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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선물

오 헨리 · 조영환 옮김

O. Henry — The Gift of the Magi, The Last Leaf, After Twenty Years

3장 · 31분

머리카락을 판 아내와 시계를 판 남편. 마지막 한 줄에서 뒤집히는 오 헨리 단편 셋.

크리스마스 선물

1달러 87센트. 그게 전부였다. 그중 60센트는 1센트짜리 동전이었다. 식료품 가게 주인과 채소 장수와 정육점 주인을 상대로 한두 푼씩 깎아 모은 돈이었다. 그렇게 깎다 보면 말은 안 해도 짠순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아 뺨이 화끈거렸다. 델라는 세 번을 세어 보았다. 1달러 87센트. 그리고 내일은 크리스마스였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낡아빠진 작은 소파에 몸을 던지고 우는 것밖에 없었다. 델라는 그렇게 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다 — 인생이란 흐느낌과 훌쩍임과 미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훌쩍임이 가장 많다고.

이 집의 안주인이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서서히 넘어가는 동안, 집을 한번 둘러보자. 주급 8달러짜리 가구 딸린 셋방. 말로 다 못 할 만큼 형편없지는 않았지만, '거지 소굴'이라는 말이 언제 붙어도 이상하지 않은 집이긴 했다.

아래층 현관에는 편지가 들어갈 리 없는 우편함이 있었고, 어떤 인간의 손가락으로도 소리를 낼 수 없는 초인종이 있었다. 거기에 '제임스 딜링엄 영 씨'라는 이름이 적힌 명함이 붙어 있었다.

'딜링엄'은 그 이름의 주인이 주급 30달러를 받던 형편 좋던 시절에 바람에 펄럭이며 내걸린 것이었다. 수입이 20달러로 줄어든 지금, '딜링엄'의 글자들은 흐릿해 보였다. 마치 겸손하고 수수한 D 한 글자로 줄어들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하지만 제임스 딜링엄 영 씨가 집에 돌아와 위층 셋방에 들어서면 그는 '짐'이라 불렸고, 이미 델라라고 소개한 제임스 딜링엄 영 부인에게 힘껏 껴안겼다. 그것으로 아주 충분했다.

델라는 울음을 그치고 분첩으로 뺨을 매만졌다. 창가에 서서 잿빛 뒷마당의 잿빛 담장 위를 걷는 잿빛 고양이를 멍하니 내다보았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인데 짐에게 줄 선물을 살 돈이 1달러 87센트뿐이었다. 몇 달을 두고 한 푼이라도 모을 수 있으면 모았는데 결과가 이랬다. 주급 20달러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지출은 늘 계산보다 컸다. 언제나 그렇다. 짐에게 줄 선물 값이 겨우 1달러 87센트. 그녀의 짐. 델라는 짐에게 줄 좋은 것을 궁리하며 행복한 시간을 여러 번 보냈다. 훌륭하고 귀하고 진짜인 것 — 짐이 가질 자격이 있다는 영광에 아주 조금이라도 가까운 것으로.

방의 두 창문 사이에는 벽거울이 하나 있었다. 주급 8달러짜리 셋방의 벽거울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주 마르고 아주 날랜 사람이라면 세로로 길게 잘린 자기 모습을 빠르게 이어 보면서 제 얼굴이 어떤지 꽤 정확하게 짐작할 수 있다. 델라는 날씬했으므로 그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창가에서 홱 돌아서서 거울 앞에 섰다.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지만 얼굴에서는 이십 초 만에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풀어 끝까지 늘어뜨렸다.

제임스 딜링엄 영 부부에게는 둘 다 몹시 자랑스러워하는 물건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짐의 아버지의 것이었고 또 그 아버지의 것이었던 금시계였다. 다른 하나는 델라의 머리카락이었다. 시바의 여왕이 환기창 건너편 셋방에 살았다면, 델라는 여왕 폐하의 보석과 선물을 초라하게 만들려고 언젠가 창밖에 머리를 늘어뜨려 말렸을 것이다. 솔로몬 왕이 지하실에 보물을 잔뜩 쌓아둔 관리인이었다면, 짐은 지나갈 때마다 시계를 꺼내 보았을 것이다. 왕이 부러워 수염을 쥐어뜯는 꼴을 보려고.

이제 델라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몸을 감싸며 흘러내렸다. 갈색 물이 쏟아지듯 물결치고 빛났다. 무릎 아래까지 닿아 거의 옷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초조하고 빠른 손길로 다시 머리를 올렸다. 한 번은 잠시 손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고, 그동안 눈물 한두 방울이 닳은 붉은 카펫 위로 떨어졌다.

