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D

지하로부터의 수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조영환 옮김

Фёдор Достоевский — 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 (1864)

21장 · 241분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페테르부르크의 구석방에 틀어박힌 마흔 살 퇴직 관리가 있지도 않은 독자를 붙잡고 이성과 이익과 둘 곱하기 둘은 넷에 맞서 제 변덕의 권리를 외친다. 그리고 스무 해 전 젖은 눈 내리던 날, 옛 동창들의 만찬과 한 여자 리자에게 저지른 일을 털어놓는다.

1부 1장

〔작가의 주〕 이 수기를 쓴 사람도, 「수기」 자체도 물론 지어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대체로 어떤 사정 속에서 만들어져 왔는지를 생각하면, 이런 수기를 쓰는 사람 같은 인물은 우리 사회에 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바로 얼마 전 시대의 한 성격을 여느 때보다 더 눈에 띄게 독자 앞에 내놓고 싶었다. 그는 아직 살아남아 있는 세대의 대표자 가운데 하나다. 「지하」라는 제목을 붙인 이 첫 부분에서 이 인물은 자기 자신과 자기 견해를 소개하며, 자기 같은 사람이 어떤 까닭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났고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히려 하는 듯하다. 다음 부분에서는 이 인물이 자기 삶의 몇몇 사건에 대해 쓴 진짜 「수기」가 이어진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매력 없는 인간이다. 내 생각에 나는 간이 아프다. 하긴 나는 내 병에 대해 쥐뿔도 모르고, 어디가 아픈지도 확실히 모른다. 나는 치료를 받지 않으며, 의학과 의사들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한 번도 치료를 받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나는 지독하게 미신적이기까지 하다. 뭐, 의학을 존경할 정도로는 말이다. (나는 미신을 믿지 않을 만큼은 교육을 받았지만, 미신을 믿는다.) 천만에요, 나는 심술이 나서 치료를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여러분은 아마 이걸 이해하지 못하시겠지. 그런데요, 나는 이해한다. 물론 나는 이 경우 내 심술로 정확히 누구를 골탕 먹이는 것인지 여러분에게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의사들에게 아무 「앙갚음」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아주 잘 안다. 이 모든 것으로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해칠 뿐 다른 누구도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도 내가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그건 심술 때문이다. 간이 아프다고? 그렇다면 더 지독하게 아파라!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이렇게 살고 있다. 스무 해쯤. 지금 나는 마흔이다. 전에는 관청에 다녔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 나는 심술궂은 관리였다. 나는 무례했고 거기서 쾌감을 느꼈다. 뇌물은 받지 않았으니 적어도 이것으로라도 나 자신에게 보상을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시시한 재담이다. 하지만 지우지 않겠다. 아주 재치 있을 줄 알고 썼는데, 지금 보니 그저 추잡하게 뻐기고 싶었을 뿐이라는 게 드러났다. 그러니 일부러 지우지 않겠다!) 내가 앉은 책상으로 청원자들이 문의를 하러 다가오면, 나는 그들에게 이를 갈았고, 누군가를 속상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면 거침없는 쾌감을 느꼈다. 거의 언제나 성공했다. 대개는 겁 많은 사람들이었으니까. 뻔하다, 청원자들이란. 그런데 멋 부리는 자들 가운데 특히 참을 수 없는 장교가 하나 있었다. 그는 도무지 굽히려 하지 않았고, 역겹게 군도를 덜그럭거렸다. 나는 그 군도를 두고 그와 한 해 반 동안 전쟁을 치렀다. 마침내 내가 이겼다. 그는 덜그럭거리기를 그만두었다. 하긴 이건 아직 내가 젊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여러분, 내 심술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아시는가? 바로 그것이 모든 요점이었고, 바로 거기에 가장 큰 추잡함이 있었다. 나는 매 순간, 가장 거세게 울화가 치밀 때조차, 내가 심술궂기는커녕 앙심을 품은 인간조차 아니며 그저 괜히 참새나 겁주면서 스스로 즐거워할 뿐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의식하고 있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도, 누가 인형 하나 가져다주고 설탕 넣은 차 한 잔 주면 나는 아마 가라앉을 것이다. 마음이 뭉클해지기까지 하겠지. 물론 틀림없이 나중에 여러분에게 나 자신 때문에 이를 갈고, 부끄러워서 몇 달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겠지만. 그게 내 버릇이다.

아까 내가 심술궂은 관리였다고 한 건 거짓말이다. 심술이 나서 거짓말을 했다. 나는 청원자들에게도 장교에게도 그저 장난을 쳤을 뿐, 실은 한 번도 심술궂은 인간이 될 수 없었다. 나는 매 순간 내 안에 그와 정반대되는 요소들이 아주 많이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나는 그 정반대의 요소들이 내 안에서 우글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들이 평생 내 안에서 우글거리며 밖으로 나가게 해 달라고 졸랐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내보내지 않았다, 일부러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것들은 나를 부끄러울 만큼 괴롭혔다. 경련이 일 지경까지 몰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긋지긋해졌다, 얼마나 지긋지긋했는지! 혹시 여러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무언가 뉘우치고 있다고, 무언가 용서를 빌고 있다고 여겨지시는 건 아닌가?…… 틀림없이 그렇게 여겨지실 거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여러분이 그렇게 여기든 말든 나는 아무래도 좋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은커녕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심술궂은 인간도, 착한 인간도, 비열한 인간도, 정직한 인간도, 영웅도, 벌레도 되지 못했다. 이제 나는 내 구석에서 여생을 보내며, 똑똑한 인간은 진지하게 무엇이 될 수 없으며 무엇이 되는 건 바보뿐이라는, 심술궂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위안으로 나 자신을 약 올리고 있다. 그렇고말고요, 19세기의 똑똑한 인간은 무엇보다 성격이 없는 존재여야 하며, 도덕적으로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 성격이 있는 인간, 활동가는 무엇보다 편협한 존재다. 이것이 마흔 해 된 나의 신념이다. 나는 지금 마흔 살인데, 마흔 살이면 인생 전부다. 그건 가장 깊은 노년이다. 마흔 넘어 사는 건 꼴사납고, 천박하고, 부도덕하다! 누가 마흔 넘어 사는가, 솔직하게, 정직하게 대답해 보시라. 누가 사는지 내가 말해 주겠다. 바보들과 불한당들이 산다. 나는 모든 노인들에게 대놓고 이렇게 말하겠다. 이 모든 존경받는 노인들, 은발에 향수 냄새 풍기는 이 모든 노인들에게! 온 세상에 대놓고 말하겠다! 나는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 나 자신이 예순까지 살 테니까. 일흔까지 살 거다! 여든까지 살 거다!…… 잠깐! 숨 좀 돌리자…….

여러분은 아마 내가 여러분을 웃기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시겠지? 그것도 틀렸다. 나는 여러분이 보기에, 또는 어쩌면 여러분이 보기에 그런 것처럼 그렇게 명랑한 인간이 전혀 아니다. 하긴 여러분이 이 모든 수다에 짜증이 나서(여러분이 벌써 짜증이 났다는 게 느껴진다) 대체 너는 정확히 누구냐 하고 묻고 싶어진다면, 나는 대답하겠다. 나는 한낱 8등관이다. 나는 먹고살 거리가 있으려고 관청에 다녔다(오직 그것 때문에). 그리고 작년에 먼 친척 하나가 유언으로 내게 육천 루블을 남겨 주자 나는 곧바로 퇴직하고 내 구석에 틀어박혔다. 전에도 나는 이 구석에 살았지만, 이제는 이 구석에 들어앉은 것이다. 내 방은 형편없고 지저분하며 도시 변두리에 있다. 하녀는 시골 아낙인데, 늙었고, 어리석어서 심술궂고, 게다가 늘 고약한 냄새가 난다. 사람들은 페테르부르크 날씨가 내게 해로워지고 있으며 내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는 건 너무 비싸다고 말한다. 나는 그걸 다 안다. 경험 많고 지혜로운 그 모든 조언가들, 고개 끄덕이는 자들보다 더 잘 안다. 그래도 나는 페테르부르크에 남는다. 나는 페테르부르크를 떠나지 않을 거다! 내가 떠나지 않는 건…… 에이! 내가 떠나든 말든 완전히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닌가.

그런데 말이다, 점잖은 인간이 가장 큰 즐거움을 느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대답: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러니 나도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1부 2장

여러분, 이제 나는 여러분이 듣고 싶든 듣고 싶지 않든, 내가 어째서 벌레조차 되지 못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엄숙하게 말하건대, 나는 몇 번이고 벌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조차 될 자격이 없었다. 여러분, 맹세하건대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은 병이다. 진짜 병, 완전한 병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평범한 인간의 의식이면 너무나 충분할 것이다. 곧 우리의 불행한 19세기에 교양 있는 인간, 게다가 지구 전체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계획적으로 지어진 도시인 페테르부르크에 산다는 이중의 불행을 짊어진 인간에게 돌아가는 몫의 절반, 사분의 일만 있어도 충분할 것이다. (도시에는 계획적으로 지어진 도시와 그렇지 않은 도시가 있다.) 이를테면 이른바 직선적인 사람들과 활동가들이 모두 그것으로 살아가는 그 정도의 의식이면 아주 충분할 것이다. 장담하건대 여러분은 내가 활동가들을 두고 재치를 부리려고 뻐기느라 이 모든 걸 쓴다고, 게다가 뻐기느라 내 장교처럼 고약한 취미로 군도를 덜그럭거린다고 생각하실 거다. 하지만 여러분, 누가 제 병을 자랑하고, 게다가 그걸로 뻐기겠는가?

하긴 내가 뭘? 다들 그러는걸. 바로 병을 자랑하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 누구보다 더 그럴 거다. 따지지 말자. 내 반박은 터무니없다. 그래도 나는 굳게 확신한다. 아주 많은 의식뿐 아니라 모든 의식이 병이라고. 나는 이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것도 잠시 제쳐 두자. 이것 좀 말해 달라. 어째서였을까.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바로 그, 그렇다, 바로 그 순간에, 예전에 우리가 흔히 말하던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의 온갖 미묘함을 내가 가장 잘 의식할 수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의식하기는커녕 그런 볼썽사나운 짓을, 그런 짓을…… 그래, 한마디로 하자면 아마 누구나 하는 짓이긴 하지만,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하필 그런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내가 가장 잘 의식하고 있을 때 저지르게 되는 그런 짓을 저지르곤 했을까? 선에 대해,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대해 더 많이 의식할수록 나는 내 진창 속으로 더 깊이 가라앉았고, 거기에 완전히 빠져 버릴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우연히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그것이 병이나 타락이 결코 아니라 나의 가장 정상적인 상태인 것처럼. 그래서 마침내 나는 이 타락과 싸울 마음조차 사라졌다. 결국 나는 이것이 아마 나의 정상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거의 믿게 되었다(아니, 어쩌면 정말로 믿었는지도). 그런데 처음에, 맨 처음에는 이 싸움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뎌 냈던가! 나는 남들에게도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고, 그래서 평생 이것을 비밀로 감추고 살았다. 나는 부끄러웠다(어쩌면 지금도 부끄럽다). 그러다 결국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이따금 더없이 추잡한 페테르부르크의 밤에 내 구석으로 돌아와서, 오늘 또 추잡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 저지른 일은 또다시 도저히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애써 의식하며, 속으로, 남몰래, 그것 때문에 나 자신을 이로 물어뜯고 또 물어뜯고, 쓸고 빨아 대다가, 마침내 쓴맛이 무언가 수치스럽고 저주받은 단맛으로 바뀌고, 마침내는 확고하고 진지한 쾌락으로 바뀌는 데서 무언가 은밀하고 비정상적이고 치사한 작은 쾌락을 느낄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다, 쾌락으로, 쾌락으로! 나는 이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도, 남들에게도 그런 쾌락이 있는지 꼭 알고 싶어서다. 설명해 드리겠다. 여기서 쾌락은 바로 자기 굴욕을 지나치게 선명하게 의식하는 데서 왔다. 이미 스스로 마지막 벽에 다다랐다고 느끼는 데서. 이건 고약하지만 달리 될 수도 없다는 데서. 이제 출구가 없으며 절대 다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데서. 설령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뀔 시간과 믿음이 아직 남아 있다 해도 틀림없이 스스로 바뀌고 싶어 하지 않으리라는 데서. 그리고 바뀌고 싶어 한다 해도 그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는 데서. 실은 어쩌면 바뀔 곳조차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결국의 결론은, 이 모든 것이 강화된 의식의 정상적이고 근본적인 법칙에 따라, 그리고 그 법칙에서 곧바로 흘러나오는 관성에 따라 일어나며, 따라서 여기서는 바뀌기는커녕 그냥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강화된 의식의 결과로 이렇게 된다. 비열한 놈인 게 옳다, 하고. 마치 비열한 놈이 자기가 정말로 비열한 놈이라는 걸 이미 스스로 느끼고 있다면 그게 그놈에게 위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그만하자……. 에이, 늘어놓기는 했는데 무엇을 설명했나?…… 여기서 쾌락은 무엇으로 설명되는가? 하지만 나는 설명하겠다! 기어이 끝까지 해내겠다! 그래서 펜을 든 것이니까…….

이를테면 나는 지독하게 자존심이 세다. 나는 꼽추나 난쟁이처럼 의심이 많고 잘 삐친다. 그런데 정말이지 나에게는 이런 순간들도 있었다. 누가 내 뺨을 때렸다면, 어쩌면 나는 그것조차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다. 틀림없이 나는 거기서도 나름의 쾌락을 찾아냈을 것이다. 물론 절망의 쾌락이지만, 바로 절망 속에 가장 타는 듯한 쾌락이 있는 법이다. 특히 자기 처지에 출구가 없다는 것을 아주 강하게 의식할 때는. 그런데 뺨을 맞을 때는, 그때는 자기가 얼마나 짓뭉개졌는지에 대한 의식이 그대로 짓눌러 온다. 무엇보다, 아무리 따져 봐도 결국 언제나 모든 일에서 내가 먼저 잘못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억울한 것은, 잘못도 없이 잘못한 사람이 된다는 것, 이를테면 자연법칙에 따라서. 첫째로 내가 잘못한 까닭은, 내가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보다 똑똑하기 때문이다. (나는 늘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보다 내가 똑똑하다고 여겼고,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따금 그것 때문에 양심이 찔리기까지 했다. 적어도 나는 평생 어쩐지 옆을 보았고, 한 번도 사람들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잘못한 까닭은, 설령 내게 너그러움이 있다 해도 그것이 전혀 쓸모없다는 의식 때문에 나만 더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내 너그러움으로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용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를 모욕한 자는 어쩌면 자연법칙에 따라 나를 때렸을지 모르는데, 자연법칙은 용서할 수가 없으니까. 잊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연법칙이라 해도 억울한 건 억울하니까. 마지막으로, 설령 내가 전혀 너그럽지 않기를 바라고 오히려 나를 모욕한 자에게 복수하고 싶어 한다 해도, 나는 누구에게도 무엇 하나 복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 수 있다 해도 틀림없이 무엇 하나 할 결심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왜 결심하지 못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따로 몇 마디 하고 싶다.

1부 3장

자기를 위해 복수할 줄 알고, 대체로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은, 이를테면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이를테면 복수심에 휩싸이면, 그동안 그들의 존재 전체에 그 감정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 양반은 미친 황소처럼 뿔을 아래로 숙이고 곧장 목표를 향해 돌진하며, 벽이나 되어야 그를 멈춰 세운다. (말이 나온 김에. 벽 앞에서 그런 양반들, 곧 직선적인 사람들과 활동가들은 진심으로 손을 든다. 그들에게 벽은, 이를테면 생각하는 인간, 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 같은 인간에게처럼 핑계가 아니다. 가던 길에서 돌아설 구실, 우리 같은 족속은 대개 스스로도 믿지 않지만 언제나 무척 반기는 그런 구실이 아니다. 아니, 그들은 온 진심으로 손을 든다. 벽은 그들에게 무언가 마음을 가라앉혀 주고, 도덕적으로 해결해 주고, 결정적인, 어쩌면 무언가 신비롭기까지 한 것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벽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그런데요, 바로 이런 직선적인 인간을 나는 진짜 인간,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여긴다. 다정한 어머니인 자연이 친절하게 그를 땅 위에 낳으면서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런 인간. 나는 그런 인간을 쓸개즙이 끓을 만큼 부러워한다. 그는 어리석다. 그 점에서 나는 여러분과 다투지 않겠다. 하지만 어쩌면 정상적인 인간은 어리석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여러분이 어떻게 아는가? 어쩌면 그건 아주 아름답기까지 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른바 고약한 의심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이를테면 정상적인 인간의 반대, 곧 강하게 의식하는 인간, 물론 자연의 품에서가 아니라 증류기에서 나온 인간을 데려다 놓으면(이건 벌써 거의 신비주의지요, 여러분. 하지만 나는 이것도 의심한다), 이 증류기 인간은 이따금 자기 반대편 앞에서 어찌나 손을 드는지, 그 모든 강화된 의식을 가지고서 자기 자신을 성실하게도 인간이 아니라 생쥐로 여긴다. 강하게 의식하는 생쥐라 하더라도 어쨌든 생쥐다. 그런데 저쪽은 인간이고, 따라서……, 등등.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스스로, 바로 스스로 자기를 생쥐로 여긴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그러라고 청하지 않았는데. 이건 중요한 점이다. 그러면 이제 이 생쥐가 행동하는 모습을 보자. 이를테면 이 생쥐도 모욕을 당했다고 하자(생쥐는 거의 언제나 모욕을 당한다). 그리고 역시 복수하고 싶어 한다. 생쥐 안에는 어쩌면 「자연과 진리의 인간(l'homme de la nature et de la vérité)」보다도 더 많은 원한이 쌓일지 모른다. 모욕한 자에게 똑같은 악으로 갚아 주고 싶은 추잡하고 비천한 작은 욕망이 생쥐 안에서는 어쩌면 자연과 진리의 인간 안에서보다 더 추잡하게 긁어 댈지 모른다. 자연과 진리의 인간은 타고난 어리석음 덕에 자기 복수를 그저 정의라고 여기지만, 생쥐는 강화된 의식 때문에 여기서 정의를 부정하니까. 마침내 일 자체에, 복수라는 행위 자체에 이른다. 불행한 생쥐는 처음의 추잡함 하나 말고도 벌써 자기 둘레에 물음과 의심의 모양으로 다른 추잡함을 잔뜩 쌓아 올렸다. 물음 하나에 풀리지 않은 물음을 잔뜩 끌어다 붙여서, 저도 모르게 제 둘레에 무언가 숙명적인 뒤범벅이, 무언가 악취 나는 진창이 모여든다. 제 의심과 동요, 그리고 마침내 재판관이나 독재자처럼 엄숙하게 둘러서서 건강한 목청을 다해 생쥐를 비웃는 직선적인 활동가들이 퍼붓는 침으로 이루어진 진창이. 물론 생쥐에게 남은 건 앞발로 모든 걸 휘휘 내젓고, 스스로도 믿지 않는 짐짓 꾸민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부끄럽게 제 틈새로 스르르 들어가 버리는 것뿐이다. 거기, 자기의 역겹고 악취 나는 지하에서, 모욕당하고 얻어맞고 조롱당한 우리 생쥐는 곧바로 차갑고 독하고, 무엇보다 영원한 원한 속으로 가라앉는다. 마흔 해 내리 자기가 당한 모욕을 가장 부끄러운 마지막 세부까지 되새길 것이고, 그때마다 스스로 더 부끄러운 세부를 덧붙이며, 자기 공상으로 심술궂게 자기를 약 올리고 자극할 것이다. 자기 공상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겠지만, 그래도 모든 걸 되새기고, 모든 걸 되짚고,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는 핑계로 있지도 않은 일을 자기에 대해 지어낼 것이며,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복수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든 찔끔찔끔, 자잘하게, 난로 뒤에서, 익명으로. 복수할 자기 권리도, 복수의 성공도 믿지 않으면서, 그리고 복수하려는 온갖 시도로 자기가 복수하려는 상대보다 백 배는 더 괴로워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면서. 상대는 아마 가려워하지도 않을 텐데. 임종의 자리에서도 또다시 모든 걸 되새길 것이다. 그동안 쌓인 이자까지 쳐서, 그리고……. 그런데 바로 이 차갑고 역겨운 반쯤의 절망과 반쯤의 믿음 속에, 슬픔 때문에 스스로를 산 채로 의식적으로 지하에 마흔 해 동안 파묻는 일 속에, 애써 만들어 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의심스러운 자기 처지의 출구 없음 속에, 안으로 파고든 채워지지 않은 욕망들의 그 모든 독 속에, 망설임과, 영원히 내린 결정과, 일 분 뒤 다시 찾아오는 뉘우침의 그 모든 열병 속에, 바로 내가 말한 그 이상한 쾌락의 즙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나 미묘하고, 이따금 의식에 잡히지 않는지, 조금만 편협한 사람이나 그냥 신경이 튼튼한 사람조차 그 안에서 단 하나의 특징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한 번도 뺨을 맞아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겠지.」 여러분은 히죽거리며 이렇게 덧붙이실 거다. 그렇게 해서 내가 살면서 어쩌면 뺨을 맞아 본 적이 있으며 그래서 전문가처럼 말한다고 정중하게 넌지시 비추실 거다. 장담하건대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신다. 하지만 안심하시라, 여러분. 나는 뺨을 맞은 적이 없다. 여러분이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완전히 아무래도 좋지만. 어쩌면 나는 살면서 남의 뺨을 너무 적게 때린 걸 스스로 아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하자. 여러분에게 몹시 흥미로운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한마디도 않겠다.

어떤 쾌락의 섬세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경 튼튼한 사람들 이야기를 차분히 이어 가겠다. 이 양반들은 어떤 경우에는, 이를테면 황소처럼 목청껏 울부짖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더없는 명예가 된다고 치더라도, 이미 말했듯이 불가능 앞에서는 곧바로 굴복한다. 불가능이란 곧 돌벽인가? 무슨 돌벽? 물론 자연법칙, 자연과학의 결론, 수학이다. 이를테면 네가 원숭이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누가 증명해 주면, 얼굴을 찌푸릴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실은 네 기름 한 방울이 너 같은 인간 십만 명보다 더 소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른바 모든 미덕과 의무와 그 밖의 헛소리와 편견이 결국 이 결론 속에서 풀려 버린다는 것을 누가 증명해 주면, 그대로 받아들여라. 어쩔 수 없다. 둘 곱하기 둘은 수학이니까. 한번 반박해 보시라.

「원 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소리칠 것이다. 「반항할 수는 없소. 이건 둘 곱하기 둘은 넷이오! 자연은 당신에게 묻지 않소. 자연은 당신 바람에도, 당신이 자연법칙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아무 상관이 없소. 당신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따라서 그 모든 결과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소. 벽은 곧 벽이오……, 등등, 등등.」 맙소사, 내가 어째서인지 이 법칙과 둘 곱하기 둘은 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연법칙과 산수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정말로 뚫을 힘이 없다면 나는 이마로 그런 벽을 뚫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 앞에 돌벽이 있고 내게 힘이 모자랐다는 것만으로 벽과 화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마치 그런 돌벽이 정말로 안식이며, 오직 둘 곱하기 둘은 넷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말로 세상과의 화해의 말이라도 품고 있다는 듯이. 오, 부조리 중의 부조리여!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모든 불가능과 돌벽을 의식하는 것이 훨씬 낫다. 화해하는 것이 역겹다면 그 불가능과 돌벽 가운데 어느 하나와도 화해하지 않는 것. 가장 피할 수 없는 논리적 조합을 거쳐, 돌벽에 대해서조차 무언가 제 잘못이 있는 것 같다는 영원한 주제에 대해 가장 역겨운 결론에 이르는 것. 또다시 전혀 제 잘못이 아니라는 게 뻔히 분명한데도. 그리고 그 결과 말없이 무력하게 이를 갈면서 관성 속에 음탕하게 얼어붙는 것. 알고 보니 화낼 상대조차 없다는 것, 대상이 찾아지지 않으며 어쩌면 영영 찾아지지 않으리라는 것, 여기엔 바꿔치기, 속임수, 사기가 있다는 것, 여기엔 그냥 뒤범벅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꿈꾸면서. 무엇인지도 모르고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모름과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래도 아프다. 그리고 모르는 게 많을수록 더 아프다!

1부 4장

「하하하! 그러면 당신은 치통에서도 쾌락을 찾아내겠구먼!」 여러분은 웃으며 외치실 거다.

「그게 어때서? 치통에도 쾌락이 있소.」 나는 대답하겠다. 「나는 꼬박 한 달 동안 이가 아팠소. 그러니 있다는 걸 알지.」 여기서는 물론 말없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신음을 한다. 하지만 그건 솔직한 신음이 아니라 심술이 섞인 신음이며, 바로 그 심술에 모든 요점이 있다. 바로 이 신음 속에 괴로워하는 자의 쾌락이 드러난다. 거기서 쾌락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신음하지도 않을 것이다. 좋은 예지요, 여러분. 이걸 풀어 보겠다. 이 신음 속에는 첫째로, 우리 의식에 굴욕적인, 여러분 통증의 모든 무목적성이 드러난다. 여러분은 물론 코웃음을 치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런데 자연 쪽은 괴로워하지 않는 자연의 모든 합법칙성이. 적은 찾아지지 않는데 통증은 있다는 의식이 드러난다. 여러분이 온갖 바겐하임 치과의사들을 다 동원해도 완전히 제 이빨의 노예라는 의식이. 누군가 원하면 이가 아프지 않게 되고, 원하지 않으면 석 달은 더 아플 것이라는 의식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래도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고 여전히 항의한다면,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거나 주먹으로 벽을 더 아프게 치는 것뿐, 그 밖에는 단연코 아무것도 없다는 의식이. 그런데요, 바로 이 피 흘리는 모욕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이 조롱에서 마침내 쾌락이 시작되어, 이따금 가장 높은 음탕함에까지 이른다. 여러분께 부탁하건대, 언젠가 이가 아픈 19세기 교양인의 신음에 귀를 기울여 보시라. 앓은 지 이틀째나 사흘째쯤, 그가 이미 첫날처럼 신음하지 않을 때, 곧 그저 이가 아파서 신음하는 게 아닐 때. 어떤 거친 농사꾼처럼이 아니라, 요즘 말로 「흙과 민중의 근본에서 떨어져 나간」, 개화와 유럽 문명에 물든 인간처럼 신음할 때. 그의 신음은 무언가 고약하고 비열하게 심술궂어지며, 낮이고 밤이고 계속된다. 그리고 그는 신음이 자기에게 아무 이득도 주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자기가 공연히 자기와 남들을 지치게 하고 짜증 나게 할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가 애써 연기하는 청중도, 그의 온 가족도 이미 역겨워하며 그의 신음을 듣고 있고, 한 푼어치도 그를 믿지 않으며, 그가 좀 더 다르게, 더 간단하게, 꾸밈음도 비틀기도 없이 신음할 수 있는데도 그저 심술이 나서, 악의로 장난을 친다는 걸 속으로 알고 있다는 것도 안다. 자, 바로 이 모든 의식과 수치 속에 음탕함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들을 성가시게 하고, 당신들 가슴을 찢고, 집안 누구도 못 자게 하고 있다는 거지. 그럼 잠들지 말라지. 당신들도 매 순간 내 이가 아프다는 걸 느끼라지. 나는 이제 당신들에게 예전에 보이고 싶었던 영웅이 아니라 그냥 추잡한 작자, 불량배요. 그래, 그러라지! 당신들이 나를 간파해서 아주 기쁘오. 내 비열한 신음을 듣기가 고약하오? 그럼 고약하라지. 지금 더 고약한 꾸밈음을 넣어 줄 테니…….」 이래도 모르시겠는가, 여러분? 아니, 보아하니 이 음탕함의 모든 굴곡을 이해하려면 깊이 발달하고 깊이 의식해야 하는 모양이다! 웃으시는가? 아주 기쁘군요. 여러분, 내 농담은 물론 품위 없고, 고르지 않고, 두서없으며, 자기 불신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하는 인간이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존경할 수 있겠는가?

1부 5장

그래, 자기 굴욕의 감정 자체에서조차 쾌락을 찾아내려 든 인간이 조금이라도 자기를 존경할 수 있겠는가, 정말 그럴 수 있겠는가? 나는 무슨 들척지근한 뉘우침 때문에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대체로 나는 「아빠,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하는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쩌면 너무 잘할 줄 알아서였다. 그것도 어떻게?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꿈에도 잘못한 게 없는 경우에 걸려들곤 했다. 그게 가장 추잡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또다시 마음이 뭉클해지고,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고, 물론 나 자신을 속였다. 전혀 연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때 마음이 어쩐지 고약하게 굴었다……. 여기서는 자연법칙조차 탓할 수 없었다. 자연법칙이 평생 줄곧, 무엇보다 나를 모욕했지만. 이 모든 걸 떠올리는 건 역겹고, 그때도 역겨웠다. 그러고 나서 일 분쯤 지나면 나는 벌써 심술궂게 헤아려 보곤 했다. 이 모든 게 거짓말, 거짓말, 역겹게 꾸민 거짓말이라는 것을. 곧 이 모든 뉘우침, 이 모든 뭉클함, 이 모든 거듭나겠다는 맹세가. 그러면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나 자신을 비틀고 괴롭혔을까? 대답: 팔짱 끼고 앉아 있기가 너무 지루해서. 그래서 괴상한 짓에 나섰던 것이다. 정말 그렇다. 여러분 자신을 더 잘 살펴보시라, 여러분. 그러면 이게 그렇다는 걸 아실 거다. 나는 어떻게든 좀 살아 보려고 스스로 모험을 지어내고 삶을 꾸며 냈다. 몇 번이나 이런 일이 있었던가. 이를테면 그냥, 아무 까닭 없이, 일부러 모욕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아무 까닭 없이 모욕을 느꼈다는 걸, 스스로 꾸며 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자기를 몰아가다 보면 마침내 정말로 모욕을 느끼게 된다. 나는 평생 어쩐지 그런 짓을 저지르고 싶어서, 마침내는 나 자신도 어쩌지 못하게 되었다. 한번은 억지로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 두 번이나. 괴로웠다니까요, 여러분, 장담한다. 마음 밑바닥에서는 괴롭다는 게 믿어지지 않고 비웃음이 꿈틀대는데도, 그래도 괴로워한다. 그것도 진짜로, 제대로. 질투하고, 제정신을 잃고……. 이 모두가 지루해서다, 여러분, 모두 지루해서. 관성이 짓눌러 버렸다. 의식의 곧고 합법적이며 직접적인 열매는 관성, 곧 의식적으로 팔짱 끼고 앉아 있기다. 나는 이미 위에서 이걸 말했다. 되풀이한다, 힘주어 되풀이한다. 모든 직선적인 인간과 활동가들이 활동적인 것은 그들이 둔하고 편협하기 때문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이렇게. 그들은 편협한 탓에 가장 가깝고 부차적인 원인을 처음의 원인으로 여기며, 그래서 남들보다 더 빨리, 더 쉽게 자기 일에 흔들리지 않는 근거를 찾았다고 확신하고는 마음을 놓는다. 그런데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행동을 시작하려면 미리 완전히 마음을 놓고, 더 이상 아무 의심도 남지 않아야 하니까. 그러면 이를테면 나는 어떻게 마음을 놓을까? 내가 기댈 처음의 원인은 어디 있고, 근거는 어디 있는가? 그걸 어디서 가져온단 말인가? 나는 생각하는 연습을 한다. 따라서 나에게는 모든 처음의 원인이 곧바로 더 처음의 다른 원인을 끌고 오고, 그렇게 끝없이 이어진다. 바로 이것이 모든 의식과 사유의 본질이다. 그러니 이것도 또 자연법칙이다. 그러면 결국 결과는? 똑같다. 기억해 보시라. 아까 나는 복수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은 아마 귀담아듣지 않으셨겠지.) 인간은 거기서 정의를 찾기 때문에 복수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는 처음의 원인을 찾은 것이다. 근거, 곧 정의를. 그러니 그는 사방에서 마음을 놓았고, 따라서 자기가 정직하고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확신하며 차분하게, 성공적으로 복수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정의를 보지 못하고, 아무 미덕도 찾지 못한다. 따라서 내가 복수한다면 그건 오직 심술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심술은 모든 것을, 내 모든 의심을 이길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바로 그것이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의 원인 대신 완벽하게 제 몫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게 심술조차 없다면 어쩌란 말인가(아까 나는 바로 이것부터 시작했다). 내 원한은 또다시 이 저주받을 의식의 법칙 때문에 화학적 분해를 겪는다. 보면 대상은 날아가 버리고, 이유는 증발해 버리고, 장본인은 찾아지지 않고, 모욕은 모욕이 아니라 운명이 되어, 아무도 잘못이 없는 치통 같은 것이 되고, 따라서 또다시 똑같은 출구만 남는다. 곧 벽을 더 아프게 치는 것. 그러면 처음의 원인을 찾지 못했으니 손을 내젓고 만다. 그렇다면 한번 제 감정에 맹목적으로, 따지지 않고, 처음의 원인 없이, 그동안만이라도 의식을 쫓아 버리고 빠져 보라. 팔짱 끼고 앉아 있지 않으려고 미워하거나 사랑해 보라. 모레, 그게 가장 늦은 기한이다, 알면서 자기 자신을 속였다고 자기를 경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결과: 비눗방울과 관성. 오 여러분, 어쩌면 내가 나를 똑똑한 인간이라고 여기는 건 오직 평생 무엇 하나 시작하지도 끝내지도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 그래, 나는 수다쟁이다. 우리 모두처럼 해롭지 않고 성가신 수다쟁이다. 하지만 모든 똑똑한 인간의 곧고 유일한 사명이 수다, 곧 빈 그릇에서 빈 그릇으로 일부러 쏟아붓는 일이라면 어쩌란 말인가.

