波), 염온동(廉溫東), 정진국(鄭鎭國)등(等) 제우(諸友)가 몹시 그립다. 유랑민(流浪民)의 신세(身)―, 부유(蜉蝣)와 같은지라 한번 동서(東西)로 흩어진 뒤에는 안신(雁信)조차 바꾸지 못하니 면면(綿綿)한 정회(情懷)가 절계(節季)를 따라 간절(懇切)하다. 이제 추억의 실마리를 붙잡고 학창시대(學窓時代)에 끄적여 두었던 묵은 수첩(手帖)의 먼지를 털어 본다, 그러나 항주(杭州)와는 인연(因緣)이 깊던 백낙천(白樂天), 소동파(蘇東坡) 같은 시인(詩人)의 명편(名篇)을 예빙(例憑)ㅎ지 못하니 생색(生色)이 적고 또 고문(古文)을 섭력한 바도 없어 다만 시조체(時調體)로 십여수(十餘首)를 벌여볼 뿐이다.

〈평호추월〉

(一)
중천(中天)의 달빛은 호심(湖心)으로 쏟아지고
향수(鄕愁)는 이슬 내리듯 마음 속을 적시네
선잠 깬 어린 물새는 뉘설음에 우느뇨

『이십리(二十里) 주위(周圍)나 되는 넓은 호수(湖水) 한복판에 떠 있는 수간모옥(數間茅屋)이 호심정(湖心亭)이다.』

(二)
손바닥 부륻도록 뱃전을 뚜드리며
「동해(東海)물과 백두산(白頭山)」 떼를 지어 부르다가
동무를 얼싸안고서 느껴느껴 울었네

(三)
나 어려 귀 너머로 들었던 적벽부(赤壁賦)를
운파만리(雲波萬里) 예 와서 당음(唐音)읽듯 외단말가
우화이(羽化而) 귀향(歸鄕)하여서 내 어버이 뵈옵고저.

〈삼담인월〉

삼담(三潭)에 잠긴 달을 무엇으로 건저볼꼬
팔 벌려 건지자니 달은 등에 업혔고나
긴밤을 달한짐 지고 꾸벅꾸벅 거니네.

『동파(東坡)에 항주(杭州)자사(刺史)로 있을 때 쌓은 석탑(石塔) 셋이 남아 있다. 달 밝은 밤에는 수면(水面)에 그림자 셋을 떨어뜨려 전아(典雅)한 당우(堂宇)와 함께 물우에 부침(浮沈)한다.』

〈채련곡〉

(一)
(裏湖)로 일엽주방(一葉晝舫) 소리 없이 저어드니
연(蓮) 잎새 뱃바닥을 간지리듯 쓰다듬네
사르르 풍기는 향기(香氣)에 잠이 들듯하구나.

『백낙천(白樂天)이 쌓은 백제(白堤)로터 서북(西北)으로 보초탑(保塔) 아래까지가 이호(裏湖)니 백련(白蓮) 인련(仁蓮)이 뒤덮인 것이 온통 연포(蓮浦)다.』

(二)
콧노래 부르면서 연근(蓮根) 캐는 저 (姑娘)
걷어 붙인 팔뚝 보소 백어(白魚) 같이 노니누나
연(蓮)밥 한톨 던졌더니 고개 갸웃 웃더라

『(꾸냥)은 처자(處子).』

(三)
누에가 뽕잎 썰듯 세우성(細雨聲) 잦아진듯
연(蓮)봉오리 푸시시 기지개 켜는 소릴러라
연붉은 꽃입술 담쑥 안고 입맞춘들 어떠리.

〈소제춘효〉

동파(東坡)가 쌓은 소제(蘇堤) 사립(娑笠) 쓴 저 노옹(老翁)아
오월(吳越)은 어제런듯 그 양자(樣子)만 남았고나
죽장(竹杖)을 낚대삼고서 고기 낚고 늙더라.

『호수(湖水)의 서남(西南)에 가로걸린 장제(長堤)가 소식(蘇軾)이 항주(杭州)자사(刺史)로 있을 때 쌓은 소제(蘇堤)다.』

〈남병만종〉

나귀를 채찍하여 남병산(南屛山)에 치달으니
만종(晩鐘) 소리 잔물결에 주름 잡혀 남실남실
고탑(古塔)의 까마귀 떼는 낯설다고 우짖더라

『고탑(古塔)의 서남단(西南端)의 뇌봉탑(雷峰塔)을 가리킨 것이요 그 탑(塔)이 선 산(山)이 남병산(南屛山)이다.』

〈누외루〉

술을 마시고 싶어서 인호상의(引壺觴而) 자작(自酌)할까
가슴 속 타는 불을 꺼보려는 심사(心思)로다
취하여 난간(欄杆)에 기대서니 어울리지 않더라.