낡은 갈색 재킷을 걸치고 낡은 갈색 모자를 썼다.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눈에는 아직 그 환한 빛을 담은 채, 그녀는 문을 나서 계단을 내려가 거리로 나갔다.

그녀가 멈춰 선 곳의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소프로니 부인. 모발 제품 일체.' 델라는 한 층을 뛰어 올라가 숨을 헐떡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부인은 덩치가 크고 지나치게 희고 쌀쌀맞아서 '소프로니'라는 이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제 머리카락 사시겠어요?" 델라가 물었다.

"머리카락은 사지." 부인이 말했다. "모자 벗고 어디 좀 보자고."

갈색 폭포가 물결치며 쏟아져 내렸다.

"이십 달러." 부인이 익숙한 손길로 머리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빨리 주세요." 델라가 말했다.

아아, 그다음 두 시간은 장밋빛 날개를 달고 지나갔다. 뒤섞인 비유는 눈감아 주시길. 델라는 짐에게 줄 선물을 찾아 가게란 가게는 다 뒤졌다.

마침내 찾아냈다. 그것은 분명 짐을 위해, 오직 짐만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그녀가 온 가게를 다 뒤집어 보았지만 그런 물건은 어디에도 없었다. 백금 시곗줄이었다. 디자인은 단순하고 정갈했고, 요란한 장식이 아니라 재질 하나로 제 값어치를 알리고 있었다 — 좋은 물건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그것은 '그 시계'에게도 어울릴 만한 물건이었다. 보자마자 델라는 이것이 짐의 것이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시곗줄은 짐을 닮았다. 조용하고 값지다 — 그 말은 둘 모두에게 들어맞았다. 가게는 그 값으로 21달러를 받아 갔고, 델라는 87센트를 들고 집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이 줄을 시계에 달면 짐은 어떤 자리에서든 마음 놓고 시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계는 훌륭했지만 줄 대신 낡은 가죽끈을 매어 두었던 탓에 그는 가끔 남몰래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집에 돌아오자 델라의 들뜬 마음은 조금 가라앉고 신중함과 분별이 돌아왔다. 그녀는 고데기를 꺼내고 가스에 불을 붙인 다음, 사랑에 관대함까지 더해져 벌어진 참사를 수습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건 언제나 엄청난 일이다, 여러분 —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사십 분이 지나자 그녀의 머리는 자잘하고 촘촘한 곱슬로 덮여서, 학교를 빼먹은 사내아이처럼 보였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오래, 꼼꼼히, 매섭게 들여다보았다.

"짐이 나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두 번째로 나를 보기 전에 코니아일랜드 무희 같다고 하겠지. 하지만 어쩌겠어 — 아아! 1달러 87센트로 대체 뭘 할 수 있었겠어?"

일곱 시에 커피를 내렸고, 프라이팬은 화덕 뒤쪽에서 달궈진 채 돼지고기를 구울 준비를 마쳤다.

짐은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델라는 시곗줄을 손에 겹쳐 쥐고, 그가 늘 들어오는 문 가까이 탁자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이윽고 저 아래 첫 층계참에서 그의 발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잠깐 얼굴이 하얘졌다. 그녀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소리 없이 짧은 기도를 올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지금 그녀는 이렇게 속삭였다. "하느님, 저이가 저를 아직 예쁘다고 여기게 해주세요."

문이 열리고 짐이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는 야위고 몹시 심각해 보였다. 딱한 사람, 그는 겨우 스물둘이었다 — 그런데 벌써 한 가정을 짊어지고 있었다! 새 외투가 필요했고 장갑도 없었다.

짐은 문 안쪽에 멈춰 섰다. 메추라기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델라에게 붙박여 있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이 있었다. 그 표정이 그녀를 겁먹게 했다. 화도 아니고 놀람도 아니고 못마땅함도 아니고 질색도 아니었다. 그녀가 각오했던 어떤 감정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 묘한 얼굴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델라는 탁자에서 몸을 비틀어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

"짐, 여보," 그녀가 소리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머리를 잘라서 팔았어요. 당신한테 선물도 못 주고 크리스마스를 넘길 수는 없었으니까. 다시 자랄 거예요 — 괜찮죠, 그렇죠?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내 머리는 아주 빨리 자라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해줘요, 짐. 우리 즐겁게 지내요. 내가 당신한테 얼마나 좋은 — 얼마나 예쁘고 좋은 선물을 준비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머리를 잘랐다고?" 짐이 힘겹게 물었다. 그렇게 애를 쓰고도 아직 그 뻔한 사실에 이르지 못한 사람처럼.

"잘라서 팔았어요." 델라가 말했다. "그래도 나 좋죠? 머리카락이 없어도 나는 나잖아요, 안 그래요?"

