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Иван Тургенев — Первая любовь (1860)
1833년 여름, 모스크바 근교 별장에서 열여섯 살 블라디미르는 이웃 곁채로 이사 온 가난한 공작 집안의 딸 지나이다를 만난다. 숭배자들을 거느리고 그를 놀리고 귀여워하던 스물한 살 아가씨는 어느 날부터 달라지고, 소년은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알아챈다. 투르게네프가 자기 첫사랑을 담았다는 소설.
1장
손님들은 진작 떠났다. 시계가 열두 시 반을 쳤다. 방에는 주인과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와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만 남았다.
주인은 종을 울려 남은 저녁 음식을 치우게 했다.
"자, 이건 정해진 일입니다." 그가 안락의자에 더 깊이 앉아 여송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첫사랑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당신 차례입니다."
통통하고 금발 얼굴이 포동포동한 작달막한 사내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는 먼저 주인을 보고, 그다음엔 천장으로 눈을 들었다.
"나한테는 첫사랑이 없었습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나는 곧바로 두 번째 사랑부터 시작했거든요."
"그건 또 어떻게요?"
"아주 간단합니다. 처음으로 아주 귀여운 아가씨 꽁무니를 따라다닌 게 열여덟 살 때였는데, 나는 그 일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그녀에게 구애했습니다. 나중에 다른 여자들에게 구애한 것과 꼭 같이요. 사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에 빠진 건 여섯 살쯤 때 내 유모한테였는데, 그건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우리 관계의 자세한 내용은 기억에서 지워졌고, 기억한다 한들 누가 그런 데 관심이 있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지요?" 주인이 말을 꺼냈다. "내 첫사랑도 그다지 재미있을 게 없습니다. 나는 지금 내 아내인 안나 이바노브나를 알기 전까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고, 우리 일은 모두 버터 바른 듯 술술 풀렸지요. 아버지들끼리 혼담을 맺었고, 우리는 아주 금세 서로 좋아하게 되어 미적거리지 않고 결혼했습니다. 내 이야기는 두 마디면 끝납니다. 여러분, 솔직히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는 늙었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젊지도 않은 총각인 두 분께 기대를 걸었습니다.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당신이 우리를 좀 즐겁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내 첫사랑은 정말로 아주 평범하지는 않은 쪽에 속합니다." 마흔 살쯤 된, 검은 머리에 흰머리가 섞인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 주인과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잘됐군요……. 이야기해 주시지요."
"그러지요……. 아니, 이야기는 안 하겠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잘 못합니다. 하다 보면 메마르고 짧아지거나, 길고 거짓되게 되거든요. 괜찮다면 기억나는 걸 모두 공책에 적어서 읽어 드리겠습니다."
친구들은 처음엔 반대했지만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두 주 뒤 그들은 다시 모였고,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약속을 지켰다.
그의 공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1833년 여름의 일이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부모님과 살았다. 부모님은 칼루가 관문 근처, 네스쿠치니 공원 맞은편에 여름 별장을 빌려 두었다. 나는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공부는 아주 조금, 느긋하게 했다.
아무도 내 자유를 구속하지 않았다.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했다. 특히 마지막 프랑스인 가정교사와 헤어진 뒤로는 더 그랬다. 그는 자기가 러시아에 「폭탄처럼」(comme une bombe) 떨어졌다는 생각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못하고, 독기 어린 얼굴로 온종일 침대에 뒹굴었다. 아버지는 나를 무관심하게 다정하게 대했다. 어머니는 나 말고 다른 자식이 없는데도 나에게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른 근심들이 어머니를 삼키고 있었다. 아직 젊고 아주 잘생긴 아버지는 돈을 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열 살이 많았다. 어머니는 슬픈 삶을 살았다. 끊임없이 마음 졸이고, 질투하고, 화를 냈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몹시 두려워했고, 아버지는 엄하고 차갑고 거리를 두었다……. 나는 그보다 더 세련되게 침착하고 자신만만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별장에서 보낸 첫 몇 주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날씨는 기막혔다. 우리는 오월 구일, 바로 성 니콜라이 축일에 도시에서 이사했다. 나는 별장 정원에서, 네스쿠치니 공원에서, 관문 밖에서 산책했다. 무슨 책이든, 이를테면 카이다노프의 역사 교과서 같은 것을 들고 나갔지만 펼치는 일은 드물었고, 그보다는 외우고 있던 숱한 시를 소리 내어 읊었다. 피가 내 안에서 들끓었고, 가슴은 그토록 달콤하고 우스꽝스럽게 저렸다. 나는 줄곧 무언가를 기다렸고, 무언가에 겁을 먹었고, 모든 것에 놀랐고, 온몸이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공상은 새벽녘 종탑 둘레를 도는 칼새들처럼 똑같은 생각들 둘레를 놀며 빠르게 맴돌았다. 나는 생각에 잠기고, 슬퍼하고, 울기까지 했다. 하지만 노래하는 듯한 시 한 줄이나 저녁의 아름다움이 불러온 눈물과 슬픔을 뚫고도, 봄풀처럼, 끓어오르는 젊은 삶의 기쁜 느낌이 돋아났다.
나에게는 승마용 말이 한 마리 있었다. 나는 손수 안장을 얹고 혼자 어디 멀리 나가서 말을 달리며 마상 시합에 나선 기사라도 된 듯 상상했다. 바람이 얼마나 즐겁게 귓가에 불었던가! 아니면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그 빛나는 빛과 푸름을 활짝 열린 영혼으로 받아들였다.
기억하기로 그때 내 머릿속에는 여자의 모습이, 여자의 사랑이라는 환영이 뚜렷한 윤곽으로 떠오른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느끼는 모든 것 속에는 무언가 새롭고 말할 수 없이 달콤하고 여성적인 것에 대한 반쯤 의식된, 부끄러워하는 예감이 숨어 있었다…….
이 예감, 이 기다림이 내 온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것을 숨 쉬었고, 그것은 피 한 방울 한 방울에 실려 핏줄 속을 굴러다녔다……. 그것은 곧 이루어질 운명이었다.
우리 별장은 기둥이 선 나무로 된 주인집과 나지막한 곁채 두 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왼쪽 곁채에는 값싼 벽지를 만드는 아주 작은 공장이 있었다……. 나는 여러 번 거기 가서, 기름때 전 작업복을 입고 핏기 없는 얼굴에 머리가 헝클어진 마른 사내아이 열 명쯤이 압착기의 네모난 나무토막을 누르는 나무 지레 위로 연신 뛰어올라, 가냘픈 몸의 무게로 알록달록한 벽지 무늬를 찍어 내는 것을 구경했다. 오른쪽 곁채는 비어 있어서 세를 놓고 있었다. 어느 날, 오월 구일에서 세 주쯤 지났을 때, 그 곁채의 덧창이 열리고 창에 여자들 얼굴이 보였다. 어떤 가족이 거기 이사 온 것이다. 기억하기로 바로 그날 점심 식탁에서 어머니가 집사에게 새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고, 자세키나 공작 부인이라는 성을 듣자 처음엔 존경심이 없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아! 공작 부인이로군……." 그러고는 덧붙였다. "어디 가난한 집인 모양이지."
"마차 세 대에 나눠 타고 왔습니다요." 집사가 공손하게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자기 마차는 없고, 가구도 아주 변변찮습니다요."
"그래." 어머니가 대꾸했다. "그래도 그편이 낫지."
아버지가 차갑게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자세키나 공작 부인은 부유한 여자일 리가 없었다. 그녀가 빌린 곁채는 어찌나 낡고 작고 낮은지, 조금이라도 넉넉한 사람이라면 거기 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런 건 다 흘려들었다. 공작이라는 칭호는 나에게 별로 먹히지 않았다. 얼마 전에 실러의 『군도』를 읽었기 때문이다.
2장
나에게는 저녁마다 총을 들고 우리 정원을 돌아다니며 까마귀를 노리는 버릇이 있었다. 조심성 많고 사납고 교활한 이 새들을 나는 오래전부터 미워했다. 이야기가 나온 그날도 나는 정원에 나갔다. 오솔길을 다 돌아다녀도 헛일이었다(까마귀들은 나를 알아보고 멀리서 끊어지듯 깍깍 울기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우리 땅과, 오른쪽 곁채 뒤로 뻗어 그 곁채에 딸린 좁은 정원 자락을 가르는 낮은 울타리 가까이 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갑자기 목소리들이 들렸다. 울타리 너머를 보았다가 나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이상한 광경이 내 앞에 펼쳐졌다.
나한테서 몇 걸음 떨어진 곳, 초록빛 산딸기 덤불 사이의 빈터에 줄무늬 분홍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흰 손수건을 쓴 키 크고 날씬한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녀 둘레에는 젊은 남자 넷이 몰려 있었고, 그녀는 그들의 이마를 차례로 작은 잿빛 꽃으로 때리고 있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아이들은 잘 아는 꽃이다. 그 꽃은 작은 주머니를 이루고 있어서, 무언가 단단한 데 대고 치면 탁 소리를 내며 터진다. 젊은이들은 어찌나 기꺼이 이마를 내밀던지. 그리고 아가씨의 몸짓에는(나는 그녀를 옆에서 보았다) 무언가 매혹적이고, 명령하는 듯하고, 어루만지는 듯하고, 놀리는 듯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있어서, 나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사랑스러운 손가락이 내 이마도 한번 때려 주기만 한다면 세상 모든 것을 당장 내주었을 것 같았다. 총이 풀밭으로 미끄러졌고, 나는 모든 것을 잊었다. 나는 그 날씬한 몸매와 목과 고운 팔과 흰 손수건 밑으로 조금 헝클어진 금발과, 반쯤 감긴 영리한 눈과 그 속눈썹과 그 아래 여린 뺨을 눈으로 집어삼켰다…….
"젊은이, 이봐 젊은이." 갑자기 내 곁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말했다. "남의 아가씨를 그렇게 쳐다봐도 되는 건가?"
나는 온몸이 움찔했고, 넋이 나갔다……. 내 곁 울타리 너머에 검은 머리를 짧게 깎은 어떤 남자가 서서 빈정거리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아가씨도 나를 돌아보았다……. 생기 있게 움직이는 얼굴에 크고 잿빛인 눈이 보였다. 그 얼굴 전체가 갑자기 떨리며 웃었고, 하얀 이가 반짝였고, 눈썹이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올라갔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 땅에서 총을 집어 들고, 낭랑하지만 악의 없는 웃음소리에 쫓기며 내 방으로 달아나 침대에 몸을 던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몹시 부끄러우면서도 즐거웠다. 나는 전에 없던 설렘을 느꼈다.
한숨 돌린 뒤 나는 머리를 빗고 옷을 털고 차를 마시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젊은 아가씨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가슴은 더 뛰지 않았지만 어쩐지 기분 좋게 조여들었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가 갑자기 물었다. "까마귀라도 잡았니?"
나는 아버지에게 다 이야기하려다가 참고 혼자 속으로 웃기만 했다. 잠자리에 들면서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 발로 세 번쯤 빙글 돌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누워서 밤새 죽은 듯이 잤다. 새벽녘에 잠깐 깨어 고개를 들고 황홀하게 둘레를 둘러보고는 다시 잠들었다.
3장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과 알게 될까?」 아침에 깨자마자 든 첫 생각이었다. 나는 차를 마시기 전에 정원에 나갔지만 울타리에 너무 가까이 가지는 않았고, 아무도 보지 못했다. 차를 마신 뒤에는 별장 앞 거리를 몇 번 거닐며 멀리서 창문을 기웃거렸다……. 커튼 뒤로 그녀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서 나는 놀라 얼른 물러났다. 「그래도 알게 되긴 해야 하는데.」 네스쿠치니 공원 앞에 펼쳐진 모래 벌판을 갈피 없이 거닐며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게 문제다.」 나는 어제 만남의 아주 작은 것까지 떠올렸다. 어째서인지 그녀가 나를 보고 웃던 모습이 유난히 또렷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마음 졸이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동안 운명이 벌써 나를 돌봐 주었다.
내가 없는 동안 어머니는 새 이웃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잿빛 종이에 쓰고 갈색 봉랍으로 봉한 편지였는데, 그런 봉랍은 우체국 통지서나 싸구려 포도주 마개에나 쓰는 것이었다. 맞춤법이 엉망이고 지저분한 글씨로 쓴 그 편지에서 공작 부인은 어머니에게 보호를 청했다. 공작 부인 말로는 어머니가 자기와 자기 자식들의 운명을 쥔 높은 사람들을 잘 안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주 중요한 소송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귀부인으로서 귀부인께 부탁 드리는 것이오며, 아울러 이번 기회를 빌리게 되어 기쁘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맞춤법은 엉망이었다). 끝으로 그녀는 어머니를 찾아뵈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기분이 언짢았다. 아버지는 집에 없어서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귀부인」에게, 그것도 공작 부인에게 답장을 안 할 수는 없었는데, 어떻게 답해야 할지 어머니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프랑스어로 쪽지를 쓰는 건 어울리지 않아 보였고, 어머니 자신도 러시아어 맞춤법에 강하지 못한 데다 그걸 알고 있어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온 것을 반기며 곧바로 공작 부인에게 가서 말로 전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늘 힘닿는 대로 공작 부인 마님을 기꺼이 돕겠으며, 한 시쯤 와 주시기를 청한다고. 남몰래 바라던 것이 뜻밖에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자 나는 기쁘면서도 겁이 났다. 하지만 나를 사로잡은 당황스러움을 드러내지 않고, 먼저 내 방으로 가서 새 넥타이를 매고 작은 프록코트를 입었다. 집에서는 아직 짧은 웃옷에 접는 깃을 달고 다녔는데, 그게 무척 싫었다.
4장
나도 모르게 온몸을 떨며 들어선 곁채의 비좁고 지저분한 현관에서, 늙은 백발의 하인 하나가 나를 맞았다. 구릿빛으로 검은 얼굴에 돼지처럼 작고 음울한 눈, 이마와 관자놀이에는 내 평생 본 적 없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그는 접시에 다 뜯어 먹은 청어 등뼈를 담아 들고,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을 발로 닫으며 툭 내뱉었다.
"무슨 일이오?"
"자세키나 공작 부인 계십니까?" 내가 물었다.
"보니파티!" 문 너머에서 덜덜 떨리는 여자 목소리가 외쳤다.
하인은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자 몹시 닳은 제복 등판과, 녹이 슬어 붉어진 문장 단추 하나가 외롭게 달린 것이 드러났다. 그는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 버렸다.
"경찰서에 다녀왔어?" 같은 여자 목소리가 되풀이했다. 하인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응?……누가 왔다고?……" 다시 들렸다. "이웃집 도련님? 그럼 들어오라고 해."
"응접실로 드시지요." 하인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나 바닥에서 접시를 집어 들며 말했다.
나는 매무새를 가다듬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나는 서둘러 들여놓은 듯 초라한 가구가 놓인, 작고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방에 있었다. 창가에 팔걸이 하나가 부러진 안락의자에 쉰쯤 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못생겼으며, 낡은 초록 원피스에 알록달록한 털실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작고 검은 눈이 나에게 딱 달라붙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자세키나 공작 부인과 말씀을 나누는 영광을 얻은 건가요?"
"내가 자세키나 공작 부인이오. 그럼 당신은 V 씨의 아들이오?"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앉으시오. 보니파티! 내 열쇠 어디 있는지 못 봤어?"
나는 자세키나 부인에게 그녀의 쪽지에 대한 어머니의 대답을 전했다. 그녀는 굵고 빨간 손가락으로 창틀을 두드리며 내 말을 듣더니, 내가 말을 마치자 다시 한번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아주 좋소. 꼭 가겠소."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그런데 참 젊구려! 몇 살이오, 물어봐도 되겠소?"
"열여섯 살입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더듬으며 대답했다.
공작 부인은 주머니에서 무언가 글씨가 빼곡하고 기름때 묻은 종이들을 꺼내 코앞까지 들이대고 뒤적이기 시작했다.
"좋은 나이지." 그녀가 갑자기 의자에서 몸을 돌리며 들썩이더니 말했다. "그리고 제발 격식 차리지 마시오. 우리 집은 수수하니까."
「너무 수수하군.」 나는 나도 모르게 혐오감을 느끼며 그녀의 볼품없는 몸을 훑어보았다.
그 순간 응접실의 다른 문이 휙 열리더니 문턱에 내가 어제 정원에서 본 아가씨가 나타났다. 그녀가 손을 들었고, 얼굴에 웃음이 스쳤다.
"자, 이게 내 딸이오." 공작 부인이 팔꿈치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노치카, 우리 이웃 V 씨의 아들이란다. 이름이 뭐요, 물어봐도 되겠소?"
"블라디미르입니다." 나는 일어서며 설레서 혀 짧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부칭은?"
"페트로비치입니다."
"그래! 내가 아는 경찰서장도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였소. 보니파티! 열쇠 찾지 마, 열쇠는 내 주머니에 있어."
젊은 아가씨는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채 아까의 웃음을 띠고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무슈 볼데마르는 벌써 봤어요." 그녀가 말을 꺼냈다. (그 은빛 목소리가 무언가 달콤한 서늘함처럼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그, 그럼요." 나는 더듬거렸다.
"어디서?" 공작 부인이 물었다.
공작 영애는 어머니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바쁘세요?" 그녀가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아뇨, 전혀요."
"털실 푸는 것 좀 도와줄래요? 이리 와요, 내 쪽으로."
그녀는 나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응접실을 나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우리가 들어간 방은 가구가 조금 더 나았고 더 멋스럽게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거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꿈속처럼 움직였고, 온몸에 바보스러울 만큼 팽팽한 행복을 느꼈다.
