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참회록」. 스물일곱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시인이 남긴 시 31편을 1948년 초판 그대로 싣고, 한자에는 한글 음을 달았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어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저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2)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저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우에 하늘이 펼처있다. 가만이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손으로 따뜻한 볼을 쓰서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얼골―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골이 어린다. 소년(少年)은 황홀이 눈을 감어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얼골―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골은 어린다.
(1939)
〈눈 오는 지도〉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츰에 말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것 처럼 창(窓)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地圖)우에 덮인다.
방(房)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壁)과 천정(天井)이 하얗다. 방(房)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것이냐. 떠나기전(前)에 일러둘말이 있든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어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작고 나려 덮어 따라갈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사이로 발자욱을 찾어 나서면 일년(一年)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1941. 3. 12)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것은 너무나 괴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延長)이옵기에―
이제 창(窓)을 열어 공기(空氣)를 바꾸어 들여야할터인데 밖을 가만히 내다 보아야 방(房)안과 같이 어두어 꼭 세상같은데 비를 맞고 오든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로의 울분을 씻을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1941. 6)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골을 가리고 병원(病院) 뒷뜰에 누워, 젊은 여자(女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日光浴)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女子)를 찾어 오는 이, 나비 한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 곳에 찾어 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試鍊), 이 지나친 피로(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여자(女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花壇)에서 금잔화(金盞花) 한포기를 따 가슴에 꼽고 병실(病室)안으로 살어진다. 나는 그 여자(女子)의 건강(健康)이― 아니 내 건강(健康)도 속(速)
히 회복(回復)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940. 12)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 5. 10)
〈간판 없는 거리〉
정차장(停車場) 푸렡폼에
나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慈愛)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사람들
다들, 어진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1941)
〈태초의 아침〉
봄날 아츰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날 아츰도 아닌 아츰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前)날 밤에
그 전(前)날 밤에
모든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또 태초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電信柱)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啓示)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罪)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요.
다들 살어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요.
그리고 한 침실(寢室)에
가즈런히 잠을 재우시요.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게외다.
(1941. 5)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呼吸)이 남어 있소.
한번도 손들어 보지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츰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마오.
(1941. 2. 7)
〈십자가〉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수 있을가요.
종(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든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 •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 5. 31)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을까.
단 한녀자(女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時代)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발이 반석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발이 언덕우에 섰다.
(1941. 6. 2)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츤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띄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 9)
〈눈감고 간다〉
태양(太陽)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었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와짝떠라.
(1941. 5. 31)
〈또 다른 고향〉
고향(故鄕)에 돌아온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房)은 우주(宇宙)로 통(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것이 내가 우는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1941. 9)
〈길〉
잃어 버렸읍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손이 호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츰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츰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어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것은 다만,
잃은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 9. 31)
〈별 헤는 밤〉
계절(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것은
쉬이 아츰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來日)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追憶)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小學校) 때 책상(冊床)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푸랑시스 • 쨤”, “라이넬 • 마리아 • 릴케” 이런 시인(詩人)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우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1941. 11. 5)
흰 그림자
〈흰 그림자〉
황혼(黃昏)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로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소리를 들을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 보내면
거리 모통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것을 돌려 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黃昏)처럼 물드는 내방으로 돌아오면
신념(信念)이 깊은 으젓한 양(羊)처럼
하로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 4. 14)
〈사랑스런 추억〉
봄이 오든 아츰, 서울 어느 쪼그만 정차장(停車場)에서 희망(希望)과 사랑처럼 기차(汽車)를 기다려,
나는 푸랕 • 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터러트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것도 없이
나래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었다.
기차(汽車)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교외(東京郊外) 어느 조용한 하숙방(下宿房)에
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希望)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汽車)는 몇번이나 무의미(無意味)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차장(停車場)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어 있거라.
(1942. 5. 13)
〈흐르는 거리〉
으스럼이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간다. 저 전차(電車), 자동차(自動車), 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 가는것일까? 정박(碇泊)할 아무 항구(港口)도 없이, 가련한 많은 사람들을 실고서, 안개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통이 붉은 포스트 상자를 붙잡고 섰을라면 모든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등(街路燈), 꺼지지 않는것은 무슨 상징(象徵)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朴)이여! 그리고 금(金)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날 아츰 우리 다시 정(情)답게 손목을 잡어 보세" 몇자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트리고, 밤을 새워 기다리면 금휘장(金徽章)에 금(金)단추를 삐였고 거인(巨人)처럼 찬란히 나타나는 배달부(配達夫), 아츰과 함께 즐거운 내림(來臨),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쉽게 씨워진 시〉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줄 알면서도
한줄 시(詩)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그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가?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1942. 6. 3)
〈봄〉
봄이 혈관(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밤〉
오양간 당나귀
아—ㅇ 앙 외마디 울음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아 애기 소스라처깨고,
등잔에 불을 다오.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키 담아주고,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목음 먹이고,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드오.
(1937. 3)
〈유언〉
후어—ㄴ한 방(房)에
유언(遺言)은 소리없는 입놀림.
―바다에 진주(眞珠)캐려 갔다는 아들
해녀(海女)와 사랑을 속사긴다는 맏아들,
이밤에사 돌아오나 내다봐라—
평생(平生) 외롭든 아버지의 운명(殞命)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1937. 10. 24)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거리 멈추어
살그머니 애딘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흔 진정코 설흔 대답(對答)이다.
슬며—시 잡었든 손을 놓고
아우의 얼골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골은 슬픈 그림이다.
(1938. 9. 15)
〈위로〉
거미란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病院)뒷뜰 난간과 꽃밭사이 사람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료양(屋外療養)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치어다 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마리 꽃밭에 날어 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파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어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끝에 때를 잃고 병(病)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慰勞)할말이—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 밖에 위로(慰勞)의 말이 없었다.
(1940. 12. 3)
〈간〉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우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쓰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든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여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誘惑)에 안떨어진다.
푸로메디어쓰 불상한 푸로메디어쓰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푸로메디어쓰.
(1941. 11. 29)
〈산골물〉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 물결속에서도
가슴속 깊이 돌돌 샘물이 홀러
이 밤을 더부러 말할이 없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 부를수 없도다.
그신듯이 냇가에 앉었으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맥기고
가마니 가마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어있는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이십사년(滿二十四年) 일개월(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는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웨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흘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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