짐은 방 안을 이상하다는 듯 둘러보았다.

"머리카락이 없어졌다고?" 그가 거의 얼빠진 사람처럼 말했다.

"찾을 것 없어요." 델라가 말했다. "팔았다니까요 — 팔려서 없어졌어요.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여보. 나한테 잘해줘요. 당신 때문에 없어진 거니까. 내 머리카락은 세어 볼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녀가 문득 진지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아무도 세지 못할 거예요. 고기 올릴까요, 짐?"

짐은 문득 넋에서 깨어난 듯했다. 그는 자기 델라를 껴안았다. 십 초 동안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반대편의 하찮은 물건이나 들여다보기로 하자. 주급 8달러든 연봉 백만 달러든 — 무슨 차이가 있는가? 수학자나 재담꾼이라면 틀린 답을 내놓을 것이다. 동방박사들은 값진 선물을 가져왔지만 그 답은 거기 없었다. 이 아리송한 말은 조금 뒤에 밝혀진다.

짐은 외투 주머니에서 꾸러미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오해하지 마, 델." 그가 말했다. "머리를 자르든 밀든 감든, 그런 걸로 내가 내 여자를 덜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어. 그래도 그 꾸러미를 풀어 보면 내가 왜 아까 잠깐 그랬는지 알 거야."

하얗고 재빠른 손가락이 끈과 종이를 뜯었다. 그러고는 황홀한 환호성. 그러고는, 아아! 여자 특유의 급작스러운 변화로 히스테릭한 눈물과 울음이 터져 나왔고, 이 집의 주인은 가진 위로의 능력을 지체 없이 전부 동원해야 했다.

거기에는 '그 빗'이 있었다. 옆머리용과 뒷머리용이 한 벌로 된, 델라가 브로드웨이의 진열창에서 오래도록 흠모하던 빗이었다. 아름다운 빗, 순전한 거북 등딱지에 보석을 둘러 박은, 그 아름답고 사라진 머리에 꽂으면 꼭 맞을 빛깔의 빗. 비싼 빗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고, 가질 가망은 조금도 없이 그저 마음으로만 간절히 원하고 그리워하던 물건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그녀의 것이 되었는데, 그토록 탐내던 그 장식을 꽂을 머리채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빗을 가슴에 끌어안았고, 마침내 젖은 눈으로 고개를 들어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내 머리는 아주 빨리 자라요, 짐!"

그러다 델라는 불에 덴 새끼 고양이처럼 펄쩍 뛰며 소리쳤다. "아, 참!"

짐은 아직 자기의 아름다운 선물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손바닥을 펴 그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무광의 귀한 금속이 그녀의 밝고 뜨거운 마음을 되비추어 반짝이는 듯했다.

"멋지죠, 짐? 이거 찾느라 온 시내를 다 뒤졌어요. 이제 하루에 백 번은 시간을 보게 될걸요. 시계 줘 봐요. 달면 어떤지 보고 싶어요."

짐은 시키는 대로 하는 대신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뒷머리에 두 손을 받치고 웃었다.

"델," 그가 말했다. "우리 크리스마스 선물은 좀 넣어두자. 지금 쓰기엔 너무 좋아. 당신 빗을 살 돈을 만들려고 시계를 팔았어. 이제 고기나 올리는 게 어때."

동방박사들은, 알다시피,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 놀랍도록 지혜로운 사람들이었고, 구유에 누운 아기에게 선물을 가져왔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이들이 그들이다. 지혜로웠으니 그들의 선물도 분명 지혜로웠을 것이고, 겹치면 바꿀 수 있는 권리쯤은 딸려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셋방에 사는 어리석은 두 아이가 서로를 위해 집안의 가장 큰 보물을 가장 어리석게 내어놓은, 별일 없는 이야기 하나를 서툴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요즘의 지혜로운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면 이렇다. 선물을 하는 모든 사람 중에 이 둘이 가장 지혜로웠다. 선물을 주고받는 모든 사람 중에 이런 이들이 가장 지혜롭다. 어디서든 그들이 가장 지혜롭다. 그들이 바로 동방박사다.

마지막 잎새

워싱턴 스퀘어 서쪽의 작은 동네에서는 길들이 미친 듯이 뻗어 나가다 저희끼리 부서져 '플레이스'라 불리는 좁은 조각이 되어 버렸다. 이 '플레이스'들은 기묘한 각과 곡선을 그린다. 어떤 길은 한두 번쯤 제 몸을 가로지른다. 언젠가 한 화가가 이 길에서 값진 가능성을 발견했다. 물감과 종이와 캔버스 값 청구서를 든 수금원이 이 길을 따라가다가,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되돌아오는 자기 자신과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그리하여 예스럽고 오래된 그리니치 빌리지로 예술 하는 사람들이 곧 어슬렁거리며 몰려들었다. 북향 창과 18세기 박공과 네덜란드식 다락과 싼 방세를 찾아서. 그러고는 6번가에서 백랍 잔 몇 개와 냄비 한두 개를 들여와 '예술인촌'이 되었다.