공작 영애는 앉아서 빨간 털실 타래를 꺼내더니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고, 타래를 정성껏 풀어 내 두 손에 걸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말없이,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느릿느릿, 살짝 벌린 입술에 아까 그 밝고 짓궂은 웃음을 띤 채 했다. 그녀는 접은 카드에 털실을 감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어찌나 맑고 재빠른 눈길로 나를 비추었던지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대개는 반쯤 가늘게 뜨고 있던 그녀의 눈이 활짝 열리면 얼굴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빛이 얼굴 위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어제 나를 보고 무슨 생각 했어요, 무슈 볼데마르?" 그녀가 조금 있다가 물었다. "분명 나를 흉봤겠죠?"
"저……공작 영애님……저는 아무 생각도……제가 어떻게……." 나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들어 봐요." 그녀가 대꾸했다. "당신은 아직 나를 몰라요. 나는 아주 별난 사람이에요. 나는 사람들이 나한테 늘 진실을 말해 주길 바라요. 듣자 하니 당신은 열여섯 살이고, 나는 스물한 살이에요. 보다시피 내가 당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니까, 당신은 언제나 나한테 진실을 말해야 해요……. 그리고 내 말을 들어야 하고요." 그녀가 덧붙였다. "나를 봐요. 왜 나를 안 봐요?"
나는 더욱 당황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눈을 들었다. 그녀는 웃었다. 아까의 웃음이 아니라 다른, 칭찬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나를 봐요." 그녀가 다정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싫지 않아요……. 당신 얼굴이 마음에 들어요. 우리는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당신은 내가 마음에 들어요?" 그녀가 짓궂게 덧붙였다.
"공작 영애님……." 나는 말을 꺼내려 했다.
"첫째, 나를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라고 불러요. 둘째, 애들이란(그녀는 고쳐 말했다) 젊은이들이란 왜 느끼는 걸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는 버릇이 있죠? 그건 어른들한테나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마음에 들죠?"
그녀가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것이 무척 기뻤지만 나는 조금 마음이 상했다. 그녀가 상대하는 게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될 수 있는 대로 거리낌 없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물론 저는 당신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 감추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정교사 있어요?"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아뇨, 저는 가정교사가 없은 지 오래됐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내가 그 프랑스인과 헤어진 지는 한 달도 안 되었다.
"오! 그렇군요, 이제 보니 완전히 어른이네요."
그녀가 내 손가락을 가볍게 때렸다.
"손 똑바로 들어요!" 그러고는 부지런히 실뭉치를 감는 데 열중했다.
나는 그녀가 눈을 들지 않는 틈을 타 그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몰래, 그다음엔 점점 더 대담하게. 그녀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얼굴의 모든 것이 그토록 섬세하고 영리하고 귀여웠다. 그녀는 흰 블라인드를 친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햇살이 그 블라인드를 뚫고 들어와 그녀의 보송보송한 금빛 머리칼과 순진한 목과 비스듬한 어깨와 여리고 고요한 가슴을 부드러운 빛으로 감쌌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나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가까워졌던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았던 것 같고, 그녀를 알기 전에는 아무것도 몰랐고 살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그녀는 벌써 낡은 짙은 빛 원피스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그 원피스와 앞치마의 주름 하나하나를 기꺼이 쓰다듬었을 것 같았다. 원피스 밑으로 그녀의 구두 끝이 내다보였다. 나는 그 구두 앞에 숭배하듯 엎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녀 앞에 앉아 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녀와 알게 되었다……. 이 얼마나 행복한가, 맙소사!」 나는 황홀해서 의자에서 뛰어내릴 뻔했지만, 맛있는 걸 먹는 아이처럼 두 발만 조금 흔들었다.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좋았고, 영원히 이 방을 나가지 않고 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꺼풀이 조용히 올라갔고, 다시 그녀의 밝은 눈이 내 앞에서 다정하게 빛났고, 그녀는 다시 웃었다.
"나를 어떻게 쳐다보는 거예요." 그녀가 천천히 말하며 손가락으로 나를 을렀다.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다 알아, 다 보고 있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녀가 어떻게 다 모르고 다 못 보겠어!」
갑자기 옆방에서 무언가 쿵쿵거리더니 군도가 쨍그랑 울렸다.
"지나!" 응접실에서 공작 부인이 외쳤다. "벨로브조로프가 너한테 새끼 고양이를 가져왔다."
"새끼 고양이!" 지나이다가 외치더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실뭉치를 내 무릎에 던지고 뛰어나갔다.
나도 일어서서 털실 타래와 실뭉치를 창턱에 놓고 응접실로 나가 어리둥절해서 멈춰 섰다. 방 한가운데에 줄무늬 새끼 고양이가 발을 벌리고 엎드려 있었다. 지나이다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고양이 주둥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공작 부인 곁에는 창과 창 사이 벽을 거의 다 가리고, 곱슬곱슬한 금발에 혈색 좋은 얼굴과 툭 튀어나온 눈을 가진 늠름한 경기병이 보였다.
"어쩜 이렇게 웃기게 생겼을까!" 지나이다가 되풀이했다. "눈이 회색이 아니라 초록색이네. 귀는 또 얼마나 큰지. 고마워요, 빅토르 예고리치! 당신 참 친절해요."
어제 본 젊은이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내가 알아본 그 경기병은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면서 박차를 딸깍 부딪치고 군도 고리를 쩔렁 울렸다.
"어제 큰 귀를 가진 줄무늬 새끼 고양이를 갖고 싶다고 하셔서……이렇게 구해 왔습니다. 말씀이 곧 법이지요." 그러고는 또 인사했다.
새끼 고양이가 약하게 야옹 하더니 바닥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가 봐!" 지나이다가 외쳤다. "보니파티! 소냐! 우유 좀 가져와."
빛바랜 낡은 노란 원피스에 색 바랜 목수건을 두른 하녀가 우유 접시를 들고 들어와 새끼 고양이 앞에 놓았다. 새끼 고양이는 흠칫하더니 눈을 꼭 감고 핥아 먹기 시작했다.
"혀가 어쩜 이렇게 분홍빛일까." 지나이다가 거의 바닥까지 고개를 숙이고 고양이 코밑을 옆에서 들여다보며 말했다.
새끼 고양이는 배가 부르자 가르릉거리며 새침하게 발을 놀렸다. 지나이다가 일어서서 하녀를 돌아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가져가."
"새끼 고양이 값으로 손 한 번만." 경기병이 히죽 웃으며 새 군복에 꽉 조인 우람한 몸 전체를 들썩였다.
"두 손 다요." 지나이다가 대꾸하며 그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그가 손에 입 맞추는 동안 그녀는 어깨 너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한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웃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냥 잠자코 있어야 할지 몰랐다. 갑자기 열린 현관문 너머로 우리 집 하인 표도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가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그에게 나갔다.
"무슨 일이야?" 내가 물었다.
"마님께서 도련님을 모셔 오라고 보내셨습니다요." 그가 소곤거렸다. "답을 가지고 안 돌아오신다고 화가 나셨습니다요."
"아니, 내가 여기 오래 있었나?"
"한 시간 넘었습니다요."
"한 시간 넘었다고!" 나는 저도 모르게 되뇌고는 응접실로 돌아가 인사하며 발을 끌기 시작했다.
"어디 가요?" 공작 영애가 경기병 너머로 나를 보며 물었다.
"집에 가야 합니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나는 노부인을 향해 덧붙였다. "두 시쯤 저희 집에 오신다고요."
"그렇게 전하구려, 도련님."
공작 부인은 서둘러 코담뱃갑을 꺼내 어찌나 요란하게 냄새를 맡던지 나는 움찔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전하구려." 그녀가 눈물 맺힌 눈을 끔벅이며 끙끙대고 되풀이했다.
나는 한 번 더 인사하고 돌아서서, 누가 자기 뒷모습을 보고 있다는 걸 알 때 아주 어린 젊은이가 느끼는 등의 어색함을 느끼며 방을 나왔다.
"꼭 또 와요, 무슈 볼데마르." 지나이다가 외치고 또 웃음을 터뜨렸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자꾸 웃을까?」 나는 표도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표도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못마땅한 듯 내 뒤를 따라왔다. 어머니는 나를 나무라며, 그 공작 부인 집에서 그렇게 오래 뭘 할 수 있었느냐고 의아해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내 방으로 갔다. 갑자기 몹시 슬퍼졌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경기병을 질투했다.
5장
공작 부인은 약속대로 어머니를 찾아왔는데 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식탁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이 자세키나 공작 부인이 아주 천박한 여자(une femme très vulgaire) 같다고, 세르게이 공작에게 자기를 위해 말 좀 넣어 달라는 부탁으로 몹시 귀찮게 했다고, 그 여자에게는 무슨 소송이며 일들이, 고약한 돈 문제(des vilaines affaires d'argent)가 늘 걸려 있는 모양이라 대단한 송사꾼임이 틀림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어쨌든 이웃이고 이름 있는 집안이니 내일 딸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오라고 불렀다고 덧붙였다(「딸과 함께」라는 말을 듣고 나는 접시에 코를 박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제 그 부인이 누군지 기억난다고 했다. 젊을 때 죽은 자세킨 공작을 알았는데, 교육은 훌륭히 받았지만 속이 비고 허튼 사람이었다고. 파리에서 오래 산 탓에 사교계에서는 그를 「파리 사람(le Parisien)」이라고 불렀고, 아주 부자였지만 재산을 몽땅 노름으로 날렸다고. 그리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거의 돈 때문이었을 텐데……"하긴 더 잘 고를 수도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덧붙이며 차갑게 웃었다……어떤 하급 관리의 딸과 결혼했고, 결혼하고 나서 투기에 뛰어들었다가 완전히 망했다고.
"돈을 꿔 달라고 하면 어쩌지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아버지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 여자 프랑스어는 하나?"
"아주 서툴러요."
"흠. 하긴 그건 상관없지. 딸도 불렀다고 했던 것 같은데. 누가 그러던데, 아주 상냥하고 교양 있는 아가씨라더군."
"아! 그럼 어머니를 안 닮았나 보네요."
"아버지도 안 닮았지." 아버지가 대꾸했다. "그 사람도 교양은 있었지만 어리석었으니까."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이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몹시 거북했다.
점심을 먹고 나는 정원에 나갔다. 하지만 총은 들지 않았다. 나는 「자세킨네 정원」에는 가까이 가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나를 그리로 끌었다. 그리고 괜한 일이 아니었다. 울타리에 다가가자마자 지나이다가 보였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그녀는 작은 책을 들고 천천히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하마터면 그녀를 그냥 보낼 뻔했다. 하지만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돌아보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둥근 밀짚모자의 넓은 파란 리본을 손으로 젖히고, 나를 보며 살짝 웃더니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모자를 벗고, 그 자리에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물러났다. 「Que suis-je pour elle?(그녀에게 나는 무엇일까?)」 나는(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프랑스어로 생각했다.
뒤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아버지가 그 빠르고 가벼운 걸음으로 나에게 오고 있었다.
"저게 공작 영애냐?" 아버지가 물었다.
"네."
"너 그 아가씨를 아니?"
"오늘 아침 공작 부인 댁에서 봤어요."
아버지는 멈춰 서더니 발뒤꿈치로 홱 돌아서서 되돌아갔다. 지나이다와 나란해지자 아버지는 정중하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도 얼굴에 놀라는 빛이 없지 않게 그에게 인사하고 책을 내렸다. 그녀가 눈으로 아버지를 배웅하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늘 아주 우아하고 독특하고 수수하게 옷을 입었다. 하지만 그때만큼 그의 모습이 늘씬해 보인 적은 없었고, 그의 회색 모자가 숱이 겨우 조금 줄어든 곱슬머리 위에 그때만큼 멋지게 얹혀 있던 적도 없었다.
나는 지나이다에게 가려 했지만,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책을 들고 가 버렸다.
6장
나는 저녁 내내, 그리고 이튿날 아침까지 무언가 시무룩하게 멍한 채 보냈다. 기억하기로 나는 공부를 하려고 카이다노프를 집어 들었지만, 그 이름난 교과서의 큼직한 줄과 쪽들이 눈앞에서 헛되이 어른거렸다. 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무예와 용맹이 뛰어났다」는 문장을 열 번 잇달아 읽었지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책을 내던졌다. 점심 전에 나는 다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다시 작은 프록코트를 입고 넥타이를 맸다.
"그건 뭐 하러?"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아직 대학생도 아니고, 시험에 붙을지 어떨지도 하느님만 아신다. 그리고 웃옷을 지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걸 내팽개칠 수는 없지!"
"손님이 오시잖아요." 나는 거의 절망해서 소곤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손님은 무슨 손님!"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작은 프록코트를 짧은 웃옷으로 바꿔 입었지만 넥타이는 풀지 않았다. 공작 부인은 딸과 함께 점심 반 시간 전에 나타났다. 노부인은 이미 나도 아는 그 초록 원피스 위에 노란 숄을 걸치고, 불꽃 빛깔 리본이 달린 구식 실내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자기 어음 이야기를 시작했고, 한숨을 쉬고, 가난을 하소연하고, 「징징댔지만」 조금도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 여전히 요란하게 코담배를 맡았고, 여전히 거리낌 없이 의자에서 몸을 돌리며 들썩였다. 자기가 공작 부인이라는 건 아예 머릿속에 없는 것 같았다. 그 대신 지나이다는 아주 엄하게, 거의 오만하게, 진짜 공작 영애답게 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차가운 굳음과 근엄함이 떠올라서 나는 그녀를, 그녀의 눈길과 미소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모습에서도 그녀는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연한 하늘빛 무늬가 들어간 가벼운 바레주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칼은 영국식으로 뺨을 따라 긴 곱슬로 늘어져 있었는데, 그 머리 모양이 그녀 얼굴의 차가운 표정에 잘 어울렸다. 점심을 먹는 동안 아버지가 그녀 곁에 앉아 그다운 우아하고 차분한 예의로 옆자리 손님을 상대했다. 아버지는 이따금 그녀를 흘끗 보았고, 그녀도 이따금 아버지를 흘끗 보았는데, 그 눈길이 아주 이상했다. 거의 적의에 차 있었다. 둘은 프랑스어로 이야기했는데, 기억하기로 나는 지나이다의 발음이 깨끗한 데 놀랐다. 공작 부인은 식사 내내 여전히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고 많이 먹으며 음식을 칭찬했다. 어머니는 그녀를 눈에 띄게 부담스러워하며 어딘가 서글픈 무시로 대꾸했고, 아버지는 이따금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지나이다도 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애는 무슨 콧대가 그렇게 높은지." 어머니가 이튿날 말했다. "생각해 보면, 뭘 그렇게 뻐기는지. 그 바느질집 처녀 같은 얼굴로(avec sa mine de grisette)!"
"당신은 바느질집 처녀를 본 적이 없는 모양이군." 아버지가 그녀에게 말했다.
"없어서 다행이죠!"
"물론 다행이지……그런데 그럼 어떻게 그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할 수 있지?"
지나이다는 나에게는 정말이지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곧 공작 부인은 작별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표트르 바실리치, 두 분의 보살핌을 믿겠어요." 그녀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노래하듯 늘어지게 말했다. "어쩌겠어요! 좋은 시절도 있었지만 다 지나갔지요. 이렇게 나도 공작 부인이랍시고." 그녀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덧붙였다. "먹을 게 없는데 지체가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아버지는 그녀에게 공손하게 인사하고 현관문까지 배웅했다. 나는 짤막한 웃옷을 입고 거기 서서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 바닥만 보고 있었다. 지나이다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나를 완전히 죽여 버렸다. 그런데 그녀가 내 곁을 지나가며 빠르게, 예전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이렇게 속삭였을 때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
"여덟 시에 우리 집에 와요, 알았죠, 꼭……."
나는 그저 두 팔을 벌렸을 뿐인데, 그녀는 벌써 흰 숄을 머리에 쓰고 가 버렸다.
7장
정각 여덟 시에 나는 프록코트를 입고 앞머리를 세운 채 공작 부인이 사는 곁채의 현관에 들어섰다. 늙은 하인이 음울하게 나를 보더니 마지못해 벤치에서 일어났다. 응접실에서 즐거운 목소리들이 울렸다. 나는 문을 열었다가 놀라서 뒷걸음질했다. 방 한가운데 의자 위에 공작 영애가 서서 남자 모자를 앞에 들고 있었고, 의자 둘레에는 남자 다섯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모자 속에 손을 넣으려 애썼고, 그녀는 모자를 높이 쳐들고 세게 흔들었다. 나를 보더니 그녀가 외쳤다.
"잠깐, 잠깐! 새 손님이에요, 이분한테도 제비를 줘야죠." 그러고는 의자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내 프록코트 소맷부리를 잡았다. "자, 이리 와요." 그녀가 말했다. "왜 서 있어요? 여러분(Messieurs), 소개할게요. 이분은 우리 이웃집 아들 무슈 볼데마르예요. 그리고 이분들은,"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손님들을 차례로 가리켰다. "말렙스키 백작, 루신 박사, 시인 마이다노프, 퇴역 대위 니르마츠키, 그리고 이미 본 경기병 벨로브조로프예요. 잘 부탁드려요."
나는 어찌나 쩔쩔맸던지 아무에게도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루신 박사가 정원에서 나를 그토록 무자비하게 무안 주던 바로 그 거무스름한 신사라는 것을 나는 알아보았다. 나머지는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백작!" 지나이다가 말을 이었다. "무슈 볼데마르한테 제비를 써 주세요."
"그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백작이 가벼운 폴란드 억양으로 반대했다. 그는 아주 잘생기고 멋 부려 차려입은 갈색 머리 남자로, 표정 풍부한 갈색 눈에 가늘고 흰 작은 코, 조그만 입 위에 가는 콧수염이 있었다. "이분은 우리와 벌칙 놀이를 하지 않았잖습니까."
"공정하지 않습니다." 벨로브조로프와, 퇴역 대위라고 소개받은 신사가 되풀이했다. 마흔쯤 된 그 사람은 흉할 만큼 얽은 얼굴에 흑인처럼 곱슬머리였고, 등이 조금 굽고 다리가 휘었으며, 견장 없는 군용 프록코트를 단추도 안 채운 채 입고 있었다.