1부 6장

오, 내가 오직 게을러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라면. 맙소사, 그러면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존경할까. 바로 적어도 게으름만은 내 안에 지닐 수 있다는 이유로 존경할 것이다. 적어도 한 가지 성질만은 내 안에 무언가 긍정적인 것으로, 나 스스로도 확신할 수 있는 것으로 있을 테니까. 물음: 너는 누구냐? 대답: 게으름뱅이. 자기에 대해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그러니까 긍정적으로 규정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나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게으름뱅이!」 이건 칭호이고 사명이다. 이건 경력이올시다. 농담 마시라, 정말 그렇다. 그러면 나는 당당히 가장 으뜸가는 클럽의 회원이 되어, 쉬지 않고 나 자신을 존경하는 일만 할 것이다. 나는 평생 라피트 포도주를 볼 줄 안다는 걸 자랑으로 삼은 양반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자기의 긍정적인 장점으로 여겼고 한 번도 자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평온하다 못해 의기양양한 양심으로 죽었고, 완전히 옳았다. 그러면 나는 그때 이런 경력을 골랐을 것이다. 나는 게으름뱅이이자 먹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게으름뱅이가 아니라, 이를테면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공감하는 게으름뱅이. 어떠신가? 오래전부터 이런 게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 마흔 살이 된 내 뒷덜미를 꽤나 짓눌렀다. 하지만 그건 내가 마흔이 되어서의 일이고, 그때는, 오, 그때는 달랐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그에 걸맞은 활동도 찾아냈을 것이다. 곧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의 건강을 위해 마시는 일. 나는 온갖 기회를 트집 잡아, 먼저 내 잔에 눈물을 떨구고, 그런 다음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위해 그 잔을 비웠을 것이다. 그때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더없이 추잡하고 틀림없는 쓰레기 속에서도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찾아냈을 것이다. 나는 젖은 스펀지처럼 눈물이 헤퍼졌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 화가가 게의 그림을 그렸다. 곧바로 나는 게의 그림을 그린 화가의 건강을 위해 마신다.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사랑하니까. 한 작가가 「누구든 좋을 대로」를 썼다. 곧바로 나는 「누구든」의 건강을 위해 마신다.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사랑하니까. 나는 이것 때문에 나를 존경하라고 요구할 것이고, 나를 존경하지 않는 자는 쫓아다니며 괴롭힐 것이다. 평온하게 살고, 엄숙하게 죽는다. 이건 멋지다, 정말 멋지다! 그리고 그때 나는 배를 어찌나 불리고, 턱을 어찌나 세 겹으로 쌓아 올리고, 코를 어찌나 백단향처럼 붉게 가꾸었을지, 마주치는 사람마다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거야말로 플러스로군! 이거야말로 진짜 긍정적인 것이야!」 그런데 여러분 좋으실 대로 생각하시라, 우리의 이 부정의 시대에 이런 평을 듣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다, 여러분.

1부 7장

하지만 이 모든 건 황금빛 꿈이다. 오, 말해 달라. 인간이 추잡한 짓을 하는 건 오직 자기의 참된 이익을 모르기 때문이며, 그를 깨우쳐 그의 참되고 정상적인 이익에 눈을 뜨게 해 주면 인간은 곧바로 추잡한 짓을 그만두고 곧바로 착하고 고결해질 것이라고, 깨우쳐져서 자기의 참된 이득을 이해하게 되면 바로 선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득을 볼 것이고, 알다시피 어떤 인간도 알면서 자기 이득에 거슬러 행동할 수는 없으니, 따라서 이를테면 필연적으로 선을 행하게 될 것이라고, 누가 처음 그렇게 선언했는가, 누가 처음 그렇게 공표했는가? 오, 갓난아기여! 오, 순수하고 죄 없는 아이여! 첫째로, 이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오직 자기 자신의 이득 하나만으로 행동한 적이 대체 언제 있었단 말인가? 사람들이 알면서, 곧 자기의 참된 이득을 완전히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뒷전으로 밀어 두고 다른 길로, 모험으로, 요행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수백만의 사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도, 무엇도 그러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 마치 오직 가리켜 준 길이 싫다는 듯이, 고집스럽게 제멋대로 다른 길을, 힘들고 터무니없는 길을 거의 어둠 속에서 더듬어 찾으며 뚫고 나갔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정말로 이 고집과 제멋대로가 어떤 이득보다도 즐거웠던 것이다……. 이득! 이득이란 무엇인가? 게다가 인간의 이득이 정확히 무엇에 있는지 여러분은 완전히 정확하게 규정하실 수 있는가? 그런데 만약 인간의 이득이 때로는 바로, 어떤 경우에는 자기에게 이로운 게 아니라 해로운 것을 바라는 데 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있어야만 한다면? 그렇다면,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기만 해도, 규칙 전체가 먼지가 되어 버린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런 경우가 있는가? 웃으시는군. 웃으시라, 여러분. 하지만 대답만은 해 주시라. 인간의 이득은 완전히 정확하게 셈이 되었는가? 어떤 분류에도 들어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들어갈 수도 없는 이득은 없는가? 여러분, 내가 아는 한 여러분은 인간 이득의 명부 전체를 통계 수치와 과학적·경제학적 공식에서 평균을 내어 뽑았다. 여러분의 이득이란 복지, 부, 자유, 평안, 그리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이다. 그러니 이를테면 이 명부 전체에 대놓고, 알면서 거스르는 인간은 여러분이 보기에, 아니 물론 내가 보기에도, 반계몽주의자이거나 완전히 미친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놀라운 건 이것이다. 어째서 이 모든 통계학자, 현자, 인류의 애호가들은 인간의 이득을 셈할 때 늘 한 가지 이득을 빠뜨리는가? 셈에 넣어야 할 모양으로 셈에 넣지조차 않는데, 셈 전체가 바로 거기에 달려 있다. 그리 큰일은 아닐 것이다. 그 이득을 가져다 목록에 적어 넣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바로 그게 재앙이다. 이 까다로운 이득은 어떤 분류에도 들어가지 않고, 어떤 목록에도 담기지 않는다. 이를테면 내게 친구가 하나 있는데……. 에이, 여러분! 그는 여러분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가 누구의 친구가 아니란 말인가! 일을 앞두고 이 양반은 곧바로 이성과 진리의 법칙에 따라 자기가 정확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웅변적이고 명료하게 여러분에게 설명할 것이다. 그뿐인가. 흥분하고 열정적으로 참되고 정상적인 인간의 이익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자기 이득도, 미덕의 참된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바보들을 조롱하며 나무랄 것이다. 그러고는 정확히 십오 분 뒤, 아무 갑작스러운 바깥 계기도 없이, 바로 그의 모든 이익보다 강한 무언가 내면적인 것 때문에, 완전히 다른 재주를 부릴 것이다. 곧 자기가 말한 것에 대놓고 거스를 것이다. 이성의 법칙에도, 자기 이득에도, 한마디로 모든 것에……. 미리 말해 두건대, 내 친구는 집합적인 인물이라서 그 사람 하나만 탓하기는 어쩐지 어렵다. 바로 그거다, 여러분. 정말로 거의 모든 인간에게 자기의 가장 좋은 이득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논리를 어기지 않으려고 말하자면) 가장 이로운 이득이 하나 있는 것은 아닐까? (방금 이야기한, 바로 빠뜨려지는 그 이득.) 다른 모든 이득보다 더 중요하고 더 이로운 이득, 필요하다면 인간이 모든 법칙에 거슬러, 곧 이성에도, 명예에도, 평안에도, 복지에도, 한마디로 이 모든 아름답고 유익한 것에 거슬러, 오직 자기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이 처음의, 가장 이로운 이득에 이르기 위해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이득이.

「그러니까 결국 역시 이득이로군.」 여러분이 내 말을 끊으신다. 잠깐만요, 아직 설명할 게 있다. 말장난이 문제가 아니라, 이 이득은 바로 우리의 모든 분류를 무너뜨리고, 인류의 애호가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짜 놓은 모든 체계를 늘 깨뜨린다는 점에서 놀랍다는 게 문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이 이득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나는 나 자신을 개인적으로 망신시키고 싶다. 그래서 뻔뻔하게 선언한다. 인류에게 그 참되고 정상적인 이익을 설명해 주어, 인류가 필연적으로 그 이익에 이르려고 애쓰면서 곧바로 착하고 고결해지게 하려는 이 모든 아름다운 체계, 이 모든 이론은 내가 보기에 아직은 한낱 말놀음일 뿐이라고! 그렇고말고요, 말놀음! 인류 전체를 그 자신의 이득의 체계로 새롭게 하겠다는 이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거의 똑같다……. 이를테면 버클을 따라, 문명이 인간을 부드럽게 만들고, 따라서 덜 피에 굶주리게 하고 전쟁을 덜 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과. 논리로는 그렇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체계와 추상적 결론에 어찌나 빠져 있는지, 자기 논리를 정당화하려고 일부러 진실을 비틀고,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예를 드는 것은 너무나 선명한 예이기 때문이다. 둘러보시라. 피가 강물처럼 흐른다. 그것도 샴페인처럼 흥겹게. 여기 버클도 살았던 우리의 19세기 전체가 있다. 여기 나폴레옹이 있다. 위대한 나폴레옹도, 지금의 나폴레옹도. 여기 북아메리카가 있다. 영원한 연방. 여기 마지막으로 풍자화 같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있다……. 그런데 문명이 우리 안의 무엇을 부드럽게 한단 말인가? 문명은 인간 안에 감각의 다면성만을 길러 낼 뿐, 그 밖에는 단연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이 다면성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어쩌면 피 속에서 쾌락을 찾아내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인간에게 이미 그런 일이 있었다. 가장 세련된 학살자들이 거의 모두 가장 문명화된 양반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채셨는가? 온갖 아틸라나 스텐카 라진 따위는 이따금 그들의 발끝에도 못 미칠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이 아틸라나 스텐카 라진만큼 선명하게 눈에 띄지 않는다면, 그건 바로 그들이 너무 자주 마주치고, 너무 흔해서 눈에 익어 버렸기 때문이다. 적어도 문명 덕에 인간은 더 피에 굶주리게 되지는 않았다 해도, 틀림없이 전보다 더 나쁘고 더 추잡하게 피에 굶주리게 되었다. 전에는 인간은 피를 흘리는 데서 정의를 보았고, 평온한 양심으로 없애야 할 자를 없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피 흘리는 것을 추잡하다고 여기면서도 그 추잡한 짓을 하고 있다. 그것도 전보다 더 많이. 어느 쪽이 더 나쁜가? 스스로 판단하시라. 클레오파트라는(로마사에서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여자 노예들의 가슴에 금 핀을 꽂기를 좋아했고, 그들의 비명과 몸부림에서 쾌락을 찾았다고 한다. 여러분은 그건 상대적으로 말해 야만의 시대의 일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도 야만의 시대라고, 왜냐하면(역시 상대적으로 말해) 지금도 핀이 꽂히니까. 지금도 인간은 이따금 야만의 시대보다 더 똑똑히 보게 되었지만, 이성과 과학이 가리키는 대로 행동하는 데는 아직 한참 익숙해지지 못했다고. 그래도 여러분은 인간이 반드시 익숙해지리라고 굳게 믿는다. 몇몇 낡고 나쁜 버릇이 완전히 사라지고, 건전한 상식과 과학이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새로 가르쳐 정상적으로 이끌 때가 오면. 여러분은 그때가 되면 인간 스스로도 제 뜻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될 것이고, 이를테면 저도 모르게 자기 의지를 자기의 정상적인 이익과 어긋나게 하고 싶어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뿐인가. 그때가 되면, 여러분 말로는, 과학 자체가 인간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이건 내가 보기에 이미 사치지만). 실은 인간에게 의지도 변덕도 없으며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고, 인간 자신은 피아노 건반이나 오르간 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게다가 세상에는 자연법칙이라는 것이 있어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전혀 그의 바람대로가 아니라 저절로, 자연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따라서 이 자연법칙을 발견하기만 하면 인간은 더 이상 자기 행동에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사는 게 엄청나게 쉬워질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저절로 이 법칙에 따라 수학적으로, 108,000까지의 로그표처럼 계산되어 달력에 적힐 것이다. 아니면 그보다 더 좋게, 지금의 백과사전 같은 선량한 출판물들이 나와서 모든 것이 어찌나 정확히 계산되고 표시되어 있는지, 세상에 더 이상 행동도 모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건 모두 여러분이 하는 말이다, 완전히 다 갖추어진, 역시 수학적 정확성으로 계산된 새로운 경제 관계가 찾아와서, 한순간에 온갖 물음이 사라질 것이다. 바로 거기에 대한 온갖 대답이 나올 테니까. 그때 수정궁이 세워질 것이다. 그때……. 그래, 한마디로 그때 전설의 새 카간이 날아올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면 이를테면 지독하게 지루하지 않으리라고는 도저히 보장할 수 없다(이건 이제 내가 하는 말이다). 모든 게 표에 따라 계산되어 있을 텐데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 대신 모든 것이 엄청나게 합리적일 것이다. 물론 지루하면 무슨 짓인들 생각해 내지 못하겠는가! 금 핀도 지루해서 꽂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고약한 것은(이것도 또 내가 하는 말이다) 자칫하면 그때가 되면 금 핀조차 반가워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으니까. 경이로울 만큼 어리석다. 아니, 전혀 어리석지는 않지만, 그 대신 어찌나 배은망덕한지 찾아봐도 그런 존재가 또 없을 정도다. 이를테면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만약 갑자기 난데없이, 미래의 모두가 합리적인 한가운데서 어떤 신사가 천박한,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반동적이고 조롱하는 낯짝을 하고 나타나서, 허리에 손을 짚고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한다 해도. 어떻소, 여러분, 이 모든 합리성을 단번에 발로 차서 먼지로 만들어 버리면. 오직 이 모든 로그표가 지옥으로 꺼져 버리고, 우리가 다시 우리의 어리석은 의지대로 좀 살아 보자는 목적으로! 그것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억울한 것은 그가 틀림없이 추종자를 찾아낼 거라는 점이다. 인간은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게 가장 하찮은 이유 때문이다. 언급할 가치도 없을 것 같은 이유. 바로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간에, 이성과 이득이 명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좋아했다는 것. 그런데 원하는 것은 자기 이득에 거슬러서도 할 수 있고, 이따금은 단연코 그래야만 한다(이건 이제 내 생각이다). 자기 자신의, 제멋대로의 자유로운 욕망, 자기 자신의, 설령 가장 터무니없는 것이라도 변덕, 이따금 미칠 지경까지 자극된 자기 공상, 바로 이 모든 것이 그 빠뜨려진, 가장 이로운 이득이다. 어떤 분류에도 들어맞지 않고, 모든 체계와 이론이 늘 그것 때문에 지옥으로 날아가 버리는 그 이득. 그런데 이 모든 현자들은 인간에게 무슨 정상적인 욕망, 무슨 미덕스러운 욕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어디서 가져왔을까? 인간에게 반드시 합리적으로 이로운 욕망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어째서 꼭 상상했을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자주적인 욕망 하나뿐이다. 그 자주성이 무슨 대가를 치르든, 무엇으로 이어지든. 그런데 욕망이란 무엇인지 알 게 뭔가…….

1부 8장

「하하하! 원하신다면 말씀드리지만, 욕망이라는 건 실은 없소!」 여러분이 크게 웃으며 끼어드신다. 「과학은 지금까지 인간을 어찌나 속속들이 해부했는지, 이제 우리는 욕망이니 이른바 자유 의지니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이라는 걸 알고 있소.」

잠깐만요, 여러분, 나 자신도 그렇게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겁까지 났다. 방금 나는 욕망이란 무엇에 달려 있는지 알 게 뭐냐고, 그리고 그게 어쩌면 다행이라고 외치려다가 과학이 생각나서…… 주저앉았다. 그런데 여러분이 바로 그 이야기를 꺼내신 것이다. 정말이지, 만약 언젠가 정말로 우리의 모든 욕망과 변덕의 공식을 찾아낸다면, 곧 그것들이 무엇에 달려 있고, 정확히 어떤 법칙에 따라 일어나며, 정확히 어떻게 퍼지고, 이러저러한 경우에 어디로 향하는지 등등, 곧 진짜 수학 공식을 찾아낸다면, 그때 인간은 어쩌면 곧바로 원하기를 그만둘 것이다. 아니, 틀림없이 그만둘 것이다. 표에 따라 원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뿐인가. 인간은 곧바로 인간에서 오르간 핀이나 그 비슷한 것으로 바뀔 것이다. 바람도, 의지도, 욕망도 없는 인간이 오르간 굴대의 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확률을 셈해 보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없을까?

「흠…….」 여러분은 결론을 내리신다. 「우리의 욕망은 대부분 우리 이득을 잘못 보기 때문에 잘못되는 거요. 우리가 이따금 순전한 헛소리를 원하는 것도, 우리가 어리석어서 그 헛소리 속에서 미리 짐작한 어떤 이득에 이르는 가장 쉬운 길을 보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 모든 게 설명되고 종이 위에서 계산되면(그건 아주 가능한 일이오. 인간이 어떤 자연법칙은 영영 알지 못하리라고 미리 믿는 건 비열하고 무의미하니까), 그때는 물론 이른바 바람이라는 것도 없을 거요. 욕망이 언젠가 이성과 완전히 짝을 이룬다면, 그때 우리는 원하는 게 아니라 따지게 될 거요. 이를테면 이성을 지닌 채로 무의미한 것을 원하고, 그렇게 해서 알면서 이성에 거슬러 자기에게 해로운 것을 바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모든 욕망과 판단은 정말로 계산될 수 있으니, 언젠가는 이른바 우리의 자유 의지의 법칙도 발견될 테니까, 농담이 아니라 표 같은 것이 만들어질 수도 있소. 그러면 우리는 정말로 그 표에 따라 원하게 될 거요. 이를테면 언젠가 누가 내게 계산하고 증명해서, 내가 아무개에게 주먹 욕을 한 건 바로 그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반드시 바로 이 손가락으로 해야만 했다고 한다면, 그때 내게 자유로운 게 뭐가 남겠소, 특히 내가 학자이고 어디서 학업 과정을 마쳤다면? 그때 나는 내 삶 전체를 서른 해 앞까지 미리 계산할 수 있을 거요. 한마디로 이런 게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거요. 어쨌든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 게다가 우리는 대체로 지치지 말고 스스로에게 되풀이해야 하오. 반드시 이러저러한 순간에, 이러저러한 사정에서 자연은 우리에게 묻지 않는다고. 자연은 우리가 공상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표와 달력을 향해, 그리고…… 뭐 증류기를 향해서라도 나아간다면, 어쩌겠소, 증류기도 받아들여야지! 안 그러면 증류기가 당신 없이 저절로 받아들여질 테니…….」

그렇고말고요. 그런데 바로 여기가 내게는 걸리는 대목이다! 여러분, 철학을 늘어놓아서 미안하다. 이게 다 지하의 마흔 해 때문이다! 좀 공상을 늘어놓게 해 주시라. 보시다시피요, 이성은, 여러분, 좋은 것이다. 그건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성은 이성일 뿐이고 인간의 이성적 능력만을 만족시킨다. 그런데 욕망은 삶 전체의, 곧 인간의 삶 전체의 드러남이다. 이성과 함께, 그리고 온갖 긁적임과 함께. 그리고 이 드러남 속에서 우리 삶은 자주 시시한 것이 되지만, 그래도 삶이지 한낱 제곱근 풀기가 아니다. 이를테면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오직 내 이성적 능력 하나만을, 곧 내가 살 수 있는 능력 전체의 이십분의 일쯤만을 만족시키려고 사는 게 아니라, 내 살 수 있는 능력 전체를 만족시키려고 살고 싶다. 이성이 무엇을 아는가? 이성은 알아낸 것만을 안다(다른 것은 어쩌면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이건 위안은 아니지만 왜 말하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제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통째로 움직이며, 거짓말을 할지언정 산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나를 안쓰럽게 보고 계신 게 아닌가 싶다. 여러분은 내게 되풀이하신다. 깨우치고 발달한 인간, 한마디로 미래의 인간 같은 이는 알면서 자기에게 이롭지 않은 무언가를 원할 수 없다고, 그건 수학이라고. 완전히 동의한다, 정말로 수학이다. 하지만 백 번째로 되풀이하건대, 딱 한 경우, 오직 한 경우가 있다. 인간이 일부러, 의식적으로 자기에게 해롭고 어리석은 것, 더없이 어리석은 것조차 바랄 수 있는 경우가. 바로 더없이 어리석은 것조차 자기에게 바랄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 그리고 오직 똑똑한 것만을 자기에게 바라야 한다는 의무에 묶이지 않기 위해서. 이 더없이 어리석은 것, 이 자기 변덕이야말로, 여러분, 정말로 우리 같은 족속에게는 지상에 있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이로울 수 있다. 특히 어떤 경우에는. 그리고 특히, 그것이 우리에게 뻔한 해를 끼치고 이득에 대한 우리 이성의 가장 건전한 결론과 어긋나는 경우에조차 모든 이득 가운데 가장 이로울 수 있다. 어떤 경우에든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중한 것, 곧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개성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정말로 인간에게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주장한다. 욕망은 물론 원한다면 이성과 짝을 이룰 수도 있다. 특히 그걸 남용하지 않고 적당히 쓴다면. 그건 유익하고 이따금 칭찬받을 일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욕망은 아주 자주, 아니 대부분 완전히, 그리고 고집스럽게 이성과 어긋나며…… 그리고…… 그리고 이것도 유익하며 이따금 아주 칭찬받을 일이라는 걸 아시는가? 여러분, 인간이 어리석지 않다고 치자. (정말이지 인간에 대해 절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이 어리석다면 대체 누가 똑똑하겠는가,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하지만 어리석지 않다 해도 괴물처럼 배은망덕하다! 경이로울 만큼 배은망덕하다. 나는 인간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는 이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두 발로 걷는 배은망덕한 존재.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이건 아직 그의 가장 큰 결점이 아니다. 그의 가장 큰 결점은 끊임없는 행실 나쁨이다. 대홍수 때부터 인류 운명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행실 나쁨, 따라서 분별없음. 분별없음은 행실 나쁨에서만 생긴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려진 일이니까. 인류의 역사를 한번 훑어보시라. 자, 무엇이 보이는가? 장엄하다? 아마 장엄하기도 할 것이다. 로도스의 거상 하나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가! 괜히 아나옙스키 씨가 그 거상을 두고, 어떤 이는 그것이 사람 손으로 만든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연이 스스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고 증언한 게 아니다. 알록달록하다? 아마 알록달록하기도 할 것이다. 모든 세기, 모든 민족의 군인과 문관의 예복만 가려내 보더라도 얼마나 대단한가. 평상 제복까지 치면 아예 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어떤 역사가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단조롭다? 뭐, 아마 단조롭기도 할 것이다. 싸우고 또 싸운다. 지금도 싸우고, 전에도 싸웠고, 나중에도 싸웠다. 이건 너무 단조롭다는 데 동의하시라. 한마디로 세계사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가장 어지러운 상상력의 머리에 떠오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단 한 가지만 말할 수 없다. 분별 있다는 것. 첫마디에서 목이 멜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일이 매번 일어난다. 삶에는 늘 행실 바르고 분별 있는 사람들, 그런 현자와 인류 애호가들이 나타나서, 평생 되도록 행실 바르고 분별 있게 처신하는 것을, 이를테면 자기 자신으로 이웃을 비추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바로 세상에서 행실 바르고 분별 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웃에게 증명하려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알다시피 이 애호가들 가운데 많은 이가 이르든 늦든 생의 끝 무렵에 제 자신을 배반하고 무슨 일화를, 이따금 가장 꼴사나운 일화를 만들어 냈다. 이제 여러분께 묻겠다. 이렇게 이상한 성질을 타고난 존재인 인간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 지상의 온갖 복을 쏟아부어 보라. 행복 속에 머리끝까지 푹 잠기게 해서, 물 위에서처럼 행복의 수면 위로 거품만 뽀글뽀글 오르게 해 보라. 그에게 자고, 과자를 먹고, 세계사가 끊이지 않도록 애쓰는 것 말고는 더 할 일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만큼 경제적 만족을 주어 보라. 그러면 그는, 인간이란 녀석은, 거기서도, 오직 배은망덕 하나 때문에, 오직 비방 하나 때문에 추잡한 짓을 저지를 것이다. 과자까지 걸고 모험을 하며, 일부러 가장 파멸적인 헛소리, 가장 비경제적인 무의미를 바랄 것이다. 오직 이 모든 긍정적인 분별 속에 자기의 파멸적인 공상의 요소를 섞어 넣으려고. 바로 자기의 공상적인 꿈, 자기의 가장 천박한 어리석음을 붙들고 있으려 할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 확인하려고(마치 그게 그토록 꼭 필요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아직 사람이지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법칙이 손수 연주하기는 하지만, 너무 연주하다가 달력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원할 수 없게 될 지경에 이르겠다고 위협하는 그런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는 것을. 그뿐인가. 그가 정말로 피아노 건반으로 판명된다 해도, 그걸 자연과학과 수학으로 그에게 증명한다 해도, 그래도 그는 정신을 차리지 않고 일부러 거꾸로 무언가를 할 것이다. 오직 배은망덕 하나 때문에. 바로 제 고집을 부리려고. 그리고 수단이 없다면 파괴와 혼돈을 지어내고, 온갖 고통을 지어내서 기어이 제 고집을 부릴 것이다! 세상에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그리고 저주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이니까(이건 이미 그의 특권이며, 그를 다른 동물과 가장 크게 구별 짓는 것이다), 그는 어쩌면 저주 하나로 제 뜻을 이룰 것이다. 곧 자기가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걸 정말로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 혼돈도 어둠도 저주도 표에 따라 계산할 수 있으며, 미리 계산할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멈추고 이성이 제 몫을 차지할 거라고 여러분이 말씀하신다면, 그러면 인간은 그런 경우에 대비해 일부러 미쳐 버릴 것이다. 이성을 갖지 않고 제 고집을 부리려고! 나는 이걸 믿는다. 나는 이걸 책임진다. 인간의 모든 일은 정말로 인간이 매 순간 자기가 핀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걸 자기에게 증명하는 데만 있는 것 같으니까! 제 옆구리가 결리더라도 증명하고, 동굴 원시인 짓을 해서라도 증명하는 데. 그러니 이런 게 아직 없다는 것, 그리고 욕망이 아직은 무엇에 달려 있는지 알 게 뭐냐는 것을 어찌 기꺼이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내게 외치신다(아직 나에게 소리쳐 줄 가치가 있다고 여기신다면). 여기서 아무도 당신 의지를 빼앗지 않는다고. 여기서는 그저 어떻게든 당신 의지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의지로 당신의 정상적인 이익과, 자연법칙과, 산수와 맞아떨어지도록 애쓸 뿐이라고.

에이, 여러분, 일이 표와 산수에까지 이르고, 오직 둘 곱하기 둘은 넷만 통용될 때 무슨 자기 의지가 있겠는가? 둘 곱하기 둘은 내 의지 없이도 넷이 될 것이다. 그런 게 자기 의지란 말인가!

1부 9장

여러분, 나는 물론 농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서툰 농담이라는 것도 스스로 안다. 하지만 모든 걸 농담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나는 어쩌면 이를 갈며 농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분, 물음들이 나를 괴롭힌다. 그것들을 내게 풀어 달라. 이를테면 여러분은 인간을 낡은 버릇에서 떼어 내고, 과학과 건전한 상식의 요구에 맞게 그의 의지를 고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인간을 그렇게 고칠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쳐야 한다는 걸 여러분이 어떻게 아는가? 인간의 욕망이 그렇게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는 결론을 무엇에서 끌어내는가? 한마디로 그런 교정이 정말로 인간에게 이득을 가져다준다는 걸 여러분이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다 말하자면, 이성의 논거와 산수가 보장하는 참되고 정상적인 이득에 거스르지 않는 것이 정말로 인간에게 언제나 이롭고 모든 인류의 법칙이라고 여러분은 어째서 그토록 확실하게 믿는가? 그건 아직은 여러분의 가정일 뿐이다. 그게 논리의 법칙이라고 치자. 하지만 어쩌면 인류의 법칙은 전혀 아닐지도 모른다. 여러분, 어쩌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시는가? 단서를 달게 해 주시라. 동의한다. 인간은 무엇보다 창조하는 동물이며, 의식적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공학 기술에 종사하도록, 곧 영원히 쉬지 않고 어디로든 제 길을 닦도록 강요받은 동물이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그 길을 뚫도록 선고받았기 때문에 이따금 옆으로 빠지고 싶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직선적인 활동가가 대체로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그에게도 이따금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고 보니 길은 거의 언제나 어디로든 뻗어 가며, 중요한 건 길이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그저 가기만 하는 것, 그리고 행실 바른 아이가 공학 기술을 소홀히 하여, 알다시피 모든 악덕의 어머니인 파멸적인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인간은 창조하고 길을 닦는 걸 좋아한다. 그건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은 파괴와 혼돈도 열렬히 사랑하는가? 이걸 좀 말해 보시라!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따로 몇 마디 밝히고 싶다. 인간이 파괴와 혼돈을 그토록 사랑하는 것은(인간이 이따금 그걸 무척 사랑한다는 건 논쟁의 여지가 없다, 정말 그렇다), 어쩌면 스스로 본능적으로 목표에 이르러 짓고 있는 건물을 완성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여러분이 어떻게 아는가, 어쩌면 인간은 건물을 멀리서만 사랑하지 가까이서는 결코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건물을 짓는 것만 사랑하지 거기 사는 건 사랑하지 않고, 나중에 그 건물을 가축들(aux animaux domestiques), 이를테면 개미나 양 따위에게 넘겨주는지도 모른다. 개미들은 취향이 전혀 다르다. 개미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놀라운 건물이 하나 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건물, 개미집이.

존경스러운 개미들은 개미집으로 시작했고, 틀림없이 개미집으로 끝날 것이다. 이는 그들의 한결같음과 긍정성에 큰 명예가 된다. 그런데 인간은 경박하고 볼썽사나운 존재라서, 어쩌면 체스 선수처럼 목표에 이르는 과정 자체만 사랑하지 목표 자체는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장담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인류가 지향하는 지상의 목표 전체가 오직 이 이르는 과정의 끊임없음에, 달리 말해 삶 자체에 있지, 정작 목표에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목표란 물론 둘 곱하기 둘은 넷, 곧 공식일 수밖에 없는데, 여러분, 둘 곱하기 둘은 넷은 이미 삶이 아니라 죽음의 시작이다. 적어도 인간은 언제나 이 둘 곱하기 둘은 넷을 어쩐지 두려워했고, 나는 지금도 두렵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곤 이 둘 곱하기 둘은 넷을 찾는 것뿐이라고 치자. 이걸 찾으려고 대양을 건너고 목숨을 바친다. 그런데 찾아내는 것, 정말로 발견하는 것은, 맹세코 어쩐지 두려워한다. 찾아내면 그때는 더 찾을 게 없다는 걸 느끼니까. 일꾼들은 일을 끝내면 적어도 돈을 받고, 선술집에 가고, 그다음엔 경찰서에 끌려간다. 자, 한 주 동안의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인간은 어디로 가겠는가? 적어도 그런 목표에 이를 때마다 인간에게서 무언가 어색한 것이 눈에 띈다. 이르는 것은 좋아하지만, 다 이르는 것은 꼭 그렇지도 않다. 이건 물론 지독하게 우스운 일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희극적으로 생겨 먹었다. 이 모든 것에 분명 말장난이 들어 있다. 그래도 둘 곱하기 둘은 넷은 어쨌든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둘 곱하기 둘은 넷은, 내가 보기에, 그저 뻔뻔함이올시다. 둘 곱하기 둘은 넷은 멋쟁이처럼 허리에 손을 짚고 여러분 길을 가로막고 서서 침을 뱉는다. 둘 곱하기 둘은 넷이 훌륭한 것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모든 걸 칭찬하자면, 둘 곱하기 둘은 다섯도 이따금 아주 귀여운 물건이다.