납작한 삼층 벽돌 건물 꼭대기에 수와 존시의 작업실이 있었다. '존시'는 조애나를 다정하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하나는 메인 출신이고 다른 하나는 캘리포니아 출신이었다. 둘은 8번가의 어느 '델모니코' 정식 식탁에서 만났는데, 미술과 치커리 샐러드와 주교 소매에 대한 취향이 어찌나 잘 맞던지 함께 쓰는 작업실이 생겨났다.

그게 5월의 일이었다. 11월이 되자 의사들이 폐렴이라 부르는, 차갑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낯선 자가 이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여기저기 얼음장 같은 손가락을 대고 다녔다. 동쪽 지구에서는 이 파괴자가 대담하게 활보하며 사람들을 수십 명씩 때려눕혔지만, 좁고 이끼 낀 '플레이스'의 미로 속에서는 그 발걸음이 느렸다.

폐렴 씨는 이른바 신사다운 노인이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의 산들바람에 피가 묽어진 자그마한 여자는 주먹이 붉고 숨이 짧은 이 늙은이가 상대할 만한 사냥감이 못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존시를 쳤다. 존시는 페인트칠한 철제 침대에 누워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채, 작은 네덜란드식 창유리 너머로 옆 벽돌집의 민민한 벽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바쁜 의사가 텁수룩한 잿빛 눈썹을 움직여 수를 복도로 불러냈다.

"가망은 십분의 일쯤 — 그렇게 해둡시다." 그가 체온계의 수은을 털어 내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 십분의 일은 저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느냐에 달렸소. 사람이 저렇게 장의사 편에 줄을 서 버리면 약전(藥典)에 실린 모든 약이 우스워지지. 저 아가씨는 낫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소?"

"저 애는… 언젠가 나폴리만을 그리고 싶어 했어요." 수가 말했다.

"그림?— 시시하군! 두 번 곱씹을 만한 게 마음에 있느냐는 거요. 이를테면 남자라든가."

"남자요?" 수의 목소리가 구금(口琴)처럼 튕겼다. "남자가 그럴 만한 값어치가— 아니에요, 선생님, 그런 건 없어요."

"그럼 쇠약이 문제로군." 의사가 말했다. "내 힘으로 걸러낼 수 있는 한 과학이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소. 하지만 내 환자가 제 장례 행렬의 마차 수를 세기 시작하면 나는 약효에서 오십 퍼센트를 뺍니다. 아가씨가 저 사람 입에서 올겨울 외투 소매 유행이 어떠냐는 질문 하나만 나오게 해준다면, 십분의 일이 아니라 오분의 일은 약속하지요."

의사가 돌아간 뒤 수는 작업실로 들어가 일본 냅킨 한 장을 눈물로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적셨다. 그러고는 화판을 들고 래그타임을 휘파람으로 불면서 씩씩하게 존시의 방으로 들어갔다.

존시는 이불 아래로 물결 한 번 일으키지 않은 채 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수는 그녀가 자는 줄 알고 휘파람을 멈췄다.

수는 화판을 놓고 잡지 소설에 넣을 펜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젊은 화가는 젊은 작가가 문학으로 가는 길을 닦으려고 쓴 잡지 소설에 삽화를 그리며 자기 예술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한다.

수가 주인공인 아이다호 카우보이에게 우아한 승마 바지와 외알 안경을 그려 넣고 있을 때, 낮은 소리가 여러 번 되풀이되는 것이 들렸다. 그녀는 얼른 침대 곁으로 갔다. 존시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무언가를 세고 있었다 — 거꾸로 세고 있었다.

"열둘." 그녀가 말했다. 조금 있다 "열하나." 그리고 "열," "아홉." 그다음엔 "여덟," "일곱"을 거의 붙여서 말했다.

수는 걱정스레 창밖을 내다보았다. 셀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보이는 것이라곤 헐벗고 스산한 뜰과 스무 자쯤 떨어진 벽돌집의 민민한 벽뿐이었다. 뿌리가 옹이지고 삭은 아주 늙은 담쟁이 덩굴 하나가 벽돌벽을 절반쯤 기어올라 있었다. 가을의 찬 입김이 덩굴에서 잎을 떨어뜨려, 뼈만 남은 가지들이 거의 헐벗은 채 부스러지는 벽돌에 매달려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수가 물었다.