"제비를 쓰라니까요." 공작 영애가 되풀이했다. "이게 무슨 반란이에요? 무슈 볼데마르는 처음 왔으니까, 오늘은 이분한테 법이 없어요. 투덜대지 말고 쓰세요,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백작은 어깨를 으쓱했지만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반지로 장식한 흰 손에 펜을 들어 종이 한 조각을 찢어 거기에 쓰기 시작했다.
"적어도 볼데마르 씨한테 무슨 일인지 설명은 하게 해 주시지요." 루신이 비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안 그러면 아주 어리둥절할 테니까. 그러니까 젊은이, 우리는 벌칙 놀이를 하고 있소. 공작 영애가 벌을 받게 되었는데, 행운의 제비를 뽑는 사람이 영애의 손에 입 맞출 권리를 얻는 거요. 내 말 알아들었소?"
나는 그를 쳐다보기만 하고 안개 속에 있는 듯 서 있었고, 공작 영애는 다시 의자 위로 뛰어올라 다시 모자를 흔들기 시작했다. 모두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마이다노프." 공작 영애가 키 크고 얼굴이 수척하며, 작고 앞을 잘 못 보는 눈에 엄청나게 긴 검은 머리를 한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시인이니까 너그러워야죠. 당신 제비를 무슈 볼데마르한테 양보해요. 그래야 저분이 기회를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갖죠."
하지만 마이다노프는 싫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머리칼을 휘날렸다. 나는 맨 마지막으로 모자에 손을 넣어 제비를 하나 집어 펼쳤다……. 맙소사! 거기 「입맞춤」이라는 말을 보았을 때 나는 어떻게 되었던가!
"입맞춤!" 나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브라보! 이분이 땄어요." 공작 영애가 받았다. "어쩜 이렇게 기쁠까!" 그녀가 의자에서 내려와 어찌나 맑고 달콤하게 내 눈을 들여다보았던지 내 심장이 굴러떨어졌다. "당신도 기뻐요?"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저……요?" 나는 더듬거렸다.
"그 제비 나한테 파시오." 갑자기 벨로브조로프가 바로 내 귀 위에서 툭 내뱉었다. "백 루블 주겠소."
내가 어찌나 분개한 눈길로 경기병에게 대답했던지 지나이다가 손뼉을 쳤고, 루신이 외쳤다. 장하오!
"하지만,"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의전관으로서 모든 규칙이 지켜지는지 살필 의무가 있소. 무슈 볼데마르, 한쪽 무릎을 꿇으시오. 우리 규칙이 그렇소."
지나이다가 내 앞에 서서, 나를 더 잘 보려는 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고 위엄 있게 손을 내밀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려다 두 무릎을 다 꿇고 말았고, 어찌나 서툴게 지나이다의 손가락에 입술을 댔던지 그녀의 손톱에 코끝이 살짝 긁혔다.
"좋아!" 루신이 외치며 나를 일으켜 주었다.
벌칙 놀이는 계속되었다. 지나이다는 나를 자기 곁에 앉혔다. 그녀는 별의별 벌칙을 다 생각해 냈다! 그중에 그녀가 「조각상」 흉내를 내야 하는 차례가 있었는데, 그녀는 받침대로 못생긴 니르마츠키를 골라 엎드리게 하고, 거기다 얼굴을 가슴에 파묻게 했다. 웃음소리가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다. 외롭고 절도 있게 길러져 점잖은 지주 집안에서 자란 소년인 나에게, 이 모든 소란과 법석, 이 거리낌 없고 거의 난폭한 즐거움, 낯선 사람들과의 전에 없던 어울림은 그대로 머리로 치솟았다. 나는 정말이지 술에 취한 듯 취해 버렸다. 나는 누구보다 크게 웃고 떠들기 시작해서, 상의하러 불러온 이베르스키 문 근처의 무슨 하급 관리와 옆방에 앉아 있던 늙은 공작 부인마저 나를 보러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어찌나 행복했던지, 흔히 말하듯 아랑곳하지 않았고, 누가 비웃든 누가 곁눈질하든 한 푼어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나이다는 계속 나를 더 아꼈고 자기 곁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어떤 벌칙에서 나는 그녀와 나란히 앉아 비단 손수건 하나를 함께 뒤집어써야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내 비밀을 말해야 했다. 기억이 난다. 우리 둘의 머리가 갑자기 숨 막히고 반쯤 비치는 향긋한 어둠 속에 들어앉았던 것을, 그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이 가깝고 부드럽게 빛나고 벌어진 입술이 뜨겁게 숨을 쉬고, 이가 보이고, 그녀의 머리칼 끝이 나를 간질이고 태웠던 것을. 나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신비롭고 짓궂게 웃다가 마침내 나에게 속삭였다. "자, 뭐예요?" 그런데 나는 얼굴만 붉히고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숨을 겨우 쉬었다. 벌칙 놀이가 지겨워지자 우리는 줄잡기 놀이를 했다. 맙소사! 멍하니 있다가 그녀에게 손가락을 세고 날카롭게 맞았을 때 나는 얼마나 황홀했던가. 그리고 그 뒤로 나는 일부러 멍한 척하려 애썼는데, 그녀는 나를 놀리며 내민 손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우리가 한 일이 어디 그뿐이었으랴!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집시 야영지 흉내도 냈다. 니르마츠키에게 곰 옷을 입히고 소금물을 먹였다. 말렙스키 백작은 갖가지 카드 마술을 보여 주다가, 마지막엔 카드를 섞어서 휘스트를 하며 으뜸패를 몽땅 자기에게 돌렸고, 루신은 「축하드리는 영광을 누렸다」. 마이다노프는 자기 서사시 「살인자」의 몇 대목을 낭송했는데(낭만주의가 한창이던 때의 일이다), 그는 그것을 검은 표지에 핏빛 대문자로 제목을 박아 펴낼 작정이었다. 이베르스키 문에서 온 관리의 무릎에서 모자를 훔쳐서, 돌려받으려면 카자치크 춤을 추라고 시켰다. 늙은 보니파티에게 여자 실내 모자를 씌웠고, 공작 영애는 남자 모자를 썼다……. 다 늘어놓을 수도 없다. 벨로브조로프만 점점 더 구석에 박혀 찌푸리고 화가 나 있었다……. 이따금 그의 눈에 핏발이 서고 온 얼굴이 빨개져서, 금방이라도 우리 모두에게 덤벼들어 나뭇조각처럼 사방으로 내팽개칠 것 같았다. 하지만 공작 영애가 그를 흘끗 보고 손가락으로 을러대면 그는 다시 제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마침내 우리는 기진맥진했다. 공작 부인은 스스로 말하듯 웬만해선 끄떡없는 사람이라 어떤 고함에도 꿈쩍하지 않았지만, 그런 그녀도 피로를 느끼고 쉬고 싶어 했다. 밤 열한 시가 넘어 저녁이 나왔다. 오래되어 마른 치즈 한 덩이와 다진 햄을 넣은 차가운 피로시키 몇 개였는데, 나에게는 그 어떤 파테보다 맛있게 느껴졌다. 포도주는 딱 한 병이었는데 그것도 이상했다. 목이 불룩한 검은 병이었고, 포도주에서는 분홍 물감 냄새가 났다. 하긴 아무도 마시지 않았다. 지치고 기진할 만큼 행복해서 나는 곁채를 나왔다. 작별할 때 지나이다는 내 손을 꼭 쥐고 다시 수수께끼처럼 웃었다.
밤이 무겁고 축축하게 내 달아오른 얼굴에 끼쳤다. 뇌우가 올 것 같았다. 검은 구름이 자라서 하늘을 기어가며 눈에 보이게 연기 같은 윤곽을 바꾸었다. 산들바람이 어두운 나무들 속에서 불안하게 떨었고, 어딘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천둥이 혼잣말하듯 성나고 둔하게 투덜거렸다.
나는 뒷문으로 내 방에 숨어들었다. 내 몸종 영감이 바닥에서 자고 있어서 그를 넘어가야 했다. 그는 깨어나 나를 보더니, 어머니가 또 나에게 화가 나서 다시 사람을 보내려 했는데 아버지가 말렸다고 알렸다. (나는 어머니에게 밤 인사를 하고 축복을 받지 않고는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영감에게 내가 혼자 옷을 벗고 자겠다고 하고 촛불을 껐다. 하지만 옷을 벗지도, 눕지도 않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 홀린 듯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내가 느끼는 것은 그토록 새롭고 그토록 달콤했다……. 나는 꼼짝 않고 아주 조금 둘레를 둘러보며 천천히 숨을 쉬었고, 이따금 떠올리며 소리 없이 웃다가,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이것이 바로 그것, 바로 사랑이라는 생각에 속으로 서늘해졌다. 지나이다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내 앞을 떠갔다. 떠가며 지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웃었고, 그녀의 눈은 조금 비스듬히, 묻듯이, 생각에 잠겨,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녀와 헤어지던 그 순간처럼. 마침내 나는 일어나 발끝으로 침대에 다가가,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나를 가득 채운 것을 흐트러뜨릴까 겁이라도 나는 듯, 옷도 벗지 않고 조심스럽게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나는 누웠지만 눈을 감지도 않았다. 곧 무언가 희미한 빛이 끊임없이 내 방에 비쳐 든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았다. 창살이 신비하고 흐릿하게 하얗게 빛나는 유리와 또렷이 갈라져 보였다. 「뇌우다.」 나는 생각했다. 정말로 뇌우였지만 아주 멀리 지나가고 있어서 천둥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서 흐릿하고 길게, 가지를 친 듯한 번개만 쉬지 않고 번쩍였다. 번쩍인다기보다 죽어 가는 새의 날개처럼 떨리고 경련했다. 나는 일어나 창가에 다가가 아침까지 거기 서 있었다……. 번개는 한순간도 멎지 않았다. 민간에서 말하는 「참새의 밤」이었다. 나는 말없는 모래 벌판을, 네스쿠치니 정원의 어두운 덩어리를, 희미한 번쩍임마다 함께 떨리는 듯한 먼 건물들의 누르스름한 정면을 바라보았다……. 나는 바라보았고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말없는 번개, 이 억눌린 섬광이 내 안에서도 번쩍이는 말없고 은밀한 충동에 대답하는 것 같았다. 아침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새벽빛이 진홍 얼룩으로 나타났다. 해가 다가오자 번개는 점점 창백해지고 줄어들었다. 점점 드물게 떨리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떠오르는 날의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의심할 바 없는 빛에 잠겨서…….
내 안의 번개도 사라졌다. 나는 커다란 피로와 고요를 느꼈다……. 하지만 지나이다의 모습은 여전히 의기양양하게 내 영혼 위를 떠다녔다. 다만 그 모습 자체도 가라앉은 듯했다. 날아오르는 백조가 늪의 풀에서 떠나듯, 그 모습은 둘레의 볼품없는 다른 형상들에게서 떨어져 나왔고, 나는 잠들며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믿음에 찬 숭배로 그것에 기대었다…….
오, 부드러운 감정들, 여린 소리들, 감동한 영혼의 선함과 가라앉음, 사랑의 첫 감동이 녹아내리는 기쁨, 너희는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느냐?
8장
이튿날 아침 차를 마시러 내려가자 어머니는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내가 각오한 것보다는 덜했다. 그리고 어젯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하게 했다. 나는 몇 마디로 대답하며 많은 것을 빼고 모든 게 될 수 있는 대로 순진해 보이도록 애썼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점잖은(comme il faut) 사람들이 아니야." 어머니가 말했다. "시험 준비하고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그런 데를 들락거릴 까닭이 없다."
내 공부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이 이 몇 마디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나는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차를 마신 뒤 아버지가 내 팔을 끼고 함께 정원으로 가더니, 자세킨네에서 본 것을 다 이야기하게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상한 영향을 미쳤고, 우리 사이도 이상했다. 아버지는 내 교육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지만 나를 모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는 내 자유를 존중했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나에게 정중하기까지 했다……. 다만 나를 자기 곁에 다가오게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아버지에게 감탄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남자의 본보기처럼 보였다. 맙소사, 나를 밀어내는 아버지의 손을 늘 느끼지만 않았다면 나는 얼마나 열렬히 아버지를 따랐을까! 그 대신 아버지는 원할 때면 한마디 말로, 한 번의 몸짓으로 거의 순식간에 자기에 대한 끝없는 믿음을 내 안에 불러일으킬 줄 알았다. 내 영혼이 열렸고, 나는 아버지와 슬기로운 친구처럼, 너그러운 스승처럼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아버지는 똑같이 갑작스럽게 나를 떠났고, 그의 손은 다시 나를 밀어냈다. 다정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밀어냈다.
아버지에게 이따금 흥이 찾아오면 아버지는 소년처럼 나와 장난치고 뛰놀 준비가 되어 있었다(아버지는 몸을 힘차게 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했다). 한번은, 딱 한 번은! 아버지가 어찌나 다정하게 나를 어루만졌던지 나는 하마터면 울 뻔했다……. 하지만 그 흥도 다정함도 흔적 없이 사라졌고,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앞날에 대한 아무 희망도 주지 않았다. 마치 그 모든 걸 꿈에서 본 것처럼. 이따금 내가 아버지의 영리하고 잘생기고 환한 얼굴을 바라보노라면……내 가슴이 떨리고 온 존재가 아버지를 향해 내달았다……. 그러면 아버지는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느끼기라도 한 듯 지나가며 내 뺨을 툭 두드리고는, 가 버리거나 다른 일에 몰두하거나 갑자기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만이 그렇게 얼어붙을 줄 알았다. 그러면 나도 곧바로 움츠러들고 차가워졌다. 이따금 찾아오는 아버지의 호의는 결코 나의 말 없지만 뻔히 보이는 애원에 이끌려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늘 뜻밖에 찾아왔다. 나중에 아버지의 성격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나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나에게도 가정생활에도 마음이 없었다. 그는 다른 것을 사랑했고 그 다른 것을 실컷 누렸다. 「얻을 수 있는 건 네 손으로 얻고, 남의 손에는 넘어가지 마라. 자기가 자기 자신의 것이 되는 것, 그게 삶의 요령의 전부다.」 아버지가 언젠가 나에게 말했다. 또 한번은 내가 젊은 민주주의자답게 아버지 앞에서 자유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그날 아버지는 내가 부르는 말로 「착한」 날이었다. 그럴 때면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었다).
"자유라." 아버지가 되풀이했다. "그런데 사람에게 무엇이 자유를 줄 수 있는지 아니?"
"뭔데요?"
"의지, 자기 자신의 의지다. 그리고 의지는 자유보다 나은 힘을 준다. 원할 줄 알아라. 그러면 자유로워질 거고, 명령도 하게 될 거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먼저, 무엇보다 더 살고 싶어 했고, 그렇게 살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삶의 「요령」을 오래 누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마흔둘에 죽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자세킨네에 간 이야기를 자세히 했다. 아버지는 벤치에 앉아 승마용 채찍 끝으로 모래에 그림을 그리며 반은 귀 기울이고 반은 딴생각을 하며 들었다. 이따금 웃으며, 어쩐지 환하고 재미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고, 짧은 질문과 반박으로 나를 부추겼다. 나는 처음엔 지나이다의 이름조차 입에 올릴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참지 못하고 그녀를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계속 웃기만 했다. 그러다 생각에 잠기더니 기지개를 켜고 일어섰다.
집을 나설 때 아버지가 말에 안장을 얹으라고 시켰던 것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훌륭한 기수였고, 레리 씨보다 훨씬 먼저 가장 사나운 말도 길들일 줄 알았다.
"아빠, 같이 타러 가도 돼요?" 내가 물었다.
"아니."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 늘 그렇듯 무심하게 다정한 표정이 떠올랐다. "원하면 너 혼자 가라. 마부한테는 내가 안 간다고 전하고."
아버지는 나에게 등을 돌리고 빠르게 멀어졌다. 나는 눈으로 아버지를 좇았다. 아버지는 대문 너머로 사라졌다. 아버지의 모자가 울타리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자세킨네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 집에 한 시간도 채 머물지 않았지만, 곧바로 시내로 갔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나는 혼자 자세킨네에 갔다. 응접실에는 늙은 공작 부인만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뜨개바늘 끝으로 실내 모자 밑 머리를 긁적이고는 갑자기 청원서 하나를 옮겨 써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기꺼이요." 나는 대답하고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글씨는 큼직하게 써 주시오." 공작 부인이 지저분하게 고쳐 쓴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안 될까, 도련님?"
"오늘 바로 옮겨 쓰겠습니다."
옆방 문이 살짝 열리고 그 틈으로 지나이다의 얼굴이 나타났다. 창백하고 생각에 잠긴 얼굴에 머리는 아무렇게나 뒤로 넘겨져 있었다. 그녀는 크고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더니 조용히 문을 닫았다.
"지나, 얘, 지나!" 노부인이 불렀다.
지나이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노부인의 청원서를 가지고 와서 저녁 내내 그것을 붙들고 앉아 있었다.