『누외루(樓外樓)는 호반(湖畔)의 이름, 정면(正面)에 큰 체경(體鏡)을 장치(裝置)하여 수면(水面)을 반조(反照)하니 화방(花舫)의 남녀(男女)―한쌍의 원앙(鴛鴦)인듯 선어(鮮魚)로 안주하여 때로 통음(痛飮)하다.』

〈방학정〉

방학정(放鶴亭) 주난간(朱欄杆)에 하루종일(終日) 기다려도
구름만 오락가락 학(鶴)은 아니 돌아오고
임처사(林處士) 무덤 곁에는 늙은 매화(梅花) 수절(守節)ㅎ더라.

『매화(梅花)를 아내삼고 학(鶴)을 아들 삼아 종생(終生)을 은둔(隱遯)했다는 임포(林逋)의 무덤과 학총(鶴塚)이 고산(孤山)에 있다.』

〈악왕분〉

천년(千年) 묵은 송백(松柏)은 얼크러져 뫼를 덮고
애닯다 만고정충(萬古精忠) 길이길이 잠들었네,
진회(秦檜)란놈 쇠사슬 찬채 남의 침만 받더라.

『수년전(數年前) 독군(督軍) 노영상(盧永祥)이 개수(改修)한 후(後)에는―악왕분(岳王墳)상초처처(上草萋萋)―같은 느낌을 받을 수 없을 만치 백의(白衣)로 봉분(封墳)을 발러버렸다.』

〈고려사〉

운연(雲烟)이 잦아든 골에 독경(讀經)소리 그윽ㅎ고나
예 와서 고려태자(高麗太子) 무슨 도(道)를 닦았던고
그래서 내집인 양하여 두번 세번 찾았네

『호수(湖水)의 남단(南端)에 고려태자(高麗太子)가 세웠다는 낡은 소찰(小刹)이 있다, 사승(史乘)에 실린 여부(與否)는 모르나 여가지(女佳持)의 환대(歡待)가 매양 은훈(慇勳)하였다.』

〈항성의 밤〉

항성(杭城)의 밤저녁은 개가 짖어 깊어가네
비단(緋緞)짜는 오희(吳姬)는 어이 날밤 새우는고
뉘라서 나그네 근심을 을을이 엮어주리.

『시가(市街)가 정제(整齊)하고 깨끗하기가 중국(中國)도시(都市)중(中)에는 항주(杭州)가 으뜸이리라. 고전미(古典美)는 적으되 물색(物色)이 소주(蘇州)에 비길바 아니다.』

〈전당강 상에서〉

가거라! 가거라!
지나간 날의 애처로운 자최여
가엾이도 희고 여윈 얼굴이여
나의 머리에서 가거라!

눈앞에 보이지도 말고
꿈속에 오지도 말고
소낙비 뒤의 구름 같이
흩어져 없어져서
다시는 내 마음 기슭으로
기어들지를 말아라.

불같은 를 주던
나의 입술은
하욤 없는 한숨에 마르고
보드러운 품에 안기던 가슴속엔
서리가 내렸다.

아! 첫사랑의 애닯던 꿈이여!
두견새 우는 느근한 봄밤
나그네의 베개머리로는
제발 떠오르지를 말아라

사월(四月)팔일(八日)밤

* 전당강(錢塘江) (전당강); 쳰탕지앙(钱塘江): 중국(中國) 저장성(浙江省)을 북동으로 흘러 항주만(杭州灣)으로 흐르는 강(江).

〈겨울밤에 내리는 비〉

뒤숭숭한 이상스러운 꿈에
어렴풋이 잠이 깨어
힘없이 눈을 뜬채 늘어져
창 밖의 밤비 소리를 듣고 있다.

음습한 바람은 방안을 휘돌고
개는 짖어 컴컴한 성안을 울릴 제
철 아닌 겨울밤에 내리는 비!
나의 마음은 눈물비에 고요히 젖는다.