그리고 어째서 여러분은 그토록 굳게, 그토록 엄숙하게, 오직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것만이, 한마디로 오직 복지만이 인간에게 이롭다고 믿는가? 이성은 이득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인간은 복지만 사랑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꼭 그만큼 고통도 사랑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고통이 꼭 복지만큼 그에게 이로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은 이따금 고통을 지독하게, 열렬히 사랑한다. 이건 사실이다. 여기서는 세계사를 들춰 볼 것도 없다. 여러분이 인간이고 조금이라도 살아 보았다면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시라.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오직 복지만을 사랑하는 건 어쩐지 꼴사납기까지 하다. 좋든 나쁘든, 이따금 무언가를 부수는 것도 아주 즐겁다. 나는 여기서 딱히 고통 편을 드는 것도, 복지 편을 드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 변덕 편을 든다. 그리고 필요할 때 그 변덕이 내게 보장되는 것 편을. 이를테면 보드빌 희극에서 고통은 허락되지 않는다. 나도 안다. 수정궁에서는 고통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고통은 의심이며 부정인데, 의심할 수 있는 수정궁이 무슨 수정궁이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인간이 진짜 고통, 곧 파괴와 혼돈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고통, 그건 의식의 유일한 원인이다. 처음에 나는 의식이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라고 아뢰었지만, 인간이 의식을 사랑하며 어떤 만족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이를테면 의식은 둘 곱하기 둘보다 한없이 높다. 둘 곱하기 둘 다음에는 물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할 일은커녕 알아낼 것조차. 그때 할 수 있는 거라곤 다섯 감각을 틀어막고 명상에 잠기는 것뿐이다. 그런데 의식이 있으면 똑같은 결과가 나오기는 해도, 곧 역시 할 일이 없기는 해도, 적어도 이따금 자기 자신을 매질할 수는 있다. 그러면 그래도 좀 살아난다. 반동적이긴 해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1부 10장

여러분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수정 건물을 믿는다. 곧 몰래 혀를 내밀 수도, 주머니 속에서 주먹 욕을 할 수도 없는 그런 건물을. 그런데 나는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이 건물이 두려운지도 모른다. 그것이 수정으로 되어 있고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며, 몰래 혀조차 내밀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보시다시피, 궁전 대신 닭장이 있고 비가 온다면, 나는 어쩌면 젖지 않으려고 닭장에 기어들어 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를 비에서 지켜 주었다는 고마움 때문에 닭장을 궁전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웃는다. 여러분은 이 경우 닭장이나 대궐이나 마찬가지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 하고 나는 대답한다. 젖지 않으려고만 산다면.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사람은 그것 하나만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고, 살려면 대궐에서 살아야 한다고 내가 머릿속에 박아 버렸다면. 이게 내 욕망이고, 이게 내 바람이다. 여러분은 내 바람을 바꿔 놓을 때에야 이걸 내게서 긁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 바꿔 보시라. 다른 것으로 나를 홀려 보시라. 내게 다른 이상을 달라. 그때까지 나는 닭장을 궁전으로 여기지 않겠다. 수정 건물이 허풍이라고 치자. 자연법칙에 따르면 그런 건 있을 수 없고, 내가 오직 내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 세대의 어떤 낡고 비합리적인 버릇 때문에 그걸 지어냈을 뿐이라고 치자. 그런데 그런 게 있을 수 없다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것이 내 바람 속에 있다면,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내 바람이 있는 동안 있다면, 마찬가지 아닌가? 또 웃으시는가? 웃으시라. 나는 모든 조롱을 받아들이겠다. 그래도 배고픈데 배부르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래도 나는 알고 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영(零)이라는 타협이 자연법칙에 따라 존재하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타협에 만족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가난한 세입자들을 위한 천 년 계약의 셋집들이 들어 있고, 만일을 위해 간판에 치과의사 바겐하임이 적힌 번듯한 공동 주택을 내 바람의 왕관으로 여기지 않겠다. 내 바람을 없애 보시라. 내 이상을 지워 보시라. 무언가 더 나은 것을 보여 주시라. 그러면 나는 여러분을 따라가겠다. 여러분은 어쩌면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말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도 여러분에게 똑같이 대답할 수 있다. 우리는 진지하게 따지고 있다.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 줄 생각이 없으시다면, 나도 절은 하지 않겠다. 내게는 지하가 있다.

그리고 내가 아직 살아 있고 바라는 동안에는, 내가 그런 번듯한 공동 주택에 벽돌 한 장이라도 날라 온다면 내 손이 말라 버려라! 아까 내가 수정 건물을 거부한 게 오직 혀로 약 올릴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데 신경 쓰지 마시라. 내가 그렇게 말한 건 혀를 내미는 걸 그렇게 좋아해서가 전혀 아니다. 어쩌면 나는 여러분의 모든 건물 가운데 혀를 내밀지 않아도 되는 건물이 지금까지 하나도 없다는 것에 화가 났을 뿐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나 자신이 다시는 혀를 내밀고 싶지 않게끔 일이 꾸려지기만 한다면, 나는 오직 고마움에서 혀를 통째로 잘라 내게 두겠다. 그렇게 꾸릴 수 없으며 셋집에 만족해야 한다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러면 나는 왜 이런 바람을 가지도록 만들어졌는가? 정말 나는 내 모든 구조가 한낱 속임수라는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만 만들어졌단 말인가? 정말 그것이 목적의 전부인가? 믿지 않는다.

하긴, 그런데 아시는가. 나는 우리 같은 지하 족속은 고삐를 채워 두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는 지하에서 마흔 해를 말없이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세상에 나와 터지면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한다…….

1부 11장

결국 여러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낫다! 의식적인 관성이 낫다! 그러니 지하 만세! 나는 정상적인 인간을 쓸개즙이 끓을 만큼 부러워한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는 그런 조건에서라면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그래도 부러워하기를 그만두지는 않겠지만. 아니, 아니, 어쨌든 지하가 더 이롭다!). 거기서는 적어도…… 에이! 이것도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나 스스로 둘 곱하기 둘처럼 알고 있으니까. 지하가 더 나은 게 전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완전히 다른 것, 내가 목마르게 바라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그것이 낫다는 것을! 지하 따위 꺼져라!

차라리 이게 더 나을 것이다. 지금 쓴 이 모든 것 가운데 하나라도 내가 스스로 믿는다면. 여러분, 맹세하건대 나는 지금 휘갈겨 쓴 것 가운데 단 한 마디, 단 한 마디도 믿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믿기는 한다. 하지만 동시에 왜인지 모르게, 내가 구두장이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의심한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 모든 걸 썼소?」 여러분은 내게 말하신다.

「그럼 여러분을 아무 할 일 없이 마흔 해쯤 앉혀 두었다가, 마흔 해 뒤에 지하로 찾아가서 여러분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보면 어떨까? 사람을 할 일 없이 마흔 해 동안 혼자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

「이게 부끄럽지도 않고, 이게 굴욕적이지도 않단 말이오!」 여러분은 경멸하듯 고개를 저으며 내게 말하실지도 모른다. 「당신은 삶을 갈망하면서, 삶의 문제를 논리의 뒤죽박죽으로 풀고 있소. 그리고 당신의 행동은 얼마나 성가시고 뻔뻔한지, 그러면서 얼마나 겁을 내는지! 당신은 헛소리를 하고 그걸로 만족하오. 당신은 무례한 말을 하면서, 그 때문에 쉬지 않고 겁을 내며 용서를 비오. 당신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장담하면서, 동시에 우리 평판에 비위를 맞추오. 당신은 이를 간다고 장담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웃기려고 재치를 부리오. 당신은 당신 재치가 재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문학적 가치에 무척 만족하는 게 분명하오. 당신은 정말로 괴로워한 적이 있었는지 모르오. 하지만 당신은 자기 괴로움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소. 당신에게는 진실도 있소. 하지만 당신에게는 순결함이 없소. 당신은 가장 하찮은 허영 때문에 진실을 구경거리로, 치욕거리로, 시장으로 들고 나가오……. 당신은 정말로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지만, 두려워서 마지막 말을 감추고 있소. 당신에게는 그걸 말할 결단이 없고 비겁한 뻔뻔함만 있으니까. 당신은 의식을 자랑하지만 그저 흔들리고 있을 뿐이오. 머리는 돌아가도 마음은 방탕으로 흐려져 있으니까. 깨끗한 마음 없이는 온전하고 올바른 의식도 없소. 그리고 당신은 얼마나 성가시고, 얼마나 끼어들고, 얼마나 거들먹거리는지!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오!」

물론 여러분의 이 모든 말은 지금 내가 지어낸 것이다. 이것도 지하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거기서 마흔 해 내리 틈새로 여러분의 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 스스로 지어냈다. 지어낼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으니까. 외워지고 문학적인 형식을 띠게 된 것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정말, 정말로 여러분은 내가 이 모든 걸 인쇄하고, 게다가 여러분에게 읽으라고 줄 거라고 상상할 만큼 경솔하신가? 그리고 내게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정말이지 나는 왜 여러분을 「여러분」이라고 부르는가, 왜 정말로 독자에게 하듯 여러분에게 말을 거는가? 내가 늘어놓으려는 그런 고백은 인쇄하지도 않고 남에게 읽으라고 주지도 않는다. 적어도 나는 내 안에 그만한 굳셈이 없고, 가질 필요도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내 머리에 공상 하나가 떠올랐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실현하고 싶다. 바로 이런 것이다.

모든 인간의 기억에는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친구에게나 털어놓는 것들이 있다.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나, 그것도 비밀로 털어놓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게조차 털어놓기를 두려워하는 것들도 있는데, 그런 것들은 모든 점잖은 인간에게 꽤 많이 쌓인다. 아니,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 점잖은 인간일수록 그런 것이 더 많다. 적어도 나 자신은 얼마 전에야 예전의 어떤 일들을 떠올려 보기로 마음먹었고, 지금까지는 늘 어쩐지 불안해하며 그것들을 피해 다녔다. 그런데 이제 떠올릴 뿐 아니라 적어 두기로까지 마음먹었으니, 이제 나는 바로 시험해 보고 싶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은 완전히 솔직할 수 있을까, 진실 전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하이네는 참된 자서전은 거의 불가능하며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틀림없이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생각에 이를테면 루소는 고백록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틀림없이 거짓말을 했으며, 허영 때문에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나는 하이네가 옳다고 확신한다. 나는 이따금 오직 허영 하나 때문에 자기에게 범죄를 통째로 덮어씌울 수 있다는 걸 아주 잘 이해하며, 그 허영이 어떤 종류일 수 있는지도 아주 잘 안다. 하지만 하이네는 대중 앞에서 고백한 인간을 두고 판단했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쓰며,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쓴다면 그건 오직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그렇게 하면 쓰기가 더 쉬워서라고 단번에 영원히 선언한다. 이건 형식, 텅 빈 형식일 뿐이며, 내게 독자는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이걸 선언했다…….

나는 내 수기를 편집하는 데 무엇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다. 질서도 체계도 세우지 않겠다. 떠오르는 대로 적겠다.

자, 이를테면 누가 말꼬리를 잡고 내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독자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지금 자기 자신과, 그것도 종이 위에서 이런 약속을 하는가? 곧 질서도 체계도 세우지 않겠다느니, 떠오르는 대로 적겠다느니 하는 약속을, 등등, 등등. 무엇 때문에 해명하는가? 무엇 때문에 변명하는가?

「글쎄, 그러게 말이오.」 나는 대답한다.

하긴 여기에는 온전한 심리학이 있다. 어쩌면 내가 그냥 겁쟁이라서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적는 동안 좀 더 점잖게 처신하려고 일부러 내 앞에 대중을 상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는 천 가지일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 무엇 때문에, 정확히 왜 나는 쓰고 싶은가?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종이에 옮기지 않고 그냥 머릿속으로 모든 걸 떠올려도 될 텐데.

그렇습니다요. 하지만 종이 위에서는 어쩐지 더 엄숙하게 나온다. 여기엔 무언가 위압하는 것이 있어서, 자신에 대한 심판이 더 많아지고 문체가 더해질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적음으로써 정말로 마음이 가벼워질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오늘 나는 오래된 기억 하나에 유난히 짓눌리고 있다. 며칠 전에 그것이 또렷이 떠올랐고, 그 뒤로 떨쳐지지 않는 성가신 음악 가락처럼 나와 함께 남아 있다. 그런데 그것을 떨쳐 내야 한다. 내게는 그런 기억이 수백 개 있다. 그런데 이따금 그 수백 가운데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짓누른다. 나는 어쩐지 그것을 적어 두면 떨쳐질 거라고 믿는다. 왜 시험해 보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지루하고, 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적는 일은 정말로 일 같다. 사람은 일을 하면 착하고 정직해진다고들 한다. 자, 적어도 기회는 된다.

오늘은 눈이 내린다. 거의 젖은, 누렇고 탁한 눈이. 어제도 내렸고, 요 며칠도 내렸다. 나는 젖은 눈 때문에 지금 나를 떠나려 하지 않는 그 일화가 떠오른 것 같다. 그러니 이것을 젖은 눈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자.

2부 1장

미망의 어둠에서
뜨거운 설득의 말로
타락한 영혼을 내가 건져 올렸을 때,
깊은 고통에 온통 사로잡힌 너는
두 손을 비틀며
너를 옭아맨 죄악을 저주했지.
잊기 잘하는 양심을
기억으로 벌하며
나보다 먼저 있었던 모든 일을
네가 내게 들려주었을 때,
그리고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가득 차
분노하고 뒤흔들린 채
너는 눈물을 터뜨렸지…….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 네크라소프의 시에서

그때 나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내 삶은 그때부터 이미 음울하고 무질서하며 야생에 가까울 만큼 외로웠다. 나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말하는 것조차 피했으며, 점점 더 내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관청에서, 사무실에서 나는 누구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고, 동료들이 나를 괴짜로 여길 뿐 아니라, 이것도 모두 그렇게 보였지만, 무언가 역겨움을 품고 나를 보는 것 같다는 걸 아주 잘 알아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 말고는 아무도 남들이 자기를 역겹게 본다고 여기지 않는 걸까? 우리 사무실 사람 하나는 역겹고 곰보 자국투성이인, 어쩐지 강도 같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나 같으면 그렇게 꼴사나운 얼굴로는 누구도 감히 쳐다보지 못했을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제복이 어찌나 해졌는지 곁에 가면 벌써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런데도 이 양반들 누구 하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옷 때문에도, 얼굴 때문에도, 무슨 도덕적인 면에서도. 둘 다 남들이 자기를 역겹게 본다고 상상하지 않았다. 상상했다 해도 윗사람이 굽어보시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는 완전히 분명하다. 나 자신이 한없는 허영 때문에, 따라서 나 자신에 대한 까다로운 요구 때문에, 아주 자주 역겨움에 이를 만큼 미칠 듯이 불만스럽게 나 자신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속으로 내 눈길을 모든 사람에게 덧씌웠던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내 얼굴을 미워했다. 추잡하다고 여겼고, 거기에 무언가 비열한 표정이 있다고까지 의심했다. 그래서 관청에 나갈 때마다 비열하다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되도록 당당하게 처신하려고 괴롭게 애썼고, 얼굴로는 되도록 고귀함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못생긴 얼굴이라도 좋다.」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고귀하고 표정이 풍부하며, 무엇보다 엄청나게 똑똑한 얼굴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완벽함을 내 얼굴로는 결코 드러낼 수 없다는 걸 틀림없이, 괴롭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끔찍한 건, 내가 보기에 내 얼굴은 단연코 어리석었다는 것이다. 나는 똑똑함만으로 완전히 만족했을 것이다. 내 얼굴이 동시에 지독하게 똑똑하다고 여겨지기만 한다면 비열한 표정에도 동의했을 정도로.

우리 사무실 사람들을 나는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미워했고, 모두 경멸했다. 그런데 동시에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그들을 나보다 높이 두기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때 나에게는 어쩐지 그런 일이 갑자기 일어났다. 경멸하다가 나보다 높이 두다가. 교양 있고 점잖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한없는 요구 없이는,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증오에 이를 만큼 자기를 경멸하지 않고는 허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경멸하든 나보다 높이 두든, 나는 마주치는 거의 모든 사람 앞에서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실험까지 했다. 이를테면 아무개의 눈길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그리고 늘 내가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이것이 나를 미치도록 괴롭혔다. 나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도 병적으로 두려워해서, 겉모습에 관한 모든 것에서 판에 박힌 것을 노예처럼 숭배했다. 사랑을 다해 모두가 가는 궤도에 몸을 맡겼고, 내 안의 모든 별남을 온 마음으로 두려워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는가? 나는 우리 시대 교양인이 마땅히 그래야 하듯 병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둔했고, 양 떼 속의 양처럼 서로 닮아 있었다. 어쩌면 사무실 전체에서 나 하나만 늘 내가 겁쟁이이자 노예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내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여겨졌다. 그런데 그저 그렇게 여겨진 게 아니라 정말로 실제로 그랬다. 나는 겁쟁이이자 노예였다. 나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걸 말한다. 우리 시대의 모든 점잖은 인간은 겁쟁이이자 노예이며,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그의 정상 상태다. 나는 이것을 깊이 확신한다. 그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러도록 짜여 있다. 지금 무슨 우연한 사정 때문이 아니라, 대체로 모든 시대에 점잖은 인간은 겁쟁이이자 노예여야 한다. 이것은 지상의 모든 점잖은 인간의 자연법칙이다. 그들 가운데 누가 무언가에 용기를 부리는 일이 있더라도, 그걸로 위안을 얻거나 들뜨지 말기를. 어차피 다른 것 앞에서 꽁무니를 뺄 것이다. 이것이 유일하고 영원한 출구다. 용기를 부리는 건 당나귀와 그 잡종뿐이다. 그런데 그들조차 어느 벽까지만이다. 그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일 가치도 없다. 그들은 정확히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그때 나를 괴롭힌 또 하나의 사정이 있었다. 바로 아무도 나와 닮지 않았고 나도 아무와도 닮지 않았다는 것. 「나는 하나인데, 저들은 모두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것으로 보아 나는 아직 완전히 어린애였다.

반대되는 일도 있었다. 이따금 관청에 가는 게 어찌나 역겨워지던지, 몇 번이나 아파서 퇴근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난데없이 회의와 무관심의 시기가 찾아온다(나에게는 모든 게 시기별로 왔다). 그러면 바로 나 자신이 나의 편협함과 결벽을 비웃고, 낭만주의라고 스스로를 나무란다. 누구와도 말하기 싫어하다가도, 말을 트는 건 물론 그들과 친구처럼 사귀어 볼 생각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다. 모든 결벽이 갑자기 한꺼번에 난데없이 사라졌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내게 결벽 같은 건 한 번도 없었고, 책에서 배운 꾸민 것이었는지도. 나는 지금까지도 이 물음을 풀지 못했다. 한번은 그들과 완전히 친해져서 그들 집을 찾아가고, 프레퍼런스 카드놀이를 하고, 보드카를 마시고, 승진 이야기를 늘어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곁가지 이야기를 하게 해 주시라.

우리 러시아 사람에게는 대체로, 발밑에서 땅이 갈라지든 프랑스 전체가 바리케이드 위에서 망하든 아무것도 끄떡하지 않는, 어리석고 별 위를 떠도는 독일, 특히 프랑스식 낭만주의자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늘 똑같고, 체면을 위해서라도 변하지 않으며, 이를테면 관에 들어갈 때까지 별 위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들은 바보니까. 그런데 우리 러시아 땅에는 바보가 없다. 이건 잘 알려진 일이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다른 독일 땅들과 다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순수한 상태의 별 위를 떠도는 성품도 없다. 이 모든 건 그 무렵 우리의 「긍정적인」 평론가와 비평가들이, 그때 코스탄조글로며 표트르 이바노비치 아저씨 같은 인물들을 쫓아다니며 어리석게도 그들을 우리의 이상으로 여기고는, 우리 낭만주의자들을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별 위를 떠도는 자들로 여겨 지어낸 것이다. 반대로 우리 낭만주의자의 성질은 별 위를 떠도는 유럽식과 완전히, 곧바로 정반대여서, 유럽의 어떤 잣대도 여기에는 맞지 않는다. (「낭만주의자」라는 이 말을 쓰게 해 주시라. 오래되고 존경받고 공이 많으며 누구에게나 익숙한 말이니까.) 우리 낭만주의자의 성질은 이렇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보며, 우리의 가장 긍정적인 지성들보다 비할 데 없이 더 똑똑히 보는 일이 잦다. 누구와도 무엇과도 화해하지 않지만, 동시에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비켜 가고, 모든 것에 양보하고, 모든 사람에게 수완 좋게 처신한다. 유익하고 실제적인 목표(무슨 관사 한 칸, 연금 쪼가리, 훈장 따위)를 늘 놓치지 않고, 온갖 열광과 서정시 몇 권을 뚫고 그 목표를 알아보며, 동시에 「아름답고 숭고한 것」도 관에 들어갈 때까지 제 안에 흔들림 없이 간직한다. 그리고 내친김에 자기 자신도 보석 세공품처럼 솜에 싸서 고스란히 간직한다. 이를테면 바로 그 「아름답고 숭고한 것」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우리 낭만주의자는 폭넓은 인간이며, 우리의 모든 사기꾼 가운데 으뜸가는 사기꾼이다. 장담한다……. 경험으로도. 물론 이 모든 건 낭만주의자가 똑똑할 경우다.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낭만주의자는 언제나 똑똑하다. 나는 그저 우리에게도 바보 낭만주의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셈에 넣지 않는다는 걸 지적하고 싶었을 뿐이다. 오직 그들이 아직 한창때에 완전히 독일인으로 바뀌어, 보석 세공품을 더 편하게 간직하려고 저기 어딘가, 주로 바이마르나 슈바르츠발트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내 관청 일을 진심으로 경멸했고, 오직 어쩔 수 없어서 침을 뱉지 않았다. 나 자신이 거기 앉아서 그 대가로 돈을 받았으니까. 결과적으로, 보시라, 그래도 침을 뱉지 않았다. 우리 낭만주의자는 다른 경력이 눈앞에 없다면 차라리 미쳐 버릴지언정(그런 일은 무척 드물지만) 침을 뱉지는 않을 것이며, 결코 떠밀려 쫓겨나지도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에스파냐 왕」의 모습으로 정신병원에 실려 가겠지. 그것도 아주 심하게 미친다면. 그런데 우리에게서 미치는 건 가냘프고 금발인 자들뿐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낭만주의자들이 나중에 높은 관등에 이른다. 비상한 다면성이여! 그리고 가장 모순된 감각들에 대한 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가! 나는 그때도 이것으로 위안을 얻었고,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져서도 결코 이상을 잃지 않는 「폭넓은 성품」이 그토록 많다. 이상을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름난 강도이자 도둑이면서도, 그래도 눈물이 날 만큼 제 처음의 이상을 존중하며 영혼 속으로는 비상하게 정직하다. 그렇고말고요, 오직 우리 사이에서만 가장 이름난 비열한 놈이 영혼 속으로는 완전히, 심지어 숭고하게 정직할 수 있다. 동시에 비열한 놈이기를 조금도 그만두지 않으면서. 되풀이하건대, 우리 낭만주의자들에게서 이따금 그런 수완 좋은 악당들이 줄줄이 나온다(「악당」이라는 말은 애정을 담아 쓴다). 그들은 갑자기 현실에 대한 그런 감각과 긍정적인 것에 대한 그런 지식을 보여 줘서, 놀란 윗사람과 대중은 그저 얼이 빠져 혀만 찰 뿐이다.

참으로 놀라운 다면성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의 사정 속에서 무엇으로 바뀌고 다듬어질지, 우리 앞날에 무엇을 약속하는지는 하느님이나 아실 일이다. 그런데 괜찮은 재료올시다! 나는 무슨 애국심, 우스꽝스럽거나 크바스 냄새 나는 애국심에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하긴 여러분은 또 내가 비웃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 아니면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반대로, 내가 정말로 이렇게 생각한다고 확신하실지도. 어쨌든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두 의견 모두를 명예이자 특별한 기쁨으로 여기겠다. 그리고 곁가지 이야기는 용서해 주시라.

동료들과의 우정을 나는 물론 오래 지키지 못했고, 아주 빨리 등을 돌렸으며, 그때의 젊은 미숙함 때문에 칼로 자르듯 인사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하긴 이런 일은 내게 딱 한 번 있었다. 대체로 나는 늘 혼자였다.

집에서 나는 우선 무엇보다 책을 읽었다. 바깥의 감각으로 내 안에서 쉬지 않고 끓어오르는 모든 것을 잠재우고 싶었다. 그런데 바깥의 감각 가운데 내게 가능한 건 독서 하나뿐이었다. 독서는 물론 많이 도움이 되었다. 흥분시키고, 즐겁게 하고, 괴롭혔다. 그러나 이따금 지독하게 지겨워졌다. 그래도 움직이고 싶었고, 그러면 나는 갑자기 어둡고 지하 같은 추잡한, 방탕이라기보다는 자잘한 방탕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 자잘한 정욕은 늘 병적인 신경질 때문에 날카롭고 타는 듯했다. 발작은 눈물과 경련을 동반한 히스테리였다. 독서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곧 그때 내 둘레에는 내가 존중할 수 있고 나를 끌어당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우울이 끓어올랐다. 모순과 대조에 대한 히스테리한 갈증이 나타났고, 그러면 나는 방탕에 나섰다. 나는 지금 전혀 나를 변명하려고 이렇게 많이 늘어놓은 게 아니다……. 하긴, 아니다! 거짓말했다! 나는 바로 나를 변명하고 싶었다. 여러분, 이건 나 자신을 위해 적어 두는 메모다.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약속했으니까.

나는 홀로, 밤에, 남몰래, 겁내며, 더럽게, 가장 역겨운 순간에도 나를 떠나지 않고 그런 순간에는 저주에까지 이르는 수치심을 안고 방탕했다. 나는 그때 이미 영혼 속에 지하를 품고 있었다. 나는 누가 나를 어떻게든 보거나, 마주치거나, 알아볼까 봐 지독하게 두려웠다. 그런데 나는 아주 어두운 여러 곳을 다녔다.

한번은 밤에 어느 싸구려 술집 앞을 지나다가 불 켜진 창으로, 당구대 곁에서 신사들이 큐로 싸우다가 하나를 창밖으로 내던지는 것을 보았다. 다른 때 같으면 무척 역겨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런 순간이 찾아와서, 나는 그 내던져진 신사가 부러워졌다. 어찌나 부러웠던지 술집 안 당구장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혹시 나도 싸우고 창밖으로 내던져질지 모르지.」

나는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우울이 사람을 그런 히스테리에까지 몰아넣을 수 있는걸!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창밖으로 뛰어내릴 능력조차 없다는 게 드러났고, 싸우지도 못하고 나왔다.

거기서 첫걸음부터 한 장교가 나를 눌러 버렸다.

나는 당구대 곁에 서서 모르고 길을 막고 있었는데, 그는 지나가야 했다. 그는 내 어깨를 잡더니 말없이, 미리 알리지도 해명하지도 않고, 나를 서 있던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 놓고는 마치 알아채지도 못한 것처럼 지나갔다. 나는 매질이라도 용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를 옮겨 놓고 그렇게 끝내 알아채지도 않았다는 것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진짜 싸움, 더 올바르고 더 점잖은, 이를테면 더 문학적인 싸움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주었을 것이다! 나는 파리 취급을 당했다. 그 장교는 키가 190센티미터 가까웠다. 나는 작고 여윈 인간이다. 하긴 싸움은 내 손에 달려 있었다. 항의만 하면 틀림없이 나를 창밖으로 내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고쳐먹고…… 앙심을 품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쪽을 택했다.

나는 당황하고 흥분한 채 술집을 나와 곧장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튿날 내 자잘한 방탕을 전보다 더 소심하게, 더 짓눌리고 더 서글프게, 마치 눈에 눈물을 머금은 듯이 계속했다. 그래도 계속했다. 하긴 내가 비겁해서 장교에게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지는 마시라. 나는 행동으로는 쉬지 않고 겁을 먹었지만 영혼 속으로는 한 번도 겁쟁이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웃는 건 좀 기다려 주시라. 여기엔 설명이 있다. 나에게는 모든 것에 설명이 있다, 안심하시라.

오, 그 장교가 결투에 나서는 부류이기만 했다면! 그러나 아니다. 그는 바로 큐로 해결하거나, 고골의 피로고프 중위처럼 윗선에 호소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양반들(아아!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결투에 나서지 않았고, 우리 같은 민간인 나부랭이와의 결투는 어떤 경우에도 꼴사납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결투를 무언가 생각할 수도 없는 것, 자유사상가다운 것, 프랑스식인 것으로 여겼다. 그러면서 그들 자신은 꽤나 남을 모욕했다. 특히 키가 190센티미터 가까운 경우에는.

거기서 나는 겁이 나서가 아니라 한없는 허영 때문에 겁을 먹었다. 나는 190센티미터의 키가 두려운 것도, 호되게 얻어맞고 창밖으로 내던져지는 것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몸의 용기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 용기가 모자랐다. 내가 두려웠던 건, 뻔뻔한 당구장 점수 기록원부터 기름때 전 칼라를 달고 거기서 얼쩡대던 썩은 내 나는 여드름투성이 말단 관리 나부랭이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의 모두가 내가 항의하면서 그들에게 문학적인 말로 이야기하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으리라는 것이었다. 명예 문제, 곧 명예가 아니라 명예 문제(point d'honneur)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직도 문학적인 말로밖에 이야기할 수가 없으니까. 평범한 말로는 「명예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나는 완전히 확신했다(그 모든 낭만주의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한 감각은 있었다!). 그들 모두 그냥 웃음보가 터질 것이고, 장교는 나를 그냥, 곧 무해하게 때리지는 않을 것이며, 반드시 무릎으로 나를 걷어차며 당구대 주위를 한 바퀴 돌린 다음, 그때에야 자비를 베풀어 창밖으로 내던지리라고. 물론 이 초라한 사건은 이것으로 끝날 수 없었다. 나는 그 뒤로 거리에서 그 장교를 자주 마주쳤고, 그를 잘 봐 두었다. 다만 그가 나를 알아보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아닐 것이다. 몇 가지 징후로 보아 그렇게 판단한다. 그러나 나는, 나는 원한과 증오를 품고 그를 바라보았고, 그렇게 계속되었다…… 몇 해 동안이올시다! 내 원한은 해가 갈수록 오히려 굳어지고 자라났다. 처음에 나는 조용히 그 장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누구와도 알고 지내지 않았으니 어려웠다. 그런데 한번은 내가 그에게 묶인 것처럼 멀리서 그를 따라가고 있을 때 누군가 거리에서 그의 성을 불렀고, 그래서 나는 성을 알게 되었다. 또 한번은 그의 집까지 뒤를 밟아 가서 10코페이카를 주고 문지기에게서 그가 어디 사는지, 몇 층에, 혼자인지 누구와 사는지 등등, 한마디로 문지기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건 모두 알아냈다. 한번은 아침에, 나는 한 번도 문학 따위를 해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이 장교를 폭로하는 모습으로, 풍자로, 소설 모양으로 그려 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쾌락을 느끼며 그 소설을 썼다. 나는 폭로했고, 중상까지 했다. 성을 처음엔 곧바로 알아볼 수 있게 비틀었지만, 나중에 충분히 생각한 끝에 바꾸어 「조국 수기」에 보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폭로 문학이 없던 때라 내 소설은 실리지 않았다. 나는 몹시 분했다. 이따금 원한이 나를 그냥 목 졸랐다. 마침내 나는 적수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에게 멋지고 매력적인 편지를 써서, 내 앞에서 사과해 달라고 간청했다. 거절할 경우에는 꽤 단호하게 결투를 암시했다. 편지는 어찌나 잘 쓰였던지, 그 장교가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틀림없이 내게 달려와 내 목에 매달리며 우정을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는 얼마나 잘 살았을까! 얼마나 잘 살았을까! 그는 자기의 위세로 나를 지켜 주고, 나는 내 교양으로, 그리고…… 사상으로 그를 고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일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상상해 보시라. 그때는 그가 나를 모욕한 지 벌써 두 해가 지났고, 그 시대착오를 설명하고 감춰 주는 내 편지의 온갖 솜씨에도 불구하고 내 결투 신청은 더없이 흉측한 시대착오였다. 그러나 다행히도(지금까지도 눈물을 흘리며 전능하신 분께 감사드린다) 나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보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하면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갑자기…… 갑자기 나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천재적인 방법으로 복수했다! 갑자기 더없이 밝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이따금 휴일이면 나는 오후 세 시가 넘어 넵스키 거리에 가서 볕 드는 쪽을 산책하곤 했다. 곧 거기서 나는 산책을 한 게 전혀 아니라 셀 수 없는 고통과 굴욕과 울화를 겪었다. 그런데 아마 내게는 바로 그게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는 미꾸라지처럼 더없이 볼썽사납게 행인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며, 장군들에게, 근위 기병과 경기병 장교들에게, 귀부인들에게 쉬지 않고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런 순간 나는 내 옷차림의 초라함,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내 작은 몸뚱이의 초라함과 천박함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에 경련 같은 통증을, 등에 열기를 느꼈다. 그것은 고통 중의 고통이었고, 쉬지 않는 견딜 수 없는 굴욕이었다. 이 세상 앞에서 내가 파리라는, 추잡하고 쓸모없는 파리라는 생각이 쉬지 않는 직접적인 감각으로 바뀌면서. 누구보다 똑똑하고, 누구보다 교양 있고, 누구보다 고결하지만, 이건 말할 것도 없고, 쉬지 않고 모두에게 길을 비켜 주는, 모두에게 굴욕당하고 모두에게 모욕당하는 파리라는. 무엇 때문에 나는 이 고통을 짊어졌는지, 무엇 때문에 넵스키 거리에 갔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그냥 그리로 끌려갔다.