9장
나의 「열정」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기억하기로 그때 나는 막 관청에 들어간 사람이 느낄 법한 것과 비슷한 것을 느꼈다. 나는 더는 그냥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날부터 내 열정이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내 괴로움도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고 덧붙일 수 있겠다. 지나이다가 없으면 나는 애가 타서 쇠약해졌다.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모든 것이 손에서 떨어졌다. 나는 온종일 팽팽하게 그녀만 생각했다……. 나는 애가 탔다……. 하지만 그녀 앞에 있다고 해서 나아지지도 않았다. 나는 질투했고, 내가 보잘것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바보같이 토라졌다가 바보같이 굽실거렸다. 그래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나를 그녀에게 끌었고, 나는 매번 저도 모르는 행복의 떨림과 함께 그녀 방 문턱을 넘었다. 지나이다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고, 나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내 열정을 재미있어했고, 나를 놀리고, 귀여워하고, 괴롭혔다. 다른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과 가장 깊은 슬픔의 유일한 원천, 제멋대로이고 책임질 것 없는 원인이 되는 건 달콤한 일이다. 그런데 지나이다의 손안에서 나는 말랑한 밀랍 같았다. 하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건 나 하나가 아니었다. 그녀의 집을 드나드는 남자들은 모두 그녀에게 정신이 나가 있었고, 그녀는 그들 모두를 줄에 매어 자기 발치에 두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가 두려움을 주었다가 하며 제 변덕대로 그들을 휘두르는 게 재미있었고(이걸 그녀는 「사람들끼리 서로 부딪치게 하기」라고 불렀다), 그들은 맞설 생각도 하지 않고 기꺼이 그녀에게 굴복했다. 생기 넘치고 아름다운 그녀의 온 존재에는 교활함과 태평함, 꾸밈과 소박함, 고요함과 장난기가 뒤섞인 무언가 유난히 매혹적인 것이 있었다. 그녀가 하고 말하는 모든 것 위로,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 위로 섬세하고 가벼운 매력이 감돌았고, 모든 것에서 독특하고 놀이하는 힘이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도 끊임없이 바뀌며 놀았다. 거의 같은 순간에 비웃음과 생각에 잠김과 정열을 나타냈다. 바람 부는 화창한 날 구름 그림자처럼 가볍고 빠른 갖가지 감정이 그녀의 눈과 입술 위를 쉴 새 없이 스쳐 갔다.
그녀에게는 숭배자 하나하나가 다 필요했다. 그녀가 이따금 「나의 짐승」이라고, 이따금은 그냥 「내 것」이라고 부르던 벨로브조로프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불 속에라도 뛰어들었을 것이다. 자기 머리와 다른 장점들을 믿지 못한 그는 줄곧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하며 다른 사람들은 말만 번지르르하다고 넌지시 비쳤다. 마이다노프는 그녀 영혼의 시적인 줄에 응했다. 거의 모든 글쟁이가 그렇듯 꽤 차가운 사람인 그는 그녀를 숭배한다고 그녀에게,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도 애써 우겼고, 끝없는 시로 그녀를 노래하며 어딘가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진심인 열광으로 그것을 그녀에게 읽어 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공감하면서도 살짝 놀렸다. 그를 별로 믿지 않았고, 그의 넋두리를 실컷 듣고 나면 그녀 말대로 「공기를 맑게 하려고」 그에게 푸시킨을 읽게 했다. 말로는 비꼬고 냉소적인 의사 루신은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알았고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 비록 뒤에서도 앞에서도 그녀를 욕했지만. 그녀는 그를 존중했지만 봐주지는 않았고, 때로는 유난히 심술궂은 기쁨으로 그도 자기 손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나는 바람둥이고, 나는 심장이 없고, 나는 배우 기질이에요." 그녀가 언젠가 내 앞에서 그에게 말했다. "아, 좋아요! 그럼 손을 내밀어요. 내가 거기 핀을 찌를게요. 당신은 이 젊은이 앞에서 창피할 거고, 아플 거예요. 그래도 당신, 정직한 신사 양반, 웃으셔야 해요." 루신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결국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를 찔렀고, 그는 정말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도 웃었다. 핀을 꽤 깊이 찔러 넣으며, 그가 헛되이 이리저리 굴리는 눈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한 건 지나이다와 말렙스키 백작 사이의 관계였다. 그는 잘생기고 날렵하고 영리했지만, 열여섯 살 소년인 나에게조차 그에게는 무언가 의심스럽고 거짓된 것이 느껴졌고, 나는 지나이다가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게 의아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 거짓을 알아챘으면서도 꺼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잘못된 교육, 이상한 사귐과 습관, 늘 곁에 있는 어머니, 집안의 가난과 무질서, 그 모든 것, 젊은 아가씨가 누리는 자유 자체부터 둘레 사람들보다 자기가 낫다는 의식까지 모든 것이 그녀 안에 반쯤 경멸하는 무심함과 까다롭지 않음을 길러 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보니파티가 와서 설탕이 떨어졌다고 알리든, 무슨 시시한 험담이 드러나든, 손님들이 다투든, 그녀는 곱슬머리를 흔들며 "별것 아니야!" 하고 말할 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말렙스키가 여우처럼 교활하게 몸을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가 우아하게 그녀의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흐뭇하고 아첨하는 작은 웃음을 띠고 그녀 귀에 무언가 속삭이기 시작할 때면 온몸의 피가 끓어올랐다. 그런데 그녀는 팔짱을 끼고 그를 유심히 바라보며 자기도 웃고 고개를 흔들었다.
"말렙스키 씨를 왜 그렇게 받아 주세요?" 언젠가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 사람 콧수염이 참 멋지잖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하긴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죠."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또 한번은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나는 내려다봐야 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어요. 나는 나를 꺾을 사람이 필요해요……. 하지만 하느님 덕분에 그런 사람은 안 만날 거예요! 누구 손아귀에도 안 걸려들 거예요, 절대로!"
"그럼 당신은 영영 사랑을 안 하겠네요?"
"그럼 당신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나요?" 그녀가 말하며 장갑 끝으로 내 코를 툭 쳤다.
그렇다, 지나이다는 나를 놀리며 무척 즐거워했다. 세 주 동안 나는 날마다 그녀를 보았는데, 그녀가 나에게 하지 않은 짓이 무엇이었으랴! 그녀는 우리 집에 거의 오지 않았는데, 나는 그게 아쉽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그녀는 아가씨로, 공작 영애로 변했고, 나는 그녀를 서먹해했다. 어머니 앞에서 들킬까 봐 두려웠다. 어머니는 지나이다를 몹시 못마땅해하며 우리를 적의에 차서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고, 그녀와는 말을 별로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유난히 영리하고 의미 있게 했다. 나는 공부도 독서도 그만두었다. 근처를 산책하는 것도, 말을 타는 것도 그만두었다. 다리를 실에 묶인 딱정벌레처럼 나는 사랑하는 곁채 둘레를 쉴 새 없이 맴돌았다. 영원히 거기 남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어머니가 나에게 투덜거렸고, 이따금 지나이다 자신이 나를 쫓아냈다. 그러면 나는 내 방에 틀어박히거나 정원 맨 끝으로 가서, 높은 돌 온실의 남은 폐허에 기어 올라가, 길 쪽으로 난 담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몇 시간이고 앉아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곁에서는 먼지 앉은 쐐기풀 위로 흰 나비들이 나른하게 날아다녔다. 날쌘 참새 한 마리가 가까운 반쯤 부서진 붉은 벽돌에 앉아 꽁지를 펴고 연신 온몸을 돌리며 짜증스럽게 짹짹거렸다. 아직도 나를 못 믿는 까마귀들이 헐벗은 자작나무 꼭대기 높이, 높이 앉아 이따금 깍깍 울었다. 해와 바람이 자작나무의 성긴 가지 속에서 조용히 놀았다. 돈스코이 수도원의 종소리가 이따금 차분하고 쓸쓸하게 날아왔다. 그리고 나는 앉아서 바라보고 듣고, 이름 없는 느낌으로 온통 가득 찼다.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슬픔도, 기쁨도, 앞날에 대한 예감도, 욕망도, 삶에 대한 두려움도. 하지만 그때 나는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했고, 내 안에서 들끓던 그 모든 것 가운데 무엇 하나 이름 붙일 줄 몰랐다. 아니면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지나이다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지나이다는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줄곧 나를 가지고 놀았다. 어떤 때는 나에게 교태를 부려서 나는 설레고 녹아내렸다가, 어떤 때는 갑자기 나를 밀어내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엄두도, 그녀를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기억하기로 그녀가 며칠 내내 나에게 아주 차가웠던 적이 있었다. 나는 완전히 기가 죽어서, 겁먹은 채 곁채에 들를 때면 늙은 공작 부인 곁에 붙어 있으려 했다. 마침 그때 공작 부인은 몹시 욕을 하고 고함을 질렀는데도. 그녀의 어음 일이 잘 안 풀려서 벌써 구역 경찰관과 두 번이나 따졌던 것이다.
어느 날 정원에서 그 울타리 옆을 지나다가 지나이다를 보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풀밭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러나려 했는데,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명령하듯 손짓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처음엔 그녀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손짓했다. 나는 곧바로 울타리를 뛰어넘어 기쁘게 그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눈길로 나를 멈추게 하고 자기에게서 두 걸음 떨어진 오솔길을 가리켰다. 어쩔 줄 몰라서 나는 오솔길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어찌나 창백했던지, 얼굴의 선 하나하나에 어찌나 쓰라린 슬픔과 깊은 피로가 드러났던지, 내 가슴이 조여들어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지나이다가 손을 뻗어 무슨 풀을 하나 뜯더니 그것을 깨물고 멀리 내던졌다.
"나를 아주 사랑해요?" 그녀가 마침내 물었다. "그렇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래요." 그녀가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되풀이했다. "그렇네요. 똑같은 눈이에요." 그녀가 덧붙이더니 생각에 잠겨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모든 게 지긋지긋해요." 그녀가 속삭였다. "세상 끝으로 가 버리고 싶어요. 견딜 수가 없어요, 감당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 나한테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아, 괴로워요……맙소사, 얼마나 괴로운지!"
"왜요?" 내가 쭈뼛쭈뼛 물었다.
지나이다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다. 나는 계속 무릎을 꿇은 채 깊은 시름에 잠겨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슴에 그대로 박혔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슬퍼하지만 않는다면 기꺼이 목숨이라도 내주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가 왜 괴로운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녀가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혀 정원에 나와 베인 풀처럼 땅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둘레는 밝고 푸르렀다. 바람이 나뭇잎 속에서 살랑거리며 이따금 지나이다 머리 위로 긴 산딸기 가지를 흔들었다. 어딘가에서 비둘기들이 구구 울었고, 벌들이 성긴 풀 위를 낮게 날며 윙윙거렸다. 위에서는 하늘이 다정하게 파랬다. 그런데 나는 그토록 슬펐다…….
"시 좀 읽어 줘요." 지나이다가 나직이 말하며 팔꿈치를 괴었다. "당신이 시 읽는 거 좋아해요. 노래하듯 읽지만 괜찮아요, 그게 젊은 거니까. 「그루지야의 언덕 위에」를 읽어 줘요. 먼저 앉고요."
나는 앉아서 「그루지야의 언덕 위에」를 읽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에」." 지나이다가 되풀이했다. "그게 시의 좋은 점이에요. 시는 없는 것을, 있는 것보다 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진실 같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거든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니,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니!" 그녀는 다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몸을 떨며 일어섰다. "가요. 엄마한테 마이다노프가 와 있어요. 나한테 자기 서사시를 가져왔는데 내가 내버려 두고 나왔어요. 그 사람도 지금 속상할 거예요……어쩌겠어요! 당신도 언젠가 알게 될 거예요……. 다만 나한테 화내지 말아요!"
지나이다는 서둘러 내 손을 꼭 쥐고 앞서 달려갔다. 우리는 곁채로 돌아갔다. 마이다노프가 막 인쇄된 「살인자」를 우리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그는 사보격 약강 시를 노래하듯 외쳤고, 운이 번갈아 가며 방울처럼 텅 비고 요란하게 울렸지만, 나는 줄곧 지나이다를 바라보며 그녀의 마지막 말의 뜻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아니면, 혹시 숨은 연적이
뜻밖에 그대를 사로잡았는가?
마이다노프가 갑자기 콧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내 눈과 지나이다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고 나는 두려움에 얼어붙었다. 나는 전에도 그녀를 질투했지만,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번쩍인 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맙소사!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
10장
나의 진짜 고통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몰래, 하지만 끈질기게 지나이다를 지켜보았다. 그녀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그건 분명했다. 그녀는 혼자 산책하러 나가 오래 걸었다. 이따금 손님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 몇 시간이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나는 갑자기 아주 눈치 빠른 사람이 되었다. 아니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일까? 아니면 저 사람일까?」 나는 그녀의 숭배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불안하게 생각을 옮기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말렙스키 백작이(지나이다를 위해 이걸 인정하기가 부끄러웠지만) 남몰래 누구보다 위험하게 여겨졌다.
나의 관찰력은 코앞밖에 보지 못했고, 나의 감춤은 아마 아무도 속이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루신 박사는 곧 나를 꿰뚫어 보았다. 하긴 그도 요즘 달라졌다. 그는 야위었고, 여전히 자주 웃었지만 어쩐지 더 둔하게, 더 독하게, 더 짧게 웃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신경질적인 짜증이 예전의 가벼운 비꼼과 꾸민 냉소를 대신했다.
"젊은이, 왜 이렇게 자꾸 여기를 들락거리시오." 언젠가 자세킨네 응접실에 나와 단둘이 남았을 때 그가 말했다. (공작 영애는 아직 산책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다락방에서 공작 부인이 하녀를 꾸짖는 새된 목소리가 울렸다.) "젊을 때 공부하고 일해야지. 그런데 당신은 뭘 하고 있소?"
"제가 집에서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당신은 모르잖습니까." 나는 거만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당황하지 않은 것도 아닌 채 대꾸했다.
"공부는 무슨 공부! 머릿속엔 딴 게 들어 있는데. 뭐, 따지진 않겠소……. 당신 나이에는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고른 게 너무 운이 나쁘오. 여기가 어떤 집인지 안 보이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모르겠다고? 그럼 당신한테 더 나쁘지. 나는 경고하는 게 내 의무라고 생각하오. 우리 같은 늙은 총각이야 여기 드나들어도 되지. 우리야 뭐 어떻게 되겠소? 우리는 단련된 사람들이라 아무것도 안 먹히오. 그런데 당신은 살갗이 아직 여리오. 여기 공기는 당신한테 해롭소. 내 말 믿으시오. 옮을 수도 있소."
"어떻게요?"
"그냥 그렇게. 당신 지금 건강하오? 정상이오? 당신이 느끼는 게 당신한테 이롭소, 좋은 거요?"
"제가 뭘 느낀다는 겁니까?" 나는 말했지만 속으로는 박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에이, 젊은이, 젊은이." 박사가 말을 이었다. 마치 이 두 마디에 나에게 아주 모욕적인 무언가가 담겨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당신이 무슨 꾀를 부리겠소. 하느님 덕분에 당신은 아직 마음에 있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하긴 따져서 뭐 하겠소? 나도 여기 안 올 거요, 만약(박사가 이를 악물었다)……만약 나도 똑같은 괴짜가 아니라면. 다만 놀라운 건 이거요. 당신같이 영리한 사람이 어떻게 당신 둘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못 본단 말이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요?" 나는 그 말을 받으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박사는 어쩐지 비웃는 듯한 안쓰러움으로 나를 보았다.
"나도 참 잘났다." 그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걸 이 사람한테 꼭 말해야 하나. 한마디로," 그가 목소리를 높여 덧붙였다. "되풀이하지만 여기 공기는 당신한테 안 맞소. 당신은 여기가 즐겁겠지만, 즐거운 데가 어디 한둘이오? 온실도 좋은 냄새가 나지만 거기서 살 수는 없소. 자! 내 말 듣고 다시 카이다노프를 붙드시오!"
공작 부인이 들어와 박사에게 치통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에 지나이다가 나타났다.
"자, 박사 선생." 공작 부인이 덧붙였다. "얘 좀 야단쳐 주시오. 온종일 얼음물을 마신다오. 가슴도 약한데 그게 몸에 좋겠소?"
"왜 그러십니까?" 루신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어떻게 되냐고요? 감기에 걸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요? 설마? 그럼 뭐, 그렇게 가는 거죠!"
"그래요!" 박사가 투덜거렸다.
공작 부인이 나갔다.
"그래요." 지나이다가 되풀이했다. "사는 게 그렇게 즐거워요? 둘레를 좀 둘러봐요……. 뭐가 좋아요? 아니면 내가 이걸 모르고 못 느낀다고 생각해요? 나는 얼음물 마시는 게 즐거워요. 그런데 당신은 이런 삶이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걸어 볼 가치도 없다고 진지하게 우길 수 있어요?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요." 루신이 말했다. "변덕과 제멋대로. 이 두 마디면 당신을 다 말할 수 있소. 당신 성격 전부가 이 두 마디에 있지."
지나이다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한발 늦었어요, 친애하는 박사님. 관찰이 형편없네요. 뒤처졌어요. 안경을 쓰세요. 나는 지금 변덕 부릴 처지가 아니에요. 당신을 놀리고 나 자신을 놀리고……퍽이나 즐겁겠네요! 그리고 제멋대로라는 건……. 무슈 볼데마르." 지나이다가 갑자기 덧붙이며 발을 굴렀다. "그렇게 우울한 얼굴 하지 말아요. 나는 누가 나를 딱하게 여기는 걸 못 참아요." 그녀는 서둘러 나가 버렸다.
"해롭소, 여기 공기는 당신한테 해롭소, 젊은이." 루신이 한 번 더 나에게 말했다.
11장
그날 저녁 자세킨네에 늘 오던 손님들이 모였다. 나도 그 가운데 있었다.
마이다노프의 서사시 이야기가 나왔다. 지나이다는 진심으로 그것을 칭찬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시인이라면 다른 소재를 고를 거예요. 다 허튼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따금 이상한 생각이 떠올라요. 특히 잠을 못 이룬 채 새벽에, 하늘이 분홍빛도 되고 잿빛도 되기 시작할 때요. 나라면 이를테면……. 나를 비웃지 않을 거죠?"
"안 웃습니다! 안 웃어요!" 우리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나라면," 그녀가 팔짱을 끼고 눈을 옆으로 돌린 채 말을 이었다. "젊은 아가씨들 한 무리를 그리겠어요. 밤에, 커다란 배를 타고, 고요한 강 위에서. 달이 비치고, 아가씨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흰 꽃으로 엮은 화관을 썼어요. 그리고 노래를 불러요. 있잖아요, 찬송가 같은 거요."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계속하시지요." 마이다노프가 의미심장하게, 꿈꾸듯 말했다.