이팔로 향기로운 애인의 머리를 안고
여름밤 섬돌에 덛는 낙수의
즐거운 속살거림에 첫닭이 울던
그윽하던 그밤은 벌써 옛날이어라.

오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꿈에라도 좋으니 잠깐만 다녀가소서
찬비는 객창에 부딪치는데 긴긴 이밤을
아, 나홀로 어찌나 밝히잔 말이냐.

〈기적〉

깊은 밤, 캄캄한 하늘에
길게 우는 저 기적 소리
어디로서 오는 차인지,
그는 몰라도
만나서 웃거나 보내고 울거나
나는 몰라도
간신히 얻은 고운 임의 꿈을
행여 깨우지나 말아라.

(2월 16일)

〈뻐꾹새가 운다〉

오늘 밤도 뻐꾹새는 자꾸만 운다
깊은 산속 빈 골짜기에서
울려나오는 애처로운 소리에
애끊는 눈물은 베개를 또 적시었다.

나는 뻐꾹새에게 물어 보았다
「밤은 깊어 다른 새는 다 깃들었는데
너는 무엇이 설기에 피나게 우느냐」 라고
뻐꾹새는 내게 도로 묻는다
「밤은 깊어 사람들은 다 꿈을 꾸는데
당신은 왜 울며 밤을 밝히오」 라고.

아 사람의 속 모르는 날짐승이
나의 가슴 아픈 줄을 제 어찌 알까
고국은 멀고 먼데 임은 병들었다니
참아 그가 못잊어 잠 못드는줄
더구나 남의 나라 뻐꾹새가 제 어찌 알까.

5월 5일밤 남경(南京)서

수필

〈조선의 영웅〉

우리 집과 등성이 하나를 격(隔)한 야학당(夜學堂)에서 종(鍾)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집 편(便)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에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모여가는 소리와, 아홉시 반이면 파(罷)해서 흩어져가며 재깔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틈에 한 번쯤은 보던 책(冊)이나 들었던 붓을 던지고 가서 둘러보고 오는데 금년(今年)에는 토(土)담으로 쌓은 것이나마 새로 지은 야학당(夜學堂)에 여(女) 아동(兒童)이 팔십명(八十名)이나 들어 와서 세 반(班)에 나누어 가르친다. 물론(勿論) 오리(五里) 밖에 있는 보통학교(普通學校)에도 입학(入學)하지 못하는 극빈자(極貧者)의 자녀(子女)들인데 선생(先生)들도 또한 보교(普校)를 졸업(卒業)한 정도(程度)의 청년(靑年)들로 밤에 「가마니」때기라도 치지 않으면 잔돈푼 구경도 할 수 없는 처지(處地)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시간(時間)과 집안 살림을 희생(犧牲)하고 하루저녁도 빠지지 않고 와서는 교편(敎鞭)을 잡고 아이들과 저녁내 입씨름을 한다. 그 중(中)에는 동절(冬節)에 보리밥을 먹고 보리도 떨어지면 시래기 죽을 끓여 먹고 와서는 이팝이나 두둑히 먹고 온 듯이 목소리를 높여 글을 가르친다. 서너 시간(時間) 동안이나 칠판(漆板) 밑에 꼿꼿이 서서 선머슴 아이들과 소견 좁은 계집애들과 아귀다툼을 하고나면 상체(上體)의 피가 다리로 내려 몰리고 허기가 심(甚)해져서 나중에는 아이들의 얼굴이 돋보기 안경(眼境)을 쓰고 보는듯하다고 한다. 그러한 술회(述懷)를 들을 때 그네들을 직접(直接)으로 도라줄 시간(時間)과 자유(自由)가 아울러 없는 나로서는 양심(良心)의 고통(苦痛)을 느낄 때가 많다.

◇

표면(表面)에 나서서 행동(行動)하지 못하고 배후(背後)에서 동정자(同情者)나 후원자(後援者)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處地)에 놓여 있기 때문에 곁의 사람이 엿보지 못할 고민(苦悶)이 있다. 그네들의 속으로 벗고 뛰어들어서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하지 못하는 곳에 시대(時代)의 기형아(畸形兒)인 창백(蒼白)한 「인테리」로서의 탄식(歎息)이 있다.