그때 이미 나는 첫 장에서 말한 그 쾌락의 밀물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교와의 일이 있은 뒤로는 그리로 더 세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바로 넵스키 거리에서 나는 그를 가장 많이 마주쳤고, 거기서 그를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그도 주로 휴일에 그리로 나왔다. 그 역시 장군들과 위세 있는 인물들 앞에서는 길을 비키고 그들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지만, 우리 같은 족속이나 우리보다 좀 나은 족속은 그냥 짓밟았다. 마치 앞이 텅 빈 공간인 것처럼 곧장 그들에게 걸어갔고, 어떤 경우에도 길을 비키지 않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내 원한에 취했고…… 그리고 앙심을 품고 매번 그의 앞에서 비켜섰다. 거리에서조차 그와 대등할 수 없다는 게 나를 괴롭혔다. 「왜 너는 꼭 먼저 비켜서지?」 이따금 새벽 세 시쯤 잠에서 깨어 미친 듯한 히스테리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다그쳤다. 「왜 하필 너고, 그가 아니지? 그런 법은 없잖아. 그런 건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잖아? 섬세한 사람들이 마주칠 때 흔히 그러듯 반반씩 하면 되잖아. 그도 반을 비키고 너도 반을 비켜서, 서로 존중하며 지나가면 되잖아.」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고, 여전히 비켜서는 건 나였으며, 그는 내가 비켜 준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더없이 놀라운 생각이 갑자기 번뜩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생각했다. 「만약 그와 마주쳐서…… 비켜서지 않는다면? 일부러 비켜서지 않는다면, 설령 그를 밀치게 되더라도. 어때, 그러면 어떻게 될까?」 이 대담한 생각이 조금씩 나를 사로잡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나는 쉬지 않고 지독하게 그것을 꿈꾸었고, 내가 그것을 실행할 때 어떻게 할지 더 똑똑히 그려 보려고 일부러 더 자주 넵스키 거리에 나갔다. 나는 황홀했다. 이 계획이 점점 더 그럴듯하고 가능해 보였다. 「물론 완전히 밀치는 건 아니지.」 나는 벌써 기쁨으로 미리 너그러워지며 생각했다. 「그냥 비켜서지 않고, 그와 부딪치는 거야. 아주 아프게는 말고, 그냥 어깨와 어깨를, 딱 예의가 정한 만큼만. 그가 나를 부딪는 만큼 나도 그를 부딪는 거지.」 마침내 나는 완전히 결심했다. 그러나 준비에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다. 먼저 실행할 때는 좀 더 점잖은 모습이어야 했으므로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했다. 「만일을 위해, 이를테면 사람들 앞에서 소동이 벌어질 경우(그런데 거기 대중은 최상급이다. 백작 부인도 다니고, D 공작도 다니고, 문단 전체가 다닌다), 옷을 잘 입어야 한다. 그건 위압감을 주고, 상류 사회의 눈에 우리를 어느 정도 대등한 자리에 곧바로 세워 줄 것이다.」 이 목적으로 나는 월급을 가불받아 추르킨 가게에서 검은 장갑과 괜찮은 모자를 샀다. 처음에 탐냈던 레몬색 장갑보다 검은 장갑이 더 무게 있고 더 품위 있어 보였다. 「빛깔이 너무 튄다. 사람이 너무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레몬색은 사지 않았다. 흰 뼈 단추를 단 좋은 셔츠는 오래전에 마련해 두었다. 그런데 외투가 크게 발목을 잡았다. 외투 자체는 꽤 괜찮았고 따뜻했다. 그런데 솜을 넣은 외투에다 깃이 너구리 털이어서, 그건 이미 하인 티의 절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깃을 바꾸고, 장교들 것 같은 비버 털을 달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고스티니 드보르 상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몇 번 시도한 끝에 값싼 독일산 비버 털 하나를 점찍었다. 이 독일산 비버 털은 아주 빨리 닳아서 더없이 초라한 모습이 되지만, 처음 새것일 때는 꽤 점잖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나에게는 딱 한 번만 필요했다. 값을 물어보니 그래도 비쌌다. 곰곰이 따진 끝에 나는 내 너구리 털 깃을 팔기로 했다.

그리고 모자라는, 나에게는 꽤 큰 액수는 내 과장 안톤 안토니치 세토치킨에게 빌리기로 했다. 그는 겸손하지만 진지하고 착실한 사람으로, 누구에게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는데, 내가 관청에 들어올 때 나를 자리에 앉혀 준 지체 높은 인물이 그에게 나를 특별히 부탁해 둔 적이 있었다. 나는 지독하게 괴로웠다. 안톤 안토니치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건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 같았다. 나는 이틀인가 사흘 밤을 자지 못했다. 대체로 그때 나는 잠을 적게 잤고 열에 들떠 있었다. 심장이 어쩐지 흐릿하게 멎는 것 같다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뛰고, 뛰고, 또 뛰었다!…… 안톤 안토니치는 처음엔 놀랐고, 다음엔 얼굴을 찌푸렸고, 다음엔 따져 보더니 그래도 빌려주었다. 빌려준 돈을 두 주 뒤에 월급에서 받을 권리에 대한 차용증을 내게서 받고서. 그렇게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 멋진 비버 털이 추잡한 너구리 털 자리에 군림했고, 나는 조금씩 일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첫 번에 함부로 결행할 수는 없었다. 이 일은 솜씨 있게, 바로 조금씩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여러 번 시도한 끝에 나는 절망하기 시작할 뻔했다. 도무지 부딪치지 않는 것이다. 그뿐이었다! 나는 준비도 했고, 마음도 먹었다. 이제 막 부딪칠 것 같다가, 보면 또 내가 길을 비켜 주었고, 그는 나를 알아채지도 못하고 지나갔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면서 하느님께서 내게 결단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도까지 했다. 한번은 완전히 결심했는데, 결국 그의 발밑에 걸려들고 말았다. 맨 마지막 순간, 한 뼘쯤 되는 거리에서 용기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나를 밟고 지나갔고, 나는 공처럼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열이 나서 앓으며 헛소리를 했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일이 더없이 잘 끝났다. 전날 밤 나는 그 파멸적인 계획을 실행하지 않고 모든 걸 헛되이 내버려 두기로 마침내 정했고, 그 목적으로 마지막으로 넵스키 거리에 나갔다. 그저 한번 보려고. 내가 이 모든 걸 어떻게 헛되이 내버려 두는지. 갑자기 원수에게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는 뜻밖에 결심했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우리는 어깨와 어깨를 단단히 부딪쳤다! 나는 한 치도 비키지 않았고, 완전히 대등하게 지나갔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았고, 알아채지 못한 척했다. 그러나 척했을 뿐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확신한다! 물론 내가 더 세게 당했다. 그가 더 힘이 셌으니까.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목표를 이루었고, 체면을 지켰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공공연히 그와 사회적으로 대등한 자리에 나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복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황홀했다. 나는 의기양양해서 이탈리아 아리아를 불렀다. 물론 사흘 뒤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여러분에게 묘사하지는 않겠다. 내 첫 장 「지하」를 읽으셨다면 스스로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장교는 그 뒤 어디론가 전근되었다. 이제 벌써 열네 해쯤 그를 보지 못했다. 그 친구,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누구를 짓밟고 있을까?

2부 2장

그러나 내 자잘한 방탕의 시기가 끝나면 나는 지독하게 메스꺼워졌다. 뉘우침이 찾아왔고, 나는 그것을 쫓아냈다. 너무 메스꺼웠으니까. 그런데 조금씩 나는 거기에도 익숙해졌다. 나는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곧 익숙해졌다기보다 어쩐지 자진해서 견디기로 동의했다. 그런데 내게는 모든 것을 화해시켜 주는 출구가 있었다.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 속으로 피하는 것, 물론 꿈속에서. 나는 지독하게 꿈을 꾸었다. 내 구석에 틀어박혀 석 달 내리 꿈을 꾸었다. 그리고 믿어 주시라, 그런 순간에 나는 닭 같은 심장으로 허둥대며 외투 깃에 독일산 비버 털을 꿰매 달던 그 양반과는 닮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영웅이 되었다. 그때라면 그 190센티미터짜리 중위를 우리 집에 방문하러 오게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그를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내 꿈이 무엇이었고 내가 어떻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는지, 지금은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하긴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꿈은 특히 자잘한 방탕 뒤에 더 달콤하고 더 강하게 찾아왔다. 뉘우침과 눈물과 함께, 저주와 황홀과 함께. 속에서 조금의 비웃음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긍정적인 도취, 그런 행복의 순간들이 있었다. 맹세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었다. 바로 그거다. 그때 나는 맹목적으로 믿었다. 무슨 기적으로, 무슨 바깥 사정으로 이 모든 게 갑자기 벌어지고 넓어질 거라고. 걸맞은 활동의 지평이, 이롭고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완전히 준비된 활동의 지평이 갑자기 나타날 거라고(정확히 어떤 활동인지는 한 번도 몰랐지만, 중요한 건 완전히 준비된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갑자기 하느님의 빛 속으로, 거의 백마를 타고 월계관을 쓰고 나설 거라고. 나는 이류 역할이란 이해할 수조차 없었고, 바로 그 때문에 현실에서는 아주 태연하게 꼴찌 역할을 맡았다. 영웅이 아니면 진흙, 중간은 없었다. 바로 이것이 나를 망쳤다. 진흙 속에서 나는 다른 때는 영웅이라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했고, 영웅은 진흙을 가려 주었으니까. 평범한 인간은 더럽혀지는 게 부끄럽지만, 영웅은 너무 높아서 완전히 더럽혀질 수 없다, 따라서 더럽혀져도 된다는 식이었다. 놀라운 건 이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의 밀물이 자잘한 방탕 중에도, 그것도 바로 내가 밑바닥에 있을 때 찾아왔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를 일깨우듯 따로따로 반짝 타올랐지만, 나타났다고 해서 자잘한 방탕을 없애지는 않았다. 반대로 대조로써 그것을 되살려 주는 것 같았고, 좋은 소스에 필요한 딱 그만큼만 찾아왔다. 여기서 소스는 모순과 고통, 괴로운 내면 분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크고 작은 괴로움이 내 자잘한 방탕에 무언가 짜릿함, 심지어 의미까지 주었다. 한마디로 좋은 소스의 몫을 완전히 해냈다. 이 모든 것에는 어느 정도 깊이마저 없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단순하고 천박하고 직선적인 서기 나부랭이의 방탕에 동의하고 그 모든 진흙을 제 몸에 짊어질 수 있었겠는가! 그랬다면 그 안의 무엇이 나를 홀려 밤거리로 꾀어낼 수 있었겠는가? 천만에요, 나에게는 모든 일에 고결한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그런데 주여, 나는 이 꿈속에서,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 속으로의 이 피신」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겪었던가. 공상의 사랑이긴 해도, 실제로는 한 번도 인간적인 무엇에도 쓰인 적이 없긴 해도, 이 사랑은 어찌나 많았던지 나중에 실제로는 그것을 쓸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이미 지나친 사치였을 것이다. 하긴 모든 것은 언제나 아주 순조롭게, 게으르고 황홀하게 예술로, 곧 완전히 준비되고 시인과 소설가들에게서 한껏 훔쳐 온, 온갖 쓰임과 요구에 맞게 고쳐 놓은 아름다운 삶의 형식으로 넘어가며 끝났다. 이를테면 나는 모두에게 이긴다. 모두 물론 먼지 속에 엎드려 내 모든 완벽함을 자진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고, 나는 그들 모두를 용서한다. 나는 이름난 시인이자 시종관으로서 사랑에 빠진다. 셀 수 없는 수백만 금을 얻어 곧바로 인류에게 바치고, 그 자리에서 온 민중 앞에서 나의 치욕을 고백한다. 물론 그 치욕은 그냥 치욕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아름답고 숭고한 것」, 무언가 맨프레드 같은 것을 담고 있다. 모두 울며 내게 입을 맞춘다(안 그러면 그들이 얼마나 멍청이겠는가). 그리고 나는 맨발로 굶주린 채 새로운 사상을 설교하러 가서 아우스터리츠에서 반동주의자들을 쳐부순다. 그다음엔 행진곡이 연주되고, 사면령이 내려지고, 교황이 로마를 떠나 브라질로 가는 데 동의한다. 그다음엔 코모 호숫가의 보르게세 별장에서 온 이탈리아를 위한 무도회가 열린다. 코모 호수는 이 일을 위해 일부러 로마로 옮겨지니까. 그다음엔 덤불 속 장면, 등등, 등등. 모르시는 것처럼 굴지 마시라! 여러분은 내가 스스로 고백한 그 많은 도취와 눈물 끝에 지금 이 모든 걸 시장에 내놓는 건 천박하고 비열하다고 말하실 것이다. 어째서 비열하답니까? 정말 내가 이 모든 걸 부끄러워하고, 이 모든 게 여러분의 삶에 있는 그 무엇보다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시는가, 여러분? 게다가 믿어 주시라, 내게는 꽤 잘 짜인 것도 몇 가지 있었다……. 모든 일이 코모 호수에서 일어난 건 아니다. 하긴 여러분이 옳다. 정말로 천박하고 비열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열한 건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비열한 건 내가 지금 이 지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그만하자. 안 그러면 절대 끝나지 않을 테니까. 모든 게 하나같이 다른 것보다 더 비열할 것이다…….

석 달 넘게 내리 꿈을 꿀 수는 도저히 없었고, 나는 사교계로 뛰어들고 싶은 이길 수 없는 욕구를 느끼기 시작했다. 사교계로 뛰어든다는 건 나에게 과장 안톤 안토니치 세토치킨의 집에 놀러 간다는 뜻이었다. 그는 내 평생 단 하나의 꾸준한 지인이었고, 지금은 나 자신도 이 사정에 놀란다. 그런데 그에게도 나는 이미 그런 시기가 찾아와서 내 꿈이 반드시, 당장 사람들과, 모든 인류와 얼싸안아야 할 만큼의 행복에 이르렀을 때에만 갔다. 그러려면 적어도 한 사람,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야 했다. 하긴 안톤 안토니치에게는 화요일(그의 손님 받는 날)에 가야 했으므로, 모든 인류와 얼싸안고 싶은 욕구도 늘 화요일에 맞춰야 했다. 이 안톤 안토니치는 다섯 모퉁이 근처 4층에, 천장이 낮고 하나같이 작아지는, 더없이 절약한 누르스름한 모습의 작은 방 네 칸에 살았다. 그에게는 딸 둘과, 차를 따르는 그들의 이모가 있었다. 딸들은 하나는 열세 살, 하나는 열네 살이었고, 둘 다 코가 들창코였는데, 나는 그들 앞에서 지독하게 쑥스러웠다. 늘 저희끼리 속삭이며 킥킥거렸으니까. 주인은 대개 서재에서, 가죽 소파에 앉아 탁자 앞에서, 우리 부처나 심지어 다른 부처의 관리인 백발의 손님 하나와 함께 앉아 있었다. 나는 거기서 손님을 두셋 넘게, 그것도 늘 똑같은 사람들 말고는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간접세며 원로원의 경매며 월급이며 승진이며 각하며 환심 사는 방법 따위를 두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 사람들 곁에 네 시간씩 바보처럼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인내가 있었다. 나 스스로는 그들과 무엇에 대해서도 감히 말을 걸지도, 말을 걸 줄도 몰랐다. 나는 멍해졌고, 몇 번이고 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마비가 내 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이건 좋고 유익했다. 집에 돌아오면 나는 한동안 모든 인류와 얼싸안고 싶은 욕망을 미뤄 두었다.

하긴 내게는 지인 비슷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옛 학교 동창 시모노프다. 페테르부르크에 학교 동창은 아마 꽤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거리에서 인사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다른 부처로 옮긴 것도 그들과 함께 있지 않고, 미운 내 어린 시절 전체와 단번에 끊으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학교에, 그 끔찍한 징역살이 같은 세월에 저주를! 한마디로 나는 풀려나자마자 동창들과 곧바로 갈라섰다. 마주치면 아직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두셋 남았다. 그 가운데 시모노프가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아무것도 두드러지지 않았고, 한결같고 조용했지만, 나는 그에게서 어떤 독립적인 성격과 정직함까지 알아보았다. 그가 그렇게 아주 편협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한때 그와 나 사이에는 꽤 밝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고 어쩐지 갑자기 안개에 덮여 버렸다. 그는 분명 이런 기억을 짐스러워했고, 내가 예전의 말투로 빠져들까 봐 줄곧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나를 몹시 싫어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확실히 알지 못한 채 그래도 그에게 갔다.

그런데 한번은 목요일에,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목요일에는 안톤 안토니치네 문이 닫혀 있다는 걸 알고서, 나는 시모노프를 떠올렸다. 그에게 가려고 4층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바로 이 양반이 나를 짐스러워하며 괜히 가는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늘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나를 더 부추겨 애매한 처지로 기어들게 했으므로, 나는 들어갔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시모노프를 본 지 거의 한 해가 되어 있었다.

2부 3장

그의 집에는 학교 동창 두 사람이 더 와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들어와도 그들 가운데 누구도 거의 아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을 못 본 지 벌써 몇 해가 되었으니 이상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분명 그들은 나를 아주 흔해 빠진 파리 같은 것으로 여겼다. 모두가 나를 미워하던 학교에서도 이렇게 푸대접하지는 않았다. 물론 나는 이해했다. 그들이 이제 관청에서 출세하지 못한 나를, 너무 영락해서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는 나를 경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 눈에 그런 것들은 내 무능과 보잘것없음을 알리는 간판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만큼의 경멸은 예상하지 못했다. 시모노프는 내가 온 것에 놀라기까지 했다. 그는 전에도 늘 내가 오면 놀라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나는 좀 우울하게 앉아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기 시작했다.

진지하고 뜨겁기까지 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이 양반들이 바로 내일, 장교로 복무하다가 먼 지방으로 떠나는 동창 즈베르코프를 위해 함께 송별 만찬을 열겠다는 것이었다. 무슈 즈베르코프는 내내 나의 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나는 상급반 때부터 특히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하급반 때 그는 그저 모두가 좋아하는 예쁘장하고 까부는 소년이었다. 하긴 나는 하급반 때도 그를 미워했다. 바로 그가 예쁘장하고 까부는 소년이라는 이유로. 그는 늘 한결같이 공부를 못했고 갈수록 더 못했다. 그런데도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학교를 성공적으로 나갔다. 우리 학교에서의 마지막 해에 그에게 유산이 떨어졌다. 농노 이백 명. 우리 학교는 거의 모두 가난했으므로, 그는 우리 앞에서 허풍을 떨기까지 했다. 그는 최고로 천박한 인간이었지만, 허풍을 떨 때조차 사람 좋은 녀석이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공상적이고 말뿐인 명예와 자존심의 형식에도 불구하고, 아주 몇 사람을 빼고는 모두 즈베르코프가 허풍을 떨수록 그의 곁에서 더 알랑거렸다. 무슨 이득 때문에 알랑거린 것도 아니고, 그냥 그가 자연의 선물을 듬뿍 받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게다가 우리 학교에서는 어쩐지 즈베르코프를 날렵함과 좋은 예절의 전문가로 여기는 게 관례였다. 이것이 나를 특히 미치게 했다. 나는 자기를 의심할 줄 모르는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미워했고, 말은 대담하게 하면서도 지독히 어리석게 나오는 자기 재담을 스스로 떠받드는 것을 미워했다. 나는 그의 잘생겼지만 좀 멍청한 얼굴(하긴 나는 내 똑똑한 얼굴과 기꺼이 바꾸었을 것이다)과 1840년대식의 거침없는 장교풍 몸가짐을 미워했다. 나는 그가 여자들과의 앞날의 성공담(그는 아직 장교 견장이 없어서 여자들과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초조하게 견장을 기다렸다)과 앞으로 매번 결투에 나갈 거라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미워했다. 기억한다. 늘 말이 없던 내가 갑자기 즈베르코프와 맞붙었던 일을. 한번은 쉬는 시간에 동창들과 앞날의 재미를 두고 떠들다가 마침내 햇볕 아래 강아지처럼 신이 나서, 갑자기 자기 영지의 시골 처녀는 하나도 그냥 두지 않겠다, 그게 영주의 권리(droit de seigneur)다, 농사꾼들이 감히 항의하면 모조리 매질하고, 수염 난 그 망나니들 모두에게 소작료를 곱절로 물리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우리 상것들은 박수를 쳤고, 나는 맞붙었다. 처녀들과 그 아버지들이 가여워서가 전혀 아니라, 그저 그런 벌레 같은 놈에게 그렇게 박수를 쳤다는 이유로. 그때 나는 이겼다. 그러나 즈베르코프는 어리석긴 해도 명랑하고 대담했으므로 웃어넘겼다. 어찌나 웃어넘겼던지, 사실 나는 완전히 이긴 것도 아니었다. 웃음은 그의 편에 남았다. 그 뒤로도 그는 몇 번 나를 이겼다. 하지만 악의 없이, 어쩐지 장난삼아, 지나가는 길에, 웃으면서. 나는 심술궂게, 경멸하며 대꾸하지 않았다. 졸업한 뒤 그는 내게 한 걸음 다가오려 했다. 나는 그다지 거부하지 않았다. 그게 내 비위를 맞춰 주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곧 자연스럽게 갈라섰다. 그 뒤로 나는 그의 병영 중위다운 성공담과 그가 어떻게 흥청망청 노는지를 들었다. 그다음엔 다른 소문이 들렸다. 그가 직무에서 얼마나 잘나가는지. 거리에서 그는 이제 내게 인사하지 않았고, 나는 그가 나 같은 보잘것없는 인물과 인사를 나누다 체면이 깎일까 봐 두려워한다고 의심했다. 한번은 극장 3층 관람석에서 그를 보기도 했다. 이미 금줄 장식을 달고 있었다. 그는 어느 늙은 장군의 딸들 앞에서 알랑거리며 몸을 굽실거리고 있었다. 세 해쯤 사이에 그는 많이 망가졌다. 여전히 꽤 잘생기고 날렵하긴 했지만, 어쩐지 부었고 살이 찌기 시작했다. 서른쯤이면 완전히 늘어지리라는 게 보였다. 바로 마침내 떠나는 이 즈베르코프에게 우리 동창들이 만찬을 대접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세 해 내내 그와 어울렸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자기들이 그와 대등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시모노프의 두 손님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계 독일인 페르피치킨이었다. 키가 작고 원숭이 같은 얼굴에, 모두를 비웃는 바보이며, 하급반 때부터 나의 가장 지독한 원수였다. 비열하고, 뻔뻔하고, 허풍쟁이인 데다 가장 까다로운 자존심 놀음을 했지만, 물론 속으로는 겁쟁이였다. 그는 속셈이 있어서 즈베르코프에게 알랑거리며 자주 돈을 빌리는 즈베르코프 숭배자 가운데 하나였다. 시모노프의 다른 손님 트루돌류보프는 눈에 띄지 않는 인물로, 키가 크고 차가운 얼굴을 한 군인 청년이었다. 꽤 정직했지만 모든 성공 앞에 머리를 숙였고, 오직 승진에 대해서만 따질 줄 알았다. 그는 즈베르코프와 무슨 먼 친척뻘이었는데, 말하기도 어리석지만 이것이 우리 사이에서 그에게 어느 정도 무게를 주었다. 그는 늘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 대하는 태도는 아주 정중하지는 않아도 참을 만했다.

「자, 한 사람에 칠 루블이면.」 트루돌류보프가 말을 꺼냈다. 「우리 셋이니 이십일 루블. 잘 먹을 수 있겠군. 즈베르코프는 물론 안 내고.」

「그야 물론이지. 우리가 초대하는 거니까.」 시모노프가 결론을 내렸다.

「정말 자네들은 즈베르코프가 우리만 돈을 내게 둘 거라고 생각하나?」 페르피치킨이 마치 주인 장군의 훈장을 자랑하는 뻔뻔한 하인처럼 거만하고 열띠게 끼어들었다. 「체면상 받기는 하겠지만, 그 대신 제 돈으로 반 다스는 내놓을걸.」

「우리 넷이 반 다스를 어떻게 다 마셔.」 트루돌류보프가 반 다스에만 신경을 쓰며 말했다.

「그럼 셋, 즈베르코프까지 넷, 이십일 루블, 오텔 드 파리에서, 내일 다섯 시.」 간사로 뽑힌 시모노프가 최종적으로 결론지었다.

「어째서 이십일 루블이오?」 나는 좀 흥분해서, 겉보기에 기분이 상하기까지 한 듯 말했다. 「나까지 치면 이십일 루블이 아니라 이십팔 루블이 될 텐데.」

갑자기 이렇게 뜻밖에 나를 내세우면 아주 멋질 것 같았다. 그러면 그들 모두 단번에 무릎을 꿇고 존경스러운 눈으로 나를 볼 것 같았다.

「당신도 오겠다는 거요?」 시모노프가 어쩐지 나를 쳐다보기를 피하며 못마땅하게 말했다. 그는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속속들이 안다는 게 나를 미치게 했다.

「어째서 안 된답니까? 나도 동창인 것 같은데. 고백하건대 빠뜨린 게 섭섭하기까지 하오.」 나는 다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당신을 어디서 찾으라고?」 페르피치킨이 거칠게 끼어들었다.

「당신은 늘 즈베르코프와 사이가 나빴잖소.」 트루돌류보프가 얼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건 아무도 판단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오.」 나는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목소리를 떨며 반박했다. 「어쩌면 바로 전에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지금 가고 싶은 거요.」

「참, 누가 당신을 이해하겠소…… 그 고상한 생각들을…….」 트루돌류보프가 히죽 웃었다.

「당신 이름을 적어 두겠소.」 시모노프가 내게로 몸을 돌려 결정했다. 「내일 다섯 시, 오텔 드 파리. 틀리지 마시오.」

「돈은!」 페르피치킨이 나를 가리키며 시모노프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시모노프조차 당황했으니까.

「됐어.」 트루돌류보프가 일어나며 말했다. 「그렇게 가고 싶다면 오라지.」

「이건 우리끼리의, 친구들끼리의 모임이라고.」 페르피치킨도 모자를 집어 들며 화를 냈다. 「공식 모임이 아니란 말이오. 우리는 어쩌면 당신을 전혀 원하지 않는지도…….」

그들은 나갔다. 페르피치킨은 나가면서 내게 전혀 인사하지 않았고, 트루돌류보프는 쳐다보지도 않고 겨우 고개만 까딱했다. 나와 단둘이 남은 시모노프는 무언가 짜증스러운 당혹에 빠져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는 앉지도 않았고 나에게 앉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흠…… 그래…… 그럼 내일. 돈은 지금 주겠소? 확실히 알아 두려고 그러는 거요.」 그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런데 달아오르면서 아득한 옛날부터 시모노프에게 십오 루블을 빚지고 있다는 게 생각났다. 하긴 그걸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갚은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인정해 주시오, 시모노프. 여기 들어올 때 나는 알 수가 없었소……. 잊어버려서 무척 유감이오…….」

「좋소, 좋소, 상관없소. 내일 만찬 때 치르시오. 나는 그저 알아 두려고……. 부디…….」

그는 말을 끊고 더 짜증스럽게 방 안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그는 뒤꿈치로 디디며 더 세게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건 아니오?」 이 분쯤 침묵이 흐른 뒤 내가 물었다.

「오, 아니오!」 그가 갑자기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렇소. 보다시피 나는 또 들를 데가 있어서……. 여기서 멀지 않은……」 그는 무언가 변명하는 목소리로, 좀 부끄러워하며 덧붙였다.

「아이고, 맙소사! 왜 말씀을 안 하셨소!」 나는 하긴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놀랄 만큼 스스럼없는 모습으로 모자를 집어 들며 외쳤다.

「바로 요 앞이오……. 두 걸음이면 돼요…….」 시모노프는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산스러운 모습으로 나를 현관까지 배웅하며 되풀이했다. 「그럼 내일 다섯 시 정각!」 그는 계단에 있는 내게 소리쳤다. 내가 나가는 게 무척 흡족했던 것이다. 나는 미칠 듯이 화가 났다.

「대체 무엇에 씌어서, 무엇에 씌어서 끼어들었나!」 나는 거리를 걸으며 이를 갈았다. 「그것도 즈베르코프 같은 비열한 놈, 돼지 새끼를 위해서! 물론 가지 말아야지. 물론 알 게 뭐냐. 내가 무슨 매인 몸인가? 내일 당장 시내 우편으로 시모노프에게 알려야지…….」

그런데 바로 그래서 나는 미칠 듯이 화가 났다. 내가 갈 거라는 걸 틀림없이 알았으니까. 일부러 갈 거라는 걸. 그리고 내가 가는 게 눈치 없고 꼴사나울수록 더 빨리 가리라는 것을.

게다가 가지 못할 확실한 장애도 있었다. 돈이 없었다. 가진 거라곤 모두 합쳐 구 루블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칠 루블은 내일 당장 하인 아폴론에게 한 달 치 급료로 줘야 했다. 그는 자기 밥은 자기가 해결하는 조건으로 칠 루블을 받고 내 집에 살았다.

아폴론의 성격으로 보아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망나니에 대해서는, 내 이 종기에 대해서는 언젠가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하긴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주지 않고 반드시 갈 것을.