"갑자기 소란, 웃음소리, 횃불, 강가에 북소리가……. 바쿠스의 여사제들 무리가 노래하고 외치며 달려오는 거예요. 거기서부터는 시인 선생, 당신이 그림을 그릴 일이에요……. 다만 나는 횃불이 빨갛고 연기를 잔뜩 피우면 좋겠고, 여사제들 눈이 화관 아래서 반짝이면 좋겠어요. 화관은 어두운 빛이어야 하고요. 호랑이 가죽과 술잔도 잊지 말아요. 그리고 황금, 황금을 잔뜩."
"황금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마이다노프가 납작한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물었다.
"어디냐고요? 어깨에, 팔에, 다리에, 어디에나요. 옛날 여자들은 발목에 금고리를 찼대요. 여사제들이 배에 탄 아가씨들을 불러요. 아가씨들은 찬송을 멈췄어요. 더는 부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꼼짝하지 않아요. 강물이 그들을 강가로 실어 가요. 그런데 갑자기 그 가운데 하나가 조용히 일어나요……. 이걸 잘 그려야 해요. 그녀가 달빛 속에서 어떻게 조용히 일어서는지, 동무들이 어떻게 겁을 먹는지……. 그녀가 뱃전을 넘어서면 여사제들이 그녀를 에워싸서 밤 속으로, 어둠 속으로 휩쓸어 가요……. 여기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모든 게 뒤섞이는 걸 상상해 봐요. 그들의 비명만 들리고, 그녀의 화관만 강가에 남아요."
지나이다는 말을 멈추었다. (「오!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게 다입니까?" 마이다노프가 물었다.
"그게 다예요." 그녀가 대답했다.
"이건 서사시 한 편의 소재는 될 수 없습니다." 그가 근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서정시에는 당신의 생각을 쓰겠습니다."
"낭만주의풍으로요?" 말렙스키가 물었다.
"물론 낭만주의풍이지요, 바이런풍으로."
"내 생각엔 위고가 바이런보다 낫습니다." 젊은 백작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더 재미있지요."
"위고는 일류 작가지요." 마이다노프가 대꾸했다. "그리고 내 친구 톤코셰예프가 그의 스페인 소설 「엘 트로바도르」에서……."
"아, 물음표를 거꾸로 찍은 그 책이요?" 지나이다가 끼어들었다.
"네. 스페인 사람들은 그렇게 쓰거든요. 내 말은 톤코셰예프가……."
"자, 또 고전주의니 낭만주의니 싸우겠네요." 지나이다가 두 번째로 끼어들었다. "차라리 놀이를 해요……."
"벌칙 놀이요?" 루신이 받았다.
"아니요, 벌칙 놀이는 지겨워요. 비유 놀이를 해요." (이 놀이는 지나이다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무슨 물건을 하나 대면 저마다 그것을 무엇에 빗대려 애썼고, 가장 좋은 비유를 찾아낸 사람이 상을 받았다.)
그녀가 창가로 갔다. 해가 막 졌다. 하늘 높이 길고 붉은 구름이 떠 있었다.
"저 구름은 무엇을 닮았을까요?" 지나이다가 묻더니 우리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나는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갈 때 탄 금빛 배의 자줏빛 돛 같아요. 마이다노프, 얼마 전에 나한테 이 이야기 해 준 거 기억나요?"
우리는 모두 「햄릿」의 폴로니어스처럼, 구름이 바로 그 돛을 닮았고 우리 가운데 누구도 그보다 나은 비유를 찾지 못하리라고 결정했다.
"그런데 그때 안토니우스는 몇 살이었을까요?" 지나이다가 물었다.
"틀림없이 젊은이였겠지요." 말렙스키가 말했다.
"그래요, 젊었지요." 마이다노프가 확신에 차서 맞장구쳤다.
"실례지만," 루신이 외쳤다. "그는 마흔이 넘었소."
"마흔이 넘었다." 지나이다가 재빠른 눈길로 그를 흘끗 보며 되뇌었다.
나는 곧 집으로 갔다. 「그녀가 사랑에 빠졌어.」 내 입술이 저도 모르게 속삭였다. 「그런데 누구를?」
12장
날들이 흘러갔다. 지나이다는 점점 더 이상해지고,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한번은 그녀 방에 들어갔더니 그녀가 밀짚 의자에 앉아 머리를 책상 모서리에 대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아! 당신이군요!" 그녀가 잔인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이리 와 봐요."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내 머리에 손을 얹더니 갑자기 머리칼을 움켜쥐고 비틀기 시작했다.
"아파요……." 나는 마침내 말했다.
"아! 아프다고! 나는 안 아플까? 안 아플까?" 그녀가 되풀이했다.
"어머!" 그녀가 갑자기 외쳤다. 내 머리칼을 한 줌 뽑아 버린 것을 본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가엾은 무슈 볼데마르!"
그녀는 뽑힌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펴서 손가락에 감고 고리 모양으로 말았다.
"당신 머리칼을 내 로켓에 넣고 다닐게요." 그녀가 말했는데, 그녀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반짝였다. "그러면 당신도 조금 위로가 될지 모르죠……. 이제 잘 가요."
집에 돌아오니 언짢은 일이 벌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따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슨 일로 아버지를 나무랐고, 아버지는 늘 그렇듯 차갑고 정중하게 잠자코 있다가 곧 나가 버렸다. 나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고, 그럴 경황도 없었다. 다만 따지기가 끝나자 어머니가 나를 자기 서재로 불러, 내가 공작 부인 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몹시 못마땅해했다는 것만 기억난다. 어머니 말로는 그 공작 부인은 무슨 짓이든 할 여자(une femme capable de tout)였다. 나는 어머니 손에 입을 맞추고(이야기를 끝내고 싶을 때 나는 늘 그렇게 했다) 내 방으로 갔다. 지나이다의 눈물이 나를 완전히 갈피 못 잡게 했다. 나는 어떤 생각에 머물러야 할지 도무지 몰랐고, 나 자신도 울고 싶었다. 열여섯 살인데도 나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나는 이제 말렙스키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벨로브조로프가 날마다 더 험악해져서 그 능청스러운 백작을 늑대가 양을 보듯 바라보는데도. 하긴 나는 아무것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짐작 속에서 길을 잃고 줄곧 외진 곳을 찾았다. 특히 온실 폐허가 좋아졌다. 높은 담에 기어올라 앉아 있노라면, 나는 어찌나 불행하고 외롭고 슬픈 젊은이인지 스스로가 딱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 슬픈 느낌이 어찌나 달콤했던지, 나는 거기 얼마나 취했던지!……
그러다 한번은 내가 담 위에 앉아 먼 데를 바라보며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갑자기 무언가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산들바람도 아니고 떨림도 아닌, 숨결 같은, 누군가 가까이 있다는 느낌 같은 것이……. 나는 눈을 내렸다. 아래 길 위로 가벼운 잿빛 원피스를 입고 분홍 양산을 어깨에 걸친 지나이다가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멈춰 서서, 밀짚모자 챙을 젖히고 벨벳 같은 눈을 나에게 들었다.
"그렇게 높은 데서 뭘 하는 거예요?" 그녀가 어쩐지 이상한 웃음을 띠고 물었다. "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늘 나를 사랑한다고 우기죠.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이 길로, 나한테로 뛰어내려 봐요."
지나이다가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나는 누가 뒤에서 떠밀기라도 한 듯 벌써 아래로 날고 있었다. 담은 높이가 4미터 남짓이었다. 나는 발로 땅에 떨어졌지만 충격이 어찌나 세던지 버티지 못했다. 나는 쓰러져 한순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눈을 뜨지도 않고 곁에 지나이다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귀여운 내 아가." 그녀가 내 위로 몸을 숙이고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에 놀란 다정함이 울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내 말을 들을 수가 있어…….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일어나."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 곁에서 숨 쉬었고, 그녀의 손이 내 머리에 닿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때 나는 어떻게 되었던가! 그녀의 부드럽고 싱그러운 입술이 내 얼굴에 온통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하지만 그때 지나이다는 아마 내 얼굴 표정을 보고 내가 벌써 정신이 들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 일어나요, 이 장난꾸러기, 미치광이. 왜 먼지 속에 누워 있어요?"
나는 일어섰다.
"내 양산 좀 줘요." 지나이다가 말했다. "봐요, 내가 어디다 던졌는지. 그리고 그렇게 나를 쳐다보지 말아요……. 이게 무슨 바보짓이에요? 다치진 않았어요? 쐐기풀에 쏘였죠? 나를 쳐다보지 말라니까요……. 이 사람은 하나도 못 알아듣고 대답도 안 하네." 그녀가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집에 가요, 무슈 볼데마르. 옷 털고요. 그리고 나를 따라올 생각 말아요. 안 그러면 화낼 거고, 다시는……."
그녀는 말을 끝맺지 않고 재빨리 가 버렸고, 나는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나를 받쳐 주지 않았다. 쐐기풀이 손을 쏘았고, 등이 쑤셨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때 맛본 행복감은 내 평생 다시 오지 않았다. 그것은 달콤한 아픔으로 내 온 팔다리에 머물다가 마침내 황홀한 깡충거림과 외침으로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나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13장
그날 하루 내내 나는 어찌나 즐겁고 자랑스러웠던지, 지나이다의 입맞춤의 감촉을 얼굴에 어찌나 생생하게 간직했던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어찌나 황홀하게 떨며 떠올렸던지, 뜻밖의 행복을 어찌나 애지중지했던지, 오히려 겁이 날 정도였고 이 새로운 느낌을 불러온 그녀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운명에 더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제는 「한 번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쉬고 죽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 대신 이튿날 곁채로 가면서 나는 큰 쑥스러움을 느꼈다. 비밀을 지킬 줄 안다는 걸 알리고 싶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겸손한 태연함의 탈 뒤에 그것을 감추려 했지만 헛일이었다. 지나이다는 아무 동요 없이 아주 담담하게 나를 맞았다. 손가락으로 나를 을러대며 멍 든 데는 없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나의 겸손한 태연함과 신비로운 척은 한순간에 사라졌고, 그와 함께 쑥스러움도 사라졌다. 물론 나는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지나이다의 차분함이 정말이지 나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나는 그녀 눈에 내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았고, 몹시 괴로워졌다! 지나이다는 방 안을 오락가락하며 나를 볼 때마다 재빨리 웃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멀리 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어제 일을 내가 먼저 꺼내 볼까.」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서둘러 어디 가던 길이었는지 물어서 확실히 알아볼까…….」 하지만 나는 손을 내젓고 구석에 앉았다.
벨로브조로프가 들어왔다. 나는 그가 반가웠다.
"얌전한 승마용 말을 못 구했습니다."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프라이타크가 한 마리를 보증한다는데, 나는 확신이 안 섭니다. 겁이 납니다."
"뭐가 겁나세요?" 지나이다가 물었다. "여쭤봐도 될까요?"
"뭐가요? 당신은 말을 탈 줄 모르잖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지요! 그리고 대체 무슨 생각이 갑자기 드신 겁니까?"
"그건 내 일이에요, 나의 짐승 씨. 그렇다면 표트르 바실리예비치께 부탁하죠……." (아버지 이름이 표트르 바실리예비치였다. 그녀가 아버지가 기꺼이 자기를 도우리라고 확신하는 듯 그 이름을 그토록 가볍고 거리낌 없이 입에 올리는 것이 나는 놀라웠다.)
"그래요?" 벨로브조로프가 대꾸했다. "그분하고 타고 싶다는 겁니까?"
"그분하고든 다른 사람하고든 당신한테는 마찬가지예요. 다만 당신하고는 아니에요."
"나하고는 아니다." 벨로브조로프가 되풀이했다. "좋을 대로 하십시오. 어쩌겠습니까? 말은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암소 같은 걸 데려오지 말아요. 미리 알려 두는데 나는 달리고 싶으니까요."
"달리시든지요……. 그런데 누구하고 타실 겁니까, 말렙스키하고요?"
"그 사람하고 타면 왜 안 되는데요, 무사 양반? 자, 진정해요." 그녀가 덧붙였다. "눈을 번득이지 말고요. 당신도 데려갈게요. 지금 나한테 말렙스키는, 피! 그런 거 알잖아요."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나를 달래려고 하시는 말씀이지요." 벨로브조로프가 투덜거렸다.
지나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당신을 달래 줘요?……오……오……오……무사 양반!" 마침내 그녀는 다른 말을 찾지 못한 듯 말했다. "그런데 무슈 볼데마르, 당신은 우리랑 같이 갈래요?"
"저는……여럿이 어울리는 건 별로……." 나는 눈을 들지 않고 중얼거렸다.
"단둘이(tête-à-tête)가 더 좋다는 거죠?……뭐, 자유로운 이에겐 자유를, 구원받은 이에겐……낙원을."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가 봐요, 벨로브조로프, 수고 좀 해 줘요. 말이 내일까지 있어야 해요."
"그래, 그런데 돈은 어디서 나고?" 공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지나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엄마한테 달라고 안 해요. 벨로브조로프가 외상을 해 줄 거예요."
"외상을 해 준다고, 해 준다고……." 공작 부인이 투덜거리더니 갑자기 목청껏 외쳤다. "두냐시카!"
"엄마(Maman), 내가 초인종 사 드렸잖아요." 공작 영애가 말했다.
"두냐시카!" 노부인이 되풀이했다.
벨로브조로프가 인사하고 나갔다. 나도 그와 함께 나왔다. 지나이다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14장
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지팡이를 하나 깎아 들고 관문 밖으로 나갔다. 가서 내 슬픔이나 달래 보자는 생각이었다. 날은 화창하고 밝았고 그리 덥지 않았다. 즐겁고 싱그러운 바람이 땅 위를 거닐며 알맞게 웅성이고 놀았다. 모든 것을 흔들었지만 아무것도 어지럽히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언덕과 숲을 헤맸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시름에 잠기려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젊음과 좋은 날씨와 싱그러운 공기, 빨리 걷는 재미, 무성한 풀밭에 혼자 누워 있는 나른함이 제 몫을 했다. 그 잊을 수 없는 말들, 그 입맞춤의 기억이 다시 내 영혼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래도 지나이다가 나의 결단을, 나의 용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낫겠지.」 나는 생각했다. 「그러라지!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은 하겠다고 말만 하지만, 나는 해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나는 또 무엇인들 할 수 있을까!……」 내 상상이 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적들의 손에서 구해 내는 모습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그녀를 감옥에서 빼내는 모습을, 그녀의 발치에서 죽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우리 집 응접실에 걸린 그림, 말렉 아델이 마틸다를 안고 달아나는 그림이 떠올랐다. 그러다 곧 커다란 얼룩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타난 데 정신이 팔렸다. 딱따구리는 가는 자작나무 줄기를 부산스럽게 타고 오르며, 콘트라베이스 목 뒤에서 내다보는 악사처럼 줄기 뒤에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불안하게 내다보았다.
그러다 나는 〈하얀 눈이 아니라네〉를 부르다가 그 시절 유행하던 노래 〈장난스러운 산들바람 불 때 그대를 기다리네〉로 넘어갔다. 그다음엔 호먀코프의 비극에 나오는 예르마크가 별들에게 하는 말을 큰 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감상적인 시를 한 편 지어 보려고도 했고, 시 전체를 끝맺을 줄까지 생각해 냈다. 「오, 지나이다! 지나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점심때가 다가왔다. 나는 골짜기로 내려갔다. 좁은 모래 오솔길이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도시로 이어졌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갔다…….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둔하게 울렸다. 나는 돌아보고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모자를 벗었다. 아버지와 지나이다가 보였다. 둘은 나란히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상체를 그녀 쪽으로 온통 기울이고 손으로 말 목을 짚은 채 그녀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지나이다는 엄하게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다문 채 말없이 듣고 있었다. 처음엔 둘만 보였다. 몇 순간 뒤에야 골짜기 굽이에서 벨로브조로프가 경기병 제복에 외투를 걸치고 거품을 문 검은 말을 타고 나타났다. 기운찬 말은 고개를 내젓고 콧김을 뿜으며 춤을 추었다. 기수는 말을 붙들면서도 박차를 가했다. 나는 길을 비켰다. 아버지가 고삐를 거두고 지나이다에게서 몸을 뗐다. 그녀가 천천히 아버지에게 눈을 들었다. 그리고 둘은 달려갔다……. 벨로브조로프가 군도를 쩔렁이며 그들 뒤를 쫓아 질주했다. 「그는 가재처럼 빨갛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녀는 왜 저렇게 창백할까? 아침 내내 말을 탔는데 창백하다니?」
나는 걸음을 재촉해 점심 바로 전에 집에 닿았다. 아버지는 벌써 옷을 갈아입고 씻고 말쑥한 모습으로 어머니의 안락의자 곁에 앉아, 고르고 울리는 목소리로 〈주르날 데 데바〉의 문예란을 읽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건성으로 듣다가 나를 보더니 온종일 어디 가 있었느냐고 물었고, 어디인지 누구랑인지 모를 데를 쏘다니는 건 싫다고 덧붙였다. 「혼자 산책했어요.」 나는 이렇게 대답하려다가 아버지를 보고 왜인지 입을 다물었다.
15장
그 뒤 대엿새 동안 나는 지나이다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녀는 아프다고 했지만, 그래도 곁채의 단골손님들이 그들 말대로 「당번을 서러」 오는 것은 막지 않았다. 모두가 왔다. 열광할 기회가 없으면 곧바로 풀이 죽고 지루해하는 마이다노프만 빼고. 벨로브조로프는 단추를 다 채우고 얼굴이 빨개진 채 음울하게 구석에 앉아 있었다. 말렙스키 백작의 가는 얼굴에는 줄곧 무언가 고약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는 정말로 지나이다의 눈 밖에 나서, 늙은 공작 부인에게 유난히 열심히 비위를 맞추며 그녀와 함께 역마차를 타고 총독을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방문은 실패였고, 말렙스키는 망신까지 당했다. 사람들이 철도 장교들과 얽힌 무슨 일을 그에게 일깨웠고, 그는 해명하며 그때는 경험이 없었다고 말해야 했다. 루신은 하루에 두 번쯤 왔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나는 지난번 이야기 이후로 그가 조금 무서웠지만, 동시에 그에게 진심으로 끌렸다. 한번은 그가 나와 함께 네스쿠치니 공원을 산책했는데, 아주 사람 좋고 상냥해서 갖가지 풀과 꽃의 이름과 성질을 알려 주다가, 흔히 말하듯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제 이마를 치며 외쳤다. "그런데 나는 바보처럼 그녀가 바람둥이인 줄 알았지! 어떤 사람들한테는 자기를 바치는 게 달콤한 모양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물었다.