나는 농촌(農村)을 제재(題材)로 한 작품(作品)을 두어 편(篇)이나 썼다. 그러나 나 자신(自身)은 농민(農民)도 아니요 농촌운동자(農村運動者)도 아니다. 이른바 작가(作家)는 자연(自然)과 인물(人物)을 보고 느낀대로 스케취판(板)에 옮기는, 화가(畫家)와 같이, 아무 것에도 구애(拘礙)되지않는 자유(自由)로운 처지(處地)에 몸을 두어, 오직 관조(觀照)의 세계(世界)에만 살아야하는 종류(種類)의 인간(人間)인지는 모른다. 또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세계(現實世界)에 입각(立脚)해서 전적(全的) 존재(存在)의 의의(意義)를 방불(髣髴)ㅎ게 하는 재조(才操)가 예술(藝術)일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물 위의 기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예술가(藝術家)의 무리는, 실사회(實社會)에 있어서 한군데도 쓸 모가 없는 부유층(蜉蝤層)에 속(屬)한다. 너무나 고답적(高踏的)이요 비생산적(非生産的)이어서 몹시 거치장스러운 존재(存在)다. 시각(視角)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호의(好意)로 바라다 본다면 세속(世俗)의 누(累)를 떨어버리고 오색(五色) 구름을 타고서 고왕독맥(孤往獨驀)하려는 기개(氣)가 부러울 것도 같으나 기실(其實)은 단 하루도 입에 거미줄을 치고는 살지 못하는 유약(懦弱)한 인간(人間)이다. 「귀족(貴族)들이 좀 더 젠체하고 뽐내지 못하는 것은 저이들도 측간(廁間)에 오르기 때문이다」라고 뾰죽한 소리를 한 【아꾸다가와(芥川)의】 말이 생각 나거니와 예술가(藝術家)라고 결(決)코 특수부락(特殊部落)의 백성(百姓)도 아니요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일민(逸民)도 아닌 것이다.

◇

적지아니 탈선(脫線)이 되었지만 백(百) 가지 천(千) 가지 골이 아픈 이론(理論)보다도 한 가지나마 실행(實行)하는 사람을 숭앙(崇仰)하고 싶다. 살살 입살발림만 하고 턱밑의 먼지만 톡톡 털고 앉은 백명(百名)의 이론가(理論家) 천명(천명)의 예술가(藝術家)보다도 우리에게는 단 한 사람의 농촌(農村) 청년(靑年)이 소중(所重)하다. 시래기 죽을 먹고 겨우내 「가갸거겨」를 가르치는 것을 천직(天職)이나 의무(義務)로 여기는 순진(純眞)한 계몽(啓蒙) 운동자(運動者)는, 조선(朝鮮)의 영웅(英雄)이다.

나는 영웅(英雄)을 숭배(崇拜)하기는커녕 그 얼굴에 침을 뱉고자 하는 자(者)이다. 그러나 이 농촌(農村)의 소영웅(小英雄)들 앞에서는 머리를 들지 못한다.

그네들을 쳐다볼 면목(面目)이 없기 때문이다.

〈2월 초하룻날〉

이월(二月) 초(初)하루는 머슴의 설날이라 한다. 남의 논 마지기를 얻어 하거나 밥술 먹는 집의 머슴 노릇을 해서 농노(農奴)의 생활(生活)을 하는 그네들이 일년(一年)에 한 번 먹고 마시고 마음껏 뛰노는 날이 이 이월(二月) 초(初) 하루다.

아침부터 밤이 이슥하도록 아래 윗 마을에서 징, 꽹가리, 새납, 장고 같은 풍물을 불며 뚜드리는 소리가 끊일 사이 없이 들린다. 그네들이 두레를 노는 광경(光景)은 「상록수(常綠樹)」 중(中)에도 묘사(描寫)한 바 있어 략(略)하지만, 아직도 눈이 풀풀 흿날리는 그믐밤, 고등(孤燈)아래서 종이 위에 「펜」을 달리면서, 바람결에 가까이 또는 꿈 속 같이 은은히 들려 오는 그 소리를 들으면 미상불 향토적(鄕土的) 정서(情緖)에 사로 잡히게 된다. 그러나 낮에 그네들이 뛰놀던 정경(情景)을 눈 앞에 그려 보면 다시금 우울증(憂鬱症)이 복바쳐 오르는 것을 억제(抑制)할 수 없다.