그날 밤 나는 더없이 흉측한 꿈을 꾸었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저녁 내내 징역 같던 학창 시절의 기억이 나를 짓눌렀고, 나는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먼 친척들 손에 그 학교에 처넣어졌다. 나는 그들에게 기대어 살았는데, 그 뒤로 그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의 잔소리에 이미 짓눌려 있고, 이미 생각에 잠기곤 하며, 말이 없고, 모든 것을 사납게 둘러보는 고아였던 나를 처넣은 것이다. 동창들은 내가 그들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술궂고 무자비한 조롱으로 나를 맞았다. 그러나 나는 조롱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서로 그렇게 지내는 것처럼 싸구려로 어울려 지낼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그들을 미워하게 되었고, 겁에 질리고 상처 입은 엄청난 오만 속에 모두에게서 나를 가두었다. 그들의 거친 태도가 나를 분개하게 했다. 그들은 냉소적으로 내 얼굴과 굼뜬 몸을 비웃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의 얼굴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우리 학교에서는 얼굴 표정이 어쩐지 유난히 어리석어지고 변질되었다.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 들어왔던가. 몇 해 지나면 그들은 보기만 해도 역겨워졌다. 열여섯 살 때 이미 나는 음울하게 그들에게 놀랐다. 그때 이미 그들 생각의 자잘함, 그들의 일과 놀이와 대화의 어리석음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들은 그토록 꼭 필요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토록 감동적이고 놀라운 대상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나는 저도 모르게 그들을 나보다 낮게 여기게 되었다. 상처 입은 허영이 나를 그렇게 부추긴 게 아니다. 그리고 제발, 신물 나게 뻔한 관청식 반론, 「나는 꿈만 꾸었지만 그들은 그때 이미 현실의 삶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따위로 내게 덤비지 마시라. 그들은 아무것도, 어떤 현실의 삶도 이해하지 못했다. 맹세하건대 바로 그것이 그들에게서 무엇보다 나를 분개하게 했다. 반대로 그들은 가장 뻔한, 눈을 찌르는 현실조차 공상적으로 어리석게 받아들였고, 그때 이미 성공 하나만을 숭배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옳지만 굴욕당하고 짓눌린 모든 것을 그들은 무자비하고 수치스럽게 비웃었다. 관등을 지성으로 여겼다. 열여섯 살에 벌써 따뜻한 자리를 이야기했다. 물론 여기에는 어리석음, 그리고 그들의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을 끊임없이 에워싼 나쁜 본보기에서 나온 게 많았다. 그들은 흉측할 만큼 방탕했다. 물론 여기에도 겉치레, 꾸민 냉소가 더 많았다. 물론 그들에게서도 방탕 너머로 젊음과 어떤 싱그러움이 언뜻언뜻 비쳤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싱그러움조차 매력이 없었고, 무언가 버릇없는 짓궂음으로 드러났다. 나는 그들을 지독하게 미워했다. 하긴 어쩌면 내가 그들보다 더 나빴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똑같이 갚았고, 나에 대한 역겨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들의 사랑을 바라지 않았다. 반대로 늘 그들의 굴욕을 목말라했다. 그들의 조롱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일부러 되도록 공부를 잘하기 시작했고, 최상위권에 끼어들었다. 이것이 그들을 누그러뜨렸다. 게다가 그들 모두 조금씩, 내가 그들이 읽을 수 없는 책을 이미 읽었고, 그들이 들어 보지도 못한 것들(우리 전공 과정에 들어 있지 않은)을 이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것을 사납고 비웃는 눈으로 보았지만, 도덕적으로는 굴복했다. 선생들조차 이 때문에 나에게 관심을 기울였으니 더 그랬다. 조롱은 그쳤지만 반감은 남았고, 차갑고 팽팽한 관계가 자리 잡았다. 마침내 나 자신이 견디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에 대한, 친구에 대한 욕구가 자라났다. 나는 몇몇과 가까워져 보려 했다. 그러나 그 가까워짐은 늘 부자연스럽게 되었고, 저절로 그렇게 끝나 버렸다. 한번은 어쩌다 친구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영혼 속으로 폭군이었다. 나는 그의 영혼을 한없이 지배하고 싶었다. 그에게 그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경멸을 불어넣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그 환경과 오만하게, 결정적으로 끊으라고 요구했다. 나는 내 열정적인 우정으로 그를 겁먹게 했다. 나는 그를 눈물과 경련에 이르게 했다. 그는 순진하고 자기를 내맡기는 영혼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기를 온통 내게 맡기자, 나는 곧바로 그를 미워하게 되어 밀쳐 냈다. 마치 오직 그를 이겨 먹기 위해서만, 오직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만 그가 필요했던 것처럼. 그러나 나는 모두를 이길 수는 없었다. 내 친구도 그들 누구와도 닮지 않았고, 아주 드문 예외였다. 학교를 나와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모든 끈을 끊고 과거를 저주하고 거기에 재를 뿌리려고 내가 가기로 되어 있던 그 전문 직무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그 뒤에 나는 이 시모노프에게 터덜터덜 찾아갔단 말인가!…

아침에 나는 일찍 잠자리에서 튀어 일어났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지금 당장 벌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오늘 내 삶에 무언가 근본적인 전환이 찾아오고 있으며 반드시 찾아오리라고 믿었다.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평생 아주 자잘한 바깥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이제 곧 내 삶에 무언가 근본적인 전환이 찾아오리라고 여겼다. 하긴 나는 여느 때처럼 관청에 나갔지만, 채비를 하려고 두 시간 먼저 몰래 집으로 빠져나왔다. 가장 중요한 건 첫 번째로 도착하지 않는 거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안 그러면 내가 너무 기뻐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런데 그런 가장 중요한 것이 수천 가지였고, 그 모두가 나를 기진맥진하도록 흥분시켰다. 나는 손수 장화를 한 번 더 닦았다. 아폴론은 하루에 두 번 장화를 닦는 건 질서가 아니라고 여겨서 세상없어도 닦지 않을 테니까. 나는 그가 어떻게든 알아채고 나중에 나를 경멸하지 않도록 현관에서 솔을 훔쳐다가 닦았다. 그다음 옷을 자세히 살펴보니 모든 게 낡고 해지고 닳아 있었다. 나는 너무 지저분하게 지냈다. 제복은 그런대로 멀쩡했지만, 제복을 입고 만찬에 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지 바로 무릎에 커다란 누런 얼룩이 있었다. 나는 이 얼룩 하나만으로도 내 자존심의 십분의 구를 빼앗기리라고 예감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주 비천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이제 현실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기가 꺾였다. 나는 그때도 이 모든 사실을 괴물처럼 부풀리고 있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나는 이제 나를 다스릴 수 없었고, 열병이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절망 속에서 그려 보았다. 이 「비열한 놈」 즈베르코프가 얼마나 거만하고 차갑게 나를 맞을지. 멍청이 트루돌류보프가 얼마나 둔하고 무엇으로도 물리칠 수 없는 경멸로 나를 볼지. 벌레 같은 페르피치킨이 즈베르코프에게 아첨하려고 얼마나 고약하고 뻔뻔하게 나를 두고 킥킥거릴지. 시모노프가 속으로 이 모든 걸 얼마나 잘 이해하고, 내 허영과 소심함의 비천함 때문에 얼마나 나를 경멸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게 얼마나 초라하고, 문학적이지 않고, 일상적일지. 물론 아예 가지 않는 게 가장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게 무엇보다 불가능했다. 나는 일단 끌리기 시작하면 머리끝까지 온통 빨려 들어갔다. 가지 않으면 나는 평생 나를 약 올렸을 것이다. 「어때, 겁먹었지, 현실에 겁먹었지, 겁먹었어!」 반대로 나는 이 모든 「잡동사니들」에게 내가 스스로 상상하는 것만큼 겁쟁이가 전혀 아니라는 걸 열렬히 증명하고 싶었다. 그뿐인가. 비겁한 열병이 가장 세게 도질 때조차, 나는 그들을 이기고, 무찌르고, 사로잡고,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꿈을 꾸었다. 뭐, 「사상의 고매함과 틀림없는 재치 때문에」라도. 그들은 즈베르코프를 버리고, 즈베르코프는 한쪽에 앉아 말없이 부끄러워할 것이며, 나는 즈베르코프를 짓뭉갤 것이다. 그런 다음 어쩌면 그와 화해하고 말을 트는 술잔을 나누겠지. 그런데 무엇보다 나를 성나게 하고 억울하게 한 건, 그때 이미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완전히, 틀림없이 알고 있었다. 실은 이 가운데 무엇도 내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실은 내가 그들을 짓뭉개고, 굴복시키고, 사로잡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며, 설령 그 모든 결과를 얻는다 해도 나 자신이 먼저 한 푼도 쳐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오, 나는 이 하루가 어서 지나가기를 얼마나 하느님께 빌었던가! 말할 수 없는 우울 속에서 나는 창가로 다가가 작은 환기창을 열고, 빽빽하게 내리는 젖은 눈의 탁한 안개를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내 형편없는 벽시계가 쉭쉭거리며 다섯 시를 쳤다. 나는 모자를 집어 들고, 아폴론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그는 아침부터 줄곧 내가 급료를 주기를 기다렸지만, 자존심 때문에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의 곁을 스쳐 문을 빠져나갔고, 일부러 마지막 반 루블로 잡은 날쌘 삯마차를 타고 나리처럼 오텔 드 파리로 굴러 들어갔다.

2부 4장

나는 전날부터 내가 첫 번째로 도착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첫 번째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나는 우리 방을 찾는 것조차 겨우겨우 해냈다. 식탁은 아직 다 차려지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인가? 여러 번 캐물은 끝에 마침내 하인들에게서 만찬이 다섯 시가 아니라 여섯 시로 예약되어 있다는 대답을 얻어 냈다. 식당 계산대에서도 그렇다고 확인해 주었다. 캐묻는 것조차 부끄러워졌다. 아직 다섯 시 이십오 분밖에 안 되었다. 그들이 시간을 바꿨다면 어쨌든 알려 주어야 했다. 시내 우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를 나 자신 앞에서, 그리고…… 그리고 하인들 앞에서라도 「망신」시킬 게 아니라. 나는 앉았다. 하인이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 앞에서 어쩐지 더 억울해졌다. 여섯 시가 되자 켜져 있던 램프 말고도 방에 촛불이 들어왔다. 그런데 하인은 내가 도착하자마자 촛불을 들여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옆방에서는 음울한 손님 둘이 따로따로 식탁에 앉아 성난 얼굴로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 멀리 어느 방은 몹시 시끄러웠다. 소리까지 질렀다. 한 무리가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무언가 고약한 프랑스어 비명이 들렸다. 부인들을 낀 만찬이었다. 한마디로 몹시 메스꺼웠다. 나는 이보다 더 고약한 순간을 보낸 적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들이 정확히 여섯 시에 한꺼번에 나타났을 때, 나는 첫 순간 무슨 해방자라도 맞듯 그들이 반가워서 모욕당한 얼굴을 해야 한다는 걸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즈베르코프가 무리를 이끄는 듯 맨 앞에 들어왔다. 그도 그들 모두도 웃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보자 즈베르코프는 자세를 가다듬고, 허리를 좀 굽히며 마치 교태라도 부리듯 서두르지 않고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다정하게, 하지만 너무 다정하지는 않게, 무언가 조심스러운, 거의 장군 같은 정중함으로. 마치 손을 내밀면서 무언가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것처럼. 나는 반대로 그가 들어오자마자 예전의 그 가늘고 비명 섞인 웃음으로 크게 웃어 젖히고, 첫마디부터 그의 밋밋한 농담과 재담이 쏟아지리라고 상상했다. 나는 전날 밤부터 바로 그것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거만하고 이렇게 각하 같은 다정함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는 이제 모든 면에서 자기가 나보다 헤아릴 수 없이 높다고 여기는 건가? 그가 이런 장군 티로 나를 모욕하려고만 한다면 아직 괜찮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침을 뱉고 떨쳐 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만약 정말로 모욕할 생각 없이, 그의 양 대가리에 자기가 나보다 헤아릴 수 없이 높고 나를 오직 보호하는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진지하게 기어들어 갔다면? 이 짐작 하나만으로 나는 벌써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놀랐소.」 그는 혀 짧은 소리를 내고, 쉭쉭 새는 소리를 내며, 말을 길게 늘이며 말을 꺼냈다. 전에는 그런 버릇이 없었다.

「우리는 어쩐지 도무지 마주치질 않았군. 당신은 우리를 피하오. 괜한 일이오.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무섭지 않소. 자, 어쨌든 다아시 이어 가게 되어 기쁘오…….」

그러고는 그는 무심하게 몸을 돌려 창턱에 모자를 놓았다.

「오래 기다렸소?」 트루돌류보프가 물었다.

「어제 정해 준 대로 정확히 다섯 시에 왔소.」 나는 곧 터질 것을 예고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시간이 바뀌었다고 알려 주지 않았나?」 트루돌류보프가 시모노프에게 돌아섰다.

「안 알렸어. 잊었어.」 시모노프는 아무 뉘우침도 없이 대답하고, 내게 사과조차 하지 않은 채 전채 요리를 챙기러 갔다.

「그럼 여기 벌써 한 시간이나 있었단 말이오, 아이고, 불쌍해라!」 즈베르코프가 비웃듯 외쳤다. 그의 생각에는 이게 정말로 지독하게 우스워야 했으니까. 그를 따라 비열한 페르피치킨이 강아지 같은 비열하고 쨍쨍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도 내 처지가 몹시 우습고 민망해 보였던 것이다.

「이건 전혀 우스운 일이 아니오!」 나는 점점 더 짜증을 내며 페르피치킨에게 소리쳤다. 「잘못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있소. 나한테 알려 주는 걸 소홀히 했소. 이건, 이건, 이건…… 그냥 터무니없소.」

「터무니없을 뿐 아니라 좀 더한 거지.」 트루돌류보프가 순진하게 내 편을 들며 투덜거렸다. 「당신은 너무 무르오. 이건 그냥 무례요. 물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런데 시모노프가 어떻게…… 흠!」

「누가 나한테 이런 장난을 쳤다면.」 페르피치킨이 말했다. 「나는…….」

「무언가 가져오라고 시키지 그랬소.」 즈베르코프가 말을 끊었다. 「아니면 그냥 기다리지 말고 식사를 청하든가.」

「그건 허락 없이도 할 수 있었다는 걸 인정하시오.」 나는 잘라 말했다. 「내가 기다렸다면, 그건…….」

「앉읍시다, 여러분.」 들어온 시모노프가 외쳤다. 「다 준비됐소. 샴페인은 내가 책임지오, 아주 잘 차가워졌소……. 나는 당신 집을 몰랐으니 어디서 당신을 찾겠소?」 그는 갑자기 내게로 돌아섰지만, 또 어쩐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분명 그는 무언가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어제 일 뒤로 생각을 굳힌 모양이었다.

모두 앉았고, 나도 앉았다. 식탁은 둥글었다. 내 왼쪽에는 트루돌류보프가, 오른쪽에는 시모노프가 앉게 되었다. 즈베르코프는 맞은편에 앉았고, 페르피치킨은 그 옆, 그와 트루돌류보프 사이에 앉았다.

「마아알씀해 보시오, 당신은…… 관청에 있소?」 즈베르코프가 계속 나를 상대했다. 내가 당황한 걸 보고, 그는 나를 다정하게 대해서 이를테면 기운을 북돋아 줘야 한다고 진지하게 상상했던 것이다. 「이 녀석, 내가 술병이라도 집어 던지길 바라는 건가.」 나는 미칠 듯이 화가 나서 생각했다.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나는 어쩐지 부자연스러울 만큼 빨리 짜증이 났다.

「……부서에 있소.」 나는 접시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

「그래애…… 이익이 되오오? 마아알씀해 보시오, 무엇이 당신을 예전 자리를 그만두게 해애앴소?」

「예전 자리를 그만두고 싶었던 게 그만두게 해애애애앴소.」 나는 이제 거의 나를 다스리지 못한 채 세 배로 길게 늘였다. 페르피치킨이 푸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시모노프는 비꼬듯 나를 보았고, 트루돌류보프는 먹던 걸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즈베르코프는 얼굴이 굳었지만 알아채지 못한 척하려 했다.

「그래애애, 그런데 당신 수입은 어떻소?」

「무슨 수입 말이오?」

「그러니까 워-월급 말이오.」

「왜 나를 시험하는 거요!」

하긴 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월급이 얼마인지 말해 버렸다. 나는 지독하게 얼굴이 빨개졌다.

「넉넉하진 않군.」 즈베르코프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렇고말고요, 카페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형편은 못 되지!」 페르피치킨이 뻔뻔하게 덧붙였다.

「내가 보기엔 그냥 가난한 거요.」 트루돌류보프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얼마나 여위었는지, 얼마나 변했는지…… 그때 이후로…….」 즈베르코프가 이제 독이 없지 않게, 무언가 뻔뻔한 안타까움을 담아 나와 내 옷차림을 훑어보며 덧붙였다.

「그만 좀 민망하게 하시지.」 페르피치킨이 킥킥거리며 외쳤다.

「이보시오, 알아 두시오. 나는 민망해하지 않소.」 나는 마침내 터져 나왔다. 「들리시오! 나는 여기서, 「카페 레스토랑」에서 내 돈으로, 내 돈으로 식사하는 거요, 남의 돈이 아니라. 이걸 알아 두시오, 무슈 페르피치킨.」

「뭐어라고! 여기서 누가 제 돈으로 안 먹는다는 거요? 당신은 마치…….」 페르피치킨이 가재처럼 새빨개져서 미친 듯이 내 눈을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그러어니까.」 나는 너무 나갔다고 느끼며 대답했다. 「좀 더 똑똑한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소.」

「당신 똑똑함을 보여 주실 작정인가 보군?」

「걱정 마시오. 그건 여기서 완전히 쓸데없는 일일 테니까.」

「이봐요, 당신 왜 그렇게 꽥꽥대는 거요, 응? 당신 그 과아안청에서 벌써 돌아 버린 거 아니오?」

「그만, 여러분, 그만!」 즈베르코프가 절대 권력자처럼 외쳤다.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이야!」 시모노프가 투덜거렸다.

「정말 어리석소. 우리는 좋은 친구를 여행길에 배웅하려고 친구들끼리 모였는데, 당신은 시비를 따지고 있소.」 트루돌류보프가 나 하나에게만 거칠게 말했다. 「어제 당신이 스스로 끼워 달라고 했으니, 모두의 조화를 깨지 마시오…….」

「그만, 그만.」 즈베르코프가 외쳤다. 「그만들 하시오, 여러분. 이건 안 되오. 그보다 내가 그저께 하마터면 결혼할 뻔한 이야기를 해 주겠소…….」

그리고 이 양반이 그저께 하마터면 결혼할 뻔한 이야기라는 무슨 비방 같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하긴 결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지만, 이야기에는 장군이며 대령이며 심지어 시종보까지 줄곧 어른거렸고, 즈베르코프는 그들 사이에서 거의 우두머리였다. 맞장구치는 웃음이 시작되었다. 페르피치킨은 비명까지 질렀다.

모두 나를 내버려 두었고, 나는 짓뭉개지고 없어진 채 앉아 있었다.

「주여, 이게 내 동무들이란 말인가!」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그들 앞에서 얼마나 바보 꼴을 드러냈나! 그런데 나는 페르피치킨에게 너무 많이 허락했다. 멍청이들은 자기 식탁에 자리를 내준 게 나에게 명예를 베푼 거라고 생각한다. 명예를 베푸는 게 그들이 아니라 나, 바로 나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여위었다! 옷차림!」 오, 저주받을 바지! 즈베르코프는 아까 무릎의 누런 얼룩을 알아챘다……. 뭘 망설이나! 지금 당장, 이 순간 식탁에서 일어나 모자를 들고 한마디도 없이 그냥 나가자……. 경멸의 뜻으로! 그리고 내일이라도 결투를. 비열한 놈들. 칠 루블이 아까울 리가 없잖나.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겠지……. 빌어먹을! 칠 루블 따위 아깝지 않아! 이 순간 나간다!……」

물론 나는 남았다.

나는 괴로워서 라피트와 셰리주를 잔으로 들이켰다. 익숙하지 않아서 빨리 취했고, 취기와 함께 분함도 자라났다. 갑자기 그들 모두를 가장 뻔뻔한 방식으로 모욕하고 나서 나가고 싶어졌다. 기회를 잡아 나를 보여 주자. 우습긴 해도 똑똑하다고 말하게 하자……. 그리고…… 그리고…… 한마디로 그놈들 따위 알 게 뭐냐!

나는 흐리멍덩해진 눈으로 뻔뻔하게 그들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벌써 나를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그들 쪽은 시끄럽고, 떠들썩하고, 즐거웠다. 줄곧 즈베르코프가 떠들었다. 나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즈베르코프는 어느 화려한 부인을 마침내 고백하게 만든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물론 말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 일에서 그의 절친한 친구인 무슨 꼬마 공작, 농노 삼천 명을 거느린 경기병 콜랴가 특히 도와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농노 삼천 명을 거느린 그 콜랴는 여기 당신을 배웅하러 오지도 않았구먼.」 나는 갑자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잠시 모두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벌써 취했소.」 마침내 트루돌류보프가 나를 알아채 주기로 하고, 경멸하듯 내 쪽을 곁눈질했다. 즈베르코프는 말없이 벌레 보듯 나를 살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시모노프가 서둘러 샴페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트루돌류보프가 잔을 들었고, 그를 따라 나만 빼고 모두 들었다.

「자네의 건강과 즐거운 여행을 위해!」 그가 즈베르코프에게 외쳤다. 「지난 세월을 위해, 여러분, 우리의 앞날을 위해, 만세!」

모두 마시고 즈베르코프에게 입을 맞추러 다가갔다.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가득 찬 잔이 손도 대지 않은 채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당신은 안 마실 거요?」 참다못한 트루돌류보프가 위협하듯 내게 돌아서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나대로 따로 축사를 하고 싶소…… 그러고 나서 마시겠소, 트루돌류보프 씨.」

「역겨운 심술쟁이!」 시모노프가 투덜거렸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곧게 세우고 열에 들떠 잔을 들었다. 무언가 비상한 것을 준비하면서도, 정확히 무슨 말을 할지 스스로도 아직 모른 채.

「조용(Silence)!」 페르피치킨이 외쳤다. 「대단한 지혜가 나오겠군!」

즈베르코프는 무슨 일인지 이해하고 아주 진지하게 기다렸다.

「즈베르코프 중위.」 내가 말을 꺼냈다. 「알아 두시오. 나는 미사여구와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자들과 잘록하게 조인 허리를 증오하오……. 이게 첫째 항목이고, 이어서 둘째가 나오겠소.」

모두 크게 들썩였다.

「둘째 항목. 나는 음탕한 재미와 음탕한 재미를 좇는 자들을 증오하오. 특히 음탕한 재미를 좇는 자들을!」

「셋째 항목. 나는 진실과 진심과 정직을 사랑하오.」 나는 거의 기계적으로 이어 갔다. 스스로 공포로 얼어붙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어떻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사상을 사랑하오, 무슈 즈베르코프. 나는 대등한 참된 우정을 사랑하오, 그런 게 아니라…… 흠……. 나는 사랑하오……. 하긴, 뭐 어떻소? 나도 당신 건강을 위해 마시겠소, 무슈 즈베르코프. 체르케스 여인들을 홀리고, 조국의 적들을 쏘고, 그리고…… 그리고……. 당신 건강을 위해, 무슈 즈베르코프!」

즈베르코프가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대단히 고맙소.」

그는 지독하게 모욕을 느꼈고 창백해지기까지 했다.

「빌어먹을.」 트루돌류보프가 주먹으로 식탁을 치며 으르렁거렸다.

「아니, 이런 건 낯짝을 갈겨 줘야 해!」 페르피치킨이 비명을 질렀다.

「쫓아내야 해!」 시모노프가 투덜거렸다.

「한마디도, 여러분, 손짓 하나도 마시오!」 즈베르코프가 모두의 분개를 막으며 엄숙하게 외쳤다. 「모두에게 고맙소. 하지만 내가 그의 말을 얼마나 값지게 여기는지는 나 스스로 그에게 증명해 보이겠소.」

「페르피치킨 씨, 방금 한 말에 대해 내일 당장 나에게 명예의 대가를 치르시오!」 나는 거드름을 피우며 페르피치킨에게 돌아서서 크게 말했다.

「그러니까 결투 말이오? 좋소.」 그가 대답했다. 그런데 아마 결투를 신청하는 내가 어찌나 우스웠고 그게 내 꼴에 어찌나 어울리지 않았던지, 모두, 그리고 모두를 따라 페르피치킨까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 물론 내버려 둬! 완전히 취했잖아!」 트루돌류보프가 역겹다는 듯 말했다.

「저 사람 이름을 적어 준 걸 절대 용서하지 못할 거야!」 시모노프가 또 투덜거렸다.

「지금이야말로 모두에게 술병을 던질 때다.」 나는 생각하고, 술병을 들어…… 내 잔에 가득 따랐다.

「……아니, 끝까지 앉아 있는 게 낫다!」 나는 계속 생각했다. 「여러분은 내가 나가면 기쁘겠지. 절대 안 나간다. 여러분을 조금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표시로 일부러 끝까지 앉아서 마실 거다. 여기는 술집이고 나는 입장료를 냈으니까 앉아서 마실 거다. 여러분을 졸로, 있지도 않은 졸로 여기니까 앉아서 마실 거다. 앉아서 마실 거다…… 그리고 원하면 노래도 부를 거다. 그렇고말고요, 노래도.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으니까…… 노래 부를 권리가…… 흠.」

그러나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들 누구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더없이 당당한 자세를 취하며 그들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아아, 그들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그들과 화해하기를 얼마나, 얼마나 바랐던가! 여덟 시를 쳤고, 마침내 아홉 시를 쳤다. 그들은 식탁에서 소파로 옮겨 갔다. 즈베르코프는 한쪽 다리를 둥근 탁자에 올리고 긴 의자에 드러누웠다. 포도주도 그리로 옮겨졌다. 그는 정말로 그들에게 자기 돈으로 세 병을 내놓았다. 물론 나는 부르지 않았다. 모두 소파에 둘러앉았다. 그들은 거의 경건하게 그의 말을 들었다. 그들이 그를 좋아한다는 게 보였다. 「왜? 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따금 그들은 취해서 황홀해지며 서로 입을 맞추었다. 그들은 캅카스에 대해, 참된 정열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갈빅 카드놀이에 대해, 벌이 좋은 관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 누구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경기병 포드하르젭스키의 수입이 얼마인지 이야기하며 그의 수입이 많다고 기뻐했다. 역시 그들 누구도 본 적 없는 D 공작 부인의 비상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침내는 셰익스피어가 불멸이라는 데까지 이르렀다.

나는 경멸하듯 미소 지으며 방 반대편, 소파 바로 맞은편 벽을 따라 식탁에서 난로까지, 그리고 다시 돌아오며 걸어 다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들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뒤꿈치로 디디며 장화를 쿵쿵거렸다. 그러나 모든 게 헛일이었다. 그들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여덟 시부터 열한 시까지 그렇게 그들 바로 앞을, 줄곧 같은 자리를, 식탁에서 난로까지, 난로에서 다시 식탁까지 걸어 다닐 인내가 있었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걷는 거다.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방에 들어오던 하인이 몇 번 멈춰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너무 자주 돌아서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따금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이 세 시간 동안 나는 세 번 땀에 젖었다가 말랐다. 때로 가장 깊은, 독 묻은 통증과 함께 한 생각이 내 가슴을 찔렀다. 십 년, 이십 년, 사십 년이 지나도 나는 그래도, 사십 년이 지나서라도, 내 온 생애에서 가장 더럽고 가장 우습고 가장 끔찍한 이 순간들을 역겨움과 굴욕 속에 떠올리리라는 생각이. 이보다 더 뻔뻔하게, 더 자진해서 자기를 굴욕 주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완전히, 완전히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식탁에서 난로까지, 그리고 다시 돌아오며 걸어 다녔다. 「오, 내가 어떤 감정과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교양 있는지 여러분이 알기만 한다면!」 나는 이따금 속으로 내 원수들이 앉아 있는 소파에 대고 말하며 생각했다. 그러나 내 원수들은 마치 방에 내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한 번, 딱 한 번 그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바로 즈베르코프가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할 때 내가 갑자기 경멸하듯 크게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어찌나 꾸며 내어 역겹게 콧방귀를 뀌었던지, 그들 모두 한꺼번에 이야기를 멈추고 이 분쯤 말없이, 진지하게, 웃지도 않고, 내가 식탁에서 난로까지 벽을 따라 걷는 모습과 내가 그들에게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그들은 말을 걸지 않았고, 이 분 뒤 다시 나를 내버려 두었다. 열한 시를 쳤다.

「여러분.」 즈베르코프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이제 모두 거기로.」

「물론, 물론!」 다른 이들이 말했다.

나는 즈베르코프에게로 휙 돌아섰다. 나는 어찌나 지치고 어찌나 부서졌던지, 목을 긋는 한이 있어도 끝내 버리고 싶었다! 나는 열이 났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관자놀이에 말라붙어 있었다.

「즈베르코프! 당신에게 용서를 빌겠소.」 나는 날카롭고 단호하게 말했다. 「페르피치킨, 당신에게도, 모두에게, 모두에게. 내가 모두를 모욕했소!」

「아하! 결투는 만만치 않다 이거지!」 페르피치킨이 독기를 품고 쉭쉭거렸다.

내 가슴이 아프게 베였다.

「아니, 나는 결투가 두려운 게 아니오, 페르피치킨! 화해한 뒤에 내일 당신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소. 나는 그걸 고집하기까지 하오. 당신은 거절할 수 없소. 나는 결투가 두렵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증명하고 싶소. 당신이 먼저 쏘고, 나는 허공에 쏘겠소.」

「혼자 신이 났군.」 시모노프가 말했다.

「그냥 돌았어!」 트루돌류보프가 대꾸했다.

「비켜 주시오, 왜 길을 가로막고 섰소!…… 대체 뭘 원하는 거요?」 즈베르코프가 경멸하듯 대답했다. 그들 모두 얼굴이 벌겠고 눈이 번들거렸다. 많이 마셨던 것이다.

「당신의 우정을 청하오, 즈베르코프. 내가 당신을 모욕했지만…….」

「모욕했다고? 다-당신이! 나-나르을! 알아 두시오, 이보시오. 당신은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나를 모욕할 수 없소!」

「그만하면 됐소, 비키시오!」 트루돌류보프가 못을 박았다. 「가세.」

「올림피아는 내 거요, 여러분, 약속이오!」 즈베르코프가 외쳤다.

「이의 없소! 이의 없소!」 그들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침 세례를 받은 채 서 있었다. 무리는 시끄럽게 방을 나갔고, 트루돌류보프는 무슨 어리석은 노래를 뽑기 시작했다. 시모노프는 하인들에게 팁을 주려고 아주 잠깐 남았다. 나는 갑자기 그에게 다가갔다.

「시모노프! 육 루블만 주시오!」 나는 단호하고 절망적으로 말했다.

그는 무언가 멍한 눈으로 몹시 놀라 나를 보았다. 그도 취해 있었다.

「설마 당신도 거기 우리와 같이 가겠다는 거요?」

「그렇소!」

「나는 돈이 없소!」 그는 잘라 말하고 경멸하듯 히죽 웃으며 방을 나가려 했다.

나는 그의 외투를 붙잡았다. 악몽이었다.

「시모노프! 당신에게 돈이 있는 걸 봤소. 왜 거절하는 거요? 내가 비열한 놈이오? 거절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당신이 알기만 한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청하는지 알기만 한다면! 여기에 모든 것이, 내 모든 앞날이, 내 모든 계획이 달려 있소.」

시모노프는 돈을 꺼내 거의 내게 내던지다시피 했다.

「가져가시오, 그렇게 뻔뻔하다면!」 그는 무자비하게 말하고 그들을 따라잡으러 뛰어갔다.

나는 잠시 혼자 남았다. 어지러움, 먹다 남긴 음식, 바닥의 깨진 술잔, 엎질러진 포도주, 궐련 꽁초, 머릿속의 취기와 헛소리, 가슴속의 괴로운 우울,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걸 보고 모든 걸 듣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는 하인.

「거기로!」 나는 외쳤다. 「그들 모두 무릎을 꿇고 내 다리를 끌어안으며 내 우정을 빌든가, 아니면…… 아니면 즈베르코프의 뺨을 갈겨 주겠다!」

2부 5장

「그러니까 이거로구나, 이거로구나, 마침내 현실과의 충돌이란.」 나는 계단을 곤두박질치듯 뛰어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이건 이제 로마를 떠나 브라질로 가는 교황이 아니로구나. 이건 이제 코모 호수의 무도회가 아니로구나!」

「너는 비열한 놈이다.」 머릿속에 휙 스쳐 갔다. 「이런 걸 두고 지금 비웃다니.」

「그러라지!」 나는 나 자신에게 대답하며 외쳤다. 「이제 어차피 모든 게 끝장났다!」

그들은 벌써 자취도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았다.

현관 앞에는 거친 모직 외투를 입은 밤 삯마차꾼 하나가 아직도 쏟아지는, 어쩐지 따뜻하기까지 한 젖은 눈을 온통 뒤집어쓴 채 외로이 서 있었다. 후텁지근하고 숨이 막혔다. 그의 작고 털북숭이인 얼룩말도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기침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걸 아주 잘 기억한다. 나는 나무껍질로 엮은 썰매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앉으려고 막 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방금 시모노프가 내게 육 루블을 주던 기억이 나를 그대로 꺾어 버렸고, 나는 자루처럼 썰매에 쓰러졌다.

「아니! 이 모든 걸 되찾으려면 많은 걸 해야 해!」 나는 소리쳤다. 「하지만 되찾고 말겠다. 아니면 오늘 밤 이 자리에서 죽겠다. 가자!」

우리는 출발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온통 회오리가 휘돌았다.

「무릎을 꿇고 내 우정을 빌지는 않겠지. 그건 신기루다. 천박한 신기루, 역겹고 낭만적이고 공상적인 신기루다. 그 코모 호수의 무도회와 똑같은. 그러니 나는 즈베르코프의 뺨을 갈겨야 한다! 갈길 의무가 있다. 자, 정해졌다. 나는 지금 그의 뺨을 갈기러 날아간다.」

「몰아라!」

삯마차꾼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들어가자마자 갈길 거다. 뺨을 갈기기 전에 서론 삼아 몇 마디 해야 할까? 아니! 그냥 들어가서 갈긴다. 그들은 모두 홀에 앉아 있고, 그는 올림피아와 소파에 있겠지. 저주받을 올림피아! 그 여자는 한번 내 얼굴을 비웃으며 나를 거절했다.

올림피아는 머리채를 끌어당기고, 즈베르코프는 귀를 잡아당길 거다! 아니, 차라리 한쪽 귀만 잡고 그 귀를 잡은 채 온 방 안을 끌고 다닐 거다. 어쩌면 그들 모두 나를 때리기 시작해서 떠밀어 낼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러겠지. 그러라지! 어쨌든 먼저 뺨을 갈긴 건 나다. 내 주도권이다. 명예의 법칙에 따르면 이게 전부다. 그는 이미 낙인찍혔고, 결투 말고는 어떤 매질로도 뺨 맞은 자국을 씻어 낼 수 없다. 그는 싸워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나를 때리라지. 그러라지, 비천한 놈들! 특히 트루돌류보프가 때리겠지. 그는 힘이 세니까. 페르피치킨은 옆에서 달라붙어 틀림없이 머리채를 잡겠지. 하지만 그러라지, 그러라지! 나는 각오하고 가는 거다. 그들의 양 대가리도 마침내 이 모든 것의 비극성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들이 나를 문으로 끌고 갈 때, 나는 실은 그들이 내 새끼손가락 하나만 한 값어치도 없다고 외칠 거다.」

「몰아라, 마부, 몰아라!」 나는 삯마차꾼에게 외쳤다.

그는 흠칫 떨며 채찍을 휘둘렀다. 내가 너무 사납게 외쳤던 것이다.