"당신한테 하는 말은 아니오." 루신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지나이다는 나를 피했다. 내가 나타나면, 알아채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녀는 언짢은 기색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그게 쓰라렸고, 그게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녀 눈에 띄지 않으려 애쓰며 멀리서만 그녀를 지켜보았는데, 그것도 늘 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달라졌고, 그녀 전체가 달라졌다. 특히 어느 따뜻하고 고요한 저녁, 그녀에게 일어난 변화가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넓은 딱총나무 덤불 밑 낮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자리가 좋았다. 거기서 지나이다의 방 창문이 보였다. 나는 앉아 있었다. 내 머리 위 어두워진 잎사귀 속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부산스럽게 바스락거렸고, 잿빛 고양이가 등을 쭉 펴고 조심스럽게 정원으로 숨어 들어왔으며, 첫 풍뎅이들이 이제 밝지는 않지만 아직 투명한 공기 속에서 무겁게 붕붕거렸다. 나는 앉아서 창문을 바라보며 그것이 열리지 않을까 기다렸다. 정말로 창이 열렸고, 거기 지나이다가 나타났다. 그녀는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녀 자신도, 얼굴과 어깨와 팔도 하얗도록 창백했다. 그녀는 오래도록 꼼짝 않고 있었고, 찌푸린 눈썹 아래로 오래도록 꼼짝 않고 똑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눈길이 있는 줄 몰랐다. 그러다 그녀는 두 손을 꼭, 꼭 맞잡고 입술에, 이마에 대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펼치며 귀에서 머리칼을 걷어 내고 흔들어 털고는, 어떤 결단을 한 듯 위에서 아래로 고개를 끄덕이고 창을 쾅 닫았다.
사흘쯤 뒤 그녀가 정원에서 나를 만났다. 나는 옆으로 비켜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손 좀 줘요." 그녀가 예전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오랫동안 수다를 못 떨었네요."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조용히 빛났고, 얼굴은 안개 너머에서처럼 웃고 있었다.
"아직도 몸이 안 좋으세요?" 내가 물었다.
"아뇨, 이제 다 나았어요." 그녀가 대답하며 작은 빨간 장미 한 송이를 꺾었다. "조금 지쳤지만 그것도 지나갈 거예요."
"그럼 다시 예전처럼 되시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지나이다가 장미를 얼굴에 가져갔다. 밝은 꽃잎의 빛이 그녀 뺨에 비친 것 같았다.
"내가 변했어요?"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네, 변했어요." 나는 나직이 대답했다.
"내가 당신한테 차가웠죠. 알아요." 지나이다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거기 신경 쓰지 말았어야 해요…….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아, 그 이야기는 해서 뭐 해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게 싫은 거예요, 그거예요!" 나는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침울하게 외쳤다.
"아니에요, 나를 사랑해요. 하지만 예전처럼은 말고요."
"그럼 어떻게요?"
"친구가 돼요, 그렇게요!" 지나이다가 나에게 장미 냄새를 맡게 했다. "들어 봐요, 나는 당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잖아요. 정말이지 당신 이모뻘도 될 수 있어요. 아니, 이모 말고 누나요. 그리고 당신은……."
"저는 당신한테 어린애죠." 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래요, 어린애예요. 하지만 귀엽고 착하고 영리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어린애요. 그거 알아요? 오늘부터 당신을 내 시동으로 임명할게요. 시동은 주인 곁을 떠나면 안 된다는 걸 잊지 말아요. 자, 이게 당신의 새 지위를 나타내는 표시예요." 그녀가 장미를 내 웃옷 단춧구멍에 꽂으며 덧붙였다. "당신에 대한 우리의 은총의 표시요."
"전에는 다른 은총을 받았는데요." 나는 중얼거렸다.
"아!" 지나이다가 말하며 옆으로 나를 보았다. "기억력도 좋으셔라! 뭐 어때요? 지금도 기꺼이……."
그러고는 나에게 몸을 숙여 내 이마에 맑고 차분한 입맞춤을 새겼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고,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따라와요, 나의 시동" 하고 말하고는 곁채로 걸어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줄곧 어리둥절했다. 「정말로,」 나는 생각했다. 「이 온순하고 분별 있는 아가씨가 내가 알던 그 지나이다란 말인가?」 그리고 그녀의 걸음걸이가 더 차분하게, 그녀의 온 모습이 더 위엄 있고 늘씬하게 보였다…….
그리고 맙소사! 내 안에서 사랑이 얼마나 새로운 힘으로 타올랐던가!
16장
점심 뒤 다시 곁채에 손님들이 모였고, 공작 영애가 그들 앞에 나왔다.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그 첫 저녁처럼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다 모였다. 니르마츠키까지 끌려왔다. 마이다노프는 이번엔 누구보다 먼저 왔다. 새 시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다시 벌칙 놀이가 시작되었지만 예전의 이상한 짓도, 바보짓과 소란도 없었다. 집시 같던 기운이 사라졌다. 지나이다가 우리 모임에 새로운 분위기를 주었다. 나는 시동의 권리로 그녀 곁에 앉았다. 그러다 그녀가 제비가 나온 사람이 자기 꿈 이야기를 하자고 했는데, 잘되지 않았다. 꿈들은 재미가 없거나(벨로브조로프는 자기 말에게 붕어를 먹였는데 말 머리가 나무였다는 꿈을 꾸었다), 부자연스럽게 지어낸 것이었다. 마이다노프는 우리에게 아예 소설 한 편을 대접했다. 무덤 지하실도, 리라를 든 천사도, 말하는 꽃도, 먼 데서 날아오는 소리도 다 들어 있었다. 지나이다는 그가 끝까지 하게 두지 않았다.
"어차피 지어내는 판이라면," 그녀가 말했다. "저마다 아예 꾸며 낸 이야기를 하나씩 하기로 해요."
첫 차례는 또 벨로브조로프였다.
젊은 경기병은 당황했다.
"나는 아무것도 지어낼 수 없습니다!" 그가 외쳤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 지나이다가 받았다. "그럼 이를테면 당신이 결혼했다고 상상해 보고, 아내하고 어떻게 지낼지 이야기해 봐요. 아내를 가둬 둘 건가요?"
"가둬 두겠습니다."
"그럼 당신도 아내랑 같이 들어앉아 있고요?"
"나도 꼭 같이 들어앉아 있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아내가 그게 지겨워서 당신을 배신하면요?"
"죽이겠습니다."
"아내가 달아나면요?"
"쫓아가서 그래도 죽이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내가 당신 아내라고 쳐요. 그럼 어떻게 할 건가요?"
벨로브조로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 자신을 죽이겠습니다……."
지나이다가 웃었다.
"보아하니 당신 노래는 짧네요."
두 번째 제비는 지나이다의 것이었다. 그녀는 천장으로 눈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자, 들어 봐요." 그녀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내가 지어낸 거예요……. 화려한 궁전과 여름밤과 놀라운 무도회를 상상해 봐요. 그 무도회는 젊은 여왕이 여는 거예요. 어디나 황금, 대리석, 수정, 비단, 불빛, 다이아몬드, 꽃, 향, 사치가 부릴 수 있는 온갖 변덕이 다 있어요."
"사치를 좋아하세요?" 루신이 끼어들었다.
"사치는 예뻐요." 그녀가 대꾸했다. "나는 예쁜 건 다 좋아해요."
"아름다운 것보다 더?" 그가 물었다.
"그건 뭔가 어렵네요, 모르겠어요. 방해하지 말아요. 그래서 무도회는 화려해요. 손님이 아주 많고, 모두 젊고 아름답고 용감하고, 모두 넋을 잃고 여왕을 사랑해요."
"손님 가운데 여자는 없습니까?" 말렙스키가 물었다.
"없어요. 아니, 잠깐만요, 있어요."
"다 못생겼나요?"
"매혹적이에요. 하지만 남자들은 모두 여왕을 사랑해요. 여왕은 키가 크고 날씬해요. 검은 머리에 작은 금관을 썼어요."
나는 지나이다를 보았다. 그 순간 그녀가 우리 모두보다 훨씬 높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녀의 하얀 이마에서, 꼼짝 않는 눈썹에서 어찌나 밝은 지성과 위엄이 풍겼던지 나는 생각했다. 「당신이 바로 그 여왕이군!」
"모두가 여왕 둘레에 몰려들어요." 지나이다가 말을 이었다. "모두 여왕 앞에 가장 아첨하는 말을 쏟아 놓아요."
"그런데 여왕은 아첨을 좋아합니까?" 루신이 물었다.
"정말 못 참겠네! 자꾸 끼어들어……. 아첨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나만 더,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말렙스키가 말했다. "여왕에게 남편이 있습니까?"
"그건 생각 안 해 봤어요. 아니요, 남편이 왜 필요해요?"
"물론이지요." 말렙스키가 받았다. "남편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조용히(Silence)!" 프랑스어를 잘 못하는 마이다노프가 외쳤다.
"고마워요(Merci)." 지나이다가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여왕은 그 말들을 듣고, 음악을 들어요. 하지만 손님 누구도 쳐다보지 않아요. 창문 여섯 개가 천장에서 바닥까지 위에서 아래로 활짝 열려 있어요. 그 너머로 큰 별이 뜬 어두운 하늘과 큰 나무가 선 어두운 정원이 있어요. 여왕은 정원을 바라봐요. 거기 나무들 곁에 분수가 있어요. 어둠 속에서 하얗게 보여요. 유령처럼 길고, 길고. 여왕은 이야기 소리와 음악 너머로 조용히 찰랑이는 물소리를 들어요. 여왕은 바라보며 생각해요. 여러분은 모두 고귀하고 영리하고 부자예요. 여러분은 나를 둘러싸고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소중히 여기고, 모두 내 발치에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나는 여러분을 지배해요. 그런데 저기, 분수 곁에, 저 찰랑이는 물 곁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지배하는 사람이 서서 나를 기다려요. 그 사람은 화려한 옷도 보석도 없고, 아무도 그를 모르지만, 그는 나를 기다리고 내가 오리라고 확신해요. 그리고 나는 갈 거예요. 내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머물고, 저 정원의 어둠 속에서, 나무들이 바스락거리고 분수가 찰랑이는 소리 속에서 그와 함께 사라지고 싶을 때, 나를 막을 수 있는 힘은 없어요……."
지나이다가 말을 멈추었다.
"그건 지어낸 겁니까?" 말렙스키가 교활하게 물었다.
지나이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여러분," 갑자기 루신이 말을 꺼냈다. "우리가 손님 가운데 있고 분수 곁의 그 행운아를 알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잠깐, 잠깐만요." 지나이다가 끼어들었다. "여러분이 저마다 어떻게 했을지 내가 말해 줄게요. 벨로브조로프, 당신은 그 사람한테 결투를 신청했겠죠. 마이다노프, 당신은 그 사람을 두고 풍자시를 썼을 거예요……. 아니, 당신은 풍자시를 쓸 줄 모르죠. 당신은 바르비에 같은 긴 약강 시를 지어서 그 작품을 〈텔레그라프〉에 실었을 거예요. 니르마츠키, 당신은 그 사람한테 돈을 꿨을……. 아니, 당신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줬을 거예요. 박사님, 당신은……." 그녀가 멈췄다. "당신은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네요."
"궁정 의사의 직분으로," 루신이 대답했다. "여왕께 손님을 맞을 기분이 아닐 때는 무도회를 열지 마시라고 권했겠지요……."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백작, 당신은……."
"그럼 나는요?" 말렙스키가 그 고약한 웃음을 띠고 되물었다…….
"당신은 그 사람한테 독 든 사탕을 건넸겠죠."
말렙스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며 한순간 유대인 같은 표정이 되었지만, 그는 곧바로 크게 웃었다.
"그리고 당신은, 볼데마르……." 지나이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 됐어요. 다른 놀이를 해요."
"무슈 볼데마르는 여왕의 시동으로서, 여왕이 정원으로 달려갈 때 옷자락을 들어 드렸겠지요." 말렙스키가 독살스럽게 말했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지나이다가 재빨리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몸을 일으키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백작님께 무례하게 굴 권리를 드린 적이 없어요. 그러니 나가 주세요." 그녀가 그에게 문을 가리켰다.
"아니, 공작 영애님." 말렙스키가 중얼거리며 하얗게 질렸다.
"공작 영애님 말씀이 옳소." 벨로브조로프가 외치며 그도 일어섰다.
"맹세코 나는 전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말렙스키가 말을 이었다. "내 말에 그런 건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은데……. 당신을 모욕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지나이다는 차가운 눈길로 그를 훑어보고 차갑게 웃었다.
"그럼 있어요."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무슈 볼데마르랑 내가 괜히 화를 냈네요. 당신은 쏘는 게 즐거우시니……. 실컷 그러세요."
"용서해 주십시오." 말렙스키가 한 번 더 되풀이했다. 나는 지나이다의 몸짓을 떠올리며, 진짜 여왕도 그보다 더 위엄 있게 무례한 자에게 문을 가리키지는 못했으리라고 다시 생각했다.
이 작은 장면이 있고 나서 벌칙 놀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다들 조금 어색해졌다. 그 장면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무언가 다른, 그다지 뚜렷하지 않지만 무거운 느낌 때문이었다. 아무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다들 자기 안에서도 옆 사람 안에서도 그것을 느꼈다. 마이다노프가 자기 시를 읽어 주었고, 말렙스키는 지나치게 열을 올려 그것을 칭찬했다. "지금 착해 보이고 싶어 죽겠지." 루신이 나에게 속삭였다. 우리는 곧 헤어졌다. 지나이다는 갑자기 생각에 잠겼다. 공작 부인은 머리가 아프다고 전하게 했고, 니르마츠키는 류머티즘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지나이다의 이야기가 나를 뒤흔들었다.
「정말로 거기 무슨 암시가 들어 있었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를, 무엇을 넌지시 말한 걸까? 그리고 정말로 넌지시 말할 무언가가 있다면……어떻게 마음을 먹을까?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나는 뜨거운 뺨을 이쪽저쪽으로 뒤척이며 속삭였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동안의 지나이다의 얼굴 표정이 떠올랐다……. 네스쿠치니에서 루신이 내뱉은 외침이, 나를 대하는 그녀 태도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짐작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는 누구일까?」 이 몇 마디가 어둠 속에 쓰여 정말로 내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낮고 불길한 구름이 내 위에 걸린 것 같았고, 나는 그 무게를 느끼며 그것이 금방이라도 터지기를 기다렸다. 요즘 나는 많은 것에 익숙해졌고, 자세킨네에서 많은 것을 보아 왔다. 그들의 무질서, 기름진 촛농 토막, 부러진 칼과 포크, 음울한 보니파티, 꾀죄죄한 하녀들, 공작 부인 자신의 몸가짐, 이 모든 이상한 삶이 더는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지나이다에게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에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모험꾼 여자(aventurière).」 언젠가 어머니가 그녀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모험꾼 여자, 그녀가, 나의 우상, 나의 신이! 그 이름이 나를 태웠다. 나는 베개 속으로 그 이름을 피하려 애썼고, 분개했다. 그러면서도 저 분수 곁의 행운아가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마다했으랴, 무엇인들 내주지 않았으랴!……
내 안에서 피가 타올라 들끓었다. 「정원……분수…….」 나는 생각했다. 「정원에 가 보자.」 나는 재빨리 옷을 입고 집에서 빠져나왔다. 밤은 어두웠고, 나무들은 겨우 속삭였다. 하늘에서 고요한 냉기가 내려왔고, 채소밭에서 딜 냄새가 풍겨 왔다. 나는 오솔길을 다 돌아다녔다. 내 가벼운 발소리가 나를 쭈뼛하게도 하고 힘을 북돋우기도 했다. 나는 멈춰 서서 기다리며, 내 심장이 크고 빠르게 뛰는 소리를 들었다. 마침내 나는 울타리에 다가가 가는 장대에 기댔다. 갑자기, 아니면 그렇게 느낀 걸까? 나한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여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어둠 속을 힘껏 노려보았다. 숨을 죽였다. 저게 뭐지? 발소리가 들리는 걸까, 아니면 또 내 심장이 뛰는 걸까? "거기 누구예요?" 나는 겨우 알아들을 만큼 더듬거렸다. 이건 또 뭐지? 억누른 웃음일까?……아니면 잎사귀 바스락거림일까……아니면 바로 귓가의 한숨일까? 무서워졌다……. "거기 누구예요?" 나는 더 나직이 되풀이했다.
한순간 공기가 흔들렸다. 하늘에 불줄기 하나가 번쩍였다. 별이 굴러떨어진 것이다. 「지나이다?」 나는 묻고 싶었지만 소리가 입술에서 얼어붙었다. 그러자 갑자기 둘레가 깊이 고요해졌다. 한밤중에 흔히 그렇듯이……. 귀뚜라미조차 나무 속에서 울음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창문 하나가 달그락했을 뿐이었다. 나는 서 있고 또 서 있다가 내 방으로, 식어 버린 침대로 돌아왔다. 나는 이상한 설렘을 느꼈다. 마치 밀회하러 나갔다가 혼자 남은 채 남의 행복 곁을 지나쳐 온 것처럼.
17장
이튿날 나는 지나이다를 언뜻 보기만 했다. 그녀는 공작 부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 그 대신 루신을 보았는데, 그는 겨우 인사나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말렙스키를 보았다. 젊은 백작은 히죽 웃으며 다정하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곁채를 드나드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 집에 비집고 들어와 어머니의 마음에 든 건 그 하나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모욕적일 만큼 정중하게 그를 대했다.