◇

이 궁벽(窮僻)한 해변(海邊) 산촌(山村)에 수간(數間) 모옥(茅屋)을 짓고 죄(罪) 없는 귀양살이를 하게 된 후(後)로 다만 고적(孤寂)과 벗을 삼고 지내기 이미 만(滿) 삼년(三年)이나 되었다. 비록 「구아조찰난위청(嘔啞晭哳難爲聽)」일망정, 산가(山歌)와 촌적(村笛)이나마 그리워서, 두렛군들과 얼려 다니며 막걸리 사발도 얻어 먹고, 춤추는 흉내도 내어 보았다.

첫 해에는 누데기를 벗지 못한 머슴군들이 헌털뱅이 패랭이를 쓰고 곤댓짓을 해서 긴 상무를 돌리며, 호적(胡笛)가락 꽹가리 장단(長短)에 요두전목(搖頭轉目)을 하는 것이며, 신명이 나서 개구리처럼 뛰노는 것이 남양(南洋)의 토인부락(土人部落)으로나 들어 찰듯 야만인종(野蠻人種)의 놀음 같이 보였다.

그렇더니 그 다음에는 두레는 농촌(農村) 오락(娛樂)으로 없지 못할 것 같이 생각 되었다. 좀 더 규모(規模)를 크게하고 통제(統制) 있게 놀도록 지도(指導) 장려(獎勵)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금년(今年)에 와서는 두레를 보는 관점(觀點)이 변(變)해졌다. 조석(朝夕)으로 만나고 사이 좋게 지내던 아래 웃 동리(洞里)가 합(合)하기만 하면 반드시 시비(是非)가 나고, 시비(是非) 끝에는 싸움으로 끝을 마춘다. 그것은 유식(有識) 무식(無識) 간(間)에 두 세 사람만 모여도 자그락거리고 합심(合心) 단결(團結)이 되지 못하는 조선(朝鮮)놈의 본색(本色)이라, 씨알머리가 밉기도 하려니와, 한 편으로 돌이켜 생각하면 가없기가 짝이 없다. 배를 싫건 불린다는 날 집집으로 돌아 다니며 얻어 먹은 것이라고는, 끽해야 두부쪽 콩나물 대가리에 돼지 죽 같이 틉틉한 막걸리 뿐이다.

평소(平素)부터 영양(營養) 부족(不足)에 걸린 그네들은 그나마 걸더듬을 해서 그 술을 마시고, 걸신이 들린 것처럼 그 거친 음식(飮食)을 어귀어귀 걷어 넣는다. 그러고는 온 종일(終日) 뚜드리고 뛰놀면서 온 동내(洞內)를 돌아다니고 나니, 「알콜」 기운은 그네들의 창자(膓子)와 단순(單純)한 신경(神經)을 자극(刺戟)시켜서, 악성(惡性)으로 취(醉)하게 한다. 곤죽이 되도록 취(醉)하고 나니 대소럽지 않은 일에 충돌(衝突)이 되고 평소(平素)의 불평(不平)이 폭발(爆發)되면 유혈(流血)의 참극(慘劇)까지도 연출(演出)하게 되는 것이다.

◇

오늘 저녁에는 주막(酒幕)거리에서 그런 광경(光景)을 보다못해서 달려가 뜯어 말렸다. 몇%밖에 아니되는 「알콜」 기운을 이기지 못해서 두눈이 만경을 한 것처럼 개개 풀렸는데 시척 건드리기만 해도 픽픽 쓰러지는 그네들의 육체(肉體)는 흡사(恰似)히 말라빠진 북어(北魚)를 물에다 불려 논 것 같다.

그러나 그네들의 혈색(血色)없는 입은 「우리에게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의 영향(營養)을 달라!」고 부르짖을 줄 모른다. 자기(自己)네의 빈곤(貧困)과 무지(無智)를 아직도 팔자(八字) 탓으로만 돌릴 뿐.

오오 형해(形骸)만 남은 백만(百萬) 천만(千萬)의 숙명론자(宿命論者)여!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그 숙명(宿命)을 짊어지고 살려는가? 중추신경(中樞神經)이 물러앉은채로 그 누구를 위(爲)하여 대대(代代) 손손(孫孫)이 이땅의 두더지 노릇을 하려는가?

〈적권세심기〉

마당에 엿장수가 왔다. 가윗 소리를 들은 어린 놈이 귀가 번쩍 띠어서 사랑방으로 화닥닥 뛰어 들었다.