「새벽에 싸운다, 이건 이미 정해졌다. 관청과는 끝이다. 아까 페르피치킨은 관청을 과아안청이라고 했지. 그런데 권총은 어디서 구하지? 헛소리! 월급을 가불받아 사면 된다. 화약은, 총알은? 그건 입회인이 할 일이다. 그런데 새벽까지 이걸 다 어떻게 해내지? 입회인은 어디서 구하지? 나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

「헛소리!」 나는 더 사납게 휘몰아치며 외쳤다. 「헛소리!」

「거리에서 처음 마주치는 사람이, 내가 말을 걸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내듯 똑같이 내 입회인이 될 의무가 있다. 가장 별난 경우도 허용되어야 한다. 내일 국장에게 직접 입회인이 되어 달라고 청한다 해도, 그도 오직 기사도 정신 하나로 승낙하고 비밀을 지켜야 할 것이다! 안톤 안토니치…….」

문제는 바로 그 순간, 온 세상 누구보다 더 분명하고 선명하게, 내 짐작들이 얼마나 추잡하게 터무니없는지, 그리고 메달의 뒷면 전체가 내 눈앞에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몰아라, 마부, 몰아라, 이 악당아, 몰아라!」

「에이, 나리!」 이 시골 힘장사가 말했다.

갑자기 찬 기운이 온몸에 끼쳤다.

「그런데 차라리…… 차라리…… 지금 곧장 집으로 가는 게? 오, 맙소사! 왜, 왜 어제 이 만찬에 가겠다고 나섰던가! 하지만 아니, 그럴 수 없다! 식탁에서 난로까지 세 시간 동안의 산책은? 아니, 그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이 이 산책의 대가를 내게 치러야 한다! 그들이 이 치욕을 씻어야 한다!」

「몰아라!」

「그런데 만약 그들이 나를 경찰서에 넘기면? 감히 못 하겠지! 추문을 두려워할 테니. 그런데 만약 즈베르코프가 경멸해서 결투를 거절하면? 틀림없이 그러겠지. 하지만 그때 나는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겠다……. 그때 나는 그가 내일 떠날 때 역마 정거장으로 뛰어가서, 그가 마차에 오를 때 그의 다리를 붙잡고 외투를 벗겨 버릴 거다. 이빨로 그의 손을 물어뜯을 거다. 「모두 보시오, 절망한 인간을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는지!」 그가 내 머리를 때리고, 그들 모두 뒤에서 때리라지. 나는 모든 구경꾼에게 외칠 거다. 「보시오, 여기 내 침을 얼굴에 묻힌 채 체르케스 여인들을 홀리러 가는 강아지 새끼가 있소!」

물론 그 뒤에는 모든 게 끝장이다! 관청은 지상에서 사라진다. 사람들이 나를 붙잡아 재판에 넘기고, 관청에서 쫓아내고, 감옥에 가두고, 시베리아로 유형 보낼 거다. 상관없다! 열다섯 해 뒤 감옥에서 풀려나면 나는 누더기를 걸친 거지가 되어 그를 뒤쫓아 터덜터덜 갈 거다. 어느 지방 도시에서 그를 찾아낼 거다. 그는 결혼해서 행복하겠지. 다 큰 딸도 있겠지……. 나는 말할 거다. 「보아라, 이 악마야, 움푹 꺼진 내 뺨과 내 누더기를 보아라! 나는 모든 걸 잃었다. 경력도, 행복도, 예술도, 학문도, 사랑하는 여인도. 모두 너 때문이다. 여기 권총이 있다. 나는 내 권총을 쏘러 왔다. 그리고…… 그리고 너를 용서한다.」 그러고는 나는 허공에 쏘고, 나에 대해서는 소식도 소문도 없을 거다…….」

나는 울음까지 터뜨릴 뻔했다. 바로 그 순간 이 모든 게 실비오와 레르몬토프의 「가면무도회」에서 나온 것임을 완전히 정확하게 알고 있었는데도. 그러자 갑자기 지독하게 부끄러워졌다. 어찌나 부끄러웠던지 나는 말을 세우고 썰매에서 내려 거리 한가운데 눈 속에 섰다. 삯마차꾼은 놀라서 한숨을 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란 말인가? 거기로 갈 수도 없었다. 헛소리가 될 테니까.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러면 그땐……. 주여! 어떻게 그만둘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모욕을 당한 뒤에!

「아니!」 나는 다시 썰매로 뛰어들며 외쳤다. 「이건 정해진 거다, 이건 운명이다! 몰아라, 몰아라, 거기로!」

그리고 초조한 나머지 나는 주먹으로 마부의 목덜미를 쳤다.

「아니 왜 이러슈, 왜 때려요?」 조그만 농사꾼이 외쳤지만, 그래도 비루먹은 말을 채찍질해서 말이 뒷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젖은 눈이 송이송이 쏟아졌다. 나는 외투를 풀어 헤쳤다. 눈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다른 모든 걸 잊었다. 뺨을 갈기기로 완전히 결심했고, 이제 반드시 지금 당장 그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 어떤 힘으로도 멈출 수 없으리라는 것을 공포 속에 느꼈으니까. 인적 없는 가로등들이 장례식 횃불처럼 눈 안개 속에서 음울하게 언뜻언뜻 스쳐 갔다. 눈이 외투 속으로, 프록코트 속으로, 넥타이 속으로 파고들어 녹았다. 나는 여미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걸 잃었으니까! 마침내 우리는 도착했다. 나는 거의 정신없이 뛰어내려 계단을 뛰어올라 손과 발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특히 다리가, 무릎이 지독하게 후들거렸다. 어쩐지 금세 문이 열렸다. 마치 내가 올 줄 알았던 것처럼. (정말로 시모노프가 어쩌면 한 사람이 더 올지도 모른다고 미리 알려 두었다. 여기서는 미리 알리고 대체로 조심해야 했다. 이곳은 그 무렵의 「유행 상점」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런 곳들은 이제 오래전에 경찰이 쓸어 버렸다. 낮에는 정말로 상점이었다. 그러나 저녁이면 소개를 받은 사람은 손님으로 올 수 있었다.) 나는 어두운 가게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 내가 아는 홀로 들어갔다. 거기엔 촛불 하나만 타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멈춰 섰다.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어디 있소?」 나는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이미 흩어져 버린 뒤였다…….

내 앞에는 어리석은 미소를 띤 인물 하나, 나를 어느 정도 아는 여주인이 서 있었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다른 인물 하나가 들어왔다.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나는 방 안을 서성였고, 아마 혼잣말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마치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 같았고, 온 존재로 기쁘게 그것을 예감했다. 나는 뺨을 갈겼을 것이다, 틀림없이, 틀림없이 갈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없고…… 모든 게 사라졌고, 모든 게 바뀌었다!…… 나는 둘러보았다. 아직 무엇이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기계적으로 나는 들어온 아가씨를 흘끗 보았다. 싱싱하고 젊은, 좀 창백한 얼굴이 내 앞에 언뜻 비쳤다. 곧고 짙은 눈썹에, 진지하고 어쩐지 좀 놀란 듯한 눈길이었다. 이것이 곧바로 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면 나는 그녀를 미워했을 것이다. 나는 더 뚫어지게, 애쓰듯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생각이 아직 다 모이지 않았다. 이 얼굴에는 무언가 순박하고 착한 것이 있었지만, 어쩐지 이상할 만큼 진지했다. 틀림없이 그녀는 이것 때문에 여기서 손해를 보고 있을 것이고, 저 바보들 가운데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긴 키가 크고 튼튼하며 몸매가 좋았지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옷차림은 더없이 수수했다. 무언가 추잡한 것이 나를 물었다. 나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는 우연히 거울을 보았다. 흥분한 내 얼굴이 더없이 역겹게 보였다. 창백하고, 심술궂고, 비열하고, 머리는 헝클어진 얼굴. 「그러라지, 오히려 기쁘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에게 역겹게 보이는 게 바로 기쁘다. 그게 즐겁다…….」

2부 6장

……어딘가 칸막이 너머에서, 마치 무슨 센 압력을 받은 듯, 마치 누가 목이라도 조르는 듯 시계가 그르렁거렸다. 부자연스러울 만큼 길게 그르렁거린 뒤, 가늘고 추잡하고 어쩐지 뜻밖에 잦은 종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누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온 것처럼. 두 시를 쳤다. 나는 정신이 들었다. 잠들었던 건 아니고 그저 반쯤 정신을 놓고 누워 있었을 뿐이지만.

커다란 옷장이 들어차 있고 상자며 넝마며 온갖 옷가지 잡동사니가 널린 좁고 비좁고 천장 낮은 방은 거의 완전히 어두웠다. 방 끝 탁자 위에서 빛나던 타다 남은 초는 이따금 조금 불꽃을 올릴 뿐 완전히 꺼져 가고 있었다. 몇 분 뒤면 완전한 어둠이 찾아올 것이었다.

나는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모든 게 한꺼번에, 애쓰지 않아도 곧바로 떠올랐다. 마치 다시 덮치려고 나를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게다가 정신을 놓고 있는 동안에도 기억 속에는 줄곧 도무지 잊히지 않는 한 점 같은 것이 남아 있었고, 내 잠결의 몽상은 그 둘레를 무겁게 맴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날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이제 깨어나 보니 아주 오래전에 지나간 일처럼, 마치 내가 이미 오래오래 전에 이 모든 걸 다 살아 내고 벗어난 것처럼 여겨졌다.

머릿속이 매캐했다. 무언가가 내 위를 떠돌며 나를 건드리고, 흥분시키고, 불안하게 하는 것 같았다. 우울과 울화가 다시 끓어올라 출구를 찾았다. 갑자기 내 곁에서 뜨고 있는 두 눈이 보였다. 호기심 어린, 끈질긴 눈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눈길은 차갑고 무심하고 음울해서, 마치 완전히 남 같았다. 그 눈길이 무거웠다.

음울한 생각 하나가 내 머릿속에 싹터서, 축축하고 곰팡내 나는 지하로 들어갈 때 같은 무언가 고약한 느낌으로 온몸에 퍼졌다. 바로 지금에야 이 두 눈이 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이 어쩐지 부자연스러웠다. 두 시간 동안 내가 이 존재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고 그럴 필요조차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것도 떠올랐다. 아까는 어째서인지 그게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거미처럼 터무니없고 역겨운 방탕이라는 관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랑 없이, 거칠고 부끄러움 없이, 참된 사랑이 마지막에 가서야 이르는 바로 그것부터 시작하는 방탕. 우리는 그렇게 오래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눈 앞에서 눈을 내리깔지 않았고 눈길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어째서인지 오싹해졌다.

「이름이 뭐야?」 나는 빨리 끝내려고 짧게 물었다.

「리자예요.」 그녀는 거의 속삭이듯, 그러나 어쩐지 전혀 상냥하지 않게 대답하고 눈을 돌렸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오늘 날씨가…… 눈이…… 고약해!」 나는 우울하게 손을 머리 뒤에 괴고 천장을 보며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흉측했다.

「여기 사람이야?」 잠시 뒤 나는 고개를 조금 그녀 쪽으로 돌리며 거의 짜증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어디서 왔는데?」

「리가에서요.」 그녀가 마지못해 말했다.

「독일 사람이야?」

「러시아 사람이에요.」

「여기 온 지 오래됐어?」

「어디요?」

「이 집에.」

「두 주요.」 그녀는 점점 더 짧게 끊어 말했다. 촛불이 완전히 꺼졌다. 나는 이제 그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있어?」

「네…… 아니요…… 있어요.」

「어디 있는데?」

「거기…… 리가에요.」

「뭐 하는 사람인데?」

「그냥…….」

「그냥이라니? 누군데, 신분이 뭔데?」

「소시민이에요.」

「계속 그 사람들이랑 살았어?」

「네.」

「몇 살이야?」

「스무 살요.」

「그런데 왜 그 사람들한테서 나왔어?」

「그냥요.」

이 「그냥요」는 이런 뜻이었다. 귀찮게 하지 마요, 메스꺼워요.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인지 나는 나가지 않았다. 나 자신도 점점 더 메스껍고 우울해졌다. 지난 하루의 모든 모습들이 어쩐지 저절로, 내 뜻과 상관없이 어지럽게 기억 속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아침에 걱정스럽게 관청으로 종종걸음 치다가 거리에서 본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오늘 관을 내가다가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어.」 나는 갑자기 소리 내어 말했다. 이야기를 시작할 생각은 전혀 없이, 그냥 거의 무심코.

「관이요?」

「응, 센나야 광장에서. 지하실에서 내오더라.」

「지하실에서요?」

「지하실이 아니라 반지하 층에서……. 알잖아, 아래층…… 나쁜 집에서……. 주위가 어찌나 더럽던지……. 껍데기, 쓰레기……. 냄새가 나고……. 역겨웠어.」

침묵.

「오늘 같은 날 묻는 건 고약하지!」 나는 그저 잠자코 있지 않으려고 다시 말을 꺼냈다.

「뭐가 고약해요?」

「눈, 진창…….」 (나는 하품을 했다.)

「아무래도 마찬가지예요.」 그녀가 잠시 침묵한 뒤 갑자기 말했다.

「아니, 고약해…….」 (나는 또 하품을 했다.) 「무덤 파는 인부들은 틀림없이 눈이 적셔서 욕을 했겠지. 그리고 무덤에는 틀림없이 물이 고였을 거야.」

「왜 무덤에 물이 고여요?」 그녀는 무언가 호기심을 가지고, 그러나 전보다 더 거칠고 짧게 끊어 말하며 물었다. 갑자기 무언가가 나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야 물이 고이지, 바닥에 한 뼘은. 여기 볼코보 묘지에서는 마른 무덤은 하나도 못 파.」

「왜요?」

「왜라니? 땅이 그렇게 물기가 많거든. 여기는 온통 늪이야. 그러니 물속에 그냥 눕히는 거지. 내가 직접 봤어…… 여러 번…….」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볼코보 묘지에는 가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을 뿐이다.)

「너는 정말 죽는 게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왜 죽어요?」 그녀가 방어하듯 대답했다.

「언젠가는 죽겠지. 그리고 아까 그 죽은 여자랑 꼭 똑같이 죽을 거야. 그 여자도…… 역시 아가씨였어……. 폐병으로 죽었지.」

「계집애였으면 병원에서 죽었겠죠…….」 (이 여자는 이미 이걸 알고 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가씨」가 아니라 「계집애」라고 했다.)

「그 여자는 여주인에게 빚이 있었어.」 나는 말다툼에 점점 더 부추겨지며 반박했다. 「그래서 폐병에 걸렸는데도 거의 마지막까지 여주인 밑에서 일했지.

주위의 마부들이 병사들과 이야기하면서 그 얘기를 했어. 아마 옛날에 그 여자를 알던 사람들이겠지. 웃더라고. 술집에서 그 여자를 추모하겠다고도 했어.」 (여기서도 나는 거짓말을 많이 보탰다.)

침묵, 깊은 침묵.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럼 병원에서 죽는 건 뭐 더 나은가?」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왜 죽어요?」 그녀가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라도?」

「그러면 뭐, 나중에…….」

「어림없지! 너는 지금 젊고 예쁘고 싱싱하니까 딱 그만큼 값을 쳐주는 거야. 그런데 이런 생활을 한 해만 하면 너는 이미 달라질 거야. 시들 거야.」

「한 해 만에요?」

「어쨌든 한 해 뒤면 네 값은 떨어지겠지.」 나는 고소해하며 계속했다. 「그러면 너는 여기서 어디 더 낮은 데로, 다른 집으로 옮겨 가겠지. 또 한 해 뒤면 세 번째 집으로, 점점 더 낮은 데로. 그리고 칠 년쯤 지나면 센나야 광장의 지하실까지 가겠지. 그것도 좋은 편일 거야. 그런데 게다가 무슨 병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지. 뭐, 가슴이 약해진다든가…… 아니면 감기가 든다든가, 무어든. 이런 생활에서는 병이 잘 안 낫거든. 한번 달라붙으면 아마 떨어지지 않을 거야. 그러면 죽는 거지.」

「그럼 죽죠, 뭐.」 그녀는 이제 아주 심술궂게 대답하고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래도 아깝잖아.」

「누가요?」

「삶이 아깝지.」

침묵.

「약혼자가 있었어? 응?」

「그건 알아서 뭐 하게요?」

「캐묻는 게 아니야. 나랑 무슨 상관이야. 왜 화를 내? 너에게도 물론 나름의 불쾌한 일들이 있었겠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냥 안됐다는 거지.」

「누가요?」

「네가 안됐어.」

「그럴 거 없어요…….」 그녀는 겨우 들릴 만큼 속삭이고 다시 몸을 움직였다.

이게 곧바로 나를 좀 화나게 했다. 뭐라고! 내가 이렇게 부드럽게 대해 주는데 이 여자는…….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좋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해?」

「아무 생각도 안 해요.」

「생각을 안 하는 게 문제야.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정신 차려. 시간은 있어. 너는 아직 젊고 예뻐. 사랑할 수도 있고, 시집갈 수도 있고, 행복해질 수도 있어…….」

「시집간 사람이 다 행복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아까처럼 거칠고 빠르게 잘라 말했다.

「물론 다는 아니지. 그래도 여기보다는 훨씬 나아. 비교도 안 되게 나아. 사랑이 있으면 행복 없이도 살 수 있어. 슬픔 속에서도 삶은 좋아. 세상에 사는 건 좋은 거야. 어떻게 살든. 그런데 여기엔 뭐가 있어…… 악취 말고. 퉤!」

나는 역겨워서 돌아누웠다. 나는 이제 차갑게 따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 자신이 말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열을 올렸다. 나는 벌써 구석에서 짜낸 내 소중한 생각들을 늘어놓고 싶어 목이 탔다. 무언가가 갑자기 내 안에서 타올랐고, 무슨 목표가 「나타났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나를 보지는 마. 나는 너에게 본보기가 아니야. 나는 어쩌면 너보다 더 나쁠 거야. 하긴 나는 취해서 여기 들어온 거고.」 나는 그래도 서둘러 나를 변명했다.

「게다가 남자는 여자에게 전혀 본보기가 아니야. 일이 달라. 나는 나를 더럽히고 먹칠하긴 하지만, 그 대신 누구의 노예도 아니야. 왔다가 가 버리면 없는 거야. 털어 버리면 또 딴사람이야. 그런데 너는 처음부터 노예야. 그래, 노예! 너는 모든 걸 내줘, 네 의지 전부를. 나중에 이 사슬을 끊고 싶어도 이미 안 돼. 점점 더 단단히 너를 휘감을 거야. 이건 그런 저주받은 사슬이야. 나는 알아. 다른 얘기는 하지도 않을게. 너는 아마 이해하지도 못할 테니까. 그런데 말해 봐. 너 틀림없이 벌써 여주인한테 빚이 있지? 거봐!」 나는 덧붙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온 존재로 듣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게 바로 사슬이야! 절대로 빚을 갚고 빠져나오지 못해. 그렇게 만들어 놓거든. 악마한테 영혼을 파는 거나 마찬가지야…….

……게다가 나도…… 어쩌면 너처럼 불행한지도 몰라. 네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나도 우울해서 일부러 진흙탕에 기어드는 건지도. 괴로워서 술을 마시잖아. 그런데 나는 괴로워서 여기 있는 거야. 자, 말해 봐. 여기 뭐가 좋아. 봐, 너랑 나랑…… 만났지…… 아까. 그런데 그동안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어. 그리고 너는 나중에야 들짐승처럼 나를 살피기 시작했지. 나도 너를 그랬고. 이렇게 사랑하는 거야? 사람과 사람이 이렇게 만나야 해? 이건 그냥 흉측한 짓일 뿐이야, 그게 다야!」

「맞아요!」 그녀가 날카롭고 다급하게 맞장구쳤다. 나는 이 「맞아요」의 다급함에 놀라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그녀도 아까 나를 살필 때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맴돌았는지도 모른다는 건가? 그러니까 그녀도 이미 어떤 생각을 할 줄 안다는 건가?…… 「빌어먹을, 이거 흥미로운데. 이건 나와 닮았어.」 나는 거의 손을 비비며 생각했다. 「게다가 이런 젊은 영혼 하나쯤 어떻게 못 다루겠어?……」

무엇보다 놀이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돌렸고, 어둠 속에서 보기에 손으로 턱을 괸 것 같았다. 어쩌면 나를 살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을 볼 수 없는 게 얼마나 아쉬웠던가. 그녀의 깊은 숨소리가 들렸다.

「너는 왜 여기로 왔어?」 나는 이제 어느 정도 권위를 가지고 말을 꺼냈다.

「그냥요…….」

「아버지 집에서 사는 건 얼마나 좋아! 따뜻하고, 자유롭고. 제 둥지인데.」

「그게 더 나쁘면요?」

「가락을 맞춰야겠다.」 내 안에서 번뜩 스쳤다. 「감상으로는 아마 별로 얻을 게 없겠어.」

하긴 이건 그냥 스쳤을 뿐이다. 맹세하건대 그녀는 정말로 내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나는 어쩐지 마음이 풀어지고 그런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속임수는 감정과 아주 쉽게 어울려 지내니까.

「누가 아니래!」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무슨 일이든 있지. 나는 누군가 너를 모욕했을 거라고 확신해. 그리고 네가 그들에게 잘못한 것보다 그들이 너에게 잘못한 게 더 많을 거라고. 나는 네 사연을 하나도 모르지만, 너 같은 아가씨는 틀림없이 제 뜻으로 여기 오지는 않을 테니…….」

「나 같은 아가씨가 어떤데요?」 그녀가 겨우 들릴 만큼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알아들었다.

「빌어먹을, 내가 아첨을 하고 있잖아. 이건 추잡해. 그런데 어쩌면 좋은 건지도…….」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봐, 리자, 내 얘기를 할게! 어릴 때부터 가족이 있었다면 나는 지금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나는 이걸 자주 생각해. 가족이 아무리 나빠도 어쨌든 아버지 어머니잖아, 원수나 남이 아니고. 한 해에 한 번이라도 사랑을 보여 줄 거야. 어쨌든 제집에 있다는 걸 알잖아. 나는 가족 없이 자랐어. 아마 그래서 이렇게 됐겠지…… 감정 없는 사람으로.」

나는 또 기다렸다.

「어쩌면 이해하지도 못하겠지.」 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우습잖아, 설교라니.」

「내가 아버지이고 딸이 있다면, 나는 아마 아들보다 딸을 더 사랑할 거야, 정말로.」 나는 마치 그녀의 기분을 돌리려는 게 아닌 것처럼 옆길로 말을 꺼냈다. 고백하건대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건 왜요?」 그녀가 물었다.

아, 그러니까 듣고 있구나!

「그냥. 모르겠어, 리자. 봐. 나는 엄격하고 무뚝뚝한 사람인데 딸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서서 딸의 손발에 입을 맞추고,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던 아버지를 알았어, 정말로. 딸이 저녁 모임에서 춤을 추면 그는 한자리에 다섯 시간을 서서 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어. 딸에게 미쳐 있었지. 나는 그걸 이해해. 딸이 밤에 지쳐서 잠들면 그는 깨어나서 잠든 딸에게 가서 입 맞추고 성호를 그어 주었어. 자기는 기름때 전 프록코트를 입고 다니고 누구에게나 인색하면서, 딸에게는 마지막 한 푼까지 털어 비싼 선물을 사 주고, 선물이 마음에 들면 그게 그에게는 기쁨이었어. 아버지는 언제나 엄마보다 딸을 더 사랑해. 어떤 아가씨에게는 집에서 사는 게 즐겁지! 그리고 나는 아마 내 딸을 시집보내지도 않을 거야.」

「어떻게요?」 그녀가 살짝 웃으며 물었다.

「질투할 거야, 정말로. 아니, 딸이 다른 사람에게 입 맞춘다고? 남을 아버지보다 더 사랑한다고? 상상하기만 해도 괴로워. 물론 다 헛소리지. 물론 누구든 결국은 정신을 차리지. 그래도 나는 아마 시집보내기 전에 걱정 하나로 나를 들볶을 거야. 신랑감을 모조리 퇴짜 놓을 거야. 그래도 결국은 딸이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겠지. 딸이 스스로 사랑하게 된 사람은 언제나 아버지 눈에 누구보다 못나 보이거든. 원래 그래. 이 때문에 집안에 나쁜 일이 많이 생겨.」

「어떤 사람들은 딸을 떳떳하게 시집보내기는커녕 팔아넘기지 못해 안달이에요.」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아! 바로 그거였구나!

「그건, 리자, 하느님도 사랑도 없는 저주받은 집안에서나 그래.」 나는 열을 올리며 받았다. 「사랑이 없는 곳엔 분별도 없어. 그런 집안이 있기는 해, 사실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집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너는 네 집에서 좋은 걸 못 본 모양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불행한 사람이구나. 흠……. 이런 일은 대개 가난 때문에 생기지.」

「그럼 나리들 집에선 더 나은가요? 가난해도 정직한 사람들은 잘 살아요.」

「흠…… 그래. 그럴지도. 그리고 또 이런 게 있어, 리자. 사람은 제 슬픔만 세기를 좋아하고 제 행복은 세지 않아. 제대로 세 보면 누구에게나 제 몫이 마련되어 있다는 걸 알 텐데. 그런데 집안에서 모든 게 잘되고, 하느님이 축복하시고, 좋은 남편을 만나서, 남편이 너를 사랑하고, 아껴 주고,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 집은 좋아! 때로는 슬픔이 반쯤 섞여도 좋아. 슬픔 없는 데가 어디 있어? 어쩌면 너도 시집가서 스스로 알게 되겠지. 그 대신 처음 무렵,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집가서 처음 무렵을 생각해 봐. 행복이, 행복이 얼마나 찾아오는지! 그것도 흔하게. 처음 무렵에는 남편과의 싸움도 잘 끝나. 어떤 여자는 더 사랑할수록 남편과 더 싸움을 벌여. 정말이야. 나는 그런 여자를 알았어. 「이렇게, 몹시 사랑하니까 사랑해서 당신을 괴롭히는 거예요. 그러니 알아줘요.」 사랑 때문에 일부러 사람을 괴롭힐 수 있다는 걸 알아? 대개 여자들이 그래.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해. 「그 대신 나중에 그렇게 사랑해 줄 거야, 그렇게 어루만져 줄 거니까 지금 좀 괴롭혀도 죄가 아니야.」 그리고 집안사람들 모두 너희를 보고 기뻐하고, 좋고, 즐겁고, 평화롭고, 떳떳하고……. 또 질투가 심한 여자들도 있지. 남편이 어디 나가면, 나는 그런 여자를 하나 알았는데, 참지 못하고 한밤중에 뛰쳐나가서 몰래 달려가 보는 거야. 거기 있는 거 아닐까, 그 집에 있는 거 아닐까, 그 여자랑 있는 거 아닐까? 이건 나쁘지. 그리고 스스로도 나쁘다는 걸 알고, 가슴이 멎을 듯하고 스스로를 벌하지만, 사랑하니까. 모두 사랑 때문이야. 그리고 싸운 뒤에 화해하는 건 얼마나 좋아. 스스로 남편 앞에서 잘못했다고 하거나 용서해 주는 건! 그러면 둘 다 얼마나 좋아지는지, 갑자기 얼마나 좋아지는지. 마치 새로 만나고, 새로 결혼하고, 새로 사랑이 시작된 것처럼. 그리고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아무도 알아서는 안 돼. 그리고 어떤 싸움이 일어나도 친정어머니조차 재판관으로 불러서 서로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돼. 그들 스스로가 서로의 재판관이야. 사랑은 하느님의 비밀이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든 남의 눈에서 가려져 있어야 해. 그래야 더 거룩하고 더 좋아. 서로를 더 존중하게 되고, 많은 게 존중 위에 서 있으니까. 그리고 한번 사랑이 있었다면, 사랑으로 결혼했다면, 사랑이 왜 지나가야 해! 정말 사랑을 지켜 나갈 수 없을까? 지켜 나갈 수 없는 경우는 드물어. 그리고 착하고 정직한 남편을 만난다면 사랑이 어떻게 지나가겠어? 신혼의 첫사랑은 지나가겠지, 맞아. 하지만 그다음엔 더 좋은 사랑이 와. 그때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고, 모든 일을 함께 꾸려 가고, 서로에게 비밀이 없어. 그리고 아이들이 생기면, 아무리 힘든 때라도 모두 행복으로 보일 거야. 사랑하고 용기만 있으면. 그때는 일도 즐겁고, 아이들을 위해 이따금 제 빵을 굶어도 그것도 즐거워. 아이들이 나중에 그걸 두고 너를 사랑할 테니까. 그러니 제 자신을 위해 모으는 셈이야. 아이들이 자라면 네가 그들의 본보기이고 버팀목이라는 걸 느끼지. 네가 죽어도 아이들은 평생 네 감정과 생각을 지니고 다닐 거야. 너에게서 받았으니까. 네 모습과 닮은 꼴을 지닐 거야. 그러니 이건 큰 의무야. 어떻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더 가까워지지 않겠어? 아이를 갖는 게 힘들다고들 하지? 누가 그래? 그건 하늘의 행복이야! 너 어린아이 좋아해, 리자? 나는 지독하게 좋아해. 알지. 이런 발그레한 사내아이가 네 젖을 빨고 있으면, 아내가 제 아이를 안고 앉아 있는 걸 보면서 어느 남편의 마음이 아내에게로 돌아서지 않겠어! 아기가 발그레하고 통통하게 팔다리를 쭉 뻗고 응석을 부려. 팔다리는 토실토실하고, 손톱은 깨끗하고 작아. 어찌나 작은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 눈은 마치 벌써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고. 젖을 빨 때는 작은 손으로 네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놀아. 아버지가 다가가면 젖에서 떨어져 온몸을 뒤로 젖히고 아버지를 보고 웃어. 마치 무슨 대단한 우스운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다시 젖을 빨기 시작해. 아니면 이가 나기 시작할 때면 엄마 젖을 깨물고는 작은 눈으로 엄마를 곁눈질해. 「봐, 깨물었지!」 셋이, 남편과 아내와 아이가 함께 있을 때 이게 다 행복이 아니고 뭐야? 이런 순간들 때문에 많은 걸 용서할 수 있어. 아니야, 리자. 먼저 스스로 사는 법을 배우고, 그다음에 남을 탓해야 해!」

「그림으로, 바로 이런 그림으로 너를 다뤄야 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맹세코 감정을 담아 말했는데도. 그리고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데 이 여자가 갑자기 깔깔 웃어 버리면 나는 그땐 어디로 기어들어 가지?」 이 생각이 나를 미치게 했다. 말 끝 무렵에 나는 정말로 열이 올랐고, 이제 자존심이 어쩐지 괴로웠다.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녀를 쿡 찔러 보고 싶기까지 했다.

「어쩐지 당신은…….」 그녀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가 멈췄다.

그러나 나는 이미 모든 걸 알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이제 무언가 다른 것이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처럼 날카롭고 거칠고 굽히지 않는 게 아니라, 무언가 부드럽고 수줍은 것이. 어찌나 수줍던지 나 자신이 어쩐지 갑자기 그녀 앞에서 부끄러워지고 죄지은 것 같아졌다.

「뭐?」 나는 다정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당신은…….」

「뭐?」

「어쩐지 당신은…… 꼭 책에 쓰인 것처럼 말하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비웃는 듯한 것이 갑자기 다시 들렸다.

이 지적이 나를 아프게 꼬집었다. 나는 이런 걸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일부러 비웃음으로 자기를 가렸다는 것을. 그것이 누군가 거칠고 끈덕지게 영혼에 파고들 때, 자존심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굴하지 않고 제 감정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수줍고 마음이 순결한 사람들의 흔한 마지막 수법이라는 것을. 그녀가 몇 번에 걸쳐 쭈뼛쭈뼛 비웃음에 다가가다가 마침내 겨우 말할 결심을 한 그 수줍음만 보고도 나는 짐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짐작하지 못했고, 심술궂은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두고 봐라.」 나는 생각했다.