"여섯." 존시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더 빨리 떨어져. 사흘 전엔 백 장쯤 있었어. 세느라 머리가 아플 정도였는데 지금은 쉬워. 저기 또 하나 간다. 이제 다섯 장 남았어."

"다섯 장이라니, 뭐가. 이 수디한테 말해 봐."

"잎사귀. 저 담쟁이의. 마지막 한 장이 떨어지면 나도 가야 해. 사흘 전부터 알고 있었어. 의사 선생님이 말 안 해줬어?"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처음 들어." 수가 대단한 경멸을 담아 나무랐다. "낡은 담쟁이 잎이 네가 낫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게다가 너는 저 덩굴을 그렇게 좋아했잖아, 이 못된 것아.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아니, 오늘 아침에 의사 선생님이 나한테 그러셨어. 네가 곧 나을 가망이— 뭐라고 하셨더라, 그대로 옮기면— 십 대 일이랬어! 그건 뉴욕에서 전차를 타거나 새로 짓는 건물 앞을 지날 때만큼이나 안전한 확률이야. 이제 수프 좀 먹어 봐. 그리고 수디는 다시 그림을 그리게 해줘. 그걸 편집자 양반한테 팔아서 아픈 아이한테 포도주도 사다 주고, 욕심 많은 저 자신한테는 돼지고기도 좀 사게."

"포도주는 더 안 사도 돼." 존시가 창밖에 눈을 붙박은 채 말했다. "저기 또 하나 떨어진다. 아니, 수프는 안 먹을래. 이제 딱 네 장 남았어. 어두워지기 전에 마지막 한 장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그럼 나도 갈 거야."

"존시, 얘." 수가 그녀 위로 몸을 굽히며 말했다. "약속해 줘. 내가 일을 다 마칠 때까지 눈을 감고 창밖을 보지 않겠다고. 내일까지 그림을 넘겨야 해. 빛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지, 아니면 블라인드를 내렸을 거야."

"저쪽 방에서 그리면 안 돼?" 존시가 차갑게 물었다.

"네 곁에 있고 싶어." 수가 말했다. "게다가 네가 저 바보 같은 담쟁이 잎을 계속 쳐다보는 게 싫어."

"다 그리면 바로 말해 줘." 존시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쓰러진 조각상처럼 하얗고 고요하게 누워서. "마지막 한 장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싶으니까. 기다리는 것도 지쳤어. 생각하는 것도 지쳤고. 붙잡고 있던 걸 다 놓고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싶어. 저 가엾고 지친 잎사귀들처럼."

"자 봐." 수가 말했다. "늙은 은둔 광부 모델로 베어먼 씨를 불러와야 해. 금방 갔다 올게. 내가 올 때까지 움직이지 마."

늙은 베어먼은 그들 아래 일 층에 사는 화가였다. 예순이 넘었고, 사티로스의 머리에서 흘러내려 도깨비의 몸으로 이어지는 미켈란젤로의 모세 같은 수염을 달고 있었다. 베어먼은 예술에서 실패한 사람이었다. 사십 년을 붓을 휘둘렀지만 여신의 옷자락 끝에조차 닿지 못했다. 그는 늘 걸작을 그리려던 참이었으나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몇 해 동안 그가 그린 것이라곤 이따금 장사나 광고에 쓰이는 어설픈 그림뿐이었다. 그는 전문 모델을 쓸 돈이 없는 이 마을의 젊은 화가들에게 모델 노릇을 해주고 얼마간을 벌었다. 진을 지나치게 마셨고, 여전히 다가올 자기 걸작 이야기를 했다. 그 밖에는 사나운 자그마한 노인이어서 누구든 무르게 구는 꼴을 지독하게 비웃었고, 위층 작업실의 젊은 화가 둘을 지키는 특별 경비견을 자처했다.

수는 아래층의 침침한 굴 같은 방에서 노간주 열매 냄새를 짙게 풍기는 베어먼을 찾아냈다. 한쪽 구석에는 걸작의 첫 선(線)을 받으려고 이십오 년을 기다려 온 빈 캔버스가 이젤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존시의 망상을 이야기했고, 존시 자신이 잎사귀처럼 가볍고 여려서 세상을 붙잡은 손힘이 더 약해지면 정말로 떠내려가 버릴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늙은 베어먼은 붉은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그런 얼빠진 망상에 대한 경멸과 비웃음을 고함쳐 쏟아냈다.