"아, 시동 나리(monsieur le page)!" 말렙스키가 말을 꺼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여왕께서는 무얼 하시나요?"
그 순간 그의 싱그럽고 잘생긴 얼굴이 어찌나 역겨웠던지, 그리고 그가 어찌나 경멸 섞인 장난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던지, 나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도 화가 나 있습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괜한 일입니다. 당신을 시동이라고 부른 건 내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시동은 주로 여왕에게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한마디 하자면, 당신은 직분을 잘 못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요?"
"시동은 주인 곁을 떠나면 안 됩니다. 시동은 주인이 무얼 하는지 다 알아야 하고, 주인을 지켜보기까지 해야 합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낮이나 밤이나."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냐고요? 꽤 분명하게 말하는 것 같은데요. 낮이나 밤이나. 낮에는 그럭저럭 괜찮지요. 낮에는 밝고 사람도 많으니까. 그런데 밤에는, 바로 그때 큰일이 나는 겁니다. 밤에 자지 말고 지켜보라고 권하겠습니다. 온 힘을 다해 지켜보세요. 기억하세요. 정원에서, 밤에, 분수 곁에서, 바로 거기를 지켜야 합니다. 나한테 고맙다고 하게 될 겁니다."
말렙스키는 웃고 나에게 등을 돌렸다. 아마 그는 나에게 한 말에 별 뜻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남을 감쪽같이 속이는 사람으로 이름났고, 가면무도회에서 사람들을 놀리는 솜씨로 유명했다. 그의 온 존재에 배어든 거의 무의식적인 거짓됨이 거기 크게 한몫했다……. 그는 나를 약 올리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처럼 내 온 핏줄 속을 흘렀다. 피가 머리로 치솟았다. 「아! 그런 거였군!」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좋아! 그러니까 어제 내 예감이 맞았구나! 그러니까 괜히 정원에 끌린 게 아니었어!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크게 외치며 주먹으로 내 가슴을 쳤다. 사실 무엇이 안 된다는 건지 나도 몰랐지만. 「말렙스키가 직접 정원에 오든,」 나는 생각했다(어쩌면 그가 입을 잘못 놀린 건지도 몰랐다. 그 정도 뻔뻔함은 그에게 있었다). 「다른 누가 오든(우리 정원 울타리는 아주 낮아서 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나한테 걸리는 놈은 무사하지 못할 거다! 아무도 나를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온 세상에, 그리고 그녀, 그 배신자에게(나는 기어이 그녀를 배신자라고 불렀다) 내가 복수할 줄 안다는 걸 보여 주겠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책상에서 얼마 전에 산 영국제 칼을 꺼내 날 끝을 만져 보고, 눈살을 찌푸린 채 차갑고 집중된 결단으로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마치 나에게 이런 일은 놀랍지도 처음도 아니라는 듯이. 내 안에서 심장이 독하게 솟구쳤다가 돌처럼 굳었다. 나는 밤이 될 때까지 눈살을 펴지도 입술을 열지도 않았고, 주머니 속에서 달아오른 칼을 손으로 꽉 쥔 채 무언가 끔찍한 일을 미리 준비하며 연신 이리저리 서성였다. 이 새롭고 전에 없던 느낌들이 어찌나 나를 사로잡고 즐겁게까지 했던지, 정작 지나이다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내 눈앞에는 줄곧 알레코와 젊은 집시가 어른거렸다. 「어디 가느냐, 젊은 미남아? 누워 있어라…….」 그리고 그다음엔 「온통 피투성이구나!……오, 무슨 짓을 했느냐?……」 「아무것도!」 나는 얼마나 잔인한 웃음을 띠고 그 말을 되뇌었던가. 아무것도!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거의 줄곧 은근히 짜증이 나 있던 어머니가 나의 비장한 얼굴에 눈길을 주고 저녁 식탁에서 말했다. "왜 곡식 자루 앞 쥐처럼 뾰로통해 있니?" 나는 너그럽게 웃어 대답하고는 생각했다. 「알기만 한다면!」 열한 시를 쳤다. 나는 내 방으로 갔지만 옷을 벗지 않고 자정을 기다렸다. 마침내 자정도 쳤다. 「때가 됐다!」 나는 이 사이로 속삭이고, 단추를 꼭대기까지 채우고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정원으로 나갔다.
나는 지킬 자리를 미리 골라 두었다. 정원 끝, 우리 땅과 자세킨네 땅을 가르는 울타리가 공동 담에 닿는 곳에 외로운 전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낮고 빽빽한 가지 아래 서 있으면 밤의 어둠이 허락하는 만큼 둘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볼 수 있었다. 바로 거기 늘 신비롭게 느껴지던 오솔길이 구불구불 나 있었다. 그 길은 이 자리에서 넘어간 발자국이 남은 울타리 밑으로 뱀처럼 기어 나가, 아카시아가 빽빽이 둘러싼 둥근 정자로 이어졌다. 나는 전나무에 이르러 줄기에 기대고 지키기 시작했다.
밤은 어제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하늘에 구름이 덜해서 덤불의 윤곽이, 키 큰 꽃들의 윤곽까지 더 또렷이 보였다. 기다림의 첫 순간들은 애가 탔다. 거의 무서웠다. 나는 무엇이든 하기로 마음먹었고, 어떻게 할지만 궁리했다. 「어디 가느냐? 멈춰라! 자백해라, 아니면 죽음이다!」 하고 벼락같이 외칠까, 아니면 그냥 찔러 버릴까……. 소리 하나하나, 바스락거림과 살랑거림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고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나는 준비했다……. 나는 앞으로 몸을 숙였다……. 하지만 반 시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났다. 피가 가라앉고 식었다. 내가 이 모든 걸 헛되이 하고 있다는, 조금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는, 말렙스키가 나를 놀렸다는 생각이 영혼 속으로 살금살금 기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매복 자리를 떠나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듯 어디서도 작은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쉬고 있었다. 우리 개조차 쪽문 곁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나는 온실 폐허에 기어올라 눈앞의 먼 들판을 보며 지나이다와의 만남을 떠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움찔했다……. 문 열리는 삐걱 소리가, 이어 나뭇가지 부러지는 가벼운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나는 두 번 뛰어서 폐허를 내려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빠르고 가볍지만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정원에서 똑똑히 울렸다. 발소리는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놈이다……. 마침내 그놈이다!」 가슴속을 그 생각이 스쳤다. 나는 경련하듯 주머니에서 칼을 뽑아 경련하듯 펼쳤다. 무언가 붉은 불티가 눈앞에서 맴돌았고, 두려움과 분노로 머리털이 곤두섰다……. 발소리가 곧장 나를 향해 왔다. 나는 몸을 웅크렸다가 그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한 사람이 나타났다……. 맙소사! 아버지였다!
어두운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모자를 얼굴까지 눌러썼지만 나는 곧바로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발끝으로 내 곁을 지나갔다. 나를 가려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아버지는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어찌나 몸을 웅크리고 움츠렸던지 땅바닥과 똑같아진 것 같았다. 질투에 차서 살인이라도 할 각오였던 오셀로가 갑자기 학생이 되어 버렸다……. 나는 아버지가 뜻밖에 나타난 데 어찌나 놀랐던지, 처음에는 아버지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라졌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둘레가 다시 조용해지자 그제야 나는 몸을 펴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밤에 왜 정원을 다니시지?」 겁에 질려 나는 칼을 풀밭에 떨어뜨렸지만 찾아보지도 않았다.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단번에 정신이 들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며 딱총나무 덤불 밑 내 벤치에 다가가 지나이다의 침실 창을 올려다보았다. 작고 조금 휘어진 창유리가 밤하늘에서 내려오는 희미한 빛 속에 흐릿하게 파랬다. 갑자기 그 빛깔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너머로, 나는 그것을 보았다, 똑똑히 보았다, 희끄무레한 블라인드가 조심스럽게, 조용히 내려와 창틀까지 내려오더니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지?" 다시 내 방에 돌아왔을 때 나는 거의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했다. "꿈일까, 우연일까, 아니면……." 갑자기 머리에 떠오른 짐작들은 어찌나 새롭고 이상했던지 나는 거기 빠져들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18장
아침에 나는 머리가 아픈 채 일어났다. 어제의 흥분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무거운 의아함과 무언가 전에 없던 슬픔이 차지했다. 마치 내 안에서 무언가가 죽어 가는 것처럼.
"뇌를 반쯤 들어낸 토끼처럼 왜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소?" 나를 만난 루신이 말했다.
아침 식사 때 나는 몰래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 차분했고, 어머니는 늘 그렇듯 남몰래 짜증이 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이따금 그러듯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지 않을까 기다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느 날의 차가운 다정함으로조차 나를 어루만지지 않았다. 「지나이다에게 다 이야기할까?……」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상관없어. 우리 사이는 다 끝났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갔지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바라던 만큼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다. 공작 부인에게 방학을 맞은 친아들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와 있었다. 열두 살쯤 된 사관생도였다. 지나이다는 곧바로 나에게 동생을 맡겼다.
"자, 사랑하는 볼로댜." 그녀가 말했다(그녀가 나를 그렇게 부른 건 처음이었다). "친구가 생겼어요. 이 애 이름도 볼로댜예요. 부탁이니 이 애를 귀여워해 줘요. 아직 좀 서먹해하지만 마음은 착해요. 네스쿠치니도 보여 주고, 같이 산책도 하고, 보살펴 줘요. 그래 줄 거죠? 당신도 참 착하잖아요!"
그녀가 다정하게 내 두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완전히 어쩔 줄 몰랐다. 이 소년이 오자 나 자신이 소년이 되어 버렸다. 나는 말없이 사관생도를 바라보았고, 그도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나이다가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를 서로에게 떠밀었다.
"자, 서로 안아요, 얘들아!"
우리는 서로 안았다.
"정원에 데려가 줄까?" 내가 사관생도에게 물었다.
"그러시지요." 그가 쉰 목소리로, 영락없는 사관생도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나이다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녀 얼굴에 이토록 사랑스러운 빛깔이 돈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사관생도와 함께 나갔다. 우리 정원에는 낡은 그네가 있었다. 나는 그를 가는 널빤지에 앉히고 그네를 밀어 주기 시작했다. 그는 넓은 금 장식줄을 단 두꺼운 나사 천 새 제복을 입고 꼼짝 않고 앉아 줄을 꽉 붙잡고 있었다.
"깃 단추 좀 풀지 그래." 내가 그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익숙합니다." 그가 말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는 누나를 닮았다. 특히 눈이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그를 돌봐 주는 게 기분 좋으면서도, 동시에 그 저리는 슬픔이 조용히 내 가슴을 갉아먹었다. 「이제 나는 정말로 어린애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는…….」 나는 어제 칼을 어디 떨어뜨렸는지 떠올려서 그것을 찾아냈다. 사관생도가 그 칼을 졸라서 얻어 가더니, 굵은 러비지 줄기를 꺾어 피리를 깎아 불기 시작했다. 오셀로도 피리를 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저녁에 바로 그 오셀로는 얼마나 울었던가. 지나이다가 정원 구석에서 그를 찾아내 왜 그렇게 슬프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품에서. 내 눈물이 어찌나 세차게 쏟아졌던지 그녀가 놀랐다.
"왜 그래요? 왜 그래요, 볼로댜?" 그녀가 되풀이하더니, 내가 대답도 하지 않고 울음을 그치지도 않자 내 젖은 뺨에 입 맞추려 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고 흐느끼며 속삭였다.
"나는 다 알아요. 그런데 왜 나를 가지고 놀았어요?……내 사랑이 왜 필요했어요?"
"내가 당신한테 잘못했어요, 볼로댜……." 지나이다가 말했다. "아, 정말 잘못했어요……." 그녀가 덧붙이며 두 손을 맞잡았다. "내 안에는 나쁘고 어둡고 죄스러운 게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이제 당신을 가지고 놀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왜, 어떻게 사랑하는지 당신은 짐작도 못 하겠지만……. 그런데 대체 뭘 안다는 거예요?"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내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기만 하면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그녀의 것이었다……. 십오 분 뒤 나는 벌써 사관생도와 지나이다와 함께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웃었다. 퉁퉁 부은 눈꺼풀이 웃음 때문에 눈물을 떨어뜨렸지만. 내 목에는 넥타이 대신 지나이다의 리본이 매여 있었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을 때 나는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나를 마음대로 했다.
19장
실패로 끝난 그 밤의 원정 뒤 한 주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하라고 하면 나는 몹시 난처할 것이다. 이상하고 열에 들뜬 시기였다. 가장 상반된 감정과 생각과 의심과 희망과 기쁨과 고통이 회오리처럼 맴도는 일종의 혼돈이었다. 열여섯 살 소년이 자기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말이지만,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웠고, 무엇이든 스스로에게 따져 묻기가 두려웠다. 나는 그저 하루를 저녁까지 살아 내기에 바빴다. 그 대신 밤에는 잤다……. 어린애다운 경솔함이 나를 도왔다. 나는 내가 사랑받는지 알고 싶지 않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걸 스스로에게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피했지만 지나이다는 피할 수 없었다……. 그녀 앞에서 나는 불에 덴 듯 타올랐다……. 하지만 내가 타고 녹는 그 불이 무슨 불인지 알아서 뭘 하겠는가. 타고 녹는 게 달콤하기만 하면 됐다. 나는 모든 인상에 나를 맡겼고, 나 자신을 속였고, 기억에서 고개를 돌렸고, 앞날에 예감되는 것 앞에서 눈을 감았다……. 이 애태움은 아마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벼락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끝내고 나를 새로운 궤도로 내던졌다.
어느 날 꽤 긴 산책을 마치고 점심때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나 혼자 점심을 먹게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나갔고, 어머니는 몸이 안 좋아 먹고 싶지 않다며 침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하인들 얼굴을 보고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짐작했다……. 그들에게 캐물을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시를 열렬히 좋아하고 기타를 잘 치는 젊은 찬장지기 필립이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에게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끔찍한 장면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하녀 방에서는 한마디 한마디 다 들렸다. 많은 말이 프랑스어로 오갔지만 하녀 마샤가 파리에서 온 재봉사 집에서 다섯 해를 살아서 다 알아들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바람피운다고, 이웃집 아가씨와 사귄다고 나무랐고, 아버지는 처음엔 변명하다가 화가 나서 「마님 나이를 두고」 무슨 잔인한 말을 했고, 그 때문에 어머니가 울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늙은 공작 부인에게 써 주었다는 어음 이야기도 꺼내며 그녀와 아가씨를 몹시 나쁘게 말했고, 그러자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화가 다," 필립이 말을 이었다. "이름 없는 편지 때문에 생긴 겁니다요. 누가 썼는지는 모르고요. 안 그러면 이런 일이 밖으로 드러날 까닭이 하나도 없었는데요."
"그럼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어?" 나는 겨우 말했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가슴 가장 깊은 데서 무언가가 떨렸다.
필립이 의미심장하게 눈을 찡긋했다.
"있었습죠. 이런 일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요. 도련님 아버님께서 이번엔 아무리 조심하셨다 해도, 이를테면 마차를 빌리든지 뭘 하든지 해야 하니까요……. 사람 손을 안 빌릴 수도 없고요."
나는 필립을 내보내고 침대에 쓰러졌다. 나는 흐느끼지도, 절망에 빠지지도 않았다. 이 모든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 스스로에게 묻지도 않았고, 왜 진작, 왜 오래전에 짐작하지 못했는지 놀라지도 않았다.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내가 알게 된 것은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이 갑작스러운 계시가 나를 짓눌러 버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내 꽃들은 한꺼번에 뽑혀 흩어지고 짓밟힌 채 내 둘레에 놓여 있었다.
20장
이튿날 어머니는 도시로 이사하겠다고 알렸다. 아침에 아버지가 어머니 침실에 들어가 오랫동안 단둘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더는 울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먹을 것을 찾았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고 결심도 바꾸지 않았다. 기억하기로 나는 하루 종일 쏘다녔지만 정원에는 가지 않았고 곁채 쪽은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데 저녁에 나는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아버지가 말렙스키 백작의 팔을 끼고 홀을 지나 현관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하인이 보는 앞에서 차갑게 말했다. "며칠 전에 백작님께서는 어느 집에서 문밖으로 쫓겨나셨지요. 지금 나는 당신과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않겠소만, 한 번만 더 우리 집에 오시면 창밖으로 내던지겠다는 걸 알려 드리는 영광을 누리겠소. 나는 당신 필적이 마음에 들지 않소." 백작은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고 움츠러들더니 사라졌다.
우리 집이 있는 도시의 아르바트로 옮길 준비가 시작되었다. 아마 아버지 자신도 더는 별장에 머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소동을 벌이지 말라고 잘 달래 놓은 모양이었다. 모든 일이 조용히, 서두르지 않고 진행되었다. 어머니는 공작 부인에게 인사를 전하고, 몸이 안 좋아 떠나기 전에 뵙지 못해 아쉽다는 말까지 전하게 했다.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니며 이 모든 게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젊은 아가씨가, 그래도 공작 영애인데, 아버지가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이를테면 벨로브조로프에게라도 시집갈 수 있었으면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무엇을 바랐던 걸까? 자기 앞날을 다 망칠까 봐 두렵지도 않았을까? 그래, 나는 생각했다. 이게 사랑이구나, 이게 정열이구나, 이게 헌신이구나……. 그리고 루신의 말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들한테는 자기를 바치는 게 달콤하다. 한번은 곁채 창문 하나에 창백한 얼룩 같은 것이 보였다……. 「정말 지나이다의 얼굴일까?」 나는 생각했다……. 정말로 그녀의 얼굴이었다.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마지막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그녀와 헤어질 수는 없었다. 나는 알맞은 순간을 골라 곁채로 갔다.
응접실에서 공작 부인이 늘 그렇듯 지저분하고 무심한 인사로 나를 맞았다.