2부 7장

「에이, 그만해, 리자. 무슨 책이야. 나 자신이 남의 일인데도 역겨운걸. 아니, 남의 일도 아니지. 이 모든 게 지금 내 영혼 속에서 깨어났어……. 정말, 정말 너 자신은 여기가 역겹지 않아? 아니, 보아하니 습관이란 게 대단하구나! 습관이 사람을 무엇으로 만들 수 있는지 누가 알겠어. 정말 너는 진지하게 네가 절대 늙지 않고 영원히 예쁠 거라고, 여기서 영원토록 너를 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여기도 추잡하다는 얘기는 아예 하지도 않을게……. 하긴, 지금 네 생활에 대해선 이렇게 말해 줄게. 너는 지금 젊고, 예쁘고, 착하고, 영혼도 있고 감정도 있어. 그런데 알아? 나는 아까 정신이 들자마자 여기 너랑 있는 게 곧바로 역겨워졌어! 취한 상태에서나 여기 올 수 있는 거야. 그런데 네가 다른 데 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산다면, 나는 어쩌면 너를 쫓아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너를 사랑하게 될 거야. 말 한마디는커녕 눈길 한 번에도 기뻐할 거야. 대문 앞에서 너를 기다리고, 네 앞에 무릎을 꿇고 서 있을 거야. 내 약혼녀처럼 너를 바라볼 거고, 게다가 그걸 영광으로 여길 거야. 너에 대해 무언가 불순한 생각을 할 엄두도 못 낼 거야. 그런데 여기서는 알잖아. 내가 휘파람만 불면 너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를 따라와야 해. 내가 네 뜻을 묻는 게 아니라 네가 내 뜻을 따르는 거야. 가장 낮은 농사꾼도 일꾼으로 고용될 때 자기 전부를 팔아넘기지는 않아. 그리고 자기에게 기한이 있다는 걸 알아. 그런데 네 기한은 어디 있어? 생각해 봐. 너는 여기서 무엇을 내주는 거야? 무엇을 팔아넘기는 거야? 영혼을, 네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영혼을 몸과 함께 팔아넘기는 거야! 네 사랑을 온갖 술주정뱅이의 조롱거리로 내주는 거야! 사랑! 그건 전부야. 그건 다이아몬드야, 처녀의 보물이야, 사랑이란! 이 사랑을 얻으려고 어떤 사람은 영혼을 바치고 죽음으로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어. 그런데 지금 네 사랑은 얼마로 쳐주지? 너는 통째로, 온통 팔려 버렸어. 사랑 없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사랑을 얻으려 애쓸 필요가 어디 있겠어. 처녀에게 이보다 큰 모욕은 없어, 알아? 들어 보니 너희 바보들을 달래느라 여기서 애인을 두게 해 준다며. 그건 그냥 장난이고, 속임수고, 너희를 비웃는 거야. 그런데 너희는 믿지. 그 애인이란 녀석이 정말로 너를 사랑할까? 나는 안 믿어. 금세 너를 그에게서 불러 갈 걸 아는데 어떻게 사랑하겠어. 그러고도 그놈은 추잡한 놈이야! 그놈이 너를 눈곱만큼이라도 존중할까? 너와 그놈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어? 그놈은 너를 비웃고 네 것을 훔쳐 가지. 그게 그놈 사랑의 전부야! 안 때리는 것만도 다행이지. 아니, 어쩌면 때릴지도 몰라. 그런 놈이 있다면 한번 물어봐. 너랑 결혼하겠느냐고. 침을 뱉거나 때리지 않으면 네 눈앞에서 깔깔 웃을 거야. 그런데 그놈 자신은 어쩌면 통틀어 부러진 동전 두 닢 값어치밖에 안 될 거야. 생각해 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서 네 삶을 망쳤어? 커피를 먹여 주고 배불리 먹여 줘서? 그런데 무엇 때문에 먹여 주는 거야? 정직한 다른 여자라면 그런 음식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 무엇 때문에 먹여 주는지 아니까. 너는 여기서 빚을 졌어. 그러니 계속 빚을 질 거고, 끝의 끝까지 빚을 지게 될 거야. 손님들이 너를 꺼리기 시작할 때까지. 그런데 그때는 곧 와. 젊음을 믿지 마. 여기서는 모든 게 역마차처럼 날아가. 그러면 너를 떠밀어 낼 거야. 그것도 그냥 떠밀어 내는 게 아니라, 한참 전부터 트집을 잡고, 나무라고, 욕하기 시작할 거야. 마치 네가 그 여자에게 건강을 바치고 젊음과 영혼을 그 여자를 위해 헛되이 망친 게 아니라, 네가 그 여자를 망하게 하고, 거지로 만들고, 털어먹은 것처럼. 그리고 도움은 기대하지 마. 다른 네 동무들도 그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너를 공격할 거야. 여기선 모두 노예고, 양심도 동정도 오래전에 잃었으니까. 비열해질 대로 비열해져서, 이 욕설보다 더 추잡하고 더 비열하고 더 모욕적인 건 지상에 없어. 그리고 너는 여기서 모든 걸 바칠 거야, 남김없이 모든 걸. 건강도, 젊음도, 아름다움도, 희망도. 그리고 스물두 살에 서른다섯 살처럼 보이게 될 거야. 병이라도 안 걸리면 다행이지, 그걸 두고 하느님께 기도해. 지금 너는 아마 일도 없이 놀기만 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세상에 이보다 더 힘들고 더 징역 같은 일은 없고, 있었던 적도 없어. 마음 하나만으로도 온통 눈물로 녹아 버릴 것 같을 거야. 그리고 여기서 너를 쫓아낼 때 너는 한마디도, 반 마디도 감히 못 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나갈 거야. 다른 데로 옮기고, 그다음엔 세 번째로, 그다음엔 또 어디로 가서, 마침내 센나야 광장에 이를 거야. 거기선 걸핏하면 때리기 시작할 거야. 그게 거기 식의 친절이야. 거기 손님은 때리지 않고는 어루만질 줄도 몰라. 거기가 그렇게 역겹다는 걸 못 믿겠어? 언제 한번 가 봐. 네 눈으로 보게 될지도 몰라. 나는 한번 거기서 설날에 문간에 있는 여자 하나를 봤어. 너무 울어 대서 벌로 좀 얼려 주겠다고 저희 동무들이 장난삼아 밖으로 떠밀어 내고 문을 닫아 버렸지. 아침 아홉 시인데 벌써 완전히 취해서, 머리는 헝클어지고, 반쯤 벗고, 온통 얻어맞은 꼴이었어. 얼굴에는 분을 하얗게 발랐는데 눈가는 시퍼렇게 멍들었고, 코와 이에서 피가 흘렀어. 어느 마부가 방금 손을 봐 준 거야. 그 여자는 돌계단에 앉아 있었는데, 손에는 무슨 소금에 절인 생선을 들고 있었어. 울부짖으며 자기 「팔짜」에 대해 무언가 넋두리를 하면서, 그 생선으로 계단을 두들기고 있었어. 그리고 현관 앞에는 마부들과 취한 병사들이 몰려서 그 여자를 놀리고 있었지. 너도 그렇게 될 거라는 걸 못 믿겠어? 나도 믿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네가 어떻게 알아. 어쩌면 열 해, 여덟 해 전에는 바로 그 여자, 소금에 절인 생선을 든 그 여자가 어디선가 여기로 왔을 때 아기 천사처럼 싱싱하고, 죄 없고, 깨끗했을지. 악을 모르고, 말 한마디마다 얼굴을 붉혔을지. 어쩌면 너처럼 자존심 세고, 쉽게 상처받고, 남들과 닮지 않고, 공주처럼 바라보며,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가 사랑할 사람에게는 온전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알았을지. 봐, 어떻게 끝났는지! 그리고 그 여자가 취하고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더러운 계단에 그 생선을 두들기던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에 아버지 집에서의 예전의 깨끗한 세월이 떠올랐다면 어땠을까. 아직 학교에 다니고, 이웃집 아들이 길에서 그 여자를 기다리며 평생 너를 사랑하겠다고, 내 운명을 너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던 때가. 그리고 둘이 크기만 하면 영원히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자고 약속하던 때가! 아니야, 리자. 네가 어디 저기, 구석에서, 지하실에서, 아까 그 여자처럼 폐병으로 빨리 죽는다면 그게 행복이야, 행복이야. 병원에 간다고? 좋아, 데려가겠지. 그런데 여주인에게 네가 아직 쓸모가 있다면? 폐병은 그런 병이야. 열병이 아니거든. 사람이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품고 자기는 건강하다고 말해. 스스로를 달래지. 그런데 여주인에게는 그게 이득이야. 걱정 마, 정말 그래. 영혼을 팔았고, 게다가 돈까지 빚졌으니 찍소리도 못 하는 거야. 그리고 죽어 갈 때는 모두 너를 버리고, 모두 등을 돌릴 거야. 그때 너한테서 뭘 받아 내겠어? 오히려 공연히 자리만 차지하고 빨리 죽지도 않는다고 너를 나무랄 거야. 물 한 모금 달라고 사정해도 욕설과 함께 줄 거야. 「이 망할 년아, 언제 뒈질 거냐. 신음해서 잠도 못 자게 하고, 손님들이 꺼리잖아.」 이건 사실이야. 나 자신이 그런 말을 엿들었어. 죽어 가는 너를 지하실에서 가장 악취 나는 구석에 처넣을 거야. 어둡고 축축한 데에. 거기 혼자 누워서 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할까? 죽으면 남의 손으로 투덜거리며 조급하게 대충 챙길 거야. 아무도 너를 축복하지 않고, 아무도 너 때문에 한숨짓지 않을 거야. 그저 빨리 어깨에서 너를 내려놓고 싶어 할 뿐. 통나무 관을 사서, 오늘 그 가엾은 여자를 내가던 것처럼 내가고, 술집에 추모하러 가겠지. 무덤에는 진창에 오물에 젖은 눈. 너 때문에 격식을 차릴 거야? 「내려라, 반카. 봐라, 이 「팔짜」는 여기서도 거꾸로 가는구먼, 그런 년이지. 밧줄 좀 줄여라, 이 녀석아.」 「이대로도 괜찮아.」 「뭐가 괜찮아? 봐, 옆으로 누웠잖아. 이것도 사람이었냐 아니냐? 에이, 됐다, 덮어라.」 너 때문에 오래 다투려고도 하지 않을 거야. 젖은 푸른 진흙으로 서둘러 덮어 버리고 술집으로 가겠지……. 그러면 지상에서 너에 대한 기억도 끝이야. 다른 사람들 무덤에는 아이들이, 아버지들이, 남편들이 찾아가. 그런데 너에게는 눈물도, 한숨도, 추모도 없어. 온 세상에서 아무도, 아무도 절대로 너를 찾아오지 않을 거야. 네 이름은 지상에서 사라질 거야. 마치 네가 한 번도 존재하지 않고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진흙과 늪뿐이야. 밤에 죽은 사람들이 일어날 때 거기서 관 뚜껑을 두드려 봐. 「착한 사람들이여, 세상에 나가 살게 해 주세요! 나는 살았지만 삶을 보지 못했어요. 내 삶은 걸레처럼 쓰이고 말았어요. 센나야 광장 술집에서 마셔 없애 버렸어요. 착한 사람들이여, 한 번만 더 세상에 나가 살게 해 주세요!……」」

나는 어찌나 격정에 빠졌던지 나 자신의 목이 메어 오려 했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멈추고, 놀라서 몸을 조금 일으켜 겁먹은 듯 고개를 숙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당황할 만도 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의 영혼을 온통 뒤집어 놓고 그녀의 가슴을 부숴 놓았다고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할수록 더 빨리, 더 세게 목표에 이르고 싶었다. 놀이, 놀이가 나를 사로잡았다. 하긴 놀이만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딱딱하고 꾸며 내어, 책처럼까지 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꼭 책에 쓰인 것처럼」 말고는 달리 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당황하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가 알아들으리라는 걸, 그리고 바로 이 책 같은 말투가 일에 더 도움이 되리라는 걸 알았고 예감했다. 그러나 이제 효과를 거두자 나는 갑자기 겁이 났다. 아니, 나는 한 번도, 한 번도 이런 절망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단단히 파묻고 두 팔로 베개를 끌어안은 채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찢어지고 있었다. 젊은 몸 전체가 경련하듯 떨렸다. 가슴속에 막혀 있던 흐느낌이 그녀를 짓누르고 찢다가 갑자기 울부짖음과 외침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면 그녀는 베개에 더 세게 얼굴을 파묻었다. 여기 누구도, 살아 있는 영혼 하나도 그녀의 괴로움과 눈물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베개를 물어뜯었고, 제 손을 피가 나도록 물었다(나중에 그걸 보았다). 아니면 풀어진 땋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움켜쥐고, 숨을 참고 이를 악물며 안간힘을 쓴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진정하라고 부탁하려고 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나 자신이 온통 오한에, 거의 공포에 사로잡혀 더듬더듬 어떻게든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두웠다. 아무리 애써도 빨리 끝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성냥갑과, 손대지 않은 새 초가 꽂힌 촛대가 손에 잡혔다. 불빛이 방을 비추자마자 리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더니, 무언가 일그러진 얼굴로, 반쯤 미친 미소를 띠고, 거의 넋 나간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내게 달려들어 나를 끌어안으려다가 감히 그러지 못하고 조용히 내 앞에 고개를 숙였다.

「리자, 내 친구, 내가 괜히…… 용서해 줘.」 나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녀가 어찌나 세게 손가락으로 내 손을 꽉 쥐던지, 나는 내가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그만두었다.

「여기 내 주소야, 리자. 나한테 와.」

「갈게요…….」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단호하게 속삭였다.

「그럼 이제 갈게. 잘 있어…… 또 만나.」

내가 일어서자 그녀도 일어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온통 얼굴이 빨개지며 몸을 떨고, 의자 위에 놓인 숄을 집어 턱밑까지 어깨에 둘렀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녀는 다시 어쩐지 아프게 미소 짓고, 얼굴을 붉히며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괴로웠다. 서둘러 나가고 싶었다. 사라지고 싶었다.

「잠깐만요.」 이미 현관 문 바로 앞에서 그녀가 갑자기 손으로 내 외투를 붙잡으며 말하더니, 허둥지둥 촛불을 내려놓고 뛰어갔다. 무언가 생각이 났거나 내게 가져와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뛰어가면서 그녀는 온통 얼굴이 빨개졌고, 눈이 반짝였고,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대체 뭘까? 나는 저도 모르게 기다렸다. 그녀는 잠시 뒤 돌아왔는데, 눈길이 마치 무언가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 같았다. 대체로 그건 이미 아까의 얼굴도, 아까의 눈길도 아니었다. 음울하고 의심 많고 고집스러운 눈길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의 눈길은 부탁하듯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믿음직하고 다정하고 수줍었다. 아이들이 몹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조를 때 그렇게 바라본다. 그녀의 눈은 밝은 갈색이었다. 아름다운 눈, 사랑도 음울한 증오도 비출 줄 아는 생기 있는 눈이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 마치 내가 무슨 높은 존재라서 설명 없이도 모든 걸 알아야 한다는 듯이, 그녀는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 전체가 가장 순진한, 거의 아이 같은 의기양양함으로 환히 빛났다. 나는 펼쳐 보았다. 무슨 의과 대학생인가 그 비슷한 사람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였다. 몹시 과장되고 꾸밈이 많지만 더없이 공손한 사랑 고백이었다. 지금은 표현들이 기억나지 않지만, 높은 문체 너머로 꾸며 낼 수 없는 참된 감정이 비쳐 보였던 것은 아주 잘 기억한다. 다 읽자 나는 나를 향한 그녀의 뜨겁고 호기심 어린, 아이처럼 조바심 난 눈길과 마주쳤다. 그녀는 내 얼굴에 눈을 못 박은 채 조바심 내며 기다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할까? 몇 마디로, 서둘러, 그러나 어쩐지 기쁘게, 자랑스러워하듯 그녀는 내게 설명했다. 자기가 어느 가정집 무도회에, 「아주, 아주 좋은 사람들, 가정이 있는 사람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집에 갔었다고. 자기는 여기서도 아직 새로 온 사람이고 그저 잠깐…… 아직 머물기로 결심한 것도 전혀 아니고, 빚만 갚으면 반드시 나갈 거라고……. 「그런데 거기 이 학생이 있었고, 저녁 내내 춤추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리가에서 아직 어릴 때부터 자기를 알았고 함께 놀았대요.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그리고 부모님도 알고요. 그런데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고 짐작도 못 해요! 그리고 무도회 다음 날(사흘 전에) 무도회에 같이 갔던 친구를 통해 이 편지를 보냈어요……. 그리고…… 그래요, 그게 다예요.」

이야기를 마치자 그녀는 반짝이는 눈을 어쩐지 부끄러운 듯 내리깔았다.

가엾게도, 그녀는 이 학생의 편지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고, 자기도 정직하고 진심으로 사랑받는다는 것, 자기에게도 공손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른 채 떠나는 게 싫어서 이 단 하나의 보물을 가지러 뛰어갔던 것이다. 아마 이 편지는 아무 결과 없이 상자 속에 누워 있을 운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그녀가 평생 그것을 보물처럼, 자기의 자랑이자 변명처럼 간직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지금 이런 순간에 스스로 그 편지를 떠올려 가져온 것이다. 순진하게 내 앞에서 뽐내려고, 내 눈에 자기를 되세우려고, 나도 보고 나도 칭찬하게 하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꼭 쥐고 나왔다. 나는 몹시 떠나고 싶었다……. 젖은 눈이 여전히 송이송이 쏟아지는데도 나는 걸어서 온 길을 갔다. 나는 지치고, 짓뭉개지고,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어리둥절함 너머로 이미 진실이 번뜩이고 있었다. 추잡한 진실이!

2부 8장

하긴 나는 이 진실을 인정하는 데 금방 동의하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깊고 납덩이 같은 잠을 자고 이튿날 아침 깨어나, 어제 하루 전체를 곧바로 헤아려 보자, 나는 어제 리자와 나눈 감상에, 「어제의 그 모든 공포와 연민」에 놀라기까지 했다. 「이런 계집애 같은 신경 발작이 덮쳐 오다니, 퉤!」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여자에게 내 주소를 쥐여 주었나? 그 여자가 오면 어쩌지? 하긴 오라지. 괜찮아…….」 그러나 분명 이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일은 그게 아니었다. 서둘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즈베르코프와 시모노프의 눈에 비친 내 평판을 빨리 구해야 했다. 바로 그게 가장 큰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에는 바빠서 리자에 대해서는 아예 잊어버리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먼저 어제의 빚을 곧바로 시모노프에게 갚아야 했다. 나는 절망적인 수단을 쓰기로 했다. 안톤 안토니치에게 무려 십오 루블을 빌리는 것.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그는 그날 아침 아주 기분이 좋아서, 첫 부탁에 곧바로 내주었다. 나는 어찌나 기뻤던지 차용증에 서명하면서 무언가 호탕한 모습으로 무심하게 그에게 알렸다. 어제 「오텔 드 파리에서 친구들과 한바탕 놀았습니다. 동창을, 어릴 적 친구라고까지 할 만한 녀석을 배웅했지요. 그런데 아시겠지만, 그 녀석이 대단한 난봉꾼이고 버릇없이 자랐거든요. 물론 좋은 가문에, 상당한 재산에, 빛나는 경력에, 재치 있고, 귀엽고, 그 부인들과 연애도 하고요, 아시겠지요. 「반 다스」를 더 마셨고, 그리고…….」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모든 말이 아주 가볍게, 스스럼없이, 흡족하게 나왔다.

집에 오자 나는 곧바로 시모노프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도 내 편지의 참으로 신사다운, 사람 좋은, 솔직한 말투를 떠올리면 감탄스럽다. 솜씨 있고 고결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쓸데없는 말 없이 나는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렸다. 나는 「아직 변명이 허락된다면」 이렇게 변명했다. 술에 전혀 익숙하지 않아서, 다섯 시부터 여섯 시까지 오텔 드 파리에서 그들을 기다리면서 (그런 척하고) 그들이 오기 전에 마신 첫 잔에 취해 버렸다고. 나는 주로 시모노프에게 사과했고, 내 해명을 다른 모두에게도, 특히 「꿈결처럼 기억나기로는」 내가 모욕한 것 같은 즈베르코프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나 스스로 모두를 찾아가고 싶지만 머리가 아프고, 무엇보다 부끄럽다고 덧붙였다. 나는 특히 갑자기 내 펜에 비친 이 「어느 정도의 가벼움」, 거의 무심함에 가까운(하지만 완전히 점잖은) 그 가벼움에 흡족했다. 그것은 가능한 어떤 이유보다 더 잘, 단번에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내가 「어제의 그 모든 추잡한 일」을 꽤 당당하게 바라본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마 생각하시듯 완전히 박살 난 게 전혀, 전혀 아니라, 오히려 차분하게 자기를 존중하는 신사가 이런 일을 마땅히 바라보는 식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지나간 일은 사내에게 흠이 아니라는 식으로.

「후작 같은 장난기마저 있지 않은가?」 나는 쪽지를 다시 읽으며 감탄했다. 「이게 다 교양 있고 발달한 인간이라서지! 다른 사람이 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빠져나올지 몰랐을 텐데, 나는 이렇게 빠져나와 다시 흥청대는구나. 모두 내가 「우리 시대의 교양 있고 발달한 인간」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정말이지 어쩌면 이 모든 게 어제 술 때문에 일어났는지도 몰라. 흠…… 아니, 술 때문은 아니야. 그들을 기다리던 다섯 시부터 여섯 시까지 보드카는 전혀 마시지 않았잖아. 시모노프에게 거짓말을 했지.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어. 그리고 지금도 부끄럽지 않아…….」

하긴, 알 게 뭐냐! 중요한 건 빠져나왔다는 거다.

나는 편지에 육 루블을 넣어 봉하고 아폴론에게 시모노프에게 가져다 달라고 사정했다. 편지에 돈이 들었다는 걸 알자 아폴론은 더 공손해져서 다녀오기로 했다. 저녁 무렵 나는 산책하러 나갔다. 머리는 어제 일로 아직 아프고 어지러웠다. 그러나 저녁이 다가올수록, 어스름이 짙어질수록 내 인상도, 그에 따라 생각도 점점 더 바뀌고 뒤엉켰다. 내 안에서, 가슴과 양심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죽지 않았고, 죽으려 하지 않았으며, 타는 듯한 우울로 제 존재를 알렸다. 나는 주로 가장 붐비는 장사꾼 거리들, 메샨스카야 거리며 사도바야 거리며 유수포프 공원 근처를 떠밀려 다녔다. 나는 늘 특히 어스름 무렵에 이 거리들을 거닐기를 좋아했다. 바로 온갖 행인과 장사치와 장인들이 화가 날 만큼 근심 어린 얼굴로 하루 벌이를 마치고 집으로 흩어져 가며 무리가 짙어질 때. 나는 바로 이 푼돈 같은 북적거림, 이 뻔뻔한 산문성을 좋아했다. 이번에는 이 모든 거리의 북적거림이 나를 더 짜증 나게 했다. 나는 도무지 나를 다스릴 수 없었고,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무언가가 영혼 속에서 쉬지 않고 아프게 솟아오르고 또 솟아올라 가라앉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뒤숭숭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영혼에 무슨 죄라도 얹혀 있는 것처럼.

리자가 올 거라는 생각이 줄곧 나를 괴롭혔다. 이상한 건, 어제의 모든 기억 가운데 그녀에 대한 기억만이 어쩐지 유난히, 어쩐지 완전히 따로 나를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저녁 무렵에 이미 완전히 잊어버리고 손을 내저었으며, 시모노프에게 보낸 편지에는 여전히 완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쩐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마치 리자 하나 때문에만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오면 어쩌지?」 나는 쉬지 않고 생각했다. 「그래, 뭐, 괜찮아, 오라지. 흠. 그 여자가 이를테면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고약해. 어제 나는 그 여자 앞에서 그렇게…… 영웅처럼 보였는데…… 그런데 지금은, 흠! 하긴 내가 이렇게 영락한 건 고약하지. 집은 그냥 궁상 그 자체야. 그런데 나는 어제 이런 옷을 입고 만찬에 가기로 했다니! 그리고 수세미 속이 삐져나온 내 방수포 소파! 여밀 수도 없는 내 실내복! 이 무슨 넝마 조각인지……. 그리고 그 여자는 이 모든 걸 보겠지. 아폴론도 보겠지. 그 짐승은 틀림없이 그 여자를 모욕할 거야. 나에게 무례를 부리려고 그 여자에게 트집을 잡겠지. 그러면 나는 물론 늘 그렇듯 겁먹고, 그 여자 앞에서 종종거리고, 실내복 자락으로 몸을 가리고, 웃기 시작하고, 거짓말하기 시작하겠지. 아, 추잡해! 그런데 가장 추잡한 건 그게 아니야! 여기엔 무언가 더 중요하고, 더 역겹고, 더 비열한 게 있어! 그래, 더 비열한 게! 그리고 또, 또 이 비열한 거짓 가면을 써야 한다니!……」

이 생각에 이르자 나는 그대로 확 달아올랐다.

「왜 비열한 거지? 무슨 비열한? 나는 어제 진심으로 말했어. 기억해. 내 안에도 진짜 감정이 있었어. 나는 바로 그 여자 안에 고결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어……. 그 여자가 울었다면 그건 좋은 거야, 이롭게 작용할 거야…….」

그래도 나는 도무지 가라앉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내내, 이미 집에 돌아온 뒤에도, 셈해 보면 리자가 절대 올 수 없는 아홉 시가 넘어서도 그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늘 똑같은 모습으로 떠올랐다. 바로 어제 일 가운데 한 순간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성냥으로 방을 비추고 그녀의 창백하고 일그러진 얼굴과 순교자 같은 눈길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미소는 얼마나 애처롭고,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얼마나 일그러져 있었던가! 그러나 나는 그때 아직 몰랐다. 열다섯 해가 지나도 여전히 그 순간 그녀가 짓던 바로 그 애처롭고 일그러진, 쓸모없는 미소를 띤 리자를 떠올리게 되리라는 것을.

이튿날 나는 이미 또 이 모든 걸 헛소리로, 곤두선 신경으로, 무엇보다 과장으로 여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늘 내 이 약한 줄을 의식했고, 이따금 몹시 두려워했다. 「나는 무엇이든 과장하지. 그래서 절뚝거리는 거야.」 나는 매시간 스스로에게 되풀이했다. 그러나 「하긴, 그래도 리자는 아마 올 거야」, 이것이 그 무렵 내 모든 따짐을 맺는 후렴이었다. 나는 어찌나 불안했던지 이따금 미칠 듯이 화가 났다. 「올 거야! 반드시 올 거야!」 나는 방 안을 뛰어다니며 외쳤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올 거고, 기어이 찾아낼 거야! 이 깨끗한 마음들의 저주받을 낭만주의란 이런 거지! 오, 이 「추잡한 감상적인 영혼들」의 역겨움이여, 어리석음이여, 편협함이여! 아니, 어떻게 이해를 못 할까, 이해를 못 할 리가 없을 텐데?……」 그러나 여기서 나 자신이 멈췄고, 몹시 당황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얼마나 적은, 얼마나 적은 말이 필요했던가.」 나는 지나가듯 생각했다. 「얼마나 적은 목가가 필요했던가(그것도 꾸며 내고, 책에서 따오고, 지어낸 목가가). 곧바로 인간의 영혼 전체를 제 뜻대로 돌려놓는 데. 이게 바로 처녀성이구나! 이게 바로 흙의 싱싱함이구나!」

이따금 나 스스로 그녀에게 가서 「모든 걸 이야기하고」 나에게 오지 말라고 사정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생각이 들면 내 안에서 어찌나 원한이 솟구치던지, 그 「저주받을」 리자가 갑자기 내 곁에 있다면 그대로 짓뭉개 버리고, 모욕하고, 침을 뱉고, 쫓아내고, 때렸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그녀는 오지 않았고, 나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특히 아홉 시가 넘으면 기운이 나고 느긋해져서, 이따금 꽤 달콤한 꿈까지 꾸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나는 리자를 구한다. 바로 그녀가 나에게 드나들고 내가 그녀에게 말해 주는 것으로……. 나는 그녀를 깨우치고 가르친다. 마침내 나는 그녀가 나를, 열렬히 사랑한다는 걸 알아챈다. 나는 모르는 척한다(하긴 무엇 때문에 모르는 척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그냥 멋으로). 마침내 그녀는 온통 당황한 채 아름답게, 떨고 흐느끼며 내 발밑에 몸을 던지고, 내가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이며 세상 무엇보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는 놀란다. 그러나……. 「리자.」 나는 말한다. 「정말 내가 네 사랑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생각해? 나는 모든 걸 보았어. 짐작했어. 하지만 내가 먼저 네 마음에 손을 댈 수는 없었어. 나는 너에게 영향력이 있으니까. 네가 고마움 때문에 일부러 내 사랑에 답하려고 억지로 애쓰고, 어쩌면 없을지도 모르는 감정을 억지로 불러일으킬까 봐 두려웠어.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 그건…… 전제니까……. 그건 섬세하지 못하니까(뭐, 한마디로 나는 여기서 무슨 유럽식, 조르주 상드식의 말할 수 없이 고결한 섬세함 따위로 횡설수설한다……). 하지만 이제, 이제 너는 내 것이야. 너는 내 작품이야. 너는 깨끗하고 아름다워. 너는 내 아름다운 아내야.

그리고 내 집에 당당하고 자유롭게
온전한 안주인으로 들어오라!」

그러고는 우리는 오래오래 잘 살고, 외국에 가고, 등등, 등등.」 한마디로 나 스스로도 비열해져서, 결국 나는 나 자신에게 혀를 내밀며 약을 올리는 것으로 끝냈다.

「게다가 그 「망할 년」을 내보내 주지도 않을 거야!」 나는 생각했다. 「그 여자들은 바깥에 돌아다니게 잘 안 내보내는 것 같거든. 저녁이면 더더욱(나에게는 어째서인지 그녀가 꼭 저녁에, 그것도 바로 일곱 시에 올 것만 같았다). 하긴 그 여자는 아직 거기에 완전히 매인 게 아니라 특별한 조건으로 있다고 했지. 그러니까, 흠! 빌어먹을, 올 거야, 반드시 올 거야!」

그 무렵 아폴론이 무례한 짓으로 내 기분을 딴 데로 돌려 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지막 인내까지 바닥나게 했다! 그는 내 종기였고, 신의 섭리가 내게 내린 채찍이었다. 우리는 몇 해 내리 늘 티격태격했고, 나는 그를 미워했다. 맙소사, 나는 그를 얼마나 미워했던가! 나는 평생 누구도 그만큼 미워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특히 어떤 순간에는. 그는 나이 지긋하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이었고, 한편으로 바느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나를, 그것도 도를 넘어 경멸했고, 참을 수 없을 만큼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긴 그는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이 허연 머리를 매끈하게 빗어 넘긴 머리통을, 이마 위에 부풀려 세우고 식물성 기름을 발라 놓은 앞머리를, 늘 V자 모양으로 다물고 있는 이 근엄한 입을 보기만 해도, 여러분은 벌써 한 번도 자기를 의심해 본 적 없는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는 최고로 꼼꼼한 규칙쟁이였다. 내가 지상에서 만난 모든 규칙쟁이 가운데 가장 거대한 규칙쟁이였다. 게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나 어울릴 법한 자존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기 단추 하나하나, 자기 손톱 하나하나에 반해 있었다. 틀림없이 반해 있었다. 그런 눈빛이었다! 그는 나를 완전히 전제적으로 대했고, 나와 말을 아주 적게 했으며, 어쩌다 나를 쳐다볼 때면 단호하고, 위엄 있게 자신만만하며, 늘 비웃는 눈길로 보아서 이따금 나를 미치게 했다. 그는 마치 내게 더없는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모습으로 제 일을 했다. 하긴 그는 나를 위해 거의 정확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무엇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전혀 여기지도 않았다. 그가 나를 온 세상에서 가장 바보로 여긴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곁에 두고 있다면」, 그건 오직 나에게서 매달 급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달에 칠 루블을 받고 내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동의했다. 그 덕분에 나는 많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이따금 미움이 어찌나 심해지던지, 그의 걸음걸이 하나만으로도 거의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특히 역겨웠던 건 그의 혀 짧은 소리였다. 그는 혀가 조금 필요 이상으로 길었거나 무언가 그런 게 있어서 늘 쉬쉬거리고 혀 짧은 소리를 냈는데, 그걸 지독하게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게 자기에게 엄청난 위엄을 준다고 상상하면서. 그는 뒷짐을 지고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특히 그가 칸막이 너머 제 방에서 시편을 읽기 시작할 때면 나를 미치게 했다. 이 낭독 때문에 나는 숱한 싸움을 치렀다. 그러나 그는 저녁마다 조용하고 고른 목소리로, 마치 죽은 사람 앞에서처럼 가락을 붙여 읽기를 지독하게 좋아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는 지금 죽은 사람 앞에서 시편을 읽어 주는 일로 고용되고, 그러면서 쥐를 잡고 구두약을 만든다. 그런데 그때 나는 그를 쫓아낼 수 없었다. 마치 그가 내 존재와 화학적으로 녹아 붙은 것처럼. 게다가 그 자신도 절대로 나를 떠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구 딸린 셋방에서 살 수가 없었다. 내 집은 나의 저택이자, 나의 껍데기, 내가 온 인류로부터 숨는 나의 상자였다. 그런데 아폴론은 어째서인지 이 집에 딸린 것처럼 여겨졌고, 나는 꼬박 일곱 해 동안 그를 쫓아낼 수 없었다.