"뭐야!" 그가 소리쳤다. "세상에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단 말이야? 빌어먹을 덩굴에서 잎이 떨어진다고 죽어? 나는 그런 소리 들은 적 없어. 안 해, 나는 자네의 그 멍청한 은둔자 바보 모델 안 서.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그 아이 머리에 들어오게 놔뒀어? 아이고, 가엾은 존시 아가씨."

"그 애는 많이 아프고 약해요." 수가 말했다. "열 때문에 마음이 병들어서 이상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요. 알겠어요, 베어먼 씨. 모델 서기 싫으시면 안 서셔도 돼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아저씨는 지독한 늙은— 늙은 수다쟁이예요."

"딱 여자로군!" 베어먼이 고함쳤다. "안 선다고 누가 그랬어? 가자고. 나도 같이 가. 삼십 분 동안 나는 설 준비가 됐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어. 맙소사! 존시 아가씨같이 착한 사람이 앓아누울 자리가 아니야, 여기는. 언젠가 내가 걸작을 그릴 거야. 그럼 우리 다 여기서 나가는 거야. 맙소사! 그럼."

둘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존시는 자고 있었다. 수는 블라인드를 창턱까지 내리고 베어먼에게 손짓해 옆방으로 갔다. 거기서 둘은 두려운 마음으로 창밖의 담쟁이 덩굴을 내다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이 섞인 차가운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베어먼은 낡은 푸른 셔츠 차림으로, 바위 대신 엎어놓은 솥 위에 은둔 광부로 앉았다.

이튿날 아침 한 시간쯤 눈을 붙였다 깬 수는, 존시가 흐릿하게 뜬 눈으로 내려진 초록 블라인드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올려 줘. 보고 싶어." 그녀가 속삭이듯 명령했다.

수는 지친 몸으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보라! 밤새도록 몰아친 비바람과 사나운 돌풍을 다 겪고도 벽돌벽을 배경으로 담쟁이 잎 하나가 남아 있었다. 덩굴의 마지막 잎이었다. 꼭지 근처는 아직 짙은 초록이었고 톱니 같은 가장자리는 삭아 가는 노란빛으로 물든 그 잎이, 땅에서 스무 자쯤 되는 가지에 용감하게 매달려 있었다.

"저게 마지막이야." 존시가 말했다. "밤사이에 틀림없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바람 소리를 들었거든. 오늘 떨어질 거야. 그럼 나도 그때 죽어."

"얘, 얘!" 수가 지친 얼굴을 베개로 숙이며 말했다. "네 생각 안 할 거면 내 생각이라도 해줘. 나는 어떡하라고?"

그러나 존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것은 알 수 없는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영혼이다. 그녀를 우정과 이 땅에 붙들어 매던 끈이 하나씩 풀릴수록 그 망상은 더 세게 그녀를 사로잡는 듯했다.

하루가 저물었고, 땅거미 속에서도 둘은 벽에 붙어 꼭지에 매달린 외로운 담쟁이 잎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밤이 오자 북풍이 다시 풀려났고, 비는 여전히 창을 때리며 낮은 네덜란드식 처마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날이 밝을 만하자 무자비한 존시가 블라인드를 올리라고 명했다.

담쟁이 잎은 그대로 있었다.

존시는 오랫동안 누운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닭고기 수프를 젓고 있는 수를 불렀다.

"나 나쁜 애였어, 수디." 존시가 말했다. "뭔가가 저 마지막 잎을 저기 남겨 두게 해서 내가 얼마나 못됐는지 보여준 거야. 죽고 싶어 하는 건 죄야. 이제 수프 좀 갖다 줘. 포도주 조금 탄 우유도. 그리고— 아니, 손거울부터 갖다 줘. 그다음에 베개를 좀 받쳐 줘. 일어나 앉아서 네가 요리하는 걸 볼래."

한 시간 뒤 그녀가 말했다.

"수디, 나 언젠가 나폴리만을 그리고 싶어."

오후에 의사가 왔고, 그가 돌아갈 때 수는 핑계를 대고 복도로 따라 나갔다.

"반반이오." 의사가 수의 여위고 떨리는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잘 간호하면 이기겠소. 그럼 이제 아래층에 있는 다른 환자를 봐야겠군. 베어먼이라던가— 화가라던데. 그 사람도 폐렴이오. 늙고 약한 사람인데 증세가 급합니다. 가망은 없어요. 다만 좀 편하게 지내시라고 오늘 병원으로 옮깁니다."

이튿날 의사가 수에게 말했다. "고비는 넘겼소. 이겼어요. 이제 잘 먹이고 돌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날 오후 수는, 아주 파랗고 아주 쓸모없는 털목도리를 흡족하게 뜨고 있는 존시의 침대로 다가가 베개까지 통째로 한 팔로 감쌌다.