「아버지 엿장수 왔어」

「응」

「나 엿 사줘」

「응응」

원고(原稿) 쓰기에 몰두(沒頭)한 아비는 코대답만 하니까 어린 놈은 대들어 아비의 머리를 꺼둘르고 붓을 빼앗어 던진다.

「가만 있어 사주께」

하면서도 아비는 무슨 혼신(魂神)이 씨운 사람처럼 붓을 집어 들고 쓰던 글을 계속(繼續)하려 한다.

엿장수는 바루 창(窓)밑까지 와서 찔그렁 쩔그렁 가윗 소리를 낸다.

어린 것은 그만 떼가 나왔다.

「어서 사줘. 어서어서 왜 엿장수 오면 사준댔지」

재촉이 성화 같다가 나중에는 발버둥질을 치고 몸부림을 땅땅 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붓을 먼지고 호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은 물론(勿論) 책상설합을 열어 보고 안방으로 건너가, 머릿장, 경대(鏡臺) 설합까지 들들 뒤져도 일전(一錢) 한 푼이 나오지를 않는다.

「아아니 일전(一錢) 한 푼이 없어?」

나는 화가 더럭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십이전(十二錢)밖에 없던거 엊저녁에 석유(石油) 사지 않았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송곳 끝 같다. 심청 사나운 엿장수는 대문간(大門間)까지 와서 엿 목판(木板)을 열어 뵈는데 어린 것은 손고락을 물고 드려다보다가 그만 비쭉비쭉 울기를 시작한다.

「내 내일 장에 가서 과자 사다주께 울지 마, 울지 말어」

달래도 타일러도 어린 것은 말을 아니 듣는다. 아비는 정말 골딱지가 나서

「예에라 요눔의 자식!」

하고 우는 놈의 귀퉁이를 쥐어 박았다. 어린 것은 그만 통곡(痛哭)이 나왔다. 아내는

「동냥도 안주고 쪽박 깨뜨려 보낸다더니 엿 한 푼어치 못 사주면서 그 애가 뭘 잘 못했기에 손찌검까지 한단 말요」 하고 자식 역성을 뿌옇게 한다. 게다가 젖 떨어진 둘쨋 놈은 영문도 모르고 귀가 따갑도록 울어싸서 집안은 그만 난가(亂家)를 이루었다.

◇

엿장수는 무색(無色)해서 엿 목판(木板)을 짊어지고 집 모퉁이로 돌아 갔다. 어린 것을 무릎 위에 눈물을 씻겨주며 꾀송꾀송 달래는 아비의 속은 부글부글 끓는 것 같다. 아무튼 솔 붙이고 살림을 하는 집안에 단 일전(一錢) 한 푼이 없어 소동(騷動)을 일으킨다는 것은 스스로도 곧이가 들리지 않거니와 생활(生活)의 책임(責任)을 진 소위(所謂) 가장(家長)으로서의 위신(威信)과 면목(面目)이 일시(一時)에 땅에 떨어진 생각을 하니 분(憤)하기 짝이 없다.

이놈의 현실(現實)에서 서투른 붓 끝을 놀려 호구(糊口)를 하려는 것도 애당초에 망녕된 생각이어니와 빈약(貧弱)한 머릿속을 박박 긁고 때로는 피를 쥐어짜듯 해서 창작(創作)을 한것이 겨우 담배 값 밖에 아니될 때 책상(冊床)이고 잉크병(瓶)이고 오지끈 아지끈 바수어 버리고 싶다. 그러면서도 청빈(淸貧)한 문사(文士)로서의 자존심(自尊心)을 가지려는 염치(廉恥)가 개를 보기도 부끄러운 때가 있다.

「반소식(飯蔬食) 음수(飲水)하고 곡굉이침지(曲肱而枕之)라도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이라고 한 이천년(二千年) 전(前)의 안연(顔淵)의 얼굴이 보고 싶다. 문학(文學)도 예술(藝術)도 다 귀찮고 발바닥만 핥고도 산다는 곰(熊)의 신세(身勢)가 부럽다. 무엇보다도 공기(空氣)만 마시고 냉수(冷水)만 먹고도 경변(硬便)을 누는 재조(才操)를 배우고 싶다.