이를테면 그의 급료를 이틀이든 사흘이든 미루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면 그는 어디로 몸을 피해야 할지 모를 만큼 소동을 벌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며칠 동안 나는 모두에게 어찌나 앙심을 품고 있었던지, 어째서인지 무엇 때문인지 아폴론을 벌주기로, 그에게 두 주 동안 더 급료를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두 해쯤 전부터 그렇게 하려던 참이었다. 오직 그가 감히 그렇게까지 내 위에서 거드름을 피워서는 안 되며, 내가 원하면 언제든 급료를 주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나는 그에게 이 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일부러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의 자존심을 꺾고 그가 먼저 급료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려고. 그러면 나는 서랍에서 칠 루블을 모두 꺼내, 돈이 있고 일부러 따로 떼어 두었다는 걸 보여 주고는, 「주기 싫어, 싫어, 그냥 싫어. 급료를 주기 싫어. 그러고 싶으니까 싫어.」 하고 말할 것이다. 이건 「내 주인으로서의 뜻」이니까, 그가 공손하지 않으니까, 그가 무례한 놈이니까. 하지만 그가 공손하게 부탁한다면 나는 어쩌면 누그러져서 줄 것이다. 안 그러면 두 주를 더 기다리고, 세 주를 기다리고, 꼬박 한 달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앙심을 품었어도 결국 그가 이겼다. 나는 나흘도 버티지 못했다. 그는 이런 경우에 늘 시작하던 것부터 시작했다. 이런 경우가 이미 있었고, 시험해 본 적이 있었으니까(그리고 말해 두지만, 나는 이 모든 걸 미리 알고 있었다. 그의 비열한 전술을 줄줄 외우고 있었다). 곧 그는 이따금 나에게 몹시 엄한 눈길을 박고 몇 분 내리 떼지 않았다. 특히 나를 맞거나 배웅할 때. 이를테면 내가 버티며 이 눈길을 못 알아챈 척하면, 그는 여전히 말없이 다음 고문에 들어갔다. 갑자기 난데없이, 내가 방 안을 걷거나 책을 읽고 있을 때 조용하고 매끄럽게 내 방에 들어와 문가에 멈춰 서서 한 손을 뒷짐 지고 한 발을 내밀고는, 엄하다기보다 완전히 경멸하는 눈길을 내게 박았다. 내가 갑자기 뭘 원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몇 초 더 나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어쩐지 유난히 입술을 앙다물고 의미심장한 모습으로 제자리에서 천천히 돌아서서 천천히 제 방으로 가 버렸다. 두 시간쯤 지나면 갑자기 다시 나와서 또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다. 미칠 듯이 화가 나서 뭘 원하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나 스스로 날카롭고 위압적으로 고개를 들어 나도 그를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 분쯤 서로를 쳐다보곤 했다. 마침내 그가 천천히 거드름을 피우며 돌아서서 또 두 시간 동안 가 버렸다.

그래도 내가 정신을 차리지 않고 계속 반항하면, 그는 갑자기 나를 보며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길고 깊게, 마치 그 한숨 하나로 내 도덕적 타락의 깊이를 모두 재는 것처럼. 그리고 물론 결국 그가 완전히 이기는 것으로 끝났다. 나는 미칠 듯이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지만, 문제가 된 일은 결국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늘 하던 「엄한 눈길」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곧바로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너무 짜증이 나 있었다.

「서!」 그가 한 손을 뒷짐 진 채 제 방으로 가려고 천천히 말없이 돌아설 때 나는 광분해서 외쳤다. 「서! 돌아와, 돌아오라고 했잖아!」 아마 내가 어찌나 부자연스럽게 으르렁거렸던지, 그는 돌아서서 좀 놀라기까지 한 얼굴로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긴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바로 그게 나를 미치게 했다.

「어떻게 감히 허락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와서 나를 그렇게 쳐다봐? 대답해!」

그러나 반 분쯤 차분하게 나를 보더니 그는 다시 돌아서기 시작했다.

「서!」 나는 그에게 달려가며 으르렁거렸다. 「꼼짝 마! 그래. 이제 대답해. 뭘 보러 들어왔어?」

「시방 저한테 분부하실 게 있으시면 그걸 하는 게 제 일입지요.」 그는 또 잠시 잠자코 있다가, 조용하고 차분하게 혀 짧은 소리로, 눈썹을 치켜올리고 차분히 고개를 이쪽 어깨에서 저쪽 어깨로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이 모든 걸 소름 끼치게 차분하게.

「그걸 물은 게 아니야, 그걸 물은 게 아니라고, 이 망나니야!」 나는 원한으로 떨며 외쳤다. 「망나니야, 네가 무엇 때문에 여기 오는지 내가 직접 말해 주지. 너는 내가 급료를 안 주는 걸 보고,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고개 숙여 부탁하기는 싫어서, 그 멍청한 눈길로 나를 벌주고 괴롭히려고 오는 거야. 그런데 망나니야, 너는 이게 얼마나 멍청한지 짐작도 모-옷 하는구나. 멍청하고, 멍청하고, 멍청하고, 멍청하고, 멍청하다고!」

그는 말없이 다시 돌아서려 했지만, 나는 그를 붙잡았다.

「들어.」 나는 그에게 외쳤다. 「여기 돈이 있어, 봐. 여기 있어!(나는 작은 탁자에서 돈을 꺼냈다) 칠 루블 전부야. 그런데 너는 이걸 못 받아. 네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와서 나한테 용서를 빌 때까지 못 바-다. 알아들었어!」

「그럴 리가 없습지요!」 그가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자신만만함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될 거야!」 나는 외쳤다. 「내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나리한테 용서를 빌 일도 없습지요.」 그는 내 외침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것처럼 계속했다. 「오히려 나리가 저를 「망나니」라고 부르셨으니, 그걸로 저는 언제든 파출소에 모욕을 당했다고 고소할 수 있습지요.」

「가! 고소해!」 나는 으르렁거렸다. 「지금 당장, 이 순간, 이 초에 가! 그래도 너는 망나니야! 망나니! 망나니!」 그러나 그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돌아서서, 이제 부르는 내 외침은 듣지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미끄러지듯 제 방으로 갔다.

「리자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은 하나도 없었을 텐데!」 나는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는 잠시 거드름을 피우며 엄숙하게, 그러나 천천히 세차게 뛰는 가슴을 안고 서 있다가, 몸소 칸막이 너머 그에게로 갔다.

「아폴론!」 나는 조용히 또박또박, 그러나 숨이 막혀 가며 말했다. 「지금 곧, 조금도 지체 말고 구역 경찰관을 불러와!」

그는 그사이 벌써 제 탁자에 앉아 안경을 쓰고 무언가 바느질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내 명령을 듣자 갑자기 푸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 순간 가! 가, 안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도 못 할 거야!」

「참말로 나리는 제정신이 아니십니다요.」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여전히 천천히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바늘에 실을 꿰면서 말했다. 「세상에 제 스스로 자기를 잡아가라고 관원을 부르러 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요? 그리고 겁주시는 거라면, 괜히 목만 쉬시는 겁지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요.」

「가!」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곧 그를 때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 순간 현관문이 갑자기 조용히 천천히 열리고 누군가 들어와 멈춰 서서 어리둥절하게 우리를 살피기 시작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돌아보고 부끄러워 얼어붙었다가 내 방으로 뛰어갔다. 거기서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그 자세로 얼어붙었다.

이 분쯤 지나 아폴론의 느린 발소리가 들렸다.

「웬 여자가 나리를 찾습니다요.」 그는 유난히 엄하게 나를 보며 말하고, 비켜서서 들여보냈다. 리자를. 그는 나가려 하지 않고 비웃듯 우리를 살폈다.

「가! 가!」 나는 넋이 나가서 그에게 명령했다. 그 순간 내 시계가 용을 쓰더니 쉭쉭거리며 일곱 시를 쳤다.

2부 9장

그리고 내 집에 당당하고 자유롭게
온전한 안주인으로 들어오라!
— 같은 시에서

나는 넋이 나가고, 망신당하고, 역겹도록 당황한 채 그녀 앞에 서 있었고, 아마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솜을 넣은 털북숭이 실내복 자락을 여미려고 온 힘을 다하면서. 꼭 얼마 전 기가 꺾였을 때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아폴론은 이 분쯤 우리 곁에 서 있다가 나갔지만, 나는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쁜 건 그녀도 갑자기 당황했다는 것이다. 내가 예상하지도 못할 만큼. 물론 나를 보고.

「앉아.」 나는 기계적으로 말하고 그녀에게 탁자 곁 의자를 밀어 주고, 나 자신은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곧바로 순순히 앉아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분명 지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 기다림의 순진함이 나를 미치게 했지만, 나는 참았다.

바로 이럴 때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척, 모든 게 여느 때와 같은 척 애써야 했는데, 그녀는……. 그리고 나는 그녀가 이 모든 것의 값을 비싸게 치르게 되리라고 어렴풋이 느꼈다.

「이상한 처지에서 나를 만났구나, 리자.」 나는 말을 더듬으며, 바로 이렇게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꺼냈다.

「아니, 아니, 무슨 생각은 하지 마!」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는 걸 보고 나는 외쳤다. 「나는 내 가난이 부끄럽지 않아……. 오히려 나는 내 가난을 자랑스럽게 여겨. 나는 가난하지만 고결해……. 가난하면서도 고결할 수 있어.」 나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차 마실래?」

「아니요…….」 그녀가 말을 꺼내려 했다.

「기다려!」

나는 벌떡 일어나 아폴론에게 달려갔다. 어디로든 꺼져 버려야 했다.

「아폴론.」 나는 줄곧 주먹에 쥐고 있던 칠 루블을 그의 앞에 던지며 열에 들뜬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여기 네 급료야. 봐, 주잖아. 그 대신 너는 나를 구해 줘야 해. 당장 술집에서 차와 러스크 열 개를 가져와. 네가 가지 않으면 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야! 너는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몰라……. 이건 전부야! 너는 무슨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너는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몰라!……」

벌써 일감에 앉아 다시 안경을 쓴 아폴론은 처음엔 바늘을 놓지 않은 채 말없이 돈을 곁눈질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아직도 꿰고 있던 실과 씨름을 계속했다. 나는 나폴레옹처럼 팔짱을 끼고 그의 앞에 서서 삼 분쯤 기다렸다. 관자놀이가 땀에 젖었다. 나 자신이 창백하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를 보다가 그가 가엾어졌던 모양이다. 실을 다 꿰자 그는 천천히 일어나서, 천천히 의자를 밀어내고, 천천히 안경을 벗고, 천천히 돈을 세더니, 마침내 어깨 너머로 나에게 한 사람 분을 온전히 사 올지 묻고는 천천히 방을 나갔다. 리자에게 돌아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대로, 실내복 차림으로 발길 닿는 대로 도망쳐 버릴까, 그다음은 될 대로 되라지.

나는 다시 앉았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몇 분 동안 우리는 잠자코 있었다.

「그놈을 죽여 버릴 거야!」 나는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 잉크병에서 잉크가 튀었다.

「아, 왜 그러세요!」 그녀가 흠칫 떨며 외쳤다.

「그놈을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나는 탁자를 두드리며 비명을 질렀다. 완전히 광분한 채,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런 광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완전히 이해하면서.

「너는 몰라, 리자. 이 망나니가 나에게 무엇인지. 그놈은 나의 망나니야……. 그놈은 지금 러스크를 사러 갔어. 그놈은…….」

그리고 갑자기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발작이었다. 흐느끼는 사이사이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그러나 나는 이미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겁을 먹었다.

「왜 그러세요! 대체 왜 그러세요!」 그녀는 내 곁에서 허둥대며 외쳤다.

「물, 물 좀 줘, 저기!」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긴 속으로는 물이 없어도 되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의식하면서. 그러나 나는 이른바 연기를 했다. 체면을 지키려고. 발작은 진짜였는데도.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나를 보며 물을 건넸다. 그 순간 아폴론이 차를 들여왔다. 갑자기 이 흔하고 산문적인 차가 그 모든 일이 있은 뒤에 지독하게 꼴사납고 초라하게 여겨져서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리자는 겁먹은 듯한 눈으로 아폴론을 보았다. 그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나갔다.

「리자, 너 나를 경멸하지?」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조바심에 떨며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그녀는 당황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차 마셔!」 나는 심술궂게 말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지만, 물론 당하는 건 그녀여야 했다. 갑자기 그녀에 대한 무서운 원한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대로 죽여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나는 그동안 그녀와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 「이 모든 게 이 여자 때문이야.」 나는 생각했다.

우리의 침묵은 벌써 오 분쯤 이어졌다. 차는 탁자 위에 있었다. 우리는 손대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더 괴롭히려고 일부러 먼저 마시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고, 그녀는 먼저 마시기가 거북했다. 몇 번 그녀는 서글프게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고집스럽게 잠자코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순교자는 나 자신이었다. 내 심술궂은 어리석음의 역겨운 비천함을 완전히 의식하면서도 동시에 도무지 나를 억누를 수 없었으니까.

「나는 거기서…… 아예…… 나오고 싶어요.」 그녀는 어떻게든 침묵을 깨려고 말을 꺼냈다. 그러나 가엾게도! 그러지 않아도 어리석은 순간에, 그러지 않아도 어리석은 나 같은 인간에게 바로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의 서투름과 쓸데없는 솔직함 때문에 내 가슴마저 연민으로 쓰라렸다. 그러나 무언가 흉측한 것이 곧바로 내 안의 연민을 모두 짓눌러 버렸다. 오히려 나를 더 부추겼다. 세상 모든 게 망해 버려라! 또 오 분이 지났다.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닌가요?」 그녀가 겨우 들릴 만큼 쭈뼛쭈뼛 말을 꺼내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욕당한 자존심의 이 첫 번쩍임을 보자마자 나는 원한으로 그대로 떨었고, 곧바로 터져 나왔다.

「대체 너는 무엇 때문에 나한테 왔어, 좀 말해 줄래?」 나는 숨이 막혀 가며, 말의 논리적 순서도 생각하지 않고 시작했다. 나는 모든 걸 한꺼번에, 단숨에 털어놓고 싶었다. 무엇부터 시작할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왔어? 대답해! 대답해!」 나는 정신없이 외쳤다. 「아가씨, 네가 왜 왔는지 내가 말해 주지. 너는 그때 내가 애처로운 말을 해 줘서 온 거야. 그래서 마음이 녹아서 또 「애처로운 말」이 듣고 싶어진 거지. 그럼 알아 둬, 알아 둬. 나는 그때 너를 비웃고 있었어. 지금도 비웃고 있어. 왜 떨어? 그래, 비웃었어! 그 전에 만찬에서 나보다 먼저 그리로 간 그놈들에게 모욕을 당했어. 나는 그놈들 가운데 하나, 장교 놈을 두들겨 패려고 너희 집에 갔어. 그런데 못 했어. 놈을 못 만났어. 누구에게든 모욕을 앙갚음해야 했어. 내 몫을 찾아야 했지. 네가 걸렸고, 나는 너에게 화풀이를 하고 비웃었어. 나는 굴욕당했으니 나도 굴욕 주고 싶었어. 나는 걸레처럼 짓뭉개졌으니 나도 힘을 보여 주고 싶었어……. 그게 다야. 그런데 너는 내가 일부러 너를 구하러 갔다고 생각했지, 응? 그렇게 생각했지? 그렇게 생각했어?」

나는 그녀가 어쩌면 헷갈려서 자세한 건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본질은 아주 잘 이해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되었다. 그녀는 손수건처럼 하얘졌고, 무언가 말하려 했고, 입술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마치 도끼에 찍힌 것처럼 의자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로 내내 그녀는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채 끔찍한 두려움에 떨며 내 말을 들었다. 냉소, 내 말의 냉소가 그녀를 짓눌렀다…….

「구한다고!」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 앞에서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계속했다. 「무엇에서 구한다는 거야! 나는 어쩌면 너보다 더 나빠. 내가 그때 너한테 설교를 늘어놓을 때 왜 내 낯짝에 대고 이렇게 쏘아붙이지 않았어? 「그러는 당신은 왜 우리한테 왔어요? 설교나 하려고?」 힘이, 힘이 그때 나에게 필요했어. 놀이가 필요했어. 네 눈물을, 네 굴욕을, 네 히스테리를 얻어 내는 게 필요했어. 그게 그때 나에게 필요했던 거야! 그런데 나 자신도 그때 견디지 못했지. 나는 쓰레기니까. 겁을 먹고 대체 무엇 때문인지 어리석게 너에게 주소를 줬어. 그래서 나중에 집에 채 닿기도 전에 벌써 그 주소 때문에 너를 온갖 욕으로 욕했어. 나는 벌써 너를 미워했어. 그때 너에게 거짓말을 했으니까. 나는 말로만 놀고 머릿속으로만 꿈꾸지, 실제로 나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아? 너희가 꺼져 버리는 거, 그거야! 나에게는 평안이 필요해. 나는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을 당장 한 푼에 팔아넘길 거야. 세상이 망하는 것과 내가 차를 못 마시는 것 중에? 나는 세상은 망해도 나는 늘 차를 마셔야 한다고 말할 거야. 너 이걸 알았어, 몰랐어? 그런데 나는 알아. 내가 악당이고, 비열한 놈이고, 이기주의자이고, 게으름뱅이라는 걸. 나는 이 사흘 동안 네가 올까 봐 두려워서 떨었어. 그런데 이 사흘 동안 무엇이 특히 나를 불안하게 했는지 알아? 그때 나는 네 앞에서 그렇게 영웅처럼 굴었는데, 여기서 너는 갑자기 이 찢어진 실내복을 입은, 거지 같고 추잡한 나를 보게 된다는 거였어. 아까 나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그럼 알아 둬. 부끄러워. 무엇보다 부끄럽고, 무엇보다 두려워. 도둑질을 하는 것보다 더. 나는 살가죽이 벗겨진 것처럼 허영이 강해서 공기만 닿아도 아파. 정말 너는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개처럼 심술궂게 아폴론에게 달려들 때 이 실내복 차림의 나를 네가 봤다는 걸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걸. 되살려 주겠다던 자가, 예전의 영웅이, 옴 오른 털북숭이 똥개처럼 제 하인에게 달려들고, 하인은 그를 비웃다니! 그리고 아까 부끄러운 여편네처럼 네 앞에서 참지 못한 눈물도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지금 너에게 털어놓는 것도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래, 너, 너 하나가 이 모든 걸 책임져야 해. 네가 그렇게 걸렸으니까. 내가 악당이니까. 내가 지상의 모든 벌레 가운데 가장 추잡하고, 가장 우습고, 가장 쩨쩨하고, 가장 어리석고, 가장 질투 많은 놈이니까. 그 벌레들은 나보다 조금도 낫지 않은데, 대체 왜인지 절대 당황하지 않아. 그런데 나는 평생 온갖 서캐한테서도 손가락질을 당할 거야. 이게 내 특징이야! 네가 이걸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너와, 네가 거기서 망하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대체 무슨, 무슨 상관이야? 그런데 이해하겠어? 이걸 너에게 털어놓았으니, 네가 여기 있으면서 들었다는 이유로 이제 내가 얼마나 너를 미워하게 될지? 사람은 평생에 딱 한 번만 이렇게 털어놓아. 그것도 히스테리 속에서!…… 또 뭘 원해? 이 모든 걸 듣고도 왜 아직 내 앞에 버티고 서서 나를 괴롭히고 가지 않는 거야?」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모든 것을 책에 따라 생각하고 상상하는 데,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예전에 꿈속에서 스스로 지어낸 대로 그리는 데 어찌나 익숙했던지, 그때 이 이상한 일을 곧바로 이해하지조차 못했다. 일어난 일은 이것이었다. 내게 모욕당하고 짓뭉개진 리자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에서, 여자가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언제나 무엇보다 먼저 이해하는 것을 이해했다. 바로 나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겁에 질리고 모욕당한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서 먼저 슬픈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비열한 놈, 악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눈물이 쏟아지자(나는 이 긴 연설을 줄곧 눈물을 흘리며 했다) 그녀의 얼굴 전체가 무슨 경련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일어나 나를 말리려 했다. 그리고 내가 말을 마치자 그녀는 「왜 여기 있어, 왜 가지 않아!」 하는 내 외침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모든 걸 말하는 게 나 자신에게 몹시 괴로웠을 거라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게다가 가엾게도 그녀는 그렇게 짓눌린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나보다 한없이 낮게 여겼다. 그런 그녀가 어디서 화를 내고 모욕을 느끼겠는가? 그녀는 갑자기 무언가 억누를 수 없는 충동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온몸으로 내게 다가오려 하면서도 아직 쭈뼛거려 제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내게 두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내 안에서도 가슴이 뒤집혔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내게 달려들어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나도 견디지 못하고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흐느꼈다…….

「사람들이 나를…… 나는 될 수가 없어…… 착한 사람이!」 나는 겨우 말하고는 소파까지 가서 엎드려 쓰러져 십오 분 동안 진짜 히스테리 속에서 흐느꼈다. 그녀는 내게 몸을 기대고 나를 끌어안은 채 그 포옹 속에서 얼어붙은 듯했다.

그러나 어쨌든 문제는 히스테리가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나는 역겨운 진실을 쓰고 있다), 소파에 단단히 엎드려 내 형편없는 가죽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나는 조금씩, 멀리서부터, 저도 모르게, 그러나 억누를 수 없이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고개를 들어 리자의 눈을 똑바로 보기가 거북하리라는 것을. 무엇이 부끄러웠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부끄러웠다. 흥분한 내 머리에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이제 역할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 이제 여주인공은 그녀이고, 나는 그날 밤, 나흘 전에 내 앞에서 그녀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굴욕당하고 짓뭉개진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이 모든 게 아직 소파에 엎드려 있던 그 순간에 떠올랐다!

맙소사! 그러면 나는 그때 그녀를 질투했던 걸까?

모르겠다. 지금까지도 결정할 수 없고,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지배하고 폭군처럼 굴지 않고는 나는 살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나 따짐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으니, 따질 것도 없다.

그래도 나는 나를 이겨 내고 고개를 조금 들었다. 언젠가는 들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도 확신하건대, 바로 그녀를 보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에 그때 내 가슴에서 갑자기 다른 감정이 불붙어 타올랐다……. 지배와 소유의 감정이. 내 눈이 정욕으로 번쩍였고, 나는 그녀의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얼마나 미워했고, 또 얼마나 그녀에게 끌렸던가! 한 감정이 다른 감정을 부추겼다. 거의 복수와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처음엔 당혹 같은 것이, 두려움까지 같은 것이 나타났지만, 그건 한순간뿐이었다. 그녀는 황홀하게, 뜨겁게 나를 끌어안았다.

2부 10장

십오 분 뒤 나는 미칠 듯이 조바심을 내며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걸핏하면 칸막이로 다가가 틈새로 리자를 엿보았다. 그녀는 침대에 고개를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있었고, 아마 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지 않았고, 바로 그게 나를 짜증 나게 했다. 이번에 그녀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결정적으로 모욕했다. 그러나…… 이야기할 것도 없다. 그녀는 내 정열의 충동이 바로 복수였다는 것, 그녀에게 가한 새로운 굴욕이었다는 것, 그리고 아까의 거의 대상 없는 내 증오에 이제 그녀에 대한 개인적인, 질투 섞인 증오가 더해졌다는 것을 짐작했다……. 하긴 그녀가 이 모든 걸 또렷이 이해했다고 단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 대신 그녀는 내가 역겨운 인간이며, 무엇보다 그녀를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완전히 이해했다.

알고 있다. 사람들은 이게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처럼 이렇게 심술궂고 어리석을 수는 없다고. 어쩌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적어도 그 사랑을 값지게 여기지 않을 수는 없다고 덧붙일지도 모른다. 어째서 믿을 수 없다는 건가? 첫째로 나는 이미 사랑할 수가 없었다. 되풀이하건대 나에게 사랑한다는 건 폭군처럼 굴고 도덕적으로 우위에 서는 걸 뜻했으니까. 나는 평생 다른 사랑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이제는 이따금 사랑이란 바로 사랑받는 대상이 자기 위에서 폭군처럼 굴 권리를 자진해서 내주는 데 있다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지하의 꿈속에서도 사랑을 싸움 말고는 달리 상상하지 못했다. 늘 증오로 시작해 도덕적 정복으로 끝냈고, 그다음엔 정복한 대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이미 도덕적으로 그토록 타락하고 「살아 있는 삶」에서 그토록 멀어져서, 아까 그녀가 「애처로운 말」을 들으러 나에게 왔다고 나무라고 부끄럽게 만들 생각을 했는데 무엇이 믿을 수 없다는 건가. 그녀가 애처로운 말을 들으러 온 게 전혀 아니라 나를 사랑하러 왔다는 것을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여자에게는 바로 사랑 속에 모든 부활이, 어떤 파멸에서든 모든 구원이, 모든 거듭남이 있고, 달리는 드러날 수도 없으니까. 하긴 방 안을 뛰어다니며 틈새로 칸막이 너머를 엿볼 때 나는 그렇게까지 그녀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가 여기 있다는 게 견딜 수 없이 괴로웠을 뿐이다. 나는 그녀가 사라지기를 바랐다. 나는 「평안」을 바랐고, 지하에 홀로 남기를 바랐다. 익숙하지 않은 「살아 있는 삶」이 어찌나 나를 짓눌렀던지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그러나 몇 분이 더 지나도 그녀는 마치 넋이라도 나간 듯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일깨워 주려고 뻔뻔하게도 조용히 칸막이를 두드렸다……. 그녀는 갑자기 흠칫 몸을 떨더니 자리에서 튀어 일어나, 마치 나에게서 어딘가로 도망치듯 제 숄을, 모자를, 외투를 찾아 서둘렀다……. 이 분 뒤 그녀는 천천히 칸막이 뒤에서 나와 무겁게 나를 보았다. 나는 심술궂게 히죽 웃었다. 하긴 체면 때문에 억지로. 그리고 그녀의 눈길에서 얼굴을 돌렸다.

「안녕히 계세요.」 그녀가 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나는 갑자기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아 펴고, 쥐여 주고…… 그러고는 다시 쥐게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돌아서서 적어도 보지 않으려고 서둘러 다른 구석으로 물러났다…….

나는 지금 당장 거짓말을 할 뻔했다. 내가 그걸 무심코, 제정신이 아니어서, 넋이 나가서, 어리석게 했다고 쓸 뻔했다. 그러나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곧바로 말한다. 나는 그녀의 손을 펴서 그 안에…… 심술로 쥐여 주었다. 그녀가 칸막이 뒤에 앉아 있고 내가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그렇게 하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것만은 틀림없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잔인한 짓을 일부러 하긴 했지만 마음에서가 아니라 내 나쁜 머리에서 했다. 이 잔인함은 어찌나 꾸며 낸 것이고, 어찌나 머리에서 나온 것이며, 어찌나 일부러 지어내고 책에서 따온 것이었던지, 나 자신이 일 분도 견디지 못했다. 처음엔 보지 않으려고 구석으로 물러났다가, 그다음엔 부끄러움과 절망 속에 리자를 뒤쫓아 뛰어나갔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리자! 리자!」 나는 계단에 대고 외쳤다. 그러나 용기 없이, 반쯤 낮춘 목소리로…….

대답이 없었다. 아래쪽 계단에서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리자!」 나는 더 크게 외쳤다.

대답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아래에서 거리로 난 뻑뻑한 바깥 유리문이 무겁게 삐걱거리며 열렸다가 뻑뻑하게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울림이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떠났다. 나는 생각에 잠겨 방으로 돌아왔다. 지독하게 괴로웠다.

나는 그녀가 앉았던 의자 곁 탁자 앞에 멈춰 서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일 분쯤 지나 갑자기 나는 온몸을 떨었다. 바로 내 앞 탁자 위에서 나는…… 한마디로 나는 구겨진 파란 오 루블짜리 지폐를 보았다. 일 분 전에 그녀 손에 쥐여 준 바로 그 지폐를. 그 지폐였다. 다른 지폐일 리가 없었다. 집에 다른 지폐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가 다른 구석으로 물러난 그 순간에 손에서 지폐를 탁자 위로 던져 놓은 것이다.

뭐가 이상한가? 나는 그녀가 그렇게 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예상할 수 있었다고? 아니다. 나는 어찌나 이기주의자였던지, 실제로는 사람을 어찌나 존중하지 않았던지, 그녀가 그렇게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것을 나는 견디지 못했다. 한순간 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옷을 입으러 달려가 허둥지둥 손에 잡히는 대로 걸치고 곤두박질치듯 그녀를 뒤쫓아 뛰어나갔다. 내가 거리로 뛰어나갔을 때 그녀는 아직 이백 걸음도 가지 못했다.

조용했다.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거의 수직으로 떨어져 보도와 인적 없는 거리에 쿠션을 깔고 있었다. 행인은 아무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로등이 서글프고 쓸모없이 깜빡였다. 나는 네거리까지 이백 걸음쯤 뛰어가서 멈췄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녀를 뒤쫓아 뛰는가? 왜? 그녀 앞에 엎드려 뉘우침으로 흐느끼고, 그녀의 발에 입 맞추고, 용서를 빌려고! 나는 그걸 원했다. 가슴이 온통 산산이 찢어졌다. 나는 절대, 절대 이 순간을 무심하게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그녀의 발에 입 맞췄다는 바로 그 이유로 어쩌면 내일 당장 그녀를 미워하게 되지 않을까? 내가 그녀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까? 오늘 또다시, 백 번째로 내 값어치를 알지 않았던가? 내가 그녀를 괴롭히지 않겠는가!」

나는 눈 속에 서서 탁한 안개를 들여다보며 이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차라리 낫지 않을까, 차라리 낫지 않을까.」 나중에 집에서 공상으로 살아 있는 가슴의 통증을 잠재우며 나는 공상했다. 「그녀가 이제 모욕을 영원히 안고 간다면 차라리 낫지 않을까? 모욕, 그건 정화야. 그건 가장 쓰리고 아픈 의식이야! 내일이면 나는 나 자신으로 그녀의 영혼을 더럽히고 그녀의 마음을 지치게 했을 거야. 그런데 모욕은 이제 그녀 안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고, 그녀를 기다리는 진흙탕이 아무리 추잡해도 모욕이 그녀를 높이고 깨끗하게 할 거야……. 증오로……. 흠……. 어쩌면 용서로도……. 하긴, 이 모든 것으로 그녀가 더 편해질까?」

그리고 정말이지, 이제 나는 나 나름으로 한가한 물음 하나를 던진다. 무엇이 나은가. 값싼 행복인가, 아니면 고양된 고통인가? 자, 무엇이 나은가?

그날 저녁 영혼의 통증으로 거의 반쯤 죽은 채 집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이런 것을 헛되이 떠올렸다. 나는 한 번도 그만큼 많은 고통과 뉘우침을 견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집을 뛰쳐나갈 때 내가 도중에 집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데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을 수 있었을까? 나는 다시는 리자를 만나지 못했고,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는 그때 우울해서 거의 앓아누울 뻔했는데도 모욕과 증오의 이로움에 관한 그 문장에 오랫동안 만족해 있었다.

그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이 모든 게 어쩐지 너무 불쾌하게 떠오른다. 지금은 많은 것이 불쾌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여기서 「수기」를 끝내는 게 어떨까? 이걸 쓰기 시작한 게 잘못이었던 것 같다. 적어도 이 이야기를 쓰는 내내 나는 부끄러웠다. 그러니 이건 이미 문학이 아니라 교정 형벌이다. 이를테면 내가 구석에서의 도덕적 타락으로, 환경의 결핍으로, 살아 있는 것에서 멀어짐으로, 지하에서의 허영 섞인 원한으로 내 삶을 어떻게 탕진했는지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맹세코 재미없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엔 일부러 반주인공의 모든 특징이 모여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게 몹시 불쾌한 인상을 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삶에서 멀어졌고, 모두 절뚝거리니까. 누구나 많든 적든. 어찌나 멀어졌던지 이따금 진짜 「살아 있는 삶」에 무언가 역겨움까지 느끼며, 그래서 누가 그걸 일깨우면 참지 못한다. 우리는 진짜 「살아 있는 삶」을 거의 노동으로, 거의 직무로 여길 지경에 이르렀고, 모두 속으로 책에 따르는 게 낫다고 동의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따금 무엇을 꼼지락거리고, 무엇을 떼쓰고, 무엇을 조르는가? 우리 자신도 모른다. 우리의 떼쓰는 청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더 나빠질 것이다. 자, 해 보시라. 이를테면 우리에게 자주성을 더 주고, 우리 가운데 누구든 손을 풀어 주고, 활동 범위를 넓히고, 보호 감독을 느슨하게 해 보시라. 그러면 우리는…… 장담하건대, 우리는 곧바로 다시 보호 감독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청할 것이다. 알고 있다. 여러분은 어쩌면 이것 때문에 나에게 화를 내고, 소리치고, 발을 구르실지 모른다. 「당신 혼자 얘기나, 지하의 당신의 초라한 얘기나 하시오. 감히 「우리 모두」라고 말하지 마시오.」 잠깐만요, 여러분, 나는 이 「모두」로 변명하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그저 여러분이 절반도 감히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끝까지 밀고 나갔을 뿐이다. 게다가 여러분은 자기 비겁함을 분별로 여기고 그것으로 위안을 얻으며 스스로를 속였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여러분보다 더 「살아 있는」 셈이다. 더 뚫어지게 보시라!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이고 뭐라고 불리는지조차 모른다. 책 없이 우리만 내버려 두면 우리는 곧바로 헷갈리고 길을 잃을 것이다. 어디에 붙어야 할지,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할지, 무엇을 존경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조차, 진짜 제 몸과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조차 짐스러워한다. 그걸 부끄러워하고 치욕으로 여기며, 무슨 있지도 않은 보편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 우리는 죽어서 태어난 자들이다. 게다가 오래전부터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도 않는데, 그게 점점 더 마음에 든다. 맛을 들이고 있다. 곧 어떻게든 관념에서 태어나는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하지만 그만하자. 나는 더 이상 「지하에서」 쓰고 싶지 않다…….

하긴 이 역설가의 「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참지 못하고 계속 써 나갔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여기서 멈추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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