"할 얘기가 있어, 흰 생쥐야." 그녀가 말했다. "베어먼 씨가 오늘 병원에서 폐렴으로 돌아가셨어. 앓은 건 이틀뿐이었대. 첫날 아침에 관리인이 아래층 방에서 그분을 찾았는데 아파서 꼼짝도 못 하고 계셨대. 신발이랑 옷이 흠뻑 젖어서 얼음장 같았고. 그 끔찍한 밤에 어디를 다녀오셨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가 없었지. 그러다 아직 켜져 있는 등불이랑, 제자리에서 끌어다 놓은 사다리랑, 여기저기 널린 붓이랑, 초록색과 노란색을 섞어 놓은 팔레트를 찾아냈어. 그리고— 얘, 창밖을 봐. 저 벽에 붙은 마지막 담쟁이 잎을 봐. 바람이 부는데도 저게 왜 한 번도 팔랑이거나 움직이지 않았는지 이상하지 않았니? 아, 저게 베어먼 씨의 걸작이야. 마지막 잎이 떨어지던 밤에 저기다 그리신 거야."

이십 년 뒤

순찰 중인 경찰관이 위엄 있게 큰길을 올라갔다. 그 위엄은 몸에 밴 것이었지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볼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밤 열 시가 채 안 된 시각이었지만, 비 냄새를 머금은 쌀쌀한 돌풍이 거리에서 사람을 거의 다 쓸어 가 버렸다.

가면서 문마다 잠겼는지 확인하고, 곤봉을 여러 갈래로 능란하게 돌리고, 이따금 고개를 돌려 고요한 큰길을 살피는 눈길을 던지는 이 경찰관은, 다부진 몸집에 약간 뻐기는 걸음걸이로 치안을 지키는 사람의 좋은 그림이 되었다. 이 근방은 일찍 문을 닫는 동네였다. 이따금 담배 가게나 밤새 여는 간이식당의 불빛이 보이기도 했지만, 문 대부분은 진작에 닫힌 상점의 것이었다.

어느 구역의 한중간쯤 왔을 때 경찰관은 갑자기 걸음을 늦추었다. 불 꺼진 철물점 문간에 한 남자가 불붙이지 않은 시가를 입에 문 채 기대어 있었다. 경찰관이 다가가자 남자가 얼른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경찰관님." 그가 안심시키듯 말했다. "친구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십 년 전에 한 약속이지요. 좀 우습게 들리시죠? 뭐, 수상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설명해 드리죠. 그쯤 전에 이 가게 자리에 식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 빅 조 브래디의 식당이요."

"오 년 전까지는 그랬지요." 경찰관이 말했다. "그때 헐렸습니다."

문간의 남자가 성냥을 그어 시가에 불을 붙였다. 불빛에 창백하고 턱이 각진 얼굴과 날카로운 눈, 그리고 오른쪽 눈썹 근처의 작고 흰 흉터가 드러났다. 넥타이핀은 이상하게 물린 큼직한 다이아몬드였다.

"이십 년 전 오늘 밤이었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여기 빅 조 브래디의 식당에서 지미 웰스와 저녁을 먹었죠. 제 제일 친한 친구이자 세상에서 제일 괜찮은 녀석이었습니다. 그 애랑 저는 여기 뉴욕에서 형제나 다름없이 같이 자랐어요. 저는 열여덟이었고 지미는 스물이었죠. 이튿날 아침에 저는 한밑천 잡으러 서부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지미는 뉴욕에서 끌어내려야 꿈쩍도 안 했을 겁니다. 세상에 여기 말고는 없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날 밤 우리는 약속했습니다. 그날 그 시각으로부터 꼭 이십 년 뒤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고요. 서로 형편이 어떻든, 얼마나 먼 데서 와야 하든 상관없이. 이십 년이면 각자 제 운명이 결정되고 한밑천도 잡았을 거라고, 그게 무엇이 됐든 말입니다."

"꽤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경찰관이 말했다. "그래도 만나는 사이가 좀 길다 싶은데요. 떠난 뒤로 친구분 소식은 못 들으셨습니까?"

"음, 한동안은 편지를 주고받았죠." 상대가 말했다. "그런데 한두 해 지나니 서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서부라는 데가 꽤 넓은 데다 저도 그 안을 아주 바쁘게 돌아다녔거든요. 하지만 지미가 살아 있다면 여기로 저를 만나러 올 겁니다. 세상에서 제일 진실하고 한결같은 녀석이었으니까요.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저는 오늘 밤 이 문간에 서려고 천 마일을 왔습니다. 옛 친구가 나타나기만 한다면 그럴 값어치가 있지요."