◇

없거던 씻은듯 부신듯이 없거라. 문자(文字)대로 「적빈여세(赤貧如洗)」함이 오히려 뱃속이나 편(便)할는지 모른다. 더러운 재물(財物)이 덕지덕지 붙은 것보다는 책상(冊床)머리에 두손 싹싹 부비고 앉은 사람이 오히려 천공해윤(天空海潤)의 심경(心境)을 가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울지마 우리 착한 애기 울지마, 이것 써 보내서 돈 오거들랑 과자 사주께. 미루꾸 사주께 응 응」

〈봄은 어느 곳에?〉

「불꺼진 화로(火爐)를 헤집어
담배 꼬토리를 찾아 내듯이
식어버린 정열(情熱)을
더듬어 보는 봄 저녁」

「몇 백년(百年)이나 묵어서
구녁 뚫린 고목(古木)에도
가지마다 파릇파릇
새 엄이 돋아 나네
뿌리마저 썩지 않은 줄이야
파보지 않은들 모르리」

〈7월의 바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트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어려서 부르던 노래를 휘파람 섞어 부르며 뱀이 지내간 자국만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과연(果然) 집이 있다! 하늘을 꿰뚫을듯 열길이나 까마아득하게 솟아오른 백양목(白楊木) 그늘 속에서 게딱지 같은 오막살이 한 채를 발견(發見)하였다.

(저기서 사람이 살다니, 무얼 먹고 살까?)

나는 단장(短杖)을 휘두르면 내려갔다. 추녀와 땅바닥이 마주 닿은 듯한 그나마도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속에서 육십(六十)도 넘어 보이는 노파(老婆)가 나왔다. 쑥방석 같은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면서 맨발로 나오더니

「아 어디서 사시는 양반인데……이 섬 구석엘 이렇게 찾아 오셨시유?」

하고, 바로 이웃집에서 살던 사람이나 만난듯 얼굴의 주름살을 펴면서 나를 반긴다.

「여기서 혼자 사우?」

나는 그 노파(老婆)가 말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을 이상(異常)히 여길 지경이었다.

「아들허구 손주새끼허구 살어유」

「아들은 어디 갔소?」

「중선으로 준치 잡으로 갔슈」

노파(老婆)는 흐릿한 눈으로 아득한 바다 저편을 건너다본다. 그 정기(精氣) 없는 눈동자에는 무한(無限)한 고적(孤寂)에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인생(人生)의 낙조(落照)가 비치지 않는가? 백양목(白楊木) 윗 가지에는 바람이 씽씽 분다. 이름도 모를 물새가 흰 날개를 펼치고 그 위를 난다.

「쓸쓸해서 어떻게 사우?」

나는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여북해야 인간 구경두 못허구 이런 데서 사나유, 농사처가 떨어져서 죽지 못해 이리루 왔지유」

나는 참아 더 묻기 어려워 머리를 숙이고 돌아 서는데, 노파(老婆)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침침한 부엌 속으로 들어간다. 수숫대로 엮은 울타리 밖에는 마늘과 파를 심었다. 북채 만한 팟종에는 씨가 앉아 알록달록한 나비가 쌍쌍이 날아 다닌다. 조금 있자

「이거나 하나 맛보시유」

하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돌려다보니 노파(老婆)는 손바닥 만한 꽃게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내 어찌 이 불쌍한 노파(老婆)의 친절을 물리치랴. 나는 마당 구석에 가 쭈그리고 앉아서 짭짤한 삶은 겟발을 맛있게 뜯었다. 그대로 돌아설 수가 없어 백동전(白銅錢) 한푼을 꺼내어 한사(限死)코 아니 받는 노파(老婆)의 손에 쥐어 주고 나왔다.

(아아, 인생(人生)의 쓸쓸한 자태(姿態)여!)

나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그집 모퉁이를 돌아 나오려는데 등뒤에서

「응아 응아」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가 우는구나! 그 늙은이의 손주가 우나보다)

나는 발을 멈추었다. 불현듯 그 어린애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한번 안아보고 싶은 충동(衝動)을 억제(抑制)할 수 없어 발을 돌렸다. 토굴(土窟) 속 같은 방 속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에 달라붙어 젖을 빠는 것은 이집의 옥동자(玉童子)였다. 그 침침한 흙방 속이 이 어린애의 흰 살빛으로 환하게 밝은듯.

「나 좀 안아 봅시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살이 삐죽삐죽 나오는 베옷 한벌로 앞을 가린 젊은 어머니는 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한다. 노파(老婆)는

「이 더러운 걸」

하며 손주를 젖에서 떼어다간 내 팔에 안겨준다.