"어째 도련님 댁에서는 그렇게 일찍 서두르시오?" 그녀가 양쪽 콧구멍에 코담배를 쑤셔 넣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를 보고 마음이 놓였다. 필립이 한 어음이라는 말이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옆방에서 지나이다가 나타났다. 검은 옷에 창백한 얼굴, 머리는 곱슬기 없이 풀려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데리고 갔다.
"당신 목소리가 들려서," 그녀가 말을 꺼냈다. "곧바로 나왔어요. 그렇게 쉽게 우리를 버리고 갈 수 있었어요, 못된 아이야?"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공작 영애님." 내가 대답했다. "아마 영영요. 들으셨을지도 모르지만, 저희는 떠납니다."
지나이다가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네, 들었어요. 와 줘서 고마워요. 당신을 못 보는 줄 알았어요. 나를 나쁘게 기억하지 말아 줘요. 내가 가끔 당신을 괴롭혔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에 기댔다.
"정말이에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알아요, 당신이 나를 나쁘게 생각한다는 거."
"제가요?"
"네, 당신이……당신이요."
"제가요?" 나는 서글프게 되풀이했다. 그리고 내 심장은 거부할 수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매혹의 힘에 예전처럼 떨렸다. "제가요? 믿어 주세요,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 당신이 무엇을 했든, 저를 얼마나 괴롭혔든, 저는 평생 끝날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고 우러를 거예요."
그녀가 재빨리 나를 돌아보더니 두 팔을 활짝 벌려 내 머리를 끌어안고 세게, 뜨겁게 나에게 입 맞추었다. 이 길고 작별하는 입맞춤이 누구를 찾았는지는 하느님만 아시겠지만, 나는 그 달콤함을 탐욕스럽게 맛보았다. 그것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안녕히, 안녕히." 나는 되풀이했다…….
그녀는 몸을 빼내어 가 버렸다. 그리고 나도 물러났다. 물러날 때의 그 느낌을 나는 전할 수 없다. 그 느낌이 다시 오기를 바라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다면 나는 나를 불행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우리는 도시로 이사했다. 나는 지난 일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고, 공부에도 쉽사리 손대지 못했다. 내 상처는 천천히 아물었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나쁜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내 눈에 더 커 보이는 것 같았다……. 이 모순은 심리학자들더러 알아서 설명하라고 하자. 한번은 가로수 길을 걷다가, 말할 수 없이 기쁘게도 루신과 마주쳤다. 나는 그의 곧고 위선 없는 성품 때문에 그를 좋아했고, 게다가 그가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기억 때문에 그가 소중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갔다.
"아하!" 그가 말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이로군, 젊은이! 어디 좀 봅시다. 아직 누렇구먼. 그래도 눈에 예전의 그 지저분한 건 없소. 사람 같아 보이오, 방 안 강아지가 아니라. 그거 좋소. 그래, 어떻게 지내오? 공부는 하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거짓말은 하기 싫었고, 사실대로 말하기는 부끄러웠다.
"뭐, 괜찮소." 루신이 말을 이었다. "기죽지 마시오. 중요한 건 정상적으로 살고 열정에 휩쓸리지 않는 거요. 안 그러면 뭐가 좋겠소? 물결이 어디로 데려가든 다 나쁘오. 사람은 바위 위에라도 서야 하오, 다만 제 발로. 나는 지금 기침이 나오……. 그런데 벨로브조로프 얘기 들었소?"
"무슨 일인데요? 아니요."
"소식이 끊겼소. 캅카스로 갔다고들 하오. 당신한테 교훈이오, 젊은이. 이게 다 제때 헤어질 줄 모르고, 그물을 찢을 줄 몰라서 생기는 일이오. 당신은 무사히 빠져나온 것 같소. 다시는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잘 가오."
「다시는 안 걸려들 거야……」 나는 생각했다. 「그녀를 다시는 못 볼 거야.」 하지만 나는 지나이다를 한 번 더 보게 될 운명이었다.
21장
아버지는 날마다 말을 타고 나갔다. 아버지에게는 목이 길고 가늘고 다리가 긴, 지칠 줄 모르고 성질 사나운 멋진 붉은 얼룩 영국 말이 있었다. 이름은 일렉트릭이었다.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그 말을 탈 수 없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오랜만에 기분 좋게 나에게 왔다. 말을 타러 나가려고 벌써 박차를 단 채였다. 나는 데려가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차라리 말타기 놀이나 하자." 아버지가 대답했다. "안 그러면 너는 그 조랑말로 나를 못 따라온다."
"따라갈 수 있어요. 저도 박차 달게요."
"그래, 그러든지."
우리는 나섰다. 나에게는 털이 덥수룩한 검은 조랑말이 있었는데, 다리가 튼튼하고 꽤 날랬다. 물론 일렉트릭이 속보를 다해 달릴 때면 내 말은 죽어라 달려야 했지만, 그래도 나는 뒤처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같은 기수를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어찌나 멋지고 무심하게 능란한 자세로 앉아 있던지, 말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그를 자랑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가로수 길을 다 돌고, 데비치예 들판에도 가고, 울타리 몇 개를 뛰어넘고(처음에 나는 뛰어넘기가 무서웠지만, 아버지는 겁 많은 사람을 경멸해서 나는 무서워하기를 그만두었다), 모스크바강을 두 번 건넜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생각했다. 아버지 자신이 내 말이 지쳤다고 했으니 더욱 그랬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나에게서 비켜 크림 여울 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강둑을 따라 달려갔다. 나는 그 뒤를 쫓았다. 쌓아 둔 낡은 통나무 더미 앞에 이르자 아버지는 재빨리 일렉트릭에서 뛰어내려 나에게도 내리라고 하고는, 자기 말 고삐를 나에게 넘기며 여기 통나무 곁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고는 작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 사라졌다. 나는 말들을 끌고 강둑을 따라 이리저리 거닐기 시작했다. 일렉트릭과 실랑이를 하면서. 일렉트릭은 걸으면서 연신 고개를 홱홱 젓고 몸을 털고 콧김을 뿜고 히힝 울었다. 내가 멈추면 번갈아 발굽으로 땅을 파고, 비명을 지르며 내 조랑말의 목을 물었다. 한마디로 버릇없는 순혈종(pur sang)처럼 굴었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강에서 기분 나쁜 습기가 끼쳤다. 가는 비가 살그머니 내리더니, 내가 그 곁을 서성이느라 지겹도록 질린 바보 같은 잿빛 통나무에 작은 검은 얼룩을 점점이 찍었다. 지루함이 나를 사로잡았는데 아버지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핀란드 사람인 파수꾼 하나가 다가왔다. 그도 온통 잿빛이었고, 머리에는 냄비 같은 커다랗고 낡은 군모를 쓰고 미늘창을 들고 있었다(모스크바강 둑에 파수꾼이 왜 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늙은 여자 같은 쭈글쭈글한 얼굴을 나에게 돌리며 말했다.
"여기서 말을 데리고 뭐 하시오, 도련님? 내가 좀 잡아 드리리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담배를 청했다. 그를 떼어 내려고(게다가 조바심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아버지가 간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그러고는 골목 끝까지 걸어가 모퉁이를 돌아 멈춰 섰다. 거리에, 나한테서 사십 걸음쯤 떨어진 곳에, 작은 나무집의 열린 창 앞에 아버지가 나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가슴을 창틀에 기대고 있었고, 그 집 안에 커튼에 반쯤 가려진 채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앉아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지나이다였다.
나는 얼어붙었다. 솔직히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엔 달아나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보면,」 나는 생각했다. 「나는 끝장이다…….」 하지만 이상한 느낌이, 호기심보다 강하고 질투보다도 강하고 두려움보다도 강한 느낌이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바라보기 시작했고, 귀를 기울이려 애썼다. 아버지가 무언가를 다그치는 것 같았다. 지나이다는 동의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녀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슬프고, 진지하고, 아름답고, 헌신과 슬픔과 사랑과 무언가 절망의,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자국이 찍힌 얼굴. 그녀는 짧은 말만 하고 눈을 들지 않은 채 그저 웃었다. 순순히, 그리고 고집스럽게. 그 미소 하나로 나는 예전의 내 지나이다를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어깨를 들썩이고 모자를 고쳐 썼다. 그건 늘 아버지가 조바심이 날 때의 표시였다……. 그러고는 이런 말이 들렸다. 「당신은 그 ……와 헤어져야 해요(Vous devez vous séparer de cette…)」 지나이다가 몸을 꼿꼿이 펴며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내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프록코트 자락의 먼지를 털던 승마 채찍을 갑자기 쳐들었고, 팔꿈치까지 드러난 그 팔을 날카롭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비명을 겨우 참았다. 지나이다는 움찔하더니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고, 천천히 자기 팔을 입술로 가져가 거기 붉게 부어오른 자국에 입 맞추었다. 아버지가 채찍을 옆으로 내던지더니 서둘러 현관 계단을 뛰어올라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지나이다가 돌아섰다. 그리고 두 팔을 내밀고 고개를 젖힌 채 그녀도 창가에서 물러났다.
놀라움에 숨이 멎을 듯하고 무언가 어리둥절한 공포를 가슴에 안은 채 나는 뒤돌아 달렸다. 골목을 달려 지나고, 하마터면 일렉트릭을 놓칠 뻔하면서 강둑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차갑고 절제된 아버지에게도 이따금 광포한 분노가 찾아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내가 무엇을 본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느꼈다. 내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지나이다의 그 몸짓, 그 눈길, 그 미소는 영영 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녀의 모습이,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이 새로운 모습이 내 기억에 영원히 새겨졌다는 것을. 나는 멍하니 강을 바라보며 눈물이 흐르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가 맞는다.」 나는 생각했다. 「맞는다……맞는다…….」
"자, 뭐 하니, 말 다오!" 내 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기계적으로 고삐를 건넸다. 아버지가 일렉트릭에 훌쩍 올라탔다……. 추위에 떨던 말이 뒷발로 서더니 3미터쯤 앞으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곧 말을 길들였다. 박차를 옆구리에 박고 주먹으로 목을 쳤다……. 「에이, 채찍이 없네.」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나는 방금 그 채찍이 내던 휙 소리와 내리치는 소리를 떠올리고 몸서리쳤다.
"채찍은 어떻게 하셨어요?" 조금 있다가 내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앞서 달려갔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잡았다. 꼭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나 없는 동안 심심했니?" 아버지가 이 사이로 말했다.
"조금요. 그런데 채찍은 어디다 떨어뜨리셨어요?" 내가 다시 물었다.
아버지가 재빨리 나를 흘끗 보았다.
"떨어뜨린 게 아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던졌다."
아버지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엄한 얼굴이 얼마나 많은 다정함과 아쉬움을 드러낼 수 있는지 보았다.
아버지는 다시 달려갔고, 나는 이제 따라잡을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보다 십오 분 늦게 집에 닿았다.
「이게 사랑이구나.」 나는 밤에 책상 앞에 앉아 다시 스스로에게 말했다. 책상 위에는 벌써 공책과 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게 정열이구나!……어떻게 분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구에게든 맞는 걸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가장 사랑하는 손에게라도! 그런데 사랑하면 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나는 무얼 상상했던가…….」
지난 한 달이 나를 몹시 늙게 했다. 내 사랑은 그 모든 설렘과 고통과 함께, 내가 겨우 짐작할 뿐인 저 다른, 알 수 없는 무엇 앞에서 스스로에게도 너무 작고 어린애 같고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 무엇은 어스름 속에서 아무리 들여다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낯설고 아름답지만 무서운 얼굴처럼 나를 겁먹게 했다…….
바로 그날 밤 나는 이상하고 무서운 꿈을 꾸었다. 낮고 어두운 방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채찍을 손에 들고 서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구석에 지나이다가 몸을 붙이고 있었는데, 붉은 줄이 팔이 아니라 이마에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둘 뒤에서 온통 피투성이인 벨로브조로프가 일어서서 창백한 입술을 벌리고 성난 듯 아버지를 위협하고 있었다.
두 달 뒤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반년 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와 함께 막 옮겨 간 페테르부르크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며칠 전 아버지는 모스크바에서 편지 한 통을 받고 몹시 동요했다……. 아버지는 무언가를 부탁하러 어머니에게 갔고,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아버지가! 뇌졸중이 온 바로 그날 아침, 아버지는 프랑스어로 나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들아.」 아버지는 나에게 썼다.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하라. 그 행복을, 그 독을 두려워하라…….」 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꽤 많은 돈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22장
네 해쯤 지났다. 나는 막 대학을 마쳤고, 앞으로 무엇을 시작할지,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할지 아직 잘 몰라서 당분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렸다. 어느 좋은 저녁 극장에서 마이다노프를 만났다. 그는 그새 결혼하고 관청에 들어갔지만, 나는 그에게서 아무 변화도 찾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쓸데없이 열광하고 여전히 갑자기 풀이 죽었다.
"그거 압니까?" 그가 나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돌스카야 부인이 여기 와 있어요."
"돌스카야 부인이 누구요?"
"잊었어요? 우리가 모두 사랑했던 예전의 자세키나 공작 영애 말이에요. 당신도 그랬잖아요. 기억나요? 네스쿠치니 근처 별장에서."
"그녀가 돌스키와 결혼했어요?"
"네."
"그리고 그녀가 여기, 극장에 있어요?"
"아니요, 페테르부르크에 있어요. 며칠 전에 여기 왔어요. 외국에 갈 참이래요."
"남편은 어떤 사람이에요?" 내가 물었다.
"아주 좋은 친구고 재산도 있어요. 모스크바에서 나랑 같이 근무했죠. 알잖아요, 그 일이 있고 나서……당신은 그 일을 다 잘 알 테니까(마이다노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그녀가 짝을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뒷일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 같은 머리면 뭐든 되죠. 그녀한테 가 봐요. 아주 반가워할 거예요. 더 예뻐졌어요."
마이다노프는 지나이다의 주소를 주었다. 그녀는 데무트 여관에 묵고 있었다. 옛 기억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나는 바로 다음 날 예전의 내 「열정의 대상」을 찾아가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무슨 일들이 생겼다. 한 주가 지나고 또 한 주가 지나, 마침내 데무트 여관에 가서 돌스카야 부인을 찾았을 때 나는 그녀가 나흘 전 해산하다가 거의 갑자기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언가가 내 가슴을 툭 친 것 같았다. 그녀를 볼 수 있었는데 보지 못했고 영영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 이 쓰라린 생각이 피할 수 없는 꾸짖음의 온 힘으로 나에게 박혔다. 「죽었다!」 나는 멍하니 문지기를 바라보며 되뇌고, 조용히 거리로 나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걸었다. 지나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떠올라 내 앞에 섰다. 그래, 이렇게 끝났구나. 그 젊고 뜨겁고 눈부신 삶은 서두르고 설레며 이것을 향해 달려갔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 소중한 얼굴과 그 눈과 그 곱슬머리를 비좁은 상자 속에, 축축한 땅속 어둠 속에 떠올렸다. 바로 여기, 아직 살아 있는 나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어쩌면 내 아버지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나는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상상력을 다그쳤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무심한 입에서 나는 죽음의 소식을 들었고,
무심하게 그 소식을 들었노라,
하는 구절이 내 영혼 속에서 울렸다. 오 젊음이여! 젊음이여! 너는 아무것에도 마음 쓰지 않는다. 너는 우주의 모든 보물을 가진 것 같고, 슬픔조차 너를 즐겁게 하고, 비애조차 너에게 어울린다. 너는 자신만만하고 뻔뻔하다. 너는 말한다. 나만 살아 있다, 보아라! 그런데 정작 너의 날들은 흔적도 없이, 셀 수도 없이 달려가 사라지고, 네 안의 모든 것이 햇볕 속의 밀랍처럼, 눈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어쩌면 너의 매력의 모든 비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데는 쓸 줄 몰랐을 힘을 바람에 날려 보낸다는 데, 우리 저마다가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를 낭비꾼이라고 여기고, 「오, 시간을 헛되이 잃지만 않았다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하고 말할 권리가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다……. 한순간 나타난 내 첫사랑의 환영을 한숨 한 번, 쓸쓸한 느낌 하나로 겨우 배웅했을 때, 나는 무엇을 바랐고, 무엇을 기대했고, 어떤 풍요로운 앞날을 내다보았던가?
그리고 내가 바란 모든 것 가운데 무엇이 이루어졌는가? 이제 내 삶에 저녁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는 지금, 그 빠르게 날아가 버린 아침의, 봄의 뇌우에 대한 기억보다 더 싱그럽고 더 소중한 무엇이 나에게 남아 있는가?
하지만 나를 괜히 헐뜯는 것이다. 그때도, 그 경솔한 젊은 시절에도 나는 나를 부르는 슬픈 목소리에, 무덤 너머에서 날아온 엄숙한 소리에 귀를 막지 않았다. 기억하기로 지나이다의 죽음을 알게 된 날에서 며칠 지나, 나는 스스로 거부할 수 없는 끌림에 따라 우리와 같은 집에 살던 가난한 노파 한 사람의 임종을 지켰다. 넝마를 덮고, 딱딱한 널빤지 위에서, 자루를 베고 그녀는 힘겹고 무겁게 죽어 갔다. 그녀의 평생은 날마다의 궁핍과의 쓰라린 싸움 속에 흘러갔다. 그녀는 기쁨을 보지 못했고 행복의 꿀을 맛보지 못했다. 그녀가 어찌 죽음을, 그 자유를, 그 안식을 반기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낡은 몸이 아직 버티는 동안, 얼어붙게 하는 손이 짓누르는 가슴이 아직 괴롭게 들썩이는 동안, 마지막 힘이 그녀를 떠나지 않는 동안, 노파는 줄곧 성호를 긋고 줄곧 속삭였다. 「주여, 제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리고 의식의 마지막 불꽃과 함께서야 그녀의 눈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의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기억이 난다. 거기, 그 가난한 노파의 임종 자리에서 나는 지나이다가 걱정되어 무서워졌고, 그녀를 위해,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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