기다리던 남자가 뚜껑에 자잘한 다이아몬드를 박은 훌륭한 시계를 꺼냈다.

"열 시 삼 분 전." 그가 알렸다. "우리가 저 식당 문 앞에서 헤어진 게 딱 열 시였습니다."

"서부에서 꽤 잘되셨나 봅니다?" 경찰관이 물었다.

"그럼요! 지미도 그 절반쯤은 됐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그 녀석은 좀 굼뜬 편이었어요. 사람은 좋았지만. 저는 이 재산을 모으느라 세상에서 제일 약삭빠른 자들과 겨뤄야 했습니다. 뉴욕에 있으면 사람이 한 홈에 갇히죠. 사람을 면도날처럼 벼리려면 서부라야 합니다."

경찰관이 곤봉을 돌리며 한두 걸음을 옮겼다.

"저는 가 보겠습니다. 친구분이 무사히 오시길 바랍니다. 시간 딱 맞춰 끊으실 겁니까?"

"천만에요!" 상대가 말했다. "적어도 삼십 분은 기다릴 겁니다. 지미가 이 땅에 살아 있다면 그 안에 올 겁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경찰관님."

"안녕히 계십시오, 선생." 경찰관은 그렇게 말하고 가면서 문마다 확인하며 자기 구역을 따라 걸어갔다.

이제 곱고 차가운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오락가락하던 바람은 꾸준히 부는 바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구역에 나와 있던 몇 안 되는 행인들은 외투 깃을 높이 세우고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침울하고 말없이 서둘러 지나갔다. 그리고 철물점 문간에서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불확실한 젊은 날의 약속 하나를 지키려고 천 마일을 온 남자가 시가를 피우며 기다렸다.

이십 분쯤 기다렸을 때, 긴 외투를 입고 깃을 귀까지 세운 키 큰 남자가 길 건너편에서 서둘러 건너왔다. 그는 곧장 기다리던 남자에게로 갔다.

"자네 밥인가?" 그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지미 웰스인가?" 문간의 남자가 소리쳤다.

"이런 세상에!" 새로 온 사람이 상대의 두 손을 자기 두 손으로 붙잡으며 감탄했다. "틀림없는 밥이군. 자네가 살아만 있다면 여기서 만나겠거니 했지. 아이고, 이런— 이십 년은 긴 세월이야. 옛 식당은 없어졌네, 밥.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걸, 거기서 한 끼 더 먹게. 서부는 자네한테 잘해 주던가?"

"끝내줬지. 달라는 건 다 줬어. 자네 많이 변했군, 지미. 자네가 그렇게 큰 줄은 몰랐는데. 두세 치는 더 커진 것 같아."

"아, 스물 넘어서 좀 더 자랐지."

"뉴욕에서는 잘 지내나, 지미?"

"그럭저럭. 시청 어느 부서에 자리를 하나 얻었네. 가세, 밥. 내가 아는 데가 있어. 거기서 옛날 이야기나 실컷 하세."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길을 올라갔다. 성공으로 자만심이 커진 서부에서 온 남자는 제 인생 내력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른 한 사람은 외투 속에 파묻힌 채 흥미롭게 들었다.

모퉁이에는 전등불이 환한 약국이 있었다. 그 불빛 속으로 들어서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서부에서 온 남자가 갑자기 멈춰 서며 팔을 뺐다.

"자네는 지미 웰스가 아니야." 그가 쏘아붙였다. "이십 년이 긴 세월이긴 하지만 사람 코를 매부리코에서 들창코로 바꿔 놓을 만큼 길지는 않아."

"때로는 좋은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바꿔 놓기도 하지." 키 큰 남자가 말했다. "당신은 십 분 전부터 체포된 상태요, '실키' 밥. 시카고에서 당신이 이쪽으로 넘어온 것 같다며 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전보를 보냈소. 순순히 가시겠소? 현명하시군. 그럼 서(署)로 가기 전에,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쪽지가 하나 있소. 저 창가에서 읽으셔도 좋소. 웰스 경찰관이 쓴 거요."

서부에서 온 남자는 건네받은 작은 종이를 펼쳤다. 읽기 시작할 때는 손이 떨리지 않았으나 다 읽었을 무렵에는 조금 떨렸다. 쪽지는 짧은 편이었다.

"밥에게. 나는 약속한 자리에 제시간에 갔었네. 자네가 시가에 불을 붙이려고 성냥을 그었을 때, 그 얼굴이 시카고에서 찾는 사람의 얼굴이라는 걸 알았어. 아무래도 내 손으로는 못 하겠어서, 돌아가 사복 경찰관에게 그 일을 맡겼네.

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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