어린 것은 젖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사지(四肢)를 바둥거리며 내 얼굴을 말끄럼이 쳐다본다. 울지도 않고 낯도 가리지 않고 반가운 인사나 하는듯 무어라고 옹알거린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손가락을 제 힘껏 감아쥐고는 놓지를 않는다.

까만 눈동자의 별 같이 영롱(玲瓏)함이여! 조그만 코와 입모습의 예뿜이여!

나는 가슴에 옮겨드는 어린 생명(生命)의 따스한 체온(體溫)에서 떨어지기 어려웠다. 이 고도(孤島)의 어린 주인(主人)을 떼치고 참아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바다 위에는 저녁 바람이 일어 성낸 물결은 바윗돌에 철썩철썩 부딪친다. 내 얼굴에는 찬 빗발이 뿌리고 백양목(白楊木)은 더 한층 처창(棲槍)한 소리를 내며 회색(灰色)빛 하늘을 비질 한다.

내가 그집에서 나오자 어린애는 다시 울었다. 걸어 오면서도 배를 타면서도 등뒤에서 「응아 응아」 하는 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들렸다. 머리 위에서 날으는 물새의 우는 소리조차 그 어린애의 애처로운 울음소리인 듯.

◇

(그 어린애가 잘 자라는가?)

(그들은 그저 그 섬 속에서 사는가?)

그 뒤로 나는 바람 부는 아침 눈 오는 밤에 몇번이나 베갯머리에서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아이가 병(病) 없이 자라기를 빌어 주었다.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언제까지나 내 귀바퀴를 돌며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일년(一年)이란 세월(歲月)이 꿈결 같이 흘렀다. 며칠 전(前)에 나는 마을의 젊은 친구들과 함께 숭어 잡는 구경을 하려고 나갔다가 「가치내」 섬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 노파(老婆)와 젊은 며느리는 전(前)보다도 갑절이나 반가이 나를 맞아 주었다. 그들은 일년(一年)에 한두번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인 듯…………

그러나 어린애는 눈에 띠우지 않는다.

「어린애 잘 자라우?」

하고 묻는데 때 묻은 적삼 하나만 걸친 발가숭이가 토방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오지 않는가, 작년(昨年)에 내가 대접을 받은 꽃게 발을 뜯어 먹으며 두 눈을 깜박깜박 하고 우리 일행(一行)을 쳐다본다.

「오오 네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나는 그 어린애를 끌어안고 해변(海邊)을 거닐었다.

어린애는 일년(一年) 동안에 몰라보도록 컸다.

오래 안아 주기가 힘이 들만치나 무거웠다.

……그 날은 바다 위에 일점풍(一點風)도 없었다. 성자(聖者)의 임종(臨終)과 같이 수평선(水平線) 너머로 고요히 넘어가는 태양(太陽)을 바라보며 나는 석조(夕照)에 타는 붉은 물결을 멀리 보며 느꼈다. 이 외로운 섬속,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속에서도 우리의 조그만 생명(生命)이 자라나고 있지않은가. 그 어린 생명(生命)이 교목(喬木)과 상록수(常綠樹)와 같이 장성(長成)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限)없이 쓸쓸한 우리의 등뒤가 든든해지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一구삼오(九三五) 첫여름 당진(唐津)에서)

절필

〈오오, 조선의 남아여!〉

-- 백림(伯林) 마라톤에 우승(優勝)한 손(孫), 남(南) 양군에게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傳)하는 호외(號外) 뒷등에(첩보(捷報))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形容) 못할 감격(感激)에 떨린다!
이역(異域)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心臟)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삼백만(二千三百萬)의 한 사람인 내 혈관(血管)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 ○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鼓膜)은
깊은 밤 전승(戰勝)의 방울 소리에 터질듯 찢어질듯.
침울(沈鬱)한 어둠 속에 짓눌렀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
○ ○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祖國)의 전승(戰勝)을 전(傳)하고자
마라손 험(險)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絶命)한 「아데네」의 병사(兵士)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勇敢)하였던 선조(先祖)들의 정령(精靈)이 가호(加護)하였음에
두 용사(勇士)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 ○
오오, 나는 웨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全世界)의 인류(人類)를 향해서 웨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弱)한 족속(族屬)이라고 부를터이냐!」

1936.8.10 새벽 신문(新聞)호외(號外) 이면(裏面)에 쓴 절필(絶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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